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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온하제, 카제하가 몸담기로 결정한 한 신계에는 다솜이라는 멋진 곳이 있습니다. 꽃이 만개하고 자연의 숨결 또한 고스란히 느껴지는, 봄이 완연히 피어난 지역입니다. 카제하는 그런 다솜이 참 좋았습니다. 고귀한 생명의 내음이 가득했으니까요. 벚꽃나무가 잔뜩 뿌리내린 다솜의 숲에서, 카제하는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 나무줄기에 몸을 기댄 채였습니다. 그러다 머리 위에 벚꽃잎이 살포시 내려앉는 느낌에, 그는 눈을 떠 갓 떨어진 벚꽃잎을 손바닥 위에 고이 담아봅니다. 곱디 고운 분홍빛입니다. 카제하는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숲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옷에 달린 자그마한 곡옥이 일순 반짝였습니다. 그의 손 위에서 피어난 작은 바람결은 이내 고요히 부는 봄바람이 되어, 벚꽃나무 숲을 부드럽게 훑고 지나갑니다. 따스한 바람에 머리카락이 기분 좋게 흔들렸습니다. 평화롭기 그지 없는, 다솜에서의 일상입니다.
카제하는 어느덧 자리에서 일어나 바람 부는 숲 사이를 느긋하게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포근한 흙 냄새가 사방에 가득했습니다. 그렇게 계속 정처없이 걷던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습니다. 맨발을 휘저으며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한 신이었습니다. 분홍 머리칼에 분홍 날개를 가진 그녀는, 이 벚꽃나무 숲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외양이었다죠.
"안녕하시오. 처음 뵙는 얼굴이구려."
카제하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봅니다. 혹여나 이 목소리가 그녀의 사색에 방해가 되진 않을지, 다소 걱정이 됩니다.
찰방찰방, 물결을 가르는 두 발이 고요한 수면을 부드러이 갈랐다. 허공에 살짝 흩어지는 물방울들마저도 마치 진짜인 것 마냥. 그러한 자신의 작디 작은 움직임과 잔잔히 불어오는 봄바람은 수면에 일렁임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고, 그에 하나, 둘, 떨어져 수면 위를 장식해주는 벚꽃잎들이 덩달아 일렁였다.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아요. 벚꽃잎 님들도. 자신의 신통력으로 인하여 바뀌어진 진한 분홍색과 빨간색의 벚꽃잎들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깨끗한 푸른 색과 대비되는 수많은 분홍색들과 빨간색들. 그에 조용히 생각에 잠기어가기 시작했다. 멍한 두 눈동자가 더욱 몽롱해지면서, 마치 생각의 호수 속으로 천천히 잠기어가듯이...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그러한 자신의 귀에 들려오는 한 낯선 목소리에, 순식간에 구슬의 빛이 훅, 꺼져버렸고, 그에 신통력으로 유지되던 호수와 벚꽃잎들도 전부 다 한순간의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멍하니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내려다보자 보이는... ...한 낯선 신 님의 모습...?
"...아..."
그에 순간 한 박자 늦게 놀란듯이 멍한 두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그리고는 다시금 한 박자 느린 동작으로 급히 분홍색의 날개를 펼쳐내어 잠시 허공을 가르며 아래로 내려와, 그대로 땅에 사뿐히 맨발을 딛었다. 그리고는 낯선 신 님께로 다가가 두 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아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올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낯선 신 님. 저는 플라밍고 수인, 리스라고 합니다. 만나뵙게 되어서 정말 영광이예요.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잠시 놀고 있느라 감히 신 님을 알아뵙지 못했어요..."
...정말로 죄송합니다, 다시금 예의바른 사과와 함께 허리를 꾸벅, 숙였다 폈다. 괜히 입가로 가져간 손가락들을 꼼지락꼼지락 거리면서, 시선은 진심으로 죄송한 듯이 슬쩍 아래로 떨구어진 채. ...어쩌지요... 하는 듯한 모습으로.
리스가 날개를 펼쳐 가볍게 활강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리스의 목에 달린 구슬이 빛을 잃어가는 게 카제하의 눈에 띄었습니다. 그녀 또한 카제하처럼 신통력을 쓰고 있었던 걸까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집중한 표정을 짓고 있던 것도 그렇고, 왠지 미안한 감정이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카제하는 내려온 리스에게 허리를 가볍게 숙여보였습니다.
