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797456> 자캐들이 독백하는 스레 :: 23

규칙 개정본

2020-06-22 12:44:06 - 2023-07-14 16:44:58

0 규칙 개정본 (5351612E+5)

2020-06-22 (모두 수고..) 12:44:06

☆ 스레 진행중인 캐릭터도, 엔딩을 본 캐릭터도, 사용하지 않는 캐릭터도, 어떤 캐릭터도 모두모두 자유로이 독백을 남길 수 있습니다.

☆ 참치 인터넷 어장에서는 공통적으로 지나친 성적 묘사 및 유혈 묘사와, 분쟁 유발 주제의 언급(정치, 사회, 과도한 뒷담 등등)을 하지 않도록 합시다.

☆ 상황극판의 규칙 또한 준수합시다. 다른 캐릭터나 오너를 저격하지 마세요.

전 자캐독백스레 : situplay>1591876823>

1 이름 없음 (5351612E+5)

2020-06-22 (모두 수고..) 12:46:09

- 인칭, 형식, 내용 모두 자유.

- 규칙이 변경된 관계로, 전 독백스레가 아니라 이쪽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2 검은색 (9399875E+5)

2020-07-14 (FIRE!) 15:05:04

빗물이 스민 상처가 쓰렸다. 멍 자국이 욱신거렸으며 코가 아픈 건지 머리가 아픈 건지 분간도 되지 않을 만큼 어질거리는 상태에서도 하늘을 보기 위해 몸을 뒤집었다.
빗방울이 얼굴에 부딪혀와 눈을 뜰 수 없었고 뜨뜻미지근하게 들러붙어 있는 코피가 닦여나갔다.
귓구멍에 물이 차는 걸 느끼며 컴컴한 밤하늘을 보려고 애썼다.
결국은 검은색이었다. 검은색과 붉은색, 그리고 흰색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그렇게 버텼는데 자신은 죽을 때까지 검은색에 갇혀있다.
그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탈출해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아 또다시 마음이 삭막해졌다.

'내가 아빠를 죽여서 이렇게 된 걸까.'

죽이지 말걸 그랬다고 조금 후회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냥 그대로 아빠 손에 죽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살기 위해 죽였고, 달아났으며, 끔찍한 생애를 보냈다. 정말이지 시궁창 같은 인생이었다.
어찌나 역겨운 삶이었는지 주마등조차 보이지 않았기에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그래도 그 붉은 등 아래는 아니니까 됐다. 죽기 전에 푸른 하늘이 보고 싶다는 소원조차 자신에게는 과분했었던 것 같다며 체념하기로 했다.
고통과 추위를 오롯이 느끼며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중에 인기척도 없이 목소리가 들렸다.

"억울하단 표정인데"

살풋 눈을 떴다.
또 검은색이다. 검은색 사람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죽음을 미루게 해줄 수는 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자신은 이제 죽을 텐데. 더 살아가기엔 너무 지쳐버렸다.

"...하늘이"

그런데도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었던 이유는 역시 한 번 더 푸른 하늘이 보고 싶어서였을까.

3 Миша (7530493E+5)

2020-07-14 (FIRE!) 18:02:17


나의 최초의 기억은 노랫소리였다.

누군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노래를 흥얼거린다. 자장 자장, 침대 모서리에 눕지 마라. 나쁜 늑대가 와서 널 잡아간단다. 잠기운에 칭얼거리며 손을 내밀면 웃으며 마주 잡아오는 손가락이 있다. 우리 집에 늑대야, 오지 마라. 우리 미샤를 깨우지 마라...



그 노래는 평생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어머니의 얼굴은 기억하지 못한다. 아버지의 얼굴은 잊었다. 그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가족은 아버지와 나, 그리고 안나, 작고 어린 안나뿐이었다. 어머니의 존재를 알리는 유일한 것은 스카프 하나였다. 바부슈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건 나중의 일이었다.

낡은 꽃무늬 바부슈카는 항상 부엌 벽에 걸려 있었다. 아버지는 매일 밤 바부슈카를 벽에서 내려 먼지를 털고 주름을 바로잡았다. 그는 그 의식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행했다. 나는 묻곤 했다. 아버지, 저건 누구 거예요? 그는 기분이 좋은 날이면 내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 주고 말았다. 대개는 그냥 자리를 떴다.

나와 안나를 낳은 사람의 흔적. 내게 자장가를 불러 주었을지도 모르는 그 사람. 돈을 얻기 위해 세간살이를 하나둘씩 팔 때도 그 바부슈카만은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아버지의 의식 역시 계속되었다. 아무리 해지고 바랬다 하더라도, 칙칙한 집 안에서 그 바부슈카는 홀로 화려한 꽃밭을 담고 있었다.

아버지는 종종 집을 비웠다. 하루나 이틀 뒤에 돌아올 때는 돈을 들고 왔다. 그 돈은 음식과 담배를 사는 데 쓰였다. 그는 온종일 담배를 피워 댔다. 하루는, 그가 집에 없을 때 바부슈카를 벽에서 내린 적이 있었다. 부드러운 스카프를 조심스럽게 들고 얼굴을 묻었다. 혹시 자그마한 향기 한 줌이라도 남아 있지 않을까 해서. 천에서는 먼지와 담배 냄새밖에 나지 않았다.

내가 혼자서도 안나를 돌볼 수 있게 되자, 아버지는 사라졌다. 마치 자신은 의무를 다했다는 것처럼. 내게 남은 건 식탁 위에 놓인 약간의 돈, 그리고 안나뿐이었다. 돈이 어디서 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미 팔아치울 것도 다 떨어진 상태였다.



바부슈카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매일같이 그를 기다리며 집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안나에게 밥을 먹였다. 이곳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는 돈을 많이 벌어서 오실 거야. 그러면 우리는 더 좋은 집에서 살 수도 있겠지. 안나에게 더 좋은 음식을 먹일 수도 있을 거고. 내일이면 오실지도 몰라. 하룻밤만, 하룻밤만 더 자면.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었다. 나는 안나를 재우기 위해 자장가를 불러주기 시작했다.

자장 자장, 침대 모서리에 눕지 마라.

남은 돈은 천천히 떨어져 갔다.

나쁜 늑대가 와서 널 잡아간단다.

가게 허드렛일부터 공사장 물심부름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널 잡아가서 숲 속으로 들어갈 거란다.

안나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숲 속으로 들어가서 금잔화 덤불 아래로 들어갈 거란다.

돈을 벌기 위해 부은 발목을 끌고 무거운 짐을 옮겼다.

우리 집에 늑대야, 오지 마라.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우리 아냐를 깨우지 마라...



그즈음, 아버지의 얼굴을 잊었다.

살아가기 위해서 잊었다.



사흘을 내리 굶은 채 마지막 남은 빵을 안나에게 줘도 괜찮았다. 안나가 웃는 얼굴을 보면 허기 따위는 금세 사라졌다. 이미 가고 없는 사람을 계속 기다릴 수는 없었다. 내게는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오빠가 금방 돈 많이 벌어서 맛있는 케이크도 사 주고 예쁜 원피스도 사 줄게. 침대에 누워 안나를 꼭 끌어안고 속삭였다. 반짝이는 상상으로 어린아이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벽에는 곰팡이가 슬고 천장에서는 물이 샜지만, 안나는 매일 밤 달콤한 꿈에 둘러싸여 잠들었다. 그 옆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나도 잠을 청했다.

네가 웃을 수만 있다면, 그걸로 괜찮아.

그런 나날이었다.

4 憬完歌 (SNFf6UFmog)

2020-08-09 (내일 월요일) 17:40:40

人必憬完
사람은 필히 완벽을 동경한다
特人饞凡
특별한 사람은 평범함을 탐하며
凡人饞特
평범한 사람은 특별함을 탐한다
賢者饞愚
현자는 우를 탐하고
愚者饞賢
우자는 현을 탐하며
獲者饞失
득본자는 실을 탐하며
失者饞獲
잃은자는 득을 탐한다
童者饞翁
젊은자는 늙음을 탐하고
翁者饞童
늙은자는 젊음을 탐하며
歷必饞來
지난것은 반드시 올것을 탐하고
來必饞歷
온것은 반드시 지난것을 탐하니
世路莫完
세상에 완벽은 없으매
人啥憧憬
인간이 동경하는건 무엇인가

5 이름 없음 (PpDG6oMwGk)

2021-03-27 (파란날) 21:48:22

인양

6 에어기어 기반 (1ZoidX2BSE)

2021-03-30 (FIRE!) 00:43:01

스톰 라이더들은 팀으로 모이고 엠블럼으로 뭉친다. 이것은 자신을 라이더라 칭한다면 필수적으로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팀도 엠블럼도 없이 혼자 A.T를 타는 스톰 라이더가 있다면 둘 중 하나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이거나, 아직 스카우트 되지 않은 강자이거나. 그렇기 때문에 소녀는 유명인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니에요."
"아니, 네가 맞아."
"아니에요."
"A.T에 메모리 카드도 없고, 엠블럼도 안 가지고 있고, 팀도 없는 라이더는 이 근처에선 너밖에 없어."
"라이더... 아니에요."
"물론 일반인이 그런 트릭을 쓰지도 않지!"

소년의 꾸준한 추궁 끝에 드디어 소녀는 '아니에요'세례를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그것을 본 소년은 드디어 자신의 말이 먹혔다 생각하고 이런 한밤중에 소녀를 찾아 공원에 온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견제하러 온 건 아니니까 걱정 마! 나는 너를 특별히 우리 최강 루키, 'Free fall'에 스카우트하려고..."
"저는 라이더가... 아니에요."

