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판 유저들에 의해 지정된 공식 룰을 존중합니다. ※친목&AT필드는 금지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금지입니다! ※모두에게 예의를 지켜주세요. 다른 이들도 당신처럼 즐겁고 싶어서 상판을 찾았다는 점을 잊지말아주세요! ※지적할 사항은 상대방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부드럽게 해주세요. 날카로워지지 맙시다 :) ※스레에 대한 그리고 저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환영합니다. 다만 의미없는 비난은 무시하겠습니다. ※인사 받아주시고, 인사 해주세요! 안녕하세요 라는 다섯글자에는 생각보다 많은 힘이 있답니다. ※17세 이용가를 지향합니다. 그렇다고 수위와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굉장히 편한 사람입니다. 질문하는 것 그리고 저라는 사람을 어렵게 여기지 말아주세요 XD
여기서 가족이라 함은 생물학적인 혈족뿐만 아니라 아홉꼬리 보호소의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했다. 어느 정도 나이가 차고 무심코 안기려 뛰어든 힘에 아버지의 뼈가 부러지던 시기, 솔직히 마리야는 어느 수용 시설에 들어가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가장 이상적인 조건은 어머니와의 계약이었지만 그에 대한 부모의 반론-"우리가 충분히 감싸줄 수 있는데 네 인생을 너무 일찍 결정짓지 말렴"-을 무시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 말을 준거 삼아 보니 남는 곳이 아홉꼬리 보호소라는 사정이었다.
그리고 막상 들어가 보니 자신을 환대해주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기우는 것 같았다- 는 사정이랄까.
여하튼 확실한 애정은 가족밖에 없다고 마리야는 얼핏 생각했다. 남자친구와 헤어진 지 얼마 안되는 나날의 결과였다. 분명 남자친구를 대할 때는 가족들을 대할 때처럼 단맛을 느끼지는 못했는데 헤어지고 나니 이 선택은 아니었나 싶고. 이미 끝난 일인데 어째서 자꾸만 생각이 나고 혼자 있고 싶지 않은 것인지. 누구한테 뭐라고 말을 걸고 싶지만 이런 스스로가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해서 그냥 가족들이 오가는 것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여느때와 다름 없는 하루였다. 자신은 아이들을 돌보고 아이들은 자신을 따른다. 미호씨, 미호, 소장님, 아줌마, 엄마, 어머니. 전부 자신을 부르는 말들. 여러가지 이름을 가진 미호는 여러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뭐, 그렇다한들 자신이 품고있는 마음과 오래 되어서 익숙함을 넘어 자신의 일부라고마저 느껴지는 처음에 가졌던 그 초심만은 어떤 이름과 얼굴을 사용한들 똑같았겠지만. 이 아이들은 가족이었다. 언제까지고 제 가족일테고 어디서나 제 가족일 것이다. 언젠가 연락이 없던 시간이 찾아와 무거워진 귀를 잡고선 밖에서 날 기다리겠노라 하고 말하는 날이 올 때까지 내 가족일 것이다.
" 음? 무슨 일 있나요? "
마리야. 애칭은 마냐. 미호는 마냐라고 부르는 걸 더 선호했다. 그야 모두에게 친하고 공정한 소장님이니까. 하는 얼굴의 일환이기도 하겠지만은 아직 서름한 잔을 들어올려 마시고 있을 때에, 그 안개가 내려앉은 호수위에 안개를 지울 수 있는건 다른게 아니고 따스함이니까. 미호는 누구보다 그걸 잘 알고있노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가족은 가족이 가장 잘 알고 데미휴먼은 데미휴먼이 가장 잘 알고 있으니 그런 어린아이도 잘 아는 이치에 따라 행동하지만 그것만큼 정답에 가까운 것도 없었다. 저물어가는 머릿속에 서성이는 유령이 되어가고 있을 때 마주친 마냐는 왜인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면담이 불가능이었던 것을 보면 분명히 일, 또는 면담으로 한창 바쁠 미호의 소장실의 문을 누군가 쾅 소리가 날 정도로 활짝 열어젖힌다. 전에도 링크를 찾으러 왔기에(그 때는 유페미아와의 링크에 자원하는 데미휴먼이 없었기에 실패로 끝났었다), 어느 정도의 면식은 있는 사이. 유페미아다. 곁에 있는 데미휴먼 아이의 손을 부여잡고 소장실까지 뛰어온 것인지 거칠게 내쉬는 숨결, 자신이 떠올린 묘책이 옳으리라고 한 치의 의심도 품지 않고 형형히 빛나는 눈은 얼핏 보기에도 정상적인 상태로는 안 보일 테다.
상황은 이랬다. 유페미아는 리코와 대화하던 중, 리코를 잘 해봐야 애완동물, 심하게는 장난감 취급하던 전 주인에게 학대받던 리코의 과거를 알게 되었고, 이에 너무나도 분개한 나머지, 다시는 리코가 그런 대우를 받지 못하게 하겠다고 결심, 그것을 위한 최선의 방법은 질 나쁜 다른 이니시에이터가 리코와 링크를 맺지 못하도록 유페미아가 먼저 링크를 맺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해 버렸다. 평상시엔 논리적인 유페미아가 이런 논리적 비약을 저지르는 건 분명히 아드레날린에 취해 이성이 마비된 탓이다. 유페미아가 원래 찾던 데미휴먼은 건장한 성인이라는 것이나, 그런 질 나쁜 이니시에이터가 온다면 미호가 쫓아내버릴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조차 기억해 내지 못하는 걸 보면, 아드레날린에 취한 것이 맞다.
바쁘다. 미칠듯이 바쁘다. 오늘 안으로 처리해야할 서류가 넘쳐났고 링크를 원한다는 애먼 이니시에이터 상대도 오늘만 네 명째다. 올려야하는 보고서만 세 장에 이 와중에 경매장 사건과 관련하여 코르포데이가 들락날락한게 오늘만 두 번째다. 원래는 커피보다 차, 그것도 전통차를 선호하는 느긋하고 자애로운 미호였지만 오늘만큼은 커피포트를 끼고선 진하디 진한 블랙커피를 계속해서 마시며 일처리중이었다. 눈 밑에 내려앉은 피곤함이 신경이 날카로워 졌음을 보이고 있었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예약되지 않은, 다시 말하자면 일정에 없던 것도 모자라 노크따위는 생략하고 들어와 소리부터 지르다니. 자신이 데리고 있는 데미휴먼에게는 언제나 자애롭고 따스한 미소를 보이던 미호였다. 미호는 아홉개의 꼬리에 난 털을 빳빳히 세우고 주변공기마저 얼어붙게 만드는 싸늘한 눈빛으로 유페미아를 바라보았다.
" 이게 무슨 예의없는 짓이죠? "
생각같아선 책상을 쾅 차고 일어났겠지만 그랬다간 책상 위의 서류더미들이 온 사방으로 날아가서 개판이 되어버린다. 그걸 정리하는 건 또 누군가의 몫이고. 그래선 안돼지. 미호는 다시금 진하디 진한 블랙커피를 쭉 들이키곤 서류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유페미아를 노려보았다. 빳빳하게 펴진 꼬리의 털 때문에 2배는 풍성해보였다.
" 아실 만큼 아시는 분이 소장의 방문을 이렇게 시끄럽게 열어제끼고 들어오시나요? 게다가, 전 오늘 어떤 면담도 예약도 들은 적이 없고 더구나 오늘은 처리해야할 일이 산더미라 받지도 않겠다고 일러두었을 텐데. "
마지막 예의를 차려 말한 미호는 커피포트에 마지막 남은 한 잔을 따라마시곤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마냐라는 이름을 부르는 것에 겨우 자신에게 대화를 걸고 있음을 깨달았다. 감정을 느끼는 데는 둔하지만 미호 씨의 패턴으로 미루어 짐작했을 때 신경 써주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받는 관심이 또 혀끝에 단맛을 돌게 했지만, 동시에 이렇게 관심을 받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본능적인 판단을 크게 불러왔다. 마냐는 으음, 소리를 내고 눈을 도록 굴렸다.
"남자친구랑 헤어져서요."
결국 나온 해법은 지극히 마리야다웠다. 정면 돌파적이라는 소리였다. 미호 씨에게 거짓을 말하기에는 본능적으로 걸리는 구석이 있고, 그렇다고 본인도 서투른 비이성적인 감정을 줄줄이 늘어놓기에는 미호 씨의 시간이 아까웠다. 그러니 진실이면서도 통상적으로 넘어갈 수 있는 대답을 제시해서 상황을 빠르게 무마하는 편이 상호 간에 이롭다는 판단이었다.
"신경써 주셔서 감사하지만 저 혼자 고민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요."
문득 덧없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생각으로, 이것이 대화를 나누기 싫어서 하는 도피는 아닐까 하는 잡념이 들기는 했지만.
아, 또 나왔다. 희미하게 뛰고있는 묻어버린 맥박의 소리. 남자친구랑 헤어져서요. 라는 대답에 미호의 머릿속은 다시 안개로 꾹 채워지고 있었다. 남자친구가 있었나 - 하고 미호는 속으로 혼잣말을 뱉었다. 보호소의 아이들에게 이런저런 조언과 케어를 아끼지 않는 미호였기에 이번에도 뭔가 케어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한 미호는 그래? 하고 한 마디를 내놓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마냐. 마리야는 감정에 서툴렀다. 아마 이번에도 서툰 거짓말보다는 직설적인 화법으로 정면돌파를 택했으리라. 감정을 모르는 게 아닌 서툴뿐이니,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아직까지도 조금은 서름한 감이 남아있는 자신의 선을 넘은 참견이지 않을까. 미호는 아홉개의 꼬리를 천천히 살랑이며 말했다.
" 그래. 혼자도 좋겠지. 차 한 잔 할까? "
전통차. 미호는 그것을 좋아했다. 이제는 갈 수 없는 고향과 과거의 잔재. 마음이 평안해지게 하는데는 그만한 게 없었다. 물론 취향을 타긴 하지만 좋은 사람과 함께하는 차 한잔보다 좋은게 과연 얼마나 많을까. 마냐와의 대화는 일종의 테라피라고 미호는 생각했다. 서투른 감정을 가르치는 것. 그것도 소장의, 어머니의 일이니까.
"미호 소장! 리코 군에게 주인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나? 더군다나 보아하니, 그 주인이란 작자가 데리고 있던 데미휴먼들을 밥도 굶기고, 중화제도 제 때에 놓아주지 않은 모양이라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기가 찬다는 말로는 채 표현도 안된다네. 리코 군에게 직접 듣지 않고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들었으면, 끔찍한 도시괴담 치부했을 이야기라네! 미호 소장, 소장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나?"
미호가 주변 공기마저 싸늘하게 만드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지만, 유페미아에게는 유페미아 나름의 방어책이 있다. 그것은 바로, 태생적으로 눈치가 정말로 없다는 것. 어떤 의미에서, 눈치 없는 사람은 편하다. 상대방의 기분이 어찌 되든, 그걸 알아채질 못하니, 이런 상황에서도 수그러들지 않고 자신이 할 말을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유페미아가 대학 총장을 어떤 태도로 대했기에 면담 한번으로 3년 뒤 교수직에서 잘리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유페미아는 미호가 자신의 결례를 지적한 후에야, 자신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에티켓을 어겼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챈 모양이다.
"이런, 일 하는 중이었나보구만. 누군가 일을 방해하면 성가시지. 나도 교수실에 누가 함부로 들어오면 싫었다네."
"하!지!만! 이 세상에 무고한 아이의 행복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나! 리코군의 인생에 다시는 과거와 같은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되네!"
//유페미아가 너무 눈치가 없어서 죄송합니다..... 미호마망 겨우 화 참으셨는데 이제 진짜 화내실 것 같아요8ㅁ8
사실대로 말하면 30분전에는 코피까지 났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는 건 해야하는 일과 정해진 기한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고. 자신이 처리해야 데리고 있는, 감히 보호하겠다 말한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이유들로 미호는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었다. 빨리해서 끝내놓고 늘어지게 쉬어야지. 라는 보상을 생각해 놓은 것 역시 움직이게 해주는 또 다른 원동력이었다.
" ...선넘네? "
선을 넘는다. 미호는 그렇게 표현했다. 리코에 대해 아느냐고 말하는 모습에서 미호는-신경이 굉장히 날카로워졌기에- '네가 리코에 대해 뭘 알아?'하고 말하는 것으로 들려왔다. 리코는 어린 나이에 수집품으로 길러졌다. 중화제를 제때 맞지 못해 침식이 진행되었고 같이 수집품으로 길러지던 한 아이가 크토니안화해 그 틈을 타 도망쳤다. 많이 먹지 못한 것에 대해 안 좋은 기억이 있어 식사는 항상 넉넉하게 챙겨주어야한다. 담벼락에서 햇볕을 쬐는 걸 좋아하고 나무를 탈 줄 알지만 가끔 내려오는 건 못한다. 미호는 그렇게 속사포로 정보를 쏟아내고는 쥐고있던 커피잔을 단순 완력으로 꾹 쥐어 깨트려버렸다. 손에 께진 파편으로 피가 났지만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이제는 귀까지 바짝 서 있었다.
