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얕게 웃는다. 저가 기억해야 할 얼굴이 하나 더 늘었다. 그리고 이름도. 항상 사람의 이름을 잘 잊고 하던 저라. 선배로써 신입의 이름을 잊는다던가 하는 불상사를 막으려 한동안 다솔의 그레이 색 머리카락을 눈에 담다, 컵을 받아들자 빈손을 거둔다. 따뜻하던 손이 금세 차게 식었지만. 다행히도 한 컵 더 가져와서. 제 자리도 아닌 남의 책상 위에 빈 쟁반을 내려놓고는 의자까지 끌어 앉는다. 다솔을 향해 몸을 돌린 채, 물그럼 바라보다 차를 홀짝인다. 입가에서 컵을 거두곤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어 낸다.
"월하라고 해요. 응. 윤 월하."
말을 끝내곤 눈을 마주하며 바라보다, 다솔이 차를 홀짝이는 모습에 방글이 웃는다. 매화 차라며. 티백이랴 향은 덜하지만 좋을 거라는 둥. 재잘 말을 이어내다 저 혼자 신나게 떠들고 있단 걸 깨닫곤 입을 다문다. 낯간지럽단 표정을 지어 보이다, 금세 다시금 웃는다.
코미키 토오야, 히라카와 토오야. 순서대로 지나간 이름이 아키오토 센하의 진짜 이름이었다. 그랬구나, 유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이어지는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CPH, 어렴풋 들어본 이름이었다. 일본에서 유명한 대기업. 그녀가 이어지는 센하의 이야기에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모든 것이 움직이는 이 공간에서 멈춘 것은 오로지 우리 둘, 길 한복판에 서있는 이들을 힐긋 쳐다보며 지나가는 이들이 간간히 있었지만 그녀는 신경쓰지 않았다. 학대, 센하의 입에서 그 말이 흐르자 유혜의 두 눈이 가늘게 흐려진다.
“ 센하..., “
애처롭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덤덤히 저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해주어야할지, 아니. 애초에 어떠한 말을 건네도 괜찮을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녀는 그와 10년을 알아오며 서로를 잘 안다고 멋대로 생각해놓고, 정작 그의 이야기는 단 하나도 알지 못했다. 웃기는 일이야, 너말이야. 유혜가 시선을 바닥으로 한 번 떨구고는 이내 다시 제 십년지기에게로 시선을 옮겨낸다.
끝까지도 파렴치한 인간들이었구나. 그 어린아이에게 능력을 써 기억을 지워버리고, 그렇게까지 자신의 소유물로 귀속 시키고 싶었던건가. 머릿 속이 달아오르는 느낌에 유혜가 무겁게 가라앉은 한숨을 내쉬어냈다. 복수라는 감정은 감히 내 스스로가 다룰 수 없는 감정이란 걸,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토오야와 센하는 다른 인간인가, 그렇다면 내 앞에 서있는 사람은 토오야인가 센하인가. 그녀가 느릿히 두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더 센하의 이름을 불렀다.
“ ...너는 어쩌고 싶어? “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었다. 그에게 질문을 되돌리다니, 하지만 그녀의 말투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 뭐라 말을 해야할까, 괜한 위로가 상처가 될까봐. 말을 아끼게 되네. 센하, 나는 실망하지 않았어. “
그녀가 흐릿히 미소를 지었다. 절교는 무슨, 어딘가 가벼운 말투로 남은 문장을 덧붙인 뒤. 그녀가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더니 다시금 밝은 미소를 지으며 센하를 바라본다.
“ 네가 토오야든, 센하든. 너는 나와 10년을 함께 한 친구잖아.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어차피 난 네 편인걸. “
범죄는 안돼, 형식적으로 우린 경찰인데. 유혜가 입꼬리를 올려내며 웃었다. 설마 나랑 절교 하고 싶은거야? 가벼운 장난을 덧붙이며. 그녀가 센하의 등을 툭툭 두드린다.
“ 소원은 원래 말도 안되는 걸 비는거야. 소원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는 없어. “
그러면서 느릿히 발걸음을 떼어내는 그녀였다. 여기서 너무 오래 머물렀어. 어차피 사무실까지 가려면 길은 한참이나 남아있었다. 대화라면 충분히 할 수 있어.
