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로라는 솔로몬이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설백색에 가까운 은빛 머리 한 타래와 곤색 보닛의 리본이 같이 흘러내리듯 기울어졌다. 혹시 잘못된 것이 있는걸까? 하는 생각도 잠시, 그가 고개를 돌려 아이니와 오세에게 하는 말에 입술을 휘어 올렸다.
아이니와 오세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아이니에게 이끌리는 오세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준다. 복도에서 두 아이의 발소리는 멀어져가고, 방은 잠시간의 침묵에 휩싸였다. 불편한 침묵이 아닌 것에 감사하듯 아우로라가 양산의 부드러운 레이스를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리고 핫, 하는 소리와 함께 아우로라는 손을 들어 제 입을 가리더니 도르륵 시선을 굴려 눈을 내리깔았다. 밖에 나간다는 사실에 너무 들떴는지 아이처럼 격하게 반응할 줄이야. 이제 데뷔탕트 이후로 완벽한 성인이 될 것이고, 그때도 이렇게 아이같은 모습을 보이면 안 될텐데..
"ㄱ, 그러니까...부디 천천히 준비해주시어요."
아우로라가 볼을 붉혔다. 제딴엔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었는지, 제가 들떠버린 이 상황이 부끄러운 모양이었나보다.
아우로라가 내는 목소리에 솔로몬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꽤나 들뜬 모양인데, 실망시키지나 않을지. 솔로몬은 아우로라가 부끄러워하는 것을 보면서 이야기했다.
" 부끄러워하지 마시오, 사교계에서야 어느 정도의 연기는 필요한 법이지만, 이 곳은 연회장이 아니니, 솔직한 모습이 지내기엔 더 좋을 것이오. "
참고만 살다 보면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몰래 몰래 하는 것보다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게 낫지. 그렇게 생각하며 솔로몬은 고갤 끄덕이고 방을 나섰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솔로몬은 평상복을 벗어 두고, 수수하지만 자연스러운 장식을 금실로 수놓은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외출복의 넓은 소매를 한번 접어 단추로 고정시키고 잠시 벗어두었던 5쌍의 반지 역시 다시 손가락에 끼운 뒤, 솔로몬은 홀로 나갔다. 홀에는 플라우로스가 간식거리가 담긴 바구니 하나를 들고 기다리고 있다.
어쩌지,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어. 아우로라는 붉게 물든 제 볼이 홧홧하다는 걸 느끼곤 고개를 픽 숙였다. 보닛 속의 풍성한 프릴이 물결처럼 찰랑였다. 그러다가도 아우로라는 솔로몬의 말에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올린다.
그의 말이 맞다. 여기는 사교계도 아니고, 연회장도 아니다. 영애들이 수근거리는 티타임도 아니고, 황태자가 있는 궁도 아니고, 어머니가 레이디잖니. 라고 점잖게 핀잔을 주는 연회장도 아니다. 아우로라가 잠시 입을 오물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ㄱ, 감사합니다."
솔로몬이 나가고나서, 아우로라는 잠시 의자에 폴싹 앉고 여러가지를 고민하더니 이내 전신거울로 몸단장을 다시금 체크하곤 방을 나섰다. 홀로 나설때는 언제 나서도 넓은 장소였다. 아우로라가 홀에 도착했을 즈음. 플라우로스가 간식거리를 담은 바구니를 들고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그녀는 밝게 웃으며 그에게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홀에 도착한 솔로몬은 플라우로스에게 다가가는 아우로라를 보며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었다. 플라우로스는 자신에게 다가오며 인사하는 아우로라에게 웃어보이며 " 반갑습니다, 아가씨. " 하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리곤 아우로라의 뒤로 보이는 솔로몬을 보며 깍듯하게 인사한 뒤에, 바구니 안에 들어있는 것을 이야기해 준다.
" 요깃거리를 할 수 있도록 샌드위치를 메인으로 넣어두었습니다, 그리고 달콤한 과자도 넣어두었으니 여기, 이 병에 담긴 음료와 곁들여 드시면 좋을 거라고 주방장이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
솔로몬은 고갤 끄덕이고는 플라우로스의 손에서 바구니를 넘겨받았다, 바구니 크기가 작지는 않았지만 솔로몬이 드니 어째 작아보인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사용인들이 딱히 따라나가지는 않는 모양, 솔로몬은 바구니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다가 플라우로스에게 이야기했다.
" 쌍둥이가 외출을 돕느라 고생했으니, 간만에 바깥 구경 정도는 괜찮겠지, 데리고 나갔다 오거라, 바깥에서 마주치더라도 굳이 우리의 시중을 들 필요는 없다, 햇빛을 보면서 쉬도록. " " 감사합니다, 공작님. 그럼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아가씨 역시 즐거운 외출 되시길 바랍니다. "
플라우로스는 고개 숙여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고, 솔로몬은 아우로라가 따라올 수 있도록 천천히 걸어나간다.
아우로라는 생글생글 웃으며 날씨가 참 좋죠? 라고 간단한 안부를 물었다. 그리곤 솔로몬이 뒤에 있었는지, 깍듯하게 인사하는 모습에 뒤로 빙글 돌아보였지. 바구니 안에 무엇이 있을까? 아,아우로라가 눈을 깜빡였다. 간단한 샌드위치, 음료, 과자. 나들이를 간다면 가장 좋은 조합이었다.
아우로라가 잠시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다. ..바구니가 원래 작았나? 아닌가? 공작님이 크셔서 작아보이는걸까? 아우로라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도, 플라우로스를 비롯한 사용인들이 따라나가지 않음에 눈꼬리를 축 휘었다. 다들 공작저에 있는걸까? 오, 그건 아닌가보다. 이어지는 솔로몬의 말에 아우로라가 환히 웃었다.
"다녀올게요, 집사님. 집사님도 조심히 다녀오셔야해요."
아우로라가 솔로몬을 뽀르르 따라갔다. 살랑이는 드레스 때문에 거리가 가늠이 안 되니까 보폭을 조금 더 넓혀야 했지만, 아무렴 어떠한가. 아우로라가 양산을 펼 준비를 하며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공작님, 어디로 가는건가요?"
아우로라의 두 눈이 반짝였다. 바깥이 그렇게도 좋은걸지도 모르겠다. 스노우디아 영지는...일단 추웠으니까.
아우로라는 솔로몬을 열심히 따라갔다. 출구로 향하는 긴 복도의 끝, 그 사이로 보이는 거대한 문. 문득 며칠 전 공작저에 처음 왔던 날이 떠올랐다. 그땐 마냥 무섭기만 했는데, 지금은 한결 편안하더라지. 다음에 보낼 편지에 꼭, 공작저는 좋은 곳이에요. 라고 써서 보내야지. 그런 생각을 하던 아우로라가 공작의 대답에 눈을 깜빡였다. 여기 기후는 온화하구나.
숲과 초원, 원한다면 바위투성이인 곳. 아우로라는 작게 웃었다. 전부 좋았다. 눈, 눈, 그리고 새하얀 눈이 가득한 스노우디아보다 훨씬 선택폭이 넓구나.