" 더 이상 선 넘으면 그 입을 찢어버리던 꼬매버리던 할 거에요. 더 이상 신경긁는 일은 그만둬 주시겠어요? "
유페미아의 질문을 도발로 받아들인 미호가 리코에 대한 정보를 속사포로 늘어놓는다. 그런데 유페미아는...
"오호, 그렇구만, 그렇구만. 수집품이었구만... 크토니안화 된 친구만 중화제를 못 맞은 줄 알았는데 리코도 중화제를 못 맞아서 팔다리가 이렇게 된 거구만... 그런 사연이 있는 줄도 모르고 난 처음 만났을 때 척골이 길다고 감탄했었네. 이거, 리코 군에게 새삼 미안해지는구만. 먹지 못할 것에 트라우마가 있다라. 그럴 만도 하지. 햍볕을 쬐는 것을 좋아하고 나무를 오르는 걸 좋아한다는 건 전혀 모르고 있었네."
아이고야, 그걸 정말로 순수히 정보 전달의 의미로만 받아들인 모양이다.
"이런, 힘조절에 실패한 모양이구만. 여기, 이걸로 지혈이라도 하게."
미호의 손에 쥔 커피잔이 완력으로 꺠어지고, 미호의 손에서 피가 나는 것을 보고서는 단순 힘조절에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셔츠춤에서 손수건을 꺼내(지난번 CPA 테러사건 때 사용했던 손수건은 버려졌기에 이건 새로 산 손수건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손수건으로 피를 닦을 일이 참 많아진 것 같다, 라고 유페미아는 문득 생각한다.), 미호에게 건네려고 한다.
"...? 선을 넘어...? 내가 무슨 선을 넘었다는 말인가?"
"아, 바쁜 데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와 방해한 일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 일은 다시 사과하겠네. 미안하네. 하지만 이건 정말 급한 일이라 싶어서 그랬다네."
거절할 마음도 없는 이 남자. 물론 냉큼 대답한다. 키아라 로체스터라. 드문 이름이로군. 하긴, 내놓는 이름으로 치면 이쪽도 평범한건 아닌가.
"션디 쿠보타(Shandy 久保田)... 편할대로 부르라고."
팔짱을 끼며 말하는 쿠보타. 허리에 차인 칼이 절그럭 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그 와중 시선은 키아라를 아래에서부터 훑어올린다. 관찰당한다. 그것은 상호간에 썩 유쾌하지 않은 일이 틀림없지만. 알아채기도 어렵게 순식간에 끝마쳐진 일이었고, 또한 이 음침한 남자의 눈은 좀처럼 보기도 어렵다.
아 마냐 엄마는 좀 무심한 여왕님 타입이라서요!(넵 엄마 닮았습니다) 에피가 눈치없이 구는 건 좀 귀엽게? 가소롭게?(표현 죄송합니다...) 보았을 거 같아요! 부하가 그랬으면 얄짤없었겠지만 에피는 지켜야 할 존재에 따지고 보면 고용주에 가까우니까요. 크토니안에 대한 주제라면 자기도 경험상 많이 알기도 하구요. 물론 좀 귀찮을 때면 돌직구로 그만하라고 했을 거 같네요 ^-T(진짜 싫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표현해야 통할 거 같아서요!)
키아라는 상대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나 궁금해했다가도 금세 그 생각을 거둡니다. 크토니안에 대해 잘 알고 총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이니시에이터, 아니면 군인밖에 없으니까요. 또한 키아라의 나름대로 단련한 신체를 자세히 뜯어보면, 누가 봐도 결코 평범한 사람이라곤 생각되지 않을 겁니다.
쿠보타는 일부러 그런 식으로 말함으로써 그 질문에 긍정했다. 스스로도 자신이 제대로 된 이니시에이터라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니시에이터에 대해 특별히 규정된 정의나 규범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총으로 사냥을 개시(Initiate)를 하듯, 남자 또한 날붙이로 그것을 한다. 단지 도구와 생각의 차이일 뿐. 다만 그녀는 쿠보타가 보기에도, 정말 '이니시에이터'그 자체의 이미지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쪽과는 자주 마주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
불어오는 바람에 쿠보타의 머리칼이 스치운다. 마냥 단순한 직감은 아니었다. 일이 우연히 겹친 것. 식사가 하나 저당 잡힌 것.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 무엇보다 바람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키아라는 쿠보타가 찬 검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크토니안과 싸울 때 검을 사용한다, 라는 것은 적어도 키아라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사람들 중에서는 없었습니다. 또한 동방 무사같은 복장을 하고 옆구리에 칼을 찬 상대의 모습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니시에이터의 이미지와는 많이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
키아라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합니다. 사실, 키아라는 쿠보타가 말하는 그런 예감과는 거리가 먼 편이었습니다. 직감 같은 것에 의존하기보단 보이는 대로를 믿고 받아들이는 편이었죠.
이런 날붙이를 고집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신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내가 원래 일자리를 때려칠 때, 유일하게 가지고 나온 것이 이 칼이었다. 버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칼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곱게 벼려진 날로써 녀석은 나에게 소리친다. '좀 더 베어라'. 그런 의미에서 이녀석은, 이미 같은 길을 걷는 동료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군.
"뭐... 조만간 알게 될거다."
제 머리 위에 얹혀 있다시피한 모자를 꾸욱 누르고는, 또다시 소매 속을 뒤적거린다. 꺼낸 것을 키아라 쪽으로 튕겨날린다. 핑그르르. 빠르게 회전하며 마치 수리검마냥 날아간다.
"다음엔 식당에서 보자고..."
명함. 이라기보다는 종잇조각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쿠보타 사무소. 크토니안 구축/신상 보호. 그 밑에는 연락처도 기입되어있다.
유페미아'님'이라는 호칭이 더 편하다는 말에 이렇게 대답하지만, 역시 ~님이라고 불리는 게 어색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네. '일단은' 말이지."
오베론의 이니시에이터냐는 질문에, 키아라와 동시에 대답한다.
키아라가 생물학을 배우겠냐는 제안을 사양하자, "에잉, 어쩔 수 없구만..."하고 중얼거리는 유페미아의 어깨가 조금은 축 쳐진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학문의 즐거움을 전수하는 것은, 그래, 직접 연구하는 것만큼 즐겁지는 않지만 그래도 유패미아 인생의 2등가는 낙인 것이다.
"천문학도 멋진 학문이긴 하지."
오베론의 말에 별이 총총히 박힌 하늘을 바라본다. 수백, 수천광년 떨어진 항성들에게서 그만큼의 시간을 거쳐 지구에 도달한 빛들. 그에 비하면 지구상의 인생사는 무한히 작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상한 관점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우주에 비하여 자신은 그렇게 작다는 사실이, 하늘에서 조용히 반짝이는 별들이, 악몽에 놀란 유페미아의 가슴을 달래준다.
"CPA보호소인 것 아니겠나. 젊은 친구가, 유달리 순종적인 걸 보면 말이야."
아무래도 아홉꼬리 보호소보다는 CPA쪽이 엄격할 테니까. 물론, 전에 만났던 리코 군처럼 아홉꼬리에서 지내면서도 순종적인 특이 케이스일수도 있겠다. 평생동안 범죄와는 관련없는 인생을 살아왔기에, 유베리드 보호소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유페미아다.
쿠보타가 소매를 뒤적이고, 무언가를 날립니다.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그것을 키아라는 재빨리 잡아챕니다. 그것은 명함이었습니다. 사무소, 크토니안 구축, 간단한 연락처. 키아라는 종잇조각에 시선을 고정하며, 상대는 말도 그렇고 행동도 그렇고 상당한 괴짜가 아닐 수 없다고 생각했던가요.
“그래. 언젠가 시간이 나면 연락 넣도록 하지.”
키아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명함을 옷 주머니에 집어넣습니다.
“그럼 다음에 보지.”
작별의 말 한 마디를 남기고, 그런 다음엔 쿠보타를 슬며시 지나쳐 제 갈길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234 ㅋㅋㅋㅋ 뭔가요 이 질문... 음,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선 실제로 굉장히 고민하고 있습니다. 도검에 이름 있는 쪽이 좋을 것 같은데 쿠보타는 그냥 칼이라고 부르는게 자연스러울 아저씨라서 말이지요. 현재 이 설정에 대해선 미정입니다. 허나 만약 검에 이름이 붙는다면 '대대로 물려받은 검이다'라거나 '모종의 이유로 이름이 붙어졌다'라는 설정이 될 가능성이 높겠네요. 예를 들어 쿠보타주가 멋대로 붙였다거나... 아무튼 미정입니다. 핫하. 결론, 쿠보타는 그런 타입은 아니지만 칼에 이름이 붙어있다- 라는 느낌이 되겠네요.
>>259 골골거리는 마리야 보고 싶다..! 머리카락 쓰다듬어주고 싶다...!(그러면 마냐에게 혼나겠죠 흑흑) >>260 그렇군요! 쿠보타가 이름을 지을 타입은 아니지만 원래 검에 이름이 정해져 있다... 인가요! 뭔가 선택받은 검 같고(????) 멋지네요! >>261 키아라가 혼자서 지어준 이름이로군요! 그런데도 이렇게 이름이 예쁘다니 키아라 네이밍 센스 최고...!bbbbb
>>265 갸악 안돼 리코야 내가 잘못했어..! 음 근데 에피라면 주입식으로 막 가르치지는 않고 최대한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가르칠 것 같아요..! 리코가 먹을 것을 좋아하니까, 같이 사탕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곱셈을 배운다든지 파이를 자르면서 분수를 배운다든지..!(본격 초등학교 수학익힘책 문제 실사판이 되어버리고)
286EP 03 : 시카의 딸 - Lupus In Tabula ◆ndsNYm2fs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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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1 (내일 월요일) 19:33:40
" 시카의 딸 - Lupus In Tabula " DAY 1 - 21 : 25 : 32 CPA
CPA에 토끼 데미휴먼이 잡혀있다.라는 소문은 삽시간에 번졌습니다. 뭐, 물론 CPA가 진행한 인도적인 방식의 심문에 대해서는 전혀 밝혀지지 않았지만요. 몇몇 이니시에이터와 의외의 몇몇 데미휴먼은 CPA에서 실제로 그 토끼 데미휴먼-블랑슈-를 만날 수 있었다고도 합니다. 들어가기전 심문방식에 대해선 일절 함구하고 안에서 알게 된 내용을 밝히지 말라는 서약과 함께요. 안개가 모이고 흩어지고, 다시 모이고 흩어지는 것 마냥 시카의 딸에 대한 정보는 모일 듯 모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데미휴먼의 인권을 위해 싸우는 과격 인권단체라는 점 정도가 세간에 알려진 정도일까요. 일각에서는 여전히 시카의 딸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알고있는 사람들 마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어제, CPA를 대놓고 노리고 정문으로 들어온 테러사건이 있었습니다. 2인으로 구성된 괴한이 정문으로 당당히 침범해 들어와 지하까지 뚫고 들어가서 블랑슈를 데리고 나가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12분이었다고합니다. 당연히 시카의 딸의 구조작전이다 - 라는게 모두의 생각이었고 실제로 조사도 그 쪽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머리부터 발 끝 까지 꽁꽁싸매고 온 탓에 신원이니 뭐니 확인할 것도 없었지만요.
A지구에서는 또 다른 사건도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타뷸라의 늑대'라 부르는 사건. 밤마다 이니시에이터 혹은 DPM 그도 아니라면 민간인이 늑대에게 물린 자국과 함께 죽어있는채로 발견되는 사건이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코르포데이도 사건에 착수했다고 하지만 이렇다할 성과는 없다고 합니다. 사건 장소는 골목부터 시작해서 술집, 식당, 상점가를 가리지 않았고 심지어는 집 안에서도 사건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생존자도 있었습니다. 다만 생존자들은 어째서인지 자신들이 본 것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고 자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타뷸라의 늑대가 찾아가서 초대장을 주었거든요.
너희가 부르는 타뷸라의 늑대야 게임을 하고싶어. 선택권은 없으니 무조건 와야할거야 장소는 지구 내부에 있어. 과거에 데미휴먼이 살던 마을이야 지금은 아무도 살지않는 유령마을이니 안심해. 마을에 도착하면 중앙에 있는 교수대로 찾아가 교수대 옆에있는 1층짜리 큰 홀이 있어. 그리로 가면 돼. 하나 더, 이것에 대해 발설하는 사람이 나오면 당연히 타뷸라의 늑대에게 물려죽을거야. 그리고 너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도.
너희가 부르는 타뷸라의 늑대야 게임을 하고싶어. 선택권은 없으니 무조건 와야할거야 장소는 지구 내부에 있어. 과거에 데미휴먼이 살던 마을이야 지금은 아무도 살지않는 유령마을이니 안심해. 마을에 도착하면 중앙에 있는 교수대로 찾아가 교수대 옆에있는 1층짜리 큰 홀이 있어. 그리로 가면 돼. 하나 더, 이것에 대해 발설하는 사람이 나오면 당연히 타뷸라의 늑대에게 물려죽을거야. 그리고 너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도.
