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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님...? 이 아이의 부모는 자신을 '주인'이라 부르라고 한 것일까? 유페미아는 A지구에서 데미휴먼이 아닌 일반인으로 평생을 살았고, 주변인 중에도 데미휴먼은 별로 없다보니 데미휴먼들이 받는 핍박에 대해선 별로 알지 못했다. 이런 유페미아에게는, 사람이-비록 데미휴먼이라 할 지라도-다른 사람을 소유할 수 있다는 개념 자체가 상식 밖의 일이라, 유페미아는 리코에게 진짜 '주인님'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보다는 아동학대를 하는 부모가 훨씬 유페미아의 생활에 가까운, '이해 가능한' 개념이었다.
"리코 군, 진정하게나. 그 누구도 리코 군을 때리지 않는다네. 그리고 설사 누가 리코 군을 때린다고 한다 치면-나는 어떤 이유라도 폭력은 나쁘다고 생각하지만-이 경우에는 특별히 예외를 삼고! 내가 그 사람을 때려줄 게야!"
이렇게 말하며 유페미아는 허공에 주먹을 날리는 시늉을 한다. 좀 전에 말했듯이 51년이라는 세월간 누굴 때려본 적이 없는 손이라서 자세는 틀렸지만 말이다.
유페미아가 이렇게 공분하는 것도 생각보면 당연하다. 유페미아는 좀 괴팍한 점이 있을 뿐 본성은 선한 사람이니까.
"그리고, 아까 전부터 얌전히 있겠다고 그러는데, 나는 어린 아이가 얌전히만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네."
"억지로 얌전히 있으려면 스트레스 호르몬이 나와서, 어린 아이의 두뇌 형성에 좋지 않거든!"
미호? 미호라면... 유페미아는 미호라는 이름의 사람을 한 명 알고있다.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지고 있는 아홉꼬리 보호소의 소장. 이니시에이터 일을 시작하면서, 페어할 데미휴먼을 찾기 위해 그녀를 찾아갔던 적이 있는 것이다. 처음 만나서는 방금의 리코에게 그랬듯이 미호를 연구대상같이 바라보았기에 별로 좋은 인상을 남기지는 못한 것 같지만...
"미호라면... 아홉꼬리 보호소의 그 미호 말인가?"
그렇다면 이 아이는 학대하는 부모님의 품을 떠나 보호소에 맡겨지게 된 것일까. 마음 아픈 일이지만, 아마 그런 부모 아래에서 자라느니 보호소 생활이 훨씬 아이에게 좋을 것이다.
스트레스? 호르몬? 역시 모르는 말이 많다. 리코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아홉꼬리 보호소의 미호가 맞냐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눈 앞의 이 사람, 에피는 때리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그 말 한마디에 긴장을 놓기는 어려웠다. 얌전히만 있는게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지금껏 배워온 일과는 반대였으니까.
“보호소는 좋아요. 맛있는 밥을 많이 주니까.”
맛있는 밥! 떠올리니 자연스럽게 침이 고인다. 오늘 밥은 뭘까, 뭐든 좋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면 뭐든 먹을 수 있어. 그치만 역시 고기가 있으면 좋겠다. 침을 꼴깍 삼킨 리코가 다시 에피의 눈치를 보듯 얼굴로 시선을 보냈다.
물론, 정말로 잘못한 일이 있다면 앞으로도 혼이 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얌전히 있지 않는다' 등의 말도 안되는 일로 이 아이가 혼이 나는 일은 없게 하겠다고 유페미아는 생각한다.
리코가 침을 꼴깍 삼키는 것을 보자, 유페미아는 주머니를 뒤져 가운데에 초콜린 껌이 들어있는 막대사탕을 두 개 꺼내 하나는 자신의 입에 넣고, 하나는 리코에게 건네려다가, 리코의 손이 막대사탕 포장을 깔 수 있는 형태가 아니란 것을 깨닫고는 자신이 직접 까서 다시 리코에게 건네준다.
"두뇌가 에너지원으로 삼을 수 있는 영양소는 포도당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나? 때문에 항상 사탕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좋은 거라네! 두뇌에게 필요한 영양소를 공금해 주거든!"
두뇌의 에너지원이 포도당밖에 없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사탕을 가지고 다닌다는 것은 핑계일 뿐이다. 두뇌가 필요한 양의 포도당 정도는 매 끼 균형잡힌 식사를 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냥 단 것을 좋아하는 것이겠지. 어쨌든, 유페미아의 고수 시절 사무실에는 이 핑계대로 항상 사탕단지가 자리잡고 있었었다.
혼내지 않는다고 약속한 에피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포장지를 벗겨 내민 사탕에서는 달콤한 냄새가 나고 있었고, 리코의 코는 귀신같이 그 냄새를 포착했다.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사탕을 받아든 리코는 덥썩 사탕을 물었다. 달달한 맛…! 여전히 리코의 눈은 생기가 없었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표정은 한층 밝아진 느낌이 들 것이다. 단 맛에 감격하고 있는 지금만큼은.
“마힛허…”
사탕을 아주 잠깐이라도 입에서 떼놓기 아깝다는 듯, 사탕을 입에 문채로 맛있다는 말을 하느라 발음이 엉망이었다. 달콤한 맛을 즐기던 리코가 귀를 쫑긋거렸다. 항상 사탕을 가지고 다니는 게 좋다는 말에 귀가 반응한 것이었다. 항상 가지고 다니는 사탕… 맛있는 사탕… 맛있는 걸 준 에피는 좋은 사람인게 틀림없다는 묘한 확신이 리코 안에 자리잡은 순간이었다.
아이의 얼굴이 밝아져서 다행이었다. 유페미아는 그다지 아이를 아이를 잘 다루는 타입은 아니지만은, 사탕을 먹고 좋아하는 아이를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까 하는 생각도 하지만, 자신은 애정표현에 서툴기도 하고, 무엇보다 아이가 손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는 관두기로 한다.
리코가 포도당이 무어냐고 질문한다. 과학상식에 대한 질문을 답해주는 건 유페미아에게 있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거나 하는 것보다는 훨씬 익숙한 분야다. 소위 말하는 전문분야라고 할 수도 있겠다. 유페미아는 신이 나서 리코의 질문을 답해준다.
"좋은 질문이네, 리코 군. 탄수화물을 이루는 가장 작은 분자단위를 단당류라 부르는데, 포도당은 이 단당류 중 하나라네. 다른 단당류로는 프럭토스와 갈락토스 등이 있다네. 이 중 포도당과 프럭토스 분자가 결합하면 설탕 분자를 이루게 되는데...."
"아, 이런. 어린 아이에게는 설명이 너무 어려웠나?"
어떻게 하면 아이에게 더 쉽게 설명을 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느라 유페미아의 눈가에 주름이 잡힌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아! 하는 탄성과 함께 옷주머니에서 사탕을 하나 더 꺼내 까며 설명하기 시작한다.
"사탕을 설탕으로 만든다는 것은 리코 군도 알고 있을 걸세. 그런데 그러면 설탕은 무엇으로 이루워졌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나, 리코 군?"
"사탕을 아주 작은 조각으로 쪼개면 설탕 결정이 되겠지. 그걸 더 작게 쪼갠다면 설탕 '분자'라는 작은 알갱이가 될 걸세. 그런데 이 설탕 '분자'도 쪼개지거든. 설탕 '분자'는 '포도당'과 '과당' 분자라는 알갱이로 쪼개진다네. 이 알갱이들은 사탕의 단맛을 낼 수 있는 가장 작은 알갱이들이라네. 그것보다 더 작은 알갱이로 쪼개려면 쪼개지지만, '단맛'이라는 '성질'을 잃게 되거든."
"'포도당'은 사탕에도 많이 들어있지만, 포도에도 많이 들어있기에 그런 이름으로 부른다네! 마침 이 사탕도 포도맛이군 그래."
포도당… 프럭토스…?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듯한 말들이 쏟아진다. 리코는 조용히 사탕을 먹었다. 잘 모르겠지만 사탕은 맛있어. 냠냠뇸뇸. 그런 소리가 들릴 것 같이 맛있게 사탕을 먹던 리코에게 에피라고 하는 이 사람은 좀 더 알기 쉬운 말로 설명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에피의 말에 따르면, 사탕을 잘게 쪼개면 설탕이 되고, 설탕을 더 작게 쪼개면 분자..?라는 것이 되고, 그 분자?를 다시 쪼갠 것이 포도당하고 과당이라는 것이었다. 잘 모르겠지만 사탕은 쪼개고 쪼개고 쪼개도 달다는 정도로 이해한 리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주아주 작은 사탕도 달다는 거네요.”
리코의 이해를 거쳐 나온 말은 에피의 설명과는 많이 동떨어진 것 같았다. 어쨌든 리코는 사탕은 달다는 정도로만 이해한 것 같으니. 사탕에도 많지만 포도에도 많이 들어있다는 말은 리코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리코에게 중요한 것은 사탕을 하나 더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고마워요, 에피는 좋은 사람이에요.”
아까보다도 밝아진 얼굴과 밝아진 어조로 말한 리코는 사탕을 받아 들고 꼬리를 빳빳하게 일자로 세웠다.
"그렇다네. 그리고 포도당보다 더 작게 쪼개면, 더 이상 '사탕'이 아니게 되어버려서 안 달아지고 말이야!"
"리코 군은 어린 나이에 비해 참으로 훌륭한 학생이군 그래."
조금은 동떨어지게 이해했더라도 일단 핵심은 꽤나 정확하게 파악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궁금한 것을 먼저 질문해오는 호기심까지. 교단에서 내려선 지 3년이 지나, 누구를 가르칠 기회가 그 기간동안 주어지지 않았던 유페미아는, 약간 감동했을지도 모른다.
"좋은 사람이라고 하기엔 내가 한 건 사탕을 준 것 밖에 없네만...."
좋은 사람이라는 말이야 듣기 좋지만, 모르는 어른이 그저 사탕을 주는 행동만으로 이 아이의 관점에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조금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세상에는 사탕을 든 나쁜 사람도 충분히 많으니까. 유페미아는 책임감 있는-실제로는 책임감이 0에 수렴하지만-어른으로써, 리코에게 경고의 말을 해 줘야겠다고 느낀다.
"리코 군, 나는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네만, 세상에는 친절한 척 하는 나쁜 사람도 많다네. 섵부른 판단을 하기 전에 조심하게나."
어린 나이에 부모에게서 학대를 받은(어디까지나 유페미아의 상상 속에서지만) 리코 군이라면 이 경고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리코 군의 꼬리가 빳빳하게 서있다. 유페미아는 크토니안의 생태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생물학자지만, 학부 시절 고양잇과 동물의 생태에 대해서도 배운 적이 있다.
'저 일자로 선 꼬리는... 만족스럽다는 뜻이구만!'
사탕 두개로 만족할 수 있다니, 얼마나 어린 시절은 아름다운가. 리코의 주인이 리코의 식사량을 줄이며 학대했다는 것을 알 리가 없는 유페미아는 이걸 또 멋대로 해석해버리는 것이다.
아주 아주 많이 쪼개면 사탕이 아니게 되어버려서 달지 않게 된다니. 리코는 사탕을 깨물려던 동작을 멈추고 천천히 녹여먹기 시작했다. 함부로 깨물다가 사탕이 아니게 되어서 맛이 없어지면… 그래도 리코는 먹겠지만, 이왕이면 맛이 있는 게 좋을 거란 판단을 했고, 그렇게 행동했다. 훌륭한 학생이라는 말을 들은 리코는 어쩐지 기뻐져, 꼬리를 바르르 떨었다. 학생이라는 말이 뭔진 모르겠지만.
“…그치만 에피는 때리지도 않았고, 맛있는 것도 줬고, 리코를 칭찬해줬으니까 좋은 사람이에요.”
