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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마을에서의 일로부터 며칠이 흘렀습니다. 키아라가 그 때 입은 부상은 여전히 심각했습니다. 역시 데미휴먼의 완력은 강력했달까요. 골절이 난 오른손목에 붕대를 둘둘 감아야 했고, 오른쪽 눈 밑에 보기 흉한 멍자국도 생겨버렸지 뭡니까. 의사가 말하길 최소 몇 주 이상은 있어야 다 낫겠다고 했던가요. 과격한 행동은 금물이라는 의사의 소견에 키아라는 지난 며칠간 집에서 철저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집에만 있다 보니 절로 답답해져 바람이나 쐬러 나온 길이었습니다.
늦은 저녁, 거리를 오가는 인파가 한산할 때였습니다. 무심코 걸음을 멈추고 보니 유베리드 패밀리의 보호소 앞이었습니다. 불현듯 마리아 생각이 뇌리를 스칩니다. 키아라는 아홉꼬리 보호소라는 곳이 있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자, 오랜만에 마리아를 보러 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꼴로는 마리아에게 괜한 걱정만 안겨줄 것 같아 금세 관두었습니다. 길가에 서서, 키아라는 괜히 애꿎은 돌멩이만 발로 차댔습니다.
“그래, 유페미아 씨 말씀이 맞아. 당신 같은 데미휴먼을 이해해 줄 이니시에이터도 분명 있을 거야.”
키아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페미아의 말에 동의를 표했습니다. 이어지는 오베론의 말을 듣고선 역시 그런가, 했습니다. 유베리드 보호소는 분명 차별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구조일 테니까요. 키아라는 그곳의 광경을 상상만 해도 끔찍했습니다. 데미휴먼이 물건처럼 다루어지는 곳. 이니시에이터와 데미휴먼의 링크는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
“...”
오베론의 충격적인 발언에 키아라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습니다. 크토니안화의 문턱에 마주닿아있는 이 가여운 사슴을 어찌해야 할까요. 답은 하나뿐이었습니다.
“그, 갑작스럽지만, 혹시 괜찮다면 나랑 링크하지 않겠나? 나도 지금 링크한 데미휴먼이 없는 상태거든.”
자신이 직접 그의 보호자이자 파트너가 되는 것. 그 제안은 순수히 동정심이나, 연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어쩌면 충동적인 감정에 의한 것일수도요.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 이가 있는데 어찌 두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수가 있나요. 그리고 키아라는 데미휴먼을 대하는 것 하나엔 자신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마리아를 어떻게 키워왔는데요. 재정적 여유도 있기에 링크하는 데에 드는 비용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습니다. 물론 상대가 동의한다는 전제 하에서의 이야기였지만요.
누군가에게는 큰 부상을 입히고, 또 누군가의 속에 분심을 심어넣은 사건으로부터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결백한 처형수와 단죄, 기타 이러저러한 이야기들. 그간에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생각이 깊은 이였다면 이 사태에 대해 고민하고 또다시 발생할지도 모를 사태를 막기 위한 대비책을 세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 관여된 인물로서 통탄해 마지않을 사실이 하나 있는데, 요점은 그거다. 야오쳰위는 현 시국의 문제를 고찰할 그 누군가가 아니라는 사실. 젤러시의 속사정이야 안타까울 뿐이고, 그렇다 해서 그 '가족들'의 계략을 말리고 싶은 생각도 그다지 들지 않는다. 몇 차례 험난한 사고를 겪은 뒤에도 스스럼없이 나다닐 수 있는 이유는 그 특유의 무념함 덕분인지도 모른다.