아, 마을? 아우로라가 무언가를 떠올리듯 눈을 크게 두어번 깜빡인다. 아! 그때 기사님이 공작저로 자신을 호위해주면서 언뜻 보았던 마을을 말하는 걸까? 아우로라는 문이 열리는 모습에 마법일까? 하고 작은 의문을 품더니 이내 고민한다. 고민은 짧았다.
"음...마을이요. 마을에 가보고 싶어요."
공작님께서 미소를 지어보일 정도였으니까. 아우로라는 해사히 웃으며 양산을 폈다. 하늘하늘한 곤색 프릴이 달린 분홍색 양산은 드레스와 색을 맞춘 듯 싶었다. 문이 전부 열렸을 즈음 쏟아지는 따뜻한 햇빛과 산들바람이 기분이 좋았다.
마을에 가보고 싶다는 소녀의 목소리. 공작은 소녀의 목소리를 듣고 두 사람의 발로 밟아나가는 오솔길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요구한 것도 아니고, 유도한 것도 아님에도, 자신을 따라 온 이들이 만든 마을. 본디 공작 자신에게 영지라는 것은 없었고, 오직 저 동굴과도 같은 성 만이 제 소유였기에 공작에겐 그들을 보호하거나 위할 의무가 없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한 불만도 품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은 공작이 자신들을 쫓아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태어난 고향조차 버리고 떠나 온 그들에게 기댈 수 있는 존재는 자신들의 고향에서 경외의 대상이었던 그 용 뿐이었으니.
사실 이미 용과 함께 이 곳으로 온 이들 중 살아남은 이는 거의 없다, 수명이 다했기 때문이겠지, 몇몇 수명이 긴 이들은 살아있지만, 분명히 그 숫자는 한 손에 꼽았다. 그리고 현재는 그들의 자녀의 자녀, 그들의 자손들이 마을을 이뤄 복작복작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어쩌면...
그들에게 고향이라는 것은 장소가 아닌, 용이 있는 곳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솔로몬은 말없이 두세 갈래로 나눠진 오솔길 중, 오른쪽으로 향하는 오솔길을 밟아 나갔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저만치에 작은 집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이고, 자신들의 일,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치는 어른들과 그 어른들을 돕는 아이들, 여럿이서 뛰어다니며 노는 듯한 보다 어린 아이들이 보인다.
오솔길을 내려다보는 공작의 시선에 아우로라가 잠시 시선을 따라 고개를 숙인다. 공작의 마을에 대한 것은 잘 모른다. 아버지도 알려주지 않았고, 사실 아버지도 모르는 것 같았으니까. 아우로라는 스노우디아 영지를 떠올린다. 겨울마다 수도에 있는 저택에서 스노우디아 영지로 돌아갔지. 이런 오솔길에 살얼음이 끼어있어선, 걸을때마다 위태롭게 살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나곤 했는데.
뭐, 그나마 여름이 되면 스노우디아 또한 따뜻하고 여러 꽃이 피어나지만 그나마도 오랜시간 얼어있어 녹지 못하는 수정 얼음이 반짝이기 때문에 한 달만 지나면 다시 꽃이 새하얗게 얼어버릴 뿐이다. 오죽 냉기가 강하면 그 주변의 눈은 녹지를 않을까. 녹색과 섞인 파랗고 하얀 색은 그렇게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었다.
그에 반해 공작님이 계신 곳은 이렇구나. 다른 영애들을 만나기 위해 다른 영지에 갔지만 이렇게 평화로운 곳은 또 없었다. 자연 그대로 있는 공작저는 그녀에게 있어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곳으로 인식되었나보다. 아우로라는 막대를 손가락 두개로 살짝 비비듯이 돌렸다. 양산이 빙그르 돌다 멈춘다.
오솔길의 갈림길에 아우로라가 고개를 기울인다. 저기로 가면 무엇이 나올까. 숲이 나올까? 다음엔 저쪽으로 가보자고 할까? 아, 이렇게 잡념만 계속 하다간 공작님을 놓칠지도 모른다. 아우로라가 솔로몬을 열심히 쫓았다.
"와..!"
마을이다! 아우로라의 눈이 양산의 그림자에 가려져도 반짝거렸다. 평화로운 마을의 분위기는 수도나 스노우디아에서 감히 보기는 어려운 것이라 그랬을까. 아우로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멀리서 바라보다 솔로몬의 당부에 눈을 깜빡였다.
"소란스럽다뇨?"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공작님의 당부니까. 아우로라는 발걸음을 재촉해 공작의 옆에 서선 보폭을 맞췄다. 이렇게 평화로운 마을에서 소란이라니. 혹시 마물이 나타나거나 그런 걸까? 음, 그럴 일은 없을테고. 아우로라가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그 말이 끝나자 이제 슬슬 마을 사람들의 시선에도 두 사람의 모습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러자 일을 하던 사람들이 일을 멈추고 두 사람을 가만히 보았고, 그런 어른들의 시선에 무언가를 느낀 듯이 아이들이 모여들었고, 아이들 역시 두 사람을 발견한 듯 했다. 어른들과는 다르게 아이들은 두 사람에게 호기심을 보이며 모여들었고, 어느 새 두 사람 주변에는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 물론 제국 수도나 다른 북적북적한 곳과 비교하기엔 적은 숫자이긴 했지만, 오솔길은 그리 넓지 않았기에 움직이는 데에 어려움이 생겼다.
" 나올 때마다 이러니, 더군다나 오늘은 아우로라 양까지 있어서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갖는 듯하오. "
자세히 보니,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종족이다, 인간과 비슷한 생김새를 하기는 했지만 엄연히 그들에게는 인간과 다른 것이 존재했으니, 바로 그 종족의 몇 가지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귀와 다른 그 귀부터, 꼬리, 몇몇은 날개, 그리고 특이한 손의 모양 등. 어찌 되었든 두 사람의 주변으로 사람이 많이 몰렸기에, 두 사람이 떨어질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두 사람만큼 튀는 복장을 한 사람이 없으니 찾기야 쉽겠지만, 아무래도 솔로몬은 그러기 싫은 모양이었다.
아우로라의 어깨에 손이 닿으며, 솔로몬은 그녀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자칫하면 드레스 자락이 밟히겠지만 어쩔 수 없지. 두 사람의 주위를 둘러싼 이들은 솔로몬과 아우로라에 대해 관심을 보이머 떠들었다, 예쁘다라는 말부터 공작님을 본 건 오랜만이다, 저 아가씨는 누구실까? 등등.
" 물러서거라, 매번 이러는 것이 지겹지도 않느냐. "
솔로몬의 목소리가 퍼지고, 사람들은 시간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길을 비켜주었다.
" 내가 오든 말든 신경 쓰지 말고 제 할 일을 하란 말이다, 괜히 시간을 내게 할애해 봤자 돌아오는 것은 없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느냐? "
그렇게 말하면서 사람들을 꾸짖지만 사람들은 별로 아랑곳하지 않았고, 몇몇 아이들은 아직도 둘 주변에서 두 사람을 구경하고 있었다.
