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아우로라 시아 스노우디아 Aurora Sia Snowdia 성별: 여 나이: 19. 소녀는 곧 데뷔탕트를 치르게 될 나이다.
외형: [https://picrew.me/image_maker/648] - 외형 출처 여명을 담아 사붓하게 내려앉은 첫눈을 고이 빚어 사람으로 만들면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가녀리고 여렸다. 새벽의 빛에 비춰진 설원처럼 고요하고 차분하나, 빛을 받으면 하얀 것 같으면서도 얼핏 하늘색처럼 보이기도 하는, 채도가 옅은 은색을 가진 머리카락은 부드러운 물결처럼 굽이치고, 그 길이가 골반을 막 넘어서고 있었다. 희고 창백해보이는 피부 사이로 유달리 붉은 입술이 보였다. 꼭 피라도 한 잔 마신듯이 도톰하고 붉은 입술 위로 시선을 올리면 작고 오똑한 코가, 그 위로 시선을 올리면 풍성하게 드리운 속눈썹 사이로 빛나는 자색 눈이 보였다. 보라색의 그 눈은 아랫부분에 분홍색이 섞여있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었고, 멀리서도 제 존재감을 드러냈다. 눈썹은 가늘고 얇아 감정을 확실하게 드러내기엔 조금 모자란 감이 있지 않았나 싶었다. 그래, 확실히 모자란 감이 있었지만 감정을 숨기는 것에 능해보이진 않았다. 소녀는 154cm로 아담했으며, 무게가 가벼운 편에 속하는지 드러난 팔과 다리가 꽤 가늘었다. 손이 큰 남자라면 손목은 가볍게 쥐고, 발목도 가볍게 쥘 수 있지 않을까. 짐작컨데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그런 몸매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어찌 보아도 작고 가녀린 소녀였으니. 손은 작았지만 손가락이 긴 편이었으며, 그런 가녀린 몸엔 별다른 장신구는 없었다. 굳이 있다고 치면 귀에 마정석으로 만들어진 귀걸이와 머리에 달린 푸른 리본이 아닐까. 현 제국의 영애답게 늘상 드레스를 입었다. 어쩔땐 풍성한 레이스가 있기도 했고, 아무런 장식도 없는 원피스 형식의 밋밋한 것을 입기도 했다. 흰색도, 진한 녹색도, 어떤 색깔도 잘 어울렸다. 그렇지만 역시 흰색이 가장 어울렸다.
성격: 차분하고, 말썽을 일으키거나 별 다른 사고를 치지 않는 등 얌전하며, 조용한 성격에 속했다. 약자에게 친절하면서도 강자에게 굽히고 소신을 다하는 등 흔하디 흔한 레이디의 소양을 다 하는 것 같이 보였지만 어딘가 다른 면도 보였다. 약간 맹한 구석도 있었고, 감정을 숨기는 것이 능숙하지도 않았다. 가끔 무언가 이해하지 못하고 겁없이 행동하는 것 처럼 보였지만 겁이 많은 편이다. 유령을 믿기도 하고, 그 사실 때문에 잠에서 자주 깨기도 하고, 사소한 것에도 놀라는 등. 그렇지만 중요한 순간엔 모든 용기를 쥐어짜내기도 한다. 그 이후에 뭘 해야할지 몰라 패닉에 빠지긴 하지만.
기타: ^ 취미는 자수. 실력은 그렇게 좋지 않지만...
^ 북동쪽 영지에 살았으며, 추위에 강한 듯 싶으면서도 강하지 않았다. 어쩔땐 혹한에도 끄떡 없는 듯 싶었으나 어쩔땐 덜덜 떨고 있기도 했다.
^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나 아직 마정석의 도움이 필요했다.
^ 가문을 위해 오게 되었지만, 역시 공작을 두려워하고 있다.
^ 그녀는 부족한 것 없이 유복하게 사랑 받으며 살아가는 딸이었고, 사교계에서 아름답고도 영향력이 있기로 유명한 영애였다. 별 다른 나쁜 기억은 없었다.
^ 황태자비가 될 뻔 했으나, 유감스럽게도 줏대없고 야망만 가득한 황태자와 차분한 아우로라는 어울리는 짝이 아니었다.
^ 가늘고도 부드러우며, 숨이 섞여 나긋나긋하기도, 어쩔땐 교태스럽기도 한 목소리였다. 어미에 날숨을 섞는 버릇이 있다.
^ 음, 차차 추가해나갈까?
[스노우디아] 지금의 아도니엘 제국을 존재하게 한 개국공신 가문으로, 선조가 마법사였으며 현 후작 도미닉의 동생이 젊은 나이에 마탑주가 되는 등 마법과 연관이 깊은 가문이다. 마법 스크롤과 마법용품을 파는 등 마법 사업을 주로 하고 있으며, 귀족파의 수장이다.
현재 직계의 가족관계는 아우로라와 동생 소네타, 그리고 아버지 도미닉과 어머니 프라나.
도미닉은 자존심이 강하고 마법 실력 또한 출중하였으나 황제파에서 폭군이라 일컬어지는 공작이 가문을 뒤흔들자 가문의 명예와 위신을 지키기 위해 장녀인 아우로라를 바치고 무릎까지 꿇었다.
겉으로는 황제파와 이리 원만하게 살고있다, 나 공작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쌓는다. 로 보이는 듯 하나 그 뒤엔 고작 명예를 위해 딸을 제물로 바친 것이나 다름 없는 것.
이름: 솔로몬 루인 아젤 Solomon Ruin Azel 성별: 남 나이: ??? 외형상 20대.
외형: [https://picrew.me/image_maker/13338] - 외형 출처 부드러운 윤기를 자랑스레 뽐내는 은백색 머리칼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어 수수하게 보여야 할 텐데도, 그 자체로 신비롭고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 머리칼의 길이는 꽤 길어 따로 묶어 정리하지 않으면 날개뼈 부분까지 내려왔으며, 앞머리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이마를 드러냈고, 길이는 쇄골까지 내려오는지라 양쪽 광대뼈를 가렸다. 그 머리카락 아래로 시원하게 드러난 이마부터, 그의 얼굴을 덮고 있는 피부는 건강함이 느껴지는 구릿빛이었고, 왼쪽 눈에 세로로 크게 그어져 있는 흉터 한 줄기는, 그가 풍기는 강인함을 한 층 더 강하게 느껴지도록 했다. 그의 두 눈은 에메랄드빛으로, 정말 보석이 그 자리에 위치한 듯, 바라보고 선 이에게 황홀경을 선사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웠으나, 언제나 상대방을 깔보듯 하고, 노려보는 듯한 눈매였기에 그 눈에서 쉽사리 우호적인 매력을 느끼기 어려웠다. 그의 기분을 쉽게 드러내는 짙고 두꺼운 눈썹 역시 은백색으로, 그의 성격을 드러내듯 대부분 미간에 힘이 들어가 끝부분이 치켜올라간 상태이다. 신장은 184cm, 큰 편이지만 다른 거구라 불리는 이들에 비해서는 당연히 작다, 키에 맞는 손, 발 크기와 상당히 다부진 몸, 분명 건장한 남성의 조건을 갖춘 것은 분명하다. 공작이라는 고위 귀족임에도 옷차림은 수수한 편, 물론 서민들 입장에선 사치스럽겠지만 다른 귀족들의 예복과 비교했을 때, 금실로 수놓았다는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장신구가 없는 예복을 즐겨 입는다. 그 외에는 왼쪽 눈에 모노클을 쓰고, 열 손가락 전부에 반지를 착용하고 있다는 것일까, 전부 금으로 된 반지이지만 시중에서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만들었다고 하며 반지마다 로마 숫자가 새겨져 있다.
성격: 그는 폭군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앞길을 막아서는 것은 부수고, 아래로부터 저항하는 것은 짓눌러 뭉개며, 위로부터의 압박에는 거세게 저항했다. 그런 그는 적대적인 상대에게 마치 재앙과 같았고, 우호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이에게도 불안함을 안겨주었다. 그럼에도 그가 고립되지 않음은, 그의 폭력적인 행각에 무언가 규칙이나 금제가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혹자는 그의 행동이 전부 계산되어있다고 하지만... 그와 별개로 그는 황가에 충성심을 아낌없이 드러낸다, 정확히는 오직 황제에게만.
기타: ㆍ그는 인간이 아닌, 드래곤으로, 제국의 첫 황제에게 패해, 황제와 그 핏줄에 충성을 맹세한 상태이다.
ㆍ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후, 성씨와 공작의 작위를 하사받았고, 황제를 따라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ㆍ그가 드래곤이라는 것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긴 시간 동안 모습이 크게 변하지 않았기에 인간에 비해 수명이 어마어마하게 긴, 용인이라는 이야기가 떠돌고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ㆍ용인이라는, 이종족으로 여겨져 묘하게 배척받으나, 공작이라는 지위와 그 힘 때문에 아무도 그의 면전에서는 대놓고 그를 까내리지 못한다.
ㆍ그는 영지가 따로 없다, 성이라고 하는 것이 산에 굴을 뚫어 만든 것이지만 내부는 아늑하며 소수의 수행원들만이 그와 함께한다.
ㆍ그는 사병 대신 황실 근위대의 한 축인 용기병들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 이는 길게 이어진 황가와의 신뢰로 부여된 것으로, 원한다면 사병처럼 부릴 수 있으나 그는 100여 명의 용기병들만을 수하에 두고 부릴 뿐, 전체를 움직이지는 않는다.
ㆍ긴 시간을 살아온, 흐르는 피 자체가 마력의 정수인 드래곤 답게 마법에 정통하다.
ㆍ그의 목소리는 중저음으로, 부드러운 편이었으나 듣는 이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ㆍ왼눈의 흉터는 초대 황제에게서 입은 상처의 흔적으로, 흉터가 없도록 치료가 가능했으나 초대 황제를 기리기 위해 내버려두고 있다.
ㆍ오감이 매우 발달해있고, 육감 역시 발달했다, 유일하게 왼쪽 눈의 시력만이 조금 하락해 모노클을 착용한다.
ㆍ10개의 반지는 각각 봉인구 역할과 마법의 매개 역할을 하는 모양, 출력 조절용이기도 하다.
회합은 연례 행사로 여겨지는 듯 싶었으나 파급력은 컸다. 간단하게 지금까지의 정책으로 어떤 점이 달라졌는지 회의를 하는 듯 싶다가도 어느새 한 쪽의 이득을 위해 긴 설전을 벌이는 것이다. 귀족의 권리냐, 혹은 황제냐. 둘중 한 쪽이 이기면 그들은 서서히 세력을 불려나간다. 회합은 황제의 앞에 내놓을 정책을 논의한다는 명분 하에 큰 이득을 가지고 자신의 기반을 다지기 위한 자리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득을 챙긴 사람 중에는 당연히 도미닉 후작이 존재했다. 딱히 무어라 평하지 않아도 최근 그의 안건으로 인해 마정석의 유통경로가 제한되며 꽤 많은 이득을 챙겼을 것이다. 제 아내의 사치스러운 장신구가 나날이 늘어나는 것을, 그리고 소네타가 아카데미 내부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을 보면 같은 귀족파도 그가 이득을 얻어내는 것에 혀를 내두르곤 하였다.
오늘도 도미닉은 어떻게 해야 귀족들의 세력을 키우고 자신의 입지를 더 다져 다른 세력의 사람들을 짓눌러야 할지 나름 고민했을 것이다.
폭군이라 불리는 공작이 참석하기 전까지는.
도미닉은 동요하는 주변 귀족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머리카락 한 올조차 비추지 않던 자가 어찌 이 곳에 온단 말인가?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황제를 지지하는 황제파중 가장 위험한 자가 이 자리에 참석한다면 그 파장은 자신조차 감당하지 못할 것인데도. 도미닉이 입술의 속살을 짓씹었다.
"이런! 공작님을 뵙습니다. 그동안 참석하시지 않으셨기에 무슨 일이 있으셨나 싶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눈치가 없는 자는 아니었다. 도미닉은 얼굴에 사람 좋은 미소를 걸어두었다. 그동안 참석하지 않아놓고 이제 오는 건 무슨 연유인가. 라고 해석해도 좋을법한 귀족들 특유의 화법이 그의 입 밖으로 튀어나오자 주변 귀족들이 슬슬 그의 눈치를 보았다. 맞는 말이었지만. 도미닉은 눈이 마주치자 슬쩍 테이블 밑의 주먹을 새하얗게 쥐었다.
자신과 눈이 마주쳤음에도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넌지시 인사를 건네는 후작, 공작은 그의 인삿말에 묘하게 날이 돋쳐있으며, 그 밑바닥에는 공포가 깔려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작의 행보는 마치 악마, 아니 그 이상과도 같은 것이라서, 많은 이들에게 공포를 심어주기에 충분했을 것이고...
눈치가 빠르면 빠를수록 공작이 상대방에게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지 알아채기 쉬울 테니, 오히려 공작에게 그런 류의 인간은 다루기가 쉬웠다. 인간은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친다, 그게 본성이니, 공작은 그 본성을 십분 이용하기로 했다.
" 무슨 일이 있기는 했지, 그동안 생각보다 바빴으니 말이오, 그러나 최근 하던 일이 막힌지라, 머리도 식히고 일을 끝낼 실마리도 찾을 겸 왔소. "
그리고 그건 바로 네놈이다. 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는 매서운 눈매와 그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후작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 최근 마정석을 수입하는 데 상당히 많은 제한이 생기지 않았소? 당연히 마법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물건이니 가볍게 다루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다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오, 그런 점에서 후작의 안건은 꽤나 효과적이던데... "
그는 말꼬리를 흐리며 눈을 감았다.
" 이 면제 조항이라는 것은 꽤나 흥미롭더군, 후작. "
그 말과 함께 수입 조례, 그 중에서도 마정석에 해당하는 부분을 펼쳐 든 공작은 예의 그 깔보는 눈빛으로 후작을 응시하며 다시 한 번 미소지었다.
그 면제 조항이라는 것은.. 마정석 수출입 시에 붙는 어마어마한 세금이 특정 무역관을 지나게 되면 통행세만 지불해도 좋다는 것. 그리고 그 무역관은... 대부분 스노우디아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 조항에 큰 문제를 느끼지 못했으리라, 결국 그 통행세는 황실의 재산이 되는 것이니까. 그 과정에서 이문이 남긴 하겠지만 당연한 것 아닌가?
다른 이들은 후작이 그저 공작의 심술에 걸려들었다고만 여겼으리라.
그가 품에서 슬쩍 꺼내 올려놓은 양피지의 정체를 모르니 말이다. 그것은... 통행증이었다, 후작의 친필 서명이 있는 통행증, 통행세를 면제해주는 물건, 본래라면 통행증은 외교성에서 처리했어야 할 테고, 담당하는 귀족도 따로 있지만..
" 설명해주었으면 좋겠구려. "
양피지는 위화감 없이 탁자에 놓여 있었다, 눈치가 어지간히 빠른 이가 아니라면 그게 언제부터 놓었는지 모를 정도로.
빌어먹게도, 도미닉의 두 눈동자가 슬그머니 다른 곳을 응시한다. 아무리 긍지 높은 귀족일지라도 특유의 오만한 눈동자를 더 마주했다간 자칫 이성을 놓을지도 몰랐다. 슬슬 상대를 돋구는 것 같았기에. 도미닉은 사람 좋게 웃던 미소를 떼지 않으려 애쓰는지 주먹을 더욱 세게 쥐었다.
"그러셨군요, 이런, 공작님의 노고가 여기까지 느껴지는 듯 합니다."
힘들게 삽질만 하시는 군 그래. 도미닉은 그런 의미를 담아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설마 들켰을리가 없잖은가. 설마.
"아무렴, 마탑의 연구에도 도움이 되니 가벼울리가 없지요. 하여 제가 안건을 낸 것입니다만."
부러 중립인 마탑까지 언급하며 도미닉은 슬슬 입술을 다물었다. 마탑까지 피해를 줄 생각은 아니겠지? 같은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도미닉이 입술을 깨물었다. 면제 조항. 젠장, 휘말린 기분이 들었다.
"...."
마정석을 수출입하는 세금을 제하고, 통행세는 스노우디아로 연결한다. 그렇기에 가장 높은 세금이 붙는 물품중인 하나인 마정석을 자신의 영지로 하여금 유통하게 하고, 그의 상단에겐 통행증을 부여해 이득을 취하는 것. 도미닉은 지금까지 그 방법으로 얼마나 많은 이득을 취했는가!
".....하하!"
그렇지만 눈 앞의 남성은. 빌어먹을 황제의 개는, 지금 통행증을 가지고 있었다. 어디서 쥐새끼가 정보를 흘린 것인가? 도미닉의 뺨을 타고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도미닉은 통행증을 담당하지 않았다. 형평성을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그의 친필 서명이 있었다는 것은.
"...장난이 지나치십니다, 공작님. 제가 어찌 이런 짓을 하겠습니까?"
위조. 혹은 매수.
"제가, 아무리 귀족을 위한다고 하지만, 이 나라의 태양이 위에 계시지 않습니까. 어찌 제가 고귀한 뜻을 악의적으로 써먹겠습니까, 공작님."
주변의 귀족들이 슬 기싸움을 눈치챘는지 입을 다문다. 귀족파도, 황제파도 선뜻 나서기 힘든 문제였음은 당연했다. 어찌 보면 각 자리의 수장이 맞붙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도미닉이 주먹을 꽉 쥐자 옆자리에 있던 귀족이 시선을 피했다. 도미닉의 가면이 서서히 금이 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감히 이종족 주제에 사람을 이리 저울질 하다니. 도미닉의 두 눈동자가 가늘게 떨려왔다. 이대로라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의심을 거두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다면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몇 귀족이 양피지에 관심을 가지자 도미닉의 눈이 서슬퍼렇게 빛났다. 머리를 굴리는 것 같았다.
늦어도 하나는 처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귀족파 전체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 전에, 스노우디아 가문은 막대한 배상금을 물게 되거나, 아니면 밑도 끝도 없이 떨어질 것이다. 그것 만큼은 안 됐다!
만약 가문이 망한다면 사랑하는 아내는 자신을 버리고 본가로 돌아갈 것이다. 데뷔탕트를 앞둔 아우로라와 마법사가 되고 싶어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는 소네트는? 아, 길가의 거지보다 더욱 구차한 삶을 살게 되겠지! 그건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도미닉이 일순 몸을 떨었다. 살기에 질렸는지 입술을 꽉 깨문 도미닉의 안색이 창백했다. 한참동안 도미닉은 침묵한다. 주변의 귀족들이 안도의 한숨을 쉴 동안에도, 공작이 말을 꺼내는 순간에도 도미닉은 고개를 숙이고 침묵했다.
"...회의 할 안건은 없군 그래. 이번 회합은 마치도록 하지. 부디 이번 데뷔탕트에서 만나길 바라네."
그리고, 그가 회장에서 나간지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숨을 가다듬더니 나직하게 이르곤 자리를 떴다. 귀족들은 잠시 그가 나간 자리를 바라보다 "하필 걸려도 폭군에게 걸렸구만." 따위의 말로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는 제각기 흩어졌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공작님."
기어이 쫓아오는 것은, 역시나 도미닉이었다. 도미닉은 불안감을 눌러담으며 한 글자 한 글자 겨우 씹어뱉듯이 말했다.
복도는 생각보다 길었다, 뭐 길든 짧든 큰 상관은 없긴 해도. 저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는 공작이 아직 복도에서 빠져나가지 않았기를 바란 모양인데, 발걸음의 주인을 확인하기 위해 공작은 돌아섰다. 아니나 다를까 발소리의 주인은 후작이었다, 공작은 후작의 표정을 보면서 옅은 미소를 띄웠다, 영악한 귀족답게 자신의 앞에 닥친 상황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듯, 간신히 내뱉은 한 문장에, 공작은 표정을 숨길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던 것인지... 소름끼치도록 즐겁다는 듯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역시 그대라면 이런 선택을 하리라 생각했소, 무모한 자가 아닌 이상 모험을 즐기지는 않을 터이니. "
무엇을 원하느냐... 그렇게 중얼거리며 스스로의 턱을 어루만지던 공작은 깔보는 듯한 눈으로 후작을 응시하며 이야기했다.
" 그 전까진 나 없이도 적당히 균형이 유지되길래 회합까지 가지도 않았소만, 최근에 눈 앞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맘대로 날뛰는 게 눈꼴시어서 말이오. "
정말 그 정도로 이렇게까지 사람을 몰아붙인단 말인가? 공작은 진심인 듯 웃으면서 후작을 빤히 쳐다보았다.
" 그대가 다른 귀족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숨통을 끊는 것이 내게는 가장 쉬운 방법이니, 저항하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소만 그래야 즐거울 테고. "
소름끼치는 이야기를 자연스레 내뱉은 공작은 말을 이어갔다.
" 그대에게 내가 원하는 것은, 그대가 귀족파의 수장으로써 내 밑임을 인정하는 것이오, 모든 이들 앞에서 말이지. "
흐음...
" 구체적으로는 무릎을 꿇는 정도면 되겠지. "
명예를 목숨처럼 여기는 귀족이라면 그야말로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과 마찬가지인 이야기였으니, 후작이 쉽게 받아들일 거라는 생각은 없었다. 공작은 미소를 띄운 채로 후작을 쳐다보았다, 과연 그는 받아들이고 영락할 것인가, 아니면 분노에 차 거절하고 가문이 무너지는 것을 볼 것인가, 아니면...
복도가 긴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아니면 공작이 자신이 올 것을 예상하고 일부러 느긋하게 가는 것인지. 도미닉은 후자를 선택했다. 그의 폭군과도 같은 성미를 잘 알고 있는 자였다. 그렇지만 단 한 번도 그의 눈에 들지 않았고, 그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점점 세력을 키워나갔건만.
몇 번째 욕을 삼키는지 모르겠다.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즐거운 것인가? 이 상황이? 제국과 함께하였던 4개의 가문중 하나를 짓밟는 것이? 오싹했다. 공포가 엄습해왔다.
"모험을 즐길 정도로 어리석진 않습니다."
뒤이어 이어지는 말에 도미닉이 입을 다물고 기함한다. 겨우 그 정도로 한 가문을 이렇게 몰아넣는 것인가? 도미닉의 표정은 겉으로는 태연해보였으나, 턱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것이 보였다.
"...."
제정신이 아니군. 내버려두는 황제도 제정신이 아님은 분명했다. 도미닉은 그렇게 생각했다. 원하는 것이 밑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그럴 수는 없었다! 그의 얄량한 자존심이 그것만큼은 안 된다며 비명을 내질렀다.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됐다. 자신은 귀족파를 대표하는 자였고, 자신이 무릎을 꿇는다면 모든 귀족파가 권익을 포기하고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차라리 죽이는 것이 나을 정도의 처사군. 그는 이를 꽉 깨물었다.
"...아무리 공작님이 흔드실 수 있다 하여도 저희 가문 또한 제국의 건립때부터 있던 가문입니다. 그 공이 찬란한 역사를 지탱하도록 하였으며 지금껏 이어진 바, 명예만큼은 지키도록 해주십시오."
내 무릎을 꿇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다른 것을 내어줄터이니,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명백한 의도가 담긴 말이었다.
그렇게 당당하고 태연하게 표정을 유지하던 이가 지금, 명예만은 지키게 해 달라며 부탁해오고 있다.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것들은 짓밟아 제 처지를 깨닫게 해줘야 하는 법.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서도, 이 상황에서조차 명예를 운운하며 머리를 짜내 자신에게 협상을 시도하는 모습은 썩 괜찮다, 라고 느낀 모양이었다.
" ...... "
이렇다 할 답 없이, 그저 먹잇감이 격렬하게 몸을 비틀어 탈출하려는 것을 바라보기만 하는 거미처럼, 그는 미소를 띄운 채 후작을 쳐다보았다. 일말의 자비조차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이.
그러나.
" 확실하게 하는 게 내 좌우명이오, 허나 이렇게까지 필사적인 모습을 보자니 한 번쯤 그 명예란 것이 얼마나 후작에게 중요한지에 대해 흥미가 생겼소. "
그렇게 이야기하며 턱을 어루만지던 공작은 손가락을 튕기며 이야기했다.
" 좋소, 후작이 무릎을 꿇는 건 사적인 자리에서 끝내는 것으로 하지, 아무도 그대가 내게 무릎을 꿇었다는 것을 모르도록 말이오. "
선심쓰듯 이야기하는 공작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 후작이 오늘을 쉽게 잊으리라 생각지는 않지만, 나중에라도 그대가 잊어버린다면 큰일이니, 후작의 소유 중 한 가지를 맡아두고 싶은데. "
넌지시 묻는 어투였으나, 분명히 그 뜻은 협박이었고, 담보를 내놓으라는 명령이었다.
" 정확히 무엇을 내놓으라고 하지는 않으리다, 다만 후작도 알 것이오, 그대의 명예와 바꿀 만한 것이 대체 무엇인지. "
공작은 후작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것을 상상하며 웃음소리를 흘렸다. 같잖은 것을 보낸다면 즉시 움직이리라 생각하니 한 걸음 물러서 주면서도 기분이 썩 괜찮았다.
그러면서도 이 영악한 자가 또 어떤 선택으로 즐겁게 해 줄지를 기대하면서, 그는 후작을 응시했다.
아무리 그래도 4가문중 하나다. 그 명예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은 두고 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후세를 위해서라도, 과거를 위해서라도. 그의 미소가 어찌 그렇게 잔인해보이는지. 도미닉의 주먹이 새하얗다 못해 달달 떨린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도미닉이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협상이 통한 것인가. 그러나 무릎을 꿇는 것은 감수하여야만 했다. 도미닉이 입술을 잘근 깨문다. 자신의 소유 중 한 가지를 맡는다는 것은, 담보를 잡는다는 것은. 도미닉이 머리를 굴린다. 마탑은 분리되어 있기에 그가 손에 쥐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하여 가문의 보배는? 그가 그런 것을 넘볼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
".....알겠습니다."
도미닉이 속으로 절망한다. 섣부른 판단은 이미 그의 뇌를 잠식하고 자리를 잡는다. 명예와 바꿀만한 것은 또 다른 명예가 아닌가. 가문의 명예와 맞바꿀만한, 도미닉의 명예. 도미닉이 고개를 숙였다. 그 누구도 지나지 않고 사용인조차 없는 복도에서 풀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미닉의 자존심이 양 손에 잡힌 깃털처럼 가뿐하게 꺾이는 소리였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바치겠습니다."
새된 목소리에 절망이 엄습한다. 도미닉은 한참동안 무릎을 꿇고있다가, 비틀대며 일어서더니 시간을 뺏어 죄송하다는 핑계를 대며 고개를 숙이고 황급히 물러났다. 그런 그의 뒷모습은 언제라도 무너질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좌절을 겪은 도미닉이 저택으로 돌아오자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자수를 놓고있던 아우로라가 그를 맞이했다. 자수를 하다 손가락이라도 찔렸는지 아우로라의 새하얀 손가락에는 붉은기가 어려있었다. 도미닉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에 결국 눈물을 쏟아냈다. 이렇게 여린 딸을 공작에게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참담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용인들은 기함했다. 도미닉이 제 딸들을 끔찍이 아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사랑했던가? 싶었던 것이다.
하필이면 오늘은 소네타가 아카데미에서 한 달에 한 번 집에 오는 날이었다. 도미닉의 우울한 기분을 알아챘는지 프라나가 도미닉을 위로했다. 아우로라, 잠시 방에 가 있으렴. 오늘 저녁 메뉴는 네게 비밀로 하고 싶구나. 애써 웃은 도미닉을 바라보던 아우로라가 조신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올라갔다. 해사하게 웃는 딸을 보자 다시금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렇게 결정의 때가 오고야 말았다.
"..그렇게 되어, 아우로라를 공작저에 보내게 되었다."
저녁 식사가 무르익자 어렵사리 결정을 내린 것을 고했다. 평화롭던 식사가 산산조각이 났다. 우아하게 칼질을 하던 소네타의 손짓이 멈추고, 프라나는 자신이 잘못 들었냐는 듯 제 남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도미닉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아우로라는 가만히 스푼을 내려놓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다시 말해봐요, 당신.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죠..?" "맞아요, 아버지. 어떻게 언니가..." "..."
명예와 바꿀 것은 제 딸이었다. 도미닉의 명예요, 스노우디아의 또다른 명예라 불리는 것. 소네타가 식기를 내팽개치더니 차라리 자신을 공작에게 바치라 하며 아우로라를 안고 울었다. 소란에서 아우로라가 눈을 깜빡였다. 아버지가 이득을 얻는 죄를 범했고, 공작은 아버지를 겁박한 것인가? 머리가 이해를 끝마치자 아우로라는 소네타를 달랬다.
"..소네타는, 열심히 공부해야지. 마법사가 되기로 했잖아." "그렇지만 언니가 없으면 의미도 없단 말이야!" "떼 쓰지 말렴. 아버지가 잘못을 저지르셨으나 나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잘못이 있으니 당연한 것이란다."
초상집 분위기구나. 아우로라는 담담히 생각하면서도, 두려움을 꾹꾹 눌러담았다. 오늘 밤은 아무래도 쉽게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두려움이 엄습한다. 그것은 아우로라를 옭아맸고, 후작저를 집어삼켰다.
일주일이 지났다. 공작을 더는 기다리게 할 수 없었다. 후작은 마차에 오르려는 아우로라를 품에 안았다. 소네타는 오지 못했지만, 소네타의 몫까지 프라나가 자신을 안는다. 아우로라가 눈을 내리깔았다. 평소보다 더욱 공을 들였기에 혹여 머리가 망가질까, 드레스의 매무새가 흐트러질라, 조심조심 안는 것이 그렇게도 슬플 수가 없었다. 아우로라는 팔을 뻗어 부모님을 껴안고는 마차에 올랐다. 마부가 침통한 표정으로 집사를 쳐다보나 집사는 이미 손수건으로 눈물을 툭툭 닦아내고 있었다.
"..저는 어떻게 알려지나요, 아버지?" "...대외적으로는, 네가 공작저에 바쳐지는 것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저.."
화합을 도모한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댔을 뿐이지. 그 말이 끝나자 아우로라가 눈을 접어 웃었다. "걱정 마세요. 자주 편지할게요." 라며.
마차 안에서 아우로라는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본다. 공작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덜컹거리는 마차 때문에 몸이 몇 번이고 흘러내릴 뻔 했지만, 그럴때마다 생각에서 빠져 고쳐앉았다. 사실 그것이 다행이기도 했다. 공작이 무섭다고 생각이 될 때마다 마차가 덜컹거려서 상념에서 벗어나게 해주니까.
..솔로몬 루인 아젤. 황가의 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공작은 아버지가 늘 저택 안에서 다른 귀족과 입에 담고는 했다. 뒤에서 욕을 하는 건 좋지 않음에도. 폭군은 예삿일이요, 저번엔 무어라 했더라. 같잖은 이종족이 감히 인간을 쥐락펴락 하려 든다. 나 쇠로 된 검을 아침으로 씹어먹을 녀석. 같은 말을 했었지. 아우로라의 머리 한 구석에서 공작의 모습이 상상이 되기 시작했다. 쇠를 먹는 날카로운 이와 매서운 눈...큰 흉터와 용인이라는 상상속의 모습..
"앗..!"
덜컹! 하는 감각에 또 몸이 흐트러진다. 그리고 아우로라는 마차가 멈췄음에 의아함을 느낀다. 왜 더 이상 풍경이 움직이지 않는 걸까? 아우로라가 문을 열자 마부가 곤란한 듯 아우로라를 바라보았다.
"그게, 마차로 가기엔...너무 가파릅니다. 마침 공작님의 명으로 오셨다는 분들이 계시는데..말이 거칠지도 몰라서.."
아우로라가 고개를 들어 아슬아슬한 길을 바라보고 용기병을 한 번 쳐다본 뒤, 말로 시선을 옮겼다. 아우로라가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조심스럽게 내렸다. 파란 리본이 넘실댔다.
"..그렇지만 공작님께는 가야하지요. 드레스 매무새가 망가지긴 하겠지만...이것도 공작님께서 나름 뜻이 있으신 게 아닐까요?"
아우로라가 해사히 웃었다. 그러면서도 손은 가늘게 떨리는 것이, 분명 한 편으로는 불안해 하고 있는 것이었다. "기사님들이 지켜주실거라 믿고 말이죠...." 라면서. 결국 선택은 하나였다.
"...이만 돌아가세요, 마부님. 아버지와 어머니께 저는 잘 지낼거라고 꼭 전해주셔야해요." "하지만 아가씨..!" "저는 괜찮아요. 마법도 쓸 수 있으니까요. 기사님, 저를 말 위에 올려주실 수 있을까요?"
아우로라는 상냥하게 웃었다. 마부가 아무래도 안 될 것 같다는 등, 그런 의미로 쩔쩔매는 것 같자 지은 미소였다. "정말 괜찮아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편지도 할 테니까요. 아무도 마부님을 혼내지 않을 거니 너무 마음에 담지도 말아요." 라고 덧붙이자 그제서야 마부는 고개를 어색하게 숙이며 뒤로 돌았다.
"고마워요, 기사님."
용기병을 바라본 아우로라가 부드럽게 웃으며 기사의 손을 잡았다. 딱딱한 건틀릿에 감싸진 손의 감각이 익숙치 않다. 정말 기사님이시네. 완전무장을 한 용기병은 또 처음보는지라, 아우로라는 두 뺨을 발그레 밝히는 것이다. 꼭 책에서 그려진 삽화 같으니, 무지 멋있다고 생각했다. 능숙한 솜씨로 자신을 말 위에 태워주자 아우로라는 조심스레 고개를 돌린다. 다른 용기병들은 마부를 도와주러 가나보다.
믿음에 부응하겠다는 말에 아우로라가 활짝 웃었다. 말 위에 오른 용기병은 안장에 매달린 끈을 꽉 잡으라 하였고, 아우로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끈을 쥐었다.
"알겠어요."
말은 짧게 울음소리를 내곤 가파른 산길을 능숙히 타고 올랐다. 아우로라가 옆의 숲길을 바라보았다. 마차 안과는 다르게 산들거리는 바람도 불었고, 상쾌한 풀내음이 코를 스치고 지나간다. 마냥 신기한 광경이었다. 차갑지만 화사한 북쪽과는 확연히 달랐고, 말을 타는 것이 익숙치 않았지만 색다른 경험이었다.
"궁금한 거요?"
아우로라가 잠시 고민하는 듯 싶더니 두 눈꼬리를 부드럽게 내렸다. 궁금한 것은 많았다. 여기는 사시사철 푸를까? 공작저는 어떤 곳일까? 스노우디아처럼 복작복작할까? 아. 아우로라가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푸른 리본이 바람에 나부꼈다.
"..공작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아우로라가 멋쩍은지 뺨을 붉히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너무 바보같은 질문은 아니었을까, 싶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공작님과 정 반대에 서계시는 분이라서, 공작님에 대해서는 잘 얘기해주지 않으셨거든요."
세간의 평은 썩 긍정적이지 않다고? 아우로라는 다시금 아버지가 다른 귀족과 했던 대화를 떠올린다. 폭군, 망할 이종족. 불과 같다는 말에 아우로라가 잠시 앞을 바라보았다. 평화로운 숲길은 새가 행복한듯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 그렇지만 공작님이 없었더라면 이런 평화로운 새의 울음소리도 듣지 못했겠구나.
"..그렇군요."
반대파에겐 껄끄럽지만 제국 내에서 공작의 존재는 중요하다. 단호함이 공포를 부르고, 따르는 이들에겐 외경을 부른다라. 아우로라가 부드럽게 웃었다. 하긴, 아무리 스노우디아나 여타 가문이 모인다 해도 공작가 또한 4가문이 아니던가. 그만큼 대단한 사람인데, 파가 다를 뿐이겠지. 아버지의 입장에선 아쉬웠을수도 있겠다. 그래서 더 미워했던걸까?
"후후, 기사님의 말씀으로 대단한 분이시라는 걸 알 것 같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아우로라는 맑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거의 다 도착했다는 말에 아우로라가 고개를 들었다. 벌써? 대답을 듣다보니 시간이 빠르게 간 것일까? 공작님을 대면하더라도 별 일이 없을 것이란 말이 안심이 되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말을 속으로 되내이곤, 아우로라는 조심스럽게 용기병의 손을 잡고 말에서 내렸다.
"..와아.."
그리고, 산의 모습 그대로라고 해도 될 정도의 광경에 아우로라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려보냈다. 뭇 다른 귀족들의 저택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아우로라는 자신을 호위해준 용기병에게 감사하다는 듯 한 손을 제 가슴팍 위에 얹고 눈을 감으며 고개를 가벼이 까딱였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린듯한 중년의 남성에게 예를 갖추듯 가볍게 드레스 자락을 들었다 놓았다.
"반갑습니다. 기사님께서 도와주신지라 무사히 올 수 있어 감사를 표할 따름이어요."
아, 사자의 귀다. 수인일까? 이종족을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는지 아우로라는 잠시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는 듯 싶었다. 지금까지 만난 수인들은 모두 노예로 쓰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인지, 공작저의 사용인으로 만난 것에서 무언가 콕콕 찔리는 것이었다. 아직도 스노우디아는 멀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을지도 모른다. 아우로라는 상념에서 벗어나 눈을 휘었다.
용기병은 예를 갖춘 후, 말을 몰아 저만치 멀어져 갔고. 사자 수인은 아우로라의 답을 들은 뒤 고갤 끄덕였다.
" 그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그렇게 이야기하며 천천히 앞서 나아가는 사자 수인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공작저 주변에 난 길이 여느 마을의 오솔길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공작저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기도 했고.. 부러 길을 낸 것이 아닌, 사람이 돌아다님으로써 자연스레 생긴 것처럼, 공작저의 조형물이나 길은 퍽이나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그 오솔길의 끝에는 족히 5미터는 되어 보이는 높이의 돌문이 있었으니, 묘하게 괴리되어 있다고 하겠다.
굳게 닫힌 돌문의 왼쪽에는 설렁줄이 하나 달려 있었는데, 사자 수인이 설렁줄을 잡아당기자 나지막한 종소리가 울렸고, 곧 돌문은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보인 것은 동굴이었으나. 내부의 크기는 어마어마하여 천장이 까마득해 보이기까지 했다. 동굴다운 울퉁불퉁함이 있긴 했으나, 바닥은 잘 닦여 평평했고, 아이보리 색의 카펫이 깔려 있었으며, 벽 역시 심하게 튀어나온 부분이 없었다.
신기한 점이라면 발광석 대신 빛을 내는 구체들이 허공에 떠 있었다는 것일까. 그 빛은 자연광과 비슷한 느낌이었고, 덕분에 동굴 내부임에도 눈의 피로가 덜했다.
" 생각보다 크다고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 공작님께서 원하실 때마다 조금씩 넓혀왔기에, 아, 응접실은 이쪽입니다. "
어느 정도 걷다 보니 공작저 통로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 홀에 도착했다, 중앙 홀은 역시 넓었으며, 정면에는 2층으로 오를 수 있는 넓은 계단이 있었고 양쪽에는 공작저를 좌, 우측으로 도는 복도가 있었다. 그 곳에서 사자 수인은 계단의 왼쪽에 있는 방으로 아우로라를 안내했다. 그 와중 아우로라는 복도를 돌아다니는 사용인들이 인간도 있고, 수인들도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정한 비율로.
아무튼, 사자 수인이 안내한 방으로 들어서면. 아늑한 분위기의 응접실이 아우로라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방 가운데에는 네모난 탁자가 있었고, 그 위에는 구리, 은, 금으로 만든 작은 종과 간식거리로 좋은 초콜릿과 사탕이 든 병이 놓여있었다. 종에는 손잡이가 달려 흔들 수 있었고, 탁자 옆에는 찻잔과 찻주전자가 놓인 수수한 카트 한 대가 놓여 있었으며, 손님이 앉을 수 있는 소파가 주인이 앉을 소파와 마주보고 있었다.
벽 쪽에는 동굴이었음에도 창문이 나 있었으며, 바깥 풍경이 보이는, 신기한 광경을 연출했다. 그 옆에는 찬장이, 그리고 책들이 꽂힌 책장이 있었다.
" 혹시 무언가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탁자에 놓인 종을 흔들어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편안히 기다려주십시오. "
그 말을 끝으로 사자 수인은 방을 나섰다. 자, 모처럼 얻은 자유시간을, 아우로라는 어떻게 쓰게 될 지...
안내! 아우로라의 두 눈동자가 별이 박힌 것 마냥 반짝거렸다. 과연 어떤 곳일까 싶었던 것이다. 아우로라는 사자 수인을 차분한 발걸음으로 따라갔다. 여느 마을의 오솔길과 다를 바가 없었다만 자연스레 생긴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아우로라는 고개를 한쪽으로 돌린다. 마을이 형성되어 있구나. 평화로운 느낌이 들어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우로라는 돌문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클 줄은 몰랐는데. 설렁줄을 잡아당기는 모양새와 함께 돌문의 위엄과는 어울리지 않는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이후로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은, 글쎄. 아우로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 생각했겠지. 짤랑짤랑, 쿠구궁. 대체 어떤 조합인걸까, 하고 가만히 생각하기도 일순이었다.
"..."
말을 잃었다. 아우로라는 어떠한 감탄사도 내지 못하고 가만히 고개를 올려 천장을 바라보려 애썼다. 이렇게 넓을 수가 있을까? 동굴다운 울퉁불퉁함이 있긴 했지만 바닥은 반질반질했고, 아이보리 색의 카펫은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것 같았다. 발광석이 없는 것에 아우로라가 고개를 기울였다. 빛을 내는 구체는 마력으로 만든 것일까? 쨍하니 화려한 스노우디아의 발광석과는 사뭇 달랐다.
"굉장히 크네요..멋있어요!"
아우로라가 수줍게 웃었다. 원하실 때마다 넓혀왔다니. 이질적이면서도 확 와닿는 말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공작의 성격중 하나를 엿볼 수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우로라는 역시 넓은 중앙홀을 눈에 담았다. 사용인들은 인간도, 수인도 고루고루 섞여있는지라 아우로라의 호기심과 경외심을 키워나갔다.
아, 정말 달랐다. 신세계를 엿보는 느낌이 들었다. 아우로라는 사자 수인이 안내한 방으로 들어갔다. 역시, 응접실은 제가 상상한 것과 비슷했다. 어느 응접실이 살벌하겠냐만은. 그렇지만 다른 것은 역시 동굴이었다는 점이 아닐까.
"알겠습니다. 바래다주셔서 감사해요."
아우로라는 웃으며 사자 수인이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아우로라는 후, 하고 짧은 심호흡을 하였다. 공작저는 굉장히 넓었고, 아직까지 그렇다 할 일도 없었다. 아버지가 걱정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기에 안심이 되었지만, 앞으로의 일이 불안하게 다가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지만...아우로라의 두 눈이 낮게 내리깔렸다.
괜찮을거야. 홀로 중얼거린 아우로라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소파는 푹신해보였고, 찻잔과 찻주전자가 놓인 트레이는 수수해보였다. 초콜릿과 사탕이 든 병에 아우로라의 뺨이 발그레 물들었지만 이내 아우로라는 시선을 피했다. 역시, 참아야 했다. 그렇지만 참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아우로라의 시선이 책장에 꽂혔다. 마법사의 피를 이었기 때문일까? 아우로라는 눈을 잔뜩 빛내며 책장을 향해 종종 걸어갔다. 과연 어떤 책들이 있을까? 한 권 정도는 읽어도 괜찮지 않을까?
아우로라가 책장을 향해 걸어가 어떤 책이 있는지 살펴 보자니, 대부분의 책은 다분히 흥미 위주인 모양이었다. 단순한 시집이나 소설이 대부분인 책들 사이에, 드문드문 마력 운용법이라던지, 역사서 등이 끼어 있었다. 아우로라가 책을 읽는 것을 즐겼다면 한 번씩은 읽어 봤을 책들이었다.
조금 더 찾아본다면 책장의 위에 간신히 걸쳐진 책 한 권을 볼 수 있으리라. 그 책은 이전에 아우로라가 본 적이 없을 내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책은 제국과 드래곤에 대한 전설이 적힌 책이었으니.
그 시각.
응접실을 벗어난 사자 수인은 공작에게 손님이 응접실에 도착해 있음을 알리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복도를 걸어들어가 이윽고 집무실 앞에 도착한 사자 수인이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고,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들어오거라. "
공작의 말이 끝나자 문이 열리고, 사자 수인이 들어와 예를 갖춘다.
" 아가씨가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공작은 그 말에 고갤 끄덕이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영애를 보냈단 말이지. 과연 그 아이가 후작가의 명예를 대신 할 수 있을지, 공작은 미소를 띄우고 집무실을 나섰다.
흥미 위주로 모아둔 책일까? 아우로라의 손가락 사이로 책 표지가 빠르게 지나갔다. 단순한 시집, 소설, 아, 이건 읽은 적 있는데. 기사님과 공주님의 로맨스! 음, 옛날 소설이긴 하지만 정말 좋은 이야기였지. 어느 순간엔 비극적이기도 하고, 기사의 그 굳건함으로 위기를 벗어나기도 하고. 아우로라는 다음 책의 제목을 읽어본다.
아, 소네타와 함께 읽어보던 마력 운용법에 대한 책이다. 무언가 슬퍼지는 것 같아서 아우로라는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음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역사서다. 황태자로 인해 잠시 입궁했던 날, 근 일주일은 시간을 죽이기 위해 읽었던 책이었나?
아. 그렇게 좋은 기억은 아니다.
"어..?"
책장의 위, 간신히 걸쳐진 책 한 권. 아우로라는 책을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처음 보는 책이다. 타파이트빛 눈이 올망올망 빛났다. 뭐지? 정말 뭐지? 책 한 권일 뿐인데도 아우로라의 호기심은 이미 세계수를 발견하고 그 용도를 고민하는 마법사와 같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손이 닿을까? 아우로라가 손을 뻗어본다. 아, 역부족이야.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듯이 아우로라가 까치발을 든다. 조금만 더 닿으면 될 것 같은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닿으면 될 것 같은데. 아우로라는 팔을 최대한 길게 뻗다가 작게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뒤로 넘어가는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제 몸이 예상 외로 아무렇지도 않자 고개를 뒤로 돌렸다. 이윽고 아, 하는 짧은 감탄사와 함께 아우로라는 몸을 빙글 돌려 책장에 등을 딱 붙였다. 머리 한 구석이 새하얘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 그, 그러니까..."
얼굴조차 본 적이 없었지만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폭군이라 불리던 공작. 아우로라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눈을 굴려 주변을 살폈다. 그러니까, 언제 오신거지? 아우로라는 이어지는 말에 어깨를 움찔 떨더니 시선을 옮겼다. 사자 수인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죄..죄송합니다..혼자 할 수 있을 줄 알고..그러니까, 사자님은 아무런 잘못도 없으세요.."
아우로라는 책을 받아들곤 책을 살살 올려 제 얼굴을 반쯤 가렸다. 이렇게 하면 눈을 마주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안일한 생각이었다만. 아우로라는 눈을 살짝 들어 솔로몬을 바라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면목이 없사와요. ㅈ,저는 혼내시더라도 사자님은 혼내지 말아주세요."
책을 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 으아악 늦고 짧아 ㅠㅠㅠㅠ...컨디션이 안 좋다니 푹 쉬고 낫길 바라구...응응, 6시! 기다리고 있을게! 나도 잘 부탁해, 솔로몬주! :>♡
책을 받아들곤 덜덜 떨면서도, 사자 수인은 질책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하는 아우로라를 내려다보던 공작은 사자 수인을 보며 이야기했다.
" 아가씨가 다치지 않았으니 이번엔 그냥 넘어가겠다, 그만 가 보거라. "
낮게 깔린 공작의 목소리에 사자 수인은 조금 놀란 듯한 눈을 보이다가 고갤 숙여 감사를 표하고, 아우로라에게도 감사를 표한 뒤 응접실 문을 닫으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공작은 응접실 문이 닫히자 몸을 돌려 주인을 위해 마련된 소파에 앉았다. 그 움직임은 공작의 구릿빛 피부와 왼눈의 흉터 덕에 투박한 느낌이었고, 입고 있는 예복도 수수한 편이었으나, 그 정도로는 가려지지 않을 만한 기품이 은은하고 자연스레 풍겼다.
" 앉으시오, 그만 떨고. "
쉽지 않은 주문이다, 그를 앞에 두고 떨지 않은 자는 손에 꼽았으니. 더군다나 저 소녀는 본인이 잘못을 했다는 생각인지 불안해 보였다. 어쨌거나 공작은 부드럽게 손짓해 그의 맞은편에 있는 손님용 소파를 가리켰다.
" 썩 좋은 첫 만남은 아니지만, 당분간은 이 곳에서 지내게 될 테니, 진부하기 짝이 없는, 내 소개부터 하겠소. "
공작은 아우로라가 자리에 앉든, 앉지 않든 말을 이어나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 내 이름은 솔로몬, 아도니엘 제국의 대귀족 중 한 명이자, 황가의 성씨를 하사받은 자, 솔로몬 루인 아젤 공작이오, 황가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하지. "
겉으로나, 속으로나 말이오. 이를 슬쩍 드러내며 웃음을 흘린 솔로몬은 아우로라를 응시하며 손짓했다. 그러자 그의 손짓을 따라 찻주전자에 담긴 물이 끓고, 아우로라와 그의 앞에 찻잔과 티스푼, 각설탕이 담긴 자기가 놓인다.
다행이다. 사자님은 아무런 벌을 받지 않으셨어. 아우로라가 속으로 안도한다. 자신에게 감사를 표하며 응접실을 나서는 사자 수인을 흘끔 바라본 아우로라가 책을 쥔 손가락을 꼼질댔다. 그래도 자신 때문에 혼날 뻔 했으니까, 그건 나중에 꼭 사과해야겠다 생각했다.
솔로몬이 자신에게서 멀어져 제 소파로 향하는 모습을 보고나서야 아우로라는 그나마 정신을 차린다. 아직도 머리가 새하얗긴 하지만 이정도면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기품이 몸에 자연스레 배어있었다. 아우로라의 시선이 솔로몬을 향했다. 마냥 무섭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닌걸까, 아니, 여전히 아우로라는 가늘게 떨고 있었다. 앉으라는 말을 듣고 아우로라가 잠시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끼더니 뻣뻣하게 제가 앉아야 할 소파를 향해 걸어갔다. 솔로몬이 제 소개를 하려는 기미를 보이자 무례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겨우겨우 움직인 것이다.
손님용 소파에 앉자 푹신한 감각이 몸을 타고 전해져왔다. 아우로라는 책의 커버를 손가락으로 잠시 쓸어내다 한 구석에 조심스럽게 내려두고,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썩 좋은 첫 만남은 아니었지. 응. 솔로몬. 솔로몬 루인 아젤 공작. 아우로라가 자신에게 와닿은 시선에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렇게 대단한 사람 앞에서 첫 만남이 실수로 시작됐으니.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실수는 해선 안 됐는데. 아우로라는 눈을 도르륵 굴려 그가 손짓하는 것을 살짝 바라보았다. 자기가 테이블 위에 놓이고, 찻주전자의 물은 끓기 시작한다. 저렇게 숨쉬듯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음에 속으로 감탄하던 아우로라는 자신의 차례라는 말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아우로라..."
작게 종알거리던 아우로라가 드레스 자락을 조심스럽게 손으로 쥐었다. 자신의 소개를 해야했다. 심호흡을 하자. 가볍게 숨을 들이마신 아우로라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자 그대로 굳는 듯 싶다가도,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눈꼬리를 휙 휘어내리는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웃으려 함이 참으로 가상하기도 하였다. 아직 뻣뻣하긴 했지만서도.
"..제국의 눈송이가 공작님을 뵙습니다. 아우로아 시아 스노우디아라고 합니다."
찻주전자 사이로 흐르는 홍차에서 따뜻한 김이 피어올랐다. 아우로라는 "..네, 좋아합니다." 라고 겨우 입술을 떼어 말하곤 각설탕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각설탕. 단 게 좋다면 넣어도 된다지만..아우로라가 머뭇거렸다. 넣고 싶다. 그렇지만 어린아이처럼 보이지 않을까. 아우로라가 겨우 고개를 돌렸다. 유혹에서 이겨내라도 한 것마낭 아직은 새하얗게 질려있던 표정에 뿌듯함이 어려있었다.
자신의 말 한 마디마다 크진 않지만 반응을 계속해서 보이는 아우로라를 보며 솔로몬은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아버지와는 딴판이로군. 집안에선 어떨 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와 만난 공적인 자리에서 그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했으니.
자신의 시선에, 아우로라가 멈칫거리다가도 미소를 띄우며 스스로의 소개를 시작하자 솔로몬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흐응, 하는 소리를 냈다. 흡족한 것인지, 아니면 무엇일지. 솔로몬은 아우로라가 홍차를 좋아한다며 조그마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그녀가 각설탕을 빤히 쳐다보다가 고갤 돌리고 짓는 표정에 어린 뿌듯함을 보았다.
" 꽤 씁쓸할 텐데, 괜찮겠소? "
솔로몬은 아우로라를 응시하면서 손가락을 움직였고, 자연스레 마법으로 각설탕 두어 개를 자신 몫의 홍차에 넣고 티스푼으로 저어 녹였다.
" 난 달콤한 게 좋다오, 다른 것을 신경쓰이지 않게 만들어 주거든. "
그렇게 이야기하며 솔로몬은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달콤한 맛과 함께 느껴지는 홍차 향이 썩 마음에 들었다.
" 그나저나 제국의 눈송이라, 꽤 감수성 넘치는 별명이로군, 누가 지어준 건가? 아니면 스스로 생각한 것이오? "
아우로라는 가만히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도 잠시였다. 뜨거운 것은 금방 가시고, 어느정도 마실만한 온도가 된 것이다. 아우로라의 눈이 찻잔에 집중하는 듯 싶다가도 씁쓸할 것이란 말에 도르륵, 각설탕을 향해 시선이 돌아갔다. 그리고 솔로몬이 각설탕을 넣는 것을 바라보았지.
"..괜, 찮습니다."
괜찮을거야. 어른의 세계로 가는 거잖아? 곧 있으면 진짜 성인이기도 하고. 아우로라는 이어지는 솔로몬의 말을 애써 흘려보냈다. 아, 혹시 여기 위에 있는 초콜릿과 사탕은 공작님이 좋아하셔서 둔 걸까? 싶은 생각도 잠시 스쳐지나갔다. 아우로라가 찻잔을 들었다. 별 다른 과장된 몸짓 없이도 우아함이 은은히 배어있는 행동이었다.
"..황태자님께서 하사하신 별칭입니다."
아우로라는 차를 마시기 전, 솔로몬의 이야기에 대답하며 잠시 찻물에 비친 자신을 마주보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엔 굉장히 부끄러운 별명이었지. 사실 별명이 하나 더 있긴 했지만.
오목눈이. 낯부끄러운 그것은 절대 듣고 싶지 않은 별명이었다. 오목눈이라니, 오목눈이라니! 아우로라와 친했던 영애들도 기함하는 별명이었다. 아우로라는 떠오른 상념을 지우기 위해 홍차를 한 모금 입에 담았고, 그 상태로 몸을 움찔 떨었다.
쓰다.
그래도 퍽 용했던 것이다. 표정을 애써 찡그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으니. 찻잔을 우아하게 테이블 위로 내려두며 애써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차를 입에도 대지 않은 것 처럼. 그리고 아우로라는 천천히 얼굴에서 표정을 지워갔다. 이 사안은 웃으며 이야기 할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께 이야기를 듣긴 했습니다."
아우로라는 감히 공작을 쳐다볼 수 없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풍성한 속눈썹에 두 눈이 언뜻 가려졌다. 아우로라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가듯 작아지는 것 같았다.
" 본인이 괜찮다면 딱히 더 권할 이유는 없겠군, 단 걸 싫어하는 이는 내 기억에는 몇 없었는데. "
혹시 단 것을 싫어하오? 물론 그건 아니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각설탕을 앞에 두고 고민한 것부터, 솔로몬이 각설탕을 넣는 것을 응시하는 눈까지. 단 걸 저렇게나 먹다니, 같은 느낌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은, 지금까지 보여 준 아우로라의 태도를 보자면 상대를 깔보거나 까내리는 등, 쉽게 부정적인 평가를 내릴 만한 이는 아니었다. 그런 고로. 단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싫어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데 왜 먹지 않는 걸까.
모종의 이미지 관리일까. 그게 왜 필요할까 생각하자니 솔로몬 스스로도 꽤 충실히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하는 것이다 라는 것까지 생각이 미친 듯했다.
" 호오, 그러고 보니 황태자님과 면식이 있었군 그래, 별 이유 없이 뵌 것은 아닐 테지. "
귀족가의 여식이 황가의 자손을 만난다는 것은 평범한 일이 아니니... 단순히 사교계 데뷔를 위해서일 수도 있으나. 이미 아우로라의 가문이라면 굳이 그런 수고를 할 이유는 없으리라. 그렇다면, 황가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구축하려고 했던 흔적인가?
다른 이도 아니라 황태자라.
" 그건 아무래도 좋소, 내가 그대를 그 별명으로 부를 일은 없을 것 같으니, 아우로라 양이라 부르는 것이 나으리라 생각하오만. "
이미 그렇게 불러놓긴 했지만서도. 그는 옅은 미소를 띄우며 소파의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자연스레 괴었다.
홍차를 마신 아우로라가 잠깐이지만 쓴 맛에 놀랐음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퍽이나 재미있는 아가씨로군, 좀 더 지켜봐도 좋겠어.
" 가족에겐 꽤나 솔직한 모양이로군, 어디까지 이야기했는지는 몰라도. "
솔로몬은 아우로라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며 미소를 지웠다. 그녀가 분위기를 파악했듯이, 이 사안은 가벼운 게 아니었으니, 어찌 되었든 그녀는 후작가를 누르기 위해 손에 쥔 존재였다.
" 아마 나에 대해 꽤 많은 험담을 늘어놓았겠지, 나와 대척점에 선 후작이니 좀 더 심하게 말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아마 대부분은 세간의 평과 비슷할 것이오, 무자비한 폭군이며, 제 내키는 대로 일을 일으키는 괴물 같은 자, 이종족 주제에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문제 그 자체라고 말이오. "
아우로라는 찻잔을 매만졌다. 단 걸 싫어할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것은..그래, 이미지 관리였다! 아이처럼 보이면 어쩌나 싶었던 것이다. 아이처럼 보여서 혹여 좋지 않은 인상이라도 사게 된다면 난처해지니까. 아우로라는 입술을 오물거리다 결국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우로라의 양 뺨이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예. 황궁에 머문 적이 있었습니다."
주제가 돌아간 것 같아 다행이었다. 만약 이 분위기를 계속 유지했더라면 아우로라는 분명 각설탕을 세 개나 넣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아우로라가 그 장면을 상상했는지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그건..조금 싫다. 그러니까, 아까부터 변명아닌 변명을 계속 하는 것 같지만, 처음 보는, 그것도 공작님께는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어떤 호칭으로 부르시더라도 영광일 따름이지요."
아우로라가 내려놓은 찻잔은 딱 한 모금의 분량만 사라져 있었다. 작은 생쥐가 열심히 마신 흔적에 가까울 정도로 미세했지만. 아무것도 넣지 않은 홍차의 맛에 익숙해지기는 한참이 걸릴 것 같았다. 아주 오래오래. 아우로라는 입안이 더 씁쓸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솔로몬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전부 사실이었으니까. 아버지는 황제파와 대척점에 있었기에, 그들의 험담을 하곤 했다. 그중에서도 유달리 공작에겐 날카로웠다. 공작은 세간의 평을 줄줄 늘어놓는다. 폭군, 괴물, 이종족, 문제 그 자체...전부 들어본적이 있는 말이었다. 아우로라가 고개를 숙이고 드레스 자락을 작은 손으로 꾸욱 쥐었다. 공작은 이 말을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한걸까?
아. 아우로라는 심장이 쿵 내려앉기라도 한듯이 몸을 크게 떨었다. 공작은 자신이 두렵냐고 물었지만, 자신은 의중을 짐작해보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되었다. 어째서일까. 후작가 때문일까? 자신은 후작가의 명예였고, 두려움은 후작가의 굴복일지도 몰랐다. 아우로라가 한참동안 말을 잇지 않는 것 처럼 보이다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타파이트빛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나 싶더니만 공작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가상한 용기였다.
아, 어쩌지. 이 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하지? 아우로라의 머리가 새하얘진다. 눈을 마주쳤는데, 다음엔 무슨 말을 해야하지? 아우로라는 겨우내 공포를 삼키듯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만일 공작님께서..세간의 평과 완벽하게 같으셨더라면, 이미 저는 공작저로 오는 길에 저를 호위해주신 기사님께 살해 당했을지도 모르지요.. 진정 무자비한 폭군이시라면 아버지의 간절한 제안도 듣지 아니하셨을테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그게.."
아우로라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맞을까.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아예 기어들어가듯, 점점 작아지다 못해 끝이 가늘어져갔다.
"ㅇ, 아직 공작님을 완벽히 알지 못해 두려운 것은 사실이지만...제가..공작저에 있는 동안 떨쳐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솔로몬은 아우로라의 말을 곱씹듯 중얼거리면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어느새 반 정도 줄어든 그의 홍차와는 달리, 아우로라의 찻잔에 담긴 홍차는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써서 그렇겠지, 관리가 철저하다고 해야 할 지, 아니면 괜한 고집일지. 솔로몬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자신의 질문에 아우로라가 고갤 숙이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곤 과연 어떤 대답을 할까 내심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침묵을 깨기 전, 아우로라가 숙였던 고개를 들고 솔로몬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고, 공작은 별다른 반응 없이 자신과 마주한 눈을 그 역시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잠시간의 침묵이 끊길 듯 끊기지 않으며 이어졌고, 이윽고 아우로라의 입에서 공포를 삼키는 듯 묘하게 눌린 목소리가 새어나오자 자신의 턱을 어루만지며, 흐음. 하는 소리를 내었다.
" 그러한가, 내가 정말 세간의 평과 같았다면 그대를 진즉에 죽였을 거라고? "
그 직후 조금 망설이던 아우로라가 간신히 이어나가는 말은, 공포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이야기, 혹은 다짐일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끝에 가서는 목소리가 작아져 흐지부지되기는 했지만, 그녀의 이야기가 끝이 나자, 솔로몬은 턱을 어루만지던 손을 떼고 웃기 시작했다.
" 후하하하하하하! 꽤나 재미있군, 용기를 쥐어짜는 것이 꽤나 재미있어, 그래, 그대 말처럼 내 진짜 모습은 직접 보지 않으면 모를 것이오, 그러나 이것은 알아두시오, 나에 대한 평을 내린 이들 역시, 나의 어떠한 모습을 보고 그런 판단을 내렸을 것이고, 외려 그대보다 나에 대해 아는 게 많을 수도 있다는 것을. "
엄연히 이야기하자면. 죽일 생각이 있었다면 진즉에 죽였겠지. 어디까지나 볼모였고, 최근 심심하던 차에 심심풀이도 되리라 생각했으니...
" 그대가 나에 대해 가지는 공포는 미지에 대한 공포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대가 이야기한 것이 최선의 방법이겠지, 지금 그 기회를 줄 테니, 나에 대해 궁금한 것을 질문해보시오. "
이렇게 보니 눈이 굉장히 아름다우시다. 새겨진 흉터로 인한 공포심이 몸을 짓누르긴 했지만 꼭 진짜 보석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머리를 스쳤다. 아우로라의 두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눈동자가 아름답다는 건 아름다운 것이고, 지금 이 문제는 다른 것이니.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었으니.
아우로라는 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 알더라도 드문드문 기억하겠지. 어떻게 보면 무모했고, 어떻게 보면 대단했다. 그 상황에서도 어떻게라도 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단 것이니. 아우로라는 말을 끝마치며 소리없이 숨을 들이켰다. 솔로몬의 웃음소리가 들린 것은 그 뒤였다.
"...."
아우로라는 말을 삼킨다. 용기를 쥐어짜는 모습이 그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킨건지 그가 웃었다. 아우로라는 뒷말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어냈다. 만약 그러하였더라면, 아. 두려운 것이다. 분명 그가 죽일 생각이라면 죽였겠지. 아우로라가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한 것. 아우로라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떤 질문을 해야할까? 아우로라는 각설탕을 빤히 쳐다보았다.
"...단 음식, 좋아하시나요..? 아, 아니..이게 아니라..그러까..."
제 나름대로 머리에 공작에 대한 무해한 이미지를 심어보려 했던걸까. 퍽 우스운 질문을 한 것을 깨달은 아우로라의 양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부끄러워. 옷자락을 잡은 손가락이 꼼질거리다 소파 한 구석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책에 시선이 닿자 움직임을 멈췄다.
아우로라는 괜히 시선을 앞으로 고정시키곤 눈을 내리깔았다. 손에 잡힌 드레스 자락이 보였다. 사용인들이 아우로라가 공작저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뒤로, 일주일동안 고심하여 골라준 드레스였다. 아우로라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흰색과, 하늘색이 섞인 것. 과하지도 않고 너무 밋밋하지도 않은 그것은 작은 주름이 져있었다.
평소엔 주름은 커녕 얼룩도 생기지 않는데. 오늘따라 많이 겁을 먹었구나. 아우로라는 스스로 생각하며 입술을 꾹 다물다가도 고개를 들었다. 이 질문이 공작의 흥미를 불러일으킨걸까. 아우로라가 흘긋 솔로몬을 쳐다보았다. 공작은 인간관계가 협소하다 하면서도, 제 질문은 진지하게 생각해 본 기억이 없다고 하였다. 아우로라는 잠시 기다리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솔로몬이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기는 모습에, 아우로라는 조심스럽게 솔로몬을 바라보았다. 공포에 질려 제가 앞으로 신세를 져야 할 공작의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건 큰 실례일테니. 아우로라가 짧은 시간동안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그렇게 무섭지는 않구나. 물론 인상이 부드러운 분은 아니시지만, 상상속의 공작님과는 달라서 다행이라 해야할지. 쇠를 씹어드시고, 무지막지하게 크면서도 나 나쁜 사람입니다. 라는 모습을 가지지 않으셨으니까. 그렇지만 흉터는. ..어쩌다 생기신걸까? 아우로라는 솔로몬이 눈을 뜨자 핫, 하곤 시선을 돌렸다. 궁금해도 물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흉터는 민감하다고들 하니까.
"...그러시군요.."
아우로라가 순한 미소를 지었다. 담담한 솔로몬의 표정도 한 몫을 했지만,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 아니란 인상이 박히자 서서히 새하얗게 질린 표정도 풀어져갔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즐거워하나 온전한 자유는 포기하였다. 아우로라가 문득 장난도 즐기실까? 하는 실없는 생각도 해보곤 금세 포기했다. 그리고, 아우로라가 머뭇대다 작게 뻐끔댔다.
"혹시..제가 지금 공작님 기준에서 잘 하고 있는걸까요..?"
아우로라가 제가 했던 질문이 마냥 멋쩍었는지 작게 웃었다. "너무 바보 같은 질문이었을까요..?" 라며 시선을 흘긋 돌리며 수줍게 볼을 붉히는 모습이 마냥 그 나이의 영애들이 하는 행동과 똑같았다.
아우로라는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오는 솔로몬을 보며 혹시 자신이 잘못 질문한 게 아닐까, 하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말 실수를 한 걸까? 다행히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무례하지 않았다는 말이 안심이 되었다. 아우로라의 옅은 눈썹이 축 내려가고 입술이 올라갔다.
참 알기 쉬운 여자였다. 표정을 숨기는 것엔 그렇게 재주가 없었기 때문일까. 아우로라는 이어지는 말에 그나마 가지고 있던 걱정마저 내려놓은 것 같았다.
공작님께 앞으로 이것저것 물어봐도 괜찮은 걸까? 아우로라는 맨 마지막의 말을 듣고 '이것저것'까지는 가지 말아야겠다. 라고 생각했다. 괜히 이것저것 다 캐보다 호기심이 발동해 안된다는 일까지 건드려 큰일을 당하면 안 될테니까. 음, 열심히 참아봐야지.
"아. 그게.."
아우로라는 플라우로스가 사자 수인의 이름인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이종족의 취급이 어떤지는 알고 있었다. 아우로라가 습관적으로 소파 위의 책을 손으로 집더니 무릎 위에 올려놓고 커버를 매만졌다.
"생명은 무엇이라도 귀하니까요.. 이종족이라고 박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후작가에서도 그 부분만큼은 별나다고 들었던 것 같다. 예전에도 그런적이 있었다. 길가에서 졸부의 자랑거리마냥 끌려다니던 엘프를 충동적으로 사들여 자유롭게 풀어주었던 것. 그 일로 아우로라가 없는 티타임은 한동안 영애들의 입방아를 찧게하기 충분했던 것 같다. 아우로라가 손가락을 꼼질댔다.
호기심에 대해 보인 긍정적인 반응이 아우로라에게서 걱정을 상당 부분 덜어낸 모양이었다. 어느새 풀어진 표정을 짓는 아우로라를 보면서 후작이 상당히 절박했음을 다시금 느낀 솔로몬은 플라우로스를 감싼 것에 대한 자신의 질문에 답하는 아우로라의 목소리를 들었다.
대답을 하며 아우로라가 무릎 위에 올린 책의 표지는 옅은 적갈색이었으며, 별다른 장식 없이 제목만이 쓰여 있었다. 별로 팔리지 않았으려나, 싶은 그 책은 꽤 오래된 듯, 표지 색 역시 예전엔 더 짙었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생명은 무엇이라도 귀하니, 이종족이라고 해도 박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는 말에. 솔로몬은 흐음, 하고 소리를 내며 생각했다, 이 이야기만 들어서는 잘 모르겠군, 단순한 이상주의라기에는 이종족을 떠받들지도 않으니.
" 그러한가, 아우로라 양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의도가 어떻든 그런 생각이라면 이 곳에서 지내기 무난할 것이오, 인간들을 주로 붙여주긴 하겠지만 이종족의 비율이 높기 때문에 이종족을 꽤 자주 마주할 테니 말이오. "
그렇게 이야기하며 아우로라를 바라보던 솔로몬은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다가 탁자에 놓인 은빛 종을 흔들어 울렸다.
그러자 곧 응접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들어오라는 솔로몬의 말이 끝나자 문이 열리며 토끼 귀의 쌍둥이 남매 수인이 종종걸음으로 들어와 솔로몬의 의자 옆에 섰다. 둘 다 키는 130cm정도로, 파란 색과 흰 색이 섞인 예쁜 예복을 입고 있기는 했으나 아직 아이들인 모양.
" 공작님 공작님! 이 아가씨는 누구세요? " " 오빠! 딱 봐도 공작님의 손님이잖아, 죄송합니다 공작님, 손님... "
곱슬거리는 새하얀 머리카락 사이로 긴 귀를 쫑긋거리며 오빠로 보이는 토끼 수인이 아우로라를 붉은 루비색 눈으로 빤히 쳐다보며 이야기하자, 비슷하게 생겼지만 얌전해보이는 누이 토끼 수인이 솔로몬과 아우로라에게 고갤 숙이며 사과했고, 붉은 눈으로 오빠를 흘겨본다.
솔로몬은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 오세, 네 누이 말대로 저 분은 내 손님이다, 후작가의 영애님이니, 무례하게 굴지 않도록 해라, 아이니, 오라비가 들떠서 실수하지 않도록 잘 볼 수 있겠지? "
오세와 아이니, 두 아이의 이름인 듯 했다. 솔로몬의 손길이 기분 좋은 듯 눈을 감고 있던 두 아이는 솔로몬의 이야기에 고갤 끄덕였다. 그제야 솔로몬은 아우로라를 보며 이야기했다.
" 여기까지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충실히 이야기를 나눠 주어 고맙소, 이제 조금 쉬는 것도 좋겠지, 식사가 준비 되면 따로 사용인을 보낼 테니 이 둘을 따라가도록 하시오, 아우로라 양이 지낼 방으로 안내하고, 짐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줄 것이니. "
말이 끝나고, 두 아이의 어깨를 두드려주자, 오세와 아이니는 어느 새 아우로라의 양 옆에 섰고, 오세는 아우로라의 손을 덥썩 잡았다. 그러자 아이니가 오세를 노려보았고, 오세는 배시시 웃으며 슬쩍 손을 떼었다.
처음 본 책은 옅은 적갈색의 표지에, 제목만 쓰여있었다. 별로 팔리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책이 꽤 오래 됐는지 표지가 바래있었다. 아우로라가 책의 겉을 쓸었다. 낡은 책의 감촉이 여실히 느껴졌다.
이종족은 박대 받을 존재가 아니다. 그들에게서 배울 것이 있고, 그들도 인간들에게 배울 것이 있을텐데. 아우로라가 이종족의 비율이 높다는 말에 웃음을 입가에 그려냈다.
"그렇군요.."
다들 친하게 지내보고 싶다고 생각했는지, 아우로라의 양 뺨이 발그레 물들었다. 은빛 종을 흔들자 응접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이윽고 들려온다. 아우로라는 눈을 깜빡였다. 작은 아이들, 토끼 귀를 가진 귀여운 아이들이네. 아우로라가 눈웃음을 지었다. "아니에요." 라고 사과를 받아낸 아우로라가 생각했다. 귀여운 친구들이네.
오세와 아이니. 두 아이의 이름이겠지. 아우로라는 솔로몬을 마주하며 고개를 숙였다. "오히려 이리 환대하여주시니 황공할 따름이어요, 공작님." 라고 가벼운 인사를 한 뒤, 아우로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세가 손을 덥썩 잡자 아우로라는 놀란 기색도 없이 눈을 마주치며 부드럽게 웃었다. 아이니가 오세를 노려보는 것 같았지만.
"...감사합니다."
아우로라는 책을 받았다는 사실이 내심 기쁜듯 하다가도,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는 것 같았다. 한 손에 책을 들면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지 못할텐데. 아우로라가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여 허공에 작은 마법진을 그려내었고, 마법진은 책을 감싸 아우로라의 머리 위에 둥실 떠올랐다. 아우로라가 드레스 자락을 잡고 살짝 들어올리며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자신에게 거듭 감사를 표하는 아우로라를 보며, 솔로몬은 말 없이 손짓했다. 오세와 아이니는 아우로라가 자리에서 일어선 뒤 하는 말에 긍정적인 답을 한다, 오세는 고갤 끄덕였고, 아이니는 " 네, 혹시...손을 잡아도 괜찮을까요..? " 하며 아우로라를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보던 오세는 다시 덥썩 아우로라의 한쪽 손을 잡았고, 아우로라가 허락한다면 아이니 역시 자유로워진 아우로라의 나머지 한쪽 손을 잡을 것이다.
공작저에 오게 된 지 며칠이 지났다. 별 다른 일은 없었고, 그녀가 할 일도 없었다. 아우로라는 어머니가 써보낸 편지의 답장을 쓰고 있었다. 공작님은 자신을 친절하게 맞이해주었고, 자신은 지금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며, 공작님은 후작가에 해를 끼치지 않으실 분이니 부디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벌써 두 페이지의 종이가 검은 잉크로 채워졌고, 세 번째 페이지도 끝자락에 다다르고 있었다.
아우로라는 잉크가 촉촉하게 묻은 깃펜을 잠시 종이에서 떼더니 고개를 빼꼼 뒤로 내밀었다. 창문새로 비치는 햇빛이 반짝반짝하니 예쁘다. 그러고보니 공작님은 이런 날씨에 산책을 나가실까? 음, 생각해보니 공작님을 뵙는 횟수가 손에 꼽는 것 같다.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거나, 식사 시간에만. 그러고보니 식사 도중에도 대화를 그렇게 하지는 않았지? 어..입맛에 맞는가에 대한 질문은 대화가 아니었나..?
무언가 고민을 하던 아우로라의 손길이 바빠진다. 아우로라의 머리도 바쁘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잽싸게 편지를 마무리하며 종이를 접고, 편지 봉투에 종이를 넣은 뒤, 펄이 들어간 왁스를 녹여 봉투 위에 뚝뚝 떨어트렸다. 그리고 그 위에 압화를 올린 뒤 공작저로 올 때 챙겨온 가문의 상징이 박힌 스탬프를 들어 꾸욱 눌렀다. 능숙한 손길이었다.
아우로라는 뿌듯한 표정으로 편지를 바라보았다. 티타임에 참석하지는 못하지만 공작저에 오기 전까진 이 방식이 유행하고 있었다. 왁스에 펄을 추가하고, 압화도 추가하는. 의외로 이런 부분에서는 유행이 더디게 바뀌니 아직 유행을 따르고 있는게 맞겠지.
이제 은쟁반 위에 편지를 올려두면 이 편지를 후작저에 전달해주겠지. 아우로라가 이제 막 은쟁반 위에 편지를 올려두었을 즈음. 아우로라는 방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오세의 명랑한 목소리, 핀잔을 주는 아이니의 목소리에 작게 쿡쿡 웃었다. 여전히 남매의 우애가 좋은 것 같아서였나? 아우로라가 들어오라는 말 대신 직접 문을 열어주며 눈웃음을 지었다.
"물론 있답니다. 오세, 아이니. 음, 어떤 용무로 찾아왔는지는 안 봐도 알 것 같지만요.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가만히 볼 수는 없겠지요?"
준비를 해야겠네요. 라며 아우로라가 다시금 고개를 돌려 창 밖을 쳐다보았다. 정말 날이 화창했다. 어떤 리본이 좋을까? 오늘도 파란색이 좋을까? 드레스는? 음, 준비를 해야겠지. 치장을 도울 사람을 불러달라고 해야할까?
" 대외적인 모습이 문제라면 아우로라 아가씨와 함께 외출하는 모습은 썩 좋게 비춰지리라 생각합니다. "
" 내가 그런 것까지 생각 못할 멍청이로 보이느냐, 네놈이 그런 이유로 사람을 이용하는 것을 내가 숱하게 보아왔지만 이번엔 그게 아닌 게 분명하다. "
그렇게 이야기하는 솔로몬이었지만, 그러면서도 플라우로스의 말처럼 손해 볼 일 없는 선택이었다. 일단 아우로라는 대외적으론 후작가와 공작가 간에 문제가 없다는 증거이며, 동맹의 증거이기도 했다. 최근 수면 위로 조금씩 불거지려 하는 황제파와 귀족파 간의 반목을 잠재우기에 딱 좋은 모습을 연출할 수 있을 테니까.
덧붙여서, 어쨌든 제 사용인들에게 호감을 산 모양이니, 한번쯤은 사용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생각했다.
" 하지만 공작님... "
" 알겠다, 다만 아우로라 양이 원한다면 외출하겠다. "
플라우로스는 솔로몬이 이야기하자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곤 덧붙였다.
" 분명 원하실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셨으면 합니다. "
그 시각. 아우로라가 방문을 직접 열고 맞이하자 오세는 함박웃음을 지었고, 아이니가 깜짝 놀라 몸을 굽혀 인사하자 그제야 오세 역시 동생을 따라 몸을 굽혀 인사했다. 어린 아이들이었지만 꽤나 능숙한 모습이었다.
" 네 맞아요! 그런데 아가씨한테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요! " " 죄송하지만...공작님이 요 며칠 바깥 구경을 안 하셔서요...아가씨께서 권해 주시면 외출하시지 않을까...해서.. "
오세가 부탁이 있다며 손을 들었고, 아이니는 조심조심 아우로라의 표정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대강 아우로라가 함께 가서 솔로몬이 외출할 수 있도록 유도해달라는 이야기.
오세의 함박웃음과 아이니의 인사. 오세 또한 아이니를 따라 몸을 굽혀 인사하는 모습이 꽤 능숙했다. 교육 받은걸까? 아우로라가 의문을 품는 것도 잠시였다. 부탁이 있다는 말에 귀를 기울이자 들리는 것은 공작님께서 요 며칠 바깥 구경을 하지 않고 계신다는 말이었다.
"공작님께서요?"
아우로라가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공작님께서 일이 바쁘신걸까? 아니면 그냥 나가지 않고 계신건가? 아이들의 말은 자신이 외출을 함으로 인해 솔로몬 또한 외출하도록 함인데. 공작님이 과연 같이 가주실까가 의문이었다. 음, 의문도 잠시였다. 아우로라가 생각을 마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간절히 부탁하는데 제가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요?"
공작님과 외출을 할 경우 대외적으로는 후작가와 공작가는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겠지. 황제파와 귀족파의 냉랭한 분위기가 가장 고조되어있는 지금, 좋은 효과를 심어줄지도 모르겠다. 이 화창한 날씨엔 반드시 나가야만 한다는 마음이 가장 컸던 탓도 있지만.
"오세, 아이니. 몸단장을 도와줄 시녀를 불러주시겠나요? 나갈 준비를 해야겠네요."
아우로라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공작저의 밖 마을은 과연 어떨까? 공작저로 오는 길에 언뜻 보고만 말았지 실제로 본 적은 없었기에 기대가 되었다.
하며 오세는 호도도도 달려 방을 나갔고, 아이니는 오세의 뒷모습을 보다가 아우로라를 돌아보면서 수줍게 미소지었다. 아무래도 시녀가 오기 전까지 함께 있을 생각인 듯.
" 실례가 아니라면 아가씨가 몸단장하는 걸 도와드려도 되나요...? "
여자아이답게 꾸미는 데에 묘한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공작저 내에서 정확히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의 느낌만 보면 수습이나 견습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그 때 복도에서 호도도도 하는 발소리가 들려오며 아우로라의 방문이 열리고 오세의 밝은 표정이 보였다. 그 뒤에는 아우로라와 같은 인간 시녀 두어 명이 서 있었고, 조심스레 아우로라에게 인사한 뒤 방으로 들어섰다.
그 모습을 본 아이니는 오세의 등을 떠밀어 내보내고 문을 닫은 뒤, 아우로라와 시녀들을 조용히 쳐다보았다. 수줍어하는 얼굴이었지만 붉은 보석빛 눈은 반짝반짝하다.
그 시각 공작의 집무실에서는. 플라우로스가 자리를 비운 뒤, 깃펜을 만지작거리던 솔로몬은 한숨을 내쉬며 펜을 내려다놓았다. 귀족의 삶은 고달팠다, 제국의 시작부터 이어진 삶이긴 했지만 그 전에 누렸던 자유로움이 그리웠다. 외출을 하는 데도 수십 가지를 고려해야 하는 삶은 솔로몬을 지치게 만들었다.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는 것에는 정치적인 목적이 가장 컸지만, 그의 무료함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어쩌면 아우로라도 그런 행동으로 인해 생긴 어떠한 과제일지 몰랐다.
공작저의 이들을 대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확실한 주종관계에다가... 그가 손수 거둔 이들이었으니까.
그러나 아우로라는.. 그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플라우로스의 자신감에 찬 말이 떠올라서였다. 분명히 외출할 거라고 했었지... 그럼 미리 준비해두는 게 좋을까.
다녀오겠다며 방을 달려 나서는 오세와 기다리는 아이니를 보며 아우로라는 잠시 작은 의문을 품었다. 아이니는 자신을 기다리는 걸까? 시녀가 오기 전까지 함께 있는다면 본인이야 좋지만...아. 그렇구나, 제 치장을 도와주고 싶었구나. 여기엔 그런 아가씨가 없었을테고....
"물론이죠, 아이니가 도와준다면 저는 굉장히 기쁠 거예요."
아우로라가 방긋 웃었다. 아이니도 치장을 도우며 여러가지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자신도 치장을 받으면서 몇가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있었으니까. 저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제 방문이 열린다. 밝은 표정의 오세를 보자하니 아무래도 시녀를 데려왔나보다.
"어서오세요. 드레스부터 외출용으로 갈아입을까 하는데 도와주시겠나요?"
수줍어하는 아이니의 얼굴과 달리 눈은 반짝한 걸 보았는지, 아우로라는 아이니에게 옅게 웃어보이고, 그 다음 빗과 아우로라가 골라야 할 장신구를 들고있는 시녀를 바라보았다.
"아이니에게도 역할을 하나 주실 수 있을까요? 머리를 빗는 것을 도와주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시녀 하나가 아우로라의 드레스를 정하고 갈아입는 걸 돕기 위해 아우로라에게 다가섰고, 시녀 하나는 아이니에게 빗을 쥐어주려 하며 "아가씨께서 드레스를 갈아입으신 뒤 머리를 빗겨드리면 됩니다." 라고 짧게 일렀다. 아우로라가 잠시 드레스 두어벌을 바라보다 하나를 가리키자 시녀가 능숙한 손길로 아우로라의 착복을 돕는다.
"어떤가요? 어울리나요?"
아우로라가 거울을 바라보며 빙글 돌아본다. 옅은 분홍색의 천이 겉을 포장한 드레스는 목이 어느정도 파여있고 남색의 레이스와 작은 리본이 장식하고 있었다. 하단의 분홍색 천이 벌어져 틈새로 보인 속 드레스는 새하얬다.
아우로라의 허락에 아이니는 눈을 반짝거리면서 아우로라를 쳐다보았다. 이야기책에서만 나오던 귀족 영애를 본 게 이런 느낌이었을까, 그런 점에서 아우로라는 아이니가 키워 온 상상을 깨트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오히려 아이니는 책이 꼭 맞다고 중얼거리면서 아가씨라고 불리려면 저렇게 행동해야 하는 걸까 하고 고민했다.
그런 고민도 잠시, 아우로라의 부탁에, 아우로라의 치장을 돕기로 한 시녀가 아이니에게 빗을 쥐어주었고, 아이니는 시녀의 말을 들은 뒤 고갤 끄덕이며 " 알겠어요. "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눈 앞에서 아우로라가 선택한 드레스가 시녀의 능숙한 손길로 아우로라의 몸에 입혀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이니는, 옷을 다 입은 뒤, 거울을 보며 한 바퀴 빙글 돌면서 질문하는 아우로라의 목소리에 꿈에서 깬 듯 놀라며 고갤 끄덕였다.
" 정말 예뻐요... 아, 굳이 드레스를 입지 않아도 예쁘시지만.. "
그렇게 손에 쥔 밧을 조물거리며 고갤 숙이던 아이니는, 이어진 아우로라의 부탁에 고갤 들고 조심스레 아우로라의 뒤로 가 섰다. 시녀는 아우로라가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의자를 가져왔고, 아이니는 떨리는 손을 보며 심호흡하다가, 조심스레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곁에 선 시녀가 결을 따라서 빗어야 한다고 이야기해 주자, 고갤 끄덕이고는 조금 서툴지만 충실히 머리를 빗어주었다.
그렇게 잠시 머리 빗는 소리만 작게 들려오는 방 안, 아이니가 조용히 중얼거린다. " 보드라워라... " 양털 같아, 까지 중얼거리던 아이니는 입을 합, 하고 막고는 죄송하다며 덧붙인다.
" 저기... 다 되었어요, 아가씨... "
빗을 손에 쥐곤 뒤로 몇 걸음 물러선 아이니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아우로라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 때 바깥에 나가 있던 오세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문에 기대 있었는데, 저만치에서 누군가가 다가오자 눈을 작게 뜨다가 깜짝 놀라서 방문을 두드렸다.
아우로라는 아이니가 책이 꼭 맞다고 중얼거리는 이야기에 눈을 휘었다. 이야기책 속에서나 보이던 아가씨가 자신인걸까? 무언가 뿌듯하면서도 좋은 기분이었다. 적어도 나쁜 인상을 심어주지 않은 것 같으니. 아우로라는 시녀가 입혀준 옷을 잠시 바라보았다. 이런 옷에는 파란 리본이 어울리지 않겠지. 아우로라가 화장대 위에 가지런히 접혀 놓인 파란 리본을 흘끔 쳐다본다.
"칭찬 고마워요, 아이니."
아우로라가 맑게 웃었다. 이런 옷 어느 장신구가 어울릴까. 시녀들이 보여줄 장신구에 어울릴만한 것이 있을까? 이러저러한 고민을 하며 아우로라는 시녀가 가져온 의자에 다소곳이 앉았다. 아이니가 머리를 빗겨주어야 했으니까. 서툴지만 머리를 빗기는 것이 마냥 기특한지 아우로라가 눈을 샐쭉 휘다가도, 다른 시녀가 가져온 상자를 가만히 바라본다.
상자를 열자 보이는 것은 여러 장신구였다. 후작가에서 가져온 그것들은 아우로라의 취향에 맞지 않는 것도 몇 있었다. 누구 취향이겠나. 안 봐도 뻔하겠지. 아우로라는 다이아몬드가 장식된 화려한 머리핀 옆의, 깃털로 장식된 소박한 머리핀을 골랐다. 보드라워, 양털 같아. 아우로라는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순수하게 웃었다. 귀엽다고 생각했겠지. 아우로라는 머리를 다 빗겨주었다는 아이니의 말에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뒤로 돌아 아이니를 마주했고, 아이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려 했다.
"정말 잘 했어요, 아이니. 덕분에 머리가 비단처럼 부드러워졌어요."
그렇죠? 라며 다른 시녀에게 질문을 한 아우로라는 마지막으로 시녀가 보닛을 씌워주자 틈새로 빠져나온 머리에 장식을 달려 했다.
자신의 칭찬에 고맙다며 답해 주는 아우로라에게 아이니는 수줍게 미소지었다. 어찌어찌 머리를 빗는 게 끝난 뒤에는 아우로라의 손길을 피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받으면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썩 좋은 듯이. 거기에 칭찬까지 덧붙여주자 얼굴이 붉어진 아이니는 애꿎은 빗만 만지작거리면서 시선을 아래로 내리꽂았다. "감사합니다..." 하고 작게 중얼거리면서.
그리고 아우로라의 치장이 마무리 될 즈음, 바깥에서 오세가 문을 두드리자 아이니가 핀잔을 주는 것을 본 것인지. 아우로라가 시녀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하자, 그 시녀는 문 쪽으로 다가가 문을 열어젖히다가 깜짝 놀라 몸을 굽히고는 문을 당기면서 뒤로 물러섰다.
열린 문으로 복도의 공기가 들어왔고, 오세가 들어온... 게 아니라 묵직한 구두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수수하지만 기품 있는 태도와 복장, 그리고 문고리를 쥔 구릿빛 손과 얼굴, 은빛 머리칼.
" 이거 실례했군, 문이 바로 열릴 줄은 몰라서 말이오. "
솔로몬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깜짝 놀란 아이니는 입을 가리고 눈을 크게 뜨다가 정신을 차리곤 고갤 숙여 솔로몬을 맞았다. 솔로몬의 뒤에는 미안한 듯 눈썹 끝이 내려간 채 어색하게 미소짓고 있는 오세가 빼꼼 모습을 보였다. 솔로몬은 아우로라를 잠시 바라보다, 가까이 선 아이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말을 이었다.
" 들은 바가 좀 있어서 왔는데, 뭔가 준비하느라 바쁜 모양이로군, 방해해서 미안하오, 급한 일은 아니니 바깥에서 기다리겠소. "
아이니가 눈을 지그시 감자 아우로라는 능숙하게 아이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어릴때 소네타의 머리를 이렇게 쓰다듬어주곤 했는데. 소네타는 잘 지내고 있을까? 설마 저번처럼 기사 지망생인 학생에게 무모하게 모의 전투를 신청했다가 지팡이로 있는 힘껏 때린 건 아니겠지. 상념을 접어두게 만드는 아이니의 수줍은 행동이 마냥 귀여운지 아우로라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시녀에게 문을 열어달라 한 직후. 아우로라는 시녀가 문을 열다 깜짝 놀라 몸을 굽히며 뒤로 물러나는 모습에 문가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아우로라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듯 양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가볍게 잡아 들어올리며 허리를 숙였다.
"공작님을 뵙습니다."
아직 리본을 묶지 못한 보닛이 흘러내릴까, 인사를 마친 시녀 하나가 조심스럽게 아우로라에게 다가가 턱가에 리본을 묶어주었고, 아우로라는 솔로몬의 말에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를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이 든 것인지, 아우로라는 재빨리 장식을 옆 머리에 매달곤 양산을 곱게 쥔 두 손을 다소곳이 모았다.
"저, 공작님..그러니까..전혀 방해하지 않으셨답니다. 마침 제 준비도 다 끝났으니, 굳이 바깥에서 기다리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그리고 아우로라는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마냥 해맑게 웃어보이다가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눈을 내리까는 것이다. 오세와 아이니가 부탁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오늘 날씨가 참 좋아서 밖에 나가보고 싶단 생각이 들어 준비를 하고 있었거든요...혹여 공작님께서 하실 말씀이 오늘은 제가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라면 조금은 아쉽겠지만요..."
보닛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리본을 묶어 고정시킨 아우로라가, 방을 나서려던 솔로몬에게 말을 건다. 전혀 방해하지 않았고, 마침 준비도 끝났으니 바깥에서 기다리지 않아도 좋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에 솔로몬은 고갤 돌려서 아우로라를 응시했다. 꽤나 화사하게 차려입은 모습을 보며, 화창한 바깥 날씨를 생각하던 솔로몬은 이어진 아우로라의 목소리에 모노클을 잠시 벗어 부드러운 천으로 닦았다.
바로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오세는 뺨을 긁적이며 솔로몬의 옆에 서 있었고, 아이니는 아우로라의 옆에 서서 솔로몬의 반응을 기다렸다. 잠시간의 침묵이 지나가고, 솔로몬은 모노클을 다시 걸치고 숨을 짧게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 나가봐도 괜찮소, 내가 찾기 어려운 곳으로만 가지 않으면. "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솔로몬은 아우로라의 표정을 보고 미묘한 듯한 표정을 짓다가 말을 이어갔다.
" 요 근래 신경써주지 못해 미안하오, 창문을 통해 햇살이 들어온다고는 하나 직접 햇빛을 쬐는 것과는 다르겠지, 보아하니 오세와 아이니가 따라 나갈 모양인데, 나가서 먹을 간식거리를 준비하라고 일러두겠소, 혹시 원하는 게 있다면 이야기하시오. "
솔로몬은 자신의 말에 아우로라가 보이는 반응을 보고 의아해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외출을 허락해줬으니 이제 즐겁게 나가보면 될 텐데, 저 모습은 그렇게 기쁘기만 한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낮게 내리깔았던 눈을 뜨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우로라를 보면서 솔로몬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하는 듯했다.
그리고 들려온 말은 혹시 오늘도 바쁜 것이냐는 이야기와, 공작 자신과 함께 외출하고 싶었다는 이야기. 솔로몬은 흐음, 하고 소리를 내면서 아우로라를 내려다보다가 곁눈질로 오세와 아이니를 살짝 보았다, 오세는 평상시 그대로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이었고, 아이니는 적잖이 긴장한 모양이었다.
" 나와 함께 외출을? 의외로군, 거절할 이유는 없지, 안 그래도 집사에게 잔소리를 들어서 말이오. "
솔로몬은 눈을 깜빡이면서 손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이야기했다.
" 그러면 너희 둘은 어떻게 하려느냐? "
솔로몬은 오세와 아이니를 보면서 물었고, 쌍둥이는 조금 고민하는 듯 했지만 웃으며 대답한다.
" 플라우로스 님을 졸라볼래요! 두 분을 방해할 수는 없으니까요! 대신 맛있는 간식은 저희도 먹고 싶어요! " " 그러니까...즐겁게 다녀오세요! 저희는 따로 나갈 수도 있을 거에요. "
외출을 허락해주어도 정작 그가 가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사용인들이 많이 걱정하는데,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기도 했고. 그래서 생각한 것이 무엇이냐면, 공작에게 불쌍하고 가련한 이미지를 연출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제 기준에서. 아우로라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런 용기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건지. 아, 아니면 혹시, 이젠 슬슬 익숙해졌나?
"정말요..?"
아우로라의 표정이 밝아진다. 양산을 쥔 손이 꼼질거리기를 멈추고, 아우로라는 오세와 아이니를 바라보았다. 쌍둥이는 플라우로스를 졸라 따로 나갈 생각인걸까? 이런, 제 자신이 혹시 쌍둥이가 나갈 기회를 뺏은 건 아닐까.
"다음에 같이 나가요, 오세, 아이니."
약속이에요. 라고 덧붙이며 아우로라는 상냥히 웃은 뒤 둘을 바라보다, 잠시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창문을 바라보았다. 새가 지저귀다 포르르 날아간다. 다음에 날씨가 좋으면, 플라우로스와 아이니, 오세, 그리고 공작님과 함께 나들이를 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귀족 영애가 요리를 하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지만, 주방장을 도와 샌드위치 정도는 만들어도 괜찮겠지. 아우로라가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나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다음 나들이 생각이라니.
아우로라는 솔로몬이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설백색에 가까운 은빛 머리 한 타래와 곤색 보닛의 리본이 같이 흘러내리듯 기울어졌다. 혹시 잘못된 것이 있는걸까? 하는 생각도 잠시, 그가 고개를 돌려 아이니와 오세에게 하는 말에 입술을 휘어 올렸다.
아이니와 오세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아이니에게 이끌리는 오세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준다. 복도에서 두 아이의 발소리는 멀어져가고, 방은 잠시간의 침묵에 휩싸였다. 불편한 침묵이 아닌 것에 감사하듯 아우로라가 양산의 부드러운 레이스를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리고 핫, 하는 소리와 함께 아우로라는 손을 들어 제 입을 가리더니 도르륵 시선을 굴려 눈을 내리깔았다. 밖에 나간다는 사실에 너무 들떴는지 아이처럼 격하게 반응할 줄이야. 이제 데뷔탕트 이후로 완벽한 성인이 될 것이고, 그때도 이렇게 아이같은 모습을 보이면 안 될텐데..
"ㄱ, 그러니까...부디 천천히 준비해주시어요."
아우로라가 볼을 붉혔다. 제딴엔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었는지, 제가 들떠버린 이 상황이 부끄러운 모양이었나보다.
아우로라가 내는 목소리에 솔로몬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꽤나 들뜬 모양인데, 실망시키지나 않을지. 솔로몬은 아우로라가 부끄러워하는 것을 보면서 이야기했다.
" 부끄러워하지 마시오, 사교계에서야 어느 정도의 연기는 필요한 법이지만, 이 곳은 연회장이 아니니, 솔직한 모습이 지내기엔 더 좋을 것이오. "
참고만 살다 보면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몰래 몰래 하는 것보다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게 낫지. 그렇게 생각하며 솔로몬은 고갤 끄덕이고 방을 나섰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솔로몬은 평상복을 벗어 두고, 수수하지만 자연스러운 장식을 금실로 수놓은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외출복의 넓은 소매를 한번 접어 단추로 고정시키고 잠시 벗어두었던 5쌍의 반지 역시 다시 손가락에 끼운 뒤, 솔로몬은 홀로 나갔다. 홀에는 플라우로스가 간식거리가 담긴 바구니 하나를 들고 기다리고 있다.
어쩌지,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어. 아우로라는 붉게 물든 제 볼이 홧홧하다는 걸 느끼곤 고개를 픽 숙였다. 보닛 속의 풍성한 프릴이 물결처럼 찰랑였다. 그러다가도 아우로라는 솔로몬의 말에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올린다.
그의 말이 맞다. 여기는 사교계도 아니고, 연회장도 아니다. 영애들이 수근거리는 티타임도 아니고, 황태자가 있는 궁도 아니고, 어머니가 레이디잖니. 라고 점잖게 핀잔을 주는 연회장도 아니다. 아우로라가 잠시 입을 오물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ㄱ, 감사합니다."
솔로몬이 나가고나서, 아우로라는 잠시 의자에 폴싹 앉고 여러가지를 고민하더니 이내 전신거울로 몸단장을 다시금 체크하곤 방을 나섰다. 홀로 나설때는 언제 나서도 넓은 장소였다. 아우로라가 홀에 도착했을 즈음. 플라우로스가 간식거리를 담은 바구니를 들고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그녀는 밝게 웃으며 그에게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홀에 도착한 솔로몬은 플라우로스에게 다가가는 아우로라를 보며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었다. 플라우로스는 자신에게 다가오며 인사하는 아우로라에게 웃어보이며 " 반갑습니다, 아가씨. " 하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리곤 아우로라의 뒤로 보이는 솔로몬을 보며 깍듯하게 인사한 뒤에, 바구니 안에 들어있는 것을 이야기해 준다.
