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오래 흘렀다. 그다지 오래랄 것도 없지만 하루하루 위태로운 삶을 살았던 그에게 있어 한 손을 모두 접어도 다른 손이 필요할 정도면 제법 오랜 시간이다. 어느덧 여름 장미는 다섯 번을 흐드러지게 피었다 졌고, 새파랗던 이파리는 수줍은 사춘기 소년 소녀처럼 낙엽 붉혀졌으며, 늙은 노인처럼 주름 자글자글해져 땅에 귀속된 뒤, 새 생명 피어나듯 낙상홍 새빨갛게 영글고 눈 소복하게 쌓이는 겨울이 찾아왔다.
다시 발 디딘 원내는 방학 기간임에도 여전히 소란스럽다. 깃펜 떨어지는 것도 재밌을 시기인지라 별것도 아닌 수수한 대화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피어오르고, 이따금씩 큰 소리에 뒤돌아 보면 파란 노리개 찬 학생이 우당탕 소리 내며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달라진 점 없어 보이나 실상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전에 보이지 않던 얼굴이 늘어난 것도 있지만, 마주했을 때 공손히 인사하던 익숙한 얼굴과 어깨 나란히 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 그렇다. 몇 년 전만 해도 이게 이해되지 않느니, 저게 어렵니 하며 하나하나 질문하던 자는 이제 그와 같은 주제를 두고 연구를 하고 있다. 복도를 지나치던 학생이 불현듯 멈춰 서더니 그를 알아보고 소리 낸다. "선배." 하며 주의를 끌자 그는 고개를 돌린다. 그 또한 훌쩍 자라 영근 외모에서 어린 소녀의 편린을 마주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학생은 짧게 잘린 금발을 찰랑이듯 고개를 숙인다.
"그간 잘 지내셨어요?" "나름. 자네는 이제 졸업반이 되겠군." "네. 그간 선배가 주신 책으로 열심히 공부했어요." "어려운 점은 없었나?" "뒤로 갈수록 글씨가 개발새발인 점만 빼면요. 대체 마지막에 적어둔 건 아바다 케다브라인가요, 아베디아 케다브리아인가요?" "직접 맞아보면 뭐가 맞는지 알겠지." "여전하셔라."
학생은 우아하게 미소 짓는다. 한때 선배 바라기에 천덕꾸러기에 불과했던 금발의 소녀는 제 과거 훌훌 털어 물씬 자라 여염집 처녀처럼 귀하게 자란 모습을 그대로 내보였다. 그럼에도 눈동자는 절대 상냥하지 않았으니, 사신의 이름을 이어 받음이 틀림없다. 그가 남겨준 책이 어려운 것은 없었는지, 원내는 어땠는지, 학생은 어땠는지. 간단한 담소를 뒤로 능글맞게 "그래서 우리 선배, 혼인은 대체 언제 하신대요?" 하는 말에 명쾌하게 딱밤을 놓은 뒤로 더 걷다 보면 냄비 부글거리며 끓는 소리와 노래하는 약초 소리를 지나게 된다. 그가 꿈을 키우게 된 소리를 지나면 작은 구석에 나무 문이 자리한다. 더 이상 앙상하지 않고 곧게 뻗어난 손가락으로 문잡아 돌려 열면 기름칠 열심히 했는지 별다른 소음이나 힘을 줄 필요도 없이 매끄럽게 열린다. 찬 공기 술술 내밀던 복도와 달리 따스한 공기로 얼굴부터 천천히 감쌌다. 문지방을 밟고 넘어가 달칵 소리 내며 문 닫는다.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책상 위에는 전임 교수가 남겨둔 수업에 필요한 자료가 몇 쌓여있고, 그 위 벽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일정을 적어둔 메모가 붙어있다. 소파는 푹신하고, 구석엔 그가 직접 들여놓은 새를 위한 횃대가 있다. 고개 돌려 바라본 서재에는 책이 가득하지만 관리 잘 되는지 묵은내 하나 나지 않는다. 그의 연구실이다. 부임된 이후 얻게 된 오랜 건물 한구석은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됐다. 한때, 그가 학생일 적엔 저기 창 너머 검은 노리개 차고 춥다 노래를 부르며 분주하게 복도를 지나치는 학생 무리가 가는 길 그대로 따라가야 나오는 너른 기숙사에서 지냈다. 그가 살아온 기숙사는 사시사철 눈이 쌓여있고 겨울바람을 마주했지만 지금 저기 지나가는 학생 무리가 어서 도착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이해가 갈 정도로 따뜻했다. 그러나 그에게 그 온기가 안식처가 되진 못했다.
