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이야기를 꺼냈을 뿐인데... 가, 같이 살자고? 아, 아니 물론 좋지만! 정말 기쁘지만! 안그래도 버벅거려 과부화되던 머릿속은 같이 살래? 라는 말에 완전히 혼돈의 소용돌이가 되어버렸다. 침착하자 이지현. 이건 언젠가 나올 이야기였어. 그냥 타이밍이 좀 빨랐을 뿐이야. 하지만 머리로만 알고있으면 뭐하나...
"ㄴ, 내는, ㅈ, 좋다...!"
이 이상 말을 더 하면 정말 이성이고 뭐고 날아갈 것 같아서 그대로 너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으으, 얼굴 화끈거려...
문득 갓 성인이 된 시절이 떠올라 작은 실소가 나와버렸다. 그때에는 정말 열심히였다. 아등바등 살아보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어쩌면 너도 그랬을까. 눈을 돌려 권주를 보지만 알 길이 없었다. 고개를 으쓱이고는 나도 물병을 가져와 물컵을 채웠다.
그럭저럭이라.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너는 여전하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여본다. 너가 좋아하던 것이 뭐가 있더라. 너는 감정표현이 드물어서인지 아는 것이 몇 없었다. 오랜기간 알고 지내왔지만 너무 모르는 것 같아 괜히 미안해졌다. 그때에는 내가 너무 관심이 없기도 했고 친구가 익숙치 않았으니. 남몰래 정당화를 시켜보는 지은이었다.
"그래도 요즘 경찰되기가 너무 힘드니까. 그리고 돈도 많이 받지!"
미술을 포기한 너의 모습에 괜히 씁쓸해졌다. 애써 좋은 이야기를 해본다. 아직도 그 경쟁력을 생각하면 질릴 정도다.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딱히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과거였다.
"나보다 먼저 경찰이 된 것은 조금 부럽단말이지."
그것도 설마 같은 팀일줄이야. 과거 친구가 같은 직장 동료가 된 것도 신기한데 심지어 같은 익스퍼라니 신의 장난이다.
"솔직히 조금 놀랐어- 너가 나랑 같았다니. 내가 엄청 특별하다고 생각해왔는데 조금 김 샌 느낌... 무엇보다도 나보다 멋지잖아!"
갑자기 심술이나서 툭 쏘아붙였다. 권주의 잘못은 없었다. 그냥 지은의 성격이 나쁘다고 생각하자.
가까이에서 보니 확실히 안색이 나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더랬다. 그에, 아실리아의 얼굴에는 짐짓 걱정스럽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역시 어딘가 많이 안 좋은 건가. 아니면 무슨 고민이 있나요. 가만 보면 은근히 속으로만 앓는 사람이다. 뭐, 그게 천성인지 아니면 외부 요인 탓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러다가도 제 손을 잡는 느낌에는 살풋 웃음을 흘렸더랬다. 손과 손 사이를 가로막는 검은 장갑 때문에 그 온기를 느끼지 못 하는 것이 새삼 아쉬울 정도로 손과 손을 잡고 있는 느낌은 몹시 부드러웠다. 공개 연애는 편하네. 문득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문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서하의 발걸음에 보폭을 맞추며 걸어갔다. 그러다가 살짝 뒤를 돌아보며, 장난스런 인사를 건넨 하윤에게는 적당히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언제부터 네가 이렇게 잘 웃는 사람이었지? 퇴근길의 공기는 아직 차갑겠지. 어디는 또 눈이 온다던데, 여기는 눈 소식은 없나. 그런 생각으로 올려다 본 하늘에서는 별이 쏟아질 듯 반짝거렸다.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에 흩뿌려진 별들이 마치 보석처럼 아름다웠다. 정말 신기하지, 도시인데도 시골 밤하늘 마냥 이런 절경이 펼쳐진다는 게 말이야. 문으로 걸어가며 무슨 일이 있느냐 묻는 말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입을 다물고 말을 아꼈다.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아실리아는 남는 손으로 문을 밀고 경찰서를 나섰다. 그리고 완전히 그 문과 멀어지고 나서야, 서하를 올려다보면서 가만히 입을 열었던 거다.
밖으로 걸어나가자 불어오는 것은 차가운 바람이다. 그래도, 한창 추울때보다는 많이 풀렸기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탁기가 얼거나 해서 곤란한 일은 없겠네. 녹이는 거 묘하게 귀찮으니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실리아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보였으니까. 오늘도 어김없이 성류시의 하늘은 정말로 아름답게 반짝였다. 너무 아름답게 반짝여서, 이제는 이것이 일반적인 밤하늘이 아닌가...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직도 왜 저 별이 저리도 반짝이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던가. 이쯤되면 저것도 익스파의 영향이 아닐까...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무튼, 문 밖으로 완전히 나온 순간, 아실리아에게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니냐고... 그 모습에 조용히 아실리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살짝 몸을 틀어 반대편 손을 올려, 아실리아의 푼 머리를 조심스럽게 다시 정리해주면서 입을 열었다.
"...이유를 물어보는 것을 보면, 능력을 쓴 것은 아닐테고... 그렇게 티가 났나? 나? ...미안. 걱정끼치게 한 모양이네. 너에게."
작게 한숨을 내쉬니 차가운 입김이 하얗게 튀어나왔다. 입을 다물까...라고 생각하지만, 안 그래도 그녀에게 말을 안하는 것도 있는 지금, 비밀을 더 만들고 싶진 않다는 생각을 하며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익스퍼 보안 유지부] 쪽에서 연락이 왔거든. ...적어도 내 상사는, 내가 이 사건에 크게 관여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 모양이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언제나 그랬듯이, 그 사람은 나에게 아무런 이유도 말하지 않으니까. ...그저 나에게 바라는 것은, 자신의 말을 따르는 것 뿐이니까. ...이 팀에서 꽤 지내다보니, 그런 곳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어. ...그래. 그런 곳에서 일했었지. 난."
씁쓸하게 웃으면서,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이어 침묵을 지키다가 짧게 사과의 말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