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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하라고…? 잘 모르겠다는 듯 눈을 껌뻑거리던 리코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기로 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서일까, 주변에 더는 잡을 것이 없다고 인식해서일까, 리코는 조금씩 차분해지고 있었다. 좌우로 흔들리던 꼬리도 점점 폭이 좁아지다가 축 늘어졌고 동공도 조금씩이지만 수축하고 있었다.
“네, 리코는 리코에요. 저번에… 루르랑 만났을 때, 그때 만났어요.”
가장 기억에 강렬하게 남았던 만남이었다. 무섭고 아픈 경험이라 그런지 쉬이 잊혀지지 않았다. 비록 후반부엔 너무 아파서 기절했기에 루르를 데려가자고 주장한 사람이 쿠보타라는 것은 모르고 있었지만. 어쨌든 리코는 그때 일을 말하면서 손을 뒤로 돌려서 파르르 털었다. 축축한 느낌. 돌아가서 씻어야겠다.
“네. 쿠보타도 돌아가요?”
다들 찾고있다는 말에 내심 걱정이 되었다. 순찰을 너무 오래 했던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를 정도로 열중하고 있던 것 같다. 리코는 가만히 쿠보타가 먼저 걷기를 기다리며 올려다 보았다.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의 표정은 어쩐지 읽기 어려웠다.
걸음을 돌린 쿠보타가 구식 단말기를 꺼내며 말한다. 뽈칵 폴더를 열어 액정을 리코에게 비추었다. 나타내는 시간은 역시, 식사시간이다. 베이스캠프에서 지정한. 이러니 저러니해도 밥은 먹어야한다.
"그나저나 놀랍군... 그 손으로 뭔가를 짖이길 수 있다는게."
이 데미휴먼. 얼핏봐선 그냥 어린애다. 아마도 녀석은 완전히 사냥을 하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크토니안을 배제하고 있었을 것이다. 얼마나 여기에 있었고, 어느정도 되는 크토니안을 잡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히 그것은 지금, 전력으로서 활용되고 있었다.
"왜 그땐 그러지 않았던 거지."
항상 가라앉아있는 목소리가 그 의도를 불분명하게 했지만, 이건 질책같은게 아니라 순수한 물음이었다. '그때'는 역시 루르와의 조우를 말하는 것일테다. 주변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쿠보타로선, 총에 맞아 정신을 잃었다거나 하는 상황을 알리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 알고있더라도 물어봤을것이다. 이 남자라면.
밥시간! 식사시간이라는 말에 리코는 눈을 크게 떴다. 듣고 나니까 어쩐지 배가 고파지는 것 같다. 벌써 그런 시간이 되었구나. 구식 단말기에 비치는 시간, 아무리 봐도 밥 먹는 시간이었다. 눈으로 확실히 보고 나니 진짜로 배가 고파졌다. 돌아가면 손 씻고 밥 먹어야지. 리코의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 든다.
“리코도 놀랐어요… 커다란 괴물은 무섭지만 작은 건 꿈틀꿈틀 움직이면 어쩐지… 잡아서 눌러야 할 것 같고, 가슴이 두근두근해요.”
커다란 크토니안은 무섭다, 하지만 작거나 자신과 비슷한 사이즈라면 움직이는 걸 볼 때마다 두근두근하고, 달려들어서 잡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잡고 나면 묘하게 기분도 좋고. 입으로 물어뜯었을 때 별로 맛있진 않지만. 손과 입이 조금 더러워지는 것도 좀 그렇긴 하지만, 이건 잡을 땐 막상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 더러워진 손을 내려다보며 걷던 리코는 쿠보타의 말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때? 아까 말한 그때?
“그땐… 팔이 아팠어요. 여기 이렇게 푹 패여서, 너무 아파서 그대로 잠들었는데 눈을 뜨니까 병원이었어요.”
여기요, 라고 하며 리코는 자신의 왼팔 부분을 가리켰다. 다른 부분에 비해 털이 조금 듬성듬성한 동그란 부분, 동그랗게 패였던 흔적이 조금 남아있다. 이제는 다 나아서 움직여도 아프진 않지만, 털은 좀 더 자라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 땐 괴물은 없었으니까… 사람이랑 친구는 때리면 안 돼요.”
사람에게 발톱은커녕, 발만 살짝 내밀어도 죽어라 맞았던 기억도 있고, 친구를 때리면 안 된다고 배운 기억도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때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당하기만 했었다. 뭔가를 하려고 해도 리코 자신이 원거리 저격에는 취약한 전술을 쓰니 뭘 제대로 하지도 못했을 것 같기도 하고...
왜냐, 라는 물음에는 딱히 답할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배웠으니까. 명확하게 안 되는 이유를 배운 적은 없고 그저 압도적인 폭력으로 깊게 새겼을 뿐이라, 왜냐고 묻는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기가 어려웠다. 데미휴먼을 상대로 얘기하는 중이라면 ‘그렇게 하면 맞으니까’라는 답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지만, 평범한 사람을 상대로 그런 답은 안 하는 편이 좋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기도 했고.
