생각의 연쇄를 끊고 엷게 베시시 미소 지었다. 서로 다른 의미에 행복함이라는 생각을 굳게 가지면서도 비슷한 감정을 같이 공유할 수 있는게 좋았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을, 방금까지만 해도 쿵쾅거리던 탓에 따듯한 자리 손으로 잡고는 만지작 거렸다. 아침에는 손 안 차갑구나.
"조금이 아니잖아!"
장호랑은 펄떡 솟아올랐다가 찬찬히 생각을 해 보고 다시 성빈의 침대에 앉았다. 어. 딱히 약속이나 할 일이 있는건 아니었어...
성빈은 당신에게 기꺼이 손을 내어주다가, 핸드폰을 본 당신이 펄쩍 뛰자 나직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곤 몸을 뒤틀며 기지개를 한 번 쭉 키더니,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뭐." 하고 느긋하게 말했다. 그 말소리의 여운이 잦아들 때쯤, 당신은 문득 따뜻하고 단단한 게 당신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안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울린다.
"─오늘은 뭐 약속이나 할 일 같은 것 없어?"
하고, 재차 확인이나 다짐을 하듯이 당신이 방금 마음 속으로 확인했던 일을 물어보는 것이다.
최성빈은 빈번하게 장호랑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고, 드물게는 애닳게 만들었고, 아주 가끔은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지금 한 일은 가장 마지막의 일. 어깨를 끌어안아오면 뒤에서부터 오는 온기와 촉감에 머리가 과부화 되버리고 만다. 표정이 안 보여서 다행이었지만, 그렇다고 당황한게 감춰졌을까. 숨소리도 내지 못 하고 눈만 땡그랗게 뜬 체, 자신의 잠옷을 꽉 쥐는 것이 한계였다.
"따, 딱히 아무것도 없어서.... 응.. 먹을래....."
잔뜩 긴장한 체 말을 하다가도 머리가 약간만 풀어지면 지금 성빈의 행동이 자신을 편하게 여기기만 하는 것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해 버린다. 묘하게.. 취급이 친한 동생 보다는 애완동물 같지 않아? 나쁜 것은 아니지만....
설렘으로 말을 잃은 당신을 나직이 부드럽게 눌러내리는 소년의 무게에는, 그러나 분명히 설레임보다는 조금 더 무겁고 음울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내가 너를 행복하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 언젠가 네가 떠나가 버리기 전까지, 나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될 때까지, 그때까지, 이기적이고 추악하지만 이렇게나마... 비겁하고 초라한 나를 용서해 줘.
그것은 편함이라기보다는 초라하고 꼴사납기 그지없는 자기연민이자 자기불신에서 우러나온 구걸. 스스로를 가누지 못하고 있는 사춘기 소년이,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중압감에 일상적으로 짓눌리면서 일그러진 내면. 완벽해야만 할 신일그룹 경영가의 떳떳한 자제로서, 다른 이 앞에서는 절대로 내색하지 않을, 내색해서도 안 될 모습이었다.
눈을 꾹 감고 당신을 뒤에서 감싸안고 있던 소년이 당신에게서 떨어져나가기까진 시간이 조금 걸렸다. 당신의 등에서 떨어져나갈 때는 소년의 얼굴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애써 태연한 척하려는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 시간이면... 실례지만 너희 집에서 먹는 것도, 아니, 잠시만."
하고, 성빈은 핸드폰을 다시 잡더니 메신저에 문자를 몇 통 보냈다. 문자가 몇 통인가 오고가는 동안, 소년의 얼굴에 걸려 있는 미소의 빛깔이 바뀌었다. 분명 입꼬리가 올라간 각도도 같고, 눈초리가 구부러져 있는 모양도 같은데, 그것은 초조한 미소에서 순전한 기쁨을 담은 미소로 조금씩 그라데이션하며 바뀌어가는 것이었다. 마치 똑같은 오브제에 주변 조명 색만 바뀌는 것처럼.
"아니- 그냥 우리 집에서 먹어도 되겠다. 이번 주말은 우리 집에서 보내도 될 것 같아."
성빈은 그렇게 오랜만인가? 하고 셈을 세어보려다가, 작년에 생각이 닿았고, 빠르게 그만두기로 했다.
"그러고 보면 그런 셈이네. 뭘 먹으면 좋을까..."
냉장고에 먹을 것은 많았다. 머핀도 아직 몇 개인가 남아있을 테고... 동파육이며, 장조림 같은 고기반찬도 아직 남아있을 테고, 겨우내 먹던 김치도 남은 것이 있다. 그 외에도 자신은 모르는 냉장고 안의 이런저런 상자들을 생각해보면 조금 뒤적거려 보면 제법 그럴듯한 밥상이 될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채끝살이 있다고 했던가?
예전부터 종종 고기를 구워준 적이 있었다. 작년에는 전혀 그런 일이 없었지만... 나름의 사정이 있는 법이 아니겠어. 장호랑은 가끔 확신이 들 때가 아니라면 작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지금도 그랬다. 아마 나중에도 그럴 것이다. 말하지 않는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나았다. 아무런 이유 없이 일년간 교류를 끊었다고 한다면 너무 보잘 것 없어지지 않는가. 아무 이유 없이 끊어질 사이라면....
