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물이 스민 상처가 쓰렸다. 멍 자국이 욱신거렸으며 코가 아픈 건지 머리가 아픈 건지 분간도 되지 않을 만큼 어질거리는 상태에서도 하늘을 보기 위해 몸을 뒤집었다. 빗방울이 얼굴에 부딪혀와 눈을 뜰 수 없었고 뜨뜻미지근하게 들러붙어 있는 코피가 닦여나갔다. 귓구멍에 물이 차는 걸 느끼며 컴컴한 밤하늘을 보려고 애썼다. 결국은 검은색이었다. 검은색과 붉은색, 그리고 흰색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그렇게 버텼는데 자신은 죽을 때까지 검은색에 갇혀있다. 그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탈출해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아 또다시 마음이 삭막해졌다.
'내가 아빠를 죽여서 이렇게 된 걸까.'
죽이지 말걸 그랬다고 조금 후회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냥 그대로 아빠 손에 죽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살기 위해 죽였고, 달아났으며, 끔찍한 생애를 보냈다. 정말이지 시궁창 같은 인생이었다. 어찌나 역겨운 삶이었는지 주마등조차 보이지 않았기에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그래도 그 붉은 등 아래는 아니니까 됐다. 죽기 전에 푸른 하늘이 보고 싶다는 소원조차 자신에게는 과분했었던 것 같다며 체념하기로 했다. 고통과 추위를 오롯이 느끼며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중에 인기척도 없이 목소리가 들렸다.
"억울하단 표정인데"
살풋 눈을 떴다. 또 검은색이다. 검은색 사람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죽음을 미루게 해줄 수는 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자신은 이제 죽을 텐데. 더 살아가기엔 너무 지쳐버렸다.
"...하늘이"
그런데도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었던 이유는 역시 한 번 더 푸른 하늘이 보고 싶어서였을까.
누군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노래를 흥얼거린다. 자장 자장, 침대 모서리에 눕지 마라. 나쁜 늑대가 와서 널 잡아간단다. 잠기운에 칭얼거리며 손을 내밀면 웃으며 마주 잡아오는 손가락이 있다. 우리 집에 늑대야, 오지 마라. 우리 미샤를 깨우지 마라...
그 노래는 평생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어머니의 얼굴은 기억하지 못한다. 아버지의 얼굴은 잊었다. 그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가족은 아버지와 나, 그리고 안나, 작고 어린 안나뿐이었다. 어머니의 존재를 알리는 유일한 것은 스카프 하나였다. 바부슈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건 나중의 일이었다.
낡은 꽃무늬 바부슈카는 항상 부엌 벽에 걸려 있었다. 아버지는 매일 밤 바부슈카를 벽에서 내려 먼지를 털고 주름을 바로잡았다. 그는 그 의식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행했다. 나는 묻곤 했다. 아버지, 저건 누구 거예요? 그는 기분이 좋은 날이면 내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 주고 말았다. 대개는 그냥 자리를 떴다.
나와 안나를 낳은 사람의 흔적. 내게 자장가를 불러 주었을지도 모르는 그 사람. 돈을 얻기 위해 세간살이를 하나둘씩 팔 때도 그 바부슈카만은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아버지의 의식 역시 계속되었다. 아무리 해지고 바랬다 하더라도, 칙칙한 집 안에서 그 바부슈카는 홀로 화려한 꽃밭을 담고 있었다.
아버지는 종종 집을 비웠다. 하루나 이틀 뒤에 돌아올 때는 돈을 들고 왔다. 그 돈은 음식과 담배를 사는 데 쓰였다. 그는 온종일 담배를 피워 댔다. 하루는, 그가 집에 없을 때 바부슈카를 벽에서 내린 적이 있었다. 부드러운 스카프를 조심스럽게 들고 얼굴을 묻었다. 혹시 자그마한 향기 한 줌이라도 남아 있지 않을까 해서. 천에서는 먼지와 담배 냄새밖에 나지 않았다.
내가 혼자서도 안나를 돌볼 수 있게 되자, 아버지는 사라졌다. 마치 자신은 의무를 다했다는 것처럼. 내게 남은 건 식탁 위에 놓인 약간의 돈, 그리고 안나뿐이었다. 돈이 어디서 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미 팔아치울 것도 다 떨어진 상태였다.
