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Rien de rien 아뇨, 전혀요 Non! Je ne regrette rien 아뇨, 전혀 후회하지 않아요 Ni le bien qu'on m'a fait 내게 베풀어진 좋았던 일들도 Ni le mal 나빴던 일들도 tout ça m'est bien égal! 내게는 모두 마찬가지에요.
- 이 스레는 두 참치의 합의하에, 옛 상황극 스레들 중 하나였던 "백합꽃 필 무렵" 의 두 등장인물의 뒷이야기를 다루는 일대일 스레입니다.
외모: 이 소녀의 균형있는 두상은 자기 얼굴 생김 중에서 제일 잘났다고 자부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 균형잡힌 머리 위에 놓인 이목구비는 느긋하고 나긋하게 처져 있었다. 유한 인상을 자아내는 부드러운 선의 콧날 양옆으로는 항상 부드럽게 웃는 듯한 눈매가 짙은 속눈썹을 드리우고 있었는데, 살며시 미소짓는 것처럼 생긴 입술과 맞물려 사랑스러운 인상이었다. 사람을 향해 미소지어 보일 때면 솜털 가시지 않은 볼이 보기좋은 분홍색을 띄곤 했다. 다만 그 예쁜 눈매 한가운데 담긴 석류색의 홍채에는, 사람에게 묘한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안력이 있었다.
비단실같이 부드러우면서도 숱이 풍성한 머리는 볼륨을 살리면서도 덥수룩하지 않게끔 깔끔한 보브컷으로 똑 끊었다. 그러나 완전히 같은 길이로 통일하지 않고 뒷머리를 비스듬하게 잘라내었다.
키는 167센티미터. 여학생들 중에서는 눈높이가 약간 높은 축에 들었다. 체중은 57킬로그램에서 60킬로그램을 오가는 평균을 살짝 웃도는 체중이지만, 탄탄한 골격과 글래머러스한 체격을 가지고 있어 우아하고 당당했다. 교복 규정은 딱히 어기지 않았고, 날씨의 춥고 더움에 따라 재킷을 덧입거나 소매를 걷거나 하는 정도였다. 사복은 꽤나 줏대있는 취향을 가지고 있어, 각양각색의 블라우스나 스커트 등 아가씨다운 옷을 즐겨 찾아입었다.
그녀의 생김새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라면 이렇게 길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사람들 사이에 놓아두면 그 석산빛의 눈동자만 아니었더라도 쉽게 찾아낼 수 없을 만한 평범무난하고 느긋하고 태평한 소녀였다.
성격: #느긋나긋 #무사태평 #상냥한_상담사 #뒤틀린_이면
기타: * 공부 잘함 교내에서 치르는 학력고사에서 항상 전교 10위권 내를 유지하는 공부괴수들 중 하나로, 올백도 이따금 기록하는 모범생이었다. 너 나 우리는 아니지만 반에서 한둘씩은 꼭 있는 공부 잘 하는 아이로 꼽혔는데, 어떻게 공부하냐고 물어보면 "수업 시간에 안 졸고 잘 듣는 거 정도..." 라는 따위 소리를 하는 눈치없는 스타일이기도 했다. "정말이라니깐. 그게 다인걸." * 원예부장 원예부의 부장.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 등 여유가 나는 시간이면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교사 뒷뜰에 마련된 화원에서 자기 화분들을 돌보는 데에 쏟는 원예가였다. 생황원예 경진대회나 원예디자인 공모전 등 각종 대회에서도 본인이 입상할 뿐만 아니라 부원들을 이끌어 입선토록 지도해주기 때문에, 원예부를 떳떳한 하나의 동아리로 존치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도 했다. 그녀의 집이 화훼업에 종사하고 있어 그녀 역시도 저절로 화훼에 도가 튼 것으로 이른바 '꽃집 따님' 이었다. * 좋아하는 것은 차 한 잔 그녀는 충실한 원예부장이기도 했지만 원예부실을 사사로운(?)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즐겼다. 쉬거나 잠깐 낮잠을 자거나 뭔가 먹고 마시면서 좋은 소파와 안락의자와 테이블, 물을 끓일 수 있는 커피포트와 작은 냉장고, 찻잔들과 차가 보관된 찬장 등을 화원에 딸린 부실에 들여와 부실을 일종의 휴식공간으로 바꾸어놓은 것도 그녀였다. 그녀는 종종 혼자, 혹은 친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과 함께 원예부실에서 소박한 티타임을 즐기곤 했다. * 재일 교포 귀국학생 재일교포 4세대로, 일본에서 나고 자라 일본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지만 중학교 때 부모의 결정으로 부모와 함께 귀국하게 되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적응을 미처 하지 못해 왕따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전에 한국말과 한국 문화에 완전히 적응하는 데에 성공했다. 지금은 그녀가 먼저 말을 하지 않으면 누구도 그녀가 귀국자녀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자그마한 키와 몸무게, 자그마한 가슴까지 자그맣게 보일 법한 요소들은 모두 가지고 있다. 그 탓에 본인도 상당히 신경쓰 고 있지만 역시 어쩔 수 없는 모양인 듯 하다. 피부는 활발한 그녀의 성격에도 태양에 강한 듯 새하얀 상태를 유지하고 있고 왼쪽 입가의 점과 오른쪽 눈가의 점을 제외하면 잡티하나 없이 관리가 잘 되어있다. 머리를 넘기고 다니는 오른쪽 귀에만 각종 모양의 귀걸이를 하며, 팔찌는 할 때도, 안 할 때도 있다. 늘 로즈마리 향수를 뿌리는 듯 로즈마리 향이 나서 그녀거 근처에 있을 애는 장미향이 난다. 머리는 목덜미를 덮는 파란색 머리의 단발로, 기르고 있는 듯 하지만 잘 손질 되어 오른쪽은 귀 뒤로 넘기고 다닌다. 눈동자 역시 머리색을 닮은 밝은 푸른색을 띄고 있어 활기찬 그녀의 눈매와 잘 어울리게 빛을 발한다. 평소에는 미소를 잘 짓고, 밝 은 표정으로 돌아다니기 때문에 상당히 밝은 분위기를 하고 있다. 코는 오똑하고, 이목구비도 뚜렷하여 작지만 체리같은 빨간색을 띈 입술도 매력적이다. 교복 치마는 줄여서 짧게 입고 다니고 위에는 등교하고 나면 와이셔츠만 편하게 입고 돌아다닌다. 윗단추 한 두개를 풀고 다니는 것은 기본이다.
성격 : ☆ 활발한 ☆ 긍정적 ☆ 의외로 내적으로 약함 늘 활발하고 밝은 성격을 갖고 있다. 대체로 기도 잘 죽지 않고, 항상 매사에 긍적적으로 생각하고 분위기를 밝게 만들곤 한 다. 친구들과도 곧잘 어울리고 사교력 또한 좋아거 누구나 그녀를 편하게 대하곤 한다. 그렇지만 외강내유의 성격으로 상 처를 곧잘 받고, 사실은 눈물도 많지만 그런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아서 허세도 부리고, 상처들을 쌓 아둔 체 혼자 힘들어 하기도 한다.
기타 : ☆ 먹는 것을 좋아한다. 꽤나 먹는 양이 많음에도 신기하게 살도 안 찌고 그것이 키나 가슴으로 가지도 않아서 좌절한다. ☆ 운동신경이나 손재주가 좋다. 악기를 다루거나 운동같은 것은 곧잘 잘하는 편으로 본인이 정착을 하지 않을 뿐, 무언가 를 한다면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 눈물이 많다. 어렸을 적 별명이 울보였을 정도로 잘 운다. 현재도 잘 울긴 하지만 울 것 같거나 하면 도망치거나, 자리를 피하는 것으로 최대한 보여주지 않으려고 한다. ☆ 겁이 많다. 무서운 놀이기구나 귀신 같은 것을 무서워 하지만 남들과 있을 때는 허세로 이겨내려고 한다. ☆ 동물을 좋아한다. 집에도 말라뮤트를 키우고 있을 정도로 동물을 좋아해서 지나가는 동물들만 봐도 그녀의 기분은 업된 다. ☆ 정이 많은 편이라서 친구들에게 일이 생기거나 하면 그냥 보고만 있지는 못한다. 자신에게 못되게 굴거나 한 사람이라도. 성향 : GL
채연주는 혹시 '이 지점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 라는 지점이 있을까요? 예를 들어서, 소혜랑 같이 시내로 쇼핑갔을 때? 다른 분들 도와주다가 탈진해버린 채연이를 소혜가 집까지 데려다주었을 때? 아니면 채연이가 쓰러지고 난 뒤 소혜가 병문안을 왔을 때? 아니면 그 이후 체육대회 행사로 왕게임을 하다가 채연이가 헤에- 하는 소리에 소혜가 난데없이 토라져버렸을 때?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채연이가 제라늄 화분을 소혜한테 가져다주러 왔을 때?
두 사람은 * 많이 친한 친구였을 것이다 * 종종 채연이가 화원으로 놀러왔을 것이다 * 전에 비해 연약한 기색을 보이는 채연이를 소혜는 걱정했지만, 정확히 어떤 병이고 얼마나 심각한지는 알지 못하고 "요새 얘가 기운이 없네"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을 것이다 * 몸이 약한 채연이가 다른 사람을 돕다 탈진한 것을 안아들고 채연이네 집까지 바래다준 적이 있었다 * 언젠가 같이 도시락을 싸와서 화원에서 바꾸어 먹어보자고 약속했을 것이다 * 시내로 나가 같이 쇼핑을 다녔을 것이다 * 그리고 지금, 쇼핑을 갔다온 채연이는 결국 병세가 악화돼 쓰러졌고 * 소혜는 그제서야 채연이의 몸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까요, 정리하자면?
네, 본 스레 당시에는 너무 안타까웠던 나머지 소혜주가 너무 제 4의 벽을 넘어버리는 무례를 저질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저도 섣불리 소혜가 채연이의 병세를 눈치채게 한 걸 후회하고 있었어요.. yy 긴가민가하지만 에이 설마-하고 있다가 채연이가 쓰러지면서 정확히 알게 되었다는 게(+충격도 받았다는 게) 조금 더 자연스러울 것 같네요.
비닐하우스의 천장으로 후두둑후두둑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몇몇 화분들은 비를 맞지 않도록 비닐하우스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두고 있었고, 몇몇 화분들은 비를 좀 맞을 수 있도록 일부러 열어둔 창가에 놓여져 있었다. 비닐하우스의 벽 한켠 옷걸이에는 물기가 송골송골 맺혀 있는 비닐 우비가 걸려 있었다. 시선을 들어보면 비였고, 올려다보면 비가 떨어지는 천장이 있었고, 옆으로 돌려보면 비가 흘러내리는 벽이 있었다. 소혜는 "야생초 편지" 라는 책의 한 대목을 떠올렸다. 봄여름의 따사로운 나날에는 물을 아무리 알맞게 줘도 꽃들이 비실비실하지 않는 선에서만 그치지만, 비를 맞고 나면 깜짝 놀랄 정도로 싱싱해지고 파릇파릇해진다... 는 대목이었다. 책에 쓰였던 어휘를 정확히 옮긴 것인지는, 읽어본 지 오래되어서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소혜는 그 말에 십분 동감했다. 이 이른 봄장마가 끝나면 바빠지겠구나, 하고 소혜는 생각했다.
그녀는 시선을 꽃바구니로 돌려내렸다. 플로랄 폼에 초록색 민들레꽃들과 뽀송뽀송한 하얀 안개꽃, 데이지 꽃들과, 선명한 자줏빛의 매발톱꽃과 보라색 으아리꽃이 비대칭으로, 하지만 극적인 대비를 이루며 보기좋게 탐스럽게 꽂혀 있는 꽃바구니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 같았는데, 꽃바구니의 주인공을 위해 비워진 가장 눈에 띄는 자리가 휑하니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시에서 주최하는 생활원예경진대회에 출품할 작품이었건만, 소혜는 그것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뭔가 생각이 나지도 않았다.
그걸 그냥 멍하니 보고 있을 뿐이었다.
채연이의 연락이 두절된 지 이틀째였다.
채연이와 함께 요리를 해서 나누어먹고는 그날 찍었던 사진을 돌려보다가 앨범에까지 이야기가 닿아 채연이의 과거 앨범을 잠깐 보고 나서, 별 시답잖은 잡담을 하며 설거지를 같이 한 뒤 헤어진 다음날 채연의 책상은 텅 비어있었다. 채연에게 메시지도 보내보고 전화도 했지만 메시지는 읽음 표시가 뜨지 않았고,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등골이 싸해져서 담임 선생님께 여쭈어봤으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며칠간 결석한다고 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 는 대답이 소혜가 들을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자신이 여태껏 쌓아왔던 '모범생' 이라는 평판으로도 뚫을 수 없는 벽은 있었다.
다음 날이 되어, 양호선생님에게 몇 번이고 캐물어서야 소혜는 간신히 채연이 입원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소혜는 전부터 어렴풋이 밝게 웃는 얼굴의 채연의 그림자에 무언가 불길한 것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다는 두루뭉실한 불길함을 느낀 적은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실감하게 된 그 불길한 것은, 소혜가 예상하던 것보다도 좀더 최악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어려운 이름의 병이었지만, 그 병명을 말해줄 때의 양호선생님의 얼굴에서 소혜는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병세가 심화되어 입원해야만 했다고, 지금은 점차 안정을 찾고 있다고. 곧, 곧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왠지 모르게 그 '곧' 이라는 말이 소혜에게는 너무도 아득한 이야기로, 너무도 기약없는 이야기로 들렸다. 마치 직접 말해주지는 못하겠지만 알아서 알아듣고 이별을 준비하라는 뉘앙스처럼 들리지 않는가. 부당하기 그지없었다.
카네다 소노카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을 남의 의지로 떠나, 자신의 '진짜 고향' 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에 온 뒤로 소노카의 나날은 악몽이었다. 빼앗기고, 빼앗기고, 빼앗기고, 빼앗기고, 또 빼앗기고 수탈당하고 괴롭힘당하고 무너지기만 했다. 물론 소노카는 가만 있지 않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발악을 다 했다. 사람은 모두 선하게 태어났으며 선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는 믿음을 포기했고, 누군가와 웃고 떠들면서 감정을 나눌 수 있으 리라는 희망을 가차없이 끊어버렸으며, 그토록 지극하던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미련없이 내다버렸다. 2년 동안 '살아남기 위해', 그녀는 그 모든 것을 희생했다.
