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바보인가. 나는 또 다시 튀어나올 뻔했던 말을 조용히 속으로 삼키며 견뎌낸다. 그나마 나 이외에 빚진 사람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긴,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눈 앞의 남자에게 돈을 빌려줄만한 사람이 얼마나 될런지. 나 생각보다 좋은 사람 아닌가? 그 와중에 들려오는 '님' 단어에 순간 움찔. 불편하단 말이야. 대접받는 건.
"주문도 많으시군. 알았어. 고구마면 되겠지? 콜라도 큰 걸로 둘 하면..."
말을 놓아도 된다는 대답을 듣자마자 어조가 확 뒤바뀐다. 이제야 좀 편하네. 난 숨을 가볍게 들이쉬었다. 나는 전화를 걸어 가장 비싼 피자 하나와 고구마 피자에 각종 사이드 메뉴까지 잔뜩 시킨 뒤 전화를 끊었다.
"갚을 수 있다면 말이지."
여기선 살살 자극하며 반응을 살핀다.
"그래서, 사실 아저씨한테 꽤 괜찮은 제안이 있는데. 일단 물어볼게. 리스크 없이 오랫동안 고통 받는 것, 리스크는 있어도 빠르게 빚을 갚을 기회를 받는 것. 어느게 좋아?"
아 쓰읍,이건 좀 고민되는데. 솔직히 가늘고 길게 가는게 좋지,어짜피 세네달만 있으면 주식 또 올라갈테니까. 설마 여기서 또 내려갈데가 있겠어?! 그래,분명히 올라간다. 올라간다! 하지만 지금 말하는 삘을 보니 돈 빌려주신 분이 재미있는 상황을 원하시는 것 같다. 으음,이거 어떻게 해야하나? 여기서는 돈을 빌려주신 분 말을 듣는게 좋겠지? 나는 해그러스님이 재밌어하실만한 대답을 하기로 한다.
"빠르게 끝내는 쪽으로 하겠습니다. 리스크 있지만 빠르게 끝내는 쪽으로."
도박에는 영 재능이 없지만,설마 여기서 더 안좋아지겠어? 하는 생각도 있고,가늘고 길게 가려면 몇달동안 계속 돈 갚으라는 소리에 시달릴 것 같으니까. 빠르게 끝내는 쪽으로 가기로 한다.
"그나저나 고통 얘기하시는데,제 이름부터 페인킬러잖습니까. 이러다가 제가 빨리 돈 갚게되면 어쩌시려고 그러는겁니까★ 나중에 수술할때 되서 아프다고 해도 안들어 줄거에요★"
...그리고 이 일은 잊지 않겠다. 나중에 해그러스 당신이 수술할때나,부상 입을때까지 이 일은 꼭 기억해두겠어! 으아아아아ㅏㅏ
이놈들은 죄다 아지트로 안오고 다른데서 밥먹나..... 이상하네, 짬밥치고는 되게 잘 만들어진거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계란말이 19인분을 모두 해치운 그는 냉장고를 뒤적이며 계란말이 재료를 꺼내드는데.....
"읏차."
양이 심상치가 않다.
"자, 그럼." -터어엉!!
꺼내든 프라이팬도 심상치 않다. 가정집에서 사용하는 프라이팬의 최소 두배 크기다. 그렇게 양팔을 걷어붙이고 심호흡을 한 뒤 그는 맹렬하게 재료들을 다지고 순식간에 계란을 풀어헤친뒤 반죽들을 남김없이 프라이팬에 싹다 때려 박았다. 동시에 손목 스냅이 미친듯이 기민해지는데 그가 프라이팬을 가볍게 뒤흔들때마다 계란말이가 조금씩 커지고 이내 재료를 모두 다 쓰는 순간..... 길이 70cm, 높이 10cm, 폭 10cm의 초 대형 계란말이가 탄생하였다.
"...... 이걸로도 모자르려나."
녀석, 갈 수록 배용량이 커져서..... 엥겔지수가 걱정된단 말이지...... 그의 작은 중얼거림이 텅빈 냉장고에 울려퍼진다
그으래? 함 두고 보자! 다음엔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이되나 함 두고 보자고,그때 되고 나서 질질 짜도 절대 안봐줄테니까 긴장 좀 해두는게 좋을걸. 아니면 지금 빛 한 50퍼쯤은 깎아준다거나.
그래,그러고보니 종목을 정해야하는데? 무슨 도박을 하는게 좋으려나? 생각해보니 이녀석 전문 도박사잖아? 평범한 도박으로는 이길 수 없을게 뻔한데. 무슨 도박을 해야할지 고민하다가 한가지 묘수를 생각해낸다. 이 도박이면 절대 속임수를 쓸 수는 없겠지,씨익 웃으면서 말한다.
"피자가 지금으로부터 15분 안에 오느냐 마느냐 맞추기 어때? 나는 온다에 건다. 이 도시 피자집 배달은 진짜 빠르거든. 그리고 빚 탕감은 전액으로 갑시다. 쩨쩨하게 하면 재미 없잖아?"
설마 피자 배달 시간까지 속임수를 써서 이겨먹진 못하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 도박을 제안한다.
