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사항 ※최대 12인이 제가 받을 수 있는 한계입니다. ※총 10개의 대사건이 모두 일어나면 완결됩니다. ※이 스레는 슬로우 스레로서, 매우 천천히 진행됩니다. 진행은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 보통 오후 2시~4시 사이에 진행되며 길면 2시간 짧으면 1시간 반 진행되니 참고 바랍니다. ※이 스레는 수련만을 위해서 세워진 무림비사의 수련 스레입니다. ※수련은 @을 달고 달아주세요. ※유혈 묘사 등이 있사오니 주의 바랍니다. ※이 외에 미처 기억하지 못한 주의사항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참치어장 상황극판의 규칙을 준용하며, 이에 기속됩니다.
곡검과 곡검이 부딪혔다기엔 이상한 소리가 났다. 방이는 어떻게든 핑계를 대며 싸움을 피하려 했지만 완고한 하리의 뜻에 어쩔 수 없이 검을 들었다. 하리의 기습은 예고없이 날아들었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회심의 중무일검이 가로막힌 하리는 손이 저린지 얼굴을 찡그렸다. 그 탓에 잠시 틈이 생겼으나 다행히 그 사이 반격은 없었다. 하리는 그대로 다시 한번 있는 힘을 다해 곡검을 내리쳤다.
까강!
이번에도 중무일검. 짐승의 발톱마냥 매섭게 할퀴어오는 일검이었으나 소리만 크고 말았다. 조금 전보다 더 간단히 가로막혀버린 검 탓에 큰 동작을 썼던 하리의 꼴만 우습게 됐다. 분명 당당한 검술의 하나이건만, 이리 손쉽게 막혀서야 쓸모가 없다. 차라리 촌부가 마구잡이로 휘두른 낫이 더 예측하기 힘들었을 터. 이래서야 일류 무사의 한 수라기엔 부끄러운 노릇이었다.
"이익...!"
하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직 겨우 두 번 막혔을 뿐이다. 아직, 아직 승부는 나지 않았다.
현란한 검격이 정신없이 쏟아졌다. 보통 사람은 눈으로 따라가기도 힘들 만큼 재빠르고 종잡을 수 없는 검격이었다. 반월비. 수많은 변초가 들고 났으나 그 중 허초는 하나도 없이 모두 급소를 노린 살초였다. 웃으며 지켜보던 수적들조차 말려야 하나, 하고 자리에서 일어설 만큼 누가 봐도 위협적인 검이었다.
분명 그래야 했건만.
챙- 채챙- 챙-
반쯤 자리에서 일어섰던 수적들이 파하고 웃으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조금씩 뒤로 밀려나긴 했으나, 방이는 그 독랄한 검격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막아냈다. 마치 사전에 합을 맞춰 연습하기라도 한 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교한 방어였다.
"둘이 비슷하긴 한데, 그래도 역시 하리가 우세하긴 하네." "쟤네 싸워서 이긴쪽이 누님, 오래비 하기로 했다잖어. 괜히 아직까지 하리가 누님 소릴 듣는게 아니지." "그래도 형문이 저 녀석도 꽤 한다? 원래 저리 잘 싸웠나?" "상대가 하리라 그런거 아니냐? 맨날 싸우다 보니 익숙허것지."
구경꾼들의 이야기를 들은 하리가 검격을 멈추고 방이를 노려봤다. 검까지 아래로 내린 완전한 빈틈. 그러나 방이는 섣불리 공격하지 않았다. 전투는 그렇게 잠시 소강상태에 빠지고, 서로 노려보기만 하는 갑판 위의 대치가 이어졌다.
쇠끼리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방이의 곡검이 하리의 검을 낚아챘다. 중무팔검 제 1성. 중아의 수법이었다.
다행히 검을 놓치지는 않았으나 하리는 꼴사납게 끌려가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자세는 흐트러지고 놀란 어깨는 아팠다. 이대로 한 수만 더 날아온다면 그대로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
"......."
찰나의 순간조차 무공을 배운 자들 간에는 목숨이 경각에 달하게 만들기 충분한 시간이건만. 결코 짧다 할 수 없는 수 초가 지나갔다.