그런데 자신이 피눈물을 흘리며 버린 그 모든 것을, 너무나도 손쉽게, 너무나도 간단하게 다시 안겨준 소녀가 바로 채연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채로, 그저 한 놈이라도 더 기분을 잡쳐주겠다고 이빨을 세우고 벼르고 있던 짐승의 머리를 가장 먼저 다가와서 쓰다듬어준 겁도 없는 소녀. 어쩌면 나리고의 불량배들 중 하나로 자리잡았을지도 모르는 소녀는, 그 대신 나긋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얼굴에 띈 타의 모범이 되는 우등생 원예부장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정작 그녀에게 그 모든 것을 기적과도 같이 되찾아준 소녀는 그 대가를 치르기라도 하는 마냥 스러지려고 하고 있었다.
소혜는 조심스레 포장된 선물을 집어들어 보았다. 길다랗게 포장된 무언가와, 작고 납작한 상자 하나가 있었다. 포장을 살짝 들춰서 내용물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소혜는 좋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채연이 학교에 나오지 않게 된 지 나흘째였다.
병문안을 가도 되는지 여쭈어보는 과정은 조심스러웠다. 다행히 컨택할 방법은 있었다. 저번에 채연이 옷을 입고 포즈를 취한 사진을, 채연의 어머니가 당신께 보내달라며 연락처를 남겨둔 것이 있었다. 그 번호로 연락이라도 드려봐야 할지 그러면 안 될지 하루종일을 고민하다가,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예절바른 어휘를 모두 동원해 조심스레 채연의 안녕을 묻는 연락으로 시작해서 '내일 병문안을 오면 좋겠다' 는 답을 들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 어제였다. 그리고 오늘, 선생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는 조금 일찍 하교해서 채연의 병문안을 가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소독을 거쳐 멸균복을 입고 마스크를 쓰고 머리두건을 뒤집어쓴 외계인같은 모양새를 하고 채연의 병실에 들어온 소혜는,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채연이를 보는 순간 오늘은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자신이 기억하던 것보다 더 수척하고 핼쑥해져서는 눈을 감고 조용히 누워 있는 채연을, 소혜는 차마 깨울 수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뭐라 말 한 마디도 못 건네고 조용히 입을 다물고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소혜는 말없이, 언젠가 취객에게 얻어맞아서 터졌던 채연의 입술을 내려다보았다. 아랫입술의 왼쪽이 터진 것도 전부 다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그 위치에 터진 상처는 없었지만, 대신 채연의 입술은 온통 생기를 잃고 푸석푸석해져 있었다.
"...다음번엔 립밤을 사와야겠네."
소혜는 나직이, 조용히, 입 안으로 중얼거렸다. 어떤 가망도 보이지 않는 것만 같았다. 다시 모든 것을 잃고 악몽 속으로 주저앉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소혜는 낙담하고 싶지 않았다. 카네다 소노카였을 때도, 김소혜로 살아가는 지금에도 그렇게 쉽게 단념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악몽 같은 세월이 찾아왔을 때, 그녀는 그녀의 스타일대로 대처했다. 그리고 또다시 지금 찾아온 이 악몽같은 순간에도, 그녀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난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거야."
내가 치를 수 있는 조그만 희생.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 거야.
소혜는 살며시, 조심스레, 채연이 깨지 않도록 침대 머리맡에 자신이 챙겨왔던 선물을 올려두기 시작했다. 연식이 좀 오래된 것 같은 흠집투성이의 CDP-여태까지 소혜의 화원에서 열심히 노래를 연주해주던 것- 하나와, 지퍼백 안에 든 밥 말리 이어폰을 내려두고, 이어서 특별히 정성들여 조심스레 포장한 길쭉한 상자에서 플라스틱 꽃병을 꺼냈다. 거기에는 보존처리된 장미 한 송이가 꽂혀 있었다. 채연의 머리카락과 같이 아름답고도 선명한 파란색을 하고 있는 그 보존처리된 장미에서는, 로즈마리 향이 은은하게 났다.
푸른 장미의 꽃말은, 기적.
소혜는 위생장갑을 낀 손으로, 잠들어 있는 둘도 없는 절친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살며시 쓸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나직이 입 안으로 중얼거렸다. 또 올게, 하고. 인사를 남기고, 소혜는 뒤돌아서 나가려고 했다...
소녀는 몽롱함 속에서 조용히 꿈을 꾸었다. 꿈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비내리는 학교에서 소녀는 열심히 자그마한 발을 움직여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목적지가 어디였지?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도 부지런히 소녀는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빛소리를 들으며 얼굴에 한가득 밝은 미소를 머금고 달려가는 곳은 학교 건물 밖에 있는 비닐하우스였다. 왠지 모르게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달려온 소녀는 힘차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이제는 익숙해진 원예실의 향기를 들이마신다. 힘껏 공기를 들이마신 소녀는 힘차게 뱉어내며 자연스레 누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 소혜야! "
소녀는 힘찬 목소리로 자신의 친구를 불렀고, 낭랑한 그 목소리는 비닐하우스 안으로 퍼져나갔다. 그렇지만 소녀의 밝은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그 부름에 응하는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소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리곤 천천히 걸음을 옮겨 평소에 소녀가 앉아있던 테이블로 향했지만 그곳엔 주인잃은 의자와 탁자, 방금전까지만 해도 누군가가 먹고 즐기던 것 같은 김이 모락모락 나오는 찻잔과 쿠키가 놓여있었지만 그 주변엔 누군가의 인기척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던 소녀는 혹시나 친구가 어딘가에 숨어있을까 싶었는지 방긋 미소를 지으며 여기저기 뒤져보며 찾아다녔지만 어딜 보아도 친구가 보이지 않아 아쉬운 듯 팔짱을 낀 체 한숨을 내쉰다.
" 어디갔지... 여기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
소녀가 살짝 울상을 지으며 중얼거리고 있을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뒷모습이 우산을 들고 비닐하우스를 나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소녀는 언제 울상을 지었냐는 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소혜의 뒷모습을 따라 달려가려했다.
" 소혜 찾았다!! 같이 가!! 어디 가는거.... "
분명 뒷모습을 따라 달려나가려던 소녀는 기분 좋게 외치면서 달려나가려 했지만 갑자기 자신의 시야가 낮아지는 것을 알아차렸다. 앞으로 넘어지는 것처럼 기우는 시야에 소녀는 처음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다리를 바라보았다. 힘없이 축 늘어진 다리는 마치 장식품인 것처럼 아무리 힘을 줘도 움직여지지 않았고, 소혜는 점점 멀어져만 갔다. 순간 공포가 소녀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주변의 식물들이 힘없이 시들어가더니 말라서 바스러지기 시작했고, 테이블과 의자는 녹이 슬기 시작했다. 너덜너덜해져가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소녀는 어떻게든 소혜에게 가기 위해 기어가기 시작했지만 소녀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두 사람의 거리는 멀어져만 갔고 소녀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 소혜야! 소혜야, 잠깐만...! 같이가.. 나 두고 가지마...! 소혜야..! "
무너져가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손톱이 부러지도록 기어가며 애절하게 부르던 소녀는 이내 무너져가는 잔해가 쏟아지는 것을 끝으로 시야가 어둠으로 가득찼다. 그리고 눈을 다시 떴을 때, 새하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어루만져준 것처럼 따스한 온기가 남아있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눈을 천천히 돌렸을 때, 등을 돌린 체 병실을 나서려는, 아까는 잡지 못했던 익숙하고 그리운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 가지마. "
갈라진 목소리로 소녀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잘 움직여지지 않는, 잠기운 탓인지 기운이 없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좀처럼 따라주지 않는 손을 뻗어 아슬아슬하게 소혜의 옷을 잡을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울고 싶었다. 아까 무너져가는 비닐하우스 속에서 느꼈던 감정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지만 소녀는 애써 웃어보이며 갈라진 목소리로 다시금 자신의 친구를 불렀다.
다행이다, 이번엔 잡을 수 있었어.
" 왔으면 깨우지.. 이렇게 아무말도 없이 가려고 했어..? "
소녀는 없는 힘도 모두 끌어모아 살풋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모습은 생기를 잃어가는 한송이 꽃봉오리 같았다.
반투명한 새하얀 멸균두건을 머리에 온통 뒤집어쓰고, 멸균복을 두르고 있는 뒷모습은 어찌 보면 간호사 선생님이나 의사 선생님으로 착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멸균두건 너머로 비쳐보이는 머리카락의 밀짚같은 연갈색이 비쳐보였던 걸까, 아니면 그 키가 채연에게 낯익었던 걸까, 채연의 마지막 꿈의 장면의 뒷모습이 그 위에 겹쳐보였던 덕일까, 채연은 소혜를 알아볼 수 있었다.
가지 말라고 갈라진 목소리로 건넨 미약한 애원은 꿈에서와 달리 꺼질 듯한 소리로나마 멸균복 차림의 사람의 등을 두들겼고, 발을 멈춰세웠고, 뒤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꽃무릇을 떠올리게 하는 빨간 눈동자가 휘둥그레져서는 채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혜가 맞다. 소혜는 떨리는 눈으로 채연을 바라보다 문고리에 올려놓았던 손을 내렸다.
"잘 자고 있었는데, 내가 깨웠구나."
채연의 병상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휘둥그레졌던 눈매는 안타까운 빛을 띄고 내리깔려 있었다. 소혜는 다시 채연에게 손을 내밀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손을 뻗다 말고 조금 주저했다. 소녀의 얼굴에 흐릿한 죄책감의 그림자가 깔려있는 것 같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고운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소녀는 나지막이 속삭이듯 말하며 천천히 두 손을 얼굴로 가져가 웃는 시늉을 해보였다. 입꼬리에 걸린 자그마한 소녀의 손가락은 좀처럼 잘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용케 올려주고 있었다. 그리곤 자신에게 손을 뻗으려다 망설이는 소혜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소혜는 웃는게 참 잘 어울리는데.. 왜 그런 표정이야? 아.. 확실히 내가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겠네. "
히히히, 소녀의 힘없는 웃음소리가 새어나오며 조용히 말을 건냈고 입꼬리를 올리고 있던 손을 떼어내 조심스럽게 주저하듯 멈춰있던 소혜의 손을 감싸쥐려한다. 언제나처럼 따스한 온기를 머금고 있는 소혜의 손을 잡아 차가운 자신의 손이 따스하게 만들어주길 바라는 것일까. 아니, 소녀는 그저 소혜의 마음을 쓰다듬어주려는 것처럼 조용히 손을 맞잡으려 하는 것이었다.
" 짠..! 이제 평소처럼 웃는거야. 내가 못나긴 했지만 소혜까지 따아할 필요는 없는걸. "
웃는 게 잘 어울린다고 말하며 힘껏 미소지은 채연의 노력이 보람없게도- 채연의 생기없고 가녀린 손이 소혜의 평소보다도 좀 더 뜨거운 손을 쥐자마자, 소혜의 눈가가 일그러지며 결국 억누르지 못한 감정이 왈칵, 하고 눈가를 넘어 한 방울 두 방울씩 주르륵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설마설마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진작에 알았어야 했는데. 너를 좀더 챙겨줬어야 했는데. 거침없이 무리하는 너를 좀더 뜯어말렸어야 했는데. 하다못해... 내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네게 웃어주기라도 해야 되는데... 소혜는 넘쳐흐르는 눈물샘에도 불구하고 입꼬리를 밀어올리려 무진 애썼지만, 실패했다.
"네가 이렇게 아파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나는..."
터져나와 버린 감정에 잠겨버린 소혜의 목소리는 평소보다도 탁했다. 소혜는 채연의 손을 잡고 소리없이 울며, 울음을 참으려 안간힘을 썼다. 웃어주고 싶은데, 평소처럼 웃어주고 싶은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 나 어딘가 고장나 버렸나 봐.
소녀의 자그마한 손이 소혜의 따스한 손에 닿자마자 눈가를 일그러트리며 눈물을 흘리는 소혜를 바라보며 소녀는 잠시 웃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늘 따스하게 미소짓던 아이에게서 흘러나오는 눈물을 보며 소녀는 이또한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행복하게 미소짓던 아이에게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구나. 자신의 소원과 반대로 울고 있는 친구를 바라보며 소녀 또한 꾹 눌러담았던 눈물이 터져나오려는 것처럼 간질거렸지만 애써 소녀는 숨을 조심스럽게 들이마셨다 뱉어내며 자신을 추스렸다. 지금 울어선 안된다고, 자기 자신을 몇번이고 타이르며 소녀는 천천히 닫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 소혜는 미안해 하거나 그럴 필요 없어. 이건 다 내가 생각없이 굴어서 그런 것 뿐이니까. 그냥 내가 무리를 좀 한 것뿐이야. "
예전처럼 활기찬 미소는 아니었지만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체, 맞잡은 소혜의 손을 조금 더 강하게 쥐어주며 소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것은 너의 탓이 아니니까 미안해 할 필요도, 자책할 필요도 없다는 것처럼 소녀는 빛이 사라지지 않는 투명한 두 눈으로 소혜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결국은 자신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다. 언제나 주변 친구들이, 그리고 소혜가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곤 했으니까. 조심하지 않은 것은 자신이고, 그렇기에 미안함을 말해야할 것은 자신이라고 소녀는 눈을 느릿하게 감으며 생각했다.
" 미안해, 소헤야. 괜한 걱정을 끼쳤나봐. 근데 우리 소혜는 하나도 걱정할 것 없다? 왜냐하면 명채연은 금방 일어나서 예전처럼 소혜한테 놀러갈 생각이거든. 침대 생활도 얼마 안 걸릴거다, 뭐~ "
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소혜가 알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듯, 그저 전혀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 맞잡지 않은 한 손을 움직여 힘이 넘친다는 듯 포즈를 취해보는 소녀였지만 보일듯 말듯 떨려오는 팔은 그리 상태가 좋지만은 못하다는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지만 소녀는 여전히 강한 척 연기하며 자신의 소중한 친구를 바라보았다. 울지마, 웃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부족한걸. 입모양으로 자그맣게 소혜에게 말한 소녀는 베시시 웃음을 지어보이더니 잡고 있던 손을 조심스럽게 풀고는 다가온 소혜의 눈가에 가져간다.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눈가를 닦아주려 하는 소녀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간다.