리코는 초대장을 빤히 응시하다가 눈에 들어오는-그 중에서도 읽을 수 있는-글자를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그림책에 자주 나오는 글자는 알고 있다. 마을이나, 늑대 같은 간단한 단어에 그쳤지만 아무것도 읽지 못했던 예전보다는 나아진 것이었다. 굳이 마을이 아닌 늑대라는 단어를 골라서 읽은 이유라면, 이전의 일을 떠올렸기 때문이겠다. 리코는 이전에 자신을 덮치려던 사람들을 누군가가 물어뜯어 죽였던 일을 아직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얗고 뾰족한 귀, 마치 그림책에서 보던 늑대 같은 귀. 어쩌면 그 데미휴먼은 진짜 늑대였을지도 모른다.
“…에피, 여기에요?”
초대장을 아래로 내리고 도착한 장소를 둘러보던 리코는 함께 움직이고 있을 유페미아를 보며 말했다. 중앙에 있는 교수대, 그 옆의 홀은… 아니, 이제는 아무도 없는 마을 전체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왜 이 초대장을 받았는지, 이곳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을지 리코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이니시에이터를 따라 갈 뿐이었다. 초대장에 지정된 장소로 걸어가던 리코는 무의식적으로 킁킁거리며 주변의 냄새를 맡았다. 어떤 냄새가 날까, 이런 장소는.
최근 들어 이상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습니다. CPA를 테러한 토끼 데미휴먼의 탈출, 그리고 소위 '타뷸라의 늑대'라 불리는 연쇄살인사건. 이 세상이 어찌 되려고 그러는 모양인지, 키아라는 걱정되었습니다. 불과 지난번, 초대장을 빙자한 협박장이 날아오기 전까지도요. 그 내용은 간단했습니다. 게임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게임을 말하는 건진 몰라도, 결코 곱게 보내줄 생각은 아니겠죠. 이런 일을 꾸미는 범죄자들의 심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초대장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곳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한 마을이었습니다. 마치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 키아라는 홀의 벽에 기대어 초대장을 다시 한 번 꺼내 읽어봅니다. 그리곤 두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릅니다. 머리가 절로 지끈거려옵니다. 키아라의 두 눈썹이 불편한 듯 좁혀졌습니다.
초대장을 뚱한 얼굴로 보면서 한 생각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했으니 이쪽에서 먼저 위협을 제거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모름지기 터지기 전의 폭탄은 해체해야 하는 법이다.
물론 다르게 생각하면 아홉꼬리 보호소가 걸렸다. 이미 미호 소장님은 충분히 코르포데이한테 시달리고 있지 않은가. 상대가 범죄자들이니 사람이 없다는 말은 신뢰할 수 없고 보호소 소속 데미휴먼이 난리를 쳤다가 그대로 걸리면 미호 소장님은 뒷수습을 하시다 과로로 쓰러지실지도 몰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먼저 엄마 아빠와 보호소 사람들을 걸고 넘어진 건 저쪽이었다.
마리야 야코바는 어지간하면 공권력에 의한 원활한 사회문제 해결을 선호했지만, 동시에 공권력이 데미휴먼에 우호적이냐고 하면 그 명제는 신뢰하지 않았다. 차라리 질문만 남발하다 그 사이에 협박범이 경고를 수행해 버릴 가능성을 높이 쳤다. 그리고 그 연장으로 이 극단적인 시국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본보기를 보이려면 자력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빠 표현대로라면 '마리야 야코바를 건드린 사람은 아주 ×되는 거야' 라는 사실을 몸소 보여줘야 한다는 소리다.
으음,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잡아서 족쳐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무표정하고 어찌 보면 맹한 낯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아직 검집에 넣은 장검의 그림자가 유령마을 중앙에 길게 늘어진다.
더군다나 그다지 효율적이지도 않은 협박이다. 인생의 모든 에너지를 사람이 아닌 연구에 쏟아부었던 유페미아에게는 딱히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없다. 굳이 따지자면 요양원에 있는 오빠와 교수일 당시 후계자로 점찍어 놓았던 연구 조교 정도? 그나마 후자는 교수직에 잘린 뒤로 연락이 끊긴 걸 보면, 유페미아가 그녀를 아꼈던 것 만큼 유페미아를 아끼진 않았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아, 이번에 같이 생활하게 된 링크대상, 리코 군도 협박 대상에 해당되는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서로 어색한 점도, 잘 모르는 점도,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 점도 많지만, 어쨌든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의 양육을 결심할 정도로 아낀다는 것은 사실이니까. 비록 아무리 그 결심이 리코의 과거를 알게 된 후 그 충격에, 홧김에 내린 결정에 가까웠던들 말이다.
"리코 군, 위험한 일에 휘말린 것 같다네."
생각이 난 김에 당사자를 불러와서 편지의 전문을 읽어주곤, 리코의 의사를 물어봤다.
"많이 위험할 수도 있는데... 같이 가겠는가?"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위험한 일에는 아이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어린아이를 데려갈 생각은 안 할 것이다. 하지만 유페미아는 어린아이를 키 작은 어른과 같다고 편하게 생각해버리고 있다. 좋게 맣한다면 아이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겠지만, 나쁘게 말하면 어린아이로서는 내릴 수 없는 어렵거나 위험한 결정을 아이에게 내리게 만드는, 이를테면 과신용 상태라고도 할 수 있다. 유페미아의 이런 점은, 아직 유페미아로서는 알아채지 못한, 리코의 '사람이 하는 질문은 무조건 명령으로 받아들이는 특성'과 최악의 시너지를 발휘해, 정말로 위험한 상황을 야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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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갈게요"라고 대답했다고, 어린 아이에 불과한 리코를 협박장에 적힌 장소로 데려온 것도 다 그런 연유에서였다.
"...그래, 늑대. 잘 읽었네, 리코군."
유페미아는 점점 리코의 독해력을 칭찬해주고는, 초대장과 리코로부터 시선을 돌려 을씨년스러운 유령도시를 시선에 담는다.
건물의 내부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었습니다. 창문이 있던 자리는 전부 철을 덧대어 막아놨으며 의외로 깨끗한 편에 속하는 내부에는 말 그대로 텅 비어있었고 꺼질듯 말듯한 조명 몇개가 들어와 그나마 어둡지않게 비추어주는 정도였습니다. 중앙 단상에는 의자 하나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어떤 형체 3개가 나란히 있었습니다. 한 명, 두 명, 서서히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고 모이기로 했던 사람이 다 오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들어왔던 큰 문이 잠겼습니다.
” 왔네? 이야 - 너무 늦어서 안 오는 줄 알았잖아 “
꺄르륵, 하는 웃음소리와 들려온 목소리는 다른곳이 아닌 천장에서 났습니다. 천장을 받치고 있는 지지대 위에서 툭, 떨어진 분홍머리의 여자는 귀에 하얀색 늑대귀가 돋아있었고 하얀 꼬리가 살랑이고 있었습니다. 특이점이라면, 그다지 밝지 않은 상황임에도 로프에 걸렸던 적이 있는지 목에 보이는 선명한 로프자국의 흉터였습니다. 여자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한 10분만 더 기다려보고 아무도 안왔다면 다 때려치고 죽이러 갔을거야. 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었습니다.
” 아차차, 파티를 연 사람이 이러면 안돼지. 정식으로 소개할게. 내 이름은 젤러시 슈피첸. 너희가 타뷸라의 늑대라고 부르는 ‘사람’이자, 블랑슈의 언니이면서, 시카의 딸의 맏언니야. “
젤러시는 잘 부탁해? 하고 말하곤 대답이 없자 뭐, 아님 말고. 하고 말하고는 입고있던 자켓의 팔에 달려있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능숙하게 입에 물곤 불을 붙였습니다. 후 - 하고 하얀 연기가 나와 허공에 흩어집니다. 젤러시는 리코를 보고는 꼬맹이, 결국 링크한거야? 하고 말하고 톡톡, 하고 재를 떨고는 단상위로 올라간 젤러시는 텅 - 하는 소리와 함께 불을 켰고 자리에는 세 명의 사람이 머리에 자루를 뒤집어쓰고 손이 뒤로 묶인채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
” 자, 여기 첫 번째 보이는 사람은 DPM이야. 하지만 말단인데다가 분위기에 휩쓸려 가입한거라 딱히 나쁜 짓은 하지 않았다고하네. 다음으로 가운데 있는 사람. 전직 이니시에이터로 너희처럼 알파지구를 위해 싸우던 사람이야. 뭐, 데리고 있던 데미휴먼을 죽게 한 잘못으로 이니시에이터 일을 그만두었다고 하네. 그리고 마지막, 살인사건의 용의자야. 모든 증거가 이 사람을 범인으로 몰고있지만 자신은 절대 아니라고 하고, 그 시간에는 집에 있었다고해. 이야 - 이 정도 했으면 자수할만한데 아직까지도 결백을 주장한다니까. “
이 모든게 그저 재미있다는듯 꺄르륵 하고 웃은 젤러시는 이 중에 한 명을 죽여야한다면, 누굴 죽일래? 하고 말하고는 손을 등 뒤로 보내 권총하나를 꺼내들었습니다. 시종일관 입에 미소를 걸고 꺄르륵 대던 젤러시는 한 순간 미소를 지우고 싸늘한 표정으로 말합니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말투로요.
” 한 가지 더. 여기서 나갈려고 한다거나, 나한테 대든다거나, 이상한 짓을 하면 너희는 물론이고 너희가 아는 모든 사람을 죽일거야. “
큰 소리를 내며 닫힌 문에 리코는 움찔하며 뒤를 돌아봤다. 잠긴 걸까, 그냥 닫힐 때와는 다른 소리가 들린 것 같다. 문이 닫히던 말던, 리코는 링크한 이니시에이터, 유페미아를 따라 가면 된다. 그런 생각이 있었기에 깜짝 놀란 것에 비해 금방 덤덤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얀 귀와 꼬리를 가진, 목에 선이 있는 늑대. 저번에 리코를 구해준 데미휴먼이 있었다. 링크한거야?라는 물음에 리코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밝아진 시야에 들어온 것은 자루를 뒤집어 쓰고 손이 묶여있는 세 사람. 그 중에 누구를 먼저 죽일 것인지를 묻고 있는 상황. 리코는 아무런 동요 없이 유페미아를 올려다 봤다. 저- 이름은 어려워서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아무튼 늑대가 말한 것은 아무 상관없었다. 죽인다, 그런 행위는 리코에겐 아직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고, 직접 한다는 것 자체도, 죽을 누군가를 고른다는 것 자체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이 명령한다면 아마, 해야 할 것이고 하게 될 것이다. 리코는 가만히 유페미아를 보고 있었다.
젤러시 슈피첸. 타뷸라의 늑대이자 시카의 딸. 결국, 그 연쇄살인 사건도 배후에는 '시카의 딸'이라는 테러단체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요즘, 어딜 가나 그들을 마주하게 되는 것만 같다. 비과학적인 생각이지만, CPA테러사건 때 그 장소에 있었기에, 첫단추를 잘못 꿰맨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문득 든다.
젤러시가 리코에게 아는 척을 하자, 유페미아는 "리코 군, 설마 아는 사람인가?" 하고 리코의 귓전에 속삭이면사도, 리코가 겁을 먹지 않도록 손을 잡아준다.
그리고-이내 불이 켜지고, 결박된 세 사람이 눈에 들어오자, 리코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지금 이게 뭘 하는 짓인가! 사람 목숨을 가지고 놀이를 하자는 겐가!"
젤러시는 대들지 말라고 했지만, 평생을 평범하게만 살아와 사람이 죽고 살고 하는 일에 면역이 안 된 유페미아로서는, 감정적인 반응이 먼저 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으음, 역시 달려들어서 머리를 날려버리는 게 최선인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를 갸울인다. 시카의 딸에다 연쇄 살인범에다 협박범...데미휴먼의 인권을 위해 싸운다는 취지 자체는 이해하지만 부수적인 살인이며 테러행각이 너무 비효율적이지 않은가.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혀끝에서 쓴맛이 나고 한 대 때려주고 싶어. 이거 싫어서 그런 거 맞지?
하지만 본보기를 위해서 잡아서 족쳐버리려고 했고 그러려면 아빠와 엄마와 보호소 사람들의 안전이 담보되어야 하니까. 눈썹만 한 번 꺾어올리고 생각에 잠긴다.
".......가운데 있는 사람."
말문이 무겁게 열렸다. 머릿속이 뜨겁다. 그야 세 사람 모두 죽을 당위성이 없으니까. 하지만 상황이 정말 어쩔 수 없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려고 온 이상 목표는 이뤄야 하니까 선택은 했다. 누구에게 직접적으로 상해를 끼쳤는지, 그리고 죄과가 명백한지. 지극히 기계적인 기준에 따라서였다.
젤러시는 그렇게 말하며 쿠보타의 승패의 조건이 뭐냐는 말에 응? 그딴 거 없는데? 하고 말하곤 고개를 갸웃하고 첫 번째 사람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 자루를 뒤집어쓴 이는 살려달라 소리지르며 몸을 비틀었고 젤러시는 가만히 안 있으면 더 아프게 죽을거야 - 하고 말하며 권총으로 머리를 툭툭 때렸다.