" 그치만 공작님 최근엔 안 오셨잖아요! " " 맞습니다, 물론 공작님께 무슨 일이 생길 리는 없지만, 계속 보이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됩니다! "
어쩌면 투정에 가까운 말들이 들려오고, 솔로몬은 짜증이 나는 듯이 손사레쳤다. 그런 그의 홀대에도 사람들의 반응은 적대적이거나 사그라들지는 않았으나, 아우로라를 배려함인지 어찌 되었든 길은 열렸다. 그제야 솔로몬은 아우로라의 어깨를 감싼 채 앞으로 나아갔다, 뒤에 아이들이 따라오기는 했지만.
곧 알게 된다라. 아우로라는 고개를 돌려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슬슬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돌아가고, 아우로라는 사람들이 이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자 타파이트빛 눈을 깜빡였다. 이이들은 호기심을 보였는지 어느새 옹기종기 모여있었고, 아우로라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아, 대다수 이종족이구나. 날개가 달려있거나, 귀와 꼬리가 있거나, 손이 특이한 사람도 있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이종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암암리에 있었기에 수도에서 그렇게 만날 기회는 없었고, 이렇게 많은 종족은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아우로라는 잠시 생각의 줄을 놓아버린 듯 싶었다. 전부 배워보고싶어! 같은 마법사 핏줄 특유의 호기심도 있었지만 점점 늘어나는 인파에 혼란을 겪는 것도 있었으니.
"그래도 다들 공작님을 반겨주는 눈치인걸요."
아우로라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웃다가도, 솔로몬이 자신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 쪽으로 끌어당기는 행동에 눈을 크게 깜빡였다. 사람이 많기 때문에 배려해준 것일까? 이런 건 처음 겪어보는데. 아우로라가 한참동안 당황한 듯 싶다가도 고개를 픽 숙이며 양산의 대를 만지작거렸다. 그것보다 공작님은 이 상황이 익숙하시구나. 심지어 매번 이러는 걸까? 아우로라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주변에서 구경을 하고 있고, 사람들은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하려 반박을 하는 것이 익숙해보였다. 그 모습이 어쩐지 친근한 사이처럼 보여 아우로라는 빙그레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신을 배려했는지 길이 트였고, 아우로라는 솔로몬과 보폭을 맞추듯 그를 따라나섰다.
" 그것도 한 두번이지, 나올 때마다 이러면 잠시 나왔을 뿐인데도 시간을 지체한단 말이오. "
그는 그렇게 부정적으로 이야기를 했으나. 아우로라는 알 수 있었으리라, 공작을 환영하는 이들의 환영 자체는 싫다고 하지 않았고, 다른 이유를 대며 상황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있었으니. 어쨌든 공작은 저들을 싫어하거나 쫓아내고 싶어하지는 았았다. 물론 아예 그런 게 없었던 건 아니다, 기분이 나쁜 날에는 굉장히 짜증나고 귀찮은, 정말로 다 쫓아내버릴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생각은 버렸지만.
" 아우로라 양 덕분에 오늘은 길이 빨리 열렸군, 최소한의 예의는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
솔로몬은 혀를 차며 걷다가, 자신이 아우로라의 어개를 잡고 있으므로, 보폭이 크면 그녀가 같이 걷기 힘들 것임을 고려해 보폭을 줄였다. 여전히 둘을 보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솔로몬의 말 때문이었을까, 꽤 많은 사람들이 돌아갔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솔로몬을 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귀족들이 차리는 예의가 아닌, 그들만의 친근한 예의로 인사를 건네며 지나가거나, 일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둘의 뒤를 따르는 몇몇 아이들은 어린 아이들답게 조그맣고 귀여웠다, 그 중에서 조금 큰 여자아이 한 명이 있기는 했지만 아우로라보다는 조그마했고, 어쩌면 아이니보다도 작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주변의 시선이나 아이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걸어가는 솔로몬은 아우로라가 미소지으면서 하는 말에 고갤 저었다.
" 그럴지도 모르지만,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소, 난 그들의 주인도, 보호자도 아니거니와 그들에게 해준 게 없소. "
그럼에도 주민들은 솔로몬을 꽤나 반겼고, 그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건넸다. 분명히 사교계에서나, 외부에서 공작은 불같은 성격에, 상대를 도발하며, 도발에 넘어오면 철저하게 반격해 짓밟는 이라고 했건만. 그런 모습을 안다면 아무도 공작에게는 무례하게 대할 리 없었다. 어쩌면 이 사람들은 외부에 대한 것을 모르고 지내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의문이 생길지도 모를 즈음에, 솔로몬은 너른 들판에 거대한 나무 하나가 서 있는 곳을 찾아냈다. 나무 밑동 부분에는 바윗덩이가 두 개 정도 있었고, 자연스럽게 나무 아래는 그늘이 져 꽤나 시원해 보였다, 아우로라가 시원한 걸 좋아할 지는 모르겠지만.
나왔을 뿐인데도 시간을 지체한다니. 아우로라는 그 부정적인 이야기에서 공작이 주민들 자체가 싫다는 티를 내지 않았음을 눈치채곤 작게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런 인간적인 면모가 있었는데도 왜 사교계에선 그를 두려워 했을까?
"이렇게 배려를 해주시니 다들 좋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적어도, 스노우디아와 수도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스노우디아는 추위에 지친 주민들이 후작이 마을에 행차를 했다 해도 아예 나타나지 않았고, 나타난다 하더라도 이리 옹기종기 모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도는..글쎄. 지나치게 굽신댔지. 의도를 모를래야 모를 수 없을 정도로.
아우로라는 솔로몬이 보폭을 줄이자 입꼬리를 휙 끌어올리며 바닥을 바라본다. 보폭이 비슷해졌다. 이제 다리를 쭉쭉 늘리지 않아도 괜찮겠지? 아우로라는 다시금 주변을 돌아보았다. 몇 주민들은 여전히 둘을 바라보았고, 친근한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살짝 뒤를 돌자 조그맣고 귀여운 아이들이 보였다. 작고 귀여운 아이들. 아우로라가 픽 웃다가도, 조금 큰 여자아이 한 명을 보곤 빈 손을 들어 가볍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고 하셔도..으음, 여기 있게 해주셔서 그런 걸지도 몰라요. 아니면 공작님이라서 좋은 게 아닐까요?"
그러면서도 아우로라는 작은 의문을 품었던 것이다. 수도에서는 공작의 이름의 일부만 언급해도 몸서리를 치는데, 이 마을은 어째 그런 기색도 없어보였다. 심지어 자신도 모르지 않던가. 음, 사교계에서만 이름이 들렸으니 모를수도 있겠지만..모르겠다. 아우로라는 너른 들판을 바라보았다. 시원한 그늘, 나무. 세상에! 아우로라가 눈을 크게 깜빡였다. 그러니까, 음. 책의 삽화로만 보있던 비밀스러운 장소 같았다.
"좋아요! 저렇게 커다란 나무가 있는지는 몰랐어요.."
그만 떠올리고 비교하자. 스노우디아의 그 거대한 얼음 나무는 도저히 쉴 곳이라고 할 수가 없었으니까. 얼어죽을 각오를 할 곳이라면 몰라도.