하리는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천천히 검을 빼냈다. 그 큰 동작이 끝날 동안 방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하리가 칼을 빼는 바람에 균형을 잃기라도 한 듯, 휘청이다 뒤로 한 발을 내딛는 것이 제 몸 가누기도 바빠 보였다. 구경꾼들의 탄식이 이어졌다. 겨우 만든 아까운 기회를 어처구니 없이 잃었다는 것이 총평이었다.
그 꼴을 본 하리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단순한 심통이 아닌, 제대로 화가 치솟은 표정. 하리는 분이 그대로 실린 기습을 가했다.
느긋이 구경하던 자들이 이번에야말로 정말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식간이었다. 수적들이 말릴 새도 없었다. 하리는 곧장 직선으로, 쏜살같이 방이에게 달려들었다.
강래수공, 제 4성. 장강이 부른다
돌진하는 힘에 몸무게를 합친 충격. 말 그대로 상대를 엎쳐버리는 수법. 방이의 몸이 기울고, 균형을 잡으려 허우적대던 팔조차 꽉 붙잡은 하리의 팔에 가로막혀 멈췄다. 그러잖아도 갑판 끄트머리에 섰던 몸이다. 그러니 제아무리 무림인이라 한들 작정하고 균형을 뒤흔드는 데는 속절없이 당하는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첨벙!
".......이러면 어떻게 된 거냐?" "하리가 이긴거 아니냐? 하리가 엎쳐서 넘어간거니까. 저거 강래수공이잖어." "그러네, 하리가 이겼네. 끝에만 살짝 밀릴 뻔 했지 내내 압도하기도 했고." "에잉 형문이 녀석, 이번엔 이기나 했더니. 자, 내 돈 가져가라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주욱 잡아당겨 물을 짜냈다. 물 덩어리가 후두둑 떨어졌지만 물에 빠진 생쥐 꼴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머리며 옷이며 물이 뚝뚝 떨어지지 않는 곳이 없었다. 몇 번 짜거나 터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을 듯 했다.
흠뻑 젖은 겉옷을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 두고, 호롱불 앞에 앉아 손에 든 곡검을 노려봤다. 불빛 아래 비춰본 검은 형편없이 이가 나가 있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분명 흠 하나 없이 시퍼렇게 날이 섰던 검이었다.
"씨이......."
하리는 낮의 비무를 떠올렸다. 순식간에 검을 낚아챈 중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대응할 수 없었다. 그게 중아였다는 것을 아는 지금조차, 솔직히 어떻게 막아야 할 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리는 이를 박박 갈며 움푹 패여버린 곡검을 매만졌다. 괜히 이가 나간 부분을 꾹 눌러봤지만, 그런다 해서 상한 검날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일은 당연히 없었다.
중아의 동작은 따지자면 셋쯤으로 나뉜다. 상대의 검까지 접근하는것으로 하나, 그것을 제대로 걸도록 감싸는 것으로 하나. 그리고 그것을 놓치지 않은 채, 올바른 방향으로 당겨오는 것이 마지막 하나. 셋 모두 간단한 일이 아니다.
무림인이란 검이 날아올 때 피하기보단 맞서 부딪히길 좋아하는 족속이니, 접근까지는 비교적 쉽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걸고, 놓치지 않고 끌어당기려 한다면 꽤나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자칫 상대의 검이 걸리지 않고 곡검의 바깥과 부딪혀 헛맞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고, 어떻게 잘 걸었다 하더라도 무게중심을 고려해 제대로 아래쪽에 걸지 않았다면 잡아당기기도 전에 스르륵 빠져버릴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아래쪽에 걸어서도 안된다. 걸린 곡검 위 그대로 노출된 상대의 검날 때문에 멋모르고 당겨오다간 내가 상할지도 모르는 탓이다.
옳은 위치에 옳게 건 검을 옳은 방향으로 잡아당겨, 상대의 검이든 균형이든 둘 중 하나를 빼앗아 우위를 점하는 것. 그러면서도 나는 잃는 것 없이 털끝 하나 다치지 않도록 하는 한 수. 그것이 하리가 아는 중아의 요체였다.
그것은 중아를 쓰는 입장에서의 이야기였다. 공격을 가하는 입장에서는 그 세 동작을 아는 것으로 족했다. 그러나 그것을 막고 피하며 대응하는 입장에서는 어찌해야 좋은가? 게다가 그것이 곡검끼리의 싸움이라면? 반월형의 곡선은 장점도 되고 단점도 되었다. 올곧은 직검이라면 무게중심을 이리저리 옮기는 것 만으로도 어찌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수련이 깊은 자의 중아라면 제아무리 직검이래도 빠져나가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곡검보다야 직검이 빼내기엔 나을 것이다.