” 어이, 아줌마. 대들면 죽인다고 했을텐데. “
네 목을 물어뜯을텐데 괜찮아? 덧붙여 당신이 아는, 그리고 당신을 아는 모든 사람을 죽일텐데 괜찮겠어? 조금 더 신중하게 행동하지 그래? 젤러시는 싸늘하게 말하며 권총을 유페미아에게 겨누곤 그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아는, 그리고 당신을 아는 모든 사람을 죽이겠다 말했습니다. 기분탓인지, 교묘히 데미휴먼을 피해갑니다.
” 아하하, 대화래. 너 진짜 웃긴다. 조용히하고 시키는대로 했으면 좋겠는데. 뭐, 좋아. 간단하게만 딱 말하자면 그런거지. 동생이 맞고들어왔으면 언니가 가서 혼내주는게 당연하잖아? 그거랑 별개로, 너희들한테 흥미라는게 생겼거든. “
젤러시는 키아라에게 그렇게 답했습니다. 그리곤 들고있던 권총으로 머리를 슥슥 긁으며 그래서 대답은 뭔데? 하고 답을 재촉했습니다. 눅눅하고 캐캐한 공기가 내려앉았습니다. 뭔가가 불편한지 젤러시는 권총으로 제 목의 흉터를 슥슥 만지다가 지루해지려고 하네 - 하고 말하며 허공에 한 발을 발사했고, 세 명의 사람은 비명과 함께 몸을 떨었습니다.
유페미아를 협박하는 말에, 교묘히 데미휴먼은 빠져있지만, 이미 데미휴먼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유페미아로서는 그것을 알아챌 방법이 없다.
살려달라고 몸을 비트는 말단 DPM의 뒷통수에 젤러시가 총을 툭툭 찌르자, 유페미아는 혹시 쏘는 것인가 싶어서 리코의 눈과 귀를 양 손으로 가려주었다. 일반인처럼 귀가 눈과 수평 위치에 있지 않고, 머리 위에 있어서 조금은 어색한 손모양이 되고는 말았지만, 그건 어찌 되든 상관 없었다. 리코는 이미 충분히 폭력을 목격한 아이였다. 리코의 인생에 더 이상의 폭력-그게 리코 자신에게 가해지는 것이든 남에게 가해지는 것을 목격하는 것이든-이 더해져서는 안된다고, 유페미아는 생각했다. 탕, 탕, 탕. 총성이 울리고 세 명의 희생자가(아무리 잘못을 한 사람이라도 유페미아에게는 희생자였다) 쓰러질 때까지, 유페미아는 그 손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총알이 공중을 가르고 자신의 머리 바로 옆을 지나가자, 유페미아는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동도 하지 않고 젤러시를 노려볼 뿐....이었다면 영화같고 매우 멋있었겠지만, 유페미아는 51년이라는 세월을 민간인으로 보냈고, 이니시에이터가 된 지금도 정신만은 민간인인 사람. 총소리가 나자마자 피한답시고 점프해 바닥을 굴렀다.
사람이 셋이나 죽었을 때부터 쿵쾅쿵쾅 울리던 가슴이 지금은 정말로 터질 것만 같다. 이러다 심근경색이 오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로.
>>321 3번은 너무 뻔한 것 같아서 의심이 갔달까요... 유페미아가 젤러시에게 대들지 않았더라면, 대학 수업을 듣다 질문이 생긴 학생처럼 손을 들어올리고, "합리적인 결론을 내리기에는, 3번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구만. 살인사건에 경위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해줄 수 없나?"하고 질문을 했을 겁니다. 두 묘사 사이에서 고민했어요 :3
아는 사이냐는 물음에 리코는 똑같이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모르는 척 하라는 유페미아의 말을 따라 리코는 ‘묶여있는 세 명’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늑대와 주고 받는 말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시선만 이리저리 돌리던 리코는 유페미아가 가려준 덕분에 눈과 귀가 봉쇄되어 버렸다. 얌전히 유페미아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고는 있지만 그 와중에 가려졌어도 귀는 여전히 잘 들린다는 말을 해야 할까-하고 어딘가 나사빠진 성실한 고민을 하던 사이, 세 번의 총성이 들렸다. 귀가 조금씩 움찔거렸다.
“...? 에피?”
총성이 한 번 더 들리고, 눈과 귀를 가리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리코는 재빨리 에피의 행방을 찾아 눈을 돌렸다. 바닥을 구르고 있지만, 저 앞에 있는 세 명과는 다른 상태다. 리코는 그대로 에피와 늑대 사이를 막아섰다.
“…그만해…”
유페미아를 지키려면 그 앞에서 당장이라도 뛰어들 자세를 취하고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 거리는 게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리코는 그렇게 하지 못했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유페미아의 명령이 없었을 뿐더러 이전에 한 번 구해준 상대이기도 하기에 어쩌면 차마 하지 못했다는 쪽이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젤러시는 쿠보타와 키아라의 말에 꺄륵 하고 웃고는 다시 팔에 달린 주머니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고는 능숙하게 불을 붙였습니다. 후 - 하고 연기를 뱉고는 톡톡, 하고 바닥에 쓰러진 세 명중 한 명의 머리위에 재를 털었습니다. 왜, 뭐, 어쩌라고. 하는 식으로 바라보던 젤러시는 따박따박 논리적으로 말하는 마리야에게 말했습니다.
>>325 극악무도한 연쇄살인범이지만, 사람을 죽이지 않을 때는 구하기도 한다는 뜻인가. 아니면, 그저 리코가 데미휴먼이었기 때문에 구해준 것일지도 모른다. 저 '타뷸라의 늑대'도 '시카의 딸'중 하나였으니까.
"나, 난 괜찮네."
유페미아는 숨을 고른 후, 몸을 일으켜 세우곤 리코에게, 자신에겐 총상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보다 총구 앞에 서 있는 건 위험하다네, 어서 물러나시게나."
>>324 "아가씨는 누군가...?"
갑자기 나타나 자신과 총구 사이를 막아선 데미휴먼. 감사하다는 말을 표현해야겠지만, 지금은 혼란스런 상황에 혀가 꼬여서, 튀어나온 말은 약간은 상황과 동떨어진 말이었다.
"나보다는 리코 군을 지켜주게나."
위험하니까 총구에서 떨어지라는 말을 리코에게는 했지만, 그녀에게는 하지 않은 건, 리코는 어린 아이이고 마리야는 성인이라는 점도 있지만, 그보다 '시카의 딸'은 데미휴먼은 쏘지 않으리라는 계산적인 생각도 컸다. 그러면 리코도 데미휴먼이지 않냐고 묻는다면... 어쨌거나 리코는 어린아이니까.
가장 앞에 있는, 늑대와 가장 가까이 있던 남자에게 늑대가 달려들었다. 리코는 유페미아가 다치지 않은 것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네 발로 땅을 딛고 힘차게 도약했다. 작정하고 노린다면 발톱을 꺼내 앞발을 크게 휘두르거나, 이를 꺼내서 물어뜯었을 것이다. 하지만 리코는 발톱도, 이빨도 쓰지 않고 그저 늑대를 몸으로 막아내듯, 뛰어든 기세 그대로 밀쳤다.
“으… 안돼!”
몸으로 밀쳐낸 후 땅에 제대로 착지한 리코는 그대로 경계하듯, 늑대를 주시하며 꼬리를 좌우로 빠르게 흔들었다.
대체 생판 관계없는 사람을 죽이는 행동의 어디가 꼭 해야 하는 일인지 모르겠지만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는다. 협박범이 따로 결고하지도 않았는데 장단에 맞춰주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늑대가 상대방에게 달려드는 것을 전투 개시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한달음에 뛰어서 늑대에게 검을 휘두른다. 이제 진짜로 여기 온 바를 실행할 차례이다.
검집에서 검을 뽑지는 않는다. 그저 몽둥이처럼 휘둘러 쿠보타에게 달려드는 상대의 팔을 후려친다. 후려친 틈을 타서 리코가 상대를 밀친다. 그것을 본 뒤 다시 한 달음에 뛰어서 상대와의 거리를 좁히고 리코를 보호하듯 등 뒤에 놓는다.
"적어도 난 그런 적 없어. 그때 일은 그때 사람들한테 이야기해야지, 왜 우리한테 난리지?"
키아라는 팔짱을 꼈다가, 팔짱을 스르륵 풀며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맨 앞자리에 있었던 쿠보타가 공격받는 걸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이쪽도 어쩔 수 없습니다. 키아라는 권총을 꺼내 재빨리 젤러시를 조준했습니다.
"하다하다 엉뚱한 사람한테 화풀이라니."
방아쇠를 당기며, 키아라는 중얼거렸습니다. 그 시카의 딸이라는 조직 수준도 알 만 하구만. 미처 내뱉지 못한 말이 응어리가 되어 목 뒤로 넘어갔습니다. 키아라가 내뱉을 뻔한 그 말은 전혀 언행에 조심성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비웃는 태도도 있었을지도요. 그럼에도 키아라가 그 말을 삼켜버린 것은, 혹시나 모를 피해가 마리아에게 갈까봐 걱정되서였습니다. 도발성의 어투가 다분한 그 언행은 상대의 심기를 돋구기에 충분했었겠죠.
쿠보타에게 달려든 젤러시는 안광을 빛내며 반원으로 날아오는 칼을 몸을 구부려 피했습니다. 일부러 그런것인지, 아니면 실수였는지는 모르지만 어깨 부분이 조금 베여 주륵 흘렀습니다. 이후에 날아오는 것은 키아라의 총탄. 우연인지, 노린것인지 쿠보타의 검을 피하며 몸을 틀었을 때 총탄을 볼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마리야의 검집. 딱히 피하지도 않고 주먹으로 쿵, 하고 맞받아쳤습니다.
” 있잖아, 어쩌면 너희 다 오늘 죽을지도 몰라 “
소름끼칠만큼 입꼬리를 늘린 젤러시는 뚜둑, 하고 목와 손목을 풀고는 앞으로 달려들려다가 마리야를 보고는 옆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피한 자리에 리코가 있자, 젤러시는 다시 한 번 반대편으로 몸을 틀었습니다. 걸리적거리는구만. 하고 말한 젤러시는 자세를 바로잡고 후 - 하고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그저 즐겁다는듯 입가에는 계속 미소가 걸려있었습니다.
” 생각같아선 빨리 끝내고 싶은데, 아아 - 아무래도 즐기고 싶단 말이야. “
그러니, 천천히 해보자고. 젤러시는 몸을 낮췄다가 앞으로 튀어나가 키아라의 손목을 주먹으로 내리쳤습니다. 이상하리만치 강한 힘. 데미휴먼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오랜 수련의 결과일까요. 그도 아니라면 그 둘이 합쳐진걸까요. 조금만 더 힘을 줬다면 아마 그대로 부숴졌을지 모릅니다. 다음으로 노린 것은 유페미아 였습니다. 유페미아의 몸을 밀치곤 그대로 덮쳐 미소를 짓고는 ‘너 진짜 죽겠다?’ 하고 말하곤 이빨을 드러내 목을 물려고 한 순간 뒤에서 날아오는 공격에 몸을 피했습니다.
자신을 덮친 젤러시가 이빨을 드러내자 유페미아는 둘의 몸 사이에 끼어 있던 마취총의 총대를 부여잡고 개머리판으로 찍듯이 젤러시의 머리를 가격하려 하지만... 빗나가고 말았다. 역시 데미휴먼의 순발력은 무시할 만한 게 못 됐다. 공격은 실패. 유페미아는 개과 동물의 행동학 관련 지식을 찾아 머릿속을 뒤진다.
그래, 분명....
개과 동물이 공격할 때는 목을 보호하렸다.
유페미아는 마취총을 돌려잡아, 개머리판이 자신의 쇄골뼈와 턱뼈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게 잡는다. 목을 물려하면 개머리판이 방해해서 물 수 없게, 그렇다고 총을 꾹 누른다면 턱뼈와 쇄골뼈가 방해해서 기도가 눌리지 않아 질식하지 않을, 그런 자세를 찾는다는 결과가 이거였다.
이제 데미휴먼의 힘에 마취총을 빼앗기지만 않으면 되었다. 유페미아는 젖먹던 힘까지 내 총을 움켜쥔다.
코 앞으로 젤러시가 다가오는 것은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눈 앞에 스쳐지나가는 상대의 얼굴, 그리고 밀려오는 고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총이 바닥에 떨어집니다.
"큭..."
키아라는 손목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깨뭅니다. 그리고 멀쩡한 손으로 다시 총을 주워, 경계 자세를 늦추지 않습니다. 젤러시에게 공격당해 나가떨어진 인영은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유페미아 씨!"
키아라는 다급히 외쳤습니다. 그리곤 제대로 겨누지도 않고, 방아쇠를 젤러시 쪽으로 마구 당겨댑니다. 제어되지 않은 반동이 한쪽 손바닥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져옵니다. 미처 조준되지 못한 탄환들은 애먼 곳으로 날아가 벽에 팍, 박혔습니다. 그러자 젤러시가 급하게 몸을 움직이는 것이 보입니다. 공격은 실패했을지라도 약간의 경고 효과는 있었던 모양입니다.