" 요깃거리를 할 수 있도록 샌드위치를 메인으로 넣어두었습니다, 그리고 달콤한 과자도 넣어두었으니 여기, 이 병에 담긴 음료와 곁들여 드시면 좋을 거라고 주방장이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
솔로몬은 고갤 끄덕이고는 플라우로스의 손에서 바구니를 넘겨받았다, 바구니 크기가 작지는 않았지만 솔로몬이 드니 어째 작아보인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사용인들이 딱히 따라나가지는 않는 모양, 솔로몬은 바구니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다가 플라우로스에게 이야기했다.
" 쌍둥이가 외출을 돕느라 고생했으니, 간만에 바깥 구경 정도는 괜찮겠지, 데리고 나갔다 오거라, 바깥에서 마주치더라도 굳이 우리의 시중을 들 필요는 없다, 햇빛을 보면서 쉬도록. " " 감사합니다, 공작님. 그럼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아가씨 역시 즐거운 외출 되시길 바랍니다. "
플라우로스는 고개 숙여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고, 솔로몬은 아우로라가 따라올 수 있도록 천천히 걸어나간다.
아우로라는 생글생글 웃으며 날씨가 참 좋죠? 라고 간단한 안부를 물었다. 그리곤 솔로몬이 뒤에 있었는지, 깍듯하게 인사하는 모습에 뒤로 빙글 돌아보였지. 바구니 안에 무엇이 있을까? 아,아우로라가 눈을 깜빡였다. 간단한 샌드위치, 음료, 과자. 나들이를 간다면 가장 좋은 조합이었다.
아우로라가 잠시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다. ..바구니가 원래 작았나? 아닌가? 공작님이 크셔서 작아보이는걸까? 아우로라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도, 플라우로스를 비롯한 사용인들이 따라나가지 않음에 눈꼬리를 축 휘었다. 다들 공작저에 있는걸까? 오, 그건 아닌가보다. 이어지는 솔로몬의 말에 아우로라가 환히 웃었다.
"다녀올게요, 집사님. 집사님도 조심히 다녀오셔야해요."
아우로라가 솔로몬을 뽀르르 따라갔다. 살랑이는 드레스 때문에 거리가 가늠이 안 되니까 보폭을 조금 더 넓혀야 했지만, 아무렴 어떠한가. 아우로라가 양산을 펼 준비를 하며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공작님, 어디로 가는건가요?"
아우로라의 두 눈이 반짝였다. 바깥이 그렇게도 좋은걸지도 모르겠다. 스노우디아 영지는...일단 추웠으니까.
아우로라는 솔로몬을 열심히 따라갔다. 출구로 향하는 긴 복도의 끝, 그 사이로 보이는 거대한 문. 문득 며칠 전 공작저에 처음 왔던 날이 떠올랐다. 그땐 마냥 무섭기만 했는데, 지금은 한결 편안하더라지. 다음에 보낼 편지에 꼭, 공작저는 좋은 곳이에요. 라고 써서 보내야지. 그런 생각을 하던 아우로라가 공작의 대답에 눈을 깜빡였다. 여기 기후는 온화하구나.
숲과 초원, 원한다면 바위투성이인 곳. 아우로라는 작게 웃었다. 전부 좋았다. 눈, 눈, 그리고 새하얀 눈이 가득한 스노우디아보다 훨씬 선택폭이 넓구나.
아, 마을? 아우로라가 무언가를 떠올리듯 눈을 크게 두어번 깜빡인다. 아! 그때 기사님이 공작저로 자신을 호위해주면서 언뜻 보았던 마을을 말하는 걸까? 아우로라는 문이 열리는 모습에 마법일까? 하고 작은 의문을 품더니 이내 고민한다. 고민은 짧았다.
"음...마을이요. 마을에 가보고 싶어요."
공작님께서 미소를 지어보일 정도였으니까. 아우로라는 해사히 웃으며 양산을 폈다. 하늘하늘한 곤색 프릴이 달린 분홍색 양산은 드레스와 색을 맞춘 듯 싶었다. 문이 전부 열렸을 즈음 쏟아지는 따뜻한 햇빛과 산들바람이 기분이 좋았다.
마을에 가보고 싶다는 소녀의 목소리. 공작은 소녀의 목소리를 듣고 두 사람의 발로 밟아나가는 오솔길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요구한 것도 아니고, 유도한 것도 아님에도, 자신을 따라 온 이들이 만든 마을. 본디 공작 자신에게 영지라는 것은 없었고, 오직 저 동굴과도 같은 성 만이 제 소유였기에 공작에겐 그들을 보호하거나 위할 의무가 없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한 불만도 품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은 공작이 자신들을 쫓아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태어난 고향조차 버리고 떠나 온 그들에게 기댈 수 있는 존재는 자신들의 고향에서 경외의 대상이었던 그 용 뿐이었으니.
사실 이미 용과 함께 이 곳으로 온 이들 중 살아남은 이는 거의 없다, 수명이 다했기 때문이겠지, 몇몇 수명이 긴 이들은 살아있지만, 분명히 그 숫자는 한 손에 꼽았다. 그리고 현재는 그들의 자녀의 자녀, 그들의 자손들이 마을을 이뤄 복작복작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어쩌면...
그들에게 고향이라는 것은 장소가 아닌, 용이 있는 곳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솔로몬은 말없이 두세 갈래로 나눠진 오솔길 중, 오른쪽으로 향하는 오솔길을 밟아 나갔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저만치에 작은 집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이고, 자신들의 일,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치는 어른들과 그 어른들을 돕는 아이들, 여럿이서 뛰어다니며 노는 듯한 보다 어린 아이들이 보인다.
오솔길을 내려다보는 공작의 시선에 아우로라가 잠시 시선을 따라 고개를 숙인다. 공작의 마을에 대한 것은 잘 모른다. 아버지도 알려주지 않았고, 사실 아버지도 모르는 것 같았으니까. 아우로라는 스노우디아 영지를 떠올린다. 겨울마다 수도에 있는 저택에서 스노우디아 영지로 돌아갔지. 이런 오솔길에 살얼음이 끼어있어선, 걸을때마다 위태롭게 살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나곤 했는데.
뭐, 그나마 여름이 되면 스노우디아 또한 따뜻하고 여러 꽃이 피어나지만 그나마도 오랜시간 얼어있어 녹지 못하는 수정 얼음이 반짝이기 때문에 한 달만 지나면 다시 꽃이 새하얗게 얼어버릴 뿐이다. 오죽 냉기가 강하면 그 주변의 눈은 녹지를 않을까. 녹색과 섞인 파랗고 하얀 색은 그렇게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었다.
그에 반해 공작님이 계신 곳은 이렇구나. 다른 영애들을 만나기 위해 다른 영지에 갔지만 이렇게 평화로운 곳은 또 없었다. 자연 그대로 있는 공작저는 그녀에게 있어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곳으로 인식되었나보다. 아우로라는 막대를 손가락 두개로 살짝 비비듯이 돌렸다. 양산이 빙그르 돌다 멈춘다.
오솔길의 갈림길에 아우로라가 고개를 기울인다. 저기로 가면 무엇이 나올까. 숲이 나올까? 다음엔 저쪽으로 가보자고 할까? 아, 이렇게 잡념만 계속 하다간 공작님을 놓칠지도 모른다. 아우로라가 솔로몬을 열심히 쫓았다.
"와..!"
마을이다! 아우로라의 눈이 양산의 그림자에 가려져도 반짝거렸다. 평화로운 마을의 분위기는 수도나 스노우디아에서 감히 보기는 어려운 것이라 그랬을까. 아우로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멀리서 바라보다 솔로몬의 당부에 눈을 깜빡였다.
"소란스럽다뇨?"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공작님의 당부니까. 아우로라는 발걸음을 재촉해 공작의 옆에 서선 보폭을 맞췄다. 이렇게 평화로운 마을에서 소란이라니. 혹시 마물이 나타나거나 그런 걸까? 음, 그럴 일은 없을테고. 아우로라가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그 말이 끝나자 이제 슬슬 마을 사람들의 시선에도 두 사람의 모습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러자 일을 하던 사람들이 일을 멈추고 두 사람을 가만히 보았고, 그런 어른들의 시선에 무언가를 느낀 듯이 아이들이 모여들었고, 아이들 역시 두 사람을 발견한 듯 했다. 어른들과는 다르게 아이들은 두 사람에게 호기심을 보이며 모여들었고, 어느 새 두 사람 주변에는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 물론 제국 수도나 다른 북적북적한 곳과 비교하기엔 적은 숫자이긴 했지만, 오솔길은 그리 넓지 않았기에 움직이는 데에 어려움이 생겼다.
" 나올 때마다 이러니, 더군다나 오늘은 아우로라 양까지 있어서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갖는 듯하오. "
자세히 보니,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종족이다, 인간과 비슷한 생김새를 하기는 했지만 엄연히 그들에게는 인간과 다른 것이 존재했으니, 바로 그 종족의 몇 가지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귀와 다른 그 귀부터, 꼬리, 몇몇은 날개, 그리고 특이한 손의 모양 등. 어찌 되었든 두 사람의 주변으로 사람이 많이 몰렸기에, 두 사람이 떨어질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두 사람만큼 튀는 복장을 한 사람이 없으니 찾기야 쉽겠지만, 아무래도 솔로몬은 그러기 싫은 모양이었다.
아우로라의 어깨에 손이 닿으며, 솔로몬은 그녀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자칫하면 드레스 자락이 밟히겠지만 어쩔 수 없지. 두 사람의 주위를 둘러싼 이들은 솔로몬과 아우로라에 대해 관심을 보이머 떠들었다, 예쁘다라는 말부터 공작님을 본 건 오랜만이다, 저 아가씨는 누구실까? 등등.
" 물러서거라, 매번 이러는 것이 지겹지도 않느냐. "
솔로몬의 목소리가 퍼지고, 사람들은 시간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길을 비켜주었다.
" 내가 오든 말든 신경 쓰지 말고 제 할 일을 하란 말이다, 괜히 시간을 내게 할애해 봤자 돌아오는 것은 없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느냐? "
그렇게 말하면서 사람들을 꾸짖지만 사람들은 별로 아랑곳하지 않았고, 몇몇 아이들은 아직도 둘 주변에서 두 사람을 구경하고 있었다.
" 그치만 공작님 최근엔 안 오셨잖아요! " " 맞습니다, 물론 공작님께 무슨 일이 생길 리는 없지만, 계속 보이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됩니다! "
어쩌면 투정에 가까운 말들이 들려오고, 솔로몬은 짜증이 나는 듯이 손사레쳤다. 그런 그의 홀대에도 사람들의 반응은 적대적이거나 사그라들지는 않았으나, 아우로라를 배려함인지 어찌 되었든 길은 열렸다. 그제야 솔로몬은 아우로라의 어깨를 감싼 채 앞으로 나아갔다, 뒤에 아이들이 따라오기는 했지만.
곧 알게 된다라. 아우로라는 고개를 돌려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슬슬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돌아가고, 아우로라는 사람들이 이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자 타파이트빛 눈을 깜빡였다. 이이들은 호기심을 보였는지 어느새 옹기종기 모여있었고, 아우로라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아, 대다수 이종족이구나. 날개가 달려있거나, 귀와 꼬리가 있거나, 손이 특이한 사람도 있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이종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암암리에 있었기에 수도에서 그렇게 만날 기회는 없었고, 이렇게 많은 종족은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아우로라는 잠시 생각의 줄을 놓아버린 듯 싶었다. 전부 배워보고싶어! 같은 마법사 핏줄 특유의 호기심도 있었지만 점점 늘어나는 인파에 혼란을 겪는 것도 있었으니.
"그래도 다들 공작님을 반겨주는 눈치인걸요."
아우로라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웃다가도, 솔로몬이 자신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 쪽으로 끌어당기는 행동에 눈을 크게 깜빡였다. 사람이 많기 때문에 배려해준 것일까? 이런 건 처음 겪어보는데. 아우로라가 한참동안 당황한 듯 싶다가도 고개를 픽 숙이며 양산의 대를 만지작거렸다. 그것보다 공작님은 이 상황이 익숙하시구나. 심지어 매번 이러는 걸까? 아우로라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주변에서 구경을 하고 있고, 사람들은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하려 반박을 하는 것이 익숙해보였다. 그 모습이 어쩐지 친근한 사이처럼 보여 아우로라는 빙그레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신을 배려했는지 길이 트였고, 아우로라는 솔로몬과 보폭을 맞추듯 그를 따라나섰다.
" 그것도 한 두번이지, 나올 때마다 이러면 잠시 나왔을 뿐인데도 시간을 지체한단 말이오. "
그는 그렇게 부정적으로 이야기를 했으나. 아우로라는 알 수 있었으리라, 공작을 환영하는 이들의 환영 자체는 싫다고 하지 않았고, 다른 이유를 대며 상황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있었으니. 어쨌든 공작은 저들을 싫어하거나 쫓아내고 싶어하지는 았았다. 물론 아예 그런 게 없었던 건 아니다, 기분이 나쁜 날에는 굉장히 짜증나고 귀찮은, 정말로 다 쫓아내버릴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생각은 버렸지만.
" 아우로라 양 덕분에 오늘은 길이 빨리 열렸군, 최소한의 예의는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
솔로몬은 혀를 차며 걷다가, 자신이 아우로라의 어개를 잡고 있으므로, 보폭이 크면 그녀가 같이 걷기 힘들 것임을 고려해 보폭을 줄였다. 여전히 둘을 보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솔로몬의 말 때문이었을까, 꽤 많은 사람들이 돌아갔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솔로몬을 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귀족들이 차리는 예의가 아닌, 그들만의 친근한 예의로 인사를 건네며 지나가거나, 일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둘의 뒤를 따르는 몇몇 아이들은 어린 아이들답게 조그맣고 귀여웠다, 그 중에서 조금 큰 여자아이 한 명이 있기는 했지만 아우로라보다는 조그마했고, 어쩌면 아이니보다도 작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주변의 시선이나 아이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걸어가는 솔로몬은 아우로라가 미소지으면서 하는 말에 고갤 저었다.
" 그럴지도 모르지만,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소, 난 그들의 주인도, 보호자도 아니거니와 그들에게 해준 게 없소. "
그럼에도 주민들은 솔로몬을 꽤나 반겼고, 그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건넸다. 분명히 사교계에서나, 외부에서 공작은 불같은 성격에, 상대를 도발하며, 도발에 넘어오면 철저하게 반격해 짓밟는 이라고 했건만. 그런 모습을 안다면 아무도 공작에게는 무례하게 대할 리 없었다. 어쩌면 이 사람들은 외부에 대한 것을 모르고 지내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의문이 생길지도 모를 즈음에, 솔로몬은 너른 들판에 거대한 나무 하나가 서 있는 곳을 찾아냈다. 나무 밑동 부분에는 바윗덩이가 두 개 정도 있었고, 자연스럽게 나무 아래는 그늘이 져 꽤나 시원해 보였다, 아우로라가 시원한 걸 좋아할 지는 모르겠지만.
나왔을 뿐인데도 시간을 지체한다니. 아우로라는 그 부정적인 이야기에서 공작이 주민들 자체가 싫다는 티를 내지 않았음을 눈치채곤 작게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런 인간적인 면모가 있었는데도 왜 사교계에선 그를 두려워 했을까?
"이렇게 배려를 해주시니 다들 좋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적어도, 스노우디아와 수도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스노우디아는 추위에 지친 주민들이 후작이 마을에 행차를 했다 해도 아예 나타나지 않았고, 나타난다 하더라도 이리 옹기종기 모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도는..글쎄. 지나치게 굽신댔지. 의도를 모를래야 모를 수 없을 정도로.
아우로라는 솔로몬이 보폭을 줄이자 입꼬리를 휙 끌어올리며 바닥을 바라본다. 보폭이 비슷해졌다. 이제 다리를 쭉쭉 늘리지 않아도 괜찮겠지? 아우로라는 다시금 주변을 돌아보았다. 몇 주민들은 여전히 둘을 바라보았고, 친근한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살짝 뒤를 돌자 조그맣고 귀여운 아이들이 보였다. 작고 귀여운 아이들. 아우로라가 픽 웃다가도, 조금 큰 여자아이 한 명을 보곤 빈 손을 들어 가볍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고 하셔도..으음, 여기 있게 해주셔서 그런 걸지도 몰라요. 아니면 공작님이라서 좋은 게 아닐까요?"
그러면서도 아우로라는 작은 의문을 품었던 것이다. 수도에서는 공작의 이름의 일부만 언급해도 몸서리를 치는데, 이 마을은 어째 그런 기색도 없어보였다. 심지어 자신도 모르지 않던가. 음, 사교계에서만 이름이 들렸으니 모를수도 있겠지만..모르겠다. 아우로라는 너른 들판을 바라보았다. 시원한 그늘, 나무. 세상에! 아우로라가 눈을 크게 깜빡였다. 그러니까, 음. 책의 삽화로만 보있던 비밀스러운 장소 같았다.
"좋아요! 저렇게 커다란 나무가 있는지는 몰랐어요.."
그만 떠올리고 비교하자. 스노우디아의 그 거대한 얼음 나무는 도저히 쉴 곳이라고 할 수가 없었으니까. 얼어죽을 각오를 할 곳이라면 몰라도.
" 나쁜 이들은 아니지, 적어도 내가 아는 이들 중에선 1,2위를 다툴 정도로 순박한 이들이오. "
대부분 이 마을 바깥으로 나가질 않으니까. 가끔가다 공작저에서 나오는 상단이 지나갈 때 필요한 물건을 얻는 정도일 뿐, 그들이 직접 바깥으로 나가 우언가를 사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가는 아이들 중, 조금 큰 여자아이는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아우로라를 보자 눈을 깜빡이면서 웃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우로라의 말에 솔로몬은 별로 감흥이 없는 듯 이야기했다.
" 애초에 주인 없는 땅이오, 누가 오고 가는지는 상관없지. "
그러나 뒤에 오는 이야기에는 흐음, 하고 숨을 내뱉으면서 곰곰히 생각하더니 말을 이어간다.
" 나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건 생각해보지 않았소, 그러나 단순히 나라고 해서 좋아한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소? "
첫인상이 좋은 편도 아니다, 더군다나 매번 호되게 대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을 꽤나 좋아했다. 솔로몬은 곰곰히 생각하면서 자신이 이야기한 장소에 대해 아우로라가 좋다고 이야기하자 나무 밑으로 걸어가 아우로라의 어께에서 손을 떼고, 바구니에 담긴 넓은 천을 꺼내 바위 위에 펼쳤다.
" 이 위에 앉아도 좋을 것이고, 아니면 바닥에 깔아도 좋소, 그게 아니면 풀 위에 앉겠소? "
적어도 자신이 아는 이들 중에선 1,2위를 다툴 정도로 순박한 이들. 아우로라는 그렇구나...하고 작게 중얼거리곤 배시시 웃었다. 평화로운 마을에서 살아가는 순박한 이종족들. 이상적인 조합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자신이 손을 흔들자 눈을 깜빡이며 웃는 아이를 부드러운 눈길로 쳐다보던 아우로라가 솔로몬을 바라보았다.
주인 없는 땅? 생각해보니 공작령이 없다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어디서 들었더라. 아버지였나? 아우로라는 양산을 살짝 돌린다. 빙그르, 하고 돌아간 양산의 프릴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솔로몬이기에 좋아하는 주민. 자신이 말을 내뱉어놓고 어딘가 모순이 있는 것 같다 생각했지만..뭐.
"사람 마음은 신이라 해도 모른다잖아요. 정말 그 이유일지도 모르는걸요?"
아우로라는 눈꼬리를 축 내리며 푸스스 웃었다.그리고 그가 넓은 천을 꺼내 바위 위에 펼치는 모습에 양산이 혹여 뒤집어질까 조심조심,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종종 걸어갔다. 바위, 혹은 바닥, 아니면 풀. 아우로라는 그가 이미 펼쳐둔 천을 거절하는 것은 또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는지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거기도 시원해서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뒤로 돌아 경치를 구경하듯 고개를 살짝 이곳저곳 살펴보았다. 정말, 정말 좋은 곳이구나! 아우로라는 속으로 생각하며 활짝 웃었다. 편지에 꼭 이 내용을 써야겠다. 공작저는 정말 멋진 곳이에요! 사람들도 모두 친절하고, 평화로워요! 라고.
사람의 마음은 신이라 해도 모른다, 정말 그러한가? 솔로몬은 아우로라의 말이 이렇다 할 대꾸 없이, 바위에 덮은 천 위에 앉은 아우로라의 곁에 바구니를 두었고, 그 바구니의 옆에 자신 역시 앉았다. 바위 위는 그늘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꽤 서늘한 기운이 올라온다.
그는 아우로라가 고개를 살짝씩 돌리면서 주변을 살피는 것을 보았다. 그녀를 따라 그 역시 조금씩 시선을 돌리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 둘을 그늘로 덮고 있는 큰 나무 외에는 주변에 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저만치에 숲이 따로 보이기는 했지만. 이 나무 하나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나무가 일반적인 나무랑 다르게 줄기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줄기가 모여 만들어진 듯했고, 이파리 모양 역시 여러 가지였다.
아우로라는 아이처럼 맑게 웃었다. 신은 마음을 모르지. 어떻게 아냐고 묻는다면야, 사람들의 마음을 안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듣는 것에 지쳐버렸을테니까! 겠다. 그래, 아우로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꽤나 괴악한 논리였다.
천 위에 앉아도 바위 위는 서늘하다. 차가운 기운이 천을 넘어서, 옷까지 스며들고, 피부에 스며들어 닿은 부분의 체온을 낮춘다. 그래도 춥다고 생각이 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아우로라는 무의식적으로 제 허벅지 위에 손을 얹거나 그런 행동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주변에 나무는 없었다. 숲은 저만치 있었고, 저기를 보면 아까 지나온 길이 보이고. 아우로라는 고개를 들어 나무를 바라본다. 일반적인 나무는 아니라는 것을 금방 눈치챘는지 아우로라의 눈이 동그래진다. 이파리 모양은 여러가지고, 여러 줄기가 모여있는 나무. 세계수가 어떻게 생겼다고 했더라. 어째 신비로운 느낌이 범상치는 않다 생각하던 찰나, 아우로라는 동그래진 눈 그대로 솔로몬을 쳐다보더니 눈을 깜빡였다.
"처음 왔을 때요??"
세상에. 나무가 이렇게나 큰데! 이렇게 큰 나무는 몇 년이 지나야.....아우로라가 기함한다. 그렇다면, 공작님께서 용인이신게 맞다면 수명이 어마어마 하시구나. 아우로라의 눈이 데구르 굴러가 나무를 다시금 쳐다보고, 다시 솔로몬을 번갈아 쳐다본다. 어지간히 놀랐나보지?
용인이시라면 당연히 수명이 길겠지만, 이렇게 어마어마한 수명을..아우로라는 겨우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돌렸다. 역시 나무였다. 나무가 큰데...몇 년동안 자란걸까. ...10년? 아냐, 10년은 아니다. 100년? 200년..? 아우로라는 눈이 핑핑 도는 느낌이 들었다. 솔로몬의 대답 때문이었으리라.
"아, 음, 아아...ㄴ..네.."
세는 것을 그만두는 정도라니..아우로라가 입술을 꼭 다물고는 용인에 대한 자료를 찾아봐야겠다 생각했다. 뭔가, 신기한 사실들이 많지 않을까. 핫, 그것보다..공작님께선 대전쟁의 이야기를 겪으셨을까? 나중에 그것도 물어보고...또..옛날 이야기도 많이 해달라고 하면..... 무리겠지..
"ㄴ, 늙은이 취급이라뇨! 그럴리가요! 만약 그런 생각이 들어도 공작님을 젊다고 생각하도록 노력할게요!! 그..그리고..."
나이에 대한 애매한 대답을 듣고 나서 아우로라가 보여주는 모습은 썩 재미있었다. 말을 더듬으면서 일단 알겠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아우로라를 보던 솔로몬은, 이번엔 늙은이 취급은 하지 말아달라고 장난식으로 한 말에 대해서 아우로라가 당황한 듯이 그럴 일 없다고 이야기하는..
? 만약 그런 생각이 들어도 젊다고 생각하다고 노력한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뭐 어쩔 수 없겠지, 그도 그럴 것이 공작과 아우로라가 살아온 세월의 차이는 상상 이상이었으니까. 꽤나 재미있게 아우로라의 말과 행동을 보던 공작에게 아우로라는 뭔가 어색햇는지 공작에 대한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
친절하고, 황실을 위해 일하는 것도 부지런하고..
" 썩 듣기 좋군, 진심일지, 아니면 당황스러움에서 나오는 이야기일지는 모르겠지만 고맙소. "
고개를 숙인 아우로라의 붉어진 귀를 본 솔로몬은 꽤 수줍음을 많이 타는구나 생각하면서 손가락을 비비다가 바구니 안에 있는 간식거리를 꺼냈다.
아우로라는 충격에서 쉽게 헤어나오지 못했다. 젊다고 생각하도록 노력해야지. 공작님은 젊은 분이시다, 저 나무는 사실 성장속도가 굉장히 빠른 것이다, 공작님은...아우로라가 양산의 프릴을 다시금 꼬집었다. 무의미한 합리화임을 깨달은 듯 싶었다.
푹 숙인 고개는 다시금 아우로라에게 고뇌를 안겨주었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한거지?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게 본심을 내뱉은 것 같았다. 적어도 지금 자신이 보는 공작은 그랬으니까. 친절했고, 황실을 위해 일하고..또..그러니까..알게 모르게 배려도 해주시고, 등등등. 아우로라가 손가락을 꼼질댔다.
세상에. 듣기 좋다니! 아우로라의 두 눈이 핑핑 도는 것 같았다. 이럴땐 어떻게 해야하지. 진심이에요! 라고 성급히 열리려던 입을 아우로라가 합, 하고 다물었다. 더 어색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니까.
아우로라는 샌드위치를 두 손으로 받아들고 샌드위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신선한 야채, 얇은 햄과 치즈 한 장, 간단하지만 딱 알맞은 재료에 아우로라가 입꼬리를 빙긋 올렸다. 이렇게 시원한 바위에 앉아 푸르른 하늘과 나무를 보며 먹기 딱 좋은 것이었다.
"..나갈때마다 항상 세 명 이상이 졸졸 따라다녔으니까요."
이렇게 나가게 해준 것도 감사했지.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달콤했는지! 귀족 영애라도 혼자 나갈 수 있는 법인데, 아우로라는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호위하는 기사, 뒤에 숨어 아우로라를 그림자에서 숨어 지키는 기사, 아우로라를 보필하는 전속 시녀와...오, 복잡했지. 도미닉이 딸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아우로라가 생각을 끊기 위해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물었다.
앗, 맛있다. 아우로라가 작게 발을 굴렀다. 일반적이고 간단한 샌드위치라도 아우로라에게 있어선 꽤 신선하게 다가온 듯 싶었다. 이렇게 사용인 없이 밖에서 먹어본 기억이 없어서 그런가? 아우로라가 열심히 입을 오물거리다 솔로몬을 바라보고 눈을 깜빡, 하고 감았다 떴다.
"맞아요, 아무도 이런 건 생각하지 못하겠죠.."
아우로라가 샌드위치를 삼키고 그의 말에 동의한다. 공작님이 무려 샌드위치를, 그것도 사용인도 없이 외출해서 먹는다니. 아우로라가 샌드위치를 내려다본다. 나중에 꼭 같이 만들자고 주방장에게 부탁해봐야지.
"사람들은 보고 싶은대로 보니까요. 공작님이 말씀하셨듯 공작님도, 그리고 저도 이렇게 나란히 샌드위치를 먹는 건 절대 상상하지 못할 거예요."
예상했던 대로 아우로라가 외출할 때엔 최소 3명 이상이 따라나섰다는 이야기를 듣고, 꽤 답답했겠거니 생각했다. 그렇지만 후작이 딸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를 생각해 보면 무리도 아닐 테고, 거기다가 홀로 외출했다가 누구를 만날 지도 모르는 일이라 생각해보자면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뭐 솔로몬 본인은 누군가에게 위협을 당할 만한 존재 자체가 아니었고, 누군가가 따라붙는 것 자체를 싫어했기 때문에 홀로 나오는 일이 잦았지만.
" 쉬러 나오는 것임에도 신경 쓸 게 많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지. "
아우로라의 말에 동의하듯 이야기하며, 그녀가 샌드위치를 먹고 난 뒤에 발을 작게 굴리는 것을 보았다. 맛이 꽤 괜찮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솔로몬은 제 몫의 샌드위치를 또 베어물었다, 채소가 싱싱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조용히 식사를 하려니, 현재 상황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에 대해서 동의하는 아우로라의 말에 어깨를 으쓱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우로라의 이야기는. 사람들은 보고 싶은대로 본다, 라는 이야기였다, 그런가. 그러한가, 이런 일에 심각해질 마음은 없었지만 그 이야기를 듣자니 드는 생각에 솔로몬은 흐음, 하고 소리를 냈다.
그럼 날 격퇴하려던 이들에겐 내가 괴물로 보였던 거겠고. 날 적대하는 이들에게는 꽤 끔찍하게 여겨지겠군.
" 아우로라 양 역시 사람이지 않소, 아우로라 양이 보기에 나는 꽤 괜찮은 이인 모양인데. "
" 무어라 딱 잘라 답하기 어렵군, 사람은 보고 싶은 대로 본다는 것은 아우로라 양의 지론이지, 내 지론이 아니니 말이오. "
말은 그렇게 하긴 했지만. 사실 단순히 부정적인 대답은 아니었다, 아우로라가 이야기한 '사람들'과 아우로라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지, 일단은. 솔로몬은 자신을 보면서 배시시 웃는 아우로라를 보았다, 공작저에 온 지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고, 솔로몬 자신과는 마주치거나 이야기를 나눈 횟수가 손에 꼽는데도 저렇게 웃으면서 대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조금이지만 흥미가 동한 솔로몬은, 고민하는 듯 눈을 깜빡이는 아우로라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여전히 조그마한 꽃송이 같은 느낌의 소녀를 보던 솔로몬은 남은 샌드위치 조각을 입 안에 털어 넣고 씹어 삼킨 다음, 아우로라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 상대방을 나쁘게 보지 않는 것은 안 좋은 태도는 아니오, 그러나 잘 모르는 상대에게 너무 긍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좋지 않지, 아우로라 양, 그대는 내가 후작저의 평화를 고의적으로 깨트린 것에 대해서 나쁜 감정은 없는 것이오? "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솔로몬은 병의 뚜껑을 열고 시원한 음료를 잔에 채웠다. 먼저 아우로라 몫의 잔을 채운 뒤, 자신 몫의 잔을 채워 마시며 아우로라에게 잔을 건넨다.
그리고 자신이 웃으며 한 말에 딱 잘라 답하긴 어렵다는 대답이 들려온. 아우로라는 샌드위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하긴, 이건 내 의견이었다. 그렇지만 부정적인 대답은 아닌 것 같고...음, 아닌가? 아우로라는 공작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대화도 많이 해본 적은 없지만.
일단 그녀가 생각하는 공작은 소문만큼 무섭지 않았다. 그런 것 같지 않은 것 같지만 친절하고, 사용인들에게 자애롭기도 하고, 또...자유로웠지.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진 몰라도.
"나쁜 감정이요..?"
아우로라는 솔로몬의 이야기에 무어라 답해야할까, 생각하며 샌드위치를 다시금 베어물었다. 먹이를 주면 곧이 곧대로 먹는 토끼마냥 열심히 샌드위치를 먹었기 때문일까, 샌드위치는 어느덧 두 입 정도를 남겨두고 있었다. 아니, 이제 한 입. 아우로라가 샌드위치를 삼켰다. 생각을 정리한 것 같았다.
"아버지가 옳지 않은 일로 이득을 취하셨으니, 언젠가는 터질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제 동생은 모르겠지만, 저는 나쁜 감정은 없답니다."
아우로라가 솔로몬이 건네는 잔을 얼떨결에 받아들더니 멋쩍기라도 한지 히, 하고 작은 바람빠지는 웃음을 냈다.
나쁜 감정은 없냐는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조금 특이했다. 저게 일반적인 사람이 할 수 있는 생각일까? 평화롭고 유복한 가정이 한 순간에 혼돈에 빠지면서, 적대적인 가문에 볼모로 온 이가 할 수 있는 이야기일까. 의문을 가지기에는 네 곁에 앉은 소녀가 그리 이야기하고 있었다, 과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솔로몬은 굉장히 차분하게 이야기를 끝내는 아우로라를 보면서 혹시 무언가 결여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차분한 이유는 무엇이지. 난 불청객일 텐데, 물론 지금까지 괄시하거나 한 일은 없었지만은.
" 언젠가는 터질 일이라, 그렇다면 나로 인해서가 아닌, 다른 이로 인해 문제가 생겼더라면 지금보다 상황이 나을 수도 있었을 텐데, 같은 생각도 들지 않소? "
조금 캐묻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소녀는 조금, 네가 봐 왔던 다른 사람들과 달랐으니까. 그래서 조금은, 이 소녀에게 너는 어떤 느낌을 주는 존재일지 궁금해진 모양이었지.
처음엔 많이 무서웠다. 가문이 무너질 수도 있었고, 아버지가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까지 접하니 가문은 수치심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상황에서도 아우로라는 차분했다. 아버지가 잘못을 했다는 사실을 접했고, 그 다음엔 언젠가 터질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잘못을 알아채지 못한 자신의 잘못도 있다고 생각하였으며...아우로라가 빙그레 웃었다. 다른 이로 인하여, 라.
"만일 공작님이 아니라 황제 폐하로 인해 이런 일이 생겼더라면 이야기는 달라졌겠지요."
다른 가문에게 들켰더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짓눌러서 상황이 나아졌겠다만, 그건 또 아우로라를 슬프게 했을 일이겠지. 아우로라는 황실을 생각한다. 폐하의 귀에 들어갔던 일이라면.....아우로라는 좋지 못했던 짝을 생각했다. 줏대없고, 그러면서도 허영심과 야망만 가득한...
아우로라가 마지막 샌드위치 조각을 여유롭게 입 속에 넣고 씹어 삼켰다.
"그리고, 공작님께선 저를 손님으로 대해주시잖아요. 인질이 아니라요."
아우로라가 주스를 한 모금 마시며 빙그레 웃었다. 그게 공작님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예요. 라면서.
솔로몬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인해 이러한 일이 생겼다면 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에. 아우로라는 솔로몬이 아닌 황제로 인해 이러한 일이 생겼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분명히, 그가 아닌 황제가 이 일을 알아채고 후작저에 보복이나 벌을 내렸다면, 지금보다 상황이 나빠지면 나빠졌을지언정 나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 소녀는 공작이 후작저를 그 일 이외의 것으로는 딱히 짓누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이 소녀, 후작저의 영애를 제 손아귀에 두는 것만으로 후작저를 통제하는 것이 한결 편안하고 쉬워지기는 했지만.
솔로몬은 아우로라의 얼굴을 보면서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조금 궁금해졌다. 마침 덧붙여진 아우로라의 이야기는 더 이상 후작저와 공작저의 불화가 어떠한 흥미나 화젯거리로 작용하기 어려우리라는 감상을 안겨주었다.
신기하게도, 이 소녀는 공작이 그녀의 평화에 큰 위협을 가했음에도, 직접 만나 본 공작이 자신에게 예의를 갖춘다는 것만으로 그를 나쁘게 보지 않고 있었다. 선입견이라는 것은 좋지 않으나 그렇다고 과감히 버리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닐 텐데.
" 아우로라 양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후작저에 압박을 주지 못할 뿐만아니라 오히려 내가 압박을 받게 될 수도 있소, 굳이 홀대할 이유를 찾지 못한 것도 있지만, 손님으로 대하는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다오. "
날 나쁘지 않게 보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인지 모르겠군.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솔로몬은 제 몫의 주스를 마셨다.
귀족파는 황제에게 있어서 손톱 주변의 거스러미와도 같은 존재일 것이다. 잘못 떼어내면 피가 날지도 모르고, 그렇다고 해서 마냥 깔끔히 떼어내도 다시 생기기 마련인. 그런데 황제가 이번 사건을 볼모로 잡아 그런 거스러미를 완전히 치워버릴 가능성은..있고도 충분히 남았지.
뭐, 그런 의미로 공작은 여러번 반복해서 말하지만 좋은 사람이다. 고작 자신 하나로 더 이상 상황이 나빠질 일은 없을테니까. 그렇지만 한가지 의문인 것이, 공작이 과연 언제까지 자신을 공작저에 두느냐. 였던 것이다. 아우로라가 이상한 상상을 이어갔다. 이대로 양녀로 들어가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부터. 공작님이 언젠가 정이 들어 자신이 결혼할 때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거나...
??
이게 대체 무슨 생각이람. 아우로라는 주스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시원하고 달콤하니, 이런 산들바람과 풀내음을 느끼며 마시면 더더욱 기분이 좋아지는 맛이었다. 아우로라가 아이처럼 빙그레 웃었다. 방금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싹 잊을 정도로.
"그렇군요..."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오히려 공작님께서 더 위험해지겠지. 아무리 황가의 성을 받은 공작이라도 엄연히 대귀족중 하나인 스노우디아 후작가의 영애를 데려와놓고, 그녀가 위험에 빠지도록 한다면... 이건 황제라도 어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뭐, 다른 것 보다. 손님으로 대하는 이유중 홀대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는 말이 아우로라를 안심시켰다. 아우로라가 다시금 주스를 홀짝였다. 탁 트인 눈 앞을 보면서.
만에 하나, 솔로몬 자신이 구석에 몰린다는 가능성에서도, 그 스스로는 사실 거리낄 것이 없었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위협 정도야 제 힘으로 충분히 뿌리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문제는 그가 단순히 '드래곤'인 솔로몬이 아니라, 제국의 대귀족 중 하나인 '공작'이라는 것이었지.
그가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공작인 그가 지내는 곳인 공작저에는 딸린 입이 있었다, 물론 그들은 공작에게 짐이 되고 싶어하지는 않을 테니 만일 문제가 생겨 공작이 그들로 인해 묶여야만 한다면. 아마 전부 흩어지거나 죽어 없어지는 선택을 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것은 전혀 공작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으니. 어찌 보면 이번 일은 일방적인 공작의 승리이면서도 동시에 불안요소를 떠안은 것이 되는 셈이었다. 그것만으로 아우로라를 판단할 만큼 속이 좁거나 한 이는 아니었으나 그녀가 있다는 것 만으로 신경써야 할 부분이 늘었으니.
조금은 불편하다. 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일단, 그는 귀족파가 눈엣가시이긴 해도 그들 역시 제국의 일부였기에 그들을 전부 뜯어낼 이유도 없었거니와, 위험부담이 너무나 컸다. 단순히 귀족들 뿐이라면 모르겠으나 그들에게 딸린 입들이 무슨 잘못이 있는가?
아니, 정정하겠다. 이미 물러질 대로 물러지기는 했지만 공작은 인간이 아니었으니, 그런 사소한 것들까지 신경썼을 리 없다. 그저 제가 하고 싶은 일들의 경중 정도만을 따져봤겠지.
아무튼, 솔로몬은 제 곁에 앉아 긍정적인 분위기를 주변에 흩뿌리는 소녀를 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새삼 다른 고민들이 떠오른다, 언제까지 그녀를 공작저에 머무르게 해야 할까. 가끔씩은 후작저로 돌려보내는 것이 후작가의 그리움을 자극하고,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을 늘릴 수 있을 테지만.
" 그렇다니 다행이로군, 가끔은 이런 것도 좋겠지. "
어느 새 비어버린 잔을 보며 솔로몬은 눈을 잠시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새삼 자신의 행동에 대해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매번 지나간 행동에 대해 짜증을 내기는 하지만. 겨우 소녀 한 명 때문에 신경을 쓸 게 마구 늘어나다니.
분명 다른 이들을 대하듯 거침없이 대하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아직까지도 그는 아우로라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에 대해 고민한다.
" 앞으로도 원하는 게 있다면 이야기하시오, 그대를 홀대하지는 않을 것이니. "
고민 끝에 일단 그녀에게 보다 적극적인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제 입으로 확신을 주는 것으로, 그녀의 방향성을 보기로 했다.
아우로라는 공작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없었다. 공작이 이종족임을 알고, 황제파의 가장 큰 기둥이며, 많은 공을 세웠음과 동시에 악명이 자자하기로 유명함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깊은 속사정까지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과 같은 간단한 것부터 시작해 그가 사용인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 그가 궁지에 몰릴때 어떤 선택을 하는지까지. 그러니까, 지극히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생활을 모른다는 뜻이겠고....아니, 일단 그걸 알면 아우로라가 여기 있을리가 없지만.
일단 아우로라는 제 몸을 지켜야 공작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보았다. 앞서 생각하였듯 그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도 없었을 뿐더러 황제파와 귀족파의 팽팽한 대립을 막아야 하는 것도 현재 그녀의 일중 하나였으니. 이미 자신이 공작저에 있다는 사실은 황제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고, 이 이슈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이다. 큰 축으로 나뉘는 황제파와 귀족파의 사람들이 아니라, 중립을 선언하는 평범한 귀족들에게. 누구나 입을 열고 수근거리며 각종 망상을 펼칠 가십거리가 되어 작은 소식이라도 큰 떡밥을 물어버린 물고기마냥 펄떡거릴 것이다. 글쎄, 공작저에 있는 아우로라 영애 이야기를 들으셨나요? 라면서.... 세상에, 그건 너무나도 끔찍하다.
그렇기에 아우로라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은 적었다. 후작저에 있었듯이 조용히, 얌전히. 흔히 말하는 레이디의 소양을 다하며 가끔가다 이런 외출을 즐기고. 다시 조용히 틀어박혀 사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시녀들의 이야기라도 들으면서 천천히 알아갈 수도 있을 것이고, 아우로라는 점점 더 안전한 방법을 선택하게 되겠지.
그렇지만 그게 아우로라가 원하는 삶일까? 아우로라가 주스를 다시금 마셨다. 잔이 점점 비어가건만 생각은 도통 비질 않는다. 이럴땐 딱 하나의 방법이 있었다.
"바람도 시원하고, 수도처럼 복잡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춥고 눈이 내리지도 않아서 정말 좋아요. 이런 곳에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공작님."
생각의 주제를 돌려버리고 밤에 자기 전 계속 꼬리를 잇는 것. 아우로라는 생각을 뚝 끊어버리고 대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따스한 이곳에 대해서. 아우로라가 이어지는 솔로몬의 이야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아우로라가 아주 잠시 고민하듯 미간을 미미하게 좁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와, 정말요? 기뻐요!"
지금은 떠오르는게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까 걱정이었지. 그래도 언젠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공작님께 조심스레 청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런데 사소한 것도 청해도 되는 걸까? 공작님, 풀밭에 누워서 굴러봐도 될까요? 마부님이 그랬는데, 풀밭은 무지 푹신하댔어요! 같은 사소한 소원도. 앗, 안될지도 모르겠다. 드레스가 더러워지니까. 아우로라가 잠시 눈꼬리를 축 내리며 주스를 마저 마셨다. 빈 잔을 보니 새삼 실감이 났다. 즐거웠던 간식 시간도 벌써 끝이 나버렸음을.
바람도 시원하고, 수도처럼 복잡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춥고 눈이 내리지도 않아서 정말 좋다고 이야기하는 소녀를 보면서 솔로몬은 눈을 깜빡였다. 물론 자신도 이 곳이 다른 극단적인 곳보다야 낫다고 생각했지만은, 저렇게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굳이 할 정도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화를 나눌 수록(그것이 대화라고 부르기에 문제가 조금 있기는 했지만)어째 그녀에 대한 의문점은 풀리기는 커녕 새로 생겨나기만 했다. 이전에는 이런 곳에 오거나 한 적이 없으니 그렇겠지 하고 의문을 밀어 넘기던 솔로몬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이야기하라는 말에 기쁘다며 답하는 아우로라를 보며 흐음, 하고 바람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자니 어느새 비어버린 잔을 내려다보는 모양. 그렇다고 잔을 채워주기에는 이미 챙겨온 주스는 동이 났다. 마법을 쓰면 당연히 채울 수야 있겠지만, 어차피 간식거리였고, 간식으로 배를 채워버리면 제 시간에 해야 하는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겠지.
솔로몬은 어떻게 하면 남은 시간을 조금 더 알차게 보낼 수 있을까 생각했다. 산책이라고 나오긴 했지만 걷거나 한 것은 여기까지 온 것뿐인데. 그러면 음식을 먹었겠다, 조금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까지 생각이 미친 솔로몬은 아우로라에게 이야기했다.
" 심심하거나 하지는 않소? 아직 돌아가기까지 여유가 남았으니, 주변을 거닐거나 해도 좋다오. "
이곳은 정말 좋다. 앞으로 영원히 변치 않을 생각이었다. 아우로라는 방긋방긋 웃었다. 다음에도 오자고 하고싶다. 그땐 플라우로스도, 아이니도, 오세도 데려오는 것이다. 그리고 샌드위치를 나누어먹고....아, 그런데..그게 가능할까? 아우로라가 잠시 생각한다. 안 된다고 하면 어쩌지? 아니, 아까 공작저에선 오세와 아이니가 같이 나가는 걸 허락하는 분위기였으니 그럴리 없겠지. 이러저러한 잡념은 접는 것이 좋겠다.
아우로라는 주스 잔을 가볍게 매만졌다. 더 마셔보고 싶지만, 그렇다면 배가 차버릴테다. 그러면 저녁을 먹지 못하겠지? 음, 그건 조금 아쉬울 것 같다. 그렇다고 지금 가기엔 조금 아쉽다.
아우로라는 고개를 들어 나무를 쳐다보고, 다시 앞을 응시한다. 탁 트인 자유. 이걸 즐겨보면 좋을텐데도. ..좋을텐데도?
아우로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변을 거닐거나 해도 좋다니. 돌아가기까지 여유가 남았다고 했다. 무려 여유가! 재깍재깍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지. 아우로라의 두 눈동자가 올망올망 생기로 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149 응응,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우로라가 지금 모든 일에 지나칠 정도로 감사했으니까...음, 설정 몇개를 들고 왔는데 수정할 게 있으면 상의해보자! 헉, 그리고 스토리라인 좋은 것 같아!! 아우로라의 원래 성격이면...(맘뭄미 생각하고 아득해짐)
그리고 얍, 아우로라와 황태자의 이야기..?
* 입궁 후 일주일간은 아우로라를 방치하였으며, 기본적인 환대조차 하지 않았다. 아우로라의 기를 꺾기 위해서였다. * 이후 적응기간이 끝나자 아우로라는 황태자가 시키는대로만 고분고분 따라야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가문과 소네타가 볼모로 잡혀있었다. 아우로라는 여기서 큰 슬픔을 느꼈다. 어쩐지, 황태자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할리가 없었다. ㄴ 소네타가 아우로라를 아끼고 마법사가 되려는 이유는, 우연치 않게 수도 골목 구석에서 아우로라가 제발 가족들은 살려달라며 황태자에게 매달리는 것을 본 이후였다. ㄴ 황태자는 아우로라에게 항상 감사를 강요했다. 살아있음에 감사하라. 너의 의지는 짓밟되 마지막 남은 정신마저 짓밟지 않은것에 감사하라. * 하여 황태자가 간혹 잔뜩 시들고 죽은 채소로 만든 것을 주곤 했다. * 그놈의 레이디. 황태자의 레이디는 얼마나 이상적인지 모르겠다. 외출 금지가 기본이었지만 사교계에 발을 내딛거나, 파티가 있을 경우 아우로라는 평소의 순수한 치장을 해서는 안 됐다. ㄴ 흰색 옷을 유달리 좋아하는 이유도, 치장을 할 때 화려한 장신구를 택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파티에서 아우로라는 상체가 달라붙거나 파인 쨍한빛의 드레스와 장신구를 강요당했다. * 마법 실력을 가늠해보겠다며 마수 평원에 던져진적이 있었다. 이때부터 아우로라는 도구가 없으면 마법을 불안정하게 사용하기 시작했다. * 궁인들은 아우로라를 무시하기 시작하였고, 아우로라는 이 사실을 황제에게 고하지 않았다. ㄴ 다만 본보기로 한 사람의 손에 찻물을 부어준적은 있었다. 그것도 방금 끓인 차를. 그 모습을 보다 못한 황태자가 사제를 불러 치료하긴 했지만. 의외로 성격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 황태자의 진정한 속내를 아는 건 아우로라였다. * 도미닉이 중립을 유지하는 마탑까지 거론하며 황제를 구슬려 파혼한 이후. 아우로라는 한동안 저택에 틀어박혔다. 과보호를 받았다.
사실 아주 늦어도 상관은 없었다, 일단 사용인들이 자신을 외출시키려고 노력을 한 데다가, 공작저 주변에서 공작을 위협하거나 할 것은 전혀 없었으니까. 밤 늦게까지 바깥에서 거닐다가 별을 보아도 좋았다, 별을 보는 취미야 딱히 없었지만, 할 게 없으면 별을 세는 것은 꽤 쓸만한 시간 죽이기였으니까. 그렇지만 늦게까지 있어서 좋기만 할지는 모르겠다, 해가 떨어지면 자연스레 기온도 떨어질 테고, 그러면 자신은 둘째치더라도 가볍게 나들이옷을 입고 나온, 네 곁에 앉은 영애가 감기에 걸릴 수도 있을 테니.
그렇게 생각하던 솔로몬은, 아우로라에게서 그녀의 아버지가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돌아오라고 이야기했다는 말을 전하자, 눈살을 찌푸리다가 천천히 표정을 풀었다. 뭐, 스노우디아의 밤은 더 추울 테니, 바깥에 굳이 나가있어서 좋을 게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걸까, 어찌 되었든 간에, 이 곳은 스노우디아도 아니었고, 후작가도 아니었다. 이 곳에서 가장 큰 힘을 지닌 이는 솔로몬이었고, 지금 이 순간에 아우로라의 보호자라는 존재에 가장 가까운 것도 그 자신이었으니.
솔로몬은 한숨을 쉬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아우로라를 내려다보면서 자연스레 손을 내밀어 손바닥을 내보인다. 길쭉한 다섯 손가락과 그 손가락들에 끼워진 금빛 반지들을 보이며 솔로몬은 입을 열었다.
" 아버지의 말을 기억하는 것은 나쁘지 않지, 허나 그것은 아버지의 보호 하에 있을 때의 이야기, 지금 아우로라 양이 몸담고 있는 곳은 공작저요, 그리고 그 공작저의 주인은 나라는 것쯤은 알겠지? 그러니 일어나시오, 무언가를 먹었으면 몸을 움직여야지. "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다니. 아우로라가 눈을 깜빡였다. 공작저 주변엔 위험한 것이 없는걸까? 음, 생각해보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누가 겁없이 공작님을 건드릴까. ...우리 아버지? 음, 이건 뒤로하자. 아버지도 후회하고 계신 걸. 아우로라가 이것저것을 상상해본다. 석양이 지는 모습, 별이 총총 뜨는 모습, 안에서 보는 것과는 다른 것들. 만지지 못하고 손에 쥐지 못하는 것을 만지고 쥐어볼 기회. 그렇지만.
아우로라는 솔로몬의 눈살이 찌푸려지는 걸 보았는지 슬쩍 시선을 내리깔았다. 말을 잘못했다. 혼나겠지. 스노우디아와 이곳은 달랐다. 눈뭉치 사이로 숨을 죽이던 늑대 마물이 있지도 않고, 혹한이 다가와 몸을 에워싸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바보같이. 아우로라가 눈을 이리저리 굴린다. 어떻게 해야하지. 어떻게 해야...
"...."
아우로라가 한숨소리와 더불어 자신에게 보이는 손을 가만히 보았다. 지금은 아버지의 보호 하에 있지 않았다. 공작저에 있고, 그곳의 주인은 솔로몬인 것이 당연했다. 아우로라가 솔로몬을 가만히 올려다본다. 그렇지, 지금은 마냥 눈치만 볼 때가 아니었다. 아우로라가 조심스레 솔로몬이 뻗은 손을 잡고 일어서려 했다.
솔로몬의 도움으로 쉽게 일어난 아우로라는 가볍게 불어오는 바람이 뺨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북부의 찬 바람과, 수도의 의뭉스러운 바람과 다르게 부드러이 스치는 그 바람이 아우로라의 많은 생각을 잠재웠다. 걱정도, 근심도, 아주 잠시간 내려놓도록.
아우로라가 솔로몬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어디로 갈까? 어딜 가더라도 아우로라에게 있어서 좋은 곳이었다. 색다른 곳은 마법사의 피를 가진 그녀의 호기심의 갈증을 해소시켜주니. 들려온 대답은 아우로라의 타파이트빛 눈을 깜빡이게 만들었다. 목적지가 없다고?
"..그렇군요.."
정해진 답이 없다는 것은 아우로라에게 있어 꽤 신기한 답이었다. 이것을, 저것을, 그것을. 아우로라에게 주도권이 있는 순간은 꾸밀 옷을 정하는 시간 뿐. 제국의 영애이기에 당연히 그런 삶을 살았고, 자유로운 신분이 아니었기에 당연히 그러하였으니. 그런데 아우로라에게도 선택할 기회가 있다니.
"네!"
아우로라가 환히 웃었다. 충분히 거니는 것을 목표로 하자.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가고 싶은 대로. 발길에 신경쓰지 아니하고. 아우로라가 솔로몬에게 이끌리듯 풀밭을 가로질러 걷나 싶다가도, 아주 잠깐 보폭을 넓혀 솔로몬과 걸음을 맞췄다. 이게 첫 번째 선택이었다. 잘했다는 것 마냥 저 멀리서 풀벌레가 울고,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 응응 차근차근 진행해보자!! 그리고 아우로라는...사랑으로 보듬어주세요 웃흥♡ ㅋㅋㅋ!!
일어선 두 사람에게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을 타고 풍겨오는 풀내음은 꽤 청량한 것이어서, 들이마실 때마다 가슴 속이 시원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솔로몬은 자신의 이야기에 눈을 깜빡이던 아우로라가, 즐거운 듯, 환한 미소와 함께 '네!'라고 대답하자, 제 선택이 꽤 괜찮았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걸어나갔다.
처음엔 자신이 먼저 내딛은 발걸음이었기에 속도에 차이가 있었지만, 아우로라가 따라올 수 있도록 천천히 걷고 있기도 했고, 아우로라가 곧 자신의 발걸음에 맞춰 보폭을 조절했기에 두 사람의 속도에는 별 차이가 없어졌다. 그렇게 자연스레 풀밭을 거닐던 두 사람이었기에, 신발이나 바짓단, 치맛단에도 자연스럽게 풀내음이 스몄다.
수도나 보통의 귀족 가문 안에서라면 제대로 포장되지 않은 길로 돌아다니다간 옷을 더럽힌다고 혼이 날 만한 일이었지만. 그 귀족가의 주인이 그러겠다는데 누가 감히 무어라 할 수 있을까, 뭐 사용인들이 할 일이 늘기야 하겠지만, 그들은 그 일을 하고 봉급을 받아가며 생활하고 있었으니,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으리라.
뭣하면 같이 세탁을 할 수도 있었다. 그에겐 남는 것이 시간이었으니, 시간을 순조롭게 보낼 수 있다면야.
각설하고. 두 사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자연스럽게 발자국과 함께 조그마한 길이 남았다. 잠시 동안을 말 없이 걷던 솔로몬은 쥔 손에 힘을 조금 풀면서 이야기했다.
" 혹여 불편하다면 손을 놓아도 좋소, ...생각해 보면, 누군가의 손을 쥔 횟수도 손에 꼽는군. "
상쾌한 풀내음, 자연 그대로의 소리. 고요한 설원과 복잡한 대도시와는 다른 곳. 아우로라는 솔로몬과 보폭을 맞춰 걸으며 풀밭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제대로 포장되지 않은 길은 풀내음을 스미게 하고, 내려앉는 차분한 공기는 그런 풀내음을 고요히 덮는다. 아우로라가 그런 것이 마냥 신기한 듯 땅을 내려다보고 발걸음을 옮겨보았다.
사실 티타임때마다 여러 정원을 거닐곤 하였으니 풀밭 또한 거니는 것을 하지 않아본 촌뜨기는 아니었다만, 온전히 제 자유를 가지고 거니는 것은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아우로라가 문득 흙이 묻은 구두의 앞코를 바라보았다.
시아, 누누히 말하지만 네 옷의 가치를 생각하렴. 설원의 숲길을 개척해서 걷지 말라고 했지. 약초가 필요하면 약초꾼을 불러오면 될 거 아니니! 문득 어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으나, 아우로라는 신경을 꺼보도록 노력한다. 여긴 설원도 아니고, 공작님께서도 직접 이 길을 걷고 계시니까. 이런 것을 감내하고 걷는 것이 아니던가. 사용인들이 조금 고생하겠지만, 청소 마법을 같이 사용해주면 괜찮지 않을까?
아우로라는 그가 쥔 손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곤 고개를 올렸다. 혹여 불편하다면 손을 놓아도 좋다며, 그리고 누군가의 손을 쥔 횟수가 손에 꼽는다는 말까지. 아우로라가 물끄러미 손을 바라보았다. 그가 구릿빛의 손으로 새하얗고 작은 손을 쥐니, 대비가 되는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다. 아우로라가 잠시 머뭇거렸다. 무례한 행동이 아닐까, 싶어서.
"..그게, 불편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아우로라가 솔로몬이 쥔 손의 손가락을 옅게 꼼질거렸다. 친한 영애와 잡은 손과도 다르고, 소네타의 손과도 달랐으며, 황태자의 손과도 다른 그 감각에 아우로라가 여러 말을 고르고 삼키길 반복하다 고개를 올려 솔로몬을 바라보았다.
"공작님께서 다른 사람의 손을 잡아본 것이 손에 꼽을 정도시라면, 제가 앞으로 자주 잡아드리면 되는걸까요..? 그러면 몇 번 더 잡으면 손가락으로도 세어볼 수 없을 정도가 될..거고..그러니까..."
불편하면 손을 놓아도 좋다. 라는 이야기에 머뭇거리면서 불편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아우로라의 목소리에, 자신이 말을 꺼내는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솔로몬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평상시라면 그리 신경 쓸 만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지금 네 말상대 역할을 하고 있는 소녀는, 앞에 어떠한 전제가 붙느냐에 따라서 정해진 답만을 할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자연스레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이미 내뱉은 말이고, 그 말에 대해 답한 목소리는 불편하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손아귀에서 작고 여린 손가락들이 꼼질대는 것을 느끼면서, 아우로라에게서 들려온 목소리가 자신을 향해 있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생각해 고개를 내려보았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예상대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조그맣고 하얀 얼굴.
손을 잡아본 것이 손에 꼽을 정도라면, 손가락으로 꼽기 어려울 정도까지 계속 잡아드리면 되는 것일까요?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나오는 것인지 그로서는 알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그렇기는 했지만 그 말은 지금까지 아우로라가 했던 말들 중에선 가장 적극적이고 나름의 이유가 있었기에. 솔로몬은 괜찮다고 여기는 듯 했다.
이우로라는 가만히 손에 집중한다. 혹시 공작님께서 불편하신건가? 싶은 생각이 스치자 아우로라의 눈동자가 아주 잠시간 잘게 흔들렸다. 실수를 한 것이라면 어쩌지? 그렇지만 공작님께서 불편해보이는 기색이 있으신가? 아우로라가 괜히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그리고 눈을 마주쳤을 즈음, 아우로라가 내뱉은 말은 그렇게도 어리기 그지 없었다. 어린 아이가 했을거라 믿어 의심치 않을, 엉뚱하면서도 뒤틀어 생각해보면 명료한 해답. 이 나이가 되면 이해하기 힘든 해답.
그럼에도 공작은 그 대답이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우로라는 솔로몬의 대답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그 안에 오밀조밀 감정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자각에서 당황, 당황에서 기쁨까지. 공작저에서 지내는 동안이라면 솔로몬의 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면, 계속 잡다보면 손에 꼽지 않을 정도가 되겠지. 아우로라가 잠시 고민하다 용기있게 덧붙였다.
"ㅁ..무르기 없기예요.."
무를 사람은 아니겠다만, 혹시 모르니까. 아우로라는 다시금 한 걸음을 내딛는다. 편지에 쓸 내용이 가득 들어차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오늘은 날씨도 좋았고, 공작저 사람들이 도와줘서 예쁘게 치장도 했고, 공작님과 밖에 나가고, 간식도 먹었고. 손을 잡아도 된다는 허락까지 받았다. 세상에, 편지지가 봉투 속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써버리면 어쩌지? 아무렴 어때. 아우로라가 방실방실 웃었다.
공작저에 있는 동안은 손을 잡아도 좋다. 단, 그 스스로가 원한다면, 이라고 조건을 걸며 이야기하긴 했지만 아우로라에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 없는 모양이었다, 이미 아우로라가 자신을 올려다보면서 덧붙인.
무르기 없기에요. 라는 말로 아마도 확실해졌다고 보아도 되겠지. 보통이라면 그냥 말 없이 넘겨버릴 수도 있으련만, 어쩐지 그녀가 대답을 기다리는 듯 해 솔로몬은 선선히 고갤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
그리하겠노라, 하고.
" 무르지 않을 테니 걱정 마시오. "
라면서 뜻을 확실하게 전한 솔로몬은, 그럼에도 아우로라가 쉽게 안심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었는지는 몰라도, 제 손에 얹혀진 듯한 모양새인 조그마한 아우로라의 손을 조금 힘주어 쥐었다, 당연히 너무 세게 쥐면 아플 테니, 단단히 붙들렸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만. 그렇게 걸음을 걷다 보니, 아우로라의 얼굴엔 어느 새 순수한 미소가 자리했다, 처음 만났을 때에도 물론 미소를 머금고 있기는 했으나, 무언가 꾸며내지 않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기쁜 표정에 솔로몬은 썩 괜찮은 것 같다면서 심심한 감상을 머릿속에 담아두고, 그 덕에 많은 것을 해보는 것 같다면서 감사함을 전하는 목소리에 천천히 입을 열어 대답한다.
" 그렇게까지 감사해 할 필요 없소, 공작저에서 지내게 되었으니, 공작저의 삶에 익숙해져야지, 자유로움 말이오. "
완전한 자유와는 거리가 있기는 했지만. 공작저가 내거는 가장 큰 가치는 자유로움이었으니, 어찌 되었든 적응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솔로몬은 발걸음을 내딛는다, 어느 새 풀밭이 끝나 가고, 온통 바위투성이인 곳까지 나아온 모양이다.
솔로몬은 그녀에게 확실히 답하였다. 무르지 않을 것이라고.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제 손을 단단히 붙들기까지 하자 아우로라의 뺨이 발그레 물들었다. 공작님께서 약속하셨다! 그 사실 하나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아우로라를 기쁘게 하고 있었다. 단순히 말 하나와 행동 하나였을 뿐인데도, 공작님께서 거짓말은 하지 않으셨을것이라 믿으면서.
"자유로움이요?"
작은 되물음은 설명을 원하는 것 처럼 어조가 깊지 않았다. 그저 자유로움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듯이. 자유로움. 공작저의 삶은 자유로움이구나. 완전한 자유는 아니겠지만 아우로라에게 있어서 이 작게 트인 숨통도 바다만큼 광활했으리라.
어찌보면 바다로 여기는 사고방식이 당연했을법도 한 것이, 제국의 영애가 할 수 있는 행동이 과연 무엇이 있을지. 아우로라가 다시금 한 발을 내딛곤,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눈 앞을 바라보았다. 짧은 시간에 깨달았다. 풀밭은 점점 그 끝을 드러내고, 바위투성이인 곳에 다다랐음을. 아우로라가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보니, 아까 바위만 있는 곳이 있다고 하셨지.
정말 많은 것이 있구나. 아우로라가 작은 소리로 감탄사를 내뱉는다. 와아, 하고. 저기에 무엇이 있을까? 소네타가 저번에 알려주었던 대기중 떠다니던 마나가 바위 틈 사이에 정착해서 피는 꽃도 있을까? 저기도 바위, 여기도 바위, 그리고 바위. 바위만 이렇게 많은 곳을 보는 것은 또 처음인지 아우로라의 눈이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생기로 차 빛났다.
무르지 않겠다. 라는 말과, 아우로라의 손을 단단히 붙잡는 행동은 솔로몬이 의도했던 대로 그녀에게 나름의 확신을 준 듯, 그녀의 뺨이 발그레해지자 그는 조금이지만 만족감을 느낀 듯했다. 그 직후에 아우로라가 자유로움이라는 이야기를 제 스스로에게 되새기듯 입 밖으로 내자, 굳이 대답을 할 필요까지는 없었음에도.
" 그렇소, 자유로움이오. "
라며 대답해 주곤, 그녀가 공작저에서 누리기 시작할 자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을지 생각해 보며, 바위를 밟기 전에 멈춰섰다. 원하는 대로 거닐기로 했으니 바위를 밟아가며 이 곳을 지나치는 것도 좋기는 하겠으나. 자신은 둘째치고 아우로라가 발을 헛디디거나 해 다치지는 않을까 괜한 걱정이 되기도 했다.
잠시 고민하듯 서 있던 솔로몬은, 입 밖에 낸 말이니 지켜야겠지 하는 생각이었는지 바위 위로 발을 내딛으며 아우로라에게 이야기했다.
" 온통 바위투성이니 조심하시오, 다듬어진 길이 아니라 넘어지기라도 하면 다칠 수 있소. "
물론 다치기 전에 잡아낼 수야 있겠지만, 놀라게 되는 것 까지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바위와 바위 사이를 넘으며 나아가다 보면, 바위틈에 피어 있는 들꽃이 드문드문 보이기도 하는 것 같다.
솔로몬을 올려다보았던 아우로라가 무언가 이질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이런 말을 해준 사람이 있었나? 하고 생각을 해보니, 그건 또 없었던 것 같다. 아우로라의 마음 한 구석을 스치는 목소리가, 귀에 먹먹히 울리는 것 같았다.
아우로라. 제국의 눈송이라는 명성답게 조용하고 차분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어? 황궁 안에서 조용히 지내라고. 모습은 드러내도 좋지만 입은 다무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눈은 입이 없거든.
아우로라가 눈을 사붓이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목소리가 언제 울렸냐는 듯 말끔히 사라져있었다. 자유로움이라 확답을 준 것이 아주 작은 파동을 일으켰음을 그녀 자신이 알기는 할까.
아우로라는 솔로몬이 멈춰서자 그를 따라 멈춰선다. 무슨 일이 있으신걸까? 하고 생각을 했더니만, 그건 또 아니다. 아우로라가 솔로몬의 배려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할게요." 라고 입술을 연 아우로라가 말만치나 조심스레 바위 위로 첫 발을 내딛었다. 부드럽게 스치는듯한 풀밭과 달리 단단한 바위를 즈려밟고, 바위 사이를 넘으면서.
아우로라가 앞만 보고 걸어선 발을 헛디딜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는지,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가 두 눈을 반짝였다. 굉장한 발견을 한 것 마냥.
"꽃이 피어있어요..!"
바위 틈의 꽃을 보고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아우로라가 유달리 파란 꽃을 보더니 뺨을 발그레 붉혔다. 아는 꽃이다! 저 꽃은 아우로라가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전에 자주 보았던 꽃인데. 이름이 뭐였더라. 그러니까..
"앗, 푸른 달 꽃이에요!"
그래, 푸른 달 꽃. 소네타가 말한 마나가 정착한 꽃은 아니지만, 비슷한 꽃이었지? 대기중의 마나가 아니라, 사람이 마법을 시전하는 등, 그런 경위로 흘러나온 마나가 떠돌다 움직임을 잃고 굳어 형성된 꽃. 아우로라가 눈을 반짝거렸다. 꽃이 예쁘다고 생각하는듯.
조심조심 바위와 바위 사이를 건너며 나아가던 아우로라의 눈에, 바위 틈에 피어난 파란 빛깔의 꽃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녀가 알고 있던 꽃인 모양인지, 꽃이 피어있다며 들뜬 듯 내는 목소리에, 솔로몬은 잠시 멈춰섰다, 그리곤 아우로라가 본 꽃이 무엇일까 하면서 자신도 시선을 아래쪽으로 내린다. 꽃은 멀리 있지도 않았고, 회색빛의 바위들 사이에서 혼자만 파란 빛을 내고 있었기에, 쉽게 발견할 수가 있었다.
꽃의 이름은 푸른 달 꽃, 인위적으로 발생한 마나가 대기 중을 떠돌다가 동력을 잃고 어느 한 곳에 떨어져 형성된 꽃. 누군가가 마법을 사용하거나 마나를 흩뿌리지 않는다면 피어날 수 없는, 태생부터가 인위적인 꽃이었으나, 자연 속에 담긴 순간부터 그 모습은 인위적이라기엔 가지각색이었고, 자연스레 주변에 스며들곤 했다. 바위틈에 내려앉은 꽃은 눈에 곧잘 띄니 주변에 스며들었다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자연에서도 왕왕 보이는 모습이었으니 크게 걸고 넘어지거나 할 부분은 아니었으리라.
" 이 주변에서 마나를 남길 존재는 없는 것으로 아는데, 퍽이나 먼 곳에서 날아온 모양이오. "
그의 사용인들 중에 마법을 사용 할 줄 아는 이가 있기는 하지만, 동굴 내에서 사용한 마법이 바깥으로 쉽게 새어나갈 것 같지는 않았기에, 그는 그렇게 추론했다. 물론 피 자체가 마나 농축액과 같은 존재인 그 자신이 원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이 주변엔 온통 푸른 달 꽃이 피어있어야 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자니, 고갤 들어 시야를 넓혀 보면, 한 송이인 줄로만 알았던 푸른 달 꽃이 꽤나 많이, 바위와 바위 사이에 피어나 은은한 푸른 빛을 내고 있는 것이 보였으리라. 해가 지고 있기는 했지만, 주변이 어두운 것은 아니었기에 그 빛을 온전히 느낄 수 없는 것이 아쉬울지도 모르겠다만.
뭣하면 밤에 나와봐도 좋을 것 같군.
" 신기한 꽃이지, 인위적인 마법의 찌꺼기가 땅에 뿌리를 박고, 자연의 힘을 흡수하며 자란다는 것은, 꽤 역설적이지 않소. "
온통 회색인 바위들 사이에 파랗게 피어난 꽃. 아우로라가 꽃이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 마냥 한없이 조심스러운 눈길로 꽃을 훑는다. 꽃의 크기를 보자하니 피어난지 오래 된 것 같았다. 아우로라는 끈임없이 꽃을 향해 사랑을 담은 시선을 보냈다. 인위적임에도 자연에 내려앉아 적응하는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내는 걸지도 모르겠다.
"멀리서요? 세상에, 오랜 길을 왔겠구나... 여기가 좋아서 꽃을 피운 걸까요?"
아우로라가 드레스 자락을 모아 옹송그려 앉더니 손을 가볍게 뻗어 꽃잎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아우로라의 마력에 반응했는지 손가락에 닿은 꽃잎이 시린 얼음과도 같은 색으로 물들었다. 아우로라의 마나가 가진 색이었다. 아우로라는 푸른 달 꽃을 이래서 좋아했다. 각기 다른 사람들의 색으로 물드는 꽃이 좋았으니까. 아우로라가 고개를 들더니 탄성을 내었다. 와아, 하는 소리에 여러 의미가 섞여있었다. 아름다워라, 꽃이 이렇게 많다니, 대단해, 등등.
"정말 예뻐요. 사람들의 마나가 이렇게 꽃이 된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역설적이라도, 이렇게 생명을 꽃피울 수 있다는 게 정말 대단하잖아요."
아우로리가 눈을 샐쭉 휘었다. 꽃잎 하나를 더 건드려보고 쿡쿡 웃은 아우로라가 고개를 들고 솔로몬을 올려다보았다.
여기가 좋아서 꽃을 피운 걸까요? 란 물음에 자신도 모르게 단순히 날아갈 힘을 잃어서 내려앉았을 뿐일 거라고 대답하려 했던 솔로몬은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삼켰다. 어쩐지 가지고 있는 환상이나 기대를 깨트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면 무어라고 대답을 해 주는 게 좋을까,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솔로몬은 곧 입을 열어 말소리를 내었다.
"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군, 그러나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니 아우로라 양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겠소. "
확실하게 드러난 답이 없다면야, 해석이나 가설은 다양할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가지가 옳다고 여겨질 수도 있으리라. 그런 점에서 솔로몬은 아우로라에 대해, 순수한 소녀라며 새삼 다시 제 머릿속에 감상을 적어두었다.
웅크려 앉아서 꽃잎을 건드리던 아우로라가 고개를 들었고, 눈 앞에 보이는 여러 송이의 꽃들을 보며 탄성을 입 밖으로 내자 그 자신도 아우로라를 내려다보던 시선을 들어 꽃들을 바라보았다.
꽃들을 보며 잠시 아무 생각도 없이 있자니, 아우로라에게서 꽃이 예쁘다며 감상이 들려왔고, 그녀가 꽃잎 하나를 더 건드리는 것과, 그 꽃잎이 얼음이 내는 빛을 잠시동안 내는 것을 본 솔로몬은, 이어진 아우로라의 말소리가 자신을 향해 있음을 느끼고 시선을 아우로라에게로 돌렸다.
그의 눈에 희고 조그마한 얼굴이 들어왔고, 여린 입술이 움직이며 푸른 달 꽃의 꽃말을 입술 사이로 내보내고 있었다.
" 불가능한 사랑은 없다, 라... 썩 낭만스럽군, 불가능한 것들이 으레 그렇듯 말이오. "
조금은 불만이 담겼으리라 오해를 살 만한 말을 하며 아우로라에게서 시선을 옮긴 솔로몬이 말을 이어나간다.
" 해가 저물고 있소, 스노우디아보다는 온화하겠지만 해가 지면 역시 서늘하겠지, 어떻게 하겠소,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을까? "
그리 이야기하는 솔로몬의 목소리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으나 묘하게 무언가가 식어 있는 느낌이었다.
아우로라의 환상과 동심이 지켜졌다. 아우로라는 그것을 알고 있을까? 마냥 환하고 순수한 미소를 지으며 꽃에 열심히 시선을 꽂던 아우로라는 마나에도 자아가 있다는 가설을 마탑에 내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공작님께서도 제 생각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했으니까. ...아니, 이미 마탑은 이 가설을 받아들였을까..?
아우로라가 솔로몬을 가만히 올려다본다. 구릿빛의 피부, 짙은 눈썹과 아름다운 눈. 그리고 흉터와 모노클. 언제 보아도 신비로운 분이셨다. 처음에 무서웠던 흉터도 지금은 마냥 신비롭다. 공작에게 너무나도 잘 녹아들었기 때문일까? 아우로라가 꽃말을 얘기하며 빙그레 미소짓는다. 불가능한 사랑은 없다. 어디서라도 꽃을 피우는 푸른 달 꽃 처럼, 사랑도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으니.
"으으음...?"
불만스러우신걸까? 아우로라가 고개를 모로 갸우뚱 기울였다. 혹시..말 실수를 한 건 아닐까? 공작님이 안 좋은 추억이 있으시거나...아우로라가 걱정을 하려던 찰나, 묘하게 무언가 식은듯한 목소리에 아우로라가 강아지마냥 눈썹을 축 내렸다.
"...공작님께서 감기에 걸리시면 안 되니까요.."
은연중에 깔린 것은, 아우로라는 감기에 걸려도 딱히 상관이 없다는 것일까. 아우로라가 조심스레 일어섰다.
솔로몬은 자신의 대답에 아우로라가 의뭉스러운 반응을 보이자 조금 더 생각하고 대답하는 게 좋았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은 비슷한 소리를 했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하면서 자신을 향한 아우로라의 시선을 받던 솔로몬은,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아우로라의 대답을 들었다.
" 내가 감기에 걸릴 일은 없소, 죽을 만큼 쇠약해지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
그렇게 단언하면서, 조심스레 일어선 아우로라를 보던 솔로몬은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어갔다.
" 나 때문에 돌아가야겠다는 생각 말고, 아우로라 양이 머물고 싶은지 아닌지를 묻는 것이었소. "
슬슬 서늘해질 테니 아우로라의 지금 옷차림으로는 체온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뭣하면 마법을 써도 될 테니 큰 문제는 아닐 테지만. 아우로라의 대답을 곱씹던 솔로몬은 그녀의 답에는 확실한 긍정이 없음을 확인하고, 그녀가 바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의 외출이니 더 있고 싶다면 더 있어도 상관없었고, 뭣하면 공작저에는 따로 연락을 취하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오늘 외출을 주도한 이의 의견이겠지.
아우로라가 고개를 가볍게 기울였다. 감기에 걸릴 일이 없으시다는 공작님의 단호한 말과 더불어, 아우로라는 그가 이종족임을 깨닫곤 고개를 픽 숙였다. 하기사, 이종족은 인간보다 수십배는 강하지. 감기에 걸릴 확률은 희박할 거야. 아우로라가 눈을 내리깔고 가만히 꽃만 쳐다보았다.
"...제가..요?"
공작님 때문에 돌아가야지, 라는 생각이 아니라 내가 머물고 싶은지라고? 아우로라가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들었다. 지금까지 그런 걸 고려해본적이 있었나? 없었다. 아우로라가 가만히 솔로몬을 바라보다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눈썹을 다시금 슬픈 강아지마냥 축 내렸다. 그리고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공작님께선 제 결정에 화를 내시지 않으시겠죠..?"
라고. 아우로라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라면, 그것이었다. 솔로몬이 제 결정에 화를 낼까봐. 아무리 자유로움을 주신다고 하셔도 선이 있으니까. 그리고, 아우로라의 삶에서 잘못된 선택은 화의 연속이었으니까. 아우로라가 드레스 자락을 꼬옥 쥐었다. 더는 공작을 바라보지 못하겠는지, 아우로라가 고개를 다시금 픽 숙인다.
"..조금만 더 많은 곳을 보고 싶어요."
아우로라가 눈을 질끈 감았다. 어깨가 절로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아하니 누군가에게 이런 의견을 냈다가 꽤 자주 혼난 듯 싶었다.
물론 결정을 내릴 때에 고려해야 할 것이 많고, 그 중 하나가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상황이었기에 아우로라가 보여준 행동이 틀렸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솔로몬이 보기에 그녀의 선택에는 본인이 원하는 바에 대한 고려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아우로라에게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 것이었지. 투박하기는 해도 직설적으로 아우로라에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아우로라는 그 이야기 덕분인지 제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듯했다.
" 의견을 내는 것만으로 화를 내는 것은 도리에 어긋날 뿐더러 스스로 속이 좁다고 광고하는 것이지, 적어도 말 한두 마디로 화를 내지는 않을 것이오. "
솔로몬은 담담하게 이야기하면서 아우로라의 이야기를 잠시 곱씹었다. 제 의견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상대방이 자신의 이야기에 화를 내지나 않을까? 하고 고민하는 것이 보통인 것일까? 적어도 솔로몬에게 그런 습관이나 가치관은 없었기 때문에, 대체 후작가에서는 영애를 어떻게 다루는 건지, 하고 생각하면서 혀를 찼다. 영애라는 이유로 인내를 요구하면서 이것 저것을 원할 때마다 그럴 수 없는 이유나 늘어놓았겠지, 처음부터 이런 성격이었으리라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한 솔로몬은, 한참을 고민하던 아우로라의 손이 드레스 자락을 꼭 쥐고, 고개를 숙이면서 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조금만 더 많은 곳을 보고 싶어요.
이야기를 하는 아우로라의 모습은 어깨가 움츠러들고 고개가 숙여진 것이, 소극적인데다 묘한 두려움이 그 몸을 감싸고 있는 듯했다. 절로 한숨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혹여 그녀에 대한 부정적인 표현으로 여길까 싶어 애써 멈춘 솔로몬은, 그 때까지 쥐고 있던 아우로라의 손을 부드럽게 고쳐 쥐면서, 다른 쪽 손을 아우로라에 턱에 가볍게 가져다 대고 그녀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올리며 이야기했다.
" 슬슬 어두워지긴 하겠지만, 간만의 외출이니 좀 더 있어도 괜찮겠지, 알겠소, 좀 더 주변을 돌아보도록 하지, 고갤 드시오, 귀족가의 영애라면 제 의견을 당당히 말할 줄도 알아야지. "
의견을 내는 것만으로 화를 내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평을 내놓는 솔로몬의 목소리에 아우로라가 침묵한다. 그렇지, 의견을 내는 것 자체로 화를 내는 건 도리에 어긋나고, 속이 좁다고 볼 수 있겠지. 그런 삶을 살아왔음을 다시금 회고하자니, 역시 부조리했다.
아우로라는 이것저것 눈치를 보며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으니까. 만약 아우로라가 목소리를 높였다간 혼이 날 것이고, 아우로라의 삶을 더 제한했다. 처음엔 거세게 저항했지만 점점 사그라들었다. 어릴적엔 다른 영애들과 비교 당하며, 아카데미에선 그나마 자유로웠지만, 그것도 찰나에 불과했다. 어느정도 생각이 무르익고 황태자에게 가문과 가족을 볼모로 잡힌 날. 아우로라의 저항은 무의미해졌다.
아우로라가 드레스 자락을 쥔 한 손에 힘을 주었다. 이번에도 의지는 탄압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기에. 아우로라가 입을 열어 뱉었던 이야기가 도화선이 되면 어쩌나 싶었기에.
그러나 솔로몬이 제 손을 부드럽게 고쳐 쥐면서, 다른 손을 제 턱에 가볍게 가져다 대고 올리자 아우로라의 몸이 잠시 흠칫, 하고 떨리나 싶더니 이윽고 떨림이 눈동자로 옮겨갔는지 두 눈동자가 가늘게 떨려왔다. 정말, 지금까지 제게 이렇게 대해 준 사람이 있었나? 아우로라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공작의 이야기와 같은 것을 듣는 건 처음이라는 듯, 아우로라의 뺨이 점점 붉어졌다.
"...네."
/ 으 아악 아아아아아악 솔로몬 너무 멋지고 막 다해 잘생기고 멋지고 엄청나고 간지나는거 솔로몬이 다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야광봉
아우로라의 얼굴을 살짝 들어 보니, 그녀의 눈이 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불안감으로 떨리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로? 일단 지금까지의 모습으로는 불안감이리라 생각되는 흔들림을 보며, 솔로몬은 아우로라가 어떤 말을 할지 잠자코 기다렸다.
그녀의 입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오물거리고, 그녀의 뺨이 붉어지는 것을 보던 솔로몬은, 이윽고 그녀의 입술 사이로 작게 떨리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네, 라는 짧은 답일 뿐이었지만 대강 저 짧은 한 음절에 복합적인 감정이 서려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본인이 숨길 경황이 없기도 했고, 아무튼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이 있었으니.
" 그렇다면 좀 더 걷도록 하지, 아니면 이 곳에서 꽃을 더 보겠소? "
그녀의 턱에 댔던 손을 떼 자신의 턱을 어루만지면서 솔로몬이 이야기했다. 이야기하는 와중에 솔로몬은 뭔가를 그녀에게 보여주는 게 좋을까 생각하면서 아우로라의 선택을 기다린다. 적어도 오늘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 좋겠다, 라는 생각을 덧붙이며 아우로라를 붙잡은 손에서 힘을 빼 가볍게 쥐었다.
아우로라는 솔로몬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가늘게 떨리는 눈동자 사이로도 확실하게 보이는 것이, 그의 청명한 녹색 눈인지라. 아우로라는 그 눈동자를 직시하며 여러 감정이 담긴 답을 내었다. 이제 다시 선택의 시간이었다. 걷느냐, 꽃을 보느냐. 아우로라가 눈동자를 도르륵 굴려 꽃을 쳐다본다. 만발한 꽃을 눈에 열심히 담듯이.
"...ㅈ..조금만, 더 걸어도 될까요...?"
아우로라가 용기를 내듯 솔로몬에게 이야기하고, 그가 손을 가볍게 쥐자 겨우 입꼬리를 끌어당겨 미소를 지었다. 근심 하나를 내려두니 그래도, 마음이 조금 홀가분해진 기분이었다. 아우로라가 다시금 솔로몬을, 가만히 올려다본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맞냐고 묻는 듯.
"꽃은 다음에, 사용인 분들이랑도 같이 보고 싶어서요..많이 보면 오늘처럼 와, 하고 감탄 할 수가 없으니까..."
아우로라가 볼을 붉히더니 조심스레 덧붙였다. 그만 보는 이유가 지극히 단순했다. 오래 보면 감흥이 사그라드니까. 다른 사람들과도 이 아름다움을 공유하고 함께 감탄하고 싶은 마음이겠지.
지금까지는 솔로몬이 먼저 선택지를 제시해 주고, 그 선택지를 선택할 자유 정도를 쥐어주는 정도였지만. 아직 아우로라가 스스로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말하기에는 어려울 것이었으므로 그리 나쁜 접근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겠다. 선택지를 제한하는 것이 선택에 도움이 되는 면도 있으니.
자신을 가만히 쳐다보던 아우로라의 두 눈동자가 꽃을 향해 방향을 바꿨고, 잠시 그 상태로 꽃들을 쳐다보던 아우로라는 용기를 내듯 목소리에 힘을 주며 하는 이야기는, 조금만 더 걸어도 될까요? 라는 이야기였다.
그 이후에 자신이 손을 가볍게 쥐는 것에 반응해 아우로라가 미소를 짓는 것을 보던 솔로몬은, 이렇게 하는 것이 맞냐는 듯이 자신을 향한 아우로라의 시선에 솔로몬은 흐음, 하고 소리를 내면서 입을 열었다.
" 알겠소, 그럼,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을까... "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아우로라를 이끌고 바위더미에서 멀어지도록 발걸음을 내딛던 솔로몬은 좀 더 걷는 것을 택한 아우로라의 이유를 듣고 꽤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사용인들과 함께 보고 싶다고 했고, 너무 많이 보면 오늘처럼 감탄 할 수 없으니까, 라고도 말했지. 조금 아쉬울지도 모르지만 솔로몬은 오늘은 무언가를 보여주지 않아도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계속 걸었다.
자신이 걷는 대로 종종거리며 옆에 붙어 따라오는 아우로라에게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자, 솔로몬은 시선을 그녀에게로 옮겼다. 자신을 올려다보며 무언가 부탁 할 것이 있는 듯, 솔로몬을 부른 아우로라는 사용인들과 함께 꽃을 본 뒤에, 다시 공작님과 이 곳에 나와도 될까요? 라며 질문했고. 그 뒤에 생각을 정리해 할 말을 고르듯 입술을 오물거리던 아우로라가 입을 열어 하는 이야기는 뜻밖이었다.
- 공작님과 같이 나오니까 좋아요. 손도 커다랗고 따뜻하시고, 이곳저곳 같이 다녀주시고...나중에 다른 곳도 같이 가보고 싶어요. 수도에도 호위 없이 공작님이랑 같이 가보고 싶고..
그와 같이 다니는 게 좋다는 이야기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단순히 좀 더 바깥에 있고 싶다는 말조차 심히 망설이던 소녀가 맞는가 싶을 정도로 확실한 자신의 의사 표현이었다. 아우로라의 말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던 솔로몬은 곧 입을 열었다.
"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군, 확답은 할 수 없지만 여유가 생기면 한 번쯤 그래도 괜찮을 것 같소. "
다음 번 외출 때 보여주는 게 좋겠군. 꽃을 보면서 즐거워하던 아우로라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솔로몬은 바위더미에서 완전히 멀어져 다시금 들판에 발을 디뎠다.
무슨 말을 한 건지 깨달았는지, 아우로라의 얼굴이 순간 확 붉어졌다. 너무 당당하게 말해버렸다. 분위기에 휩쓸렸다고 해야할까. 비어있는 손으로 손부채질을 하며 아우로라는 눈을 도르륵 굴렸다. 거절이 들려올까, 미리 부끄러워 해야겠다 생각하던 아우로라는 의외의 대답에 고개를 픽 돌려 솔로몬을 쳐다보았다. 세상에.
"ㅅ..수도에 예쁜 카페가 있어요. 사실 영애들 사이에선 저랑 제 동생만 아는 곳인데, 케이크가 정말 맛있거든요. ㄷ..다음에 꼭 소개시켜..드릴게요....."
퍽 익숙하게도, 끝으로 갈수록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다. 그래도 사실인 걸. 케이크가 맛있고, 마카롱의 색이 유달리 고운 곳. 아우로라가 소네트와 함께 비밀로 하던 맛집. 소네트가 여기는 다른 영애랑 오 말고 언니랑 나랑 이렇게 우리 둘만 가야 해! 꼭이야, 꼭! 하고 외치고 새끼손가락을 걸었던 것이 불과 한 달 전인데도. ....그래도 공작님은 영애가 아니니까 괜찮지 않을까. 아우로라가 솔로몬의 드레스 차림을 상상했다 조용히 몸을 떨었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이건 아니었다. 정말, 정말로!
각설하고, 그런 비밀스러운 같이 가자고 하는 것 부터 아우로라가 솔로몬을 신뢰하는 게 아닐까. 아우로라가 바위더미에서 멀어지고, 다시금 들판에 발을 디뎠다. 바람에 들판의 풀이 흔들리는 소리가 나고, 풀이 바스락거리며 밟히는 소리가 덧붙여진다. 아우로라가 다시금 한 걸음을 내딛을 무렵, 그녀가 제 드레스 자락을 밟았음을 직감했으나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아우로라가 넘어질듯이 순간 중심을 잃고 앞으로 휘청였다.
자신이 긍정의 대답을 하기 이전에, 이미 아우로라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고, 손부채질 하는 것 역시 볼 수 있었다. 솔로몬은 어떤 점에서 그녀가 부끄러워 할 만한 부분이 있었는지 곰곰히 생각해보다가, 자신의 대답 이후에 들려온 아우로라의 목소리에, 결론을 내리는 것을 유보하고 끝으로 갈수록 작아지는 그녀의 말에 귀기울였다.
카페인가... 평상시라면 갈 일도 없거니와 보는 것조차도 드문 장소였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카페를 간다고 하면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시간을 죽이는 것인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수도에 들어간 이상 그를 기다리게 하려는 자는 없었으므로. 그리고 그에게 수도는 길게 머무를 만한 장소도 아니었으니, 수도 내에서도 그가 알고 있는 장소는 손에 꼽았다.
아무튼, 영애 중에선 아우로라와 그 동생만이 아는 장소를 소개해 주겠다는 이야기가 되겠고. 솔로몬은 그 말에 담긴 뜻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파고들자면야 비밀 장소를 알려주겠다는 것이니 신뢰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
" 알겠소, 그리 이야기하니 믿어 보지. "
그렇게 대답하면서 풀밭을 나아가려던 차에, 제 옆, 아우로라에게서 짧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분명 손은 그가 쥐고 있었으니 무언가 아우로라를 위협할 것은 없으리라 생각했건만. 그가 시선을 빠르게 돌렸을 때 아우로라는 중심을 잃고 앞으로 휘청이고 있었다. 이대로 손을 잡아당기는 게 좋을까? 그랬다간 팔에 적잖은 부담이 갈 지도 몰랐다. 솔로몬은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마법을 써서 아우로라를 잡아당기며, 쥐고 있지 않은 팔을 아우로라의 허리에 감아 살짝 안아들었다. 일단 균형을 잃은 이상, 제대로 발을 딛기 전까지는 그가 붙잡은 손 쪽에 무리가 갈 것이고, 다시 발을 딛기에는 드레스 자락이 이미 밟혔으므로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는 그녀가 다시 제대로 설 수 있도록 그녀의 발을 아예 땅에서 떼버리는 것을 택했다.
" 괜찮소? 날이 어두워져서 드레스 자락이 방해되는 모양이로군. "
솔로몬은 아우로라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이야기했다.
//갱신! 저런 아우로라주ㅠㅜ 너무 무리하진 말구! 난 괜찮으니까 보다 현생에 집중하도록 해!
믿는다니. 아우로라가 겨우 올라가려는 입술을 애써 내리려는 듯 아랫 입술을 앙 다물었다. 다행인 것은 올라가려는 입술은 겨우 막았다는 것이고, 다행이라 할 수 없는 것은 아우로라가 드레스 자락을 밟았다는 것이었다. 아우로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곧 지면과 충돌하겠거니 생각했거늘.
"...앗.."
마법을 썼는지 마나의 파장이 일었음을 아우로라가 직감하고, 이내 뭔가 붕 떴다는 느낌이 들자 아우로라는 그제서야 감았던 눈을 떴고, 자신을 안아들고 있는 솔로몬의 행동에 당황한듯 그대로 굳어버렸다.
"ㄱ, 그게..괘...괜찮아요..."
어째 이 상황을 뇌가 따라가지 못하는 듯, 아우로라의 눈동자가 멍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상황이지? 분명 아우로라는 넘어지려고 했고, 마나의 파장을 느낀 뒤에 공작님이 마법으로 자신을 띄워주었다고 생각했는데....아우로라의 시선이 솔로몬의 팔에 닿았다. 세상에, 지금 자신이 생각하는 게 맞는걸까?
"감사합니다.."
점점 어두워져 얼굴이 보이지 않으려 한다고 해도 아우로라의 얼굴은, 확실히 붉었다. 아우로라가 고개를 픽 숙여버렸다.
누구든지 갑작스럽게 누군가의 팔에 안기게 된다면 놀라겠지. 괜찮다고 이야기하면서 고개를 픽 숙이는 아우로라를 보며, 솔로몬은 그녀를 살짝 내려놓았다. 그리 무거우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생각 외로 더 가벼웠기에 혹시 잘 못 먹고 지낸 것은 아닐까 생각해봤지만 그건 아닐 테고, 원체 가녀린 모양이었다.
" 다음부터는 조금 더 움직이기 좋은 옷을 고르는 게 좋겠소, 그럴 일이 없기야 하겠지만, 혹여 내가 받아내지 못하면 다칠 수도 있으니. "
치료하는 것이야 어렵지 않았지만 다쳤을 때의 아픔까지 없던 것으로 할 수는 없으니까. 솔로몬은 그녀의 허리춤을 감았던 팔을 떼고 아우로라의 얼굴을 살폈다. 어둑어둑해지긴 했지만 아우로라의 얼굴은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온전히 마법으로 그녀를 받아내는 게 나았을까 생각했지만 그랬다간 뭔가 붕 떠 있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었고, 그 결과가 직접 받아내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반응을 보자니 조금 실수한 건 아닐까 생각하던 솔로몬은 자신의 머리를 쓸어넘기며 이야기했다.
" 갑작스럽게 몸에 손을 대 미안하오, 갑작스러운 일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런 모양이오. "
그렇게 사과하며 아우로라의 반응을 살피던 솔로몬은 제 손가락을 비비면서 다음 번에는 마법으로 받아내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면에 다시 발이 닿는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우로라의 표정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하다는 듯 멍해보였다. 움직이기 좋은 옷이라는 말은 겨우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뻣뻣하게 끄덕인다. 받아내지 못하면 다칠 수도 있다는 말은 과연 들었을지.
"ㄱ, 그게, 그..그게...앗, 우왓..."
충격 때문에 보닛의 리본이 느슨하게 풀렸는지, 아우로라의 시야가 가려지자 아우로라는 겨우 보닛의 리본을 다시 맸다. 아우로라의 손이 유달리 부산스러웠다. 공작님이 구해주셨는데, 팔이 닿았다니. 팔, 찰나였지만 분명 단단했지.. 세상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아우로라의 눈이 핑핑 돌았다.
"ㄱ, 괜찮아요! 제가 드레스 자락을 밟은 것도 있고, 그, 그게, 사실은, 이렇게 도움을 받는 건 ㅇ, 익숙하지 않아서요..."
황태자는 넘어지려던 그녀를 잡아준 적이 있었지만 좋은 의도는 아니었다지. 아우로라가 우물쭈물거리다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다잡더니 솔로몬의 손을 덥썩 잡으려고 했다. 하루치 용기는 고사하고, 거진 사흘치의 용기였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인 행동이었다.
"ㄷ, 다음엔 안 넘어질게요..! 그러니까, 그게, 저는 정말 괜찮고...정말로, 고마워요..공작님..."
자신의 말을 들었는지, 아니면 경황이 없어 들리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다. 일단 확실한 것은, 지금 아우로라는 굉장히 당황한 상태라는 것이었고, 그런 상태와 맞물려 보닛이 그녀의 시야를 잠깐이지만 가리는 상황까지 벌어지자 그녀의 혼란이 가중되는 모양이었다. 이럴 땐 무어라 참견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맞겠지.
그렇게 잠시간 아우로라가 보닛을 정리하고 나서 조금씩 더듬으며 하는 이야기를 듣자니 묘하게도 측은한 감정이 고갤 들어올리려 하고 있었다. 그 다음 순간 우물쭈물하던 아우로라가 심호흡을 하고, 자신의 손을 덥썩 잡자 잠시 눈을 크게 뜨던 솔로몬은 다시 표정을 원래대로 고치고 그녀가 뭘 하려는 것인지 살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 들린 아우로라의 목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작아지기는 했으나 대강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다음엔 안 넘어지겠다는 말로 시작해서, 본인은 괜찮으며, 정말 고맙다는 이야기. 솔로몬은 덥썩 잡힌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지만 빼거나 하지는 않았고, 어깨를 한 번 으쓱이며 이야기했다.
" 그렇다면 다행이로군, 고마워 할 것 없소, 옆에서 걷던 사람이 다치는 것을 가만히 보는 것이 이상한 것이지, 고맙다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한 것도 아니었소. "
말을 마치고 아우로라를 내려다본 솔로몬은 문득, 방금 쓴 마법의 여파였는지 두 사람 주변에 마나가 가라앉은 것을 보았다. 조금만 건드리면 (아우로라 입장에서)재미있는 것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어쩔까...
일단은 아까 아우로라가 이야기했던, 사용인들과의 나들이도 있으니 보류하는 것으로 하고, 솔로몬은 아우로라가 이제 어떻게 할지 기다리는 듯 그녀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용기를 내어 손을 잡고 말을 했음에 아우로라는 당분간, 그래, 일주일은 밖에 나가지도 못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너무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무려 공작의 손을 덥썩 잡아버렸으니까. 아우로라는 그 찰나에도 솔로몬의 눈이 잠시 커진것을 보았다. 역시, 제 행동이 갑작스럽긴 했지.
"그..그래도..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우로라가 작게 종알거리곤 눈을 도르륵 굴렸다. 푸르른 들판에 어느새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는지, 아우로라가 어둑해진 시야에 적응하듯 눈을 깜빡였다.
"...그게, 공작님."
아우로라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갔다. 솔로몬의 한 손은 놓지 않은 상태였다. 일단 가긴 해야하는데. 어디로 가야할까. 들어가야 할까? 그렇지만 이 풀밭에서 조금만, 아주 조금만 걷고 가도 괜찮지 않을까? 아, 그러고보니.
괜찮다는 표현을 어깨를 으쓱이는 것과, 부정적이지 않은 말로 대신했으나, 아무래도 아우로라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결국 그 말을 삼켜버린 듯 했지만. 과연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던 걸까, 솔로몬은 조금 궁금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본인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듯하니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어느 새 해는 거의 진 듯, 어두컴컴해진 들판을 보며 한 걸음 내딛는 아우로라를 따라 앞으로 걸어가던 솔로몬은, 여전히 한 손을 잡은 채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아우로라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무슨 질문이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방금 전에 하려고 했던 이야기일까? 라고 생각했지만 다음 순간 들려온 질문은 아무래도 아까 하려고 했던 이야기는 아닌 듯 했다.