그러나 곡검과 곡검은 어떤가? 서로 아귀가 딱 맞으니 걸려들었을 때 빼내려면 방향을 한참 뒤틀어야 한다. 일단 한번 걸려들고 나면 급격히 불리해지는 것이다. 그만큼 빙 둘러 잡아채야 하고, 애초에 방향도 맞아떨어져야 하니 걸리기도 어렵긴 하지만.......
"잠깐, 그럼 내가 그렇게 걸려들기 좋은 방향으로 들고 있었다고? 내가 방이와 싸운 것이 몇 날인데!"
하리는 검을 내려놓고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아직 물기 가득한 머리카락에서 주륵 강물이 흘렀다. 신경질적으로 손을 털어버린 하리는 애써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런, 이런 각도로 칼날이 서 있을 때 중아가 걸려오면 필패니까... 이익! 이걸 다 빼고 나면 할 수 있는 동작이 너무 제한되는데!"
하리는 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중무팔검의 초식을 펼쳤다. 단순한 초식 시연만은 아닌 것이, 눈앞에 가상의 적이라도 있는 양 검을 맞대고 떼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여전히 어깨에서 둔통이 느껴지는지 크게 검을 휘두를 적에는 사뭇 아미가 찌푸려지긴 했으나, 그 순간에조차 하리는 끊어짐 없이 검을 휘둘렀다. 수적이 된 이래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해온 검. 놀란 어깨 따위에 새삼 초식을 펼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시 한번 곡검이 허공을 넘나들었다. 상정된 가상의 상대는 조금 전과 똑같은 방향으로 똑같이 공격해왔다. 그러나 하리의 움직임은 아까와 달랐다. 자신있게 휘두르며 들어가다가도 멈칫하다 망설이고, 각도만 바꾼 같은 동작을 몇 번이나 다시 취하며 시도하기도 했다. 또 낯선 움직임을 시도하다 발이 꼬여 휘청이는가 하면,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답답하다는 듯 수차례 검을 고쳐쥐고 파지법을 바꿔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런 모든 노력이 무색하게도, 하리는 상대가 잡아채기 좋은 자세를 취하지 않고도 싸울 수 있는 검로를 찾아내지 못했다. 한 동작 한 동작 낱낱이 분해해가며 고민했음에도 그랬다. 단 한 순간도 빈틈을 만들지 않고 하리가 검로를 이어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최소한 지금의 하리가 가진 역량으론 그랬다.
"짜증나......."
하리는 그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낮에 놀랐던 오른 어깨가 시큰거렸다. 하루 자고 나면 회복될 정도의 약한 통증이였지만, 거슬리는 것은 거슬리는 것이었다.
방이와의 비무 중, 단 한번이었다 하나 허를 찔리고 말았다는 것. 그게 그렇게 참을 수 없이 분했다. 대응조차 하지 못하고 그 한 수를 그대로 허용하고 말았다는 것이, 그리고 그 상황을 파훼한 것이 하리의 한 수가 아니라 엉뚱하게 균형을 잃은 방이 탓에 나온 요행이었다는 것이 하리는 너무나 화가 났다.
지금까지 하리는 항상 방이보다 반 보, 때로는 한 보씩이나 진도가 앞서 있었다. 그런만큼 비무에서도 하리는 방이를 수월히 이겨냈다. 몸이 자라 타고난 덩치나 힘에 차이가 나기 시작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워낙 자주 싸우다 보니 서로의 수법에 익숙해져, 방이도 하리의 공격을 막아내는 일은 적잖아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언제나 기세를 압도하고 공격을 주도하며 비무에 이기는 것은 하리였다. 방이는 막기에나 급급해 제대로 된 공격을 해내지도 못해왔다. 여태껏 늘 그래왔다. 그랬는데.
그런데 갑자기 그 양상이 변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방이의 공격 중에 순간순간 예상치 못한 날카로운 공격이 튀어나오는 날이 생기기 시작했다. 여전히 공격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것도, 마지막에 이기는 것도 하리였지만, 이기고 난 뒤의 시원한 맛이 사라지고 말았다. 특별히 날카롭던 방이의 공격이 하리가 의도하지 않은 이유로 허무히 스러질때면, 이게 정말 내가 이긴것이 맞나 하는 찝찝한 기분이 남아 하리를 괴롭혔다. 그리고 오늘 역시 바로 그런 날이었다.