다른 데로 가라는 늑대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리코는 그대로 달려들어 늑대를 한번 더 밀쳐낼 생각이었다. 뒷발에 힘을 세게 주어 앞으로, 맹수의 무시무시한 도약력을 아낌없이 발휘해서 유페미아를 구하려고 했으나… 어디까지나 생각에서 그쳤다.
고양이가 높은 곳으로 점프를 하려다가 어정쩡하게 뛰어 그대로 나동그라지거나, 과하게 긴장한 상태에서 ‘고장 나는’, 그런 경우를 가끔 볼 수 있다. 그렇다. 힘차게 도약하려고 한 리코였지만 총성이 왔다갔다하고 칼이 번쩍이는 이런 상황에서는 긴장을 하지 말라는 것 자체가 무리인 상황이고, 리코 자신도 누군가를 적극적으로 공격하게 된 것도 거의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리코는 지금 과민하게 긴장한 상태였고,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몸이 훨씬 경직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태로 도약을 시도했으니, 망하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쓸데없이 강한 힘으로 뛰쳐나가려던 리코는 그대로 화려하게 넘어졌고, 의도치 않게 슬라이딩까지 해버렸다. 주욱 미끄러진 리코는 다급히 고개를 들어 늑대에게 외쳤다.
저 사람, 강하다. 검 손잡이에서 느껴지는 둔중한 충격을 느끼고 직감적으로 느낀 사실이었다. 어릴 적 어머니와 대련할 때 느꼈던 만만치 않은 완력과 견고한 수비가 고스란히 떠오른다.
"배려는 감사하지만..."
그냥 가면 무고한 사람을 계속 죽일 거잖아요. 저로서는 사태 해결을 위해선 당신을 막는 게 제일 효율적이라고 생각해요. 그 말을 끊어 말하며 어떻게든 때려 보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이리저리 튀어오르지만 첫 한 방 이후로 계속 틈이 보이지 않는다. 한 대도 맞지 않는 것을 느끼곤 이를 빠득 간다. 사람을 지키지 못하는 것 이전에 싸움꾼으로써 밀린 것이 분했다.
그렇게 한 쪽은 걸리적거리는 총을 빼앗아 치워버리기 위해서, 한쪽은 마지막 생명줄과도 같은 총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 양껏 힘을 주고 있던 찰나, 갑자기 상대방이 잡아당기던 힘이 사라진다. 쿠보타의 수리검 때문인지, 키아라의 총소리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마리야의 육탄공격 때문인지,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젤러시가 몸을 뒤로 뺀 것이다. 유페미아는 이 틈을 타, 쿠보타의 충고처럼 총을 잡고 구르듯이 빠져나와 두 다리로 일어선다. 말하자면, 전투 복귀라는 것이겠지.
가엾게도, 너도 그리 좋지 않은 선택을 한 모양이구나. 걱정하지마렴, 네 주인에게서는 우리가 꼭 해방시켜줄테니. 하고 젤러시는 리코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바닥에 쓰러진 리코에게 다가가 뒷목을 잡아 들어올리고는 더 이상 빚지면 좋을 게 없을텐데. 하고 말하곤 어깨를 으쓱한 뒤 에 한쪽 벽으로 던졌습니다.
” 아, 왜이리 날파리들이 많아. 한 번에 하나씩 정리하려고 했는데 “
유페미아에게서 떨어진 젤러시는 고개를 들어 한 쪽 벽에 걸린 시계를 보더니 앗, 시간없다. 하고 중얼거리고는 시간없으니까 빨리 끝내자. 하고 말한 뒤에 잠시간 대치하며 서 있다가 누구부터 끝내야하지. 하고 어깨에 흐르는 피를 닦아냈다.
” 마지막 기회야. 나는 데미휴먼은 건드리지 않아.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꼬리말고 도망가. 아니면 나도 어쩔 수가 없거든 “
혼자서 몇 명을 상대하는 젤러시였지만 지친 기색은 없었고 늑대란 이런것이다. 하고 보여주듯 이리뛰고 저리뛰며 능숙하게 다대일의 싸움을 풀어가는 젤러시였습니다. 다음으로 내린 판단은 키아라. 키아라였습니다. 나머지는 별 도움 안돼니, 저걸 먼저 잡아야한다. 하고 생각한 젤러시는 몸을 웅크렸다가 키아라에게 튀어나갔습니다.
” 도박 한 번 걸어보자고. 우리 자매님들이 날 건드릴지, 아닐지 “
키아라를 가격한 젤러시는 얼마나 세게 쳤는지 주먹에서는 펑 - 하고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첫 번째는 복부에, 두 번째는 얼굴을 때려 바닥에 눕히고는 목을 돌려 풀어주고는 유페미아때와 마찬가지로 그 위에 올라타 이빨을 드러냈습니다.
젤러시에게 던져진 리코가 떨어진 한쪽 벽쪽으로 뛰어가, 리코를 일으켜 세우고는 그녀의 상태를 살핀다. 리코가 데미휴먼의 감과 고양잇과 동물의 착지력을 발휘해서 완벽히 착지했을지도 모르지만, 하여튼 그랬다. 그야, 이니시에이터가 되기 전까지는 데미휴먼을 접할 일이 없던 유페미아의 상식으로는 어린 아이가 그런 거리를 던져지면 크게 다치는 게 당연한 일인 것이다.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해보게. 이번엔 팔관절을 굽혔다 폈다! 다리 관절도! 이제 한번 일어나 보게. 괜찮은가? 어디 아픈 곳은 없나?"
전투 상황중에 어울리지 않는 응급조치 광경이지만, 자신의 보호 아래 있는 어린 아이가 다쳤을 수도 있는데 내버려둘 수는 없다는 것이, 그 당시 떠오른 유페미아답지 않게 책임감 있는 생각이었다.
이렇게 잠시 정신을 전투가 아닌 다른 곳에 팔고 있던 사이, 고개를 돌려 보니 좀 전 유페미아가 그랬던 것처럼 키아라가 젤러시에게 깔려 목을 물릴 위험에 처한 것이 아닌가. 키아라에게는 CPA 테러 사건 때부터 오늘 싸움에 이르기까지, 여러 모로 받은 은혜가 많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도왔겠지만 말이다. 유페미아는 마취총을 조준하여 젤러시를 향해 발사하지만, 마취탄은 늑대 데미휴먼의 예민한 귀를 스치고 지나갈 뿐이다.
"젤러시! 멈추시게, 그 자는 데미휴먼의 어머니라네!"
혹시나 이 말을 들으면 공동의식을 느껴 공격을 그만둘까 하고, 유페미아는 젤러시에게 소리친다.
젤러시의 화살은 키아라를 향해 있었습니다.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습니다. 복부를 가격당하자 엄청난 고통과 함께 거친 파열음이 납니다.
"컥..."
목을 따라 울컥 올라오는 것이 느껴집니다. 두번째로 얼굴을 맞자 온 세상이 빙빙 돕니다. 밭게 기침을 내뱉자 새빨간 핏덩이가 토해졌습니다. 핏덩이는 보기 흉하게 터져나오며 키아라의 입술 부근에 묻혀졌습니다. 몸이 힘없이 밀쳐지고 차가운 바닥이 등결에 닿습니다. 힘겹게 눈을 감았다 뜨자 자신 위에 올라탄 젤러시가 보입니다.
"그래, 죽여봐. 등신아. 난 곱게 못 죽는다고..."
키아라는 피를 토하는 와중에도 거친 말을 내뱉으며 으르렁댔습니다. 마리아를 위해서라도, 절대 여기서 죽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키아라는 공격을 하는 대신, 한 쪽 팔을 들이밀며 목을 물어뜯으려는 젤러시를 견제하는 것으로 자기방어를 하려 했습니다. 목을 물리는 것보단 차라리 팔을 물리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요.
해방이라는 말에 리코는 의문을 품었지만 그걸 말로 채 하기도 전에 뒷목을 잡혀 들어올려졌다. 버둥거려도 손은 풀리지 않았고, 곧바로 강한 부유감과 추락할 때의 오싹한 느낌, 그리고 벽에 부딪혔을 때의 통증이 차례로 리코를 찾아왔다. 본능적으로 다리를 아래로 내려 발부터 닿게 하려고 했지만 아쉽게도 그 과정을 다 처리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리코는 그대로 머리부터 벽에 처박혔다.
“아윽…!!”
유페미아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킨 리코는 제대로 서려고 했지만 시야가 어지러워 머리를 제대로 들 수 없었다. 유페미아의 말대로 손가락도 쥐었다 펴보고, 팔도 굽혔다 펴고, 다리도 굽혔다 펴본다. 전부 제대로 움직이지만 그러는 순간에도 어지러움은 쉬이 멎지 않았다. 아픈 곳이 없냐는 말에 리코는 작게 대답했다.
“어지러워요…”
누군가를 깔아뭉개고 물어뜯으려는 늑대가 보인다. 안돼, 키아라는 좋은 사람인데. 리코는 어지러움을 참으며 크게 외쳤다.
“안돼!! 키아라는 좋은 사람이야!!”
소리를 지른 탓에 머리가 한층 더 어지러웠다. 묘하게 올라오는 구토감을 리코는 애써 참아내고 있었다.
>>432 머리부터 벽에 부딪혔고, 어지럽다. 뇌진탕의 대표적인 증세이다. 응급처치법으로는 환자의 상체를 일으켜 세워줘야 하고, 충격 부위에 냉찜질을 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이 곳에는 냉찜질을 해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일단은 상체라도 기댈 곳을 마련해주어야겠다. 유페미아는 티셔츠 위에 입고있던 플라넬 셔츠를 벗어 베개 모양이로 접어 리코의 머리 뒤에 괴어 주고는, 리코가 벽에 몸을 기대 앉아있도록 한다.
"뇌진탕이 온 걸 수도 있으니, 일다는 이 자세로 안정을 취하는 게 좋겠네, 리코군."
//리코가 다쳤다니 에피 메딕 나가신다..! 리코주 에피가 너무 과보호를 하는 것 같거나 여하튼 너무 나대는 것 같으시다면 바로 찔러주세요!(찡긋
리코가 들어올려져 날아가는 것을 보고 짧게 비명에 가까운 것을 뱉는다. 꼬리 말고 도망가라는 말에 속에서 불이 나는 것을 느낀다. 적 하나 더 만든 셈 쳐요. 짧게 뱉은 다음 다시 이를 악물고 늑대에게 달려든다. 그러나 역시 번번이 빗겨나가는 것이 경험의 차이가 넘을 수 없는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 같다.
잠시 방심한 사이 상대방은 키아라를 향해 달려든다. 작은 바램에 머리칼이 비산하고 황급히 몸을 돌려 보지만 이미 키아라를 깔아뭉개고 물어뜯으려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찰나의 순간이 중요했기에 뛰어올라서 직접 치는 게 더 빠를까, 검을 던져서 저지하는 게 고민한다. 검을 던지지만 빗나가는 것을 보고 다시 이를 빠득 간다.
번뜩이는 이빨로 목을 물려고 했을 때 데미휴먼의 어머니라는 말을 듣고 멈칫한 젤러시는 그 잠깐 멈칫한 틈 때문에 팔을 올릴 틈을 주고 말았고 쳇 하고 혀를 찬 젤러시는 더 지체하지 않고 키아라의 팔을 물었습니다. 아니, 물려고 했습니다. 울리는 총성과 날아오는 총탄을 몸에 맞은 젤러시는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옆으로 구르고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화를 삭이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 아 - 개운해졌다.. "
주르륵 흐르는 피를 살짝 핥은 젤러시는 머리 무거웠는데, 고맙네. 하고 말하곤 자신을 노려보는 여러개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팔에 닥쳐오는 끔찍한 고통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별안간 총성과 함께 젤러시가 나가떨어졌습니다. 키아라는 비틀대며 일어나 성한 한 쪽 손으로 총을 집어들었습니다. 맞은 곳이 아직도 욱신거립니다. 그리고 아직도 성치 못한 몸으로, 한 쪽 손을 들어 젤러시를 총으로 겨누었습니다.
“계속 그렇게 이빨을 드러내신다면야,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맞서주지.”
젤러시를 노려보는 그 눈동자는 형형히 빛나고 있었습니다. 죽음을 코 앞에 두고 키아라는 놀랄 만큼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어차피 적으로 만났는데. 뚱한 표정으로 대꾸하곤 그 사이 주운 검을 쥔다. 우리를 죽인다고 했으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인다고 했으니까, 이미 공적으로 연쇄살인범 대 협박 피해자들이고 이러쿵 저러쿵. 결국 어차피 지금 싸울 수밖에 없는 사이이다. 스릉, 검집에서 검을 뽑고 다시 자세를 잡는다. 사람의 형상을 한 상대를 베면 느낌이 좋지 않지만 상대가 너무 강하니 어쩔 수 없다.
" 수적으로 유리하다지만은.. 알파는 쉽게 지지 않거든. 아니, 질 수 없고 지면 안 돼. "
모조리 죽여볼까. 하고 말한 젤러시는 다시 달려들려다가 멈칫 하고는 시계를 바라봤다. 벌써 시간이.. 하고 말한 젤러시는 아쉽네. 하고 말하며 뒤로 물렀습니다. 시카가 준 시간이 이것밖에 없다며 발을 동동 구르던 젤러시는 너희 운 좋네. 하고 덧붙이며 벽으로 다가가 주먹으로 툭툭 치기 시작합니다.