그 질문은 오늘 나들이가 즐거웠냐는 것이었다. 즐거웠는가...라. 뭐라고 대답하는 게 좋을까, 오늘 나들이에 대한 느낌을 가만히 떠올리던 솔로몬은 문득 질문을 입 밖으로 낸 아우로라가 환하게 웃는 것을 보곤 할 말을 정했다.
" 음, 꽤 즐거웠다고 생각하오, 덕분이겠지. "
혼자 나오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두 사람이 같이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꽤 신선한 경험이었으니까. 아니, 정정하겠다, 물론 이전에 이런 경험이 없지는 않았으나 너무 오래 전이었을 뿐이니까. 아무튼, 솔로몬은 즐거웠다고 이야기하면서 마음을 굳혔다, 맛보기로 보여주는 것도 괜찮겠지.
솔로몬은 의도적으로 주변에 마나를 흩뿌렸고, 방금 전 아우로라를 잡아내며 흩어진, 이미 풀들 사이와 흙 위에 가라앉은 마나를 자극해 꽃을 피워냈다, 어느 새인가 뒤를 돌아본다면 솔로몬의 발자국이 찍힌 곳엔 그의 마나가 남아 에메랄드와 같은 보석빛을 내던 푸른 달 꽃이 점점 본래의 색으로 돌아가 은은하게 빛나는 것이 보였을 것이다.
어두운 들판에서도 올려다본 솔로몬의 눈은 보석같기 그지 없었다. 아우로라는 활짝 웃었다. 감정선이 짧은건지, 아니면 여러 감정이 한꺼번에 쏟아진건지. 당황했던 방금 전의 모습은 어디가고 활짝 웃는 소녀만 남아있는 것이 용했다.
꽤 즐거웠다는 말과, 덕분이겠지. 라는 덧붙임. 공작님께서 즐거워 하셨다니, 그야말로 다행인 일이 아닌가. 아우로라의 표정이 더욱 환해졌다. 활짝 웃던 표정이 어린 강아지 같았다면, 이번 표정은 거기서 맛있는 간식을 받았다는 듯 더 환하게. 이 비유가 맞는지가 의문이겠지만.
과거, 이렇게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과 나들이를 갔지만 그렇게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 아우로라가 웃긴 했을까. 아마 웃었더라도 즐겁게 있진 않았을테다. 의도적인 웃음을 흘리고, 즐겁다는 말을 애써 내뱉고. 아우로라가 나쁜 생각을 다시금 몰아낸다. 그리고 마나의 파장이 일자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고 뒤를 돌았다. 왜 마나를 흩뿌리시는 걸까?
"..!"
아우로라가 말을 잇지 못하고 꽃과 솔로몬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에메랄드와 같은 보석빛의 푸른 달 꽃이 흐드러지게 피더니, 점점 파란색이 되어 은은히 빛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꽃을 피우다니. 아우로라는 솔로몬을 대단한 사람을 보는 것 처럼 쳐다보고, 다시금 꽃을 바라본다.
"대단해..너무 예뻐요..!"
황홀경에 젖은 눈이었다. 새로운 지식의 욕구도 채웠고, 눈도 즐거웁다니. 아우로라가 그상태로 눈을 초승달처럼 샐쭉 휘었다.
눈은 마음의 창이다. 라는 이야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우로라의 눈에는 생기가 있었다, 그 몸에 흐르는 마나가 활기 넘친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그 눈은 빛을 내고 있었지. 자신의 이야기 덕분이었을지, 아니면 원체 빠르게 진정하는 부류의 사람일지는 모르겠으나, 아우로라의 표정은 환하게 빛을 내듯 미소짓고 있었다.
그런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은 생각보다 오래 가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솔로몬이 의도적으로 흩뿌린 마나를 느꼈을 것이고, 그가 의도한 대로 아우로라의 시선은 자연스레 뒤를 향했으니까. 싫어할 거라는 예상은 하지 않았지만 과연 얼마나 좋아할까에 대한 궁금증은 있었다.
잠시간 들려오던 웃음소리나 말소리가 멈추었다. 솔로몬은 아우로라의 시선을 따라 꽃을 보았고, 그 시선이 자신을 향했다가 다시금 꽃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들려온 말소리는 너무나 아름답다는 이야기.
대단하다는 이야기였고. 그 목소리에는 굳이 찾아내려 노력하지 않아도 경탄이, 황홀함이 서려 있었다. 생기가 어린 눈은 그 위에 황홀함을 덮었고, 한층 더 반짝이는 듯했다. 솔로몬은 모노클 너머로 보이는 아우로라의 표정을 보곤, 심심풀이 쯤으로 여겼던 행동이 기대 이상이었음을 느꼈다.
" 단순히 마나를 뿌리박게 했을 뿐이오, 자라는 것을 재촉하기는 했지만. "
라면서 담담하게 이야기한 솔로몬은 아우로라와 걸어온 자취를 한 번 눈으로 훑었다. 이미 해는 기울어 버렸는지 온통 어두웠지만, 마을 쪽에선 은은한 불빛이 보였고. 두 사람의 발자취에는 푸른 달 꽃이 빛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생기 넘치는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것처럼 선명했지. 잠시 풍경을 감상하듯 서 있던 솔로몬은 아우로라에게 이야기했다.
온통 푸른 달 꽃이다. 걸어온 걸음마다 피어있는 인위적인 생명은 생명이라는 사실 그 자체로 아름다울 따름이다. 아우로라는 새로운 생명이 피어났음에 황홀함을 서려내었다. 신이 아님에도 이렇게 새 생명을 피게 하는 것은 흔하지 않은 기회였으니.
"마나를 뿌리박게 하는 것 부터가 대단한걸요..! 자라는 걸 재촉하는 건 마탑의 마법사들도 어려워 할 거예요!"
짧은 시간 안에 이렇게 흐드러지게 필 줄은 몰랐겠지.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했어도 이런 건 못 할거야. 아우로라가 잠시 꽃에 시선을 내리박는다. 다른 건 둘째치고, 정말, 황홀했으니까. 어둠이 내리앉자 마을은 은은하게 불빛을 밝히고, 마나 꽃은 푸른 빛을 낸다.
아우로라가 꽃에서 시선을 떼어 솔로몬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푸른 빛을 정면에서 받아서 그러는 걸까, 솔로몬의 머리카락에 푸른 빛이 섞인 것을 잠시 바라보고,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확실히, 이젠 두려움이 가시는 것 같다. 처음 보았을 때 아우로라는 본능적인 두려움에 어린 양처럼 떨었거늘, 이젠 아무렇지도 않으니 말이다. 찬찬히 살펴볼 수도 있었다! 아직 완벽하게는 무리고, 공작이 제게 시선을 주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아우로라가 빙긋 미소를 지었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다음번엔 오세와 아이니도, 플라우로스님도 꼭 보여드려야지. 그리고 편지도 꼭 써야지. 돌아갈 생각을 하니 몽실몽실 떠오르는 생각들이 아우로라의 마음을 벅차게 했다.
마나를 뿌리박게 하는 것 부터가 대단하며, 자라는 것을 재촉하는 것은 마탑의 마법사들도 어려워할 것이라는 아우로라의 이야기에 수긍하면서 솔로몬은 저만치 마을 쪽에서 보이는 불빛과, 자신 앞에 핀 푸른 달 꽃의 불빛을 보고 있었다. 그 와중 아우로라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다는 느낌이 있었으나, 어쩐지 자신 역시 그녀를 보게 되면 그녀가 시선을 다시 돌릴 것 같다는 생각에 돌아보지는 않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눈이 마주쳤을 때 그 상태로 자신을 오래 마주보지는 못했으니까.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부끄러움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잠시 뒤에 솔로몬이 내뱉은, 이만 돌아가자는 의미의 이야기를 듣고서 아우로라가 보인 반응은 아쉬워한다거나, 마지못해 대답한다는 느낌은 없었다. 만족할만한 경험을 선사해줬다고 봐도 되는 것일까. 미소지으며 알겠다고 고갤 끄덕이는 아우로라를 보던 솔로몬은 여전히 한 손을 쥔 채로 공작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그럼 돌아가도록 하지, 집에 돌아가기도 전에 이런 말을 하긴 뭣하지만, 다음 외출을 기대하겠소. "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띄운 솔로몬은 곧 미소를 지우고 시선을 정면으로 옮겼다. 어느새 검은 장막 같은 하늘엔 달이 떠올랐고, 별들이 촘촘히 박혀 은은한 빛을 두 사람을 비롯한 지상에 뿌리고 있었다.
마나를 뿌리박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아우로라는 지난 경험을 생각하며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아버지라면 가능할까? 글쎄, 아버지가 소싯적 마법을 굉장히 잘 쓰셨다는 사실은 들었지만 자라오면서 마법을 써주는 일은 거의 못 봤으니. 소네타라면...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소네타는 뛰어난 마법사니까. 그에 비해 자신은. 아우로라는 금세 생각을 접어버린다.
푸른 달 꽃에 비친 공작의 모습을 계속 보자하니, 참 멋있다고 생각이 드는 것도 있었다. 나중엔 눈이 마주쳐도 가만히 있을수 있지 않을까? ..음, 그게 언제가 될까? 일단 하루는 아니다. 일주일도 아닐 것 같고...혹시 평생 못 보면 어쩌지? 열심히 자주 봐야하나? 그것보다, 솔로몬의 손은 따뜻하더라.
다음 외출을 기대한다니. 아우로라가 공작의 미소를 보았는지 눈을 잠시 크게 깜빡이더니 이내 환히 웃었다.
"저도 기대할게요, 공작님."
검은 장막과도 같은 하늘, 달은 숨을 죽여 둘을 지켜보았고, 별들은 그런 달을 대신해 빛을 뿌렸다. 아우로라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기울여 공작의 팔에 제 머리를 기대듯 하였다. 무례한 행동일지도 몰랐으나 이번만큼은 넘어가주시길. 아우로라의 입가에 수줍은 미소가 올라왔다.
"..돌아가요."
이렇게, 둘이서.
// 모찌모찌 ㅋㅋㅋㅋㅋㅋㅋㅋ 꺅 아우로라 모찌모찌 하면 분명 :ㅁ..!? 하는 표정으로 솔로몬 쳐다보구 ㅎ, 혹시 제 볼에 살이 찐 건가요? 라고 말하다가 자기도 한 번 말랑말랑 해보고 :ㅁ..! 싶은 표정 다시 지을 거야...분명...(대체) 일상은 슬 여기서 마무리 하고 새 상황으로 넘어갈까? 만약 넘어간다면 이번엔 내가 선레를 쓸게. 어떤 상황이 좋을까? :> 성인식 겸 늦은 데뷔탕트는 조금 무르익고나서가 좋으려나 :3?
공작과 단 둘만의 나들이를 보낸 뒤, 아우로라는 며칠동안 생글생글 웃으며 공작저에 따스함을 싣고 다녔더란다. 아이니와 오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거나, 주방장과 협심하여 플라우로스에게 간식을 만들어 깜짝 선물을 주거나, 솔로몬에게 쿠키를 구워서 살짝 집무실 앞에 두고 도망치거나.
그렇게 행복하게 지내던 아우로라가 근 일주일만에 드디어 편지를 써서 보냈다. 여러가지 내용을 눌러담기 위해서인지 얼추 대여섯장의 편지지가 초석으로 희생 당했지만. 아우로라가 가문의 인장을 찍고, 은쟁반 위에 다소곳이 편지를 올려둔다.
그간 잘 지내셨어요? 저는 잘 지내니 걱정 마세요. 부터 시작해서, 공작님과 나들이를 갔어요. 처음엔 공작님께서 싫어하시면 어쩌지 했는데 저 덕분에 나쁘지 않으셨대요. 공작님께서 손도 잡아주셨고요, 예쁜 꽃도 구경하고 커다란 나무도 보았어요. 공작님께서 심은 나무라고 했을 때 많이 놀랐어요. 와, 공작님의 마법은 정말 대단했어요! 그렇게 예쁜 푸른 달 꽃은 처음 봤다니까요! 언젠가 집으로 돌아가면, 저희 가족 모두가 정원에 같이 푸른 달 꽃을 심어보아요! 까지. 조잘조잘 이러저러한 얘기를 가득 써둔 편지는 이제 팔랑팔랑 하인의 손에 쥐어져 후작저로 도착하겠지.
그렇게 오늘도 행복한 하루가 지나고, 아우로라는 유달리 일찍 침대에 쏙 들어가 싱글싱글 웃었다. 오늘은 창문 밖으로 달이 뜨지 않았지만, 별이 대신 총총 빛나니 아름다웠다. 침대가 오늘따라 푹신하니 잠이 쏟아져선, 결국 아우로라가 작게 하품하며 눈을 감았다. 그렇지만 행복한 날과 달리 꿈은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아우로라는 침대에서 몸을 뒤척였다. 꿈 속에서 그렇게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나타나선, 서로 나들이를 갔던 것이다. 마차가 멈췄다. 마차에서 내리니 절벽이 보였고, 그 갑자기 자신의 등을 갑자기 떠미는 것이었다.
오, 아우로라.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천재라지. 그 마법 실력을 좀 보여주었으면 하는데. 항상 긍정적인 네가 참 신기하단 말이지. 마수의 앞에서도 그렇게 웃을 수 있을까?
나들이는 좋은 선택이었던 모양이었다, 그 전에는 공작저에서 지내기는 했어도 아우로라가 활발하게 돌아다니지는 않았었는데, 나들이 이후 아우로라의 심경에 변화가 일었는지 공작저 내부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용인들과 착실히 호감을 쌓아나갔으니 말이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인간의 전부는 아닌 법, 과연 그 내면 깊은 곳까지 본래의 밝음을 되찼았을지는...
아무튼 요 며칠간 아우로라의 모습은 확실히 밝았고, 그 때문이었을까, 사용인들의 걱정은 한 시름 덜어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느슨해진 일상에서, 누구도 도와 줄 수 있으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할 수 없는 곳. 제 자신의 꿈 속에서 공포로 인해 내지르는 비명소리는.
당연하게도 공작저의 주인의 귀에 들어갔을 터다. 어두운 밤이었기에 공작저의 대부분은 잠에 들었을 시간이었지만. 드래곤에게 경계 없는 휴식이란 없었고, 잠은 들었어도 온갖 장소에서 오는 소리를 듣던 솔로몬은 유난히 낯익으면서도 위태로운 비명소리에 눈을 떴다.
그런 공작 다음으로 심상찮은 소리에 잠에서 깬 이가 있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두 토끼 수인이었다. 오세와 아이니는 잠옷 차림으로 복도에 나와 램프를 든 채 아우로라의 방으로 향했고, 조심스레 문을 두드린다.
그 누구도 이런 나들이는 원하지 않았을테다. 꿈 속에서, 아우로라는. 황태자가 말하는 나들이에 환상을 품고 있었다. 실날과도 같은 희망을 품에 안고, 이 기회로 황태자가 능력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게 하도록. 그렇지만, 절벽으로 오는 것은 나들이라고 할 수 없었다. 아우로라는 절벽 밑이 어딘지를 잘 알고 있었다. 마수가 득시글대어 매년 대규모 토벌이 이루어지는 평원. 스노우디아의 눈 표범 기사단의 기사들이 매년 출정하는 곳.
어째서 여길 온 걸까, 생각하자니 황태자가 아우로라에게 퍽 친절하게 속삭이는 것이다.
"오, 아우로라,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천재라지."
그 부분에서 아우로라는 나머지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잠식했다. 불안함은 이미 붉은 경고를 울렸으나 두려움은 아우로라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이대로 뛰쳐나가면 그 누구도 이런 나들이는 원하지 않았을테다. 꿈 속에서, 아우로라는. 황태자가 말하는 나들이에 환상을 품고 있었다. 실날과도 같은 희망을 품에 안고, 이 기회로 황태자가 능력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게 하도록. 그렇지만, 절벽으로 오는 것은 나들이라고 할 수 없었다. 아우로라는 절벽 밑이 어딘지를 잘 알고 있었다. 마수가 득시글대어 매년 대규모 토벌이 이루어지는 평원. 스노우디아의 눈 표범 기사단의 기사들이 매년 출정하는 곳.
어째서 여길 온 걸까, 생각하자니 황태자가 아우로라에게 퍽 친절하게 속삭이는 것이다.
"오, 아우로라,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천재라지."
그 부분에서 아우로라는 나머지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잠식했다. 불안함은 이미 붉은 경고를 울렸으나 두려움은 아우로라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이대로 뛰쳐나가면 후작저는 무사하지 못할테니까.
그래서, 그대로 떠밀려서 절벽 아래로 떨어져서 무엇을 했지? 그래, 일단은 살아남고 싶어서 마법을 썼는데. 마나의 냄새를 맡고 마물이 다가올거라고 생각했지.
노크소리가 들릴리가 만무했다. 깊은 잠은 아우로라를 꺼내줄리가 없었다. 아우로라가 위를 올려다보듯 가만히 있더니, 끝이 가느다랗게 변하는 특유의 보드라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것이다.
"제발 살려주세요, 전하, 꺼내주세-"
꿈 속에서, 눈 앞에서 마주친 그것은. 아우로라의 숨소리가 일순 멈춘 것도 같았다.
// 황태자가 나쁜 걸로! >:3! 꺅 잠자는 공주님을 깨우는 방법은 왕자님이 도착하기만 ㅎㅏ면 된댔어! (그럴리 없음) 오세랑 아이니 걱정해주냐구..흑흑 공작저 사람들 다 친절하구..ㅠㅠ
아우로라의 방 문을 두드렸으나 당연히 들릴 리가 없었다. 오세, 그리고 아이니는 방 안에서 들리는 아우로라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역시 잘못 들었던 게 아니었어, 어쩌면 좋지? 두 아이는 조금 겁에 질린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면서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눈을 깜빡이며 이야기했다.
" 내가 여기 지키고 있을게, 얼른 가서 플라우로스 님을 깨워! 그래도 너무 큰 소리는 내지 말고! " " 응! 금방 다녀올게! "
그 말을 끝으로 오세는 계속 문을 두드리면서 아우로라를 부르기 시작했고, 아이니는 등불을 든 채 복도를 빠르게 달려나갔다. 토끼 수인답게 빠른 속도로 플라우로스의 방 앞에 도착한 아이니는 문을 두드리며 플라우로스를 불렀고, 플라우로스는 열쇠 꾸러미를 챙긴 뒤 아이니의 뒤를 따라 아우로라가 머무는 방 앞에 도착했다.
" 확실한 거겠지요, 오세, 아이니? " " 지금은 목소리가 끊겼어요!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구요! " " 살려달라는 말이 들렸어요 플라우로스 씨, 저희가 늦은 건 아니겠죠? '
플라우로스는 아우로라가 머무는 방의 열쇠를 찾기 위해 열쇠 꾸러미를 이리저리 살피며 중얼거렸다.
" 그렇다고는 해도 손님의 방을 함부로 열어도 될지... "
그러나 두 아이의 재촉과, 그 자신도 느끼는 심상찮은 분위기에 서둘러 열쇠를 찾은 플라우로스는 자물쇠에 열쇠를 꽂아 열었다. 문이 열리며 세 사람의 눈에 들어온 것은, 마치 숨을 멈춘 것처럼 눈을 감은 채 누워 있는 아우로라였다.
혹여 아우로라가 숨을 쉬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아이니는 입을 손으로 가리고 아우로라에게 다가갔고, 오세는 꽤 침착하게 손에 들고 있던 등불의 불씨를 방 안의 등불에 옮겨 붙였다. 플라우로스는 아우로라에게 귀를 기울여 그녀가 숨을 쉬는지 확인하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 오세, 가서 공작님을 모셔오십시오, 급한 일입니다. "
그리고 그 즈음.
솔로몬은 비명소리에 이어졌던, 자신을 살려달라며 애원하는 목소리마저 끊기자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의 육감이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꿈 속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마수들이 다가오는 평원의 한 가운데에서 아우로라가 고개를 들었다. 대체 누가? 혹시 기사를 풀어둔걸까? 아우로라가 가느다랗게 중얼거렸다. "제발 살려주세요." 라고.
마주한 아우로라는 새파랗다 못해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가뜩이나 하얗던 소녀는 아예 핏기마저 싹 사라져버리고, 세 사람의 입장에선 시체처럼 보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우로라는 옅게 헐떡이며 숨을 쉬고있긴 했다. 잔뜩 겁에 질려 억눌렸는지 그조차도 가늘게 떨려 끊길 것 같았지만.
아, 아우로라. 익숙한 목소리에 아우로라가 꿈 속에서 몸을 떨었다. 정말 독한 여자네. 다른 영애들은 절벽에서 떨어지기 전부터 울었을텐데. 마치 날씨가 좋다고 말하는 것 마냥 가볍게 들려오는 목소리. 그리고, 그 목소리에 분노를 느끼기도 이전에 아우로라는 천천히 고개를 내린다.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 제 것이 아닌 거친 숨결. 아우로라는 마물이 눈 앞에 나타났음을 직감했다. 황태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우로라. 열심히 해봐. 한 마리 정도 잡으면 다음엔 안 데려올테니까. 그 전에 죽는다면 소문이 거짓이겠지. 아카데미를 졸업한 천재가 마수 한 마리도 못 잡는게 말이 되겠어?
정적이 일었다. 가늘게 떨리던 일말의 숨소리마저 여러 감정에 하얗게 질려 이젠 나오지 않았다.
옅게 헐떡이는 아우로라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던 아이니는 플라우로스의 말을 듣고 오세가 복도를 뛰어나가자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창문으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창문을 통해 시원한 바람이 조금씩 들어오고, 아이니는 방을 나가서 은 대야에 물을 담아온다. 플라우로스는 아우로라의 숨이 멎지는 않는지 살피면서 그녀가 어째서 깨어나지 못하는지, 혹시 마물에게 물리거나 한 게 아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고갤 들던 오세는 자신이 부딪힌 상대와 눈이 마주치곤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도 그럴 것이...
" 이 밤에 어딜 그리 바쁘게 가느냐? " " 공작님! "
솔로몬이 눈 앞에 서 있었으니까. 그러나 놀라는 것도 잠시, 자신이 무슨 일로 바쁘게 돌아다녔는지를 떠올린 오세는 솔로몬을 쳐다보며 급히 말을 이어갔다.
" 아우로라 아가씨가 이상해요! 악몽을 꾸고 계시는 것 같은데 좀처럼 일어나지를 못하고 계세요! 플라우로스 님이 솔로몬 님께 알려드리라고 하셔서 솔로몬 님을 찾아가는 중이었어요! "
급하게 이야기하느라 말의 두서가 다소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지만, 대강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파악 할 수 있었기에 솔로몬은 오세를 한쪽 팔로 안아들고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 속도는 상상 이상이라서, 오세가 뛰어 온 거리를 훨씬 빠르게 지나 아우로라의 방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오세를 내려 놓은 솔로몬은 아우로라의 방 안에 들어섰고, 자신을 보며 고개 숙이는 아이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플라우로스에게 손짓하며 아우로라에게 다가갔다.
" 무슨 일이지? " " 악몽입니다, 허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실제로 경험한 일이 악몽으로 구현된 모양입니다, 단순한 꿈이라면 진즉에 깨어나도 이상하지 않으나 실제 경험에 근거한 꿈이라면 현실과 분간하기 어렵지요. "
솔로몬은 플라우로스의 말을 듣다기 아우로라의 숨소리가 잦아드는 것을 확인하곤 아우로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살짝 뒤로 젖혀 숨을 좀 더 편하게 쉴 수 있도록 했다. 악몽이라, 옳다. 옳기는 하나 이 악몽은 단순한 것이 아닌 모양이군.
" 악몽으로 인해 현실의 건강이 위협받는 것을 예전에도 본 기억이 있다, 단순한 악몽이 아니야. " " 허면...? " " 자세한 것은 좀 있다 이야기해 주겠다, 지금은 숨통을 트여야 해, 일단 몸을 조금이라도 조일 만한 장신구가 있는지 보고, 있다면 풀어놓거라, 꿈이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만큼, 현실도 꿈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
그 말을 듣고 아이니가 아우로라의 손목이나 발목 등에 있을 만한 장신구를 풀어놓고자 다가갔고. 솔로몬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 단순한 꿈이라면 현실의 사망에 이르는 수준의 충격으로 깨어나겠지만, 이 경우는 위험하다, 잘못하면 몸뚱아리만 남을 지도 모르겠군, 플라우로스, 말해 보거라, 네놈의 눈엔 보이겠지, 그녀가 어떤 공포를 마주하고 있는지. " " 허나 공작님... "
무언가 불안하다는 듯이 솔로몬을 보던 플라우로스는 솔로몬과 눈이 마주치자 고갤 숙였다.
" 원하지 않는 자의 심연을 들여다보았다간 그 자가 망가진다, 그러나 네겐 상대를 망가트리지 않고 들여다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 그게 네 마법이잖느냐. " " 알겠습니다. "
솔로몬이 왔을 때, 정확히는 그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숨을 편하게 쉴 수 있도록 하였을 때. 아우로라는 흐윽, 하고 겁에 질린 숨을 들이켰다. 겨우 숨통이 트여 숨을 쉬는 것이 결코 좋은 꿈을 꾸는 것은 아닐지라. 거대한 공포는 아우로라를 감싸 삼켰고, 가라앉는 바다 한 가운데에서 겨우 숨을 쉴 틈이 만들어졌을테니.
아이니가 손목에서 한 장신구를 풀 수 있었을 것이다. 스노우디아의 가문 문양이 그려진 작은 팔찌는 협소하고도 낡아서, 어릴적에 선물 받은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금 꿈 속. 플라우로스가 보게 될 꿈 속. 아우로라는 눈 앞의 거대한 마물과 정확하게 눈을 마주쳤고, 마물은 공격하지 않고 아우로라를 가만히 내려다 볼 뿐이었다. 마나의 파장을 일으킨 것이 아우로라인지 가늠하는 듯. 절벽 위에선 엄숙하되 냉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잡아봐, 아우로라. 내 아내가 될 생각이라면 이정도는 각오했어야지. 황실은 그것보다 더 잔인한 것들로 득시글댈텐데, 이정도도 못 잡으면 그 곳에서 네가 어찌 버틸 수 있을까."
아우로라가 마물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시선을 조금이라도 돌렸다간 마수는 바로 공격을 할 기세였고, 황태자의 얼굴을 보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우로라가 덜덜 떨며 손을 살포시 뻗었다. 마법을 준비하는 듯 싶다가도, 아우로라가 기어코 시선을 돌리던 것이다.
"드미트리 전하."
외부의 개입으로 마나가 막혔다. 마물이 의아한듯 아우로라를 쳐다본 것도 그 이유였을테다. 황태자가 빙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우로라가 무력함에, 그리고 그의 잔인함에 질려 홀린듯이 중얼거렸다.
플라우로스가 보는 것을 읊어 내려가고, 솔로몬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지고 있었다. 그 곁에 서서 아우로라의 손목에서 풀어낸 장신구를 꼭 쥐고 있던 아이니는 플라우로스의 목소리로 표현되는 아우로라의 악몽과, 그녀의 감정을 들으며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아, 마물이 아우로라를 발견하고 말았는가.
" 이...마물은... " " '가둠'인가? "
장난도, 농담도 정도가 있다며 혀를 찬 솔로몬은 아우로라가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 라는 목소리에 솔로몬은 생각을 굳힌 듯, 플라우로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 놈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야기해라, 이 일이 해결되려면 그걸 알아야 한다, 지금 당장 꿈에서 그녀를 건져 낼 수야 있겠지만, 놈을 뭉개버리지 않는 한 이런 일이 다시 생길 가능성이 있다. " " 예,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가둠'에게 조금이라도 상처를 입었다면... "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던 아이니가 잘 모르겠다는 듯 솔로몬을 올려다보았고, 어느 새 방 안에 들어와 있던 오세가 그런 누이의 궁금증을 대변하듯이 입을 열었다.
" '가둠'이라니 그게 뭔가요? 아우로라 아가씨의 상태랑 무슨 연관이 있는 거죠? " " 오세, 지금은 바쁘니 나중에 이야기해 주겠습니다, 공작님이 뭔가를 하셔야 하는데... "
라면서 오세의 질문을 미뤄두려던 플라우로스에게 솔로몬이 손짓했고, 플라우로스는 알겠다는 듯 고갤 숙였다.
" '가둠'은 꽤 질이 나쁜 마물입니다, 지금은 개체 수가 줄어 보기 어렵지만 예전엔 제국 곳곳에서 나타나 골머리를 썩였지요, 마물답게 마나를 탐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어 인간을 노려 공격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기는 해도 지능이 그리 높지는 않았고, 기사들의 갑주를 분쇄할 정도의 파괴력을 지닌 '가둠' 개체는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제국에서 대대적으로 구제를 한 뒤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습니다만... 가둠으로 인한 피해의 대부분은 구제 이후에 생겨났지요, 이 마물은 단순한 흉포함으로만 따지면 분명히 다른 위험한 마물에 비해 떨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어째서 가둠으로 인한 피해가 컸느냐... 바로 '가둠'의 이빨이나 발톱에 있는 독소 때문이었습니다, 그 독소는 뱀이나 벌 등이 지닌 마비독이나 괴사독과는 다른, 마나에 영향을 주는 독이지요, 악질적인 것은 이 독소가 바로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꽤 오랜 기간 잠복해 있다가, 과거의 트라우마를 들춰 내 악몽을 꾸게 만들지요, 그리고 지금 아우로라 양의 모습처럼... 악몽을 꾸기 시작하는 순간 독소는 체내의 마나에 섞여 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현실의 몸에 영향을 미치게끔 하는 것입니다, 치료할 방법은 독소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세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그 독소의 주인인 '가둠'을 제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독소에 당한 이가 죽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마지막 하나는... "
까지 플라우로스가 차근차근 설명했고, 아우로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녀를 바라보던 솔로몬이 입을 열었다.
" 마지막 하나는, 트라우마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솔로몬을 포함한 네 사람 모두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오세와 아이니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솔로몬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플라우로스 역시 입을 다물고 두 아이와 함께 솔로몬에게서 두어 발자국 물러섰고. 솔로몬은 굉장히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제 턱을 어루만지다가 이야기했다.
" 내가 곧 그리 가겠소. "
솔로몬은 아우로라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고, 그 직후 솔로몬의 몸에서 에메랄드 빛의 마나가 흩뿌려지는가 싶더니- 솔로몬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아우로라는, 꿈 속에서 익숙하지만 그 때에는 느껴보지 못했을 마나의 파동을 느낄 수 있었을까-
으으 아직 답이 안 올라와서 다행이야.. - 내가 곧 그리 가겠소 부분부터 수정할게..//
" 지금은 이렇게밖에 해줄 수가 없군, 미안하오. "
솔로몬은 아우로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다른 쪽 손으로 아우로라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그것뿐이라면 과연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을 테지만... 아우로라의 손을 쥔 솔로몬의 손에서 그의 마나가 띄는 빛인 에메랄드 빛이 은은하게 퍼졌고, 자연스레 마나는 아우로라에게로 흘러들어 간다.
모종의 이유로 아우로라 스스로의 마나가 막혀 버린 상태인 모양이었으니. 잠시만이라도 대신할 것이 필요할 터였다.
아우로라가 꿈 속에서 마주한 마물, 가둠. 그것의 형태는 작은 소녀에게 공포를 주기엔 충분했다. 아우로라가 시선을 돌리자마자 가둠이 두 발로 일어선다. 두 발로 선 그것은 아우로라의 키의 얼추 두 배정도 되는 크기에, 날카로운 발톱 세 개가 삐죽 솟아있고 긴 주둥이를 가지고 있었고, 아우로라가 삶을 갈구하며 다시금 시선을 돌려 그 장면을 마주했다.
아우로라는 잘 알고 있었다. 황태자는 절대 아우로라를 구하지 않을 것이다. 구한다고 한들 멀쩡한 모습일 때 구해주지 않을 것이다. 온 몸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피투성이가 되어 살려달라고 겨우 빌 때 그제서야 아우로라를 구출해 사제에게 던져주겠지. 제 나름의 길들이는 법일 것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귀족파인 후작저를 뒷배경으로 삼고 세력을 키우기 위해.
아우로라는 이대로 순응해야할지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 마나가 막혔는지 마법은 쓸 수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아우로라가 이종족들 처럼 신기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검술? 유감스럽게도 검을 제대로 쥐어보지 못한 소녀인데다 검까지 없는 노릇이었지. 그렇지만 그 순간, 아우로라는 익숙한 듯 기시감이 드는 마나의 느낌에 손을 쥐었다 폈다.
꿈 속의 아우로라는, 과거의 아우로라는 처음 느끼는 마나였다. 에메랄드빛의 마나. 아우로라가 마음을 다잡고 손을 다시금 뻗었다. 가둠이 날카로운 손톱을 휘두름과 동시에 아우로라가 마법 주문을 중얼거리곤 얼음으로 만들어진 창을 쏟아내리려 했다.
"꺅!"
떨어지는 얼음의 충격과 이미 휘둘러진 손톱을 막을 수는 없었는지, 그 과정에서 살짝 긁히고 뒤로 넘어지긴 했지만. 실제 과거에선 그대로 예쁘게 차려 입었던 드레스 자락이 찢어지고 큰 상처를 남겼겠지. 아우로라가 어안이 벙벙한듯 제 손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게 뭐지? 왜 익숙히지? 전혀 처음 느껴보는 마나였는데. 그 와중에 가둠은 다시금 몸을 일으키며 괴성을 내질렀다.
솔로몬은 꾸준히 아우로라에게 자신의 마나를 흘려보내면서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방금 자신이 흘려넣은 마나가 일부이긴 했지만 소모되는 것을 느낀 솔로몬은 그녀의 몸에 얕게 긁힌 상처가 생긴 것을 보았고, 쯧, 하며 혀를 찼다. 정말 성가시기 그지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독소만 없었다면 그저 소탕하는 것으로 끝날 뿐인 마물일 터인데, 독소에 당한 이들의 마나에 스며들어, 기본적으로 현실에서 맛보기 어려운 달콤함을 느끼게 해 주는 꿈을 불쾌하기 그지 없게끔 변질시키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꿈 속의 죽음이나 고통이 현실에 그대로 나타나는 꼴이라니.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자면 방법은 분명히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의 모든 것은 꿈에 영향을 미친다, 당연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그가 마나를 흘려보내는 것만으로도 악몽 속의 아우로라에겐 적잖은 도움이 되고 있겠지. 그리고, 몸에 난 상처 역시..
솔로몬은 아우로라의 몸에 생긴 긁힌 상처를 치유하면서, 아우로라에게 이야기했다. 과연 그 말이 꿈 속의 그녀에게 전해질 지는 모르겠지만.
" 아우로라 양, 지금 그대가 겪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직시해야 하오, 꿈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해. "
당연히 쉬울 리 없다. 현실에 기반한 꿈보다도 더욱 심한, 직접 겪었던 현실의 공포를 다시금 되살리는 그 악몽을 꿈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그렇지만 꿈을 인식하지 않으면 꿈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을뿐더러, 꿈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물론 이번 꿈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목숨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겠지. 물론 바로 꿈에 들어가 아우로라를 빼내 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랬다가는 아우로라의 정신이 충격을 받을 수도 있었고, 자신으로 인해 결과가 달라진 꿈이 그녀의 무의식 속에 남아 그녀가 자신에게만 의지하게 되는 결과를 낳을지도 몰랐다. 그로써는 아우로라가 자신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거나 하게 되는 것이 썩 좋은 결과는 아니라고 생각했으므로, 지금은 그녀가 꿈임을 깨닫고 깨어나려는 의지를 보일 수 있도록 조력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물론 이미 아우로라 자신의 마나가 아닌 솔로몬의 마나를 쓴 시점에서 위화감을 느끼고는 있겠지. 부디 그녀가 그 위화감을 바탕으로 꿈임을 알아차리길 바라고 있었다.
" 물론...그게 안 된다면 억지로라도 꺼내와야겠지. "
솔로몬은 아우로라의 머리를 쓸어넘기면서 자신의 뒤에 있는 세 사람, 플라우로스와 오세, 아이니에게 이야기했다.
" 내가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 돌아가서 쉬거라, 문제가 해결되면 부를 테니. "
오세와 아이니는 그 말에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했지만, 플라우로스가 두 아이를 다독이며 방을 빠져나갔고. 이제 아우로라의 방 안에는 솔로몬과 아우로라 둘 뿐이었다.
가둠의 괴성과 얼음이 깨지는 소리에 황태자는 아우로라를 내려다보고 미간을 찌푸린 것 같기도 했다. 예상치 못한 전개였기 때문일까, 기사로 위장했던 마법사에게 마나를 막았다면서? 라고 다그쳐보곤 내심 안도하는 사제를 보며 한숨을 쉬었지만. 그것은 꿈 속의 황태자였지 과거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 어떻게 보면 아우로라의 기억속에 남은 그의 행동들일지도 모르겠다. 아우로라가 본 황태자의 실체.
아우로라는 일어서 뒤로 한 걸음 물러서려다 멈칫하더니,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몸의 상처가 사라졌다. 사제가 한 일인가? 싶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고위사제가 아니라면 신성한 힘으로 치료를 하려면 아우로라의 상처에 가까이 있어야 했고, 무엇보다 드미트리가 가만히 내버려둘리도 없었으니까. 의아함을 느끼던 아우로라는 가둠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몸에서 푸른 피를 뚝뚝 흘리는 것을 보곤 마음을 다잡았다.
다시금 마법 주문을 외우자 주문을 끝마치는 즉시 파란 불덩어리가 두어개 생기더니, 가둠을 향해 날아갔다. 아우로라가 다시금 이상함을 느꼈다. 이렇게 마법이 숨쉬듯 자연스럽게 나올리가 없었다. 거기다가, 아우로라가 마법을 쓰고 난 뒤 흩날리는 마나의 잔재를 보았다. 에메랄드빛이다. 아우로라의 마나는 밝은 하늘색인데. 가둠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더니 마구잡이로 발톱을 휘두르자 아우로라가 다시금 마법을 사용했다. 발톱을 튕겨내는 막 때문에 가둠이 퍽이나 성이 난 듯 싶었다. 아주 잠시간의 틈, 아우로라는 생각해야만 했다. 무언가 놓친 것을, 놓쳐버린 조각을.
"....."
가둠의 날카로운 손톱이 보호막에 하나의 구멍을 뚫었다. 균열이 가고, 서서히 깨지기 시작하는 보호막 사이에서 아우로라의 시야에 단 한 송이의 꽃이 들어왔다. 푸른 달 꽃. 일렁이는 에메랄드빛 마나에 물들어버린 그 꽃에, 아우로라가 쏟아지는 의문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다시, 침대. 잠들어있는 아우로라는 고통스럽고 두려워 하던 표정을 점차 지워나가더니, 입을 열어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잠들어있던 아우로라의 표정은 아직까지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방금 전의 상처를 치유한 이후에 다른 상처가 생기지 않은 것과, 제가 흘려보낸 마나가 소모되는 것을 보자니 심각한 상황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난 모양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직 아우로라가 꿈에서 깨어나지는 못했으므로, 솔로몬은 아우로라에게 꾸준히 마나를 흘려보내면서 그녀가 꿈이라는 것을 눈치채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우로라의 표정이 편안하지는 않더라도 좀 전의 공포로 얼룩진 표정이 아닌, 긴장되긴 했으나 한층 나아진 표정으로 변했고. 그녀의 입술이 열리면서 가늘고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자. 그녀의 손을 꽉 쥐며 솔로몬은 이야기했다.
" 내가 여기 있소, 아우로라 양. "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는 않았으나, 분명히 자신을 불렀다는 것은. 알아챘다는 것이겠지, 그 때의 그녀라면 알지 못했을 마나의 존재를 알아차렸다는 것이겠지. 물론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지는 않았으므로, 아우로라에게 목소리가 전해지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답을 줄 수 있을까? 간단하다. 지금까지 하던 것이 무엇이었지? 솔로몬은 꽉 쥔 아우로라의 손을 통해 자신의 마나를 한층 더 많은 마나를 흘려넣었고, 그녀의 몸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신경쓰며 조금씩 흘려보내는 마나량을 줄여간다.
꿈 속이라도 알 수 있었다. 이건 자신의 마나가 아니고, 솔로몬의 마나라는 것을. 그리고,. 이건 과거의 일이고, 심지어 일어나지도 않았던 경우임을. 가둠의 독에 의해 몽롱하게 꿈 속에 갇혀있던 아우로라의 정신이 똑바로 돌아왔다. 여긴 현실이 아니라고 돌아온 정신이 절박하게 외쳤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보호막의 균열이 점점 커져갔고, 아우로라는 흘러 들어오는 마나를 느끼곤 가둠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꿈 속에서 몇 번이고, 이때의 꿈을 얕게나마 꾸었다. 그때는 타인들의 도움으로 깰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혼자서 나와야 했고, 솔로몬은 직접 나서지 않는다. 아우로라가 손을 다시금 앞으로 뻗었다. 보호막이 깨지며 가둠이 크게 울부짖으며 손을 크게 휘두르던 순간.
아우로라가 마법진을 커다랗게 펼쳤다. 얼추 두세개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을 보자 절벽 위의 마법사가 기함한다. 스노우디아가 제국을 세우는 것에 일조한 초대 마탑주의 피를 이은 것으로 유명하긴 했지만, 지팡이나 주문도 없이 저런 마법을 사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듯. 솔로몬의 마나가 한 몫을 하긴 했지만, 빠른 캐스팅과 여러개가 꼬여 하나를 이루는 복잡한 마법진은 아우로라의 실력이었으리라.
마법진이 가둠을 속박했고, 아우로라의 꿈이 조각나기 시작했다.
침대, 아우로라의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은듯 은은히 빛났다. 스노우디아 가문의 사람들이 강력한 마법을 사용하면 나타나는 특징이었다. 아우로라의 몸이 느릿하게 움직이더니, 솔로몬의 손을 끌어 제 볼에 대었다.
"...제 곁에 계셨군요.."
그동안 눌러담은 두려움을 추스르려는 듯, 평온함도 아니고, 공포에 질린 표정도 아니었다. 꼭 어린 아이가 제 부모를 잃었다 찾았을 때 안도하였듯이 짓는. 그런 표정이었다.
자신이 흘려보내는 마나가 계속해서 소모되는 것이 느껴지고, 솔로몬은 아우로라가 꿈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솔로몬의 기다림과, 꾸준한 보살핌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는 듯이 아우로라의 손이 움직였고, 그녀의 손을 쥐고 있던 자신의 손을 그녀 자신의 볼에 가져다 대었다. 보드라운 볼의 촉감과 온기가 손에 느껴진다, 그리고 드디어 꿈에서 벗어난 것인지 그녀에게서 조그맣지만 확실하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말을 하는 아우로라의 표정은, 평온함이나 공포에 질린 표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제 부모를 잃어버린 채 공포에 질렸던 아이가 결국에 자신의 부모를 찾았을 때 지을 만한, 안도감에 찬 표정이었다.
" ...그렇소. "
조용히 그녀의 말에 대답한 뒤, 잠시 침묵하며 그녀의 뺨을 가만히 쓰다듬고 내려다보던 솔로몬은, 말을 이어갔다.
" 어째서 이런 꿈을 꾼다고 미리 이야기하지 않았소? 물론 단순한 악몽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소. "
솔로몬은 조금, 아우로라를 나무라듯 이야기했지만. 그의 표정은 분노나, 불편함을 담고 있지는 않았다, 아우로라가 눈을 떠서 솔로몬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오히려 안도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겠지.
솔로몬은 무어라 더 덧붙이지는 않고, 아우로라를 바라보며 잠시 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인간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이렇게 가녀린 소녀가 겪기에는 끔찍하기 그지없을 일이었을 터다. 첫 만남 때 그녀에게서 들었던, 황태자가 구면이라는 이야기를 떠올려 보면, 그녀와 황태자의 관계는 전혀 원만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겉으로는 인자하고 황실의 계승자로써 별 부족함 없는 모습을 보여왔다만은, 뒤에서는 귀족가의 영애를, 사지로 몰아넣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에게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황가에 충성을 바치는 그로써는 당연히 황가의 뒤에 대하여 굳이 조사를 할 이유가 없었으나, 아우로라가 겪은 일로 말미암아 그는 미리 황태자의 성향을 파악하지 못한 것에 대해 조금은 후회하기 시작했다.
대체 황태자는 무슨 이유로 후작가의 영애에게 이런 짓을 한 거지? 아무리 황태자라고 해도 대귀족의 영애를 함부로 다루는 것이 쉬울 리 없을 뿐더러, 그로 인한 후폭풍을 쉽사리 감당하기는 어려울 텐데. 그러나 아우로라의 상태를 보자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자 절로 나오는 한숨에 착잡함을 느낀 솔로몬은 아우로라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그녀라면 자신의 폭로나 말로 인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피해를 입으리라 생각했겠지. 그러나 그녀가 쉽사리 이야기하지 못하고 황태자의 핍박을 참고 견딘 이유가 그녀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였음을 솔로몬은 알지 못했다. 어찌 보면 그녀가 공작저로 온 이유와 빼다박았을 그 이유를, 알게 된다면 과연 그는 어떻게 아우로라를 대할 수 있을까.
적어도 지금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 ...사실 아우로라 양의 비명소리는 진즉에 들었소, 처음엔 환청이라 여겼기에 보살피는 것이 늦어 상처까지 입었었으니... 미안하게 생각하오. "
가둠이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꿈이 조각나기 시작했다. 최후의 발악인지 가둠이 꿈 속의 황태자를 이용했다. 황태자가 가둠과도 같이 울부짖는다. 네가 행복해질리가 없다면서, 언제까지고 자신의 그늘 밑에서 이용 당하고, 공작에게도 언젠가 이용을 당해 버려질 것이러고. 네 곁에 언제까지고 자신이 함께 할 것이라고. 아우로라가 마법진에 부숴지는 꿈 속에서, 황태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우로라는, 당신과 달리 적어도 공작님께선 그럴 분이 아니라고 꿈 속에서 외쳤고, 이윽고 산산조각난 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우로라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가늘게나마 눈을 떴다. 아우로라가 느끼기에 자신의 뺨을 쓰다듬는 공작의 손은 따스했고, 공작의 긍정은 큰 힘이 되었으며, 한 편으로는 지난 날의 서러움이 북받쳐 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아우로라가 가만히 솔로몬을 올려다본다. 미리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라. 아우로라가 어리광을 부리듯 손에 뺨을 가볍게 비볐다.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는지 퍽 조심스러운 모양새였다.
"죄송해요..공작님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는데."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는 말이 꼭 나무라는 것 같았지만, 아우로라가 눈을 들어 본 공작은 안도에 가까워보였다. 아우로라가 시선을 마주한다. 잠시동안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공작을 마주하자니, 괜히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꿈. 그저 꿈일 뿐인데. 이제 황태자는 자신에게 손을 대지 않을거라고 생각하는데. 아우로라가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자 투명한 눈물이 도르르, 떨어 흘러 솔로몬의 손을 적셨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나 때문에 공작님마저 위험에 처하면 어쩌지. 아냐, 이번엔 내가 지켜내야지. 그렇지만..아우로라가 그런 생각을 하더니 솔로몬이 머리를 쓸어주며 하는 말에 생각을 멈춘다.
아냐, 괜찮을거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아우로라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정도 응석은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 무서웠으니까, 이번 한 번은 봐주지 않을까. 아우로라가 물기어린 목소리로 겨우 내뱉었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려다본 아우로라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가늘게나마 그녀의 눈이 뜨였다. 그것으로 끝이 아닌, 그녀의 시선이 조심스레 움직여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안 솔로몬은, 그녀의 눈이 조금씩 물을 머금은 듯이 젖어드는 것을 보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느릿하게 그녀의 눈꺼풀이 마주붙었다가 떨어지며 눈이 머금었던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고 있는 자신의 손을 적시는 것을 느꼈다.
말없이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며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솔로몬은, 미안하다는 자신의 이야기에 대해서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아우로라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천천히, 마치 그동안의 아픔을 삼키며 간신히 내뱉듯이 하는 말을 들었다.
- 무서웠어요
라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아우로라의 얼굴을 본 솔로몬이었지만, 이대로라면 그녀는 그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웠으면서도 이 이상으로 자신의 감정을 쉽게 드러낼 수 없을 것이었다. 주변에 황궁 사람들이 있다면 악몽으로 우는 것만으로도 핀잔을 줬겠지, 물론 챙기기야 했겠지만은, 그런 것은 이미 말로 인한 상처를 메꿔 줄 수 없을 터, 어차피 그는 사소한 예절을 따지기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었거니와, 아우로라가 보이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가슴 한켠이 아려오는 느낌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 ..... "
그는 새삼 어째서 후작이 그녀를 끔찍이도 아꼈는지 이해가 되는 듯했다. 이 정도로 심했던 정도가 있었을까 싶지만, 단순히 악몽으로 힘들어하는 모습만으로도 부모의 마음이 철렁이는 것은 쉬웠겠지. 한동안 말없이 아우로라의 뺨을 어루만지던 솔로몬은 부드러운 어조로 이야기했다.
" 혼자 공포를 짊어지느라 고생 많았소, 비록 좋은 방법으로 그 아픔을 알게 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젠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곁에 있을 것이니. "
그러니 굳이 오늘 모든 것을 쏟아내거나, 이야기하지 않아도 좋소. 나는 그대 생각보다 더 기다리는 것에 익숙하니. 라고 덧붙이며 솔로몬은 희미하지만 미소를 지었다.
제 눈물을 닦아주는 손길이 익숙하지 않았다. 한평생을 같이 자라온 가족들의 손길과는 달랐고, 아예 닿지 않았던 황태자의 손도 아닌 그것은 익숙하지 않으면서도, 아우로라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작은 소녀가 얼마나 눌러담고 살아왔을까. 무서웠다고 조심스레 고하는 것 조차, 몸에 배어있는 인내가 보일 정도였다. 아우로라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제 의지와 다르게, 눈을 깜빡이지 않아도 흐르는 그것이 어찌나 뜨거운지. 그 일이 있고나서 처음으로 황궁에서 악몽을 꾸었을 날, 궁인 하나가 아우로라에게 타이르듯이 말했던 것은 상상 이상이었다. 여기서 울어도 아무도 달라지지 않으니 포기하라고 했던가. 그 이후로 아우로라가 거세게 저항했지만 남는 것은 협박이었다.
파혼 이후, 도미닉은 그간의 일 때문인지 아우로라를 제 목숨만치나 소중히 여겼다. 그것이 한없이 죄스러웠음을 제 아비는 알까.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솔로몬의 손길에 아우로라가 촉촉한 눈망울을 굴려본다. 구릿빛 손이 보였다. 제 손보다 훨씬 크고, 따스한 손을. 그리고 따스한 손만치나 따스한 말을.
"......."
아우로라가 고개를 돌려 솔로몬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희미한 미소가 자신의 눈엔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 남자라면. 아우로라가 재차 느릿하게 뺨을 부볐다. 눈물을 그치려 노력하듯 몸이 잠깐 잘게 떨렸다.
"..그것만큼은 무르지 말아주세요."
꼭 곁에 있어주셔야 해요. 아우로라가 작게 덧붙이며 조심스럽게 한 손을 들어올렸다. 작은 손에서 손가락이 익숙하게 소지를 제외하고 접힌다. "약속.." 하고 조그맣게 중얼거리던 아우로라가 다른 손으로 이불을 그러모으더니 제 목께로 조심스레 올렸다. 퍽 수줍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주면서, 아우로라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곤 제 손에 다시금 뺨을 비비자 그에 답하듯 솔로몬은 손을 부드럽게 움직여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녀의 몸이 잘게 떨리는가 싶더니 자신을 향한 조그마한 입술이 움직이면서 내는 목소리가 들리자, 그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것만큼은 무르지 말아주세요, 라며 들어올려진 아우로라의 한쪽 손이 새끼손가락을 제외하고 접힌 것을 본 솔로몬은, 뒤이어 아우로라가 조그맣게 약속을 원하는 듯한 이야기와 함께 제 몸을 덮은 이불을 나머지 한쪽 손으로 조심스레 그러모아 쥐곤 제 목께로 조심스레 당겨 올리는 모습에 희미하지만 미소를 띄우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손을 떼었다.
" 약속은 반드시 지키겠소, 아우로라 양. "
이젠 전설로만 남아 있을 뿐인, 제국의 초대 황제와의 약속을 그는 지금까지도 지키고 있었다. 그 전설 속의 드래곤이 그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 자체는 현 시대에 존재하지 않겠지, 물론 누군가가 관심을 가지고 그를 유심히 살펴본다면 실마리를 잡을 수는 있겠지만, 제국의 공작이 가진 과거를 캘 만한 용기를 가진 위인이 과연 있을까.
어찌 되었든 그는 약속을 쉽게 하지 않는 만큼, 한번 한 약속은 절대 깨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그게 그로 하여금 오랜 시간을 살아올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탐욕과 본능만을 쫓다가 용 사냥꾼들에게 쓰러져 간 동포와 그들의 자손들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으니.
이리도 다정한 사람이었구나. 아우로라가 악몽의 조각을 완전히 떨쳐내며 제 볼에 닿는 온기를 느꼈다. 정말 약속해주실까? 이렇게 작은 영애의 부탁도 들어주시는걸까, 아냐, 공작님께서 나를 도와주셨잖아. 들어주실지도 몰라...
이러저러한 생각도 잠시였다. 그의 말에는 확신이 있었고, 아우로라는 그가 거짓을 고할 사람이 아님을 직감했다. 공작님은, 제 눈 앞의 폭군이라 불리는 자는 자신에게 약속을 해준 것이니. 그렇게도 신기한 장면이 없었다.
"기뻐요."
새끼손가락을 걸어주자 아우로라가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언제 울었냐는 듯 눈을 조심스레 반쯤 접어 배시시, 하고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손가락을 걸어주셨으니까 이 약속은 깨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우스운 생각도 해본다. 손가락을 건 약속은 깨지지 않는대. 라는 어린아이들의 신념처럼.
"...아까는 긁힌 부분이 조금 따가웠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공작님이 마나를 나눠주신 덕분이에요.."
그렇게 크게 다친 부분도 없었고. 아우로라가 멋쩍은지 작게 피, 하고 웃었다. 마물에게 그렇게 대단한 마법도 써보다니. 늘 이론으로만 생각했던 마법을 실제로 써볼 수도 있었지.
"그렇지만 오늘은 잠을 못 잘 것 같아요.."
다시 그 꿈을 꾸면 어쩌나 싶으니까. 아우로라가 이불을 살포시 끌어당겨 제 입가를 우물우물 덮었다.
긍정의 답과 함께 손가락을 걸어 주자 아우로라는 기쁘다고 이야기하며, 운 탓에 조금 부은 눈으로 배시시 웃음지었다. 어느 정도 자란 인간들 사이에서는 손가락을 걸고 약속하는 행위가 쉽지 않을 뿐더러 서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지금 그의 앞에서 미소짓고 있는 소녀에겐 그 자체로 큰 신뢰를 심어준 모양이었다.
이어서 어디 아프거나 한 곳은 없냐는 솔로몬의 질문에 아우로라는, 아까는 긁힌 곳이 따가웠으나 지금은 괜찮다고 이야기했고, 그 이야기에 솔로몬은 상처가 났던 부분으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은 말끔히 낫긴 했지만...
" 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아우로라 양의 재능이오, 숨 쉬듯이 마나를 소모할 수 있었던 것도. "
대단하구려. 라고 덧붙이며 아우로라를 내려다보던 솔로몬은, 잠시 뒤에 아우로라가 이불을 끌어당겨 입가를 덮으며 하는 이야기에 눈을 깜빡이다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 피곤하지 않은 것이오? 지금이라도 다시 잠들어야 내일을 기분좋게 보내지 않겠소, 정 무서우면 오늘 밤은 같이 지내도 괜찮소만. "
솔로몬은 그리 이야기하면서 아우로라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가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열린 창문을 통해 풀향기가 들어와 코를 간질인다.
그렇게 큰 상처도 아니었고 말이지. 아우로라는 공작의 질문에 퍽 긍정적으로 답한 뒤, 자신의 재능이라는 말에 시선을 도르르 굴렸다. "과찬이에요." 라고 조근거리던 목소리는 수줍음이 잔뜩 묻어있었다.
"꿈 속에서요, 도구 없이 마법도 사용했어요. 평소엔 이론으로만 생각하던건데.."
신기했다고 덧붙이던 아우로라는 솔로몬이 피식 웃으며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자 가린 입을 오물거렸다. 정말 못 자겠는데! 그렇게 무시무시한 마물도 잡았고, 악몽을 산산조각 냈으니 잠도 조각났겠지. 아우로라가 입술을 작게 삐죽이다, 솔로몬의 말에 눈을 잠시 두어번 깜빡였다.
정 무서우면 오늘 밤은 같이 지내도...? 어디선가 소네타가 아우로라에게 언니!! 안돼!! 라고 외치는 것 같았지. 자고로 남자들이란! 하고 서두를 뗄지도 모르고. 음, 소네타. 공작님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아우로라가 솔로몬의 눈동자를 잠시 빤히 마주치다가, 솔로몬이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불을 그러쥔 손을 떼었다.
열린 창문 사이로 산들바람에 언뜻 타고오는 풀향기가 코를 스쳤다. 들판에서 꽃을 피웠던 것이 떠올랐는지, 아우로라가 편안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윽고 아우로라는 솔로몬의 옷깃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갱신이얌! 새벽의 아우로라주 대단해ㅡ에! 나야말로 여러가지로 고마워! 같이 일댈 해주는 것만 해도 고맙구...솔로몬 좋아해줘서 고맙구!! 그리고 이마에 입맞춘건...(///)조금 이르다고 생각해서 말이지ㅎㅎ 로판 읽고있구나! 난 요즘 책하곤 거리가 먼 생활이라ㅠ필력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네.. 그래도 언젠가 더 멋져질 아우로라 생각하면서 쥐어짜야겠어!
현실에서도? 세상에, 현실에서도 그때 사용했던 마법을 쓸 수 있는 걸까? 아우로라가 반짝반짝 빛나는 눈망울로 무언가를 생각하나 싶더니, 이내 생각을 접는 듯 싶었다. 이 마법을 사용할 순간이 오지 않아야 할텐데. 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마법을 만일 쓰게 되는 순간이라면 분명...
아우로라가 풀향기에 마음이 편안해진듯 싶었더라지. 산들거리는 바람과 날아오는 풀향기, 그리고 저 멀리서 은은히 들려오는 바람결에 흩날리는 풀들의 노래. 아우로라는 불어오는 바람만치나 산들거리는 마음으로 솔로몬에게 작은 부탁을 했고, 이내 자신의 뺨을 쓰다듬는 손길에 미소지었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부드러운 어조는 아우로라를 안심시키기 충분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는 손길은 퍽 따스했다. 간질간질한 기분에 아우로라가 작게 키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어릴 때 이후로 누군가가 같이 침실에 있어주었다는 사실이 색다르게 다가온 탓이리라.
뺨을 쓰다듬어 주자 미소짓는 아우로라를 보며, 언젠가 보았던 아이들의 미소를 떠올린 솔로몬은, 감사하다는 이야기와 함께, 기분 좋은 듯 키득거리던 아우로라가 장난스럽게 하는 이야기를 듣곤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는, 부탁이었을까? 그는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어떻게 할 지 고민하는 듯했다, 옛날 이야기라...동화라던가, 시중에 떠도는 전설에 그리 깊은 흥미를 지닌 자신이 아니었기에 무슨 이야기를 해주는 게 좋을까 생각하던 그는, 문득 침대 옆 선반에 놓여있는 책을 발견하곤 그 책을 집어들었다. 퍽 오래된 듯 색이 바랜 겉표지와 인기 없었을 것 같은 디자인, 아우로라와의 첫 만남에서 선물이라고 주었던 책이었다.
옛날 이야기. 자신과 소네타가 아직 어려 한 침대를 쓸 적. 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유모를 꼬옥 붙잡곤 동화책을 읽어달라고 떼를 쓴 적이 있었다. 그러면 유모가 어휴, 못말린다니까. 라는 서두와 함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주었지. 그때 하나만 더요! 하나만 더! 하다 까무룩 잠든 게 수도 없었지만! 공작님도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주실까? 그러면 좋겠다. 어떤 이야기일까? 마탑의 마법사 이야기? 날아다니는 용사님 이야기?
"책이요?"
앗, 저 책. 아우로라가 눈을 휘었다. 첫 만남때 받았던 선물. 적응하느라, 이곳저곳 둘러보느라 아직 읽어보진 못했던 것을 오늘 공작님이 읽어주신다니. 아우로라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읽어주세요!" 라고 뱉은 목소리는 잔뜩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누군가의 잠자리 옆에 앉아서는, 그 사람을 위해 책을 읽어주거나 옛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던가? 자신의 목소리가 딱히 동화나 조곤조곤하게 이야기해야 하는 내용에는 딱히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솔로몬이었지만, 적어도 지금 그가 책을 읽어주길 바라는 저 소녀에게는 별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솔로몬은 책을 읽어달라며 고갤 열심히 끄덕이는 아우로라를 보곤, 그녀의 뺨에서 손을 떼고 책장을 손으로 넘겼다. 꽤 두꺼운 표지가 넘어가고, 얇은 종이가 팔랑이는 소리가 들린다.
" 그럼 읽도록 하지, 제목은... '아도니엘' 이로군. "
수수한 표지에, 짧은 단어. 솔로몬은 제국의 이름과도 같은 그 단어를 내뱉으며 책장을 넘겼다. 사각, 하고 책장끼리 부대끼는 소리가 들려오고 잠시 그 내용을 읽던 솔로몬은 입을 열었다.
" 비룡과 페가수스, 거대한 새들이 하늘을 날고, 숲 속에는 라이칸과 유니콘, 머메이드와 엘프, 페어리들이 살았던 먼 옛날. "
" 다양한 종족들은 자신들의 터전을 지키거나 하는 일 이외에 불필요한 싸움을 벌이지 않고 균형을 이루며 살아갔습니다. "
" 그렇게 긴 시간이 흘렀고, 수많은 종족들은 이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가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며 번성했습니다. "
책에는 삽화가 실려 있었는지, 솔로몬이 다음 장을 넘기기까지 읽는 활자는 그리 길지 않은 모양이었다.
" 그리고 그 세상에는 훗날 신이라고 불리우는 존재들 역시 살았는데, 그들은 각자 한 종족을 맡아 길러내는 데 힘썼고, 서로 도와가며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나갔습니다만, 오직 한 명의 신만이 자신만의 종족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
사각, 하고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다시 들린다. 솔로몬은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금 글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른 신들이 그 신을 따돌리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신 스스로는 외로움을 느꼈고, 진흙에 자신의 애정을 담아 자신과 닮은 형상을 빚어냈고, 결국 새로운 종족을 탄생시키게 되었고, 이 순간이ㅡ "
아도니엘. 제국의 이름을 본딴 책의 첫 내용은 흥미로웠다. 아우로라의 눈이 반짝인다. 여러 이종족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책은 또 처음인 것이다. 이종족은 마탑이 연구했던 대로의 이야기룰 보여준다. 그들은 숭고한 자연과 하나가 된 삶을 살았던 것이다. 불필요한 싸움을 줄이고, 번성하는 삶.
다음은요? 라고 묻지는 않는다. 아우로라의 두 눈은 아이처럼 반짝였다. 삽화가 실린 책이었는지 넘기는 속도는 빨랐다. 어떤 삽화일까? 서로서로 잘 지내는 이종족의 삽화? 즐겁게 웃는 이종족?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유니콘? 유니콘은 굉장히 신성하다던데.
아, 신의 이야기다. 아우로라가 귀를 기울인다. 종족을 만들지 못한 신은..애정을 담아 자신과 비슷한 종족을 만드니, 그것이 인간이라는 말에 아우로라가 이불을 꼬옥 끌어안는다.
작은 아버지께서 자신을 마탑으로 회유하기 위해 마구 이야기를 꺼냈던 것들 중 하나였나? 들어본 것 같다. 연구 결과, 인간은 저절로 나타난 게 아니고 이종족보다 늦게 만들어졌다고.
그렇지만 그 다음은 모르는 터였다. 그렇기에, 아우로라가 기대를 하며 입술을 빙긋 끌어올렸다. 그 다음은 무얼까?
" 그러나 인간은, 비룡처럼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가 없었고, 엘프처럼 자연의 힘을 빌리는 능력도 없었으며, 머메이드처럼 물 속에서 숨을 쉴 수도 없었습니다. "
" 또 라이칸처럼 뛰어난 육감을 가지거나, 강한 힘을 지니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
그렇기에.
" 인간들은 서로 떨어져 지내는 것이 아닌, 한 곳으로 모여들어 그들만의 사회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연스럽게 생겨난 종족이 아니었던 만큼 인간은 자연의 다른 종족들처럼 자연에 쉽게 녹아들지 못했을 뿐더러, 특출나게 뛰어난 것이 없었기에 그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
또 다시 사각, 하고 책장끼리 부대끼는 소리가 들린다. 다음 장을 다시금 훑은 솔로몬은 아우로라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잠시 살피는가 싶더니 계속해서 글을 읽어 내려간다.
" 한 곳으로 모여든 인간들을 보살피던 신은, 인간들이 좀 더 번성하기를 바랐고, 직접 그들 곁으로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땅으로 내려온 그 신은 인간에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도구들에 대해 알려주었고, 인간은 신의 인도로 불을 지피거나 하는 등 빠르게 발전해 나가, 하나의 문명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
" 처음엔 주변 종족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삶의 방식을 따라하기도 하는 등, 나름대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 인간이었지만, 자연으로부터 태어나 자연의 법칙대로 살아가는 종족과는 다르게, 인간은 한 신의 의지로 인해 탄생했기에, 자연의 법칙을 쉽사리 이해하지 못했고, 그 때문이었는지 자연을 제 입맛대로 바꾸고자 하는 욕망이 인간 안에 싹트고 있었습니다. "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아우로라가 솔로몬에게, 인간들은 그 욕망을 이겨냈냐고 물었고, 솔로몬은 어깨를 으쓱이며 이야기했다.
" 글쎄...어땠을지, 계속 읽어보겠소. "
그렇게 말하며 책장을 넘긴 솔로몬의 표정은 별 변화가 없었다, 애초에 그에게 이 이야기가 얼마나 흥미를 불러일으켰겠냐만은.
" 인간은 신의 도움으로 만든 도구들과 지식을 통해 서서히 삶의 터전을 넓혀가기 시작했습니다, 집이란 것을 짓고 그 안에서 생활하는 인간에게 숲과 호수, 바위투성이 산은 살기에 부적합한 곳일 뿐, 인간은 느리기는 해도 조금씩 나무를 베고, 바위를 깎고, 땅을 평평하게 만들어갔습니다. "
" 처음엔 인간을 위해 자신들이 살던 자연의 일부를 내어준 이종족과 그 이종족을 보호하던 신들이었지만, 인간은 쉽사리 만족하지 않았고, 처음엔 대화를 통해 풀어나갔던 관계가 깨어지며 이종족과 인간 사이에는 충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
" 신들은 자연의 순환에서 벗어난 충돌을 멈추기 위해 인간의 신에게 그들을 멈추어달라고 부탁했지만, 외로움으로 인해 창조와 인도를 시작한 신에겐 인간만이 외로움을 달래 줄 존재가 되었고, 그런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고 싶다는 스스로의 욕망마저 가지게 되면서 신들의 부탁은 묵살되고 말았습니다. "
슬프다는 감상 이후, 자신의 행동을 보곤 빙그레 미소짓는 아우로라의 표정에 솔로몬은 피식 웃음을 흘리다가, 그 다음엔 어떻게 되었냐는 아우로라의 질문에 답하듯, 그는 글을 읽어 내려갔다.
" 인간의 욕망을 향한 행동은 계속되었으나, 이종족이 지닌 힘을 도구만으로 뛰어넘기는 어려웠고, 인간들은 그들의 곁에 내려온 신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 이상 그들에게 간섭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을 테지만, 인간을 사랑한 신은 인간에게 자신의 힘을 나누어주게 됩니다. "
" 그 힘을 인간은 마나라고 불렀고, 마나를 통해 인간은 이종족과 대등, 아니 그 이상으로 강해질 수 있었습니다. "
그러나.
" 인간의 욕망과 뒤섞인 때문이었을까, 본디 푸른 빛을 띄는 성스러운 마나는 이리저리 뒤틀려 본래의 빛을 잃고 파괴적으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본래라면 불을 피워낼 뿐인 마나가 불덩이를 만들어 숲을 태웠고, 호수를 마르게 했으며, 깨끗한 물을 솟아나게 할 뿐인 마나가 파도가 되어 산을 깎아내리고 땅을 휩쓸었습니다. "
" 인간이 마나를 다루는 방식은 파괴적인 것이어서, 신들조차도 그 파괴에 대응하기도 전에 다치고, 쓰러져 갔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신들의 힘의 원천 역시 마나였으니까. "
신에게 도움을 청한 인간.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결과. 그것이 마나였다는 사실은 마법사의 피를 가진 사람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아우로라가 눈을 깜빡인다. 과거엔 어떤지 모르겠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현제국에서 마법사라 불리는 사람들은 적다. 그 마법사 중에서도 두 가지 이상의 속성을 제대로 구사하는 사람들은 약 스물 남짓.
마탑은 아직도 마나를 가진 사람들이 적은 이유를 연구하고 있었다.
아우로라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던 찰나, 다음 이야기가 들려온다. 마나는 뒤틀렸고, 파괴적이며 신조차 쓰러져갔다고.
솔로몬은 자신이 읽어내려가는 글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의 눈이 닿은 책장에는 인간이 뒤틀린 마나를 이용해 숲을 불태우는 삽화가 실려있었다.
" 어디까지나 전설을 다룬 책이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시오, 이 책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유를 알겠군. "
인간을 이렇게까지 질 나쁜 존재로 표현한 책이 시중에 자유롭게 떠도는 것은 인간 입장에서 썩 좋지 않겠지. 누구 하나 제대로 기억하지도, 심지어는 기록된 문헌도 없는 까마득한 옛날의 이야기라면 상상을 통해 지어내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할 것이니 저자가 괘씸하기 그지없으리라고까지 생각이 미치자 솔로몬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 이어진 내용은 이렇소, 그렇게 신들은 하나 둘 신격의 죽음을 맞이했고, 지상으로 떨어져 자신이 돌보던 종족의 구성원이 되어 인간으로부터 멀리, 이종족의 보존을 위해 도망쳤고, 인간이 모여 이룬 최초의 문명 주변엔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
세계의 반 이상을 자신들의 영향 아래에 둔 인간은.
" 자연을 제 입맛대로 바꾸는 것으로도 모자라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신이 지닌 힘에 대한 뒤틀린 욕망까지 가지게 되었고, 인간을 사랑할 줄만 알았지 인간이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 보지 못했던 인간의 신은 자신에게 위협이 다가오고 있음을 몰랐습니다. "
전설을 다룬 책이라니. 그래도..그래도 이건 너무 잔인하다. 인간들의 욕망으로 다른 종족들이 고통받고 신까지 다치다니! 본인이 인간이긴 하지만, 정말 슬픈 사실이었다. 아우로라는 이종족과 화합을 해야한다는 의견을 가졌으니까. 노예나 장난감이 아니라, 동등하고 존중해야 하는 존재.
"...."
책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 아우로라는 잘 알 것 같았다. 제국의 분위기 상, 이종족을 제압한 인간들은 영웅이나 다름이 없는데 극악무도한 가해자로 나오니까 당연히 괘씸해서라도 숨기려 들었겠지.
이종족은 결국 도망쳤다. 최초의 문명은 고독히 존재하며 광기를 키우고 자신들의 은인마저 삼키려 들었다. 아우로라가 솔로몬을 가만히 바라본다. 아까부터 솔로몬은 자신을 살폈다. 이종족이라 알려진 공작님은 이 책을 읽으며 인간인 나에게 어떤 기분이 들까.
솔로몬은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바라보는 아우로라의 눈망울을 보면서, 괜히 이런 이야기를 읽어준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지만 별 수 없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옛날 이야기라는 것은 (본인 입장에서)따분하기 그지없었고, 정말 몇몇 인간을 제외한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에게 썩 달갑거나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존재는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자신이 지금 읽어주고 있는 책의 내용은, 신이라는 존재를 통해 이종족과 인간의 관계를 풀어나가고 있었다, 결국 인간 그 자체의 본성이 나쁘다기보다는 인간에게 힘을 쥐어준 신의 잘못도 있다고 해석할 수 있겠지.
저자도 결국 인간이었던 모양이었다, 혐오에 가까운 틀을 가지고 있긴 한 모양이었지만.
" 결국 인간은 다른 신들을 끌어내려 이종족의 구성원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심하게 자신들의 신에게 위해를 가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향한 인간의 행동이 뜻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한 신은 자신이 사랑한 존재에게 찢기는 결말을 맞이했고, 그나마 이종족의 껍데기에 들어가 언젠가 끝날 삶을 유지한 다른 신들과는 다르게, 인간의 신은 제 손으로 만든 존재들에게 찢겨, 영혼이 자리할 육신을 얻지 못한 채 사라져버렸습니다. "
어리석게도 인간은.
" 자신들이 찢어발긴 신의 힘을 얻기는 커녕 그대로 신이 사라져버리자 당황했고, 그제야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들의 편이었던 존재를 스스로 내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을 한 것입니다. "
" 신이 사라지자 갑작스레 세계에 덩그러니 남겨진 인간은, 그제서야 공포를 느꼈습니다, 부모에게서 떨어진 아이가 느끼는 그러한 공포를, 그리고 자연스럽게 인간은 신을 죽이는 데 앞장선 이들을 질타하는 자들과, 그들 역시 동조하지 않았냐며, 이제 와서 책임을 전가하지 말라고 힐난하는 이들이 대립하는 이들로 갈라졌습니다. "
" 처음엔 단순한 언쟁으로 시작했겠지만, 누군가로부터 마나를 이용한 공격이 시작되었고, 인간은 이종족을 몰아내고, 신을 죽인 그 힘으로 서로를 다치고 죽게 만들었습니다. "
솔로몬은 책장을 넘겼다.
" 얼핏 보면 그들은 신을 죽인 것이 잘못이라 여기기는 했지만, 그 누구도 책임을 지고 싶어하지 않았기에 싸움은 커져만 갔고, 대지에는 인간의 시체가 쌓이고 썩어갔습니다. "
자신을 올려다보며 옷깃을 잡는 아우로라를 마주본 솔로몬은 읽을 책을 잘못 선택한 게 아닐까 곰곰히 생각했다, 적당히 옛 이야기나 해줄 걸 그랬나. 그렇지만 아우로라가 다음 내용을 궁금해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기에 솔로몬은 계속해서 글을 소리 내어 읽었다.
" 이대로 간다면 최후의 한 명이 남을 때까지, 혹은 모두 죽을 때까지 싸움이 계속될 지도 몰랐습니다만, 인간들 중 그런 미래를 떠올리곤 자신들의 싸움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외치는 이들이 나타나면서 인간끼리의 싸움에는 작은 변화가 일었습니다. "
" 그들은 동족상잔을 멈추자고 호소했고, 싸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싸움을 멈추고자 하는 이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소수였고, 아이러니하게도 서로 죽일 듯이 싸우던 인간들은 싸움을 중재하려는 이들에게 그들의 창끝을 겨누었습니다. "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리고, 솔로몬은 손끝으로 글씨를 훑으며 읽어내려간다.
" 수적으로 열세인 평화주의자들은 이전에 자신들이 이종족에게 행했던 일을 그대로 겪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멀리 도망치게 된 것입니다. "
" 그들이 쫓겨나자 다시금 인간은 서로를 죽였고, 아예 터전을 반으로 갈라 서로가 완전히 다른 이념을 가졌으며, 전쟁을 이어갈 것임을 천명했습니다. "
한편.
" 쫓겨난 이들, 추방자들은 정처 없이 떠돌다, 이제는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선 볼 수 없는 숲, 호수로 둘러싸인 거대한 바위산을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나있었기에 예전 세계의 모습을 직접 보고 기억한 이들은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들은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에 매료되어 바위산 안으로 들어서고자 했습니다. "
" 물론 이 곳도 괜찮은 곳이지만, 그 바위산은 더 아름다웠소, 찾고 싶다고 찾을 수 있는 곳도, 그 곳에 오르고 싶다고 오를 수 있는 곳도 아니었지, 과연 이 땅 위에 존재하는지조차 불분명한 곳이오, 그 곳에 가서 돌아온 이들이 이 시대엔 없기 때문이고, 이미 너무나 오래된 이야기니 기억하는 이조차 없겠지. "
솔로몬은 아우로라의 질문에 대답해주며 책장을 넘겼다.
" 아무래도 이야기가 좀 딱딱한 감이 있군, 어디, 아무래도 잠에 들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해주겠소. "
그렇게 이야기하며 솔로몬은 책에 마나를 흘려보냈고, 책은 그의 손에서 두둥실 떠올라 두 사람을 향해 책장을 펼쳐보였고, 솔로몬은 아우로라의 손을 부드럽게 쥐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Monstra in memorias.
그러자 책장이 빠르게 넘어가는가 싶더니 두 사람에게 밝지만 눈이 부시진 않은 빛을 쏟아냈고, 방 안을 가득 메웠던 빛이 사라지자 두 사람은... 놀랍게도 책에서 표현하던 그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바람도 스쳐지나가고, 풀내음도 들리는 것이 마치 진짜 같았다.
그런 것에 놀라기도 잠시, 마치 머리에 울리듯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린다.
-바위산에 들어가고자 했던 추방자들을 반긴 것은 아름다운 자연이었습니다, 푸른 잎들이 바람 따라 흔들리며 쏴아아ㅡ 하고 소리를 냈고, 호수면은 바람을 따라 작은 파문을 일으키며 흔들렸습니다. 입구(입구라기엔 어딜 통해서든 들어설 수 있었지만)부터 황홀함을 선사한 바위산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가던 추방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공포심에 휩싸여 멈춰야만 했습니다.-
" 주변을 경계하지 않고 나아가던 인간들 주변에는 이제 그들의 기억에서 잊혀진 이종족들이 모여있었소, 그들은 인간에게 특별히 적대적인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기록을 통해 자신들이 그들에게 행한 일을 기억해 낸 인간들은 당연히 그들이 자신들에게 위해를 가하리라 생각했겠지. "
솔로몬은 놀라기는커녕 태연하게 아우로라의 손을 잡고 미소를 띄우며 해설을 덧붙인다.
-그러나 이종족은 인간을 구경하기는 했으나 별다른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고, 몇몇 호기심이 큰 이종족의 유아들은 인간들에게 다가가기도 했습니다, 그들에게 인간은 무서운 존재가 아니었던 모양이었습니다.
더 아름다웠소, 라는 말에서 아우로라가 작은 의문을 품었다. 마치, 공작님은 직접 그 장소를 눈으로 보고 살았다는 듯.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진실과도 같은 어조에 아우로라가 눈을 깜빡였다. 공작님이 만약 진짜로 그 장소를 보셨더라면...얼마나 나이가 많으신 걸까?
"특별한 경험이요..?"
책이 두둥실 떠올랐다. 아우로라는 솔로몬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자 책을 바라보았고, 책은 밝은 빛으로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아우로라가 눈을 감았다 뜨니 보이는 그 세상이 어찌나 밝고 아름다웠는지!
"와아...!"
정말 아름다운 장소였지. 감탄하기도 잠시, 아름다운 목소리가 머리에 울리듯이 들어온다. 추방자들도 이런 황홀함을 느꼈겠지. 아니, 그것보다. 공포심에 젖었다는 말에 아우로라가 눈을 깜빡이다가도, 이어지는 이야기에 이해하듯 눈썹을 축 휘어내렸다.
"그렇군요.."
손을 잡아주는 것이 위안이 되어 다행이다. 아우로라가 옅게 미소를 지어보이곤 다시금 이야기에 집중했다. 이종족의 유아, 어린 이종족은 인간들에게 다가가기도 했더라지. 그래, 무서운 존재가 아니었을까? 그들이 나쁜 사람이 아닌 걸 본능적으로 알았던걸까? 아우로라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자신들을 위협하거나 적대하지 않는 이종족들을 보며 부끄러움을 느낀 추방자들은, 어쩔 줄 몰랐습니다, 나아가거나 돌아가지 못하도록 그들에게 제제를 가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들의 과오를 떠올리자니 아름다운 자연의 품으로 들어가는 것이 분에 넘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겐 돌아갈 곳이 없었고, 용기를 내기로 했습니다, 추방자들은 이종족에게 당신들만 허락한다면 이 곳에서 지내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 그러나 이종족은 인간이 바위산에서 사는 것을 허락할 수가 없었소, 이종족은 땅의 주인이 아니었으니 누가 살아도 좋다, 아니다를 결정할 수 없었던 것이지, 대신 이종족은 인간들을 바위산의 주인에게 안내해주기로 했소. "
솔로몬이 이야기를 마치자 두 사람의 앞에서 이종족과 이야기를 나누던 추방자들이 이종족의 인도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는 아우로라의 손을 잡은 채 추방자들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마법으로 펼쳐진 일종의 환상인 만큼 흙이 묻지는 않았지만 바닥의 질감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 새롭다.
-이종족의 인도를 통해 숲을 지나 바위산의 맨 아래쪽을 마주하게 된 인간들은 다시금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봐온 어떠한 산보다도 거대한 그 산은 구름을 뚫고 치솟아 있었습니다. 이종족은 산 위를 가리키며 이야기했습니다, ' 산을 올라 이 산의 주인을 만날 수만 있다면, 이 곳에서 지낼 수 있을 겁니다. '
" 그러나 산은 너무나 높았지, 보다시피 깎아지른 절벽투성이에 어떠한 안전장치도 없는 산행을 한다는 건 목숨을 거는 것이나 다름없었소, 인간들은 한순간 의지를 잃고 이대로 머물 곳을 찾지 못하는 것일까 생각했소. "
추방자들은 과오에 부끄러워하고, 돌아갈 곳이 없기에 용기를 내었다고 했다. 아우로라가 이해하듯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과오를 부끄러워하는 건 다행이라고 생각했나보다. 솔로몬의 이야기에 아우로라가 고개를 돌린다. 정말, 공작님은 이 전설속에 살다 오신걸까? 아니, 책을 읽어보셔서 그런걸까? 잘 모르겠다.
"주인이요?"
아우로라는 솔로몬의 손을 잡고 추방자들을 따라 걸었다. 바닥의 질감은 생생한데 흙이 묻지 않네. 신기해라. 아우로라가 두 눈을 깜빡였다. 숲을 지나자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 보였다. 정말, 정말 크다! 산의 주인은 저기 꼭대기에 있겠지?
"...아."
맞다. 아우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전장치도 없고, 절벽이고. 힘들었을테지. 아우로라의 의문은 잠시였다. 날아다니는 마법도 꽤 힘들테니까. 아우로라가 추방자 무리를 가만히 살펴본다.
아우로라의 물음에 고갤 끄덕이며 답한 솔로몬은 잠시 추방자들을 지나쳐 바위산의 일부인 흰 바위를 어루만졌다.
-누구 하나 산을 오르겠다고 쉽게 나서지 못한 채 하루가 지나가 버렸습니다, 이종족은 인간을 쫓아내지 않고 그들이 무슨 결정을 내릴 지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렇다곤 해도 영원히 선택을 유보할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추방자들이었으니, 자연에서의 하루는 정말 아늑하면서도, 착잡함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하루를 지냈다는 음성이 들리면서, 자연스레 이종족과 추방자들의 움직임이 잠시간 빨라졌고, 해가 빠르게 지고 다시금 떠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추방자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목숨이 걸린 도전은 꺼려진 모양이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다시금 새벽이 찾아오자, 솔로몬은 아우로라의 손을 붙잡은 채로 잠자리에 든 추방자들에게 시선을 옮겼고, 뒤이어 음성이 머릿속에 울렸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추방자들 사이, 작은 그림자 하나가 홀로 일어서서 이종족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마치 솔로몬과 아우로라를 향해 걸어오는 듯한 그 그림자(그 주변에 있는 이종족에게 다가간 것이겠지만.)에 달이 빛을 비추었고, 드러난 그림자의 주인공은 열 살 남짓한 어린 소녀임을 두 사람은 확인할 수 있었다.
-제가 산을 오르겠어요, 정말 무섭지만 바위산을 가리킨 여러분에겐 공포가 없었으니까, 이유 없이 오르는 사람을 내치지는 않는 거겠죠, 만약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저는 저 사람들이 좋으니까요.
소녀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오고, 소녀의 의지를 존중한 이종족들의 안내를 따라 소녀는 바위산을 올랐다.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추방자들이 다시금 바위산에 대한 고민을 하는 모습이 보이자 솔로몬이 아우로라에게 이야기했다.
" 이종족은 추방자들에게 새벽에 한 소녀가 출발했다고 이야기해 주었소, 그러나 추방자들의 반응은 뜻밖의 것이었지, 그들 중에서 가장 어린 이는 낮게 잡아도 열여덢, 열아홉 살, 지금으로 따지자면 성인식을 치를 나이였으니까, 아이의 생김새를 설명해 주었지만 전부 그 소녀를 본 적이 없다고도 했소. "
바위산도 주인이 있었구나. 아니, 당연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아우로라는 추방자를 지나치는 솔로몬을 쫄래쫄래 따라갔다. 누구 하나 산을 오르겠다 쉽게 나서지 못했으며, 이종족은 인간을 쫓아내지 않았다. 저런 가파른 산을 오르는 건 당연히 무서울테고, 결정은 타의로 이뤄져선 안 될테니까. 아우로라가 추방자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더불어 이종족의 마음도.
이종족과 추방자들의 움직임이 잠시간 빨라졌다. 부자연스럽게 시간이 움직이는 것도 잠시, 해가 점점 떠오르기 시작했다. 물러설 곳도 없고, 목숨은 하나였구나. 그런데도. 아우로라는 가만히 솔로몬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열 살 남짓한 어린 소녀. 아우로라는 작은 소녀를 보며 작게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저렇게 작은 소녀가 오르겠다고 한 것인가? 세상에나! 아우로라의 손이 입을 가렸다.
"없었..다고요? 그러면 그 소녀는 누굴까요..?"
자신과 동갑내기인 아이들만 있지, 열 살 남짓한 아이는 없었다니. 대체 누굴까? 아우로라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 소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눈 가득 생기를 띄우며 자신을 바라보는 아우로라에게서 좋다는 말이 들리자, 솔로몬은 아우로라의 뒤로 가서 섰고, 그의 왼손으로 그녀의 왼손을, 오른손으로는 그녀의 왼손을 붙잡은 뒤 땅을 가볍게 박차 뛰어올랐다. 순간 그가 마법을 쓸 때 보이는, 에메랄드빛의 마나가 마치 반딧불이처럼 흩날렸고, 몸이 마치 깃털처럼 가벼워 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을 터였다.
" 자, 천천히 발을 내딛으시오, 자연스럽게. "
그렇게 이야기하며 솔로몬은 아우로라의 뒤에 선 채 그녀가 안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리드하며 허공에 발을 내딛었다. 점점 멀어지는 땅과, 옆으로 보이는 바위산의 경사를 따라 두 사람은 날아오르고. 그렇게 위로 항하던 두 사람의 시야에 그 소녀가 보였다, 바위산을 오르는 작고 여린 소녀가.
-추방자들을 위해 산을 오른 소녀는 출발했을 때와 달리 많이 지쳤고, 상처투성이였습니다. 험하디 험한 바위산을 오르는 것은 이종족에게도 어려운 일이었으니, 연약한 인간 소녀에겐 역부족일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어느새 시간이 또 흐르고, 달이 떠올라 소녀를 비춘다.
" 그러나 소녀는 포기하지는 않았소, 사실 마법을 쓸 수만 있다면 훨씬 순조롭게 산을 타고 올랐겠지만, 소녀는 마법을 쓸 줄 모르는 모양이었지. "
어떻게 올라가나 고민하는 것도 퍽 우스운 일이었다. 아우로라는 솔로몬이 자신의 뒤로 가서 서 손을 잡아주자 고개를 돌려 솔로몬을 올려다본다. 그가 땅을 박차 뛰어오르자 몸이 붕 떴고, 아우로라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허공을 살포시 내려다 보았다.
허공이다! 처음에는 이대로 떨어지는게 아닐까 싶어 아우로라의 몸이 경직되어 있었으나, 익숙한 마나의 파동이 느껴자고, 반딧불이처럼 에메랄드빛의 마나가 흩날리자 점점 굳었던 몸이 풀려갔다. 천천히 발을 내딛으라는 부드러운 지시에 아우로라가 어색하게나마 발을 내딛는다.
"이..렇게요..?"
멀어져가는 땅은 굳이 쳐다보지 않으려 애쓰려 하더니, 점점 어색하던 발걸음은 퍽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내 아우로라의 시야에 소녀가 보였다. 작은 몸으로 오르는 것은 어려울텐데도,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열심히 오르고 있는 것이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달이 소녀를 비췄다.
"마나도 없이...대단해요.."
작은 소녀에게서 경외심을 느낀 듯, 아우로라의 두 눈이 차분해졌다. 마법을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해낸다고 하지. 그 점이 대단했다. 눈 앞의 소녀는 끈기도 대단했던 것 같다.
/ 악 악 악악 세상에 이거 공중산책이잖아 ㅠㅠㅠㅠㅠㅠㅠ...(데굴데굴) 공작님 너무 스윗해요...888888....
자신의 말에 따라 발을 내딛는 아우로라에게 격려를 건네며, 솔로몬은 천천히 허공을 밟아 조금씩 위로 올랐다. 그렇게 올라가는 두 사람의 시야에 계속해서 보이는 소녀는, 지칠대로 지쳐 쓰러졌지만, 그렇게 한나절 정도가 지나자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산을 탸고 올랐다.
조금이라도 발을 헛디뎠다간 까마득한 낭떠리지로 떨어질 것만 같은 바위산, 그래도 꾸역꾸역, 산을 오르는 소녀였으나, 결국 도저히 넘어갈 수 없을 것만 같은, 중간에 발판으로 삼을 만한 곳이 없는 위치에 도달했다. 어느새 산을 휘감고 있던 구름도 저만치 아래에 있었고, 공기는 차가워져 소녀는 흰 입김을 내뿜고 있었다.
" 포기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라는 말을 종종 하곤 하지 않소? 저 소녀가 처한 상황이 그러했지,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간신히 뛰어넘어 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저렇게 지쳐서야, 소녀는 고지를 코앞에 두고 찾아온 절망적인 상황에 주저앉고 말았소. "
소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결국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걸까, 그들 중 나보다 튼튼한 사람이 올랐어야 되는 걸까, 내가 홀로 오른다는 건...또 다시 내가 저지른 어리석음일까.
그렇게 다치고 지치면서도 고통으로 인한 잠시간의 눈물 외엔 흘리지 않던 소녀는 결국 울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이를 악물고 산을 오르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강하게 대비되어, 그 얇은 팔다리가 더욱 얇은 것만 같았고, 눈에서 시작해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훔쳐내고 훔쳐내도 그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솔로몬은 아우로라의 말에 담담하게 대꾸하며,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닦는 소녀를 바라보던 솔로몬은 문득 산의 정상을 올려다보았다. 그 때 바위산을 이루고 있는 단단하고 흰 바위에 소녀의 눈물이 닿았고, 그 다음 순간, 정상 쪽에서 거대한 것이 움직이는 소리가 천지를 압도하듯 들려왔다.
무언가 정상에 떨어진 것인가? 아니면 사실 바위산은 화산이었던 걸까?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녀는 물기가 어려 흐릿한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그 소리는...
순식간에 정상과 소녀가 있는 곳 주변에 있는 물안개가 사방으로 퍼지며, 그동안 가리고 있던 정상을 뚜렷하게 볼 수 있게 해주었고. 소녀의 몸은, 바람을 타고 오르는 민들레 씨앗처럼 정상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 곳에서.
소녀는 정상을 가득 채운, 초록빛의 풀들과, 그 풀밭 위에 엎드리고 있는...
" 바위산의 주인이 누군지를 보게 되었지. "
바위산의 주인에겐 거대한 날개가 있었고, 날개는 활짝 펼쳐져 있었다, 소녀가 처음에 떠오를 때와 같이 부드럽고, 가볍게 풀밭 위에 내려앉자, 그것은 날개를 접고, 소녀의 몸통이 다 들어갈 정도의 크기를 가진 눈을 떠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것의 몸은 비늘로 뒤덮여 있었고, 머리에는 덩치에 걸맞은 거대한 뿔이 자라 있었다. 그래, 그것의 정체는ㅡ
" ...... "
솔로몬은 아우로라를 인도해 정상으로 사뿐히 내려와, 소녀가 겁을 먹은 채로, 그러나 정상까지 자신을 올려 준 바람의 출처와, 정상을 향해 오른 자신의 목적을 떠올리며 한 걸음씩 그것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았다.
할 수 있는게 없다니. 아우로라의 눈이 잠시 가라앉았다. 책에 몰입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애써 자기 스스로를 달랜 아우로라가 소녀를 바라보다, 거대한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지? 하고 생각하기도 잠시였다. 물안개가 사방으로 퍼지고 소녀는 정상으로 날아오른 것이다.
아우로라의 시점이 바뀐다. 그리고 그 곳에서 본 것은. 바위산의 주인이었다. 아우로라가 작게 감탄했다. 비늘로 덮여있는 몸체와 거대한 눈동자, 제 몸집에 걸맞은 뿔과 날개. 아우로라가 고개를 기울였다. 많이 봤는데, 책에서, 전설에서...
"드래곤..?"
세상에! 저렇게 멋지게 생겼구나. 위엄있어라. 아우로라는 겁을 먹은 소녀의 마음을 이해하는 듯 싶었고, 그것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며 솔로몬을 가만히 올려다본다. 공작님은 어떤 생각을 하실까? 자기처럼 용이 위엄있고 멋지다고 생각할까? 아니, 그것보다.
다행이라고 이야기하는 아우로라의 말에 혼잣말하듯 덧붙인 솔로몬은, 아우로라의 손을 잡은 채 소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소녀는 떨리는 다리로 드래곤에게 다가갔고, 드래곤은 거대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러자 소녀는 나아가던 발걸음을 멈추었고, 소녀를 포함한 세 사람, 솔로몬과 아우로라의 머릿속에 중후한 음성이 울렸다. 이 음성의 주인은 아마도, 저 드래곤이겠지.
-정상에 이르러 눈물을 이는 이전에도 있었다만, 그대가 흘린 눈물엔 원망도, 스스로를 위한 걱정도 없더군, 그대는 인간인가? 바위산을 타고 오른 엘프나, 라이칸, 머메이드들에게 들었던 것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그 눈물에서 느껴진 감정은 내가 전해 들은 인간의 모습과 전혀 비슷하지 않은데.
" 저, 저는... "
드래곤의 음성에 겁을 먹은 듯 말을 더듬으며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했던 소녀는, 무언가 이야기하기 어려웠는지 입을 다물고 고갤 숙였다. 그러자 드래곤은 눈을 깜빡이며 다시금 목소리를 울렸다.
-인간은 마법을 쓸 수 있다고 하지, 신들의 힘인 마나를 물려받은 존재라던가, 그런데 그대는 마법을 쓸 줄 모르는가 보군?
소녀는 말 없이 고갤 끄덕였고, 드래곤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뭐, 이도 저도 아닌 몸으로 산을 오르는 것에 흥미가 동해 정상으로 띄워 올린 것은 이 몸이니, 자격 문제는 신경쓰지 않도록 하지, 본론으로 들어가서, 왜 산을 올랐는가? 인간들을 바위산에 머물게 해 달라?
드래곤의 음성이 다시금 울리고, 소녀는 용기를 내 고갤 들었다. 그리곤 드래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덜덜 떨리는 다리를 손으로 꽉 잡아 진정시킨 소녀의 입에서.
" 인간을 구해주세요, 뒤틀린 마나로 타락한 인간을 구할 수 있도록, 힘을 빌려주세요, 전, 저는 인간이 정말 무섭지만, 정말 아팠었지만, 그래도 전 인간을 사랑하고 있어요, 내 행동들은 어리석었다는 걸 알아요, 그렇다면 인간의 잘못은 제 잘못인 거잖아요, 혼자서 해내야 한다고 하실지도 모르지만, 지금 저에겐 아무런 힘이 없는 걸요, 하지만 저는 그들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요, 그리고 그 방법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당신의 힘이 필요해요, 바위산의 주인...아니,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신님, 제발 옛 정을 생각해서라도 절 도와주세요. "
드래곤의 음성. 머릿속에 울리는 것으로 보아 보통 마법은 아니겠지. 아우로라의 두 눈이 크게 깜빡였다. 원망도, 스스로를 위한 걱정도 없는 눈물이라니. 그렇게 순수히 타인만을 위해 흘리는 눈물일까? 만약 그것이라면...그런 사람은 실제로 존재하는구나. 아우로라가 잠시 드래곤과 소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심지어 마법조차 사용할 수 없다니.
아우로라는 소녀의 대답을 들었다.덜덜 떨리는 다리를 손으로 꽉 붙들고, 자신을 진정시키는 소녀가 하는 말을 듣고 든 생각은 아마도. 신은 인간을 얼마나 사랑했을까, 에 대한 것이겠지.
"....."
인간을 구해달라니. 마지막으로 남은 신. 찢어지고 괴로워 했음에도 인간을 어찌 저리 사랑했는지.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자신은 만일 신이었다면 저런 선택은 하지 않았을테지. 그야, 자신은...
겁에 질린 탓이었는지, 아니면 감정이 뒤섞인 탓이었는지,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는 소녀를 보며 솔로몬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제 곁에 선 아우로라에게서 대단하다는 중얼거림이 들려오자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갤 끄덕였다.
" 신이라고 부르긴 했지만, 결국 그들도 고통을 느끼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또 다른 생명이었을 뿐이지, 사랑으로 그 공포를 밀어내는 것은 연약하다는 반증인 동시에, 사랑에 맞먹는 게 있다면 죽음에 대한 공포조차도 이겨내는 강인함이 있다는 뜻이 되오. "
그리고..
" 적어도 지금 그대 앞에 선 저 소녀는, 인간과 다름없소, 더 이상 신이라 불릴 수 없는 존재... 어쩌면 인간으로 지낼 시간조차 얼마 남지 않은. "
담담히 말을 이어나가며 솔로몬은 에메랄드빛 눈을 빛냈다. 반면 드래곤은 소녀의 이야기에 별다른 흥미가 동하지 않은 듯, 짙은 회색의 눈을 천천히 떴다.
-내가 어째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군, 게다가, 그대는 존재 자체가 마법인 수준이지, 그게 그대가 마법을 쓸 수 없는 이유다, 그대를 이루는 것은 인간의 살이 아니야, 오직 마나. 이미 육신을 잃은 그대는 상처 입은 영혼만이 살아남아 마나의 정수인 영혼으로부터 육체를 투영하고 있을 뿐이니, 이미 삶이라는 것을 잇는 마법을 쓰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이기에 다른 마법을 쓸 마나따윈 없는 것이다.
그런 그대가 무슨 수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거지? 드래곤의 음성이 무겁게 울려퍼진다.
" ...맞아요, 마법을 쓴다는 건 제 목숨을 내놓는 거나 다름없어요, 그리고 전 그게 정말 두려워요, 두렵지만...! "
겁을 먹어 다시금 물기 어린 눈을 번쩍 뜨며 소녀는 드래곤에게 소리쳤다.