검을 뽑을 적만 해도, 오늘 하리는 순수한 검법으로만 방이를 두들겨 줄 작정이었다. 그런데 수세에 몰리고, 그런 상황이 나온 연유가 영 개운하지 못한 대치 끝에, 기어이 쓰지 않으려 했던 수공을 쓰고 나서야 이겨낸 것이다. 이게 우연일까? 단순히 그리 생각하고 넘기기엔 어딘가 걸리는 구석이 있었다. 하리는 우울한 얼굴로 얼굴을 무릎에 파묻었다.
이래서는 안된다. 하리는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아에 당하기 좋은 순간이 언제인지는 알았지만, 그 동작을 완전히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하리로서는 어떻게 하더라도 그 검을 피할 수 없다. 검이 붙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그 힘을 역이용할 방법은 없을까?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시험해볼 가치는 있었다.
곡검은 휘어있어 같은 곡검에 걸리기 쉬우나 그것은 상대가 든 곡검 역시 마찬가지다. 일단 두 검이 붙고 나면 힘의 방향을 옮겨 오히려 당겨올 소지도 충분히 있다는 이야기였다. 역으로 당겨오는 것까진 힘들어도, 최소한 힘을 흘려내 중아에 당하지 않을 수는 있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한 하리는 방안을 뒤져 연습용으로 쓰던 반월형 목검 둘을 꺼냈다. 양손에 하나씩 잡고 둘을 붙여 힘을 가하니 확실히 칼날의 각도와 칼끝의 방향, 검이 붙은 위치에 따라 조금씩 둘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이 바뀌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을 이리 움직이면 저리 가고. 저리 움직이면 방향을 뒤틀 수 있으며, 순간적으로 힘을 뺐다가 다시 가하면 자세를 무너뜨릴 수도 있을 듯 했다.
"오늘처럼 그렇게 낚아채가는 상황이라면 이렇게..."
왼손에 든 목검으로 오른손에 든 목검을 감싸며 오늘의 비무 모습을 재현한 하리는 오른손의 각도를 뒤틀며 재빨리 앞으로 뛰어갔다.
"오히려 더 빨리 가까이 뛰어가 접근한 다음 방향을 바꿔 힘을 주면...!"
오른쪽 목검의 각도가 빙글 돌아가는 것과 함께 왼쪽의 검이 힘없이 옆으로 내리눌렸다. 하리가 두 검을 모두 들고 있어 바로 알아차리긴 어려웠지만, 맞은편에서 상대가 든 검이었다 생각하자면 상대는 팔꿈치가 아래를 향한 상태에서 손에 잡은 검이 내리눌려 힘을 쓸 수 없게 되는 상황이었다. 이거라면 확실히 해볼만 했다. 피하는 것보단 훨씬 가능성 있는 이야기같았다.
"이걸 이용하는 건 또 다른 문제겠지. 방어하는데만 쓸 것이 아니라 공격하는 데도 쓸 수 있는지도 알아봐야겠고. 또..."
내내 딱딱하게 굳어 있던 하리의 얼굴이 드디어 풀렸다. 점검해볼 것들을 하나씩 꼽아보며, 하리의 얼굴에 생글거리는 미소가 올라왔다.
"아! 곡검이 아닌 직검을 상대로도 통할지도 알아봐야겠다. 방이 녀석이랑 싸울때야 곡검끼리지만, 무림엔 직검이 더 많으니까. 우리 말고 곡검쓰는데가 어디어디 있더라? 에이 몰라. 하여간 직검이 더 많겠지. 한번 계속 연습하고 연구해보자. 잘만하면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몰라!"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신나게 재잘거리던 하리가 갑자기 우뚝 멈췄다. 그리고는,
"엣취!"
큰 소리로 재채기를 한 하리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하긴 푹 젖은 옷을 입고 한참이나 검을 휘두르던 참이다. 이제야 달달 떨기 시작한 것이 오히려 늦은 것인지도 몰랐다.