" 야, 도망치는게 좋을거야. 곧 크토니안이 올거거든. 너흰 내 손으로 죽이고 싶어서. "
그럼 이만. 하고 발랄하게 말한 젤러시는 벽을 주먹으로 세게 내리쳤고 오래된 벽돌벽은 그대로 무너져내리고 젤러시는 바람같이 사라졌습니다.
//
여기까지입니다. 어찌저찌 필요한 내용은 다 뺐네요. 모바일이라 이게 참.. 고생하셨습니다!!
이성적으로는 거절해야 하는 것을 아는데 줄 달린 인형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소장님이 끓여 주시는 차의 향기가 달큰해서 절로 눈가가 풀어진다. 그러면서 있는 대로 어지러웠던 기분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이것도 다 소장님을 좋아하고 같이 있고 싶어서 그런 거겠지, 라고 스치듯이 생각한다.
소장님과 함께 차를 마시며 조금은 이성적인 판단을 되찾는다. 자신은 말하자면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감정의 회오리 속에 갇혀 있었던 모양이라고. 그걸 깨는 데 소장님이 큰 도움을 주셨으니 조금만 더 기대도 되지 않을까 하고. 물론 소장님은 바쁘시지만 자신은 이미 이렇게 대찬 방식으로 소장님의 시간을 낭비해 버렸지 않은가. 그러니 상호 간에 만족할 만한 교류를 가지는 일이 그 손해를 대체할 수 있는 행동일 터라고 결론을 내린다.
"제가 요새 남자친구 연락에 좀 늦게 답장을 했거든요."
그랬더니 헤어지고 싶냐고 물어봤어요. 어차피 그 전부터 걸리는 일이 있고 해서 저쪽에서 헤어질 의사가 있으면 장기적으로 봤을 때 헤어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감정 없고 조금은 비정한 낯을 말갛게 풀고,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헤어졌던 사정을 솔직히 풀어 나갔다. 그래서 이미 끝난 일이고 합의 하에 헤어졌으며 솔직히 미련이 남을 만한 감정적인 교류도 없다고 생각하고요.
"그런데 헤어질 때 대화가 자꾸 생각이 나요."
분명 대화에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 그때 제 행동이 성에 차지 않고요.
//그리고 일상 이었습니다! 제가 지옥에서 올라온 느림보라는 말은 이런 의미였습니다...시간이 늦었으니 캡틴 킵하시는 게 좋을 것 같구요 편하실 때 이어주세요!
키아라는 살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누누히 생각해왔듯 키아라에겐 인류를 크토니안으로부터 지켜내는 거창한 사명감 따위는 없습니다. 부족하게 자란 유년기의 압박감과 마리아를 위해서라는 생각이 그녀를 이니시에이터의 길로 이끌었을 뿐.
"유베리드라..."
키아라는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마피아가 운영하는 보호소, 무연고의 데미휴먼을 납치해간다는 흉흉한 소문이 도는 곳. 키아라가 유베리드 보호소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은 막연한 불신과 걱정, 그뿐이었습니다. 또한 키아라는 개인적으로 그곳의 소장에게 좋은 감정을 지니고 있진 않았습니다. 일반인들이 범죄자에 대해 가지는 두려움이라기보단... 좀 더 과격한 증오라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키아라는 그러했습니다.
"보호소 생활이 힘들지는 않나?"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운영하는 보호소라면 생활 환경도 좋지 않을 것이다, 키아라는 늘 그렇게 생각하곤 했습니다.
이니시에이터 지인이 별로 없는 유페미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쪽 일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건 아니다. A지구의 마피아 대부인 소넷 유베리드가 데미휴먼 보호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애초에 그건 꼭 이니시에이터가 아니더라도 알 정도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니까.
다만... 그 보호소 출신인 사람을 직접 마주하는 것은 처음인 것이다. 솔직히 유베리드의 데미휴먼에게 이렇게 외출이 허용된다는 것에도 놀랐다. 유페미아의 머릿속에서 유베리드 패밀리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로는, 햇볕도 안 닿는 반지하에서 쇠창살 뒤에 갇혀있는... 그런 이미지밖에 떠오르지 않았기에.
솔직히 말해 괜히 오베론 군과 엮여버렸나, 하는 이기적인 후회도 잠시 해본다. 오베론과 엮인다는 것은 그를 보호하고 있는 유베리드 패밀리와 엮인다는 것이고, 평생을 민간인으로 살아왔던 유페미아로서는 유베리드 패밀리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떨치기 어려운 탓이다.
"자네... 하루 빨리 좋은 이니시에이터를 만나길 빌겠네."
오베론을 바라보는 유페미아의 얼굴엔 (유페미아의 머릿 속에서) 틀림없이 끔찍한 생활을 보내고 있을 오베론에 대한 동정심과 측은지심이 숨김없이 드러나있다.
>>581 죄송합니다 크토니안 사태가 언제 발발했을까 궁금해서 위키 뒤져보고 왔어요...미호 나이를 생각해보면 적어도 36년은 넘었겠지만요! 아무튼 두사람이 검객이라는 접점이 있다보니...쿠보타가 검을 키티(마냐네 어머니)에게 배웠다는 설정 어떠신가요? (참고로 마냐네 어머니는 현재 50대로 잡고 있어요)
마냐 어머니는 선한 편이긴 한데 현실적이고 잔혹하기로도 손에 꼽는 편이라 쿠보타를 이해하면서도 그래도 그건 아니지!!! 하고 생각할 것 같아요. 그러면 마냐 어머니가 쿠보타씨 어릴 적에 검술을 가르쳐 주었는데 쿠보타가 자라서 사람을 베니까 극대노해서 인연을 끊었다는 설정은 어떠신가요? 어색한 설정인 것 같으시면 편히 말씀해 주세요!
으음... 솔직히 무리가 많은 설정이라고 생각되지만, 한편으론 또 굉장히 매력적이라서 포기하기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제쪽은 구체적인 이미지는 없고, 뭔가 대략적인 것들만 떠오르는군요. 마리야네랑 뭔가 으르렁거리면서도 사이좋은... 막연한 그림입니다. 그렇다면 조금 절충해서, 과거보다는 현재에 집중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쿠보타가 과거를 청산하고 이니시에이터를 시작할때에 도와줬던 것이 마냐네 어머님이라던가... 과거를 알면서 덮어주고 도와주는 것에 빚을 졌다던가 말이지요. 그 댓가로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자산인 칼솜씨로 마냐와의 대련상대가 되라든가...? 그 안에서 쿠보타도 '답'을 찾으려 한다던가... 뭔가 산으로 가는군요. 허허. 사족으로 쿠보타는 현재 데미휴먼을 베어도 되는지 어떤지 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으려 하고 있는 중입니다.
>>591 그러면 마냐가 꽤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냈다고 해도 무방하겠네요! 쿠보타의 과거사를 듣고 나니 쿠보타가 마냐를 어떻게 대할지도 궁금해요. 쿠보타에게 마냐가 의미 있었는지도 궁금하지만 마냐는 자기를 대하는 태도에 따라 행동이 바뀌는 타입이라서요. 물론 별 생각 없었을 수도 있을 것 같지만요 ㅎㅎ
>>594 쿠보타에게 있어서 데미휴먼은 외계인입니다. 사람같지만 사실은 전혀 새로운 존재고, 그렇다고 크토니안도 아닌 것이라 마구 적대시하는 것도 좀 그렇지요. 마냐와는 오랜 시간 검을 맞대면서 지냈으니, 아마 서로 거리낌이 없는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딱히 구분을 짓고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사람을 대할 정도일까요. 그러면서도 감정은 둔한 주제에 호전적인 면이 있어서 그 부분을 일깨워주려고 장난도 치고 할 것 같군요. 쿠보타도 매사엔 껄렁껄렁이고 감상에 휘둘리는 편이라, 항상 생각하고 자기 고집있게 행동하는 오히려 마냐에게 더 배우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595 ㅋㅋㅋㅋㅋㅋ 외계인 지인1이 되는 거네요! 마냐도 쿠보타가 장난칠 때마다 자기가 자각하지 못하는 선에서 툴툴거릴 거 같아요. 의미없는 시간낭비(장난) 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라고...(표현 죄송합니다 애가 너무 호전적이라 바닥기기) 그러면 남은 썰이 있다면 다음에 풀고 일상을 돌려볼까요...? 아니면 일상은 일단 예약만 해놓고 이만 쉬시는 게 좋을까요?(저는 일상 돌려도 쌩쌩합니다)
유베리드 보호소가 힘들지 않다는 말에는,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골몰히 고민해본다. 정말로 유베리드 보호소가 괜찮은 것인지, 아니면 이 사슴이 전에 살던 삶이 그것보다도 끔찍했던 건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는 것이다. '예전에 살던 곳 보다야 낫다'는 말은 여러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말이다.
"확실히 많은 사람들이 데미휴먼에게, 더더욱이 침식이 심한 데미휴먼에게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만, 그건 무식한 자들의 편견에 불과하다네! 중화제만 꾸준히 맞아준다면야 데미휴먼도 일반인과 다를 게 없고, 또 링크한 데미휴먼에게 중화제는 무료로 주어지지 않나! 무지한 자들의 말은 무시하게나, 이건-그래, 제대로 된 지식이 박힌 이니시에이터를 찾아 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시게."
보자.. 젤러시가 교수대로 끌려가던 당시의 상황이에요. 나중에 과거회상하면서 나올테지만..
교수대가 있는 곳까지 올라가는데는 13개의 계단이 있었어요. 13은 불길한 숫자잖아요? 13개의 계단을 다 밟고나서 죽으면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미신겸 전통이 있던거죠. 처음 젤러시는 죽기 싫다고, 살려달라고 온 몸을 비틀다가 결국은 13개의 계단을 직접 하나하나 밟으면서 올라가고 소리쳤어요. 13개의 계단을 다 밟았다고, 난 지옥으로 갈거고 악마가 되어서 돌아오겠다고, 다시 돌아와서 너희 전부의 목을 물어 뜯겠다고.
유령 마을에서의 일로부터 며칠이 흘렀습니다. 키아라가 그 때 입은 부상은 여전히 심각했습니다. 역시 데미휴먼의 완력은 강력했달까요. 골절이 난 오른손목에 붕대를 둘둘 감아야 했고, 오른쪽 눈 밑에 보기 흉한 멍자국도 생겨버렸지 뭡니까. 의사가 말하길 최소 몇 주 이상은 있어야 다 낫겠다고 했던가요. 과격한 행동은 금물이라는 의사의 소견에 키아라는 지난 며칠간 집에서 철저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집에만 있다 보니 절로 답답해져 바람이나 쐬러 나온 길이었습니다.
늦은 저녁, 거리를 오가는 인파가 한산할 때였습니다. 무심코 걸음을 멈추고 보니 유베리드 패밀리의 보호소 앞이었습니다. 불현듯 마리아 생각이 뇌리를 스칩니다. 키아라는 아홉꼬리 보호소라는 곳이 있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자, 오랜만에 마리아를 보러 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꼴로는 마리아에게 괜한 걱정만 안겨줄 것 같아 금세 관두었습니다. 길가에 서서, 키아라는 괜히 애꿎은 돌멩이만 발로 차댔습니다.
“그래, 유페미아 씨 말씀이 맞아. 당신 같은 데미휴먼을 이해해 줄 이니시에이터도 분명 있을 거야.”
키아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페미아의 말에 동의를 표했습니다. 이어지는 오베론의 말을 듣고선 역시 그런가, 했습니다. 유베리드 보호소는 분명 차별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구조일 테니까요. 키아라는 그곳의 광경을 상상만 해도 끔찍했습니다. 데미휴먼이 물건처럼 다루어지는 곳. 이니시에이터와 데미휴먼의 링크는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
“...”
오베론의 충격적인 발언에 키아라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습니다. 크토니안화의 문턱에 마주닿아있는 이 가여운 사슴을 어찌해야 할까요. 답은 하나뿐이었습니다.
“그, 갑작스럽지만, 혹시 괜찮다면 나랑 링크하지 않겠나? 나도 지금 링크한 데미휴먼이 없는 상태거든.”
자신이 직접 그의 보호자이자 파트너가 되는 것. 그 제안은 순수히 동정심이나, 연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어쩌면 충동적인 감정에 의한 것일수도요.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 이가 있는데 어찌 두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수가 있나요. 그리고 키아라는 데미휴먼을 대하는 것 하나엔 자신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마리아를 어떻게 키워왔는데요. 재정적 여유도 있기에 링크하는 데에 드는 비용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습니다. 물론 상대가 동의한다는 전제 하에서의 이야기였지만요.