"어떤 고기야? 집에 밥 있어?"
적당히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밥은 있는지 물어봤다. 고기를 구워줄 거라면, 그건 분명히 성빈이 몫이니까 간단한 일이지만 밥이라도 얹혀야지 하는 마음이다.
성빈의 작년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는 작년에 대해 말을 아꼈다. 그저 너무 바빴다- 라거나, 다른 친구들이랑 좀 복잡한 일이 있었다- 라면서 직접적인 대답을 피했다. 그렇지만 그는 그럼에도 당신을 영영 떠나지 않고, 이렇게 당신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의 작년이 어땠는가를 들어보려면 아직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그는 그것에서 당신으로 대표되는 자신이 원래 누리고 있던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것이었는지 배운 듯했다.
"밥? 밥솥을 열어봐야 알겠는데... 채끝살 스테이크 해 줄게."
하면서, 성빈은 부시시 눈을 비비며 그제서야 상반신을 일으켜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뭔가 해주겠다고 장담한 것치곤 아직 꽤나 잠기운을 떨치지 못한 모양.
반대로 장호랑쪽의 가족은 많이 바쁜 일이 없다에 가까웠다. 기껏 해봐야 아빠가 출장을 나가거나, 엄마가 친구들이랑 여행을 가거나 이니까. 이렇게 큰 집에서 혼자 하루를 보낸다는건 어떤 고독일지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 으응!"
아주 낯뜨겁고 위험 천만한 헤프닝이었지만 이렇게 받아주는 상냥함에 장호랑은 감동받았다! 눈을 크게 뜨고, 또 총기가 가득하게 반짝이면서 성빈을 보았다. 그리곤 폭 하고 아직 침대에 앉아 있는 성빈의 허리를 끌어안다가 "금방 올게!" 하는 말을 남기고는 창문을 열어 자기 방으로 넘어가 버렸다.
"이번 주말이 특이 케이스인 거야. 어머니는 보통 주말에 집에 계시고, 아버지도 집에 오시니까... 사실 집에서 누군가랑 같이 시간 보내는 건 랑이 쪽이 더 많지만."
하고, 성빈은 자신의 허리를 푹 끌어안아 오는 당신의 머리를 도닥도닥 쓰다듬어주었다. -이 소년에게 있어 당신은 무엇일까? 이웃집 소꿉친구라는 것은 그에게 있어 어떤 의미일까? 애완동물 같은? 사랑스러운? 말못할 마음을 품고 있는? 성빈에게 묻는다면 그 스스로는 그 어느 쪽이라고도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이 소년에게 차지하고 있는 이 위치는,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라면 찾아보기 힘든 매우 특징적이고도 독점적인 위치임에 틀림없었다.
"응, 조심히 다녀와."
당신이 성빈네 집 정문의 초인종을 누르거나 아니면 다시 건널판자를 통해서 성빈의 방으로 넘어왔을 때는, 어느덧 팬에 버터를 녹이는 고소한 냄새가 집안에 맴돌고 있었다.
요리를 하는데 방해를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다시 성빈의 방을 건너서 들어왔는데 주방은 아랫방일텐데 벌써부터 허공에 버터 냄새가 맴돌았다. 자기가 왔다고 큰 소리로 말을 하기 직전에, 좋은 생각이 나서 핸드폰을 든 체로 살금 살금 내려갔다. 요리를 하는 최성빈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둘 생각이었다. 숨소리도 죽이고 조심 조심...
당신이 계단을 살금살금 내려오는 줄도 모르고 소년은 버터를 녹이면서 온도를 체크하는 데에 여념이 없다. 한동안 그가 누워있는 모습만 보느라 잊고 있을 수 있는 사실이지만 그는 키가 퍽 컸다. 커다란 키, 그 반면에 온순한 성질을 짐작케 하는 부드러운 연갈색의 머리카락의 뒷모습. 그는 파자마 차림에 윗옷만 가디건으로 갈아입고 나서 그 위에 베이지색의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키가 크는 바람에 조금 짧아진 파자마 바짓자락의 아래로, 실내화를 꿰어신고 있는 발과 함께 그의 발목과 복사뼈가 매초롬하게 드러나 있었다. 마리네이드해 놓은 채끝살을 한번 집게로 뒤집어보고 있는 그 소년은 자신의 눈앞에 놓인 것에 열중하느라 당신이 그렇게까지 등 뒤로 가까이 다가온 줄은 전혀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저런 모습이 장호랑을 설레게 한다는 사실을 본인은 알까. 작년에도 저 옷 입었었는데, 분명 저렇게 작지는 않았었을텐데. 오빠 일년만에 키 엄청 컸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벽, 또는 기둥 뒤에 숨어서 아주 조용히 심호흡을 한 다음에 핸드폰을 다시 켰다. 사진으로 꼭 찍을거야. 대대손손 물려줄 가치가 있는 모습이다. 마음을 먹고 몸을 살짝, 팔을 쭉 뻗어 성빈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하다 보니 약간 각도가 부족했다. 그래서 한 쪽 발도 까치발로 서고 조금 더 더 팔을 뻗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