아직 얻어맞아 멍든 곳의 붓기가 덜 빠진 방이와 함께 장삼이 아저씨 손에 이끌려 강가에 섰던 그날. 장삼은 여기가 바로 수적들의 젖줄이자 삶의 터전이라 말하며 강물에 발을 담그게 했다. 그때, 어쨌더라. 퉁퉁 부은 얼굴로 얌전히 물에 발을 내딛던 방이와 달리, 하리는 한사코 들어가지 않겠다 도리질을 쳤다. 한참을 어르고 달래고 윽박도 질러보던 장삼이 참다못해 억지로 끌고 들어가려 하자, 하리는 그만 누나로서의 체통도 잊고 비명을 지르며 풀쩍 뛰어올라 장삼의 가슴팍에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난데없이 낭패를 당한 장삼은 하리를 어떻게든 떼어내보려 애를 썼지만, 필사적으로 달라붙어있는 아이를 흠없이 떼어내기란 무공을 배운 수적에게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하리의 고집에 포기하고 만 장삼은 그날 하루 하리를 등에 업고 수업을 진행했다. 무슨 어린애가 이리 힘이 세냐고 투덜거리면서.
장강 밑바닥에 가라앉아 누운 채 기억을 떠올리던 하리는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다 옛날 일이다. 하리는 느리게 숨을 들이쉬었다.
강래수공 제 1성 물의 호흡
강래수공을 배우면 물 속에서도 호흡할 수 있다는 말은 하리를 떼어놓기 위한 장삼의 헛소리가 아니었다. 정말 그랬다. 하리는 그것을 방이가 강래수공 1성을 다 배우고 나서야 겨우 믿게 되었다. 일각이 지나도록 방이가 물 속에서 나오질 않던 날, 하리는 정말 놀라 까무라칠 뻔 했다. 어찌나 놀랐는지 그토록 악착스레 힘을 주어 장삼의 목을 감았던 팔에 힘을 풀고 방이를 구하려 첨벙 물에 뛰어들었을 정도였다.
그렇다. 하리는 그날 그때까지 장삼에게 업혀있었던 것이다. 죽어도 물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하리와 어떻게든 강래수공을 가르치려는 장삼의 실랑이는 방이가 강래수공 1성을 다 배우도록 계속됐다. 그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꼬박꼬박 하리를 끌고 갔던 장삼은 장삼대로, 그걸 또 매번 물에 들어가기 싫다고 수업이 끝나는 시간까지 장삼의 등에 붙어있던 하리는 하리대로 대단한 고집들이었다.
장삼을 따라 고향을 떠나 수채에 왔던 날, 하리는 그만큼 큰 물을 처음 보았다. 황하 근처 마을 출신이라 하나, 하리와 방이가 구걸하던 마을은 물에서 제법 떨어져 있었다. 조금만 걸으면 갈 수 있는 거리긴 했지만, 그래서 그쪽까지 구걸을 다녀온 아이들도 많았지만 어쩐지 하리만은 그러길 싫어했다.
그때 하리는 물이라는 것이 싫었다. 이유는 하리도 몰랐다. 너는 황하에 떠내려가다가 너절다리에 걸려있는걸 주워왔다 말하던 예전 거지패 두목의 말을 믿는 건 아니었다. 사실 그럴수밖에 없는게, 두목은 항상 거지패의 고아가 식견이 들고 머리가 자라 제 부모는 어디로 갔는가, 하는 의문을 품기 시작할 때마다 똑같은 소리를 반복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리만은 유별나게 물이 싫어 그 흐르는 소리만 들어도 질색했던 것을 보자면, 정말 황하에 떠내려가다 가까스로 주워져 구조된 것은 아니더라도 기억도 나지 않는 아기일 적 한번쯤 물이란 놈에 아주 호되게 혼난 일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하리는 생각했다.
그런 하리에게, 처음 본 장강의 세찬 물결은 거의 세상이 뒤흔들리는 공포요 충격이었다. 수채에 올 적 처음 본 것이 하필 큰 비가 지난 뒤 굉음을 내며 뒤섞여 흐르는 탁류였기에 더욱 그랬다. 하리의 눈에 그것은 물이라기보단 거대한 괴물같았다. 용이 있다면 그런 모습일까? 그때부터 하리는 장강 밑바닥에 산다는 교룡의 존재를 남몰래 믿기 시작했다. 수적들끼리 농담처럼 하는 이야기였지만, 어린 하리가 듣기엔 그 말처럼 이치에 알맞는 설명이 없었다. 물이란 쉬이 흘러내리고 흩어지는 것이건만 어찌 저리 무시무시한고. 그러니 저것은 필시 장강 교룡의 힘이 닿아 저런 것일테다. 그게 어린 하리의 생각이었다.