하지만 포부 좋게 밝힌 이유는 소녀의 작지만 조곤조곤한 반박에 잘려버렸다. 게다가 그 반박은 소년이 소녀에게 말을 걸자마자 다섯 번은 연속해서 들은 말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한번 왜 소녀가 라이더인지 설명하려 했지만, 소녀가 더 빨리 입을 열었다.

"처음이 아니에요... 당신같이 스카우트를... 하러 온 사람은... 하지만 다들... 제가 라이더가 아니란 걸 알게 됐고... 당신도 그럴 거예요..."

드디어 이야기가 진전되었다. 비록 소년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기는 했지만.
소녀의 말대로 수수께끼의 솔로 라이더를 스카우트하려는 팀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소녀가 응한 일은 한 번도 없었고, 스카우트에 실패한 팀들도 '그녀는 라이더가 아니다.'라는 말만을 하면서 순순히 포기했다.
확실히 소년이 보기에도 소녀가 명성에 비해 뛰어난 라이딩 기술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런데도 꾸준히 말을 건 것은 왜 그녀가 라이더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지 알고 싶어서였고, 소녀는 지금 바로 그 이야기를 하려 하고 있었다.

"하죠... 대결... 그럼 제가 왜... 라이더가 아닌지 아실 거예요..."
"좋아!"

그래서 소년은 소녀의 대결 신청에 망설임 없이 응했다.

도착한 곳은 작은 건물의 옥상이었다. 특별한 장치나 트랙이 있기는커녕 사람도 살고 있지 않은듯한 곳의 바닥은 울퉁불퉁하고 지저분해 척 보기에도 라이딩엔 적합하지 않았다.

"여기가 트랙이야? 굳이 장소를 옮길 필요도 없었을 것 같은데."
"아니에요."

소년은 이제 소녀의 '아니에요'를 똑같이 따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여긴 왜 올라왔는데?"
"저기... 맞은편..."

소녀는 자신들이 있는 곳보다 몇 배는 높은 건물을 가리켰다. 폐건물인지 여기저기 붉은 페인트가 칠해져 얼룩덜룩한 상태였는데, 위쪽 벽면 한군데만 하늘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아하! 알만하네! 저기를 터치하라는 거지? 벽 타기 스킬쯤이야 초보자도 할 수 있지!'

소년은 높긴 하지만 아주 아득한 것도 아닌 높이에 칠해진 하늘색을 보고 자신만만해했지만 뒤이어 나온 소녀의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기를... 벽을 타지 말고· · · · · · 터치하면... 들어갈게요."
"...뭐?"
"여러 번 하셔도…. 괜찮아요."
"한번 하고 백번하고의 문제가 아니잖아! 지금 있는 건물의 두 배는 되는 높이라고! 게다가 여기서부터 거리도 따지면 벽 타기 없이는 불가능해! Moon ride도 한계가 있어!"
"그럼 안 하시는..."
"누가 안 한대?"

단칼에 자르는 소녀를 뿌리친 뒤, 소년은 하늘색 표시를 노려보았다. 이런 곳까지 데리고 와서 구체적인 위치와 방법까지 짚어줬다는 건, 방법이 있기는 한다는 거다. 그렇다면 순순히 포기해줄 수는 없었다.

'방법이 뭐지? 어떻게 하면 되지? 어떤 트릭을 써야 하지?'

감도 잡히지 않는 상태에서 소년은 우선 최대한 뒤로 빠졌다. 벽 타기를 하지 말라고 했으니 최대한 가속도를 붙인 다음 점프해서 터치할 생각이었다. 높이뛰기와 같은 원리였다. 도움닫기도, 장대도 없었지만 그나마 가장 가망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라고 생각한 소년은 최대한 높이 뛰어올라서 하늘색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저... 그래도 날 샐 때까진... 못 기다려요..."
"허억... 허억..."

말할 힘도 없었다. 벌써 몇 번이나 실패와 도전을 반복했으니 지칠 만도 했다. 소년의 머리로 생각해낼 수 있는 방법은 전부 시도해봤지만, 하늘색 마크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최대한의 가속도도 내보고, 지형지물도 이용해봤지만, 근처에도 가지 못해 마지막에는 발악하듯이 힘만 잔뜩 주고 뛰어올랐지만 지친 탓인지 더 멀어질 뿐이었다. 이쯤 되면 소녀 본인은 할 수나 있는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그럼... 이제 제 차례네요."

그 의구심에 대답하듯이 소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년이 처음 했던 것처럼 최대한 뒤로 빠졌다. 그러곤 숨겨둔 실력이 있는것도 아니라는듯 그다지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옥상 바깥을 향해 달려가는 소녀를 멍하니 보고 있던 소년은 문득 스치는 예감에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소녀를 붙잡았다.

"잠깐...!"
"으아아..."

팔이 붙잡힌 소녀는 A.T를 멈추지 못해 중심을 잃었고, 둘 다 요란하게 넘어졌다.

"아야야... 뭐 하는 거예요...!"

화를 내도 목소리가 작은 소녀에게 소년은 조금 우물쭈물하다가 설핏 들었던 불길한 예감을 입에 담았다.

"그냥 떨어지려 했지."
"네."
"왜 그런 짓을...!"
"그게... 방법이거든요."

떨어지는 게 방법이라는 소리에 조금 얼이 빠졌지만 이내 이유를 이해했다. A.T의 기본적인 원리는 지면을 차는 힘에 어시스트 모드가 반응해서 휠이 회전, 가속하는 것이다. 즉, 지면을 세게 차면 찰수록 A.T는 힘을 얻는다.

"제 A.T는... 오로지 점프에만 집중해서 개조했어요..."

소녀는 설명한 뒤 다시 시도하려 들었고, 소년은 다시 한번 소녀를 말렸다. 라이더답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라이더였기에 말려야 했다. 애초에 소녀의 방법은 라이딩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소년은 이제서야 소녀가 라이더가 아니라는 소리를 듣는 이유를 알았다.

"그만둬. A.T가 충격을 전부 흡수하는 건 아니야! 네 몸이 먼저 망가져!"
"알고 있어요... A.T를 신었다고... 무릎에, 다리에... 충격이 없지는 않아요."
"그럼 왜 하는 거야! 그 충격을 견딜 만큼의 신체를 가진 것도 아니잖아!"
"그게 어쨌다는 거죠."

저음으로 똑똑히 말한 소녀는 소년을 뿌리치고는 뛰쳐나가서 떨어져 내렸다.

"몸이 작은 게 어쨌다는 거야...! 힘이 부족한 게 뭐 어쨌는데...! 단 한 순간이라도 하늘에 닿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날아올랐다.
소년은 소녀가 하늘색에 닿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그녀가 말한 대로 방법이 있었다. 하늘을 향한 동경을 눈에 품고 금방이라도 녹아 내릴듯한 밀랍 날개를 달고 있는 듯한 소녀를 본 소년은 더는 말릴 수 없었다.


"우연이네요."

소녀는 얼굴도 보기 싫다는 티를 한껏 드러내며 소년에게 인사했다. 마주치자마자 그런 인사를 받은 소년은 상처받은듯한 제스쳐를 취하면 장난을 친 다음에서야 인사에 대답했다.

"찾아온 거야. 오늘은 인사만 할 거니까 걱정 마! 그러니까... 어디 가서 앉을까?"

소녀의 무릎에 감긴 깁스와 들고 있는 목발을 보면서 한 질문이었다. 걷거나 서 있는 게 힘든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에 소녀는 소년의 제안을 받아들여 근처 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건 역시, 저번에 날아오른 여파인 거지?"
"네... 의사도 이제... 제 얼굴을 외웠더라고요…."

똑같은 일로 병원에 간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였다. 소년은 문득 소녀가 몇 번이나 추락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하늘을 날 수 있다. 스톰 라이더라면 한 번쯤은 들어보고, 한 번쯤은 입에 담는 말이지."
"네... 하지만 날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는... 아무도 하지 않죠..."

절망적으로 재능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리 노력하고 열정을 불태워도 하늘을 날기는커녕 하늘에 닿을 수조차 없는. 그런 부류는 대부분 A.T자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라이더의 길을 걷는걸 그만두게 되지만 소녀처럼 하늘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애초에 A.T랑은 맞지 않는 몸이라고... 이런 방법을 계속 쓰다가는 A.T는커녕... 걷지도 못하게 될 거라는 이야기는... 이미 충분히 들었어요."
"하지만 그렇대도 하늘을 포기할 수는 없었던 거지?"
"하늘에 닿을 수만 있다면... 몸이 부서지더라도... 라이더가 아니게 되더라도... 상관없었어요."

거기까지 말한 소녀는 푸르른 웃음을 살짝 지어 보인 뒤, 목발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칠 대로 지쳤지만, 아직 생명력이 남아있는 움직임이었다.

"이제 가세요... 여기에 스톰 라이더는 없어요."
"그거 알아? 어떤 라이더는 머리에 A.T를 얹고 다닌다더라."

미련없는 인사를 남기고 떠나려는 소녀에게 소년은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뜬금없는 말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소녀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소년은 자신도 자리에서 일어나 소녀를 똑바로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자신의 길을 달리다 보면 언젠가는 8개의 길에 이어져 8명의 왕을 만난다고 하지. 그건 뒤집어 말하자면 누구나 자신의 길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야. 그리고 그 길을 어떻게 달리느냐도 전부 각각의 라이더에게 달려있지... 저번에는 네 길을 가로막아서 미안했다."