친절한 척 하는 나쁜 사람? 리코에게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만을 겪어왔기 때문일까. 아직은 생소한 개념인 것이다. 어쨌든 리코의 관점에서 에피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었다. 사탕을 두 개나 줬으니 좋을 수밖에 없기도 했고. 아마 지금만큼은 리코 속에서 미호를 제치고 좋은 사람 1위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귀나 꼬리가 달리지 않은 사람 중에서 1위일지도 모르고. 두 번째 사탕도 거의 다 먹어갈 무렵, 리코는 훌쩍 고개를 들고 코를 킁킁거렸다. 묵직한 바람에 실려온 아주 미미한 냄새, 하지만 리코가 가장 좋아하는 냄새. 밥 냄새였다. 벌써 밥 먹을 시간이 됐나 봐. 리코는 에피를 보며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이로 깨무는 것 정도로는 단 맛이 사라질 정도로 작게 쪼개지지 않으니까 걱정할 것 없다네 리코 군."
"그래, 학생. 학생이라는 건 말이야... 그래, 무언가 새로운 걸 배우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네. 그런 의미에선 나도 학생이라고 할 수 있겠구먼!"
이렇게 말하며 유페미아는 껄껄 웃는다. 방금 자신이 정한 기준대로라면, 대부분의 인류가 무언가의 학생일지도 모르겠다. 온 지구를 커다란 배움의 장이라고 생각하니, 자신이 한 비유지만 유페미아의 입장에서는 퍽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아이가 생각하는 "착한 사람"의 기준이 너무 낮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때리지 않으니 착한 사람이라니, 그런 건 "괜찮은 사람" "인간 쓰레기가 아닌 사람"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 아닌가. 그래도 아이의 칭찬은 고맙게 받아두기로 한다.
유페미아에게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데, 이 아이는 밥 냄새가 난단다. 이것도 데미휴먼의 능력일까. 순간, 유페미아는 인간보다 몇십 배나 발달된 호랑이의 후각 상피 구조가 리코에게도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럼, 밥은 제 때 제 때 먹어야지! 이런 건 굳이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된다네. 작별인사 정도쯤은 해주면 좋겠지만 말이네."
"아, 좋은 생각이 났네. 내가 리코 군 집까지-아홉꼬리 보호소가 맞지?-리코 군을 바래다 주면 어떻겠나. 어린 아이가 홀로 다니는 것도 위험하니 말이야."
식료품점으로 향하던 길이었지만, 운동 삼아 길을 잠시 우회해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어린 아이가 홀로 다니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도 사실이니까. 더군다나 리코는 데미휴먼. 유페미아는 데미휴먼들이 당하는 핍박에 대하여 자세한 것은 모르고 있지만, 그래도 그들의 대우가 인간에 비해 좋지 않다는 것 정도는 막연히 알고 있다. DPM같은 과격주의자들이 있다는 것도 신문을 통해서 알고 있고 말이다.
깨무는 정도로는 그렇게 작게 쪼개지지 않는구나, 리코는 새롭게 배운 사실을 기억했다. 그래도 사탕은 여전히 천천히 녹여먹고 있었다. 그 사이에 제법 많이 녹아내려, 정말 작아져버린 사탕이 사라지는게 아쉬웠기 때문이었다. 점점 사라져가는 사탕의 맛을 아쉬워하면서도 리코는 에피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학생, 학생은 새로운 걸 배우려고 하는 것. 그렇다면 자신도 학생인가? 지금껏 아무런 배움 없이 살아왔지만, 그래도 리코는 새롭게 마주치는 것들을 하나씩 배워가는 중이었다. 글자는 아직 읽을 수 없지만. 하지만 좀 전에도 새로운 걸 배웠으니, 아마 자신은 학생이 맞을 것이다. 리코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입 안에서 사라진 사탕이 아깝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네. 아홉꼬리… 네, 그럼 같이 가요.”
바래다 주면 어떻겠나-라는 권유를 같이 가겠다는 통보 정도로 받아들인 리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보호소는 그리 멀지 않았다. 리코의 걸음으로 약 5분 정도 거리. 짧다면 짧을 거리였다. 충분히 거절해도 좋을 거리지만 리코가 거절하지 않은 것은 ‘감히 인간님의 결정에 거스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리코는 공중을 향해 코를 킁킁거린 후, 보호소가 있(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한 손으로 가리켰다.
“여기에요. 이쪽.”
그리고는 천천히 두 발로 조심조심 걸어가기 시작했다. 혼자였다면 네 발로 풀쩍 뛰어갔겠지만 지금은 옆에 사람이 있으니 두 발로 걷기로 한 것이었다.
키아라는 인적 드문 밤길을 걷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오늘도 여느때와 같이 평화로운 하루였겠지요. 갑자기 크토니안화해버린 데미휴먼만 아니였으면 말입니다. 사방은 쥐 죽은 듯 고요합니다. 가로등의 불빛이 깜빡이며 점멸합니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과 함께 뒤쪽에서 높은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몸 이곳저곳이 뒤틀린 끔찍한 괴물이 있었습니다. 네 발로 땅을 짚으며 기는 그 괴물은 더 이상 인간이라고는 보기 힘들겠군요. 그리고 그 앞에는 한 여자가 넘어진 채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키아라는 재빨리 외투에서 총을 꺼내 크토니안에게 겨눕니다.
"빨리 일어나, 어서!"
그리고 크토니안 앞의 여자에게 큰 소리로 외칩니다. 그녀는 키아라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듯 재빨리 일어나 뒤로 도망갑니다. 총성이 들리고 총구에서 연기가 솟았지만 괴물은 아직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크토니안은 앞으로 천천히 기어오며 낮은 울음소리를 내었습니다.
아이가 입맛을 다시자 유페미아는 사탕을 하나 더 꺼내 리코에게 내민다. 이번에는 콜라맛 사탕이다. 단 것을 입에 떼지 않는 습관이 이럴 때는 참 유용하구먼. 대체 그 많은 사탕이 주머니라는 좁은 공간에 어떻게 들어있었는지는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미스터리하지 않을 수 없지만 말이다.
유페미아가 정말로 책임감 있는 어른이었다면, 아이에게 한번에 이렇게 많은 사탕을 주지 않을 것이고, 만약에 주더라도 충치를 조심하라는 경고 정도는 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페미아는 그렇게까지 책임감 있는 어른도 아니었고, 애초에 유페미아 자신도 그렇게 자기 통제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기에-유페미아 입장에서 사탕은 먹고 싶으면 먹는 것이다. 호기심이 일면 실례를 무릅쓰고 질문을 하는 것이고, 또 호기심이 일면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크토니안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아이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대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생각마저 하는 것이다.
싫으면 거절해도 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리코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는 통보로 받아들였음을 알 리가 없는 유페미아는 리코의 대답에 활짝 웃으며, 그녀가 가리킨 방향으로 앞장서 걸어가기 시작한다.
"그런 다리 구조로 두 발로 걸으면 불편하지 않나?"
지금 이 질문은 아이의 불편을 눈치챘다기보다는, 순수히 학구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질문에 가까웠다. 아이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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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이 둘은 아홉꼬리 보호소에 도착한다. 보호소의 정문 앞에는 곱게 생활한복을 차려입은 미호 소장이 리코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시간에 리코가 자리에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리코가 외출을 나갔구나 생각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139 미호는 가능한한 링크에 관여하지 않으려 합니다. 모든 것은 아이들의 의사에 맡기죠. 원한다면 하고 원하지 않는다면 못하도록 막을뿐입니다. 다만, 리코양이처럼 어린 아이는 그리고 더구나 그 과거가 곱지 않은 아이는 미호가 링크에 적극적으로 개입합니다. 아무래도 판단력이 더 좋은 건 미호일테니까요. 리코같은 경우는.. 아무래도 막으려 들 것 같네요. 어디까지나 미호는요 :3
사탕을 하나 더 받은 리코는 정말로 행복하고 기뻤다. 아마 근처에 키가 큰 나무가 하나 있었으면 그걸 긁어대며 기쁨을 표현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게 하기 전에 해도 될까요? 라는 허락을 구하긴 했겠지만.
“조금은. 그치만 걸을 수 있어요. 뛸 때는 이렇게 하는 게 더 빨라요.”
그렇게 말하며 리코는 네 발로 뛰는 시늉을 해보였다. 두 발로 걷는 것은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어쩌면 스스로가 불편하다고 느끼지 못할 뿐일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리코는 불편하게 느끼지 않았고, 그걸 보여주듯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발을 들었다 놓았다 하고서는 다시 걸었다.
이윽고, 또는 어느새 둘은 보호소에 도착했다. 정문 앞에 서 있는 미호를 보고 리코는 귀를 쫑긋거렸다. 한달음에 미호에게 달려가려다, 리코는 자신의 옆에 사람이 있다는 걸 기억해내고 멈췄다. 작별의 순간이라는 말에 아이는 천천히 에피를 보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히 가세요. …사탕 맛있었어요. 고마워요.”
그리고는 에피를 따라하듯 손을 흔들고, 뒤를 돌아 저를 기다리고 있는 미호에게로 걸어갔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 보호소 안으로.
//아이고 내가 지금 쪼금 몽롱해서 막레가 엉망이네... ;ㅁ; 미안!! 아무튼 에피랑 돌리는 내내 즐거웠어~ 고생했어 에피주!!
놈은 꿈쩍도 하지 않고 계속 다가오고만 있습니다. 계속 이대로라면 밀릴 수밖에 없을 겁니다. 키아라가 방법을 생각하는 사이, 머리에 헬멧을 쓴 한 남자가 나타나 가세합니다. 하긴, 이런 크토니안 상대로 권총은 그저 견제사격밖에 되지 않을 겁니다. 남자가 크토니안의 다리를 사격하는 사이 키아라는 재빨리 전화기를 꺼내 CPA에 전화합니다.
"여기 크토니안이 나타났습니다. 큰 놈이요."
키아라는 대충 주소를 말하곤 전화를 끊습니다. 이대로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됩니다. 얼마나 걸릴까요, 10분? 크토니안은 다리를 맞았지만 멀쩡한 듯 게속해서 기어오고 있습니다. 키아라는 크토니안의 눈을 노리고 방아쇠를 당깁니다. 꽤나 고통스러웠는지 전진을 멈춘 놈은 고개를 처박고 다시금 낮은 울음소리를 냅니다.
총알이 몇발 남았는지 묻는 질문에 키아라는 짧막하게 대답합니다. 정식 임무에 나서는 게 아닌 이상 총은 그저 호신용으로 들고 다니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마저도 7발이 전부였고요. 아까 2발을 써버렸으니 5발밖에 남지 않았겠죠.
"그게 좋겠군."
키아라는 대답과 함께 뒤로 서서히 물러나며 크토니안과의 거리를 넓힙니다. 몇 분간 교전은 계속되었습니다. 유인은 성공적이었고 온 사방에 그 흉측한 자태를 잘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고요한 도로에 엔진 소리가 울리고, CPA의 차량이 근처에 멈춰섭니다. 무장한 인원들이 차에서 하나둘씩 내리고 일제히 괴물을 향해 총알을 쏟아붓습니다. 이러한 집중 포화에 크토니안은 얼마 가지 못하고 금세 쓰러졌습니다. CPA측 인원들이 사체를 수습하는 동안 키아라는 이마에 흐른 땀을 훔칩니다. 긴장되는 순간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 A지구의, 그리고 그 A지구의 아홉 꼬리 보호소의 근처 총포상에, 조금은 앳되어 보이는 자그마한 소녀가 쇼 윈도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 이따금씩 날개를 파닥거리기도 하고, 턱에 손가락을 올리고 무언가를 고민하기도 하는 소녀의 곁에는 견고한 금속 가방 두개가 양 옆에 하나씩 놓여있었다. 소녀의 시선이 어디로 향해있는가 보면, 총포상에서 전시해놓은 여러 총과, 그 총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여러 악세서리들이 있는 것이다. 소녀의 눈동자는 쇼윈도 너머의 이곳저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깊은 고민에 잠겼다.
"흐으으음..."
총을 사려던 것은 아니었다. 소녀에게는 이미 손에 익은 충실한 총이 세정이나 있었고, 지금의 총에도 충분히 만족한 상태였다. 소녀가 찾는 것은 마찬가지로 자신의 총을 빛나게 해줄 악세사리들이었다. 원래 있던건 실수로 부숴먹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소녀의 고민은 그리 금방 끝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안에 더 볼게 많을지도 모르지.