이제 충분히 호흡을 가다듬은 하리가 정좌하며 눈을 감았다. 가득찬 물에 귀가 멍멍한 가운데 물 흐르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물 속의 법칙은 밖에서완 달랐다. 아주 작은 소리도 멀리까지 들리는가 하면, 가까이서 나는 큰 소리조차 먹먹하여 들리지 않기도 했다. 물은 알 수 없는 저만의 규칙으로 체에 걸러내고 뒤튼 소리를 전달해왔다. 수적들에겐, 그리고 13년차 수적인 하리에겐 이젠 익숙해진 법칙이었다.
강래수공 제 2성 소주천
소란한 고요가 감도는 모래알 위에 정좌하고 앉은 하리가 안을 관조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끌어올리기 시작한 내공이 잔잔한 듯 세차게 맥동을 시작하니, 그 성상이 꼭 하리가 아는 물과 같았다. 하리는 여전히 장강 교룡의 존재를 믿었으나, 끊임없이 흐르는 장강의 도도한 물결이 꼭 교룡의 덕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알았다. 힘없이 주르륵 흘러내리며 줏대없이 그릇에 따라 제 모양을 바꿔대는 것이 물이었지만, 그 옛날 하리가 본 것과 같이 거세게 흐르며 앞길을 막는 모든 것을 부수고 지워버리는 것 또한 물이었다. 그러한 물의 성질을 똑 닮은 내공을, 하리는 조심스레 인도하며 길을 따라 흐르도록 했다.
하리의 인도에 따라 때론 느리게, 때론 세차게 흘러가던 내공이 백회에서 멈췄다. 그 자리를 아쉬운 듯 맴도는 내공을 하리는 어르고 달래며 되돌리려 했다. 그러나 내공은 쉽사리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자꾸만 백회를 넘봤다. 파르르 떨며 용솟음치는가 하면 애가 닳은 듯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아대는 것이었다.
얘, 아직 어림도 없단다.
말썽많은 짐승을 대하는 양 속으로 내공에게 말을 건네던 하리는 문득 등용문의 고사를 떠올렸다. 황하 상류에 있다는, 오르기만 하면 용이 된다는 문 용문. 그 아래에는 수많은 고기들이 모여있으나 그 중 정말로 용문을 넘는 것은 천년에 한 마리 나올까 말까 하다더라. 아무래도 호사가들의 허무맹랑한 이야기같이 들렸지만, 하리는 옛날부터 그 이야기를 퍽 좋아했다. 마침 하리의 이름자 뜻이 또 황하의 잉어가 아닌가!
넘기만 하면 물고기가 용이 된다는 문 이야기를 어디 길거리에서 듣고 온 날, 잔뜩 흥분한 하리는 눈을 반짝이며 저처럼 생선의 이름을 가진 방이와 함께 밤새도록 소곤거렸다. 얘, 우리는 여기 황하 하류 근처에서 구걸하고 살지만, 저 위쪽 상류로 올라가면 그런 문이 있다더라. 넘기만 하면 용이 된대. 그 문을 넘어가기만 하면.
후우-
떼쓰는 어린애마냥 한참을 고집스레 움직이지 않던 내공이 겨우 방향을 되돌렸다. 하리는 또 저 혼자 신이 나 이번엔 멋대로 혈도를 내달리려 드는 내공을 붙잡아 길을 인도했다. 13년을 보았음에도 물의 법칙이란 여전히 종잡을 수 없는 구석이 있듯, 그 변덕스러운 성질을 똑 닮은 이 내공이란 것 역시 그랬다. 이쯤이면 다 알았다 싶으면, 갑자기 돌변해 난생 처음 보는 얼굴을 보여준다. 그토록 종잡을 수 없이 멋대로 굴다가도, 또 어떤 때는 아주 알기 쉬운 법칙대로 움직인다. 알 듯 말 듯, 언제나 어려운 것이 물이었고 내공이었다.