바부슈카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매일같이 그를 기다리며 집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안나에게 밥을 먹였다. 이곳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는 돈을 많이 벌어서 오실 거야. 그러면 우리는 더 좋은 집에서 살 수도 있겠지. 안나에게 더 좋은 음식을 먹일 수도 있을 거고. 내일이면 오실지도 몰라. 하룻밤만, 하룻밤만 더 자면.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었다. 나는 안나를 재우기 위해 자장가를 불러주기 시작했다.
자장 자장, 침대 모서리에 눕지 마라.
남은 돈은 천천히 떨어져 갔다.
나쁜 늑대가 와서 널 잡아간단다.
가게 허드렛일부터 공사장 물심부름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널 잡아가서 숲 속으로 들어갈 거란다.
안나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숲 속으로 들어가서 금잔화 덤불 아래로 들어갈 거란다.
돈을 벌기 위해 부은 발목을 끌고 무거운 짐을 옮겼다.
우리 집에 늑대야, 오지 마라.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우리 아냐를 깨우지 마라...
그즈음, 아버지의 얼굴을 잊었다.
살아가기 위해서 잊었다.
사흘을 내리 굶은 채 마지막 남은 빵을 안나에게 줘도 괜찮았다. 안나가 웃는 얼굴을 보면 허기 따위는 금세 사라졌다. 이미 가고 없는 사람을 계속 기다릴 수는 없었다. 내게는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오빠가 금방 돈 많이 벌어서 맛있는 케이크도 사 주고 예쁜 원피스도 사 줄게. 침대에 누워 안나를 꼭 끌어안고 속삭였다. 반짝이는 상상으로 어린아이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벽에는 곰팡이가 슬고 천장에서는 물이 샜지만, 안나는 매일 밤 달콤한 꿈에 둘러싸여 잠들었다. 그 옆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나도 잠을 청했다.
스톰 라이더들은 팀으로 모이고 엠블럼으로 뭉친다. 이것은 자신을 라이더라 칭한다면 필수적으로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팀도 엠블럼도 없이 혼자 A.T를 타는 스톰 라이더가 있다면 둘 중 하나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이거나, 아직 스카우트 되지 않은 강자이거나. 그렇기 때문에 소녀는 유명인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니에요." "아니, 네가 맞아." "아니에요." "A.T에 메모리 카드도 없고, 엠블럼도 안 가지고 있고, 팀도 없는 라이더는 이 근처에선 너밖에 없어." "라이더... 아니에요." "물론 일반인이 그런 트릭을 쓰지도 않지!"
소년의 꾸준한 추궁 끝에 드디어 소녀는 '아니에요'세례를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그것을 본 소년은 드디어 자신의 말이 먹혔다 생각하고 이런 한밤중에 소녀를 찾아 공원에 온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견제하러 온 건 아니니까 걱정 마! 나는 너를 특별히 우리 최강 루키, 'Free fall'에 스카우트하려고..." "저는 라이더가... 아니에요."
하지만 포부 좋게 밝힌 이유는 소녀의 작지만 조곤조곤한 반박에 잘려버렸다. 게다가 그 반박은 소년이 소녀에게 말을 걸자마자 다섯 번은 연속해서 들은 말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한번 왜 소녀가 라이더인지 설명하려 했지만, 소녀가 더 빨리 입을 열었다.
"처음이 아니에요... 당신같이 스카우트를... 하러 온 사람은... 하지만 다들... 제가 라이더가 아니란 걸 알게 됐고... 당신도 그럴 거예요..."
드디어 이야기가 진전되었다. 비록 소년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기는 했지만. 소녀의 말대로 수수께끼의 솔로 라이더를 스카우트하려는 팀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소녀가 응한 일은 한 번도 없었고, 스카우트에 실패한 팀들도 '그녀는 라이더가 아니다.'라는 말만을 하면서 순순히 포기했다. 확실히 소년이 보기에도 소녀가 명성에 비해 뛰어난 라이딩 기술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런데도 꾸준히 말을 건 것은 왜 그녀가 라이더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지 알고 싶어서였고, 소녀는 지금 바로 그 이야기를 하려 하고 있었다.
"하죠... 대결... 그럼 제가 왜... 라이더가 아닌지 아실 거예요..." "좋아!"
그래서 소년은 소녀의 대결 신청에 망설임 없이 응했다.
