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빈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다. 해열패드를 붙여주고, 우선 사온 죽부터 먹여준 다음에, 약이랑 이온음료를 먹여주고... 해야 할 일은 이것저것 떠오르지만, 양 손이 모두 당신에게 잡혀 있어서야 어쩔 수 없다. 특히 당신이 히히히 하고 웃으면서 그것을 좋아하는 장난감마냥 붙들고 있다면 더더욱. 그가 당신의 이마에 얹혀 있던 손을 자기도 모르게 떼도록 한 것은 당신의 질문이었다. "어?" 하고, 그제서야 소년은 자기 눈가로 손가락을 가져가 보는 것이다. 그리곤 거기 맺혀 있던 물기를 당황하며 황급히 닦아낸다.
"아니, 아니야... 울기는 무슨. 그냥 급하게 오다 보니까 눈에 먼지가 들어갔겠지."
이마에 덮어놓은 손을 뗀 김에, 성빈은 반대쪽 손은 당신이 계속 만지작거리게 두고는 한 손으로 약국 봉지를 뒤적였다. 열이 날 때 이마에 붙이는 패드였다. 열에 달뜬 당신을 내려다보다가, 성빈은 참지 못하고 나직이 질문을 건넸다.
질문에 어? 하고 손을 떼어가는 것을 보면 성빈이도 의도하지 않게 눈물이 흘렀나보다. 빠르게 닦아내는 모습에 의문을 품었으나 급하게 왔다는 소리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이지만 지금은 그걸 분석할 정신이 없었고, 자신을 신경써서 빨리 왔다는 부분이 기뻤으니까.
"어? 음.. 쪼끔?"
많이 아프냐는 물음에 찬찬히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해본 다음 대답을 했다. 성빈이를 신경쓰느라 몰랐지만 몸의 근육들이 시큰거렸고, 머리는 띵 하고 어질어질 지끈거렸고, 으슬으슬 추위도 거기 있었다.
"추워."
이불을 벗어난 상체의 추위가 아프냐는 물음 이후에야 자각이 되서, 작게 웃으며 뒤로 누웠다. 성빈의 한 쪽 팔을 상어인형처럼 끌어안는 것은 덤이었다. 참고로 진짜 상어인형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냐면- 침대와 벽 사이에 끼어 있었다.
상냥한 걱정을 담은 소리가 당신의 귓가에 나직이 깔린다. 당신은 마침 침대에 누우려고 상반신의 무게균형을 뒤로 기울이려고 했으나, 성빈이 한 발 더 빨랐다. "다시 눕자." 하는 소리가 당신의 귓전에 닿았다는 것을 자각했을 때는, 성빈의 팔뚝 정도가 아니라 상반신이 한꺼번에 당신의 품에 안겨들어 있었다. 아니, 당신이 성빈에게 안긴 꼴이다.
바깥의 아직 찬 봄바람을 정통으로 맞아야 했던 손끝과는 달리, 성빈의 몸뚱이에는 당신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서둘러 움직이면서 달아오른 체온이 고스란히, 두터운 초봄 외출복 아래로 느껴지는 성빈의 탄탄한 상반신에 따뜻하고 포근하게 남아 있었다. 성빈은 당신을 온 상반신으로 폭 끌어안은 채로 당신을 다시 침대에 뉘었다. 그때, 아래층에서 전자레인지가 조리를 끝냈다는 삑삑거리는 알람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팔 정도를 끌어안고 만족할 요량은 생각치도 못 한 기습에 새하얗게 지워지고야 말았다. 몸 전체를 끌어안겨지자 어지럽던 머리에 다시 핑 하고 혈류가 돌며 몇 배는 어지러운 기분이다. 병기운을 변명삼아 더듬 더듬 이불 아래로 팔을 뻗어 성빈의 몸을 두른 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심장소리가 밖으로 세어나가지 않기 위해서인듯 입도 눈도 세게 꼭 감았다.
"안 돼. 여기 있어."
힘을 주어 성빈을 더 단단히 끌어 안았다. 그래봐야 원래 쪼그맣고 지금은 몸도 안 좋은 상황이라 성빈이가 뿌리친다면 맥 없이 풀려나겠지만.
당신의 응석 한가득 담긴 팔은, 성빈이 조금만 힘을 주면 금방 떨어져나가고 말 것이다. 물리법칙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면 이론상으로는 그럴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모를 한 가지 사실은, 당신은 성빈에게 있어 어떤 예외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당신의 손길에는 얼마 안 되는 물리적인 제재력보다 훨씬 강한 결속력을 지닌 욕심이 담겨 있었고, 성빈이 함부로 당신의 팔을 떨쳐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었다. 옆구리에 감긴 당신의 팔에 담긴 온기에서, 품안에 놓인 당신의 몸에서 전해지는 맥박에서 느낄 수 있는.
성빈은 당신의 속박을 풀기를 포기했다.
"─응. 계속 이렇게 있어줄게..."
당신을 품 안에 안은 채로, 그는 손을 뻗어 당신의 머리를 살살 다독이며 쓰다듬기 시작했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 좀더 어릴 적, 서로가 서로에 대한 '거리감' 이라던가 '체통' 이라던가 '사랑' 같은 것에 좀더 둔감하던 옛날, 성빈은 종종 이런 식으로 당신을 꼭 끌어안아서 재우곤 했다. 훨씬 더 솔직하면서도 훨씬 더 순진한 마음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었던 그때처럼 그는 당신을 보듬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듣고 싶어하는 말을 그대로 해주는 탓에 호랑은 꿈을 꾸고 있나 착각할 지경이었다. 생각을 어디 멀리로 전개할 힘이 없는 탓에 상대방이 하는 말의 뜻을 해석하거나, 행동의 맥락을 짚을 필요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에서 머무르고 만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호랑이는 조금 더 성빈의 품 안에서 부시럭 대다가 작은 말을 남기고는 얼마 못 가 잠에 빠지고야 말았다.