낯선 이의 등장에 조금 놀란듯 소녀는 그쪽을 돌아보았다. 오묘한 빛의 머리카락과 날개가 푸르게 빛났다. 소녀는 쇼 윈도에서 손을 떼고는 낯선 이를 바라보면 똑바로 섰다. 예상치 못한 이의 등장에 조금 놀란 것을 빼면, 그다지 경계허지는 않는 눈치였다. 순진한건지, 여유가 있는건지 모를 모습.
"총기 악세사리를 좀 고르려고 하는데 종류가 너무 많은거 있죠?"
소녀는 경쾌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척 봐도 붙임성 좋고 구김살도 잘 보이지 않는 모습. 아마 근처의 아홉 꼬리 보호소에서 온 걸지도 모르겠다.
그다지 크지는 않은 총기 케이스를 한 손에 하나씩 잡아들고 소녀는 낯선 이를 따라 들어왔다. 기다란 총기 케이스 하나를 열자, 소녀의 체구에도 무리 없이 쓸만한 작은 사이즈의 기관단총 두 정이 눈에 들어왔다.
"우지 프로. 9mm 파라벨럼탄을 분당 1000발이 넘는 속도로 퍼부을 수 있는 아이죠. 사이즈도 적당히 작고, 레일도 기본으로 장착되어있답니다. 기관단총의 대명사라고도 할 수 있죠. 아, 지금 꽂아놓은 탄창은 40발 들이 확장탄창인데, 총탄은 안 들었으니까 걱정 말고요."
소녀는 총을 꺼내들고는 마치 총잡이라도 되는 양, 총을 한바퀴 빙 돌리고는 손에 쥐며 말했다. 테이블 위에 총을 올려놓은 소녀는 이번에는 다른 케이스를 열어 다른 총을 꺼내들었다. 유난히 총열이 굵고 짧으며, 접이식 개머리판을 달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일반적인 돌격소총과 비슷한 형상이었다.
"이거는 제가 특별히 만든 단축형 Vepr-12에요. 원래 반자동 산탄총인데 특별히 자동으로도 쏠 수 있게 개조했고요. 드럼 탄창까지 장착하면 산탄만 대충 스무발은 넘게 들어가요. 근거리에서 죄다 퍼부어버리기엔 충분하죠."
역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전체적으로 근접전용, 좀 멀어봤자 중거리에서나 쓸 법한 종류의 총들이었다. 낯선 이의 착잡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녀는 신나게 떠들며 자신의 총에 대한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았다. 원래 이렇게 말이 많은걸까?
그러자 아이는 신난듯이 기관단총과 산탄총을 들어보이며 총에 대한 설명을 했다. 아이가 총 이야기로 이렇게나 즐거워 하는건 참으로 묘했다.
"일단 우지 쪽을 먼저 얘기해보지. 반동제어가 중요할거야. 안 그러면 표적이 10미터만 멀리 있어도 다 빗나가겠어. 아이라서가 아니라 보통 어른이라도 높은 연사로는 제어하지 못해." 라고 말했다가 아이의 날개가 눈에 띄었다. 데미휴먼은 보통 사람과는 차원이 다르게 강하다는 말을 들어 봤다.
"...그렇다 해도 비싸고 거추장스러운 레이저 사이트 같은 악세사리보다는 컴펜세이터와 개머리판을 다는게 좋을거야." FookinLaserSight "제어 되지 못한 수십발의 총알보다 제대로 통제된 한발이 더 강하다."
"흠... 컴펜세이터라, 그건 괜찮은데, 개머리판은 조금 크지 않으려나요? 근데 레이저 사이트는 왜요?"
소녀는 우지 두 정을 한 손에 하나씩 들고는 탄창과 약실이 빈 것을 확인, 그리고 한쪽에 놓인 마네킹을 향해 양 총구를 겨누어보았다. 신중한 샤프슈터 스타일보다는 총탄을 흩뿌려 적을 제압하는, 그야말로 람보 스타일이었다. 어쩌면 콜트와는 상극일지도 모르는, 그런 스타일.
사실 훈련 비행 중에 총을 떨어트리는 바람에, 원래 쓰던 레이저 사이트를 부숴먹었던 것이었다. 총은 멀쩡했지만, 레이저 사이트 없는 신속한 조준은... 조금 힘들었다. 원래는 새걸 구해볼까, 하는 생각에 여기로 온거지만, 뭔가 총 잘 쏘게 생긴 아저씨의 진지한 조언에, 이 참에 없는 채로 연습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기본기가 먼저, 그런건가."
반쯤 중얼이듯이 소녀는 말했다. 소녀가 총을 다시 다소곳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이젠 소녀가 콜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엄마랑 일하던 아저씨요. 엄마가 이니시에이터였거든요."
소녀는 그리 크진 않은 날개를 한번 펼쳐보이며 말했다. 이니시에이터는 크토니안과 가장 가까운 직업 중 하나다. 특히 여성의 몸으로 크토니안과 맞선다는 것은... 그런 위험성이 극도로 높아지는 것이었다. 소녀가 데미휴먼인 것도, 어쩌면 그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 아저씨는 매였어요. 지금은 많이 기억이 나진 않지만, 엄청 빠르고, 눈이 날카로운 아저씨였죠."
태연은 카운터 위에 총기 케이스를 올려놓으며 말했다. 내부는 실내사격장 치고도 꽤나 넓고 제대로 설비가 된 곳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야외사격장에 비해서 크기가 작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태연은 이 곳에 오는 일이 잦은지 익숙한 솜씨로 사격을 준비했다. 두 정의 우지를 꺼내어 컴펜세이터를 장착하고, 총탄이 담긴 탄창을 밀어넣고, 장전손잡이를 당기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약실로 탄이 밀려들어갔다. 태연이 한쪽으로 총을 겨누어 보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오케이. 준비 끝."
태연이 표적지를 한장 집어들어 레일에 끼우고는 스위치를 눌렀다. 레일이 스르륵 움직이며 50m의 거리까지 표적지를 실어다 날랐다. 표적지가 멈추자, 태연은 두 정의 총을 집어들었다. 45도로 비스듬히 세운 총을 앞으로 똑바로 향하고, 표적지를 지그시 노려다보았다.
"..."
짧게 숨을 들이마시고, 태연은 방아쇠를 당겼다. 곧 총구에서 맹렬히 화염을 뿜어내며, 발사된 총탄이 표적지를 향해 빗발쳤다. 80발의 총탄을 모두 쏘아붓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곧 이어 텅 빈 총구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훅- 하고 불어내고는, 태연은 호탕하게도 스위치를 내리쳤다. 다시 레일을 타고 표적지가 이쪽으로 돌아왔다. 빗발치는 총탄을 맞는 표적지를 보아하니...
"어때요?"
...딱히 뭐라고 하긴 힘든 상태였다. 마구 흩뿌려진 총탄에 완전히 걸레짝이 된 표적지는형체만 겨우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이 거리에서 양손 아킴보로 개머리판 없이 풀오토로 쏴갈긴 것 치고는 괜찮았지만, 특별히 정확하다곤 하기 힘들었다. 그도 그럴게 근처 벽에도 총탄이 잔뜩 박혔으니. 적어도 나름 숙련된 덕인지 천장에 박히진 않은게 다행이리라.
습기 찬 바람이 부는 한밤중, 키아라는 방금 막 임무 하나를 완수하고 오는 길이었습니다. 도로를 따라 펼쳐진 큰길가엔 사람이 꽤나 많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오늘따라 거리가 북새통을 이루고 있군요. 아무 생각 없이 길을 따라가던 키아라는, 길 어귀에 서있는 한 데미휴먼 꼬마를 발견했습니다. 척 보기에도 침식이 많이 진행되었고, 상당히 어려보이는 아이였기에 걱정이 되었습니다. 길이라도 잃은 걸까요? 인파가 북적이는 길거리에서 아이는 혼자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오가는 사람들은 아이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는 데미휴먼인 아이를 사나운 눈초리로 쏘아보고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키아라는 저 아이를 그냥 보고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데미휴먼, 그것도 마리아의 또래처럼 보이는 아이였으니까요. 그녀는 인파를 헤치고 나아가 아이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추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습니다.
눅눅한 느낌의 바람이 코 끝을 스쳐갔다. 많은 사람들의 냄새가 묻은 바람, 오가는 사람들만큼 냄새도 다양했다. 리코는 멍하니 사람들을 보며, 때로는 사나운 눈초리에 주눅들기도 하며 서 있었다. 아마 이유는 딱히 없을 것이다. 보호소에 들어간 이래 리코는 목적지 없이, 목적 없이 돌아다니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갑자기 얻게 된 자유에 방황하고 있는 것인지, 혹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자기만의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어쩌면 리코 자신도 잘 모르는 것일 수도 있고. 어쨌든 중요한 건 지금 리코가 길 어귀에 오도카니 서 있다는 점이었다.
“……”
사람들은 대체로 무관심했다. 몇몇 사람들은 세상물정을 모르는 리코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경멸이나 분노 등이 담긴 부정적인 시선을 거리낌없이 향했고, 리코는 그 때마다 눈을 피했다. 비록 그러한 시선을 보내더라도 다행히 아직은 손까지 대는 사람은 없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도 없었다. 적어도 조금 전 까지는. 조금 전, 멍하니 있던 리코 앞으로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왔고 리코는 자연스럽게 그 사람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니요. 그냥 있었어요. 길은 알아요.”
시선을 돌리자마자 재빠르게 상대의 외형을 살폈다. 귀도 꼬리도 없고, 아마 그냥 사람. 그렇게 판단한 리코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참 솔직한 대답이었다. 길을 잃지도 않았고, 그냥 서 있었을 뿐이니까.
키아라는 아이에 대해 궁금한 것을 가감없이 물어보았습니다. 주변을 둘러봐도 아이의 보호자로 보이는 이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근처엔 보호소도 없습니다. 이 아이는 자의로 거처를 떠나온 걸까요? 왜? 세상엔 데미휴먼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혹여 자기 방어 능력이 없는 조그만 아이를 누군가 해코지하기라도 한다면 어떡할까요. 그랬기에 키아라는 아이가 더욱 더 걱정이 되었습니다.
"밤길은 위험하단다, 꼬마야. 나쁜 사람들도 많고."
키아라는 무릎을 굽힌 자세에서 아예 쪼그려 앉아 아이를 바라보았습니다. 얼굴은 근심 가득한 표정을 띠고 있었습니다. 길가의 사람들은 둘을 신경도 쓰지 않고 무심히 지나치기만 했습니다.
어디에서 왔냐는 물음에 리코는 순순히 대답했다. 보호소가 있을 방향을 가리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보호소를 나와 풀쩍풀쩍 뛰어다니며 여기저기를 돌아다녀도 방향은 잘 기억하고 있었다. 이렇게 돌아다니는데도 리코가 무사히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아마 대로변은 되도록 피하고 골목으로, 조용히 돌아다녀서일까? 어쩌면 단순히 운이 좋았던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리코는 상대가 하는 말을 잘 이해하진 못했다. 나쁜 사람, 자신을 때리는 사람은 아직 길에서 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 말을 부정하기엔 상대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혼날지도 몰라, 리코는 덜컥 겁을 먹고 고개를 숙여 머리를 조아렸다.
“…잘못했어요. 때리지 마세요.”
슬쩍, 자연스럽게 양 손을 올려 얼굴을 감싼 채로 잘못했다는 말을 반복했다. 혼나는 건 무서워, 리코의 머리에는 그 생각만이 가득했다.
"총 한두번 쏴본거 아니니까요! 비행보다는 덜 자신있지만... 그래도 충분히 자신있는 분야라고요."
태연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는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태연은 아무 것도 안 하고 늘어질 때 빼면 비행과 사격 연습을 거르지 않았다. 이것저것 시행착오를 겪으며 쌓아온 기술과 경험은 태연 스스로가 꽤 자부할만한 것이었다. 비록 실전에서 써볼 기회는 없었지만 말이다.