" 나쁜 이들은 아니지, 적어도 내가 아는 이들 중에선 1,2위를 다툴 정도로 순박한 이들이오. "
대부분 이 마을 바깥으로 나가질 않으니까. 가끔가다 공작저에서 나오는 상단이 지나갈 때 필요한 물건을 얻는 정도일 뿐, 그들이 직접 바깥으로 나가 우언가를 사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가는 아이들 중, 조금 큰 여자아이는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아우로라를 보자 눈을 깜빡이면서 웃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우로라의 말에 솔로몬은 별로 감흥이 없는 듯 이야기했다.
" 애초에 주인 없는 땅이오, 누가 오고 가는지는 상관없지. "
그러나 뒤에 오는 이야기에는 흐음, 하고 숨을 내뱉으면서 곰곰히 생각하더니 말을 이어간다.
" 나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건 생각해보지 않았소, 그러나 단순히 나라고 해서 좋아한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소? "
첫인상이 좋은 편도 아니다, 더군다나 매번 호되게 대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을 꽤나 좋아했다. 솔로몬은 곰곰히 생각하면서 자신이 이야기한 장소에 대해 아우로라가 좋다고 이야기하자 나무 밑으로 걸어가 아우로라의 어께에서 손을 떼고, 바구니에 담긴 넓은 천을 꺼내 바위 위에 펼쳤다.
" 이 위에 앉아도 좋을 것이고, 아니면 바닥에 깔아도 좋소, 그게 아니면 풀 위에 앉겠소? "
적어도 자신이 아는 이들 중에선 1,2위를 다툴 정도로 순박한 이들. 아우로라는 그렇구나...하고 작게 중얼거리곤 배시시 웃었다. 평화로운 마을에서 살아가는 순박한 이종족들. 이상적인 조합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자신이 손을 흔들자 눈을 깜빡이며 웃는 아이를 부드러운 눈길로 쳐다보던 아우로라가 솔로몬을 바라보았다.
주인 없는 땅? 생각해보니 공작령이 없다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어디서 들었더라. 아버지였나? 아우로라는 양산을 살짝 돌린다. 빙그르, 하고 돌아간 양산의 프릴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솔로몬이기에 좋아하는 주민. 자신이 말을 내뱉어놓고 어딘가 모순이 있는 것 같다 생각했지만..뭐.
"사람 마음은 신이라 해도 모른다잖아요. 정말 그 이유일지도 모르는걸요?"
아우로라는 눈꼬리를 축 내리며 푸스스 웃었다.그리고 그가 넓은 천을 꺼내 바위 위에 펼치는 모습에 양산이 혹여 뒤집어질까 조심조심,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종종 걸어갔다. 바위, 혹은 바닥, 아니면 풀. 아우로라는 그가 이미 펼쳐둔 천을 거절하는 것은 또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는지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거기도 시원해서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뒤로 돌아 경치를 구경하듯 고개를 살짝 이곳저곳 살펴보았다. 정말, 정말 좋은 곳이구나! 아우로라는 속으로 생각하며 활짝 웃었다. 편지에 꼭 이 내용을 써야겠다. 공작저는 정말 멋진 곳이에요! 사람들도 모두 친절하고, 평화로워요! 라고.
사람의 마음은 신이라 해도 모른다, 정말 그러한가? 솔로몬은 아우로라의 말이 이렇다 할 대꾸 없이, 바위에 덮은 천 위에 앉은 아우로라의 곁에 바구니를 두었고, 그 바구니의 옆에 자신 역시 앉았다. 바위 위는 그늘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꽤 서늘한 기운이 올라온다.
그는 아우로라가 고개를 살짝씩 돌리면서 주변을 살피는 것을 보았다. 그녀를 따라 그 역시 조금씩 시선을 돌리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 둘을 그늘로 덮고 있는 큰 나무 외에는 주변에 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저만치에 숲이 따로 보이기는 했지만. 이 나무 하나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나무가 일반적인 나무랑 다르게 줄기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줄기가 모여 만들어진 듯했고, 이파리 모양 역시 여러 가지였다.
아우로라는 아이처럼 맑게 웃었다. 신은 마음을 모르지. 어떻게 아냐고 묻는다면야, 사람들의 마음을 안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듣는 것에 지쳐버렸을테니까! 겠다. 그래, 아우로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꽤나 괴악한 논리였다.
천 위에 앉아도 바위 위는 서늘하다. 차가운 기운이 천을 넘어서, 옷까지 스며들고, 피부에 스며들어 닿은 부분의 체온을 낮춘다. 그래도 춥다고 생각이 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아우로라는 무의식적으로 제 허벅지 위에 손을 얹거나 그런 행동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주변에 나무는 없었다. 숲은 저만치 있었고, 저기를 보면 아까 지나온 길이 보이고. 아우로라는 고개를 들어 나무를 바라본다. 일반적인 나무는 아니라는 것을 금방 눈치챘는지 아우로라의 눈이 동그래진다. 이파리 모양은 여러가지고, 여러 줄기가 모여있는 나무. 세계수가 어떻게 생겼다고 했더라. 어째 신비로운 느낌이 범상치는 않다 생각하던 찰나, 아우로라는 동그래진 눈 그대로 솔로몬을 쳐다보더니 눈을 깜빡였다.
"처음 왔을 때요??"
세상에. 나무가 이렇게나 큰데! 이렇게 큰 나무는 몇 년이 지나야.....아우로라가 기함한다. 그렇다면, 공작님께서 용인이신게 맞다면 수명이 어마어마 하시구나. 아우로라의 눈이 데구르 굴러가 나무를 다시금 쳐다보고, 다시 솔로몬을 번갈아 쳐다본다. 어지간히 놀랐나보지?
용인이시라면 당연히 수명이 길겠지만, 이렇게 어마어마한 수명을..아우로라는 겨우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돌렸다. 역시 나무였다. 나무가 큰데...몇 년동안 자란걸까. ...10년? 아냐, 10년은 아니다. 100년? 200년..? 아우로라는 눈이 핑핑 도는 느낌이 들었다. 솔로몬의 대답 때문이었으리라.
"아, 음, 아아...ㄴ..네.."
세는 것을 그만두는 정도라니..아우로라가 입술을 꼭 다물고는 용인에 대한 자료를 찾아봐야겠다 생각했다. 뭔가, 신기한 사실들이 많지 않을까. 핫, 그것보다..공작님께선 대전쟁의 이야기를 겪으셨을까? 나중에 그것도 물어보고...또..옛날 이야기도 많이 해달라고 하면..... 무리겠지..
"ㄴ, 늙은이 취급이라뇨! 그럴리가요! 만약 그런 생각이 들어도 공작님을 젊다고 생각하도록 노력할게요!! 그..그리고..."
나이에 대한 애매한 대답을 듣고 나서 아우로라가 보여주는 모습은 썩 재미있었다. 말을 더듬으면서 일단 알겠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아우로라를 보던 솔로몬은, 이번엔 늙은이 취급은 하지 말아달라고 장난식으로 한 말에 대해서 아우로라가 당황한 듯이 그럴 일 없다고 이야기하는..