머리 숙여 사과하는 소년을 앞에 둔 소녀는 이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되었다. 다리만 멀쩡했다면 진즉에 도망쳤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모습이었지만 소년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소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 어어..."
"너의 의지도, 동경도, 길도. 전부 훌륭한 라이더였어. 설령 모든 라이더가 부정하더라도 나만은 너를 라이더로. 아니, 왕으로 인정하겠어. 나의 「밀랍」의 왕이여."

이날 소녀는 왕이 되었고, 진정으로 라이더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녀는 소년의 손을 잡았다.

7 이름 없음 (f5DYzUM.ZA)

2021-04-02 (불탄다..!) 18:54:22

닿지못하는 하늘을 원망했다. 항상 빛을 비추며 만인에게 따스한 태양을 저주했다. 닿지 못할 희망을 외면했다.
기쁨은 알지 못했고, 우정은 배신이었으며, 사랑은 허상이었다. 나는 그저 '살아있다'라고 말하며 실실 웃어대는 바보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리라.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은 기만이었으며, 노력도 이유도 자본도 우연도 없는 내게는 오직 실패 외의 길은 존재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나는 계속 외면해왔다. 나는 한심하다는 것을 나는 바보일 뿐이었다는 것을 멍청하고 겁쟁이라 죽음조차도 선택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임을
나는 오직 남을 갉아먹는 것으로만 살아남는 기생충이며, 만인에게 민페를 끼치는 악인이니라.

"오늘도 살아있다."

그리 중얼거리며 나는 쓸쓸한 시선을 화면에서 돌린다. 내가 잘하는 것은 절망을 외면하는 것뿐
그럼으로서 더 큰 절망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필사적으로 '현실을 즐겨!'라면서 무시할 뿐.
아아, 내 무덤은 남지 못하리라. 나는 그럴 가치조차 없는 자이기에

8 이름 없음 (rk6vrTtQSE)

2021-05-17 (모두 수고..) 01:37:05

갱신

9 이름 없음 (.urV7APaRE)

2021-05-17 (모두 수고..) 14:35:06

와 이런 스레도 있었네

10 友雨 (rFeP0PsVUY)

2021-07-09 (불탄다..!) 09:16:49

오늘이 비가 오는 날이라서 나는 문득 신발끈을 고쳐 묶다 신발 코를 계단 아래로 내밀어 보았다. 현관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따로 흐르는 곳이 없어서 경사진 지붕을 타고 가장자리로 떨어지는데, 내 신발을 처음 적신 건 바로 그 흐르는 빗물이었다. 발을 빼지 않고 있었더니 아직 내리는 실비가 천 운동화를 마저 적시고 고무창을 깐 신발에 차오르고 있었다. 가장 따뜻하게 차려입은 곳이라 찬 빗물에 퍼뜩 놀랐다. 햇빛을 가리는 데는 좋지만 비가 올 땐 젖을 수 있는 현관 지붕에 불과한 캡모자와 추운 맨팔을 가려주지 못하는 반팔 셔츠와 물이라도 맞으면 축축 늘어질 츄리닝 바지 모두 한 부위 한 겹씩 입었는데, 발은 양말과 신발을 모두 입고 있으니 잘 차려입은 셈이다. 이렇게 되면 실내든 실외든 갈 수가 없으니 새 양말을 신고 나와야 할 것이다. 나는 옆에 걸려 있는 손잡이가 동글동글해 지팡이 같은 우산을 보며 어차피 빗길을 걷다 보면 발이 좀 젖을 테니 우산을 쓰고 나가야 할지, 일부러 적신 양말을 갈아신으러 시간을 낭비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지만 조금 후 현관 문을 열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요즘 시간을 쓸 일이 많다 보니 이렇게 사소하게 시간을 낭비하는 게 즐거워지고 있었다. 나는 진열대에 진열된 멋진 지갑을 사면 내일 뭘 먹을지도 고민해야 할 사람이 참지 못하고 지갑을 사 버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원래 해서는 안 될 일을 충동적으로 저지르는 건 너무 즐겁다. 그게 후회할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나는 아내가 든 비닐봉지를 들고 아직 뒷처리가 덜 되어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11 어느 제작감독의 잠 못드는 새벽 (Ez0GLvfhwI)

2021-11-15 (모두 수고..) 09:36:07

창작극은 성공하기가 어렵다. 사람들이 잘 아는 고전 명작에 기반을 두지 않은 쌩 창작극은 더 그렇지. 그런 걸 보러 오는 사람은 대체로, 어지간한 극에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속된 말로는 썩은 물 관객 정도다. 그런 사람들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것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신새벽은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나름대로 애착도 있었던 오페라가 상영 기간만 채우고 시원하게 잊힘을 크게 아쉬워하지는 않았다. 중세풍의 가상 국가, 그것도 작은 시골 마을 배경에 좋게 말하면 독특하고 나쁘게 말하면 근본 없는 설정, 그리고 로맨스의 이뤄짐은 없고 성장만이 남는 여성 주연 서사는 선호하는 사람이 드물 테니까. 야심과는 달리 부족함이 많은 작품이었음에도 소수나마 마음에 들어 해준 관객이 있었음에 감사할 뿐이었다.

그런 심정과는 별개로, 자신이 무대에 올린 오페라의 주인공들이 한자리에 모여 수다를 나누는 속편 격의 짧은 글을 적고, 다른 연출과 구성을 구상해볼 정도로 미련이 남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이미 내려간 오페라 하나에 매달려 있기에는 계획해두고 구체화하고 실행해야 할 계획들이 산더미였다. 그렇게 그가 제작을 맡았던 첫 창작 오페라 '나르카'는 기억속에서 한동안 잊혔으나,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 그 이름은 뜬금없이 새벽의 귀에 다시 들어왔다. 공연이 내려간 후 유튜브에 올렸던 각 아리아의 클립 영상들의 조회 수와 댓글 수가 폭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애착이 있던 컨텐츠가 흥하기 시작한 건 기뻤지만, 그보다는 의아함이 앞섰다. 내려간 지 1년은 더 됐고, 당시에 그렇게 핫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왜?

그러나 놀람도 잠시, 새벽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깔끔하게 묻힌 줄 알았던 컨텐츠가 다시 흥하기 시작했다면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우선 흥하기 시작한 원인을 찾아보기 위해 바쁘게 손을 움직여 유튜브 등 SNS에서의 반응을 살펴보고 아이디어가 될 만한 것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몇몇 중독성 있는 아리아나, 특정 장면에서의 스크린샷이나 움짤 등이 밈이 되어 유행을 탄 것이 시작인 모양이었다. 조회 수 면에서나, 밈화 면에서나 특히나 핫한 것은, 도적들의 합창곡인 "아이고 배야"의 클립 영상이었다. 영상을 재생해보며, 새벽은 피식 웃었다. 다시 보니 노래뿐만 아니라 연기도 잘 해주셨네. 가사 자막도 적절한 때 나와서 짤로 만들기 좋았겠다. 어쨌든 반응이 핫하니, 조만간 출연진분들을 모시고 뭐라도 하자. 그다음에는 좀 더 손을 봐서 다시 무대에 올리고. 생각 나는 고칠 점은 몇 개 있지만, 그래도 리뷰만큼 확실한 게 없겠지.
새벽은 SNS 사이트를 켜둔 창을 한쪽에 밀어두고 공연 예매 사이트에 접속해서는, 초연 당시 달렸던 리뷰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보러 오는 사람이 적고, 리뷰를 쓰는 사람은 더더욱 적었던 창작 오페라의 특성상, 역시나 정독하기에 무리가 없는 분량이었다.

새벽은 아쉬움을 느낀 부분에 대해서만 따로 기록하며 리뷰를 읽던 중, 한 문장을 보고 의아함에 눈을 깜빡였다. 남자 주인공으로부터 배신을 당했다지만, 여주가 너무 오버하는 것 같았다는 의견이었다. 그랬었나? 그렇게까지 했으면 누나가 진작에 디렉팅을 이따위로 했냐고 한 소리했을 텐데. 의구심에 몇 번이고 해당 장면의 아리아를 돌려보던 새벽은, 뒤늦게야 아... 하는 소리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당 아리아가 시작되기 전 짧게 흘러간 레치타티보에는 배신감으로 인한 분노와 슬픔이 표현되어 있었다. 짧더라도 인상에 남으려면 남을 수도 있었겠다. 그렇다면 이걸 어떻게 만지면 더 자연스러워질까?

여주인공의 실제 모델이었던 누나 새별에게 연락하기엔 새벽 두 시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고, 새벽은 뜻밖의 상황에 복잡해진 머리를 비울 겸 음원사이트에서 평소 듣던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했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즐겨 듣던 노래들에 귀를 기울이던 새벽은, 문득 유독 또렷한 발음으로 들려오는 가사에 신경을 집중했다. 오랜 연인과의 권태기, 이별에 대해 담담한 톤으로 서술하는 가사는, 여주인공의 상황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었지만, 그는 작은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여주가 남주에게 호감을 느낀 것은 사실이라지만, 그만큼 속된 말로 깨는 장면도 자주 있었다. 마음이 식은 건 아닐까 번민하는 아리아도 들어간 판에, 남주의 배신에 심하게 슬퍼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설득력 없는 감정선일 수 있었겠다는 생각까지 머리에 스쳤다. 새벽은 이내 컴퓨터를 끄고 침대에 누웠다. 자신이 제작 총괄이기는 했지만, 가사와 스토리 전개는 극본가의 몫이었다. 재상연이 확정되는 대로 극본가님과 미팅을 가지자. 그 안에 작은 컨텐츠도 만들어보고. 애착을 가진 이야기가 다시 세상의 관심을 받은 것이 설레서일까, 새벽은 불을 끄고 누웠음에도 쉬이 잠들지 못했다.