불과 몇 년 전이지만 그가 살던 세계는 혓바닥처럼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때때로 찾아오는 북풍은 죽음을 목전에 마주하는 것처럼 시렸고, 언제든 찾아올 위협을 시사하듯 매서웠다. 그 당시엔 수많은 죽음의 위협을 받았고, 죽지 않고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이 졸업보다 중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좋지 않았던 몸 상태에서 신경을 몇 배는 더 곤두세우고 살았고, 방 안의 포근한 온기마저 믿을 수 없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곤 했다. 날카로운 신경으로 하루하루 살아오던 세상은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변했다. 그리고 더 이상 그 누구도 죽지 않는다. 원내 사람들이 위협을 받고 살지 않는다. 아이들은 죽음의 위협을 마주해 뜬 눈으로 밤 지새우지 않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아무런 문제 없이 발 디딜 수 있다. 변한 세상이나 그 격동의 여파는 절대 작지 않다. 누군가 행복하다면 그만큼의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보이지 않는 평화를 이룩하기 전까지 발버둥 친 사람의 희생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를 비롯한 이전 세대의 사람이다.
격동한 세상은 그의 삶에 여러 생채기를 남겼다. 사람들은 그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른다. 알아도 그 사람의 인생에 하등 도움 될 바가 없다. 그저 생겨난 평화를 누리고, 평온하게 앞길을 향해 걷고, 새로 들이닥칠 어둠을 막아낸다. 밝은 사회를 위한 이면에 신경 쓰면 모든 것이 무너지기 때문에. 여전히 그는 드물지만 악몽을 꾸곤 한다. 짐승이 달려들어 한 여성을 물어뜯는 꿈이다. 그가 발로 걷어찬 여성은 뒤로 넘어간다. 이윽고 뼈를 씹는 소리와 함께 비명소리 하나 없이 죽는다. 옆에서 누군가 날카롭게 웃는 소리가 들리고, 그는 그 끔찍한 죽음을 눈으로 담는다. 뒤에선 이미 고인이 된 누군가 그를 멍하니 쳐다보며 대체 뭘 가르쳤냐 나무라는 목소리를 끝으로 그는 꿈에서 깬다.
그것만으로도 끔찍하지만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꿈은 관을 열었을 때 아무것도 없는 꿈이다. 가장 좋은 나무로 만들고, 정성스레 칠한 관. 뚜껑에는 홍 마노, 하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석 자를 적어두었는데 막상 열어보면 머리카락 한올 없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것도 끔찍하지만 시체가 온데간데없으니 장의사의 일을 겸하던 그에게 있어 가장 끔찍한 꿈이다. 그는 꿈에서 시간의 흐름대로 천천히 늙어간다. 힘없이 주저앉아 아무것도 없는 관 안을 더듬고 그 이름을 불러도 주변에도, 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그와 텅 빈 관만이 암흑 속에서 천천히 죽어가고, 그 관 안에는 있어야 할 시체 대신 그가 자리 잡는다. 그리고 꿈에서 깨면, 그는 살아있다.
두 꿈을 꾸고 나면 하루를 공친다. 식사는 누군가의 살점을 뜯는 것 같이 역하고, 깃펜은 손가락처럼 보여 집어던질 때가 있으며, 지팡이는 피범벅인 것처럼 보여 열심히 닦다 보면 그의 손바닥이 헤져 한때 그가 평화를 위해 찔렀던 여성이 아닌 자신의 피로만 범벅이 되어있었다. 수업을 진행하려 해도 귀에서 뼈 씹는 소리가 윙윙 울린다. 그럼에도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는 죽어 이전 세대에 머무르지 않고 유동적인 세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가 무엇보다 귀히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도 이 유동적인 세계에서 천천히 변해가며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변화에서 자기 자신을 유지해야 함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무너지지 않는다. 그는 혼자가 아니고,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이 아니며, 더는 자신과 같은 비극을 맞지 않도록 바른길로 학생을 인도해야 했다.
그가 교수가 된 이유도 그것이다. 횃대에 자리 잡은 까마귀가 길게 울었다. 윤기나는 깃털 달린 날개 멋들게 펼쳐 날아오더니 그의 어깨에 앉는다. 그는 늘 그랬듯, 앞으로도 그렇듯, 그 어느 순간에도 달라지지 않을 고귀한 사랑을 한번 돌아보고 손을 뻗었다. 그는 윤기나는 검은 머리카락을 한갈래로 낮게 묶었고, 둥근 안경 사이로 색 미묘하게 다른 눈동자를 유순하게 접어 웃었다. 날카롭고 신경적이던 어린 학생은 어느새 멋들어지게 자라 차분한 교수가 되었다. 세상이 변했고, 그도 변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는다. 오로지 사랑하는 자 위해, 둘 사이에 아이는 없으나 자식처럼 여기는 이 세계를 위해.
"드디어 취임식이고, 입학식이구나, 내 드디어 교수가 되었어. 아가, 부디 이 영광스러운 자리 같이 가지 않으련. 이번엔 부디 무지개를 토하거나 색이 변하지 않도록 내 용써보마."
그의 왼손 약지에 새 반지가 반짝였다. 마노석으로 귀히 만든 반지는 영원토록 함께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