" 밥은 잘 챙겨먹고 온거야? 막 나 없다고 거르고 그런 건 아니지? 온실은 제대로 돌보고 온거지? 얼마전에 봤을 때만 해도 푸릇푸릇한게 다들 힘이 넘쳐서 보기 좋았는데 괜히 다들 아프거나 하면 곤란하다구.. 맞다, 공부도 꼬박꼬박 해야한다?? 나는 바보라서 공부랑은 거리가 멀지만 소혜는 아니잖아~ "
미안함에 울 것만 같은 소혜를 달래기 위해선지 아무렇지 않은 듯 소혜 걱정을 하기 시작하며 소녀는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얼마전보다도 눈에 띄게 야윈 소녀였지만 그런 것쯤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것처럼 얼굴에 미소가 새겨져 있었다.
"정말, 그런 것까지 다 네 탓으로 돌리지 않아도 된다니까... 네가 아픈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
넌 항상 희생양이라도 되겠다는 마냥 모든 잘못을 네 탓으로 돌리는구나. 그러지 말아. 그러기엔 넌 너무 불행하고 착하고 여린 아이야. 반질반질한 굳은살이 낀 소혜의 손끝에서는 은은한 머스크향과 함께 꽃향기가 났다. 소혜는 비어있던 쪽 손을 들어 어떻게든 눈물이 엉망으로 흘러내린 얼굴에서 눈물을 훔쳐냈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레, 반대쪽 손에 맞잡아져 있던 채연의 손등을 조심스레 들어올려서는 뺨을 기댔다. 평소와 다름없이 부드러운 소혜의 뺨은, 그래도 평소보다는 조금 더 뜨거웠다. 그러나 이내, 소혜는 채연의 손이 아직 덜 닦여나가고 남아 있는 눈가의 물기를 닦아낼 수 있도록 손을 풀어주었다. 그제서야 소혜는 조금 진정한 건지, 채연의 소혜 걱정에 소혜는 한 마디 한 마디씩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쥐고는 대답을 이어갔다.
"물론이야... 밥은 항상 잘 챙겨먹고 있어. 온실은, 네가 언제 돌아와도 좋도록 예쁘게 가꿔둘게. 맛있는 차도 간식도 새로 사두고... 그래, 저번에도 이야기했었지. 공부. 돌아오면 공부 가르쳐줄 테니까, 진도 뒤처진다고 걱정하지 말아."
웃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라지만, 또한 웃는 것만으로 시간이 채워지지는 않는 법이다. 시간을 웃음으로 채워넣은 만큼, 언젠가 어딘가에서는 눈물을 채워넣게 되어 있다. 그 반대로, 눈물을 채워넣었다면 어딘가에서는 웃음을 채워넣을 수 있는 날이 온다. 소혜는 양 손을 채연의 어깨로 뻗었다. 채연을 조심스레 포옹해주려는 듯이.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계속 말해왔잖아... 그건 네가 잘못한 일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채연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 그런가..? 소혜가 그렇다면 그럴수도 있지만.. 소혜를 울린 건 확실히 내 탓인걸. "
소혜의 말에 소녀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다가 부끄러운 듯 웃으며 작게 중얼거린다. 완전히 소혜의 말을 수긍한 것은 아니었지만 굳이 소혜의 앞에서 부정을 하거나 그러고 싶지는 않은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것은 소혜를 생각하는 소녀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조금씩 진정이 되는 듯 눈물을 닦아내는 소혜를 다행이라는 듯 안도감이 가득 담긴 눈으로 응시하던 소녀는 떨림이 섞여있는 소혜의 대답에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사실 소혜가 그러지 않을거라고 생각하는 소녀였기에 어쩌면 예상했을지도 모르는 답이었지만, 직접 듣는 것으로 생각보다 더 마음이 놓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다행이다. 소혜가 하나라도 소홀해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역시 쓸데없는 걱정이었네. 헤헤. 그나저나 온실을 얼마나 더 잘 꾸며두려는거야. 무리하면 안된다? 나는 지금 소혜가 가꿔놓은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하니까. 그나저나 공부 가르쳐준다구..!? 와아, 소혜랑 시간 보낼 이유가 하나 더 생겼구나! 완전 좋다! "
조금은 오버스럽게, 소녀는 기뻐하며 활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힘이 떨어져서 그런지 환한 미소가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그 미소가 거짓이 아니라는 것쯤은 소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아닌 소혜라면 분명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자신을 조심스럽게 포옹해주려는 소혜의 모습에 놀란 듯 눈이 커졌던 소녀는 이내 눈웃음을 지어보이며 천천히 소혜를 끌어안고 얌전히 품에 안겼다. 그리곤 장난스럽게 얼굴을 어깨에 비비적댄 소녀는 이어진 소혜의 말에 눈을 느릿하게 깜빡인다.
" 소혜는 늘 그렇게 이야기 해주는구나. 매번 그럴때면 나는 고마워서 네게 뭘 해줘야 할까, 뭘 해주면 너에게 돌려줄 수 있을까 생각하곤 해. 나에겐 참 과분한 사람이 곁에 있구나 하고 말이야. 몇번이고 그렇게 말해줘서 잘 알고 있어.. 그런데.. "
조심스럽게 팔을 끌어올려 부드러운 소혜의 머리카락을 매만져주려 하면서 말을 끊은 소녀는 숨을 고르듯 천천히 자그마한 숨소리를 낸다. 얼마나 지났을까 소녀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지금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구나 하면서, 어쩌면 조금은 일그러졌을지도 모르는 얼굴을 한 체로.
" 그래도 소혜가 우는 걸 눈 앞에서 보는 건 마음이 아픈걸. 내탓이 아니라고 해도 마음이 아파서 그래. 이럴때는 몇번이고, 몇번이고 내 탓이라고 생각할거야. 그러면 분명 다음에는 소혜를 울지 않게 해줄 수 있을테니까. 바보 같이 또 소혜를 울리지 않을 수 있을테니까. "
오히려 내가 너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걸. 채연의 친구가 아직 감정에 잠겨있는 목소리로 당신에게 속삭였다. 그녀는 반에서 1~2등을 도맡는 모범생이기도 했고, 누구의 말이든 기꺼이 귀를 기울여주는 상냥한 상담사이기도 했으며, 맡은 일을 차곡차곡 해내는 착실한 원예부장이기도 했다.
포옥, 하고 소혜의 품에 파묻힐 때는 코끝에 코코넛 향기 같기도 하고 갓 구워낸 빵 같기도 한 달큰한 향기가 따뜻한 체온과 함께 맴돌았다. 철저한 살균 절차를 마친 무균복 너머로도 맡을 수 있는 냄새였다. 당신은 당신이 익히 기억하고 있던 푸근한 감촉에 파묻혔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그저 평범한 어느 날 화원에 들러서 그녀의 품에 기댈 때와 다를 것 없이. 당신이 소혜의 품에 안겨올 때면 당신의 머리를 소혜가 쓰다듬곤 했지만, 이번에는 소혜가 당신의 손에 머리를 맡겼다. 목 높이에서 끊은 명주실같은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매만질 때마다 그 은은하고도 달큰한 향기가 손끝에 묻는 것 같았다. 소혜는 아직도 조금씩 떨리는 목소리로 나직이 대답했다.
"내가 우는 것은 그래서야, 채연아. 네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내가 잘못해서. 내게 이렇게나 많은 일을 해준 소중한 친구가 이렇게 아팠다는 걸 미처 알지 못해서. 그게 너무 안타까워서."
자신의 품에 파묻힌 당신의 몸에서, 소혜는 새삼 당신이 얼마나 메말랐는지를 깨달았다. 밝게 웃는 얼굴 뒤로 이렇게 될 때까지 너는 얼마나 많은 고통을 네 탓으로 돌렸을까. 얼마나 아파했을까. 얼마나 외로워했을까. 너와 함께해주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어째서 이런 것들을 놓치고 있었던 걸까.
"너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어, 채연아. 왜 나야? 왜 나만 이런 아픈 꼴을 당해야 하는 거야? 이건 불공평해. 나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이렇게 아파야만 하는 거야... 라고."
헌신적이기 그지없는 소녀. 자기희생에서 가장 큰 보람과 기쁨을 찾는 소녀. 스스로를 조금씩 깎아내어가며 모두에게 나누어주는 소녀. 자신의 몫이라곤 전혀 남겨두지 않고 모두에게 빛을 나누어주는 데 아낌없이 바치는 소녀. 그런 당신이 가지고 있는 빛이 흔들리는 순간, 그녀는 당신을 위해 이렇게 돌아왔다.
"그런데 넌 그러지 않았어. 그러긴커녕, 모든 것을 네 잘못으로 돌리기로 했지... 채연아, 너에게 책임이 없는 잘못까지 짊어지면서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아도 돼.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넌 충분히 착하고 좋은 애니까. 그러니까, 그동안 아팠던 만큼... 슬퍼하고, 화도 내보고, 억울하다고 한탄도 해보고... 내가 다 들어줄게."
"내가 더 이상 필요없게 될 때까지, 채연아, 네 옆에는... 항상 내가 있을 거야. 네가 바란다면."
" 물론,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너를 원망하거나 하진 않을거야. 다른 사람도 원망하거나 하지 않을거야. 왜냐하면.. 아픈 것도 마음 아픈데 누군가를 원망하고 미워한다면 더 마음이 아프잖아? 역시 나는 그런건 싫어서 그러지 않을거야."
소혜의 품에 파묻혀 달큰한 향기 속에서 조용히 온기를 느끼던 소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해오는 소혜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조금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온기만큼은 아프기 전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살살 소혜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소녀의 손가락은 부드럽게 대답하면서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좀 더 따스하게 소혜를 보듬어주려는 것처럼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그렇게 답을 해주곤 조용히 이어지는 소혜의 말을 듣던 소녀는 품에 안겨있던 몸을 천천히 떼어내곤 소혜와 얼굴을 마주했다.
소혜의 아름다운 붉은빛 눈동자와 눈을 마주한 소녀는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소혜의 볼로 가져와 살살 어루만져준다. 예쁜 얼굴이 눈물을 흘리느라 조금 망가져버린 것만 같아서 안쓰러운 듯, 그럼에도 충분히 아름다움을 뽐내는 친구의 얼굴을 살살 매만져준 소녀는 천천히 말라붙은 입술을 열었다.
" 누가 보면 내가 죽으려는줄 알 거 같아. 있잖아, 소혜야. 나는 살거야. 살고 싶어. 앞으로도 오래오래 살아가면서 우리 소중한 소혜랑 다른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을 볼거야. 그게 내 소원이거든. 이세상 사람들 모두가 행복할 수 없어도 내 주변사람들 만큼은 행복하길. 그게 내가 바라는거니까. 근데 내가 죽으면 분명 모두 슬퍼할거야. 그러니까 살거야. 걱정하지마. "
자기만 믿으라는 것처럼 소녀는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실린 목소리로 답했고,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소혜의 눈가와 볼을 살살 어루만져주었다. 그리곤 조금 고민하는 듯 눈을 잠시 여기저기 굴리던 소녀는 천천히, 힘을 내서 몸을 굽혀선 자신을 바라보던 소혜와 이마를 맞댄 체 살며시 눈을 감는다. 이마를 통해 서로의 온기가 맞닿는 것을 느끼며 은은한 로즈마리 향이 나는 숨결을 소녀는 뱉어냈다.
" 소혜는 언제나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소혜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앞으로도 언제나처럼 밝은 미소를 짓고 있으면 좋겠어. 예전처럼 어딘가 텅 비어버린 것 같은 소혜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
차분하게 소혜를 향한 바램을 읊조린 소녀는 천천히 눈을 뜨고는 한없이 가까워진 눈을 마추다 방긋 웃어보인다. 그리곤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덧붙이려는 듯 느릿하게 눈을 감는다.
" 내 옆에 있어줘. 오랫동안. 바보같은 내 부탁이지만 내 옆에 오래도록 있어줘. 소혜가 곁에 있고 싶지 않아서 떠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전까지는.. "
소혜의 목소리 역시도 갈라져 있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그녀의 눈동자는, 무어라 표현하지 못할 감정을 머금고 일렁이고 있었다. 가장 거친 폭풍우가 몰아치는 이 순간, 당신의 불꽃이 꺼져 버리는 줄로만 알았던 그 순간, 그러나 당신의 불꽃은 그 어느 불꽃보다도 작게... 하지만 그 어느 불꽃보다도 분명히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엿하게 욕심을 부릴 줄도 알고."
당신이 당신의 이마를 소혜의 이마에 기대어오자, 소혜는 당신이 기대기 좋게 몸을 약간 뒤로 기울이며 당신의 어깨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사르르 흔들리는 앞머리가 잠깐 당신의 이마를 간지럽힌다.
"-그건 너에게 달렸어, 채연아. 나 스스로가 네게 좋은 친구가 되기를 내가 바라고 있는 것처럼, 네가 그러기를 바라고 있다면- 내가 네 옆에 있어주기를 원한다면 난 계속 네게 좋은 친구로 남아있을 거야. 네가 희망을 갖고 있는 한."
어느샌가, 소혜가 모르는 사이 당신은 그렇게나 성장해버린 모양이다. 꺄르르 웃거나 살갑게 소리칠 뿐만 아니라, 단호하고 당당하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요구할 수도 있게 된. 그렇지만 그것은 당신이 바라던 가장 당신다운 소원들 중 하나였고, 소혜는 그것을 기꺼이 이루어주고자 했다. 당신의 소원에 속박되는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당신의 눈이 감길 때는, 소혜 역시도 당신을 따라 눈을 마주 감았다.
"네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나도 사라지지 않을게. 몇 번이고 말했잖니. 네가 바라기만 한다면 나는 네 곁에 있을 거야."
나직한 서약이 끝나고, 소혜는 당신의 이마에서 자신의 이마를 살며시 떼며 눈을 떴다. 그리고 당신을 끌어안은 그대로 살며시 밀어서는, 다시 당신을 병상 위에 뉘어주려고 했다.
자신을 바라보며 속삭이는 소혜에게 보란듯 해맑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소녀는 부드럽게 답했다. 분명 전보다 야윈 모습이었지만 소녀의 밝은 미소는 변하지 않은체 그대로 남아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저 소혜의 말 한마디에 너무나도 행복하다는 듯 웃고 있는 소녀는 지금 이세상 다른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 하나를 얻은 것처럼 보였다.