12 이름 없음 (yqdCw6MVjQ)

2021-11-16 (FIRE!) 16:43:43

허무하게 꼬리를 이끌고서 너는 갔다 오색으로 반짝이는 꼬리에 꺼끌한 모래알을 묻혀가면서 너는 갔다 나는 잡지 않았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고향을 사랑했고 그리워했으니 내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워져 오직 시선으로 너를 쫓는다 너의 수지가 방금 바다에 닿았다 짠물이 낯선지 지레 겁을 먹고 몸을 떠는 네 모습에 난 아주 작게 소리를 냈다 이러면 한 번쯤은 나를 돌아봐 주겠지

13 인어왕자 (RmnNCYXtJ2)

2021-12-05 (내일 월요일) 11:01:38

<하늘은 바다의 색을 닮고, 바다는 하늘의 색을 닮았어. 나는 하늘을 볼 때면 바다에 있는 내 마음을 느낄 수 있어. 오래 전에 바다에 빼앗겨 버린 내 마음, 여린 심장에서 물을 짜내는 짠기에 괴로워 숨막혔을 때도 있었지만, 역시 내 마음이 바다에 잠겨 있는 한 나는 바다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물결치는 하늘색. 산산히 부서지는 흰 파도의 거품. 옛날에 읽은 인어공주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누군가의 단말마 같기도 한, 아름답다기엔 너무 지루한 자연. 그 앞에 나는 서 있었어.>

소년은 귀에 꼬아서 걸어 놓은 마스크 줄에 손가락을 걸었다. 그리고 잡아당겼다. 달랑달랑 한쪽 귀에 걸리던 마스크가 툭 튕겨져나와, 손가락이 빠지자 해변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소년은 분홍색 바탕에 흰 하트가 퐁퐁 튀어나온 슬리퍼를 끌다가 그것도 모래사장에 내던졌다. 휘청거리듯 발목까지 양말 자국이 남은 흰 발이 모래를 튀기며 착륙했다.

<마침내 첫 발을 내딛은 거야. 나는 아픔 없이 바다를 느낄 수 있게 된 거야. 온 몸을 내던져 바닷물에 잠길 수도 있고, 모래사장을 뒹굴며 옷 속에 들어간 모래를 털어내며 짜증스레 뛸 수도 있고, 맨발로 젖은 모래덩어리를 흩어 볼 수 있어. 그렇게 실컷 놀고 난 후에는 온몸의 바닷물이 말라서 모공이 소금으로 따끔따끔해질 때까지 바람을 쐴 수도 있지. 빨래 대신 건조대 위에 올라간 것처럼 파도 소리 들리는 땅 위에 두 발로 서서 바람을 맞을 수 있다고.>

소년은 사막의 모래언덕처럼 울룩불룩 솟은 작은 모래산들 꼭대기를 밟으며 위험천만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때다 싶은 순간에 갑자기 몸을 틀고는, 텔레비전 속 발레리나처럼 균형 잃은 몸을 모래 위에 닿은 유일한 발 하나로 휙 돌리며, 하늘이 잘 보이게 위쪽으로 돌아 바닥으로 쓰러졌다. 목이 부러질 걸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모래가 푹신한 솜이나 고향의 꽃밭처럼 목을 받쳐 줄 것이라고 믿었거나, 제 목이 젤리처럼 물렁물렁하다고 믿었거나. 아니면 장난 하나하나에 왔다갔다할 수 있는 제 목숨이라곤 신경도 안 쓰는 철없는 장난꾸러기거나. 정답은 3번이었다.

<하늘의 푸른색이 달을 따라 흘러나가기 시작하면 그 밑엔 바닥이 어디인지 모를 어둠과 반짝이는 별들이 남아. 종이에 걸러낸 바닷물 같지. 결정이 된 작은 소금만 거름종이 위에 남긴 바닷물처럼, 하늘의 잔여물은 별일 거야. 사람들이 좋아하는 밝은 빛에도 녹지 않아서 쭉 한 자리에 박혀 있는 이름 모를 광물들. 사랑스러운 보석들. 사실 나는 별을 본 적이 없어. 사진이나, 동화책 같은 게 아니면. 하지만 별을 직접 보면 틀림없이 아름다울 거야.>

하늘에 별은 떠 있지 않았다.

<보여주고 싶었어. 오래전 희미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하늘과 엄청나게 가까운 곳. 자연이 만들어 준 전망대. 이곳에서 별을 찾아 떠나려면 그곳밖에 없을 거야. 가까운 곳에서 출발하는 게 그나마 도착할 확률이 높을 테니까, 그치.>

바다를 떠난 인어왕자의 기억 속에 남은 꿈.

<보고 싶은 아와나미.>

보여주지 못한 꿈.


시미야 사이토(四宮 采斗), 19세.
물가의 그대
On a Shore with Love

나고야의 어른이 된 소년.

14 DADA propesser (hxdpoM2FsE)

2021-12-08 (水) 16:30:14

시간이 오래 흘렀다. 그다지 오래랄 것도 없지만 하루하루 위태로운 삶을 살았던 그에게 있어 한 손을 모두 접어도 다른 손이 필요할 정도면 제법 오랜 시간이다. 어느덧 여름 장미는 다섯 번을 흐드러지게 피었다 졌고, 새파랗던 이파리는 수줍은 사춘기 소년 소녀처럼 낙엽 붉혀졌으며, 늙은 노인처럼 주름 자글자글해져 땅에 귀속된 뒤, 새 생명 피어나듯 낙상홍 새빨갛게 영글고 눈 소복하게 쌓이는 겨울이 찾아왔다.

다시 발 디딘 원내는 방학 기간임에도 여전히 소란스럽다. 깃펜 떨어지는 것도 재밌을 시기인지라 별것도 아닌 수수한 대화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피어오르고, 이따금씩 큰 소리에 뒤돌아 보면 파란 노리개 찬 학생이 우당탕 소리 내며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달라진 점 없어 보이나 실상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전에 보이지 않던 얼굴이 늘어난 것도 있지만, 마주했을 때 공손히 인사하던 익숙한 얼굴과 어깨 나란히 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 그렇다. 몇 년 전만 해도 이게 이해되지 않느니, 저게 어렵니 하며 하나하나 질문하던 자는 이제 그와 같은 주제를 두고 연구를 하고 있다. 복도를 지나치던 학생이 불현듯 멈춰 서더니 그를 알아보고 소리 낸다. "선배." 하며 주의를 끌자 그는 고개를 돌린다. 그 또한 훌쩍 자라 영근 외모에서 어린 소녀의 편린을 마주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학생은 짧게 잘린 금발을 찰랑이듯 고개를 숙인다.

"그간 잘 지내셨어요?"
"나름. 자네는 이제 졸업반이 되겠군."
"네. 그간 선배가 주신 책으로 열심히 공부했어요."
"어려운 점은 없었나?"
"뒤로 갈수록 글씨가 개발새발인 점만 빼면요. 대체 마지막에 적어둔 건 아바다 케다브라인가요, 아베디아 케다브리아인가요?"
"직접 맞아보면 뭐가 맞는지 알겠지."
"여전하셔라."

학생은 우아하게 미소 짓는다. 한때 선배 바라기에 천덕꾸러기에 불과했던 금발의 소녀는 제 과거 훌훌 털어 물씬 자라 여염집 처녀처럼 귀하게 자란 모습을 그대로 내보였다. 그럼에도 눈동자는 절대 상냥하지 않았으니, 사신의 이름을 이어 받음이 틀림없다. 그가 남겨준 책이 어려운 것은 없었는지, 원내는 어땠는지, 학생은 어땠는지. 간단한 담소를 뒤로 능글맞게 "그래서 우리 선배, 혼인은 대체 언제 하신대요?" 하는 말에 명쾌하게 딱밤을 놓은 뒤로 더 걷다 보면 냄비 부글거리며 끓는 소리와 노래하는 약초 소리를 지나게 된다. 그가 꿈을 키우게 된 소리를 지나면 작은 구석에 나무 문이 자리한다. 더 이상 앙상하지 않고 곧게 뻗어난 손가락으로 문잡아 돌려 열면 기름칠 열심히 했는지 별다른 소음이나 힘을 줄 필요도 없이 매끄럽게 열린다. 찬 공기 술술 내밀던 복도와 달리 따스한 공기로 얼굴부터 천천히 감쌌다. 문지방을 밟고 넘어가 달칵 소리 내며 문 닫는다.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책상 위에는 전임 교수가 남겨둔 수업에 필요한 자료가 몇 쌓여있고, 그 위 벽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일정을 적어둔 메모가 붙어있다. 소파는 푹신하고, 구석엔 그가 직접 들여놓은 새를 위한 횃대가 있다. 고개 돌려 바라본 서재에는 책이 가득하지만 관리 잘 되는지 묵은내 하나 나지 않는다. 그의 연구실이다. 부임된 이후 얻게 된 오랜 건물 한구석은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됐다. 한때, 그가 학생일 적엔 저기 창 너머 검은 노리개 차고 춥다 노래를 부르며 분주하게 복도를 지나치는 학생 무리가 가는 길 그대로 따라가야 나오는 너른 기숙사에서 지냈다. 그가 살아온 기숙사는 사시사철 눈이 쌓여있고 겨울바람을 마주했지만 지금 저기 지나가는 학생 무리가 어서 도착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이해가 갈 정도로 따뜻했다. 그러나 그에게 그 온기가 안식처가 되진 못했다.