? 만약 그런 생각이 들어도 젊다고 생각하다고 노력한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뭐 어쩔 수 없겠지, 그도 그럴 것이 공작과 아우로라가 살아온 세월의 차이는 상상 이상이었으니까. 꽤나 재미있게 아우로라의 말과 행동을 보던 공작에게 아우로라는 뭔가 어색햇는지 공작에 대한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
친절하고, 황실을 위해 일하는 것도 부지런하고..
" 썩 듣기 좋군, 진심일지, 아니면 당황스러움에서 나오는 이야기일지는 모르겠지만 고맙소. "
고개를 숙인 아우로라의 붉어진 귀를 본 솔로몬은 꽤 수줍음을 많이 타는구나 생각하면서 손가락을 비비다가 바구니 안에 있는 간식거리를 꺼냈다.
아우로라는 충격에서 쉽게 헤어나오지 못했다. 젊다고 생각하도록 노력해야지. 공작님은 젊은 분이시다, 저 나무는 사실 성장속도가 굉장히 빠른 것이다, 공작님은...아우로라가 양산의 프릴을 다시금 꼬집었다. 무의미한 합리화임을 깨달은 듯 싶었다.
푹 숙인 고개는 다시금 아우로라에게 고뇌를 안겨주었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한거지?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게 본심을 내뱉은 것 같았다. 적어도 지금 자신이 보는 공작은 그랬으니까. 친절했고, 황실을 위해 일하고..또..그러니까..알게 모르게 배려도 해주시고, 등등등. 아우로라가 손가락을 꼼질댔다.
세상에. 듣기 좋다니! 아우로라의 두 눈이 핑핑 도는 것 같았다. 이럴땐 어떻게 해야하지. 진심이에요! 라고 성급히 열리려던 입을 아우로라가 합, 하고 다물었다. 더 어색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니까.
아우로라는 샌드위치를 두 손으로 받아들고 샌드위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신선한 야채, 얇은 햄과 치즈 한 장, 간단하지만 딱 알맞은 재료에 아우로라가 입꼬리를 빙긋 올렸다. 이렇게 시원한 바위에 앉아 푸르른 하늘과 나무를 보며 먹기 딱 좋은 것이었다.
"..나갈때마다 항상 세 명 이상이 졸졸 따라다녔으니까요."
이렇게 나가게 해준 것도 감사했지.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달콤했는지! 귀족 영애라도 혼자 나갈 수 있는 법인데, 아우로라는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호위하는 기사, 뒤에 숨어 아우로라를 그림자에서 숨어 지키는 기사, 아우로라를 보필하는 전속 시녀와...오, 복잡했지. 도미닉이 딸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아우로라가 생각을 끊기 위해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물었다.
앗, 맛있다. 아우로라가 작게 발을 굴렀다. 일반적이고 간단한 샌드위치라도 아우로라에게 있어선 꽤 신선하게 다가온 듯 싶었다. 이렇게 사용인 없이 밖에서 먹어본 기억이 없어서 그런가? 아우로라가 열심히 입을 오물거리다 솔로몬을 바라보고 눈을 깜빡, 하고 감았다 떴다.
"맞아요, 아무도 이런 건 생각하지 못하겠죠.."
아우로라가 샌드위치를 삼키고 그의 말에 동의한다. 공작님이 무려 샌드위치를, 그것도 사용인도 없이 외출해서 먹는다니. 아우로라가 샌드위치를 내려다본다. 나중에 꼭 같이 만들자고 주방장에게 부탁해봐야지.
"사람들은 보고 싶은대로 보니까요. 공작님이 말씀하셨듯 공작님도, 그리고 저도 이렇게 나란히 샌드위치를 먹는 건 절대 상상하지 못할 거예요."
예상했던 대로 아우로라가 외출할 때엔 최소 3명 이상이 따라나섰다는 이야기를 듣고, 꽤 답답했겠거니 생각했다. 그렇지만 후작이 딸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를 생각해 보면 무리도 아닐 테고, 거기다가 홀로 외출했다가 누구를 만날 지도 모르는 일이라 생각해보자면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뭐 솔로몬 본인은 누군가에게 위협을 당할 만한 존재 자체가 아니었고, 누군가가 따라붙는 것 자체를 싫어했기 때문에 홀로 나오는 일이 잦았지만.
" 쉬러 나오는 것임에도 신경 쓸 게 많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지. "
아우로라의 말에 동의하듯 이야기하며, 그녀가 샌드위치를 먹고 난 뒤에 발을 작게 굴리는 것을 보았다. 맛이 꽤 괜찮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솔로몬은 제 몫의 샌드위치를 또 베어물었다, 채소가 싱싱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조용히 식사를 하려니, 현재 상황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에 대해서 동의하는 아우로라의 말에 어깨를 으쓱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우로라의 이야기는. 사람들은 보고 싶은대로 본다, 라는 이야기였다, 그런가. 그러한가, 이런 일에 심각해질 마음은 없었지만 그 이야기를 듣자니 드는 생각에 솔로몬은 흐음, 하고 소리를 냈다.
그럼 날 격퇴하려던 이들에겐 내가 괴물로 보였던 거겠고. 날 적대하는 이들에게는 꽤 끔찍하게 여겨지겠군.
" 아우로라 양 역시 사람이지 않소, 아우로라 양이 보기에 나는 꽤 괜찮은 이인 모양인데. "
" 무어라 딱 잘라 답하기 어렵군, 사람은 보고 싶은 대로 본다는 것은 아우로라 양의 지론이지, 내 지론이 아니니 말이오. "
말은 그렇게 하긴 했지만. 사실 단순히 부정적인 대답은 아니었다, 아우로라가 이야기한 '사람들'과 아우로라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지, 일단은. 솔로몬은 자신을 보면서 배시시 웃는 아우로라를 보았다, 공작저에 온 지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고, 솔로몬 자신과는 마주치거나 이야기를 나눈 횟수가 손에 꼽는데도 저렇게 웃으면서 대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조금이지만 흥미가 동한 솔로몬은, 고민하는 듯 눈을 깜빡이는 아우로라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여전히 조그마한 꽃송이 같은 느낌의 소녀를 보던 솔로몬은 남은 샌드위치 조각을 입 안에 털어 넣고 씹어 삼킨 다음, 아우로라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 상대방을 나쁘게 보지 않는 것은 안 좋은 태도는 아니오, 그러나 잘 모르는 상대에게 너무 긍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좋지 않지, 아우로라 양, 그대는 내가 후작저의 평화를 고의적으로 깨트린 것에 대해서 나쁜 감정은 없는 것이오? "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솔로몬은 병의 뚜껑을 열고 시원한 음료를 잔에 채웠다. 먼저 아우로라 몫의 잔을 채운 뒤, 자신 몫의 잔을 채워 마시며 아우로라에게 잔을 건넨다.
그리고 자신이 웃으며 한 말에 딱 잘라 답하긴 어렵다는 대답이 들려온. 아우로라는 샌드위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하긴, 이건 내 의견이었다. 그렇지만 부정적인 대답은 아닌 것 같고...음, 아닌가? 아우로라는 공작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대화도 많이 해본 적은 없지만.
일단 그녀가 생각하는 공작은 소문만큼 무섭지 않았다. 그런 것 같지 않은 것 같지만 친절하고, 사용인들에게 자애롭기도 하고, 또...자유로웠지.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진 몰라도.