"수직으로... 이렇게 겨누면 돼요?"
콜트의 말을 유심히 귀 기울여 듣던 태연은, 우지를 다시 장전했다. 그리고 조금 전에 가르친대로 표적지를 향해 두 정의 우지를 평행하게 수직으로 세워 들고는, 콜트를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서 아홉꼬리 보호소까지는 거리가 좀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멀리 나왔던 걸까요. 그 다음 순간, 키아라의 표정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그도 그럴 게 눈 앞의 아이가 갑자기 저를 때리지 말라며 방어 자세를 취했기 때문이지요. 자신도 모르게 아이에게 겁을 준 게 아닐까 걱정되었습니다.
"아, 난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야. 괜찮으니 진정하렴."
키아라는 애써 웃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아이를 달래려 노력했습니다. 그녀는 아이의 머리에 손을 올려 가볍게 쓰다듬으려 했습니다. 안심하라는 의미의 행동이었습니다. 이 아이는 도대체 과거에 무슨 일을 겪었길래, 사소한 행동에도 지레 겁을 먹은 것인지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리코가 아주 살짝 고개를 들어 상대의 안색을 다시 살폈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손을 보자마자 리코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떨기 시작했다. 손이다. 손이 오고 있어. 이 다음은 익숙한 아픔이 덮쳐 오겠지. 머리일까, 아니면 등? 머리를 잡고 발로 차던 때도 있었다. 다짜고짜 배를 맞을 때도 있었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닥쳐올 지 모르는 공포가 되살아난다. 리코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아플지에 대한 것뿐이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바들바들 떠는 리코의 머리에 손이 닿았다. 우악스럽게 머리채를 잡는 손이 아닌, 가볍게 쓰다듬는 손이었다. 손이 닿는 순간 움찔하고 크게 몸을 떤 리코는 몸을 굳히고 움직이지 않았다. 몸부림치면 더 아프게 된다는 생각에 가만히 숨을 죽이고-하지만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있었다.
키아라가 아이를 쓰다듬자, 아이는 낯선 이의 손길이 두려운 듯, 계속 잘못했다며 되뇌이고만 있었습니다. 아이의 몸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습니다. 아이는 명백히 몸을 떨고 있었습니다. 마치 누군가에게 얻어맞기라도 할 것처럼요.
“괜찮아, 괜찮아.”
키아라는 계속해서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습니다. 안심시키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이 아이에게 무슨 속사정이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좋은 기억은 아니었을 겁니다. 부모에게 학대를 당했다거나, 물건처럼 사고 팔렸다거나... 키아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생각을 떨쳐냈습니다. 이렇게 어린 아이조차 가혹한 세상에 던져져 상처를 입어야 한다니, 잔인하기 그지없군요.
깊게 깔린 콜트의 낮은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태연이 표적지에 시선을 꽂았다. 표적지를 향한 총은, 총을 조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팔을 뻗어 겨눈다는 느낌이었다. 태연이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내 수십번의 총성이 들려왔다. 두 정의 총에서 쏟아져 나온 탄피들이 쉴새없이 바닥을 두드렸다. 총성이 다시 멎어들면, 총구에서 연기가 다시금 피어올랐다. 이번에는 연기가 나는 총을 그대로 내려둔 채로, 다시 표적지를 회수했다.
"...오..."
중앙에서는 약간 벌어졌지만, 이번에는 더 안정적인 탄착군을 볼 수 있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표적지는, 가운데만이 위태롭게 이어져 흔들리고 있었다.
"...괜찮네요? 생각보다 더!"
그리고는 태연이 씨익 웃으며 콜트를 향해 표적지를 내밀었다. 표적지가 결국은 툭 끊어져 반절이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괜찮다는 말과 함께 쓰다듬는 손길. 몸의 떨림이 점점 잦아들었다. 그래도 리코는 여전히 조심스럽게 상대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숙였다. 따뜻한 손길, 미호랑 비슷한 느낌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완전히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은 깊게 자리잡은 기억 때문이었다. 괜찮아, 하는 말에 리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도 때리지 않는 사람이다. 아마도…
“…네…”
바래다 줄까? 라는 물음에 리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위험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렇게 해야 했다. 슬쩍 상대의 얼굴을 본 리코는 안심했다. 웃고 있다. 웃는 얼굴일 땐 괜찮다. 아주 가끔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체로 웃는 얼굴일 땐 맞지 않았으니. 다소 안심해서일까, 아까보다는 나아진 모습으로 리코는 보호소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 저쪽이에요. 길 알아요.”
그리고 상대가 먼저 움직이면 따라 가려는 듯 기다렸다. 이번에도 올 때는 네 발로 뛰어 왔지만, 갈 때는 두 발로 걸어가게 되었지만 리코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태연이 가볍게 날아올라 곁에 쌓여있는 박스의 꼭대기에 걸터앉았다. 철판으로 덮힌 천장을 한번 바라보곤, 다시 고개를 내려 콜트에게 시선을 향했다. 허공에 매달린 다리는 작게 살랑이고 있었다.
"다들 그런 사람들을 영웅이라고 부르고요."
그리고는 손으로 허공에 반쯤 매달린 몸을 지탱한 채로, 태연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숙였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태연의 얼굴은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태연은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니시에이터였던 어머니. 언제나 모두를 위해 하늘로 날아올랐던 어머니. 사실 어머니에 대한 태연의 기억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가 몸을 던져가며 고귀한 희생을 치렀다는 것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2. 『자유를 원해』 유페미아: "아이고, 며칠 동안 연구를 못했더니 몸이 근질거려 못 참겠구먼. 가세! 크토니안을 찾아서!"
3. 『이것이 나의 현실인거지』 유페미아: ".....그래, 그렇다네. 평생의 연구를 빼앗기고 교수직에서도 쫓겨난 이게 내 현실인게지." "하지만, 걱정 말게나! 나, 유페미아는 이 명석한 두뇌를 이용해 이 위기도 극복할 수 있음이 명백하다네! 명심하게나, 쥴스-하퍼는 내 적수가 되질 못해!"
키아라는 온화한 미소를 띄우며 아이를 칭찬했습니다. 부드러운 손길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다 보니 몸의 떨림이 점점 잦아드는 것이 느껴집니다. 인간에게 상처받고 버림받은 데미휴먼이 있다는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키아라 또한 데미휴먼 딸이 있는 어머니였기에 그 아픔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화살은 심지어 이렇게 어린 아이에게까지 날아왔죠. 이 차별과 의심, 편견은 지구상에서 데미휴먼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될 겁니다. 인간은 저와 다른 존재를 본능적으로 경계하는 습성이 있으니까요. 참 씁쓸한 현실입니다.
“참, 이름이 어떻게 되니? 난 키아라야.”
키아라는 아홉꼬리 보호소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갑니다. 그리곤 자신의 뒤를 따라 종종걸음을 걷는 아이를 보고 이름을 물어봅니다.
이름을 묻는 말에 리코는 재깍 대답했다. 아이가 있다는 건 무슨 뜻일지 고민하던 리코는 전 주인이던 그 사람이나, 지금 보호소를 운영하는 미호처럼 아이들을 데리고 있다는 걸로 해석했다. 전자와 후자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리코의 짧은 생각으로는 그렇게 이해하는 게 전부였다. 이 사람은 미호 쪽에 더 가까운 것 같다고 생각하며 키아라의 뒤를 따라 종종 걸어가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묘하게 익숙한 냄새와 닮은 냄새. 보호소에서 오며 가며 마주치던 마리아라는 아이의 냄새와 비슷했다. 리코는 무심코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냈다. 그냥 비슷한 냄새라고 생각했을 뿐인데, 정말 무심결에 나와버린 것이었다.
“마리아…” “…랑 비슷해요, 냄새.”
뒤에 짧게 덧붙인 말에는 약간의 당황이 묻어 있었다. 리코는 잠시 시선을 피했다가 손을 들어 살짝 살짝 그루밍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당황한 것도 가라앉고 진정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키아라는 아이의 이름을 읊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곧 리코의 입에서 마리아의 이름이 나오자 키아라는 궁금한 듯 리코를 바라보았습니다. 마리아와 냄새가 비슷하다는 말이었습니다. 일반적인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는 오감을 지닌 데미휴먼이라면, 사물을 냄새로 구별하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그러할진대 사람의 체취로도 이를 구별한다는 것은 꽤나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그래? 신기하구나.”
키아라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마리아 생각만 하면 이렇게 온화해지는걸요.
“내가 마리아 엄마거든.”
이내 아이는 무엇이 두려운 것인지 키아라의 시선을 피해, 털로 뒤덮힌 손을 들어 핥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리코의 눈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키아라는 말 없이 리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싹싹, 그런 소리가 날 듯이 손을 핥다가 머리에 손이 닿아 그만두었다. 쓰다듬는 손길에는 아직 움찔했지만 그래도 위험하지 않다는 걸 알았으니까, 금방 괜찮아졌다. 마리아 엄마라는 말에 리코는 작게 고개를 기울였다.
“엄마?”
보호소에서 가끔 들은 말이다. 보호소에 오기 전에는 가끔 새로 온,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 중 몇몇이 말하는 걸 들은 적은 있다. 하지만 그게 어떤 것인지 리코는 잘 모르고 있었다. 잘 모르기는 하지만, 마리아를 비롯한 가끔씩 엄마(혹은 아빠)를 만나고, 얘기하는 아이들은 대체로 웃고 있을 때가 많았기에 리코는 막연히 그것들에 대해서 ‘잘 모르겠지만 뭔가 좋은 건가 보다’정도의 감상을 품고 있었다. 때로는 다른 아이들에게 그게 뭔지 물어봤지만 ‘엄마는 엄마야’라는 말이 돌아왔기에 그 이상의 궁금증은 해소할 수 없기도 했다.
“그거 알아요. 좋은 거에요.” “엄마 얘기를 하는 애들은 다들 웃고 있으니까.”
돌아가면 마리아에게 마리아 엄마를 만났다고 얘기해줄까, 귀를 실룩거리며 걷던 리코가 갑자기 귀를 뒤로 홱 젖혔다. 생각해보니 많이 깜깜해진 시간, 이렇게 늦게 들어가면 분명 마리아보다 미호를 먼저 만나게 될 것이다. 많이… 많이 무서울 거야. 잠시 상상한 리코는 그만 발을 멈춰버렸다. 무서워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망쳤다간 더 무서워질 걸 알기에 이도저도 못하고 멈춰 선 것이다.
리코의 말에 키아라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사실, 엄마가 무슨 느낌인지 말하라고 하면 키아라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부모 없이 자라왔거든요. 한편으론 이 아이 역시 부모님이 안 계신걸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리코와 함께 길을 가던 중 리코가 제자리에 순간 멈춰섰습니다. 키아라가 무슨 일인가 싶어 뒤를 돌아보니, 리코는 겁 먹은 강아지처럼 꼬리를 내리고 벌벌 떨고 있기했습니다. 리코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 이렇게 늦은 밤에 미호가 화내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던 거군요. 키아라는 미호 소장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미호는, 깜깜한 밤중에 아이가 돌아온다면 먼저 화를 내기보단 걱정해주지 않을까요. 리코는 아직 어린 아이니까요.
“괜찮을 거야, 리코. 걱정 말고 같이 가자.”
키아라는 무릎을 굽히고 리코와 눈높이를 맞추었습니다.
“그래도 무서우면, 내가 미호 언니한테 잘 말해둘게.”
주변은 어느새 오가는 사람 하나도 없을 정도로 한산해졌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리코를 보호소에 데려다주어야 합니다. 데미휴먼에게 있어 보호소 바깥은 위험하니까요.
눈높이를 맞추고 이야기하는 키아라를 보며 리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했다, 사람은 항상 높은 곳에서 자신을 내려다본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두 번째로 눈높이를 맞추고 얘기해주는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기에는 미호가 화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더 컸기에 리코는 일단 생각을 미루고, 앞에 있는 키아라에게 의지하기로 했다.