도착한 곳은 작은 건물의 옥상이었다. 특별한 장치나 트랙이 있기는커녕 사람도 살고 있지 않은듯한 곳의 바닥은 울퉁불퉁하고 지저분해 척 보기에도 라이딩엔 적합하지 않았다.
"여기가 트랙이야? 굳이 장소를 옮길 필요도 없었을 것 같은데." "아니에요."
소년은 이제 소녀의 '아니에요'를 똑같이 따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여긴 왜 올라왔는데?" "저기... 맞은편..."
소녀는 자신들이 있는 곳보다 몇 배는 높은 건물을 가리켰다. 폐건물인지 여기저기 붉은 페인트가 칠해져 얼룩덜룩한 상태였는데, 위쪽 벽면 한군데만 하늘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아하! 알만하네! 저기를 터치하라는 거지? 벽 타기 스킬쯤이야 초보자도 할 수 있지!'
소년은 높긴 하지만 아주 아득한 것도 아닌 높이에 칠해진 하늘색을 보고 자신만만해했지만 뒤이어 나온 소녀의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기를... 벽을 타지 말고 터치하면... 들어갈게요." "...뭐?" "여러 번 하셔도…. 괜찮아요." "한번 하고 백번하고의 문제가 아니잖아! 지금 있는 건물의 두 배는 되는 높이라고! 게다가 여기서부터 거리도 따지면 벽 타기 없이는 불가능해! Moon ride도 한계가 있어!" "그럼 안 하시는..." "누가 안 한대?"
단칼에 자르는 소녀를 뿌리친 뒤, 소년은 하늘색 표시를 노려보았다. 이런 곳까지 데리고 와서 구체적인 위치와 방법까지 짚어줬다는 건, 방법이 있기는 한다는 거다. 그렇다면 순순히 포기해줄 수는 없었다.
'방법이 뭐지? 어떻게 하면 되지? 어떤 트릭을 써야 하지?'
감도 잡히지 않는 상태에서 소년은 우선 최대한 뒤로 빠졌다. 벽 타기를 하지 말라고 했으니 최대한 가속도를 붙인 다음 점프해서 터치할 생각이었다. 높이뛰기와 같은 원리였다. 도움닫기도, 장대도 없었지만 그나마 가장 가망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라고 생각한 소년은 최대한 높이 뛰어올라서 하늘색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저... 그래도 날 샐 때까진... 못 기다려요..." "허억... 허억..."
말할 힘도 없었다. 벌써 몇 번이나 실패와 도전을 반복했으니 지칠 만도 했다. 소년의 머리로 생각해낼 수 있는 방법은 전부 시도해봤지만, 하늘색 마크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최대한의 가속도도 내보고, 지형지물도 이용해봤지만, 근처에도 가지 못해 마지막에는 발악하듯이 힘만 잔뜩 주고 뛰어올랐지만 지친 탓인지 더 멀어질 뿐이었다. 이쯤 되면 소녀 본인은 할 수나 있는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그럼... 이제 제 차례네요."
그 의구심에 대답하듯이 소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년이 처음 했던 것처럼 최대한 뒤로 빠졌다. 그러곤 숨겨둔 실력이 있는것도 아니라는듯 그다지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옥상 바깥을 향해 달려가는 소녀를 멍하니 보고 있던 소년은 문득 스치는 예감에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소녀를 붙잡았다.
"잠깐...!" "으아아..."
팔이 붙잡힌 소녀는 A.T를 멈추지 못해 중심을 잃었고, 둘 다 요란하게 넘어졌다.
"아야야... 뭐 하는 거예요...!"
화를 내도 목소리가 작은 소녀에게 소년은 조금 우물쭈물하다가 설핏 들었던 불길한 예감을 입에 담았다.
"그냥 떨어지려 했지." "네." "왜 그런 짓을...!" "그게... 방법이거든요."
떨어지는 게 방법이라는 소리에 조금 얼이 빠졌지만 이내 이유를 이해했다. A.T의 기본적인 원리는 지면을 차는 힘에 어시스트 모드가 반응해서 휠이 회전, 가속하는 것이다. 즉, 지면을 세게 차면 찰수록 A.T는 힘을 얻는다.
"제 A.T는... 오로지 점프에만 집중해서 개조했어요..."
소녀는 설명한 뒤 다시 시도하려 들었고, 소년은 다시 한번 소녀를 말렸다. 라이더답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라이더였기에 말려야 했다. 애초에 소녀의 방법은 라이딩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소년은 이제서야 소녀가 라이더가 아니라는 소리를 듣는 이유를 알았다.