" .. 이대로 누워서 자버리면 소혜는 가버리겠지? 그건 싫은데. 왠지 좀 더 소혜랑 함께 있고 싶어. 어.. 그러니까.. 지금 막 여기가 간질거려. 이런건 처음인데.. "
소녀는 소혜와 나직한 서약을 마무리 하고 몸을 뉘어주려는 소혜를 바라보다 자그마한 두 손을 가슴팍에 가져다대곤 수줍은 미소를 지은 체 중얼거리듯 말한다. 익숙하지 않은 감정, 소혜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왠지 가슴 한켠이 간질거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수줍게 손을 모은 체 자신의 상태를 말한 소녀는 소혜의 붉은 눈동자와 눈을 맞추었다. 그러다 왠지 모르게 부끄러움이 몰려오는 듯 얼굴을 복숭앗빛으로 서서히 물들였다.
" 다.. 다시 생각해보니까.. 왠지 곁에 있어준다는게..그러니까 그게.. 되게 부끄럽달까..! 막막 그거 같잖아.. 연애소설이나 드라마 같은 곳에서 주고 받는 말 같아서.. 우우, 내가 무슨 말을 하는거람. "
소녀는 부끄러움에 결국 자그마한 손으로 얼굴을 포옥 덮었다가, 슬그머니 손을 조금 내려선 눈만 빼꼼 내민체로 소혜를 바라본다. 몸을 베베 꼬는게 여전히 부끄러운 듯 보였지만.
"나도 생각같아서는 채연이랑 같이 병원에서 지내면서 다 나을 때까지 있어주고 싶지만... 허락된 면회시간이 그렇게 길지가 않아."
소혜는 그제서야, 평상시에 띄우던 미소를 일부나마 되찾았다. 웃는 듯 아닌 듯 잔잔하면서도, 뺨에 또렷한 보조개를 피우는 상냥한 미소. 창문으로 비쳐드는 이른 봄장마의 우중충한 하늘빛이 비쳐서 그런가 그것은 조금 구슬픈 기색을 띄고 있었지만, 그녀의 웃음에는 분명한 안도감과, 친구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네가 잠들지 않고 있더라도 난 곧 있으면 나가야만 해... 그래서, 그래서 저걸 가져왔어."
소혜는 잠깐 당신의 침대 머리맡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신에게도 낯익을 흠집투성이 CDP가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지퍼백에 담긴 이어폰이 놓여 있었고.'
"화원에서 같이 듣던 노래들이 담겨있어. 네가 혹시나..." 소혜는 잠깐 뜸을 들였다. "혹시나 학교나 화원이 그리우면, 저 안에 담긴 노래들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 저것들 말고도 다른 노래를 듣고 싶다면 다른 CD를 만들어줄게. 화원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아, 다른 카세트가 있으니까. 그리고-"
복숭앗빛이 되어 얼굴을 손으로 덮고 있는 당신에게로, 소혜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숙여내렸다. 꽃무릇이 피어있는 것 같은 발간 눈동자와, 천장의 형광등을 등진 미소가 어째서일까 조금 짓궂은 기색을 띄고 있는 것도 같다. 그녀의 손이 살며시 뻗어와서는, 당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가다듬어주기 시작했다.
소녀도 정해진 시간이 있다는 것은 틈틈이 들리는 어머니를 보아서 알고 있었지만, 소혜를 보내는 것은 괜스레 아쉬움이 남는 모양이었다. 상냥함과 자신을 향한 애정이 담겨있는 듯한 부드러운 소혜의 미소와 함께 자신을 타이르듯 말하는 소혜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소혜가 좀 더 있을 수 있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잔머리를 굴려보는 소녀였지만 좀처럼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듯, 아쉬움이 깃든 눈으로 소혜를 바라보는 소녀였다.
" 고마워.. 잘 들을게. 저거 들을 때마다 소혜 생각이 날 것 같아. 아마 꿈에서도 소혜를 보겠지. 그러면 보고싶다고 막 연락할지도 모르니까 귀찮다구 차단하면 안된다..? "
소녀는 CDP를 흘끗 보고는 고맙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속삭이더니 말을 끝맺을때는 살며시 애교를 부리듯 눈을 찡긋거린다. 소녀 나름대로 소혜의 기분이 좋아질 수 있게 노력을 하는 것이지만, 어쩌면 소혜에게 마냥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마음을 서툴게 뱉어내는 것일지도 몰랐다. 소녀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자신이 바라는 것을 조금씩 털어놓기 시작했기에 지금의 말도 소녀의 솔직한 마음 중 하나일 것은 분명했다.
" ... 그, 이런 건 소혜가..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이랑 주고 받는거잖아..? 보통 소설이나 드라마에선 그랬는데.. "
여전히 복숭앗빛으로 얼굴을 완전히 물들인 소녀가 손바닥에 막혀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기울여 바라보는 소혜에게 말했다. 왠지 모르게 소혜의 발간 눈동자와 짖궃은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소녀의 마음 한켠이 더욱 더 간질거리는 것만 같았다. 아니, 이제는 간질거림을 넘어서 혹여나 소혜에게 들릴까 싶을 정도로 두근거리는 소리가 커져갔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소녀는 풍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더니 조심스럽게 얼굴을 가리던 손을 내리며 완전히 분홍빛으로 물즌 얼굴로 얌전히 소혜의 손길을 받아들인다.
" 그런 약속을 내가 받아도 되나 싶어서.. 그! 싫다는 건 아니니까아...! 막 소혜 오해하면 안된다..?! 가슴이 콩닥거려서 나도 모르게.., 아니 그니까 아무튼 좋다는거야..응.. "
발간 소혜의 눈을 바라보며 자그마한 입술을 파르르 떨며 횡설수설하던 소녀는 결국 말끝을 흐리며 입을 꾸욱 다문다. 이래저래 굉장히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소녀에게는 낯설고 익숙지 않은 감정이 자꾸만 가슴 속에서 올라오고 있었으니까. 그것을 어찌해야 맞는 것인지 알지 못하는 소녀는 부끄러움으로 물든 얼굴을 한 체 작게 숨을 뱉어낸다.
소혜: 소율아, 내 하얀 원피스 못 봤 소율: (소혜의 하얀 민소매 원피스를 걸치고 있다) (여기저기 다 헐렁함) (왠지 원망의 표정으로 소혜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소혜: ...... 이번 주말엔 얌전히 언니랑 같이 옷 사러 나가자 난쥉아. 소율: 난쥉이라고하지마있씨(씩씩)
"애태우거나 속 썩일 필요 없이, 뻘리 나으려고 노력하면 되는 거야. 노력하되 무리하지 말고. 착한 채연이는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지?"
소혜는 당신의 머리를 손으로 부드럽게 쓸며 나직이 말했다. 인사치레하듯 쓰다듬을 때 가볍게 머리 겉을 스치고 지나가는 손길이 아니라, 같이 쉬는 시간을 보낼 때 분위기가 안정되면 으레 해주는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파묻는 공들인 손길이었다.
"외로우면 언제든지 톡 남겨줘. 확인할 때마다 답장할 테니까."
손길을 멈추지 않은 채로 잠깐 시계를 곁눈질로 힐끔 올려다본 소혜는, 당신의 응석에 걱정 말라는 듯이 방긋 웃어보였다. 따스하면서도 정겨운 그 미소는, 소혜가 이제 안도하고 슬픔을 완전히 내려놓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러다 당신의 웅얼거리는 소리에 소혜의 눈매가 살며시 가늘어졌는데- 그 조그만 변화가, 소혜의 미소를 절친한 친구의 그것에서 얄궂은 장난꾸러기의 그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우리 채연이... CDP가 아니라 커플링을 해서 올걸 그랬나? 아유, 귀여워라."
키들거리며 당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길로 당신의 뺨을 살며시 매만지던 소혜는, 당신의 얼굴에 맺힌 열기를 느낀 건지 미소를 악간 덜어내고 질문했다.
소혜의 손이 이마에 내려앉자 작게 숨을 들이킨 소녀는 이내 기분 좋은 듯 두 눈을 곱게 접어 웃어보이며 이마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만끽하다 천천히 숨을 뱉어내며 작게 중얼거린다. 무리하지않고 소혜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면서 얼른 건강해지기, 그건 소혜뿐만 아니라 소녀도 바라는 일이었다. 예전처럼 소혜와 학교를 다니고, 조용한 원예실에서 둘이서 시간을 보내고, 노을이 진 하교길에서 나란히 걸어가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니까. 자신이 있을 곳은 새하얀 병실이 아니라 소혜가 있을 곳이라는 걸 소녀는 잘 알고 있었다.
" 응, 그러면 자꾸만 톡을 할지도 몰라. 막막 톡을 해서 소혜가 공부하는걸 방해할지도 몰라. "
자신을 보며 방긋 웃어보이는 소혜의 말에 소녀도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키득거리며 답한다. 분명 말만 그렇게 할 뿐, 톡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가면서 보낼 것이 뻔한 소녀였지만 소혜가 눈 앞에 있을 때만큼은 왠지 모르게 어리광을 부리게 되는 것은 소혜의 묘한 마력이 만들어내는 현상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미소를 띈 소혜는 아까처럼 슬픔이 남아있지 않아서 무척이나 다행이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역시 소혜는 저런 모습이 제일 보기 좋다고, 잘 어울린다고 소녀는 마음 속으로 되뇌이며 수줍게 소혜를 바라본다.
" 커..커커커커 커플링..!? "
장난꾸러기의 미소를 띈 소혜가 내뱉은 말에 복숭아같던 분홍빛 얼굴을 완전히 붉게 물들이며 말을 더듬기 시작하는 소녀였다. 분명, 분명 연애 쪽으로는 백지나 다름없을 소녀였기에 이런 장난에도 화르륵 얼굴을 붉히곤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었다. 흐에에나 에에 같은 당황한 듯한 소리를 내던 소녀는 이내 뺨을 매만지는 소혜의 손길에 조금 놀란 듯 움찔거리다 떨리는 입술을 열며 고개를 저어보인다.
" 으응..? 아, 아니야..! 괘..괜찮아..!! "
소녀는 자그마한 손까지 아기새처럼 파닥거리며 소혜를 말리고는 우물쭈물하는 것이 다 보이게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소혜를 타박하듯 중얼거린다.
" 커플링 같은건.. 소혜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랑 맞춰야 하는거라구... 정말.. "
붉어진 목소리로 중얼거린 소녀는 결국 얇은 이불을 끌어올려 눈만 빼꼼 내민체 입술을 삐죽거린다. 아마도 소혜가 자신을 놀리려고 하는거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괜찮은 거지? 깜짝 놀랐네... 음, 공부하면서도 톡으로 수다 정도는 떨 수 있는 거니까. 그 정도야 받아줄 수 있지?"
완전히 빨개진 당신을 소혜는 눈을 가늘게 뜨고 키들키들 웃으며 내려다볼 뿐이다. 왜인지 장소만 다를 뿐, 평소의 화원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소혜는 뭔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이 나직이 속삭이듯 한 타박 소리는 듣지 못한 걸까? 의뭉스러운 미소만을 띈 채로, 소혜는 당신을 달래기라도 하려는 듯 다시 찬찬히 당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다 달칵, 하고 소혜의 어깨 너머에서 병실 문이 살며시 열리는 게 보였다. 소혜도 그 소리를 들은 건지 뒤를 돌아보았다. 살며시 열린 문틈 사이로 위생복 차림의 간호사 언니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명채연 환자 보호자 분, 이제 정리하시고 나와주셔야 돼요." "-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아쉬워하지 말아, 채연아. 적어도 일주일에 세 번은 올게."
소혜는 마지막으로 당신의 앞머리를 쓸어 정리해주면서, 의자에서 허리를 일으켰다. 그러다 말고 그녀는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빙긋이 웃었다. "채연아, 잠깐만." 그렇게 말하고는, 소혜는 당신에게로 머리를 숙여내린다.
빨개진 자신을 보며 키득거리는 소혜의 모습에 소녀는 살짝 볼을 부풀려보이다 이내 바람을 빼고는 웅얼거리듯 답한다. 왠지 자꾸만 소혜에게 놀림받는 느낌이 들었는지 역으로 되돌려 줄 수 없을까 고민하던 소녀였지만 부끄러움에 마비된 소녀의 머리는 주인이 바라는 답을 주지 못했다. 그러다 자신이 타박을 하듯 중얼거렸던 말에 아무런 말도 없이 미소를 지어보이는 소혜를 보며, 혹시라도 자신이 실수라도 한 것일까 고민이 되는 듯 눈을 살며시 굴리며 소혜를 살피기 시작했다. 다행히 다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소혜를 보며 눈만 내민 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소녀는 고개를 내미는 간호사를 보곤 슬슬 기간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머리를 쓸어서 정리해준 소혜가 일어나며 하는 말에 걱정말라는 듯 애써 기운을 내며 활기찼던 때의 모습을 흉내낸 소녀는 옅은 미소를 지어보인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잠깐만이라 말하는 소혜를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이던 소녀는 이내 이마에 입술을 맞춰주는 소혜의 행동에 얼음이라도 된 것처럼 아주 잠시 굳어선 멍하니 소혜를 바라본다. 분명 소녀에게는 엄청나게 길게 느껴졌겠지만, 아마도 단 몇초에 불과했을 시간동안 굳어있던 소녀는 이내 정신을 차린 듯 아, 하는 짧은 소리를 뱉어내더니 얼굴을 화르륵 붉힌다.
" .... "
곧 자리를 비우고 병실을 나설 소혜를 잠시 올려다 본 소녀는 이내 입술을 깨물곤 용기를 낸 듯 몸에 힘을 줘서 고개를 가까이 해 소혜의 볼에 살며시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댄다. 방금 전, 소혜가 자신의 이마에 입술을 새겨넣은 것처럼.
쪽.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소혜의 볼에 수줍게 입을 맞춰준 소녀는 이내 부끄러운 듯 다시금 이불을 끌어올려선 머리 끝까지 가려버린다. 그러다 소혜가 가야한다는 것을 떠올렸는지 스르륵 이불을 조금 내려선 눈만 내민체로 작게 속삭인다.
왜 빨개지는지 알고 저러는 건지 모르고 저러는 건지. 알고 저러는 거면 소혜는 당신 생각보다 좀더 잔인한 성격일지도 모른다. 모르고 저러는 거면 소혜는 당신 생각보다 훨씬 둔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 꿍꿍이를 알 수 없는 여우 같은 미소 뒤에는, 무언가 있다는 것만 겨우 짐작할 수 있을 뿐 무엇이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것은 어릴 적 소혜나, 소혜의 남매들이 아플 때면 어머니가 늘 해주던 주문을 베껴서 당신에게 써준 것에 불과했지만, 그것을 무슨 생각으로 당신에게 해주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당신은 소혜의 그 얄궂은 주문이 건드려버린 당신의 마음을 한 조각이나마 표현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갑자기 고개를 들어올리는 당신을 보고 소혜는 일으켜세우려던 허리를 멈췄고, 소혜의 뺨은 당신이 닿을 수 있는 곳에 멈춰섰다. 당신의 입술이 소혜의 뺨에 닿을 때는 왠지 베이비파우더를 떠올리게 하는 달큰하고도 아련한 향기가 코끝에 맴돌았다. 소혜는 잠깐 당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곤 따뜻하게, 아직 당신의 눈이 이불 밖으로 나와 있을 때 방긋 웃었다.
