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의 길고 긴 말을 들으면서 센하는 침묵을 지켰다. 시선은 다른 곳을 애매하게 향하면서 중간에 노골적으로 지루하다는 듯이 하품까지도 쩍, 하고 하였다. 아무리 범죄자를 상대하는 것이라 해도, 근본적인 사이인 인간 대 인간으로서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대충 알아듣기는 했다. 익스파가 밝혀진 일이 초래할 수 있는 갈등에 관한 이야기였다.
하. 어처구니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분명 요즈음 때의 중심되는 중요한 이야기다. 그러나.
"네, 그러신가 보죠. 하지만 저는 대단하신 개혁자의 소견은 물어본 적 없습니다. 알고 싶지도 않고."
뒤늦게 성인의 흉내를 내다니, 역시 역겹다. 닥치고 있으라니까 쓸데없이 말이 많군요. 아까와 같은 냉소적인 소리만 내뱉고, 실질적인 주제와 관련해서는 일체의 대꾸도 하지 않은 것은 짐짓 고의로 보였다. 이어지는 이준의 말들.
ㅡ하윤이와 약속을 했네. 난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자신은 단 한 번도 받아본 기억이 없는,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의 형태를 띠고 있어 순간 목에서 덜컥 무언가가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색한 감정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무엇인진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조차도 우습다는 것이었다. 당신 되게 웃기다. 그렇게 운을 떼었다.
"그동안 그 잘난 개혁을 한답시고 딸의 부탁은 전부 묵살한 주제에, 뒤늦게 약속했네 뭐네 운운하면서 생색내는 거예요? 왜, '좋은 아버지'로 남고 싶어서?"
코웃음을 쳤다.
"정말이지, 위선의 극치야. 당신."
또 이어지는 이준의 말들. 하윤과 서하의 관계에 대해 묻는다.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어서 진상은 모르지만 그 질문도 충분히 센하를 냉소하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또 이어지는 말...
"...허, 탈옥인가요?"
센하는 눈매를 일그러뜨리면서 비난조로 되물었다. 그러고 보면 실제 탈옥수가 한 명 있었지. 센하는 책상 위에 팔꿈치를 올려 비스듬하게 턱을 괸 뒤 이어서 말했다. 그 어조는 마치 동화구연 같았다. 잔혹한 동화의.
"그래, 어디 해볼까요? 나는 당신을 몰래 풀어준다. 당신은 서하 씨를 찾으러 간다. 여기까진 순조롭죠."
자, 이어서. 건방진 목소리가 울렸다.
"당신이 서하 씨를 실제로 만나기도 전에, 하윤 씨도 보기 전에 '내가 당신을 잡아 수갑을 채운다'. 무자비하게 대하면서."
푸흐흐, 뒤틀린 웃음소리가 즐거운 듯이 울렸다.
"그리고, 또다시 당신을 몰래 풀어준다. 당신은 서하 씨를 찾으러 간다. 그리고 내가 다시 당신을 잡아서 수갑을 채운다. 몸도 마음도 피폐해질 때까지. 영원히, 영원히. 아아, 경사로군요."
역시 내가 생각해도 이건 무리수였다. 나를 향한 날카로운 발언들이 들려오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저들이 나에게 이렇게 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오히려 이렇게 면회를 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지경이기도 하고... 하지만, 역시 신경 쓰이는데... 다음에 하윤이가 오면 물어볼 수밖에 없나. 네 이놈. 서하 군. 자네, 대체 내 딸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일단 침착 냉정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 대신에, 나는 피식 웃으면서 눈앞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장난은 이 정도로 하도록 하지. 사실 나도 진짜로 될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자네들에게 한 가지는 전하도록 하지. 이건...진지한 것이네. 흘겨들어도 좋고, 진지하게 들어도 상관은 없네. 어차피...나중에 하윤이가 오면 그대로 이야기 할 생각이니까."
그래. 이것은 저들에게 꼭 알려줘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무슨 소리를 듣더라도 상관없이 이야기하기로 했다.
"...그 악마를 기억하고 있나? 그래. 익스퍼 보안 유지부의 간부였던 그 악마. 그 자를 반드시 잡아내게.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자네들이 앞으로 이끌어갈 미래에..큰 해가 될 걸세. ...그 자는, 절대로 이번 일로 포기할 이가 아니지. 몇 년의 시간이 지나더라도, 반드시 다시 나타날걸세. ...그리고 그 집요함으로, 다시 무언가를 꾸미게 되겠지. ...나보다 더 악독하고 내 처제보다 더 위험한 이가 바로 그 자일세. ...나에 대한 악감정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 자는 꼭 잡아야 할 걸세."
이어 나는 두 손을 모아서 내 얼굴 앞에 두었고 진지한 눈빛과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 자가 시행한 실험은, 익스파 주입 실험만이 아닐세. 나도 자세하게 알아내진 못햇지만... Extinction EX. ...줄여서 E2 실험이 있었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리 좋은 것은 아니겠지."
조용히 입을 다물고 나는 그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뭐라고 하던지, 나는 전할 것은 전하기로 마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