“다른 친구는 해도… 리코는 못해요… 이해할 수 없어요…”
생각해 보면 신기했다. 어떻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람에게 적의를 드러내고 공격할 수 있는 걸까. 지금껏 봐 온 친구들이 그랬던 모습을 보면 리코는 이해할 수 없었다. 리코의 가치관으로는 있을 수 없고, 해서는 안 될 두려운 일이니까.
“…밥 냄새…! 맛있겠다…”
베이스캠프에 점점 가까워지자 밥 냄새가 났다. 리코는 가볍게 코를 킁킁거렸다. 맛있는 냄새다! 전시에 가까운 상황이다 보니 캠프의 식사는 호화롭기는커녕 그저 칼로리를 채우기 위한 것에 가까운 편이었지만, 리코에겐 그것조차 맛있는 식사였다. 바닥에 고인 빗물보다야 훨씬 맛있는 것이니까. 리코는 조금씩 걸음을 빠르게 했다.
//멋대로 시카즈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는 리코쟝... :3 머리속이 꽃...아니 캣닢밭이야...(?????
여기서 더 묻는 것은 인간성을 떠나, 어른이 할 짓은 아니라고 생각해 거기서 그만 둔다. 뭐, 그럴거다. 이것이 녀석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일테지. 왜냐하면 그렇게 배워왔으니까. 차이점이라면, 그렇게라도 답을 갖고 있느냐, 아니느냐의 차이인가. 여전히 갈 길이 멀군. 요행을 바랬건만.
"임마... 들뜨지 말라고."
어느새 뒤따라오던 리코가 쿠보타를 앞질러 있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녀석이 먼저 뛰어가도 잡을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좋냐. 이니시에이터에게 제공되는 레이션이.
캠프에 도착하자마자 손을 씻으러 달려갔다. 손을 씻고 나오니 쿠보타가 먼저 받은 식사를 이쪽으로 건네줬다. 움츠러들거나 조용하거나, 얌전한 모습을 자주 보이던 리코가 이때만큼은 활기차게 큰 소리로 감사를 표하며 받아 들었다. 밥의 힘이란 무서운 것이다.
“감사합니다!”
아마 개과 동물이었다면 꼬리가 빠져라 흔들어대고 있겠지만 리코는 호랑이라 꼬리를 빳빳하게 위로 올린 걸로 끝났다. 누가 뺏어갈세라 자리에 앉자마자 허겁지겁 먹기 시작한 리코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밥을 먹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정말로 단순한 사고방식이었다. 아까 전 크토니안을 사냥하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아까 전의 모습이 작은 맹수였다면 지금은 그저 밥을 먹으며 행복해하는 집고양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 같은 모습.
아이가 먹기에는 많아 보이는 양이었지만 리코는 별 문제 없다는 듯 빠르게 먹어 치워갔다. 먹는 동안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식사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많이도 먹는군... 옆에 앉아 퍼먹는 내가 무안해질 정도로. 특히나 이 식량은 성인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분명 남길거라고 생각했다. 한창 먹을 때라던가. 대충 그런건가.
"그러고보니 너의... ...파트너가 안 보이는군."
이대로 적적히 먹는 것도 뭣해서 입을 열어본다. 항상 붙어다니던 여사. 링크를 깊게 생각해본적 없는 쿠보타가 천천히 단어를 선택하며 말했다. 그 중엔 주인, 동료, 친구같은 여러가지 후보가 있었으나 파트너로 결정된 것이다. 그렇다치더라도 자칫 실례가 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애초에 쿠보타란 사람부터가 섬세하지 못하다. 그저 물었다.
파트너가 어떤 사람인지 묻는 말에 리코는 일단 씹고 있던 것을 삼키며 생각했다. 파트너…가 뭔지는 알고 있다. 베이스캠프에는 정말 다양한 태스크포스가 있어서, 온갖 이니시에이터들이 몰려있고, 그런만큼 서로가 다양한 말을 썼다. 링크한 데미휴먼을 ‘저것’이라고 가리키는 사람도 있었고, 파트너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뭐 하여간 다양했다. 그런 것들을 듣거나 봐왔기에 리코는 대충 쿠보타가 물어보는 대상이 에피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에피는 좋은 사람이에요.”
맛있는 것도 주고, 때리는 일도 없다. 집에서는 따뜻하게 잘 수도 있고, 모르는 것도 많이 가르쳐주고.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한 기준과 함께 그렇게 말한 리코는 물을 마시고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꽤나 양이 많지만 리코에게는 별 문제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딱 맞게 좋은 양이었다.
“앗 근데 가끔… 이상할 때도 있어요. 어려운 말도 많이 쓰고… 그래도 좋은 사람이에요.”