소녀는 여우 같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방긋 웃는 소혜의 마지막 인사에 작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달큰하고 아련한 소혜의 향기가 코 끝에 남아있었기에 무언가 이유 모를 아쉬움이 소녀의 마음에 남았지만 병실을 나설 소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소녀는 입술을 오물거렸다. 낯선 감정, 자꾸만 간질거리는 이 마음이 무엇인지 소녀는 아직까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저, 이런 반응이 소혜에게서만 느껴질 것이라는 막연한 감각만을 느낄 뿐이었다.
소혜가 병실을 나선 후에 홀로 남게 된 소녀는 이불을 만지작거리다 아무도 없는데도 머리 끝까지 이불을 끌어올려 덮고는 몸을 웅크린다. 그리곤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는 것만 같은, 소혜의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던 이마를 자그마한 손으로 매만지며 홀로 푸흣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 ... 큰일이다.. 벌써 보고 싶은데.. "
소녀는 입을 가리고 키득키득 웃으며 혼자서 중얼거리다 무언가 떠오른 듯 '아!' 하는 탄성을 낸 소녀는 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든다.
' [ 사진이 전송되었습니다. ] '
소녀의 자그마한 손가락이 자연스레 어우러져 자그마한 하트를 만든 손사진을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소혜에게 보낸 소녀는 홀로 남은 병실 안에서 만족스런 웃음소리를 흘리며 베개를 쿵쿵 두드렸다. 지나가던 간호사에게 무리하지 말라고 혼난 것은 비밀이지만.
네, 못했던 장래 이야기도 나눠보거나, 이런저런 곳 가보고 싶다고 미리 점찍어두거나, 1학기에 있을 수학여행 이야기를 하거나... 아니 채연주, 마구니가 넘쳐흐르고 계세요 uu 천천히 돌려봐요. 오늘 밤은 개복치 소혜주가 기력이 쇠진해서 새 일상을 시작할 엄두가 안 나지만요yy...
제어못하는 소혜라니.. (솔깃) 음.. 봤죠. 그런 모습의 소혜도 매력터지니까 한두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물론 소혜주의 의견에 맞춰나가니까 꼭 봐야하는건 아니지만 질투하는 에피소드가 하나 정도는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요! 채연이가 질투하면 낯선 소유욕 때문에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 될테고 소혜는...
다급하시다 *uu* 저번 일상이 끝나고 나서는 2주쯤 뒤 채연이가 퇴원할 때의 이야길 돌려보고 싶다고 하셨죠? * 반 친구들의 걱정이 가득 담긴 롤링페이퍼는 소혜가 두 번째 병문안 때 들고 왔을 것이다 * 소혜는 매번 꼬박꼬박 교과서와 노트를 가져와서 채연이가 뒤처지지 않도록 공부를 알려주었을 것이다 (uu...) 음, 이것 외에 또 뭔가 특기할 만한 사항이 있으려나요?
익숙해져버린 환자복을 벗어서 깔끔하게 침대 위에 올려둔 소녀는 어머니가 가져다주신 새하얀 원피스를 걸친다. 예전보다도 헐렁해진 느낌이 들었지만 환자복을 벗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이 좋은 듯 소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한가득 담겨있었다. 열어둔 창문으로는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있었고, 자그마한 가방에 몇개 없는 짐을 챙겨놓고 나니 병실은 소녀가 오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소독약 냄새에 은은하게 로즈마리 향이 풍겨온다는 것이 소녀가 들어오기 전과 다른 듯 했다.
" 소혜는 언제 오려나 "
어머니는 오지 못한다고, 대신 소혜가 올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소녀였기에 침대에 걸터앉아 바닥에 닿지 않는 다리를 장난스럽게 흔들거린다. 가죽샌들을 신은 소녀의 아기자기한 발가락은 바닥을 향해 쭉 펴져있었지만 아쉽게도 소녀의 키로는 바닥에 닿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소녀는 제목을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고개를 좌우로 기울이며 창 밖을 바라본다. 한동안 안에서만 보던 저 맑은 하늘 아래의 풍경 속으로 다시 뛰어든다는 생각만으로도 소녀는 행복해보였다. 그도 그럴게, 아프기 전에는 언제나 활발하게 뛰어다니던 소녀의 모습을 떠올려본다면 당연해보이는 이야기였지만.
" 아, 좋은 생각났다! "
소녀는 슬그머니 열리지 않는 병실 문을 바라보다 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재밌는 생각이 났다는 듯 침대에서 폴짝 뛰어 내려와 다다다 문으로 달려간다. 그리곤 문이 열리는 쪽으로 서서는 숨을 생각인지 자그마한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체,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키득거리는 소리를 숨죽여 내면서 곧 있으면 찾아올 소혜를 기다리기 시작한다.
당신의 어머니께서 소혜에게 부탁을 해왔을 때 왜일까, 소혜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희망마저 빛이 바래다 못해 바스러진 채로 오랜 세월 동안 어두운 동굴을 저벅저벅 가로지르다, 마침내 동굴의 출구에서 비쳐들어오는 빛을 본 듯한 그런 기분. 왜일까? 몇 달 동안 죽을 것처럼 천천히 시들어가다가 어느 순간 꺾이듯이 풀썩 쓰러져버린 당신의 모습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소혜가 당신을 꼬박꼬박 찾아온 2주 동안 당신이 꾸준히 보여준 회복세는 소혜의 그런 걱정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소혜가 내가 너무 과하게 걱정했나, 싶어서 머쓱해할 정도였으니까.
"내가 너무 과민한 걸까-..."
상아색 오버핏 블라우스의 앞섶을 스커트 허리춤에 밀어넣고, 전신거울 앞에서 몸을 한바퀴 빙 돌려 자기의 뒷모습을 비스듬히 돌아보며 소혜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소혜는 이내 시답잖은 위화감 같은 것은 대수롭지 않게 떨쳐버리기로 했다. 어찌되었건 당신의 병세가 호전되어 이제 퇴원해도 된다는 것은 매우 기쁜 소식이었으니까. 기말고사 이후에 예정된 수학여행은, 아마 별탈없이 채연이와 같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별나게도 남미로 간다던데, 어떠려나.
출발하기 전에 핸드폰 메모장과 크로스백을 뒤져보며 당신의 부모님께 부탁받은 이런저런 퇴원절차-당신의 부모님께서 거의 다 진행해두신 덕분에, 소혜가 부탁받은 것은 정말로 마지막 뒷마무리 정도였지만-를 다시 한 번 체크한 소혜는, 모든 준비가 완벽한 걸 확인하고 나서야 서랍장을 열어서는 우아하게 디자인된 조그만 유리병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손목에 두 번 칙, 칙, 뿌리고 손목을 부빈 다음 그것을 다시 귀 뒤에 톡톡 두드린다. 방 안에 봄의 화원을 떠올리게 하는 뭉클뭉클한 비누향이 부드럽게 퍼져나간다. 그러면 이제 출발해볼까. 소혜는 핸드폰을 꺼내선 카*오택시를 불렀다.
"채연아."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달카닥 열린다. 초여름의 훈풍과 함께, 또각또각 구두 소리와 함께, 아직 봄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듯한 향기가 사르르, 병실 안으로 흘러들어온다. 집중치료실에 들어설 때 하고 있던 중압감 있는 위생복 차림도 아니고, 평일에 당신의 병실을 방문할 때 늘상 입고 있던 나리고 교복 차림도 아니고, 소혜의 취향대로 나풀나풀 간드러지게 빼입은 사복 차림으로 소혜는 병실에 들어선다.
그리고, 소혜는 고개를 휘휘 돌려 주변을 살펴본다. 당신의 전략은 성공해서, 문이 열릴 때 저절로 문 뒤에 숨은 꼴이 된 당신의 모습을 소혜는 발견하지 못했다. 문 뒤에 당신이 있는 줄도 모르고 얘가 어디 갔지? 하고 의아함을 담아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소혜. 지금 놀래켜준다면, 당신의 장난은 대성공이다.
다만, 나부끼는 커튼 아래 열려 있는 창문에 소혜의 눈길이 닿았을 때는 소혜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소녀가 소중한 친구를 놀래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문 뒤에 쪼그려 앉아 기다리는 몇십분 동안 소녀는 그저 놀래켜서 화들짝 놀라는 소혜를 상상하며 이따끔 입을 가린체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를 낸다. 중간에 간호사가 한번 왔다 갔지만, 그런 소녀를 보며 귀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돌아갔다. 소녀는 간호사가 쓰다듬어준 머리를 살살 매만지곤 베시시 미소를 지은체 쪼그려 앉아있다가 어딘가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끼곤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 왔다..! 왔다..! 소혜 왔다..! "
듣는 이가 한명도 없는데도 소녀는 혼자서 얇은 다리를 한손으로 두드리며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혹시라도 소리가 새어나갈까 양손으로 입을 꼬옥 막아버린다. 몇번이고 머리 속으로 상상을 했으면서도 막상 놀래켜야 할 상황이 다가오자 어쩔 줄 몰라하던 소녀는 숨을 꼬옥 참은 체 문이 열리는 것을 바라보았고, 이내 예쁘게 차려입은 소혜가 병실로 들어서는 모습에 베시시 미소를 지어보인다.
' 흐흐흥~ 내가 어딨는지 모르는 거 같지?? '
어디있는지 모르는 듯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소녀의 모습에 숨죽여 웃으며 언제 뛰어나가서 소혜를 놀래킬지 고민하는 중에, 자신의 친구가 창문을 보곤 어마어마한 오해를 한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체 나갈 타이밍을 잡으려 준비하며 한동안 자신의 친구를 내버려둔다. 소혜가 하얗게 질렸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는 듯 슬금슬금 문 뒤에서 나와 몸을 숨여 나아간 소녀는 이내 소혜의 등으로 뛰어들어 안기며 달큰한 우유향이 나는 소혜의 등에 얼굴을 문질거린다.
" 와앙~!! 소혜야, 놀랐지~? 그치?? "
그저 해맑은 목소리로 친구의 속도 모른체 놀래켰다고 생각한 소녀는 슬쩍 고개를 들어 반응을 보려한다.
소혜의 등에 몸을 던져 푹 파묻혔을 때, 당신은 소혜의 등에서 그녀의 체취가 폭 피어오르는 것과 소혜의 몸이 당신의 충돌을 받아내느라 약간 흔들리는 것 말고도 당신이 충돌한 지점을 중심으로 몸이 활처럼 살짝 휘면서 흠칫, 하고 움찔하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소혜는 당신의 장난에 아주 제대로 화들짝 놀란 모양이다.
"─────!!!!"
소리없는 아우성을 지르며, 소혜는 아연실색한 얼굴을 하고 뒤를 돌아본다. "너, 너..." 속도 모르고 해맑게 웃고 있는 당신과 눈을 마주친 소혜의 얼굴이 어째 점점 새빨개지면서 표정이 >:( 모양으로 변하더니, 숫제 눈가에 눈물이 글썽이고 있다. "너 이..." 소혜는 침착하게 당신의 팔을 끌러내고는 당신에게로 돌아서서는-
"깜짝 놀랬잖아, 이 기집애야!!"
하고 반쯤 소리를 지르다시피 하더니, 당신의 양 뺨을 양손으로 꼭 집는다 싶더니 딱 아프기 직전의 정도로-쓸데없이 절묘하게- 쭉 잡아늘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도 얼마 못 가서 소혜는 화나 보이던 표정마저 무너뜨리며 당신의 뺨을 놓았다. 터무니없는 오해가 불러일으킨 공포 위에, 볼살마저 쉽사리 잡기 힘들 정도로 야윈 당신의 모습이 불러일으킨 슬픔이 덧칠된다. 소혜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갈라진다.
"깜짝 놀랬잖아..."
그리고 소혜는 냉큼 당신을 자신의 품에 끌어안는다. 익숙한 포옹이다. 소혜의 품 안은 언제나 그랬듯이 쿠션처럼 당신의 모양대로 부드럽고 따뜻하게 당신을 받아들였다. 코를 간질이는 달큰한 꽃향기가 흩날리듯 당신을 감싼다.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지만, 소리 없는 아우성과 함께하는 아연실색한 소혜의 표정에 소녀는 그저 자신의 계획대로 성공했음을 알아차리곤 베시시 웃으며 키득키득 웃기 시작한다. 아연실색한 표정에서 소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 수 있었기에 자신과 눈을 마주한 소혜를 보며 웃고 있던 소녀는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자 어색하게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리곤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는 소혜의 눈을 확인한 소녀는 당황함이 가득해진 얼굴로 변해선 '어라..?' 하는 중얼거림을 남긴다.
" 으갸아악~ 소, 소혜야.. 자, 잘못해써어.. "
팔을 끌러낸 소혜가 소리를 지르자 화들짝 놀란 소녀는 이어서 뺨을 양손으로 꽉 잡히는 순간 양팔을 휘적거리며 울상을 짓는다. 막 아프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뺨이 잡혔기에 버둥거리면서도 소혜의 눈치를 살핀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소혜가 화난 표정을 풀자 소녀는 버둥거리면서도 안도한 듯 소혜를 바라본다.
" 이, 이렇게 소혜가 놀랄 줄은 몰랐는데.. 그냥 까꿍 정도만 생각했는데... "
소혜의 반응에 당황한 것은 소녀도 마찬가지였기에 울음기 섞인 목소리에 움찔거리며 웅얼거리듯 변명을 늘어놓는다. 아무래도 소혜가 울먹일거라고는 수없이 상상했던 모습들에서도 예상하지 못 했던 소녀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소혜가 품에 자신을 끌어안아주자 느껴지는 포근하고 달큰한 향기에 소혜의 허리를 얌전히 끌어안아준다.
" 앞으로 밥 잘 먹으면 살도 다시 붙을거래..! 약도 잘 먹고...! "
소혜를 달래려는 듯 빼꼼 품에서 고개를 들고는 소혜를 올려다보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한다. 허리를 끌어안았던 손으로는 살살 소혜의 등을 토닥이고 있었고, 이내 베시시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어보인다.