“네…”
어느 새 주변을 오가는 사람이 줄어들고, 거리는 한산해졌다. 조용해진 거리를 아주 잠깐 둘러본 리코는 다시 발을 움직였다. 물론 키아라가 먼저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걱정을 한시름 덜자 여유가 생겼는지, 리코는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렸다. 한산한 밖, 보호소, 미호, 좋은 사람들, 사슴과 뱀… 뭔지 모르게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생각에 잠긴 채로 걷고 또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 앞에 보호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 전과 비슷하게 보호소 정문 앞에 미호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리코는 저도 모르게 귀를 딱 뒤로 붙이고 꼬리를 다리 사이로 감췄다.
리코가 다시 발걸음을 옮깁니다. 다행히 걱정은 조금 덜은 모양입니다. 인적이 드문 큰길가를 계속해서 걷다 보니, 저 멀리로 아홉꼬리 보호소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보호소 문 앞에 익숙한 인영이 보입니다. 늦게까지 리코가 보이지 않자 걱정된 모양인지 미호가 보호소 밖에서 기다리고 있군요.
“이제 헤어질 시간이구나, 리코.”
키아라는 다시 한 번 리코를 쓰다듬어 준 뒤 리코를 데리고 미호의 앞까지 걸어갑니다. 길에서 우연히 리코를 마주쳐서 바래다주었다는 말과 함께,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볼게. 보호소에서 잘 지내야 한다? 리코.”
키아라는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제 갈 길을 가면서도, 조그만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봄이었다면 선선한 바람이 불었을겁니다. 가을이라면 슬슬 해가 넘어가고 있을 시간이었고, 겨울이라면 매서운 칼바람이 불었겠지만 여름의 태양은 아직도 하늘 위에서 모든 것을 내려다보며 살인적인 더위를 만들어냅니다. A지구의 하루도 마찬가지로, 살인적인 더위아래 모든게 하기싫을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하루는 하루의 일과가 있는 법이죠. A지구의 구성인들은 오늘도 하루와 싸워갑니다. 살인적인 더위 아래서말이죠.
CPA에서는 이례적으로 지구의 이니시에이터들을 CPA의 다용도 대형 홀로 초대했습니다. 더불어 미호의 아홉꼬리보호소, 그리고 유베리드의 유베리드 패밀리의 소장들과 해당 보호소의 데미휴먼까지도 불러들였죠. 공공기관인 CPA에서 이런 행사를 연 까닭은 더 많은 이니시에이터와 데미휴먼을 링크시켜서 페어를 맺게하고 새로운 기술인 인체강화에 대해서 홍보를 하기 위함이라고 홍보영상에는 나와있었습니다. 미호는 자신의 보호소에 있는 데미휴먼중 원하는 이들만을 추려서 홀로 출발했고 유베리드는 조직원 몇을 붙여 대충 몇 명을 뽑아 홀로 보냈습니다. CPA라는 대형 기관에서 주최하는 행사니 대충 뺄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늦지않게 가려면 슬슬 출발해야합니다. 귀찮더라도 가게되면 어떤 좋은 정보를 얻을 지 모르는 법이니까요.
키아라는 제 집에서 가만히, 누워만 있었습니다. 평소라면 임무에 나서거나, 외출에 나가거나 했겠지만 모든 게 귀찮았습니다. 그야 바깥은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다 문득 휴대전화가 울리는 진동에 정신이 퍼뜩 들었습니다. 화면엔 문자 한 통이 발송되었음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 있었습니다. 느릿한 움직임으로 그 내용을 확인해보니, CPA에서 이니시에이터와 각 기관의 데미휴먼들을 초대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문자를 확인한 키아라는 귀찮다, 란 생각이 들었지만 금세 그 생각을 접어두기로 합니다. 이니시에이터란 직업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CPA와도 밀접히 관련된 직업이니까요. 가서 손해볼 것은 없을 겁니다. 키아라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CPA로 향할 채비를 마쳤습니다. 집을 나서자 들어오는 따가운 햇살에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장내의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선을 넘어간다 싶을 때쯤 강단위로 한 남성이 올라와서 옷 매무새를 점검하고 마이크를 톡톡치자 삐 – 하는 피드백이 울리고 나서야 장내는 안정을 찾았습니다. 자신을 CPA연구소에서 데미휴먼의 인체강화와 이니시에이터의 강화신체를 연구하는 연구팀의 팀장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고개를 꾸벅 숙입니다.
“ 잠시 강단의 화면을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 남자는 최근 일어나는 아웃월드를 잇는 창이 열리는 횟수가 이전보다 빈번함과 이게 얼마나 위험한 사태인지를 설명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선 더 많은 이니시에이터와 무기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데미휴먼이 아닌 무기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 불쾌함을 드러내는 이들이 몇몇 있었지만 그 누구도 직접 입을 열고 일어나 표현을 하진 않았습니다.
“ 조금 지루하실 수 있으니 주제를 환기시켜보자면 최근 창이 자주 열리는 건 누군가가 의도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어떤 정신나간 단체인지는 모릅니다만 그건 여러분들이 해결해주시리라 믿습니다. “
이후로는 다시 원래 주제로 돌아가 이니시에이터가 더 확실하게 적을 제압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인 인체개조 수술은 이미 사례가 많고 안정성과 효과가 입증됐다는 말부터, 무기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인체강화는 조금 위험할 수 있지만 이니시에이터가 관리만 잘 한다면 크게 위험하지는 않을거라 말합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CPA가 주최하는 이번 행사를 통해서 링크 대상을 쉽게 구할 수 있다는 모양이었다. 위험이 많은 이니시에이터라는 직업의 특성상, 이니시에이터 동료들에 비해 나이가 많고, 전투경험이 없는 큰 단점을 안고 있던 유페미아는, 자신과 링크하려고 하는 데미휴먼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참으로 곤란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고, 그렇기에 이번 행사의 소식은 유페미아에게 있어 반갑게 다가왔다.
앞으로 자신의 연구 조교 겸 보디가드가 되어 줄 사람-유페미아는 자신의 링크 상대를 이 정도로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다-을 처음 만나는 자리인데, 첫인상에 신경 쓰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해서, 유페미아의 오늘의 옷차림은 스톡 타이가 달린 블라우스에 베이지색 체크무늬 재킷과 정장바지로, 교수 시절 입곤 했던 캐주얼 정장 차림이다. 지난 3년간 장롱에 묵혀 두던 정장을 버리지 않았던 게 참으로 잘 한 일이라고 유페미아는 생각한다.
문을 열고 나서자, 자신을 둘러싼 살인적인 열기에 잠시 주춤하지만, 겨우 더위에 밀려 포기할 수는 없다. 유페미아는 꿋꿋하게 CPA 다용도 홀을 향해 자신의 갈 길을 밀고 나간다. 사실, CPA 행사로 향하는데 정장을 고집하지만 않았더라도 이렇게 덥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 보는 장소에 리코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구경하기 바빴다. 털이 가득 부푼 채로 둥글게 휜 꼬리와 뒤로 착 붙은 귀가 긴장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긴 하지만. 거기에 미호 옆에 착 붙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눈 하나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장소, 많은 사람. 긴장한 리코의 귀에 삐- 하는 소리가 잡혀 고개를 홱 돌렸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지만, 리코가 제대로 알아들은 이야기는 극히 적었다. 질문이 있냐는 물음에 리코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에 대답하는 대신 리코는 화면을 보며 아는 글자를 찾아 띄엄띄엄 속으로 읽었다.
이니시에이터와 데미휴먼의 인체강화를 담당하는 CPA의 연구팀장이 발표를 시작했다. 자신도 교수 시절, 크토니안의 위험과 생태에 대한 경각심과 지식을 증진하기 위한 강연에 초청되여 전문지식이 없는 일반인을 상대로 강단에 선 적이 있었다. 그 떄의 기억을 생각하니 지금의 연구팀장이 딱해지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어쨌거나 연구팀장은 학계의 일원으로써 현역으로 일하고 있으니.
최근 창이 자주 열린다는 말이 유페미아의 주의를 사로잡는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소식해 대한 적절한 반응은 두려움이겠지만, 유페미아는 달랐다. 창이 자주 열리는 것은 더 많은 순수 크토니안이 인월드로 넘어옴을 의미한다. 순수 크토니안이 많이 넘어올수록 마이크로칩으로 추적할 수 있는 크토니안도 많아지고, 자신의 '산란장 이론'을 증명하기도 수월해 지는 것이다. 그래서, 유페미아는 이 일로 위험에 처할 다른 사람들을 위해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걸 어찌할 수 없었다.
연구팀장은 이니시에이터와 데미휴먼들의 인체개조를 권장했지만, 유페미아는 그것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51세의 나이에 천투경력 전무. 그런데도 이니시에이터. 인체개조가 시급하다면 시급한 부류의 사람이지만, 본인은 그렇게 느끼질 않는 것이다.
겨우내 CPA 홀에 도착한 키아라는 자리에 앉았습니다. 홀 안은 여러 이니시에이터들과 데미휴먼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키아라는 연구팀장이라는 이의 말을 잠자코 듣다, 어느 순간 그녀의 눈썹이 불쾌한 듯 꿈틀댑니다. 무기? 지금 데미휴먼을 보고 무기라고 말한 건가요? 장내가 조금씩 웅성댔습니다. 이에 불만이 있는 사람도 몇 보였으나 직접적으로 표현하진 않았지요. 그것은 키아라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소란도 금세 가라앉았습니다. 그 뒤론 익히 들어온 이야기들이 반복되었습니다. 창을 여는 건 누군가의 의도로 인한 거라든가, 그 중에서 키아라의 이목을 사로잡은건 인체개조 수술에 대한 이야기 등. 무기─즉, 데미휴먼─의 인체 강화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무기라는 어휘가 심기를 상당히 건드렸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건 좋지 않은 일입니다. 키아라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입을 열었습니다.
"데미휴먼에게 인체개조를 적용할 수 있다면, 그 효과 혹은 부작용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혹시나 자신과 링크하여 같이 싸울 데미휴먼이 나타날 수도 있으니 이런 점은 꼭 알아둬야 겠지요.
“ 데미휴먼의 인체개조. 좋은 토픽이죠. 이니시에이터처럼 강화 신체를 달아준다면 안 그래도 강력한 이들이 더욱 강해질 수 있습니다. 부작용이라, 현재까지는 부작용이 없어요. 피시술자 본인의 정신상태에 문제가 오는 것 정도랄까.. “
팔다리가 기계로 바뀌고 보이면 안돼는 것들이 보이는데, 정상으로 있기라는 게 쉽지는 않거든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조소를 띄웠습니다.
“ 안타깝게도 지원과 관련된 부분은 제 권한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 생각이라도 조금 보태자면.. 아마 당분간은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니시에이터는 늘어만 가는데 크토니안전에 쓰이는 복구비용도 만만치 않거든요. “ 하지만 우리를 위해 목숨걸고 싸우는 이니시에이터를 위해서라면 지원할 수 있는건 뭐든 하는게 CPA입니다. 하고 남자는 말했습니다. 데미휴먼은, 빼고 말했군요. 누군가는 또 여기서 불편함을 느꼈겠지만 이번에도 직접 말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 밖으로 향한건 미호였습니다. 자신이 데려온 데미휴먼들에게는 이제 그만 나가자, 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창문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총알이 날아들어 남자의 가슴을 뚫었고 검은 피가 붉게 물들어갈 때 남자는 이렇다할 소리도 내지못하고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다시, 장내는 시끄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몇몇 인원들이 뛰쳐나가 쓰러진 남자의 상태를 확인하려했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니시에이터를 위한 지원은 아끼지 않겠다면서, 데미휴먼은? 저 멀리서 미호 소장님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이 보입니다. 아마도 이 자리가 불편했던 것이겠지요. 귀를 찢는 듯 창이 깨지는 시끄러운 소음과 함께 연구팀장이 쓰러졌습니다. 홀은 순식간에 혼란으로 가득찼습니다. 이니시에이터와 데미휴먼을 소집한 CPA, 그리고 갑작스럽게 총을 맞고 쓰러진 연구팀장. 키아라가 이 혼란스런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습격입니다. 이내 상황을 파악한 키아라는 재빨리 홀 밖으로 달려나가 총성의 근원지를 찾으려 했습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습격을 벌인 걸까요? 어떤 목적으로?