"나쁜 감정이요..?"
아우로라는 솔로몬의 이야기에 무어라 답해야할까, 생각하며 샌드위치를 다시금 베어물었다. 먹이를 주면 곧이 곧대로 먹는 토끼마냥 열심히 샌드위치를 먹었기 때문일까, 샌드위치는 어느덧 두 입 정도를 남겨두고 있었다. 아니, 이제 한 입. 아우로라가 샌드위치를 삼켰다. 생각을 정리한 것 같았다.
"아버지가 옳지 않은 일로 이득을 취하셨으니, 언젠가는 터질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제 동생은 모르겠지만, 저는 나쁜 감정은 없답니다."
아우로라가 솔로몬이 건네는 잔을 얼떨결에 받아들더니 멋쩍기라도 한지 히, 하고 작은 바람빠지는 웃음을 냈다.
나쁜 감정은 없냐는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조금 특이했다. 저게 일반적인 사람이 할 수 있는 생각일까? 평화롭고 유복한 가정이 한 순간에 혼돈에 빠지면서, 적대적인 가문에 볼모로 온 이가 할 수 있는 이야기일까. 의문을 가지기에는 네 곁에 앉은 소녀가 그리 이야기하고 있었다, 과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솔로몬은 굉장히 차분하게 이야기를 끝내는 아우로라를 보면서 혹시 무언가 결여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차분한 이유는 무엇이지. 난 불청객일 텐데, 물론 지금까지 괄시하거나 한 일은 없었지만은.
" 언젠가는 터질 일이라, 그렇다면 나로 인해서가 아닌, 다른 이로 인해 문제가 생겼더라면 지금보다 상황이 나을 수도 있었을 텐데, 같은 생각도 들지 않소? "
조금 캐묻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소녀는 조금, 네가 봐 왔던 다른 사람들과 달랐으니까. 그래서 조금은, 이 소녀에게 너는 어떤 느낌을 주는 존재일지 궁금해진 모양이었지.
처음엔 많이 무서웠다. 가문이 무너질 수도 있었고, 아버지가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까지 접하니 가문은 수치심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상황에서도 아우로라는 차분했다. 아버지가 잘못을 했다는 사실을 접했고, 그 다음엔 언젠가 터질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잘못을 알아채지 못한 자신의 잘못도 있다고 생각하였으며...아우로라가 빙그레 웃었다. 다른 이로 인하여, 라.
"만일 공작님이 아니라 황제 폐하로 인해 이런 일이 생겼더라면 이야기는 달라졌겠지요."
다른 가문에게 들켰더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짓눌러서 상황이 나아졌겠다만, 그건 또 아우로라를 슬프게 했을 일이겠지. 아우로라는 황실을 생각한다. 폐하의 귀에 들어갔던 일이라면.....아우로라는 좋지 못했던 짝을 생각했다. 줏대없고, 그러면서도 허영심과 야망만 가득한...
아우로라가 마지막 샌드위치 조각을 여유롭게 입 속에 넣고 씹어 삼켰다.
"그리고, 공작님께선 저를 손님으로 대해주시잖아요. 인질이 아니라요."
아우로라가 주스를 한 모금 마시며 빙그레 웃었다. 그게 공작님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예요. 라면서.
솔로몬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인해 이러한 일이 생겼다면 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에. 아우로라는 솔로몬이 아닌 황제로 인해 이러한 일이 생겼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분명히, 그가 아닌 황제가 이 일을 알아채고 후작저에 보복이나 벌을 내렸다면, 지금보다 상황이 나빠지면 나빠졌을지언정 나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 소녀는 공작이 후작저를 그 일 이외의 것으로는 딱히 짓누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이 소녀, 후작저의 영애를 제 손아귀에 두는 것만으로 후작저를 통제하는 것이 한결 편안하고 쉬워지기는 했지만.
솔로몬은 아우로라의 얼굴을 보면서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조금 궁금해졌다. 마침 덧붙여진 아우로라의 이야기는 더 이상 후작저와 공작저의 불화가 어떠한 흥미나 화젯거리로 작용하기 어려우리라는 감상을 안겨주었다.
신기하게도, 이 소녀는 공작이 그녀의 평화에 큰 위협을 가했음에도, 직접 만나 본 공작이 자신에게 예의를 갖춘다는 것만으로 그를 나쁘게 보지 않고 있었다. 선입견이라는 것은 좋지 않으나 그렇다고 과감히 버리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닐 텐데.
" 아우로라 양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후작저에 압박을 주지 못할 뿐만아니라 오히려 내가 압박을 받게 될 수도 있소, 굳이 홀대할 이유를 찾지 못한 것도 있지만, 손님으로 대하는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다오. "
날 나쁘지 않게 보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인지 모르겠군.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솔로몬은 제 몫의 주스를 마셨다.
귀족파는 황제에게 있어서 손톱 주변의 거스러미와도 같은 존재일 것이다. 잘못 떼어내면 피가 날지도 모르고, 그렇다고 해서 마냥 깔끔히 떼어내도 다시 생기기 마련인. 그런데 황제가 이번 사건을 볼모로 잡아 그런 거스러미를 완전히 치워버릴 가능성은..있고도 충분히 남았지.
뭐, 그런 의미로 공작은 여러번 반복해서 말하지만 좋은 사람이다. 고작 자신 하나로 더 이상 상황이 나빠질 일은 없을테니까. 그렇지만 한가지 의문인 것이, 공작이 과연 언제까지 자신을 공작저에 두느냐. 였던 것이다. 아우로라가 이상한 상상을 이어갔다. 이대로 양녀로 들어가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부터. 공작님이 언젠가 정이 들어 자신이 결혼할 때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거나...
??
이게 대체 무슨 생각이람. 아우로라는 주스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시원하고 달콤하니, 이런 산들바람과 풀내음을 느끼며 마시면 더더욱 기분이 좋아지는 맛이었다. 아우로라가 아이처럼 빙그레 웃었다. 방금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싹 잊을 정도로.
"그렇군요..."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오히려 공작님께서 더 위험해지겠지. 아무리 황가의 성을 받은 공작이라도 엄연히 대귀족중 하나인 스노우디아 후작가의 영애를 데려와놓고, 그녀가 위험에 빠지도록 한다면... 이건 황제라도 어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뭐, 다른 것 보다. 손님으로 대하는 이유중 홀대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는 말이 아우로라를 안심시켰다. 아우로라가 다시금 주스를 홀짝였다. 탁 트인 눈 앞을 보면서.
만에 하나, 솔로몬 자신이 구석에 몰린다는 가능성에서도, 그 스스로는 사실 거리낄 것이 없었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위협 정도야 제 힘으로 충분히 뿌리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문제는 그가 단순히 '드래곤'인 솔로몬이 아니라, 제국의 대귀족 중 하나인 '공작'이라는 것이었지.
그가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공작인 그가 지내는 곳인 공작저에는 딸린 입이 있었다, 물론 그들은 공작에게 짐이 되고 싶어하지는 않을 테니 만일 문제가 생겨 공작이 그들로 인해 묶여야만 한다면. 아마 전부 흩어지거나 죽어 없어지는 선택을 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것은 전혀 공작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으니. 어찌 보면 이번 일은 일방적인 공작의 승리이면서도 동시에 불안요소를 떠안은 것이 되는 셈이었다. 그것만으로 아우로라를 판단할 만큼 속이 좁거나 한 이는 아니었으나 그녀가 있다는 것 만으로 신경써야 할 부분이 늘었으니.