크토니안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조금 무서워진다. 폭력에 대한 공포와는 조금 다른 공포지만… 리코는 크토니안 이야기를 하는 에피를 떠올리고 살짝 시선을 돌리며 덧붙였다. 그래도 좋은 사람이라고… 돌렸던 시선을 다시 밥으로 가져가던 리코는 문득 쿠보타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그 여자가 좋은 사람이란 것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이상할 때라... 어린애가 하는 말은 틀린 것이 없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쉽게 들통난다. 데미휴먼을 차별하거나 그럴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그것과는 또 다른 이야기인가. 의외군. 마냥 캣맘으로만 생각을 했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아니라고 말한 리코는 다시 물을 마셨다. 딱히 별나다는 감상은 없었다. 베이스캠프에 있는 사람들 대다수가 링크를 하고 있는 것 같았기에 물어봤을 뿐이었다. 없다고 해도 뭐, 그럴 수도 있지 정도로 넘길 수 있는 일이고. 슬쩍 눈을 올리자 모자 사이로 잠깐 비춰진 눈과 마주쳤다. 아주 잠깐이라 잘 모르겠다. 역시 표정을 잘 모르겠는 사람이다.
“…잘 먹었습니다. 후아암…”
그 많던 음식을 게눈감추듯 먹어치운 리코는 작게 하품을 했다. 순찰은 이미 돌았고, 아마 다음 차례인 다른 태스크포스가 자신의 뒤를 이어 나가있을 것이다. 또 차례가 돌아오기 까지는 조금 시간이 있으니 아마 조금 잘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작게 눈을 꿈뻑이고는 쿠보타를 보았다.
“쿠보타… 다시 나가요? 리코는 조금 잘래요…”
먹고 자고 뛰놀고, 그렇게 한창 자랄 때라 그런가, 비록 사냥이긴 했지만 어쨌든 뛰어놀고(?) 들어와서 밥도 먹었으니 졸릴 만도 했다. 리코는 자신이 먹은 것들을 정리한 후 쿠보타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신이 머무는 텐트가 있는 쪽으로 가려다가 잠시 발을 멈췄다. 살짝 뒤돌아 쿠보타를 보고 리코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참, 친구가 말했어요. 편안한 거짓말보다 불편한 진실을 따르래요. …잘 모르겠지만, 많이 많이 전해달라고 했어요.”
그럼 갈게요, 바이바이.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텐트를 향해 걸어갔다. 조금 자고 다시 일어나서… 순찰 돌아야지.
쳰위의 '그런가요?'라는 대답에 자신이 얼마나 건강한지 보라는 듯 유페미아는 자신의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보행기를 의지하지 않고 똑바로 서 보인다. 그 즉시, 아직은 완전히 아물지 않은 허벅지 부상이 욱씬대는 바람에 눈을 찔끔거리며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만 말이다. 이거 괜히 역효과만 본 것은 아닐지.
그렇다. 생채기조차 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야오쳰위를 처음 봤을 때는, 당연히 병원에 온 방문객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젤러시 건도 그렇고, 하고 말을 잇는 쳰위의 말에 유페미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타뷸라의 늑대'도 유독 일반인만을 공격했지.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과격하지만 일단은 데미휴먼을 위하는 단체인 이상 데미휴먼은 공격하지 않는건가.
"...어쩌면 이니시에이터를 돕는 데미휴먼은, 변절자 취급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네."
라고 말을 하며 유페미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카의 딸' 같은 극단주의자 단체일 수록, 흑백논리를 자주 사용한다. 따라서 '적의 적은 친구....가 아니라, '적의 친구는 적' 같은 논리를 들고 와서 데미휴먼들을 공격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유페미아는 리코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돌아서서는 자신의 TV 장롱 속을 뒤지기 시작한다. 유페미아의 현관문은 '1020'이라는 비밀번호를 입력한 후, 열쇠를 꽂아 돌려야 열리는 이중 잠금 형태. 열쇠가 있어야 리코도 집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예전에 장롱 어딘가에 처박아두었던 기억이 분명히 있는 여벌 키를 찾고 있는 것이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유페미아가 여벌 키를 손에 쥐고 리코를 향해 돌아섰을 때,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리코의 목걸이가 또렷히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유페미아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대감에 붕 떠있던 기분이 갑자기 추락하는 것을 느낀다. 그 목걸이가 어떤 것인지, 리코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지 미호 소장에게서 전달받은 내용에서 기억해낸 것이다. 유페미아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다.
"그 목걸이는... 전에 리코 군을 학대했던 사람..., 그러니까, 그, '주인'이란 사람이 걸어놓은 겐가?"
'걸어준 것'이 아니라 '걸어놓은 것'이라고 표현한 것에는 그 목걸이를 참에 리코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미호를 통해 이미 아는 까닭이다. 금빛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목걸이가, 유페미아에게는 점점 고대 감옥에서 사용했던 계구와 같은 것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유페미아는 무릎을 꿇는 자세로, 리코와 눈높이를 맞춘 채 그녀를 흔들림 없는 초록빛 눈으로 응시하며, 중대한 제안을 하듯이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