불과 몇 년 전이지만 그가 살던 세계는 혓바닥처럼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때때로 찾아오는 북풍은 죽음을 목전에 마주하는 것처럼 시렸고, 언제든 찾아올 위협을 시사하듯 매서웠다. 그 당시엔 수많은 죽음의 위협을 받았고, 죽지 않고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이 졸업보다 중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좋지 않았던 몸 상태에서 신경을 몇 배는 더 곤두세우고 살았고, 방 안의 포근한 온기마저 믿을 수 없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곤 했다. 날카로운 신경으로 하루하루 살아오던 세상은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변했다. 그리고 더 이상 그 누구도 죽지 않는다. 원내 사람들이 위협을 받고 살지 않는다. 아이들은 죽음의 위협을 마주해 뜬 눈으로 밤 지새우지 않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아무런 문제 없이 발 디딜 수 있다. 변한 세상이나 그 격동의 여파는 절대 작지 않다. 누군가 행복하다면 그만큼의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보이지 않는 평화를 이룩하기 전까지 발버둥 친 사람의 희생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를 비롯한 이전 세대의 사람이다.

격동한 세상은 그의 삶에 여러 생채기를 남겼다. 사람들은 그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른다. 알아도 그 사람의 인생에 하등 도움 될 바가 없다. 그저 생겨난 평화를 누리고, 평온하게 앞길을 향해 걷고, 새로 들이닥칠 어둠을 막아낸다. 밝은 사회를 위한 이면에 신경 쓰면 모든 것이 무너지기 때문에. 여전히 그는 드물지만 악몽을 꾸곤 한다. 짐승이 달려들어 한 여성을 물어뜯는 꿈이다. 그가 발로 걷어찬 여성은 뒤로 넘어간다. 이윽고 뼈를 씹는 소리와 함께 비명소리 하나 없이 죽는다. 옆에서 누군가 날카롭게 웃는 소리가 들리고, 그는 그 끔찍한 죽음을 눈으로 담는다. 뒤에선 이미 고인이 된 누군가 그를 멍하니 쳐다보며 대체 뭘 가르쳤냐 나무라는 목소리를 끝으로 그는 꿈에서 깬다.

그것만으로도 끔찍하지만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꿈은 관을 열었을 때 아무것도 없는 꿈이다. 가장 좋은 나무로 만들고, 정성스레 칠한 관. 뚜껑에는 홍 마노, 하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석 자를 적어두었는데 막상 열어보면 머리카락 한올 없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것도 끔찍하지만 시체가 온데간데없으니 장의사의 일을 겸하던 그에게 있어 가장 끔찍한 꿈이다. 그는 꿈에서 시간의 흐름대로 천천히 늙어간다. 힘없이 주저앉아 아무것도 없는 관 안을 더듬고 그 이름을 불러도 주변에도, 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그와 텅 빈 관만이 암흑 속에서 천천히 죽어가고, 그 관 안에는 있어야 할 시체 대신 그가 자리 잡는다. 그리고 꿈에서 깨면, 그는 살아있다.

두 꿈을 꾸고 나면 하루를 공친다. 식사는 누군가의 살점을 뜯는 것 같이 역하고, 깃펜은 손가락처럼 보여 집어던질 때가 있으며, 지팡이는 피범벅인 것처럼 보여 열심히 닦다 보면 그의 손바닥이 헤져 한때 그가 평화를 위해 찔렀던 여성이 아닌 자신의 피로만 범벅이 되어있었다. 수업을 진행하려 해도 귀에서 뼈 씹는 소리가 윙윙 울린다. 그럼에도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는 죽어 이전 세대에 머무르지 않고 유동적인 세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가 무엇보다 귀히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도 이 유동적인 세계에서 천천히 변해가며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변화에서 자기 자신을 유지해야 함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무너지지 않는다. 그는 혼자가 아니고,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이 아니며, 더는 자신과 같은 비극을 맞지 않도록 바른길로 학생을 인도해야 했다.

그가 교수가 된 이유도 그것이다. 횃대에 자리 잡은 까마귀가 길게 울었다. 윤기나는 깃털 달린 날개 멋들게 펼쳐 날아오더니 그의 어깨에 앉는다. 그는 늘 그랬듯, 앞으로도 그렇듯, 그 어느 순간에도 달라지지 않을 고귀한 사랑을 한번 돌아보고 손을 뻗었다. 그는 윤기나는 검은 머리카락을 한갈래로 낮게 묶었고, 둥근 안경 사이로 색 미묘하게 다른 눈동자를 유순하게 접어 웃었다. 날카롭고 신경적이던 어린 학생은 어느새 멋들어지게 자라 차분한 교수가 되었다. 세상이 변했고, 그도 변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는다. 오로지 사랑하는 자 위해, 둘 사이에 아이는 없으나 자식처럼 여기는 이 세계를 위해.

"드디어 취임식이고, 입학식이구나, 내 드디어 교수가 되었어. 아가, 부디 이 영광스러운 자리 같이 가지 않으련. 이번엔 부디 무지개를 토하거나 색이 변하지 않도록 내 용써보마."

그의 왼손 약지에 새 반지가 반짝였다. 마노석으로 귀히 만든 반지는 영원토록 함께 하리라.

15 (Hv5rIapgCI)

2022-03-28 (모두 수고..) 05:37:35

의자에 앉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치 설거지와 빨래는 끝났고... 이제 남은 건 청소 뿐인가. 의자를 당겨 식탁에 몸을 뉘이자 언제부터 쌓였는지 모를 피로가 몰려들었다. 슬슬 피곤하네. 눈을 감고 숨을 죽이니 동생 방에서 잔잔한 말소리가 들려온다. 편집자와 전화를 하고 있는 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몰라도, 내가 화두에 오르는 일은 영영 없겠지. 헛웃음이 나온다. 외로워. 너무나도 외로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냥 나랑 둘이서 살자. 내가 돈을 벌테니까 언니는... 언니는 아무것도 안해도 돼. 살아있기만 해줘. 제발..."
밧줄을 든 나를 껴안고 동생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텅빈 눈을 한 채, 동생을 끌어안았다. 동생을 울리다니. 나는 끝까지 칠칠맞지 못한 언니인 거구나. 헛웃음이 나왔다. 스스로가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 동생의 눈물이 흘러내려 옷을 적셨다. 그 눈물의 온도가 너무나도 따뜻해서. 차마 동생을 밀쳐낼 수 없었다.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동생을 혼자 남기고 떠날 만큼, 나쁜 언니가 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시작된 동거생활은 순탄했다. 동생은 생계를 책임지고, 나는 집안일을 도맡는다. 나를 위해서일까? 동생이 쓰기 시작한 소설은 점점 빛을 발했고, 너는 점차 앞으로 나아갔다. 걸어갈 힘조차 없었던 나는 너의 등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저멀리 서있는 사람이, 언제나 뒤를 돌아보며 멈춰있는 나를 챙기려든다. 그 상냥함은 하나둘씩 모여 나의 죄가 되어간다. 빈틈없이 쌓인 나의 죄는 나를 속박하고 순탄이라는 울타리를 더욱 촘촘히 만든다.


잠깐 잠에 빠져있었나. 시끄럽게 울리는 새소리에 눈이 뜨였다. 몸을 일으키니 어깨에 놓인 담요가 흘러내린다. 분명 동생이 잠든 나를 위해 담요를 덮어준 것이겠지. 오늘도 갚아야 할 죄는 늘어만 간다. 오직 너를 슬프게 하지 않기 위한 삶. 이런 삶에 의미는 있는걸까?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내게 보이는 풍경이 아름다울수록 나는 점점 더 추악해져만 간다. 아아, 사라져버리고 싶어. 당장이라도 이런 삶 따위는 그만두고 싶어. 따뜻함 따위는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아. 창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의 손은 창밖의 풍경에 닿지 않는다. 의미없는 손짓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고 힘없이 떨어진다. ...그 순간.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텅빈 눈에 한 순간 빛이 들어왔다.

16 이름 없음 (4cCLm9C0xU)

2022-06-02 (거의 끝나감) 02:28:49

" 세계를 지배하겠다는게냐? 짐을 눈 앞에 두고서? "

확실히 그는 경외할만한 사내였다. 하등한 필멸자임에도 당당히 내 앞에 찾아왔고, 내게 처음으로 상처를 입힌 존재였다. 아득히 먼 옛날, 나를 쓰러트리고 신이 되겠다며 덤벼왔던 마왕도, 인간종의 종말이 찾아올거라는 예언을 듣고선 모든 군대를 이끌고 덤벼왔던 인간의 왕조차도, 내게 상처를 입히지 못했으니.