조금은 불편하다. 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일단, 그는 귀족파가 눈엣가시이긴 해도 그들 역시 제국의 일부였기에 그들을 전부 뜯어낼 이유도 없었거니와, 위험부담이 너무나 컸다. 단순히 귀족들 뿐이라면 모르겠으나 그들에게 딸린 입들이 무슨 잘못이 있는가?
아니, 정정하겠다. 이미 물러질 대로 물러지기는 했지만 공작은 인간이 아니었으니, 그런 사소한 것들까지 신경썼을 리 없다. 그저 제가 하고 싶은 일들의 경중 정도만을 따져봤겠지.
아무튼, 솔로몬은 제 곁에 앉아 긍정적인 분위기를 주변에 흩뿌리는 소녀를 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새삼 다른 고민들이 떠오른다, 언제까지 그녀를 공작저에 머무르게 해야 할까. 가끔씩은 후작저로 돌려보내는 것이 후작가의 그리움을 자극하고,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을 늘릴 수 있을 테지만.
" 그렇다니 다행이로군, 가끔은 이런 것도 좋겠지. "
어느 새 비어버린 잔을 보며 솔로몬은 눈을 잠시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새삼 자신의 행동에 대해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매번 지나간 행동에 대해 짜증을 내기는 하지만. 겨우 소녀 한 명 때문에 신경을 쓸 게 마구 늘어나다니.
분명 다른 이들을 대하듯 거침없이 대하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아직까지도 그는 아우로라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에 대해 고민한다.
" 앞으로도 원하는 게 있다면 이야기하시오, 그대를 홀대하지는 않을 것이니. "
고민 끝에 일단 그녀에게 보다 적극적인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제 입으로 확신을 주는 것으로, 그녀의 방향성을 보기로 했다.
아우로라는 공작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없었다. 공작이 이종족임을 알고, 황제파의 가장 큰 기둥이며, 많은 공을 세웠음과 동시에 악명이 자자하기로 유명함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깊은 속사정까지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과 같은 간단한 것부터 시작해 그가 사용인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 그가 궁지에 몰릴때 어떤 선택을 하는지까지. 그러니까, 지극히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생활을 모른다는 뜻이겠고....아니, 일단 그걸 알면 아우로라가 여기 있을리가 없지만.
일단 아우로라는 제 몸을 지켜야 공작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보았다. 앞서 생각하였듯 그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도 없었을 뿐더러 황제파와 귀족파의 팽팽한 대립을 막아야 하는 것도 현재 그녀의 일중 하나였으니. 이미 자신이 공작저에 있다는 사실은 황제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고, 이 이슈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이다. 큰 축으로 나뉘는 황제파와 귀족파의 사람들이 아니라, 중립을 선언하는 평범한 귀족들에게. 누구나 입을 열고 수근거리며 각종 망상을 펼칠 가십거리가 되어 작은 소식이라도 큰 떡밥을 물어버린 물고기마냥 펄떡거릴 것이다. 글쎄, 공작저에 있는 아우로라 영애 이야기를 들으셨나요? 라면서.... 세상에, 그건 너무나도 끔찍하다.
그렇기에 아우로라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은 적었다. 후작저에 있었듯이 조용히, 얌전히. 흔히 말하는 레이디의 소양을 다하며 가끔가다 이런 외출을 즐기고. 다시 조용히 틀어박혀 사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시녀들의 이야기라도 들으면서 천천히 알아갈 수도 있을 것이고, 아우로라는 점점 더 안전한 방법을 선택하게 되겠지.
그렇지만 그게 아우로라가 원하는 삶일까? 아우로라가 주스를 다시금 마셨다. 잔이 점점 비어가건만 생각은 도통 비질 않는다. 이럴땐 딱 하나의 방법이 있었다.
"바람도 시원하고, 수도처럼 복잡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춥고 눈이 내리지도 않아서 정말 좋아요. 이런 곳에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공작님."
생각의 주제를 돌려버리고 밤에 자기 전 계속 꼬리를 잇는 것. 아우로라는 생각을 뚝 끊어버리고 대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따스한 이곳에 대해서. 아우로라가 이어지는 솔로몬의 이야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아우로라가 아주 잠시 고민하듯 미간을 미미하게 좁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와, 정말요? 기뻐요!"
지금은 떠오르는게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까 걱정이었지. 그래도 언젠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공작님께 조심스레 청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런데 사소한 것도 청해도 되는 걸까? 공작님, 풀밭에 누워서 굴러봐도 될까요? 마부님이 그랬는데, 풀밭은 무지 푹신하댔어요! 같은 사소한 소원도. 앗, 안될지도 모르겠다. 드레스가 더러워지니까. 아우로라가 잠시 눈꼬리를 축 내리며 주스를 마저 마셨다. 빈 잔을 보니 새삼 실감이 났다. 즐거웠던 간식 시간도 벌써 끝이 나버렸음을.
바람도 시원하고, 수도처럼 복잡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춥고 눈이 내리지도 않아서 정말 좋다고 이야기하는 소녀를 보면서 솔로몬은 눈을 깜빡였다. 물론 자신도 이 곳이 다른 극단적인 곳보다야 낫다고 생각했지만은, 저렇게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굳이 할 정도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화를 나눌 수록(그것이 대화라고 부르기에 문제가 조금 있기는 했지만)어째 그녀에 대한 의문점은 풀리기는 커녕 새로 생겨나기만 했다. 이전에는 이런 곳에 오거나 한 적이 없으니 그렇겠지 하고 의문을 밀어 넘기던 솔로몬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이야기하라는 말에 기쁘다며 답하는 아우로라를 보며 흐음, 하고 바람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자니 어느새 비어버린 잔을 내려다보는 모양. 그렇다고 잔을 채워주기에는 이미 챙겨온 주스는 동이 났다. 마법을 쓰면 당연히 채울 수야 있겠지만, 어차피 간식거리였고, 간식으로 배를 채워버리면 제 시간에 해야 하는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겠지.
솔로몬은 어떻게 하면 남은 시간을 조금 더 알차게 보낼 수 있을까 생각했다. 산책이라고 나오긴 했지만 걷거나 한 것은 여기까지 온 것뿐인데. 그러면 음식을 먹었겠다, 조금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까지 생각이 미친 솔로몬은 아우로라에게 이야기했다.
" 심심하거나 하지는 않소? 아직 돌아가기까지 여유가 남았으니, 주변을 거닐거나 해도 좋다오. "
이곳은 정말 좋다. 앞으로 영원히 변치 않을 생각이었다. 아우로라는 방긋방긋 웃었다. 다음에도 오자고 하고싶다. 그땐 플라우로스도, 아이니도, 오세도 데려오는 것이다. 그리고 샌드위치를 나누어먹고....아, 그런데..그게 가능할까? 아우로라가 잠시 생각한다. 안 된다고 하면 어쩌지? 아니, 아까 공작저에선 오세와 아이니가 같이 나가는 걸 허락하는 분위기였으니 그럴리 없겠지. 이러저러한 잡념은 접는 것이 좋겠다.