" 언젠가 내 마나는 바닥날 거고, 어차피 그렇게 되는 순간 인간들을 더 이상 볼 수 없으니까! 머물 수 있는 육신 따위 진즉에 없었고, 이젠 누구도 만들어낼 수 없으니까! 그렇게 된다면 인간은 변화하지 못할 거고, 결국 인간은 멸망하고 말 거에요! 그리고 인간의 뒤틀린 마나는 삶의 터전을, 바위산을 포함한 세계를 파괴할 테니까! 내가 죽어서 그들이 변화할 수만 있다면 다시 살아나더라도 기꺼이 목숨을 내놓겠어요! 전부 나의 잘못이니까! 그리고 난 그들이 변하게 할 방법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절반뿐이야, 다른 신들이 모두 자취를 감춘 이상, 나머지 절반을 해낼 수 있는 건 당신뿐이에요, 제발...도와주세요! "
소녀의 목소리에는 짙은 물기가 어려있었고, 아니나 다를까 이야기가 끝나자 마자 소녀는 다시금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눈물을 닦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흐려지는 시야로 드래곤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우로라의 눈이 점점 잠잠해져갔다. 존경어린 시선도, 가엾단 시선도, 다행이라는 시선도 점점 사그라들었다. 신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저 그 종족을 대표하는 것일 뿐. 인간으로 지낼 시간 조차 얼마 남지 않은 소녀는..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하는 걸까? 부디, 그러지 않기를 바랄 뿐인데. 아우로라의 눈이 가라앉는다. 목숨은 함부로 내놓는 것이 아닌데. 인간을 위해서 자신이 희생한다니. 대체 왜? 아우로라가 닿지 않을 질문을 속으로 해본다. 대체 왜? 사랑이 뭐라고, 인간을 사랑하는 게 뭐라고 희생을 자처할 가능성을 열어두는걸까?
이해할 수 없었다. 울음을 터트리는 소녀의 외침은 다른 소녀에게 전혀 다가오지 않는 것이다. 좋은 것이 아니다. 공작님이 자신을 위해 읽어준 책이, 좋아야만 하는데. 드미트리의 목소리가 언뜻 들린 것 같기도 했다.
아우로라. 황실을 위해, 내 즉위를 위해 희생은 감수해야지. 다들 너를 황태자를 위해 목숨까지 바친 아름다운 황태자비라 칭송하겠지. 다들 너를 희생정신이 가득한 성녀로 받아들일거야. 그러니까.
아우로라가 눈을 느긋하게 감았다 떴다. 소녀는 어떨까. 드래곤이 만약 허락한다면 다시금 죄를 지을 인간들을 위해 어리석은 선택을 할까, 아니면... 아우로라가 솔로몬의 손을 잡은 그 손에 미약하게 힘을 주었다.
자신의 손에 붙잡고 있는 작고 여린 손으로부터 전해지는 미약하지만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한 힘. 솔로몬은 그 힘에 시선을 돌려 아우로라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두 알 수는 없을테지만, 그 눈빛에서 그녀가 느끼는 감정이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 쯤은 읽어낼 수 있었으리라. 솔로몬은 무어라 말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고, 그저 조용히 아우로라의 손을 고쳐 쥐어주었다.
그리고 그 둘 앞에서, 서로를 보고 있는 소녀와 드래곤 사이에는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그러한가.
먼저 정적을 깬 쪽은 드래곤이었다. 드래곤의 반응은 퍽이나 건조한 것이어서, 과연 다음에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그것으로 말을 끝내버릴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다행스럽게도 전자였기에 대화가 끊기지는 않았지만.
-어리석기는, 인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도 본질은 세계의 일부인 것을, 이미 인간이 저지른 일들은 단순히 자신들만을 궁지로 내모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위협이 되고 있다. 그런 인간들을 구원하는 게 옳은가? 아니, 애초에 구원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인가? 고작 어리광이나 부리려고 산을 오른 것이었나? 정말이지 실망만 느껴지는군, 스스로가 겪었던 일시적인 죽음이 가지는 의미를 아직도 모르는 것인가? 그대를 죽인 순간부터 인간의 오만함은 끝을 모르고 치솟고 있다, 설령 그대가 자신을 희생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무슨 방법을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이 몸은 그대의 계획을 지지해줄 마음도, 도울 마음도 없다. 그러나 산을 오른 자에겐 적어도 바위산에 머물 자격은 주어지는 것이니, 그 추방자들과 함께 여기서 지내도 좋다. 다만 그들이 또 다시 자신들의 과오를 이 곳에서도 반복하려고 한다면...
분노에 차거나, 흥분에 겨워 빠르지 않은. 차분하고 담담한 음성이었지만, 그 음성이 드러내는 뜻에 위압된 듯, 소녀는 눈물을 훔칠 뿐 무어라 대꾸하지 못했다.
-그 땐, 그들과 함께 사라질지, 아니면 다른 길을 선택할 지 결정해야 할 것이다.
"' ...희생이란 것은 모름지기 망설임을 필요로 한다, 신이라고 불리운 다른 이들조차도 제 목숨 아까운 줄을 알았고, 이 바위산에 머무는 모든 존재도 마찬가지지, 네가 그들을 제 자식처럼 사랑하더라도 그들이 너에게 친애의 감정조차 가지지 않는다면 그 사랑의 마지막은 슬픔이오, 고통일 뿐이다. 또한 그대가 희생에 대해 망설임이 없다고 해서 상대도 그러리라 생각하지 말거라, 이 몸과, 바위산의 주민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그대의 눈물은 내게 아무런 감흥도 없다. 그대가 무언가를 하고자 한다면 그대가 책임질 수 있는 범주 안이어야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두거라. '"
드래곤의 음성과 함께, 아우로라의 곁에 선 솔로몬의 입술이 움직이며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아우로라의 손을 잡아끌어 바위산 정상의 끄트머리에 가서 섰다. 절벽과도 같은 그 끝에서 내려다본 바위산과 그 주변을 둘러싼 자연이 아름다웠다.
" ...이 곳에서 볼 것은 다 보았소, 아직 소녀의 답이 남긴 했지만, 아우로라 양, 그대는 소녀의 답을 듣겠소? "
자신의 손을 고쳐 쥐어주었기에. 아우로라의 가라앉던 눈이 잠시 감긴다. 불편함을 티를 내선 안 됐다. 이 내용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니까. 아우로라는 솔로몬을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정적이 지나고 드래곤이 목소리를 내었으니까.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아우로리가 고민했다. 그리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였다. 인간의 오만은 지금도 끝을 치달리고 있으며, 그들은 이종족을 아직도 억압하고 있으니까. 자신들이 모든 것을 평정할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아우로라가 느긋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생각을 갈무리 하고 소녀를, 과거의 신을 쳐다본다.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을텐데.
그리고는 솔로몬을 올려다 보는 것이다. 공작님은 어째서 드래곤과 똑같이 말을 하는 걸까. 꼭 자신이 이야기 하는 것 처럼. 아우로라가 솔로몬에게 이끌려 바위산 정상의 끄트머리를 따라간다. 절벽과도 같은 그 끝. 아우로라가 잠시 주춤했다.
아무래도, 절벽 같은 곳은 싫었다. 그렇지만 절벽의 자연은 아름답기 그지 없어서. 아우로라가 소녀를 다시금 쳐다본다. 어떡할까. ..소녀는 어떤 선택을 할까. 모르겠다. 아우로라가 입술을 열어 조곤조곤 말했다.
"듣지 않을래요."
아무래도, 공작님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나머지 내용은 직접 읽으면 되는 것이고, 어떤 답이라도 지금의 기분으로는 즐겁게 읽을 수 없을 것이다. 희생에 대한 이야기라면 더욱이.
돌아가자는 말과 함께 솔로몬이 자신을 끌어당기자 아우로라는 짧은 외마디 소리를 내었다. 앗. 까마득한 절벽 너머의 자연은 아름답지만, 절벽 그 자체는 무섭기 그지 없어서. 아우로라의 눈 앞이 아찔해졌다. 싫다. 이런 건 싫었다. 무섭고, 떨어지면 마물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공작님이 자신을 단단히 감싸더니...
"자, 잘 잡ㅇ-?!"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며 숨을 헉 들이킨 아우로라가 아예 눈을 감아버리곤 솔로몬을 저도 모르게 끌어안았다. 강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붕 스치는 것이 그렇게 무서울 수 없었다.
사뿐히 내려앉는 감각. 아우로라는 발이 땅에 닿자마자 그제서야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먹먹한 귀로 들려오는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주문, 그리고 밝은 빛. 아우로라는 방 가운데에 서있음을 느끼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죠, 전설이었죠.."
진짜였다면, 역시 슬펐겠지. 아니, 그것보다. 아우로라가 솔로몬을 쳐다보았다. 빠르게 슬픔을 잊고, 어쩐지 뾰루퉁한 시선을 내보이는 것이다.
솔로몬은 농담을 던지듯 이야기하면서 아우로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쨌든...오늘 읽어주기로 한 이야기는 방금 끝이 났고, 시간은 꽤나 흘러서 온통 캄캄하기만 했던 하늘이 어느새 차가운 남빛으로 변해 있었다. 아직 달이며 별이며 떠 있기는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태양의 빛에 가려져 잠시동안 보이지 않겠지.
" 무서웠다면 미안하오, 하지만 내가 곁에 있는 한, 고작 절벽에서 떨어지는 정도로는 다치거나 하지 않을 것이니. "
어째서인지, 웃는 솔로몬을 보자하니 아우로라는 그가 얄밉다고 생각했다. 버릇대로 했다고 농담조로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렇지만,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꼭 자신이 어린 아이 같지 않은가! 음, 생각해보니 어린 아이처럼 굴긴 했던 것 같다. 공작님은 나이가 무지 많으시니 어린 아이처럼 보일지도 모르고. 아우로라가 마음을 차분히 하려고 하며 그가 머리를 쓰다듬은 곳 위에 손을 올려보았다. 아직 온기가 남은 것 같았다.
어느덧 창 밖은 차가운 남빛이다. 조금 지나면 예쁜 하늘색이 되고, 환한 아침이 되겠지. 아우로라는 이어지는 솔로몬의 이야기에 고개를 돌렸다. 고작 절벽에서 떨어지는 정도로는 다치지 않는다니... 더 심한 일이 있어도 지켜주시겠다는 뜻이겠지.
"...공작님도 다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어깨를 토닥이는 느낌에 아우로라가 고개를 들어 솔로몬의 눈을 마주치려 했다. "제가 다치지 않는다고 해도 공작님께서 다치면, 그때 곤란해지는 사람은 따로 있단 말이에요." 라면서. 아우로라는 이내 심란한 마음을 훌훌 털어버리고 미소를 지었다.
아우로라의 말에 솔로몬은 기분이 묘한 듯이 표정을 지었다. 곤란해한다...인가. 잠시 생각하는가 싶었지만 아우로라가 침대에 앉으며 생긴 미세한 진동을 느끼고 그녀에게 시선을 옮겼다.
" 그래도 조금은 자 두는게 좋지 않겠소? 날이 밝으면 따로 낮잠을 자는 게 아닌 한 피곤해질 텐데. "
그렇게 이야기는 했지만 솔로몬은 딱히 아우로라를 꼭 재워야 한다는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공작저 생활이 불편하지는 않느냐는 질문에 아우로라가 고갤 저으며 다들 잘 대해준다고, 오히려 자신을 그들이 불편해하며 어쩌나 싶었다고 대답하자 그거 다행이라며 고갤 끄덕였다.
그 직후에 자신을 올려다보며 천진한 웃음을 흘리는 모습에 그 역시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만다.
공작님이 다치시는 건 싫어요. 왜 그 말은 뱉을 수 없는 걸까? 뭔가 하고 싶은데, 갑자기 턱 하고 혀가 무거워지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아직은 부끄러운 걸까. 싶기도 하고. 아우로라가 입을 오물거렸다. 나중에, 꼭 말해야지! 라고 생각하면서.
"으으음, 드문드문 쪽잠이라도 자둘게요."
지금은 해가 뜨는게 보고 싶기도 하고... 아우로라가 멋쩍었는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해가 뜨는 건 예쁘니까. 그건 꼭 보고 싶기도 하고. 그리고 아침에, 오세랑, 아이니랑..또 플라우로스님께 좋은 아침이라고 가장 먼저 말하고 싶기도 하고. 아, 공작님께도 말씀 드려야지. ...지금 말씀 드리는 게 좋을까?
"달라졌나요..?"
아우로라가 고개를 잠시 기울이다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꽤나 피곤했겠다, 라. 부정하기엔 그 사실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라 곤란했다. 긍정을 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짐을 맡기는 것 같고, 부정을 하기엔 거짓이 아니고.
틈틈히 쪽잠이라도 자겠다는 말에 솔로몬은 그렇게 이야기했다. 멋쩍게 웃는 얼굴을 보자니 잠을 자라고 재촉할 기분이 영 아니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 이후 첫인상과는 많이 달라졌다는 자신의 말에 대해서, 아우로라가 맑게 웃으며 솔로몬과 공작저 사람들 덕분이라고 하는 말로 답하자. 솔로몬은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는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띄웠다.
" 본래 자신의 모습을 잃지 않는 선에서 더욱 나아질 수 있다면 충분히 좋다고 말할 수 있겠지, 그런 점에서는 꽤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하고 있소, 물론 아우로라 양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편린만 보았을 뿐이지만은. "
" 모든 것이 좋아질 거라는 낙관은 해주지 못하오, 그러나 아우로라 양 스스로가 그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면 결국엔 그리 될 것이니, 공작저에서 지내는 시간만큼은 후회가 없었으면 좋겠군. "
그렇게 이야기하는 두 사람의 뒤로부터 달빛과는 차원이 다른, 실낱같은 불빛조차 그 무엇보다 밝은, 태양의 빛줄기가 하늘을 가르지르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방금에야 떠오르기 시작했음에도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회색빛이었던 하늘이 순식간에 푸르게 변해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으리라. 솔로몬은 아우로라를 따라 뒤를 돌아보았고,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그의 곁에 선 소녀는 마치 태양처럼 밝게 미소지었고, 자신의 손 위에 그녀의 손을 얹으며 그 작고 여린 입술을 움직였더라.
다음 상황이라.. 어느정도 부드러운 상황을 해봤으니까ㅡ이제 두 사람이 처한 현실을 좀 비춰볼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우로라는 자신의 행동이 후작가에 어떤 영향을 끼칠 지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고. 솔로몬은 아우로라한테 신경이 쓰이면서도 제국 내 자신의 입지가 아군보다는 적이 많다는 거겠지..?
아우로라와 같이 이야기 속을 거닐고, 해돋이를 본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다. 아우로라가 오기 전 공작저는 거대한 크기만큼 조용했다, 솔로몬이 시끌벅적한 것을 썩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거니와, 그를 따르는 사용인들 역시 자신의 고용주를 닮아서인지 서로 수다를 떨거나 하지는 않는 편이었으니. 그나마 오세와 아이니가 온 뒤부터는 아이들이 돌아다니는구나- 할 만큼의 소리는 들렸지만 그래도 여전히 넓은 공작저 전체를 두 아이가 가득 채울 수는 없었다, 그럴 의무도 딱히 없었지만. 그렇게 간간히 들려오는 아이들의 목소리와, 그 아이들의 재잘거림에 답하는 어른들의 목소리만 들렸을 뿐인 공작저였을 터인데.
" 요즈음 꽤나 공작저가 소란스럽군, 아니... 활기가 넘친다고 해야 하겠지. "
솔로몬은 자신도 모르게 부정적으로 내뱉은 말을 스스로 정정하며 서류를 넘겼다. 요 며칠 이종족의 처우에 관련해서 계속 문제가 발생하는 모양이라, 그는 한숨을 내쉬며 서류를 읽고, 서명하고, 봉투에 넣어 봉인했다. 봉인된 서류들은 황실과 귀족회의에 전달될 터, 마법을 사용하니 전달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고, 굳이 자신이 출석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안건은 해결될 것이다.
잠시 쉴 틈이 생긴 솔로몬은, 어느새 식은 차를 마시며 곰곰히 생각했다. 공작저가 이렇게 활기 넘치게 된 데에는 아무래도 아우로라의 영향이 크겠지, 처음에 보았을 땐 별 기대가 되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하고 싶은 말을 숨기거나 조신한 모습을 고수하는 것이 여느 영애들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그녀가 공작저에 온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다, 물론 그녀가 살아온 시간에 비하면 보잘것없이 짧은 시간이고, 또 그 중에서도 솔로몬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한 시간은 더 적은 만큼 그녀의 진짜 모습을 안다, 라고 단언하기는 어려웠지만은... 그 짧은 시간 동안 본 그녀의 일부분은, 솔로몬으로 하여금 그녀가, 으레 귀족들이 삶에 취해 얻게 되는 허영심보다는, 맑은 마음씨를 지녔다는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다.
사용인들로 하여금 더욱 밝아지도록 만들어준 것도 그녀, 그녀는 인간이면서 이종족을 두려워하기보다는 다가가고 싶어했고, 그 덕분에 솔로몬의 사용인들은 아우로라에게 매우 좋은 감정을 지니게 된 모양이었다. 그 역시 아우로라에게 느끼는 감정은 부정적이진 않았으나...
그는 한쪽으로 치워 두었던 서류를 집어들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녀와 그 자신은 오랜 시간 이어져온 제국의 앙금을 상징하는 존재나 다름없으니, 그 점이 솔로몬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공작님과 함께 책 속을 들여다보고, 해돋이를 보며 아침 인사를 한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아우로라는 그 며칠동안 공작저 사람들과 더욱 긴밀해져만 갔다. 아침에 시녀들이 깨우기도 전에 일어나고, 오세와 아이니를 대동하여 공작저를 탐험하거나, 주방에 들어가 주방장과 함께 사용인을 위한 간식을 만들어서 나누어 주거나, 하녀의 옷을 입고 어떤가요? 라며 서로 키득거리며 장난을 치거나,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거나...
조용했던 공작저는 어느순간 아우로라로 인해 활기찬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우로라는 그 순간들을 즐겼다. 공작저 사람들의 표정이 밝게 미소를 지을 때면 그만큼 행복한 건 또 없었다.
오늘은 집무 때문에 바쁘신 것 같은 공작님을 위해 주방장과 케이크를 구웠다. 정확히는 복숭아 무스 케이크였다. 복숭아가 제철인 탓도 있었고, 조각으로 자르면 모두가 나누어 먹을 수 있었으니. 두 시간 정도, 다른 사용인들을 위해 간식을 만들다 주방장이 아우로라에게 말했다. 케이크가 한김 식을 때 까지, 남은 한 시간은 잠시 자리를 비우셔도 좋습니다. 라고.
아우로라는 생글생글 웃으며 방으로 쫄래쫄래 걸어갔다. 방에 들어선 아우로라는 은쟁반 위에 놓인 편지를 바라보았다. 소네타가 보낸 것이었다! 아우로라는 잔뜩 기대를 하며 편지를 펼쳤다. 최근 소네타에게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해줬는데, 소네타는 과연 어떤 이야기를 보내주었을까.
"잘 지내는구나....아."
[(중략) ...
언니는 황제파가 아니야. 잘 생각해.]
아우로라는 편지를 곱게 접고, 다시금 봉투속에 넣은 뒤 편지를 보관하는 상자를 열어 가장 구석자리에 편지를 올려두었다. 아주 잠깐동안, 생각을 하고 싶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우로라는 실과 바늘, 자수 판을 집어들었다. 자수를 놓으면 이것저것 생각이 정리되곤 했으니까. 아우로라의 손길이 점점 바빠져갔다.
그랬지. 공작님은 황제파셨고, 자신은 귀족파의 영애였지. 아주 오랜 시간 이어진 제국의 대립구도. 더군다나 아우로라는 이곳에 정상적인 계기로 온 것이 아니었다. 도미닉의 잘못으로 가장 소중한 걸 바치게 되었고, 그 소중한 것이 자신이었으니까. 그렇지만..공작님은 나쁜 분이 아니셨지. 또 그렇지만, 아버지의 입장에서는...아우로라가 이대로 있는다면, 후작저에 미칠 영향이 너무 컸다.
"아야."
아우로라는 바늘이 손가락을 깊게 찌르자 가만히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손가락을 꽤 깊게 찔렸는지 어느새 뭉글하게 손가락 위로 고인 피를 보니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었다. 이제 보니 손 끝이 엉망이다. 자수를 잘 좋는 편은 아니었지, 맞다. 아우로라가 애매하게 웃다가도, 지금쯤이면 케이크가 다 식었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고인 피를 가볍게 닦아내곤 자리에서 일어서 복도를 나섰다. 다 괜찮을 것이다. 괜찮을 것이고, 괜찮을 것이다. ..아니, 하루 정도는 잠시 후작저에 다녀와도 괜찮지 않을까. 후작저에 계속 가지 않는다면 구설수에 오를수도 있고..그러니까, 그러니까. 아우로라가 결심하듯 주방 문을 열어젖혔다.
...
똑똑똑, 공작의 집무실을 조심스럽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공작님, 계세요..?"
아니나 다를까, 아우로라였다. 무스 케이크 조각이 담긴 접시를 조심스레 한 손에 들고있는.
손에 쥔 서류를 내려다보며, 차게 식어 향이 다 날아가 버린 듯한 차를 마신 솔로몬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공작에게 전달할 사안이 담긴 서류, 라는 형식을 하고 있긴 했지만 엄연히 따져봤을 때 이 서류에 담긴 내용은 황제파 귀족들이 우회적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드러내는 것이었으니. 그 서류에 적힌 내용을 해석하자면 후작가를, 나아가 귀족파 전체를 더 크게 압박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명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압박이라는 것은 너무 부드러운 표현이었을지도.
그들은 자신들의 반대에 선 귀족들을 쓸어 치워버리고자 했다, 도무지 쉽사리 이해를 할 수가 없군. 황제파의 귀족들 중 정말 황제에게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귀족이 몇이나 될는지.
거기다 최근에는 두 파벌을 불문하고 꽤나 불온한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었으니. 이는 신경 쓸 것이 늘어나게 되는 결과를 낳았으므로, 솔로몬은 갑작스레 밀려들어온 일거리에 시달리게 되었다.
아무튼, 그 서류에서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상대를 철저히 부러뜨리고자 하는 의도뿐만이 아니었다, 솔로몬 자신이 지금 데리고 있는 아우로라를 그들이 이용하고자 한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딸이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에 분노나 절망을 느낄 그 가족에 대한 측은함은 그닥 없었고, 필요에 의해 술수를 쓰며 여러 귀족을 압박해 온 솔로몬이었으나, 그럼에도 그는 황제파의 의견에 동의하기 어려웠다.
아우로라가 이용당하는 것을 영민한 후작(어디까지나 인간 기준에서)이 모를 리도 없었고, 혹여 문제가 발생해 아우로라가 도구로 구실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 다음은 곧바로 전면전이다, 틀림없을 거라고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파가 믿는 구석은 많겠지. 황제를 지지한다는 정당성, 자연스레 황제에게 복종하는 인간들에게 지지를 받으리라. 그 다음은... 자신일까.
아마 그들이 바라는 모습이라면, 제국의 뜻대로 전쟁에 나섰을 때 보였던 자신의 모습이겠지. 적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그에 반해 귀족파에는 이렇다 할 명분이 현재는 없는 상황이지만, 아우로라에게 문제가 생기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렇게도 애지중지하던 딸에게 문제가 생기면 자제력을 자연스럽게 잃겠지. 그렇다면 당연히 적극적으로 반격에 나설 것이다.
여러 가지가 얽혀 심란한 상태로 앉아있던 솔로몬의 귀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자신이 안에 있냐며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는 최근에야 귀에 익기 시작한 것으로, 그 주인은 아우로라일 테지.
" 들어오시오. "
솔로몬은 잔을 내려다보다가 한 쪽으로 치워놓고는, 나머지 서류를 마법을 통해 묶어 봉인했다. 그리곤 문이 열리기 전에 머리를 정리하고, 모노클을 닦았다.
아우로라는 노크를 한 뒤, 잠시 케이크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파스텔빛으로 먹음직스럽게 익은, 슬라이스된 복숭아 조각, 분홍빛 무스...괜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후작저에선 잘 만들지 못했는데. 귀하고 고운 아가씨가 무거운 것을 들어선 안 된다는 이유도 있었고, 다치면 안된다는 이유도 있었으니까. 기껏 만들 수 있던 건, 쿠키틀에 반죽을 찍어내거나 샌드위치를 만드는 정도였지만..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다가도 들어오시오, 라는 말에 아우로라는 고개를 들었다. 계시는구나. 아직도 일에 치이고 계시는 걸까?
"그럼 실례할게요."
아우로라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들이밀었다. 아무리 소네타가 편지를 주었어도, 갑자기 태도가 달라지면 공작님께서 자신의 상태를 눈치 채실 수도 있었다. 심란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될테니까. 이윽고 아우로라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미소를 지었다. 기분이 썩 좋아보이는 미소였다.
"많이 바쁘실텐데, 죄송해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
방 안에 들어와 어느새 종종걸음으로 솔로몬의 앞에 선 아우로라의 손엔 예쁘장한 접시가 들려있었다. 접시 위엔 케이크 조각이 있었고, 아우로라가 케이크를 자랑하듯 제 가슴께로 올려보이곤 활짝 웃었다.
"그리고 너무 무리하시면 안 되니까요. 케이크는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
음.....아우로라가 잠시 멋쩍기라도 했는지 눈을 굴렸다. "주방장님이 많이 도와주셨지만요." 역시, 온전히 자신이 만든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아우로라는 이런 걸 해본 경험이 거의 없었으니까. 아우로라가 테이블 위에 조심스레 접시를 올려두었다.
들어오라고 말한 직후, 집무실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그 열린 틈 사이로 아우로라의 얼굴이 빼꼼하니 모습을 드러냈다. 시선이 옮겨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 솔로몬은 아우로라가 짓는 미소를 보면서 자연스레 턱을 괴었다.
그렇게 보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으니, 곧 아우로라는 방 안으로 들어와 솔로몬과 그녀 사이에 솔로몬의 집무용 책상을 두고 섰다. 그리곤 많이 바쁠 텐데 방해해서 미안하다는 듯, 하지만 할 말이 있어서 왔다고 이야기하는 아우로라를 보며 솔로몬은 무어라 대꾸하지 않은 채 그녀가 무슨 말을 덧붙일지 기다리는 듯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방 안에 들어오면서부터 조심스럽게 들고 있던 접시와, 그 접시에 놓인 케이크가 꽤나 시선을 끌었으니...
그런 생각에 부응하듯, 아우로라는 케이크를 보여주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무리하지 말라는 의미로 직접 만들었다고. 물론 주방장이 도와줬다며 덧붙이는 모습에 솔로몬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텐데, 사소한 것도 숨기지 않고 이야기하는 모습이 퍽 흥미로웠던 모양이었다.
테이블 위에 올라온 접시를 보던 솔로몬은 서류를 한쪽으로 밀어 놓고,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자 의자 하나가 두둥실 떠올라 아우로라의 뒤에 안착했고, 문가에 놓여 있던 찻주전자가 끓는 소리를 내시 시작했다.
" 고맙소, 덕분에 잠시 쉬겠군, 그럼 앉으시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왔을까? "
찻물을 다 끓인 듯, 조용해진 찻주전자가 솔로몬의 손짓대로 둥실 날아와 찻잔에 차를 부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과 함께 은은한 차의 향기가 방 안을 맴돈다.
앉으라고 옮겨온 의자에 아우로라가 앉자, 차가 담긴 잔을 건네며, 각설탕이 담긴 그릇 역시 그녀 쪽으로 밀어준 솔로몬은, 과연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기다리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우로라의 조그마한 입술이 움직이고, 그 입술 사이로 나오는 목소리는, 후작저에서 편지가 왔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확히는 동생에게 온 편지인가. 아우로라의 동생도 아카데미의 학생이었음을 새삼 떠올리면서 그는 찻잔의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대강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예상을 해 본다. 방학을 맞이해 집에 돌아온 동생에게 받은 편지에는 무슨 내용이 써 있었을까, 보고 싶다? 솔로몬은 아우로라가 이야기하며 짓는, 마치 강아지 같은 표정을 보면서 작지만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직 저는 데뷔탕트 볼도 못 치뤘고..곧 다가오는 황실 연회때 소네타와 같이 치르기로 했거든요. 그렇지만 드레스를 맞출 살롱 같은 건 편지로 상의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그래서..
-며칠간만 후작저에 다녀와도 괜찮을까 하고 허락을 맡으러 왔어요.
자신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아우로라를 보던 솔로몬은, 잠시 눈을 감고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씁쓸한 맛과 대비되는 향기가 입 안을 은은히 감싸돌다가 사라진다.
" 케이크, 먹어도 되겠지? "
그는 대답 대신 아우로라를 보며 물었고, 포크를 집어들곤 케이크의 끝 부분을 눌러 떼어낸 뒤, 다시금 포크로 그 조각을 찔러 들고 자신의 입에 넣었다. 우물우물, 입 안의 조각을 씹으며 눈을 감은 솔로몬은, 아우로라를 보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했다.
아우로라를 볼모로 삼은 것은 후작에게 선을 넘지 말라는 뜻이지, 후작가를 무너뜨리겠다는 선언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며칠간 돌려보내는 것은 현 상황에 나름의 환기를 가져다줄 결정이 될 수 있겠지.
솔로몬은 케이크 조각을 삼킨 뒤, 눈을 뜨곤 아우로라에게 이야기했다.
" 드레스를 맞추는 게 중요하다면 이 곳에서 만들어 줄 수도 있소, 웬만한 살롱보다 나을 테지. "
아우로라는 대답 대신 케이크에 대해 이야기 하는 솔로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드시라고 만든 거였으니까. 내심 마음에 드셨으면 하는 바가 있었는지 아우로라의 눈빛이 퍽 조심스럽다. 이런 중요한 상황에서도..
"맛은 어떠신가요...?"
이렇게 대답했으니. 아우로라는 차가 담긴 잔을 가만히 바라보다, 각설탕을 집게로 집어 넣었다. 하나, 둘...셋은 양심이 찔렸는지 조용히 집으려다 말았지. 아우로라는 티스푼으로 가볍게 차를 섞은 뒤, 차를 마셨다. 씁쓸한 맛은 단맛에 살짝 눌려있었다.
"...드레스를 여기서 맞춘다면 기쁠 거예요. 그렇지만....."
아우로라가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적당히 끓었기에 너무 뜨겁지도 않은, 온기가 남은 찻잔. 누군가의 손에 붓지 않아도 되는 그런 적당한 온도. 그리고 그때와는 다른 향. 아우로라가 찻잔에 비친 자신을 마주했다.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은걸까. 잠시 머뭇거리던 아우로라가 입을 열었다.
"가족들도 보고 싶어요. 매일 편지에서 제 안부를 묻는데, 계속 편지로만 괜찮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다들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
케이크의 맛은 어떻냐면서 조심스럽게 묻는 아우로라에게, 솔로몬은 구체적인 대답 대신, 포크를 쥔 손을 움직여 케이크를 또 한 조각 떼어내 입 안으로 넣었다. 그렇다고 대답을 온전히 대신할 수는 없으니, 맛있다고 덧붙인 그는, 아우로라가 차에 각설탕을 넣은 뒤 마시는 것을 보며 잘게 씹힌 케이크를 넘기고, 찻잔에 담긴 차로 입 안의 단 기운을 덜어내듯 한 모금 마신다. 찻잔을 내려놓고 잠시 아우로라를 바라보자니, 드레스를 공작저에서 맞추다면 기쁠 것이라고 이야기한 뒤에 잠시 망설이듯 찻잔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그의 눈에 담긴다.
그녀는 이야기를 할까? 아니면 그만둘까?
아우로라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기로 결정한 듯, 입을 열어 그녀 앞에 앉은 솔로몬에게 이야기했다. 가족들이 보고 싶다고. 뒤어 무어라 말이 덧붙여지긴 했지만 요지는 그러했다, 그는 말없이 케이크를 떼어내 아우로라의 앞접시에 놓아두었고, 자신 몫의 케이크도 떼어내 다시금 입 안에 넣고 씹었다.
무작정 달기만 한 케이크가 아니었기에 괜찮다고 생각하며, 아우로라의 말을 곰곰히 되짚던 솔로몬은 입 안에 담긴 케이크를 삼킨 뒤, 다시금 차로 목을 축이고 입을 열었다.
다시금 케이크를 떼어 먹으며 맛있다고 덧붙이는 터라, 아우로라의 표정은 그나마 밝아졌다고 할 수 있었다. 아우로라는 다시금 차를 마셨다. 이후 찻잔을 내려놓고, 의견을 얘기한 것이지. 가족들이 보고 싶다고. 이후 찻잔에 비치는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 처음부터 사실을 이야기 했더라면. 제 몫의 케이크가 앞접시에 놓인다. 아우로라는 케이크에 손을 대지 못했다.
아우로라가 잠시 침묵했다. 그 이유는, 그리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는.
"...살롱에서 드레스를 맞추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자매의 우애와 데뷔탕트 볼 준비로 넘어갈 수 있겠지만, 가족들을 만나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니까요."
아우로라가 손을 아래로 내려두었다. 드레스 자락 위에 올라간 손은 어느새 드레스 자락을 조심스럽게 그러쥐고 있었다.
"제가 공작저로 온 이상,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해야 하니까요..."
아우로라가 입술을 앙 다물었다. 겨우 이런 사실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거니와, 공작님께 전부 털어버리지 않았던가. 실은 어떻게 해도 후작저에 영향을 미칠 것을 알고 있었다. 동생을 본다고 해도, 후작저에 직접 간다고 해도, 아예 가지 않아도..아우로라가 드레스 자락을 쥔 손에 미약하게 힘을 주었다.
케이크에 손을 댈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우로라는 그녀 앞에 놓인 그녀 몫의 케이크를 건드리기는 커녕 손을 내렸다.
그리곤, 어째서 처음부터 원하는 바를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았느냐는 솔로몬의 질문에 대답하듯 목소리를 내었고. 자신의 행동이 후작저, 그러니까 제 가족들에게 어떤 악영향을 미칠 지 몰라 그랬다는 의미가 담긴 답을 한 그녀가 말을 마친 뒤 입술을 앙다문 것을, 솔로몬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뒤에는 죄송하다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새어나왔고. 솔로몬은 말 없이 차를 마셨다. 잠시 동안의 침묵, 다행스럽게도 침묵은 그렇게 길지는 않았다.
" 알면 되었소, 자... 차가 식겠군, 케이크랑 꽤 잘 어울리니 멀뚱멀뚱 보지만 말고 좀 먹으시오. "
라고 화제와는 다른 말을 뱉으며 슬슬 식어가는 차를 마신 솔로몬은 포크를 만지작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 아직 아우로라 양이 발을 내딛기에 귀족들간의 신경전은 수라장일 뿐이지, 원하는 바를 사실대로 이야기해야 의도가 잘못 전달되지 않소, 그걸 어떻게 포장해 무마하는지는 내 몫이니, 내게 그럴싸한 이유를 보여줄 필요는 없소. "
케이크를 좀 먹어보라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고갤 들고 케이크를 먹는 아우로라를 보며, 솔로몬 역시 제 몫의 케이크를 포크로 잘라내 입 안에 넣었다. 케이크를 오물거리는 아우로라의 표정을 보자니 그녀에게도 마음에 드는 맛인 모양, 솔로몬은 그렇게 많이 달지 않으면서 과일 향이 적당히 섞인 케이크는 주방장의 도움을 받았다고는 해도 괜찮은 결과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오물거리는 것도 잠시, 차를 마시며 입가심을 하는 듯 보인 아우로라가 방금 전에 솔로몬이 한 이야기에 알겠다고 답한 뒤에, 조금 축 쳐진 듯한 표정으로 미소를 짓자 말없이 차를 마셨다.
뭐라고 해줘야 저 시무룩한 상태를 좀 달래 줄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애꿎은 케이크를 여러 조각으로 나누던 중, 아우로라가 조용히 목소리를 내자 귀를 기울인다. 주변으로 흩어지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듣자, 동생과 함께 드레스를 맞추고 싶다는 게 거짓은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말이 들렸고, 잠시 동안 조용한가 싶더니 아우로라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마...그녀의 가족이 들었다면 크게 놀랄 만한 이야기였다.
" 나와 말이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물어도 되겠지? "
눈을 조금 크게 떴던 솔로몬은 금새 평정을 되찾고 아우로라에게 질문하면서 조각난 케이크를 포크로 찍어 입에 가져갔다.
애꿎은 찻잔만 만지작거리고, 애꿎은 케이크만 조각이 났다. 아우로라는 자신이 만들어버린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 해야할까 고민하듯 찻잔에 담긴 차를 가만히 바라본다. 다시 한 모금. 움직인 찻잔 속의 내용물은, 쟁쟁하게 파문이 일었다. 아우로라가 방금 내뱉은, 어찌 보면 파문이 일 것 같은 말 처럼.
"그게..."
괜찮겠지. 이미 다 말씀 드려버렸고..아우로라가 찻잔을 손에서 떼고 테이블 위에 올려둔다. 공작님과 같이 가면, 분명 어떤 효과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고. 아우로라가 포크를 집어들어 제 몫의 케이크를 반으로 갈랐다.
"저 혼자 가면 어느쪽이라도 이번 일에 대한 말이 나오겠지만, 공작님께서 같이 가주신다면 어느쪽도 말을 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아직 어른들의 생각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아우로라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공작님이 함께 하시면 함부로 의견을 내놓지 않고 입을 다무는 건 알고 있거든요.."
아우로라가 멋쩍게 웃었다. "..으음, 공작님께 상처가 되는 말이었더라면 죄송해요." 라고 덧붙였더라지. 가장 무모한 방법이지만, 황제파에서도 아우로라를 풀어준다는 말이나 함부로 이용하자는 의견은 나오지 않을 것이고, 귀족파에서도 주제를 파악해서 반격의 불씨는 아직 지필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이고. 그렇게 생각 했을 것이다.
아우로라가 조각낸 케이크를 다시금 조각내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저번 나들이 때..카페를 소개 시켜드리겠다고 한 건 저였는걸요..기왕 가는 거, 드레스도 맞추고 같이 갔으면 좋겠다 싶었고...소네타한테 공작님이 나쁜 사람이 아니란 것도 보여드리고 싶었고...그러니까..."
아우로라가 배시시 눈웃음을 지었다. "같이 가주시면 안 될까요.." 라고 조곤조곤 말하는 것이, 어째 소극적이던 평소와 달랐더라지.
어째서 자신과 함께 가고 싶냐는 물음에 대해, 아우로라는 포크로 그녀 몫의 케이크를 반으로 가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 홀로 후작저에 가게 되면, 당연하게도 귀족파에게 숨통을 트여 준다는 느낌을 쉽게 지울 수는 없을 테니 분명 황제파 귀족들에게 반발을 사게 될 것이다. 그리고 후작가를 포함한 귀족파 역시 공작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골머리를 썩이겠지, 혹여 귀족파에서 아우로라를 다시 돌려보내지 않는다거나 한다면...
그 시점부터 단순 신경전이었던 것은 수라장으로 탈바꿈할 것이다. 장기적으로나 단기적으로나 좋은 선택은 아니지, 후작은 약점을 되돌려받았으나 반격을 하기에는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지만, 그가 거느리는 귀족들의 생각은 아마 다르겠지. 그리고 상황은 황제파도 다르지 않을 터였다, 황제파의 귀족들은 공작에게 압박을 가하고자 하겠지, 공작이 반응하지 않는다면 저들끼리 일을 벌일지도 몰랐다.
그런 점에서 아우로라의 이야기는 꽤나 가치가 있다...라고 생각한 솔로몬은, 아우로라가 계속 이어가는 말에 저도 모르게 피식 하고 웃음을 흘리고 만다. 그렇지, 뒤에서야 이종족이라 깔보고 있을지언정, 대놓고 무어라 하지는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자신이 오랜 시간에 걸쳐 구축한 공포 때문이겠지.
상처가 되는 이야기었다면 죄송하다고 덧붙이는 아우로라에게 괜찮다고 대답해 준 솔로몬은, 아우로라가 조각낸 케이크를 그녀의 입가로 가져가면서 잇는 말에 눈을 깜빡였다.
" 호오, 그것도 신경쓰고 있었소? 거기다가 동생까지 같이 만나게 하겠다? "
솔로몬은 아우로라를 빤히 바라보다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그녀가 조곤조곤 덧붙이는 말을 들었다. 조그맣지만 확실하게, 같이 가줬으면 한다는 의미가 담긴 말을. 잔을 내려놓고, 한참을 눈을 감은 채 찻잔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솔로몬은, 제 우편에 놓인 서류들을 실눈을 떠 힐끗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 알겠소, 그리 하지. "
그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케이크를 한 조각 찍어 입 안에 넣었다.
" 다만 아직 일이 다 끝나지 않아서 말이오, 일을 끝마칠 동안 언제쯤 가는 게 좋을지 생각해두시오. "
아우로라는 아직 한 세력을 이끌어가는 여러 귀족들의 생각을 꿰뚫 정도로 노련하진 못했지만, 그들이 솔로몬의 ㅅ자만 들어도 입을 다문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악명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칭송할 업적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우로라는 솔로몬이 괜찮다는 말에 안심했는지, 한결 편해진 태도로 케이크를 조각내 입으로 가져다댔다.
"...소네타는 직접 보기 전까지는 믿지 않거든요..."
그리고 자신을 쳐다보자 배시시 웃으며 덧붙이는 말들은, 황태자에게 한 번도 해주지 않았던 것이라. 아우로라는 잠시 자신에게 혼란을 느꼈다. 같이 가줬으면 한다는 어조가 아양 같았나? 솔로몬이 잔을 내려두고 눈을 감자 그 사이 아우로라는 혼란을 수습했다. 이건! 그러니까, 그, 전략적인 의미니까! 정치적인 의미기도 하고, 그러니까! ..눈이 핑핑 도는 걸 보니, 얼추 합리화를 끝낸 것 같았다.
"정말요?"
아우로라의 표정이 환해졌다. 아우로라는 겨우 표정을 가다듬더니 이어지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공작님과, 수도로 가게 되었다니. 일단 편지로 자신과 공작님이 간다는 사실을 알려야 하니 며칠은 걸리겠지. 아우로라가 뺨을 발그레 물들이며 환히 웃었다.
"네!"
수도에서, 늘 이용하던 살롱으로 가게 될까? 만약 그렇다면 소네타와 드레스도 맞추고..공작님과 함께 카페도 가고. 또...또...아우로라가 식어버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보니, 공작님이 도심 한복판에 계시는 모습은 어떨까?
" 나를 직접 보더라도 그녀가 생각을 쉽게 바꿀지는 모르겠군, 눈에 비친 사실만을 받아들이는 이일수록 새로운 것에 인색하다오. "
아우로라가 그녀의 누이에 대해 하는 말을 듣고 나서 위처럼 답한 솔로몬은, 자신의 승낙에 뺨을 붉게 물들이며 기분 좋은 듯한 기색을 보이자 일단은 괜찮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케이크를 한 조각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방금까지와 같이 케이크를 씹어 삼키곤, 입 안을 씻어내듯이 차를 마신 그는, 수도의 모습을 떠올렸다. 사실 단순히 방문하는 거라면 공간 전이 마법으로 눈 깜짝할 새에 왕복할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이는 몇 없게 될 터.
지금까지 황제를 알현하거나, 최고회의에 참석해야 할 때, 가끔씩 수도를 방문할 때 쓰는 방법이 공간 전이였기 때문에. 아마도 그가 왕복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본 이들은 궁인들 뿐일 것이고. 그 외엔 마탑의 마법사들이나 그에 필적하는 힘을 지닌 귀족 정도가 그가 이동한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의 수도의 백성들이 아는 솔로몬의 모습은... 아마 아우로라가 보는 모습과는 궤를 달리하지 않을까, 전장에서 적을 무자비하게 뭉개며, 수틀리면 아군이라도 사정없이 밀어붙이는 폭군.
아우로라는 눈을 깜빡였다. 소네타가 보낸 편지는 전부 그런 내용이었으니까. 공작님을 믿지 마! 아주 나쁜 사람이야! 언니를 이용하려고 그런거야! 언니도 힘들면 말을 하란 말이야. 맨날 공작저는 좋은 곳이라고 쓰지 말고. 만약 언니가 공작님의 압박에 함부로 말을 못 하면, 다음 편지에 당근과 토끼를 그려줘! 등등. 이번에 직접 만나면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아우로라는 찻잔을 내려두고 케이크 조각을 입에 넣고 씹어 삼켰다. 아우로라의 시선이 케이크에 꽂혔다. 만나고자 하는 이....으음. "..가족이요?" 라고 말해보던 아우로라는 무언가 떠올렸는지 고개를 들고 포크를 내려두었다. 그래! 이건 꼭 말해야 했다!
"만나면 안 되는 사람은 있어요! 뮤리엘 영애라고, 최근 수도에서 매일 쇼핑을 하는 친구가 있어요! 그게..그..."
아우로라가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볼을 빨갛게 물들였다. 뮤리엘을 만나고 싶지 않은 이유는, 자신을..!
".....아무래도 너무 친하다보니 들키면 부끄러울 것 같거든요.."
눈송이 보송보송 오목눈이 등등 낯부끄러운 별명으로 아무렇지 않게 부르니까. 아카데미에서도 그랬고. 아우로라는 나름 필사적이었다. 더 많은 별명을 들켜서는 안 됐다. 이번에 또 괴악한 별명을 붙여줄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폭군 곁의 병아리나..으악, 그건 싫었다. 정말로!
지금까지 그가 보아온 모든 이들, 아니...한 명을 제외한 전부가 그러했다. 물론 그가 그 선입견을 타파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으니 딱히 누구의 탓이라고 하긴 어렵지만은. 뭐, 그래도 직접 보게 된다면 조금은 달라질까, 적어도 아우로라와 같이 있는 자신을 보게 되면 터무니없는 생각은 줄어들겠지, 아우로라가 이야기를 통해 추측해 본 소네타는 어쨌든 본 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확신을 하는 모양이었으니.
" 뮤리엘? "
마냥 낯선 이름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확실히 떠오르는 이름도 아니다. 그래서 그 영애가 어쨌다는 거지? 라는 의문이 구체적으로 떠오를 즈음, 볼이 빨개진 아우로라에게서 어느 정도 의문을 해소할 답이 들렸다.
" 보통 친하다고 하면 보고 싶어하지 않소? 그대가 보고 싶지 않다면 상관은 없지만, 수도를 돌아다니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마주치리라 생각하는데... "
일단은 공작과 후작가의 영애다. 물론 귀족들이 자주 돌아다니는 수도지만, 인파가 몰리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없으니...
뮤리엘, 미안해. 나중에 꼭 끌어안게 해줄테니까 제발, 공작님과 있을 때 별명짓기는 하지 말아주길. 아우로라가 슬쩍 생각했다. 시끌시끌하니 좋은 친구지만 별명짓기와 더불어 황실 관계자니 자연스럽게 밀어내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눈치가 좋은 뮤리엘이라면 언젠가 황태자에 대해 눈치를 채주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아니니까.
"...."
자주 보기 어렵다는 말은 확실히 아니었다. 황실의 일임을 익히 짐작할 수 있을법한 미소가 고개를 살짝 숙인 아우로라에게서 드러났다. 부드럽게 미소짓긴 했지만 입술 끄트머리가 살짝 떨리는 미소. 드미트리에 대한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 떠올랐겠지.
"...다행이에요."
아우로라가 고개를 들어 다시금 미소를 고쳤다. 편하고 환한 미소였다. 꼭, 조용히 다녀와야지. 아우로라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아우로라는 조각난 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서류도. 그리고.....솔로몬의 손도.
"ㅈ, 저는 이만 가볼게요..편지도 써야하고..공작님의 일을 계속 방해할 수는 없으니까.."
아우로라의 표정을 보자니 자주 보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는 건 아마 황태자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겠지. 솔로몬은 굳이 더 캐묻지는 않기로 했고, 곧 아우로라는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나 잠시 머뭇거리긴 했지만 고갤 숙이며 이제 가보겠다고 이야기한다.
" 알겠소, 식기는 내가 따로 처리할 테니 가보시오. "
선선히 고갤 끄덕이며 아우로라에게 손짓한 솔로몬은, 아우로라가 머뭇거린 이유가 뭘까 생각한다. 뭔갈 해주길 바랬나?
아우로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제 방으로 물러났고, 책상 앞에 폴싹 앉아선 빠르게 편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공작님께서 같이 수도로 내려오기로 했어요. 드레스를 맞출 생각이고요...또...소네타에게 안부를 전하고, 마탑에 전해달라는 소식 등등 이것저것. 아우로라가 펜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지었다. 공작님과 함께 하는 수도는 어떨까. 아우로라가 편지를 은쟁반 위에 올려두었다.
이제 남은 건 하나구나. 며칠이 지나 수도로 가는 당일. 아우로라는 심호흡을 하고 바로 제 방에 연결된 설렁줄을 당겼다. 늘 외출을 도와주던 시녀들을 호출한 아우로라는 짐짓 비장한 모습으로 말했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예뻐보여야 해요!"
수도에 가서 드레스를 위해 살롱에 들러야하고, 살롱에 들리면 필연적으로 몇 영애들과 마주할 수밖에 없으니까. 약 한달간 사교계에서 부재했던 탓에 물렁해진 영애들의 기선제압을 위해서라는 이유였다.
평소보다 공들여 머리를 빗고, 적당히 틀어올렸다. 보닛은 쓰지 않기로 했다. 대신 챙이 넓은 모자를 쓰기로 하였지. 네크라인이 적당히 파인 드레스는 라벤더 색으로, 아우로라의 신비로운 머리색과 잘 매치가 되는 편이었다.
"좋아요, 꼭 이기고 돌아올게요!" "아가씨라면 다른 영애들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거예요!"
대체 뭘 이긴다는 건지. 아우로라가 어째선지 응원을 받으며 중앙 홀로 나섰다. 소네타도 처음엔 당황한듯 편지지에 잉크를 엎었지만, 하루가 지나고 언니 마음이지. 라고 했으니까... 그래, 괜찮을거야!
아우로라가 물러나고, 다시금 집무실에 홀로 남은 솔로몬은, 밀어두었던 서류로 눈을 돌렸다. 전부 다 확인하고 처리하려면 시간이 꽤나 걸릴 테지만, 아우로라가 언제쯤 출발할 지는 몰랐으므로 느긋하게 일을 할 수는 없었다,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미리 끝내놓아야 나중에 발목 잡히는 일이 없을 터이니. 서류를 자신 앞에 가져다 놓고, 아우로라에게 받은 케이크 조각내 포크로 찍어 입 안에 넣으며, 솔로몬은 서류를 하나하나 넘겼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수도로 가는 날. 솔로몬은 서류뭉치를 봉인했고, 집무실 안에 있는 벽난로에 마나로 불을 피워 올렸다, 솔로몬의 마나로 발생한 에메랄드빛 불꽃 속으로 서류뭉치를 하나 둘 집어던지던 솔로몬은, 이윽고 던져진 마지막 서류뭉치까지 불길에 휩싸여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보곤 불을 사그라들게 했다, 불이 꺼진 자기는 재를 포함한 어느 무엇의 흔적도 남지 않았다. 아마 지금쯤이면 황실 회의장의 정 가운데에 있는 화로에서 불길과 함께 서류들이 모습을 드러냈겠지, 이걸로 그가 할 일은 일단락된 셈이다.
그럼 이젠 외출 준비를 해야겠지. 솔로몬은 별 고민 없이, 평상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수수한 복장을 선택했다, 다만 수도 내에서 불상사가 발생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공작저의 상징인 용 형태의 브로치를 옷깃에 달았고, 공작에게 내려진 휘장을 축소시켜 놓은 듯한 망토를 왼쪽 어깨에 걸쳤다. 검은 빛 투성이인 옷차림이었지만, 마냥 어둡게만 느껴지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였는지 옷에는 금실로 여러 무늬가 수놓아져 있었고, 마냥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기품이 느껴지도록 조화를 이루는 것이, 퍽 볼만했을지도.
준비를 마친 솔로몬은, 공작저를 나가거나 공작저 내부를 돌아다니기 위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넓은 중앙 홀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중앙 홀엔 사용인들 여럿이 모여 아우로라와 솔로몬을 마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처음엔 낯선 이들이었겠지만, 지금은 거의 대부분이 아우로라를 알고 있었고, 그녀에게 썩 긍정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었지. 이젠 전부 낯익은 얼굴이긴 할 테지만, 역시 유난히 눈에 띄는 건 그들을 통솔하는 플라우로스와, 다른 사용인들과는 달리 조그마하고, 그 나이에 맞게 활기찬 두 아이, 오세와 아이니였으리라.
플라우로스는 솔로몬에게 다가와 고갤 숙였고, 솔로몬은 플라우로스에게 은빛 종을 건넸다.
" 그럼 다녀오도록 하마, 무슨 일이 생기면 종을 울리도록. " " 알겠습니다, 공작님. "
" 잘 다녀오세요, 아우로라 아가씨! 공작님! " "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두 분! "
여전히 오세는 거리낌없는 태도로 밝게 웃으며 아우로라를 배웅했고, 아이니는 아직도 수줍은 것인지, 조금 머뭇거리긴 했지만 이윽고 조심스레 미소지으며 두 사람을 배웅했다.
" 자, 그럼 출발하도록 하지. "
사용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솔로몬은 아우로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돌문이 솔로몬의 손짓을 따라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리고, 열린 문틈으로 따스한 햇살이 새어들어온다.
먼저 도착해있자니 사용인이 여럿 마중을 나와있었다. 아우로라는 미소를 지으며 뒤를 살짝 돌아보았다. 이제는 많이 친해진 것 같은 사용인들의 얼굴이 보였지만 역시 가장 시선이 가는 쪽은 플라우로스와 오세, 아이니였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으니까.
아, 공작님이다! 아우로라는 잠시 눈을 크게 뜨나 싶더니 이내 환히 웃었다. 분명 평소와 다르지 않으신데도, 공작저의 상징을 담은 브로치와 망토를 착용해서일까? 평소보다 더 기품이 넘쳐보이셨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아우로라가 잠시 생각에 빠진다. 공작님께서 연회에 참여하실땐 당연히 복장을 갖추시겠지? 그렇다면...
"다녀올게요."
아우로라는 생각을 접곤 오세와 아이니를 잠시 바라보더니, 싱긋 웃었다. 오는길에 선물을 사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아우로라는 솔로몬을 올려다보았고, 익숙하게 그의 손을 잡으며 정면을 쳐다보았다. 문이 열리고 따스한 햇살이 넘실대며 쏟아져나온다. 오늘은 날씨가 좋은 만큼, 예감이 좋았다.
"날씨가 좋네요, 꼭 하늘이 공작님께서 수도에 가는 걸 배려해 준 것 같아요!"
아우로라가 히, 하고 작게 웃었다. 마차를 타고 갈까? 그렇지만 여긴 가파른지라 마차가 오고가기 힘들었지. 그러면 워프 게이트가 있을까? 으음, 공작님의 마력이라면 가능하겠지만....아우로라가 문득 책 속의 일을 떠올렸다.
맑은 하늘을 보며 아우로라가 하는 말에, 솔로몬 역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떠 있기는 했지만 햇빛을 가릴 정도는 아닌, 햇빛 아래 있으면 조금 더울까 싶은 날씨였다. 구름이 조금 더 있으면 좋지 않으려나. 그런 생각을 잠시 접어두고 아우로라에게 시선을 돌린 솔로몬이 입을 열었다.
" 아우로라 양을 배려했을지도 모르지. "
그렇게 이야기하고 나서 일단 공작저 앞의 오솔길을 따라 걷던 솔로몬에게 아우로라의 질문이 들려온다. 아아, 지난번 이야기 속에서 허공을 걸었던 것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 그럴 수도 있지만, 그랬다간 수도로 가는 길에 동네방네 외출중이라고 광고하는 셈이 되겠지, 산 아래 마을까지만 내려가면 마차가 있소, 일단 그 곳까지만 가는 게 낫겠군. "
그렇게 이야기하며 솔로몬은 소매에서 흰 천을 꺼냈다. 손수건? 이라기엔 크기가 큰 게, 일반적인 보자기보다 큰 그 천은...자세히 보니 사파이어가 박힌 브로치가 달려 있는 망토인 듯했다.
" 자, 이 망토를 잠시 두르도록 하시오, 청금누에나방의 고치에서 뽑아낸 실로 짠 천이라 내리쬐는 햇볕에서 피부를 보호해 줄 것이오, 혹여 더워지더라도 금새 시원해질 테니 개운한 상태를 유지해 줄 것이고. "
그렇게 솔로몬이 망토를 아우로라에게 건넨 뒤, 숲을 향해 휘파람을 불자, 풀숲을 해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은빛 털을 가진 늑대 두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따사로운 햇빛을 가리듯 손을 들어 모자의 챙을 양 손으로 조심스럽게 잡은 아우로라가 눈을 깜빡였다. 날씨가 나를 배려해줬을까? 으음, "둘 다 배려한걸로 치죠!" 라며 아우로라는 환히 웃었다. 날씨가 오늘은 정말 좋으니까.
아우로라는 허공을 걷던 그 순간을 떠올린다. 으음, 공작님 말씀대로 사람들에게 광고하는 셈이겠지. 아우로라는 산 아래 마을에 있다는 마차를 떠올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아우로라가 솔로몬의 소매에서 나타나는 흰 천을 가만히 바라본다. 음, 천이 맞나? 아, 사파이어가 박힌 브로치가 언뜻 보이는 것이 망토인 듯 싶었다. 아우로라는 공작의 배려에 입술을 휘어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조심스럽게 망토를 둘러본 아우로라가 시원한 느낌에 눈을 크게 깜빡였다. 신기해라. 아니, 신기한 건 이 뿐만이 아니었다! 아우로라는 솔로몬이 늑대를 불러내자 멍하니 늑대를 쳐다보았다. 늑대를 타 봤냐고..?
"어, 아니요..."
...늑대를 타본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 아닌가..? 아우로라가 눈을 깜빡였다. 어릴적엔 조랑말을, 아카데미에선 말을 타봤지만... 늑대는 처음이었다. 그래, 만져본 적은 있었다. 사냥 대회 때 자신에게 바쳐진 죽은 늑대를. 아우로라가 눈을 깜빡였다. 살아있는 늑대는...푹신하겠지..? 음, 착각일까.
그래, 둘 다를 배려한 것으로 치자.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을 언젠가 들은 기억이 있었으니. 자신이 건넨 망토를 두른 아우로라가 감사하다는 말을 하자, 솔로몬은 고갤 끄덕였고, 모습을 드러낸 두 늑대에게 손짓해 늑대들이 자신과 아우로라에게 다가오게끔 했다. 두 마리 전부 상당한 크기를 자랑해 타고 가는 데 별 문제는 없어 보였고, 날카로운 눈매와는 다르게 솔로몬의 손짓에 유순하게 반응했다.
솔로몬은 늑대를 타기 위해서 만든 안장을 소환해, 얌전히 앉은 늑대의 등에 올렸다. 그리곤 자신이 탈 늑대를 잠시 대기시킨 뒤, 아우로라가 타야 할 늑대에게 다가가 안장을 올린 뒤, 아우로라에게 손을 내민다.
" 그렇다면 좋은 경험이 될 것이오, 늑대들은 말만큼 빠르고, 산양보다는 못해도 험지를 잘 달리지, 발을 잘 걸고, 안장 앞부분의 손잡이를 잘 잡으시오, 손잡이에 부여된 마법이 아우로라 양에게 힘을 보탤 것이니 떨어지지 않을 것이오. "
크다! 보통 늑대보다 더 큰 느낌이 들었다. 아우로라는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늑대를 가만히 마주보았다. 날카로운 눈매는 확실히 무서웠지만, 솔로몬의 손짓에 유순하게 반응하는 걸 보니 커다란 개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아우로라가 미소를 지으며 솔로몬을 바라보았다. 이 늑대도 공작님을 따르는 것이겠지? 역시, 대단한 분이시다.
"..알겠어요..!"
아우로라가 솔로몬의 손을 조심스레 잡고 미소를 지었다. 늑대는 말만큼 빠르구나. 거기다 험지도 잘 달리고...안장 앞부분의 손잡이를 잘 잡으랬지. 아우로라는 자신을 바라보는 늑대를 향해서도 미소를 지었다.
"안녕, 늑대야. 잘 부탁할게."
솔로몬의 도움을 받아 안장 위에 조심스레 앉은 아우로라는,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이제서야 떠오른 의문이지만 공작님께선 이 늑대를 타고 다녔을까, 싶은 것이다.
아우로라가 늑대 위에 얹은 안장 위에 올라앉자, 솔로몬이 가볍게 손짓했고, 늑대는 몸을 일으켰다, 말을 탔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몸이 붕 뜨는 느낌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아우로라의 말에 반응하듯 아우로라를 보던 늑대는 고갤 돌려 앞을 바라보았고, 그 옆에 선 솔로몬은 좀 더 큰 늑대 위에 능숙하게 올라타 휘파람을 불었다.
" 자, 가자! "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늑대는 고갤 들어 아우우-하고 울음소리를 냈고,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답게 울퉁불퉁했지만, 늑대들은 능숙하게 바위를 뛰어넘고, 구덩이를 피해가며 빠른 속도를 유지했다, 두 사람의 옆으로 길쭉한 나무들이 빠르게 지나쳐 가고, 그 속도에 걸맞게 바람은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가며 시원함을 선물했다. 무서울지도 모르겠지만, 조금만 익숙해진다면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눈으로 좇으며 자연을 담아낼 수 있으리라. 그렇게 빨리 달리는 와중에도 나무 사이로 뛰어다니는 사슴이나 산양, 다람쥐 등의 동물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다.
문득 솔로몬을 돌아본다면, 은빛 머리카락과, 그 검은 망토가 휘날리는 것은 물론이오, 그의 표정이 꽤 밝다는 것을 알 수 있겠지.
솔로몬의 손짓에 반응하듯 늑대는 몸을 일으켰다. 몸이 붕 뜨는듯한 느낌에 아우로라가 손잡이를 저도 모르게 꾹 쥐었다. 말을 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 때문일까, 자신도 모르게 긴장이.되었던 탓이었다. 아우로라는 솔로몬을 살짝 바라본다. 공작님께선 능숙하게 늑대 위에 올라탔고, 휘파람을 부셨다.
"아, 우왓.."
아우로라는 늑대가 울음소리를 내고 앞으로 달려나가자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앞으로 숙이곤 손잡이를 꽉 잡았다. 울퉁불퉁한 길이었지만 늑대들은 바위를 능숙하게 뛰어넘았고, 순식간에 풍경은 바람과 함께 스쳐지나갔다. 아카데미에서 성질이 보통이 아니던 말을 잘못 골랐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의 말이 난폭하게 달리던 속도와 얼추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괜히 떨어질꺼 두려워 아우로라는 손잡이를 더욱 꽉 쥐었다.
그러기를 잠시, 아우로라는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어느덧 시선이 팔려있었다. 나무 사이로 뛰어다니는 사슴의 그림자, 산양의 뿔, 늑대를 저멀리서 발견해 나무위로 쪼르르 올라가는 다람쥐...아우로라가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돌렸다.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도 공작님은 자신과 비슷한 속도였기에 흐리게 보이지 않았다.
은빛 머리카락과 검은 망토가 휘날리는 것이, 꼭 기사님 같다고 생각하던 아우로라는 문득 그의 표정을 보곤 남몰래 눈을 휘어 웃어보였다.
꽤 밝아보이는 표정은 꼭 장난을 치길 좋아하던 소년의 것 같기도 했고, 자유로움을 찾은 방랑자 같기도 했으니까. 공작님도 저렇게 밝은 표정을 지으시는구나. 저런 표정이라면 계속 보고 싶다. 앞으로 내가 노력해서 공작님께서 매일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들면 될까? 문득 아우로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휙 돌려 정면을 쳐다보았다. 세상에, 나도 참, 무슨 생각을 한 거야!
확실히, 지금 공작은 꽤 들떠 있었다. 귀족의 위엄이니 뭐니, 제국의 귀족으로 살아온 시간보다, 자유로운 드래곤으로 살아온 그에게는 귀찮은 형식일 뿐이었으니까. 물론 다른 귀족들과는 판이하게 제멋대로 행동했기에 다른 귀족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으나, 어쨌든 제국의 백성들에게 보이는 그는 제국의 대귀족인 공작이었다. 그런 그에게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공작저와 그 주변은 그런 최소한의 형식조차 벗어던지고 즐길 수 있는 장소였으니. 어차피 이 산길은 험해 마차를 타고 오를 수 없을 뿐더러, 공작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땅에 겁 없이 발을 들일 이도 없었으므로, 늑대의 등에 올라 빠르게 내리막을 달리는 것은 다른 이들의 눈을 신경 쓸 필요 없는 즐거운 일탈이었을 터다.
주변을 돌아보기보다는 속도감을 즐기듯, 정면을 바라보며 미소짓는 표정은 아우로라가 떠올린 것처럼, 마치 즐거운 소년과도 같았다.
" 꽤 신나지 않소? 잘 닦인 길을 달리는 것과는 다른 감각이지! "
자신이 탄 늑대 옆에 나란히 달리는 늑대, 그 위에 올라탄 아우로라에게 시선을 돌리며 들뜬 듯한 말투로 아우로라에게 말을 건 솔로몬은. 아우로라가 자신을 보고 있었음을 깨닫지는 못했고, 그녀가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무서움에 경직된 건 아닐까 여기는 모양이었다.
다음엔 느긋하게 다른 곳도 달려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에 그렇게 답하면서 늑대가 달리는 대로 몸을 맡기던 솔로몬은, 정말 숲의 끝에 다다르자, 휘파람을 불었다. 처음에 늑대를 부를 때와는 다른, 중간에 높은 음으로 쭉 올라갔다 그대로 뚝 끊기는 휘파람 소리에 늑대는 귀를 쫑긋거리더니 점차 속도를 줄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춰섰다.
멈춰 선 늑대 위에 앉아 잠시 뒤를 돌아보자니, 흙먼지가 일렁이다가 흩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미 멈춰섰음에도 늑대의 흔적은 아직 다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 이젠 조금만 걸어가도록 하지, 조금만 걸어가면 인가들이 나올 것이오. "
그렇게 이야기하며 늑대에서 내린 솔로몬은 늑대를 쓰다듬어 주더니 늑대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우로라를 태운 늑대는 아우로라의 말에 반응한 듯 꼬리를 한 번 휘두르듯 흔들었다. 그리곤 귀를 쫑긋거리며 아우로라가 내리길 기다리는 듯 조심스레 앉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라. 아우로라가 방긋 웃으며 그때도 공작님께서 소년 같은 미소을 지어주실까? 하고 생각해본다. 만약 그렇다면 좋을텐데. 공작님께서 환히 웃는 걸 봤다고 편지에 써보면, 사람들이 공작님에 대해 생각하는 게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숲의 끝에 도다르자 공작님께서 휘파람을 불었다. 이전과는 다른 휘파람 소리에 아우로라가 입술을 오무려본다. 바람 새는 소리밖에 나지 않는구나. 아우로라에게 있어 휘파람은 어려운 것이었다. 늑대들은 점점 속도를 줄여갔고, 이내 멈춰선다. 아우로라는 늑대 위에 앉아 뒤를 돌아보았다. 흙먼지가 일렁이다 이내 흩어지는 것이, 보통 빠른 속도와 힘이 아니었음을 짐작케 했다.
"알았어요. 수고 많았어, 늑대야."
아우로라는 꼬리를 한 번 흔들고, 귀를 쫑긋거리며 조심스레 앉는 늑대의 움직임에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늑대 위에서 내렸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손을 뻗어 늑대를 쓰다듬고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 복슬복슬했다! 꼭 커다란 강아지를 만지는 느낌이었다.
"데려다줘서 정말 고마워."
그리곤 솔로몬의 근처로 걸어간 아우로라는 그를 올려다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어요!" 라며.
자신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은 아우로라의,'색다른 경험' 이었다는 말에 그 역시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그리곤 두 사람이 등에서 내린 뒤, 두 사람을 빤히 보며 얌전히 서있던 늑대들을 돌아보며 솔로몬이 손짓했고, 늑대는 두 사람에게 인사하듯 머리를 조아리더니 몸을 돌려 숲 속으로 달려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들 사이로 자취를 감춘 늑대들을 보던 솔로몬은 시선을 돌려 아우로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 그럼 계속 가지, 마차가 기다릴지도 모르오. "
물론 빠르게 내려왔으니 아직 마차가 도착하지 않았을 확률이 높았다. 그래도 마냥 느긋하게 갈 수는 없는 일, 솔로몬은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자신의 손을 잡으며 맑은 미소를 짓는 아우로라를 보며 옅게 미소를 지은 솔로몬은, 소네타와 어디에서 보기로 했냐는 자신의 물음에 대한 답으로, 수도 마차역에서 기다린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직후 아우로라가 검지와 엄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고, 그 원 안으로 마나를 불어넣자 시린 얼음과도 같은 마나로 이루어진 나비가 피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어디론가 날아가는 나비를 보던 솔로몬은, 아이같이 미소지으며 소네타에가 연락을 넣어봤다는 말을 하는 아우로라에게 시선을 옮겼다.
" 아우로라 양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
솔로몬은 웃으며 아우로라의 손을 붙잡은 채 마차역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때맞추어 한 마차가 도착했으니, 바로 두 사람이 탈 마차 되시겠다.
" 그럼 마차를 타도록 하지, 시간이 꽤 걸릴 테니, 피곤하다면 눈을 붙여도 좋소. "
마차는 꽤 수수한 장식만이 되어있었으나, 그 마차를 끄는 말 두 마리는 검은 갈기로 유명한 제국의 말 두 마리였으므로, 지체 높은 이가 타는 것임은 알 수 있었다. 솔로몬은 아우로라가 마차에 오르는 것을 돕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마차역에 도착하자 한 마차가 도착했다. 시간이 꽤 걸릴 테니, 피곤하면 눈을 붙여도 좋다고 하였지만. 아우로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를 바라본다. 수수한 장식이 되어있으나 제국에서 검은 갈기로 유명한 두 마리의 말이다. 저 말이라면 어지간한 평민들도 알 것이다! 아우로라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창 밖을 구경하느라 눈은 붙이지 못할 것 같지만요."
으음, 과연 그럴까. 어조에 확신은 없었지만 그러면 그런 것이겠다만은. 자신이 마차에 오르는 것을 돕기 위해 기다려준 솔로몬 덕분인지, 아우로라는 마차에 손쉽게 오를 수 있었다. 원래는 마부나 기사의 도움을 받곤 하였지만 지금은 그런 사람이 없으니까. 아우로라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리고 자리에 앉자 어디선가 짙은 갈색의 마나로 이루어진, 손바닥만한 도마뱀이 나타나선 아우로라의 어깨 주변을 맴돌았다가 사라졌다. 아우로라가 잠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건 다 좋았지만, 자신의 마나로 이루어진 나비가 입의 물려있었으니까.
물론 아우로라가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님은 알고 있었기에 농담조로 이야기한 솔로몬은, 자신의 도움을 통해 마차에 오른 아우로라가 감사를 전하자 고갤 끄덕이며 마차에 올랐다. 창 밖으로 볼 수 있는 풍경은, 어쨌든 아우로라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본 스노우디아 영지와 수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를테니까. 그리고 자리에 앉자 두 사람을 따라 마차를 올랐는지, 짙은 갈색의 마나로 이루어진 도마뱀이 나타나 아우로라의 어깨 주변을 맴돌다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처음엔 웬 도마뱀인가 싶어 쫓아낼까 했지만, 아우로라의 반응을 보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그녀의 동생이 보낸 것인 듯했다.
" 무어라 답이 왔소? "
가끔 덜컹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큰 흔들림 없이 달리는 마차 안에서, 아우로라의 표정을 보며 솔로몬이 물었다. 지금 보고 알았지만, 아우로라의 동생이 지닌 마나는 아마도 짙은 갈색인 모양, 혹은 외부에서 모은 마나일지도 모르겠다. 솔로몬은 두 자매가 모두 보통 수준 이상의 마법적 재능이 있음을 다시금 떠올리며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뭣하면 커튼을 내려도 좋다는 말에 꺄르륵 웃으며, "으음, 커튼을 내리면 잠들 수 있을까요?" 라는 농담을 던진 아우로라에게 그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제는 어느 정도 농담을 자연스레 주고받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구나, 라고 생각할 즈음에 소네타에게서 온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를 이야기하는 아우로라의 표정을 보자니, 마냥 좋기만 한 자매 관계는 아니었나? 라는 생각이 뒤따라온다.
아니면 한 두번 있는 일이 아니라 조금이지만 질린 것일까? 꽤 오래 못 보고 지냈다지만, 얼마 전 솔로몬에게 와서 동생과 함께 드레스를 맞추고 싶다고 이야기하던 때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고 해야 하나.
" 어차피 아우로라 양은 더 이상 아카데미의 학생이 아니지 않소? 아카데미에서 생긴 일로 아우로라 양에게 피해가 가리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데. "
넌지시 이야기하며 그는 아우로라를 따라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는 동안 바깥에서 보이던 풀밭과 산들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하나 둘 건축물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마차와 말 등, 탈것만이 달리는 길과 사람들이 걷는 길이 나뉘어져 슬슬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틀을 강요하는 곳에서 자유를 원한다면...당연하지. 아우로라는 이어지는 말에서 고개를 끄덕이곤 사교계에 대해 생각했다. ..이미 소네타는 사교계에서 몇 이야기가 나돌긴 했지. 아우로라 영애, 소네타 영애는 계속 그렇게 평민들이나 영식들과만 어울린다면 좋은 레이디는 되지 못 할 거예요. 부디 이 점을 기억해주시기를 바라요. 같은.
"사교계에 나서기 전에 마음껏 자유를 누린다는 것은 좋긴 하겠지만...걱정되는게 제 마음이니까요."
아우로라는 그 말을 이후로 소네타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기로 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수도 외곽에 들어선 것 같다는 솔로몬의 말에 눈을 한껏 반짝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역의 간판이 보였다.
"공작님과 대화를 하다보니 정말 빨리 도착한 것 같아요."
아우로라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솔로몬이 먼저 마차에서 내리고, 자신에게 손을 내밀자 아우로라는 그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심할게요..." "언니!!!!!"
아우로라는 고개를 휙 돌리더니 환히 미소지었다. "소네타!" 라고 외치는 쪽을 쳐다보니, 아우로라와는 사뭇 다른 모습의 여성이 보였다. 비슷한 은발이지만 조금 더 짙어 연보라색에 가깝고 포니테일로 올려 묶은 머리, 그리고 큰 키와 두 눈에 가득 들어찬 자신감이 아우로라와 확실히 차이가 났다.
이미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조금이나마 사교계에 발을 담근 아우로라였으니, 아직 소네타가 가지지 못한 경험들을 꽤 많이 가지고 있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그 경험을 얻는 과정에서 자신이 처했던 어려움을 동생에게도 겪게 하고 싶지는 않겠지. 그렇기 때문에 아우로라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사람마다 성향도, 위기를 타파하는 방식도 다른 만큼 소네타가 사교계에 뛰어들었을 때 어떤 일을 마주하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으므로 소네타에 대해서 아우로라와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아직 직접 만나 본 적이 없기도 했고.
" 내 생각에도 그렇소, 여로에 말동무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로군. "
그와 이야기하다 보니 정말 빨리 도착한 것 같다는 아우로라의 말에 긍정하듯 고갤 끄덕인 솔로몬은, 그녀가 자신의 손을 잡으며 조심하겠다고 고갤 끄덕이자, 팔에 힘을 주고 그녀가 마차에서 내릴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고 그 즈음 저만치에서 언니를 부르는 소녀의 목소리에 아우로라가 고갤 돌리곤 그녀의 동생의 이름을 외치자,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갤 돌린 솔로몬은, 연보랏빛에 가까운 은발을 포니테을로 올려 묶은, 꽤 큰 키의 소녀를 볼 수 있었다. 과연, 아우로라와는 사뭇 다른 느낌, 닮았으면서도 두 자매 사이에는 확실히 구분 가능한 특징이 잔뜩이었다. 그렇게 소네타를 보는 것도 잠시, 아우로라가 무사히 마차에서 내릴 때까지 기다리듯, 솔로몬은 아우로라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말동무가 있는 것은 좋았다. 아우로라는 마차에서 내리려 할 때 소네타를 보게 되었고, 그 표정은 평소보다 더 밝은 듯 싶었다. 순수하고 맑은 미소가 얼굴을 가득 채우자 소네타 또한 얼굴에 반가움을 그려냈다. 자세히 보니 다른 점이 몇가지 더 있었다. 예를 들면 진한 보라색의 눈동자라던가..기타등등.
아우로라는 마냥 방실방실 웃다 솔로몬의 손을 잡고 있었던 것을 깨닫고 잠시 흠칫 놀라더니,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리고, 소네타를 향해 한 걸음 걸어갔다. 하마터면 공작님을 기다리게 할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소네타는 마음에 들지 않았나보다. 그녀는 잠시 아우로라를 쳐다보다 솔로몬을 바라보았다.
"..나는 지금껏 협박이나 그런 걸 당해서 편지에 거짓말을 한 줄 알았는데." "아, 그게...그러니까.." "됐어. 스노우디아의 작은 영애가 공작님을 뵙습니다."
소네타는 의외로 순순히 그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했다. 아우로라는 눈을 크게 깜빡이며 믿지 못하겠단 표정을 지어보이다 그 표정을 지워나갔고, 소네타는 아우로라에게 한 걸음 다가서 잠시 그녀를 빤히 쳐다보곤 잠시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우로라는 그런 소네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래, 그래. 빨리 드레스라도 맞추러 갈까? 이렇게 있다가 날 새겠다. 그치?" "힝..."
소네타를 바라보며 마냥 웃던 아우로라가, 공작의 손을 잡고 있었음을 깨닫고 흠칫 놀라며 마차에서 내린다. 그리곤 혹여 자신이 공작을 기다리게 한 것은 아닐까 하며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솔로몬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 했다. 그녀가 무사히 내렸다면 그 뿐이었을까, 소네타가 아우로라에게 하는 말은 충분히 무례가 될 수 있었음에도, 그는 별다른 말 없이 소네타가 예를 갖춰 인사하자 손짓하며 이야기했다.
" 반갑소, 소네타 양. "
물론 아우로라는 그가 그녀에게 대하듯 부드럽게 그녀의 동생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으리라. 다른 사람들이야 공작의 거만하고 퉁명스러운 태도만을 보아왔을 테니, 그럼 그렇지 할 테지만. 그가 그렇게 여기는 만큼, 소네타에게도 딱히 그의 존재는 신경 쓸 부분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속내를 알 수는 없겠지만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언니를 끌어안는 모습을 보자면...
소네타는 솔로몬이 인사를 받아주자 슬쩍 눈을 굴려 아우로라를 바라보았다. 그럼 그렇지, 역시 소네타 또한 그런 생각으로 일관한 것이 분명했다. 아우로라는 소네타의 등을 토닥여주며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드레스라도 맞추러 가야 소네타의 기분이 풀릴 것 같다. 소네타는 항상 나는 드레스가 어울리지 않는 걸. 하고 퉁명스럽게 말해도.
"그러고보니 소네타, 이렇게 언니를 끌어안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아우로라는 맑게 웃었지만 순간 소네타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린 것이다. 솔로몬이 마차를 돌려보내고 아우로라를 향해 시선을 옮기면,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어떻게 할 줄 몰라하는 소네타와 눈이 마주칠지도 모르고. 소네타는 한참동안 입술을 오물거렸다. 곤란하면 하는 행동이 제 언니와 마냥 같았다.
마차를 보낸 뒤 시선을 두 소녀에게 돌려 보니, 아우로라에게 소네타가 쩔쩔매는 모습이 눈 안에 들어온다. 그리곤 두 자매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자면, 아무래도 아우로라와의 의견 나눔 없이 아카데미에서 과를 바꿔버린 모양...이라기보다는. 무언가 문제가 생겨 과를 바꾸게 되었다...라는 느낌이다.
잠시동안 나눈 대화의 끝은 자신을 부르는 것이었다. 아우로라에게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이어 살롱으로 빨리 가자는 말이 들리고, 그녀의 미소와 함께 소네타가 짧고 작은 비명소리를 내며 제 언니에게서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집안에서는 꽤 엄하기도 한 언니인가, 라고 생각하며 솔로몬은 고갤 끄덕이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 알겠소, 그럼 가도록 하지. "
아우로라에게 손을 내밀까 생각했지만 오랜만에 본 여동생과 손을 잡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었던 그는 두 사람에게 손짓해 둘의 뒤에서 걸으려 했다.
둘이서 손 잡고 다니는 걸 볼까 했더니만. 아우로라는 자신이 따로 떨어져 다니는 것이 썩 내키지 않는 듯, 자신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당연히 소네타는 그리 좋아하는 눈치는 아니었지. 아우로라가 내민 손을 잠시 보며 잡을까 말까 고민하던 솔로몬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작고 흰 손을 쥐었다.
어쩌다 보니 셋이서 나란히 걷는 모양새가 되었는데, 솔로몬이 가운데 있는 것도 아니고, 조그마한 소녀 한 명이 가운데에 서서 양쪽에 자신보다 큰(물론 한 명은 그녀보다 어렸지만) 사람들의 손을 잡고 걷고 있었으니. 어쨌든 쉽사리 보기 어려운 광경이었기에 모든 이들은 아니어도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이 가끔씩 그들에게 몰렸다. 시선을 받으며 걷다 보니, 옆에서 두 소녀가 나누는 이야기가 자연스레 들린다.
아무래도 지금 향하는 살롱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 모양인데, 두 사람에게 불쾌한 일이 있었던 모양. 소네타는 지속적으로 거침없는 언행을 보였고, 아우로라는 그 언행을 제지하는 식으로 대화가 이어진다, 그렇게 이야기하던 중 아우로라가 살롱에 들러 드레스를 보고 난 뒤, 솔로몬과 함께 카페에 갈 생각이라고 이야기하자 소네타에게서 한숨이 들렸다.
" 그렇소, 약속을 했었지. "
자신에게 동의를 구하는 아우로라에게 고갤 끄덕이며 대답해준 솔로몬은 새삼 아우로라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지금까지 보아온 이들과는 처음부터 다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걷다 보니, 자연스레 시선보다는 제 옆에 선 두 소녀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었다. 자신이 영애가 아니라는 것을 이유로 소네타를 설득하는 아우로라와, 그 말에 별다른 반박을 찾지 못하는 소네타. 그리곤 소네타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아우로라가 자신을 올려다보다가 시선을 돌리자 나중에 한 번쯤 골려주겠다고 생각하며 걷던 솔로몬은, 두 소녀의 화제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 미묘한 지루함도 잊을 겸 두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듣자하니 아카데미에서 다툰 검술과의 영식을, 소네타 자신의 검술(?)로 골려준 모양이었다. 적극적이고 저돌적인 성격이라는 게 확연히 드러나는 이야기에 흥미가 생기는 듯 자신의 턱을 매만지던 솔로몬은 소네타가 기사단에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하자 마차 안에서 아우로라와 이야기하던 것이 떠올라 미소를 띄웠다.
" 후작가에 여장부가 있었군 그래, 굳이 사교계에 나가지 않아도 좋지, 재능만 있다면 기사로 대성할 수 있을 것이오. "
문제라면 기사 역시 예법이 있다는 걸까. 물론 소네타가 예를 갖추는 법을 알고 있다는 것은 좀 전에 자신에게 인사를 할 때 확인했으니 괜찮겠다고 생각하며, 그녀가 원하는 기사단은 어디일까 생각해 본다. 역시 황실 근위대인가? 아니면 후작가의 기사들을 이끌고 싶어할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소네타에게서 아우로라가 아카데미에 다니던 시절 사교계보다는 마탑에 머물고 싶어했다는 말이 들렸고, 이번엔 아우로라가 부끄러워하자 말 없이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 아마도 그런 모양이오, 자, 들어가도록 하지, 후작가의 아가씨들. "
그리곤 어느새 도착한 살롱 앞에 서서, 그를 알아본 직원이 문을 열자 잠시 아우로라의 손을 놓고 둘에게 먼저 들어가라 손짓한다.
여장부가 있었다는 말에 소네타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재능만 있다면 기사로 대성한다라. 아우로라는 소네타를 잠시 쳐다보았다. 소네타가 가려는, 대성하고 싶어하는 기사단은 어디일까. 소네타는 아우로라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듯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사자 기사단으로 가고 싶어." "눈 표범은?" "우리 가문의 기사단은 좀 많이 부담스러운 거 알지?" "음..그렇겠네."
검은 사자. 황제와 귀족, 어느쪽에게도 정치적인 검날을 겨누지 않는 중립적인 기사단으로, 마물을 토벌하고 전장에서도 최전방에 나서는 기사단중 하나였다. 아우로라는 그런 소네타의 미래가 덜컥 걱정이 되었는지 소네타를 잡은 손가락을 꼼질댔다. 그 걱정도 소네타의 장난에 한김 식긴 했지만. 아우로라는 솔로몬이 자신의 손을 꼬옥 잡아주자 그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뭔가 장난스럽기도 한 그 미소는 방금 건 못 들은걸로 해달라는 뜻 같기도 했다.
"네에-" "먼저 들어갈게요..!"
자매는 그렇게 살롱에 들어가는 순간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느슨했던 분위기를 바꾸었다. 그 모습이 품위 있는 귀족 영애들의 모습 같기도 했고, 살롱을 불시에 검문하는 사람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데뷔탕트 볼은 중요하기도 했고, 기선제압도 중요하니까.
// 힝 요즘 오타가 느는 것 같아서 고민이야 88...조금만 잘못해도 손가락이 삐끗하네 (._. 아니 그것보다 ㅂ공작님 골려주겠다니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허엉 공작님 골려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너무 귀여워서 나 여기 좀 누워야 할 것 같아ㅠㅠㅠㅠㅠㅠ 공작님... 그렇지만 아우로라는 결백합니다..근육질 미남이 드레스를 입는 것은 웨딩드레스만 허용한다구..(솔로몬주: 으악 저리가요)
소네타가 소속되고자 하는 기사단은 검은 사자. 일단은 중립을 유지하는 기사단이로군, 사실 깊이 들어간다면 어느 한 쪽의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니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여지가 있었지만. 어쨌든 특정 세력에 소속된 기사단보다는 자유롭다는 건 장점이 될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아우로라가 자신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어보이곤, 자신의 손짓에 따라 그녀의 동생과 함께 살롱에 들어서는 것을 보곤 그도 잠시 뒤 살롱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보다 앞서 들어간 두 영애는 방금까지 격식없이 이야기하던 것과는 다르게, 귀족가의 영애다운 모습으로 살롱의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자리를 안내받아 망토를 벗고 자리에 앉았음에도, 그를 알아본 몇몇 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큰 사교 파티에도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가 그보다도 작은 살롱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그러거나 말거나 솔로몬은 두 자매를 눈으로 좇으며 손님맞이용으로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는 찻주전자의 뚜껑을 열어보거나 했다.
일단은 두 영애가 아는 사람을 보게 되면 대충 인사를 나눈 뒤에는 자리로 돌아오거나 할 테니. 그는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격식없이 대화하던 것과 다르게,들어가는 걸음엔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아우로라는 자리를 안내받으며 주변을 슥 훑어보았다. 이번에 유행할 디자인 몇개를 전시해두었지만, 흥미를 보이는 소네타와 달리 아우로라의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수군거리는 소리에 아우로라가 슬쩍 고개를 돌려보지만 그도 잠시였다.
"세상에, 너무 오랜만에 찾아와주셨네요, 공녀님!"
아우로라를 보며 달려온 살롱의 주인은 "거 봐, 내가 공녀님께서 절대 좋아할 스타일이 아니랬지?" 라며 다른 직원들에게 잠시 핀잔을 주었다. 아우로라는 그제서야 미소를 지어보였다.
"오랜만이에요." "이번엔 어떤 일로 찾아오셨나요?"
그리고 목소리를 낮춘 것이다. "혹시, 뒤의 분은 소문의 공작님이신가요?" 라며. 아우로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주변을 훑더니 손가락으로 진열된 드레스 몇개를 주욱 가리켰다.
"데뷔탕트 볼을 위해 왔어요. 그렇지만 전부 마음에 들지 않으니,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을동안 다른 디자인을 가져오세요. 몰리."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아우로라는 그제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고, 고개를 휙 돌려 솔로몬에게 다가갔다. 별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대상이 없던 것 같다.
살롱 안에는 요즘 유행할 만한 디자인이 전시되어 있었으나, 그 옷들을 보는 아우로라에게 살롱의 주인이 보이는 태도를 보자니 전시된 옷들은 그녀의 흥미를 끌지 못한 모양이다. 그 와중에 솔로몬 자신에게 꽂히는 시선이 있기는 했지만 딱히 무어라 하는 소리를 듣지는 못했으니 그는 개의치 않고 아우로라가 옷을 고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 아우로라와 살롱의 주인이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아우로라가 옷들을 손가락으로 훑은 뒤 드레스들을 가리키며 무어라 하는 모습을 보면 일단 주인에게 무언가 요구하는 거겠지.
그리곤 일단 용무가 끝났는지 고갤 돌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아우로라를 보던 솔로몬은 그녀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입을 열었다.
" 어디, 마음에 드는 옷은 찾았소? "
아닌 것 같지만. 아우로라에게 넌지시 물어보면서 그녀가 앉을 수 있을 만한 자리를 마련해 준 솔로몬은 새삼 드레스를 고르는 것도 신경이 많이 쓰이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아우로라를 바라보았다.
좋은 드레스는 많았지만 원하는 건 없었다. 소네타는 그런 제 언니가 마냥 신기한지 아우로라를 빤히 쳐다보았고, 아우로라는 시선에 답하듯 "전부 내겐 안 어울려보여." 라고 짧게 답하며 솔로몬의 말에 피, 하고 작게 웃었다.
"아직이요.. 어울리는 옷을 못 찾겠다 싶어서 다른 디자인을 보여달라고 말하고 왔어요."
자리에 앉으며 아우로라는 소네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왜 소네타는 앉지 않는 걸까...싶었건만. 소네타는 이미 한 드레스에 시선이 꽂힌 모양이었다. 아우로라가 말했다. "보고 와도 돼. 입어봐도 좋고, 디자인이 달라도 장신구랑 색 배치를 같이 고민해보면 되겠지?" 라며 운을 떼자 소네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어딘가로 걸어갔다. 아무래도, 드레스를 입어보려는 것 같았다.
마음에 드는 옷은 찾았냐는 자신의 물음에, 어울리는 옷을 못 찾겠다 싶어 다른 디자인을 보여달라 말하고 왔다는 답이 들린다. 고갤 끄덕이는 동안 아우로라는 자리에 앉아 소네타가 왜 앉지 않는지 궁금해하는 모양이었는데, 그런 그녀의 시선을 따라 솔로몬이 시선을 돌려 보자 아우로라가 소네타에게 마음에 든다면 보고 오라는 이야기를 했고, 소네타는 고갤 끄덕이며 어딘가로 걸어갔다. 그 뒤에 대화할 만한 사람은 없었냐는 질문을 건넸고, 아우로라는 유감스럽지만 아직은 없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서 이어진, 솔로몬은 어떻냐는 질문에, 솔로몬은 자신의 턱을 매만지다가 웃으며 입으 열었다.
" 마찬가지라오, 애초에 내가 살롱에 오는 것 자체가 거의 볼 수 없는 일이니. "
이게 알려지면 꽤 이슈가 되겠지, 이걸로 가십거리를 삼을 수도 있겠지만 그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걸며 이 일을 언급할 만한 사람은 없었으니. 이 살롱 안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살롱에 모습을 드러낸 것에 대해 놀라움이나 수군거림은 보여줬지만, 아무도 그에게 다가와 먼저 말을 걸거나 하는 이는 없었다. 물론 사교 파티에 들어선다면야 그와 최소한의 관계는 구축하고자 하는 이들이 말을 걸어오겠지만, 그 때에도 그가 먼저 말을 거는 경우는 정말 흔치 않았다, 기껏해야 황실의 주요 인사들에게 말을 건네는 정도겠지.
살롱에 오는 것 자체가 볼 수 없는 일이지. 아우로라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은 무언가, 살롱에 오지 않을 인상이니까. 수도에서도 공작님이 오는 일은 없어보였고. 살롱 안의 사람들은 쉽게 말을 걸지 않았으니. 아우로라가 그럼에도 활짝 웃었다.
"곧 익숙해질지도 몰라요!"
라며. 아우로라는 이윽고 솔로몬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두며 가볍게 그의 손등을 토닥이듯 하였다. "아니면 공작님도 옷을 맞추시는 건 어때요?" 라고 덧붙이다 순간 입을 앙 다문 것은 아마도..
"마, 맞다. 죄송해요. 여긴 드레스만 맞추는 곳이었지."
드레스만 맞추는 곳이었으니까. 아우로라가 멋쩍게 히, 하고 웃더니 살롱의 직원들이 자신의 앞으로 마네킹을 대여섯개 끌고오는 것을 보았다. 정확히는, 자신과 솔로몬의 앞으로.
"공녀님을 위해 엄선한 특별한 디자인이랍니다."
아우로라는 솔로몬의 손등 위에 올려둔 손을 잠시 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수한 멋을 가진 것도 있었지만, 그중 유독 화려한 것도 있었다. 화려하며 네크라인이 지나치게 깊게 파여있는 그것은, 어째 영애보다는 마담이 입어야 할 것 같았지만. 아우로라의 표정이 차게 굳었다. 할 말을 잃은 것 같기도 해보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조나 표정을 보자면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심심한 농담조였을 뿐이지. 그런 솔로몬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우로라는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 올리며 그의 손등을 토닥인다. 그리곤 그에게, 그도 옷을 맞추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가 드레스만 맞추는 살롱임을 떠올린 것인지 멋쩍게 웃었다.
그렇게 농담 같은 이야기들이 오고가는 동안, 살롱의 직원들은 아우로라에게 보이기 위해 고른 옷들이 걸린 마네킹들을 끌고 왔다. 자신의 손등에 포개졌던 자그마한 손이 떨어지며 아우로라가 자리에서 일어섰고, 옷들을 살피는 모습을 따라 솔로몬도 마네킹들이 걸친 드레스들을 훑어본다.
수수한 느낌의 드레스들 사이 유독 눈에 띌 정도로 화려한 모습의 드레스 하나. 그리고 차게 굳은 아우로라의 표정, 솔로몬은 왜 그녀의 표정이 차게 식었을지를 생각해 본다.
" 고맙지만 디자인의 균형이 맞지 않는군, 수수한 드레스들 사이에 화려한 게 하나 끼어있으니, 일단 이 드레스들은 두고, 비교적 화려한 것들로 좀 더 가져오게, 영애가 혼자 고민할 시간을 주도록. "
지금도 무서운 '사람'은 아니라고 실없는 생각을 하던 솔로몬은, 자신의 지시에 직원들이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나는 것을 보다가, 드레스를 입은 소네타와 아우로라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들었다. 둘의 대화에서 등장하는 '그'는, 아마도 황태자겠지, 처음엔 그냥 옷의 취향이 심하게 어긋나서 그런 것이려니 했건만, 알고 보니 황태자와 엮여있었기에 불쾌하거나, 당황했던 모양이었다. 소식이 느린가? 하기사 본인도 아우로라가 황태자와 엮여있었다는 것은 대화를 나눠보고서야 알았으며, 그와 불미스러운 관계라는 것은 꿈을 들여다본 뒤에 깨달았으니까, 황태자에 관해 어떤 형태로든 좋지 않은 이야기가 떠도는 것은 용납될 수 없으니 이들이 모르는 것은 당연했으리라. 자신을 돌아보며 쓰게 웃던 아우로라가, 마네킹 사이를 누비며 걷다가 미소를 맑게 고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솔로몬은, 어떤 것이 잘 어울릴까요? 라며 질문하는 아우로라를 잠시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 수수한 편이 좋다고 생각하오, 별다른 장식 없이도 아름다워야 진정 아름다운 것이지, 정 밋밋하다면 브로치나 리본을 따로 달면 될 테니, 처음부터 화려한 드레스보다 마음에 들게 만들 수 있지 않겠소? "
아우로라는 솔로몬의 속을 알기라도 했는지 "사람의 겉과 속은 아주 많이 다른 법이라잖아요." 라고 덧붙였다. 당연했다. 황태자는 자유로우며 유쾌한 성군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었고, 아우로라는 그와 좋은 짝이 될줄 알았으나 대립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며, 그의 자유를 위해 자리에서 물러난 비운의 여인으로 남았을 뿐이다.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더 마주치지만 않으면 되니까. 아우로라는 드레스 사이를 거닐다 어느 한 드레스에서 멈췄다. 수수한 편이 좋다, 라. 맞는 말이다! 별다른 장식이 없어도 아름다우면 좋을테니. 소네타는 아우로라가 멈춰선 드레스에서, 그녀와 드레스를 겹쳐보듯 두어걸음 뒤로 물러섰다.
"언니, 그거 입어봐." "이거?" "응. 그게 제일 예쁜 것 같은데."
마침, 솔로몬이 말한 기준에도 맞는 것 같기도 하였고. 아우로라가 솔로몬을 빤히 쳐다보다 드레스를 한 번, 소네타를 한 번 쳐다보았다.
사람의 겉과 속은 아주 다른 법이다. 그 말에 다시금 머릿속의 생각이 환기되는 기분이다, 되도록이면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않으려 했지만. 저도 모르게 아우로라 역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생각은 당연하게도 그녀 역시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을까ㅡ라는 논리적 귀결로 이어진다. 곧 그런 생각은 멀리 치워버렸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다시금 지워버리는 동안 아우로라는 드레스 사이를 거닐다가 어느 한 드레스 앞에 멈춰섰고, 그 모습을 본 소네타에게서 그 드레스를 한 번 입어보라는 이야기가 들렸다. 드레스는 무게가 나가는 장식이 없어 가벼웠고, 수수했지만 아름다운, 그러니까 솔로몬이 이야기했던 조건에 꽤 잘 들어맞는 드레스였다. 아우로라도 그 드레스가 마음에 있긴 했는지, 솔로몬과 드레스, 소네타를 번갈아 보다가 조금 얼떨결에 결정된 것에 대한 감정을 나타내듯, 드레스를 입어보고 오겠다고 이야기했고, 솔로몬은 고갤 끄덕인다.
직원을 불러, 소네타가 어울린다며 이야기해 준 드레스를 입기 위해, 다녀오겠다며 탈의실로 걸어가는 아우로라에게 고갤 끄덕여 준 솔로몬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소네타가 고갤 돌려 자신을 바라보며 운을 띄우자, 그녀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일단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에서, 확실히 눈에 본 것만을 믿는 성격이라고 생각한 솔로몬은, 소네타가 제 언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예쁘다는 말부터, 성격에 대한 칭찬과, 그 재능에 대한 칭찬까지. 많은 영식들이 가슴에 한 번쯤은 품어봤을 거라는 말에 솔로몬은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는지 고갤 끄덕였다. 그러다가 소네타가 목소리를 낮추며 하는 말에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싶기는 했다.
" 무얼 듣고 싶은지 모르겠군, 아우로라 양에 대한 평이 듣고 싶은 것이오? 아니면 황태자에 대한 내 생각을 듣고 싶은 것인가? "
그는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검지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목소리를 낮춘 것은, 적어도 누군가가 들어서 좋을 말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고 봐도 되겠지, 물론 그녀의 거침없는 태도는 썩 마음에 들었으나, 그것은 현재 아카데미의 학생으로 있는, 대귀족 후작가의 영애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으니... 과연 그녀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기사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라는 생각을 하던 그는, 그래도 그녀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생각할 줄은 알 것이라 판단하며 말을 이었다.