남자의 말에 주변 데미휴먼들이 툴툴거렸다. 하지만 작게 들려오던 그 소리는 겨울철 얼어붙은 수도꼭지처럼 간헐적으로 몇 방울씩 떨어지다 이내 완전히 멈춘다. 역시, 아니마는 CPA의 데미휴먼들이 가장 행동거지가 바르다고 생각했다. 저기 저 혼자 발끈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는 아홉꼬리의 데미휴먼들보다 말이다. 고개를 살짝 돌려 하나 둘씩 일어서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차..
'쨍그랑-'
순간 자기도 모르게 의자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줘 버렸다. 간이 접이식 의자의 속 빈 쇠봉이 우그러졌다. 머리 위로 우수수 떨어지는 유릿조각들이 딱딱한 뼈로 이뤄진 돔에 부딪히면서 따그락거리는 소리가 머리통에 울렸다. 저 앞의 단상에선 아까 말하던 남자가 가슴팍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그에게 달라붙는 것이 보였다. 크토니안은 총을 쏘지 않는다. 이건 테러다.
소란스러운 비명 소리, 고함 소리. 그리고 금속 비린내. 수많은 자갈돌이 굴러가는 듯한 뛰는 발 소리. 그에 덩달아 아니마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한다. 엄밀히 말해서 아니마에겐 심장이 없었으나 아마 아니마를 조금만 주의깊게 살펴보면 그녀가 흥분 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명령...명령을...."
하지만 아니마는 이를 악물고 계속 간이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었다. 자신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능력이었다. 모두가 혼비백산하여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와중에도 아니마는 목석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날아올 총알이나 머리 위의 유릿조각은 더 이상 아니마의 안중에 없었다.
미호는 제 옷자락을 잡는 리코를 번쩍 안아들어 제 품에 안고는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상황을 확인했습니다. 명백한 테러행위, 암살, 불특정 다수를 노리는가 그게 아니면 특정 요인을 노린 암살행위인가. 장내가 시끄러워졌고 빔프로젝터가 검은 화면으로 바뀌고 삐 - 하는 하울링이 계속되다가 들려오는 변조된 목소리.
" 정숙하고 자리에 앉아라. "
의자에 앉아서 내 얘기를 듣는다면 다치는 사람은 없을거야. 그러니, 부디 자리에 앉아서 얘기를 들어줬으면 한다. 침착하고 냉정한 목소리에 덩달아 안정을 찾는 사람들도 있었고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정신나간 소리 하지 말라며 문을 열고 나간 이니시에이터가 있었습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날아간 문을 연 이니시에이터는 그 뒤로 쭉 날아가 유리창을 깨고 밖으로 떨어졌습니다. 문 앞에는 얼굴 반을 복면으로 가린 누군가가 서있었습니다. 검은색 긴 부츠를 신은, 아마도 여자는 후드티를 눌러쓰고 얼굴 반을 가린채 말합니다.
" 조용히하고 앉으라고 하잖아? "
나가려는 새X나 시끄러운 새X가 있다면 방금 나가 떨어진 병X하고 같은 꼴이 될테니까, 알아서들 하라구
여자목소리. 문을 막고 선 여자는 여유로운듯 벽에 기대어 섰습니다. CPA는 대체 뭘 하고 있는걸까요. 우선 자리에 앉는게 현명한 처사인 듯 합니다. 움직였다간 다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틀렸습니다. 연구팀장은 이미 치명상을 입고 숨이 끊어진 듯 보였습니다. 순간 프로젝터가 검은 화면으로 점멸하고, 소름끼치듯 차분한 변조 음성이 들려옵니다. 키아라는 일단 남자가 쓰러져있던 단상에서 내려가 가까운 자리에 앉습니다. 덩달아 어떤 여자가 들어오며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아까 콜트가 자신을 말리지 않았다면, 방금 전 날아간 저 이니시에이터와 같은 꼴이 되었겠지요. 심장이 벌렁거리지만 의외로 마음만은 차분합니다. 정황상으로 봐선, 프로젝터의 목소리와 저 여자는 한패처럼 보였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이 사단이 났는데 CPA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요? 경비들도 전부 어디로 갔는지, 아니면 애초부터 없었는지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키아라는 숨을 죽이고, 잠자코 여자를 노려보았습니다.
미호의 품에 안겨 나름대로 열심히 상황을 살폈지만, 도통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리코는 지금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귀가 아픈 하울링에 리코는 귀를 파르르 떨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침착하고 냉정한 목소리. 이상한 목소리긴 했지만 그 어조는 리코에게 과거의 기억을 상기시키기엔 충분했다. 리코는 바짝 몸을 굳히고 있다가, 미호의 어깨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미호… 여기… 앉아…?”
앉아야 하는 걸까, 주변을 보면 이미 앉은 사람도 몇 보이는 것 같았다. 문 앞에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얼굴을 가리긴 했지만, 리코가 듣기에는 여자 목소리 같은 소리로 말했다. 나가려던 사람은 저 멀리로 튕겨나갔다. 리코는 일찌감치 나가는 것을 단념하고, 미호의 품에서 내려와 앉았다.
벽에 기대어 서있는 여자는 얼굴을 가리고 있어 대체 무슨 표정을 짓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랫층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걸로 보아 CPA측에서 조치를 취하는 중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계단을 뛰어올라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 괜찮아요 리코. 미호가 있잖아요? 내가 꼭 지켜줄게요."
미호는 리코에게 말하며 미소를 지어보였습니다. 항상 보이는 그 온화한 미소.
시선은 다시 빔프로젝터와 스피커로 옮겨갑니다. 삐 - 하는 하울링이 한 차례 울리고 나오는 목소리는 여전히 기분나쁘게 변조된 톤이었습니다.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여자는 딴 생각 하지말고 집중하라며 문을 지키고 서 있습니다.
" 본론만 말하겠다. 아웃월드를 잇는 창을 열고 있는건 다른 사람이 아닌 나다. 나와, 우리의 가족들이고, 나의 딸들이다. "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듯한 목소리는 아웃월드를 여는 것은 자신이며 이 모든것은 너희들이 직접 초래한 일이니 원망하려거든 스스로를 원망하라 말합니다. 이 시간 이후부터 창이 열리는 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라 말합니다. 저쪽이다! 하는 소리와 함께 CPA의 요원들이 도착하자 문 옆에 서있던 여자는 작게 욕을 읊조리고는 펑 -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CPA를 걷어차 날려버리고는 그 길로 사라졌습니다.
대담하게도 CPA연구소를 노린 테러사건은 삽시간에 소문이 번졌고 사건조사와 규명에 그 자리에 모였던 모든 데미휴먼과 이니시에이터가 불려갔습니다. 당연히 이렇다할 정보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어느정도의 소득은 있었습니다. 단순 소문이었던 아웃월드를 잇는 창을 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기정사실로 밝혀진 것, 팀장을 저격한 총알이 .338 라푸아 매그넘이라는 것, 저격수의 위치가 못해도 700m는 될 것이라는 것 등 영양가 높은 정보는 아니었지만요.
당분간 데미휴먼에 대한 혐오범죄가 증가할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예측했습니다. 그 때 문에 서있던 후드를 뒤집어 쓴 여자에게서 '토끼 귀'를 보았다는 증언이 계속해서 들려왔고 눈가에 흉터가 있었던 것 같다는 증언이 추가로 들려와 토끼 귀에 눈에 흉터가 있는 데미휴먼을 찾는다는 공고또한 여기저기에 붙었습니다.
이 날 사건이 있은 후에 그 목소리의 주장을 뒷받침 하기라도 하듯, 사건 직후 두 개의 창이 열렸고 총 16마리의 순수 크토니안이 넘어왔습니다. 12마리는 현장 사살 되었지만 4마리는 놓쳤다,는 것으로 보아 최소 4마리의 크토니안이 새로 생길 것으로 예상된다고 합니다.
확실한 건 단순 팩의 소행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CPA와 이니시에이터에게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진 조직이 있다는 것, 정도일까요.
저기 서서 불안하게 주변을 서성이는 데미휴먼들은 그냥 불안감에 자신을 통제할 수 없게 된 녀석들이다. 하지만 아니마는 아직도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생활실로 돌아가라던지, 주변 수습을 하라는 것 따위의 명령이 일체 없었다. 마지막으로 받은 명령이 여기 앉으라는 것이었다. 하긴, 주변 조금 서성인다고 누가 화를 내거나 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자아는 그것마저도 용납하지 않았다.
"곧 직원 분들이 인솔하러 오실 겁니다.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면 됩니다."
아니마는 촉수를 올려서 머리 위에 올라앉은 유리 조각과 가루들을 쓸어내린다.
"그 테러리스트들. 열등한 인지 능력을 곧이곧대로 내비치더군요.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은근슬쩍 책임을 전가하려 드는 그 뻔뻔함이란..."
초면인 사람과 사용하기에 조금 격한 표현이 있었으나, 아니마는 그것을 신경쓸 만한 사회성이 부족했다.
갑자기 시작되었던 사태는 그 시작만큼이나 가까이 끝이 났지만, 유페미아는 집에 가지 못하고 행사장 입구를 서성이고 있다. 옆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충격감과, 비록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지만 살려내지 못했다는 죄책감, 인간이 이리 쉬이 죽는다는 것에 대한 허무감. 여러 가지 감정들이 유페미아를 짓눌러 그녀가 계속 서성이게하게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포칼립스라는 배경이 무색하게도 유페미아는 평생을 꽤나 보호받고 자라, 자연사 외의 인간의 죽음을 목도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최소한, 그녀가 기억하는 한은 말이다.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두 사람은 제외다.
유페미아가 지혈하려 했던 연구팀장의 피가 손가락 사이에 눌어붙어 찐득찐득하고, 가는 곳바다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아니, 피냄새는 나에게서 나고 있겠구만...'
그렇게 서성이고 있던 중, 붉은 머리를 한 여성과 마주친다. 데미휴먼의 돌연변이가 없는 걸로 봐서, 이니시에이터거나, CPA측 직원일 것이다.
방금 일어난 일은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세상이 어찌 될려고 이러는 건지요. 이럴 때일수록 키아라는 더욱 더 마리아가 보고 싶었고 걱정이 되었습니다. 의문의 괴한들이 사라지고, CPA측 인원들이 현장으로 올라오며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습니다. 하지만 키아라는 아직도 현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던 키아라는 문득 하얀 천이 덮힌 채 들것에 실려나가는 형체를 보았습니다. 아까 전 총을 맞고 쓰러졌던 연구팀장이겠지요. 데미휴먼을 무기라고 지칭하는 등 심기에 거슬리는 언행을 하던 이였지만 괘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 편견과 오해가 있다 한들 폭력으로 해결하는 것은 옳지 못하지요. 키아라는 씁쓸하게 그 모습을 지켜봅니다. 하얀 천에 피가 배어 붉게 물드는 것이 보입니다. 아까 현장에서 연구팀장을 지혈하던 중년의 여성이었습니다. 그녀의 손엔 피가 잔뜩 묻어있군요. 아마 연구팀장의 피일 것입니다. 여성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허탈해보였습니다.
"방금 전 현장에 계셨던 분이지요?"
키아라는 여성에게 말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필사적으로 연구팀장을 살리려 노력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왜 이렇게 기분이 착잡한지 모르겠네. 그 사람이 살아서 뭐라고 지껄여댈 때는 짜증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
유페미아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지만, 그 웃음 뒤에는 어떠한 즐거움도 없다. 실소, 라는게 이런 것일 터이다.
"사람이 죽는 게 처음이라 이럴지도 몰라. 부끄럽지만 이 나이 되도록 누가 죽는 걸 지켜본 적이 없거든. 이렇게 위험한 세상인데도 말일세."