누군가에게는 큰 부상을 입히고, 또 누군가의 속에 분심을 심어넣은 사건으로부터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결백한 처형수와 단죄, 기타 이러저러한 이야기들. 그간에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생각이 깊은 이였다면 이 사태에 대해 고민하고 또다시 발생할지도 모를 사태를 막기 위한 대비책을 세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 관여된 인물로서 통탄해 마지않을 사실이 하나 있는데, 요점은 그거다. 야오쳰위는 현 시국의 문제를 고찰할 그 누군가가 아니라는 사실. 젤러시의 속사정이야 안타까울 뿐이고, 그렇다 해서 그 '가족들'의 계략을 말리고 싶은 생각도 그다지 들지 않는다. 몇 차례 험난한 사고를 겪은 뒤에도 스스럼없이 나다닐 수 있는 이유는 그 특유의 무념함 덕분인지도 모른다.
보호소 인근의 폐건물 지붕에 올라앉아 있던 그는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흑백이 반전된 황적색 눈이 지면의 물체들을 더듬더듬 훑었다. 그는 감각이 뛰어나게 발달한 데미휴먼이었지만, 야간시력만큼은 보통의 인간과 다르지 않았다. 능력의 원본이 된 동물의 시력이 그랬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내려다보아도 형체가 흐린 인영들을 보던 그는, 결국 위치를 옮겨 거리를 좁히고서야 그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와 헬멧을 쓴 남자. 몇 번인가 스치듯 보아온 얼굴이었다. 조금은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그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 두 손을 입가에 올려 손나팔을 만들고서 말이다.
"아! 그때 그분들 맞죠!"
그러고선 한 발 늦게 아래로 내려온다. 부서진 지붕이 밟혀 덜컹거리는 소리 몇 번, 바닥에 착지하는 소리 한 번. 그리고 요란하게 뛰어오는 소리가 잠깐. 땅 위로 내려선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의 앞에 멈춰섰다.
"여긴 웬일이에요?"
서슴없이 말하는 모습을 보니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친한 사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맞다, 저 알죠."
꽤 늦은 감이 있는 확인절차도 함께. 그는 상대의 분위기를 살피다 멋쩍게 어깨를 으쓱했다.
줄곧 아스팔트 바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키아라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듭니다. 콜트였습니다. 아는 얼굴을 만났는데 꼴이 이게 뭔가요. 키아라는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습니다.
“살아있어서 다행이지. 아무튼 다시 봐서 반갑군, 콜트.”
키아라는 그 상황에서 죽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죽는다면 마리아가 얼마나 슬퍼할까요. 마리아를 위해서라도 몸을 사려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키아라는 오로지 마리아 걱정 뿐이었습니다. 별안간,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날아듭니다. 명백히 자신들을 향한 것 같은 외침.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린 곳엔 언제부턴가 쭈욱 보아왔던 유인원의 데미휴먼이 있었습니다.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어 이름이나 자세한 속사정은 모르지만요. 이런 애매한 사이에 서슴없이 말을 걸어오는 상대의 친화력에 감탄할 새도 없이 요란한 소리가 몇 번, 울려퍼집니다.
"별 일은 아니고, 그냥 지나가던 길."
이내 상대는 살갑게 다가와 말을 걸어옵니다. 지금 이 상황이 어색하지 그지없지만, 키아라는 어깨를 으쓱이며 상대의 질문에 대답합니다.
크토니안이 되면 죽여달라는 말에 유페미아의 입이 딱 벌어진다. 하긴, 이 정도로 침식이 진행되었으니, 중화제 타이밍을 놓친다면 크토니안화할 가능성도 확실히 존재야 하겠지만...
"아니, 자네, 그게 무슨 끔찍한 소린가! 더군다나 크토니안화라니, 의사는 아니지만 평생을 크토니안을 연구한 사람으로서 내 소견을 밝히자면 자네가 중화제만 꾸준히 맞는다면 평생 살면서 크토니안화 할 확률은 1프로도 채 안된다네! 그것도 높게 잡은 수치이지! 어디까지나, 중화제만 제 때 제 떄 맞아준다면 말이야."
그보다, 이 청년은 어떻게 이렇게 죽음에 초연할 수가 있는가. 디스토피아라고도 불려지는 세상에서 50년을 보냈지만 아직 유페미아는 죽음에 초연해지기는 커녕 익숙해지지도 못했다.CPA테러 사건 때도 그랬고 말이다.
"그래, 그러면 되겠구만!"
키아라가 링크를 제안하자, 유페미아의 얼굴엔 자기 일도 아니면서 화색이 돈다. 이니시에이터와 링크를 맺는다면, 끔찍한 수용소 생활도(유페미아의 상상 속의 유베리드 보호소는 딱 그거다, 수용소) 청산하고, 중화제 투여 시간도 두 사람이 지키는 만큼 더욱더 꼬박꼬박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키아라 군은 짧은 기간동안 알고 있었지만, 믿음직스러운 이니시에이터임이 분명했다. 다행이다! 이 불쌍한 청년의 앞길에도 이제 좀 햇볕이 들겠구만!
얼굴만 아는 사이, 정확한 지적이다. 그는 키아라의 말에도 가볍게 지은 웃음을 지우지 않고 그 곁으로 다가섰다. 사실은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지만, 그렇다 해서 경계하는 기색은 아닌 것으로 보인 탓이었다. 그렇다면 계속 말해도 되겠지. 그가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불러세운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그저 알아두면 좋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다. 여태껏 알게 모르게 계속해서 마주친 인연이 아닌가. 도로록 눈을 굴려 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다 고개를 젓는다.
"친분이란 게 별건가요. 그 정도만 기억해도 아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렇죠? 그러며 둘이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대답을 가로채었다. 조금 어색한 분위기나, 당황스런 지금의 상황은 자연스럽게 넘겨버리려는 양. 자신을 콜트라 말한 남자가 내민 손을 보자 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음…… 고맙긴 한데, 손 잡아도 괜찮겠어요?"
그는 오른팔을 들고 제 눈높이에 맞추어 흔들었다. 이미 침식이 진행되어 인간의 것과는 형태를 달리하는 손이 눈앞에 흔들렸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와의 접촉을 꺼리곤 했다. 특히나 손이 닿기라도 하면 소스라치게 놀라서는 화를 내기도 했고…… 머뭇거림도 잠시, 그는 스스럼없이 콜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먼저 청한 쪽이 잘못한 거다. 쳰위가 히죽 웃었다. 날카롭게 자란 치아가 슬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때는 새벽에 맞닿은 야심한 밤, 유페미아는 자신의 애마인 오프로드용 지프 트럭을 타고 질주한다. 몰래 '벽'을 월담해, GPS 추척기를 외골격 틈에 삽입한 순수 크토니안 세 마리를 방생해 주고 돌아오는 길이다. 희귀한 순수 크토니안을 한 마리도 아니고 세 마리나 잡다니, 오늘은 정말로 운수 좋은 날이었다.
유페미아는 순수 크토니안을 방생할때, '벽'에서 5km 남짓한 구간부터는 차를 세워 번호판을 떼어낸 후, 도로를 벗어나, 수비가 엉성한 구간을 찾아서 '벽'의 굴곡을 따라 멀리서 빙 돌곤 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포장도로에 다다른 유페미아는, 떼어냈던 번호판을 다시 달기 위해 길 어귀에 차를 세운다. 차량 번호표를 달고 허가 없이 '벽' 부근을 알짱거리는 게 의심을 사기 딱 좋은 행동인 것 만큼, A지구 시내를 차량 번호판 없이 달리는 것도 의심을 사기 좋았으니까, 사람이 오가는 대로에 들어서기 전에 다시 번호판을 부착하는 것이다.
차량 글로브박스에서 소켓렌치와 드라이버, 그리고 주인공격인 번호판을 꺼내 내리려는데, 길 가에 서있는 인영이 보인다.
순간, 연구실에서 일하던 '로버트 초이'라던 학생이 이야기해준 '자유로 귀신'이라는 이야기가 떠올라 겁이 나지만, 그런 비과학적인 생각은 도로 집어넣기로 한다. 암, 귀신보다는 자신을 쫓아온 수비대라든가 한적한 곳을 달리는 차량을 노리는 차량 강도라든가가 가능성이 더 높...이런, 그게 더 무섭잖아!
유페미아는 그럼에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지프차의 창문을 살짝 내려 수수께끼의 인영에게 말을 걸어본다.
"...누구시요?"
//아무 때나 괜찮으시다기에 정말로 아무렇게나 썼는데 상황이 너무 특이한 상황은 아닐까 걱정되네요...!
벽에 대해 생각하는것은 뫼비우스의 띠를 보는 것만 같다. 벽으로 안과 밖을 나눠서 밖을 경계하고 안을 보호한다지만, 도대체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밖인지도 모르겠을 때가 가끔 있을 뿐더러 밖에있는 위험한것들로부터 안을 지키려는 것인지, 아니면 밖에 있는 안타까운 이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용도인지. 가끔은 헷갈릴 때가 있었다. 벽 밖에 있을 허수지구. 그 곳에는 분명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벽 밖의 그 사람들은 하루하루 죽음과 줄타기를 하며 살고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괜시리 씁쓸해졌다.
늦은 시간에 굳이 벽 까지 나온것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것은 아니었다. 그저 바람 좀 쐬면서 산책이나 할 겸, 그리고 혹시 벽 뒤에 있을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도 해볼겸. 그리고 어쩌면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불현듯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 때 왜인지 뒤에서 라이트가 비추어왔고 멈칫하고 뒤를 돌아봤을 때 지프차의 창문이 내려가고 누군가가 '누구냐'고 물었다.
" 아, 반가워요! 스칼렛 다이아몬드라고 합니다. "
새파란 하늘같은 긴 머리에, 쫑긋 솟아있는 파란색 귀 그리고 어딘가 짧아보이는 꼬리에 특이한 점이라면 그 새파란 머리 가운데 있는 한 줄의 흰 머리. 자신을 스칼렛이라 소개한 데미휴먼은 방긋방긋 미소를 지으며 이 근방은 위험하니까 얼른 들어가는게 좋을거에요. 하고 덧붙이며 주먹으로 벽을 톡톡 쳤다. 이게 우리를 지켜준다고는 하지만, 글쎄요. 정작 이 도시를 지키는건 벽이아닌 다른 사람들일텐데.
다행이다. 수비대도, 차량 강도도 아닌 것 같다. 아니, 후자야 유독 친절한 차량 강도라면 아직 가능성이 남아있을 수도 있겠지만... 수비대는 데미휴먼을 고용하지 않으니, 일단 전자는 확실히 아닌 것이다. 수비대가 아니라면야, 이름 정도는 알려줘도 괜찮겠지.
"위험하지. 위험한 곳이지만... 그러는 스칼렛 군도 이 곳에 있지 않은가."
라고 말하며 유페미아는 미소짓는다.
"이런 곳을, 이런 시간에 나오는 사람은 정말로 드문데, 반갑네. 스칼렛 군은 어떤 연유로 이곳까지 나온 겐가?"
이렇게 말하면서도 유페미아의 눈은 스칼렛의 귀와 꼬리를 훑는다. 딱히 데미휴먼을 차별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고-유페미아는 데미휴먼도 '병이 있을 뿐'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스칼렛이 어떤 동물의 데미휴먼인지 궁금해서이다. 그런 거야 그냥 물어보는게 가장 간단한 방법이지만, 생물학자의 자존심에, 이런 건 척하면 척하고 알아 맞출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버린 것이다.
쉽게 죽지도 않을테고, 쉽게 죽을 수도 없거든요. 하고 말한 스칼렛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어보였다. 시종일관 웃는얼굴을 유지하는 스칼렛은 자신을 훑어보는 유페미아의 눈을 보고는 제가 어떤 데미휴먼인지 궁금하신가봐요? 하고 말했다. 어떤 연유로 나왔느냐 - 는 질문에 스칼렛의 머리속에는 많은 생각이 돌아다녔다. 딱히 특별한 이유가 없어서 뭐라 말하기가 애매하단 말이지.
" 음. 고양이의 데미휴먼이에요. "
궁금하시다면 알려드릴게요. 그리 어려운것도 아니니까. 스칼렛은 그렇게 덧붙였고 다시 주먹으로 벽을 톡톡 쳤다. 언제까지 버텨주려나, 궁금한데.
스칼렛은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킁킁, 하고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바람냄새. 벽 너머에 있을 강에서 나는 물비린내. 풀에서 나는 녹음. 공기가 조금 내려앉아서 나는 특유의 향기. 그리고 그 속에 미미하지만 섞여있는, 확실하게 느껴지는 이상한 냄새. 틀림없는 크토니안이다. 스칼렛은 내리세요. 하고 말하곤 문을 잡아 열었다. 버릇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위험하니까 이해해 주세요. 하고 말한 스칼렛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 크토니안이 있어요. 근처에. "
손가락을 풀어주자 손톱이 길게 늘어져 약 20cm까지 늘어났고 뾰족한 손톱의 스칼렛은 차를 톡톡 치면서 움직이다가 뭔가 이상한데, 하고 말하며 고개를 갸웃하고는 뒷좌석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냄새를 맡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여기, 차 뒷좌석에서 순수 크토니안의 냄새가 나요. 좀 심한데, 혹시 이니시에이터에요? "
스칼렛은 이제야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차 뒷자리에서 나는 크토니안의 냄새는 전투후의 잔향이 남은 것이리라. 스칼렛은 손톱을 다시 집어넣고는 짧은 꼬리를 살랑이면서 크토니안을 싣고 다닌다는 말에 뭐, 안보이는데서 처리하려면 그런 방식이 낫겠지. 하고 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듯 했다. 이니시에이터라. 싸움을 시작하는 이들이란 뜻이지. 링크한 데미휴먼이 있을지, 다른 이니시에이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데미휴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등 물어보고싶은 것들이 있기야 했다만 초면인 사람에게 그러는 것도 실례이리라.
