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서 대상인 이 지현을 모르는 상인이 있다면 첩자라 하는 말이 세간에 떠돌아다닐 정도로 이 지현이라는 이름 석자는 상인들 사이에서는 이름 높은 사람이다.
본디 이 지현은 부모가 양반이었으나, 지독한 돌림병에 어린 지현을 뺀 일가 전체가 몰살당하고 평민 가정에 입양되었다. 하나 다행인 것은, 지현은 저의 아비의 성향을 고이 물려받아 끈기와 집념이 유별난데다 어릴 적부터 셈에 능했으며, 훗날 대 상인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헌데 이런 대상인도 요근래들어 하나씩 사업을 정리하고 후계를 교육하는 일에 집중하여서, 일각에서는 사모하는 이가 있어 정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설이 도는데 진위는 알 수가 없다.
늦은 밤이었더라지. 기방의 한 구석에서 웃음소리가 떠나가지를 않았다더라. 술을 한 잔 따르지 않겠더냐, 네에, 나으리. 당연히 따라드려야겠지요. 하하, 요 계집. 어쩜 이리 예쁜지, 이리 오거라, 한 번 안아보자꾸나! 따위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싶으니, 한 청년이 문을 덜컥 열자 붉은 머리를 지닌 청년의 한 손에는 술잔이, 다른 팔에는 저고리가 반쯤 벗겨진 기생이 안겨있었더란다. 기생은 화들짝 놀라 제 저고리를 여미곤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얼굴을 가렸고, 그런 모습을 본 남성의 표정이 경멸에 가까이 변했더란다.
"어찌 삼패만을 옆에 끼고 있는지. 한심하기 그지 없구나." "무례한 건 여전하시군요, 형님."
잔에 들린 술잔을 입술쪽으로 기울이며 청년은 표정을 구겼다. 술 맛이 떨어졌구나. 술잔을 내팽개치고 제 형, 정현을 올려다보는 표정이 참으로 볼만하였다지. 기생에게 물러나라 대충 손짓하자 기생은 황급히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갔고, 그는 자리에서 비틀거리고 일어섰다.
"왜." "왜, 라는 말이 잘도 나오는 것을 보아하니 여전한가 보구나.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셈인게냐." "죽을 때 까지. 조만간 죽겠지요." "죽음을 어찌 그리 가볍게 말한단말이냐. 지조없는 녀석!"
호통소리에 화연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그는 방에서 나가기 위해 정현의 옆으로 걸어가며 나지막히 읊조렸다.
"죽음을 경험하였으니 당연히 가벼운 것이 아닌지. 이 자가 나고자란 이후 역관에 어울리는 자가 아닌것 또한 알지 않던지. 형님은 의지라는 것이 있었다지만 나에겐 그 어느것도 없었지요. 이만 가시지요, 내 아무리 상것인 삼패들과 놀아난다 하여도 누구와는 달리 이곳의 예절은 지키니."
술 맛이 떨어졌다. 대문을 나섰다. 오자마자 저런 이야기를 하니, 제 아비가 무슨 말을 할지는 뻔하였다. 그래도 도술포도청이 어쩌고, 이수파가 어쩌고. 도술포도청이고 뭐고, 이수파고 뭐고, 전부 어찌 생각해도...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신경 쓸 필요도 없다. 문득 한 아씨가 머리에서 스쳐지나가자 그는 혀를 차며 대문을 나섰다. 왜 하필 이 아씨가 떠오르는겐지! 하! 설마 이 내가 그 쬐만한 아씨를 사모하는겐가? 그럴리가! 술김에 그런 생각을 하는것이겠지.
진사댁의 고명딸과 혼인했다는 색목인은 무예 실력이 출중했다 하여, 그 영지 저잣거리의 아낙네들의 입방아에 이리저리 찧어 올라가고 내려가고 반복했다. 글월은 보낼 줄 알던가, 은애하는 여인네에게 글월 하나 보내지 못하고 그리 혼인을 올렸다던가ㅡ 아아, 그렇지. 흰소리는 이리저리 올라갈 뿐, 실체 없는 것은 쉬이 사라진다.
그 집의 장자는 마치 동백꽃 같은 머리를 길러, 마치 제 아비를 그리 똑 닮았다던가. 헌데, 행실은 제 어미를 똑 닮아, 그리 소반 지어 놀고, 자수 놓고 논다지?
그 집에 부용이 그리 많다 하여, 그 집은 부용댁으로도 불렸다. 아, 그래, 아이의 아명 또한 부용이 들어가는구나. 아이는 집에 있으면 제 누이와 함께 꽃가락지 만들어서 놀았더란다. 그랬더란다.
아이는 어두워질 때 쯤이면 제 누이와 함께 강둑에서 하야로비들이 저 멀리 훨훨 날아가는 것을 그리 한참 바라봤다. 아이가 좋아하는 풍경 중 하나였다.
「누이, 저 하야로비들이 날아가는 모습이 절경이지 않습니까」
그 질문을 하며, 붉게 빛나는 하늘과도 같은 아이의 머리색은 빛났고, 말간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럼에도 푸른 그 눈은 형형히 빛났다. 아아, 그렇고나. 아이 치고는 표정이 정말로 기괴했고나. 그 질문을 하는 제 아랫 동생을 본 아이의 누이는 하회홈을 하다, 고개를 비뚝였다.
「그렇네」
가자, 집에 가자. 멀리서 대감 어른이 걱정하신다는 하인의 목이 떨어져가는 외침에 두 아이는 강둑에서 타박타박 발걸음을 내려가는 것이었다. 양 손에는 서투른 솜씨로 만든 꽃가락지가 여실히 엮여 있었다.
그 날은 조금 멀리 갔다지? 아이가 없어졌다 하는 그 소리 하나에, 머리가 붉은 사내 아이가 사라졌다며 온 집안이 그리 떠들썩 했더란다. 아이의 누이가 아이를 부르며 앙앙 우는 소리가 온 집안을 울렸다. 집 안의 아낙네들도 하인들도 이리저리 후두두두두두둑. 그 발걸음이 마치 말 발굽 소리와도 같았던가.
아이를 찾은 곳은 외딴 집이었더란다. 포도청 어르신들의 품에 안긴 아이의 시선은 제 집안 어른들이 담겼다가 그리 빨리 사라졌을 게다. 그 시야에 끝까지 남아있던 것은, 그래. 끔찍하리만큼 붉은 색이었다. 모든 것은 그래, 그리 사라져버렸다.
적색 포를 입은 대감 어른은 대문을 넘어, 마당을 달려, 문지방까지 넘어서 달려왔고나. 그 관복이 참 무거웠다지? 누가 감히 정이품 대감 어른의 장자를 건들었을꼬. 누구일까? 누굴꼬? 아이에게 곶감이 있다며 꾀어낸 건 누굴거나.
그 날이 아이를 확 뒤집어 버렸고나. 너는 나를 만들어서 죽였고나. 그 붉디 붉었던 것이 어찌 푸르게 변하리라 믿는 게냐. 고왔던 그 시절은 그렇게 버림 받았더란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날들은 그렇게 산산이 부숴져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