" 황태자께 좋은 감정이 없다는 것은 알지만, 말은 조심하도록 하시오, 어디에 듣는 귀가 있을지 모르지, 이미 늦기는 했소만. "
" 당사자에게나 옹졸하게 느껴질 일이오, 부디 옹졸한 일의 피해자가 되지 않으면 하는데. "
세력의 크기로나, 지위로나. 귀족에게 황태자는 쉽사리 건드리기 어려운 위치였으니, 황태자에게 우호적이더라도 현 황제가 아닌 미래의 권력메 머리를 조아린다 여겨질 수 있었고, 그게 아니라면 황제의 계승자를 능멸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그리고 적어도, 그가 아는 한도 내에선... 황태자는 그런 자신의 유리한 위치를 꽤 잘 활용하고 있었다. 적어도 백성들 사이에서 황태자는 촉망받는 황제의 자질을 지닌 이였고, 공작인 그가 생각하기에도 그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은 딱히 없었다, 그저 백성들이 아는 황태자의 모습과, 정치에 능한 황태자의 모습은 다를 뿐. 성인이 된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음에도 황태자는 정치에 재능을 보였지, 그에 반해 소네타는 거침없을지언정 술수에는 아무리 잘 쳐줘도 황태자에게 다다르지 못할 터, 작정하고 물고 늘어진다면 악몽과도 같은 일이 벌어질 터다. 보통이라면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만, 소네타의 성격 때문에 아우로라가 다시금 황태자와 엮이게 되면 그 끝은 절대 좋을 리가 없었으니, 일단은 그녀를 안심시키고자 약속했던 것도 있었기에 소네타에게 넌지시 이른 것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솔로몬 자신은 황태자와의 관계에서 굉장히 자유로웠다, 황태자 쪽에서 그를 만나는 것을 유독 꺼리는 것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는 황실의 이익을 우선으로 움직이는 귀족들의 수장이었으니 눈 밖에 날 이유가 없기도 했고. 이런저런 생각이 왔다갔다하는 동안, 소네타에게서 또 다른 화제로 질문이 들려왔고, 솔로몬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소네타를 쳐다보았다.
" 글쎄, 후작가로 보내는 편지의 내용까지 일일히 확인하지는 않아서 말이오. "
일단, 소네타를 만나러 가겠다고 했을 때의 이야기로 미루어 보았을 때, 적어도 소네타와 후작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신의 이미지와는 다른 이야기를 적어 보냈겠지.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솔로몬은 소네타가 어떻게 이야기를 이어갈지 기다리는 듯 손깍지를 꼈다.
걱정 말라며, 혼자였다면 황태자를 물고 늘어졌을 거라는 말에 솔로몬은 심드렁하게 덧붙이듯 이야기하곤, 그래도 본인이 홀몸이 아니라는 자각은 확실하다고 판단한 것인지, 아니면 그런 이야기에 흥미가 가신 것인지 자신의 검지와 엄지를 비비며, 그 두 손가락으로 시선을 내린다. 그러다가, 아우로라가 후작저에 보내는 편지의 내용을 일일히 확인하지는 않는다는 자신의 말에, 소네타가 탄식하며 차라리 검열로 인한 내용이었다면 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곤 눈을 천천히 깜빡인다. 무슨 내용이었길래? 하고 궁금해하던 때 즈음, 소네타가 아우로라로부터 받은 편지에 어떤 내용이 있었는지를 이야기하자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테지. "
그는 나지막히 이야기하면서 눈을 떠 저만치에서 걸어오는 아우로라를 보았고, 그와 같이 아우로라를 바라보는 소네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말을 듣는다. 편지의 내용을 그에게 이야기한 것을 비밀로 해 달라는 말, 그가 들은 내용이라고 해 봤자 아우로라가 보기에 그는 폭군이라기 보다는 성군이다, 라는 말 뿐이었으니 무슨 문제가 되는 걸까 싶었다만, 소네타가 아우로라를 대하는 모습을 보자면 정말 아카데미 첨탑 위에 매달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솔로몬은 선선히 고갤 끄덕였다. 첨탑에 매달릴 소네타가 걱정되었다기보다는, 그런 일이 생기면 적잖은 소요가 생길 테고, 그럼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전달되는 일거리가 늘어날 테니...라는 이유였지만. 그는 일단 소네타와의 대화가 일단락되고, 자신 쪽으로 걸어오는 아우로라에게 다시금 시선을 돌렸다.
일단 무작정 폭군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는 벗어난 모양이었지만, 그렇다고 소네타의 생각이 긍정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겠다. 그녀에게 그리 살갑게 대하지도 않았으니 살가운 평가가 돌아올 리 없겠지. 아무튼 일련의 대화가 끝나고, 드레스를 입은 채 다가온 아우로라가 소네타와 나누는 이야기를 듣던 솔로몬은 고갤 끄덕였다.
" 드레스는 입지 않으니 말이오, 안목은 소네타 양이 더 낫겠지. "
라고 덧붙이며 심심한 맞장구를 쳐 준 솔로몬은, 아우로라가 몇 걸음 물러나 빙글 도는 것을 보았고, 이윽고 자신이 보기에 어떤지를 묻는 그녀의 목소리에 잠시 턱을 괴고 고민했다. 어쨌든 화려한 장식이 거의 없음에도 아름답다는 느낌은 들었기에 합격점이었으나, 등이 파인 게 조금 걸린다.
" 좋다고 생각하오, 이젠 아우로라 양의 선택이 남았군, 어디, 드레스는 마음에 드는지? "
자신의 맞장구에 키득거리는 아우로라를 보며, 어느 정도 유머를 가지는 게 괜찮겠다 생각하던 솔로몬은, 아우로라에게 드레스는 마음에 드는지 물었다. 그에 대한 답으로 아우로라는 잠시 고민하는 듯 싶었지만 결국 고갤 끄덕이며 활짝 웃어보였고, 수수하지만 유행도 따르고 있다며 드레스 자락을 매만졌다. 천의 감촉을 가늠해보는 것일까, 뭐니뭐니해도 착용했을 때 피부에 부담이 가지 않는 게 제일이라고 생각하던 솔로몬은, 아우로라와 소네타가 드레스의 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듣는다.
가만히 들어 보니, 가문과 새벽을 상징하는 색 위주로 고르는 모양이었고, 소네타는 그에 따라 연한 보라색을 택했다. 그럼 아우로라는 무슨 색을 선택할까 궁금해하며 이야기를 기다린 솔로몬은, 그녀가 연한 하늘색을 선택하자 고갤 끄덕였다, 새벽 하면 떠오르는 시원한 색감. 그렇게 드레스의 디자인과 색이 선택되는 것으로 준비는 끝난 모양, 이제는 드레스를 주문하는 것만 남았다. 소네타의 이야기로 미루어보자면 꽤나 빨리 선택이 끝난 것 같지만, 아우로라의 미소를 보자니 선택이 빨랐어도 문제는 없는 거겠지, 들인 시간에 결과가 비례하는 게 항상 들어맞지도 않는 법이고.
그렇게 말없이 두 자매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던 솔로몬은, 이윽고 아우로라가 옷을 갈아입으러 갈까 하며 소네타에게 이야기를 꺼내는 것과, 그 이야기에 같이 가자며 대답하는 소네타에게 다녀오라는 듯 손짓했다.
드레스의 색을 맞추는 것은 예상 외로 빠른 시간이 걸렸고, 드레스의 디자인도 의외로 빠른 시간이 걸렸다. 본인들이 만족하면 되는 거니까, 뭐. 아우로라는 주인을 불러세웠다.
"둘 다 이 디자인으로, 그리고 색과 원단, 추가 할 장식은 사람을 보내 값을 지불하면서 정확하게 알려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올게요, 공작님!"
용건은 간단하고 빠르게. 능수능란하게 주문을 끝낸 아우로라는 환히 미소를 짓더니 소네타와 함께 직원을 대동하여 탈의실로 향했다. 그러다가도 솔로몬이 나가는 것 같자 무언가를 고민하다 살롱의 수석 디자이너인 주인에게 다시금 일렀다.
"몰리, 당분간은 이 드레스들과 동일한 디자인은 더이상 받지 마세요. 한 번 뿐인 날에 겹치는 드레스를 보면 다들 뭐라고 생각하겠나요." "역시 공녀님이십니다. 데뷔탕트 볼 이후로 사교계에 큰 유행을 불러오실 생각이시군요?" "사교계에 당분간 나가지 못할테니 그정도는 해야겠죠. 내 존재라도 남겨야 함부로 깔보지 못할테니까요. 그리고 소네타의 위상도 높여야 해요." "언니, 벌써 거기까지 생각했구나." "다른 건 몰라도 드레스 디자인이 같다는 핑계로 물어뜯기는 건 질색이니까. 자, 어서 갈아입고 카페라도 가자꾸나."
어느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아우로라는 소네타의 손을 잡고 살롱을 나섰다. 그 사이에 머리도 다시 틀어올렸는지 훨씬 깔끔해보였다.
어찌 되었든, 드레스 선택이 끝나고, 아우로라가 살롱의 주인을 불러세운 뒤 확실하게 주문을 하는 모습을 본 솔로몬은, 그녀가 옷을 갈아입으러 다녀오겠다고 미소지으며 이야기하자, 고갤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옷을 갈아입는 데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할 것이니, 자신은 나가서 기다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왜 굳이 살롱 안에서 기다리지 않느냐, 라고 묻는다면 자신을 보고 술렁이는 살롱 안의 분위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을까. 이유가 무엇이었든 솔로몬은 자매가 탈의실로 가는 모습을 보다가 일어서서 몸을 돌렸고, 걸어두었던 망토를 제 손으로 다시 걸친 뒤 출구 쪽으로 구둣발 소리를 내며 걸어나간다. 살롱 바깥으로 나온 솔로몬은 그제야, 얼마 뒤면 있을 데뷔탕트 볼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데뷔탕트. 그것은 단순한 사교 파티가 아니다, 비로소 사교계를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성인으로 인정받기 위한 자리, 물론 그 뿌리는 사교계지만, 데뷔탕트에서 보인 모습을 통해 성인이 된 소년/소녀들의 미래를 향한 길이 열리거나 닫힌다는 것도 과언은 아닐 터.
그렇기에 새삼 솔로몬은 생각이 깊어지는 것을 쉽사리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런 자리에 황실의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 다른 이들은 그렇다 쳐도, 황태자가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을까? 그동안 데뷔탕트 볼에 참석 자체를 잘 하지 않았거니와, 누가 오든 그의 신경을 쓰이게 만들지 못했건만. 쓸데없는 노파심에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쉴 즈음,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뜨고 돌아보니 깔끔한 모습의 아우로라와 소네타가 있었다. 오래 기다렸냐는 질문에 그는 입을 열었다.
데뷔탕트. 아우로라가 드레스를 한 벌만 만들도록 특별히 지시를 넣고, 소네타의 위상을 드높이려 한 이유는 무엇일까. 직원들의 도움을 받으며 옷을 다시금 갈아입던 아우로라의 머리가 바삐 돌아갔다. 소네타는 사교계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자신 또한 공작저에 있음으로 소식이 뜸해졌으니 기강을 잡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드미트리. 아우로라가 그를 생각했다. 이번엔 아우로라가 그의 기를 꺾겠다 생각했다. 드높은 개국공신 가문의 딸 둘이 모두 데뷔를 할 것이니 어지간해선 황실의 사람은 당연히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드미트리 또한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컸다. 그렇지만 과거와 달리 옆에 그 누구도 거느리지 않고 나타나겠지. 불편한 자리가 될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던 아우로라가 거울을 덤덤하게 쳐다본다.
이니, 불편함은 이미 지독하게 겪었다. 그보다 더한 수모도 겪었는데 무어가 더 불편할까. 아직까지 자신은 이리 영향력이 큰 사람임을 드러내야 했고, 한 번의 파혼으로 밀어두었던 거리를 더더욱 벌려놓아야 했다. 흥미를 가질수도 없을 정도로. 차라리 마탑에 들어갈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건 너무 큰 거리라 보류했고. 아우로라가 밖에 나왔을 때 다른 이유가 생긴 것 같기도 했다. 마탑에 틀어박히면 공작님과 카페를 갈 수 없으니까.
"네. 이번 데뷔탕트가 기대 돼요."
소네타도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고, 아우로라는 살갑게 웃으며 솔로몬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는 것 같았지.
"그러니까, 이제, 음...비밀인 곳으로 가요!" "카페를 그렇게 빙 둘러 말해야겠어?" "그렇지만 정말 비밀인 곳이잖아?" "이젠 비밀도 아니잖아."
볼일은 다 끝났냐는 자신의 질문에, 아우로라는 그렇다고 대답한 뒤에, 이번 데뷔탕트가 기대된다고 덧붙였고, 그 옆에 있던 소네타 역시 공감하듯 고갤 끄덕였다. 기대된다라, 솔로몬은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우로라의 살가운 웃음을 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던 아우로라를 가만히 바라보던 솔로몬은, 이윽고 그녀가 카페를 에둘러 이야기하고, 소네타가 그런 아우로라의 이야기에 태클을 거는 것을 들으며 고갤 끄덕였다.
" 그럼 안내를 부탁하겠소. "
황실을 방문하거나, 최고 회의에 참석할 때가 아니면 잘 오지도 않는 수도에, 드레스를 맞추고(물론 본인이 입을 옷은 아니었지만), 드레스를 맞춘 뒤에는 차를 마시기 위해 영애 둘이서만 가기로 했다는 카페로 가게 된다. 지금까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나? 솔로몬은 그런 생각을 하며 안내를 기다린다.
안내를 부탁하다니! 꼭 안내원이 된 기분이다. 그러면, 안내원의 본분을 다해야겠지. 아우로라가 짐짓 당당한 영애처럼 가슴을 쭉 폈다. "저를 따라오시면 돼요!" 라고 말하는 것이,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라고 미리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소네타가 슬쩍 아우로라를 보다 솔로몬을 향해 시선을 옮기더니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제 언니가 솔로몬의 이야기에 갑자기 당당해진게 퍽 신기하다는 듯.
"그러고보니, 공작님께선 커피를 드셔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소네타가 문득 아우로라의 손을 잡고 걷다가 질문을 건넸다. 아우로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는요?
"최근에 커피라는 것도 유통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아카데미에서 한 영애가 선물로 받았는데, 마시면 잠도 깨고 맛도 홍차와는 다른 씁쓸함이라 기이하댔어요." "맞아, 그러고보니 저번에 뮤리엘이 백작부인께서 커피에 맛을 들렸다고 했어."
두 소녀는 고개를 기웃, 하고 기울였다. 공작님은 우리보다 더 많이 있고, 아는 것도 많으니까! 와 같은 느낌이었다.
안내를 부탁한다는 솔로몬의 말에, 아우로라가 가슴을 펴며 그녀를 따라오면 된다고 당당하게 답하는 것을 보자니, 여러 가지로 들떠있는 모양이었다. 아직 공작저에서는 이런 모습을 본 기억이 없는 것 같은데.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소네타가 솔로몬에게 시선을 옮기더니 묘한 감정이 담긴 표정을 짓자, 그는 소네타를 잠시 쳐다보다가 아우로라의 뒷모습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렇게 그냥 조용히 카페까지 갈까 싶었던 찰나, 소네타에게서 커피를 맛본 적이 있냐는 질문이 들려왔고, 아우로라가 고갤 끄덕이는 것을 보니 그녀도 적잖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커피라.
" 언젠가 이방에서 맛본 적이 있는 것 같군, 선물로 받은 영애가 있고, 커피에 맛들린 백작부인이 있다면 제국 내에서도 재배하는 곳이 있을 것이오, 수도에는 꽤 많이 유통되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 "
그렇게 대답하면서 두 사람의 뒤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솔로몬은, 카페에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이 섞인 듯한 소녀들의 대화를 들으며 안내에 따라 방향을 틀었다.
가슴을 쭉 펴고 당당한 모습이, 평소 보이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뭐, 이 성격이나 저 성격이나 다 똑같겠다만은...두 소녀는 이방에서 맛본 적이 있는 것 같다는 말에 두 눈에 기대를 잔뜩 품었다. 역시, 공작님은 다르구나! 하는 생각도 했던 것이고. 도미닉은 커피를 접했으나 본인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멀리하였으니, 두 소녀가 맛보기는 어려웠겠지.
이방에서 커피를 맛본 적이 있는 것 같다는 자신의 말에, 두 소녀의 눈에는 기대가 가득 담긴다. 외지로 돌아다니는 게 제국 안에만 있는 것보다야 재미있었으니 자연스럽게 그는 이방인들과 마주쳤고, 이방의 문화를 다른 귀족들보다 빠르고, 진정성 있게 접할 수 있었으리라. 각설하고, 커피에 대해 두 소녀가 왜 그리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가 하니, 소녀들의 아버지인 도미닉 후작의 입맛에는 영 맞지 않았던 탓에 소녀들은 맛볼 기회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거기다가, 확인차 지난번 카페에 갔을 때에는 보지 못했냐고 물었더니 답과 함께 들려오는 두 소녀의 대화를 들어보자면 아카데미에서 선물을 받을 가능성은 있었으나 주변에서 그 선물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를 않는 것 같다. 듣자하니 지난번에 준 선물도 누군가에게 뺏긴 것 같고.
커피를 한번쯤 맛보게 해야 하나 생각하면서 걸음을 걷던 솔로몬은, 어느새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낸 카페를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곤 묻기 전에 아우로라와 소네타에게서 카페에 대한 부연설명이 들렸다, 케이크가 맛있는 곳이고, 황실에서 일하던 파티시에가 직장을 그만두고 차린 곳이라는 말. 그런데도 유명해지지 않는게 신기하다고 이야기하는 목소리에 주변을 잠시 둘러본다, 이렇게 안내를 받아서야 찾아오는 곳이니 그런 건 아닐까? 아니면 두 사람이 습관적으로 이야기하듯이, 이 곳을 다녀가는 이들이 전부 자신들만의 비밀이라 여기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케이크가 맛있고! 디저트도 화려한 곳! 아우로라는 황실에서 지내는 동안 그런 디저트를 먹은 적이 있지 않을까? 뭐, 있었긴 했다. 그래도 티타임때 엉망인 차를 마신다 해도, 화려한 티푸드는 맛보았으니까. 황제와 함께 저녁식사를 할때도, 늘 좋은 디저트가 나오긴 했고. 그렇지만 그 안에서 살벌한 분위기를 감싸며 먹는 것 보다, 자유롭게 먹는 것이 훨씬 나았으니까.
"맛은 둘째치고, 정말 예쁘기도 하니까." "맞아! 창가에 자리도 있네요? 어서 가요!"
딸랑, 차임벨 소리와 함께 아우로라는 문을 열었다. 벌써부터 단 크림의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고, 기이한 차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아우로라가 처음 맡는 냄새에 고개를 기울였다. 커피 향이었다.
"오늘은 치즈케이크가 남아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네."
다행히 쇼케이스에 여러 케이크가 남아있었고, 각종 디저트도 있었다. 그리고, 커피도 있었고. 두 소녀의 눈이 반짝였다.
지금까지 먹어왔던 음식들을 떠올리며, 오늘 맛보게 될 디저트는 어떤 수준이 될까 생각하던 솔로몬은 두 소녀가 들뜬 채 카페의 문을 열자 들려온 차임벨 소리에 생각을 멈추고 두 소녀를 따라 카페로 들어섰다. 아무튼 여러모로 특이한 광경이었을 터다, 수행원 하나 없이 귀족들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것은. 그래도 아직까진 소란스럽거나 한 일이 생기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문득 코를 간질이는 커피 향기에 시선을 돌렸다.
" 그럼 주문을 해야겠지, 추천할 만한 게 있느냐? "
솔로몬은 쇼케이스를 보고 눈을 반짝이는 아우로라와 소네타에게서 시선을 돌려 직원에게 이야기했다. 자신 있는 디저트 하나쯤은 있으리라 생각한 솔로몬은 답을 기다린다.
아우로라와 소네타가 들어온 것 까지는 괜찮았다. 구석의 영애들은 제각기 수다를 떠느라 바빴고, 영식들은 어째 서로 옹기종기 모여 고백을 해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하듯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다만, 솔로몬이 들어오고나서 잠시 조용해지나 싶더니 다들 목소리를 낮추어 무어라 소근거린다. 대다수 공작이 여긴 어쩐 일인가, 에 대해서였으나 이내 그것도 조용해진 것이었다.
그야..아우로라가 있었으니까. 소문이 사실이구나, 라며 한 영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뜬소문인줄 알았더니 사실이었음에 놀라기라도 했는지 영애는 고개를 휙 돌려 다른 영애와 열정적인 토론을 시작했다. 직원은 솔로몬의 질문에 당황한듯 잠시 어버버거리다,이내 자세를 고쳐잡았다.
"예. 레몬 타르트와 커피입니다. 레몬 타르트는 그렇게 시지 않아 부담없이 드실 수 있고, 커피의 기이한 맛과도 궁합이 좋습니다."
아우로라와 소네타는 레몬 타르트라는 말을 듣고 공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공작님과 레몬 타르트? 라는듯한 표정의 소네타와 함께 공작님도 타르트를 좋아하실까? 라는듯한 아우로라의 표정이 볼만했다.
"..타르트?" "무스 케이크도 좋아하셨는 걸." "...언니가 만들어줬어?" "응." "...나 방금 뭔가 대단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자신이 카페 안에 들어서자 잠시동안 조용해졌던 카페 안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들 작게나마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그는 그런 수군거림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추천할 만한 게 있냐고 물었더니 잠시 당황한 듯 어버버거리던 직원이 정신을 차리고 레몬타르트와 커피를 추천하자 자신에게 꽂히는 두 소녀의 시선을 느낀 그는 직원에게 이야기하며 아우로라에게 시선을 옮겼다.
" 그대로 내오거라, 추천할 만한 실력인지 봐야겠다. "
그리곤 아우로라에게 주문하라는 듯 손짓했다, 같은 걸 먹을 생각이라면 주문할 필요는 없겠으나. 케이크와 디저트의 종류가 다양하니 다른 걸 고르지 않을까.
자신이 주문을 한 뒤, 이어서 소네타와 아우로라가 주문을 마친다. 그럼 이제 금액을 듣고 계산을 하면 될 텐데, 직원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아우로라가 대담하게도 자신이 세 사람의 몫을 내겠다고 이야기하며 자신을 돌아보며 입을 방긋거린 뒤 씨익 미소짓는 것이 보였다.
" 아니, 사양하지, 아우로라 양, 소네타 양, 여기서 기다리지 말고 자리부터 맡아두시오. "
그녀의 입이 움직이는 것으로 무얼 의도하는지는 알았고, 아무 이유 없는 배려같은 게 아니라는 것 역시 짐작하긴 했으나 아무래도 불편한 느낌은 쉽게 지울 수 없었다. 분명 좋은 생각으로 꺼낸 말이겠지만... 이는 자칫 잘못하면 모욕으로까지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그나마 이 곳이 그렇게까지 북적이지 않았거니와 수행원도 없었기에 다행이지, 물론 아우로라였기에 심하게 대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바라본 창 밖은 꽤 생동감 넘쳤다, 사람들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고 가끔씩 마차도 덜거덕대는 소리를 내며 마차 전용 도로를 달린다. 개중에는 꽃을 파는 소년도 있었고, 무언가 비밀스런 볼일이라도 있는 듯 골목길로 향하는 영애들이 있었으며, 서로 팔짱을 껴 애정을 과시하듯 지나다니는 연인들도 있었다. 그렇게 별다른 감흥 없이 창 밖에서 지나가는 풍경들을 보던 솔로몬에게, 소네타로부터 띄워진 운이 아우로라를 통해 화제가 되어 들려온다. 바깥에 보이는 영식 하나가 소문난 바람둥이라는 이야기와, 아우로라가 파혼했다는 걸 알자마자 청혼을 했다는 이야기.
" 그를 붙들어 둘 만한 영애는 없었던 모양이지. "
때맞추어 나온 디저트들과 커피를 내려다본 솔로몬은, 커피잔을 들고 천천히 커피의 향을 맡았다. 잘 구워진 커피콩으로 내렸을까, 일단 향기는 합격점이다. 다음은 맛인데, 과연 이 커피는 너무 달거나 쓰지 않을까? 향과 어우러져 그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그는 잠시 커피를 내려다보다가 찻잔을 입가에 대고 한 모금 입에 머금는다. 따스한 커피가 입 안을 적시며 향기를 발산한다. 커피는 우유가 들어갔는지 부드러웠고, 조금 달았지만 심하지는 않았다.
" 세상에는 아가씨들이 아는 것보다 더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법이오, 내가 그 영식과 개인적인 안면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니 옹호하거나 매도할 생각은 없지만, 자신의 애인을 꽉 붙잡고 사는 것을 좋아하고,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만날 수도 있소. "
그렇게 된다면 정말 남자로서 제 구실을 못 하게 될 수도 있겠지. 라고 소네타의 이야기에 덧붙이며 피식 웃던 솔로몬은, 제 맞은편에 앉은 두 영애가 자신이 커피를 마신 뒤에 두 사람도 마셔 보라 권하고 나서야 자신들 몫의 커피를 마시는 것을 본다. 일단 아우로라는 커피의 향도, 부드럽고 달콤쌉싸름한 맛도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지만 소네타는 영 아닌 모양이었다. 우유를 뺀 걸로 다시 달라고 할까 생각했지만 커피를 많이 마셔서 좋을 것은 없다고 생각했는지 의견을 물어보기로 한다.
그 전에 아우로라가 활짝 웃으며 커피가 홍차처럼 널리 퍼지길 기대하는 듯한 이야기를 하자, 왜 그런 기대를 하는 걸까 싶어 입을 연다.
"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퍼질 테지만, 아우로라 양이라면 원할 때 마실 수 있지 않겠소? 그리고 소네타 양, 우유를 뺀 커피로 다시 주문하겠소? "
자신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음에 들었는지 고갤 주억이는 소네타와, 어찌 됐든 이야기를 이해한 듯 창 밖을 내다보는 아우로라에게서 자신 앞에 놓인 디저트로 시선을 옮긴 솔로몬은, 포크를 들어 타르트 가장자리를 찍고 떼어낸다. 입에 넣기 좋은 크기로 떼어진 타르트를 입 안에 넣고 두어 번 씹으니, 타르트 특유의 달콤한 맛과 함께 레몬의 새콤한 맛이 섞여 새콤달콤한 맛이 입 안으로 퍼져 나갔다. 커피의 씁쓸한 맛과는 방향성이 다른 맛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렇다고 타르트와 우유 섞인 커피가 불협화음을 내는 건 아니어서, 그는 꽤 만족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금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자신은 언제든 커피를 마실 수 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라고 이야기한 아우로라의 말에 천천히 눈을 깜빡인다. 그리고 커피를 새로 주문하겠냐는 자신의 질문에 소네타가 고갤 저으며 괜찮다 이야기하자 그 역시 고갤 끄덕이곤 타르트를 다시 떼어내 입 안에 넣는다.
" 제국의 기후가 어떠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웬만큼 맞지 않는 게 아니라면 적당한 가격으로 유통될 것이니 걱정 마시오, 수요가 늘면 자연스레 공급도 늘어나는 것이니. "
라며 아우로라에게 이야기한 솔로몬은 타르트를 삼키고 잔에 담긴 커피를 휘휘 저었다. 우유가 섞인 탓에 거품이 조금씩 이는 커피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은 여느 때와는 조금 다른, 이완된 느낌을 풍긴다.
제국의 기후가 어떠냐에 따라 다르다라. 아우로라는 마탑의 마법사들을 떠올린다. 그들이 모여서 여러 주문을 결합한다면 맛있는 커피를 재배할 수 있지 않을까? 다른 마법사들도 커피를 맛보면 좋아할지도 모르는데. 음, 싫어할까? 잠이 안온다고 하니까 획기적일 것 같긴 한데....다들 잠도 아깝다면서 연구에 몰두하니까. 아우로라가 눈을 깜빡였다. 솔로몬이 커피를 젓는 것은 둘째치고, 그의 얼굴이 이완된 느낌이 들었으니까.
"그렇겠죠? 그러면 좋겠어요."
맛보지 못한 사람도 쉽게 맛볼 수 있음 좋을테니까. 아우로라가 따뜻한 커피를 다시금 목 뒤로 넘긴다. 홍차와는 다른 씁쓸한 맛이 입안을 맴돌았다. 이윽고 아우로라는 환히 미소를 지었고, 잔을 내려놓으며 솔로몬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같이 나오니까 기뻐요."
앞으로도 같이 자주 나온다면 좋을텐데. 아우로라는 그리 말하며 눈을 휘었다. 소네타는 그 장면을 보며 무얼 했냐면, 글쎄다.
좋을 때다.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던가...?
// 으악 늦어서 미안해~! 슬슬 마무리 짓구 다음 상황으로 넘어갈까...? (는 소재가 없ㅇ음,...)
아우로라, 소네타와 함께한 수도 방문 이후, 공작저로 돌아온 솔로몬은 별일 없이 조용한 나날이 이어졌다. 제국 내에서 아무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공작인 그에게까지 굳이 전달될 정도인 일은 없었던 모양이고, 어쩌면 조금 심심하고 지루한 나날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공작저를 관리하고, 아우로라가 불편하지 않도록 신경을 써주는 시간을 보내면서 지내던 솔로몬에게, 황실로부터 서신이 날아들었다. 서신을 집무실의 책상에 올려두고 펼쳐 천천히 읽어내려간 솔로몬은, 피식 하고 입가에 미소를 띄운다.
" 하기사, 때가 되었지. "
솔로몬은 서신을 고이 접어두고 집무실을 나선다.
-
솔로몬이 서신을 받고 나서 얼마 뒤, 공작저 안은 어쩐지 평소보다 분주하다, 플라우로스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고, 그런 그의 말에 따라 사용인들은 바삐 움직인다. 청소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무언가 준비하는 것 같기도 한 그 움직임들은 즐겁거나 들떠 있지는 않았고, 오히려 조금 심각해 보인다. 그렇지만 아우로라가 있는 쪽은 평상시와 크게 다를 바 없었는데, 꼭 아우로라와는 관계 없는 일이라는 걸 이야기해주는 듯했다.
//얍! 너무 늦었네 ㅠㅠ미안해! 답레가 어떻게 해야할지 어려우면 오세나 아이니같은 아이들이랑 같이 있다거나 그렇게 해도 돼! 꼭 내가 뭘 해야만 성립되는 건 아니니까!
수도 탐방 이후, 드레스의 정확한 디자인이 정해질 만큼 시간이 지났다. 아우로라는 드레스의 디자인을 담은 편지를 보았고, 그 이후엔 늘 같은 일상이었다. 편지를 보내고, 사용인들과 나날을 보내는. 가끔 소네타에게 안부 편지가 오기도 하고, 마탑에서 하고있는 연구에 대한 편지도 오고. 이종족에 관한 연구 자료가 너무 흥미로워서 아우로라가 방에 틀어박힌 것을 빼면, 평범하다면 평범한 일상이 지속되었다.
그런 평범함이 얼마나 되었다고. 공작저 안은 평소보다 더 분주한 듯 싶어 아우로라는 눈을 깜빡이며 오세와 아이니를 번갈아 쳐다보고, 다시금 앞을 바라보았다. 공작저 안에서 무슨 파티라도 하는 걸까? 하기엔 즐겁거나 들떠있지 않았다. 심각해보인다고 해야할까, 그렇지만 그 분위기는 자신에게 닿지 않았다. 말 그대로, 심각하고 분주한 장면을 바라만 보는 입장이 되었다. 수도에서 가끔 일어나는 사건을 바라보며 지나치는 느낌. 자신의 일상은 너무나도 평화롭고 그대로였다는 것이,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오세, 아이니. 다들 어째서 이렇게 바쁜 건지 둘은 알고 있나요?"
아우로라는 오세와 아이니에게 질문했다. 다른 것 보다, 오세와 아이니는 이 상황에 대해 잘 알지 않을까 싶어 물어보는 것이었다. 자신은 공작저에 얼마 있지 않았지만, 둘은 이 일이 무엇인지는 얼추 알고 있지 않을까? 만약 모른다면...공작님을 찾아가 보는 것도 좋겠지. 아우로라가 솔로몬을 떠올린다. 그러고보니 최근엔 식사시간을 제외하곤 거의 만나지 못한 것 같다. 아우로라가 틀어박혀 있어서 그랬나?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용인들과는 달리, 오세와 아이니는 아우로라의 말동무를 해 주거나, 아우로라의 시중을 들었기에 여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두 아이에게 아우로라가 다들 어째서 바쁘게 움직이는지를 질문하자, 아이니는 조금 고민하다가 오세에게 고갤 끄덕였고, 오세는 아이니가 고갤 끄덕이자 눈을 깜빡이며 입을 열었다.
" 올해 대토벌이 조금 앞당겨졌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최근 들어서 마물이 나타나는 일이 늘어났다고 하더라고요. " " 사실 대토벌은 정기적이라서 천천히 준비해왔는데... 갑작스럽게 결정된 거라서 다들 바쁜 것 같아요. "
대토벌, 처음엔 제국 내에서 발생하는 마물들로부터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제국의 구성원들이 모여 마물을 몰아내는 것을 의미했으나. 마물의 출현 빈도가 눈에 띄게 줄고,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닌 개발되지 않은 곳에서나 마물이 간간히 보인 뒤엔 오히려 제국에서 먼저 그 마물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평원이나 숲 속으로 들어가 대대적으로 마물을 없애는 일이 되었다. 대토벌 전후 대토벌에 참여한 이들을 위로하는 연회가 열리는 등, 이제는 연례행사 쯤으로 여겨지는 대토벌이 급작스럽게 소집된 것이다.
" 뭐 이쪽 주변에는 마물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까요, 공작님이 계시는데 어떤 게 감히 오겠어요? " " 사실 가끔씩 공작님이 외출하는 게 주변에 어슬렁거리는 마물들을 치우러 가시는 거라고 들었어요, 여기는 아무래도 자연에 가깝고 마나가 농후하니까 공작님께서 출타하시는 동안에는 좀 위험해지거든요...그래서 다들 공작저레 마물이 들어오거나 하는 걸 막으려고 준비하는 것도 있어요. "
오세의 말에 아이니가 부연설명을 덧붙이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사용인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우로라는 대토벌이라는 이야기에 두 눈을 크게 깜빡였다. 대토벌이 앞당겨지는 일은 흔치 않거니와, 마물이 나타나는 일이 늘어났다는 소식은 좋은 소식도 아니었으니까. 스노우디아의 눈표범 기사단은 이번에도 대토벌에 참여하겠지, 비록 귀족들을 먼저 생각한다고 할지언정 마물은 황제파고 귀족파고 할 것 없이 누구나 앞장서서 토벌을 하곤 했으니까.
"이쪽 주변에는 마물이 없었군요. 공작님께서 그만큼 강력하시다는 말씀이겠죠?"
마물은 앞뒤 가리지 않고 공격을 자행하나, 자신보다 월등히 위에 있는 존재에겐 굴복하는 몇 마물도 있다고 들었다. 아우로라는 이어지는 이야기에 눈을 깜빡였다. 주변에 어슬렁거리는 마물을 치운다는 발언이 꼭 쓰레기를 버린다는 것 처럼 평온한 것도 있거니와, 공작님께서 출타하시는 동안 마물이 들어오거나 하는 걸 막으려고 준비한다는 말도 있었으니까.
자신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아우로라의 손길에 기분이 좋은 듯 방긋 미소지은 오세와 아이니는 아우로라가 뭔가 도울 일은 없냐고 이야기하자 어떤 게 있을까 곰곰히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렇지만 쉽게 답이 나올리 만무, 두 아이는 공작저 내에서 이것저것 결정할 위치가 아니었으니까, 거기다가 대토벌령은 어디까지나 솔로몬에게 내려온 것이지, 아우로라나 공작저의 다른 사람들에게 내려온 게 아니었다. 그렇게 한참을 곰곰히 생각하던 오세가 뭔가 떠오른 듯 아이니에게 속닥였고, 아이니는 눈을 깜빡이며 고갤 끄덕였다.
" 대토벌 때 따라가는 수행원들이 있는데, 누가 갈지는 전적으로 공작님의 결정에 달려있어요, 혹시 대토벌에 따라가 보시는 건 어떨까요? 마물의 소굴로 들어가는 거나 다름없긴 하지만 그만큼 제국의 병력들도 많이 투입되니까, 안전할거라고 생각해요, 뭣보다 공작님이랑 같이 다니실 거고... " " 공작님께서 허락하실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아가씨가 흥미가 있으시면 한번쯤 이야기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거라고 생각해요. "
공작님에게 비할 마물이 없다는 말에 아우로라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면 꼭 공작님께서 마물들의 왕 같잖아요." 라며 둘을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본 아우로라는 두 아이의 이야기를 가만히 기다린다. 도울 일이 없다면...글쎄, 어떻게 해야할까. 도움이 되고 싶은데. ...행운의 자수라도 해서 손수건에 무사를 빌어야 할까?
"대토벌에요..?"
아우로라는 눈을 크게 떴다. 대토벌에 따라가도 괜찮은걸까? 아우로라가 잠시 마물을 떠올린다. 가둠. 아우로라의 머리를 스쳐지나간 마물이 하나 생각났다. 그것은 아직도 아우로라를 슬금슬금 건드리듯 꿈에서 나오곤 했는데...
이참에 쓸어버리면 좋겠네. 응.
"좋은 생각이네요. 오세, 아이니. 만약 둘이 수행원으로 따라가면 공작님께서 허락을 해주지 않겠지요....?"
같이 가고 싶다고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스노우디아의 눈표범 기사단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아우로라의 두 눈동자가 기대에 가득 차고있었다.
둘의 순수한 점이 퍽 귀여운 것인지라, 아우로라는 쿡쿡 소리내어 웃으며 둘을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들이 존재하니 대토벌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오늘이 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제가 노력해볼테니, 같이 갈 수 있도록 해봐요."
아우로라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대토벌의 수행은 토벌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진 않지만, 가끔 귀한 가문의 자제나 아카데미의 장학생들이 수행, 혹은 보조를 위해 참석하며 인재의 초석을 꽃피우기도 하는 의미를 가진 자리이기도 했으니까. 그런 자리였기에 다양한 인종이 모여있는 아카데미의 인재들로 인해, 이종족에 대한 처우도 약간이나마 좋아지긴 했고. 만약 둘을 데려간다면 이종족에 대한 시선이 더욱 곱게 변하지 않을까.
두 아이는 아우로라가 솔로몬에게 대토벌 수행 관련으로 이야기를 하러 가보자고 말하자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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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로라와 두 아이가 공작의 집무실로 향하는 동안,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용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까 전부터 보았듯 단순히 청소를 하는 이들부터, 무기를 닦고 갑옷을 살피는 이들도 있는가 하면 공작저에 크게 난 창문들에 석궁 등을 가져다 놓는 모습도 보인다. 아무래도 오세와 아이니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솔로몬이 공작저에 머물지 않을 때 공작저 주변에 모여들지도 모르는 마물을 상대할 준비를 하는 모양. 그 즈음 솔로몬은 사용인들의 시중을 받아가며 닦은 검에 자신을 비춰 보는 등,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집무실로 향하는 동안 보인 광경은 다양했다. 늘 그렇듯 청소를 하는 사람, 무기를 닦고 갑옷을 살피는 사람, 크게 난 창문에 석궁을 가져다 놓는 사람까지...이렇게나 다양하게 준비를 할 줄은 몰랐다. 스노우디아도 가끔 마물이 나타나지만, 추위에 약해진 개체거나 근처의 마탑에 있는 마법사들 때문에 좋은 연구거리가 되곤 하지만, 여기는 아닐테니까.
아우로라는 눈을 커다랗게 깜빡였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공작저 사람들에게 벌써 정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다치거나 죽는다면 정말 슬플 것이고. 마물이 아예 안온다면 더 좋을텐데. 아우로라의 눈썹이 강아지마냥 잠시 축 처졌다. 뭐, 그것도 잠시였지만.
아우로라가 집무실의 문에 노크하자, 나가보라는 솔로몬의 목소리와 함께 집무실의 문이 안에서 열린다. 천천히 벌어지는 문틈 사이로 보이는 것은 사용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대토벌 준비를 하는 공작의 모습이었다, 문을 연 것도 공작의 시중을 들던 사용인 중 한 명인 듯, 아우로라를 본 사용인은 고갤 숙여 그녀를 맞았고, 오세와 아이니는 아우로라의 뒤에서 빼꼼 집무실 안을 들여다본다.
" 아우로라 아가씨, 죄송하지만 지금 공작님은 토벌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하실 말씀이 무엇인지 알려주시면... "
하고 조심스레 이야기하는 사용인 뒤, 솔로몬은 문 너머로 보이는 아우로라와, 쌍둥이 토끼 수인을 보곤 입을 열었다.
" 됐다, 들여보내거라, 그리고... 나머지는 너희 손을 빌리지 않아도 괜찮으니 이만 나가봐도 좋다. "
솔로몬의 이야기에 사용인들은 고갤 숙여 그의 이야기에 반응한 뒤, 아우로라에게 인사하며 방을 차례대로 나선다. 집무실 안은 평상시보다는 복잡한 것이, 용기사들이 입는 갑옷이 걸쳐져 있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 갑옷에 기대 있는 검과 방패, 바로 처리해야 할 서류들 등이 보인다. 솔로몬은 투구를 갑옷걸이에 씌우며 아우로라를 돌아보고 입을 열었다.
" 좀 소란스럽지? 아우로라 양과는 별 상관 없는 일이긴 하지만 신경이 쓰이겠군 그래, 무슨 일로 왔소? 그 아이들까지 데리고. "
사용인이 대신 문을 열었나보다. 아우로라는 눈을 휘어 웃으며 사용인을 바라보았다. 토벌 준비를 하고 있어 바쁘니 축객령을 대신 내리려는 걸까. 아우로라는 떠나야 하는 걸까, 하고 생각하다가도 공작이 되려 사용인들에게 축객령을 내리자 방 안에 들어왔고, 오세와 아이니도 들여보냈다.
"오늘따라 많이 바쁘신 것 같아요."
아우로라는 짤막한 안부 겸 농담을 건네고, 주변을 살포시 둘러보았다. 확실히 예전보다 많이 여유로워진 모습이었다. 이젠 두려워하지도 않고, 많이 적응한듯한 모습. 투구도 보이고, 갑옷도 보이고...그러고보니 그때 자신을 데려다준 기사님도 대토벌에 참여하실까? 그러면 감사인사를 드려야지.
자신에게 안부 겸 농담을 건네는 아우로라에게 수긍하듯 고갤 끄덕이며 이야기한 솔로몬은 그녀의 태도가 확실히 여유로워진 것을 느끼며 그녀가 무슨 용건으로 왔을까 싶어 말을 기다린다. 그리고 자신의 물음에 아이들이 장난스레 흘린 웃음소리를 듣고 결심이 선 듯, 아우로라가 어깨를 펴며 자신을 부르자 의아한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니.
-저희요, 대토벌의 수행원으로 따라가고 싶어요!
라는 말이 들렸다. 그런 말을 하는 아우로라의 표정이나 몸짓을 보자면 예전보다 당당함이 보였고...그래, 패기도 어느 정도 녹아들어 있었다. 솔로몬은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아우로라와 두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트라우마 극복이라는 게 말처럼 쉽게 되는 게 아니었으니. 물론 지난번 꿈에서 그녀가 가둠을 물리치도록 도움을 준 것으로, 그녀는 더 이상 가둠에게 큰 공포를 가지지 않게 된 모양이었지만...어디까지나 꿈 이야기.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한낱 마물이 아닐 터다. 그럼에도 활짝 웃으며 자신을 수행원으로 데려가달라고 이런저런 이유를 대는 아우로라에게 솔로몬은 단호한 거절 대신 괜찮겠냐 물었다.
그리곤 아우로라가 말꼬리를 늘이면서 눈꼬리를 내리며 간절한 눈빛을 보내자, 팔짱을 낀 채 지긋이 그녀를 바라보던 솔로몬이 입을 열었다.
" 그 아이들도 어느 정도 마법은 쓸 줄 아오, 몸 쓰는 것은 어쩌면 아우로라 양보다 나을지도 모르지,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오. "
멋쩍게 웃는 아우로라에게 미리 걱정하지는 말라는 듯이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허락에 아우로라가 눈을 반짝이며 쌍둥이에게 웃어보이는 것을 본 솔로몬은, 이어서 그녀가 절대 말썽피우지 않겠다고 들뜬 듯이 이야기하자 말없이 고갤 끄덕인다. 오세와 아이니는 아우로라가 허락을 받아내자 그녀처럼 눈을 반짝이며 기대감에 부푼 표정으로 솔로몬에게 고개 숙여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한다. 솔로몬은 쌍둥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아우로라에게 시선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 그럼 어서 준비하시오, 출발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
준비는 사용인들이 도와줄 거라며 아우로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그는, 이제 준비하러 가보라며 손짓하곤 몸을 돌렸다. 너무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는 게 아닌가 싶기는 했지만, 원하는 게 있다면 최대한 들어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있었고, 그들만 대토벌에 보내는 게 아닌, 자신과 자신이 거느린 기사들도 함께 하는 것이었으므로 별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하면서.
" 준비가 끝나면 중앙 홀로 오시오, 아마 그 즈음이면 대평원에 마탑의 마법사들이 진을 펼쳐놓았겠지, 그 곳으로 바로 이동할 것이오. "
지킬 수 있겠다. 아우로라가 솔로몬의 말에 눈을 조심스럽게 접어 미소를 지어보였다. 괜찮을것이다. 절대 나쁜 사건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아우로라는 오세와 아이니가 기대감에 부푼 표정을 보며 뿌듯한 표정을 짓더니,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준비할게요!"
뭐랄까, 챙길 것이 많을 것 같긴 했지만, 몇개는 마법으로 불러내면 될 거야! 라고 생각했는지 아우로라의 주변에 미세하게 마나가 일렁이는 것 같았다. 사용인들도 도와줄거고...또...음, 음!
"알겠어요!"
아우로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세와 아이니를 대동하고 집무실 밖으로 나섰고, 둘에게도 "준비를 하자구요. 잊는 것이 없도록 해요." 라면서 활짝 웃어보였다. 중앙 홀, 오랜만에 듣는 마탑의 마법사들. 아우로라가 준비를 위해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부지런히 이것저것을 챙기던 도중. 아우로라는 생각했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있다면 안전하겠지? 음, 조금 괴짜긴 해도 말은 잘 들으니까. 거기다가 마법도 잘 쓰고! 으으음.. 아우로라가 문득 고개를 들어 눈을 깜빡였다. 손목에 낡은 팔찌가 제대로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좋아, 확인 완료.
준비가 끝나면 중앙 홀로 오라는 자신의 말에, 아우로라는 쌍둥이를 데리고 집무실을 나섰다. 문 바깥에서 두 아이에게 준비하자며 당부하는 말이 새어들어오고, 솔로몬은 집무실 문이 닫히자 방금 투구를 걸어놓은 걸이대로 시선을 옮겼다. 은백색의, 윤기가 흐르는 듯한 갑옷이 그의 시선에 들어온다, 용기사들의 장으로서 착용하는 갑옷을 보며 솔로몬은 책상 위에 놓인 서류들을 마저 정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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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로라를 따라 집무실 바깥으로 나온 오세와 아이니는 아우로라가 준비하자고 이야기하자 고갤 끄덕이곤 함께 어디론가 달려간다. 아무래도 본인들의 방을 찾아서 돌아갔겠지, 그리고 아우로라가 준비를 다 끝낸 즈음, 다시 모습을 드러낸 쌍둥이의 모습은 썩 볼만했다, 수행원이라는 직책에 걸맞은 옷차림일까?에 대해서는 조금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아이들이라는 특성을 떠올려 보면 충분히 단정하면서도 필요한 건 갖춘 모양새. 오세는 흰 깃털이 달린 푸른 빛의 모자를 썼고, 똑같이 깔맞춤 한 짧은 망토를 어깨에 걸쳤다, 반면 아이니는 붉은 색감의 옷차림으로 전체적인 구성은 오세와 비슷했으나, 좀 더 얌전해 보이는 인상이다.
준비를 끝마친 아우로라는 꽤 간편한 차림을 한 모습이었다. 평소와 달리 머리를 위로 질끈 묶어올렸고, 드레스가 아니라 기사 제복에 가까운 옷을 입고 있었다. 숄이 달린 긴 망토와, 무릎까지 올라오는 부츠까지. 플레이트 아머를 입지 않았을 뿐이지, 궁에서 돌아다니는 기사라도 해도 믿을 정도였다. 허리춤엔 검이 없었지만.
"세상에, 정말 귀여워요."
오세와 아이니를 바라본 아우로라의 뺨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아이들이라는 특성을 떠올리면 단정했고, 큰 가방을 든 그 귀여운 모습 때문인지 평소보다 몇 배는 귀여웠다. 아우로라는 둘을 품에 가득 안고싶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둘의 옷 매무새가 흐트러질까 다음에 안는 것이 좋겠다고 떠올렸다.
자신들에게 귀엽다고 이야기해주는 아우로라를 보며 오세는 눈을 반짝였고, 아이니는 볼을 발그레 붉히며 눈을 깜빡인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본 적 없던 그녀의 기사 제복과 비슷한 옷차림이었고, 그녀는 아름다웠으니까.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지체할 시간이 없었으니 두 아이는 아우로라와 함께 중앙 홀로 향했다. 그리고 중앙 홀로 나아가자니. 함께 수도로 외출한 날처럼 공작저 내의 사용인들이 중앙 홀에 모여있었고. 그들 가운데에는 평상시의 긴 검정색 법복이 아닌, 용기사들의 문장인 은빛 용 문장이 왼쪽 가슴께에 수놓아진 조끼, 그 위에 조끼 형태의 은빛 흉갑을 걸쳤다. 왼쪽 어깨에는 은빛 견갑이 무릎께까지 오는 붉은 안감의 망토를 고정하고 있었고, 손에는 흰 장갑을 낀 채 상아빛의 지팡이를 쥐고 있었으며, 편한 움직임을 위해 무릎까지 오는 부츠를 신고 있었다.
사용인들에게 무어라 이야기를 하던 솔로몬은, 시야에 아우로라와 쌍둥이가 들어오자 이야기를 끝내곤 아우로라를 보며 이야기를 꺼낸다.
" 잘 어울리는군, 좋은 선택이오, 움직일 일이 어찌 되었든 생길 테니 편한 옷이 바람직하지, 너희 둘도 잘 차려입었구나, 가방엔 뭘 담았는지 묻지 않아도 되겠지? "
라는 이야기에 쌍둥이는 걱정하실 필요 없다며 웃어보였다. 솔로몬은 고갤 끄덕이며 아우로라에게 흰 장갑을 낀 손을 내민다.
" 자, 이제 출발하겠소, 진을 통해 이동해 본 적은 있소? "
없다면 눈을 감아도 좋소.
" 멀미할 지도 모르니! "
라고 이야기하며 솔로몬은 지팡이로 바닥을 쿵 찍었고, 동시에 바닥에 생긴 이동진이 에메랄드빛을 내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동진 주변의 사용인들이 그들을 배웅하는 모습이 점차 흐려져 가고, 몸이 붕 뜨는 듯한 감각과 함께 주변의 마나가 짙어지며 격렬하게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그렇게 마나의 격류에 휩쓸리는가 싶을 즈음, 솔로몬은 아우로라를 안심시키려는 듯 쥔 손에 힘을 주었고, 쌍둥이는 그런 그와 아우로라에게 찰싹 붙은 뒤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나의 흐름이 부드러워지더니, 솔로몬의 마나가 아닌 다른 이들의 마나가 섞이기 시작한다, 한두 명이 아닌 여럿의 마나가 섞이는가 싶던 찰나, 다시금 솔로몬의 마나가 짙어지며 순식간에 마나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리곤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를 바람과 함께 풀내음이 코를 간질이는데... (눈을 감았다면)천천히 눈을 떠 보니 바닥에 그려진 이동진과, 그 주변에 선 마법사들, 그리고 그들이 모여 선 원을 조금 떨어진 채 둘러싼 기사들과 사냥꾼들의 모습이 보였고. 조금만 더 시선을 멀리 돌려보자니...드넓은 평원과 그 끝에 우거진 숲이 보인다.
아우로라는 마찬가지로 볼을 발그레 붉혔다. 귀여운 두 아이에게서 듣는 칭찬은 낯설었다. 멋있다니. 예쁘다는 말은 사교계에서 들어왔지만 멋지다는 말은 또 처음이었다.
중앙 홀에 도착하자 수도로 외출한 날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도 이렇게 사용인들이 모여있었는데. 그렇지만 분위기는 평소와 달랐다. 아우로라는 솔로몬을 가만히 바라보다 활짝 미소를 지었다. 검은 법복과는 다른 옷차림이 낯설었지만 그만큼 멋있었으니까.
"공작님도 오늘 굉장히 멋있으세요."
아우로라는 그가 흰 장갑을 낀 손을 내밀자,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진을 통해 이동해 본 적이 있냐, 라...아우로라가 고개를 저었다. 먼 거리를 이동할때는 멀미가 나는 마법보단 차라리 마차가 편했다.
"눈을..요?"
그리고, 마법진이 발동되며 사용인들이 자신들을 배웅하는 모습이 흐려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짙어지며 격렬한 마나의 흐름이 곱게 자란 아가씨에게 익숙치 않았는지 아우로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솔로몬의 손은 단단했기 때문에 아우로라는 그래도 휩쓸려가진 않겠다고 안심하는 듯 싶었고, 자신에게 찰싹 붙은 아이를 다른 팔로 감쌌다.
팔로 감싸기도 잠시, 마나의 흐름이 금세 부드러워지더니 다른 사람들의 마나가 섞이는 듯 싶었다. 부자연스러운 조화와 함께 마나가 다시금 짙어지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느낌이 들며 바람과 풀내음이 코를 간질이자 아우로라가 눈꺼풀을 천천히 들었다.
"와...!"
대평원일까? 바닥의 이동진도, 마법사들도, 기사들과 사냥꾼도 모두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기대감 섞인 탄성에 아우로라는 잠시 몸을 움찔 떨었고, 이내 주변을 다시금 둘러보았다. 한 마법사가 아우로라에게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아우로라가 마탑에 가면 늘 반겨주던 마법사였다. 아우로라도 가볍게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아직 스노우디아의 기사단은 도착하지 않은 걸까? 아우로라가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탄성에 아우로라가 움찔하자, 그녀의 손을 꼭 쥐어준 솔로몬은 자신에게 딱 붙어있는 오세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러자 잠시 멍한 표정이었던 오세가 정신을 차리곤 가방에서 뭔갈 꺼내려는 듯 뒤적인다.
그리고 오세가 가방을 뒤지는 동안, 아이니도 정신을 차리고 주변에 선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솔로몬은 아우로라가 하는 말을 듣고 정면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 자, 이제 기사들이 기다리는 주둔지로 가지, 길은 오세가 열어줄 것이오. "
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세는 가방에서 무언가 꺼내더니 하늘로 띄워올렸다. 뭘 띄운 걸까? 하고 자세히 보면, 마정석이 박힌 새 모양의 장치인 게 보이는데...어디에 쓰는 장치일까 싶은 찰나.
오세의 손에는 방금 전 띄운 장치와는 다른 둥근 장치 하나가 더 쥐어져 있었고, 오세가 그 장치를 톡톡 두드리자 하늘에 뜬 장치에서 그 소리가 증폭되어 퍼진다.
[ 앗, 됐다... 그러니까...공작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이제 주둔지로 이동할 테니 길을 터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아직 도착하지 않은 기사단과 사냥꾼들이 도착하는 대로 토벌 회의를 시작한다고 하니 공작님의 군영으로 단장님들을 포함한 지도자분들, 꼭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그렇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오세의 곁에 선 아이니가 무어라 속닥이는 것으로 봐서, 아이니의 도움을 받아가며 이야기를 한 모양. 아무튼 이야기 전달이 끝나자 그에 반응하듯 그들 주변의 인파가 갈라져 길을 만들었고, 솔로몬은 쌍둥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공작님은 역시 공작님인가보다. 사람들의 이목이 순식간에 집중되는 것도 그렇고. 아우로라는 솔로몬의 손에 진정하는 듯 싶었다. 아이니와 오세도 곧 옷매무새를 다듬거나 가방을 뒤지는 등 본래의 임무에 집중했고.
"주둔지로요?"
오세가? 아우로라는 오세의 행동을 바라보았다. 마정석이 박힌 새 모양의 장치, 그리고 아우로라는 다른 장치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마도구다! 아, 목소리를 키우는 장치인걸까? 아우로라가 오세의 말솜씨에 미소를 짓기도 찰나였다. 아이니의 도움을 받아가는 것 같았으니. 아우로라가 소리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수고 많았어요, 오세, 아이니."
아우로라는 솔로몬을 따라가려 했다. 그리고, 한 마법사가 아우로라를 향해 자신의 마나로 만든 작은 새를 날려보냈다. 아까 아우로라에게 손을 흔들어준 마법사였다. 아우로라가 손가락 위에 새를 올리며 귀를 기울이는 듯 싶더니 살풋 미소를 지었다.
솔로몬과 아우로라, 그리고 쌍둥이는 사람들이 터준 길을 따라 걸었다. 얼만큼 걸었을까, 저만치 앞에 희백색의 천막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 보인다, 아무래도 주둔지인 모양. 각 천막에는 해당 기사단의 군영임을 나타내는, 기사단의 상징이 수놓아진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고, 그 천막을 호위하는 기사들이 오와 열을 맞춰 서 있거나 불을 피우고 있었다, 귀족이 자신의 사병을 이끌고 온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런 제국의 기사들이 지내는 군영 앞에, 갈색의 천막들 역시 보였는데, 이렇다 할 깃발이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 기사나 귀족의 천막은 아닌 것 같았다.
" 저쪽은 사냥꾼들이 머무르는 곳이오, 마물을 잡는 데에는 사냥꾼이 기사들보다 나을지도 모르지, 제국에서 이것저것 지원을 하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기사들보다 대우가 덜한 것도 사실이오. "
저 천막들도 사냥꾼들 개개인이 사냥을 나설 때 사용하던 것을 그대로 가져와 쓰는거라고 덧붙인 솔로몬은, 어느 새 자신 가까이 와 있는 용기병을 보자 발걸음을 멈췄다. 다른 기사들과 달리 전신무장을 해 살갗이 드러나지 않는 모습을 한 용기병은 솔로몬과 아우로라에게 고개 숙여 예를 표하고, 그들의 뒤에 따라붙는다. 솔로몬은 말없이 그 용기병에게서 시선을 옮겼고, 멈췄던 발걸음을 재촉해 한 천막 앞으로 나아간다, 그 천막에는 솔로몬의 문장이 수놓아진 깃발이 바람 따라 펄럭이고 있었다. 천막 입구에 선 용기병이 솔로몬과 아우로라를 보고 예를 갖추자, 솔로몬이 이야기했다.
" 얼마 뒤면 다들 이 곳을 올 것이다, 해당 기사단이나 귀족가의 문장을 지니지 않은 자는 들여보내지 말거라, 사냥꾼은 허가증을 확인하고 들여보내도록. " " 알겠습니다, 공작님. "
솔로몬은 고갤 끄덕이곤 천막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천막 내부는 바깥에서 보던 것보다 넓어서, 한눈에 봐도 확장 마법을 통해 공간을 넓혀 놓았음을 알 수 있었다, 바닥 역시 입구 쪽만 흙바닥일 뿐, 좀 더 들어서니 카펫이 깔려 깔끔했다. 솔로몬은 간소화된 응접실같이 생긴 곳으로 걸어가 망토를 벗어 걸이대에 걸어두곤, 완전무장한 용기병에게 손짓했고, 용기병은 오세와 아이니, 아우로라가 앉을 의자를 가져왔다.
" 군영에 들어왔으니 좀 앉으시오, 어차피 토벌까진 시간이 남았고, 그렇다면 쉬는 게 좋겠지, 불편한 점은 없소? "
솔로몬을 따라 걷자니 새하얀 천막이 늘어서있었다. 아우로라는 각 기사단의 상징이 수놓아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저건 알폰스 남작의 사병인가보다. 알폰스 가문의 상징이 펄럭이는 걸 보니 그렇겠지.
앗, 눈표범 기사단이다. 아우로라는 불을 피우다 자신을 알아보는 기사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우리 아가씨다! 우리 아가씨야! 뭐, 그런 표정과 기세였지만. 아우로라가 멋쩍게 웃었다. 어릴때부터 저러셨지.
"사냥꾼이요? 외로울 것 같아요."
아우로라는 약간 슬픈 표정을 지었다. 마수에게서 사람들을 지켜주니 기사들처럼 대우를 받을 법 한데. 아우로라는 전신무장을 한 용기병을 바라보았고, 미소를 가볍게 지어보였다. 천막으로 들어가기 전, 솔로몬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듣고.
아, 그렇구나. 이 순간을 노리고 중요한 사람을 암살할수도 있으니까. 아우로라는 천막 내부로 들어가자마자 짐작햇다. 여기, 마법을 써서 넓혔구나. 거기다 깔끔해. 마법을 이렇게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또 오랜만인지 아우로라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끝없는 학구열과 호기심이 낳은 가문의 영애다웠다.
"불편한 점이요? 음...없어요!"
아우로라는 활짝 웃었다. 그리고 손바닥에 다시금 날아들어온 새를 귀여워해주며 입술을 가볍게 오물거렸다.
" 제국은 기사단이 꽤 많으니 말이오, 아카데미란 곳이 있으니 자연스레 제국을 위한 인재를 길러내게 되는 것이고, 그 인재들은 제국의 녹을 받으며 봉사하니. "
크고 작은 일에 동원되기도 했으므로, 제국에서 자연스레 기사들을 포함한 관리들의 대우는 좋은 편이었다. 반면 사냥꾼을 비롯한, 개개인이 의뢰를 받아가며 그 의뢰금이나 보상금으로 삶을 이어가는 이들은 제국의 기사들에 비해 대우가 나쁜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제국의 입장에서 그들은 아카데미에 입학하거나, 따로 등용되지 못하고 자신들의 삶에 타협점을 찾은 이들일 뿐이었으니까. 그들의 활동을 규제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상황이었다.
" 고될 수밖에, 목숨을 잃으면 그들의 식솔에겐 남는 것도 없겠지. "
솔로몬은 사냥꾼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입을 열어 조용히 덧붙인다.
" ...그러나 사냥꾼에게는 기사들 이상의 노련함이 있고, 전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가족들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사냥을 시작한 이들도 있을 테지, 그런 이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면 웬만한 기사단 못지 않은 세력을 구축할 수도 있을 것이오. "
말을 끝낸 솔로몬은 손깍지를 껴 무릎 위에 올리며, 불편한 점은 없냐는 자신의 질문에 없다고 답하며 활짝 웃는 아우로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바닥에 새 한 마리가 날아들어오자, 그 새로부터 전달받은 이야기인지 아카데미 실습조에 대한 말을 하자 깍지 낀 손의 엄지를 들었다가 다시 돌려놓으며 이야기했다.
" 아카데미에서 볼 수 있는 마수는 대부분 삽화거나, 마법으로 형상만 나타낸 게 전부지 않소, 가끔가다 실물을 볼 수도 있겠지만 한없이 약해진 상태이겠지, 마수는 마력이 엉겨붙은 덩어리이기도 하니, 마법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다면 무서워하지 않을 수도 있소, 과연 눈앞에 마수가 서 있어도 공포를 느끼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마수에 대한 공포는 아우로라 양이 잘 알고 있지 않소? "
제아무리 재능 있는 마법사라도 갑자기 들이닥친 상황에는 당황할 것이고, 당황하게 되면 제대로 된 마법을 쓸 수가 없으니, 자신의 마법이 마수에게 통하지 않는다면 공포에 휩싸일 게 분명하다. 그런 점이 노련한 마법사와 아닌 마법사를 나눈다고 생각한 솔로몬은 깍지 낀 손의 엄지를 마주 비비며 이야기했다.
" 이제 곧 귀족들과 지휘자들이 모여들 텐데, 괜찮겠소? 그들이 아우로라 양을 보고 무슨 이야기를 할지 모르겠소만. "
제국의 기사들은 대우가 좋았지. 아우로라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사냥꾼은 아카데미에 입학하지도 않고, 따로 등용되지도 않았다. 이유는 여러가지였지만 타 국가에서 넘어와 정착한 케이스가 대다수였지. 아우로라는 이어지는 말에 고개를 느즈막히 돌렸다. 고된 삶을 살지만 노련함이 있고, 기사단 못지 않은 세력을 구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우로라의 머리가 바삐 돌아간다.
만약 그들이, 전폭적인 지원과 이름을 날리는 누군가의 지지를 받는다면. 그래서 세력전의 조력자로 참여하여, 불가피한 전쟁이 일어난다면.
제국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이 될 것이다. 영주끼리의 전쟁은 있었지만, 그와는 격이 다르겠지.
"...그렇죠."
삽화거나, 약해진 마수였지. 어린 새끼를 실습으로 잡은 적도 있었다. 물론 그 새끼도 갓 태어난 존재였다. 마수에 대한 공포. 아우로라는 입술을 오물거렸다. 마수의 공포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특히 아우로라는 더더욱.
사냥꾼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에 아우로라가 고갤 끄덕이며 잠시 말이 없자, 솔로몬은 자연스레 그녀가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구나 짐작하곤 깍지 낀 손을 내려다보았다. ...앞서 이야기했던, 노련함과, 삶에 대한 의지로 무장한 사냥꾼들을 과연 누가 제 세력에 흡수하려고 할까, 자칫 잘못하면 오히려 자신이 그 세력에 휘둘리게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을 제외한 모든 기득권층에게서 소외될 위험을 안고 그런 모험을 시도할 이가 있을까?
솔로몬은 말없이 미소지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귀족들은 자신의 잇속에는 정말 밝았다, 그리고 그들이 거느리는 기사들도 마찬가지였지, 개중에는 정말 숭고한 의지를 지니고 기사가 된 이들도 있을 테지만, 제국이 커지고, 오래될수록 그런 의지보다는 금전과 명예에 휘둘리기 마련이었으니.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사냥꾼들을 이용할 생각 외에, 자신들이 그들의 후원자가 될 생각은 없을 것이다. 그게 바로 솔로몬이 바라는 바였음은 말할 필요 없었으리라.
" 괜찮을 것이오, 물론...사람이 많은 만큼 사고로 위장한 암살이 일어날 가능성도 높긴 하지만, 언제나 그런 위험은 있어왔고 지금까지 별 일 없었으니. "
적어도 지금까진 그랬다. 일종의 마물을 상대로 한 전쟁이라고도 볼 수 있는 만큼, 아군을 공격하는 일은 어지간해서는 일어나지 않을 터였으니. 그러나 권력에 대한 욕망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언제 어디서 뜻밖의 일이 일어나 문제가 발생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 그렇다면야, 슬슬 모일 시간인데, 후작가에서는 누가 올지 모르겠군, ...아우로라 양이 후작가를 대표할 생각은 없소? "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만큼 소란스러운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며, 솔로몬은 뜻밖의 이야기를 꺼낸다.
마냥 어린 영애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기회. 아우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있으면 성인식을 치뤄 성인이 될 것이고, 마냥 사랑만 받기에는 그만큼 어린 아이도 아니었다. 아우로라가 오세와 아이니를 돌아보았다. 제가 지금부터 후작가의 대표래요! 그런 뜻이 아니었을까?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할게요."
아카데미의 부장과는 다른 개념일텐데. 아우로라는 마음을 다잡듯 고개를 끄덕이며 천막으로 가까워지는 목소리에,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맞다! 좋은 경험이 될 것이고..꼭 잘 해낼 것이다. 아우로라가 다짐했다. 잘 해내서, 그러니까..잘 해내서...벗어나야지! 제국의 눈송이나 오목눈이라는 별명 말고, 듬직한 별명이 하나 생겨야 할 것이 아닌가!
눈앞에서 귀족가의 대표가 정해지는 것을 보던 쌍둥이는, 아우로라가 자신들을 돌아보자 웃으며 고갤 숙였다, 잘 해내실 거에요, 라는 의미였을까.
" 잘 해내리라 믿겠소. "
일단은 그녀를 후작가의 대표로 내세우는 것이므로, 그녀가 실수를 하면 후작가의 평판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겠으나... 그녀를 세운 것은 공작 자신이었기에 공작의 결정 역시 구설수에 오를 뿐만 아니라 공작의 권한에 대한 이야기도 오갈 터였다. 그런 위험을 어느정도 감수하면서도 굳이 그녀를 대표로 세우는 이유가 무엇이었을지. 아우로라가 자신의 손을 잡으며 미소를 짓자, 그녀에게 마주 웃어보인 솔로몬은 발걸음을 옮겼다.
간이 응접실에서 나가자 꽤 넓은 공간이 나타났고, 그 가운데에는 의자가 빙 둘러 놓여있는 원탁이 있었다. 솔로몬은 자신의 자리로 가면서 아우로라에게 제 옆자리를 권했고, 그가 의자에 앉자 오세와 아이니는 그 의자 뒤에 서서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그가 앉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천막의 입구가 열리며 하나 둘씩, 해당 가문과 기사단, 사냥꾼을 대표하는 이들이 들어선다.
잘 해내야지! 아우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잘 알고 있었지. 자신이 후작가의 대표이기 때문에, 자신의 한마디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아우로라가 마른 침을 삼켰다. 잘 해낼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누가 되면 안된다는 생각이 범벅이 되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아우로라는 간이 응접실에서 나가자 보이는 공간을 똑바로 응시했다. 원탁, 그리고 솔로몬의 옆자리. 아우로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고, 머리를 단정하게 매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막의 입구가 열리며 사람들이 들어섰고, 아우로라는 가만히 기다리다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게 입술 속 살을 짓씹곤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 아가씨?" "오랜만이에요. 타리크 경."
눈표범 기사단의 기사단장이라니! 아우로라가 속으로 탄식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저 자는 어려운 상대다. 타국에서 용병일을 하다 왔지. 아우로라가 흘끔 솔로몬을 바라보다, 다시금 그를 마주했다.
"저는 아버지가 오실 줄 알았는데." "후작님께서는 황명으로 입궁하신 상태입니다."
아우로라는 그렇구나. 라면서 슬쩍 다른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사냥꾼도, 몇 귀족도, 다른 기사단장도 처음 보는 사람들이다. 마탑에서는 수습 마법사를 내보냈는지, 한 남성이 불안한 눈치로 이곳저곳을 살폈다. 아우로라가 작은 아버지를 떠올리곤 미간을 좁혔다. 작은 아버지 성격이라면 분명...
뭐? 마물 잡으러 간다고? 귀찮아. 야, 대충 제비뽑기로 대표랑 도우미 뽑아라. 제비뽑기는 신의 뜻이라는 말 몰라? 일단 나는 신을 믿지 않으니까 뽑기엔 참여 안 한다.
하나 둘씩, 각 기사단과 가문의 대표와 그 수행원들이 들어와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그 중엔 아무리 봐도 대표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들도 있었으나, 솔로몬은 딱히 개의치 않는 듯했다.
" 그만 두리번거리고 앉게, 마탑의 자리는 저 쪽이네, 안내해 드리거라. "
마탑에서 온 남성에게 자리를 알려주라며 오세에게 손짓하자, 오세는 곧바로 그에게 다가가 그가 앉을 자리의 의자를 빼주었다. 어찌어찌 사람들이 전부 자리에 앉고, 솔로몬은 바로 회의를 시작하는 게 아닌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 인사치레는 그만두고, 앞서 이야기할 게 있소, 폐하께 위임받은 대토벌에 대한 권한으로, 오늘 후작가의 대표 역할은 내 옆에 앉은 아우로라 양이 맡게끔 결정했소만, 이의 있소? "
일단 이의가 있다면 들어주겠다는 이야기이긴 했지만. 그의 어투나 만심이 완연히 드러난 표정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의도는 그런 게 전혀 아님을 알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일단은, 후작가를 포함한 이들에게 무례로 비춰질 수는 있었기에 어떤 반응이 나타날지는 모르는 상황.
당연하게도 여러 가문의 대표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물론 대놓고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곤 있지만... 개중에 귀족파의 성향을 짙게 띈 기사들에게서는 불만 역시 보이는 것만도 같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들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누군가가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까 기다리고 있었다. 하기사 가장 중요한 건 후작가에서 정식으로 대표가 되어 온 이의 의견이겠지.
솔로몬은 뭐가 문제냐는 듯, 눈표범 기사단의 단장에게 넌지시 이야기했다. 그렇긴 해도 그의 태도는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묵살하겠다는 강압적인 태도보다는,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지켜보겠다는 느낌이 강했다. 일단 후작가의 대표로 온 타리크 경이 이야기를 꺼내면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좀 더 커졌고, 수군거리는 이들의 숫자도 늘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냥꾼들은 솔로몬의 이야기에 거부감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는 모양이었지만.
그 와중에 마탑의 대표로 온 풋내기 마법사가 조심스레 손을 들고, 유일하게 긍정적인 이야기를 꺼냈지만 금세 다른 귀족에게 제지된다. 물론 그런 의견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밀어붙여도 상관없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대토벌의 지휘권을 지닌 이는 본인이었으니. 그런 와중에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을 느낀 그는, 아우로라를 향해 시선을 살짝 돌렸고, 그녀의 눈동자에서 무언가 원하는 빛이 아른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래, 지금은 굳이 자신이 나설 필요가 없다.
" 자, 다들 진정하시오, 아우로라 양의 이야기도 들어보는 게 좋지 않겠소? 그녀가 대표의 역할을 맡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결정해도 늦지 않소, 당연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보다 타당성이 떨어진다면...꽤나 체면이 구겨질 것이오. "
그는 느긋하게, 하지만 신중하게 이야기하라는 뜻을 담아, 아우로라와 귀족들, 기사단장을 포함한 대표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런 그의 표정은 썩 즐거워 보였더랬다.
"보좌를 할 수는 있겠지만, 전장에 나서는 상황이 되면 전략을 미루며 아가씨를 최우선으로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우로라가 입술의 속 살을 보이지 않게 자근자근 깨물었다. 아가씨라는 한계를 만들어버리는구나. 시끄러운 듯 시끄럽지 않은 소음이 주변을 꽉 메우자 아우로라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 사냥꾼들은 괜찮은데, 귀족이 문제구나.
아우로라가 마법사를 가만히 바라본다. 마법사가 눈을 마주치자 고개를 픽 숙였다. 마탑의 풋내기가 아가씨라고 못 할 것은 없다 하니 힘이 나는 것 같았다. 강한 사람이 말하는 것 보다 더더욱. 마탑의 마법사와 귀족 영애가 다르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더 능할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것일 텐데도. 아우로라가 솔로몬의 말이 끝나자 입술을 휘어 올렸다.
"경의 말씀대로 저는 보호 받아야 할 입장이 맞지요. 마탑의 마법사와 다른 귀족 영애이기도 합니다." "헌데 대표를 맡겠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우로라가 눈을 휘어 솔로몬처럼 즐거워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저는 보다시피 후작가의 수행원으로 온 것이 아닌, 솔로몬 루인 아젤 공작님과 함께 왔으며 공작님의 뜻으로 대표의 자리를 직접 권유 받았으니 마땅히 보호를 받아야 하지요. 아니면 공작님의 성의가 다른 분들에 의해 짓밟히는 모습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제 몸은 혼자서도 지킬 수 있습니다. 보통의 마법사와는 다른 귀족 영애니 말입니다. 라며 아우로라가 가만히 마법사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줄곧 마탑에 있었으니 저를 아시지 않나요?" 마탑의 마법사가 몸을 웅크리며 지팡이를 끌어안았다. 저당 잡혔다 싶은 눈치였다.
"...마탑주님이 매일 아가씨께서 보내신 편지를 받을 때 마다 저희 보고 이정도만 되어도 이쁨 받는데 너흰 대체 뭘 하냐고 지금 이게 마법이냐고 갈구니까요..."
아우로라가 솔로몬을 바라보며 히, 웃었다. 이미 공작을 물고 늘어진 것 부터가 대담한 모습이었지만, 마탑까지 물고 늘어질줄은 몰랐는지 몇 귀족의 입이 다물렸다. "혹 다른 의견이 있습니까?" 라고 묻는 것은..오, 권력의 맛을 느낀게 분명했다.
보좌로 해결되지 않겠냐는 자신의 질문에, 보좌는 가능하겠지만 아가씨를 최우선으로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다고 답하는 타리크 경에게 솔로몬은 이렇다 할 이야기를 건네지는 않았다. 이 상황을 헤쳐 나가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아우로라였고, 이미 아우로라는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으니까.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전장에 나설 때 애로사항이 꽃핀다는 이야기를 반박하기 위해서 솔로몬의 수행원이라는 점과, 그의 제안으로 대표의 자리에 서게 될 테니 당연히 보호받아야 하는 입장이라며, 새삼 그런 이야기를 문제삼는 이들에게 묘한 압박을 주는 모습은 퍽이나 새로웠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했던 마탑의 마법사에게 답이 예상되는 질문으로, 자신이 원하는 답을 이끌어내 마탑주에게 인정받은 실력이라는 것을 넌지시 드러냄으로 쐐기를 박는 듯 보였다.
제국은 아카데미를 통해 마법사들을 길러내지만 그 중에서 정말 마법사로 대성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고, 귀족들 중에서도 마법을 능란하게 쓰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으니. 제국 내의 마법사들의 정점(적어도 대외적으로 드러나 있는 마법사들 중)인 마탑주가 보증하는 인재인 아우로라의 말에 쉽사리 반박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으리라.
그렇게 아우로라가 귀족들을 상대로 분위기를 가져오며 대담하게도 다른 의견이 있냐며 묻자, 솔로몬은 잠자코 다른 의견이 있을까 생각하며 기다린다.
사실 귀족들에겐 아니꼽기 그지없는 상황이리라, 더욱이 귀족파에 속한 이들이라면 더욱. 그러나 이 곳은 최소한의 예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대로 목숨이 끊어질 수도 있는 전장이었으니, 적어도 이 자리에서 더 이상의 이견은 없는 모양이었다. 솔로몬은 분위기를 읽고는 아우로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 아무래도 이야긴 끝난 것 같군, 그럼 처음에 내가 이야기했던 것에 동의하는 것으로 알겠소, 자! 그럼 바로 토벌 전략회의를 하지, 타리크 경은 아무쪼록 아우로라 양이 실수하지 않게 도우면 될 것 같소. "
잘 먹혀든 것 같다. 이른바 물고 늘어지기 전술! 악랄하거나 치사할 수도 있지만, 진짜 귀족들의 싸움이 더 치사하니까. 아우로라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불만은 있지만 쉬이 꺼내지 않는 모습이 마냥 새로웠다. 예전엔 어찌 중요한 대화에 영애가 대화에 끼어드십니까, 나 영애는 나서지 마시게! 같은 말을 많이 들어왔는데.
마법사의 피는 귀했다. 마법을 쓰는 것 자체가 귀족들 사이에서도 소수였고, 그마저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아우로라가 헛점을 잘 이용했는지 마법사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다른 귀족들의 시선이 따가웠기 때문이었다.
아우로라는 솔로몬이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자 칭찬 받은 강아지마냥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웃었다. 드디어 첫 대토벌의 발걸음을 내딛는구나! 그것도...대표로! 아우로라가 이 일은 꼭 소네타에게 편지로 전해줘야겠다고 생각했고, 타리크는 말을 이으며 예를 갖추듯 고개를 숙였다.
아우로라의 어깨를 그가 두드리자, 그녀는 칭찬을 받은 강아지처럼 미소를 지었고, 그 표정을 보며 그 역시 옅게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후작가의 대표로 아우로라가 어울리느냐에 대한 이야기는 일단락이 났고, 이제는 이들이 이 장소에 모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솔로몬의 주관 하에, 각 대표들에게서 각종 전략과 마물의 파악 현황 등이 오고가고, 찬성과 반대를 나누며 그에 대한 근거를 대는 것을 통해 결정된 사안에 따라서 탁자에 펼쳐진 대평원의 지도 위에 각 기사단과 귀족가, 사냥꾼들을 상징하는 말들이 올라 자리를 옮기거나 굳힌다. 마물 사냥에는 사냥꾼들이 훨씬 뛰어난 부분이 있었기에, 솔로몬은 사냥꾼들의 의견을 주의 깊게 들으며 설령 채택되지 않은 전략이라도 차선책으로 두는 등,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꽤 시간이 흘러 모든 사안이 결정되었고,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솔로몬은 하루 동안 수고한 이들에게 시원한 음료와 함께 과일을 대접했고, 그런 짧은 휴식이 끝난 뒤에 군영을 채웠던 이들이 하나 둘씩 자신의 진지로 돌아가면서, 어느 새 그의 군영에는 그와 그의 기사들, 수행원인 오세와 아이니, 아우로라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오세와 아이니는 그제야 짐을 풀기 시작했고, 솔로몬은 텅 빈 원탁 앞에 앉아 말을 만지작거리며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토벌의 회의는 처음 겪는 것이라, 아우로라는 평소보다 더욱 집중했다. 전략과 마물의 파악. 보통 영애들이 화원에 앉아서 듣는 드레스나 보석, 남의 이야기와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는 어렵기도 했지만, 그만큼 타리크가 쉽게 설명해주기도 했다.
정말이지, 대단했다! 이런 대화를 나누는구나. 나도 언젠가 영애가 아니라 아우로라 경이나 그 비스무리한 것으로 불리며 다른 대화에도 참여할 수 있지 않을까? 아우로라가 생각했다. 어느새 모든 사안이 결정되고, 해가 지는지 천이 빛을 빼앗겨 점점 어두운 색을 내비쳤다. 잠깐의 휴식 이후로는 그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 조용해졌고.
아우로라는 그제서야 현실로 돌아온 것 마냥 고개를 들었다. 하도 집중했더니 퍽 익숙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시간을 똑 잘라서 여기에 데려다둔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오새와 아이니가 짐을 풀기 시작했고, 공작님은 지도를 바라보며 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우로라가 그 셋을 가만히 바라보다, 솔로몬의 곁에 다가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더 수정할 게 있나요..?"
듣자하니 이번에 새롭게 나타난 마물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고 타리크 경이 말했지. 무려 날개가 달려있어서 근접해서 싸우기가 어렵다고 했다. 날아다니는 마물은 많았지만 면적이 넓어 잡기가 수월했는데, 이번 마물은 꼭 잠자리처럼 생겨서 이리저리 피하니 말썽이라고 했다. 으으음, 늑대만한 잠자리라니. 생각해보니 무지 징그러운데. 아우로라가 미간을 픽 찡그렸다.
지도를 보며 말을 만지작거리던 자신에게 아우로라가 더 수정할 게 있냐며 말을 걸어오자, 솔로몬은 그녀에게 시선을 옮겼다가 다시금 지도로 되돌린 뒤에 입을 열었다.
" 글쎄, 수정할 만한 게 있는지 찾아보고 있기는 했소, 이번엔 변수가 될 만한 게 좀 늘어서 말이지. "
마물의 종류가 날로 늘어나고 있았다. 그 중에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마물도 있어서, 토벌의 성공 여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 대공수단이 전무한 이들의 목숨에 크나큰 위협이었으니. 무예가 뛰어난 기사라도 두 발이 땅에서 강제로 떨어진 채 얼마나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을지. 똑같이 하늘을 날며 대응할 수 없다면 방법은 하나 뿐이었다, 활, 투창과 같은 수단으로 이동을 저지할 수 밖에. 마법사들의 적절한 화력 지원이라면 좀 낫겠지만 마법사의 수는 적을 뿐더러 혹여 마물이 마법사만을 노린다면..
오늘 회의에 앞서 자신이 대표의 자격이 있다는 것을 꽤 능란하게 증명한 것에 대해,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애초에 왜 그녀를 후작가의 대표로 내세웠을까. 슬슬 균형을 유지하며 사는 삶에 싫증을 느끼기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정도에서 벗어난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였을까? 어쩌면 아우로라라는 존재에 색다른 흥미가 생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과연 후작가의 영애라는 틀에서, 제국의 귀족이라는 틀에서 얼마나 자신의 길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그녀는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을까?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을까?
새삼 그는 얽메여있다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에게도 메여 있지 않았을 때가 그립다, 마물이 존재하지 않았을 그 때가 그립다. 굳이 힘을 과시하지 않아도 좀이 쑤시는 일 없던 그 때가.
변수가 많다는 말에 아우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들었으니까. 무서운 마물들이 늘었다니. 아우로라가 입술을 잠시 오물거렸다. 활을 잘 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땅에서 싸우는 사람들보단 적었고, 마법사들을 노릴 수도 있고. 가뜩이나 적은 마법사가 아닌가.
솔로몬이 앉기를 권하자 아우로라는 자리에 앉아 활짝 웃었다. 첫 전략회의었지. 아우로라는 눈을 또르르 굴렸다. 그러니까, 소감이라고 한다면...
"어렵긴 했지만 그만큼 대단했어요. 다들 이렇게 열심히 하는구나 싶기도 했고..."
아우로라가 잠시 입술을 오물거렸다. 생각을 하거나 말을 잇기 어려우면 잠시 그렇게 하는 것이 버릇이었지만. 잠시간의 침묵이 있고 아우로라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사실은, 부러웠어요. 저는 꽃과 보석, 드레스와 사람들의 이야기만 듣고 배웠는데, 다른 분들은 이런 걸 하니까...욕심이 더 나기도 해요."
물론 자신처럼 여자인 대표나 마법사도 있었지만, 그 사람은 날때부터 검과 활을 먼저 잡거나, 아니면 거세게 저항해서 성공한 케이스니까. 그 반면, 아우로라 자신은 그럴 수 없었다. 아카데미에서 그나마 자유를 얻긴 했지만 그 이후 황태자에게 잡혀버렸으니까. 가족을 볼모로 잡혀 자유는 꿈도 꿀 수 없었으니까. 그런 아우로라에게 있어서 대표의 자리는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았다. 틀에 벗어난다는 일탈적인 행동, 그리고 인정 받을 수 있는 길.
아우로라는 솔로몬의 한숨에 눈을 깜빡였다. 궁금한 것. 궁금한 것이라면....아우로라가 지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말 두 개가 지도 한 쪽에 서있었다. 아마 저건 활과 창이었지.
"..."
아우로라가 조심스럽게, 솔로몬이 방금 전까지 만지작거리던 말을 잡아 지도 한 쪽에 올려놓았다.
"마법사 중 실력이 좋은 사람들과 창병을 같이 두면 안 될까요?"
궁금하기도 했다. 아우로라는 고개를 비뚝 모로 기울이며 지도를 주의깊게 바라보았다. 마법사들이 아무리 보통 기사들을 보조 한다지만....
"기본적으로 증폭 마법도 있고... 마탑에서 은색 별 정도의 실력을 가진 마법사라면 복제 마법을 사용해서 쏘아내는 창을 늘릴 수도 있을텐데...아무도 그 의견을 내지 않아서 궁금했어요. 위험해서 그런건가요?"
전략회의에 참여한 소감을 묻자, 아우로라는 어렵긴 했지만 다들 대단했다고 대답했다. 그리곤 잠시 입을 오물거리며 이어서 할 이야기를 찾는 듯했고, 곧 침묵을 깬 그녀는 사실 회의에 참여하는 이들과 토벌에 나서는 이들이 부러웠다는 말을 덧붙인다. 귀족가의 영애로, 언제나 그에 걸맞는 몸가짐을 무언의 압박을 통해 강요받아 왔겠지. 그렇긴 해도 부럽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 같았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자신들에게 요구되는 몸가짐이나 예의에 별 불만을 가지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직접 현장에서 발 벗고 뛰는 이들을 깔보기 일쑤이건만.
아무튼 특이한 소녀라는 생각을 하며,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 그녀가 처했던 상황을 다시금 떠올린다.
" 그렇다면 다행이군, 내일도 잘 하리라 믿겠소, 아마 타리크 경도 있으니 별 문제는 없겠지. "
별 생각없이 타리크를 언급하며 지도로 시선을 돌리던 그는, 궁금한 게 있으면 이야기해 보라고 했던 자신의 말에, 그녀가 탁자 위에 놓인 말을 잡아 지도의 한쪽에 올려놓으며 이야기를 시작하자 귀를 기울인다. 창병과 궁병과 함께 마법사들 중 실력이 수준급인 이들을 배치하는 건 어떻겠냐는 의견. 어째서 그런 의견을 낸 걸까 하는 참에 그녀는 나름의 근거를 대기 시작했다.
바로 수준급의 마법사라면 복제 마법을 통해 화살의 수나 창의 수를 늘려 탄막을 형성할 수 있을 테고, 그럼 공중을 나는 마물의 접근을 확실히 봉쇄하기 쉬워질 거라는 이야기였다.
" 마법사들이 중요한 전력인 만큼, 쉽사리 움직일 수 있는 형편이 아니오, 게다가...마탑이 아무리 귀족들과 황실의 영향에서 떨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아우로라 양도 알고 있지 않소? 언제까지나 마탑에 남아있을 수 있는 마법사는 극히 소수일 뿐이고, 그들을 제외한 마법사들은 결국 황실이나 유력한 귀족가에 속하게 된다는 것을, 결국 그들도 정치나 권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이야기라오. "
간간히 이야기했던 것처럼. 대토벌이라는 중대사 속에서도 정치적인 이해득실이 존재하긴 마찬가지였고, 따라서 마법사들의 배치를 쉽사리 바꿀 수 없는 건 당연했으리라.
" ...한 가지 더 이야기해 주자면, 앞서 이야기했듯 마물은 마력을 탐하기 때문에 마법사들이 밀집된 쪽을 우선적으로 노릴 것이오, 그러나 본대는 그만큼 강하게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 위험하지 않으나, 아우로라 양이 이야기한 쪽은 상대적으로 방어가 부실하오,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마법사들의 마력을 감지한 마물로부터 강한 공격을 받게 될 것이고, 심하면 몰살당할 수도 있소. "
설마 이 일이 끝나고 아버지께 말씀드린다던가 그러지는 않겠지? 아우로라가 눈을 깜빡였다. 만약에 그렇다면..음, 아버지께 애교를 한껏 담아 편지를 쓸 상황이 올지도 모르겠다.
"..아.."
마탑에 남는 것은 소수이며, 나머지는..그래. 어딘가에 속해 누군가의 지원군이 된다. 마법사들 또한 정치적인 것이 존재했으니..그럴법도 하겠다. 아우로라가 그것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곤, 마물이 마력을 탐한다는 사실에 눈을 다시금 들어올렸다. 맞다. 가장 간단한 사실이었지. 아카데미 수업시간에 배웠는데, 왜 까먹은걸까?
"으으, 역시 어렵네요..생각한대로 마물이 픽픽 쓰러져서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요?"
작은 투정이었다. 마물이라는 존재가 여러모로 골치가 아프니 이정도는 애교 수준이었지만. 그러다가도, 방법을 모색하겠다는 말에 뺨을 붉히며 히 하고 웃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아예 죽거나 다치지 않을 가능성은 없지만, 그래도 피해가 최소한이었으면 좋겠어요. 좋은 방법이 나오면 좋겠네요.."
누군가의 죽음은 피할 수 없다. 그렇지만, 최소화 하는 것은 가능하겠지? 아우로라가 다리를 앞뒤로 동동 구르며 가만히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마물들이 저 너머에 있다는 것을 알리듯 뒤틀린 마나나 기괴한 마력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있죠, 공작님. 예전에 들은 소문인데요, 사람을 여럿 잡아먹은 대마수는 마족들이 반려동물로 데리고 다니기도 한대요. 마족들의 마력이 엉겨붙어서 만들어진 거라 마족을 잘 따르기도 한다고 하고...."
아무래도 기괴한 마력을 느꼈는지, 퍽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마족은 마왕이 대전쟁 때 베르도의 황제와 계약하여 마족 군대를 지원군으로 보냈다가 패전한 이후 어지간하면 아도니엘에 오지 못하는데도. 아우로라가 잠시 이번에 골치가 아프다는 잠자리 마수가 그려진 그림을 바라보다 고개를 약간 모로 기울였다.
역시 어렵다는 아우로라의 말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리고 방법을 모색해 보겠다는 자신의 말에 그녀가 볼을 붉히곤 히, 하고 웃으며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일이 되도록이면 없었으면 한다고 이야기하자, 그는 눈을 감고 눈썹을 으쓱할 뿐, 별다른 답을 하지는 않았다.
결국 인간의 업보이건만.
다시금 마물이 탄생하는 이유를 떠올리던 그는, 아우로라가 문득 마족과 그 마족이 거느리는 대마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눈을 천천히 뜨곤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어서 잠자리 마물을 묘사한 그림을 보며 그녀가 마족들의 취향에 대해 이야기하자 눈을 반쯤 감고 그림을 내려다보던 그는 입을 열었다.
" 글쎄...병기로 써먹기에는 충분할 것 같으니 어떨지 모르겠소, 단순한 반려동물은 아니겠지. "
본디 마물이란 인간이 마법을 쓰면서 생기는 찌꺼기들이 죽어가는 동물이나, 시체에 엉겨붙어 그 형상을 바탕으로 생겨나는 것이었으나. 마물을 구성하는 마력은 기괴하게 뒤틀린 것이라서 인간들은 아직 그게 자신들의 마나로부터 기인했음을 알지 못했다. 마탑에 마물의 근원을 조사하는 이들이 있기야 하지만, 그들의 시점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부조화의 화신인 마물의 근원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베르도 제국군과, 그 제국군을 도와 참전한 마족군을 격퇴하면서 그들에게서 얻어낸 정보에 의하면.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마물을 만들어내는 원리를 연구해 그들이 의도적으로 마물을 만드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게 마탑의 정보망에 흘러들어간 거겠지, 마족이 마물을 만들어낸다는 와전된 정보가.
그렇지, 쉬운 일은 아니다. 사실 목숨에 관련된 모든 일이 쉽지 않지만. 아우로라는 잠자리 마물을 바라본다. 다시 봐도 징그럽고..또..징그럽고...징그럽다. 끔찍하다의 바로 전 단계라고 해야하나. 아우로라는 솔로몬의 이야기에 그림에서 시선을 떼었다. 더 봤다간 꿈에서 나올 것 같았으니까.
"병기요..?"
아, 그렇구나. 사람을 엄청 해쳤을테니까. 아우로라는 다루기 쉽겠다는 말에도 잠시 고민을 하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니까...마족의 마력은 순수하니까. 아직 마족의 마력에 대해 느꺄본 적도 없고 그렇지만, 일단 순수하다니까...
"어려워요."
아우로라가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요즘들어 감정표현이 많이 늘어난 것 같았다. 약간이지만 심통도 낼 줄 알고, 많이 활발해졌고..공작저에 처음 왔을땐 그저 겁 많고 여린 소녀에 불과했는데. 공작저에서 지내며 점점 주눅들었던 활기를 찾는 듯 싶었다.
"생각해보니 사제들이 보이지 않네요."
대토벌 때 참여하지 않는 걸까? 으음, 그건 아닌 것 같은데..아우로라가 이전, 드미트리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아니, 대화라고 할 것도 없었던 그것은...그래.
- 대토벌이 있대. 그래서 당분간 사제는 없을테니 저번처럼 시종에게 차를 들이붓지 말라고.
경고였지. 아우로라는 그 대신 버릇없는 시종에게 회초리를 들었지만. 생각해보니 그건 조금 통쾌한 일이었다. 아우로라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 맑고 깨끗하다는 의미가 아니오, 어둡고 짙으며, 무겁다는 의미지, 시체를 되살리거나 하는 마법이 그들의 특기니 말이오. "
엄연히 따지면 되살아나는 게 아니었지만. 솔로몬은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며 어렵다고 이야기하는 아우로라에게 설명을 해 주곤, 그녀가 사제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이야기하자 잠시 지도를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 사제들은 황실에 속해 있으니, 황실에서 보내지 않는 한 보기 어려울 것이오, 온다고 해도 사제들끼리 올 리는 없고, 황실의 유력자가 한 명쯤은 올 테지. "
신과 사랑에 빠진 소녀의 전설이 제국의 시작으로 여겨지는 만큼, 황가의 피가 흐르는 이들은 사제로 살아가지 않더라도 사제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규율이나 힘을 다룰 수 있도록 교육을 받았다. 사제가 되어 두각을 나타낸다면, 비록 황가에 메여있기는 해도 충분한 발언권을 가질 수 있었으니, 제위 경쟁에서 승산이 없거나 밀려날 위험을 지닌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 사제가 되기를 택하기도 했다. 물론 황가의 피가 섞이지 않았더라도 사제가 되는 경우가 있기는 했으나 극소수에 불과할 뿐더러, 사제들이 운용하는 술식의 대부분을 운용할 수 없었기에 의술만을 배우는 게 대부분이었다.
" 하지만 대토벌은 마물을 사로잡기 위해 행하는 게 아니오, 어디까지나 박멸이 목표니, 사제들의 도움이 없어도 될지도 모르지. "
그는 그녀가 방긋 미소를 짓자 턱을 괴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가 마물에게 죽을 뻔 했을 때, 그 사제가 오는 건 아닐까 싶어 물었을까?
다른 의미로 순수하구나. 안 좋은 의미로. 죽은 자를 살려내거나..그러니까. 으음, 무서운데. 아우로라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족은 무서우니까, 만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마족들은 계약을 위해 영혼도 잡아먹고..막, 그런다던데. 아우로라가 나쁜 생각을 휙휙 내던졌다. 안돼, 꿈에 나올지도 몰라!
"...그렇군요."
안 왔으면 좋겠다. 아우로라가 황실의 유력자를 떠올렸다. 정말, 안 왔으면 좋겠다. 황가의 사람들은 사제의 규율이나 힘을 다루는 법을 배운다. 황가의 사람이 아니라도 사제는 된다만, 그건 극소수이거나, 의술만을 배우거나, 이종족이라 배제당하기도 하니까.
"그렇겠네요. 마물은 박멸해야하니까..."
그리고, 아우로라는 사제들이 싫다는 말에 쿡쿡 웃었다.
"..저도 싫어요. 사실, 치료를 위해서 생각은 해봤지만 가장 먼저 나가 떨어질 것 같기도 하고...."
가벼운 어조였다. 덤덤하게 뱉었지만 속내는 어떨지. 아우로라는 다시금 지도 밖으로 벗어난 말 하나를 쥐어 만지작거렸다.
" 마족들에겐 자신들의 터전이 따로 있으니, 마주치기는 쉽지 않을 것이오, 굳이 이런 널찍한 곳까지 와서 마물을 만들면서 주의를 끌지는 않겠지. "
물론 만약이라는 것은 언제나 존재했으니, 마족에 대한 대응책도 생각해놓긴 해야겠다고 덧붙인 그는, 사제가 싫다는 자신의 말에, 아우로라가 쿡쿡 웃으며 그녀 역시 사제가 싫다는 말을 하자 어깨를 으쓱였다. 마법사 이상의 특권을 지닌 이들이었고, 그들과 관련해서 그는 좋은 기억이 없었던 데다가, 실질적으로 그들 중 몇이나 전투에서 1인분을 해낼지 확신도 없었다.
" 그때 일이 있었다고는 해도, 사제를 싫어하게 될 특별한 이유가 따로 있소? 그 사제는 황태자의 명령에 마지못해 따른 것 아니었나? "
말을 만지작거리는 아우로라를 보며, 그는 넌지시 질문한다. 이전부터 사제가 싫었던 걸까? 아니면 그 일 이후로 싫어졌던 걸까? 적어도 세간에 알려진 사제의 표면적인 모습은 모범적인데다가, 각종 질병에서 국민들의 생명을 구한다는 듯이 퍼져있으니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좋은 이미지일 텐데. 거기다 황가의 핏줄만이 사제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와 달리 소수긴 해도 그 이외의 이들이 사제가 되었다는 사실이 마냥 꽉 막힌 집단은 아닐 뿐더러 자신도 사제가 될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을 품게 했을 터다.
그게 헛된 희망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겠지. 아무튼 그는 사제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간이 가진 마력을 통해 이종족에게 보다 우위에 서고자 하는 욕망이 드러난 게 마법사라면, 사제는 그보다도 더 배타적이고 협소한 욕심이었다. 이종족은 물론이거니와, 같은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규율에 맞지 않는 자는 배척하니.