" 그나저나 우리 소혜는 왜 이렇게 예쁘게 차려입고 왔어?? 소혜가 예쁜건 평소에도 잘 알고 있었는데. 약속이라도 있는거야?? "
자신을 데리러 올 소혜가 다른 약속을 잡지 않을 것을 잘 알면서도 괜히 기분이 좋아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물음을 던지며 응? 하는 소리를 낸다.
소혜는 그제서야 간신히 얼굴에서 놀랐던 기색을 지워내고는, 어느 주머니괴물 게임의 시스템 메시지를 인용하며 >:| 정도의 표정을 하고선 당신을 안은 채로 당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놓았다. 표정에 서린 짓궂은 기색은 나 이제 아무렇지 않으니 걱정 말아라, 하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당신의 머리를 헝클어놓는 것을 그만두고, 원래의 그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와서는 정성스러운 손빗질로 다시 당신의 머리를 원래대로 돌려놓기 시작했다.
"그냥- 그냥 내가 바보같은 생각을 한 것뿐이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 넌 아무 잘못 없으니까."
어느 정도 손빗질이 끝나자, 소혜는 당신을 끌어안고 있던 팔 한쪽을 조심스레 끌러서는 네 팔목을 가볍게 쥐어보았다. 흙일로 단련된 손은 그 표면이 조금 거칠었고 여기저기 굳은살이 박혀 있었지만, 소혜의 품속과 다를 바 없는 안온함이 있었다. 그러나 소혜는 지금 그 손으로 당신의 팔목을 잡아보고 있다. 생각보다 더 가늘었던 걸까. 소혜의 목소리가 한층 더 차분히 가라앉았다.
"...응. 밥 잘 먹고, 약도 꼬박꼬박 먹자. 내가 많이 도와줄게."
그러다 그 다음 순간 당신이 질문을 던지자, 소혜는 언제 착 가라앉았냐는 듯 다시 씨익 웃으며 당신의 코끝을 살며시 꾹 쥐었다.
"글쎄= 뭐라고 대답해주면 제일 기분좋겠니? 오늘 있는 약속은 딱 하나뿐이라고? 오늘 기쁜 일이 있어서 이렇게 입었다고 해줄까?"
소혜가 게임 흉내를 내며 머리를 헝클이자 소녀는 꼼짝도 못 한 체 소혜를 보여주려 정리했던 머리가 망가지는 것을 얌전히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소녀의 표정은 ㅠ^ㅠ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금방 소혜가 손을 멈추자 헝클어진 머리를 한 체 뱅글뱅글 눈이 도는 듯한 표정을 한 체 멍하니 소혜를 올려다본다.
" 다.. 다행이다아... 난 또 내가 놀래켜서 화난 줄 알았어어... "
여전히 뱅글뱅글 도는 듯한 표정을 하던 소녀는 어느정도 머리가 정리되자 그제야 또렷하게 소혜를 바라보며 웅얼거리듯 말한다. 소혜가 화난 것이 아니라니, 큰 산이라도 넘은 듯 했던 소녀였다. 남을 화나게 만드는 일은 소녀가 두려워하는 커다란 일 중 하나였으니까. 그러다 갑자기 팔목을 움켜쥐는 소혜의 행동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 소녀가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리자, 소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새하얀 피부가 드러난 어깨 위로 흘러내린다.
" 어..우움... 나 보여주려고 입고 왔다고 했으면 좋겠어.. "
소녀는 소혜의 말에 잠시 고민을 하는 듯 올려다보다 손가락을 꼬물거리던 소녀는 자그마한 손을 모으고 까치발을 해선 작게 소헤만 들으라는 듯 속삭인다. 그리곤 부끄러운 듯 므히히 하는 귀여운 웃음소리를 흘리며 손으로 눈만 빼꼼 내민 체 얼굴을 가려버린다. 소녀의 두 눈은 소혜의 반응을 살피려는 듯 하면서 슬쩍슬쩍 침대 쪽으로 뒷걸음질을 친다.
그제서야 잠깐 쥐었던 당신의 손목을 놓아주고는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눈가에 남아있던 물기를 닦아낸 소혜는 당신을 바라보며 싱긋 웃어보인다. 당신의 하얀 원피스 차림을 보고 그런 말을 하나 보다. "귀여워, 채연아." 하고 한 마디를 덧붙이고, 그녀는 당신을 쓰다듬어주려 손을 뻗었다.
"날씨도 좋고, 원피스를 입고 있는 걸 보면 어딘가 놀러가고도 싶지만... 아직 병이 다 나은 것도 아니고, 오늘은 널 집으로 데려다주러 온 거니까."
소혜는 다시 병실을 한번 휘 둘러보면서, 뭔가 빠뜨린 게 없는지 확인했다. "뒷정리는 간호사 언니가 해주셨나 보네. 빠뜨린 물건 없지?" 그리고, 이제 당신이 병실을 벗어나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쁜지 활짝 웃었다. 희고 가지런한 이빨을 드러낸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는 당신에게 손을 내민다.
" 물론 비슷한 옷을 입었으면 기뻤을 것 같지만 지금도 충분히 소혜는 예쁘니까 괜찮은걸? 맞아, 한송이 꽃 같아. "
소혜가 눈가에 남아있던 물기를 닦곤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보이자 소녀도 따라서 미소를 지으며 사소한 건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 부드럽게 속삭인다. 소녀의 속삭임이 괜한 빈말이 아니라는 것은 소녀의 평상시 모습을 아는 사람이었으면 당연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초롱초롬 빛이 새어나오는 듯한 두눈으로 올려보고 있는 소녀를 본다면 분명 진심을 가득 담아 이야기 한다는 것을 그 누구라도 알 수 있을만한 모습이었다. 귀엽다는 칭찬에는 수줍게 웃으며 자그마한 두손을 모아 입을 가리곤 소리죽여 키득거린다. 두 귀가 빨간 것이 칭찬이 꽤나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 그러네, 놀러가지 못하는 건 아쉽다.. 내가 좀만 더 건강했으면 확 소혜랑 놀러가버리는건데. 그치? 막막 이런 말하니까 나쁜 계획을 꾸미는 것 같아서 악당이 된 느낌이야. "
악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별거 아닌 계획이었지만 소녀는 므히히 하는 귀여운 웃음소리를 흘리며, 악당같은 음흉한 미소를 지어보이려 했지만 결과물은 꼬맹이가 장난치기 전에 짓는 미소가 되어버린다. 역시 선천적으로 나쁜 일을 하는데 익숙치 않은 소녀였기에 그런 모습이 나오는 것 같았다. 그래도 활짝 웃고 있는 소혜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 한켠이 따스해지는듯 두 손을 꼼지락 거린다. 그러다 손을 내미는 소혜를 바라보곤 침대 위에 올려뒀던 자그마한 짐가방을 등에 매더니 후다닥 달려가 소혜의 손을 두 손으로 꼬옥 잡는다.
" 응!! 소혜랑 갈거야. 가자아! "
소혜의 팔에 장난스럽게 매달린 소녀는 베시시 웃으며 소혜의 팔에 비비적거린다. 분명 소혜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따스함인 것은 분명해보였다. 소녀는 그렇게 소혜의 팔을 꼭 끌어안은체 천천히 병실 밖으로 향했다.
당신의 속삭임에 소혜는 가만히 당신의 눈동자에 어린 빛무리를 바라보았다. 빛이 비쳐들어오는 창문을 등지고 있어도 당신의 눈에는 항상 별이 담겨 있었다. 소혜는 허리를 살며시 숙여 당신과 눈높이를 맞추며, 문득 질문을 던졌다. 옅게 미소를 띄면서, 당신에게만 들리면 좋겠다는 듯한 나직한 질문을.
"채연이에겐 내가 무슨 꽃이면 좋겠니?"
그러나 그것도 잠깐, 당신이 짐가방을 챙겨들고 손을 잡아올 때는 옅은 미소 위로 저도 모르게 흐뭇한 웃음이 덧씌워진다. 왠지 당신의 미소와 닮은, 장난꾸러기같은 미소.
"건강해질 거잖아? 조급해하지 않아도 돼. 아직 초여름이잖니. 놀 수 있는 시간은 많이 남아있어- 그럼, 오늘은 채연이네 집으로 놀러가는 걸로 할까?"
" 으음... 마음 같아서는 이런저런 예쁜 꽃들은 다 가져다 붙여주고 싶은데.. 나는 그다지 똑똑하지 못해서 꽃이름은 잘 몰라. 그치만 소혜의 눈을 보고 있으면 페튜리아가 생각나. "
페튜리아의 꽃말은 '당신과 있으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소녀는 소혜가 알아차릴수도, 모를수도 있겠지만 몇가지 알지 못하는 꽃들 중에서 지금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꽃을 꺼내들곤 베시시 미소를 지어보인다. 지금 이순간에도 소혜와 함께 있으면 병의 아픔이나 우울감 같은 것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게 사라져버렸으니까.
" 응응, 게다가 소혜는 나를 올해만 보고 안 볼건 아니잖아? 나는 오~랫동안 볼 생각이거든! "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하는 소혜에게 잠시 팔을 놓아주더니 팔로 최대한 크게 원을 그려보이며 오랫동안 볼거라고 말한 소녀는 맑은 웃음소리를 내며 다시 소혜의 팔을 끌어안고 병원을 나선다. 지나가며 마주치는 간호사들이나 낯이 익은 노인 환자들에게 넉살좋게, 그리고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며 걸어가면서도 결국 소녀는 소혜의 팔로 돌아와 얌전히 붙어서 병원을 나선다.
" 으으..! 역시 병원에 있는 것보다 밖으로 나오는게 최고네..! 병원 앞인데도 다른 세상 같아..! "
소혜와 함께 길을 걸으며 주변을 두리번 거리던 소녀는 못 참겠다는 듯 귀엽게 발을 구르더니 베시시 웃으며 소혜를 올려다본다. 그저 둘이서 걷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것처럼. 그러다 뭔가 생각이 난 듯 슬쩍 소혜의 허리를 톡톡 건드린다.
" 소혜는 내가 해줬으면 하는거 있어? 요즘 나 도와주느라 바빴잖아.. 건강해져라, 같은건 빼고! 내가 다 들어줄게! 소혜가 해줬으면 하는거! "
나름대로 소혜의 도움을 받은 것을 신경쓰고 있었는지 거리를 걷던 소녀가 소혜를 올려다보며 말을 건낸다.
계속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yy 혐생이 어째 요즘들어 일이 점점 꼬이는 것 같아서 불안불안하긴 했는데 이번 주말을 완전히 통째로 빼앗겨버릴 줄은 몰랐어요... 화요일, 그러니까 내일쯤은 되어야 그나마 여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시 한 번, 죄송해요.
소혜는 짓궂게도 페튜니아의 나쁜 쪽의 꽃말을 끌어와버렸다. 그렇지만, 글쎄 그게 과연 짓궂은 장난기로 꺼낸 농담일까. 왠지 나직이 그 꽃말을 읊조리는 소혜의 얼굴에 서린 미소에는 개구쟁이의 장난기와는 또다른 어떤 음울하고 냉소적인 그림자 같은 것이 흐릿하게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그림자 속에서 소혜의 빨간 눈동자의 빛깔이 마치 핏빛처럼 진득하게 일렁이는 것만 같았다.
"어떤 의미론 어울리는 꽃말일지도." 킥킥킥, 하고 웃은 소혜는 말을 바꾸면서, 고개를 기울여 고쳐 웃어보였다. 물론 그녀는 당신이 무슨 뜻으로 페튜니아의 꽃말을 말했는지 안다. "물론 농담이야. -기뻐, 그렇게 말해줘서. 내가 채연이에게 그런 친구가 되어줄 수 있어서. 앞으로도 오랫동안, 잘 부탁해요."
방금 잠깐 그녀의 얼굴을 스쳐갔던 어두운 기색이 착각이라도 되었던 것처럼, 다시금 지어진 소혜의 상쾌한 미소에는 그늘 한 점 없었다. 병원을 가로지르며 당신과 함께, 당신-그리고 소혜와 안면을 텄던 다른 환자들이나 간호사들에게 같이 인사를 드리고 나서 소혜는 당신과 함께 정문으로 나섰다. 정문 밖의 경치를 둘러보며 탄성을 지르는 당신을 바라보는 소혜의 눈동자에는 깊고 짙은 감회가 담겨 있었다. 햇살마저 들지 않던 그늘 속에서 끝끝내 시들지 않고 희망을 갖고 견디다가, 마침내 햇살 속에서 꼭꼭 품어왔던 아름다운 파란색을 발하는 당신이 그녀에게는-
"...정말이야. 다른 세상 같네."
멍하니 감회에 잠긴 채로 당신의 시선 방향을 따라 주변 경치로 시선을 돌리면서 당신의 말에 맞장구를 치던 소혜는, 허리를 콕콕 찌르는 당신의 손길에 다시 당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싱긋 웃으며 되물었다.
"건강해져라-는 말이 안된다면, 그건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네가 스스로 그렇게 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
네, 천천히, 채연주께서 주고 싶으실 때 주셔요. 우리는 느긋하게 가요. 음... uu 저는 대부분의 꽃말을 구글에서 검색해서 알아보곤 하는데, 페튜니아의 꽃말은 예외로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알던 꽃말과는 달라서.. 저는 오히려 페튜니아에 그런 좋은 꽃말이 있다는 것을 재차 검색해보고서야 알았어요.
이민오고 나서 교우관계가 순탄했더라면 소혜는 확실히 좀더 밝은 아이가 되었겠지만, 밝을 때의 매력이 있고 차분할 때의 매력이 있고... 무엇보다 지금 소혜는 차분한 아이니까,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채연이랑 같이 차분하게 있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게 제 바람이에요. 저는 이제 스탠드 불도 슬슬 끄려던 참이에요... 채연주도 얼른 주무세요. 잘 자고, 내일 봐요.