" 차라리 세계를 지배하겠다는게 나을 정도로 시시한 이야기구나. 내 곁에 머무르고 싶을 뿐이라니. "

나는 조금 웃었다. 필멸자들은 이해할수가 없었다. 찰나의 순간을 살아가는 멍청한 종족들이기에, 수많은 욕망에 휩싸인다. 종의 번식을 바랄것이고, 부와 명예를 바랄것이다. 그런 저급한 욕망들을 위해 태양이 뜨고 지는 그 짧은 시간을 쪼개어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 아니던가? 그러나, 내 앞의 사내는 그 모든 것들이 성에 차지 않는 양 내 옆에 있는다는 지극히 단순한것을 소망할 뿐이었다.

" 마음대로 하거라. 너는 유일하게 내 몸에 상처를 낸 사내가 아니더냐, 충분히 자랑스러워할만한 일이지. 네가 앞으로 얼마나 살아갈진 모르겠지만, 내겐 한때일 뿐인 여흥일테니. "

그렇게 우리는 이따금씩 담소를 나누었다. 가끔 인간의 음식을 먹어보았고, 양이 차지 않아 아쉽다는걸 알게되었다. 가끔 대련을 했고 가끔은 싸우기도 했다. 그렇게 여섯번 눈을 깜빡인 정도의 짧은 시간이 흐르자, 그는 확실히 노쇠해있었다.

" 너, 이제 곧 죽겠구나. 내가 눈을 한번 깜빡였다고 느낄 짧은 시간이 흐르면. "

그는 대답하지 않고, 희미한 미소를 띄운 채 웃을 뿐이었다.

" 만족스런 시간이었느냐? "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눈을 몇번 깜빡였을 즈음엔 녀석이 있던 자리에 스러져가는 백골만이 존재했다.

" 찰나의 시간이 흐른것 같은데, 너는 어느새 정말로 죽어버렸구나. "

" 내겐 만족스러운 시간이 아니었다. 스쳐가듯 짧은 인연이었음에 어찌 만족하겠느냐. "

" 내 유일한 벗이여. "

...

" 그렇게, 드래곤은 자신의 모든 힘을 사용하여 세계에 축복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꽃과 나무에서는 엘프가, 땅과 바위에서는 드워프가, 초원에서는 수인이 등장했고, 지금의 사회로 발전하게 되었다는것이죠. 자, 이는 하나의 설화로써 창조신화적인 측면에서 해석해볼수 있겠는데요. 여기서 드래곤이 의미하는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

" 현재로써도 종족적인 측면에선 풀리지 않은 다양한 난제들이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이 설화가 존재했다는 약 만년전의 시간대인 꽃과 요정의 시대에서는, 자신들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궁금증이 그 당시 신의 존재성과 결합하여 드래곤이라는 경외시되는 종족의 형태로 발현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 아주 정확한 대답입니다. 그 당시에는 신이 살아 숨쉬던 시대였으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시기였기에 사람들이 숭배함에도 그 정의를 명확하게 알고있지 못하던 시기였죠. 여기서 신은 약 천년 후인 잃어버린 시대에서야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데... 이런, 시간이 다 되었군요. 그럼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배우는것은 언제나 즐겁다. 그러나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것들 투성이다.

" 돌아갈까? "

" 그래, 너도 내일 수업 없지? 돌아가면 고기나 실컷 먹자고. "

" ...어제도 고기 먹었는데? "

" 어제는 그냥 맛만 봤잖아. 감질나 죽겠다고. 배부를때까진 먹어야될거아냐. "

" 야, 진짜 뒤질래? 이럴거면 그냥 싸우자고 하던가~ 너 고기 배부를때까지 먹으면 한 700kg는 먹잖아. 그 돈 다 어디서 구하는데. "

" 아니 그러니까 내가 돈좀 벌어온다니까? 그 뭐야, 요새 무규칙 대련하는거 있잖아. 소규모 고대전쟁, 줄여서 SGG? 챔피언 벨트 함 따올테니까 상금으로 실컷 먹으면 될거아냐. 근데 그것도 못나가게 해~ 밥도 감질나게만 먹여~ 진짜 죽이고 싶은건 니가 아니라 나거든? 어? 시끼야, 슉 슈숙 원시회귀 펀치 임마, 어? 드래곤 브레스~ 임마. "

" 응 저쩔 섬살각~ 너 옛날에 나한테 졌잖아. 아직도 역린쪽 상처 쓰라리죠? 개발렸죠? 내가 이겼죠? 그리고 내가 죽으면 또 질질짤거죠? 나 살린다고 금술 썼다가 반필멸자로 떨어졌는데 이번에 또 추하게 울면서 살리면 내 반도 못살고 죽을거죠? 그러니까 부전승으로 내가 이김~ 오늘 저녁밥은 풀때기임 수구루빵뽕~ "

" 야. "

" ...어..? "

" 넌 오늘 진짜 뒤졌다. "

" 아니 야 이 미친년아 입에서 불나온다고, 불!!! "

오늘도 하루가 이해되지 않는것들 투성이로 끝나간다. 또 다시 찰나의 순간이 지나면 너는 또 다시 떠나가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나도 이번엔 그 찰나의 순간이 지나면 널 따라갈 수 있을테니.

17 이름 없음 (8wYomYyJQY)

2023-01-04 (水) 13:25:29

재미있군. 어디 죽을때까지 싸워보자. 네가 먼저 쓰러진다면 네 무덤에 키스해주지.

18 이름 없음 (euKapfO0/2)

2023-01-05 (거의 끝나감) 21:23:29

저 이역만리의 국가들과도 맞닿을 만큼 거대한 판도를 자랑하는 대환제국(大桓帝國). 그 제국의 황궁에서는 궁녀들이 꼭두새벽부터 타구와 요강을 비우거나 윗전께서 쓰실 세숫물과 손난로를 준비하거나 윗전 처소의 뜰을 깨끗이 정돈하는 등 등 각자의 소임을 다하느라 분주하다. 그런 가운데 관례(冠禮)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은 티가 역력한 나인이 저와 마찬가지로 빨랫감을 한가득 옮기는 중인 또래 나인에게 말을 꺼냈다.

“얘, 얘, 들었니? 홍 준장님이 이번에 만년장성(萬年長城)으로 부임하신대.”

“진짜? 아.. 내 낙이 또 사라지네.”

“얘가, 얘가! 무슨 경을 치려고 낙 타령이야? 우린 폐하바라기여야 하는 거 몰라?”

“왜, 눈은 즐겁잖아. 그 그림 같은 이목구비며 잘 빠진 몸이며..”

“뭐래? 난 못 들은 거다!”

“어우, 야!” 조심스러운 궁녀가 질겁하며 후다닥 앞서가자 촐랑거리는 궁녀가 자길 버리지 말라는 듯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근데 어쩌다 그 변방으로 가신대? 만년장성은 아(阿) 씨 가문 영지 아냐?”

조심스러운 궁녀는 못 들은 척 세답방에 들어가서는 우물물을 긷다가, 촐랑거리는 궁녀를 흘기고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얘는, 생각 안 나? 만년장성 부서졌다는 장계 올라왔을 때. 마족을 못 막으면 폐하께서 몽진하셔야 하나 어쩌나 난리도 아니었잖아.”

“아~, 근데 그거 아 씨 가문이 다 막았잖아. 그래서 폐하께서 훈장도 내리셨고. 그러고 보니 그 훈장 받은 대령님도 미모가 아주 그냥 후광이 비치던데.”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조심스러운 궁녀가 인상을 구겼다. 그러나 그도 잠시, 조심스러운 궁녀는 말을 말자는 듯 고개를 내젓고는 속풀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빨래를 마구 주물렀다.

“부서진 게 문제라나 봐. 하기사 만년장성이 어떤 데야? 태풍에도 끄덕없고 균열도 절로 복구된다고 신의 성이라고도 하잖니. 근데 폭탄 테러로 부서졌대. 범인도 못 잡았고.”

빨래를 하면서도 조심스러운 궁녀의 말에 집중하던, 촐랑거리는 궁녀가 벙찐 표정을 띠며 손을 멈추었다. 그러다 스스로에게 놀란 듯 화들짝 움츠리더니 빨랫감의 더러워진 부분을 다시 비비며 되물었다.

“그럴 수가 있어? 거기 병력이 몇인데? 폐하께서도 각별히 신경 쓰셔서 군자금 팍팍 대시고 설비도 최신식으로만 했다지 않았나?”

“그러니 큰일이지. 테러범이 투명인간이 아니고서야 무슨 수로 폭탄을 터뜨리냐고.” 조심스러운 궁녀는 빨래에 시선을 고정하고 손을 계속 놀리면서 대꾸했다. “그래서 폐하의 측근인 홍 준장님이 가시나 봐. 병력도 아 씨 가문의 갑절이나 데려가고 계급도 더 높으니 아 씨 가문도 함부로 못할 거라나?”

“그렇구나.. 와.. 세상 모를 게 어심(御心)이다. 난 폐하께서 훈장 내리실 때 그 대령님 출세길 활짝이겠다 했는데.”

“너 죽고 싶니?! 우리 같은 궁녀 나부랭이가 어심을 어떻게 알아? 그렇게 넘겨짚다간 뼈도 못 추려, 얘! 빨래나 해. 늦겠어!”

“아, 응!”

둘은 수다를 그치고 손을 재게 놀렸다. 그래서 빨래를 제 시간에 마쳤을지 아닐지는 하늘이나 알 것이다.