"만나서 반갑소, 리스 공. 본인이 혹시 그대의 명상을 방해했다면 사과하겠소. 본인은 호랑이 수인 신 타케모리 카제하라고 하외다. 카제하라고 부르시오, 편하게."
이어지는 리스의 사과에, 그는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우스꽝스러워서도 아니고, 비웃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부담스럽게 느끼는 듯한 리스에게 분위기를 풀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괜찮소, 사과할 필요 없소. 갑자기 인사를 건넨 건 본인 쪽이니, 늦게 알아챌 수도 있는 거지."
카제하는 손사래를 치며 겸손히 대답했습니다. 눈꺼풀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접혔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어째서 자신은 신이 아니라는 듯 말을 하는 걸까요. 리스라는 플라밍고 수인은 구슬도 있고, 신통력도 쓸 수 있는 명백한 신입니다. 그리고 그녀 또한 신계 라온하제의 주민일 테고요. 카제하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허나 리스 공 또한 분명한 신일진데 어찌 그리 위축되어 계시는 것이오?"
그는 무릎에 손을 짚고 살며시 허리를 굽혀 리스의 두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리스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에 담긴 의문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태도였습니다. 그런 그의 눈에는, 여전히 따스한 빛이 서려있었죠.
갑자기 자신의 귀에 들려온 낯선 목소리. 그에 아래를 내려다보니 보이는 낯선 신 님의 모습에, 그제서야 한 박자 늦게 황급히 땅으로 내려와 신 님의 앞에 섰다. 그리고 공손하게 인사와 함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올리자, 낯선 신 님께서도 사과를 들려주셨다. 아예 자신에게 똑같이 허리를 가볍게 숙이시는 모습에, 멍한 눈동자가 크게 뜨여졌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고개를 좌우로 도리도리, 저어보였다.
"...아, 아닙니다...! 명상같은 걸 하고 있던 것이 아니니 저는 괜찮습니다. 저에게 허리 숙이시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타케모리 카제하 님... 이시군요. 만나뵙게 되어서 정말로 영광이예요, 카제하 님."
다시금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올리고는 희미하게 헤실헤실 웃어보였다. ...새로운 신 님의 이름을 알게 되었어요. 정말로 기뻐요...! 그러다 이어진 카제하 님의 시원한 웃음과 말씀에, 한 박자 늦게 "...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부드러운 눈웃음. 그에 카제하 님의 자상한 배려가 느껴지는 듯해, 잠시 멍한 눈동자로 카제하 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다시금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해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카제하 님. 하지만 전 '신' 님의 부름에 곧바로 응답하지 못 했는 걸요. 그러니... 다음부턴 저도 곧바로 응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자신은 '신' 님이 아니라는 가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나 이어서 카제하 님께서 아예 무릎을 짚고 허리를 굽혀 자신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자, 놀란듯이 멍한 두 눈동자를 깜빡깜빡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괜히 슬쩍 시선을 옆으로 떨구어 피하며 자신의 왼쪽 눈을 은근히 가렸다. 거기에 무의식적으로 왼쪽 눈가를 매만지며 한 박자 늦게 입술을 열었다.
"......말씀은 정말로 감사하지만, 저는 '신' 님이 아니랍니다. 그러니... '신' 님이신 카제하 님을 이렇게 직접 뵙게 되니 영광스럽고 숭배하는 마음에 그만... ...하지만 그렇게 많이 위축된 것은 아니니 괜찮습니다. 걱정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해요, 카제하 님."
이내 다시금 카제하 님에게 희미하게 헤실헤실 웃어보였다. 무려 자신의 시선을 맞추어주신 것에 대하여 영광스러운 진심이 담긴, 위축되지 않은 감사 인사와 함께.
빠른 응답이라는, 다소 엉뚱하다면 엉뚱한 대답에 카제하는 그만 실소를 흘렸습니다. 그녀는 대체 무엇이 두려운 것인지 카제하의 시선을 슬쩍 피했습니다. 그럼에도 상대와 눈높이를 맞춘 그의 자세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영광스럽고 숭배하는 마음을 가질 필요는 없소. 어차피 우리는 다 같은 라온하제에 사는 이웃 아니겠소? 신이라고 해서 고귀하고, 신이 아니라고 해서 하찮은 것이 아니오. 그러니 본인은 리스 공께서 너무 자격지심을 가지지 말았으면 좋겠는 바요."