"그만둬. A.T가 충격을 전부 흡수하는 건 아니야! 네 몸이 먼저 망가져!" "알고 있어요... A.T를 신었다고... 무릎에, 다리에... 충격이 없지는 않아요." "그럼 왜 하는 거야! 그 충격을 견딜 만큼의 신체를 가진 것도 아니잖아!" "그게 어쨌다는 거죠."
저음으로 똑똑히 말한 소녀는 소년을 뿌리치고는 뛰쳐나가서 떨어져 내렸다.
"몸이 작은 게 어쨌다는 거야...! 힘이 부족한 게 뭐 어쨌는데...! 단 한 순간이라도 하늘에 닿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날아올랐다. 소년은 소녀가 하늘색에 닿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그녀가 말한 대로 방법이 있었다. 하늘을 향한 동경을 눈에 품고 금방이라도 녹아 내릴듯한 밀랍 날개를 달고 있는 듯한 소녀를 본 소년은 더는 말릴 수 없었다.
"우연이네요."
소녀는 얼굴도 보기 싫다는 티를 한껏 드러내며 소년에게 인사했다. 마주치자마자 그런 인사를 받은 소년은 상처받은듯한 제스쳐를 취하면 장난을 친 다음에서야 인사에 대답했다.
"찾아온 거야. 오늘은 인사만 할 거니까 걱정 마! 그러니까... 어디 가서 앉을까?"
소녀의 무릎에 감긴 깁스와 들고 있는 목발을 보면서 한 질문이었다. 걷거나 서 있는 게 힘든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에 소녀는 소년의 제안을 받아들여 근처 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건 역시, 저번에 날아오른 여파인 거지?" "네... 의사도 이제... 제 얼굴을 외웠더라고요…."
똑같은 일로 병원에 간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였다. 소년은 문득 소녀가 몇 번이나 추락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하늘을 날 수 있다. 스톰 라이더라면 한 번쯤은 들어보고, 한 번쯤은 입에 담는 말이지." "네... 하지만 날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는... 아무도 하지 않죠..."
절망적으로 재능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리 노력하고 열정을 불태워도 하늘을 날기는커녕 하늘에 닿을 수조차 없는. 그런 부류는 대부분 A.T자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라이더의 길을 걷는걸 그만두게 되지만 소녀처럼 하늘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애초에 A.T랑은 맞지 않는 몸이라고... 이런 방법을 계속 쓰다가는 A.T는커녕... 걷지도 못하게 될 거라는 이야기는... 이미 충분히 들었어요." "하지만 그렇대도 하늘을 포기할 수는 없었던 거지?" "하늘에 닿을 수만 있다면... 몸이 부서지더라도... 라이더가 아니게 되더라도... 상관없었어요."
거기까지 말한 소녀는 푸르른 웃음을 살짝 지어 보인 뒤, 목발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칠 대로 지쳤지만, 아직 생명력이 남아있는 움직임이었다.
"이제 가세요... 여기에 스톰 라이더는 없어요." "그거 알아? 어떤 라이더는 머리에 A.T를 얹고 다닌다더라."
미련없는 인사를 남기고 떠나려는 소녀에게 소년은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뜬금없는 말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소녀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소년은 자신도 자리에서 일어나 소녀를 똑바로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자신의 길을 달리다 보면 언젠가는 8개의 길에 이어져 8명의 왕을 만난다고 하지. 그건 뒤집어 말하자면 누구나 자신의 길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야. 그리고 그 길을 어떻게 달리느냐도 전부 각각의 라이더에게 달려있지... 저번에는 네 길을 가로막아서 미안했다."
머리 숙여 사과하는 소년을 앞에 둔 소녀는 이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되었다. 다리만 멀쩡했다면 진즉에 도망쳤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모습이었지만 소년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소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 어어..." "너의 의지도, 동경도, 길도. 전부 훌륭한 라이더였어. 설령 모든 라이더가 부정하더라도 나만은 너를 라이더로. 아니, 왕으로 인정하겠어. 나의 「밀랍」의 왕이여."
이날 소녀는 왕이 되었고, 진정으로 라이더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녀는 소년의 손을 잡았다.