소녀는 한순간 꽃말을 읊조리는 소혜의 미소가 한없이 차가워져서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평소의 온화함이 가득했던 눈은 온데간데 없이 빨간 눈동자에는 자신이 익숙치 않은 무언가의 감정이 깃들어있는 듯 보였고, 소녀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조심스럽게 소혜를 살폈다. 그래도 이내 금방 미소를 지어보이며 웃음소리를 내는 소혜를 보며 소녀는 안도한 듯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고, 소혜와 마찬가지로 잘 부탁한다며 가볍게 인사를 해보인다. 소녀는 잔뜩 신세를 진 것을 생각하면 앞으로도 잘 해야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 건강해지는건... 소혜가 빌지않아도 괜찮은걸? 그건 내 소원이고, 내가 이룰거니까. 그러니까 소혜는 정말 바라는 일만 말하면 되는거야. 소혜가 원하는 걸로. "
소혜의 팔을 안은 체 걸어가던 소녀는 낭랑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소혜의 팔을 놓고 타다닷하는 소리와 함께 예전처럼 앞으로 몇걸음 달려나가 뒤돌아보며 베시시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어보인다. 한없이 가벼워보이는 소녀의 발걸음은, 소녀의 몸이 말그대로 가벼워진 것 또한 사실이었지만 지금 소녀의 마음이 너무나도 가볍고 편안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 나를 위한 소원은 내가, 소혜를 위한 소원은 소혜가 비는거야. 그니까 뭐든 말해도 괜찮아. 내가 다 들어줄게. 이뤄줄 수 있는거면 다 이뤄줄게. "
멈춰선 소녀는 눈웃음을 지은 체 그리 넓지도 않지만 양팔을 크게 벌리며 소혜를 앞으로 끌어안으려는 듯 천천히 소혜에게로 되돌아왔다. 그러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에게 말하며 그 붉은 눈동자를 맑은 바다같은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괜찮다는 듯이, 모두 괜찮다는 듯이 소혜의 손길은 개구쟁이처럼 웃는 당신을 상냥하게 다독인다. 초여름의 햇살이 쨍-하고 비쳐든다. 소혜는 가방을 뒤적이더니, 살짝 구부러진 널찍한 챙을 하고 있는 파나마 햇을 꺼내서는 당신의 머리에 톡, 하고 비스듬히 얹어주었다. 탈색한 밀짚으로 짜여서 까만 띠가 둘러져 있는 그것은 당신의 얼굴과 어깨에 서늘한 그늘을 부드럽게 드리워내린다.
"이렇게 쓰니 예쁘네."
소혜는 당신의 머리 위에 올라앉은 챙 넓은 밀짚모자의 그늘 아래로 얼굴을 살며시 들이밀고는 당신의 코앞에서 빙긋이 웃어보인다. 사라락 하고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소혜의 냄새를 실어다주기라도 한 걸까, 그 밀짚모자에선 왠지 그녀의 냄새가 났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당신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여름이 오면 밀짚모자를 예쁘게 쓰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하얀 원피스를 입어달라고 하려 했는데, 마침 입고 있으니 그건 됐고."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당신의 가벼워진 몸을 부드럽게 폭 하고 품어주었다. 병과 싸우는 동안 당신도 조금 바뀐 것이 있겠고, 소혜도 조금 바뀐 것이 있겠지만, 소혜의 품이 당신을 푹신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예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당신을 품 안에 기대어놓은 채로, 빨간 꽃잎같기도- 비스듬히 기울어내려가는 석양같기도 한 눈을 소혜는 당신과 지긋이 맞추어두고는 대답했다.
상냥하게 다독이는 소혜의 말에, 소녀는 잘 모르겠다는 듯 동글동글한 눈을 깜빡이며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머리에 내려앉는 부드러운 소혜의 손길에 두 눈을 곱게 접어 베시시 웃어보인다. 자신은 공부도 못하고 머리도 그다지 좋지 않지만 소혜는 자신과 다르게 똑똑하고 똑부러지는 아이였으니까, 소혜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하고 생각하고 마는 소녀였다. 좀 더 자신이 노력하면 되는 일이였으니까. 그러다 가방을 뒤적이는 소혜의 모습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소혜의 손길이 떠나간 머리를 한 손으로 매만진다. 못내 소혜의 온기가 아쉬운 듯 보였다.
" 그, 그런가아~ 소혜가 가져다줘서 그런가봐~ "
햇빛을 막아주는 널찍한 챙의 모자가 처음엔 익숙치 않은 듯 갸웃거리던 소녀는 시원한 기분이 들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예쁘다고 말해주는 소혜의 말에 쑥스러운 듯 몸을 꼬며 답한다. 이래저래 자신에게 해주는 칭찬은 언제고 익숙해질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역시 칭찬을 듣는건 기분이 좋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 소녀였다. 게다가 모자에서는 은은히 자신이 좋아하는 소혜의 향이 물씬 풍겨서 소혜와 같은 향을 가지게 되는게 아닐까 하는 자그마한 상상도 해버리는 것은 덤이었다. 그렇게 눈을 올려 모자의 챙을 살피던 소녀는 소혜가 자신을 품어주자 이제는 자연스레 소혜의 품에서 어리광을 부리듯 얼굴을 부비적댄다. 부비적댈수록 강렬해지는 소혜의 향은 소녀를 포근하게 감싸안아 마치 구름에 떠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줬다.
" 응! 같이 찾아서 내가 들어줄게. 뭐든 말이야! "
소혜의 붉은 눈을 마주한 소녀의 푸른 눈동자는 약해진 상태에서도 그 맑은빛을 잃지 않은체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분명 해낼 수 없을 일도 해낼 수 있을 것만 같도록. 그러다 택시가 왔다는 말에 소녀는 정답이라는 듯 고개를 힘껏 끄덕이더니 소혜의 손에 깍지를 끼곤 앞장서서 택시를 향해 걷기 시작한다. 손가락 사이로 스며드는 소혜의 체온은 소녀가 마냥 강해지는 것만 같은 느낌을 주었기에 가벼울 발걸음이 한껏 힘을 머금고 있었다. 베시시 짓고 있는 소녀의 미소는 떨어질 줄 몰랐고 그것은 택시를 타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힘찬 인사말과 함께 택시에 탄 소녀는 택시에서도 여전히 깍지 낀 손을 풀지 않은체 집 근처로 가달라고 했고 택시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흥흥흥~ 아주 작은 명채연~ 작은 명채연이 나간다~ "
한껏 들뜬 기분을 보여주듯 학교를 짧은 다리로 돌아다니며 기분좋게 흥얼거리던 콧노래를 오랜만에 흥얼거리며 소녀는 고개를 좌우로 기분 좋게 움직인다. 얇은 다리도 리듬을 타듯 움직이고 있었다. 노래를 흥얼거리던 소녀는 슬쩍 고개를 돌려선 소혜를 바라본다.
입원해있는 동안 몇번이나 와준 소혜에게도 여전히 이것저것 묻고 싶은게 많은것인지, 아니면 그저 학교에 가고 싶어서 괜스레 학교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몰랐지만 소녀는 엉뚱한 물음을 던져두곤 재밌다는 듯 손을 잡고 있지 않은 빈손으로 입을 살며시 가린체 '히히히~' 하는 소악마의 웃음을 흉내낸다. 영 사악한 느낌은 하나도 살지 않고, 개구쟁이 같은 느낌만 있었지만.
손길에 담긴 온기에 대한 당신의 아쉬움을 알아채지 못한 걸까, 소혜는 자기 머리를 매만지는 당신의 모습을 보고도 뭔가 눈치채지 못했는지 당신에게 모자를 씌워줄 뿐이다. 야속하게도 소혜는 이런 부분에서 유독 둔했다. 둔한 것일까, 무심한 것일까. 그렇지만 소혜는 당신이 다가오는 것에는 어떤 거부도 없이 부드러운 포용으로 그것을 환영했다. 손길 대신 품에 기대어서 그녀의 온기와 향기를 재차 확인하는 동안, 소혜는 당신을 다독이듯 품어주는 것으로 당신에 대한 애정을 표시했다.
"모자 비뚤어진다, 얘..."
하고 모자를 고져씌워주고 나서야, 소혜는 당신을 부드러운 손길로 이끌어 택시에 태웠다. 당신이 깍지를 껴올 때 그녀는 곱게 구부러져 있던 눈매를 약간 크게 뜨면서 문득 손을 내려다보았지만,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살갑게 미소지으면서 당신의 손을 꼭 붙들어주었다. 그 손은 당신에게 한없이 따뜻했다. "교통비는 너희 어머니께서 맡겨주셨으니 네가 따로 낼 필요 없어." 택시 안에서도 당신의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소혜는 덧붙였다. 주변 풍경이 차창을 스쳐지나간다. 몇 주 전만 해도 낯설었던- 이제 제법 낯익은 풍경들이다.
"그 노래도 정말 오랜만에 듣네-" 하고 키들대던 소혜는 당신의 말에 당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별일이라니- 아직 딱히 큰 사건은 없지? 기말고사가 슬슬 코앞으로 다가와서 애들이 조금씩 미쳐가는 것만 빼면. 후배들?"
꽤나 장난스레 웃으며 당신의 질문에 장단을 맞추어주던 소혜의 눈이 왠지 모르게 얄궂게 가늘어지는 것 같았다. "없지는 않은데- 궁금해?" 잠깐 당신을 새빨간 눈동자로 빤히 바라보던 소혜는, 얼마 안 가 다시 평소의 미소를 되돌리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 원예부 애들이야 쫓아다닐 만한 선배가 나밖에 없긴 하지? 음~ 이번에 시청에서 주관하는 원예 경진대회가 있었는데, 원예부 아이들 중에 내가 가르쳐준 1학년 아이들 셋이 나란히 입상했고, 화원에는 원추리 꽃이 예쁘게 피었어."
엄청 늦었네요. 요 며칠간 추가업무가 전부 다 밤늦게 끝나서... 끝나자마자 집에 돌아와서는 씻지도 못하고 일단 침대에 눕고 생각하자- 하고 침대에 자빠진 다음에 소식이라도 남겨야지 하고 핸드폰 집어들기도 전에 잠들어버리는 나날들의 연속이었어요... YY 채연주랑 좀더 같이 오래 있어드리고 싶은데, 하다못해 요즘 엄청 바빴다고 말씀이라도 드리고 싶었는데. 많이 늦었죠. 미안해요.
19시간을 자고 일어났더니 채연이가 아플 때 이랬으려나, 하는 느낌으로 멍하고 감각이 흐릿하고 둔해서 몸을 가누는 게 평소보다 어렵네요uu... 그래도 죽 든든하게 끓여먹고, 비타민제를 좀 챙겨먹으니까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요. 사실 몬스터에너지를 한 캔 원샷해 버리면 제 기운을 찾을 것 같긴 하지만, 아무래도 그러면 나쁜 생활패턴이 몸에 배어버릴 것 같고... 답레는 채연주께서 여유되실 때 언제든지 느긋이 주셔도 좋아요.
손길이 떠난 소녀의 아쉬움은 다독이듯 품어주는 소혜 덕분에 금방 눈녹듯 사라져버렸다. 소녀는 욕심이 많지 않은 아이였으니까. 그저 자신에게 건내져 오는 호의를 기분좋게, 그리고 감사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아이였다. 물론 자신이 배로 돌려주려는 점은 누군가에겐 고쳐야한다고 혼내야 할 부분이겠지만, 소녀에게만큼은 그것이 당연한 일이나 다름없었다.
" 에헤헤, 미안미안. "
모자가 삐뚤어지는 것 정도는 봐달라는 듯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꾸벅 사과를 해보인 소녀는 그대로 소혜와 택시에 올라탔다. 깍지를 끼자 눈이 커지는 소혜를 보지는 못한 듯 그저 인사성 좋게 택시기사와 인사를 나누고 목적지를 말할 뿐이었다. 게다가 자연스레 손을 붙들어주는 소혜의 행동에 소녀는 아마도 말해주지 않는한 모를 것은 분명했다. 덧붙이는 소혜의 말에는 "엄마 빨라...!" 하는 중얼거림과 함께 동그랗게 커진 눈을 하는 소녀였지만,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는지 자연스레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소녀였다.
" 기..기말고사....! 나, 아무래도 기말고사가 끝날때까지는 집에서 휴식을 취해야 할 것 같은데에.. "
생각하지도 못했던 시험 소식에 숨을 들이키는 소리를 낸 소년이 떨리는 숨소리를 내며 뱉어내더니 어색하게 웃고는 슬그머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소녀는 학교가 무척이나 좋았고 즐거웠지만, 단 한가지 피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시험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공부에는 약하고, 관심도 적었던 소녀였기에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는 했지만.
" ... 뭐야, 역시 소혜는 대단하네...! 아니, 후배들도 대단하지만 다 소혜가 알려줘서 가능했던거잖아! "
장난스럽게 후배들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웃어보이는 소혜의 말에 소녀의 푸른 눈동자가 반짝이더니 자그마한 두 주먹을 꼭 쥔 체 소혜를 돌아보며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오랜만에 큰소리를 내서 그런지, 말을 하고 나선 콜록콜록 기침을 하긴 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눈을 초롱초롱하게 한 체 소혜를 바라본다.
" 우리 소혜의 대단함을 학교 사람들이 다 알아버렸으니... 소혜가 학교의 유명인사가 되는건 팥죽 먹기야. 암. "
소녀는 이내 팔짱을 끼곤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며 어딘가 오묘하게 틀린 말을 던진다. 그것을 모르는지 소녀는 태연하게 걱정말라는 듯 소혜의 손을 다시 꼭 잡아준다. 마치 자기가 옆에서 도와주겠다는 것처럼.
"의사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거야? 그렇다면 거기에 더 뭐라 말을 얹지는 않을게. 결시생을 위한 2차시험도-아마 방학이 시작하기 전에- 있으니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 거야."
소혜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당신의 잔꾀에 쐐기를 꽂았다. 이럴 때는 쓸데없이 촘촘한 시스템이었다. "오히려 2차시험은 좀 쉽게 출제되는 경향이 있다고 하니까, 성적 끌어올리기 좋을지도. 내가 충분히 도와줄게." 호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개중에는 쓰디쓴 약을 권하는 것과 같은, 분명 도움은 되지만 받아들이기에는 고통스러운 호의도 있다. 그렇지만 받아들이기 고통스러운 것들 중에는 그 고통에 따른 톡톡한 보상을 해주는 것들도 있다. 켁켁 기침하는 당신의 입에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뽑아들어서 대어주며, 소혜는 당신이 숨을 고르기를 기다렸다가 말을 이어갔다.
"글쎄- 학교 내에서 유명인사가 된다고 딱히 뭔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난 그런 건 딱히 신경쓰지 않아."