보호소 인근의 폐건물 지붕에 올라앉아 있던 그는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흑백이 반전된 황적색 눈이 지면의 물체들을 더듬더듬 훑었다. 그는 감각이 뛰어나게 발달한 데미휴먼이었지만, 야간시력만큼은 보통의 인간과 다르지 않았다. 능력의 원본이 된 동물의 시력이 그랬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내려다보아도 형체가 흐린 인영들을 보던 그는, 결국 위치를 옮겨 거리를 좁히고서야 그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와 헬멧을 쓴 남자. 몇 번인가 스치듯 보아온 얼굴이었다. 조금은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그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 두 손을 입가에 올려 손나팔을 만들고서 말이다.
"아! 그때 그분들 맞죠!"
그러고선 한 발 늦게 아래로 내려온다. 부서진 지붕이 밟혀 덜컹거리는 소리 몇 번, 바닥에 착지하는 소리 한 번. 그리고 요란하게 뛰어오는 소리가 잠깐. 땅 위로 내려선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의 앞에 멈춰섰다.
"여긴 웬일이에요?"
서슴없이 말하는 모습을 보니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친한 사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맞다, 저 알죠."
꽤 늦은 감이 있는 확인절차도 함께. 그는 상대의 분위기를 살피다 멋쩍게 어깨를 으쓱했다.
줄곧 아스팔트 바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키아라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듭니다. 콜트였습니다. 아는 얼굴을 만났는데 꼴이 이게 뭔가요. 키아라는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습니다.
“살아있어서 다행이지. 아무튼 다시 봐서 반갑군, 콜트.”
키아라는 그 상황에서 죽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죽는다면 마리아가 얼마나 슬퍼할까요. 마리아를 위해서라도 몸을 사려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키아라는 오로지 마리아 걱정 뿐이었습니다. 별안간,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날아듭니다. 명백히 자신들을 향한 것 같은 외침.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린 곳엔 언제부턴가 쭈욱 보아왔던 유인원의 데미휴먼이 있었습니다.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어 이름이나 자세한 속사정은 모르지만요. 이런 애매한 사이에 서슴없이 말을 걸어오는 상대의 친화력에 감탄할 새도 없이 요란한 소리가 몇 번, 울려퍼집니다.
"별 일은 아니고, 그냥 지나가던 길."
이내 상대는 살갑게 다가와 말을 걸어옵니다. 지금 이 상황이 어색하지 그지없지만, 키아라는 어깨를 으쓱이며 상대의 질문에 대답합니다.
크토니안이 되면 죽여달라는 말에 유페미아의 입이 딱 벌어진다. 하긴, 이 정도로 침식이 진행되었으니, 중화제 타이밍을 놓친다면 크토니안화할 가능성도 확실히 존재야 하겠지만...
"아니, 자네, 그게 무슨 끔찍한 소린가! 더군다나 크토니안화라니, 의사는 아니지만 평생을 크토니안을 연구한 사람으로서 내 소견을 밝히자면 자네가 중화제만 꾸준히 맞는다면 평생 살면서 크토니안화 할 확률은 1프로도 채 안된다네! 그것도 높게 잡은 수치이지! 어디까지나, 중화제만 제 때 제 떄 맞아준다면 말이야."
그보다, 이 청년은 어떻게 이렇게 죽음에 초연할 수가 있는가. 디스토피아라고도 불려지는 세상에서 50년을 보냈지만 아직 유페미아는 죽음에 초연해지기는 커녕 익숙해지지도 못했다.CPA테러 사건 때도 그랬고 말이다.
"그래, 그러면 되겠구만!"
키아라가 링크를 제안하자, 유페미아의 얼굴엔 자기 일도 아니면서 화색이 돈다. 이니시에이터와 링크를 맺는다면, 끔찍한 수용소 생활도(유페미아의 상상 속의 유베리드 보호소는 딱 그거다, 수용소) 청산하고, 중화제 투여 시간도 두 사람이 지키는 만큼 더욱더 꼬박꼬박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키아라 군은 짧은 기간동안 알고 있었지만, 믿음직스러운 이니시에이터임이 분명했다. 다행이다! 이 불쌍한 청년의 앞길에도 이제 좀 햇볕이 들겠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