"맨날 아팠으면 좋겠다."
성빈의 몸에 두른 팔에는 힘이 스르륵 빠졌고 머리는 자연스럽게 베개 위로 굴렀다. 작게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성빈에게 들려오고, 이불 아래로 조금씩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잠에 들어서, 이제 어디 가더라도 잡지 못 한다.
당신의 꿈과 현실의 경계가 서서히 허물어지자, 성빈은 당신의 머리와 팔이 베개와 침대 위로 제자리를 찾아가도록 조심스레 바로잡아 준 다음에 이불을 푹 덮어주었다. 그리고 당신의 이마에 얹어놓았던 손의 냉기가 가시기 전에, 아까 봉지에서 꺼내놓았던 해열용 쿨패드를 뜯어서 당신의 이마에 조심스레 착 붙였다. 뇌는 열에 약하니, 몸에서 열이 날 때 머리의 열을 잡아주는 것을 게을리하면 안 되니까.
당신이 여전히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성빈은 몸을 일으켰다. 당신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성빈은 향수 냄새가 옅게 묻어 있는 자신의 외투를 당신의 이불 위에 겹쳐서 덮어주었다. 잠깐이면 되니까. 그는 당신이 깨지 않도록 최대한 발소리를 죽여 움직였다. 1층의 전자레인지까지 내려갔다가, 따뜻하게 데워진 죽그릇을 쟁반에 받쳐들고 스프 떠먹는 숟가락과 함께 다시 당신의 방으로 올라오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는 소리를 최대한 줄이며 당신의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아직 잘 자고 있으려나? 일단 가져다놓고. 깨면 먹여야지.
그런 성빈이의 노력을 알아주기라도 하는 듯 장호랑은 성빈이 나갔을 때와 다른 것 하나 없이 푹 자고 있었다. 봄의 조용한 공기와 좋아하는 사람의 냄새가 가득한 코트. 성빈이 문을 열 때에 살짝 실수하여 평소처럼 소리를 냈다고 해도 뒤척임 조차 없었을 것이다. 자고 있는 장호랑은 별 달리 꿈을 꾸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편안하게 푹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도 이렇게 병문안을 와준 적이 있던가. 훨씬 더 철 없을 적의 이야기 같지만...
그렇게 조금 시간이 지나자 저절로 눈이 떠졌고 약속한 대로 성빈이는 어디 간 적이 없었다. 단지, 뿅 하고 눈에 안 보이던 죽을 들고 왔을 뿐이지. 아니면 들고 오는 걸 못 봤던가.
"죽 진짜 사왔네... 고마워."
말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음량이 작고 목소리가 탁하다는 점이 달랐다. 흠칫, 내 놓고도 놀랐다.
방으로 돌아왔을 때도 당신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성빈은 이내 그냥 당신의 침대 옆에 숫제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먹을 사람이 잠들어버렸으니,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야겠지. 성빈은 죽그릇의 뚜껑을 닫아놓았다. 어차피 전자레인지 안에서 절절 끓을 만큼 뜨거워져 있던 죽이니 오히려 한동안 놔두는 게 더 좋을 성싶다. 성빈은 물컵과 물병, 그리고 죽이 놓인 쟁반을 당신의 침대 머리맡 선반에 올려두었다. 그리곤 당신이 침대에 걸터앉아 있거나 누워 있을 때면 늘 하듯이, 그는 당신 침대의 머리맡 옆에 팔짱낀 팔을 올려놓고는 그 위에 머리를 얹었다. 흡사 바닥에서 두 손끝이랑 머리만 침대에 얹어두고 주인을 빤히 바라보는 커다란 개처럼.
그런 채로, 성빈은 곤히 잠든 당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러 가지 생각이 성빈의 머리를 스쳤다.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어떻게 해야만 할까.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깨어 있는 당신에게 절대로 맨정신으로는 할 수 없을 말을, 아무도 듣지 못하도록 입 속으로 조용히 되뇌어보는 것. 그뿐이다.
저기, 랑아, 생각해봤는데, 아무리 봐도 내 일상의 한 조각이라기엔 네가 내 마음 속에 너무 크게 박혀 있는 것 같아.
당연히 그것을 입 밖으로 내는 일은 없었다. 대신에, 그는 손을 뻗어 잠든 당신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매만져보면서, 차차 백일몽에 빠지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당신이 잠깐의 낮잠을 자고 나서 눈을 떴을 때 본 것은 당신의 머리와 별로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머리를 얹어놓은 채로 꾸벅꾸벅 잠들어 있는 성빈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당신이 나직이 부르는 소리에, 성빈은 이내 눈을 살며시 떴다. 초점이 흐린 녹색 눈동자가 잠에 옅게 취해서는 당신의 금빛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성빈은, 천진난만하게 헤실헤실 웃는다. 그리곤 잠에 취한 눈을 부비며 당신의 침대에 얹어놓았던 상반신을 일으켜서는 쟁반에서 물병을 집어들고는 물을 한 컵 따라준다.
오빠 피곤했구나 하고 키득거리는 소리를 내고, 성빈이 따라준 물을 받아 마셨다. 열 때문에 땀을 많이 흘려서 그런걸까, 아니면 따라주는 사람이 다른걸까. 물이 아주 달았다. 물을 마시는 와중에 졸려하는 성빈의 머리를 보고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말 걸. 눈 뜨고 그냥 손을 뻗어서 천천히 머리카락이나 만져볼걸. 그래도 되는 날이어서 괜히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