왜냐면 모든 생명은 신이든 신이 아니든 그 자체로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으니까요. 카제하는 신이면서도 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 홍학 신에게서 왠지 모를 애처로움을 느꼈습니다. 리스의 언행은 신을 무조건적으로 우러러보는 인간계의 인간들과 사뭇 닮아있었습니다. 어차피 다 같은 생명이며 인격체인데, 그렇게까지 예의를 차릴 필요가 있을까요. 그녀의 소심한 태도 앞에서 어김없이 카제하의 오지랖이 빛을 발했습니다.
"얘기가 그만 길어져버렸군. 리스 공은 여기서 뭘 하고 계셨소?"
그는 낮추었던 자세를 풀며, 살짝 화두를 돌렸습니다. 계속 이런 화제를 이어가는 것 자체가 리스에게는 부담되는 행동일 수도 있을 텝니다. 숲을 올려다보자 한 차례 세차게 따스한 바람이 불고 벚꽃잎이 우수수 흩날립니다. 잎이 떨어지는 바스락 소리가 요란하면서도 고요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카제하 님의 말씀을 조용히 따라서 중얼거리며, 슬쩍 옆으로 피했던 시선을 다시 느릿하게 한 박자 늦게 가져왔다. 다시 바라본 카제하 님은 여전히 자신과 눈높이를 맞추어주고 계셨고, 그에 이어서 들려오는 카제하 님의 말씀에서도 여전히 온화한 다정함이 묻어나왔다. 그렇기에... 이내 멍한 서로 다른 색의 두 눈동자를 부드러이 접어 웃어보였다.
"...말씀 정말로 감사합니다, 카제하 님. 하지만... 저는 '신' 님이 아니라고 해서 하찮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동물 씨들, 식물 씨들, 사물 씨들,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존재들은 전부 다 소중한 걸요. ...다만, '신' 님께서는 더욱 위대하신 존재들이시니까요. 그래서... 저는 숭배하고 싶어요. 물론 마찬가지로 '신' 님이신 카제하 님도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카제하 님...?"
그것이 바로 자신이 편한대로 행동하는 것. 다른 신 님을 찬양하고, 숭배하고, 신뢰하는 것. 그렇게 손가락을 작게 꼼지락거리면서 조금은 조심스러운 태도로 카제하 님께 여쭤보면서도, 나름대로의 자신의 신념은 계속해서 유지했다. 그러다 이어서 들려오는 카제하 님의 말씀에, 한 박자 늦게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입술을 열었다.
"...저는 여기서 저 나뭇가지에 앉아서 저의 신통술로 놀고 있었습니다. 제 신통술은 환각 능력이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이내 다시 두 손을 자신의 구슬에 천천히, 살며시 갖다대자, 구슬이 다시금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다시금 주변에 펼쳐진 잔잔하고 고요한 호수. 이번에는 카제하 님께도 보이도록 만들어진 환각의 투명한 물은 자신의 무릎을 조금 넘는 깊이였고, 불어오는 바람에 물결이 잔잔히 일렁이는 그 모습은, 마치 실제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었습니다. 벚꽃잎 씨들의 색깔도 바꾸어보면서요."
이내 천천히 두 손바닥을 들어올리자, 그 위에 연분홍색의 벚꽃잎이 점차 진한 분홍색, 그리고 마침내는 빨간색이 되어 자신의 손바닥 위에 살포시 안착했다. 그리고 그 벚꽃잎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들어올려, 한 박자 늦게 카제하 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희미하게 헤실헤실 웃으면서 두 손바닥을 가만히 위로 올려보였다. 카제하 님께서 벚꽃잎을 더 잘 보실 수 있게 하려는 듯이.
/ 앗...! 아니예요, 카제하주! 저도 곰손인 걸요...ㅎㅎㅎ(토닥토닥) 전혀 늦지 않으니까 편하게 천천히 써주셔도 된답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카제하주!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