게다가, 그들이 쓰는 구속 술식은 까다롭기 그지없었는지라, 그는 초대 신관을 떠올리며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아우로라는 잠시 침묵하며 말을 만지작댔다. 매끈한 칠이 되어있는 말은 아우로라의 손 위를 매끄럽게 스쳐지나갔다. 사제를 싫어하게 될 특별한 이유. 그 사제는 황태자의 명령에 마지못해 따른 것이라 악감정이 없지만. 아우로라가 잠시 솔로몬을 바라보고, 짐을 푼 오세와 아이니를 쳐다보았다.
"전하께서는 나중에, 반역이 일어나 황태자의 자리를 뺏긴다 해도 자기는 사제가 되어 평온히 살 거라고 했어요."
누가 그 소네타의 언니가 아니랄까봐. 아우로라는 평온하게 불온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 말을 끝으로 다시금 아우로라가 입을 다물었다. 그때, 그 말에도 자신의 미래는 불투명했다.
"그 반면에, 전하의 곁에 계속 남아있었고 반역이 정말 일어났다는 가정하에. 그때의 저는 사제도 될 수 없고, 면죄부를 가질 수도 없지요. 전하는 사제가 되어 면죄부를 가지지만, 제 미래는 목이 잘리거나 다른 나라에 팔려가는 것이니. 그래서 사제가 싫어요. 이젠 신을 모셔야 하는 의미로 남은 것이 아니라 그저 도피처로 쓰이니까요."
그리고 솔직히 귀찮잖아요. 입만 열면 따박따박 대꾸하는 마탑이랑 똑같아선, 엄청나게 싸우니까. 아우로라가 농담을 덧붙이곤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다, 화제를 돌리려는 듯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나중에, 반역이 일어나 황태자의 자리를 뺏긴다 해도 자기는 사제가 되어 평온히 살 거라고 했어요.
누가 들으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만한 이야기였다. 다시금 황태자가 성군의 자질을 타고 난 것이 아닌, 영악하기 그지없기에 성군을 연기 할 수 있을 뿐이라는 걸 느낀 그는, 잠시 입을 다문 아우로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그를 잠시 보다가 짐을 다 풀고서 둘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피곤한지 하품을 하고 있던 두 아이에게 가 있었지.
-그 반면에, 전하의 곁에 계속 남아있었고 반역이 정말 일어났다는 가정하에. 그때의 저는 사제도 될 수 없고, 면죄부를 가질 수도 없지요. 전하는 사제가 되어 면죄부를 가지지만, 제 미래는 목이 잘리거나 다른 나라에 팔려가는 것이니. 그래서 사제가 싫어요. 이젠 신을 모셔야 하는 의미로 남은 것이 아니라 그저 도피처로 쓰이니까요.
라는 그녀의 생각과 함께, 마냥 심각한 이야기로만 비춰지는게 걱정되었는지 마탑과 함께 사제들을 한데 묶어 일일히 걸고 넘어져가며 엄청나게 싸우기만 한다며 덧붙인 투정 섞인 농담을 듣는다. 이제는 정치적 도피처 중 하나가 되어버린 사제의 길, 개중에는 사제의 길을 동경해 사제가 된 이들도 있겠으나, 결국은 그들도 권력의 늪에 빠져들 것이고, 광신에 빠져 불쾌한 일을 행할지도 모른다.
사제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아우로라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고, 솔로몬이 걱정 말고 이야기를 해보라는 말에 잠시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러니까, 음. 정말 말 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이미 먼저 주제를 꺼냈으니, 아니에요. 라고 김 식는 얘기는 할 수도 없고.
"...조만간에, 데뷔탕트 볼이 있잖아요."
드레스도 시종을 보내 더 자세하게 맞췄고, 그 날을 위한 장신구도 몰래몰래 편지로 정했고..또..준비를 단단히 해두려 했지. 아우로라가 부끄러운 듯 한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뺨이 발그레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때요, 공작님이 에스코트 해주시면 좋겠어요. 첫 춤도 공작님과 추고 싶고..."
아우로라가 슬쩍 눈을 내리깔며 시선을 피했다. 보통 에스코트는 어린 영애의 개인 호위기사나 개인 마법사, 혹은 혼약자나 가족이 보통이었고 첫 춤은 혼약자가 기본이었다.
"저는 이제 약혼자도 없고...아버지는 소네타를 맡아주시기로 했거든요.."
아우로라가 그제서야 눈을 살포시 들었다. 긴 속눈썹 사이로 보라색과 분홍색이 섞인 기묘한 눈동자가 수줍은 뺨만치나 촉촉하고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걱정 말고 이야기해 보라는 자신의 이야기에, 아우로라가 이야기를 할까 말까 고민할 때 나오는 버릇인 입을 오물거리는 모습을 보이자, 무슨 부탁을 하려고 고민을 하는 걸까 생각한다. 그녀가 입을 오물거리다가 꺼내는 이야기는 좋든 나쁘든 그의 흥미를 끌었던 전례가 있었기에 잠자코 그녀가 이야기를 꺼내길 기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입이 열리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얼마 뒤면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는 데뷔탕트 볼이었고, 그녀는 볼을 발그레 물들이며 자신의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그리고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는 그 데뷔탕트 볼에서 솔로몬이 자신을 에스코트 해줬으면 한다는 것이었고, 그뿐만 아니라 첫 춤도 그와 함께 추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눈을 내리깔아 시선을 피하면서도, 이제 자신은 약혼자가 없으며, 자신의 동생은 아버지가 에스코트 해주기로 했다는 말을 덧붙인 그녀는, 그제서야 눈을 살풋 들며 솔로몬을 바라보았다.
보라색과 분홍색이 섞인 눈동자가 물을 머금은 듯 촉촉한 빛을 내고 있었고, 그 눈을 마주 바라보는 연녹색의 눈에는 어떤 빛이 서려 있었을까. 용기를 쥐어짜내듯 들리는 마지막 말에, 잠시 침묵하던 그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입을 열었다.
" 대토벌이 무사히 끝난다면, 그리하겠소. "
대체 어떤 감정으로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인지 감을 잡기가 어려웠다. 비록 예전보다는 감정을 잘 표현하면서, 마냥 멋모르는 영애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그렇기에 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다른 이도 아니고 정 반대 세력의 수장에게 에스코트를 부탁하다니. 그리고 조건을 붙이기는 했지만, 수락의 가능성을 내비친 자신의 행동도 돌이켜 보면 경솔한 건 아니었나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워라. 말해버렸다. 아우로라가 솔로몬의 시선을 마주보다 눈을 다시금 내리깔았다. 굉장히 이상했겠지. 갑자기 데뷔탕트의 에스코트와 첫 춤을 부탁하다니. 아우로라가 발그레 달아오른 볼의 열기를 식히려는 듯 이곳저곳 시선을 굴리더니, 이내 들린 긍정의 여지가 있는 발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사히 끝난다면. 믿지 않았던 신에게 기도라도 해야 할까? 여러 생각들이 머리를 마구 스쳐 지나갔다. 정 반대 세력의 수장에게 이런 얘기를 하니 당연히 이상했겠지. 아우로라는 솔로몬의 질문에 입가를 가린 손을 양 뺨에 올려두었다. 뺨이 홧홧한 느낌이었지만, 겨우 돌렸던 시선을 제자리에 두었던가?
"..."
우물쭈물하기도 잠시였다.
"그건요, 나중에 말씀 드릴래요. 지금은 비밀로 하고 싶어요."
그리고 예의 그 순한 미소를 지어보이던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엔 잔망스러울지도 모르는.
대토벌이 무사히 끝난다면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그의 말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확답을 준 것은 아니었으나 긍정의 여지가 있는 말을 들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 말을 들은 직후 그녀는 자신의 입을 가렸던 손을 제 뺨에 가져다 대며 얼굴을 식히려는 듯하다가 겨우 시선을 제자리에 돌려 두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부탁을 하는 이유를 묻는 그에게,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지금은 비밀로 하고 싶다며 미소를 지어보인다. 그는 본인 입으로 비밀로 하고 싶다는 그 이유가 뭘지 슬슬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어쩐지 지금은 비밀로 놔두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어 더 이상 캐묻는 것을 그만두었다.
"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부탁은 기억하고 있을 테니, 이제 그만 눈 좀 붙이시오, 시간이 늦었소. "
순하디 순한 미소를 가만히 보던 그는, 그녀에게 이제 그만 잠자리로 가라며, 어느새 서로 기대 졸고 있는 쌍둥이로 시선을 옮겼다.
공작님께 만든 비밀. 아우로라는 속으로 쿡쿡 웃었다. 부탁을 기억한다는 말도 좋았고, 곧 있을 데뷔탕트도 기대가 됐다. 시간이 늦었구나. 아우로라가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로 기대 졸고 있던 쌍둥이를 향해 시선을 옮겼지.
앗, 아이들도 벌써 졸고 있었구나. 아우로라가 두 아이를 안아드는 모양새에 새삼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오세도, 아이니도 간단하게 안아올릴 수 있구나.
"네!"
아우로라는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솔로몬의 뒤를 따랐다. 좋은 날이었다.
...
한편, 어두운 방 한 구석. 한 남성이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새 마물이 생겼던데." "실험해보고 싶었거든." "이거, 좀 자존심 상하는데..실험을 할 정도로 내가 약한 힘을 주었을까봐?" "그럴리가, 그 강한 힘을 주었는데도 패전을 했다는 점이 거슬릴 뿐이지." "보면 볼수록 맹랑한 인간이네. 왜 네가 내게 힘을 달라고 한 건지 궁금할 정도로."
남성이 기묘하리만치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쥐어서 흔들어보고 싶은 것이 생겼거든."
달이 뜨지 않았다. 조만간 있을 데뷔탕트 볼에선, 환하고 커다란 달이 뜨겠지. 그 이전에 누가 어떻게 죽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두 아이를 잠자리에 뉘이고, 아우로라 역시 자신의 잠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정말 홀로 남은 솔로몬은, 탁자 위에 놓인 초가 타들어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조금씩 천막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깥 공기에 촛불이 일렁이고, 그의 눈빛 역시 따라 울렁이는 것 같다.
데뷔탕트 볼에서 그녀를 에스코트하고, 같이 춤을 춰 달라는, 사실상 파트너가 되어달라는 부탁의 이유가 무엇일지. 그리고 그에 대한 자신의 답은 긍정의 의미를 품고는 있었으나, 다소 애매모호했기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과연 이번 대토벌은 무사히 끝이 날 수 있을까? 아우로라 앞에서는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최근에 새로이 모습을 드러낸 마물들은 하나같이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비록 마물이 비정상적인 존재라고는 하지만 그 마물의 원형이 가지는 특징을 옅게나마 가지고 있을 테고, 대부분은 야생에서 살아가던 짐승을 원형으로 삼고 있었기에 자신들이 여기기에 상대하기 버겁다면 피해를 끼치지 못했으나, 최근에 모습을 드러낸 마물들은 달랐다, 마족이 직접 훈련시킨 마물과 비슷하게, 오직 대상을 잡아먹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자신의 생존조차도 뒤로 미루는 모습을 보였지.
그렇기에 위험 부담은 점점 커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최악의 경우, 마물 발생의 근원을 파헤치기 위해 다소의 손실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무사히 대토벌이 끝이 날 수 있을까?
솔로몬은 한숨을 내쉬며 아우로라가 냈던 의견을 떠올려 깃펜을 끄적인다.
그렇게 밤은 깊어지고, 어느새 주둔지 주변을 덮었던 어둠이 서서히 트는 동에 밀려 떠난다. 불침번들은 대토벌 준비를 위해 각 천막의 사람들을 깨우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이들을 깨우기 위해 뿔피리를 불어 소리를 퍼트린다.
쌍둥이는 눈을 비비고 일어나 수납 마법이 부여된 가죽 주머니에 담긴 물로 손발과 얼굴을 깨끗이 씻고 종종걸음으로 솔로몬의 침소와 아우로라의 침소로 달려갔다.
자신들에게 잘 잤냐고 물으며 미소짓는 아우로라에게, 두 아이는 웃으며 고갤 끄덕인다. 솔로몬은 이미 일어났는지 침상이 정리되어 있었고, 그의 모습은 이미 침소에선 찾을 수 없었다. 오세와 아이니는 그 사실을 아우로라에게 이야기하면서 준비된 아침식사가 끝나면 출발할 것 같다고 덧붙인다.
" 대평원 가운데에 있는 원시림 지대에 들어갈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거리가 좀 되니까 중간중간에 오늘처럼 야영을 할 것 같아요. " " 걱정은 마세요! 최대한 편안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왔거든요! "
차근차근 계획을 설명하는 아이니와, 그런 계획도 문제없다는 듯이 활기차게 이야기하는 오세를 따라 식사가 준비된 곳으로 이동하니, 마침 솔로몬이 천막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 식사 시간에 늦지는 않았군, 피곤할 텐데 뿔피리 소리가 거슬리지는 않았을까 모르겠소. "
로브에 앉은 이슬을 털어내며 자신의 자리에 앉은 솔로몬은 두 아이와 아우로라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덧붙이며 알맞게 식은 스프에 스푼을 담갔다.
라고 이야기하며 스프를 한 스푼 떠서 입에 넣고 삼킨 솔로몬은, 미리 소금간을 해 구운 고기를 썰어 놓은 요리를 포크로 찍어 입 안에 넣고 씹는다. 그리곤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하려는 아우로라가 식사에 앞서 원시림 지대에 대해 들을 수 있을지를 묻자, 입 안의 고기를 씹어 삼키곤 고갤 끄덕인다.
" 문제될 것 없지, 급하게 먹을 필요도 없으니 원한다면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해 줄 수도 있소. "
어디까지나 아우로라가 원한다면, 이었기 때문에 일과 식사는 별개라고 이야기하며 그녀가 식사를 이어가자 그는 식사가 끝나면 이야기하겠다며 포크로 고기를 찍어 입에 넣고 씹는다. 그리곤 잊을만 하면 스프를 떠먹은 그는, 스프를 비롯한 음식들이 바닥을 보이자 식기를 내려놓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그릇들을 모아 닦고 청결 마법으로 다시 쓸 수 있도록 그릇의 상태를 깨끗하게 만드는 과정을 거친 뒤, 식사를 했던 탁자에 다시금 앉아 아우로라가 궁금해했던 원시림 지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 이름에서 알 수 있겠지만, 그 숲을 구성하고 있는 나무들은 지금은 보기 어려운 종류요, 크기도 보통 큰 게 아니고, 자라온 시간도 그만큼 어마어마하지, 대평원의 일부라곤 해도 웬만한 숲의 수십 배는 되는 면적을 차지하는 데다, 앞서 말했듯 나무들이 크고 빽빽해 숲에 들어서면 좀체 방향을 잡을 수가 없소. "
그것뿐이라면 다른 방법으로 방향을 찾으면 되지 않을까? 싶을 즈음 그는 말을 이었다.
" 덧붙여서, 그 안은 마나가 농후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마나에 중독될 수도 있소, 마나 중독이 어느 정도의 위협인지는 알고 있겠지? "
아스파라거스를 베어물고나서, 아우로라는 스프를 다시금 한 스푼 떠먹었다. 적당히 식은 스프를 비우고, 아스파라거스를 비롯한 야채를 야금야금 먹어치운 아우로라가, 마지막으로 고기를 한 점 썰어 입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한 점만 먹는 것은 그나마 속이 버텨줄 때 맛보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청결 마법은 유용했다. 정말, 이런 마법을 만드는 사람들은 모두 천재인 게 분명해. 아니면 집안일에 넌더리가 났다던가. 아우로라는 이윽고, 원시림 지대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와..."
연구하고 싶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보기 어렵다니. 과거를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였다. 나무들이 크고 빽빽해 숲에 들어서면 좀체 방향을 잡을 수 없을 뿐더러, 마나 중독의 위험이 있었으니까.
"...위험하네요..."
자칫하면 마나가 폭주하거나, 폐인이 될 수도 있다. 심하면 죽을지도 몰라. 아우로라는 작게 몸서리를 쳤다. 그러고 싶진 않았다. 조심하고, 조심하게 해야겠지. 마나 중독은 정말, 정말! 위험하니까. 그런 곳을 간다니. 괜찮을 거야. 아우로라가 심호흡을 했다.
" 고위계의 마법을 펑펑 써댄다면야 숲과 함께 마나들도 날려버릴 수 있겠지만, 마나가 짙은 만큼 원시림 바깥에서 쓰는 마법은 그 마나층에 닿으면 본질을 잃고 제 위력을 내지 못할 가능성이 높소. "
마법은 마나를 일종의 개념을 통해 가공하고, 제련하는 것이다. 마나를 제련하기 위한 개념이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마법 자체가 틀어지는 것과 같이, 마법을 구성하고 유지라는 데 쓰인 마나보다 주위의 마나가 크게 늘어나거나 줄어들게 되면 마법은 제 위력을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 주변의 마나가 증가하는 것을 감안해 확장의 개념으로 제련한 마법이라면 그 위력도 늘어날 확률이 높지만. 원시림의 안팎을 감싼 짙은 마나는 육안으로 확인이 될 정도로 짙고 무거웠으니.
" 그렇다고 안에 들어서서 마법을 써대면, 처음 느끼는 풍부한 마나에 다들 화력 조절도 못할 것이고, 중독과 더불어 마법을 쓰기 위한 회로가 과부하로 파괴될 것이오. "
결론은 마법을 자제해야 할 뿐만 아니라, 마나 중독에 빠지지 않도록 흡수하고 배출할 마나량을 조절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마나 중독은 마력이 미약한 이들보다도 마력운용에 재능이 있는 이들에게 위협적이었으니.
"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오, 이야기해주지 않았다가 생길 문제를 피하려고 이야기한 것 뿐이니, 출발 준비는 다 끝냈소? "
" 좋소, 그럼 바로 출발하지! 우리를 비롯해서 선발이 먼저 나서면 후발대는 천막을 거둬서 뒤따라올 것이오. "
원시림에서 주의해야 할 사항들을 이야기해주자, 원시림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무섭다고 말한 것도 잠시, 활짝 웃으며 조심하겠다고 이야기하는 아우로라를 보며, 솔로몬은 고갤 끄덕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흉갑을 갖춰 입고, 지팡이를 허리춤에 매단 그는, 천막 밖으로 나가 휘파람을 불었고, 그 휘파람 소리에 반응하듯 윤기가 흐르는 검은 빛의 말이 그의 앞으로 달려와 머리를 조아린다.
" 말 타는 법은 배웠소? 후작가에서 즐겨 타던 말이 있다면 그 말로 준비할 수도 있을 것이오. "
말의 목을 쓰다듬으며 말의 등에 얹힌 안장이 잘 고정되어 있는지, 등자는 멀쩡한지 발로 한 번씩 건드린 그는, 아우로라를 돌아보며 물었다. 물론 같이 돌아다니긴 할 테지만, 이번 대토벌에서 그녀의 역할은 그의 수행원인 동시에 후작가의 대표였으니, 후작가의 기사들을 이끌 수도 있어야 했다, 그러려면 말을 탈 줄 아는게 좋겠지.
아우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우로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먼지를 털었고, 귀걸이를 잠시 만지작거렸다. 귀걸이가 있으니까, 그리고 또...으음, 마법 말고 할 줄 아는 것은..모르겠다. 아우로라가 검은 빛의 말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아카데미에서 배운 적 있어요. 즐겨타던 말은...."
이우로라가 말 끝을 흐렸다. 말은 탈 줄 알지만, 그것도 도미닉 몰래였다. 아우로라가 혹여 말에서 떨어질까 노심초사하던 아버지는 결국 말을 모두 기사단에게 줘버렸으니까. 그래도, 지금은 그가 없으니까. 오랜만에 그 아이를 탈 수 있지 않을까.
"있어요. 준비 해달라고 할게요."
그리고 아우로라가 손 끝에서 마나로 만든 작은 나비를 날려보냈다. 우리 당근이. 당근을 가장 좋아해서 당근이라고 짓긴 했지만...아우로라가 눈을 슬쩍 피했다. 말 이름이 당근이라니. 기사단 내부에서도 당근이한테 줄 당근은 어디갔어? 라는 농담이 돌아다닐 정도니 미안해지지 않나.
말을 탈 줄 아는 영애는 드물다. 기껏해야 조랑말을 타고 느긋한 산책을 할 뿐이지, 속도를 즐기는 영애는 보기 힘들었다. 아우로라도 어릴 적 조랑말을 사달라고 졸랐고, 조랑말을 타고 다녔지.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말을 탄 이후로는 조랑말도 거칠게 몰면 괜찮지 않을까...까지의 발상까지 간 것이 문제지만.
"알겠어요. 꼭 부를게요."
조심해야한다. 만약에, 그녀가 갈라지는 상황에 놓인다는 것은 본래 전술에 큰 지장이 있어 도망치거나 하는 상황일테니. 아우로라가 심호흡을 하며 무리에 섞여 사라지는 솔로몬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런 상황에서 공작님은 무사하셔야 하는데. 굳이 영애 하나를 지키겠다고 본인을 희생하는 것을 바라지도 않고, 본인이 짐이 되는 것도 싫었으니까. 멀리서 달려오는 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근아!"
검은 말과 달리 당근이는 부드러운 크림색에, 검은 갈기를 지니고 있었다. 아우로라가 당근이의 머리를 끌어안고 꺄르륵 웃었다. 오랜만이야, 라고 말한 아우로라도 안장 위에 올라타고는, 갈기를 쓰다듬어주었다.
얼마 뒤, 선발대가 평원 위에 오와 열을 맞춰 섰다. 선발대의 맨 앞에는 솔로몬이 자신의 검은 말과 함께 있었고, 아우로라는 아마도 그의 왼편에 그녀의 애마를 탄 채 서 있을 것이다. 잠시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슬슬 잠잠해지고, 쌀쌀했던 새벽의 시간이 지나, 평원에 부는 바람은 적당히 시원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으나, 그 바람에는 마물이 내뿜는 기분 나쁜 마나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선발대가 진을 치기를 기다렸다는 듯, 마물들이 대평원을 마구잡이로 떠돌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대평원 중심의 원시림을 둘러쌌다. 마치 원시림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것처럼, 누군가가 마물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어렴풋하게라도 느낄 수 있었다.
심상치 않은 마나가 섞인 바람을 맞으며 말들이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자, 솔로몬은 고삐를 단단히 틀어쥐며 말을 진정시켰다. 그의 시선은 마물들이 아닌 원시림을, 아니...그 안에 숨어 있는 무언가를 향한 듯, 흔들림 없이 한 곳만을 바라보고 있었고, 이내 고갤 돌려 선발대의 기사들과 사냥꾼들에게 소리친다.
" 이번 토벌은 지금까지와는 다르다! 지금까지의 토벌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번엔 정말 목숨을 걸어라, 저 마물들의 움직임을 봐라, 우리가 지금까지 상대해 온 야생성 짙은 오합지졸이 아니다! 저들을 통솔하거나 그에 준하는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배후에 있음이 분명하니 우리는 지금 전쟁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
솔로몬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마시더니 다시금 말을 이어나간다.
" 전쟁의 패배는 곧 제국의 존망에 영향을 미친다, 제국의 전력에 준하는 토벌대가 패배하면, 저 안의 존재는 분명히 자신감을 얻고 마물들을 이끌어 파괴를 일삼을 것이다, 그런 공포가 너희의 식솔들을 지배하게 둘 텐가? 아니라면 정신을 바짝 차려라, 이건 전쟁이다! 우리의 목표는 적을 섬멸하는 것이다! "
명령 없이 퇴각하는 자는 즉결 처형이다! 나에게 자비를 바라지 마라! 적이든, 아군이든.
" 이 순간부터 내게 자비란 없으니, 패전은 곧 죽음이다! 가자! "
그 외침과 함께, 솔로몬은 말을 재촉했고, 그의 의지대로 검은 말은 바람처럼 내달려 원시림을 지키고 선 마물들에게 돌진한다.
선발대의 맨 앞. 아우로라는 솔로몬의 옆에 말을 탄 채로 서있었다. 평원에 부는 바람은 시원했고, 만약 이곳이 마물이 득시글거리는 곳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이라도 말을 타고 저 멀리 달렸겠지. 기분 나쁜 마나가 몸을 스쳤다. 마물들은 조용했다. 정확히는 원시림을 둘러싼 모습이, 누군가가 마물을 꼭 조종하는 것 같았다. 아우로라가 당근이의 갈기를 토닥거렸다.
심상치 않은 마나는, 아우로라에게 아주 두려운 존재였다. 무언가 저 안에 들어가면, 정말 큰일이 나지 않을까. 아우로라가 그렇게 생각하던 도중 솔로몬의 외침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랬지, 이번 토벌은. 목숨을 걸어야 하지. 원래 마물 토벌은 목숨을 거는 일이지.
"....."
전쟁. 전쟁의 패배는 제국의 존망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아우로라의 머리 한 구석이 새하얘지나 싶더니, 이윽고 차분해졌다. 꿈에서 나올지도 모르지만, 일단 저지르고 보면 되는 것이다. 용기를 쥐어짜자. 처음 공작님께 말을 거는 것 보다 어려울 건 없을 거야. 아우로라가 그렇게 생각하곤, 공격 마법 스크롤을 품에서 꺼내며 솔로몬의 뒤를 따라 말을 몰았다.
토벌대의 선두에서 달리는 솔로몬의 뒤로 아우로라를 비롯한 기사들이 뒤따른다. 빠른 속도로 마물과의 거리가 좁혀지고, 마침내 솔로몬과 마물의 거리가 불과 1마신 정도로 좁혀졌을 때. 고삐에서 떨어진 솔로몬의 왼손에서 취람빛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마물과 부딪히기 직전, 그의 마력은 한 점으로 모여들더니, 일순 취람빛의 섬광을 사방에 흩뿌리며 폭발했다. 그 폭발은 오직 마물들만을 향한 것이었기에, 그의 뒤를 따르던 이들은 마력의 섬광에 눈부심을 느낄 뿐, 아무도 폭발에 휘말리지는 않았고. 계속해서 불어오는 평원의 바람에 흙먼지가 퍼져나가자 보이는 광경은, 부채꼴 모양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마물들의 진형이었다, 물론 아직도 많은 마물들이 남아 있었고 다시금 빈틈을 메우려는 듯 마물의 물결이 움직였지만, 사기 증진엔 충분했으리라.
" 전면전은 후발대에 맡긴다! 송곳처럼 길을 뚫어 원시림에 들어선다! "
솔로몬은 말의 안장에 매달려 있던 채찍을 꺼내들고 소리쳤다.
" 아우로라 양, 마물들이 빈틈을 메우지 못하게 둔화시키시오! 길을 오래 유지해야 하오! "
마물과의 거리가 점점 좁아진다. 공격 마법을 준비하던 아우로라는 문득 움직이는 여러 마물들 사이에서 익숙한 모습을 마주했다. 가둠이었다. 아우로라가 마나를 무력하게 거두고 두려워하던 찰나. 눈 앞의 섬광에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대단했다. 공작님께서도 마법에 능하다는 말을 들어왔고, 강력한 사람임을 알고 있음에도. 겪어보는 것은 듣는 것과 다르게 이리도 어마어마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부채꼴 모양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마물들. 이렇게 필사적인데, 두려워해선 안 됐다. 남은 마물들이 빈틈을 메우기 위해 움직이자 한 손을 고삐에서 놓았다.
"..알겠어요!!"
할 수 있을거야. 귀걸이도 있잖아. 팔찌도 있고, 아우로라가 손에서 다시금 마나를 모았다. 괜찮다. 이젠 마물은 두렵지 않다. 공작님도 곁에 계시고, 타리크 경도 근처에 있었다. 잠시간의 생각을 마친 아우로라가 눈을 질끈 감으며 손을 앞으로 뻗었다.
무엇보다 이번에 자신이 공적을 세우면 데뷔탕트 볼에서 공작님이 춤을 춰주실 건데..!! 그러면, 그러면!
어느새 주문도 외지 않았는데 손 끝에서 두 개의 마법진이 생겨났고, 점점 움직이는 마물들을 향해 강력한 눈보라가 몰아쳤다. 몇몇 마물들은 얼어붙기 시작했고, 움직임이 느려지거나 미끄러지기까지 했다. 주변의 풀이 딱딱해질 무렵, 아우로라가 손을 거두고 눈을 살그머니 떴다.
아우로라에게 마물들이 진형을 복구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라는 말을 한 뒤, 그는 마력을 흘려보낸 채찍으로 마물을을 휘둘러 쳐 파괴하며 앞으로 전진한다. 그러다가 뒤에서부터 뿜어져 퍼지는 냉기에 문득 시선을 돌려 보니, 단순히 마물을 둔화시키는 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마물을 통째로 얼려버리고 그 일대에 빙판길을 만들어버리는 아우로라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채찍을 휘둘러 얼어붙은 마물들 뒤에서 우왕좌왕하는 마물들을 쳐 없애곤 아우로라에게 소리쳤다.
" 잘 했소! 그 정도로 마력에 여유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이걸로 한동안은 진형을 메우기 어려울 것이오, 어서 원시림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
솔로몬은 채찍을 말아쥐고 나머지 한 손으로 고삐를 단단히 붙잡은 채 원시림의 입구로 달려나간다. 그러나 쉽게 들여보낼 생각이 없는 것인지, 원시림에 가까워질수록 나무 그늘 아래에 숨어 있던 비행 가능한 마물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아우로라가 염려했던 대로, 상대적으로 방어가 부실한 죄익의 창병들을 향해 마물이 날아들었고, 궁병들로 막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으나.
" 걸려들었다! 지금이다, 풋내기인지 아닌지를 증명할 시간이다! "
라며 소리치는 솔로몬의 목소리와 함께 궁병들이 쏘아낸 화살은 색색의 마력에 휘감기며 거대해지고, 그 수가 두 배, 세 배로 늘어 탄막군을 형성했다. 그제야 궁병과 창병들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마법사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고, 그 중에는 제비뽑기로 뽑힌 마탑의 대표도 있었다. 쉽게 운용하기 어려운 마법사들이 소수라고는 해도 갑작스레 선발대의 좌익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가 무엇이었든간에, 갑작스런 마법사들의 등장에 마물들이 피해를 입고, 공중을 나는 마물들이 땅에 떨어지며 시간이 끌리게 된다. 솔로몬은 계속 말을 달려 앞을 막아서는 마물들을 쳐내며 이야기했다.
" 좋은 전략이었소, 분대 하나 정도만을 빼올 수 있었지만 효과는 괜찮구려! 자, 거의 다 왔소! "
활짝 웃는 아우로라에게 미소를 지어보인 솔로몬은, 아우로라의 마법과 다른 이들이 열어놓은 길을 빠르게 내달리며 허리춤에 뒀던 지팡이를 들어 마치 창을 던지려는 것처럼 쥐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원시림의 입구에 다다랐을 때, 그는 지팡이를 있는 힘껏 바닥에 내리꽂았고, 지팡이는 확실하게 땅에 박혔다. 그렇게 땅에 박힌 지팡이를 지나친 그는 바로 말머리를 돌리고 소리쳤다.
" 거의 다 됐다! 원시림 안으로 들어와라! "
들어오지 못할 것 같다면 말머리를 돌려라, 아군에게 방해가 된다! 라고 덧붙인 그의 빈 손에는 다시금 에메랄드 빛의 마력이 일렁였고, 그 마력을 모은 손을 지팡이에 대자, 지팡이는 마력에 휩싸이며 원시림의 안과 밖을 나누는 막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막이 아닌지, 막은 원시림 가까이 있던 마물들을 사그라트리며 밀어냈고, 천천히 경계를 긋고 있었다.
그리고...아마 아우로라는 느낄 수 있었으리라. 후발대 쪽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밀집을, 마법사들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이 보유한 마력이 모여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헉 괜찮아? 별일은 없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여기도 바람이 많이 불긴 했는데 영향권이라기엔 좀 멀었던 거 같아, 지금은 아예 멀쩡한 날씨로 돌아가버렸구!
꼭 창을 던지려는 것 처럼 지팡이를 쥔 공작님의 모습에 아우로라는 의구심을 품었다. 그리고 원시림의 입구에 다다랐을 무렵, 땅에 지팡이가 박히자 아우로라는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우로라가 그의 뒤를 따를 무렵.
"...세상에."
아우로라는 기함했다. 원시림에 결계를 치신 걸까? 아우로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후발대 쪽에서 느껴지는 마나도 그렇고, 결계도 그렇고.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며 아우로라가 고개를 느슨하게 기울였다.
괜찮을까. 마물들이 그렇게 지키는 것이 이 안에 있다면. 어쩌면 공작님도 버거울지도 모른다. 아우로라가 귀걸이를 만지작 거리더니 품 속에서 다시금 마법 스크롤 한 장을 꺼내, 저 밖으로 던졌다. 마수를 향해 공격을 하는 골렘을 소환하는 마법이었다. 준비하는 동안 마수들이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도 있었다.
// 응응 지금은 괜찮아~ ㅠㅠ 영향권에서 멀었다니 다행이다. 이런 태풍이 다시 오지 않았음 좋겠네 ㅠㅁㅠ~~~
자신의 뒤를 따라 아우로라가 들어오고, 타리크 경을 포함한 선발대의 일부 역시 안정적으로 원시림 안으로 들어오자, 솔로몬은 결계를 닫는 속도를 높인다. 자연스레 결계 안으로 제때 들어오지 못하리라 판단한 이들은 아직 메워지지 않은 결계의 틈으로 들어오려는 마물들의 주의를 끌며 결계로부터 멀어진다. 그런 이들만으로는 부족할 뻔 했으나, 아우로라가 던진 스크롤로부터 소환된 골렘이 마물들과 육탄전을 벌이면서, 결계 바깥의 선발대가 결계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게 된다.
" 됐다, 지금이다! "
그렇게 결계가 완벽히 닫히기 직전, 솔로몬은 하늘로 한 줄기 빛을 쏘아 올렸고, 그 빛줄기가 원시림을 빠져나가는 동시에 결계가 닫힌다. 그리고 그 빛줄기에 반응하듯, 후발대 쪽에서 모이던 마력이 응축되더니 원시림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든다.
거대한 마력 덩어리가 점점 원시림을 향해 가까워지자, 그 마력의 정체가 거대한 불덩어리임을 알 수 있었으리라. 원리 자체는 불을 일으키고 응집하는 마법에 증폭을 계속한 것 뿐이었지만, 단순한 게 가장 위력적일 수도 있는 법. 거대한 불덩이는 결계에 부딛히곤 수십, 수백 개의 불덩이로 나뉘어 결계 바깥에 쏟아져 내린다. 순식간에 결계 바깥이 불길에 휩싸이며 마물들과 풀을 태우는 소리를 낸다.
괜찮으시다니 다행이다. 아우로라가 안도의 한숨을 쉬곤 흘끔 그를 올려다보았다. 원시림 바깥은 후발대에게 맡기고..아우로라는 원시림 깊은 곳을 향해 같이 시선을 돌리고는 눈을 꾹 감았다.
마나가 공기를 무겁게 했다. 이렇게 짙고 무시무시한 마나는 처음이었다. 아우로라가 숨을 쉬는 것도 조심하듯 아주 조금씩, 모아서 숨을 쉬었다. 마나를 특히 잘 느끼는 체질이라 그런지 많이 긴장이 되었다. 걱정은 사서 한다지만, 정말 마나 중독이 되면 안 되니까! 그리고 마나 중독은 방심하다가 생길 수도 있고..그러니까.. 그러니까!
"...그거..정말 무서운 사실이네요.."
아우로라가 처음으로 부정적인 말을 꺼냈다. 일반적인 마물이 아니라면 분명 불을 뿜거나 그런 무지막지한 애들이 나타나겠지? 엄청 커다란 가둠이 나타나면? 아니면 귀여운데 흉폭한 애면?! 유령은?! 앗, 유령은 안 나타나겠지. 어째선진 몰라도 그 부분에서 진정을 한 것 같았다. 아우로라가 후, 하고 모아 쉰 숨을 천천히 내쉬더니 당근이의 갈기를 토닥였다.
그렇게 잠시 동안의 휴식 뒤, 솔로몬은 어두컴컴한 원시림의 깊은 곳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분명히 꺼림칙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은데, 온통 짙고 무거운 마나 투성이다 보니 정확한 위치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단순하게 생각을 해 보면 숲의 가운데에 근원이 있겠지만... 그는 자신을 따라 숲 안으로 들어온 이들을 돌아보았다. 수색이 길어질수록 다들 지칠 테고, 그렇게 되면 성공할 확률이 현저히 낮아질 터. 그렇다고 해도 근원을 찾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는 말의 목을 두드리며 일행에게 이야기한다.
" 이제부턴 쭉 나아가도록 하겠소, 나무들이 크고 두꺼우니 조심하고, 앞 뒤로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도록 하시오, 마법은 조심스럽게 쓰고. "
잠시간의 휴식. 아우로라는 당근이와 함께 마음을 가다듬었다. 원시림은 마법을 조심해야 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마법 스크롤도 마나를 퍼뜨리니 사용할 때 특히 조심해야겠지. 아니면 위력이 굉장히 커져서 걷잡을 수 없을지도 모르고. 아우로라는 숲 깊은 곳을 목을 쭉 빼서 바라보았다.
형용하기 힘든 꺼림칙함이 등골을 타고 흘러들어온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느낌을 받고 있지 않을까. 아우로라가 잠시 움츠러 들었다가도, 솔로몬의 말에 허리를 쭉 펴며 고삐를 꽉 쥐었다. 내가 주눅들면 안 돼. 고작 마물에게 질 수도 없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자니, 짙은 마나가 무겁게 깔려 있고, 나무가 까마득하게 높이 자라있는 것 외에는 생각보다 특별한 게 없는 듯했다. 물론 다른 숲보다 조용하긴 했지만, 과연 정말로 조용한 것인지, 아니면 짙은 마나에 묻혀 마물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기가 어려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현재 나아가는 방향이 제대로 된 방향인지조차 알 길이 없었다, 숲에 길이 따로 나 있지는 않았으니까. 그저 막연히 깊이 들어가면 되겠거니 싶으면서도, 그에 따르는 불안감이 생기는 것 역시 어쩔 수 없었다.
" 소굴에 들어와 줬는데도 딱히 반응이 없군, 마나의 흐름도 변화가 없고... "
넓은 원시림을 전부 돌아본다는 것은 어렵다, 그렇다면 수색 마법을 쓰는 게 나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본 솔로몬이었지만, 혹여 그 마법이 변질되어 문제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이 미치자 그만두기로 한다.
" 아무래도 어쩔 수 없겠군, 두 조로 나뉘어서 움직이는 게 좋겠소, 한 조는 소수로 편성해서 빠르게 움직이고, 나머지 한 조는 천천히 이동하면서 퇴로를 확보해 놓아야겠소. "
짙은 마나는 숨을 턱 막히게 하고, 나무는 까마득하게 높게 자라있다. 아우로라가 높은 나무를 마주하듯 고개를 점점점 위로 들어올리다 결국 높이를 가늠하기를 포기한 듯 고개를 픽 내렸다. 울창한 숲은, 만약 마나가 짙지 않았다면 오세와 아이니, 그리고 플라우로스와 함께 피크닉을 와도 좋을 것 같았지만 지금은 음산했다.
당연하겠지만 숲에 길도 안 나있고, 마물들은 반응이 없다. 지금쯤이면 마물들이 당연히 공격하려 들텐데도, 아무런 반응도 없는 것이 꼭 이 숲에서 마물들을 통제하는 자를 이길 수 없을 것이라 믿고 구경만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두 조로요?"
아우로라가 눈을 깜빡였다. 소수냐, 천천히 이동하며 퇴로를 확보하냐. 공작님을 따라가야 할까? 아우로라가 고개를 기울였다. 어떻게 하지...?
예이! 즐거운 추석이야! 나는 꽤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해, 아우로라주는 잘 지내고 있을까나! 송편은 아쉽게도 못 먹었어...대신이라고 해야 할까 떡국(?)은 먹었지만 말이지! 설날은 아니지만! 그리고 픽크루 너무 귀여워ㅠㅠ한복 너무 귀여울거 같다구ㅜㅠ 그래서 나도 만들어봤지롱! 곤룡포가 있긴 하지만 솔로몬은 왕이 아니니까 구군복으로 입혔어!
위험하다는 말로, 본대에 남아 있는 것이 안전할 거라며 에둘러 표현하니 망설이는 듯한 모습을 보인 아우로라였지만. 같이 가겠다고 해도 말리지는 않겠다는 이야기에 반응하듯 자신과 함께 가겠다 말했고, 그는 잠시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 알겠소, 그럼...본대의 통솔은 타리크 경에게 맡길까 하는데, 아니면 타리크 경이 신임하는 이에게 맡기고 날 따라도 좋소. "
상대해야 할 존재가 어떤 술수를 부릴 지 모르니 마법보다는 보다 직관적인 수단에 능한 이가 필요했다. 거기에...아우로라가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덜 느끼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일단 숲 안에 들어온 이상, 감시당하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니, 자연스레 아우로라에게 쓰이는 신경을 의도적으로 느슨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그녀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으니까.
같이 가야해. 지켜내야해! 아우로라의 표정은 굳건한 다짐을 한 듯 해보였다. 타리크는 말의 고삐를 쥐곤 잠시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이대로 자신마저 가버린다면 본대가 전멸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가씨께서 공작님을 따라나선다고 하였고...그렇게 고민하던 타리크의 눈 앞에 보인 것은 가련한 희생양 하나였다.
"그렇다면 본대는..맡기겠습니다." "저요?!"
검은 사자 기사단에서 파견을 나온 기사였다. 그는 부산스럽게 갑옷을 덜걱거리다 결국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돌렸다.
"알겠습니다. 무운을 빕니다."
아우로라는 당근이의 고삐를 꽉 쥐었다. 빠르게 이동한다니. 정신을 바짝 차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과연 저 안에 뭐가 있을까, 무슨 짓을 할까, 무얼 위해..?
타리크 경이 함께 가겠다는 의사를 내비치자, 본대에 남을 사람들에게 행동 지침을 알려준 그는, 자신이 향하고자 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분명히 이 나무들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을 터다, 최대한 빨리 찾아내서 매듭을 지어야겠지.
" 그럼 가도록 하지. "
그 말과 함께 솔로몬은 말의 움직임을 재촉했고, 그에 반응하듯 검은 갈기의 말은 마치 평원에서 내달리듯 나무뿌리를 뛰어넘어 빠른 속도로 나아간다. 가만히 말을 내달리던 그는 조금씩이나마 주변의 짙은 마나가 흐트러지는 것을 느꼈고, 말이 달리는 속도에 비례해 자신의 귓가를 때리는 바람의 소리 사이로 말이 아닌 무언가가 풀을 밟는 소리, 나무표면을 긁어가며 오르는 소리와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비교적 조용했을 때에는 들리지 않았던 소리들이 들려오고, 자연스레 불안감을 느끼게 만들고 있었다.
본대에 남는 사람들은 행동지침을 들은 이후 마찬가지로 무운을 빌었다. 아우로라는 솔로몬을 따라 말을 몰았고, 타리크 경 또한 그 뒤를 따랐다. 빠른 속도로 말을 몰다보니 짙은 마나가 흐트러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기분이 아니라 확신인가. 아우로라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일단은 말에 집중하기로 했다. 말을 타지 않은지 오랜 시간이 지나 감이 떨어진걸까, 아니면 이렇게 거세게 달려본 적이 처음인걸까. 허벅지가 아려오는 감각에 아우로라의 자세가 자칫 흐트러질 뻔 했지만, 말에서 떨어질까 고삐를 세게 쥔 덕분에 떨어지지는 않았다.
"..."
이질적인 소리. 점점 활동을 시작하는 것인지, 아니면 달려드는 것인지. 기이한 소리들에 아우로라가 불안한지 눈을 슬쩍 굴렸다. ..괜찮을거야. 저도 모르게 아우로라가 중얼거렸다.
마굴이 되었다고? 아우로라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고, 타리크는 믿기 힘든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동안 아무도 이 곳을 정벌하지 않으려 들은 것인가? 아니면... 아우로라가 숨을 힉, 하고 멈췄다. 마물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아우로라의 손이 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눈동자에서 손, 그리고 이내 온 몸이 떨리겠지. 하지만, 하지만...
"이대로 간다면.."
실마리를 잡아채고, 조종하는 배후를 알 수 있게 된다. 아우로라가 허리를 곧게 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타리크는 말 없이 아우로라를 응시하다 눈매를 누그러트렸다. 제 아가씨가 많이 변한 것이었다.
"존명."
타리크는 등 뒤에 매고있던 거대한 도끼를 손에 쥐더니, 그대로 말을 몰아 거세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마물들이 앞을 가로막았으나 타리크는 도끼를 들어 마물 하나의 두 다리를 깔끔하게 베더니,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시도했다.
힘차게 앞으로 박차고 나간 타리크는, 등에 매고 있던 도끼를 휘둘러 마물을 베어넘겼다. 솔로몬은 다리를 베인 마물에게 채찍을 휘둘러 휘감고 바닥에 끌며 달리다가 채찍을 크게 휘둘렀다. 그의 팔에서 채찍으로 전해진 힘은 채찍을 물결치듯 흔들었고, 그 채찍 끝에 휘감겨 있던 마물은 채찍의 흔들림과 함께 속박에서 풀려나 다른 마물들에게로 날아갔다. 채찍의 속박에서 벗어난 마물은 다른 마물들과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고, 그 마물과 부딪힌 다른 마물들 역시 형체를 온전히 유지하지 못했다.
" 아우로라 양, 받으시오! "
채찍을 휘둘러 타리크의 측면으로 달려드는 마물들을 쳐 없앤 그는, 아우로라에게 마정석이 박힌 장갑을 던졌다.
" 그 장갑을 착용하고 마력을 불어넣으시오, 아카데미에서 어떤 무기를 다뤘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대의 마력이라면 어떤 무기가 모습을 드러내든지 다룰 수 있을 것이오! "
그러니까, 무기를 휴대하는 것보다 마력 축적이 우선인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사용자에 따라 형태나 위력이 달라지는 마법 무기인 모양이었다. 과연 그녀는 어떤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는지.
그렇게 그는 아우로라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타리크를 엄호했고, 한동안 속도를 유지하며 나아갈 수 있었으나, 점점 앞을 막아서는 마물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속도를 내기가 어려워지고 있었다.
타리크 경도 그렇고, 공작님도...아우로라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마물들을 상대하는 모습이 아우로라에게 있어선 새로운 것이며, 또 그들의 강함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아우로라는 마법을 사용할 수도 없는 처지였기에 입술을 가만히 오물거렸다. 도움이 되면 좋을텐데. 그렇게 생각하던 도중.
"앗...!"
아우로라는 장갑을 아슬아슬하게 받으며 설명을 들었다. 마력을 불어넣으라고?..? 아우로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카데미에선 주로 레이피어를 썼는데. 내 마력이라면 어떤 무기라도 되는 걸까. 아우로라가 잠시 숨을 들이마시고는 장갑을 손에 착용했다.
"괜찮을거야. 고작 마력을 불어넣는 것 뿐이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는 동안 마물의 수는 늘어나고 있었고, 아우로라가 눈을 질끈 감으며 마력을 장갑에 불어넣었다. 그리고...
"아..."
적어도, 아우로라에게 있어선 처음 보는 무기였다. 장총. 그럼에도 아우로라는 망설이지 않고 정확히 마물의 머리를 조준하더니,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과 함께 마물의 머리가 날아가자 아우로라가 어안이 벙벙한듯 솔로몬을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채찍질을 하며 꾸역꾸역 길을 나아가던 솔로몬은 채찍을 피해 날아드는 마물이 총성과 함께 머리가 날아가자 아우로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아우로라가 서릿빛을 띄는 장총을 손에 쥐고 있었다. 마정석의 도움이 있기는 해도 대부분이 그녀의 마력으로 이루어졌을 장총이었으니 무겁지도 않았을 테고, 그녀가 자신의 마력이라는 생각만 잘 해 준다면 마치 손처럼 다룰 수 있을 무기였다.
" 어떤 무기든 상관없을 것이오, 그저 자신의 마력이라는 것만 잊지 않는다면 충분하오! "
잘 했소! 라고 덧붙이며 옅게 미소를 띈 그는 다시금 채찍을 휘두르려 했으나...순간적으로 짙은 마나를 꿰뚫고 화살이 날아들어 채찍을 끊어 버린다.
" ......! "
계속해서 휘둘러 손상을 입기는 했지만 마력으로 단단히 제련된 채찍을 단번에 끊어 버린 화살을 살펴보고자 시선을 움직이지만 화살은 보이지 않고, 심상치 않음을 느낀 그는 이제 쓸모가 없어진 채찍을 던져 버린 뒤 아우로라에게 주었던 것과 비슷한 장갑을 착용했다.
" 아무래도 거의 다 온 것 같군, 무슨 생각인지 모르지만 아우로라 양이 쏜 총성 이후로 마물이 달려드는 수가 줄어들었소, 단순히 몰려드는 것만으로는 막기 어렵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
다시금 마나층을 꿰뚫고 화살이 날아드는 소리가 타리크와 아우로라를 향해 들렸고, 동시에 두 발의 화살이 취람빛 궤도를 남기며 두 사람을 노리던 화살과 부딪혀 상쇄된다. 취람빛의 화살이 날아온 곳으로 시선을 옮겨 보면, 화살과 같은 빛을 내는 활을 손에 쥐고 있는 솔로몬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리라.
" 저격을 하려는 모양이오, 공격은 내가 요격할 테니 아우로라 양이 저격수를 찾아내시오, 타리크 경은 내가 막아내지 못한 공격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도록 하고, 잘 할 수 있겠지? "
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두운 마나로 이루어진 화살들이 날아들었고, 그에 대응하듯 솔로몬의 손이 시위를 튕기며 화살들을 쏘아 보냈다.
크기가 큰 것은 괜찮았다. 마물이 클 수도 있는 법이다. 그렇지만 저 짙고 어두운 마나의 악취와 징그러운 생김새는 아우로라의 정신을 저 멀리 어딘가로 날려보내기 딱 알맞았다.
저런게 숲에 있다고? 마물 토벌이 의미가 있긴 한 건가?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 어쩌지?
방아쇠도 당기지 못하고 저격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아우로라의 눈동자는 수축하여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다 취람빛 화살과 함께 기괴한 비명소리가 들리자, 당근이는 진정하지 못하고 날뛰려 했다. 곁에 있던 타리크 경이 고삐를 꽉 쥐어줘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그대로 낙마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우회하십시오, 아가씨!!" "하, 하지만 공작님이...!" "아가씨, 지금 정신을 차리셔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공작님께서 알아서 하실 수 있을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우로라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번엔 짐이 될 수 없는데.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려던 아우로라는 결국 말을 몰았다.
대답을 듣지 못했다. 아우로라는 입술을 꾹 깨물며 당근이가 속도를 높이도록 했다. 더 달려, 더 빨리! 재촉하는 목소리가 짐짓 앙칼지기까지 했다. 우회한 길을 나아가다보니 거대한 마물로 인해 만들어진 새로운 길이 보였고, 아우로라는 화살이 다시금 자신과 타리크를 노리자 그제서야 고개를 휙 돌렸다. 아우로라가 총의 마력을 회수하더니 빠른 속도로 다시금 장갑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 잡히기만 해봐라!!!" "맙소사."
아우로라는 어느새 레이피어 하나를 쥐고 있었다. 레이피어를 휘두르자 화살 몇개가 깔끔하게 잘렸고, 타리크 또한 도끼를 휘둘러 화살을 내쳤다. 우회하라고는 했지만...당근이가 갑작스레 방향을 틀자 타리크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돌아오십시오, 아가씨!! 아가씨!!!!"
이대로는 안돼. 아우로라가 마물이 지나가며 만든 길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저 끝으로 가면, 그 녀석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무모했고, 지나치게 좋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렇지만..
두 사람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 마물을 처리할 심산이었던 그였으나, 생각보다 마물이 더 빨랐던 데다가, 계속해서 울퉁불퉁한 숲 길을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는 말이 조금씩 지쳐가고 있어 점점 거리가 좁혀지고 있었다. 이러다간 뭘 해 보기도 전에 붙잡히겠군, 하고 생각한 그는 활을 구성하던 마력을 회수하고, 빠르게 마력을 흘려 보내 창을 구성한 뒤 정면에 냅다 집어던졌다.
창이 날아가 나무에 꽂히면서 창의 모습을 유지할 정도로 응축되어 있던 마력이 순간적으로 팽창했고, 바로 그 자리에 포탈 하나가 만들어졌다. 그는 말의 목덜미를 두드리며 무어라 속삭였고, 점점 작아지는 포탈을 노려보다가 등자를 박차고 뛰어내렸다.
등에서 주인이 뛰어내리자 말은 검은 갈기를 휘날리며 닫히기 직전인 포탈 너머로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취람빛 마력으로 열렸던 포탈은 사그라들었다.
말에서 뛰어내린 그가 뒤를 돌아보자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마물이 거대한 팔을 휘두르고 있었다. 일순간 취람빛 섬광이 번쩍여 아우로라의 시야에 잡혔고, 마치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가 뒤이어 들려온다.
타리크는 결국 아우로라를 놓쳤다. 본대에 지원요청을 해야하나? 일단 알리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자신의 주군인 도미닉에게 있어 아우로라를 두고 간다는 것은 청천벽력같은 소식이겠지만, 타리크는 아우로라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처음 기사단에 부임 했을 때, 어린 나이의 아가씨를.
- 아하, 자네가 이번에 오게 된 타리크군 그래? - 눈 표범 기사단에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궁금한 점은 없는가? 로웬이 알려줄테야. - ...그게, 그...
타리크는 기사단 사이에 당당히 앉아 차가 아닌 코코아를 마시고 있던 양갈래 은발의 소녀를 흘끔 쳐다보았다. 그때의 기사단장이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로웬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 신입! 후작님께 따님이 둘 있는 것은 알겠지? 아우로라 아가씨와 소네타 아가씨! - 알고 있습니다. 아우로라 아가씨는 얌전하시고, 소네타 아가씨는 활기차시다고... - 저 분이 아우로라 아가씨야! - 예? - 요 며칠 전 파티에서 남작 영식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쳐서 코뼈를 부러트렸지 뭐야, 우리 아가씨! 원래는 저택 안에서 근신을 하셔야 하는데, 창문에서 나무를 타고 내려오셨어. 이 일은 비밀로 해야해. 알겠지?
아우로라 아가씨는 자신도 말릴 수 없는 사람이다. 타리크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한편, 말을 몰던 아우로라는 일순 취람빛 섬광이 번쩍이자 잠시 말을 멈췄다. 폭발하는 소리? 뭐지? 공작님은? 아우로라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설마 위험에 빠지신 건가? 아우로라는 말 머리를 돌려야할지 고민하던 도중, 순간적으로 레이피어를 들어 화살을 쳐냈다.
레이피어로 화살을 쳐낸 아우로라의 서늘한 태도에 반응한 건지 화살은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주변에 높이 자라 있는 원시림의 이파리들이 흔들리며 서로 부딪혀 내는 소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짙고 무거운 마나 사이로 달콤한 향기가 새어나온다.
그 향기는 달콤했지만 썩 기분 좋은 것은 아니었고, 어쩐지 정신이 아득해질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대체 어디서 이런 향기가 풍겨오는 것일까? 생각하게 될 즈음, 아우로라가 보고 있던 원시림의 사이에 드리워진 그림자에서 무언가가 날아들어 그녀의 목을 꿰뚫으려 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찰나, 나무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마물을 볼 수 있었으리라. 그 모습은 그녀와 엇비슷한 나이의 소녀였으나, 지나치게 창백한 피부와, 짙게 풍기는 달콤한 향기가 분명히 저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고 있었다.
- 최근 마물이 출몰하는 빈도가 늘었다는데. - 덩달아서 피해도 늘고 있습니다, 재산의 피해도 피해지만 인명피해가 급증하는 형편입니다... - 토벌이 필요할 정도로 강한 마물에 대한 보고는 없는데, 병사들 만으로도 대처 가능한 마물들이라면 사람의 숨통을 쉽게 끊지는 못할 터다, 그런데도 사망 추정자가 늘고 있으니, 뭔가 이상하군. - 마물들의 움직임이 조금 다르다고 합니다, 그래도 위험하다 여기면 물러나는 놈들이건만 최근에는 먹잇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고도 하고...무덤까지 파헤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 그러고 보면, 제국의 병사들을 묻어 놓은 무덤도 파헤친 흔적이 있었지... "
그는 평원 곳곳에 파헤쳐진 곳이 있었음을 떠올린다, 처음엔 단순히 마물이 파놓은 토굴이거니 했었지만...
" 성가신 짓을 하는구나. "
찢어진 망토를 풀어 땅에 던지며, 땅에 박힌 발을 뽑아 멀쩡한 지반에 올려 일어선 솔로몬은 마력이 폭발한 탓에 더 이상 장갑으로 기능하지 못하게 된 천쪼가리를 버리고, 흙먼지가 온통 묻어있는 옷을 털었다. 은빛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몸을 푸는 그의 앞에는, 폭발로 인해 반으로 갈라진 데다가, 사방으로 찐득한 살점이 튄 마물이 꿈틀대고 있었고...그 갈라진 틈 사이로...마물의 것이 아닌, 인간의 팔과 다리가 마찬가지로 움찔대고 있었으며, 반으로 갈라진 살점이 뭉쳐지며 마물보다는 인간에 가까운 형태를 갖춰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팔과 다리는 우드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살점에 먹혀가고 있었으니.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을 노려보던 그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으려는 듯 땅을 박차고 나가 뭉쳐지고 있는 살덩이를 팔로 꿰뚫으려 했고.
화살은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아우로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원시림의 이파리들이 흔들렸고, 이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우로라가 그 사이에서 나는, 유쾌하지 않은 달콤한 향기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득해질 것 같은 느낌의 그것은 절대 좋은 것이 아니었다.
"!"
아우로라는 목을 꿰뚫려는 것을 황급히 피하곤 이를 악 물었다. 스쳤다. 하마터면 그대로 절명할 뻔 했다. 어깨에 스친 상처가 생기고 이내 피가 배어나오는 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모습을 드러낸 마물은 아무리 봐도, 인간형이었으니까.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지나치게 창백한 피부와 짙게 풍기는 달콤한 향기. 아우로라가 레이피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젠 인간마저 마물로 변하는 건가?"
아우로라가 눈을 형형히 치켜떴다. 폭음이 들려왔다. 아우로라가 지체하지 않고 레이피어에 마나를 담아 마물을 향해 거세게 휘둘렀다.
폭발 이후 주변에 휘날리는 나뭇잎과 흙먼지가 가라앉으며, 그 가운데에 선 솔로몬이 모습이 드러났고, 폭발을 견디지 못해 찢어진 소매를 가다듬으며 자신이 날려버린 살덩어리를 쳐다보았다. 기분 나쁜 마력을 내뿜으며 꾸물거리는 살덩어리는 다시금 인간의 형상을 취하기 시작했고, 방금 폭발시켰던 개체 이외에 다른 한 개체는 이미 온전히 사람의 형상을 취한 채 그를 빤히 보고 있었다.
아니,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눈에는 제대로 된 초점이 없어 제대로 살아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으니, 절로 드는 꺼림칙한 기분과 함께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하는지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채웠으나.
자신을 빤히 보고 선 것도 잠시, 빠른 속도로 달려든 마물의 공격에 뺨을 얕게 베이며 상황이 쉽게 풀리지는 않으리라고 직감한 그는 주먹에 마력을 실어가며 마물의 몸을 으깼다.
그 즈음, 아우로라와 마주한 소녀 형상의 마물은 아우로라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생기 없는 미소를 짓더니 사뿐사뿐 앞으로 나아오다가 아우로라가 휘두른 레이피어를 무언가로 쳐 튕겨낸다. 다만 그녀가 마나를 담은 게 효과가 있었는지 레이피어를 쳐낸 마물의 방어 수단이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부러진 채 바닥에 떨어진, 레이피어를 막은 게 무엇인가 하니 기괴하게 뒤틀린 뼈임을 확인할 수 있었고.
" 너, 덤 같은게 아니었구나? "
소름끼치도록 맑은 목소리와 함께 소녀는 우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달콤한 향을 흩뿌리며 처음에 아우로라를 노렸던 날카로운 뼈를 뽑아내 다시금 그녀를 꿰뚫으려고 했다.
아우로라를 노리던 뼈는 생각보다 단단한 편은 아닌지 레이피어와 부딪히며 박살이 났다, 그러나 박살난 뼈의 조각 역시 날카로운 것이어서, 2차적인 피해는 불가피해 보였다.
창백한 피부와 대비되는 검은 눈을 깜빡이며, 공격이 막힌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뼈를 뽑아내 아우로라에게 계속 공격을 퍼부었다.
" 누구든 이렇게 깊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거든, 그게 바로 우리가 나갈 때가 됐다는 신호가 될 테니까. "
물론 들어온 녀석들을 먹어치운 다음이겠지만. 이라고 재잘대는 목소리는 여전히 맑기만 하다.
..
원시림 가운데에 둥그렇게 파인 구덩이 가운데에 선 솔로몬은, 심호흡을 하며, 어느새 수십 체로 불어난 마물을 둘러보았다.
" 접근 방법이 잘못된 건가, 이렇게 시간을 끌 수는 없건만. "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에게 달려드는 마물 한 체를 쳐 쓰러트렸다. 전투력도, 방어력도 특출난 게 없다, 그저 조금 귀찮을 뿐이지만 끊임없이 분열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시간을 끈다는 목적을 완벽하게 달성하고 있는 눈 앞의 마물들을 보며 머리를 굴렸다. 아우로라와 타리크 쪽에도 분명 다른 마물이 따라붙었을 텐데, 고작 이런 마물에 발이 묶이다니.
인간을 재료로 만들어낸 비정상적인 마물, 그 마물을 만든 이는 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일을 벌이는 거지?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의문을 떨쳐내기가 어려웠다, 어쩌면 함정에 말려든 게 아닐까.
어제 봤다면 바로 답을 해줬을 텐데,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를 나눠 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부터 몰려와. 그럴 수 없었던 내 상황이 원망스럽고, 탈판이라는 결정을 내려야 했을 아우로라주에게 어떤 이야기도 전해주지 못한 게 슬프다. 나 스스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힘이 모자라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우로라와 아우로라주를 위해서 어떻게 하면 특별한 경험을 안겨 줄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글을 써왔는데, 이젠 더 이상 못 하겠구나. 이런 동기부여가 있었음에도 레스 하나를 써 내려가는게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던 나였는데, 이제 뭘 보고 글을 써야 하는 걸까. 언젠가 이별하는 건 당연한 거지만, 참치 어딘가에서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게 너무 아쉽네, 이런 좁은 곳에서조차 새로운 모습으로 마주칠 아우로라주를 보고 누군지 알아채기가 어려울 텐데, 이제 우리가 다시금 마주칠 가능성은 너무 희박해져 버렸어. 인연이니 뭐니 하는 것 까지는 아니었어도 함께해줘서 고마웠어, 탈판한다고 했으니 이걸 볼 수는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영영 내 마지막 말은 닿지 않을것만 같아서 후회가 된다.
상처입고 떠나는 때에도 정말 좋은 말만 해주고 가서 고마워, 부디 아우로라주의 삶에 딛고 넘어설 수 있는 희망이 가득하길 바랄게. 나도 뭔가 답하는 그림을 올리고 싶지만 상황이 여전히 여의치 않네. 그냥, 이제는 영영 볼 수 없을 테니, 아우로라에게 고백을 하는 솔로몬의 말이나 적고, 나도 이만 떠날게.
안녕, 솔로몬주. 사실 여긴 꿈이야! 상판을 하는 꿈이지! 농담이고 좋은 점심, 점심 잘 챙겨 먹었지? 안 챙겨먹었다면 지금이라도 먹도록 합시다~ 이렇게 안부인사 전하는 것도 오랜만이라 좀 낯선 감이 없지않아 있네. 빨리 익숙해지면 좋으련만. ㅎㅎ 것보다 저기 내 그림이 있었잖아? 으, 부끄러우니까 빨리 지워야겠다..@.@ 이게 아니지, 그동안 잘 지냈을까? 기다려줘서 정말 고마워. :>
이럴 수가... 꿈이라니 너무 슬픈걸ㅠㅜ 이게 꿈이면 더 오래 꾸고 싶다.. 물론 지금 난 멀쩡한 상태니까 꿈은 아니겠지! 응, 점심은 12시쯤 먹었어, 아우로라주도 먹었을까? 괜찮아 괜찮아, 금방 나아지겠지! 앗 그림 예쁜데 왜! 나도 저만큼이라도 그리고 싶은걸. 응, 이런저런 일이 있긴했지만 괜찮아!
솔로몬주는 잠에 빠져듭니다..레드썬! 이 아니지..들켜버렸네..이럴수가! 꺄악! 나도 점심은 먹었어, 솔로몬주도 잘 챙겨먹어서 다행이다. 이제 저녁 먹을 시간이 다가오지만 ㅋㅋㅋ.... 앞으로 차차 나아지겠지? 빨리 익숙해져서 도란도란 얘기도 하고싶고 그러네 ㅎㅎ~ 그리고 흑역사는 숙청이다! 에잇! 에잇! 일이라니, 나쁜 일이 아니었기를 바라. 으음..그래도 괜찮았다니 다행이네..
그것보다 고록 계획이랑 답록을 먼저 들어버려서 스포일러가 되어버렸잖아! 레드썬이아, 이것도 레드썬! 우린 아무것도 못 본거야. 알겠지? >:0
뼈가 레이피어와 부딪힐 때마다 박살이 났기에 정타는 확실히 피할 수 있었지만, 앞서 아우로라가 상처를 입었던 것처럼 뼈의 파편은 날카로운 편이어서 조금씩 부상이 쌓여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상태를 십분 이용해먹을 생각인지 아우로라가 계속해서 공격을 막아내더라도 새로운 뼈를 뽑아내며 공격을 시도하던 마물의 모습을 보면, 어째서 귀찮을 것 같긴 하지만 상관없다고 했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맞아, 설마 나 혼자서 다 해결하려고 하는 거겠어? 우리를 찾으러 들어오는 녀석들도 혼자 오는 게 아닐 텐데, 그 정도는 기본이지. "
여전히 별다른 긴장감 없이 재잘대며 마물은 아우로라가 총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며 살짝 고갤 기울였다. 저게 뭐였더라..? 아까 비슷한 걸 본 거 같기는 한데.
" 사냥이 힘든 만큼 결과는 달콤한 거야. "
그리곤 아우로라가 총의 방아쇠를 당기자, 발사된 마력탄을 막기 위해 뼈로 자신을 감싸던 마물은 다음 순간 뼈가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나가떨어졌다.
" ?????? "
물론 금새 다시 일어서기는 했지만 어깨 부분에 구멍이 뚫린 채 지금 벌어진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갤 갸웃거리던 마물은 상처가 천천히 메워지자 입을 열었다.
" 방금 건 좀 의외긴 하네... 그래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아. "
여긴 우리들에겐 천국이거든. 하면서 기분 좋은 듯 미소짓는 모습은 전혀 혐오스럽지 않은 외견이었으면서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
" 차라리 혼자 들어왔더라면. "
그는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는 마물들을 흘겨보면서 중얼거렸다. 성가시기 짝이 없는 장소였다. 이런 장소가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지는 알 수 없었으나 분명히 누군가의 손길이 닿았음은 분명했으리라. 그리고 이렇게, 어떤 식으로 토벌이 진행될지, 누가 원시림 안으로 들어올지도 알고 있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괘씸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대토벌이 실패하기를 바라는 것인가? 아니면 그 과정에서 유의미한 손실이 발생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인가? 일단 그는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집중하기로 했다.
인간이나, 보통의 마물이라면 즉사할 수준의 피해를 입혀도 살점이 남아있다면 새롭게 형체를 구성한다, 하나 하나의 강함은 별볼일없지만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점이 성가시다. 처음의 한 체에서 벌써 수십 체로 불어난 마물들을 보면서 그는 곰곰히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계속 불어날 수가 있지? 살점이 무한정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처음에 분쇄했던 마물의 크기를 생각하면 이 숫자는 말이 안 될 정도였다.
핵이 따로 있는 존재라면 진즉에 찾아내서 없앴을 텐데... 핵이 존재하지 않으니 이렇게 약한 게 분명했다, 그 말인 즉슨... 누군가 핵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그러니까... 멀리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는 건데.
솔로몬은 자신이 뭘 해야할지 생각하며 마물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지금은 피하는 게 옳다, 자신에게 유리한 전장만을 찾아서 싸우더라도 항상 승리할 수는 없는 판에 불리하기 짝이 없는 전장에서 소모전을 지속할 이유는 없다.
그렇게 물러서는 솔로몬을 뒤쫓는 마물들의 모습을 보며 다시금 솔로몬은 자신의 가설에 확신을 얻었다, 마물들은 장애물에 부딪히거나 걸려 넘어지는 등 오직 솔로몬만을 향해 오고 있었으니... 이는 자신을 노린 함정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문득 마물 몇 체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본 그는 의문을 품었다. 뭐지? 자신은 아무것도 한 게 없건만, 갑작스레 무너져 내리는 이유는... 핵의 역할을 하는 존재에게 급히 마력이 필요하게 된 건가.
멈춰 있다면 짙은 마나의 안개 때문에 마력의 기척을 찾아내기 어렵다. 하지만 지금처럼 계속해서 움직인다면 자연스레 안개는 흐트러질 터, 그는 마물들을 유인하며 마력의 흔적을 쫓았다.
전투가 늘어지기 시작했다. 아우로라는 볼이 피로 축축하게 젖어들어가는 느낌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이대로 소모전이 계속 된다면 아우로라가 불리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마물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계속해서 공격을 해왔고, 아우로라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물러서지 않는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그 말을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유효타. 마물을 두르고 있던 뼈가 박살나며 저 멀리 나가떨어지자 아우로라는 그 사이를 틈타 풀숲 구석에 숨어있던 당근이의 고삐를 쥐었다.
"당근아, 내 말 잘 들어야 해. 지금 당장 타리크 경을 따라가. 너라면 갈 수 있을 거야."
내 피를 묻히면 어련히 상황을 짐작하겠지. 마물이 일어나자 아우로라는 마물을 주시하며 고삐를 가볍게 당겼다 놓았고, 발굽 소리와 함께 말은 달리기 시작했다. 어깨의 구멍이 순식간에 메워지는 모습은 비위가 상했지만, 이 마물이 지나가게 놔두면 일어날 일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우로라는 마물이 미소짓는 모습에 총구를 겨눴다.
"그건 모르는 일이죠. 당신이 무덤 속으로 들어갈지...."
- 시체를 되살리거나 하는 마법이 그들의 특기니 말이오.
문득 아우로라는 솔로몬이 해주었던 마족에 대한 설명을 떠올렸다. 시체. 아우로라가 다시금 방아쇠를 당기려 하며 물었다.
"생각해보니 여긴 사교계도 아니니 예의는 그만 차려도 될 것 같네요."
마족은 시체를 되살리는 마법이 주특기이다. 사제는 참전하지 않았다. 인간을 닮은 마물이 나타났다.
나가떨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그 찰나의 시간에 빠르게 움직이는 아우로라를 보며 마물은 다시금 우드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뼈를 뽑아냈다. 자신에게 총구를 겨누는 모습에, 대처법을 생각하는 건지 아우로라를 바라본 채 원을 그리며 천천히 걷던 마물은, 갑작스레 땅을 박차고 아우로라에게 달려들었다.
" 무덤이라니 무슨 말이람, 무덤 같은 게 남아있을 리 없잖아? "
날카로운 뼈를 아우로라에게 뽑아내면서 마물은 미소를 지었다. 마물의 재료가 된 인물이 생전에 어떤 이였는지는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현재 저 마물의 모습은 자신의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했으니까.
" 그걸 왜 말해줘야 하는 걸까, 어차피 네 마력은 내 차지가 될 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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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체를 쓰러트릴 때마다 불어나기만 하는, 귀찮기 짝이 없는 마물을 일일히 상대하는 것을 포기하고 나무 사이를 내달리며 마물들이 자신을 쫓아오게끔 유도하던 솔로몬은, 자신과 마물들이 이동하면서 생긴, 마나층의 균열을 통해 현재 원시림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 본대 쪽은 아직 무사한가, 그럼 저기서 계속 일렁이는 건... "
아우로라.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 이건 자신의 실책일지도 모른다. 가뜩이나 소수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거기서 또 인원을 나누다니, 물론 그는 신경 쓸 것을 줄이고자 한 것 뿐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나머지 인원을 위험에 그대로 노출시킨 셈이 아닌가.
어떻게 하지? 영애 쪽으로 움직여야 하나? 타리크가 같이 있다면 그렇게까지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거라고 애써 생각을 가다듬으며 솔로몬은 허리춤에 찼던 검을 뽑아 들었다.
천천히 원을 그리며 걷는 마물을 보며 아우로라 또한 긴장한듯, 손이 희게 바랠 정도로 총의 손잡이를 쥐었다. 이윽고 땅을 박차고 달려드는 순간, 아우로라는 방아쇠를 당겼으나 총탄은 달려드는 마물을 빗나갔고, 아우로라는 이제 모두 끝이라는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에 쥐고 있던 총을 땅바닥에 툭, 하고 떨궜다.
"내 마력을 탐낸다니...안돼..."
그러나 아우로라는, 마물이 근처까지 다가오자 고삐를 쥐었던 팔, 정확히는 소매춤에 꽂힌 총을 꺼내들어 마물을 향해 겨눴다.
"내가 총이 두 자루라서 네가 다친단 말이야. 난 몰라, 그걸 깜빡하고 말하지 않았네?"
고개를 든 아우로라의 미소가 환히 빛났다. 마치 이 순간을 노렸다는 듯.
"오늘 누가 죽나 해보자고."
그리고 아우로라는 방아쇠를 당겼다.마물이 코앞까지 오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실패해도 상관은 없었다. 지금쯤이면 타리크 경은 본대에 도착해 상황을 알렸을 것이고, 당근이는 열심히 타리크 경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테니까. 이대로 시간을 조금 더 끈다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
먹혀 들었다! 그렇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튕겨 나가지도 않고, 허리만 꺾인 상태였다. 뒤로 꺾여버린 목은 기괴한 소리를 내며 돌아왔고, 아우로라는 새 살이 빠르게 돋아나는 마물을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어떻게..."
통하지 않았단 말이야? 그대로 시선을 내리자 땅에 박힌 뼈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배를 찌른 뼈. 아우로라는 헉, 소리와 함께 숨을 들이켰다. 어느새 피는 울컥 올라와 입 밖으로 흘러나왔고, 아우로라는 강한 고통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 죽는 걸까?
"안돼.."
안 된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이대로라면 본대도 무너질 것이다. 가족도 볼 수 없을 것이고, 공작저에서 보냈던 안온한 일상도 무너질 것이다. 공작님은 무사하실까? 공작님은..
"공작님..."
공작님께서 데뷔탕트 때 같이 춤도 춰주신다고 약속했는데. 공작님께 하고 싶은 얘기가 아직 많은데. 아직 손에 꼽지 못할 정도로 손을 잡아주지도 못했는데. 매번 도움만 받고, 내가 공작님을 지켜주지 못했는데. 아우로라는 마음을 다잡은듯 마물의 어깨를 그대로 붙잡으려 했다.
"절대 못 보내줘. 공작님껜..절대로 보내줄 수 없어..!!"
이 공간에서 마나를 개방하거나 마법을 사용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알고 있다. 폐인이 되거나, 마나를 감당하지 못하고 죽을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못하고 죽어서 길을 터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 마나가 그렇게 탐이 나? 그러면 가져. 대신 좋게 주진 않을 거야."
미세하게나마 개방되기 시작하는 마나, 그리고 아우로라는 폭발 마법의 시동인을 읊기 시작했다.
그동안 많이 기쁘고 누렸으니, 이제 다른 사람들의 평온한 일상을 위해 이정도는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잠식한다. 만약 내가 살아남아서, 저 마물이 날뛰게 된다면. 그 처참한 광경을 눈으로 봐야만 한다면.
그만큼 끔찍한 광경은 없겠지. 그럼, 그렇다고 이대로 마냥 희생 해야만 할까? 싫다! 드미트리가 내세웠던 이상적인 황태자비와 다를 것이 하나 없는 삶으로 끝나고 싶진 않다!
아우로라는 목을 향해 다가오는 뼈를 똑바로 응시했고, 뼈가 멈추면서 마물의 안에 남아있는 마력이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신이 내린 기회나 다름이 없었다.
"네 편이면 내 편으로도 만들 수 있는 법이야. 그게 제국 최고의 레이디가 알려주는 사교계의 법칙이니까 잘 배워둬."
희생하되 살아남을 것이다. 양극적인 감정이 한꺼번에 물밀듯 치고 올랐다. 살아서 할 얘기가 많다. 취람빛으로 물들었던 푸른 달 꽃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자신이 만든 케이크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 손이 얼마나 의지가 되었는지, 같이 늑대를 타고 달렸을 때 얼마나 신이 났는지..그리고 얼마나 감사한지.
"아까 차가워서 기분 좋다고 했지?"
단순한 폭발로는 살이 메워지고 돋아날 것이다. 그렇다면, 아우로라의 시동인에 맞춰 다른 마법진 하나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난 차가운 걸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 스노우디아의 겨울은 한 번 얼어 붙으면 영영 녹질 않거든."
빙결과 폭발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좋은 조합이었다. 아우로라는 시동인을 모두 읊어내렸고, 거대한 마법진이 펼쳐지자 눈을 감았다. 시린 혹한을 담은 폭발이 원시림의 짙은 마나로 순식간에 주위를 휩쓸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그리고, 자신이 살아남길 바라면서.
좋은 저녁! 저녁 먹었지? 답레가 늦어서 미안해~ ㅠㅠ 오늘은 무지무지 예쁜 픽크루를 발견해서 오랜만에 픽크루를 가져와봤어! 내가 생각하는 아우로라랑 똑 닮아서 놀랐지 뭐야 ㅎㅎ! 요즘 예쁜 픽크루가 계속 생겨서 좋은 것 같아! https://picrew.me/image_maker/285726
로브 때문에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잘 보이지 않는, 아마 이 원시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주모자일 것으로 보이는 이는 낮게 한탄하듯 이야기했다. 솔로몬은 그런 그에게 검을 겨눈 채 천천히 다가갔고, 로브를 입은 상대방은 다 포기한 상태인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 묻고 싶은 게 많다만, 볼일이 네게만 있는 게 아니라서 말이다, 자, 순순히 따라온다면 지금 목이 떨어지지는 않을 거다. "
그거 안타깝소. 라고 대답하며 로브를 벗은 상대방의 모습을 본 솔로몬의 눈이 잠시 크게 뜨였다가 가늘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로브에 가려져 있던 그의 하반신이 그가 앉은 바위와 일체화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런가, 이미 늦었나. " " 그렇지, 이미 늦었소, 이미 모든 것은 제 모습을 잃어 가고 있지. "
하반신이 바위와 일체화 되어가고 있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 그 표정에는 분노나 공포는 없었고, 그저 허탈감만이 엿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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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난 이 안에서 태어났어, 내가 먹고 자란 것도 이 마력이라고, 그게 어떻게 네 편이 된다는 거야? "
이해할 수가 없다며 아우로라를 보고 움직이려는 듯 몸부림치던 마물은, 아우로라가 스노우디아의 겨울을 이야기하며 시동인을 읊자. 그나마 조금씩 꿈틀거리던 몸 곳곳에 담긴 아우로라의 마력이 냉기를 내뿜기 시작하는 감각에 눈을 크게 떴다.
얼어붙는다, 얼어붙어. 꽁꽁 얼어 버려, 아, 뭘 잘못한 거지? 지금은 때가 아니었던 건가?
" 잠깐 만 기 다려- "
입가조차 한기에 굳어가기 시작하는 듯 느릿느릿 이야기를 꺼내는 마물의 눈동자가 불안감인지 무엇인지 마구 흔들린다. 하지만 이미 늦었겠지. 아우로라와 마물을 중심으로 생겨난 마법진이 작동하면서 일대에는 한겨울과 같은 한기를 담은 마력이 불어닥쳤다.
자신의 마력만을 이용한 마법이었다면 큰 영향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원시림 내에 있는 뒤틀린 마력이 아우로라의 마력에 동조하여 규모가 커진 데다가, 묘하게 뒤틀림으로 인해 사용자조차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그야말로 자연이 보여주는 힘의 편린과도 같은 마법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우로라는 싸늘한 시선으로 얼어붙어가는 마물을 마주했다. 관통한 뼈를 내버려두면 자기 자신도 얼어붙을 게 뻔했다. 또 다시 위험을 감수하며 아우로라는 뒤로 물러났다. 배를 관통한 뼈가 빠져나오자 다시 한 번 고통이 밀려왔고, 아우로라는 그대로 숨을 들이키며 자리에 주저 앉았다. 마침 시선 만치나 싸늘한 냉기가 휘몰아쳤다.
이제 끝이다.
그래, 이 정도면 잘 한 거겠지. 마물도 없앴고, 전투는 승리로 기록 될 것이고, 그리고...아우로라는 몸을 웅크렸다. 밀려오는 고통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참 추웠다.
뒤틀린 마나로 인해 마법의 영향이 내게도 오는 걸까? 하지만 난 추위를 별로 타지 않는데...아우로라는 피가 새어나오지 않도록 상처 부위를 꾹 눌렀다. 체력이 조금만 더 됐더라면 가벼운 치료 마법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이젠 마법을 쓸 힘도 남아있지 않는 것 같았다. 뽀얀 입김이 입 바깥으로 새어나왔다. 아우로라는 고개를 들었다.
온통 새하얗다. 꼭 스노우디아의 겨울을 보는 것 같네. 자연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익숙한 새하얌 사이에서 말발굽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공작님은...무사..하실까..."
타리크 경이 자신의 이름을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와 함께 아우로라는 눈을 감았다. 눈을 뜨면 모든 나쁜 상황이 끝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갱신이야! 좋은 저녁! 어제 다들 투표 때문에 나온 김에 다들 돌아다녔나봐. 장보러 나갔다가 사람이 바글바글해서 깜짝 놀랐어. ㅎㅎ 그런게 거짓말처럼 오늘은 또 사람이 적더라고.. 맞아, 봄이니 해가 따뜻해서 좋지만 바람이 너무 차가워. ㅠㅠ! 꽃샘추위도 빨리 가셨으면 좋겠다~ 오늘도 좋은 하루, 감기 조심해!
뭐라 말을 이어가려는 듯 보였던 마물은 그대로 얼어붙었고, 잠시 뒤 몸 안에서부터 일어난, 마치 냉기의 폭붕과도 같은 마력의 흐름에 마물은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얼어붙은 채 산산히 깨진 것처럼 사방으로 퍼진 마물은, 타리크가 도착할 즈음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정말 마물의 시간이 끝을 고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우로라는 마물과 마주쳐 살아남았다.
" 다 끝났소, 전부 다... "
하반신이 바위와 일체화 된 노인. 노인의 몸은 솔로몬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점점 몸이 굳어가는 듯 보였다. 상반신이 아래부터 천천히 굳어가는 것이 명백히 느껴질 정도로, 이제는 숨을 내쉬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노인을 보면서 솔로몬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표현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는 듯 보였다.
" 이미 늦었다는 건 안다, 넌 그야말로 몰락하고 있으니까... 그런 건 관심 없다. 대체 누가 널 이렇게까지 하게 만들었는지가 중요하지, 말해라. " " ...... "
그런 솔로몬의 표정을 보던 노인은, 아우로라의 마력이 일으킨 폭풍에 휘말려 사라진 마물을 느낀 듯, 고개를 푹 숙였다.
"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원하지는 마시오, 알다시피 나는 미끼일 뿐... "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솔로몬에게 이야기를 하는 그. 그런 그를 바라보는 솔로몬의 뒤로 말발굽 소리가 들려 오고, 곧 노인의 목소리는 묻히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계속해서 입술을 움직였고, 그런 그에게 가만히 시선을 고정하던 솔로몬은, 말발굽 소리가 멈춘 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 곳에는 자신의 말이 이끄는 대로 자신을 찾아온 몇 명의 기사가 있었다. 용기사들은 방금까지 본대가 마물들의 습격을 받았으나, 갑자기 마물들이 공격을 멈추고 한 곳으로 몰려가자 그 뒤를 밟았다며 솔로몬을 찾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그리곤 그가 방금까지 보고 있던 게 무엇인지를 물었으나, 솔로몬은 손을 내저으며 자신의 흑마에 올라탔고, 본대가 기다리고 있을 거점으로 향했다. 그렇게 공작과 기사들이 떠난 자리, 그 자리에는 누군가가 정성스럽게 조각한 것 같은 노인의 모습을 한 바위만이 남아 있었다.
타리크가 말을 몰고 도착했을 때 아우로라의 주변은 새하얗게 얼어붙어 있었다. 상황으로 보아 아우로라가 마법을 썼음을 짐작했으나, 주변엔 마물의 흔적이 전무했다. 타리크는 부상을 입은 아우로라를 말 위에 올렸다.
"일 났군 그래."
타리크는 귀족도 아니고 일개 기사에 불과했지만, 지금까지 굴러온 경험으로 마땅한 증거가 없다는 것이 불러올 위험을 잘 알고 있었다. 귀족파의 여러 귀족들이 이 사건을 빌미로 솔로몬 공작을 조여올 것이다. 증거가 없으니 터무니 없는 사실을 진실인 양 떠들어 댈 것이고, 아가씨가 무슨 말을 늘어놓아도 듣지 않을 것이다. 암살이라고 떠들 가능성도 농후했다. 이 기회를 틈타 숙적이나 중요한 귀족이 죽는 경우도 허다했으니까. 타리크는 불안한 마음을 뒤로하고 본대가 있을 거점으로 말을 몰고는, 주변을 주욱 둘러보았다. 솔로몬 공작은 도착했는가? 치료 마법이 가능한 마법사는?
기사들과 함께 본대로 돌아왔을 때, 그 곳에 아우로라와 타리크는 없었다. 뭔가 상황이 잘못되고 있음을 느낀 솔로몬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본대를 지키던 기사들에게 묻는다.
" 습격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부상자는? 나 이외에 선발대는 돌아오지 않았나? "
다행스럽게도 부상자는 많지 않았으나, 혹시나 싶어 물었던 두 번째 질문에는 아무도 그가 원하는 답을 해주지 못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에 솔로몬은 인상을 찡그리며 원시림 안에서 마주쳤던, 아마도 현인이었을 노인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말머리를 돌렸다.
" 거점을 굳혀라, 두 사람은 내가 찾아 볼 테니 절대 이동해선 안 된다. "
미끼, 그 노인은 자신을 미끼라고 이야기했다. 그게 틀린 게 아니라는 걸 차근차근 증명해 보이는 것처럼, 원시림 안의 짙은 마나는 한결 가벼워지긴 했으나 여전히 어둡고 무거운 편이었고, 여전히 이 곳은 바깥과 단절된 채 뭔가를 끊임없이 준비해 오던 장소라는 걸 강조하듯 그를 비롯한 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으음 갱신할게. 다른 건 아니고, 뭐라고 해야 하나 아무래도 중간에 쉰 시간도 있고, 내가 일대일 자체에 익숙하지 않은 것도 있어서 진행이 좀 매끄럽지 않은 거 같아서 말이야. 일단 지금 건 어떻게 끝낼지 생각해 놨는데 앞으로 어떤 식으로 진행하는게 서로 편할까 싶어서, 한번쯤 얘기해보고 싶어.
갱신할게, 그렇구나. 생각해보니 진행이 매끄럽지 않긴 하겠다. 우리가 같은 뇌를 가지고 서로 스토리를 공유하는 것도 아니구 ㅋ큐ㅠㅠ...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해! 우리끼리 조율하는 것이 있어야 일대일이니까~ 솔로몬주는 어떤 식으로 진행하길 바라는지 혹시 들을 수 있을까?
다시 왔어! 맞아 맞아, 스토리를 공유하는 게 아니라 서로 맞춰가는 게 되니까 약간 뭐라고 해야하나... 진행?이 늘어지기도 하고 그런 부분이 있어서. 으음 그래서 내 생각이 뭐냐면, 서로 한 파트씩 맡아서 리드한다! 라는 느낌으로 해보는 건 어떨까? 이번 대토벌까지는 기존 방식대로 진행해 보고, 서로가 서로의 임시 길잡이가 되어주는 느낌으로?
마법사는 없지만 사냥꾼은 있다. 노련한 자들이니 마물이 돌진하거나 하는 위험이 있더라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다행이었다. 타리크는 아우로라의 안색을 살폈다. 아직은 괜찮지만 계속 내버려두면 버티는 것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아무리 아카데미흘 수석으로 졸업하고 마법을 대단하게 사용하더라도 그간 영애와 황태자비로 살아온 세월로 약해진 체력은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니까.
이번 전투에 사제가 없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도 큰 오산이었다. 아직도 의문인 점이지만 생각을 접기로 한 타리크는 사냥꾼에게 정중히 말했다
"아가씨께서 마물과 전투를 벌이다 큰 부상을 입었소. 빨리 본대로 돌아가야 하는데, 본대와 떨어져 찾기가 어렵군. 본대는 어디에 있는지 안내를 부탁해도 되겠소?"
타리크는 잠깐 불안한 표정으로 아우로라의 환부를 다시금 살폈더. 역시 상처가 깊다. 대체 무엇에 찔린 거지? 날카롭다기엔 뭉툭하고, 뭉툭하기엔 날카로운데도 깊다. 사냥꾼은 알고 있을까?
"그리고 영애의 상처를 보아하니 여태까지 상대한 마물중 이런 상처를 내는 마물은 없었소. 새로운 마물이 나타난 것이 아닐까 추측중이오."
부상을 입은 아우로라, 그리고 그런 아우로라를 보호하며 이동하던 타리크와 마주친 사냥꾼들은 타리크의 행동을 통해 아우로라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듯 보였다. 그리곤 타리크가 정중하게 하는 말에 사냥꾼들 중 아마도 우두머리에 가까워 보이는 이가 가죽으로 된 모자를 벗으며 이야기했다.
" 본대라면 따라오시면 됩니다, 그보다 부상이 심하다고 하셨는데... "
영애를, 그것도 후작가의 영애의 상처를 함부로 볼 수도 없는 노릇, 하지만 타리크가 환부를 살펴본 뒤에 상처를 설명해 주자 사냥꾼은 잠시 고민하더니 가죽으로 되어 있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가만 보니 풀처럼 보이는데, 사냥꾼의 말로는 약초라고 한다.
" 제 눈에도 그렇습니다, 그래도 유사한 상처를 떠올려 보자면... 늑골이 박살났을 때 그 늑골이 폐를 질러 낸 상처와 유사해 보이는군요. "
그러니까... 뼈와 비슷한 무언가에 찔렸을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였다. 아무튼 얇은 천으로 약초를 감싼 뒤, 근처에서 평평한 돌 하나를 찾아 그 위에 올려놓고 약초를 짓이기기 시작한 사냥꾼은, 약초에서 나온 즙으로 적셔진 천을 타리크에게 내밀었다.
" 이걸 환부에 붙이면 좀 나을 겁니다, 이 정도로 큰 상처를 완전히 없애는 건 아무래도 무리지만 급한 불부터 꺼야겠지요. "
그즈음 솔로몬은 급작스레 조용해진 원시림을 돌아다니며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분명히 그 노인이 이 원시림 내부에 영향을 미치고 있던 건 맞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분위기가 바뀔 수 있는 건가? 아무래도 여전히 함정에 빠져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 솔로몬은, 말머리를 돌리려다가 자신을 찾아온 사냥꾼 몇과 마주쳤다.
" 공작님, 찾았습니다. " " 다행이로군, 다른 건? "
영애가 부상을 입은 것 같다며 덧붙이는 사냥꾼의 말에 솔로몬의 눈썹이 잠깐 꿈틀대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은 채 사냥꾼에게 안내를 명령했다. 그와 동시에 뒤에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 본대에 남겨두었던 기사 몇이 부상을 입은 채 급하게 솔로몬에게 달려오고 있었으니, 마찬가지로 부상을 입은 종자들 역시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모양새인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솔로몬이 대체 무슨 일이냐는 듯 기사와 종자들을 쳐다보자 마치 패잔병 같은 이들을 이끌고 있던 기사가 숨을 헐떡이며 이야기했다.
" 헉...함정입니다... 마물이 아니라...헉... " " 물을 좀 가져다 주거라. "
솔로몬의 말에 반응하여 사냥꾼이 물을 건네자, 기사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숨을 가다듬었다.
" 그것이... 공작님께서 낙오된 분들을 찾으러 나서신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습격을 받았습니다, 지금 본대는 궤멸 상태입니다. " "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거라, 그리고 너희들은 서둘러 영애에게 돌아가 본대가 아닌 이 쪽으로 인도해라, 본대는 위험하다. "
기사에게 말을 재촉하며 솔로몬은 자신을 안내하기로 했던 사냥꾼에게 은화를 쥐어준 뒤 서둘러 아우로라와 타리크 쪽으로 보냈다.
아마도 우두머리에 가까워 보이는 자. 그는 본대로 안내하겠다 하였고, 본대는 안전하겠지, 지금 쯤이면 어느정도 토벌은 끝났을 것이고, 사람들이 치료를 받을 것이다. 마법사들이 사제를 대신해 치료를 하고 있겠지만, 아가씨의 치료를 도와줄 마법사가 있느냐가 앞으로의 문제였다. 지금은 1분 1초가 위급한 상황이지만, 이 상황에서 불안해하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기에 타리크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위협적인 공격을 하는 마물은 없었는데..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타리크는 사냥꾼이 약초의 즙에 적셔진 천을 내밀자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아우로라의 환부에 천을 붙이던 타리크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깊게 생각했다. 잠자리형 마물과 더불어 아가씨께 상처를 남긴 위협적인 마물의 출현, 거기다 사제가 참전하지 않은 사실까지. 여러 악재가 한꺼번에 겹치는 것이 이렇게 흔한 일이었나?
"고맙소. 이 은혜는 언젠가 꼭 갚도록 하겠소."
타리크는 아우로라가 말에서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붙들고 고뻬를 다시금 쥐었다. 이제 본대로 가야겠지. 타리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안내를 해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타리크의 말에 자신도 마찬가지라며 이야기한 사냥꾼은, 타리크가 아우로라의 환부에 천을 붙인 뒤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자 머리를 긁적인다.
" 별 거 아닙니다, 사제들에게 치료를 받는 게 쉬운 게 아니니까요. "
마법사에게도 마찬가지고. 그의 말처럼, 서민들은 마법에 대한 혜택과는 조금 거리가 멀었다, 마법을 쓰고, 마법에 의해 보호받고 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여전히 현실감 없는 이야기었던 거겠지. 아무튼 타리크가 말고삐를 단단히 붙들고 고갤 끄덕이자 무슨 의도인지 알아챈 듯 역시 고갤 끄덕인 사냥꾼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다행스럽게도 별로 멀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뭐가 나올지 모르니 조심해서 따라오시길. "
사냥꾼들은 타리크와 아우로라를 찾아서 지나온 길을 되짚어 가며, 그들이 남겨 놓은 표시를 확인했다. 그렇게 얼마쯤 갔을까, 사냥꾼이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뭔가 발견한 듯 그 멈칫했다.
" 아니... "
그 즈음, 사냥꾼을 아우로라와 타리크 쪽으로 보낸 솔로몬은, 자신을 찾아온 기사와 종자들이 휴식을 취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가만히 그들의 모습을 살피던 그는 패잔병이라기에는 기사들의 숫자가 여전히 많다는 것과, 생각보다 그들의 부상이 심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말의 상태가 심한 전투를 치르고 도망쳐 온 것 같지 않은 것 같자 의문을 품는다. 그러고 보니 이 와중에도 면갑을 벗지 않는 이도 있었고.
언젠가는 바뀔 것이라는 이야기.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냥꾼의 표정은 반쯤 체념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조차도 자라오면서 그의 부모님께 그러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왔을 것이고, 그의 부모님 역시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기약 없는 희망.
" 예, 저기... "
잠시 멈췄던 사냥꾼이 손을 들어 가리킨 쪽에는 널부러진 시체와, 아직 숨이 붙은 채 신음하는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본대의 대열은 온데간데없이, 아무리 봐도 궤멸 직전까지 몰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상황. 사냥꾼들은 바로 움직여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기사들의 상처를 확인했고, 할 수 있는 한 응급처치를 했다.
" 이상하군... 어째서 검상을 입었지? "
사냥꾼들이 기사들의 상처를 살피며 이상하다고 이야기하는 동안 솔로몬이 보냈던 사냥꾼 무리가 합류하고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가 타리크 쪽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 상황이 심상찮습니다, 최대한 빨리 공작님과 합류해야 할 것 같습니다. "
그리곤 의아해 할 타리크에게 몇 가지 알아낸 사실을 설명한다. 본대가 갑작스레 습격을 받았으며, 솔로몬에게 합류한 기사들이 있었다, 그들 주장으로는 마물의 습격이었다고.
"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 정도로 큰 싸움을 벌였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지금 보시는 대로 이렇게 아군이 살아남았는데 두고 갈 이유도 없지 않겠습니까? "
아이들에게. 타리크는 반쯤 체념한 표정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대물림되는 이야기였겠지. 자신의 실수였다. 그렇지만 일말의 희망마저 놓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왜 일까. 아무리 질리도록 들어왔어도 흥미로운 이야기처럼. 타리크는 생각을 멈추고 사냥꾼이 가리킨 쪽을 바라보았다.
"맙소사. 이게 무슨 일이지?"
궤멸 직전까지 몰렸다는 것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널부러진 시체, 그리고...숨이 붙은 기사? 타리크는 강한 의문을 느끼고, 말머리를 조심스럽게 돌려 시체쪽으로 향했다.
"검상이군."
멀리서 봐도 알 수 있었다. 이건 검상이다. 몇 시체를 유심히 살피던 타리크는 상황을 듣곤 미간을 좁혔다. 검상과 마물의 습격. 검을 든 마물이 아니라면 이럴리가 없지.
"..그렇소. 아군이 살아남았는데 두고 가는 건 마물의 습격이라기엔 너무 인간적이지."
자칫하면 최악의 대토벌이 되겠구만. 타리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말의 고삐를 강하게 쥐었다.
임시 거점을 만드는 속도가 빨랐다. 역시 노련한 사냥꾼이라는 것인가. 타리크는 그동안 무슨 일인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첫째. 원시림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아우로라 아가씨는 마법을 사용했고, 마물과의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었다. 둘째. 전투가 벌어지는 틈을 노려 사건이 발생했다. 셋째. 본대는 궤멸 직전이고, 원인은 불명이다. 아무리 마물의 습격이라 주장해도 검상은 쉽게 납득할 수 없다.
종합하자면 이번 대토벌은 무언가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인가. 시기가 좋지 않군. 타리크는 나름 생각을 마치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임시 거점을 구축하는 일은 끝이 났고, 이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소. 공작님께서 부디 무사하셔야 할텐데..물론 강하신 분이니 안심은 되지만, 아무래도 이렇게 불길한 일이 가득하니 걱정이 되서 원..."
준비가 끝이 나고, 길을 아는 자는 먼저 나아가 달라는 타리크의 말에 사냥꾼들은 원시림을 앞장서 나아가면서 기사들이 지나갔을 것으로 판단되는 흔적들을 짚어간다.
또한 솔로몬이 보냈던 사냥꾼들의 인도도 있었기에 그들이 길을 잃는 일은 없었다. 문제는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옅어진 마나층을 뚫고 뭔가 터지는 소리, 파열음,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기 시작했다는 것일까.
소리는 점점 커지는가 싶더니, 쾅, 하고 큰 소리와 함께 아마도 솔로몬이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곳으로부터 충격이 넓게 퍼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그 충격과 함께 원시림의 공기층에 실려 있던 짙은 마나가 퍼지고, 그 마나를 밀어낸 취람빛의 마나가 자연스럽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이에게 스며들었다.