하리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떠오르려다 말았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생각이 모여 단단한 형체를 갖추기도 전에 억지로 흩어낸 탓이다. 하리는 미간을 조금 좁혔다. 내공에 집중하기 위해서인지, 조금 전 떠오른 상념을 흩어내기 위해서인지. 그러나 뒤이어 떠오른 잡념의 행렬을 보자면, 전자의 이유는 아닌 듯 했다.
하리의 이름은 얼굴도 모를 부모가 지어준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거지패의 두목이 지어줬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하리도 방이도, 하리가 선택한 이름이었다.
생선 중에 으뜸이 황하의 잉어고, 그 버금가는것이 바로 황하의 방어라더라. 황하의 잉어와 방어라면 중원 어디에서도 인정하는 가장 값진 생선이라더라.
그 소리를 들은 하리는 대번에 하리를 제 이름으로 차지했다. 곁에 있었으나 한발 늦어버린 방이는 졸지에 방이가 되어버렸다. 방이는 제 이름이 썩 마음에 드는 눈치는 아니었으나-주로 버금간다는 부분에서- 자꾸 불리다 보니 제법 괜찮다 싶었는지 계속해서 그것을 제 이름삼아 써왔다. 수채에 오고, 나이가 들며 방이가 제멋대로 이름을 형문으로 바꿔버리기 전까지는.
하리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형문이 다 뭐람? 하늘같은 누님이 신경써 내려준 이름은 어디가서 엿바꿔먹고 그런 엉뚱한 이름을 지어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기왕 새로 지어왔으면 뜻이라도 좀 좋던가. 용도 봉황도 아닌 궁벽한 집안이라니! 이것이 바로 그 사춘기의 반항인가 뭔가 하는 그것인가?
하리는 팩 떠오른 생각과 짜증을 지워내며, 내공을 단전에 갈무리했다. 소주천의 막바지에는 숫제 산책나온 강아지마냥 쾌활히 굴던 내공이었다. 다행히 단전의 앞에서는 강아지와 달리, 돌아가는 것을 꺼려하지 않고 얌전히 쏙 들어가버렸지만 말이다. 이럴때는 또 순한 것이 내공이란 놈이었다. 물이 아래로 흐르듯 자연히 단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꽤 오랜 시간 운기를 했음에도 내공은 늘지 않았다. 잡념이 많았던 탓이로구나. 하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일어나 발을 굴렀다. 그 추력으로 하리의 몸이 치솟아 수면 위로 향했다. 이제 다시 배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방이와의 비무 뒤 중아의 묘에 대해 고민하던 하리는 홀로 칼춤을 추는 것만으론 두 힘간의 미묘한 균형을 다루는 이 새로운 깨달음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다고 결론내렸다. 그러나 방이에게 도움을 달라 말하기엔 누님의 체면이 살지 않는 상황! 더군다나 방이를 이기려 만드는 수법을 방이가 익혀버려서는 꼴이 우스워진다. 그렇다고 다른 수적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느냐, 하면. 방이만큼 하리의 검을 잘 아는 자가 드물어 도움을 주려다 크게 다칠지도 모르는 일.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하리는, 방이 몰래 조용히 장삼을 찾아갔다.
똑똑-
돌이켜보면, 그때부터 잘못이었던 것 같다.
"아저씨, 바빠요?"
진짜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안 바쁘면, 나 수련 좀 도와줘요."
어떻게든 방이를 이길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하리는 그만 스스로 고통의 구렁텅이에 발을 들여놓고 말았던 것이다.
이리 된 경위를 떠올리는 그 짧은 순간 이미 하리가 딴 생각을 하고 있음을 눈치챈 장삼의 목검이 또다시 하리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벌써 십수년째 맞은 목검이건만 어찌된 일인지 조금도 익숙해지질 않고 매번 새로이 아팠다. 하리의 맷집이 늘어난 만큼 그간 장삼 역시 더 아프게 때리는 법을 연마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무리 궁리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오늘 몇 대만 더 맞았다가는 하리는 정말 꼴사납게 엉엉 울고 말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으아아아아!!"
강래수공 제 3성, 검기상인
비명을 지르며 치켜든 하리의 곡검에서 넘실넘실 검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검법만을 쓰기로 약속한 지도대련 중에 검기를 써서 비겁한 것이 무슨 상관인가? 하리는 이 검기가 장삼을 위협한 덕에 단 한 대라도 덜 맞을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