한 때는 누가 죽는 것을 직접 목도할 일이 없는 것이 정상인 세상도 있었더랬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 시대는 이미 역사의 뒷켠으로 사라진 후다. 크토니안 사태 이후로 크토니안들이 숙주와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고, 범죄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는, 유페미아 같은 경우는 지금까지 비정상적으로 운이 좋었다고 할 수 있다.
검은색의 마호가니 원목을 사용한 몸체에 흰색 가죽을 덧대어 만든 모던한 느낌의 의자에 앉은 여자는 말했습니다. 눈의 흉터를 긁적이다가 생각보다 많이 이른데요? 하고 덧붙이곤 고갤 돌렸습니다.
" 차질없이 진행됐으니까 괜찮아. 하고싶은 말과 해줘야 하는 말 전부 해줬으니까 "
검은 가죽장갑을 벗으며 책상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다른 여자는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물 한잔을 쭉 들이키고는 책상앞에 앉아 펜을 집어들었습니다. 펜 끝을 입에 물고 곰곰히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고 곧 방 안에는 침묵이 내려앉았습니다. 할 말이 없으면 안 하면 되는 거 아닐까 - 그 말을 증명하듯 내려앉은 침묵은 전혀 불편치 않았습니다.
" 몇이나 죽어나갈까요? 아니, 그딴건 상관없지. 옳은 일을 하는거잖아요? 몇 명이 뒤져나가던 상관없어"
침묵을 깬 말은 혼잣말마냥 허공을 향해 뱉어졌고 정처없이 떠돌던 말은 제 갈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흩어져가던 말을 잡아 다시 내치듯 끼익 하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다른 이가 말합니다.
" 그게 네 문제인거야. 아무 생각없이 부수고 죽일 생각만 하니까 ■■도 너한테 별 말 안하는거 아니겠냐? " " 갑자기 시비네 뒤지고싶나 진짜..? 네 머리 먼저 걷어차줄까? "
말다툼이 일었고 곧 싸움으로 번질 분위기였지만 상서열자에 ■■인 ■■■의 말에 ■■■는 아니 그냥 말이 그렇단거지.. 하고 이를 뿌득갈며 한 수 무릅니다.
펜끝을 입에 물고있던 이가 그만들 하렴. 하고 말하자 언제 싸웠냐는듯 분위기는 다시 식었고 입가에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 ■■는 오늘의 일이 만족스러웠단 듯 둘의 어깨를 톡톡치곤 고생했어. 하고 말했습니다
"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때가 되었구나 "
■■는 그 말을 끝으로 방에서 나갔습니다. 하나 둘 방을 나가자 주인을 잃은 공간에는 다시 적막이 내려앉습니다.
여성의 눈에 눈물이 고입니다. 이내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눈물을 삼켜냅니다. 일반적으로 죽음이란 걸 접해보지 않은 일반인 입장에서는, 이번 일 때문에 많이 놀랐겠지요. 바로 코 앞에서 사람이 죽었는데요.
“키아라 로체스터입니다. 당신은요?”
여성이 진정한 것 같자 키아라는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뗍니다. 그리고 자신을 소개하며 악수를 청합니다.
“이니시에이터 일을 하기 전에, 군에 오랫동안 있었습니다.” “크토니안들을 상대하는 부대에 있었죠.”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20대 시절, 눈 앞에서 전우가 처음 죽었을 때, 키아라는 많이 슬펐습니다. 마치 자기 잘못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그런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죽음을 겪은 지금도 아직 누군가의 죽음은 익숙해지지 않았습니다. 죽음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요.
상황이 정리되었지만 장내는 아직도 어수선했습니다. 넓디 넓은 홀에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혼란스러워하는 이들 몇 명,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올라온 CPA측 인원들, 그리고 키아라와 중년의 여성이 전부였습니다.
유페미아는 조금 망설이다 손에 묻은 피를 재킷 앞섶에 닦고는 키아라의 내민 손을 잡고 흔든다. 방금 전 일에 놀라 손은 조금 차갑게 식었지만, 손에 적당히 힘이 실려있는 좋은 악수다.
"이래뵈어도 나도 이니시에이터라네. 일단은, 말이네."
"그렇구만..."
키아라의 군 생활 이야기에, 유페미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크토니안을 상대하는 부대라. 그렇다면 키아라도 크토니안에 대해서 자신만큼은 아니지만 빠삭하게 알고 있으리라. 대학교수 시절, 학생들과 크토니안을 관찰하기 위해 비슷한 군 부대의 보호를 청한 일이 있었다. 문득, 키아라가 그때 만났던 지인을 알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혹시, █부대의 쥬나이퍼 리 중위를 알고 있나? 5년 전에 그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네."
"5년 전 일이니까, 더이상 중위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말일세."
이게 무슨 일인지, 중얼거리는 키아라의 말에 유페미아도 생각에 잠긴다. CPA를 겨냥한 명백한 테러행위에 '가엾은 자들과 왕을 위해, 우리가 왔다'는 의미불명의 선언. 유페미아는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회장을 나오면서 문 쪽의 괴한이 데미휴먼이었다고 쑥덕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물론, 데미휴먼에 대한 인식이 안좋다는 것은 알기에 그 말을 곧대로 믿기에도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고 보니, 자네는 사태가 일어났을 때 강연단 위에 없었지. 혹시 문 쪽의 괴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봤나? 강단 위에서는 조명 때문에 아무 것도 안 보였다네."
유페미아는 주황빛 머리에 주근깨, 그리고 장난스런 수풀색 눈을 지니고 있던 젊은 중위를 회상했다. 10년 사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는데, 5년이면 강산은 변하지 않더라도 사람은 많이 변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5년 전 주나이퍼는 중위였고, 유페미아는 교수였지만, 이제 그들은 각자 중위도 교수도 아니게 되었으니. 정확히 말하자면, 주나이퍼는 진급했고 유페미아는 인사정리 대상에 들어간 것이지만 말이다.
"예전에 우리 연구팀을 호위해준 군인들 중 한 명이었다네. 연구 목적으로 '벽' 너머로 갈 일이 있었거든."
"마취총을 쏘는 법도, 총을 쏘는 법도, 모두 그녀에게서 배웠다네. 그녀가 없었다면 이니시에이터가 될 엄두도 못 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은인이야. 그녀를 아는 사람을 만나다니 반갑구먼."
유페미아는 괴한이 토끼 귀를 지니고 있었다는 키아라의 말에 생각에 잠겨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그럼 자신이 들었던 쑥덕거림이 정확했던 모양이구먼.
"데미휴먼이라... 그럼 주동자는 데미휴먼이고, 피해자는 반(反) 데미휴먼 인사라는 말이 되는구먼. 연구 팀장이 무슨 말을 했는지 우리 모두 들었으니까 말이야."
"설마 그렇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일까, 방금 일은?"
유페미아에게는 데미휴먼에 대한 안좋은 편견은 없다. 크토니안에 대한 비이성적인 공포가 없다 보니, 그 공포가 데미휴먼에 대한 무분별한 증오로도 번질 일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 대해 드러나있는 정보들만 놓고 보면, 한번쯤은 할 수 있는 생각이다. 키아라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유페미아는 크토니안을 두려워하지 않고, 따라서 데미휴먼을 무서워하지도 증오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데미휴먼의 인권을 위해 뭔가 노력을 한다거나 하지는 않고, DPM같은 '드러나있는' 폭력 집단만 알고 있다 뿐이지 데미휴먼들이 겪고 있는 크고 작은 차별에 대해서도 무지하지만 말이다. 좀 각박한 평을 내리자면 죄를 지은 여인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말릴 생각은 안 하고, '쯧쯧쯧' 혀만 차대는 방관자, 그것이 유페미아의 현재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키아라의 진심 어린 위로에 유페미아는 웃어 보인다. 자신을 믿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내 말이 그 말일세. 인간이나 데미휴먼이나 다 같은 사람인데 말이지."
유페미아는 혀를 끌끌 차며 키아라의 말에 맞장구쳤다.
키아라의 딸이 데미휴먼이라는 말에는, 유페미아의 눈이 동그래진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이내, 유페미아의 얼굴에 동정-은 상대를 깔보는 것이기에 아니고-, 이해-는 데미휴먼은 커녕 아이 자체를 키워 본 적이 없는 유페미아로서는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그런 표정이 차오른다.
"그렇구만, 그동안 맘고생이 심했겠구먼...."
이번에는 유페미아가 키아라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 차례다.
한편, 유페미아의 마음 한켠에는 전쟁터가 벌어진다. 너무나도 질문하고 싶은 질문이 있는데, 그것이 엄청난 실례일 수도 있다는 걸 알기에 고민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천사와 악마가 아닌,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에티켓"이라는 요정과 "과학적 호기심"이라는 요정이 유페미아의 어깨 위에서 싸우고 있는 꼴이다.
키아라는 유페미아의 토닥임에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확실히 키아라는 걱정이 많이 되었습니다. 이번 일로 분노한 누군가가 데미휴먼들이 잔뜩 모인 보호소로 화살을 돌리지 않을까봐요. 그리고, 유페미아는 크토니안에게 감염된 경로를 물어보았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입니다. 키아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잠깐 고민하다 입을 열었습니다.
"으음... 그냥 놈의 타액에 감염되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 이상은 말씀드리기 곤란하군요."
아주 길고 거대한 뱀 크토니안이었다죠, 아마? 키아라는 금세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쳐내었습니다. 그 당시의 기억은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습니다. 사실 그 기억도 이젠 흐릿해져 잘 기억나지도 않고 말이죠.
맞다 캡틴께서 그동안 크토니안에 대해 대답해 주신 걸 에버노트에 정리해 봤어요... https://www.evernote.com/shard/s466/sh/3d1860f5-3c27-4139-bc19-1df7a9eb6a5e/6ed33fad0f7a42f88d2fc6dd6b939b8d
낮은 좋지. 해가 쨍쨍하면 기분도 덩달아 좋아지잖아? 마치 세상에 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듯 평화로워 보이고 만나는 이들마다 기분이 좋아보이고 모든것이 아름다워 보이기만 하는 낮은 좋은거야. 모든게 저마다의 색깔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선인인 것 마냥 돌아다니잖아?
그래서 난 밤이 더 좋아.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면 어두운 존재라고 부르는 우리들이 스물스물 땅 위로 올라오거든. 세상에 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구석구석, 골목골목마다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어둠이 내려앉고 만나는 이들마다 더러운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것 마냥 표정을 보기도 힘들고 모두가 색깔을 잃었을 때 찾아오는 광기란.. 정말 최고야.
" 그렇지 않아? "
남자의 이름은 소넷. 소넷 유베리드. 유베리드 패밀리라는 마피아 조직이자 보호소를 운영하고 있는 그 유베리드였다. 머리를 꽁지머리로 묶은 소넷은 어두운 폐공장에서 제 앞에 네 명의 사람과 두 명의 데미휴먼을 무릎꿇려놓고는 손을 등뒤로 묶어놓았다. 손에는 항상 애용하는 황금도금된 권총을 들고있었고 여섯 명의 사람들은 입에 재갈을 문 채 무어라 말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소넷은 황금도금된 그의 권총으로 제 머리를 긁적이다가 네 명의 사람의 머리에 대고 한 발씩 사이좋게 박아주고는 덜덜 떨고있는 데미휴먼을 보다가 실소를 뱉고는 제 뒤에 서 있던 조직원들에게 말했다.
" 보호소로 데려가. 오늘부터 새로운 가족이니까 "
비릿한 웃음을 짓는 소넷과 여전히 덜덜 떨고만 있는 데미휴먼, 차게 식어가는 네 구의 시체와 이 사람은 보스지만 최악이라는 듯한 눈길의 조직원들. 소넷은 오늘도 재산이 늘어났음을 기뻐하며 거리로 나섰다. 원래라면 조직원들을 대동하겠지만 가끔은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하다며 혼자 나온것이다.