꿈자리가 뒤숭숭하다. 파브닐의 두 눈동자에 그림자가 졌다. 분명 무슨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도 나지 않고, 찝찝하기만 하다. 물론 세수를 하고 나니 전부 다 까먹었지만. 기지개를 쭉 켜며 옷을 보았다. 오늘은 밖에 순찰 비스무리한 걸 하기로 했었지. 정장으로 갈아입고 장갑까지 완벽히 끼고 나니 허기가 졌더라.
"엘리고스."
엘리고스가 지금쯤이면 식사를 준비했을테다. 엘리고스가 해주는 건 다 맛있어. 제 자신이 처음 맛을 본 이후로 꼬박꼬박 제 식사를 챙겨주니. 빨리 가야겠다 생각했는지 파브닐은 두 손을 땅에 짚고 조막만한 용으로 변해 재빨리 주방을 향해 뛰어갔지.
"엘리고스!"
어느새 의자에 앉아 식탁에 두 앞발을 올려둔 파브닐의 두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파브닐은 엄청 커다란 무언가를 봤어!!
얼씨구,말하는거 보소?! 지금 시킨 피자가 15분안에 오는거라고! 새로 시키거나 주문 바꾸는건 사기잖아!
"야,그건 사기잖아!"
아니 진짜 이자슥이,주문을 바꾼다니?! 역시 돈 많은 놈들은 뭐가 달라도 달라! 하지만 이미 늦었어,이 도시 피자는 아무리 늦어도 10분이면 오거든?! 메뉴 하나 바꿨다고 해서 15분 넘게 걸릴리가 없지. 애초에 바꾸는 것도 사기지만! 바꾼다고 해서도 15분 안에 못올리가 없다고. 그런데...
"...잠깐만,불의의 사고는 또 뭐냐."
왠지 분위기가 갑자기 싸해지는게 느껴지는데,설마 15분안에 피자가 못오게 할 방법이 있다는 뜻인가. 빚진놈들 동원해서 피자집에 마구 들어간다음 피자 한판씩 시키기라도 할 생각인거냐?! 설마?!
허기가 진다! 무지막지한 크기로 변하는지라 꽤나 에너지 소모가 컸더라지. 일을 끝내고 나면 간식을 자기 전까지 챙기니..뭐, 아무렴 어떠한가. 엘리고스 왜 고개 끄덕여? 그런 눈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기우뚱 기울인 파브닐은 제 앞발을 보고 호다닥 사람으로 변했더라지. 좋아, 식사 준비 완료.
"잘 먹겠습니다!"
크고... 아름다워요. 어디선가 들리는 괴전파는 신경도 쓰지 않았더라지. 파브닐의 두 눈동자가 반짝였다. 크다! 파브닐이랑 키가 비슷해. 포크를 들어 계란말이를 콕, 찔러본 파브닐은 그대로 케이크를 뜨듯 조심스레 계란말이를 떼어 입에 넣었다. 따끈하고, 폭신하고..
그와 동시에 무슨 사발 하나를 가져오더니, 밥솥의 남은 밥을 싹다 털어서 사발 안에 담고 그걸 파브닐 앞에 내려놓는다. 누가 보면 무슨 도전 음식을 먹는줄 알겠지만..... 파브닐이 먹는 양을 생각하면 이건 나름대로 정상적인 현상이다. 거기에 더해서 그는 연회용으로 쓰는 5000cc 맥주잔을 가져와 얼음을 한가득 담은다음 홍초를 한잔, 그리고 나머지를 물로 채워 파브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마지막이다. 다른 사람들이 먹을건 다 해놨고, 그러니 체하지 않게 천천히 먹으려무나!"
엥겔지수가 어떠하며 만들때의 노고가 어떠하리, 이렇게 맛있게 먹는 것만 봐도 기쁘거늘.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파브닐의 피부위에 덮힌 비늘의 감촉을 느꼈다.
넉넉하게! 많이! 파브닐의 양 뺨이 발그레하니 적적한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밥도 있다! 마실 것도 있어! 다 먹고나면 배가 부를테지! 오늘은 마음 놓고 변신해도 되겠다.
"알았어요."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마냥 좋은듯 한껏 입꼬리를 휘어올린 파브닐은 고개를 끄덕이곤 계란말이를 다시금 포크로 퍼서 입안에 집어넣고, 밥을 양 볼이 빵빵해지도록 가득 담더니 열심히 그것을 씹었다. 꼭꼭 씹어서 삼키고, 홍초를 목 뒤로 넘겼다. 엘리고스 최고. 맛있는 거 주는 사람은 착한 사람.
"오늘, 여기까지만..."
이 밥으로도 충분하다고? 오, 맙소사. 다이어트라도 하나. 파브닐은 다시금 밥을 입안에 가득 퍼 넣었다. 맛있어. 먹는 거 최고.
이미 다른 사람들의 분량의 몇 배를 먹었다는 것에 대해 충분히 태클을 걸 요소는 충분하지만 파브닐의 식사량이 조금 줄은 것이 조금은 걱정이 되면서도 아무일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천천히 파브닐이 식사를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도 홍초를 한 모금 들이킨다. 너무 더운 날씨엔 이렇게 홍초 한 잔만 마셔도 피로가 싹 풀리는게 느껴진다.
"너무 무리는 하지 말거라."
싸울 때 와는 다르다. 약간의 온기와 편안함, 그리고 부드러움이 섞인 목소리다. 분명히 동료들을 잃은 자, 그리고 소중한 것을 잃은 자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도 잠시 엘리고스는 예의 그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