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물러서서 월하를 본다. 더 이상 살 것이 없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은 금방 끝났다. 애초에 산 것이 별로 없으니 당연한 처사였다. 지은은 따로 준비한 장바구니에 물건을 집어 담고 마트 밖으로 나섰다. 이제 집에만 가면 될 일이었다. 지은은 밖에서 월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방향은 같았지만 헤어지는 시간은 금방이었다. 그야, 마트 근처에서 만났으니 헤어지는 곳도 마트 근처였다. 헤어지기 위해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월하를 배웅했다. 그렇게 지은도 뒤를 돌고 헤어지면 되는 일이었다. 집으로 향하기 위해 등을 돌리고 다급하게 말을 걸었다.
”저, 월하야!“
패기 넘치게 이름은 불렀는데 이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지은은 혼란으로 가득한 머리를 뒤로 하고 월하를 똑바로 보았다.
달빛이 어깨에 쌓이고 어둠이 눈을 가리는 밤, 공허함과 외로움이 그녀를 쓸어덮치고 회의와 절망에 허덕이며 제 발목을 잡아끄는 늪에서 발버둥을 치는 밤, 그렇게 그녀의 기억 한 부분이 처참히 깨져버린 밤이었다.
느릿히 눈꺼풀을 꿈뻑이니 희끄무레한 달빛이 눈시야를 밝혀냈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본 숫자가 6이었고 지금 휴대전화 액정에 비추어지는 숫자가 3이었는데. 모르겠다. 그 얼마나 깊은 잠에 빠졌던걸지 그녀는 딱히 알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새하얀 빛을 내비추는 휴대전화를 침대 모퉁이로 던져내며 오른손으로 느릿히 제 눈가를 문질렀다. 갑자기 제 눈에 빛이 들어와서일지 저도 모르게 인상을 푹 찡그리니 눈이 아프고 시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눈가를 문질렀을까. 제 볼에 붙여두었던 넙적한 밴드가 툭 하고는 제 손가락을 건들였다. 아, 그제야 제가 왜 이리도 우울하고도 아팠던건지 생각이 나는 그녀였다.
서장님의 얼굴이 제 머릿 속을 한 번 스쳐 지나갔다. 서장님. 왜 그러셨어요? 목적지를 잃은 질문은 허공을 방황하다 가라앉아 저 끝 없는 바다의 밑바닥으로 떨어질 뿐이었다. 느릿히 제 눈가에서 손바닥을 치워내자 살짝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다시금 희끄무레한 달빛이 쏟아졌다. 달빛을 보기 싫은 밤이었다.
당신은, 내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나의 아픔을 공감해주지 말아야 했고 나를 도와주지 말아야했다. 당신은 내가 당신에게 일말의 정도 붙이지 못하도록 해야했고 그 날, 당신은 나에게 그 말들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당신을 존경했다. 비단 당신이 서장님이라는 직위를 갖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신은 내가 힘들고 혼란스러울 때 그 아픔을 이해해줬고, 내가 잘못 된 길에 들어서지 않도록 나를 붙잡아줬다. 나에게 당신은 의지가 되고 믿을 수 있었으며 경찰이라는 꿈을 다 다양한 색으로 채워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준 사람이었다. 그랬던 사람이었다. 당신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머리가 아파왔고 혈관이 수축하듯 눈 앞이 아찔거렸다. 몸을 두어번 뒤척인 뒤에야 그녀는 한쪽 얼굴을 침대에 파묻은 채로 제 눈을 떠낼 수 있었다. 당신은 우리가 우스웠을까. 정의를 위한다는 어줍잖은 말들을 내뱉는 우리가 얼마나 우스웠을까. 한 때 당신을 믿고 존경했던 우리가 얼마나 우스웠을까. 그녀가 몸을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더이상 달빛은 쏟아지지 않았다.
작고 여렸다. 당신은 너무나도 작고 여렸다. 사랑하는 당신은 나와 다르게도, 아직 아이였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주변 사람들은 붙잡을 기회조차 주지 않고 떠나버린다. 그래, 지금도 그러하였지. 서장이라 불렸던 자는. 많은 이에게 믿음과 신뢰를 주었던 자는 기회조차 주지 않고 처음부터 자신들을 떠나있었으니.
"...."
왜 당신은 자기 자신을 머저리라 생각하는건가. 붙잡고 싶어하며, 곁을 떠나는 것이 싫었더란다. 당신을 떠날리가 없음에도 어찌하여 불안해 하는것인가. 당신을 단단히 품에 안았다. 떠나보내지 않겠다는 듯, 당신을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두 초록색 눈동자가 당신의 뒤에 놓인 벽을 노려보았다. 놓아달라 해도 떠나지 않을것이다.
"절대 떠나지 않을거예요."
더 이상 당신의 주변 사람들이 떠나지 아니하도록. 그 누구도 당신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없도록. 그는 조용히 몸을 떼곤 눈을 마주친 이후, 손을 들어 그 작은 얼굴을, 볼을 쓸어주며 나지막히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