닿지못하는 하늘을 원망했다. 항상 빛을 비추며 만인에게 따스한 태양을 저주했다. 닿지 못할 희망을 외면했다. 기쁨은 알지 못했고, 우정은 배신이었으며, 사랑은 허상이었다. 나는 그저 '살아있다'라고 말하며 실실 웃어대는 바보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리라.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은 기만이었으며, 노력도 이유도 자본도 우연도 없는 내게는 오직 실패 외의 길은 존재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나는 계속 외면해왔다. 나는 한심하다는 것을 나는 바보일 뿐이었다는 것을 멍청하고 겁쟁이라 죽음조차도 선택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임을 나는 오직 남을 갉아먹는 것으로만 살아남는 기생충이며, 만인에게 민페를 끼치는 악인이니라.
"오늘도 살아있다."
그리 중얼거리며 나는 쓸쓸한 시선을 화면에서 돌린다. 내가 잘하는 것은 절망을 외면하는 것뿐 그럼으로서 더 큰 절망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필사적으로 '현실을 즐겨!'라면서 무시할 뿐. 아아, 내 무덤은 남지 못하리라. 나는 그럴 가치조차 없는 자이기에
오늘이 비가 오는 날이라서 나는 문득 신발끈을 고쳐 묶다 신발 코를 계단 아래로 내밀어 보았다. 현관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따로 흐르는 곳이 없어서 경사진 지붕을 타고 가장자리로 떨어지는데, 내 신발을 처음 적신 건 바로 그 흐르는 빗물이었다. 발을 빼지 않고 있었더니 아직 내리는 실비가 천 운동화를 마저 적시고 고무창을 깐 신발에 차오르고 있었다. 가장 따뜻하게 차려입은 곳이라 찬 빗물에 퍼뜩 놀랐다. 햇빛을 가리는 데는 좋지만 비가 올 땐 젖을 수 있는 현관 지붕에 불과한 캡모자와 추운 맨팔을 가려주지 못하는 반팔 셔츠와 물이라도 맞으면 축축 늘어질 츄리닝 바지 모두 한 부위 한 겹씩 입었는데, 발은 양말과 신발을 모두 입고 있으니 잘 차려입은 셈이다. 이렇게 되면 실내든 실외든 갈 수가 없으니 새 양말을 신고 나와야 할 것이다. 나는 옆에 걸려 있는 손잡이가 동글동글해 지팡이 같은 우산을 보며 어차피 빗길을 걷다 보면 발이 좀 젖을 테니 우산을 쓰고 나가야 할지, 일부러 적신 양말을 갈아신으러 시간을 낭비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지만 조금 후 현관 문을 열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요즘 시간을 쓸 일이 많다 보니 이렇게 사소하게 시간을 낭비하는 게 즐거워지고 있었다. 나는 진열대에 진열된 멋진 지갑을 사면 내일 뭘 먹을지도 고민해야 할 사람이 참지 못하고 지갑을 사 버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원래 해서는 안 될 일을 충동적으로 저지르는 건 너무 즐겁다. 그게 후회할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나는 아내가 든 비닐봉지를 들고 아직 뒷처리가 덜 되어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창작극은 성공하기가 어렵다. 사람들이 잘 아는 고전 명작에 기반을 두지 않은 쌩 창작극은 더 그렇지. 그런 걸 보러 오는 사람은 대체로, 어지간한 극에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속된 말로는 썩은 물 관객 정도다. 그런 사람들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것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신새벽은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나름대로 애착도 있었던 오페라가 상영 기간만 채우고 시원하게 잊힘을 크게 아쉬워하지는 않았다. 중세풍의 가상 국가, 그것도 작은 시골 마을 배경에 좋게 말하면 독특하고 나쁘게 말하면 근본 없는 설정, 그리고 로맨스의 이뤄짐은 없고 성장만이 남는 여성 주연 서사는 선호하는 사람이 드물 테니까. 야심과는 달리 부족함이 많은 작품이었음에도 소수나마 마음에 들어 해준 관객이 있었음에 감사할 뿐이었다.
