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Rien de rien 아뇨, 전혀요 Non! Je ne regrette rien 아뇨, 전혀 후회하지 않아요 Ni le bien qu'on m'a fait 내게 베풀어진 좋았던 일들도 Ni le mal 나빴던 일들도 tout ça m'est bien égal! 내게는 모두 마찬가지에요.
- 이 스레는 두 참치의 합의하에, 옛 상황극 스레들 중 하나였던 "백합꽃 필 무렵" 의 두 등장인물의 뒷이야기를 다루는 일대일 스레입니다.
정작 요 근래 당신에게 있어 가장 무리하는 일은 소혜와 함께 공부하는 일이 아닌가 싶지만. 소혜 역시 그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당신이 문제를 잘 풀면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종종 머리를 쓰다듬어주거나 간식을 입에 까넣어주는 식으로 능숙하게 얼러주면서 당신이 많이 힘들어보이면 한동안 펜을 내려놓고 서로 기대어앉아서는 잠깐 낮잠을 자는 식으로 완급조절을 하곤 했다.
소혜는 당신의 어깨를 다독이며, 당신을 자신의 품에 기대어뉘어 놓았다. 당신의 집까지 얼마 남지 않은 동안, 그녀는 당신이 마음껏 자신의 품에 기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동안 병상에 누워 있던 만큼 외로워했을 당신에게 조금의 보상이라도 되면 좋겠다는 듯이.
소혜는 먼저 차에서 내려 당신의 손을 잡아줄 심산으로 몸을 일으켰으나, 당신이 생각보다 민첩하게 차에서 내리자 조금 놀란 듯 눈을 치떴다. 그러나 이내 그 표정은 안도감이 담긴 미소로 바뀌었다. 생각보다도 당신이 훨씬 건강해져 있다는 사실이 안도감으로 다가온 모양이다. 그녀는 이내 거스름돈을 가방에 챙겨넣고는 부드럽게 다리를 돌려서 차에서 내렸다. 부웅, 하고 택시는 떠나갔다.
이제서야, 무언가 제자리로 돌아간 것 같아.
어느덧 당신의 집 앞에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당신을 바라보며, 소혜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 당신도 느끼고 있을 그런 생각을. 그리곤 그녀는 다시 방긋 웃으며 당신의 집 현관으로, 그 곳에 서 있는 당신에게로 다가왔다.
"그러면,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맞이해줘서 고마워요, 하고 소혜는 활짝 웃으며, 윙크를 날리는 당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소혜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방긋방긋 웃던 소녀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고개를 휙휙 저으며 말하더니 먼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곤 소혜를 돌아보며 자신의 어머니 흉내를 내며 '채연아, 소혜한테도 엄마가 집열쇠를 맡겨둘까?' 하고 말하더니 꺄르르 웃기 시작한다. 그만큼 일을 하느라 바쁜 소녀의 어머니도, 그리고 소녀도 옆에서 보듬어주는 소혜를 믿고 있다는 증거나 다름없을 것이다.
" 내 방으로 가서 쉴까? 티비를 보기엔 마땅히 재밌는 걸 할 시간도 아니고... 나는 그냥 소혜랑 이야기하고 푹 쉬는게 더 재밌을 것 같거든! "
아주 조금 앞장서서 집안으로 들어가던 소녀는 이내 자신을 따라올 소혜를 돌아보며 어떻냐는 듯 물음을 던진다. 기왕이면 소혜가 하고 싶은 것이 있거나 한 건 아닌지 살피려는 듯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갸웃거리며 소혜를 바라본다. 고개를 갸웃거릴 때마다 머릿결 좋은 푸른빛 머리카락이 소녀의 새하얀 어깨에 흘러내렸다. 물음을 던져두곤 답을 아주 잠시 기다리던 소녀는 뭔가 재밌는 생각이 났다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다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자신의 방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 소혜야, 나 잡아봐라~ "
예전만큼 잽싸거나 빠르진 않았지만 해맑게 방으로 달려가 어머니가 정돈해두어 말끔하게 정리된 자신의 침대 위로 뛰어든다. 가벼운 소녀가 뛰어들어서 그런지 삐걱거리는 소리조차 나지않은 침대 위에서 소녀는 얼굴만 배게에 파묻은 체 새하얀 다리를 파닥거린다. 마치 그러면 자신이 뒤쫒아올 소혜에게 전혀 보이지 않을 것처럼.
그러나 당신이 당신의 어머니를 흉내내며 던진 말이 소혜에게는 정말로 뜻밖이었는지,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곤 깜빡였다.
"그- 그 정도로 믿어주시는 줄은 몰랐는데. 그러지 않아도 괜찮을 거야, 응."
예상하던 것보다 더 큰 신뢰를 얻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것인지, 소혜는 홍조가 옅게 낀 볼에 손부채질을 하며 시선을 잠시 옆으로 돌렸다. '어차피 집에 네가 있거나 너랑 같이 오게 될 테니까, 응...' 하고 덧붙이면서. 그러느라 소혜는 당신의 제안에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렇게 하자, 네 짐들도 원위치시켜야 되고. 방 청소는 어제 어머니께서 해두셨다고는 들었지만- 채연아?" 그 때문에 갑작스런 당신의 돌발행동에도 순발력 있게 대응하지 못했고. 사실 소혜는 발이 느린 편이었으므로, 당신이 아무리 허약해져 있다고 해도 속도를 내서 달리면 소혜로서는 당신을 쉽게 따라잡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의 뒤를 따라 방으로 따라온 소혜는, 얼굴만 베개에 파묻은 채로 흡사 칠면조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당신을 보고 쿡쿡대고 웃었다. 그리곤 능청스레 "채연이가 어디 갔을까- 분명 방으로 도망치는 걸 봤는데." 하고 장난스레 장단을 맞추며 방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시늉을 시작했다. 그러다 장난기가 더 동한 소혜는, 짐짓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다.