으음 갱신할게... 뭐라고 해야 하나...눈에 띄게 글 구성 수준이 바닥을 치고 있다고 해야 할까, 묘하게 슬럼프 온 거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다시 읽어본다고 해서 뭔가 더 나은 것도 생각이 안 나고.. 뭔가 요즘 붕 떠 있는 느낌이라서 좀 미안하네.. 음 징징거리려고 쓴 건 아닌데 흠;; 그냥 오늘 하루 잘 보냈나 싶어서 남겨!
좋은 저녁이야, 솔로몬주! 답레가 늦어서 미안해. 어제부터 몸이 좋지 않아서 답레를 주지 못했네. ㅠㅠ... 나는 괜찮다고 생각해. 조급해하지 말구 천천히 쓰다보면 괜찮아 질거라고 믿어. 쉬고싶다면 조금 쉬고 오는 것도 괜찮구. 전혀 징징거리는게 아니니까 걱정 말라구! 나는 하루를 잘 보냈어. 솔로몬주도 좋은 하루 보내길 바라!
길을 잃거나 하는 문제는 없었지만, 막상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옅어진 마나층을 맹렬하게 파고드는 파열음과 폭음, 그리고 엄습하는 불안감. 타리크는 불길한 예감이 현실이 되었음에 탄식을 흘렸고, 취람빛의 마나가 퍼져나가자 아우로라가 말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타리크는 무언가 심상치 않음에 한 손에 자신의 도끼를 쥐었고, 그 사이 아우로라는 스며든 마나에 그나마 정신을 차리는 것 같았다. 고갈되고 원시림의 짙은 마나에 어지럽혀진 아우로라의 마나가 돌아오고 있는 징조였다.
"으.."
타리크는 그 작은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말을 맹렬한 기세로 몰려 했다. 솔로몬을 찾기 위함이었고, 무모한 전쟁의 싹을 끊기 위함이었다.
방심했다. 내부에 적이 있을 거라고 어렴풋이 짐작했고, 항상 뒤에서 어떤 수를 쓸 수 없는 게 정치의 생리이거늘. 대토벌의 전략을 이야기하던 이들 전부가 대토벌이 끝날 때까지 아무 일 없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다고 이야기했었지. 그게 외부적인 요인이든 내부적인 요인이든 정치판 위에 올라탄 이들이라면 언제나 조심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아우로라에게 이야기했었건만.
정작 자신이 그걸 조금 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쾅.
하고 폭발하는 소리가 다시금 울린다. 소리의 중심에 선 남자는 찢어진 옷의 끝자락이 휘날리는 것을 보면서 쯧, 하고 혀를 찬다. 그의 구릿빛 피부는 크고 두꺼운 나무의 잎으로 인해 드리워진 그림자 때문인지 더욱 어둡게 보였고, 자연스레 그의 팔을 타고 흐르는 한 줄기의 피 역시 검게만 보인다.
" 커어...억.... "
피가 끓는 듯한 신음소리를 흘리며, 솔로몬에게 도움을 청하고자 왔던 기사들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긴 그는 벌레를 보듯 그들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방심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
멍청하긴. 잠시 숨을 고르며 주변을 스윽 둘러본 그는, 이들의 숨통을 확실히 끊어놓을지, 아니면 어떻게 할지를 고민했다. 기사가 데리고 온 이들은 대부분 마족의 표식을 지니고 있었다, 분명히 마족은 아니었음에도... 대체 무슨 일이 꾸며지고 있는 거지? 죽어가는 기사의 투구를 쳐 벗겨내고, 그가 또 다른 무언가를 지니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던 그는 뭔가 발견한 것인지 말 없이 잡았던 손을 놓아 기사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둔다.
" ...... "
방금 내가 뭘 본 거지? 그 곳엔 황실의, 그것도 사제의 문장이 있었다! 애초에 기사가 아니었던가? 아니, 기사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단지 축복을 했을 뿐인가? 자신에게 이 정도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공격을 했다는 걸 떠올리면 축복을 받았을 가능성은 크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기사가 사제의 문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 사제의 문장을 보유한 기사, 사제들을 보호하는 의무를 지닌 기사단도 물론 있지만 이 기사는 그 기사단에 속한 이가 아니다.
뭔가 벌어지고 있다. 순간 자신을 누군가 보고 있는 느낌에 시선을 마력을 담아 시선을 움직이니, 그를 감시하던 사역마 하나가 마력에 쬐여 그 자리에서 터져 사라진다.
" 감시까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 "
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그가 잠시 신경을 다른 곳에 둔 사이 부풀어오르던 기사들의 시체가 폭발했다. 이게 바로 타리크가 느낀 폭발이었고, 기사들의 시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 장소에, 겉옷이 누더기처럼 된 솔로몬만이 남아 있었다.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맞불을 놓기 위해 자신의 마력을 사방으로 흩뿌렸던 솔로몬은 먼지를 털어내면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시선을 옮겼다. 나를 처리하기 위해 오는 증원인가? 그렇다면 본대는? 아우로라는? 원시림 바깥은? 그는 마력을 끌어올리며 말발굽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적이라면, 그 자리에서 먼지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다짐하면서.
타리크는 이 혼란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생각하려 했다. 폭발을 일으키는 마물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없거니와, 아무리 자신이 아둔하다고 해도 방금 전 바람을 타고 흘러오는 소리는 죽어가는 사람의 소리였다.
"이게 무슨..."
지금까지 타리크는 대토벌에서 술수를 부려 죽어나가는 귀족을 여럿 보며 귀족들은 참 힘든 삶을 사는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이렇게까지 심했던 적은 또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이 일은 분명 귀족 사회의 귀에도 들어갈 터. 대체 누가 이런 간 큰 행동을 감행했을까. 아니,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일이 달라지겠지만...
"아니길 빌어야지."
불경한 생각이다. 타리크는 흙먼지에 시야가 가려지자 도끼를 휘둘러 먼지를 걷어냈고, 이내 말의 속도를 점점 늦추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맹렬하던 말발굽 소리는 점차 느려지기 시작했고, 타리크는 그제서야 도끼를 등 뒤로 거두고 주변을 바라볼 수 있었다. 주변은 잔해밖에 남아있지 않다. 온전한 사람의 형상을 찾긴 어려웠고, 그 사이의 온전한 형체는 겉옷이 누더기가 된지 오래였다. 타리크가 외쳤다.
"공작님, 접니다!!"
부디 마력을 거둬달라는듯한 모습과 함께 타리크는 축 늘어진 아우로라의 목을 가누는 듯 싶었다.
갱신할게, 오늘은 날씨가 참 좋은 것 같아. 며칠 전 까지만 해도 바람이 쌀쌀했는데, 오늘은 바람이 포근하니 딱 봄날씨였어. 코로나가 슬슬 진정되가는 분위기지만 아직 안심하긴 이른 것 같네. 언제쯤 마스크를 쓰지 않고도 나갈 수 있는 날이 올까? 항상 건강 조심하길 바라! 오늘도 좋은 하루!
갱신할게! 오늘은 갑작스레 확 따뜻해진 거 같아, 최고 기온이 27도라고 하더라고, 평소처럼 입었는데 좀 덥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 으음 아직 완전히 코로나가 사그라든 건 아니지만 그래도 굉장히 많이 상황이 나아지고 있으니까...금방 바깥에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아우로라주도 항상 건강 조심하고 좋은 하루 보내!
좋은 새벽! 오늘은 기쁜 날이야! 느긋한 주말, 황금연휴! 오늘은 한 번 밖에 나가볼까 해. 부디 따뜻한 바람이 불고 맑길 바라고 있고. ㅎㅎ 솔로몬주는 어제 하루 잘 지냈을까? 오늘 하루도 잘 지냈으면 좋겠다. 아우로라랑 솔로몬도 이번 대토벌이 끝나면 따뜻한 바람과 맑은 날씨 아래에서 즐거운 나날을 보낼 수 있겠지? 일해라 솔로몬주! 나도 일할테니!(??) ㅋㅋ 농담이구, 항상 행복한 하루 보내길 바라!
타리크가 자신에게 순순히 아우로라를 맡기자, 조심스레 아우로라를 안아 든 솔로몬은 잠시 그 자리에 앉았다. 한쪽 팔과, 땅에 앉으면서 충분히 받침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된 두 다리로 아우로라를 받치며 그녀의 머리칼을 정리하며 아우로라가 입은 상처를 살피던 그는,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는 타리크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직후, 아우로라가 마법을 쓴 흔적이 남아있었다는 말에, 그는 시선을 들어 타리크에게 향했다.
" 마법...? 이 안에서? "
분명 이야기했었지, 변질된 마나로 가득찬 곳에서 쓰는 마법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만 한다고. 자신 내부에 있는 마력 외에도, 체외의 마력을 끌어다 쓰는 것은 마법사라면 기본 소양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었는데. 체내에 불순물이 흐른다면 당연히 문제가 될 거라고.
하지만 이 상처는...
" 마법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상대였던 모양이군. "
솔로몬은 아우로라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손을 들어 그녀의 환부를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그러자 아우로라의 몸을 취람빛 마력이 은은하게 감싸는가 싶더니 아우로라에게 흡수된다, 아무리 솔로몬이라고 해도, 이렇게 쇠약해진 소녀를 이렇게 열악하기 그지없는 환경에서 치료하려면 고도의 집중력을 요했기 때문에 그는 일단 그녀가 정신을 차릴 수 있게끔 만들어 보려고 하는 듯했다.
좋은 저녁, 솔로몬주! 오늘 하루는 즐겁게 보냈을까? 오늘은 주말의 끝인데도 그렇게 아쉽지가 않네. ㅎㅎ~ 5월이 되자마자 날씨가 따뜻해져서 여러모로 고민이야. 반팔을 입자니 조금 그렇구 또 긴 옷을 입자니 덥네. ㅠㅠ....밖에 나갔다도 오고 입을 옷들 정리하느라 여러모로 바쁜 하루였어. 역시 오늘도 사람들이 많더라! 다들 답답하니 마침 황금연휴에 완화도 됐겠다, 똑같은 심정이었나봐. 뻘하게 현대 AU의 아우로라와 솔로몬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드네. 만약 그렇다면 둘의 관계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지금 설정에서는 도미닉이 바쳤다! 지만 현대에선 바친다는 개념이 없으니까...답은 홈스테이인가 >:ㅁ...?! 이렇게 되니 AU도 해보고 싶다. 언젠간 해보는 걸로! >:3 오늘도 좋은 하루, 답레 금방 써올게!
잠시간의 침묵. 타리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마법을 쓸 줄 모르는 타리크라도 원시림 내부에서 마법을 쓰면 안 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숱한 토벌에서 파견을 나온 마법사들이 열이면 열 나누던 대화이기도 했으니.
"...새로운 마물입니까?"
타리크가 도착한 당시 주변은 새하얗게 얼어있었다. 마치 그 장소만 겨울이었다는 듯. 마물의 흔적은 없어 어떤 마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지만, 그정도로 치열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마물이었길래? 타리크는 아우로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취람빛 마력이 아우로라에게 흡수됐고, 그 덕분인지 아우로라는 그나마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는 듯 싶었다.
일단은. 일단은 마물이라고 이야기한 솔로몬은 자신이 마주쳤던 마물과, 그 마물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노인을 떠올렸다. 과연 마물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나? 자신이 상대한 마물은 성가시기는 했어도 위협적이지는 않았는데 아우로라가 상대한 마물은 위험을 무릅쓰고 마법을 쓰면서까지 상대해야 할 정도였다면 보통은 아닐 터.
" 괜찮소,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내 실책이지, 아직 움직이기는 힘들어 보이니 실례하겠소. "
고통에 겨운 듯 찡그리며 더듬더듬 말을 이어가는 아우로라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이야기한 솔로몬은, 그녀를 한쪽 팔로 안아들었다.
" 내 목에 팔을 걸 수 있겠소? "
상처를 온전히 치유하지는 못하겠지만, 계속해서 마력을 흘려보내 아우로라가 다시 의식을 잃지 않도록 한다.
좋은 저녁! 오늘도 좋은 하루 보냈을까! 난 그럭저럭 잘 보내고 있어! 슬슬 코로나도 많이 잠잠해진 거 같고, 조금 있으면 외출하는 데에 부담도 그만큼 없어질 거 같아서 내심 기대하는 중이야! 어찌 되었든 사그라들어 준다면 더 좋아지면 좋아질 테니까! 그리고 현대 AU라면 지금 솔로몬과 아우로라의 관계가 비슷하게 유지되기는 좀 어렵긴 하겠다, 그걸 떠나서 홈스테이 자체는 굉장히 흥미로워! 아무튼 좋은 하루 되었길 바라면서 가볼게!
새로운 마물. 일단은. 사람일 가능성도 떠올렸지만 그럴 가능성은 아무리 생각해도 존재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것에 꿰뚫린 흔적은 있었지만 검상은 절대 아니었으며, 창상도, 그 외의 다른 것도 아니었으니. 아우로라는 눈을 낮게 내리깔았다. 과연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공작님 탓일까? 공작님 탓으로 돌리면 또 위험할텐데. 아우로라는 자신을 안아드는 품이 저번에 산책을 하다 넘어졌을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짧게 생각했다. 그때도 위험한 순간이었는데. 지금은 더 위험한 순간이구나.
"...할 수 있을 것..같아요."
아우로라는 팔을 들어올려 솔로몬의 목가를 끌어 안았다.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아프긴 했지만, 다행히 사냥꾼의 응급처치와 흘러 들어오는 마력 덕분에 이제 다시 정신을 잃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고통도 조금씩 가시는 듯 했지만 상처는 여전하겠지.
"공작님.."
아우로라는 짧게 숨을 들이키곤 투정을 부리듯 조근거렸다. 꼭 이 상황에서 자신은 괜찮다는 듯 투덜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의 목가를 끌어안는 아우로라에게 잘 했다며 격려의 말을 건넨 솔로몬은, 사냥꾼이 준비해 온 말에 올라타기 위해 발을 내딛는다. 그렇게 천천히 말 쪽으로 다가가는 동안 자신에게, 결국 무사히 일이 끝났고, 말썽을 피운 것도 아니니 에스코트를 해줘야 한다며 조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말 없이 자신의 목가를 끌어안은 영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일이 다 끝나면 그리 하리다. "
그러니 지금은 정신을 잃지 않도록 힘을 비축하라며 낮게 속삭인 그는, 말의 안장을 붙잡고, 한쪽 발을 등자에 걸친 채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사뿐히 안장에 안착한 솔로몬은, 아우로라를 안은 팔에 견고하게 힘을 주면서, 남은 한쪽 손으로 고삐를 쥐었다.
타리크 또한 말 위에 올랐고, 솔로몬의 품에 안긴 아우로라는 반쯤 감긴 눈으로 아무것도 없는 너른 평야를 응시했다. 체감하기로는 절대 안 끝날 것 같던 길고 치열한 전투였는데, 어느새 이렇게 끝나버렸다. 어딘가 안심이 됐다.
"나중에 무르기 없기예요."
머리를 쓰다듬는 감촉에 아우로라는 옅게 미소를 짓다가도, 정신을 잃지 않으려는 듯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다친 건 분명 소문이 날텐데, 부모님껜 어떻게 설명할까? 소네타에겐? 이제 생각해보니 오세랑 아이니가 걱정할텐데. 돌아가면 플라우로스도 있을건데...더이상 생명의 위협이 없고 치료 받을 일만 남았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여러 걱정들이 기다렸다는듯 쏟아져나온다.
"네에."
일단 이 장소에서 빠져나간 다음에 생각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면 답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아우로라는 솔로몬을 끌어안은 팔에 희미하게나마 힘을 주며 고개를 조심히 파묻었다. 이정도는 봐주시겠지 하는 마음이었는지, 아우로라의 행동은 퍽 자연스러웠다.
// 좋은 오후..! 연휴가 끝나니 바빠졌네. ㅠㅠ 답레가 늦어 미안해. 요즘 날씨도 더워서 빨리 지치게 되더라고. ㅠㅠ 피곤하다보니 요즘 침대에 조금만 닿아도 잠들어버리네. 오늘도 좋은 하루!
나중에 무르기는 없다고 이야기하는 아우로라를 안심시키려는 듯 이야기한 그는, 이제 돌아가자는 자신의 말에 작게 대답하며 품에 얼굴을 파묻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겨우 한 고비 넘긴 셈인가. 그는 후우, 하고 숨을 내뱉으면서 말을 몰았다. 마물을 유인하거나, 적을 처치하기 위해 맹렬하게 달리던 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긋하게 산책하듯 말발굽이 다그닥거리는 소리가 숲에 퍼진다.
솔로몬이 한바탕 크게 일을 벌인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가 마주쳤던, 숲과 연관이 있어 보이는 노인의 결말 때문이었을까 숲 안의 마나는 여전히 무거웠어도 그들이 습격을 당했을 때와 비교하면 숲은 그들에게 적의를 품고 있지는 않은 듯했다. 그리고 그 때문이었을까, 숲에 들어올 때 걸린 시간보다 훨씬 적은 시간이 지났다고 느껴짐에도 어느새 그들이 들어왔던 숲의 입구에 도달해 있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너른 평야, 물론 숲 주변은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한 흔적, 그러니까 불에 그을린 흔적들 투성이었지만 이 너른 평야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겠지. 그렇게 평야로 발을 내딛으면서 사냥꾼들과 기사들은 조금이지만 긴장의 끈을 놓았고, 그건 그들을 기다리던 평야의 토벌대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솔로모의 겉옷이 너덜해진 것을 보고 여전히 긴장한 듯 토벌대는 조용했다.
" ...... "
말없이 말을 몰아 토벌대와 가까워지고, 마침내 토벌대의 지휘자와 마주쳤을 때, 솔로몬은 입을 열었다.
" 볼일은 끝났다, 전부 불태워라. "
지휘자는 그 말을 듣자 마자 고갤 끄덕였고, 곧바로 말을 재촉해 토벌대의 본대에 포격을 명령했다. 동시에 그와 전투를 함께한 경험이 있는 병사들의 환호성이 퍼지며 솔로몬과 그 일행을 위해 길을 열었으니.
갱신! 좋은 오후! 코로나가 좀 잠잠해지나 싶었는데 또 일이 터진 거 같아서 또 바깥으로 나가는 게 영 어려워졌네 8ㅁ8 뭐 그래도 한달? 정도 있으면 또 괜찮아지지 않을까 싶지만 그래도 당장 바깥에 날씨도 좋은데 못 나가는 게 엄청 불편하겠지... 아우로라주는 괜찮을까? 어느 지역에서 지내는지는 모르겠지만 코로나가 너무 길게 늘어지는 거 같아서.
분명 가볍게 넘어갈 만한 일이 벌어진 게 아니었음에도. 자신이 나아갈 수 있게 병사들이 갈라지는 것으로 만들어진 길을, 말에 탄 채 나아가는 솔로몬의 모습은 처음에 숲으로 달려나갔던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태도로 무장하고 있었다. 물론 그의 몸에 걸쳐져 있던 겉옷은 누더기처럼 너덜거렸지만, 그 정도로는 옷을 입은 이의 모든 것을 가늠할 수는 없는 법.
환호성을 들으며 나아가는 솔로몬, 그런 그를 아우로라가 올려다보다가 환하게 웃으며 `끝났네요' 라고 이야기하자, 솔로몬은 말없이 고갤 끄덕였다. 이걸로 한 고비는 넘겼다고 봐도 좋을까, 적어도 토벌이 실패했다거나 하는, 가장 최악의 상황과는 가능한 멀리 떨어진 상황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자신의 천막으로 향했다.
그리고 저만치 그와 아우로라가 머물렀던 천막이 보이기 시작하고, 천막 앞에 선 조그마한 두 아이 역시 눈에 들어올 즈음. 솔로몬은 말을 멈추고 아우로라를 안아든 채 말에서 내려 자신들을 기다렸을 두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오세와 아이니, 신경이 쓰였겠지만 꾹 참았다는 것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밝게 미소지으며 다가온 두 아이는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 어서 오세요, 공작님, 아가씨! "
솔로몬은 그런 두 아이를 내려다보다가 아우로라에게 설 수 있겠냐 물었고, 만약 그녀가 설 수 있다면 그녀를 조심스레 내려놓은 뒤,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야기하겠지.
완벽하게 승전보를 울릴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일단 마물과 인간의 전쟁에선 이겼으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대토벌이라는 단어에 긴장해 볼 수 없었던 너른 평야를 느긋히 눈에 담고, 어느정도 마나가 돌아오자 조금씩이나마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던 아우로라는 이내 익숙한 천막이 보이자 천막 앞에서 기다릴 두 아이를 생각하고 미소를 지었다. 오세와 아이니는 어땠을까? 자신과 공작님이 없어도 괜찮았을까?
"다녀왔어요, 오세, 아이니."
둘 다 씩씩하게 잘 기다려줬구나. 얼마나 목이 빠지게 기다렸을까. 돌아온 마나로 조금이나마 해둔 치료 덕분인지 일어서기는 수월했고, 아우로라는 솔로몬이 둘을 쓰다듬은 다음 두 아이를 안으려다 잠시 멈칫했다. 이대로라면 아이들의 예쁜 꼬까옷에 피가 묻겠지. 이럴땐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하던 아우로라는 이내 두 아이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려 하였다.
"저희가 없는 동안 힘들진 않았죠?"
// 좋은 밤! 일정이 빡빡하다니..솔로몬주도 그렇구나 ㅋㅋㅋ..코로나가 갑자기 다시 휘몰아칠줄은 몰랐네. 바깥은 완전 한산해졌어. 아무래도 이번 사건 영향이겠지? 이제 좀 괜찮아지나 싶었는데 조금 많이 슬프다. :( 내일도 좋은 하루 보내길 바라, 날씨가 덥다니까 시원하게 있구.
오세와 아이니, 두 아이는 솔로몬과 아우로라의 옷차림이 멀쩡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보고는 잠시 놀란 듯 했지만, 두 사람이 그래도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 건지 더 이상 놀랐다는 것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대신 자신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솔로몬의 손길에 기분이 좋은 듯 미소를 지었고, 이어서 이마에 느껴지는 아우로라의 부드러운 입술을 받아들이며 기분이 좋은 듯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 네, 저희가 할 일이라곤 애초부터 두 분 수발이었으니까요, 두 분이 안 계시니까 할 게 없어서 심심하기까지 했어요! " " 많이 피곤하시죠...? 얼른 식사를 준비해 올 테니까 쉬세요, 두 분 다! "
아우로라의 질문에 밝게 대답하는 오세와, 두 사람이 피곤할 것이라고 생각한 건지 서둘러 천막 안으로 안내하는 아이니를 보며 솔로몬은 아우로라에게 어서 따라가라는 듯 손짓했다.
" 나도 곧 뒤따라갈 테니 먼저 들어가시오, 상처나 옷에 대해서는 아이니가 잘 해 주겠지. "
//좋은 밤이야! 으으 맞아 일정 너무 빡빡해ㅜㅠ 다음 주가 가장 고비일 거 같아... 그러게... 코로나가 좀 잠잠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또 뭔가 터졌더라고...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내일 좋은 하루 보내고, 나중에 또 올게!
두 아이가 잠시 놀란듯한 모습을 보이자 아우로라는 바로 수긍했다. 놀랄법도 했지, 아침까지 멀쩡했는데 이런 꼴로 돌아온다면 누가 놀라지 않을까? 하지만 애정이 담긴 행동에 둘은 금방 진정하고 기분이 좋은 표정을 지었다. 어쩜 저리 둘 다 사랑스러울까? 아우로라는 고됐다면 고된 전투를 마치고 돌아왔음에도 피로가 싹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둘을 보니 피곤한 것도 잊어버렸지 뭐예요. 많이 심심했을텐데,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오세, 아이니."
아우로라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고, 솔로몬의 손짓에 고개를 끄덕이며 천막 안으로 들어가려 했고, 발을 내딛기 직전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그리고 아우로라는 천막 안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대체 이 말의 어디가 부끄러운진 모르겠지만.
// 잠깐 갱신하고 갈게. 현생은 그렇게 바쁘지 않지만 막상 일정이 빡빡하네..이게 무슨 아이러니한 일인지 모르겠다...ㅠㅠ 그래도 오늘 하루도 힘내길 바라! :)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 아우로라의 모습에, 오세와 아이니는 역시 아가씨는 아름답다! 라고 생각한 건지 미소를 띄우고 아우로라보다 앞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두 아이를 뒤따라 천막으로 들어가려던 아우로라가 잠시 멈춰 서서 솔로몬에게 고개를 돌리자, 솔로몬은 무슨 할 말이라도 있냐는 듯 아우로라를 응시했고, 이윽고 너무 무리하지 말라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오자 그는 말 없이 미소를 지었다.
무어라 대답해 주기도 전에 천막 안으로 도망치듯 들어가는 아우로라의 뒷모습을 잠시 보던 그는 누더기 수준으로 너덜거리는 겉옷을 벗어 아무렇게나 던져 두곤 말에 올라타 지휘관들이 모여 있는 천막으로 향했다.
한편, 아우로라가 천막 안으로 들어오자 오세는 바쁘게 움직이면서 천막 내부를 정리하고 있었고, 아이니는 물을 따뜻하게 데워 놓고 있었다.
" 앗 아가씨, 물 데워 놨어요, 옷 벗는 걸 도와드릴까요? "
물에서 피어 오르는 향긋한 수증기가 아우로라를 기다리는 듯 반긴다.
//갱신! 와 갑자기 비가 엄청나게 오고 있어! 어제부터 엄청 온다...번개도 막 치고 벌써 장마인 걸까? 아무쪼록 별 일 없길 바라면서 답레 달고 갈게!
아우로라는 기분이 좋아진듯 미소를 숨기지 못하고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그의 미소가 그 어떤 대답보다 좋았다. 공작님은 아실까? 그의 미소가 얼마나 상냥한지. 다른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해도 자신에겐 그저 자상한 분이시라는 걸. 만약 내가 공작님께...
세상에,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아우로라는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곤 고개를 숙였다.
"ㄴ, 네. 부탁드려요, 아이니."
아우로라는 손으로 얼굴께를 황급히 부채질하며 시선을 굴렸다. 따뜻한 물, 향긋한 수증기..머리를 푸는 건 제일 마지막으로 해야겠다. 겉옷을 벗은 아우로라는 셔츠가 붉게 물든 모습에 음..하고 곤란하다는 듯 소리를 냈다.
"혹시 흉이 질까요..?"
흉이 지는 건 둘째치고, 아이니가 이런 상처를 봐도 괜찮은걸까? 아우로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이니를 한 번 쳐다보았다.
//날씨가 너무 오락가락하네..며칠 전엔 너무 춥고, 며칠 전엔 너무 덥고, 비가 쏟아지고.. 여긴 그나마 괜찮아! 밖에 안 나가서 그런가 ㅎㅎ.. 솔로몬주도 별 일 없길 바라!
피에 젖은 셔츠를 받아 바구니에 담아 둔 아이니는, 자신을 부르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고갤 들어 아우로라를 올려다보았다.
" 감사해요. "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아이니의 표정은 무척이나 기쁜 감정을 애써 숨기려는 듯 보였다. 옅게 미소를 띈 채, 옷이 담긴 바구니를 집어든 아이는, 목욕물 준비가 다 되었다는 말이 들려오자 허리춤에 걸어 두었던 주머니에서 흰 가운을 꺼내며 아우로라에게 이야기한다.
" 여기 이 가운을 걸치세요, 청결 마법이 걸려 있으니까 얼룩 걱정은 안 하셔도 괜찮아요. "
가운을 받아들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에게 고맙다고 이야기하는 아우로라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아이니는 욕실로 아우로라를 안내하려는 듯 바구니를 들었다. 그리곤 가운을 걸치면서 오늘 있었던 일들에 대한 말을 하는 아우로라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니, 아이의 눈에 비친 소녀의 모습은 분명 상처투성이에 그리 깔끔한 모습은 아니었음에도 퍽이나 아름다웠다.
처음에는 정말 다사다난한 하루였다며 조금 피곤한 기색을 보이던 표정이, 공작의 이야기를 하면서 수줍은 미소로 바뀌었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두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고 있었다. 정말 예쁘다. 라는 말이 절로 새어나올 것 같은 그런 표정에 아이니는 조금 멍한 듯한 표정으로 아우로라를 올려다보았다.
말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지만 여전히 아우로라의 얼굴은 발그레했고, 미소 역시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기에 말을 마친 그녀에게 아이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저희도 공작님을 많이 좋아하는걸요, 그런 이야기라면 하루 종일 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
또 뭐라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아직 어린 탓이었을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을 잡기가 어려운 듯 잠시 고민하던 아이니는, 일단은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게 맞겠다라고 생각한 건지 바구니를 한 번 내려다보고 아우로라에게 미소를 지었다.
" 그러면 이제 목욕하러 가실까요? "
//오늘도 좋은 하루(?) 새벽에 일이 있어서 일어나있는 김에 답레해! 꼭 좋은 하루 되길 바랄게!
두서도 없고 주제도 명확하지 못한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싶어 아우로라는 멋쩍게 웃었다. 후작저에 있을 땐 담당 하녀에게 오늘 하루를 이야기 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꾸며낸 이야기도 있었다. 황태자가 잘 대해주지도 않았으면서 그가 정말 친절했다고 하는 것이라던가. 하지만 아이니와 오세의 경우에는 꾸밈이 없는 진실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더욱 후련하면서도 부끄러웠던 것 같다. 아우로라는 아이니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다, 잠시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 네. 좋아요. 이제 가야죠! 더 있는 것도 찝찝하고..."
아이니가 한 말이 믿기지 않는다. 대답할 타이밍도 놓쳤거니와, 아우로라는 목욕을 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멍하니 고개를 내려 제 발걸음만 쳐다보았다.
"그랬구나..."
아우로라는 입술을 달싹이며 혼자 중얼거리곤 입을 합 다물었다. 처음에는 공포였고, 그 다음에는 존경이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공작님을 존경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공작님을 좋아하는 거였구나.
이제서야 깨달은 자신이 마냥 바보 같기도 했고, 점점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니와 오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을 인정하고 마주하는 기분은 상상하기도 어려울 만큼 후련했다. 아우로라는 고개를 들고 눈이 부시도록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 목욕을 할 시간이었다.
// 세상에, 너무 늦게 자는게 아닌가 싶어서 걱정된다. 코로나가 또 잠잠해지나 싶었는데 이번엔 물류센터라니..이번엔 얼마나 크게 퍼질지 두렵기도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것이 참 묘하네. 마스크 잘 쓰고 조심하길 바라!
욕실은 바로 옆. 아이니는 옷을 세탁할 생각인지 아우로라와는 다른 장소로 향했다. 아이니가 없어도 혼자 목욕할 수는 있으니까, 하고 아우로라는 욕실에 발을 들였다. 약초의 향을 머금은 따뜻한 수증기가 뺨에 닿자 아우로라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공작저나 후작저의 이름을 올리기도 부끄러운 간소한 장소였지만, 천막 안에 이렇게 갖춰져있는 욕실은 드물 것이다. 마물을 토벌하고 씻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축복이니까 이정도면 호화롭고도 남은 것이기도 하고. 아우로라는 욕조로 걸어가고는 조심스럽게 손을 욕조에 넣어보았다. 따뜻하다. 오세가 물을 덥혀줘서 당연히 따뜻하겠다만은..온도가 딱 적당했다. 너무 뜨겁지 않아서 상처가 쓰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욕조 안에 몸을 담그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푹 나왔다. 마물과 제대로 싸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긴장이 풀려 한숨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맡기던 아우로라가 물에 비친 자신을 보고 옅게 웃었다.
"바보같네.."
대토벌이 처음이니 마물과 싸운것도 이번이 처음인게 당연하지. 이래선 무슨 대단한 일을 한 것 마냥 부풀려 생각하는 것 같잖아. 두 손에 물을 가득 떠 얼굴에 몇번 끼얹자 마물의 피와 흙먼지가 지워졌다. 아우로라는 그제서야 자신의 얼굴 상태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으음..."
흉터가 남을 것 같은데...아우로라가 마물의 뼈가 스쳐지나간 상처를 매만지며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나도 이렇게 얼굴에 흉터가 남을까봐 걱정이 되는데 공작님도 그러셨을까? 아우로라는 솔로몬의 얼굴을 생각했다. 아, 공작님..잘생기셨지. 흉터조차 멋있으셔서..흉터가 만약에 없었더라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아우로라는 물 속에 머리를 박듯이 집어넣으며 소리없는 비명을 질렀다. 뭐든 자각한 것이 문제다. 자각하기 전엔 괜찮았는데 막상 자각해버리면 이렇게나..
앞으로 공작님 얼굴을 어떻게 뵙지. 한숨을 쉬듯 아우로라의 머리 주변으로 공기방울이 뽀그르 올라왔다.
..지금쯤 공작님은 뭘 하고 계실까?
//매일 늦게 자는게 아니라서 다행이다 ㅠㅠ..건강은 빨리 챙길수록 좋은거랬어! 이번에 또 사회적 거리두기를 할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지네. 이어지는게 그렇구..응응. 오늘도 좋은 하루 보냈기를 바라!
아우로라가 따스한 물에 몸을 담그며 약욕을 즐기는 동안, 솔로몬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자신이 본 것과, 기억하는 게 맞다면 그것은 사제를 상징하는 문장임에 틀림없을 텐데.
물론 자신이 이종족이라는 이유로 제국 내에서 자신을 곱게 보는 시선이 흔하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고, 더군다나 황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사제들 입장에서 거슬려한다는 첩보도 있었긴 하지만 이런 씨알도 안 먹힐 위협을 해오다니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연관지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자신이 습격당한 것과, 아우로라의 목숨이 잠시나마 위태로웠던 것이 아무래도 동떨어진 두 사건 같지는 않았다.
만약 그들이 뒤쫓은 게 자신이 아니라 아우로라였다면... 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한숨을 내쉬며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 괜한 생각이 자꾸 드는군. "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애써 두 상황의 관계성을 부정하던 그였지만 계속해서 신경이 쓰이는 것을 그가 어떻게 마무리짓기에는 정보도, 시간도 그리 넉넉하지 않았기에. 다른 지휘관들에게 이 일에 대해 의논하는 것도 위험부담이 큰 상황, 스스로 할 수 있는 데까지 상황을 파악하기로 한 그는 몸을 돌렸다.
적어도 대토벌에 사제들이 참여한다는 이야기는 없었고, 사제들을 수호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기사단 역시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니 자신을 습격한 이들이 정말 사제와 관련이 있다면 이것은...
황가가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 외에도 그가 신경써야 할 부분에 제때 신경을 쓰기 어렵게끔 만들고 있었다. 물론 그 스스로 그런 생각이 현재 상황에 그닥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지금 당장 어찌 해결할 수 없는 일은 일단 미뤄두기로 결정을 내린다.
지금은...대토벌 성공에 따른 병사들의 위로와, 손실 확인 등을 통해 대토벌을 완전히 마무리짓는 게 우선이다.
그리고...
" 아우로라는...아무래도 후작가에서 항의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
확신은 하지 않는다. 귀족 파벌의 수장이기 이전에 자신의 딸을, 긴 시간 동안 이어져 내려온 가문의 명예에 맞먹을 정도로 끔찍이 아끼는 아버지일 터, 따라서 후작은 아우로라 습격과는 관계가 거의 없겠지.
그렇다면 자신에 대한 습격은?
하는 생각을 하며 걷자니 어느새 공작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이들이 머무는 천막에 도착해 있었다. 금방 돌아가겠다고 이야기했던거 같은데 좀 늦은 모양이다.
천막 안으로 들어서니 바쁘게 움직이는 오세와 아이니가 그를 반긴다. 오세에게 누더기가 된 겉옷을 건네고, 세탁 바구니를 들고 오는 아이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아우로라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들은 그는, 어차피 아우로라가 목욕을 끝내기 전까지는 대화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씻을 준비를 했다.
분명 염려되는 일만 말씀드리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든 혼자 보내보려 햇는데. 아우로라는 물 속에서 한참을 찰박이더니 입술을 오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역시 실패다. 얼굴을 마주하기엔 지금은 감정을 조금 수습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피곤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렇게 생각이 복잡하면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지니까.
한참을 생각하던 아우로라는 비누거품을 머리 위로 몽글하게 얹더니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아까는 생각할 필요 없어, 하더니 지금은 생각을 정리하자. 로 마음이 바뀐다라. 사람 마음 참 간사하다. 아우로라는 잠시 숨을 들이마시곤 몸 안의 마나를 가다듬었다.
"마법을 쓸 수는 있구나.."
원시림에서 폐인이 될 줄 알았는데 다행히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회복 속도가 느리긴 하지만 이정도로 살아남은 건 천운이 아닐까. 아우로라는 마법을 사용해 물을 움직여 몸을 빠르게 훑어내렸고, 이내 비누거품이 말끔히 사라지고 피가 묻거나 더러웠던 곳도 깨끗해졌다. 준비된 새 가운을 걸치고, 아우로라는 욕실을 나서려 했다. 사용인을 부르지 않고 퍽 당당한 모습이었다.
아이니가 세탁 마법을, 오세가 수선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조금씩 도와주듯 조언하면서, 아우로라가 나오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까 생각한다. 이번 토벌이 어땠는지를 가볍게 묻는 게 좋을까? 역시 조금 이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어느새 아이니는 세탁을 거진 다 마쳤고, 오세는 꽤 능숙하게 옷을 수선하고 있었다. 이제 딱히 조언은 필요 없으려나, 하고 생각한 뒤 욕실 옆, 아우로라가 가운으로 갈아입었던 장소에서 옷을 갈아입은 그는, 마침 욕실에서 나오던 아우로라와 마주친다.
" ...... "
분명 공작저 내에서 수십 번은 마주친 얼굴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마주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순간적으로 뭐라고 이야기를 꺼내야 할 지 생각이 나지 않는 건지, 가만히 아우로라를 쳐다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침묵이 어색하게 이어지려는 찰나, 자신을 찾던 아우로라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빗을 들고 나타난 아이니 덕에 침묵은 깨지게 된다.
갱신할게! 오늘 하루도 잘 보냈을까? 여기도 여름이구나~ 싶은 날씨야! 물론 무지 습하지만...장마가 무려 한달에 걸쳐서 찔끔찔끔 올거라고 하더라구. 거짓말이면 좋겠다 싶지만. 사람들이 북적북적하니 좋지만 뭔가 참 쓰기도 하네..이렇게 되는구나 결국엔~ 싶기도 하구. 오늘 안에 꼭 답레 가져올게! :)
씻고나니 포근하다. 깨끗해진 몸, 따뜻한 공기, 몸에서 은은하게 나는 비누내음과 약초의 향까지. 이대로 침대에 누워버리먼 좋겠지만, 공작님과 이야기를 하기 위해 결심을 했으니 나중으로 미뤄야겠다. 일단 머리를 빗고, 그 다음에 옷도 제대로 갖춰입고..그리고..
"……"
계획한 일은 왜 항상 마음대로 풀리질 않는 걸까. 아우로라는 솔로몬을 마주치자 습관처럼 솔로몬을 올려다봤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공작저 내에선 수십 번을 마주쳤다지만 이런 상황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아니, 그것보다 외간남자와 이렇게 마주치는 상황 자체가 없었다. 아우로라는 잠시 제 옷매무새를 살피듯 고개를 아래로 숙이더니, 또 화들짝 놀라선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아, 아..네! 부, 부탁드려요 아이니!!"
아이니가 구원자처럼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아우로라는 인사도 하지 못하고 후다닥 아이니 쪽으로 다가가려 했다.
눈이 마주치고, 그가 입을 다물고 있는 만큼, 두 사람 사이에서 흐르는 침묵은 꽤나 어색했다. 요 전에도 이렇게 침묵 속에서 서로 얼굴을 봤던 기억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느낌이 다르달까. 아무튼 그렇게 어색한 상황이 지속되는가 했지만 타이밍 좋게 나타난 아이니 덕분에 아우로라는 간신히 입을 떼고 현재 상황을 피할 방법을 찾은 모양이었다.
빗으로 머리를 빗어 주어도 괜찮겠냐는 아이니의 질문에 부탁한다면서 후다닥 그 아이 쪽으로 다가가는 아우로라에게 말 없이 쳐다보던 솔로몬은, 무언가 말을 하는 게 좋았을까 생각했다. 뭐, 결국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상황에서 무슨 말을 했어야 하는지 감이 안 잡히는 것은 똑같았고, 무슨 말을 했어도 아우로라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모르는 일이었으므로 그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걸로 충분했겠지... 하고 넘기고 만다.
오해를 할 만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갑작스럽게 마주쳐서 당황했을 뿐이겠지. 아이니와 함께 시야에서 아우로라가 사라진 자리를 잠시 쳐다보던 그는, 욕실로 향했고, 가운을 벗은 뒤 토벌로 인한 피로를 풀고자 욕조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아이니는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아우로라에게 조금 얼떨떨한 모습으로 고갤 끄덕이며 자리를 옮겼다. 아우로라가 편히 앉을 의자를 가져오면서 빗을 손에 든 채 미소를 짓는 것이, 퍽이나 기대하는 모양이다.
아이니 덕분에 한시름 놓았다. 아우로라는 아이니에게 다가가며 생각했다. 앞서 생각했듯 이런 상황에서 어떤 외간 남자도 마주친 적도 없고, 가족도 마주친 적도 없거니와 하였기에 공작님을 마주쳐도 어떤 말을 꺼내며 상황을 대처해야할지 몰랐다.
앞으로 공작님 얼굴은 어떻게 봐야하지? 아까 그 무안한 상황이 없었던 것 처럼 하면 될까?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한참 생각에 잠기려던 찰나, 아우로라는 의자를 가져오며 미소를 짓는 아이니를 보고는 마주 미소를 지으며 생각을 갈무리했다. 나중에 생각하자. 아우로라는 의자에 앉으며 가만히 거울을 마주보았다. 당황했던 흔적이 남은건지, 아니면 씻고 나와서 몸에 열기가 남은 것인지 볼이 발그레했다.
"잘 부탁드려요, 아이니."
마주본 거울 사이로 보이는 아이니를 향해 아우로라는 활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예전에도 이렇게 머리를 빗어준 적이 있었지. 그때가 언제였더라, 공작님과 바깥에서 푸른 달 꽃을 보게 됐던 날이었지. 참 예뻤는데..그 다음에 뭐라고 했더라, 언젠가 꼭 플라우로스와 아이니, 오세도 함께 가자고 했었지. 이번에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지나가게 된다면 공작님께 제안을 해볼까?
아이니가 아우로라의 머릿결을 정리하고, 솔로몬이 욕조에서 피로를 푸는 것을 마지막으로, 대토벌의 본 작전은 마무리 지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사후 처리와 수습, 그리고... 대토벌 도중 얻어낸 정보들을 짜깁기하고 앞으로 또 발생할지도 모르는 위협에 대한 대응을 생각하는 것 뿐.
대토벌 자체는 마무리 되었으므로 사적인 대화를 다른 이들과 나눌 법도 하건만, 총 책임자였던만큼 솔로몬은 오히려 대토벌 도중보다 더욱 바빴다. 그랬기에 가장 가까이 두고 있었던 아우로라와도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한 채, 며칠이 하염없이 지나가고, 그런 상황에서 오세와 아이니는 제 역할을 다 하면서 경험을 쌓았다.
그렇게 하나 둘, 대토벌에 참가했던 기사단들이 자신들의 주인을 따라 돌아가고, 평야에 감시 마법을 펼쳐 새롭게 마물이 나타나거나 하는 것을 확인하고자 한 마탑의 마법사들까지 귀환하면서 너른 평야에는 어느새 솔로몬의 기사들과 후작가의 기사들만이 남았다. 귀족파의 수장을 따르는 기사단과, 황제파의 수장을 따르는 기사단인만큼 마지막까지 대토벌이 무사히 끝났다는 확신이 들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대토벌과 관련된 내용을 검토했고,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솔로몬은 여전히 아우로라에게 후작가의 대변을 맡겼다. 또한 아우로라와 그 자신이 당한 습격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후작가에 전달할지 등에 대해서도 역시 아우로라에게 일임하여 짧은 대화를 나눈 것을 마지막으로 남은 이들 모두 자신이 속한 영지로 귀환하는 것으로 대토벌은 완전히 끝이 나게 된다.
물론 대토벌 외적인 부분... 아우로라의 부상에 대한 후작가의 반응은 어떨지 알 수 없었고. 솔로몬과 아우로라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확인한, 둘을 노린 세력이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도 알 수 없었지만.
갱신할게! 으음 일단 끝을 내긴 했는데 필력이 너무 모자라서 영 그렇네 8ㅁ8 다음 상황에 대해서는 굳이 대토벌과 연관을 지을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으니까 너무 깊게 고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ㅠ 애초에 파바박 하고 계속해서 전력질주하려고 일대일을 시작한 것도 아니니까 느긋하게 이야길 나눠보는 것도 중요할 거 같아, 생각해보면 진행하는 데에 집중하느라 우리끼리 이야기한 게 상대적으로 적기도 하고?
좋은 오전? 아침? 아직 오후는 안 됐으니까 오전으로 할게! 일이 끝나서 다행이지만 바빠지는 것 같다니 걱정이네..알차게 간다고 해도 너무 무리하는게 아니었음 좋겠다! 그러고보니 요즘 날씨가 참 오락가락 하는 것 같다. 어느 날은 바람이 세게 불고, 어느 날은 너무 덥고..2020년은 참 복잡하게 지나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변덕스러운 날씨니 부디 건강 조심하길 바라.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길!
갱신! 오늘은 날씨가 좋네~ 이런 날엔 나가서 피서라도 가고 싶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엄두가 나질 않는다...ㅠㅠ
그런고로 오늘의 픽크루! 아우로라는 수인? 인수?로 따지면 어떤 종족일까 하고 생각해봤는데 어째 다람쥐가 떠오르더라구! 그런데 막상 귀엽게 분홍색을 넣어보니까 왠지 때릴거야? 하고 짜증을 돋구는 모 분홍 다람쥐가 떠오르더라 ㅋㅋ..그럴 애가 아닌데도...ㅋㅋㅋㅋ이미지가 중요하다는 걸 여기서 다시금 깨닫네. 아차, 픽크루 출처는 여기!
갱신할게! 이렇게 바쁘다고 느껴진 건 뭐랄까 진짜 처음인 거 같아, 할 일을 하나하나 하다 보니까 어느새 피곤해서 자러 가는 내 모습은 마치... 회사를 다니는 건 아니지만 마치 일이 끝나고 집에 와서 꿀같은 휴식을 잠으로 해결하는 회사원 같다고나 할까! 아무튼, 나도 피서 엄청 가고 싶은걸... 마찬가지로 사정이 사정인지라 피서는 무리지만ㅠ 그리고 픽크루 너무 귀여워!!! 그렇구나, 수인이라면 다람쥐 쪽이구나, 으으 너무 귀엽다ㅠㅠ ㅋㅋㅋ아 분홍색 하면 생각나는 그 다람쥐 말이지? 물론 아우로라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니니까 괜찮아!
우와...정말 난리도 아니었던 하루 같아. 비가 온다는 건 좋지만 이렇게까지 비가 올 줄이야. 솔로몬주는 많이 바쁘구나! 바쁜게 하루라도 빨리 해결됐음 좋겠네..ㅠㅠ.. ㅋㅋㅋㅋㅋㅋ맞아..아우로라는 그럴 애가 아니지! >;3 만약 저렇게 귀랑 꼬리가 어느날 돋아났다면 깜짝 놀라선 솔로몬에게 달려가지 않을까? 제가 이종족이 되었어요! 라면서. ㅋㅋㅋ 솔로몬은 드래곤이니 수인?처럼 된다고 하면 날개랑 뿔이 돋아나려나? 궁금하다~
갱신! 오늘도 비가 좀 오나 싶더니 금방 그쳤네! 그 뒤론 한 방울도 못 봤고... 그만큼 시원해지긴 했지만 또 습하기도 해서 어쩔 수 없이 에어컨을...켰어! 아무리 돈이 든다지만 내 행복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희생이 아닐까ㅋㅋ 응응, 아우로라는 그런 애가 아니니까 말이야, 헉... 그러고 보니 정말 아우로라라면 그렇게 할 거 같아! 너무 귀엽겠다- 나중에 한 번 해 보는 건 어떨까? 그리고 솔로몬은.. 음 아마 그렇겠지? 확실히 드래곤이다! 싶은 요소가 드러나지 않을까 싶어!
바쁘다 바빠..오늘따라 엄청 바쁘네~ 맞아..내 행복을 위해서라면 전혀 아깝지 않지! 그래도 역시 에어컨을 켜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하더라 ㅋㅋㅋ 나는 아직도 못 켜고 있어..조금 더 더워지면 켜려구 ㅠㅠ... 나중에? 좋아! 공작저에서 일어난 작은 헤프닝이려나? 기대 되네~ :3 드래곤이다 싶은 요소..무지 멋있을 것 같아~ ㅠㅠ 언젠가 볼 수 있겠지? 오늘도 좋은 하루 보냈길 바라!
갱신! 에어컨을 켜면 상쾌하고 좋긴 하지만 하루종일 켜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엄청 덥거나 씻고 나와서 잘 때까지만 켜놓는 편이야, 적어도 잠은 쾌적하게 자야 하지 않겠어? 아직 안 켰다는 건 그래도 버틸 만 하다는 이야기인 거 같으니까 걱정되지는 않지만, 무리해서 버티는 건 좋지 않으니까!
오늘은 잠깐잠깐 여유가 생겨서 이렇게 와 봤어, 이야기를 나눠보자곤 했지만 어째 서로 메모만 남기고 가는 느낌이라서 조금 애매한 거 같기도 하고...그래도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지만.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지금까지 뭔가 목적이 있는 레스들을 주고받아 왔잖아? 그런 거 없이 단순히 일상다운 레스들을 나눠보는 건 어떨까? 내가 말하면서도 뭔가 이상하긴 한 데다가 벌써 제대로 스레를 뛴 게 까마득해서 쉽지는 않을 거 같지만 뭐라도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아우로라주의 생각은 어떨지 궁금해서 써 봤어,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
좋은 오후, 오늘도 여유는 저녁부터 있을 것 같네...요즘따라 일이 바빠져서 큰일이야. ㅠㅠ 그러고보니, 생각해보니까 메모를 남기는 느낌이긴 했네. 음음..... 앗, 제안은 잘 읽었어. 목적이 있는 레스...일상다운 레스도 필요하지, 응응. 제안해줘서 고마워, 일상적인 레스를 쓰는 게 나도 익숙치는 않지만 열심히 해봐야겠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냈길 바라!
얍 갱신! 어제는 평소에 안 하던 일을 하고 난 뒤라서 그런가 온몸이 뻐근하더라구ㅠ 그래서 하루 느긋하게 쉬었어. 그리고 음, 나도 슬슬 돌리는 게 어떨까 생각은 하고 있었어! 물론 시간이 그렇게 쉽게 나는 게 아니라서 바로 시작하기에는 좀 애매하겠지만.. 아무튼 아우로라주만 괜찮다면 오늘이나 내일부터 당장 시작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느긋하게 쉬었다니 다행이다. 늦어서 미안해! 최근에 갑자기 열도 나고 나갔다 온 일도 잦았구 시국이 시국이다보니 설마 코로나인가? 하고 긴장해서 검사를 받고 왔어. 다행히 음성 판정이 나오긴 했지만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ㅋㅋ..병원에 가보니까 감기라고 하더라구. 그래서 나도 집에서 푹 쉬는 중이야. 나는 괜찮아! 지금 돌리는게 솔로몬주가 괜찮을까...하고 생각하고 있지만!
헉 감기 걸렸구나...여름 감기에 걸리다니 고생이 많네... 그래도 코로나19는 아니라니 다행이다, 단순 감기라면 약먹고 쉬면 금방 나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진 않을게! 그리고 일상은 언제든지 괜찮아! 부담없이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어.
그 외에는 음... 몇 가지, 제국이랑 주변국, 그리고 제국 내의 정치상황? 같은 것들이 현재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생각한 게 있으면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 요전에 따로따로 진행을 맡아서 하기로 이야기하긴 했지만 그래도 서로 충돌되는 설정이나 내용 같은 게 있는 건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어서!
제국(아도니엘)-주변의 중소국(중동이나 동양, 혹은 다른 서양의 뉘앙스를 지닌 국가)-가장 큰 대립을 하고있는 옆나라(제국을 선언할 준비를 한다던가?) 정도겠구..
아무래도 정치상황은..황제파와 귀족파사 서로 견제중?이라고 해야할까. 여전히 간을 보다가 이번 사건으로 어느 한쪽을 아예 조금 눌러서 기선제압을 하려고 할 것 같긴 해. 아무래도 현재 황제파가 더 우세하지만..
저번에 1:1을 논의할 때 말했던 설정을 가져오면..그중에서도 4개의 가문이 가장 큰 위력을 가지고 있어서 거의 수장에 가깝다구 볼 수 있고.
황제파 가문 둘, 귀족파 가문 둘로 정확히 반반 나뉘어있고, 각 파에 개국공신과 전쟁영웅 가문이 고르게 섞여있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 아우로라의 가문이 개국공신이니 다른 귀족파는 전쟁영웅이겠지..?
현재 다른 정치상황이라면 역시 황태자와 2황자의 작은 대립도 있지 않을까? 2황자는 중립이지만 귀족파에서 살짝 밀어주고있고 황태자도 표면상 중립이지만 정 반대로 밀어주다보니 서로 미묘하게 대립할 것 같네. 그니까...윗동네는 좀 으르렁대는데 나머지는 평화로워. 곧 데뷔탕트라서 더 신경전 아닌 신경전도 벌일 것 같구.
음음!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 음... 황태자와 황자의 사이는 좋은 편일까?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그렇겠지? 문제는 뒤쪽에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건데...이걸 요긴하게 써 먹을 수도 있을 거 같네! 그러면 황태자에 대해서 좀 더 설명을 부탁해도 될까? 몇 번 일상을 진행하면서 본 걸로는 일단 장차 명군이 될 자질을 갖춘 걸로 비춰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건 아마 맞겠지? 그리고 비전도 아마 제국에 장기적으로 도움이 될 거 같다는 생각도 들어서, 아우로라를 괴롭혔으니 곱게 봐 주기는 어렵지만 마냥 나쁜 사람이다!는 아닌 걸까나?
황자와 황태자의 사이는 표면상으로는 좋겠지..? 황태자는 내심 경계할지도 모르지만. 명군이 될 자질은 갖췄지만 사람을 쓰고 버리는게 너무 능숙한게 문제인 사람이라고 해야할까? 비전도 도움이 될 사람이지만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해야겠네. 야망도 깊고. 그리고 음..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만 비전을 실현으로 옮기기엔 미성숙하단 느낌..?
늦어서 미안! 2황자는 지금 황위에 관심이 있거나 하지는 않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속내가 조금 시커먼 황태자와는 달리 조용한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약간...형님이 더 출중하고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 않으니 자신이 곁에서 보필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해야하나. 우애를 중요시 해서 미련도 집착도 없다는 느낌이라고 하는게 맞을 것 같네!
음 우호적인 가문이라... 사실 생각해놓은 건 딱히 없다고 해야 할까... 제국의 설정도 그렇고 대부분 아우로라주에게서 들었었잖아? 그래서 뭔가 추가하거나 하는 데에 좀 조심스러웠다고 해야 할 거 같아.
으음 그래도 생각해둔 건 있어! 솔로몬은 개국공신(겸 전쟁영웅이기도 하지만)이니까 황제파에는 전쟁영웅 귀족이 따로 있겠지? 그 귀족과는 적어도 겉으로 대립각을 세우지는 않을 거 같아, 애초에 서로 악감정이 있는 사이도 아닐 거 같고. 그 외에는 음... 귀족파에는 아마도 없을 거 같아, 애초에 평판 자체가 선인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머니까. 반면에 황제파에 속한, 작위를 가진 이들이라면 유서 깊은 가문 중에서는 인간을 비롯한 세계의 역사에 관심이 있을 만한 가문이 경외심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그 외에는 준남작 같이, 세습되지 않는 작위를 받은 이들이라면 꽤 우호적일 거라고 생각해, 준남작이라는 건 대부분 전공을 세워서 받는 작위니까, 귀족 가문이 되기에는 조금 모자라겠지만!
그렇겠지...! 아무래도 조금 실례한 게 아닌가 싶어, 너무 아우로라주한테만 부담을 준 건 아니었음 좋겠는데.
단순 개개인으로라면 악감정을 가지지 않은 귀족파 가문도 찾아보면 있긴 하겠지만 정치판이라는 게 개인적인 의견보단 그들이 속한 파벌의 입장이 좀 더 우선되는 법이잖아? 그런 의미에서 껄끄럽다고 생각해. 애초에 솔로몬도 잘 지낼 생각이 없...고... 근데 이건 같은 황제파 귀족들에게도 마찬가지라서, 제국 내의 솔로몬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은 이유도 이런 거라고 생각해.
나도 생존신고! 헉, 솔로몬주가 700을 먹었어! 조금만 더 있으면 새 판을 세울 수 있겠다! 그렇지, 응응...나도 일을 하다가 오늘이 며칠이더라 하고 달력을 보면 벌써 이만큼이나 지났구나 싶고..나는 잘 지내고 있어! 일이 조금 많긴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 (u.u) 오늘 하루도 잘 보냈을까? 슬슬 여름이라고 티내나봐~ 밤도 낮도 되면 습하고 덥고. 더위 조심하길 바라!
갱신할게! 시원하긴 해서 다행이지, 응응. 더위가 한츰 꺾인 것 같긴 한데 이 다음이 두려워지기 시작했어. ㅋㅋㅋ...비가 그치고 해가 쨍쨍한 날이 되면 얼마나 더워질까.. 그것보다 부산쪽은 물난리가 났었다는데 더 큰 피해가 안 났으면 좋겠다. 장마라고는 해도 너무 심각한 것 같아. :( 동생과의 시간은 잘 보냈을까? 나는 오늘 쉬는날이라 모처럼 여유롭게 지내고 있어! :D
얍 갱신이야! 오늘도 비가 계속 오는구나, 물론 어제처럼 쏟아져 내리지는 않았지만 바깥을 우산 없이 돌아다니기는 어려운 날씨네. 확실히...어제보다는 비가 덜 내려서 그런건지 좀 더워진 느낌이야, 진짜 큰일이다...비가 완전히 그치면 푹푹 찌겠지. 응, 나도 뉴스에서 봤어, 심지어 안타까운 일을 당하신 분들도 계시더라고...며칠은 더 쏟아질 거라던데 별 일 없었으면 좋겠는걸. 동생하고는 시간 잘 보냈어! 이제 한 1~2주 뒤에야 다시 볼 수 있을 거 같아, 아우로라주는 쉬는 날이었다니 다행이네!
난 요즘 하루에 두 끼 정도 먹고 있어, 체중 조절도 해야 하고, 아무튼 규칙적으로 먹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
흐음 확실히 그렇겠구나, 솔로몬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을 거 같네. 후작가 쪽에서도 더 강도 높은 비판은 하기 어렵겠지... 그러면 일상은... 이거 어떨까? 부상도 치료할 겸 요양하느라 바깥 소식을 따로 듣지 못하던 아우로라가 간만에 바깥 소식(예를 들자면 후작가의 비난이라든가, 소네타의 편지라든가)을 접하면서 진행해보는 건?
많은 일이 있었다. 처음엔 대토벌에 따라가고 싶었을 뿐이다. 아버지는 대토벌의 ㄷ자도 꺼내지 못하게 했으니까. 오세와 아이니도 가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으니, 공작님께 부탁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 이후엔 마수를 토벌하기 위해 직접 나설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마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고작해야 수발을 들고 허드렛일을 할 줄 알았는데 회의에 참가하고 직접 마물을 소탕할 줄이야. 하지만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결과를 먼저 서술하자면 아우로라는 큰 부상을 입게 되었다. 기묘한 마물에게 습격 당해 단 둘이 대치했고, 마법사가 원시림에서 마나를 사용하기까지 했으니 죽지 않은게 되려 신기할 정도였다. 그 이후의 일은 정신을 차리지 못해 알 수 없었지만 타리크 경에게 듣자하니 이상한 낌새가 있었다고 했다. 내분은 다른 귀족들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라 아우로라는 믿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아우로라는 침대 위에 있었다. 막상 검진을 받고나니 상태가 좋지 않았다. 대토벌 당시에는 몰랐지만 갈비뼈가 일부 부러졌고, 상처는 꽤 깊었다. 얼굴에도 거즈가 붙게 됐는데, 뺨에 흉터가 남을지 안 남을지는 시간이 지나야 알 것 같다고 했다. 치료 마법도 한계가 있는지라, 이렇게 침대에서 생활한지 3주. 그동안 아우로라는 잘 먹고, 잘 쉬었다. 얄쌍하던 앙상하던 몸에 약간의 살이 붙은 것 같기도 했다. 하긴, 하는 일이라곤 주방장이 챙겨준 특식을 먹고, 침대에 눕고, 자고, 주치의와 대화하고, 먹고, 자고, 심심하면 책을 좀 읽고 하는 일 뿐이었으니 안 붙는게 더 이상하겠다.
"아가씨, 편지가 왔어요!" "고마워요, 아이니."
아우로라는 편지를 받아들며 간만에 바깥 소식을 듣겓거니 싶었다. 소네타의 편지였다. 소네타가 보낸 편지에는 아카데미의 소식도 있고, 귀족들의 이야기도 재밌게 쓰여있고, 집안의 일도 써져있어서 특히나 기대가 됐다. 편지지를 펼쳐본 아우로라는 들뜬 얼굴로 내용을 읽어가다가, 점점 표정이 차게 식어갔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지금 공작님을 뵈어야겠어요." "아직 움직이시면..!" "괜찮아요. 잠깐 대화만 하고 올테니까 걱정 말아요."
아우로라가 솔로몬의 집무실을 향해 가는 지금쯤, 솔로몬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평소와 같은 업무? 아니면 도미닉 후작의 항의서를 읽고 있었을까? 아니면...
// 너무 오랜만에 쓰는거라 그런가 감이 안 잡히네..(@.@) 복잡해두 양해해주길 바라..!
과정이 어떤 식이었든간에, 대토벌은 마무리되었다. 애초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것만으로도 대토벌은 꽤나 성공적이었고, 비록 습격을 당하기는 했지만 그를 통해 제국 내부의 불온한 움직임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으니 솔로몬에겐 뜻밖의 수확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물론 아우로라가 크게 다친 부분도 있었고, 이번 습격을 지켜보던 사역마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솔로몬 자신이 그런 수준의 기습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습격자들도 알게 되었을 터.
사실 그동안 그가 보여 준 행보로만 따진다면 증거가 있든 없든 바로 내부를 들쑤실 만 했겠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는 듯 보이지 않았다. 기습과 그로 인한 문제 외에도, 아우로라, 그러니까 후작가의 영애를 멋대로 대토벌에 참가시키고, 큰 부상을 입게 만든 것에 대한 항의가 그에게 날아들었으나 그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물론 아우로라가 대토벌에 함께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부분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게 그가 눈에 띄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 이유가 될 수는 없어 보였다. 그럼 대체 무슨 이유로? 아마 그 자신만이 알고 있겠지.
대토벌에서 돌아온 이후, 아우로라가 부상을 치료하며 요양하는 동안 솔로몬은 자신에게 날아드는 항의를 무시하거나 형식적인 답변만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대토벌 후처리도 해야 했기에 그는 꽤나 바쁜 듯했고, 아우로라가 요양하며 식사도 따로 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아우로라와 마주치는 시간도 현저히 적어지다가 아예 뚝 끊기고 말았다. 그리고 오늘, 소네타의 편지를 받고 아우로라가 집무실에 도착하자, 집무실 문은 살짝 열려 있어 집무실 내부를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 솔로몬은 없었다. 잠시 바람이라도 쐬러 나갔을까? 집무실 책상 위에는 서류가 쌓여 있고, 그 중에는 후작가의 봉인이 찍힌 서신도 있었다.
아마도 항의서인 모양이다.
//얍! 괜찮아, 읽는 데 전혀 불편한 점도 없었고 괜찮았어! 나야말로 오랜만이라서 좀 어렵네..!
집무실 문이 열려있다. 틈 사이로 보이는 내부를 보자 아우로라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기껏 침대 밖으로 나와 몸을 움직였더니 막상 중요한 공작님께서 자리를 비우셨다니. 어쩜 이렇게 타이밍이 좋지 않을까? 그렇다고 저택 내부를 돌아다니기엔 아직 이곳저곳 쑤시는 곳이 많았다. 무례한 행동인 건 알지만 잠깐만 들어갔다 나와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 아우로라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집무실은 어딜 가나 책상 위가 같다. 황실도 그렇고, 후작의 집무실도 그렇고, 하물며 공작가도 그랬다. 쌓인 서류, 잉크병과 깃펜, 말라붙은 잉크자국...아우로라는 쌓여있는 서류를 찬찬히 훑어보다 익숙한 서신을 발견했다. 사슴이 새겨지고 짙은 남색 밀랍으로 봉인된 그것은 스노우디아의 것이었다.
안봐도 뻔하다. 항의서겠지. 아우로라는 무심결에 서신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소네타의 편지에선 분명 '아버지가 굉장히 화가 나셨다'고 써있었고, 아우로라도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알았으니까. 황태자와 파혼하기 전에도 그랬지만 파혼한 이후 특히나 더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키운 딸인데 말도 없이 전장에 나섰다가 다쳐서 돌아오면 누가 좋아하겠나.
서신을 펼쳐보려던 아우로라는 불안감을 느끼며 그대로 굳어버렸다. 만약 이 서신 안에서, 다시 자신을 후작저로 돌려보내달란 요구를 했으면 어쩌나 싶었다. 그렇게 된다면 분명 공작님의 영지엔 발도 들이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읽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아우로라는 이미 연정을 품게 된 사람이 이 저택을 나가야 한다고 통보하는 것만큼 끔찍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내가 먼저 알고, 덤덤하게 받아들이는게 낫지 않을까.
"괜찮을거야. 아무런 내용도 없을거야. 형식적인 내용일거야."
아우로라는 주문을 외듯 중얼거리며 서신을 펼쳤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아우로라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무슨 내용이 적혀있었을까? 누가 집무실 안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솔로몬이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아우로라가 펼쳐 본 서신에는 글씨가 깨알같이 들어차 있었다. 후작이 매우 화가 났다는 소식에 비해 서신에서 보이는 어투는 차분했으나, 과연 후작이 차분한 상태에서 서신을 작성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심하거나 원색적인 비난은 보이지 않는 것이 역시 한 파벌의 수장다운 행동이었다고 해야 할까... 후작가의 봉인이 찍힌 이상 실수했다간 역으로 책을 잡힐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서신은 항의서의 형식보다는 정기적으로 의견을 교환하는 데에 쓰는 서신 정도의 성격을 띄고 있었으나, 아우로라가 솔로몬과 함께 있는 것에 대해 불안감을 심히 느끼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봉인된 채 집무실 책상에 놓여 있었으니 솔로몬은 아직 서신을 읽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도착한 서신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다시 잘 돌려놓는다면 없던 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비록 격식을 차린 항의라고는 해도 솔로몬의 기분이 상해 아우로라를 돌려보내거나, 부정적인 대응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숨겨버릴 수도 있을 터다.
깨알같은 글씨라고 해도 읽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우로라는 이미 열어본 서신의 내용을 찬찬히 훑었다. 아버지께서 화가 나셨다고 했는데,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신 것 같다. 괜히 수장이 아니라는 듯 차분하고 요점만 잘 정리가 되어있었다. 그래도..
"화가 많이 나셨네..."
불안함이 항의서의 중간중간에 스며들어 있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더 일어날지 모른다는 염려의 형식으로 쓰여있었지만, 사교계에 오랜 기간 몸을 담은 아우로라가 그 염려에 숨어든 뜻을 모를리가 없었다.
공작님께선 아직 서신을 읽지 않은 것 같고. 아우로라는 생각에 잠겼다. 이 서신을 이대로 숨겨버린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 될 수도 있는데. 하지만 나중 일을 생각하면 어째서 답신이 없냐며 다시금 항의서를 보낼수도 있고, 꼬리를 잡힐 수도 있다. 그러면 다시 잘 돌려놓을까? 그러면 되겠다!
하지만 그 이후의 반응은 어떻게 하지? 만약 기분이 나쁘시다면? 그래서 나를 돌려보낸다면? 후작가에 안 좋은 일이 생간디면?
아우로라는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앙 다물었다. 어느쪽이라도 다 나쁜 일이다. 어떻게 할까? 하던 찰나 아우로라의 눈에 빈 종이와 깃펜이 보였다. 아우로라는 서신을 잘 돌려놓고는,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냈다.
[항의서를 읽어버렸어요. 죄송해요. 그렇지만 후작저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 아직 공작님의 손을 손에 꼽지 못할 정도로 잡지 못해드렸는걸요...]
…대체 이게 무슨 해괴한 내용인가 했더니만, 아마도 아우로라의 항의서인 것 같다. 아우로라는 살금살금 집무실 밖으로 나가려 했다. 과연 아우로라는 발칙한 항의서를 써놓고는 방에 돌아갈 수 있었을까?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나가지 못했을까.
아우로라는 편지를 숨기거나 읽지 않은 척을 하는 대신 자신이 항의서를 읽었으며, 후작저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이유가 담긴 메모를 남기기를 선택했다. 이미 저지른 일인데다가 스스로도 이게 발칙하다고 여겨졋던 모양인지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고자 한 아우로라가 문 쪽으로 다가가자 집무실로 향하는 발걸음 소리가 복도로부터 흘러들어온다.
집무실 문은 여전히 살짝 열린 상태였기에 문틈으로 집무실 바깥 복도를 확인할 수 았을 터, 만약 아우로라가 집무실 문 틈으로 복도를 살피려고 했다면, 바로 집무실의 주인이 걸어오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솔로몬의 발걸음은 딱히 급하거나 한 것 같지 않았다. 혹시 집무실이 아니라 다른 곳에 가지는 않을까 싶어 기다려 볼 수도 있겠지만... 속도가 빠르지 않기는 해도 분명히 집무실 쪽으로 그의 발걸음은 향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솔로몬의 모습을 살피다가 그가 시선을 돌린 틈을 타 빠르게 빠져나가는 것을 시도해 볼 수도 있겠지만 아우로라의 몸 상태가 과연 그런 민첩한 움직임을 허용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가만히 기다린다면 집무실로 들어오는 솔로몬과 딱 마주보게 될 텐데, 집무실에 들어온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방금 쪽지를 남긴 상황인데, 솔로몬이 항의서를 계속해서 방치할 리도 없고, 만약 집무실에 들어와서 항의서와 쪽지를 본다면 그에 대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라는 고민을 하고 있을지, 아니면 어떨지 모르는 아우로라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솔로몬은 집무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일하는데 하도 햇빛이 뜨거워서 혼났지 뭐야, 오후 넘어서는 그늘이 많이 져서 괜찮았지만.
그건 괜찮아! 몸 상태가 안 좋아서 그랬던 거고, 애초에 서로 재촉하면서 힘들게 하고 싶진 않으니까. 그래도 푹 쉬고 있다니 다행이네, 얼른 나아졌으면 좋겠다!
방으로 서둘러 돌아가려 했건만, 발걸음 소리에 아우로라는 살짝 복도를 살펴보곤 크게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지금 크게 소리를 내면 들킬 것이다. 공작님께선 저번에 악몽을 꿨을 때, 알고 있었다고 했으니까. 거기다가 용인이시니까 자신이 있다는 걸 들킬지도 모른다. 제 입을 틀어막은 아우로라는
어떻게 해야하지? 지금 빠져나간다 해도 몸상태가 그걸 받쳐줄리가 없고, 그렇다고 기다리면 마주치고, 마법을 쓴다면 마나의 잔해가 남을 것이다. 아우로라는 패닉에 빠진듯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더니 바쁘게 숨을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책상 밑? 절대 안 돼! 들키기 가장 좋은 곳이고..장식장? 장식장도 안 되는데.. 아우로라는 문득 소파를 발견하곤 그 밑을 바라보았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다! 소파에 앉을리도 없고...아우로라는 결심한 듯 소파 밑으로 슬슬 기어 들어갔다. 체구가 작고 잠옷 차림이라 다행이지, 만약 아우로라가 키가 컸고 옷도 풍성한 드레스였다면 어림도 없었을 상황이었다.
아우로라가 고민 끝에 소파 밑에 숨자마자 집무실의 문은 열렸고, 집무실 너머 복도에서부터 들려오던 발걸음 소리가 방 안에서 들리기 사작했다. 소파 밑으로 볼 수 있는 상황은 매우 제한적이었기에 그저 솔로몬이 집무실 안에 들어왔고, 천천히 집무실을 돌아보고 있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었으리라.
그리고 솔로몬 본인은 집무실에 누군가 들어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인지 집무실을 한번 훑어보고 자신의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쌓여 있는 서류를 적당히 정리해 책상 한 쪽에 몰아둔 뒤, 귀족들이 자신에게 보내온 항의서들을 하나하나 읽어보는 듯 하더니 그대로 항의서들은 한 장 한 장 집무실 안에 있는 난로에 던져져 불태워진다.
그러다가 후작가의 항의서도 확인한 그는, 앞서 불태운 항의서와 마찬가지로 항의서를 불태우려고 했으나 항의서와 함께 놓여 있던 쪽지를 발견하게 된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공작님과 마주칠 뻔 했다. 아우로라는 입을 다문 상태로 슬슬 눈치를 살폈다. 소파 밑 시야로 보이는 건 벽난로와 공작님의 다리 정도. 공작님께서 항의서가 떨어지거나 해서 허리를 숙이지 않는 이상 자신과 마주칠 확률은 없었다. 이대로 공작님이 다시 나갈 때 까지 기다렸다가, 나가시면 그때 방 안으로 도망쳐야지.
소파 밑이라 그런지 시야가 제한적이지만 열심히 시선을 쫓아보니 집무실을 돌아보는 건 알 수 있었다. 다행히 책상쪽 시선은 넓어서 드문드문 공작님의 팔이나 서류를 들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반, 그리고 어떻게 일을 하시고 계실까 하는 궁금증 반으로 볼 수 있었다.
공작님은 그냥 불태워버리는구나. 대답 할 가치도 없는 걸까? 아니면 흔적을 남기지 않는 걸까? 혹은 둘 다일수도 있겠지. 후작가의 항의서도 그럴거고. 납작 엎드린 모습으로 고개만 모로 돌려 난로 속의 불꽃이 항의서를 낼름 먹어치우는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우로라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잦아들자 몸을 굳혔다.
'어떡하지? 설마 들킨 걸까?'
빳빳하게 굳어버린 아우로라는 숨을 죽였다. 어떻게 하지? 이대로라면...솔직하게 나가서 말해야할까? 아우로라가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며 옴싹달싹 하지 못하는 도중, 솔로몬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집무실에서 자신에게 온 각종 편지들과 자료들을 읽어 보았지만 전부 별 일 아니었다. 그나마 눈길을 끌었던 것은 후작가에서 온 서신이었을까, 작성하며 감정을 최대한 조절하기 위해 노력하는 후작의 모습이 눈에 선한 것 같다. 그래봤자 아우로라는 현재 자신의 울타리 안에 있고,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후작이 당장 어떻게 아우로라를 빼내 오거나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역시 약간의 흥미를 끌었을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편지를 벽의 화로에 던져 넣으려고 했다. 지금까지 던져 넣은 여러 장의 서신처럼.
그러다가 항의서와 함께 있던 메모를 발견하고 읽어 보니, 다름 아닌 아우로라가 썼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럼 자신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아우로라가 집무실에 왔덨다는 이야기인가? 그게 합리적인 판단이겠다고 중얼거린 그는 그것보다 다른 부분에 대해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분명 후작가를 그리워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더군다나 돌려보낸다는 이야기를 한 적도 없음에도 그런 일이 생길까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이나, 그 이유라고 하는 것이 그의 입장에선 상당히 난해했기 때문에 그는 잠시 서류 등 종이를 만지작거리던 것을 멈추고 한참 동안 메모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메모가 뭐라고 말을 할 줄 아나, 결국 아우로라에게 직접 이야기를 해 보기로 생각한 것인지 그는 집무실 책상에 놓인 종을 울렸고, 곧바로 사용인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아우로라는 뻣뻣하게 굳어 나갈 생각을 빠르게 철회했다. 공작님께서 이렇게 조용하신 이유는 아까 중얼거린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겠지. 잠깐의 침묵 뒤 들려오는 건 사용인을 부르는 종소리였다. 아우로라는 혹여 사용인이 알아보면 어쩌나 싶어 더 깊게 몸을 웅크렸고, 집무실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큰일났다..!'
사용인과의 대화에서 공작님은 엇갈렸다고 말씀하셨지만, 아우로라는 차마 자신이 여기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하지 고민하던 아우로라는 집무실을 나서려는 소리에도 가만히 있기로 했다.
'일단 공작님께서 나가시면, 그때 나가자.'
텔레포트 마법으로 방에 가야할까? 아니면...아우로라는 고민하던 도중 황급히 입을 제 입으로 틀어막았다.
'하필 이때면..!'
먼지가 비강을 간지럽혔는지 아우로라는 입을 꾹 다물고 공작님이 어서 나가길 바랐다. 이대로 소리가 난다면...
자신이 나간 뒤에 나가야겠다는 아우로라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용인이 나간 뒤였음에도 바로 집무실을 나설 생각은 없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던 솔로몬은, 집무실 책상 위에 놓인 후작의 항의서와 아우로라의 메모를 챙겨 들고 나서야 집무실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동안 소파 아래의 먼지는 아우로라의 코를 간지럽히는 일에 충실했고, 이대로라면 재채기를 하게 될 것이며, 일반적으로 그의 집무실에서 나지 않을 소리로 인해 그가 집무실을 샅샅히 뒤질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하늘이 도왔다고 해야 할 지, 솔로몬은 곧바로 집무실을 나섰고, 혹여 아우로라가 재채기를 했다고 해도 아마 집무실 문이 닫히는 타이밍과 겹쳐 솔로몬은 듣지 못하거나, 들어도 조금만 이상하게 생각할 만한 상황이 되었다.
아무튼, 솔로몬은 집무실을 빠져나와 복도를 천천히 걸어나가면서, 아우로라가 있을 만한 장소를 생각해 본다.
제발 빨리 가주세요, 아우로라는 입을 꾹 다물며 숨을 참았다. 왜 저렇게 늦게 가시지? 무슨 일이 있는걸까? 아니면 들켰나? 아우로라는 집무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결국 작게 재채기를 내뱉었다.
"엣취!"
아무리 공작가라도 이 밑까지 깨끗하진 않다는 걸 인지한 아우로라는, 슬금슬금 소파 밑에서 빠져나오며 옷에 달린 먼지를 톡톡 쳐냈다. 후에 들킬 일을 만들지 않겠다는 듯 그 먼지를 발로 슥 밀어 소파 밑에 넣고 능청스레 시선을 돌리기까지 했으니, 모든 증거가 인멸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문을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열려고 했던 아우로라는, 들키지 않을 정도로만 고개를 내밀어 주변을 살폈다.
사람들이 없겠지? 주변을 열심히 살핀 아우로라는 사람이 없음을 직감하곤 집무실을 조용히 빠져나가 마치 치즈를 찾아 돌아다니는 생쥐처럼 조심스럽게 뽈뽈거리기 시작했다. 아직 움직일때마다 온 몸에서 아프다고 항의를 하고 있지만, 쪽팔린 상황보다는 차라리 아픈게 나을테니까. 그렇게 아우로라는 공작님께서 자신이 있을 장소를 고민할 것이라는 결론과 함께 정원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그늘이 진 작은 나무 아래였다.
'여기라면 내가 요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실지도 몰라.'
물론, 머리 위에 자그마한 먼지가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다는 건 자신도 아직 모르는 것 같지만.
집무실을 빠져나온 솔로몬은 복도를 걸어가면서 아우로라가 어디에 있을지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일단 자신을 찾으러 방을 나섰다는 말을 사용인이 했었으니 방에 있을 가능성은 낮겠지, 물론 자신을 찾지 못해서 다시 돌아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그녀를 찾고 있다는 것을 사용인에게 이야기했으므로 방에 그녀가 머물러있다면 금시에 자신에게 돌아와 그녀가 방에 머물러있다고 이야기했을 터다.
그럼 어디에 있을까? 저택 내부 어딘가인가? 아니면 공작저 바깥으로 나갔을까? 아무리 요양하는 동안 답답하다고 해도 아직 완치되지 않은 상태로 바깥을 돌아다니다니 안 될 일인데. 그리고... 어째서인지 최근, 아우로라의 마력을 탐지하기가 어려워졌다고 생각하며 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마 부상 때문에 여러모로 약해져 있기 때문이겠지.
그렇다면 저택 내부와 외부 둘로 나누어서 아우로라가 둘 중 어느 곳이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낫겠다고 결정한 그는, 저택 내부는 사용인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바로 공작저 중앙을 가로질러 정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서니, 아우로라가 이 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처음 산책을 나선 길이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갑작스레 감정의 변동으로 위험한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산책을 나섰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는 길을 따라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공작저 주변에 모여 사는 주민들의 집이 나타나고, 그를 보며 인사해 온다. 아우로라가 이 쪽으로 지나갔다면 그들이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솔로몬은, 자신의 궁금증을 그들이 풀어줄 수 있을지 물었고, 돌아온 답은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 뿐이었다.
그렇다면 이 쪽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며 그대로 발걸음을 돌린 그는, 급히 나가느라 살피지 못했던 공작저의 정원에 발을 들인다. 천천히 정원의 꽃이나 나무들을 살피며 걷지만, 아직 아우로라를 발견하지는 못한 것 같다.
" 아우로라 양, 여기 있소? "
꽤나 큰 목소리로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 얍 갱신이야! 벌써 며칠 째 비가 오는 건지 모르겠네... 뉴스 보니까 계속 실종자나 사망자가 나오는 거 같은데 아우로라주 쪽은 괜찮아? 내 쪽은 다행히 땅이 높은 편이라 수해는 없었어.
아우로라는 작은 나무 그늘 밑에서 솔로몬이 언제 올까 긴장하고 있었다. 별로 잘못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어째 가슴이 계속 뛰었다. 아무래도 소파 밑에 있었다는 것에 작은 죄책감을 느낀 것이 아닐 정도로. 아무래도 그 가설이 맞는 것 같다. 그야, 공작님의 사생활을 엿본 기분이라고 해야할까? 말로 설명하긴 힘들지만 정상적인 일을 한 건 아니니까.
아우로라는 고개를 들었다. 창문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건 사용인들의 그림자였다. 설마 나를 찾는 걸까? 그럴리가. 아우로라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림자 너머로 새어든 강한 빛에 눈을 꾹 감았다. 그렇게 공작님을 기다리던 아우로라는, 아주 잠깐동안 잠에 빠져든 것 같았다. 몸은 무리해서 움직였고, 마나도 아직 수복 되지 못하고 약해져 없는 상황. 거기다 시원한 나무그늘과 포근한 햇살 때문에 잠에 빠져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헉!"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렇게 오랜 시간은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정도로 아우로라가 숨기의 귀재도 아닐 뿐더러, 아직 해가 저물지 않았으니. 아우로라는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번쩍 뜨면서, 자신의 뺨을 두어번 짝짝, 하고 쳐 정신을 차렸다. 공작님께서 자신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꿈결에서 들린 목소리가 절대 아니었다. 아우로라는 혹시 목소리가 잠겼을까, 몇 번 헛기침을 해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ㅈ, 저 여기 있어요..!"
지금이 몇시지? 아니, 해가 진 건 아니겠지? 아이니가 찾을텐데. 아니, 그것보다 공작님께서 이미 날 찾고 계시는데. 설마 들킨 걸까? 쿵쿵대는 가슴과 함께 아우로라는 떨리는 눈동자로 솔로몬의 목소리가 들렸던 곳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 늦어서 미안! 여기는 괜찮았어. 다른 동네는 조금 난리가 난 것 같지만...더 큰 피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늘 하는 말이지만... 이것 말고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는 것 같아. 정말 다들 괜찮아졌으면 좋겠다. 더 큰 피해가 없었으면.. :(
여기에도 없나? 라는 생각이 들 즈음, 정원의 한 켠에서 아우로라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목소리의 근원을 찾아 그는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그가 서 있는 장소와 아우로라가 쉬고 있던 나무 사이의 거리는 가까웠고, 자연스레 아우로라가 자신의 시선에 담기자 그는 발걸음을 옮겨 아우로라에게 다가갔다.
" 여기 있었군, 몸은 좀 괜찮소? "
처음에는 얼굴을 보자 마자 메모에 대해서 이야기할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상태가 마냥 괜찮아 보이지는 않았기에 먼저 안부를 묻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기로 했다. 어쨌든 아직 요양이 필요한 환자니까, 충격을 줄 수도 있는 말은 최대한 자제하는 게 좋겠지. 아무튼 몸은 좀 괜찮냐고 인사치레에 가까운 말을 하긴 했지만 그녀의 모습은 그닥 괜찮아 보이지는 않았다, 상당히 피곤해 보였다고 해야 하나, 물론 부상을 당한 그 때보다야 훨씬 나아졌지만 여전히 힘든 건 사실이었으니.
" 요양하는 게 많이 답답했나 보오, 그래도 어디 갈 지 이야길 해 줬다면 좋았을 텐데, 아직 완전히 나아지지는 않았잖소. "
//갱신할게! 나야말로 늦어서 미안해! 앗 그렇구나, 괜찮았다니 다행이다! 뉴스랑 신문을 보니까 장마는 슬슬 끝나간다는 거 같아, 문제는 장마가 지나가니까 태풍이 뒤이어 온다는 건데... 더위가 스무스하게 지나가게 되니까 괜찮은 걸까? 수해만 없다면 더 좋을 텐데..
솔로몬과 눈을 마주치자 아우로라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미소라기엔 어딘가 어색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아무래도 졸다 깨서 그런 것이려니 싶을 정도로 미묘한 것인지라 그렇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네. 덕분에 많이 나았는걸요."
친절한 공작저의 사용인들 덕분에 점점 더 좋아지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아파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고, 마법도 전혀 쓸 수 없었는데 지금은 공작저를 이렇게 오래 돌아다니고. 어느정도 마나의 흐름을 읽을 정도로 회복이 됐다. 그마저도 희미하지만. 언젠가는 예전처럼 다시 읽을 수 있을거니,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며 아우로라는 양 손을 모았다.
"걱정시켜드려서 죄송해요. 안에만 있다보니 소식도 제대로 알 수 없어서 조금 답답했어요…."
아우로라는 손을 꼼질거렸다. 아무래도 솔로몬이 편지를 읽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만약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양 티를 낸다면 의심을 살 것이다. 양심에 콕콕 찔리는 일이지만 모르는 척 해야 맞겠지? 그리고 솔직하게 몇 부분도 얘기하는게 좋겠고. 아우로라는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공작님을 만나뵈려고 했는데… 계시지 않아서 잠시 산책을 나왔다가 잠들어버렸네요. 혹시 아이니가 저를 찾았나요?"
// 으악, 현생이 갑자기 또 몰아치네... 장마가 끝난다니 다행이다. 그렇지만 이번엔 찜통더위가 올거라고 하네...태풍도 그렇구. 미쳐 돌아간다는 말이 정말 맞는 것 같아. 아니면 이렇게 오락가락 할리도 없구...(._.
자신을 보며 방금 잠에 깬 듯 미소를 짓는 아우로라의, 덕분에 많이 나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사요인들이 잘 보살피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신은 공작이라는 위치 때문에 밀려드는 업무로 그녀가 요양하는 동안 잘 찾아가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나아지고 있다면 아무래도 좋은 것이겠지.
" 꽤 오래 안에서 쉬기만 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래도 어디에 가는지 사용인들에게라도 이야기해 두지 그랬소. "
답답했다는 말에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며 이야기한 그는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잠시 생각하는 듯 보였다. 어쨌든 아우로라를 찾은 이유가 따로 있었고, 지금 자신의 앞에 아우로라가 있었으므로 이야기를 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어쨌든 그녀 역시 자신을 보기 위해서 방을 나섰다고 했었으니까.
" 아니, 딱히 아우로라 양을 찾는 사용인들은 없었소, 아우로라 양이 날 찾으러 나섰다고만 알고 있던데, 이유를 물어도 되겠소? "
아우로라를 찾았으니 사용인들에게 더 이상 수고할 필요 없다고 알려줄 필요가 있긴 하지만, 자연스럽게 사용인들이 모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사적인 대화를 나누기는 조금 어려울 지도 모른다. 사용인들은 조금 더 있을 리 없는 아우로라를 찾기 위해 저택을 돌아다니겠지만 어느 정도는 뭐. 괜찮겠지. 라는 생각을 하는 솔로몬의 표정은 평소와 그리 다른 점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흐흐..; 나도 마찬가지야! 분명 장마 막바지라는 말을 들었던 거 같은데 또 비가 온다네... 비가 안 오는 곳도 있다지만 그 쪽은 폭염 특보라니 대체 왜 이러는 것이야...
자신의 말에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며, 자신을 찾은 이유를 천천히 입 밖으로 내기 시작하는 아우로라의 모습을 그는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니까 최근에야 받아 본 바깥의 소식이 그녀가 느끼기에 좋은 소식이 아니었고, 그 소식이 자신에게 전해지면 메모장에 그녀가 써 둔 일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래, 거기까진 생각이 미칠 수 있지, 중요한 건 그 다음이었다. 자신이 그 일에 대해서 무어라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아우로라의 입에서 싫어요, 라는 말이 나왔고, 또 그가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묻기도 전에 아우로라는 어째서 그렇게 이야기한 건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으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으나 결과적으로 공작저에서 보고, 느낀 일들이 그녀에게는 해방감을 주었고,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 자신을 지극히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로 인해 자유를 상당 부분 제한당하는 것이 싫다는 게 요지라고 볼 수 있겠지.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자유에 대한 갈망이란 건 그 역시 가지고 있었으니까.
이미 알아버렸는데 어떻게 놓겠어요. 라는 그녀의 말에서, 공작저에서의 시간이 그녀의 삶을 꽤나 크게 바꿔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긍정적인 변화일지, 부정적인 변화일지는 알 수 없어도, 어찌 되었든간에 큰 변화로 작용했다는 거겠지.
"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는 알겠소, 하지만... "
그렇다고는 해도 무작정 기한 없이 그녀를 계속 붙잡아 두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물론. 그녀를 공작저로 데려온 것에는 확실히 자신의 어떠한 목적 달성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상당 부분 작용했지만 그렇다곤 해도 조금 붕 떠 있었다고 해야 할까, 대토벌로 인해 그녀가 입은 부상과, 그로 인한 제국 내 여론은 그녀를 계속해서 공작저에 머무르게 하기에는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스스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라는 말을 하게 된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아마 자신에게 영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귀족들이 보기에는 자신이 그녀를 협박한 것처럼 비춰지겠지.
더군다나, 단순한 흥미로 인해 행한 몇 가지 일들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방해가 될 여지도 있었다. 지금은 조금 기다리는 게 맞지 않을까.
" 귀족들간의 일은 그렇게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대도 알고 있을 거요. "
돌려보내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라는 생각이 드는 상황이었다. 매정하다 느껴도 어쩔 수 없다.
애초부터 그랬으니까.
//답레! 많이 바쁜가 보네, 그래도 무리하지 마! 하루에 한 번씩은 확인하고 있으니까, 이렇게 이야기해 주는 걸로 족하거든1
귀족들간의 일은 그렇게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우로라는 그 말에 옷깃을 꾹 말아 쥐었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부정하고 있었다.
귀족들간의 일은 소설 속의 이야기처럼 낭만적이지 않다. 가시와 칼날을 혀에 숨겨두고, 손짓 하나하나도 긴장해야하는 것이 귀족의 삶이었다. 소네타처럼 아예 얼굴에 철판을 깔고 제 마음대로 살 것이라는 의지를 강하게 표출하면 모를까, 한 나라를 좌지우지 하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견제하는 삶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그들은 동화 속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공작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으니 인정해야만 했다. 아우로라는 눈을 내리감았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차근차근 처음부터 다시 쌓아가면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이 아무리 오래 걸려도. 언젠가는 다시 기회가 오지 않을까. 여러 생각과 마음이 교차했다.
"제가 너무 무리한 부탁을 드렸네요."
생각을 정리한듯 아우로라는 옷자락을 말아 쥐던 손을 펼치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늘 그렇듯 웃는 부드럽게 웃는 낯으로 아우로라는 솔로몬을 올려다보았다.
"제가 원하는 대로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
아우로라는 양 손을 뻗어 조심스레 솔로몬의 한 손을 잡으려 했다. 가능하다면 그의 손을 제 근처로 뻗어 뺨 위에 얹으려 했고, 동시에 배시시 웃어보였을 수도 있다.
"대신에, 만약에 저를 돌려보내신다고 해도 약속은 지켜주셔야 해요. 데뷔탕트 때, 에스코트도 해주시고 첫 춤도 춰주시기로 약속 했잖아요."
약속을 지켜준다면, 미련 없이, 앞으로 후작 영애로서 공작저에 영원히 돌아갈 날이 없을 것이란 선고가 내려와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저는 목숨까지 다 걸었는데, 공작님께서 약속을 안 지켜주신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가 될테니까요."
귀족들은 별로 신경쓰지 않을 약속과 문제겠지만, 사람과 사람(솔로몬이 사람은 아니었지만)간의 약속이니까.
"그리고 마탑의 이름을 빌려서라도 항의서를 써버릴 거예요."
아우로라가 눈을 슬쩍 내리깔고 아랫 입술을 비죽 내밀며 투덜거리듯 말했다. 상처를 받은 표정은 아니었다. 마치 슬퍼하지 않기로 자기 자신과 약속한듯, 평소와 같은 표정이었다.
너무 무리한 부탁을 했다며 부드럽게 미소짓는 아우로라를 내려다본다. 무리한 부탁이라는 말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물론 현 상황이 그에게 긍정적이지 않게 흘러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그가 어떤 식으로 움직여도 세간의 이목이 집중될 가능성은 높다. 그래도, 그가 언제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신경쓰던 이였는가 하면 글쎄올시다. 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 터였다.
아우로라가 사경을 해멘 것이 후작에게는 큰 충격이자, 솔로몬에 대한 분노이며, 이참에 솔로몬에게 잡힌 약점을 해결할 수 있는 기회였겠지만 그런 배경적인 상황이 어떻든 간에 아우로라는 현재 솔로몬 자신의 보호 아래에 있었다. 수틀리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른다, 라는 기존에 그가 쌓아 온 모습들은 귀족들의 공세에도 그가 퍽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황제가 직접 명령하는 게 아닌 이상, 아우로라를 어떻게 할 지는 온전히 솔로몬에게 달려 있었으니까. 후작 역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은근히 자신을 압박했을 뿐, 대놓고 자신을 비난하며 아우로라를 돌려달라는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영리한 만큼 조심스러운 건 어쩔 수 없는 거겠지.
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상황을 정리해 보던 솔로몬은, 자신의 손에 다른 이의 살갗이 닿는 느낌에 시선을 옮겼다. 그렇게 그의 시선은, 자신의 손을 조심스레 잡은 아우로라의 작은 양쪽 손을 담았고, 이어서 그 작은 손에 이끌려 자신의 손이 아우로라의 뺨에 닿는 것 역시 담았다.
그리곤.
" 만약 저를 돌려보내신다고 해도 약속은 지켜주셔야 해요. " " 저는 목숨까지 다 걸었는데, 공작님께서 약속을 안 지켜주신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가 될 테니까요. " 라는 그녀의 이야기를 귓가에 담았다.
약속이야 지킬 생각이었지만, 어째서 그렇게까지 그 약속을 중요하게 여기는지는 알 방도가 없었다. 물론 데뷔탕트가 중요한 행사로 여겨진다는 것과, 그 데뷔탕트의 에스코트를 부탁한다는 것은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긴 했지만 지금까지 아우로라가 이야기를 하는 방식을 생각해 보면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러니까... 그가 약속을 해 놓고 지키지 않아 자신이 창피를 당한다거나 하는 문제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 물론 약속은 지킬 거요, 하지만 어째서 그렇게까지 답을 듣고 싶어하는 것이오? "
언젠가 아우로라를 돌려보낼 때는 올 것이다, 그게 데뷔탕트 이전일지, 이후일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약속은 지킬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그녀의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 답하기 곤란하다면 하지 않아도 상관없소, 그냥... 약속은 지킬 테니 걱정하지 말고, 부탁에 대해서는 좀 생각을 해 봐야겠군. "
사실 이미 결정한 사안이었지만, 여러모로 아우로라의 반응을 이해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그녀의 반응을 살펴 보고자 그는 답을 미루기로 했다.
//에구 아우로라 다 포기한 거 같아서 미안하네 8ㅁ8 솔로몬이 인간같지가 않아서 미안해!!!!
무리하지 않는 중이라면 다행이야, 벌써 이번 주가 끝나가는데 조금이라도 쉬어두는 게 어떨까 싶어, 그래야 또 새로운 한 주를 활기차게 시작하지! 나는 물론 잘 쉬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포기할 수밖에 없겠다. 아우로라는 깊게 생각했다. 공작님께서 지금까지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오셨다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게 흘러갈 수도 있는 법이니까.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습에서 더 나쁜 이미지가 덧씌워지는 건 싫었다. 딸아이가 다쳤는데도 아이를 돌려받지 못한 후작의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르는 법이고. 그러니까, 공작님과 함께 할 시간은 앞으로 더 적어질지도 모른다.
"……"
아우로라는 다시금 눈을 감았다. 약속을 지키겠다는 말이,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전부 투박했고, 따뜻했다. 그 행동 때문에, 답을 듣고 싶어하는 이유를 아우로라는 더욱 말할 수 없었다. 아우로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제가 공작님께 감히 연심을 품어서요. 그래서 더 답을 듣고 싶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아우로라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답하기 곤란하다는듯. 그저 "언젠가는 꼭 말씀드릴게요." 라고 작게 중얼거리고는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감사합니다."
거절할 것 같았는데. 그래서 마음을 다잡았는데. 아우로라는 여러 생각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잠시 솔로몬을 쳐다보다가, 이내 빙그레 미소지었다.
"너무하세요.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는데 늘 다시 생각하시잖아요. 이러다 제 버릇이 나빠질지도 몰라요."
다시금 농담. 오늘도 밤에 생각을 몰아서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복잡해진 마음도, 생각하다보면 괜찮아지겠지.
//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구! 나야말로 아우로라가 요렇게 삽질해서 미안해 ㅠ.ㅠ
마침 오늘은 쉬는 날이야. 대체공휴일 만세! 그렇지만 코로나는 만세가 아니네. 오랜만에 어디라도 나가 놀러다녀보고 싶었는데...전부 물거품이 됐어...(._.
답하기가 곤란하다면 이야기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아무런 답을 듣지 못하게 되니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이미 자신이 이야기한 부분도 있으니 더 묻기에는 애매한 상황, 어차피 상황을 지켜보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으니 이 화제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결정을 유보하겠다는 자신의 말에 감사하다며 미소짓는 아우로라의 목소리가 들린다.
" 지나온 시간이 많아지면 신중해지는 건 어쩔 수 없지, 아까 이야기했듯 쉽게 결정할 사안이 아니니 말이오. "
아우로라의 농담에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볼에 닿아 있던 손을 움직여 그녀에게 내밀었다.
" 그럼 이제 돌아가도록 하지, 아직 요양이 더 필요하잖소. "
//으악 짧아... 아냐 아냐! 아우로라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걸!!!