그런 심정과는 별개로, 자신이 무대에 올린 오페라의 주인공들이 한자리에 모여 수다를 나누는 속편 격의 짧은 글을 적고, 다른 연출과 구성을 구상해볼 정도로 미련이 남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이미 내려간 오페라 하나에 매달려 있기에는 계획해두고 구체화하고 실행해야 할 계획들이 산더미였다. 그렇게 그가 제작을 맡았던 첫 창작 오페라 '나르카'는 기억속에서 한동안 잊혔으나,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 그 이름은 뜬금없이 새벽의 귀에 다시 들어왔다. 공연이 내려간 후 유튜브에 올렸던 각 아리아의 클립 영상들의 조회 수와 댓글 수가 폭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애착이 있던 컨텐츠가 흥하기 시작한 건 기뻤지만, 그보다는 의아함이 앞섰다. 내려간 지 1년은 더 됐고, 당시에 그렇게 핫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왜?
그러나 놀람도 잠시, 새벽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깔끔하게 묻힌 줄 알았던 컨텐츠가 다시 흥하기 시작했다면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우선 흥하기 시작한 원인을 찾아보기 위해 바쁘게 손을 움직여 유튜브 등 SNS에서의 반응을 살펴보고 아이디어가 될 만한 것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몇몇 중독성 있는 아리아나, 특정 장면에서의 스크린샷이나 움짤 등이 밈이 되어 유행을 탄 것이 시작인 모양이었다. 조회 수 면에서나, 밈화 면에서나 특히나 핫한 것은, 도적들의 합창곡인 "아이고 배야"의 클립 영상이었다. 영상을 재생해보며, 새벽은 피식 웃었다. 다시 보니 노래뿐만 아니라 연기도 잘 해주셨네. 가사 자막도 적절한 때 나와서 짤로 만들기 좋았겠다. 어쨌든 반응이 핫하니, 조만간 출연진분들을 모시고 뭐라도 하자. 그다음에는 좀 더 손을 봐서 다시 무대에 올리고. 생각 나는 고칠 점은 몇 개 있지만, 그래도 리뷰만큼 확실한 게 없겠지. 새벽은 SNS 사이트를 켜둔 창을 한쪽에 밀어두고 공연 예매 사이트에 접속해서는, 초연 당시 달렸던 리뷰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보러 오는 사람이 적고, 리뷰를 쓰는 사람은 더더욱 적었던 창작 오페라의 특성상, 역시나 정독하기에 무리가 없는 분량이었다.
새벽은 아쉬움을 느낀 부분에 대해서만 따로 기록하며 리뷰를 읽던 중, 한 문장을 보고 의아함에 눈을 깜빡였다. 남자 주인공으로부터 배신을 당했다지만, 여주가 너무 오버하는 것 같았다는 의견이었다. 그랬었나? 그렇게까지 했으면 누나가 진작에 디렉팅을 이따위로 했냐고 한 소리했을 텐데. 의구심에 몇 번이고 해당 장면의 아리아를 돌려보던 새벽은, 뒤늦게야 아... 하는 소리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당 아리아가 시작되기 전 짧게 흘러간 레치타티보에는 배신감으로 인한 분노와 슬픔이 표현되어 있었다. 짧더라도 인상에 남으려면 남을 수도 있었겠다. 그렇다면 이걸 어떻게 만지면 더 자연스러워질까?
여주인공의 실제 모델이었던 누나 새별에게 연락하기엔 새벽 두 시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고, 새벽은 뜻밖의 상황에 복잡해진 머리를 비울 겸 음원사이트에서 평소 듣던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했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즐겨 듣던 노래들에 귀를 기울이던 새벽은, 문득 유독 또렷한 발음으로 들려오는 가사에 신경을 집중했다. 오랜 연인과의 권태기, 이별에 대해 담담한 톤으로 서술하는 가사는, 여주인공의 상황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었지만, 그는 작은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여주가 남주에게 호감을 느낀 것은 사실이라지만, 그만큼 속된 말로 깨는 장면도 자주 있었다. 마음이 식은 건 아닐까 번민하는 아리아도 들어간 판에, 남주의 배신에 심하게 슬퍼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설득력 없는 감정선일 수 있었겠다는 생각까지 머리에 스쳤다. 새벽은 이내 컴퓨터를 끄고 침대에 누웠다. 자신이 제작 총괄이기는 했지만, 가사와 스토리 전개는 극본가의 몫이었다. 재상연이 확정되는 대로 극본가님과 미팅을 가지자. 그 안에 작은 컨텐츠도 만들어보고. 애착을 가진 이야기가 다시 세상의 관심을 받은 것이 설레서일까, 새벽은 불을 끄고 누웠음에도 쉬이 잠들지 못했다.