19 이름 없음 (Jadzq1pfas)

2023-01-05 (거의 끝나감) 21:31:40

웃기지만, 이게 진짜다.
그 날의 환상은 그저 신기루였던 것이다.
그런 네가 아름다울 리 없다. 이것이 현실이다.
믿지 말거라, 순교자들을, 영웅들을, 모험가들을, 현자들을.

눈을 뜨자 제일 먼저 느껴지는 것은 오른다리의 환상통일 것이다. 베드에서 일어나면서는 관절이 삐그덕거리면서 갈리는 날카롭고 묵직한 통증일 것이고, 그 다음에는 굳은 몸의 이곳저곳의 근육통, 그리고는 건조한 피부에서 느껴지는 극도의 가려움일 것이다.

어찌되었건 모두 통증이다.

테이블 위에는 담배가 한 팩 있다. 원래는 피우지 않는 것이지만.
왠지 그 친구가 준 것일까 하여 한 대 태운다.

파이가 먹고싶다.

여긴 비가 새나? 객실 관리도 안 하나 보죠?

20 이름 없음 (Jm9Pts2rN2)

2023-02-14 (FIRE!) 00:20:37

nnnn년 n월 n일
날씨 흐림

어... 뭐부터 적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도 머릿속이 어지럽다. 그렇지만 써야지. 그래.
오늘 친구가 나한테 죽고 싶다고 말했다. 힘들어서 오늘은 자세히 못 쓰겠지만, 위급상황이었다. 그때는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 친구가 날 안 보는 사이 최대한 티를 안 내려 노력하며 문자로 119에 신고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도 패닉상태였던 것 같은데 용케 단번에 정확한 위치까지 써서 보냈네. 그래, 그건 잘했다.
그러고 나서 시간을 벌려고 아무말 대잔치나 했던 것 같다. 밥은 잘 먹냐, 잠은 잘 자냐. 죽고 사는 문제는 중대사니까 적어도 2주 정도는 삼시세끼 챙기고 밤에 자고, 여유 되면 하루에 10분 이상 산책도 하고, 그러면서 컨디션 좋을 때 다시 한번 진지하게 고려해봐라. 후회한다고 해서 돌이킬 수 있는 일도 아니지 않느냐.
그렇게 떠드는 사이 구조대원 분들이 오셨고, 걔는 그분들이랑 같이 갔다. 내가 신고했다는 걸 알았을 진 모르겠다. 그래도 노파심에, 그 친구 카톡에 몇자 남겼다.

생명의 전화: 1588-9191
보건복지 상담센터: 129
서울시자살예방센터 : 1577-0199

이 번호들이랑, 나에게라도 말해줘서 고맙다는 말, 나는 많은 도움이 되지는 못하지만 이 번호로 전화한다면, 어떻게든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말. 네가 필요한 도움을 받고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길 진심으로 바란다는 말까지.

이 말들이 그 친구에게 와닿았을 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내 딴에는 최선을 다했다는 거만 생각하기로 했다. 쓰다 보니 또 눈물 나네. 누구라도 멘탈이 나갈 상황이라고 생각하긴 한다만, 이 여파가 내 예상보다 세게 올 줄은 몰라서 좀 당황스럽기도 하다. 아, 술 땡긴다. 근데 슬플 때 술 마시는 건 알코올 중독의 지름길이니, 내일이 공강이고 모레부턴 주말임에 감사나 하면서 그냥 차나 한잔 마시고 자자. 그래도 일기에라도 찌그리니 기분이라도 좀 나은 것 같다. 내일은 코노에서 서른 곡, 서른 곡 땡길테다.

뚝 그치고 꿀 반 티스푼 넣은 캐모마일 차를 들이켜며, 오늘 일기 끝.

21 그 불쌍한 부잣집 아가씨의 옆자리? (C3mFHKsD4U)

2023-07-14 (불탄다..!) 15:16:38

종례가 끝났다. 몸을 짓누르는 피로에, 진은 그대로 일어나지 못하고 책상에 늘어지듯 엎드렸다. 긴 하루였다. 하필이면 마지막 교시에, 수행 평가에 들어가는 조별 과제의 발표가 있었던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학원에 독서실에 눈코 뜰 새 없는데, 이 조별 과제 때문에 다사다난한 짝사랑 끝에 겨우 사귀게 된 남자친구와도 데이트다운 데이트는커녕, 멀리 떨어진 반이라 얼굴조차 못 보고 일주일을 지냈던 차였다. 조금 미안했지만, 상황 설명도 그때그때 제대로 했고 걔네 반도 수행평가는 있었을 테니 이제부터 재미있게 놀면 되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진은 돌려받은 휴대폰으로 남자친구 조지안에게 카톡을 보냈다.

[지안지안]
[나 오늘 수행 끝났어!]
[학교 끝나고 시간 돼?]

보내기가 무섭게, 메시지 옆에 찍힌 조그마한 1자가 사라졌다. 폰 받자마자 내 연락만 기다렸나 보군, 귀엽기는. 진은 씰룩이는 입꼬리를 다잡으며 메시지를 한 번 더 보냈다.

[지금 너희 반으로 갈까?]

이번에도 어김없이 1은 사라졌지만, 몇 분이 지나도록 답장이 없었다. 폰 켜두고 있다가 다른 애한테 말 걸렸나. 느긋한 체하려다가도 액정을 힐끔거리고 있자니, 갑자기 지안에게서 카톡이 왔다. 일언반구 말도 없이, [드렁큰]이라는 건물의 주소만 덩그러니 찍혀있었다. 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이름이네. 술집 같아. 근데 이래선 마치, 여기로 오라는 것 같잖아. 지안이가 모범생이랑 거리가 멀긴 하지만 그 정도로 선넘는 짓을 할 녀석은 아니라서 반한 건데. 잘못 보냈나. 일단 걔네 반으로 가봐야지. 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고 지안의 반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안의 반에 가보니, 학생 몇명이 남아서 숙제를 하고 있었고, 그 중에 지안은 보이지 않았다. 진짜 먼저 간 거야? 실망감에 돌아서려던 찰나, 지안의 반에 오가다 친해진 친구인 이정이 눈에 띄었다.

"지안이 벌써 집에 갔어?"
"조지안? 걔 점심시간 나절부터 교실에 안 들어왔는데. 학교 짼거 아냐?"

학교를 쨌다고? 진짜로? 그 말을 듣는 순간, 다시금 지안에게서 온 술집같은 이름의 주소가 생각이 나며,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예감이 강하게 엄습했다. 진은 정신없이 학생에게 고맙다고 말하고는 급하게 학교를 빠져나와, 트렁큰 이라는 건물로 향했다. 학원에 가는 날이었지만, 신경쓸 여유 따위는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믿었던 남자친구가 학교를 짼 건 둘째 쳐도 술집에 가 있다니,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가까이 가본, 드렁큰이라는 가게는, 그냥 술집도 아니고, 속된 말로 룸빵이라고 부르는, 유흥업소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양복을 입은 남성 두 명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진이 무작정 입구로 다가가자, 남자들은 그를 막아섰다.

"어허, 학생, 안돼. 이런 데는 학생이 올 데가 아니야."
"여기서 놀려고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여기에 제 남자친구가 있는지 없는지만 확인할게요. 들어가게 해주세요!"
"글쎄, 안 된다니까!"

진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입구 안에서 어깨에 문신한 남자가 나와, 남자들을 옆으로 제치고 말을 걸었다.

"이 진, 맞지?"
"그런데요?"
"니 남친 안에 있다. 들어와 보던가."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개소리라고 치부하기에는, 진은 눈앞의 남자를 본 적이 있었다. 한 때 지안과 어울려 다니던 3학년 선배였다. 진은 마른세수한 뒤, 선배를 따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무서웠다. 유흥업소니만큼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장 컸고, 이 안에서 정말로 지안을 볼지도 모른다는 것도 못지않게 두려웠다. 선배는 어느 방 앞에 멈춰서서는 문을 열었다. 그 방 안에는, 아니나 다를까, 양주며 소주며, 각종 술병이 어지러이 굴러다니고 있었고, 열 몇 명 남짓한 학교 양아치들과... 지안이 있었다. 그는, 양아치들 사이에서 병째로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믿고 싶지 않은, 부정하고 싶은 광경이었다. 그때, 차가운, 술기운에 잔뜩 꼬부라진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용건이 뭐야."

뻔뻔하게도, 잘못하기는커녕 도리어 저가 상처 입었다는 듯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이는 목소리에,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진정하려고 애를 써봐도 진정되지 않았다. 진이 침묵하자, 소파에 반쯤 누워있다시피하던 지안이 재차 쏘아붙였다.

"용건이 뭐냐니까? 말도 제대로 못 할 거면 꺼져."

그 말에, 염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태도에, 조금 전만 해도 뜨겁게 달아오르던 머리가, 거짓말처럼 폭 식었다. 진은 어느새 표정조차 없어진 무미건조한 얼굴로, 조금 전까지는 자신의 남자친구였던, 다른 여자아이와 진심으로 다툴 정도로 좋아했던, 그러나 지금은 유흥업소에나 출입하는 쓰레기일 뿐인 남자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지안을 짝사랑하던 시절, 그가 자신에게 했던, 하소연인지 자학인지 모를 말이 떠올랐다. 꼴통. 그 때는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했다는 게 가슴 아팠고 몇번이고 부정했지만, 지금 보니 그 말 만큼 지안에게 어울리는 말이 없었다.

"...너 진짜 꼴통 맞구나?"
"뭐...?"