소혜는 창밖으로 잠깐 힐끔 시선을 돌렸다. 주변의 풍경은 서서히 좀더 낯익은 모습으로... 당신의 동네의 모습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난 유명하다거나 그런 건 잘 안 맞을 것 같거든... 그럴 팔자도 아니고, 그럴 만한 재주도 없고, 설령 그런 게 있어서 유명해진다고 해도 그 유명세라거나 하는 걸 쉽게 받아들이지는 못할 것 같고. 나는 말야, 격렬한 스릴이나 짜릿한 기쁨... 그 반대로 깊은 절망이나 밤장을 설칠 걱정 같은 것이 없는, 기복이 적은 평온한 인생을 살고 싶어."
창 밖으로 돌아갔던 소혜의 시선은 천천히 당신에게로 되돌아왔다. 소혜는 방긋이 웃어 보였다. 소혜는 아직까지도 당신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그런 평온한 삶에 좋은 친구가 함께해 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어느덧, 택시는 매우 낯익은 풍경 앞에 멈춰섰다. 다 왔습니다, 하는 택시기사의 말이 들렸다. 소혜는 비어있는 쪽 손으로 품을 뒤적여서는 지갑을 꺼내서, 지폐 두어 장을 꺼내 택시 기사님께 건네어주고 거스름돈을 받았다.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꾀병에 답하는 소혜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웅얼거림으로 답하는 소녀였다. 추가시험이 있을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고-의외로 운좋게 여태껏 아슬아슬하게 통과해서 치뤄본 적이 없었다- 거기에 소혜의 부드러운 미소까지 더해져서 잔꾀를 부릴래야 부릴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자신의 다가올 미래를 받아드리기로 마음먹은 소녀는 아주 잠시 먼곳을 바라보며 울상을 지어보인다. 소녀에겐 꽤나 공부가 어려운 부분인 듯 했다.
" 소혜는 그렇구나. 가끔 주목을 받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있었거든..! 그래서 소혜도 살짝은 그럴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네. 왠지 소혜라면 그럴 것 같긴 했지만 말이야. "
잠시 창 밖을 향했던 소혜의 시선이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오고, 그 예쁜 미소를 다시금 지어보이자 소녀는 마주 웃어보이며 슬쩍 몸을 움직여 소혜에게 기대어 앉았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달큰한 소혜의 향이 짙어지자 입꼬리를 조금 더 끌어올리며 기분 좋은 콧소리를 내는 것은 덤이었다. 그리곤 조용히 이어진 마지막 말에는 무어라 말을 덧붙이는 대신 그저 소혜의 손을 꼭 잡아주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무어라 부족한 말솜씨로 말하는 것보다 그게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 감사합니다~ 안전운전 하세요~"
소혜가 내리자고 하자 기사에게 낭랑하게 인사를 하고 먼저 문을 열고 내린 소녀는 돌아서선 소혜가 내리기를 기다린다. 그러면서도 슬쩍 슬쩍 고개를 돌려 집을 바라보는 것은 분명 소녀도 집으로 돌아오고 싶었던 마음이 한가득이었음은 분명했다. 소혜가 내리고 택시가 떠나갈 즈음엔 먼저 가녀린 다리를 서둘러 움직여 현관문으로 향한 소녀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열쇠를 찾는다.
" 얼른 들어가서 쉬자, 소혜야~ 집, 집, 오랜만에 집이다~ "
기분이 좋은 듯 노래를 흥얼거리며 열쇠를 넣어 문을 연 소녀는 문을 열고는 먼저 몇걸음 들어가선 돌아선다. 그리곤 이어서 걸어올 소혜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등뒤로 손을 모은 체 입을 연다.
" 어서와, 소혜야~ 우리집에 온 걸 환영해."
이젠 다시 자신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소혜에게 보여주고 싶은 듯 낭랑한 목소리로 말한 소녀는 장난스럽게 윙크를 해보인다.
갱신해둘게요. 답레로 갱신하고 싶었지만... 집에 오면서 진짜 올해들어 처음 맞아보는 수준의 장대비를 맞고 왔더니 몸살기운이 확 올라오네요. 임시방편으로 따뜻한 국 한 그릇 끓여먹고 누워 있긴 한데, 아무래도 답레를 드리긴 힘들 것 같아요. 푹 쉬고, 얼른 나아서 답레 드릴 수 있도록 할게요. 채연주는 빗속에 다닐 일 없이 뽀송뽀송하게 계셨나요?
정작 요 근래 당신에게 있어 가장 무리하는 일은 소혜와 함께 공부하는 일이 아닌가 싶지만. 소혜 역시 그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당신이 문제를 잘 풀면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종종 머리를 쓰다듬어주거나 간식을 입에 까넣어주는 식으로 능숙하게 얼러주면서 당신이 많이 힘들어보이면 한동안 펜을 내려놓고 서로 기대어앉아서는 잠깐 낮잠을 자는 식으로 완급조절을 하곤 했다.
소혜는 당신의 어깨를 다독이며, 당신을 자신의 품에 기대어뉘어 놓았다. 당신의 집까지 얼마 남지 않은 동안, 그녀는 당신이 마음껏 자신의 품에 기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동안 병상에 누워 있던 만큼 외로워했을 당신에게 조금의 보상이라도 되면 좋겠다는 듯이.
소혜는 먼저 차에서 내려 당신의 손을 잡아줄 심산으로 몸을 일으켰으나, 당신이 생각보다 민첩하게 차에서 내리자 조금 놀란 듯 눈을 치떴다. 그러나 이내 그 표정은 안도감이 담긴 미소로 바뀌었다. 생각보다도 당신이 훨씬 건강해져 있다는 사실이 안도감으로 다가온 모양이다. 그녀는 이내 거스름돈을 가방에 챙겨넣고는 부드럽게 다리를 돌려서 차에서 내렸다. 부웅, 하고 택시는 떠나갔다.
이제서야, 무언가 제자리로 돌아간 것 같아.
어느덧 당신의 집 앞에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당신을 바라보며, 소혜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 당신도 느끼고 있을 그런 생각을. 그리곤 그녀는 다시 방긋 웃으며 당신의 집 현관으로, 그 곳에 서 있는 당신에게로 다가왔다.
"그러면,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맞이해줘서 고마워요, 하고 소혜는 활짝 웃으며, 윙크를 날리는 당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소혜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방긋방긋 웃던 소녀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고개를 휙휙 저으며 말하더니 먼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곤 소혜를 돌아보며 자신의 어머니 흉내를 내며 '채연아, 소혜한테도 엄마가 집열쇠를 맡겨둘까?' 하고 말하더니 꺄르르 웃기 시작한다. 그만큼 일을 하느라 바쁜 소녀의 어머니도, 그리고 소녀도 옆에서 보듬어주는 소혜를 믿고 있다는 증거나 다름없을 것이다.
" 내 방으로 가서 쉴까? 티비를 보기엔 마땅히 재밌는 걸 할 시간도 아니고... 나는 그냥 소혜랑 이야기하고 푹 쉬는게 더 재밌을 것 같거든! "
아주 조금 앞장서서 집안으로 들어가던 소녀는 이내 자신을 따라올 소혜를 돌아보며 어떻냐는 듯 물음을 던진다. 기왕이면 소혜가 하고 싶은 것이 있거나 한 건 아닌지 살피려는 듯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갸웃거리며 소혜를 바라본다. 고개를 갸웃거릴 때마다 머릿결 좋은 푸른빛 머리카락이 소녀의 새하얀 어깨에 흘러내렸다. 물음을 던져두곤 답을 아주 잠시 기다리던 소녀는 뭔가 재밌는 생각이 났다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다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자신의 방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 소혜야, 나 잡아봐라~ "
예전만큼 잽싸거나 빠르진 않았지만 해맑게 방으로 달려가 어머니가 정돈해두어 말끔하게 정리된 자신의 침대 위로 뛰어든다. 가벼운 소녀가 뛰어들어서 그런지 삐걱거리는 소리조차 나지않은 침대 위에서 소녀는 얼굴만 배게에 파묻은 체 새하얀 다리를 파닥거린다. 마치 그러면 자신이 뒤쫒아올 소혜에게 전혀 보이지 않을 것처럼.
그러나 당신이 당신의 어머니를 흉내내며 던진 말이 소혜에게는 정말로 뜻밖이었는지,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곤 깜빡였다.
"그- 그 정도로 믿어주시는 줄은 몰랐는데. 그러지 않아도 괜찮을 거야, 응."
예상하던 것보다 더 큰 신뢰를 얻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것인지, 소혜는 홍조가 옅게 낀 볼에 손부채질을 하며 시선을 잠시 옆으로 돌렸다. '어차피 집에 네가 있거나 너랑 같이 오게 될 테니까, 응...' 하고 덧붙이면서. 그러느라 소혜는 당신의 제안에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렇게 하자, 네 짐들도 원위치시켜야 되고. 방 청소는 어제 어머니께서 해두셨다고는 들었지만- 채연아?" 그 때문에 갑작스런 당신의 돌발행동에도 순발력 있게 대응하지 못했고. 사실 소혜는 발이 느린 편이었으므로, 당신이 아무리 허약해져 있다고 해도 속도를 내서 달리면 소혜로서는 당신을 쉽게 따라잡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의 뒤를 따라 방으로 따라온 소혜는, 얼굴만 베개에 파묻은 채로 흡사 칠면조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당신을 보고 쿡쿡대고 웃었다. 그리곤 능청스레 "채연이가 어디 갔을까- 분명 방으로 도망치는 걸 봤는데." 하고 장난스레 장단을 맞추며 방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시늉을 시작했다. 그러다 장난기가 더 동한 소혜는, 짐짓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다.
얼굴만 베게에 파묻은 체 파닥거리던 소녀는 방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에, 숨을 죽인 체로 자신을 건드릴 소혜를 기다리며 웃고 있었다. 그러다 방을 둘러보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혼잣말에 화들짝 놀라선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파바박 하는 소리와 함께 배게에서 고개를 든 소녀는 이내 말도 안된다는 표정으로 소혜를 보며 소리를 내더니 후다닥 몸을 일으켜 침대를 뛰어내려와 소혜의 품으로 뛰어든다.
" 뭐..뭐야아..! 놀다 가는거 아니었어!?!? 시험이 곧 있긴 하지만 오늘은 나랑 놀다가 가는거 아니었어!?"
동그랗게 커진 눈에는 너무하다는 듯, 당황스러움이 깃든 체로 소혜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소녀의 작은 입은 당황스러움에 달싹거리다 간신히 말을 더듬으며 소혜의 말에 답을 했고, 이내 못 보내주겠다는 듯 소혜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체 휙휙 고개를 저어보일 뿐이었다. 왠지, 병원에 입원하기 전과는 다르게 어리광이 생겨버린 듯한 소녀였지만 본인은 그런 줄 모르는 듯 그저 연신 소혜를 붙잡고 고개를 저어보일 뿐이었다.
" 내, 내가 재미없나..!? 소혜가 힘들게 했나?! 그러면 미안해!"
혼자서 상상의 나래라도 펼치는건지, 드라마 속의 이별장면 마냥 소혜를 꼬옥 잡고 매달리는 소녀였다. 이래저래 소혜가 그냥 돌아가는 것이 엄청나게 서운하고 싫은 듯 했다. 어쩌면 혼자 있는게 너무나도 싫은 것일지도 몰랐다. 이미 질릴 정도로 병원에 홀로 있었으니까.
당신이 이렇게 격렬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기에, 냉큼 품으로 달려드는 당신을 소혜는 민첩하게 받지 못하고 한 걸음쯤 뒤로 떠밀렸다. 그렇지만 그녀는 이내 무게균형을 잡고 당신을 폭 받아안았다. 항상 그렇듯이 당신을 밀어내거나 하지 않고 편하게. 언제나처럼 폭신한 온기가 안심하라는 듯이 당신을 휘감아온다.
"정말 안기는 걸 좋아하네, 채연이는."
왜인지, 전보다도 좀더 어리광이 늘어버린 것 같은 당신의 모습이었지만 소혜는 딱히 그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 옷자락을 꼭 붙들고 있는 당신을 짓궂게 웃으며 내려다볼 뿐이다.
"내가 좀더 있어주면 좋겠니?"
무언가를 확인하기라도 하듯, 나직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고요하게 질문을 던지고는, 소혜는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당신의 머리 위로 손을 떨어뜨려서는 당신의 머리를 달래듯 살며시 삭삭 쓸어준다.
"걱정 마.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장난이었으니까. 어머니가 오실 때까진 같이 있어줄게."
너는 항상, 모두를 위해 밝게 빛나려고 애쓰면서 그 뒤에서는 외롭게 떨고 있구나. 걱정 말아. 내가 같이 있어줄게.
언제부터 그랬던걸까. 병원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문득 소녀에게 두려움이 찾아오곤 했다. 자신이 이렇게 병실에 있는 동안에도 창 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쉴세없이 거리를 오가고, 복도를 오갔다. 같은 사람이 보이기도 하고, 처음 보는 사람이 보이기도 했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자신은 병실 안에 멈춰있는 반면, 밖의 사람들은 쉴 틈 없이 흘러간다. 자신은 정체되고, 그들은 흘러간다. 그것은 자신이 모두에게서 서서히 잊혀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소녀가 조금이나마 느끼게 만들었다.
"응, 조금만 더.. 아니 사실은 좀 더 오래. 많이.. "
그래도 소혜나 어머니가 찾아올 때면 소녀는 두려움을 밀어낼 수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모두가 돌아가고 나서는 언제나 소녀는 혼자였다. 그래서 소혜와 이렇게 있을 수 있도록 밖으로 나온 다음에는 왠지 모르게 더욱 더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혼자는 싫어. 소녀는 욕심이란 감정을 끌어올려 소혜를 붙잡았다. 소혜의 옷을 자그마한 손으로 꼬옥 잡은체 고요하게 울려퍼지는 소혜의 물음에 답했다. 소녀가 걱정 가득한 눈으로 올려다보다 이내 머리에 내려앉는 손길에 안도한 듯 자그맣게 숨을 뱉어낸다.
" 으응.. 다행이다... 너무 놀랐어.. 소혜도 짖궃다니까 정말.."
꼬옥 쥐고 있던 손을 풀어낸 소녀는 이내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다 소혜를 강하게 끌어안는다.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언제나 자신의 옆에 있어달라는 것처럼. 그러다 문득 부끄러움도 들었는지 파묻었던 얼굴을 빼꼼 들어서 소혜를 바라보았다.
" 나 되게 못난 것 같아. 그치? 하여튼.. 애도 아닌데.. 헤헤"
고개를 빼꼼 들어 소혜를 보며 웅얼거리듯 말한 소녀는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힌다. 그럼에도 눈은 피하지 않은 체로 또렷하게 소혜의 붉은 눈동자를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