허무하게 꼬리를 이끌고서 너는 갔다 오색으로 반짝이는 꼬리에 꺼끌한 모래알을 묻혀가면서 너는 갔다 나는 잡지 않았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고향을 사랑했고 그리워했으니 내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워져 오직 시선으로 너를 쫓는다 너의 수지가 방금 바다에 닿았다 짠물이 낯선지 지레 겁을 먹고 몸을 떠는 네 모습에 난 아주 작게 소리를 냈다 이러면 한 번쯤은 나를 돌아봐 주겠지
<하늘은 바다의 색을 닮고, 바다는 하늘의 색을 닮았어. 나는 하늘을 볼 때면 바다에 있는 내 마음을 느낄 수 있어. 오래 전에 바다에 빼앗겨 버린 내 마음, 여린 심장에서 물을 짜내는 짠기에 괴로워 숨막혔을 때도 있었지만, 역시 내 마음이 바다에 잠겨 있는 한 나는 바다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물결치는 하늘색. 산산히 부서지는 흰 파도의 거품. 옛날에 읽은 인어공주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누군가의 단말마 같기도 한, 아름답다기엔 너무 지루한 자연. 그 앞에 나는 서 있었어.>
소년은 귀에 꼬아서 걸어 놓은 마스크 줄에 손가락을 걸었다. 그리고 잡아당겼다. 달랑달랑 한쪽 귀에 걸리던 마스크가 툭 튕겨져나와, 손가락이 빠지자 해변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소년은 분홍색 바탕에 흰 하트가 퐁퐁 튀어나온 슬리퍼를 끌다가 그것도 모래사장에 내던졌다. 휘청거리듯 발목까지 양말 자국이 남은 흰 발이 모래를 튀기며 착륙했다.
<마침내 첫 발을 내딛은 거야. 나는 아픔 없이 바다를 느낄 수 있게 된 거야. 온 몸을 내던져 바닷물에 잠길 수도 있고, 모래사장을 뒹굴며 옷 속에 들어간 모래를 털어내며 짜증스레 뛸 수도 있고, 맨발로 젖은 모래덩어리를 흩어 볼 수 있어. 그렇게 실컷 놀고 난 후에는 온몸의 바닷물이 말라서 모공이 소금으로 따끔따끔해질 때까지 바람을 쐴 수도 있지. 빨래 대신 건조대 위에 올라간 것처럼 파도 소리 들리는 땅 위에 두 발로 서서 바람을 맞을 수 있다고.>
소년은 사막의 모래언덕처럼 울룩불룩 솟은 작은 모래산들 꼭대기를 밟으며 위험천만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때다 싶은 순간에 갑자기 몸을 틀고는, 텔레비전 속 발레리나처럼 균형 잃은 몸을 모래 위에 닿은 유일한 발 하나로 휙 돌리며, 하늘이 잘 보이게 위쪽으로 돌아 바닥으로 쓰러졌다. 목이 부러질 걸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모래가 푹신한 솜이나 고향의 꽃밭처럼 목을 받쳐 줄 것이라고 믿었거나, 제 목이 젤리처럼 물렁물렁하다고 믿었거나. 아니면 장난 하나하나에 왔다갔다할 수 있는 제 목숨이라곤 신경도 안 쓰는 철없는 장난꾸러기거나. 정답은 3번이었다.
<하늘의 푸른색이 달을 따라 흘러나가기 시작하면 그 밑엔 바닥이 어디인지 모를 어둠과 반짝이는 별들이 남아. 종이에 걸러낸 바닷물 같지. 결정이 된 작은 소금만 거름종이 위에 남긴 바닷물처럼, 하늘의 잔여물은 별일 거야. 사람들이 좋아하는 밝은 빛에도 녹지 않아서 쭉 한 자리에 박혀 있는 이름 모를 광물들. 사랑스러운 보석들. 사실 나는 별을 본 적이 없어. 사진이나, 동화책 같은 게 아니면. 하지만 별을 직접 보면 틀림없이 아름다울 거야.>
하늘에 별은 떠 있지 않았다.
<보여주고 싶었어. 오래전 희미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하늘과 엄청나게 가까운 곳. 자연이 만들어 준 전망대. 이곳에서 별을 찾아 떠나려면 그곳밖에 없을 거야. 가까운 곳에서 출발하는 게 그나마 도착할 확률이 높을 테니까, 그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