아우로라는 주스 잔을 가볍게 매만졌다. 더 마셔보고 싶지만, 그렇다면 배가 차버릴테다. 그러면 저녁을 먹지 못하겠지? 음, 그건 조금 아쉬울 것 같다. 그렇다고 지금 가기엔 조금 아쉽다.
아우로라는 고개를 들어 나무를 쳐다보고, 다시 앞을 응시한다. 탁 트인 자유. 이걸 즐겨보면 좋을텐데도. ..좋을텐데도?
아우로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변을 거닐거나 해도 좋다니. 돌아가기까지 여유가 남았다고 했다. 무려 여유가! 재깍재깍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지. 아우로라의 두 눈동자가 올망올망 생기로 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149 응응,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우로라가 지금 모든 일에 지나칠 정도로 감사했으니까...음, 설정 몇개를 들고 왔는데 수정할 게 있으면 상의해보자! 헉, 그리고 스토리라인 좋은 것 같아!! 아우로라의 원래 성격이면...(맘뭄미 생각하고 아득해짐)
그리고 얍, 아우로라와 황태자의 이야기..?
* 입궁 후 일주일간은 아우로라를 방치하였으며, 기본적인 환대조차 하지 않았다. 아우로라의 기를 꺾기 위해서였다. * 이후 적응기간이 끝나자 아우로라는 황태자가 시키는대로만 고분고분 따라야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가문과 소네타가 볼모로 잡혀있었다. 아우로라는 여기서 큰 슬픔을 느꼈다. 어쩐지, 황태자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할리가 없었다. ㄴ 소네타가 아우로라를 아끼고 마법사가 되려는 이유는, 우연치 않게 수도 골목 구석에서 아우로라가 제발 가족들은 살려달라며 황태자에게 매달리는 것을 본 이후였다. ㄴ 황태자는 아우로라에게 항상 감사를 강요했다. 살아있음에 감사하라. 너의 의지는 짓밟되 마지막 남은 정신마저 짓밟지 않은것에 감사하라. * 하여 황태자가 간혹 잔뜩 시들고 죽은 채소로 만든 것을 주곤 했다. * 그놈의 레이디. 황태자의 레이디는 얼마나 이상적인지 모르겠다. 외출 금지가 기본이었지만 사교계에 발을 내딛거나, 파티가 있을 경우 아우로라는 평소의 순수한 치장을 해서는 안 됐다. ㄴ 흰색 옷을 유달리 좋아하는 이유도, 치장을 할 때 화려한 장신구를 택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파티에서 아우로라는 상체가 달라붙거나 파인 쨍한빛의 드레스와 장신구를 강요당했다. * 마법 실력을 가늠해보겠다며 마수 평원에 던져진적이 있었다. 이때부터 아우로라는 도구가 없으면 마법을 불안정하게 사용하기 시작했다. * 궁인들은 아우로라를 무시하기 시작하였고, 아우로라는 이 사실을 황제에게 고하지 않았다. ㄴ 다만 본보기로 한 사람의 손에 찻물을 부어준적은 있었다. 그것도 방금 끓인 차를. 그 모습을 보다 못한 황태자가 사제를 불러 치료하긴 했지만. 의외로 성격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 황태자의 진정한 속내를 아는 건 아우로라였다. * 도미닉이 중립을 유지하는 마탑까지 거론하며 황제를 구슬려 파혼한 이후. 아우로라는 한동안 저택에 틀어박혔다. 과보호를 받았다.
사실 아주 늦어도 상관은 없었다, 일단 사용인들이 자신을 외출시키려고 노력을 한 데다가, 공작저 주변에서 공작을 위협하거나 할 것은 전혀 없었으니까. 밤 늦게까지 바깥에서 거닐다가 별을 보아도 좋았다, 별을 보는 취미야 딱히 없었지만, 할 게 없으면 별을 세는 것은 꽤 쓸만한 시간 죽이기였으니까. 그렇지만 늦게까지 있어서 좋기만 할지는 모르겠다, 해가 떨어지면 자연스레 기온도 떨어질 테고, 그러면 자신은 둘째치더라도 가볍게 나들이옷을 입고 나온, 네 곁에 앉은 영애가 감기에 걸릴 수도 있을 테니.
그렇게 생각하던 솔로몬은, 아우로라에게서 그녀의 아버지가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돌아오라고 이야기했다는 말을 전하자, 눈살을 찌푸리다가 천천히 표정을 풀었다. 뭐, 스노우디아의 밤은 더 추울 테니, 바깥에 굳이 나가있어서 좋을 게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걸까, 어찌 되었든 간에, 이 곳은 스노우디아도 아니었고, 후작가도 아니었다. 이 곳에서 가장 큰 힘을 지닌 이는 솔로몬이었고, 지금 이 순간에 아우로라의 보호자라는 존재에 가장 가까운 것도 그 자신이었으니.
솔로몬은 한숨을 쉬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아우로라를 내려다보면서 자연스레 손을 내밀어 손바닥을 내보인다. 길쭉한 다섯 손가락과 그 손가락들에 끼워진 금빛 반지들을 보이며 솔로몬은 입을 열었다.
" 아버지의 말을 기억하는 것은 나쁘지 않지, 허나 그것은 아버지의 보호 하에 있을 때의 이야기, 지금 아우로라 양이 몸담고 있는 곳은 공작저요, 그리고 그 공작저의 주인은 나라는 것쯤은 알겠지? 그러니 일어나시오, 무언가를 먹었으면 몸을 움직여야지. "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다니. 아우로라가 눈을 깜빡였다. 공작저 주변엔 위험한 것이 없는걸까? 음, 생각해보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누가 겁없이 공작님을 건드릴까. ...우리 아버지? 음, 이건 뒤로하자. 아버지도 후회하고 계신 걸. 아우로라가 이것저것을 상상해본다. 석양이 지는 모습, 별이 총총 뜨는 모습, 안에서 보는 것과는 다른 것들. 만지지 못하고 손에 쥐지 못하는 것을 만지고 쥐어볼 기회. 그렇지만.
아우로라는 솔로몬의 눈살이 찌푸려지는 걸 보았는지 슬쩍 시선을 내리깔았다. 말을 잘못했다. 혼나겠지. 스노우디아와 이곳은 달랐다. 눈뭉치 사이로 숨을 죽이던 늑대 마물이 있지도 않고, 혹한이 다가와 몸을 에워싸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바보같이. 아우로라가 눈을 이리저리 굴린다. 어떻게 해야하지. 어떻게 해야...
"...."
아우로라가 한숨소리와 더불어 자신에게 보이는 손을 가만히 보았다. 지금은 아버지의 보호 하에 있지 않았다. 공작저에 있고, 그곳의 주인은 솔로몬인 것이 당연했다. 아우로라가 솔로몬을 가만히 올려다본다. 그렇지, 지금은 마냥 눈치만 볼 때가 아니었다. 아우로라가 조심스레 솔로몬이 뻗은 손을 잡고 일어서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