얼굴만 베게에 파묻은 체 파닥거리던 소녀는 방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에, 숨을 죽인 체로 자신을 건드릴 소혜를 기다리며 웃고 있었다. 그러다 방을 둘러보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혼잣말에 화들짝 놀라선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파바박 하는 소리와 함께 배게에서 고개를 든 소녀는 이내 말도 안된다는 표정으로 소혜를 보며 소리를 내더니 후다닥 몸을 일으켜 침대를 뛰어내려와 소혜의 품으로 뛰어든다.
" 뭐..뭐야아..! 놀다 가는거 아니었어!?!? 시험이 곧 있긴 하지만 오늘은 나랑 놀다가 가는거 아니었어!?"
동그랗게 커진 눈에는 너무하다는 듯, 당황스러움이 깃든 체로 소혜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소녀의 작은 입은 당황스러움에 달싹거리다 간신히 말을 더듬으며 소혜의 말에 답을 했고, 이내 못 보내주겠다는 듯 소혜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체 휙휙 고개를 저어보일 뿐이었다. 왠지, 병원에 입원하기 전과는 다르게 어리광이 생겨버린 듯한 소녀였지만 본인은 그런 줄 모르는 듯 그저 연신 소혜를 붙잡고 고개를 저어보일 뿐이었다.
" 내, 내가 재미없나..!? 소혜가 힘들게 했나?! 그러면 미안해!"
혼자서 상상의 나래라도 펼치는건지, 드라마 속의 이별장면 마냥 소혜를 꼬옥 잡고 매달리는 소녀였다. 이래저래 소혜가 그냥 돌아가는 것이 엄청나게 서운하고 싫은 듯 했다. 어쩌면 혼자 있는게 너무나도 싫은 것일지도 몰랐다. 이미 질릴 정도로 병원에 홀로 있었으니까.
당신이 이렇게 격렬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기에, 냉큼 품으로 달려드는 당신을 소혜는 민첩하게 받지 못하고 한 걸음쯤 뒤로 떠밀렸다. 그렇지만 그녀는 이내 무게균형을 잡고 당신을 폭 받아안았다. 항상 그렇듯이 당신을 밀어내거나 하지 않고 편하게. 언제나처럼 폭신한 온기가 안심하라는 듯이 당신을 휘감아온다.
"정말 안기는 걸 좋아하네, 채연이는."
왜인지, 전보다도 좀더 어리광이 늘어버린 것 같은 당신의 모습이었지만 소혜는 딱히 그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 옷자락을 꼭 붙들고 있는 당신을 짓궂게 웃으며 내려다볼 뿐이다.
"내가 좀더 있어주면 좋겠니?"
무언가를 확인하기라도 하듯, 나직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고요하게 질문을 던지고는, 소혜는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당신의 머리 위로 손을 떨어뜨려서는 당신의 머리를 달래듯 살며시 삭삭 쓸어준다.
"걱정 마.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장난이었으니까. 어머니가 오실 때까진 같이 있어줄게."
너는 항상, 모두를 위해 밝게 빛나려고 애쓰면서 그 뒤에서는 외롭게 떨고 있구나. 걱정 말아. 내가 같이 있어줄게.
언제부터 그랬던걸까. 병원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문득 소녀에게 두려움이 찾아오곤 했다. 자신이 이렇게 병실에 있는 동안에도 창 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쉴세없이 거리를 오가고, 복도를 오갔다. 같은 사람이 보이기도 하고, 처음 보는 사람이 보이기도 했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자신은 병실 안에 멈춰있는 반면, 밖의 사람들은 쉴 틈 없이 흘러간다. 자신은 정체되고, 그들은 흘러간다. 그것은 자신이 모두에게서 서서히 잊혀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소녀가 조금이나마 느끼게 만들었다.
"응, 조금만 더.. 아니 사실은 좀 더 오래. 많이.. "
그래도 소혜나 어머니가 찾아올 때면 소녀는 두려움을 밀어낼 수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모두가 돌아가고 나서는 언제나 소녀는 혼자였다. 그래서 소혜와 이렇게 있을 수 있도록 밖으로 나온 다음에는 왠지 모르게 더욱 더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혼자는 싫어. 소녀는 욕심이란 감정을 끌어올려 소혜를 붙잡았다. 소혜의 옷을 자그마한 손으로 꼬옥 잡은체 고요하게 울려퍼지는 소혜의 물음에 답했다. 소녀가 걱정 가득한 눈으로 올려다보다 이내 머리에 내려앉는 손길에 안도한 듯 자그맣게 숨을 뱉어낸다.
" 으응.. 다행이다... 너무 놀랐어.. 소혜도 짖궃다니까 정말.."
꼬옥 쥐고 있던 손을 풀어낸 소녀는 이내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다 소혜를 강하게 끌어안는다.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언제나 자신의 옆에 있어달라는 것처럼. 그러다 문득 부끄러움도 들었는지 파묻었던 얼굴을 빼꼼 들어서 소혜를 바라보았다.
" 나 되게 못난 것 같아. 그치? 하여튼.. 애도 아닌데.. 헤헤"
고개를 빼꼼 들어 소혜를 보며 웅얼거리듯 말한 소녀는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힌다. 그럼에도 눈은 피하지 않은 체로 또렷하게 소혜의 붉은 눈동자를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