" 네. 후각이라던가.. 많이 발달했으니까요. "
보통은 맡지 못하는 냄새를 잘 맡아요. 생선냄새라던가, 하고 덧붙인 스칼렛은 살풋 웃었다. 생선 좋지. 구워먹어도 맛있고 생으로 먹어도 맛있고, 다 맛있지 생선. 그렇게 생각하니 입맛이 다셔진다. 이런 나이의 이니시에이터라. 하긴,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알아서들 퇴직하고 사라지는게 이니시에이터니까. 스칼렛은 응. 그럴게요. 하고 말하곤 이제부턴 뭘 할까 - 하고 고민하다가 말을 뱉었다.
역시. 대부분의 포유류는 인간보다 좋은 후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데미휴먼도 인간보다 우수한 후각을 갖는 것도 인지상정이다. 그나저나 굳이 '생선'냄새라고 특정하는 것을 보니 아가씨가 생선을 좋아하나 보구먼. 고양이 데미휴먼이라서 그런 것일지, 아니면 그저 개인의 기호에 따른 것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히치하이킹인가, 좋네. 이것도 인연인데, 어서 타시게!"
방금 전의 난관을 잘 헤치고 나온 자신이 자랑스러워 기분이 좋아진 유페미아는, 스칼렛의 제안에 흔쾌히 응한다. 운전대 옆에 있는 버튼을 눌러 트럭의 락을 열고는, 이쪽에 앉으라고 자기 옆좌석을 툭툭 두드린다. 그런데... 움직임에 걸리적거리는 게 있다. 아뿔싸, 미처 달아놓지 못한 번호판이다. 이걸 어떻게 해야 스칼렛 군이 눈치채지 않고 달 수 있다, 유페미아는 잠시 고민한다.
"저기, 스칼렛 군이 미리 라디오에서 음악을 골라두고 있게나! 나는 잠시, 그, 차량 정비 좀 하겠네!"
"그... 오프로드에서 한참 달렸으니 아무래도 고장이 났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번호판은 스칼렛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외투춤에 숨기고, 소켓렌치와 드라이버는 한 손에 쥐고 뛰쳐나가선, 숙련된 솜씨로 번호판을 다시 달곤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온다.
데미휴먼이라 해서 차별하지 않는다, 란 말에 한쪽 눈썹을 비스듬하게 올린다. 과연 정말로 그럴까? 좋은 말에도 불쑥 반발심부터 들고 보는 것은 습관에 가깝다. 특히나 차별에 관해선 더더욱 관점이 까다로워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속생각을 곧이곧대로 내보일 수도 없는지라, 낯에 서린 의심은 곧 웃음에 가리어졌다. 잠깐의 불순이 빠르게 지워져갔다.
"네, 예전부터 여기서 지내고 있어요."
키아라, 그리고 콜트. 차례로 이름을 외고 기억에 새긴다. 일순간 이름이 서로의 외양과 잘 어울린다는 잡생각도 스쳤다. 그는 콜트와 악수를 나누었던 손을 풀고는 곧장 키아라에게로 내밀었다. 차례로 번갈아가며 악수를 하자니 상황이 조금 우습다.
"그런 이야기가 있긴 한데…… 완전히 거짓말이라고는 못 하겠네요."
떠도는 소문은 거짓의 총량만큼이나 진실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법이다. 저도 그렇게 들어오게 됐고요, 그렇게 이어지려던 말은 속으로만 삼켜두었다. 보호소의 앞에서 험담을 해 좋을 게 없다. 비록 그 내용이 어느 정도는 진실이라 해도.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 얼버무렸다. 결론은 작위적인 느낌이 없잖게 드는 변호였다.
정말 옛날것이긴 한데, 언니가 힙합을 좋아해요. 하고 덧붙인 스칼렛은 라디오를 만지작거리며 옛날 노래를 전문으로 틀어주는 방송국으로 수신을 맞췄다. 좋네~ 하고 덧붙힌 스칼렛은 창문을 내리곤 팔 한쪽을 내놓았다. 가끔은 이런것도 괜찮겠지. 혹시나 우연히 얻어탄 차가 연쇄살인마나, 납치범의 차라면 반으로 갈라서 해치우면 되니까 상관없어. 스칼렛은 속으로 말하곤 스스로도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었다.
" 그나저나, 굉장한 오프로드네요. 취미인가요? "
아, 하긴 이니시에이터들은 여기저기를 다녀야하니 오프로드 차량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더라. 하고 중얼거린 스칼렛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에 기분좋다는듯 눈을 감고 창문에 팔을 포개곤 머리를 올려놓았다. 휘날리는 하늘색 머리 사이로 한 가닥의 흰 머리가 팔락인다. 늦게까지 안들어가면 집에서 뭐라할 수도있지만 뭐 어때, 언니들도 늦게 들어오는 거 잦고. 밥은 다 해놓고 나왔는걸.
얼마나 옛날 노래길래 미리 양해를 구해야 하는가...하고 생각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옛날 노래라서 좀 놀랐다. 그도 그럴게, 유페미아가 태어나기보다도 훨씬 전 노래였으니까. 하긴, A지구의 사람들 중에는 옛날 노래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크토니안 사태 이전의 세상에 대한 향수랄까. 옛날 노래만 틀어주는 전문 방송국까지 있을 정도니까 말이다.
"취미...라고 할 수도 있겠지. 어짜피 크토니안을 잡으려면 포장도로 비포장도로 가리지 않고 다녀야 하니까, 연습도 되고 말이야."
"소문이라... 난 인맥이 그다지 넓지 않아서 들은 소문은 없네만,"
"...아, 그래! 최근에 겪은 특이한 일은 있다네."
"'타뷸라의 늑대'라고 들어 봤나?"
이 말과 함께 유페미아는 스칼렛에게 '타뷸라의 늑대'의 초대장에 응해 버려진 마을에 간 것과, 그녀의 게임 때문에 사람이 셋이나 죽은 것, 그 뒤로 일어난 전투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나하고 링크한 리코 군은 그 때 벽에 던져져, 뇌진탕 증세까지 보였었다네."
이렇게 말하는 유페미아의 목소리가 떫다. 하긴, 상대가 쏜 총알에 맞을 뻔 한 것도, 사람이 셋이나 죽은 것도, 늑대의 강력한 송곳니에 목을 물릴 뻔 한 것도, 리코 군과 키아라 군이 다친 것도 좋은 기억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이 분에게 젤러시의 뒷담을 까는건... 기분상 사망 플래그일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요 :3 에-바(에피 바이)!!!
살풋웃은 스칼렛은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부르며 차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즐겼다. 아, 이부분 너무좋아. 너를 잊고 싶지만 난 초능력이 없어. 시적표현 최고라니까~ 스칼렛은 눈을 접어 웃으며 있다가 타뷸라의 늑대라는말에 고개를 갸웃하곤 차 안으로 머리를 들여넣었다. 타뷸라의 늑대. 타뷸라의 늑대라.. 그리고 들려오는 이야기. 사람이 셋이나 죽고, 그 뒤로 일어난 전투로 뇌진탕까지 왔었다. 늑대의 송곳니에 물릴 뻔 했다. 스칼렛은 그런 일도 있었군요. 하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뭐, 다들 무사히 나왔으니 된 거 아니겠어요? "
그거에 감사하도록 하자구요. 그렇게 여전히 웃으며 말한 스칼렛은 한 순간도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이 아이에게 이런 살가운 미소라는 건 기본 장착인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예쁜미소를 이어가는 스칼렛은 타뷸라의 늑대라는 말에도 크게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
키아라는 쳰위의 대답을 듣고 무심코 툭 내뱉었습니다. 키아라도 그런 소문을 익히 들어왔습니다. 유베리드 패밀리가 데미휴먼을 어디서 납치해온다던가 하는 종류의 것들 말이죠. 그런 소문들이 반쯤은 사실인 셈입니다.
“그건 의외네. 난 유베리드 보호소는 엄청 삭막하고 살기 힘들거라 생각했는데.”
잘 지내고, 나쁘지 않다. 의외의 대답이었습니다. 키아라는 항상 유베리드 패밀리 보호소는 데미휴먼에게 엄청 엄격하고, 차별이 난무하는 그런 곳일거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 소장이 마피아란 점과 보호소에 대해 흉흉한 소문이 도는 것이 그런 이미지 형성에 가담한 것입니다.
“내가 아는 한 친구도 여기 출신이었지.”
키아라는 회고하듯 말을 꺼냈습니다. 곧 자신과 링크할 대상이 될 이를 떠올리면서요. 아직 정식 링크 절차는 밟지 않았긴 합니다만.
그럼 거짓말은 아니다, 키아라의 말에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검지를 동그랗게 말아 엄지에 붙였다. 돈을 속되게 표현하는 그 수신호였다.
"아시다시피 저희 소장님이 돈을 좋아하시잖아요. 돈벌이를 하려면 구색 정도는 맞춰야죠."
적어도 밥을 굶기거나 고문하는 일은 없어요. 다소 험악한 소리를 하면서도 농담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듯 일부러 시시덕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유베리드는 쓸데없는 낭비를 하지 않는다. 판매되기도 전에 상품이 멋대로 죽어버리면 그거야말로 큰 손실이 아닌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유베리드 패밀리의 수용환경은 좋지 않았다. 미싱링크된 데미휴먼의 복귀율은 최하, 데미휴먼의 위에 있는 인간에 대한 대우마저도 처참하기 그지없다. 그런데도 나쁘지 않다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진 만족의 기대치가 바닥에 가까운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최소한의 생존 조건만 충족한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는 주의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말을 듣던 그가 또다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링크한 데미휴먼이 있으신가 봐요?"
그대로 눈동자를 굴려가며 짧은 계산을 마친다. 아는 친구라면 데미휴먼인가, 인간인가. 보호소 관련자라 하면 일반적으로는 데미휴먼을 이르는 것일 터이다. 인간 관계자라면 유베리드의 부하밖에 없으니까. 그렇다면 묻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얼마에 넘겨받았는지, 어떤 용도로 사용하는지, 종합평은 어떻게 되는지……. 줄줄이 이어지던 생각을 끊은 것은 남자의 반박이다. 그는 고개를 돌려 콜트를 마주보았다.
"당연히 아니죠. 접근을 조금 다르게 해야할 것 같은데-, 저는 처음부터 인간이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꼭 인간다운 만족을 바라야 할까요?"
말을 마치며 콜트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제 발언으로 자칫 분위기가 묘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처음 그들의 앞에 나타났을 때와 같이 어색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적당한 무마를 시도했다.
"뇌진탕 증세를 보이는 건 '무사히' 나온 게 아니라네. 키아라 군은 손목을 골절한 모양이고 말이야."
스칼렛은 '무사하다'를 '목숨을 부지했다' 정도의 의미로 사용한 것 같지만, 아무리 그래도 단어선택이 그 때의 전투를 너무 아무렇지 않은 일 취급하는 것 같다고 생각한 유페미아는 살짝 툴툴거린다.
"데미휴먼의 인권향상이 필요하다는 것은 나도 요즘 느끼고 있는 바라네. 그동안 살면서는 연구에 집중하느라 사회문제에는 영 관심이 없었는데 말이야, 이니시에이터 일을 하면서 직접 접해보니까 문제가 심각하더군!"
"리코라고, 나와 링크한 아이는 보호소에 오기 전에 '주인'이 있었던 모양이야. 그 자는 리코를 자신의 수집품 쯤으로 생각했나 보더라고. 밥도 굶기고, 폭력을 행사하는 등 여러가지 학대를 한 모양일세. 심지어는 수집품으로의 가치를 높인답시고 중화제를 주지 않고 일부러 침식을 진행시켰다네! 믿을 수가 있나, 스칼렛 군? 그런 말도 안되는 이유로 한 아이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한 거야!"
링크가 성사된 후, 미호 소장이 건네준 파일을 통해 알게 된 내용들을 스칼렛에게 늘어놓는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눈으로 읽고도 믿기 힘든 내용들이었다.
"게다가 더 믿기 힘든 건, 최근엔 데미휴먼을 사고파는 비밀 경매도 있었다네! 말이 좋아 경매지, 사실은 인신매매장이지. 이건 내 두 눈으로 확인한 사실이네. 스칼렛 군도 데미휴먼이니 조심하시게."
"여하튼.... 그래서 데미휴먼의 인권 신장이 필요하다는 것은 요즘 들어 각별히 느끼고 있다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방법이 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남의 일이었다면 혹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에게서 목숨의 위협을 받아본 이상 그들을 좋게 생각하고 싶진 않는군."
//리코랑 링크가 성사된 후 미호가 에피에게 리코에 대한 정보가 정리된 파일을 줬다고 서술했는데 괜찮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