당황과 분노가 뒤섞인 얼굴로 멍청하게 되묻는 지안을 보니 절로 조소가 새어나왔다.

"니 입으로 꼴통이라며? 말 뿐이었나보네, 성매매 업소에나 드나드는 주제에."

그대로 등을 돌리자, 무어라 악을 쓰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진은 방을 나와서는 곧장 밖으로 내달렸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울더라도 이런 공간에서는 울고 싶지 않았다. 업소에서 나와 바깥 공기를 쐬니, 머리가 식었다. 화가 나고 슬픈 것과는 별개로, 지금 봤던 광경은 명백한 범법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울음이 쏙 들어갔다. 편의점 안에 들어가, 112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여기, OO 편의점 OO 점인데요... 근처의 유흥업소에서 청소년을 출입시킨 걸 봤어요... 네, 네... 편의점 앞에서 뵐게요..."

전화를 끊자, 참았던 눈물이 솟구쳤다. 억울하고 분했다. 저런 새끼인 줄 알았으면, 성매매 업소나 드나드는 새끼인 줄 알았으면, 그렇게 마음을 다해서 좋아하지 않았을 텐데. 내 시간도, 내 감정도 그런 식으로 낭비하지 않았을 텐데. 그런 밑바닥 인간에게 정을 붙인 스스로가 한심하고, 진심으로 좋아했던 상대가 저런 쓰레기였다는 사실이 허탈했다. 진은 눈물을 닦은 뒤, 편의점에서 초콜릿을 잔뜩 사서 나와서는, 경찰이 오기 전까지 조금 더 울었다.

22 ...에는 할머니가 계신다. (C3mFHKsD4U)

2023-07-14 (불탄다..!) 15:17:38

훌쩍임이 끊이지 않는 고급 승용차 안, 뒷자석의 차선옥 여사는 짜증스럽게 차창 밖만 바라보았다. 세상없게 귀한 손주가 납치라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 그 동기가 남자애에게 애정을 구걸하기 위함이었다는 것, 뒤치다꺼리를 하노라고 했지만 결국 범죄를 은폐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 그 난리를 쳤는데도 손주가 옆에서 세상 끝난 듯 울고 있다는 것, 그 모든 것이 언짢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그만 울라고 윽박지를 수도 없었다. 흥분해 있을 때 그래 봤자 서로 악다구니만 쓰게 될 테니까. 그럼 운전 중인 허 기사만 정신 사나울 게 뻔하다. 그래서 차 여사는 치미는 울화를 삼키며 울음소리가 가라앉길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훌쩍임이 서서히 뜸해지다가 잠잠해졌다. 소음이 가시자 심란함도 가라앉는 듯했다.

“다 울었냐?” 물티슈와 차에 비치된 손 소독제를 건네자, 손주는 차 여사를 힐끗 보다가 받아서 손을 닦았다. 어느 정도 진정한 모양이다. “사내놈한테 볼일이 있으면 가둬도 그놈을 가뒀어야지, 뭐하러 다른 앨 잡아?”

“그치만! 거슬렸는걸! 내 껀데! 갖은 애를 써서 내 꺼로 만들었는데! 그 기집애가 아무렇지도 않게 가로채잖아! 조지안 그 자식도! 통화는 나랑 해 놓구 그 기집애만 찾던걸! 나 보란 듯이 막 사진 보내고!”

빽 내지르는 소리에 귀가 다 얼얼했다. 울고 짜던 꼴보다는 한결 낫다만. 헌데 사진을 보내다니? 이건 무슨 말인가?

“무슨 사진?”

“오토바이 탄 사진! 그 기집애 폰에다 보냈어! 부른 건 난데!”

“그 애한테 간 걸 니가 어떻게 알아?”

“가뒀으니까! 폰도 가져왔지!”

어안이 벙벙해졌다. 자신이 제대로 이해한 거라면, 그 사내놈이 자기 사진을 보낸 게 손주에게서 그 애를 가뒀단 소릴 들은 뒤라는 건가? 그러니까, 사람이 납치됐다는데 요즘 말로 ‘인증 샷’이라는 걸 찍었다고? 그걸 파악하자 그만 울화통이 터져 손주의 등짝을 후려쳤다.

“이 맹추야! 등신아! 어디 남자가 없어서 그딴 미친놈을 건드려!?”

“악! 왜 때려!!!”

손주가 악을 쓰며 팔로 막았지만, 분이 가시질 않았다. 몇 번 더 때리고 악다구니를 쓴 뒤에야 차 안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이래서야 허 기사가 운전이나 제대로 하겠나. 차 여사는 손주를 밀친 뒤 헛기침을 했다.

“허 기사, 아무 주차장이든 들어가 주게! 최대한 빨리!”

그러는 사이에도 손주는 왜 때리냐며 짜증을 부렸다. 차 여사는 이마를 짚고 입을 다물었다, 속으로는 참을 인 자를 되뇌며. 그런 끝에 허 기사가 근처의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 그에게 5만 원 권 지폐 몇 장을 건넨 뒤 요기라도 하고 오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손주와 둘만 남자, 차 여사는 차게 말문을 열었다.

“누가 날 납치한다 치자. 이 할미가 힘은 없으니까 양아치 몇이 달려들면 답 없지. 그럼 어쩔래?”

“뭘 어째? 그 새끼들 다 잡아 죽이지. 경호원이든 경찰이든 못 찾으면 모가지야!”

“내 폰에 니 사진은 안 보내?”

“내가 바보야?! 폰은 납치범한테 있을 게 뻔ㅎ…!?”

잔뜩 독이 올랐던 손주가 뭔가를 느낀 듯 입을 다물었다. 마음이 좀 놓였다. 제멋대로에 고집불통이다가도 뭔가 납득한 순간 순순해지는 것, 차 여사가 좋아하는 손주의 이면이었다. 사내놈한테 환장했어도 아주 먹통이 되지는 않았구나. 차 여사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그치, 신고할까 봐 폰부터 압수했겠지, 오늘 니가 그랬듯이. 사진이 아니라 사진 할애비를 보내도 개뿔 소용없는 짓이란 말이다. 사람이 감금됐다는데 그런 짓을 하는 건, 그놈한테 중한 게 너도 그 애도 아니라 요즘 말로 가오라는 뜻 아니냐?”

성질 같아선 고작 그딴 놈이 좋다고 한 거냐고 내지르고 싶었으나, 그건 참았다. 너무 열을 내면 도리어 반발 심리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나 약 올리려고 그런 거 아닐까? 나 보라고 보낸 거야!”

“그래서 얻는 게 뭔데? 니가 홧김에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너도, 그 애도 골치 아파지는데 그랬다고? 그랬으면 진짜 바보지!”

“…….”

침묵이 고였다. 어둑한 차 안이었지만 손주의 입꼬리가 축 처진 건 보였다. 무리도 아니다. 애착을 가졌던 상대가 형편없는 인간임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하물며 그 난리를 칠 만큼 애착이 강했다면 오죽하겠는가. 그래도 믿고 싶었다, 손주의 분별력을. 폼 잡느라 천지 분간 못하는 머저리도 못 알아본다면, 앞으로 아랫사람 부리기가 쉽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묵묵히 기다리는데, 별안간 손주가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악!!!!!” 너무 급작스러워 저도 모르게 귀를 막았지만, 비명에 가까운 고함은 막힘없이 귀에 꽂혔다. “그딴 븅신한테! 내가!! 기분 나빠!!!”

다행이다. 차 여사는 쾌재라도 부르고픈 기분을 애써 감추며 손주의 손을 쥐었다.

“알았으면 됐다. 이제라도 알아봤으니 다행이지.”

“…하지 마. 창피해.”

손주가 차 여사의 손을 뿌리쳤지만, 칭얼거리는 듯한 목소리에서 진심은 아닌 티가 났다. 그제야 차 여사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이제는 두 팔로 감싸 안지 못할 만큼 커 버린 손주를 끌어안았다.

“괜찮다. 사람 알아보기는 원래 어려워. 이번에 하나 배웠으니까 기억해 두려무나. 널 구차하게 만들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다. 주제 파악 못 하고 나대는 것들은 니 세계에서 쳐내면 그만이야.”

“…응.”

손주는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처럼 차 여사의 품에 폭 묻혔다. 그런 손주를 내내 토닥이며 차 여사는 괜찮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23 이름 없음 (pO13pQjU4U)

2023-07-14 (불탄다..!) 16:44:58

"네가 좋아."

두 눈 멀쩡히 뜬 것 무색하게, 발언의 종착점이였던 이는커피만 휘적였다. 티스푼을 두어 번 찻잔 입구에 털더니, 하는 말은 고백한 사람 무안할 정도로 덤덤했다.

"그래?"

질문이되 질문은 아닌 답. 그저 호응일 뿐이였다. 고백을 한 당사자는 그걸 보고 그저 시시덕거린다. 그런 시시콜콜한 답을 예상하였던 것 마냥 받아드리더니, 상대의 손목을 붙잡고선 끌어안아 버린다. 가슴팍과 가슴팍이 닿은 표면이 아파올 정도로 팔을 죄었다만, 그도, 상대도 그 얼얼함에 딱히 신경을 쏟진 않았다.

"죽어도 좋지?"

그걸 들은 상대는 손에 들린 커피잔의 액체가 넘실대는 것을 주의깊게 보다가, 그 움직임이 진정되고 나서야 답을 한다.

Powered by lightuna v0.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