옷 안에는 금장도금된 권총이 들어있는 홀스터가 있었다. 직접 'Vendetta'라는 이름을 붙인 총을 마지막으로 사용하는 날은 자신의 얼굴에 상처를 낸 그 크토니안의 머리에 마지막 한 발을 박아넣는데 사용하리라고 다짐한 소넷은 항상 몸에 총을 지니고 다녔다. 가슴쪽에 느껴지는 묵직한 느낌이 좋았다. 주머니에서 고급 시가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인 소넷은 후 - 하고 하얀 연기를 뱉어냈다. 코 끝에 걸려있는 고급 시가의 향은 언제 맡아도 향긋했고 밤을 즐기게 해주는 데는 이만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최근에는 중화제에 손을 대는 멍청한 것들까지 늘었다지만 자신은 절대 그런 싸구려에는 손을 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 돌아다니기엔 좋은 시간은 아닌데.-
문득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멈춰선 소넷은 고개를 돌리고 그 다음 몸을 돌렸다. 고개를 갸웃하고는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나한테 하는 말?' 하고 대꾸하고는 재밌는 사람이네, 하고 키득키득 웃었다. 뚜벅뚜벅 하고 남자의 앞으로 다가온 소넷은 눈 앞에 보이는 거대한 방탄헬멧에 우왓, 하고 조금 놀란 티를 보이고는 이런거 쓰고 다니면 목 부러질텐데? 하고 말하며 손 끝으로 톡톡 헬멧을 건드린다.
" 나 같은 사람한테는 돌아다니기 더 없이 좋은 시간이지 "
반갑네. 난 소넷 유베리드. 너희가 알고있는 유베리드 패밀리의 소장! 자신을 그렇게 소개한 소넷은 왼손은 입에 물고있는 시가로 가져가곤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무안하네, 하고 덧붙인 소넷은 내밀었던 손을 털며 다시 가져와 주머니에 꽂아넣었다. 다시 습 - 하고 시가를 빨아들인 소넷은 도발엔 도발로 대응한다는 듯 남자의 방탄헬멧에 후 - 하고 연기를 뱉어냈다. 코 끝에 걸려있던 달콤한 헤이즐넛향이 방탄헬멧을 타고 어깨로 내려와 땅으로 내려가며 사라졌다. 잠시간 방탄헬멧 너머의 눈을 바라보던 소넷은 좋은 눈을 가졌네. 하고 말하곤 다시 시가를 빨아들이고, 코 끝에 향을 건 다음 뱉어낸다. 보랏빛 달빛이 내려와 어깨에 앉았고 조금은 서늘한 바람이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갔다.
" 돌아가라니, 내가 어디서 뭘 하던 그건 내 마음 아니야? "
자유야 자유~ 이 알파지구는 이렇게 어딘가 나사가 빠져 돌아가는 것 같더라도 개개인의 자유만큼은 보장해주거든. 봐봐, 심지어 데미휴먼마저도 야밤에 맘대로 돌아다니게 허락한다니까? 이니시에이터도, 나같은 보호소 소장이나 혹은 범죄자의 이름을 달고있는 사람이라도 전부 자유가 보장되는 이거야말로 유토피아 아니겠어?
소넷은 궤변이라면 궤변을 토해내고는 그래서 정말 악수 안해줄거야? 하고 다시 눈을 접어 웃으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래,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는 마피아 조직의 보스였으니까. 아? 어쩌면 지금도 보스일지도? 아무튼, 그것들 때문에 방금 난 총소리하고 나랑 연관되어있다고 생각하는거잖아? 이야 - 형씨, 그거 나쁜 버릇이라고. 사람을 배경으로만 평가하는건 좋지 않는 버릇이야~ 직접 겪어보지 않았잖아? 나란 사람을 말이야. 내가 정말 선량한 보호소 소장이라면 어떻게 사과할 생각이야?
소넷은 그렇게 말하며 심심하던차에 잘됐네. 하고 덧붙이고는 콜트를 따라 폐공장으로 걸어갔다. 시간은 이미 꽤 지났다. 그 자리에 있던 조직원들도 멍청한 놈들은 아니기에 이미 현장은 깨끗하게 치웠을 것이고 데미휴먼은 보호소로 옮겨졌을 것이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현장에서 이 남자는 뭐라고 할까, 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정확히는 나랑 관계가 없다고 했지만. 소넷은 쿡쿡대고 웃으며 주변을 빙빙 돌았다. 어느샌가 꺼져버린 시가를 바닥에 비벼 끄고는 뒷주머니에서 힙플라스크를 꺼내 안에 담긴 양주를 쭉 마시고는 새로운 시가를 꺼내 입에 물고 성냥을 이용해 불을 붙였다. 다시 헤이즐넛 향이 코에 걸렸다. 헤이즐넛, 소넷은 유달리 이 향을 좋아했다. 소넷이 움직이는 동안에는 항상 헤이즐넛 향이 따라다닌다고 말할 만큼 소넷은 헤이즐넛향을 좋아했다. 그래서일까, 폐공장에는 온통 헤이즐넛 향이 걸려있어 보였다.
" 뭘 책임지느냐고? "
무슨 질문이 그래?
플라티나빛 달빛이 폐공장을 비추고 있었고 금방까지 꽤 많은 사람이 모여있던 공장부지는 이젠 아무도 없이 단 두 명의 남자가 서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느낌이 좋다. 나는 안전하고,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듯. 마치 심장이 무거워진듯한 착각마저 주는 이 느낌이 좋다.
" 난 내 자신에 대한 책임을 지는거고, 날 따라오는 내 가족들에 대한 책임을 지는거야. 가장으로써, 리더로써는 당연한 일이잖아? "
이대로 막간극을 보는 것도, 어쩌면 직접 그 극에 참여하는것도 재미있을지도. 소넷은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제 가슴팍을 겨누고있는 리볼버의 총끝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방탄헬멧을 쓴 남자를 바라보며 아직 불꽃을 내고있는 시가를 입에물고 빨아들이곤 다시 하얀 헤이즐넛향을 뱉어냈다. 항상 피비린내 나는 곳에 있다보니까 그 역겨운 냄새를 잊어버리기 위해 코끝에 항상 헤이즐넛향을 걸고 다녔고 아마 거기에 중독된게 아닐까 하는 잡생각이 머리로 지나갈때 쯤 다시 입이 열렸다.
" X까는 소리하네 "
큭큭 하고 웃은 소넷은 가슴속 홀스터에 들어있는 금장도금되어 화려하게 빛나는 권총을 꺼내 자신의 머리에 겨누곤 말을 이어갔다.
" 책임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 책임 때문에 살아야지. "
내가 책임질게 하고 픽 죽어버리면 그건 그냥 책임져야하는 결과를 두고 꼬리말고 도망치는 개새끼말고 뭐가되는거라고 생각해? X도 말도 안돼는 소리 아니야? 책임을 질거면 끝까지 살아서 내가 벌여놓은 판 다 수습하고 그 다음에 나가 뒤져야 책임을 지는거 아니겠냐고? 야, 그리고 지금 너도 존X 웃긴 거 알아?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 총소리가 나랑 연관있다는 증거하나도 없는데 갑자기 책임 운운하면서 내 가슴팍에 총을 겨누면 난 뭐라고 해야해? 아, 이게 너희 이니시에이터가 말하는 정의인가 뭔가 그건가?
소넷은 제 머리를 겨누고 있던 총을 내려 콜트를 겨누다가 다시 홀스터에 집어넣고는 뒤를 돌아 앞으로 걸어나갑니다.
" 내 밑에 있는 우리 가족들하고, 내가 데리고 있는 데미휴먼들 네 말대로 책임질 수 있으면 쏴 봐. "
이야기는 어둠속에서 시작해 골목으로 옮겨갔습니다. 골목으로 옮겨간 이야기는 술집으로 번졌고 술집으로 번진 이야기는 알파지구 전체를 뒤덮겠지요. 이미 블랙라벨소사이어티에서는 소문을 이상히 여기고 나름대로 조사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미친소리로, 누군가는 씹기 좋은 가십거리로, 누군가는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로 치부할 이야기지만 소문에 뼈와 살과 피가 더해진다면 나름의 신빙성도 있게 들리는 것도 가능하겠지요.
" 그래서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한다는거야? "
연갈색의 포니테일을 올려 묶은 여자는 더운 날씨에 짜증이 났는지 인상을 잔뜩 구기곤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습니다. 한 손에는 PDA를 들고 다른 손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든 여자는 땀이라도 식히고자 나무 그늘 아래에 있는 벤치에 털썩 주저 앉았습니다. 빨대를 입에물고 쭉 - 빨아들이자 조금은 살겠다는듯 후 - 하고 숨을 뱉어낸 여자는 막막하구만.. 하고 허공을 바라봤습니다. 어느정도 해가 내려가고 더위가 한 풀 꺾였다지만 이런 살인적인 더위에서 뭘 계속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요.
" 엥, 잠깐! 거기 데미휴먼! "
여자는 제 앞을 지나가던 데미휴먼을 부르곤 가까이 다가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잡아세웠습니다. 뭔가 깜빡했다는듯 아, 맞네. 하고 중얼거린 여자는 뒷주머니에서 지갑과 작은 카드를 꺼내 보여줍니다.
Corpo Dei
Miley Semovente
District A-27 Special Assult Unit
" 이런 사람이야, 코르포데이 마일리 세모벤테라고 하거든. 물어보고싶은 게 있는데 괜찮을까? "
마일리는 더우니까 이쪽으로, 하고 말하고는 나무그늘 아래에 있는 벤치로 오베론을 이끌었습니다. 쭉 - 하고 커피를 들이킨 마일리는 날씨 많이 덥다 그치? 하고 시덥잖은 이야기나 하면서 주제를 빙빙 돌리다가 길을 잃었냐는 말에 내가? 하고 자신을 가리킵니다.
" 아무리 그래도 코르포데이 특수기동팀 팀장인데 길을 잃었을리가. "
아마 이 지구의 모든 사람들이 모르는 길을 나는 알고있을걸. 그러니 그럴 일은 절대로 없어. 마일리는 그렇게 말하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벤치에 내려놓고는 본격적인 취조에 들어가겠다는 듯 PDA를 집어듭니다. 실례되지 않는다면 녹음 좀 할게. 하고 말한 마일리는 오늘의 날짜를 녹음기에 대고 말하고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 아, 혹시 이름이 뭐야? 링크한 이니시에이터가 있나? 그게 아니라면 보호소출신? 그렇다면 어느 보호소야? "
너무 많이 물어봤나. 마일리는 멋쩍은듯 머리를 긁적이고는 천천히 대답해줘도 된다며 PDA를 벤치에 내려놓습니다. 코르포데이, 데미휴먼 사건을 전문으로 전담하는 경찰과 같은 조직. 그리고 그 조직의 특수기동팀의 팀장이라기에는 어딘가 앳돼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강하고 단호한 태도를 보고있자면 그 자리까지 올라간 게 이상하지만은 않아보였습니다.
마일리는 소넷, 하고 작게 이름을 읊조리고는 언젠가 내 손으로 잡아서 법정에 세울테니까 그렇게 전하라고 말하고는 휴 - 하고 화를 삭이듯 숨을 뱉었습니다. 링크한 이니시에이터가 없는 데미휴먼, 거기에 유베리드 패밀리. 마일리는 접점이 많은데.. 하고 중얼거리며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였습니다.
" 내가 물어보고 싶은 건 이거야. "
요즘 들어서 이상한 소문이 돌고있어. 갈 곳 없는 데미휴먼이나 버려진 데미휴먼을 잡아서 암시장에 팔아버린다고. 어딘가에 그 암시장이 있는데 그 곳에서 경매를 한다고 하더라고. 팔려간 데미휴먼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는 몰라. 연구실에 팔려갈 수도 있고, 강제적으로 링크할 수도 있고, 노예로 사용될 수 도 있겠지. 뜬 구름 잡는 소문이라고 무시할 수도 있는데 실종신고가 들어오는 건수도 이상하게 저번에 비해서 조금 늘기도 하고 해서 게다가 상황이 상황인 만큼 조금은 파고들어도 괜찮을 것 같아서 말이야. 혹시 이 소문에 대해서 아는 게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