어제는 모처럼 연휴였는데 코로나 때문에 나가 돌아다니지 못한 것 같아서 안타깝네ㅠ 그래도 코로나로부터 안전하려면 어쩔 수 없지! 안 그래도 경기도 쪽에 또 엄청 확진자가 늘었다고 하더라구... 별 일 없었으면 좋겠다ㅠㅠ
지나온 시간이 많아지면 신중해진다. 인간성을 확인할 수 있는 그 말에 아우로라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 물론 공작님의 말씀대로 귀족의 눈과 혀가 도사리고 있으니 쉽게 결정할 사안이 아닐 뿐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 앞에 먼저 붙였던 말에 안심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참 재밌다. 마음을 다잡았는데 이렇게 흔들 줄이야. 이렇게 쉽게 안심시킬 줄이야. 밤에 몰아서 하기로 한 생각에 더 많은 사항이 추가될 것 같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공작님을 떠날 마음의 준비를 언제 해야하는지, 조금만 더 공작님께 기대도 괜찮을지.
"네에."
아우로라는 솔로몬이 내민 손을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가지는 벌써 해결이 된 것 같았다. 공작님께 조금이라도 더 기대도 될 것이다. 아우로라가 활짝 웃어보였다.
"저, 공작님. 아까 그거랑 이건 손 잡은걸로 안 쳐도 될까요?"
그러면 더 많이 손을 잡을 수 있겠지. 아우로라가 그의 옆에 서며 장난스레 웃었다.
// 갸아아 늦다..짧다..8ㅁ8 전국이 난리야..나도 확진자 동선이 겹쳐서 순간 놀랐는데 다행히 시간대가 달랐더라고..조금만 늦게 갔으면 큰일날 뻔 했어. 솔로몬주도 조심해! 마스크 꼭 끼고! 그으리고 이 다음엔 어떻게 할까? 더 이을까? 아니면 새 상황으로 넘어가야할까? 🤔
갱신할게! 벌써 며칠 째 확진자가 세자릿수네... 거기다 앞자리는 2야... 어휴.. 확진자랑 동선 겹쳤다는 거 알았을 땐 엄청 놀랐겠다, 그래도 시간대가 달라서 다행이야! 겹쳐도 무조건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긴 하지만 그런 작은 가능성도 없다는 건 좋은 일이니까. 응, 알겠어, 아우로라주도 조심해!
으음 그런가... 그래도 믿고 기다리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믿고 기다리는 게 어떨까! 방역에 발 벗고 나서지는 못하지만 개인 방역은 충실히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구나... 생각보다 아프구나 8ㅁ8, 나는 아직 한 번도 검사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 잘 몰르지만 힘들었겠다, 그럴 일 없다니 정말 다행이야!
확실히 데뷔탕트는 신경쓸 부분이 꽤 있는 중요한 사건이니까 좀 더 봐야 할 거 같고, 그러면 데뷔탕트 이전 상황을 일상으로 하는게 맞는 거 같아, 으으으음 그런데 어떤 일을 하면서 지내려나... 아! 지난번에 드레스 주문하러 갔었잖아? 그 드레스 관련해서 상황을 잡아보는 건 어떨까?
아냐, 괜찮아! 느긋하게 써주길 바라. 춤 연습은 어떨까...하는데 괜찮을까? 데뷔탕트 때 아무래도 춤도 같이 춰야하니까. 둘이 더 가까워질 기회가 생길수도 있구. 드레스 입어보기도 넣어볼까 했는데 아무래도 아우로라 입장에서 그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 같아서 솔로몬 앞에서 보여주진 않구...아이니나 플라우로스 앞에서만 보여줄지도 모르겠네.
데뷔탕트, 제국 내 크고 작은 가문의 자녀들이 공식적으로 제국 사교계에 입문하기 위해 거쳐야 할 가장 중요한 관문이다. 물론 데뷔탕트를 치르기 전에도 가문이 유명하다면 자연스레 그 가문의 자제 역시 유명할 확률이 높겠지만 그런 유명세나 명성은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았다면 아무래도 좋은 수준이라고 할 정도로 데뷔탕트는 권위를 인정받아 오고 있다. 단순히 사교계에 진출하는 것처럼 스스로의 입지를 다지는 것 뿐만 아니라, 장차 가문의 대를 잇거나 하는 등, 후계로 인정받기 위해서도 굉장히 중요한 자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정치적인 이유 외에도 어쨌든 데뷔탕트는 연회의 형태를 띄기 때문에 즐길거리가 풍부하고, 나아가 제국의 국민들에게도 즐거움을 제공한다.
제국의 모두가 환영할만한 행사라고 보면 되겠지만.
그에겐 그닥 기분 좋은 행사는 아닌 모양이었다.
"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듣고 싶군. "
공작저 안, 넓은 홀에서 그는 아우로라와 마주 서 있었다. 그러니까... 꼭 해야 할 게 있다면서 자신을 찾아와 홀로 데리고 온 셈인데, 홀에 도착해서야 그녀의 입에서 무슨 목적으로 여기에 왔는지를 듣게 된 것이다.
" 춤 연습이라니, 꼭 해야만 하오? "
춤울 추기는 커녕 데뷔탕트에 갔었던 날도 가물가물할 정도였는데, 갑자기 춤 연습이라니. 물론 그녀를 에스코트해주기로 했지만 춤은 좀 아니지 않나 생각하면서 그는 아우로라를 쳐다보았다.
//얍 레스 받아라! 상황을 어떤 식으로 하면 좋을지 감이 안 잡혀서 이렇게 해 봤어, 아우로라라면 분명 솔로몬에게 직접 부탁했을 거 같아서! 다른 일이라면 모르지만 어쨌든 솔로몬이 데뷔탕트 때 에스코트해 주기로 약속했으니까 적극적으로 나올거라고 생각했어!
사교계에 몸을 담아야 하는 제국의 여성 귀족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 데뷔탕트. 아우로라에게 있어 데뷔탕트는 보통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사교계에서 아무리 자신이 유명해도, 데뷔탕트를 치르지 못했다는 이유로 여러모로 불이익이 있었으니까. 예를 들면 정보의 불이익이라던가. 어른들만 하는 이야기라면서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는 영애에겐 알려주지 않는 사교계의 이야기가 있다보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제 데뷔탕트를 치르게 될 테니 그때의 좋지 않은 기억과는 안녕이다. 이제 자신은 어른들만 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들을 수 있고, 더 많은 정보를 챙길 수 있으며, 정당한 권위도 가지게 되고…
"저와 춤 연습을 해주세요!"
공작님과 춤을 출 수 있게 됐다! 아우로라는 마주 선 솔로몬을 올려다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요 며칠간 자신의 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푹 쉬고, 잘 치료 받은 결과, 아우로라의 상태는 몸도 마음도 아주 좋아졌다. 윤기있는 머리카락도 그렇고, 이젠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깡 마르던 지난날의 모습과 달리 어느정도 몸에 굴곡이 생겨있었다. 덕분에 옷의 치수를 재러 온 살롱의 직원이 드레스의 맵시가 더 예쁠 것이라고 말해주었고.
"그야 당연하죠. 에스코트도 에스코트지만, 첫 춤도 같이 춰주기로 약속하셨잖아요."
아우로라는 꽃받침을 하듯 양 뺨에 손을 올리곤 솔로몬의 시선에 짐짓 애교스럽게 눈을 깜빡였다.
"데뷔탕트 때 제가 실수로 공작님 발을 밟아버리면 어떡해요. 그런 걸 대비해서라도 춤 연습은 꼭 해야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공작님께서 자신이 발을 헛디디자 안아올릴 정도로 세심한 분이시긴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기본적으로 아우로라의 체중은 솔로몬에게 비할 바가 못 됐다, 다리 힘 역시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아우로라가 실수로 자신의 발을 밟는다고 해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반응할 수 있다는 이야기지만 어디까지나 춤을 춘다는 것에 대한 거부반응 때문에 이야기하는 것일 뿐, 그녀가 원하는 식의 답은 아니라는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약속을 했고, 아우로라는 그런 약속을 지켜달라는 압박?을 꽤 능란하게 자신에게 보내고 있었으니. 그로써는 거절할 만한 마땅한 이유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 ...알겠소, 데뷔탕트에 참석한 것도, 어딘가에서 춤을 춘 것도 오랜만이라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약속한 게 있으니.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자신은 엄연히 제국의 대귀족, 춤 같은 연회의 필수 요소들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 아우로라도 후작저에 있을 때 충분히 배워 뒀겠지, 그렇다면 연습에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아우로라를 쳐다보았다.
" 그럼 연습 전에, 요즘에는 어떤 춤을 주로 추는지 알고 있소? "
귀족들은 제국을 다스리고, 동시에 제국의 유행을 주도하는 역할도 맡고 있다. 특히 데뷔탕트는 큰 연회인 만큼, 데뷔탕트 때 영애들이 입는 드레스나, 그들의 식사, 나아가 그들이 추는 춤까지 주목받게 되므로 어떤 춤을 춰야 할지도 생각해 둘 필요가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데뷔탕트가 다가오는 만큼 귀족들은 제 가문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데뷔탕트에 나서는 영애들에게 억지로라도 춤 연습을 시키고 있겠지. 아마 아우로라가 끔찍히도 싫어하는 일들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녀가 자신에게 멋쩍게 미소지으며 해 오는 질문에 흐음, 하고 기억을 더듬는다.
" ...글쎄, 왈츠는 아니었던 것 같군. "
왈츠보다는 좀 더, 덜 형식적이었던 것 같다고 덧붙이면서 그는 자신의 턱을 살짝 더듬었다.
" 뭐, 지금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서민들 중에서는 비슷한 춤을 추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지만 알다시피 제국은 귀족들과 황제가 주도하지. "
그래도 데뷔탕트는 중요한 행사니까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일까, 아니면 후작가의 영애인 만큼 후작가에서 종용하기에 하는 것일까. 소네타가 춤 선생님을 괴롭게 할까봐 걱정이 된다는 아우로라의 말을 통해 유추해 보면 아무래도 후자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아우로라와 춤에 대한 이야기를 가볍게 나눈 뒤, 슬슬 춤 연습을 해야 하지 않겠냐면서 본격적으로 춤 연습에 들어가기 위해 생각을 해 본다.
" 그럼, 가볍게 인사부터 나누도록 합시다. "
라고 이야기하면서 몇 발자국, 아우로라 곁으로 다가오면서 그는 아우로라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몸을 살짝 굽히며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
" 한 곡, 춤을 청해도 되겠소? "
// 얍 갱신! 마이삭?인가 뭔가 하는 태풍이 오고 있어서 그런가 날씨가 선선한 거 같아, 좀 습하긴 해도 전보단 훨씬 나은 거 같네!
드레스를 맞추기까지 했으니까. 드레스 고르는 건 좋았지만 그 다음은 정말 죽을 맛이라고 했었지. 아우로라는 지금쯤 춤 연습을 가장한 신나는 발 밟기 시간이 된 건 아닐까 생각하며 작게 속으로 기도했다. 신이시여, 소네타를 담당하는 춤 선생님의 발이 무사하게 해주세요.
"ㄴ, 네!"
정말 시작이구나. 아우로라는 쭈뼛 긴장하고는 곁으로 그가 다가오며 정중히 손을 내밀자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데뷔탕트 때 새침한 인상을 남기는게 좋을까? 아니면 동화 속 소녀처럼? 답이 정해졌다. 저렇게 멋진 공작님 앞에선 어쩔 수 없었다.
"물론이죠."
수줍은 소녀처럼. 그렇지만 짐짓 도도하게 내민 손 위에 제 손을 얹은 아우로라는 눈을 휘어 미소를 지어보였다.
// 어서와! 나도 갱신하고 갈게! 이번 태풍이 엄청 세다고 하더라고...뉴스에서는 매미보다 심하다고는 하는데 그정도면 얼마나 무서울지 짐작도 안 간다. 솔로몬주 사는 지역이 어딘지는 잘 모르겠지만, 태풍의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심하길 바라! 안전이 가장 우선이니까!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 :D
그 언니에 그 동생이라고 해야 할 지. 겉보기에는 두 사람이 상당히 다른 듯 보였지만 글쎄, 아우로라에게서 가끔씩 보이는 모습들을 생각해 보면 결국 오랜 시간 함께 해오면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서로의 생각을 잘 이해하는 자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라는 식의 생각도 잠시, 자신이 내민 손 위로 아우로라의 자그마한 손이 얹어지자 그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그리곤 마치 짜기라도 한 듯, 홀 안에 익숙한 박자의 음악이 울리기 시작한다.
" 그럼 천천히 움직여 보도록 하지, 느긋하게 따라오도록 하시오. "
정직하게 짚어 주는 박자에 맞춰, 그는 한 발 한 발, 홀의 중심에서 멀어지듯 움직이며 아우로라를 이끌었다.
//매미보다 심한 거면 초토화 수준인 거 아닐까...! 그래도 내륙 쪽은 워낙 피해가 적으니까... 방향이 동해안 쪽으로 꺾인다는 예보가 있었으니까 그 쪽에 피해가 없었으면 좋겠네ㅠ 아우로라주는 오늘 좋은 하루 보냈을까! 좋은 하루였으면 좋겠다!
착실한걸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소네타는 아무래도 지낸 기간이 많은 가족이니까. 서로 이렇게 통하는 면도 있고 그런 걸까? 아니면 다른 뜻일까. 아우로라는 미소를 지으며 솔로몬을 올려다보았다. 익숙한 박자의 음악이 울린다. 마법일까?
"네..!"
마법이라도, 마법이 아니라도 신경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우로라는 조심스럽게 솔로몬을 따라 발을 내딛었다. 지금 신경쓸 것은 마법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솔로몬과 함께 왈츠에 집중하는 것이다. 행여 발을 밟을까 한 발, 또 한 발. 조심스럽게 스텝을 옮기던 아우로라는 눈을 내리깔았다. 저도 모르게 거세게 심장이 뛰었다.
만약 데뷔탕트 때도 이런 반응이 나오면 어쩌지? 공작님과 얼굴을 마주봐야 하는데, 그게 어려워지다니. 괜히 움직이는 발만 바라보던 아우로라는 작게 입술을 오물거렸다.
//좋은 하루! 음, 그쪽은 어때? 제주도에 사는 지인한테 연락이 왔는데 그쪽은 완전 난리래. 큰 피해가 없었으면 좋겠는데 어쩔 수 없을 것 같다고 하더라. 자연재해는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아니다보니까.. 마음이 좀 좋지는 않네. 솔로몬주가 있는 지역도 무사하게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이야. :<
음악을 따라, 박자를 맞춰 천천히 움직이는 발걸음. 음악의 박자와 조금씩 어긋나더라도 괜찮았다, 맞추기 어려운 박자는 아니었지만 메트로놈도 아니고, 누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박자를 손쉽게 맞추겠는가. 손을 맞잡고 움직이던 아우로라의 시선이 움직이는 발에 고정된 것을 보면서 그는 움직임을 눈에 익히려는가 보다 하고 잠시 아무 말 없이 내버려두었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발만 쳐다보면 같이 춤을 추는 거라고 할 수 있을지 애매했기에 그는 입을 연다.
" 어떻소, 움직임은 좀 익숙해진 것 같소? 그럼 슬슬 얼굴을 봤으면 하는데. "
결국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면서 춤을 춰야 하는 거니까. 물론 굳이 안 봐도 상관없겠지만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비춰질지는 알 수 없으니.
//좋은 하루에용! 여긴 별 일 없었어, 아무래도 내륙 쪽이라 그런가? 바람 좀 불고 자잘하게 비가 계속 온 정도였어. 문제는 다음이네... 또 태풍 하나가 올라온다는데 걱정이야, 이번엔 진짜로 관통할 거 같다니까... 안전 지대가 없을 거 같네 ㅠ
약간씩 어긋나기는 했지만 얼추 제대로 된 춤을 추는구나 싶어질 때쯤, 그의 목소리가 두 사람 간의 침묵을 깼고, 춤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아우로라의 움직임에서 그녀가 깜짝 놀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얼굴이 분홍빛으로 상기되어 있고, 조금 급한 듯 이어가는 목소리까지, 어째 심상찮다는 생각이 든 건지 잠시 말 없이 그녀의 얼굴을 보며 음악에 박자를 맞추던 그는 흐음, 하는 소리와 함께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약속이나 한 듯이 음악이 멈추고, 그는 손을 들어 아우로라의 턱에 가볍게 대었다.
" 괜찮소? 열이 있거나 한 건 아니겠지, 많이 좋아졌기는 해도 부상을 입었던 사실이 없었던 건 아니니 혹여 힘들었다면 이야기하시오. "
평소와 다름없을 정도로 그녀의 상태가 양호하기는 해도, 부상의 후유증이란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게 아닌 만큼 그녀의 몸 상테에 신경을 써야 했다. 실제로 그녀의 상태가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였지만.
//갱신할게! 간만에 시간이 나서 얼른 써 왔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ㅠㅠ 요즘 일이 많아서 여러모로 뭘 할 짬이 잘 안 나, 그래도 음... 일 이 많은게 결과적으론 나쁜 게 아니니까 좋게 생각하고 있어, 아무튼 생각해줘서 고마워!
" 확실히 움직임이 조금 부자연스러운 것 같군, 조금씩이라도 움직여 줘야 괜찮아지긴 할 테지만 무리하는 것도 좋지는 않지, 피곤하지는 않소? "
몸을 움직이지 못해서 몸이 조금 굳었다, 라고 볼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이 상황을 해결하려면 몸을 움직이는게 제일이다. 보통은 그렇지만 뭐든 급하거나 정도가 심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도 있으므로 쉬엄쉬엄 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닐 테지. 안 그래도 가녀린데다 보통의 영애라면 평생 경험하지도 못할 부상을 당했었으니까 상당히 신경을 쓸 수밖에 없고.
" 데뷔탕트까지는 시간이 남았으니 천천히 연습을 해도 괜찮을 거요, 회복에 좀 더 비중을 두는 편이 장기적으로 좋을 거라고 보는데. "
아우로라의 손을 붙잡은 채 천천히 홀 가장자리에 놓인 탁자와, 탁자 주변에 놓인 의자 쪽으로 걸어간 그는, 그녀를 의자 쪽으로 살짝 잡아당겼다. 앉으라는 의미의 행동, 춤 연습을 지금 멈추고 쉬러 가든, 다시 춤 연습을 할 생각이든간에 잠시 앉아서 숨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차라도 한 잔 하면서 숨 좀 돌리지. "
라는 말과 함께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작은 종을 흔들어 울리자, 기다렸다는 듯 사용인들이 들어와 티타임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갱신할게! 벌써 화요일이 거의 다 가버리고 수요일이 코 앞에 있어 ㅠㅠ 으으 요즘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 거 같아, 할 일이 잔뜩인데 제발 천천히 갔으면 ㅠ
아우로라는 샐쭉 웃었다. 다시 의심해봐도 역시, 공작님은 결국 내가 피곤한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다시금 당황했던 속을 진정시키며 생각해보니 공작님의 걱정이 이해가 갔다. 아우로라는 제대로 된 기사 훈련을 받은 적도 없었고, 이번 부상은 기사들도 어지간하면 입지 않을 테니까.
"…네에."
그래도 역시 조금은 아쉽다. 아우로라는 솔로몬의 손에 이끌려 의자로 향했다. 아랫입술이 비죽이지 않도록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몇 번 조금씩 오물거렸던 아우로라의 머리에서 방금 상황이 또 느릿하게 재현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세심하신 분인데! 결국 아랫입술을 한 번 비죽이고 말았다. 다른 곳에선 이렇게도 세심하신데...하고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덤이었다.
"티 타임은 또 오랜만이네요."
아우로라는 의자에 앉아 솔로몬이 종을 흔드는 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티 타임이라. 잘 생각해보면, 처음에 공작님을 뵈었던 날 마셨던 차의 맛은 기억나지 않는다. 쥐가 갉아먹은듯 마신 것도 있지만, 그때의 자신은 공작님을 두려워 했으니까.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그날은 과거의 나 치고는 용기를 많이 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고로 이번엔 각설탕을 넣어야지.
// 우와악 갱신이야..! 벌써 목요일이네.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는 말은 나도 동감이야. 이러다 조금만 게으르게 지내도 12월이 훌쩍 다가올 것 같아서 무섭다. 제발 천천히 갔으면 좋겠네. 시간아 제발 멈춰줘..!
피곤하지는 않다며 웃는 그녀에게 그가 이야기했다. 그러면 뭘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단순한 겉치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뭐라 덧붙이지는 않았다, 어떻게 할 지는 이미 생각해 뒀고, 바로 실행하고 있었으니까. 자신의 손에 이끌려 탁자 주변에 놓인 의자에 마주 앉은 아우로라를 보면서, 티 타임은 또 오랜만이라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렇게 말할 정도였나' 하고 기억을 되짚어 본다. 그리고 그 결과 확실히, 처음에 응접실에서 영 좋지 않은 분위기와 함께 티타임을 가졌던 일 이후에 제대로 된 티타임을 가진 일이 거의 없는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좀 더 신경을 써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러는 동안 티타임을 위한 준비는 끝났고, 사용인이 찻주전자를 들어 찻잔에 차를 담자 끓인 지 오래되지 않은 듯 찻물에서 김이 솔솔 올라온다. 두 사람의 잔에 차가 담기자, 이제 가봐도 좋다는 듯 솔로몬이 손짓했고, 그 손짓에 반응하여 사용인들은 홀에서 빠져 나갔다. 그제야 찻주전자 옆에 놓인 각설탕 병 뚜껑을 열고, 은빛 집게로 각설탕 하나를 집어들며 입을 여는 그.
" 차를 마신 일은 꽤 되지만 말이오, 아우로라 양 말처럼 이렇게 둘이 찻주전자와 찻잔을 앞에 두고 있는 건 오랜만이군. "
각설탕 넣겠소? 라면서 집게로 집은 각설탕을 들어보인다.
//나도 갱신할게! 맞아 맞아, 진짜 벌써 9월이 반 넘게 지났고, 10월이 벌써부터 눈 앞에 아른거리는 거 같아...! 으으 마음이 조금 급해지지만 급하게 생각해서 좋을 건 없겠지, 차근차근 하나씩 해결하도록 해야겠어!
아우로라는 테이블 위를 잠시 훑어본다. 각설탕이 담긴 병, 사용인들이 준비해준 좋은 찻잔..그리고 공작님. 이렇게 단 둘이서 제대로 된 차를 마시는 게 얼마만일까? 아우로라의 치맛자락 위 손가락이 꼼질거렸다.
이번에는 그때처럼 어른이 되겠답시고 차에 각설탕을 넣지 않거나, 두려움에 떨지 않아야지. 아우로라가 다짐했다. 어른이라고 단 걸 싫어하지 않는다. 공작님은 두려워 할 존재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우로라는 많은 걸 깨달았다. 사용인들이 빠져나가자 아우로라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종종 이렇게 같이 차를 마셔도 괜찮을까요, 공작님?"
기회를 마냥 놓치지 않을 것이다. 예전처럼 두려움에 떨지 않고 차분하게 아우로라가 입을 열었다. 따스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를 바라보던 아우로라는 각설탕에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활짝 웃었다.
"네!"
활짝 웃으며 대답했던 것도 잠시,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예전의 실수 아닌 실수(어른처럼 보이고 싶어 각설탕을 넣지 않았지.)가 부끄러웠던걸까. 아우로라는 눈을 이리 데굴, 저리 데굴 굴리다 멋쩍게 웃었다.
"...두 개요."
//답레가 늦어서 미안해. 요즘 이것저것 고민할 것도 있고 어젠 몸이 좋지 않아서 하루종일 앓아 누웠네...지금은 몸도 괜찮구 고민하던 것도 풀렸어! 솔로몬주는 바쁜게 좀 해결 됐을까? 차근차근 해결하겠다고 다짐하는 걸 보니 역시 바쁜 것 같지만...응원할게! 좋은 일만 있을거야!
" 어려울 것 없지, 차를 마시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도 운치 있는 일이니 말이오. "
앞으로 종종 이렇게 차를 같이 마셔도 괜찮겠냐는 아우로라의 말에 답하면서, 처음 같이 차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았던 때를 떠올리자니, 여러 모로 감회가 새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에는 굉장히 딱딱한 분위기 속에서 마주보고 있었지, 지금처럼 이런 대화를 나누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을 때 쯤, 각설탕을 넣겠냐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아우로라의 긍정적인 답이 들려오자 곧 현실로 눈을 돌렸다.
생각의 동굴 속에서 현실로 눈을 돌리니 활짝 웃고 있는 아우로라의 얼굴이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 각설탕을 넣겠냐는 질문은 거의 같았지만, 대답과 표정은... 과장을 좀 보태서 같은 사람에게서 나온 반응인가 싶을 정도로 판이하게 달랐다. 그녀가 공작저에서 지낸 시간이 그녀에게 어떤 영향을 준 걸까.
" ...알겠소, 자. "
일단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황이었고, 그렇게 생각해서 나쁠 게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는 각설탕을 하나, 둘 그녀의 차에 조심히 떨어트렸다. 작게 퐁, 하고 찻물에 떨어진 각설탕은 조금 뜨거운 듯한 온도에 빠르게 녹아내려 형상을 잃어간다.
" 오늘은 한 개만 넣어야겠군, 스폰지 케이크의 맛이 어떨지 모르니. "
라면서 각설탕을 하나 자신의 차에 떨어트린 그는, 두 사람 앞에 놓인 네 조각의 스폰지 케이크 중 하나를 아우로라에게 건넸다.
차를 우리는 법이라도 배워야 할 판이다. 아우로라의 입에서 미소가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이 행동으로 미루어보아 솔로몬도 어렴풋이 알고 계실 것이다. 아우로라가 공작저에 오게 된 직후와 지금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예전에는 웃지도 못하고, 무얼 해도 사과하며 버릇처럼 감사를 입에 달고 다녔건만. 지금은 자기 주장도 이렇게 확실하게 말하게 되었지 않은가.아우로라는 무릎 위에 곱게 포갠 손을 가볍게 꼼질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케이크를 생각 못했네요."
하지만 늦었다. 이미 각설탕은 따뜻한 차에 흐물흐물 녹아버렸고, 아우로라는 그래도 단 음식과 단 음식을 더하면 더 맛있어지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며 티스푼을 들어 찻잔 안을 가볍게 저었다.
"감사합니다."
케이크. 맛있는 스폰지 케이크. 아우로라는 작은 포크를 들어 케이크 끄트머리에 가볍게 힘을 주어 베어낸 뒤, 콕 집어 입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처음 씹자마자 눈이 동그래졌지만 삼킬 때까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맛이 없는 걸까? 하고 생각이 될 때 즈음, 아우로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 어떡하죠? 저는 앞으로 본가에 돌아가게 된다면 다른 케이크는 입에도 안 댈 것 같아요."
미소를 지으며 정말이냐고 묻는 말에, 그렇다며 대답한다. 그리곤, 차가 너무 달콤해지면 케잌의 맛을 제대로 보기 힘들 것 같다는 뜻으로 한 이야기에 케잌을 생각하지 못했다며 찻잔 안을 젓던 아우로라가 케잌의 끄트머리를 포크로 베어내 한 입 맛보는 것을 보았다. 입 안에 들어간 케잌을 처음 씹었을 때에는 눈이 동그래졌으나, 그 이후 케잌을 목 너머로 삼킬 때까지 그 외의 반응이 보이지 않자 생각보다 맛이 별로인가? 생각할 즈음 그녀의 중얼거림을 듣는다.
앞으로 본가에 돌아가게 되면 다른 케이크를 입에도 안 댈 것 같다는, 극찬에 가까운 감탄.
" 그 때가 되면 마음에 드는 케잌을 또 찾게 될 거요. "
물론 그녀가 이야기한 의도에 부합하는 건 아니겠지만, 분위기를 가볍게 유지하는 데에는 좋을 거라고 생각한 듯 보였다. 그리곤 그 역시 케이크의 맛을 확인하고자 포크를 집어들었고 케이크의 끝을 베어 입 안에 넣었다. 스폰지 케잌다운 부드러움이 적당한 달콤함과 함께 입 안에 감돌고, 이빨에 짓이겨진 케잌을 목 뒤로 넘기자 확실히 맛이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맛있다! 지금껏 먹어본 케이크중에 이런 것이 있었을까? 몇 번 씹지도 못했는데 촉촉하고 보들보들하니 혀 위에서 조금의 잔해와 함께 녹아버렸다. 이 위에 잼이나 생크림을 얹는다면 더 맛있겠지. 상상만 해도 행복감이 물밀듯 치고올랐다.
"정말 그렇게 될까요? 그러면 좋겠다…"
마음에 드는 케이크를 찾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보다 오세도, 아이니도, 플라우로스도, 소네타도, 그리고 공작님도 모두 좋아할만한 케이크는 없을까? 아우로라는 포크를 내려놓고 찻잔을 집어들었다. 차도 따끈하고 달콤하니 딱 좋았다. 역시 단 음식과 단 음식의 조합은 최고였다.
"후작가에서요?"
아우로라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어땠더라. 후작가에서 가족과 함께하는 티타임은 거의 없었다. 기껏 해본다고 해야 소네타와 대화를 할 때 뿐이지, 나머지는 아직 제대로 사교계에 발을 들이지도 못한 영애끼리 모여 서로 미리 견제하는 것 뿐이었다. 그나마 특별한 티타임이 있다면…
"…다른 가문과 같았어요. 영애를 적당히 초대해서, 서로 견제하고, 파벌을 만들고. 그래도 작은 아버지와 티타임을 가질 때는 좋았어요. 늘 틀과 상식에 벗어나는 분이셨거든요."
현 마탑주인 아우로라의 작은 아버지. 아우로라가 기억하기로는 티타임을 가질 때 각설탕을 4개씩 넣어야 했으며, 의자 위에 늘어지듯 앉아선 하루종일 차만 젓다가 식으면 그제서야 한번에 쭉 들이키곤 했다. 귀족의 의무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삶을 사는 괴짜. 아우로라는 빙그레 웃었다.
"공작님께서는 기억에 남는 티타임이 있으신가요?"
//차근차근 해나간다니 다행이다. 이어두고 갈게! 천천히 답해주길 바라! 좋은 하루 되고, 즐거운 한가위 보냈으면 좋겠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가까운 시일 내가 아니더라도 마음에 드는 케이크를 찾게 되지 않을까 라는 뜻을 담아 그는 이야기했다. 그리곤 입 안에서 케이크가 흩어져 없어질 즈음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적당한 씁쓸함이 케잌의 단 맛을 씻어내는 것을 느낀다.
" 그렇소, 이 곳에 오기 전... 그러니까 지금까지 삶의 대부분은 후작가에서 보냈을 테니. "
어쨌거나 자신이 나고 자란 집이다, 돌아가고 싶겠지. 그 이유 중 하나가 티타임일지도 모르고. 하지만 어쩐지 자신의 질문에 대해 생각하는 모습이 마냥 즐거운 기억을 되짚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답으로 보아, 역시 그닥 즐겁지 않았는가, 싶었다. 그래도 현 마탑주와의 티타임은 즐거웠다... 그는 일반적인 귀족과는 달랐으니, 아우로라 역시 일반적인 귀족 영애와는 다르다는 이야기가 되겠지.
물론 다른 영애들을 만나 이러한 이야기를 한 기억은 딱히 없었으므로 그들이 마냥 그들의 삶을 즐기고 있었을지는 모르겠다만. 적어도 보여지는 모습만으로 판단하자면 그러했으니 아우로라가 특별하게 여겨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으리라. 라는 생각을 하며 찻잔의 테두리를 만지작거리던 그는, 기억에 남는 티타임이 있냐며 묻는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 글쎄... 여기서 어느 정도 지냈으니 알겠지만 공작저에는 손님이 찾아오는 일이 드물다오, 대부분 혼자 한 잔 정도 마실 뿐이지. "
작은 아버지와의 티타임은 솔직하게 얘기를 꺼낼 수 있어서 좋았다. 물론 다른 영애들과 있을 때도 솔직하게 얘기는 꺼냈지만, 그 솔직함의 강도가 달랐다. 영애들과의 티타임에서 정말 솔직하게 얘기를 꺼낸다면 언젠가 그것이 약점이 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작은 아버지와의 티타임에서는 사소한 것까지 모조리 털어놓을 수 있었으니까. 생각해보면 작은 아버지는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 새끼가 나빴구만. 때려치고 마탑으로 오는 건 어때?" 하고 아우로라를 꼬드기곤 했다.
공작님께서는 기억에 남는 티타임이 있었을까? 음, 아무래도 없으신 것 같다. 아우로라는 홀짝, 차를 마시곤 눈을 샐쭉 휘어 웃었다.
"그러면 지금이 기억에 남는 티타임이 될 지도 모르겠네요."
손님이 찾아오는 일도 드물고, 혼자 마신다면. 자신과의 시간이 기억에 남는 티타임이 되지 않을까? 앞으로 같이 마셔준다고도 했고. 아우로라는 히히, 하고 작게 웃음소리를 내고는 케이크를 포크로 꾹 눌러 베어냈다.
"아니면 앞으로 더 멋진 티타임이 생길지도 모르고요."
냠. 아우로라는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응응, 안녕! 연휴 잘 지내고 있어! 물론 조금 바쁘긴 하지만...내게도 쉴 권리를 달라~=_=
아우로라에게 이야기했듯이, 공작저에는 보통 손님이 찾아오지 않았다. 따라서 티타임을 가질 때 오지도 않은 손님과 찻주전자와 케잌 등을 사이에 두고 서 있는 건 불가능했고, 자연스레 평소와 다른 티타임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으니 기억에 남는 티타임을 떠올리는 것 역시 어려웠으리라.
그런 그의 생각을 알고 있었는지, 지금이 기억에 남는 티타임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이야기하는 아우로라의 눈을 그는 쳐다보았다. 그럴 수도 있겠군, 이라는 말이 나올 만한 상황이었지만 아우로라는 그녀 스스로의 말 끝에 히히, 하고 웃음소리를 붙이며 또 다른 이야기를 했다.
앞으로 더 멋진 티타임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 ...그런가. "
그럴 수도 있겠군, 이라고 이야기하며 그는 찻잔에 담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가만히 눈을 감고 차의 향과 맛을 느끼면서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더 멋진 티타임이라. 더 멋진 일상이라는 말이라고 생각해도 좋을까?
긴 시간을 살아오면서, 자신의 삶이 좋다, 싫다를 따질 때는 이미 지났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리 행복하기만 한 삶은 아니라는 생각은 항상 가지고 있었지만 글쎄, 더 나아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고 적어도 최근까지는 커다란 변화라고 느껴질 만한 것은 없었다.
그래, 최근까지는.
사실 별 의미 없는 이야기를 했을 뿐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자신에게 그런 실속 없는 이야기라도 해온 이가 있었던가?
아우로라는 멋진 티타임을 떠올려보았다. 공작님의 의견이 아닌 자신의 희망사항일 뿐이지만, 멋진 티타임이라고 한다면 역시 꽃이 가장 아름답게 피어난 계절의 정원에서 좋은 날씨, 디저트와 함께가 아닐까. 거기에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다면 더할나위 없는 티타임일 것이다. 아우로라는 다시금 차를 마셨다.
"으음, 글쎄요…"
영애들과 이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던가? 아우로라는 티타임을 떠올렸다. 드레스 이야기, 새로운 장신구 이야기, 어떤 영애의 영식이 아주 소문난 바람꾼이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가끔가다 진솔한 이야기. 그렇지만 자신의 망상이나 좋은 티타임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정말, 진심으로, 친구가 되고 싶어하는 영애도 있었지만. 마치 뮤리엘 처럼. 아우로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뇨. 있더라도 진심이 담기지는 않았을 거에요. 다들 너무 피곤하게 사니까요."
아우로라는 눈을 내리깔았다.
"기억에 남는 티타임에 대한 이야기나 앞으로 더 멋진 티타임이 있을거예요. 라고 말한다면 당신의 티타임은 미흡하네요. 로 받아들이는 영애가 많거든요. 저는 진심을 담아도 상대방은 그렇게 듣지 않아서 굳이 많은 대화는 안 나눴어요."
그리고는 포크를 들어 애꿎은 케이크를 꾸욱 눌렀다. 포크의 옆면에 짓눌려 잘린 케이크를 찍어내리고 나서야 아우로라의 시선이 올라올 수 있었다.
영애들과도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지에 대해 묻자, 잠시 고민하는 듯한 아우로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답이 나오지 않을 만한 질문이었나?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라는 의문은 다음 순간 들려온 아우로라의 목소리에 쉽게 해소되었다.
다른 영애들과는 이런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그에게 한 것과 같은 말을 했더라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어떤 식으로 비틀어 해석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을 테니 진심을 담아서 이야기했을 리는 없다.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해도 자신의 의도가 비틀리는 것을 보는 게 싫어서 대화 자체를 굳이 많이 나누지 않았다는 말에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씁쓸하기는 해도 이게 현실이었고, 사실이었다.
지금 당장은 걱정할 것 없이 사는 귀족 영애라고 해도 결국 자라서, 데뷔탕트를 거쳐 본격적으로 사교계에 나서게 되면 그들의 부모와 같이 귀족의 일원이 되렜지. 그리고 지금까지 그들의 선조가 해왔던 것처럼 자신의 가문을 위해서 각종 방법을 모색할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그리고 아마, 자신 앞에 있는, 이 영애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지금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리는 없다, 흔치 않은 경험이긴 하겠지만 인간의 삶은 짧고, 그 짧은 생을 위해서 많은 것을 빠른 시간 내에 잊는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의미 없게 느껴지는 듯 했다.
" ...... "
그 직후 들려온, 아우로라가 덧붙인 말만 아니었다면.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면, 그는 있는 그대로 들어준다고, 그래서 지금이 좋다고 이야기하는 이 앞에서 결국 너도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오히려 자신의 생각이 짧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판이었다.
" 그런가... "
그렇게 판단할 수도 있었던 건가. 긴 삶을 이어오면서 거짓도, 참도 그다지 의미가 없어졌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이 하는 말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도, 파악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 뿐이었는데.
" 지금까지 봐 오면서 느꼈겠지만 나는 사람을 대하는 것에 능숙하지 못하지. "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이 좋다니, 다행이오. 이제는 많이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그는 옅게 미소짓는다.
갱신하고 갈게! 연휴 끝난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일이 밀려있지는 않을까 걱정이네.. 나는 별 일 없이 하루하루 보내고 있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엄청 바빴는데 연휴가 끝나니까 오히려 더 느긋해졌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그런가 요즘 조금만 신경을 덜 쓰면 글러먹어지는 느낌이야...!
조만간 후작저로 돌아갈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런 솔직하고 담백한 티타임은 가질 수 없겠지. 아우로라는 찻잔 속 내용물에 시선을 고정했다. 홍차 사이로 아우로라의 모습이 일렁인다. 귀족의 일원이 되어서… 아우로라가 생각했다. 차라리 마탑으로 가버릴까? 하고.
그렇지만 아우로라는 아직 마탑으로 갈 수 없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일단 지금은 후작가를 이을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뭐, 솔직하고 담백한 것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깨닫겠지. 지금은 현재를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음, 그래도 괜찮은 걸요."
아우로라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공작님께서 사람을 대하는 것에 능숙하지 못해도 제 사람을 아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세와 아이니도 그렇고, 플라우로스도, 그리고 영지의 사람들도. 능숙하지 않아도 괜찮다. 능숙하지 못한만치 사람을 은연중에 아끼니까. 아우로라가 생긋 미소를 지었다. 다시금 차를 한 모금 마신다.
"공작님은 알게 모르게 상냥하신 걸요."
// 갱신할게! 요즘 무지 바쁘네...연휴가 끝나니까 바빠지는 건 국룰인가봐. ㅠㅠ... 별 일 없이 잘 보낸다니 다행이다. 글러먹으면 뭐 어때? 쉴 수도 있는 거지! 오늘도 좋은 하루 보냈길 바라!
사람을 대하는 게 능숙하지 못하다. 쉽게 말하자면 그다지 친근하게 상대방에게 다가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용기를 내서 자신에게 다가오고자 하는 이들도 거칠게 밀어낸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어차피 영원한 것은 없다고 믿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그가 경험해온 것을 통해서라면 그럴 수 밖에 없겠지.
자신과 계속해서 대화를 하고자 하고, 티타임을 즐기고... 완곡하지만 부정적인 표현을 했음에도 ' 그래도 괜찮은 걸요. ' 라면서 미소를 짓는 소녀의 모습은 어느 정도 그가 지금까지 생각해오던 것을 재검토해야 할까 조금 고민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시간 역시 그가 보내온 시간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을.
" 이해하기 어렵군, 내가 어딜 봐서 상냥하다는 거요? "
물론 돌이켜 보면 사용인들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에 띄게 그들을 우대하거나 했던 기억은 없었다. 사용인 외, 그러니까 자신의 울타리 바깥에 있는 이들에게는 무관심이 가장 우선했고, 귀찮게 하는 이들에겐 대놓고 불쾌하다는 것을 표현했다. 별 악의 없이 귀찮게 굴 뿐인 이들에게도 그러한데 적대하는 이들에겐 어떻겠는가. 자연스레 자신의 평판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인간과 다르다는 것만으로도 눈총을 받는 세상인데, 그런 자가 공작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다른 귀족들을 깔보는 듯한 언사를 일삼으니 눈엣가시일 테다. 제국의 서민들에게도 그리 친근한 모습은 아닐 테니 그는 어쩌면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 제국 내에서 굉장히 이질적인 존재임에 틀림 없었으리라.
그럼에도 그가 공작의 지위를 유지하며, 안하무인 보일 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제국의 시작과 함께 이어져 온 인연과 그 자신이 가진 강대한 힘 때문이었으리라. 현재 제국 내 귀족들이 두 파벌로 나뉘어 있고, 자신이 그 중 한 파벌의 우두머리 격임에도 파벌의 귀족들은 자신을 마냥 좋게만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물며 적대적인 파벌에서는 어떠하겠는가, 그리고 자신의 앞에 있는 영애는 다른 가문도 아니고 자신을 필두로 한 파벌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파벌의 지도자 격인 후작가의 영애가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해가 힘들었다. 여러 가지 양보해서 그녀가 정치판에 즐비한 소문들을 곧이곧대로 믿는 성격이 아니라고 해도, 계속되는 소문은 의심을 낳고, 의심은 해결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확신으로 변해갈 가능성이 높다. 비록 그녀가 스스로의 가문 아래서 그를 바라보았을 때와, 이렇게 자신과 마주보고 앉아 보았을 때의 느낌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 후작... 그리니까 아우로라 양의 아버지가 그런 말을 듣는다면 아마 나와 비슷한 반응일 거라고 생각하오.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마찬가지겠지. 그들 보다야 나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시간이 많았으니 어느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그대 역시 내 전부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잖소. "
속단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 믿음이 커질 수록, 보답 받지 못할 때의 반동이 크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소. "
다시 한 번, 완곡하게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을 심사숙고하라 이야기하며 그는 찻잔에 남은 홍차를 전부 마셨다.
// 갱신! 바쁘다니 안타까...운 걸까? 그치만 요즘 일이 없어서 쩔쩔매는 사람도 많다니까 좋게 생각하자구! 어차피 나는 어디로 사라지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바쁘면 바쁜 대로 보내고, 느긋하게 답레해 줬으면 좋겠어!
다른 누군가 듣는다면 이상한 대화였을 것이다. 공작은 에둘러 부정적인 표현을 하고, 영애는 곧이 곧대로 믿듯이 어딘가 나사가 빠진 대답을 하고. 아우로라는 찻잔의 가장자리를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문지른다. 알고있다. 공작님과 같이 지내 살짝 다르다고 해도 굳이 제국에서 그의 악명이 왜 퍼졌겠는가.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텐데. 그럼에도 아우로라는 여전히 나사가 하나 빠진 대답을 이어갔다.
"공작님은 더이상 쓸모가 없고 증거를 남길 여유는 없다는 이유로 무고한 사람이나 사용인을 죽이거나 해치신적이 있으신가요?"
잠깐의 침묵.
"아니면 자신의 말에 제대로 따르지 않는다고 가족의 목숨으로 남을 협박한 적이 있으신가요?"
아우로라는 질문에 맞지 않는 평온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애써 미소를 지은 것 치고는 퍽 자연스러웠다. 그렇지만 역시 찻잔을 잡은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셨다면 제 기준에선 상냥하신 분인거에요."
아우로라는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당신은 과연 드미트리와 같을까. 그렇지만, 솔로몬의 단호한 말에 무언가를 깨달았다.
"제가 실언을 했네요. 방금 이야기는 듣지 못한 걸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
실은 내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공작님과 첫 나들이를 갔을 때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보고싶은대로 본다는 말. 아마 나도 그렇지 않을까? 공작님을 내가 원하는대로 투영해 바라본게 아닐까. 보답 받지 못할 때의 반동은 당연히 알고 있다. 그것만큼 비참하고 슬픈게 없다는 것도. 아우로라가 고개를 숙였다. 그렇지만 이럴때만 욕심이 고개를 빼꼼 내민다.
"좋은 티타임이었는데 제가 괜히 분위기를 망친게 아닌가 싶네요."
내 욕심이 과해도 나는 당신을 믿고싶다. 아우로라는 그 말을 꾹 삼켰다. 아직이다. 아직 이 이야기를 할 순간이 아니다.
//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네. ㅎㅎ...솔로몬주도 느긋하게 답레 써주길 바라. 이번에도 짧지만 달콤한 연휴 잘 보내구!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다른 이가 듣기에는 상당히 이상하게 들릴 말들 투성이었다. 또한 자칫 잘못했다가는 상대방에 대한 큰 무례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말들까지 오갔다, 듣는 귀가 둘 외에는 없는 게 그야말로 다행인 상황. 거기다가 자신의 반응을 통해 아우로라가 뭔가 깨달은 듯이 한 이야기도 있었으므로 그는 못 들은 걸로 하겠다며 빈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 이게 정상적인 관계였을지도 모르지, 좋은 관계로부터 시작된 게 아니었잖소. "
그녀가 조금... 아니 많이 낙심할지도 모르지만 언제까지고 계속 이런 관계가 유지되는 건 어렵겠지. 그 스스로도 조금은 꿈을 꾸는 것 같은 시간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런 꿈에서는 언젠가 깨는 게 당연한 결과겠지. 꿈이 너무 달콤하다면 현실로 돌아왔을 때의 반동도 클 터, 어차피 영원히 이어질 수 없는 일이라면 최대한 연착륙할 수 있도록 행동하는 게 옳지 않을까.
그래, 지금까지 그와 그녀의 관계는 아마... 정상적이지 않았다고 해야겠지. 그러니까 지금 그가 하는 행동은 관계를 틀어지게 만드는 게 아니라 본래 이랬어야 할 방향으로 되돌린다고 하는 게 맞지 않을까.
" 차를 다 마셨군...티타임은 이쯤 하지. "
조금 더 쉬고 싶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없는 억지로 티타임을 더 이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아마 그녀도 마찬가지겠지, 이럴 의도로 차를 마시고자 한 것도 아니었고. 그 전에는 이럴 의도로 그녀를 공작저에 데려온 게 아니었는데 어느 부분부터 틀어진 건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에게도 조금 휴식이 필요했다. 혼자 사색할 시간이 필요했다.
//얍 답레! 연휴 마지막 날인데 엄청 금방 지나간 거 같다...ㅠ 왜 쉬는 날은 이렇게 빨리 가버리는 거야!
티타임이 끝나고 드레스 자락을 잡아 빠르게 인사를 하고는, 복도를 뛰어 방으로 숨어 들어가버린지 벌써 이틀이 지났다. 오세나 아이니를 비롯한 시종에게 혼자 있고 싶으니 들어오지 말라고 한 지는 하루가 지났다. 아우로라는 하루 내내 침대에 누워 천장만 쳐다봤다.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그 때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하다. 분명 처음엔 좋은 대화였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자세히 생각해보니 일단 내 잘못이다. 그래, 이건 인정한다.
'그리고 밀렸어. 이건 분명 선 긋기라고.'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밀렸다는 것이다. 서로가 현실의 벽을 둬버렸다. 거리를 두어야 한다. 이 거리가 언제까지 갈 지도 모른다. 아마 평생 거리를 둘 지도 모른다. 일단 뿌리 깊은 상황도 문제지만, 근본적으로 일단 이건 나 혼자만의 삽질이니까. 공작님은 나를 마음에 두지 않았고, 나만 이렇게 마음에 두다가 이 사단이 난 거나 다름이 없다.
아우로라가 몸을 벌떡 일으켜 베개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짝사랑 한 번 지독하게 아프네, 내가 하는 사랑은 왜 다 이따위야! 드미트리 이 나쁜 자식, 다 너 때문이야! 각종 원한을 담아 한참 베개에게 솜주먹 폭력을 행사하던 아우로라가 앓는 소리를 내며 늘어졌다. 오늘따라 날씨가 화창해선, 고개 너머로 보이는 창문 밖이 신경 쓰일 정도였다.
"…나갈까."
아우로라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차라리 잠깐 머리도 식힐 겸 나갔다 올까? 어차피 아무도 오지 않을 거고, 잠깐이라면 괜찮겠지? 다들 이정도는 용납하겠지? 이젠 시간이 좀 오래 걸리지만 내 몸 하나 지킬 마법도 조금씩 다시 쓸 수 있게 됐고, 아픈 몸도 다 나았으니 괜찮을 것이다.
"좋아, 가자!"
그렇게 아우로라가 드레스룸에서 새하얀 원피스와 챙이 넓은 모자를 꺼내며 가출(?)을 준비하는 사이. 솔로몬은 과연 무얼 하고 있을까.
// 갱신할게. 선레 얍! 그것보다 악몽이라니...괜찮은 거야? 많이 힘들었나보다. 피곤했다면 푹 쉬고 그 꿈이 두 번 다시는 안 나오길 내가 기도해줄게. 부정적인 꿈은 반대로라고 하니까 좋은 일만 가득할거야. 응응..88 오늘은 부디 푹 자길 바랄게. 행복한 꿈 꿔, 솔로몬주.
티타임이 그리 좋지 않게 마무리된 지도 벌써 이틀 째. 오세나 아이니에게 이야기를 들었던 걸로 미루어 보면, 아마 그 때 대화에서 충격을 받았고, 그로 인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상황이 아닐까.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 기분이 풀릴 때까지 내버려 둬야 하나? 아니면 먼저 다가가서 이야기를 해 봐야 하는 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하지 못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니 좀처럼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 일단 생각을 좀 가다듬어야겠어. '
보통 때라면 진작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일이 밀리지 않도록 할 테지만 잠자리에 들 때부터 적잖은 부분에 신경을 써서 그런지 한참 뒤에야 잠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마구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잡아 정리해 묶곤 차가운 물에 세수라도 할 겸, 은쟁반에 놓인 그릇에 담긴 물과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낸다. 혼란스러웠던 정신이 어느 정도 가다듬어지는 듯한 느낌,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쉰다.
"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르지. "
어쩌면 이게 맞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자신과 아우로라의 관계는 애초부터 우호적인 게 이상한 관계, 적대적인 게 오히려 더 정상에 가까울 만한 관계다. 잘 해준다고 해 봤자 손님 대우가 전부일 뿐인, 그런 관계일 터였다.
그렇다면 이번 일은, 비정상적으로 흘러 가던 두 사람의 관계를 정상적인 궤도로 돌려놓은 것일 텐데. 어째서 이렇게 불편하고 신경이 쓰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얼굴의 물기를 깔끔하게 닦아 내고, 느슨한 셔츠를 걸친 그는 평소처럼 집무실의 책상 앞에 앉았다.
그래, 이건 보다 정상적인 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시간일 뿐이다. 지금 당장은 상황이 갑자기 바뀐 것처럼 느껴지고, 때문에 충격을 수습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렇다면 기다리는 게 가장 옳을 거라고 판단한 그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했다.
얼마 못 가 그만두긴 했지만. 역시 심란한 건 그대로였고, 그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미간을 꾹 눌렀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틀 동안이나 마주치지 못했고, 그도 그녀를 찾지 않았으니 그녀가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을지 신경이 쓰여 견디기가 힘들었다. 혹시 갑작스러운 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망연자실하거나 하지는 않았겠지...
이럴 의도로 그녀를 데려온 게 아니었는데. 잠시 고민하듯 보이던 솔로몬은 책상 한 쪽에 놓여 있는 종을 울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플라우로스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 부르셨습니까, 공작님? " " ...아우로라 양은 뭘 하고 있지? 아직도 방에서 나오지 않았나? "
예... 아직, 하고 이야기하는 플라우로스의 말을 들은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역시 이야기를 나눠 봐야 하나? 차근차근 이야기를 해서 납득을 시켜야 하나?
" 알겠다, 굳이 방에서 나오라고 재촉하거나 하지는 말고, 아가씨가 불편하지 않도록 잘 보고만 있거라. "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으면 바로 이야기도록 해라.
" 알겠습니다, 공작님. "
플라우로스가 고개 숙이며 집무실을 나서자, 그는 잠시 심호흡하다가 깃펜을 집어 들었다. 일을 해야지. 아직은 모르겠다, 나 스스로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갱신할게! 으응, 진짜 실감이 나서 큰일이었지 뭐야 ㅠ 다행히 아직 그 이상의 꿈은 아직 못 꿨어! 꿈을 꿨는지 아닌지도 기억이 안 나고. 그렇게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
그것보다 정말 괜찮을까? 아우로라는 거울에 비치는 제 모습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하늘하늘한 흰 원피스는 허리가 하늘색 끈으로 둘러매여선 움직일 때 밑단이 하늘하늘 날렸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은 오늘도 새벽의 설원처럼 윤기가 넘쳤다. 굽이 거의 없고 납작한 구두는 활동이 편해보였고… 마지막으로 챙이 넓은 모자와 낡은 팔찌까지.
완벽해! 그렇지만 이런 모습으로 나가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아우로라가 한 바퀴 빙 돌아본다. 나중에, 언젠가는. 평범한 옷을 사서 입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평민들이 입을 법한 그런 옷. 지금은 이런 옷으로 만족하고 나가야겠지. 아우로라는 모자를 꾹 눌러쓰더니 창문을 슬쩍 살폈다.
아, 잠깐.
이대로면 들킬 텐데. 아우로라가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눈을 굴려 침대를 쳐다 보았다. 어째 갑자기 나가버리면 일이 커질 것 같다는 걸 자신도 안다는 듯. 아우로라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아우로라 양, 대체 왜 말도 없이 나간 거요? 그게요, 속이 답답하기도 하고 머리를 식히려고… 대체 왜? 그게, 그…
"이대로는 안 되겠다."
추후 공작님의 심문이 두려웠던 나머지 아우로라는 몸을 순간 파르르 떨었다. 아직 시작도 안 해봤는데 공작님께 차인 것 같아서요. 라고 대답할 상황은 피해야만 했다. 아우로라는 허둥자둥 깃펜과 종이를 들어 글을 휘갈겨 적었다.
[머리도 식힐 겸 잠깐 나갔다 올게요.]
이정도면 되겠지? 이정도면 될 거야. 설마 이 작은 사안도 이해하지 못하겠어? 아무리 후작가의 영애라고 해도 지금은 정계에서 써먹을 일도 없을 텐데. 위험하다고 해도 마법도 쓸 수 있고, 그러니까. 아무튼, 그러니까.
나가야겠다! 아우로라가 공작저로 올 때 가져왔던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창문을 벌컥 열고는…
아우로라가 가출을 감행할 마음을 먹고 차근차근 준비를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일단 일을 처리하고자 마음 먹은 솔로몬. 하나씩 서류를 검토하고 불태우고... 그렇게 쌓여있던 서류가 줄어들어 바닥을 보일 즈음 시계를 보니 슬슬 식사를 할 시간이다. 이번 일이 생기기 전에는 조금 소원하더라도 식사 시간에는 꼭 마주 앉아 있었는데. 이번엔 아무래도 어렵겠지.
같은 시간에 식사를 하는 걸 피하거나, 정 불편하다면 방에 식사를 가져다 주는 식으로 얼굴을 마주치는걸 피했다. 당연한 결과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묘하게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의 접점이 자취를 감춘 느낌에 지금 두 사람의 관계야말로 현재 제국의 귀족들이 날 세우고 있다는 걸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게 아닐까.
" ...... "
이렇게 걱정을 하는 게 정상으로 비춰질지 아닐지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모른 체 하고 있자니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가끔은 제국의 공작이라는 위치가 참으로 불편하게 느껴진다. 물론 다른 귀족들에 비하면 주변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 편이고 비교적 하고 싶은 일을 마음 가는 대로 하지만 자신의 위치를 아예 모르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은 시간이 약이라고 생각을 하자, 지금까지 살아온 결과 이는 진리에 가까웠다. 조금 다른 의미로 적용될 여지도 있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솔로몬은 마무리 된 일거리를 한 쪽으로 밀어 놓고 종을 울렸다. 플라우로스가 얼마 뒤 집무실로 들어와 곧 식사하러 가겠다는 솔로몬의 이야기를 주방에 전달하러 나서고, 식사가 준비될 동안 그는 잠시 바람이나 쐴 겸 바깥에 나섰다.
공작저 안에 있는 정원, 새벽 이슬이 아직 남아 잎사귀를 타고 또르르 굴러 떨어지는 모습이 보이는 그 정원을 천천히 거닐면서 두 사람이 차를 마실 때를 떠올린다. 어디서 문제가 발생한 걸까. 티타임 자체의 문제였을까? 아니면 그 과정에서 나눈 이야기에 문제가 있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두 사람의 관계 자체가 문제였을까.
그런 솔로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공작저의 메이드는 식사가 준비되는 대로 아우로라에게 간단한 식사를 전달하기 위해 복도를 걷고 있었다. 금새 아우로라의 방 앞에 도착해 문을 두드리는 메이드였지만...
평온(?)한 공작저에 한바탕 폭풍이 불어오기 고직 몇 분 전... 주방에서 솔로몬의 식사 준비를 보고 있던 플라우로스가 주방을 빠져나와 식당 쪽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그런 플라우로스를 찾으며 급하게 공작저 안을 돌아다니던 메이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플라우로스를 마주쳤고, 그에게 손에 쥔 쪽지를 보여주며 아우로라가 방 안에 없다고 이야기했다.
" 그게 정말입니까? 어째서... "
어째서 이런 일이, 듣기만 해서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메이드를 따라 아우로라의 방으로 향한 플라우로스는 텅 비어 있는 방과 활짝 열려 있는 창문을 보고 나서야 상황을 비로소 확실하게 이해했다. 이를 어쩐다, 바로 공작님께 말씀 드려야 하나? 잠시 고민하는 플라우로스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메이드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리더니 자신은 잰걸음으로 공작저 안의 정원으로 향했다.
한참을 정원에서 거닐던 솔로몬과 마주친 플라우로스, 급한 와중에도 몸을 굽혀 솔로몬에게 예의를 차린 그는 아주 잠시동안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 공작님, 아가씨가...사라지셨습니다. " " 뭐라고? "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 플라우로스는 차근차근 자신이 이해한 상황을 설명했다. 식사를 전달하기 위해 아우로라의 방으로 향했던 메이드가 처음 상황을 확인했으며 방의 창문이 열려 있었고,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쪽지를 남겨놓았다. 라는 상황을. 이야기를 마치며 문제의 그 쪽지를 솔로몬에게 건넨 플라우로스. 솔로몬은 쪽지를 받아들었고 확실히 그 쪽지에 쓰여 있는 내용을 되새겨 읽었다. 대체 어딜 나갔다 온다는 이야기지? 혹시 공작저 주변을 거니는 건 아닐까 싶어 그는 쪽지를 접어 셔츠 주머니에 넣고 입을 열었다.
" 혹시 모르니 공작저 안부터 천천히 찾아보도록 하자, 말도 없이 여길 나서다니...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
어딜 나갔다 오냐면, 하필이면 도심가겠다. 아우로라는 골목을 빠져나오자 보이는 수많은 사람을 보고 잠깐 공작저를 떠올렸다. 이대로 돌아가기엔 조금 그렇고...정말 조금이면 괜찮겠지. 이렇게 된 거 그냥 저지르자. 돌아다니면 잊을 수 있을 거야. 성큼성큼 인파에 섞였던 아우로라는 아까부터 수도없이 반복한 생각을 갈무리했다. 그리고는 이곳저곳을 둘러보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와아-"
왁자지껄한 풍경에 아우로라가 감탄한다. 아무래도 공작저에 오래 있긴 했나 보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것에 감탄할 정도가 되다니! 뭐, 지금은 즐겁게 노니는, 시골에서 상경한 순박한 영애처럼 보일 테니 감탄사를 내뱉어도 괜찮겠지? 사람이다. 많은 사람과 공작저와는 다른 활발함!
아우로라가 걱정을 잊듯 도도도, 발을 떼 상점가를 향해 걸어갔다. 꼭 아이같은 모습이었다. 제 처지를 이렇게라도 잊으려고 하는 듯,
"여기에도 없습니다."
한 편, 공작저 안. 아우로라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나마 찾은 흔적이라면 아우로라가 홀로 단장이라도 했는지 열린 드레스룸과 없어진 원피스, 모자였다.
공작저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우로라는 없었다. 그렇다는 건 공작저 바깥으로 나섰다는 건데. 유일하게 찾아낸 흔적은 열려 있는 드레스룸과, 없어진 한 벌의 원피스, 그리고 모자. 간단한 나들이 복장이라고 볼 수도 있는 옷차림, 그렇다면 마을 쪽으로 나섰나? 아니면 공작저 주변의 초원?
" 그렇담 공작저 바깥이겠군, 일단 대부분은 업무에 복귀시켜라, 마을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 " 수행원은 누굴 데려가시겠습니까? "
수행원이라,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 싶더니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 '비네'를 데려가겠다. " " 알겠습니다, 그럼 곧바로 준비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비네'라는 이름을 가진 누군가를 수행원으로 하겠다는 그의 말에, 플라우로스는 되묻거나 하는 일 없이 곧바로 발걸음을 돌려 어디론가 향했다. 그리곤 공작저 안의 잠겨 있는 여러 방 중 하나로 향해 열쇠로 문을 열었다.
" 나오거라, 공작님께서 찾으신다. "
방 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인 촛불 하나가 유일한 광원 역할을 하는 어두컴컴한 방. 그 안에 있던 이는 플라우로스의 말을 듣고 천천히 일어섰다. 공작님께서 찾으신단 말이지... 잠시 뒤, 외출 준비를 하고 공작저의 홀에 도착한 솔로몬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플라우로스와 그 곁에 선, 후드를 깊게 뒤집어 쓴 비네를 마주쳤다.
아우로라는 자신에게 방해가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 아마 모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이렇게 열심히 돌아다닐리도 없으니까. 신나게 놀고 잊자. 혼나면 심심했다며 투정이라도 부려보자. 그리고 언젠가는, 공작저를 떠나야 할 테니까. 그때의 마음의 준비라고 하는 건 꼭꼭 숨겨놓자. 아우로라는 괜히 주먹을 꾹 쥐고 두어번 흔들었다. 할 수 있다, 아우로라. 나는 잊을 수 있어!
"거기 아가씨."
그런 아우로라에게 손짓하는 건 길가의 천막 안이었다. 아우로라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 보았다. 천막 속에 사람이 있다.
"부르셨어요?"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 처럼 보였을까, 아니면 순박해서 사기치기 좋은 소녀로 보였을까. 가까이 다가오라는 손짓에 아우로라는 잠깐 머뭇거렸지만, "아가씨 마법사지?" 라는 말에 그의 앞에 성큼 다가섰다. 더 가까이 들어와. 아우로라는 어쩔 수 없이 천막 안에 들어갔다.
"어떻게 아셨어요?" "다 아는 방법이 있지. 얘기만 듣고 가."
자글자글한 주름, 흰 수염. 그리고 앞에 놓여진 여러가지 주술 도구와 카드. 마법사인 아우로라에게 있어 그렇게 신빙성이 가지 않는 주술사였다. 그가 카드 한 장을 건네주며 말했다.
"잊어." "네?" "인간이 아닌 자와 사랑해봤자라고. 아가씨가 잊는 게 편해."
아우로라는 카드를 빤히 내려다 봤다. The Fool이라 쓰여진 카드. 바보라는 단어에 괜히 심통이 나 입술을 비죽이며 말했다.
"왜요?" "많은 게 바뀔 테니까." "바뀌어요?" "그 이상은 알려줄 수 없어. 이만 나가 봐. 카드는 아가씨 가지고." "네?" "어서."
아우로라는 얼떨결에 카드를 들고 천막 밖으로 쫓겨났다. 다시 들어가려 뒤를 돌아 봤을 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한참동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두커니 서 있었지만, 그 이후엔 영 찜찜하다는 표정으로 카드를 쥐며 발길 닿는 대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마을의 외곽, 저도 모르게 조용한 곳을 향해 점점 나아가는 길이었다.
마차를 준비할 시간은 없다. 바로 휘파람을 불어 불러낸 늑대 위에 올라탄 솔로몬과, 말 위에 오른 비네, 공작저 바깥의 평원을 지나 아우로라가 처음 말을 타고 올랐던 오르막의 끝이자, 늑대를 타고 내려갔던 내리막의 시작점에 두 사람은 서 있었다.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오는 은은한 바람이 솔로몬의 머리카락을 흔들 즈음 그는 입을 열어 비네에게 묻는다.
" 공작저 주변, 그러니까 이 길 양 옆의 숲에서도 마력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는단 말이냐? " " 뭐... 마력의 흔적 자체야 있습니다만 공작님께서 말씀하신 그 마력의 흔적과는 다릅니다, 끽해야 영락한 마수거나 겁도 없이 공작저를 염탐하려는 것들이겠죠. "
그러니까 별 것 없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로브로 감싸인 어깨를 으쓱이는 비네, 솔로몬은 말 없이 내리막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느끼기에도 이 주변에선 특기할 만한 게 없었으니까... 평소라면 이렇게까지 신경쓰일 일은 아니었다. 이동 스크롤을 사용한다면 사용자가 이동한 대로 미미하지만 마력의 궤적이 남는 게 정상일 텐데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혹시 몰라 비네에게 알아보게 했지만 이 녀석도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수 없을 정도라니.
" 일단 가자, 안 그래도 희미한 흔적... 시간이 가면 더 흐려질 테지. " " 알겠습니다~ "
꽤 심각한 듯한 솔로몬이었지만 그런 그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는 듯 후드의 그림자에 가려지지 않은 비네의 입꼬리는 기분 좋은 듯 웃고 있었다. 빠르게 내리막을 달려 내려가기 시작하자 펄럭이는 후드, 후드가 벗겨지지 않도록 손으로 누르며 신이 난 듯 깔깔대는 비네.
" 이야~ 이렇게 나가 보는 게 참 오랜만입니다? " " 조용히 하거라, 아우로라 양이 아니었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으니. "
심하게 신난 듯한 비네에게 눈치를 주는 솔로몬, 그 말을 들은 비네는 웃음을 꾹 참고 솔로몬의 뒤를 따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저만치 보이는 공작저 아래 도시의 초입...
많은 것이 바뀐다는게 무슨 뜻일까? 아우로라는 무작정 발을 내딛음과 동시에, 머리를 바삐 굴려 생각에 잠겼다.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는 채 계속, 자기도 모르는 곳으로.
노인, 주술사의 말 뜻을 짚어보아도 이거다 하는 감이 없다.
내가 잊는게 왜 편할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할까? 아니,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여러 일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술사의 말은 그걸 뜻하는 게 아닌데! 무언가 커다란 사건이 터질 것 처럼 비장했다. 그러면서도 장난처럼 과장스럽지도 않다.
아우로라는 우뚝 서 한참동안 카드를 바라보았다. 내가 공작님에 대한 마음을 접으면 그 커다란 일이 사라질까?
"아마 아닐 거야."
아우로라는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마을의 외곽. 시장의 끝, 그리고 너른 초원의 시작. 바람이 불어와 아우로라의 머리카락이 살랑인다. 마음을 접어봤자 이미 운명은 방향을 돌렸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런 일도 없었더라면 사건이 일어날리 없지만 이미 시작 되었다. 그렇게 된다면, 차라리 사건을 직면하고 원하는 것을 얻어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조금만 즐기다 빨리 돌아가자. 아우로라가 다짐하고는 고개를 돌릴 무렵. 심상치 않은 느낌에 경계하듯 마나를 모아 주변의 감각을 곤두세우려는 그 순간.
금새 도시 안으로 들어선 둘, 그러나 도시에 들어섰어도 딱히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시라는 건 돌아다니는 사람의 머릿수만 헤아려 봐도 상당한 곳이었으니 마력의 흔적을 찾아내는 걸 방해하는 존재가 없더라도 흔적을 되짚어가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그렇다고 해서 찾는 걸 멈출 수는 없는 법, 솔로몬은 어떻게 하면 아우로라를 잘 찾아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런 솔로몬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깥에 나온 게 마냥 신난 듯 입꼬리를 올리고 걷는 비네...
" ...... "
한참을 목적지 없이 걷던 솔로몬은 문득 골목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멈추었고, 그런 솔로몬의 모습을 의아하게 여긴 듯 마찬가지로 멈춰 선 비네에게 무언가 말하기 위해 솔로몬은 입을 열었다.
" 여기서부턴 갈라지도록 하자,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거라, 반대의 경우에는 바로 호출하마. " " 아~ 알겠습니다. 공작님! "
비네가 신난 듯 방금까지 걷던 방향으로 멀어지는 것을 잠시 곁눈질하던 솔로몬은 시선을 고정했던 골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핏 보면 별다를 게 없는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골목일 뿐이지만 가까이 가면 갈수록 주변의 다른 골목과는 다르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으리라. 골목 안쪽으로부터 풍겨 오는 묘한 분위기,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이나 강대한 마력을 가진 솔로몬이 다가가자 눈에 띄게 일렁이는 골목의 모습에 그는 옳은 선택이라 판단헀다.
" 나오거라, 은거지가 박살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
하지만 배짱이라도 부리는 듯 아무도 나타나지 않기를 잠시, 솔로몬이 조금 더 다가가자 이제는 멀리서 바라봐도 마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이 크게 흔들리는 골목의 모습에 다급히 목소리가 들려온다.
" 잠시.. 잠시만 기다려 주게. "
그 뒤에 잠시 작게 욕지거리하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어쩌겠는가, 나오지 않을 수는 없으니. 얼마 뒤 일렁임이 가라앉는가 싶더니 마치 신기루처럼, 골목이 있던 자리에 천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우로라는 흡, 하고 숨을 들이켜며 몸을 일으켰다. 놀라 비명을 질렀고, 그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 그래.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손을 뻗었고... 아우로라는 입술을 앙 다물었다. 여긴 어디지? 인신매매? 납치? 아니면 뭐지?
"이러니까 아버지가 과보호를 하신 건가."
아우로라는 손목에 묶인 줄을 보며 고운 얼굴을 찌푸렸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싸한 기분만 뒷목을 스친다. 그러고보니 카드. 그 카드는 어딨지? 내 팔찌는? 팔을 확인해보니 팔찌는 있다. 카드도 아마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아우로라는 고개를 쭉 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둡다. 오두막 안인 것 같은데. 숲 속인가? 아니면 다른곳? 아우로라는 마나를 써서 주변의 기운을 느껴보려 했다. 그리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막혔어."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아무도 없다! 이런 곳에 손 발을 다 묶어놓고 그냥 떠난 건가? 왜? 무슨 이유로? 아니, 다른 곳에 잠시 간 것 같다. 마력의 흔적이 조금이나마 남아있으니까. 아우로라는 크게 외쳤다.
"아무도 없어요?!"
라고.
한편, 솔로몬이 만난 천막 속의 누군가. 그는 솔로몬의 정체를 눈치 챈건지, 아니면 강대한 마력에 짓눌렸는지 창백한 안색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로 왔는가."
그는 애써 침착한 태도를 고수했다.
// 아고고, 어려운 일상 주제였나보다. 미안해...88... 아우로라는...납치를 당했어! (솔로몬주: 뭐가 문제야) 백마탄 공작님이 구해주시겠지 모...u.u 싶은 심정이지만 너무 부담주는게 아닐까 싶어 미안해진다 88...
창백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에게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턱을 매만지는 그. 빠르게 위로부터 아래로 차림을 훑어 보니, 허름한 듯한 로브 안에 낯익은 인장의 천이 모습을 약간 드러내고 있었다. 마탑의 학파 중 하나이지만 소수파인데다가 최근 기반까지 흔들리고 있는 파벌이로군.
" 이런 곳에서 모습이나 숨기고... 뭘 하고 있는 거지? " " 그, 그거야... 지나가는 이들에게 점을 봐 주고 있소. "
이렇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게 잘 먹히지. 점이라? 점성술에 대한 소양이 있는 자인가? 하지만 도저히 그럴듯해 보이지 않았다.
" 오늘은 몇 명이나 점을 봐 줬지? " " 오늘은 한 명도 없었소, 귀티나는 아가씨 한 명을 붙잡을 수 있었는데 저기... 저 쪽에 갑자기 웬 노인이 나타나서 아가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바람에...아마 점을 보지 않았나 싶군. "
남성이 가리키는 쪽을 돌아보지만 휑한 거리만 보일 뿐. 그는 잠시 그 텅 빈 곳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 그 아가씨, 어디로 갔지? "
어느 쪽이든, 방향을 듣고 난 뒤 그는 남성이 가리켰던 텅 빈 거리의 한편으로 걸어갔다. 무언가 남아 있다, 이질적인 마력의 흔적이. 어쨌든 이쪽부터 찾아보는 게 옳았던 모양이었다. 보통 이런 도시 구석구석에는 생계를 위해 담합하여 살아가는 이들이 있기 마련. 영락해가는 파벌을 일으킬 자금을 모으기 위해 곳곳에서 점성술을 활용하는 거겠지, 마법과는 거리가 있는 이들에겐 잘 먹힐 테니까. 그렇지만 아우로라... 귀족이며 마법사이기도 한 그녀가 대체 무엇에 이끌려 점성술사에게 향했던 걸까.
그 시각, 비네는 도시를 대강 돌면서 아우로라의 마력을 쫓았다. 중간중간 끊기고 방해되어 있기는 했지만 인파로 인해 그렇게까지 철저히 작업을 하지는 못한 모양인지 처음보다는 비교적 온전한 흔적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도심가를 빠져 나와 그 주변 마을의 외곽에 서 있었다.
" 아~이거, 어떻게 여기서 딱 끊겼지? "
갑자기 끊겨 버린 흔적에 조금 당황하는 비네였으나 조금 주변을 둘러 보다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초원에 굴러다닐 법하지 않은 모자를 발견해 집어든다.
" 이거... 아가씨 냄샌데? "
모자를 쥔 채 초원 쪽을 바라보는 비네 뒤로 드리우는 그림자..
...
아우로라의 외침은 현재 그녀가 처한 상황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였다. 라고 생각할 즈음 그녀의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온다.
정말 아무도 없나? 아우로라는 입술을 꾹 다물고는 고개를 숙였다. 이대로라면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았다. 아무도 없냐고 외치면 사람들이 나타나는 전개는 역시 소설 속의 이야기인가 보다. 이대로 묶여서 죽는 걸까? 누가 날 발견하면 어떻게 될까! 공작님은? 아이니는? 오세는? 플라우로스는? 우리 가족은! 일어나려 해도 어찌나 잘 묶었는지, 꼭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는 것 빼고는 전혀 움직일 수가 없다.
"헉..!"
포기할까 생각했을 때, 아우로라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열심히 몸을 꼼질거렸다. 웅얼거리는 소리! 도와줄 사람일까? 만약에 도와줄 사람이 아니라 납치범이면 어쩌지? 그래도 일단 부딪쳐볼까? 아우로라는 온 용기를 끌어모아 조심스럽게 소리를 냈다. 작지만 단호하게.
"거기, 누구에요?"
최소 둘이다. 이 둘이 내 편이거나 지나가는 사람이라 날 도울 수 있으면 좋겠다. 아우로라는 잔뜩 긴장해선 몸을 움직이다 말고 겨우 고개만 돌려 어둠속을 확인하려 했다.
// 으악 짧다! 좋은 자세야 솔로몬주! 잠들까 했는데 레스가 나타나서 다행이다. 잇고갈게 뿅! 오늘도 좋은 하루!
점술가가 일러준 방향으로 아우로라가 남긴 마력의 흔적을 찾아 바삐 발걸음을 옮기는 솔로몬. 그러나 노련한 누군가가 집요하게 솔로몬을 마크하고 있는 것인지 좀처럼 마력의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다행이라면 길 양쪽에 천막을 치고 있는 상인들이 아우로라의 모습을 대강이나마 기억하고 있어 방향을 유추할 수 있었다는 점일까.
그렇게 물어물어 점점 도심가를 벗어나 마을 외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솔로몬, 얼마 지나지 않아 비네가 아우로라의 모자를 발견한 곳에 도착하지만. 그저 텅 빈 초원만이 눈 앞에 펼쳐져 있을 뿐, 아무것도 솔로몬을 찾아낼 수 없었다.
분명 비네가 있었던 곳인데, 비네는 어디로 간 걸까? 그런 사실을 알 리 없었던 솔로몬은 막막한 심정으로 초원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혹시 뭔가 알아낸 게 있을까 싶어 비네에게 전언 마법을 사용해보지만 어째서인지 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아니... 답을 할 수 없는 상황인가? 대체 자신을 둘러싸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 이 녀석은 또 어딜 간 거지... 돌아가서 수색대를 마련해야 하나? "
너무 성급하게 나선 건 아닐지 모르겠다며 중얼거린 그, 어차피 스스로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이야기한 거라면 다시 돌아오리라 믿고 기다리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는 일이건만. 너무 과민반응을 한 게 아니었을까 싶어 말 없이 턱을 매만진다. 여기서 흔적은 끊겼다. 더 이상 추적하는 건 의미가 없어... 하고 생각할 즈음 초원의 풀들 사이로 떨어져 있는 붉은 머리카락 한 줌이 눈에 들어온다.
" 이건... "
짐승의 털 같은 게 아니다, 이 색과 질감이라면...
" 비네로군, 여기서 대체 뭘 본 거지...? "
역시 여기서 뭔가 있었던 게 틀림없어, 습격이라도 당했나? 제 스스로 머리카락을 잘라낸 것 같은데. 자신의 상태가 예전만 같았더라면 이런 식으로 수고를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조금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솔로몬이 상황을 추리하는 동안, 어둠 속에 묶인 아우로라에게 말을 걸었던 존재는 다시금 바스락거리더니 옹알거렸다.
" 너는 누군데? "
아까보다는 정확한 발음, 아무래도 거리가 좀 떨어져 있었거나 일부러 목소리를 조그맣게 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목소리로 판단하기에는 확실히 여린 것이, 이제 갓 아이 티를 벗은 소년의 목소리 같다.
" 옷이 예쁜 걸 보니까 예쁨받았었나 봐. "
이번엔 여자아이의 목소리, 자세히 귀를 기울여 보면 두 사람 말고도 여러 명이 조금씩 바스락대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아우로라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갓 아이 티를 벗은 소년의 목소리. 여기 살던 아인가? 아니면 어린 조력자? 아니, 어린 조력자가 있을 리가. 야만인이 아닌 이상 제국법에 절대 맞지 않는다. 설마 같이 잡혀온 아이? 아우로라가 무언가 답하려다 다시금 입을 다물고 귀를 기울인다.
여자아이. 그리고 바스락대는 소리. 여러명인가? 한참동안 소리에 집중하던 아우로라가 가볍게 숨을 들이켰다. 경계심이 강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이 마을에 잠시 머물던 사람. 너희는 누구니?"
그것보다 예쁨 받았다고? 그런 걸 어린아이들이 할 수 있는 말이던가? 무언가 맞지 않는 묘한 느낌에 아우로라가 표정을 찡그렸다. 잘못 돌아가도 한참 잘못 돌아가는 느낌이다.
"여기는 어딘지도 말해줄 수 있을까?"
만약에 이 아이들이 어떤 일을 당해서 같이 있는 거라면. 나는 이 아이들을 구할 수 있을까? 비록 그게 아닐지라도 가슴이 턱 하고 막혀온다. 어찌 되었든 납치 현장에 아이들이 같이 있는 거니까. 누군가 돌본다고 해도, 아니라고 해도.
일단 비네의 머리카락을 잘 묶어 둔 채 마을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솔로몬. 사람이 없어졌다, 아우로라도 비네도. 마을 외곽쪽으로 향했다는 것은 분명한데 외곽에서 다시 돌아왔다는 목격담 같은 건 없다. 적어도 비네는 확실히 어디론가 잡혀간 모양인데.
" 그러고 보니... "
외곽이라고는 해도 가까이에 마을이 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 초원은 사람의 손이 거의 닿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이제야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걸로 봐서 사람들이 돌아다니지 않을 시간은 아니다, 적어도 도심가와 마을 내에는 사람들이 있었지. 하지만 이 곳에는 어째서 아무도 없는 거지? 하다못해 아이들끼리 잠시 나와 놀 수도 있는 장소였음에도 그런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꼭 이 곳에는 나와 있으면 안 되는 것처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떠오르는 것이 하나. 제국은 넓고, 많은 이들을 제국민으로 받아들였으나 그런 것을 거부하는 이들은 예전에도, 지금도 있으리라.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이익만 얻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는 이들도 있지. 문득 마을을 가로질러 오며 보았던 마을 내의 모습을 떠올린다, 얼핏 보았을 땐 한가롭고 나른해 보였지만... 달리 보면 그들은 별로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 그리고... 젊은이의 모습은 본 기억이 없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일정 나이 미만의 아이들을 단 한 명도 마을에서 발견할 수 없었다. 그가 마을 전체를 구석구석 뒤져 본 것은 아니지만 이 마을에는 활기가 없었다.
" 설마... "
...
" 이 마을? 어딜 말하는 거야? " " 바보야, 우리 마을 말하는 거잖아. "
여자아이가 아우로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이야기하자 곧바로 머리를 한 대 쥐어박는 소리와 함께 남자아이가 핀잔을 주는 모양이었다. 여자아이는 씨잉... 하고 짜증을 내다가도 말 뜻을 이해한 듯 적잖이 들뜬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 진짜? 그러면 우리 엄마 봤어? " " 쟤가 네 엄마를 어떻게 알아. "
아냐, 알 거야! 우리 엄마니까! 라고 이야기하며 씩씩대는 여자아이.
" 여긴...글쎄, 헛간 같은 용도로 지은 오두막 같아. "
남자아이가 그렇게 말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아우로라의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그녀의 바로 옆에 쭈그리고 앉은 두 아이와, 조금 멀리에 모여 잠을 자고 있는 다른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쪽에는 조금 더 적은 숫자의 아이들이 구석에 모여, 낡은 나무벽 너머로 아주 조금 새어나오는 빛에 의존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꽤 어린가보다. 그것보다 저렇게 서슴없이 머리를 쥐어박아도 되는 건가? 그렇지만 아우로라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는 자연스럽게 납득했다. 아. 그렇지. 때려도 뭐 이 나이때는 괜찮겠지. 그것보다 엄마라니? 엄마를 봤다는게 무슨 뜻일까? 설마 진짜 납치를 당한 걸까? 아니, 납치를 당한 것 같다. 평범한 상황에선 이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니까.
"세상에."
어둠에 눈이 익자 아우로라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아이들이 이렇게 많다니. 전부 납치 당한 건가? 비윤리적이다. 제국법을 위반하는 행위가 아직도 있다니. 오래 전, 드미트리가 보는 앞에서 노예상과 만나 엘프를 사 풀어주었던 이후로 그런 행위는 절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야 그가 이런 행위를 근절하겠다 약속했으니까. 그땐 그렇게 믿었는데.
"인간을 대상으로 한 건 아직까지 성행하는 건가."
아니, 어쩌면 이종족도 이렇게 아직 거래할지도. 숨기면서 이런 행동을 계속 하는 것이 사람 아닌가. 아우로라는 알 수 없는 허탈함과 분노에 입술을 자근, 깨물었다.
갱신할게! 답레 기다렸을 텐데 미안해ㅠ 아무래도 이번 주에는 일이 좀 많아서 자주 오기 어려울 거 같아...미리 얘기했어야 했는데ㅠㅜ 그래도 다음주가 되면 꼭 답레해 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줘, 이번 주 중이라도 시간이 생기면 얼른 써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구. 으음 아무튼 좋은 하루 보내 아우로라주!
요근래 바빠서 뭔가 제대로 확인을 못했네. 갱신이 그동안 없어서 미안해. 일이 많은 건 괜찮아! 솔로몬주가 무리하지만 않으면 좋겠네. 느긋하게 현생 처리하고 와도 괜찮으니까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써주길 바라. 잘 기다릴 수 있어! :) 오늘 하루도 좋은 하루 보내길 바라. 다시금 말하지만 너무 조급해하지 말구 천천히 답레 주고!
잠시 마을에 머물면서 현재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 생각하는 그. 분명 이건 비상식적인 일이다. 물론 그의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여러 정황 상 아이들을 납치해서 노예로 파는 일당이 있다는 거겠지. 표면적으로는 제국에서 금한 일이나 이직도 감시를 피해 노예상을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망타진 하는 것이 어려울 뿐더러 납치당한 아이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팔려나간 아이들도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노예상을 처리한다고 해도 아이들의 거취를 정하는 일이 문제가 될 터. 그래서 적당히 억제하는 선에서만 눈 감아 주고 있던 게 지금까지의 제국 귀족들의 태도였을 것이다. 심지어 그중 몇몇은 노예상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자금을 확보하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을 바깥의 초원을 바라보는 그, 마을사람들이 찾으러 갈 엄두도, 도움을 청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마을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본거지가 있을 거다. 아무리 도시 외곽, 한적한 마을이라고는 하지만 정도가 심하다고는 생각하면서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 어쩔 수 없지, 이 참에 한 번 솎아내는 게 낫겠군. "
하늘을 보며 마력으로 만든 새 한 마리를 공작저로 날려보낸 그는, 마을과 초원의 경계에 서서 저만치에 보이는 숲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즈음, 밧줄 좀 풀어주지 않겠냐고 묻는 아우로라에게 남자아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 알겠어, 그런데 어떻게 나가려고? "
여기, 낡아 보여도 엄청 튼튼하다던데. 라면서 벽을 한 번 쓸어내리는 남자아이, 그러고 보면 다른 아이들 전부 밧줄로 손 발이 묶여 있지는 않았음에도 딱히 나가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 못 나갈 걸... 들은 얘기론 몇 명인가 여기 왔었는데 다 처리했다고 하더라. "
처리했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저만치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다른 아이들에 비해 조금 나이가 더 있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중얼거리자, 남자아이는 다시금 어깨를 으쓱이며 아우로라의 팔과 다리를 조이고 있던 밧줄을 풀었다.
아우로라는 이 장소에서 마나를 느꼈으니 마법도 당연히 사용할 수 있을거라는 희망을 가졌다. 아이들을 바라보니 다들 탈출 시도는 하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튼튼하다면 체계적인 조직일 터. 아우로라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아이들이 나가지 않은 이유는...
"처리라는 말을 했어?"
인간이길 포기한 걸까? 아우로라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렇게 어린 아이들에게 어떻게 그런 짓을! 아우로라는 밧줄이 풀리자 손목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밧줄 자국이 남았긴 했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다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우로라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뗐다.
"내가 꼭 여기서 나가게 해줄게."
아우로라는 밧줄이 풀리자마자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의 먼지를 손가락으로 쓱 훑었다. 손가락이 닿는 곳마다 바닥이 맨질해지는 것을 보아하니, 이곳에 캐스팅 없이 마법진을 설치할 가능성은 있어보였다. 아우로라의 머리가 바쁘게 일을 시작했다. 노예상에게 신분을 밝혀봤자 미적지근한 반응으로 돌아올 거고, 그렇다면… 아우로라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였고, 먼지를 걷어내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게 됐으면 좋겠는데."
아우로라는 먼지투성이인 손으로 머리카락을 대충 훑어 넘겼다. 바닥은 어느새 복잡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고, 마나만 주입하면 될 일이었다. 통신 마법진이 과연 발동 될까? 아우로라가 문양 가운데에 손을 짚으려 했다.
마법을 쓸 수 있다면 탈출할 수 있을 거라는 아우로라의 말에, 남자아이는 눈을 반짝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마법을 쓸 줄 아는 사람을 보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아이들 중에는 간단한 마력운용 정도는 자연스럽게 하는 아이가 있을 수 있지만 정식으로 교육을 받지 않은 아이가 마법사에 준하는 실력을 갖출 확률은 매우 희박했으니, 제대로 마법을 쓸 줄 아는 사람을 마주쳤다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는 들뜬 듯 보였다.
" ...똑똑히 들었어. "
분명 여기 있던 아이들 중 몇몇이 없어지는 걸 봤다면서 중얼거린 여자아이는 자신의 무릎을 당겨 끌어안았다. 그런 여자아이를 잠시 쳐다보던 남자아이는 고갤 아우로라에 돌려서, 그녀가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아무튼 얼마 지나지 않아 먼지투성이었던 바닥에 마법진이 그려지고, 아우로라가 문양에 손을 짚어 마나를 흘려 보내자 마법진은 은은하게 빛을 내기 시작했다. 바로 통신 마법이 발동되었지만 갇혀 있는 곳 주변으로 방해 공작이 있는지 통신 대상을 특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통신 상태가 좋을 거라는 보장도 없고.
그 때, 벽 쪽에 있던 아이가 뭔가를 들은 듯 급히 손짓하자, 남자아이는 눈을 깜빡이더니 아우로라에게 이야기했다.
" 누가 오고 있대, 아마 나나 다른 애들을 잡아온 녀석들일거야. "
그 전에 이거 숨겨야 하지 않을까? 마법진을 가리키며 그렇게 이야기한 남자아이는 여기저기 흩어진 짚단을 집어들었다.
//괜찮아! 천천히 하자구! 날씨는 확실히 이상한 거 같아, 왜 11월인데 후텁지근한 걸까...
겸손하게 답한 아우로라는 마법을 쓸 줄 아는 사람이 적음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그렇구나, 중요한 전력이 될 수도 있으니 마나는 최대한 아끼는 게 좋을 것 같다.
"...괜찮아. 이제 아무도 처리 당하지 않을 거야. 내가 약속할게."
아우로라는 여자아이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이렇게 어리고 한참 사랑 받을 나이의 아이들을 노예로 거래한다니. 아우로라의 미간이 구겨졌다.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이럴 수 있지?
"방해하는 사람이나 결계가 있나보네."
아우로라가 쓰게 웃었다. 이런 거 하나는 대비했다 이 말인가? 그렇다면 마법사가 일당을 돕는 확률이 높다. 제국법을 크게 어기는 행위에 마법을 사용하지 말 것. 마탑의 규칙을 어기다니, 얼마나 간이 큰 녀석인지는 모르겠지만 걸리면 목숨은 없을 것 같다. 적당히 작은 아버지가 상대해주겠지.
"..."
통신 상태도 양호할 거라는 보장이 없다. 마탑에 연락을 취할 수만 있다면 순식간일 텐데...
"아, 응..! 숨겨야지."
아우로라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들키면 곤란하니까. 아이를 도와 짚단을 주워 마법진을 조심스럽게 덮으려 시도했다.
// 갱신할게! 오늘 날씨가 무지 춥다...어제는 좀 후덥지근 한 것 같더니 오늘은 갑자기 추워졌어. 곧 입김도 나올 것 같네. 솔로몬주도 감기 조심하고, 요즘 코로나가 다시 극성이니까 부디 조심하길 바라!
이제 아무도 처리 당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한다는 아우로라의 말에, 여자아이는 아우로라를 힐끗 보더니 말없이 고갤 무릎 사이에 파묻었다. 그런 이야기가 오가는 것도 잠시, 누군가가 오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마법진을 숨기는 아우로라와 남자아이. 다행히 짚단이 많이 널려 있어서 가리는 데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리고 이제는 아우로라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두세 명 정도가 걸어오며 떠드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마치 항상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은 구석 쪽으로 모여들어 잔뜩 웅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에서부터 걸어 놓은 빗장이 풀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며 빛이 안으로 새어들어온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라면 좀체 익숙해지기 어려운 빛이 문이 열린 공간만큼만 안에 들어오고, 아마 납치범들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들린다.
" 얼른 넣어두자. " " 이게 웬 횡재냐, 요즘엔 도통 보이질 않았잖아. "
당최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이 뭔가를 안으로 던졌고, 아마도 아우로라 앞 쪽에 털썩, 하고 뭔가 떨어진 것 같다.
" 솔직히 좀 아깝지 않아? 간만에 찾은 거잖아. " " 두목이 손 대지 말라는데 어쩌겠냐, 이미 여자애 한 명을 두목 몰래 데려온 상황에서 말 안 들었다간 손목 날아갈걸. "
참 나, 우리도 좀 좋으면 어디 덧나나. 라고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문이 닫히고, 잠시 빛으로 밝아졌던 내부가 깜깜해지면서 애써 익숙해졌던 어둠이 다시 생소한 게 되고 말았다.
" 또 누굴 잡아왔나 보네, 이번엔 누구지? "
//갱신! 어제는 좀 바빠서 못 왔었어. 이제는 바람도 많이 불고 해서 체감온도가 낮으니까 진짜 조심하자!
들키지는 않았지만 빛이 강해 탈출은 힘들겠다. 아우로라는 눈이 부시는지 눈을 꾹 감았다. 여기가 새삼 얼마나 어두웠는지 실감이 간다. 눈 아파! 납치범으로 추정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아우로라는 실눈을 떴다. 횡재니 뭐니,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니 토악질이 나올 것 같다.
"!"
던져지는 소리. 아우로라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여서 눈에 띄거나, 짚단이 흐트러져서 마법진을 들킬지도 모르니까. 대화는 갈수록 저질스럽기만 하다. 어떻게 어린아이에게 저런 생각을 품지? 입술을 꾹 다물고 문이 닫히자 아우로라는 눈을 완전히 떴다. 어둡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금세 눈에 어둠이 익긴 했지만, 여전히 침침하다.
"저기, 괜찮아요?"
아우로라는 던져진 사람을 향해 다가가려 했다. 누구지? 저 녀석들의 말로 들어봐선 이 마을에 아이가 흔하지 않은 것 같던데. 아우로라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 갱신! 봄과 겨울이 섞인 것 같은 날씨네. 금방 추워져버리니 이거 원 애매하기까지 해. 밤에 입김이 나오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솔로몬주도 조심하길 바랄게!!
날카로운 듯한 여성의 목소리가 아우로라의 말에 반응하듯 들린다. 아무래도 이번에 잡혀 온 이는 여성인 모양인데... 아무튼 그 여성은 끙차, 하고 간신히 앉은 자세로 몸을 일으켰다. 그제서야 대강 상황을 파악한 건지 아마 아우로라가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쪽(물론 반대쪽을 보고 있긴 했지만)을 보며 입을 열었다.
" 괜찮아요, 좀 두들겨 맞긴 했지만. "
어째 조금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괜찮다며 이야기한 그녀는 아직 어둠이 익숙하지 않은지 그 외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잠시 동안 침묵이 유지되자 아우로라의 끈을 풀어줬던 남자아이가 입을 열어 묻는다.
" 너도 잡혀 온 거지? 운도 없네... "
그 말을 하는 동안 슬슬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고, 간신히 실루엣 정도만 구별할 정도지만 눈 앞에 있는 여성의 모습을 본 남자아이는 어, 하고 놀란 듯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어쩐지 조금은 겁 먹은 것 같기도 한 그런 숨소리. 그도 그럴 것이...
" 어디 보자, 아! 저기 아가씨, 아가씨 귀족 맞죠? "
그런 남자아이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둠 속을 스윽 훑어보던 여성의 시선이 아우로라에게 고정되고, 끈은 어느새 풀었는지 자유로워진 손과 발을 이용해 아우로라에게 다가와 바짝 얼굴을 내민다. 갑작스런 움직임에 남자아이는 확실히 겁을 먹은 듯, 숨소리를 죽인 채 뒤로 물러서 앉았고,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갱신할게! 아침이랑 밤엔 진짜 춥더라, 입김이 막 나와... 응, 안 그래도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그런가 코가 좀 막히는 것 같더라고, 몸 따뜻하게 하고 있는 중이야.
두들겨 맞은게 괜찮은 건가? 아우로라는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보다 거기가 아닌데, 어둠에 눈이 익지 않은 걸까? 뭐, 그건 방금 빛을 본 자신도 마찬가지지만.
"저는 이쪽에 있어요."
아우로라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침묵이 이어졌다. 아우로라는 소년의 말과 함께 눈이 어둠에 익는지 형체가 흐릿하게 보이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아우로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종족인게 확실하다! 커다란 뿔, 낯설면서도 익숙한 이종족. 문득 오세와 아이니가 떠올랐다. ...다들 걱정하고 있겠지?
"ㄴ, 네! 맞는..데요...?"
아우로라는 불쑥 다가온 여성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덕분에 목소리 톤이 잠깐 높아졌지만, 이정도로 밖에 있을지도 모르는 녀석들이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아우로라는 귀족이냐 대뜸 묻는 말에 옷차림 때문인가, 생각하다가도 고작 이정도로 귀족이냐고 물어볼레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혹시 몰라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떠보려 했다.
"혹시, 아젤 공작가의..."
공작가의 사람인 걸까? 그렇지만 저런 분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 갱신할게, 답레가 너무 늦어서 미안해 ㅜㅜ....12월이 다가오니까 엄청 바빠지기 시작했어. 일도 바쁜데 요즘 밖에 나가려고 할 때마다 무서워지기도 하네. 나갈때 마스크 꼭 쓰고 절대 벗지 말고! 우리 조심하자...건강이랑 일은 중요하니까..ㅠㅠ...
자신은 이 쪽에 있다는 아우로라의 말에 고갤 돌려 아우로라가 있는 쪽을 바라보는 여성은 어두워서 그렇다고 머리를 긁적였다. 불쑥 아우로라에게 다가가 질문을 한 건 그 직후였고, 아우로라가 놀란 목소리로 맞다고 이야기하자 그거 다행이라며 웃는다. 그리곤 무어라 이어서 이야기하려는 듯 싶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우로라가 그녀에 대해 묻는 목소리가 들려 오고, 그녀는 눈을 깜빡이더니 고갤 살짝 기울였다.
" 아젤? 아젤 공작가라... 흠... "
잠시 동안 그렇게 곰곰히 생각하는 듯 보이던 그녀는 뭔가 생각이 났는지 한쪽 주먹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톡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 아! 맞아요, 공작가에서 온 사람입니다, 비네라고 불러주세요. "
그러니까, 아우로라 아가씨 맞으시죠? 라면서 아우로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아무래도 어둠이 영 익숙해지질 않는지 미간을 찡그린다.
" 너무 어둡네, 잠깐 실례할게요. "
그러면서 잠시 허공에 뭐가 있기라도 한 듯 천천히 손을 움직이는 비네, 그러자 어째서인지 아우로라의 몸에 있는 마력과, 통신 마법을 사용했을 때 썼던 마력이 반응하기 시작, 비네의 손 끝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곤 은은하게 빛을 내는 것이, 아우로라의 마력이 가진 기본 성질과는 조금 다른 형태로 마법이 사용되고 있었다.
아무튼 빛이 은은하게 아우로라와 다른 이들이 갖힌 곳을 비추고, 자연히 비네의 모습도 좀 더 자세히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커다란 회색빛의 뿔, 그리고 그 뿔과 머리를 감싸고 있는 붉은 머리칼은 턱밑까지 아무렇게나 자라 있어 정돈되지 않은 느낌을 많이 주고 있었다. 둔 눈은 호박빛이었으나 동공이 인간과는 다르게 가로로 늘여져 있어 대강 비네가 어떤 이종족인지 가늠할 수 있게 했다.
" 아~ 죄송해요, 멋대로 마력을 써 버려서. "
//갱신할게! 어제는 가족 기일이라서 잠깐 어딜 좀 다녀왔는데 시간이 엄청 늦었더라구... 그래서 답도 못하고 바로 쓰러져 잤어. 어이구... 바쁘다니 좀 힘들겠다, 안 그래도 코로나 때문에 바깥에 돌아다니는 건 힘든데 일이 늘면 더 힘들지 않으려나ㅠ 너무 무리하지 말구. 응, 나갈 때 꼭 마스크 쓰고 나가고 있어, 건강이랑 일 둘 다 중요하니까 꼭 둘 다 해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