“ 힘들었겠다. “
진심이 실린 말이었다. —너도, 나도. 유혜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두 눈을 깜빡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점심시간이 주어지자 밥을 먹기 전에 근처 편의점에 들렀다. 음료수라도 하나 사 마실 생각이었는데 무엇을 마실지 고민이었다. 옆에 2+1이라고 적혀있는 탄산 음료가 있었지만 탄산 음료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2개나 사기에는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2+1이면 하나에 800원인데...”
이걸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평소에 즐겨마시던 밀크티를 꺼내들었다. 값이 좀 더 나가더라도 맛있는 걸 사자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무사히 음료수를 고르고 계산대를 향하던 도중 또 다른 시련이 지은에게 닥쳤다. 발렌타인 특별 이벤트 1+1 초콜릿 바. 평소의 초콜릿 바라면 눈길조차 주지 않을 것이었지만 이렇게 활인 행사가 있으니 그냥 지나가기 힘들었다. 뭘 먹을까 초콜릿 앞에 걸음을 멈추어 서있는 지은의 모습은 진지해보였다. 활인 이벤트는 언제나 감사한 것이었지만 이렇게 행복한 고민거리를 주고는 했다. 뭘 고를까...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지은이 중얼거렸다. 오래 고민했다가는 점심시간을 모두 쓰고 말 것이다.
키 크고, 끝이 약간 갈색인 흰 머리카락. 윤 월하 선배님. 어감이 예쁜 이름이었다. 아는 한자들을 생각해보자면 분명 이름의 뜻도 예쁘지 않을까. 머리속으로 다시 한 번 되짚어본 다솔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해야 할 이름이 하나 더 늘었구나. 다행히 다들 기억할만할 특징이 있어서 이름을 외우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다.
매화는 들어봤지만, 단순히 꽃으로만 생각했지, 차로 마셔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애초에, 그녀는 차를 마셔본 적이 손에 꼽았다. 돈의 여유 탓이기도 했고, 먹어볼 기회가 없기도 했고. 단순히 차는 쓴 맛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깊고 은은한 맛이라 방금 내심 놀랐을 정도였다. 얼마 안 남은 차를 잠시, 쟁반 위에 소리 없이 조심스레 내려놓고, 월하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 아, 괜찮습니다. 얘기, 재밌었는데요. 차 좋아하시나봐요? "
다솔은 월하의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곤 다시 컵을 들어 남은 양을 두 모금에 걸쳐 비웠다.
너는 어쩌고 싶냐. 실망하지 않았다. 10년을 함께 한 친구니 무슨 짓을 해도 네 편이다. 경찰이니 범죄는 안 된다. 설마 자신이랑 절교하고 싶은 것이냐. 소원은 원래 그런 것이니 어울리지 않는 단어는 없다. 마지막으로, 힘들었겠다. 수많은 말들이 진심과 함께 다가왔다. 나는 그 모든 말들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내용은 이해한다. 그러나 그 문장들이 어째서 자신에게 오는 것인지, 그것을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바보 같아. 한없이 착한 게 독이 될 수도 있음을 본인은 몰라? 멍청하게도."
먼저 발걸음을 옮기는 유혜를 보며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평소의 능청스러움이 아닌 까칠한 모습을 보이며, 진심과 함께 온 그 모든 말들을 향해 매정한 말로 대꾸하고 만다. 보통은 실망하기 마련 아니었던가. 걸어가면서 시선은 바닥에 내리꽂은 상태로 복잡한 기분에 휩싸였다.
"...범죄는 안 된다 했지? 그래, 잘 알고 있어. 그래서 예전 사건 때 저지 당했던 거겠지. 나중에 코미키 가에게도 복수해야해서, 그 일을 잊어버리게 하려고 팀에 선물을 돌린 건데...하하, 것 봐. 나도 죽일 놈이라니까."
계속 스스로를 조롱하고 깎아내렸다. 어쩌면 지금껏 느껴왔던 위태로움의 정체는 이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코미키 텐마를 향해 복수의 칼날을 갈면서 거만하게 굴지만, 사실은 저의 분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다. 그런 모순된 생각들이 혼란을 일으킨 것이니라. 바닥을 여전히 내려다보다가 결국은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그래, 이것이 저의 분수인 것이다.
"...미안해."
쓸데없는 이야기로 기분을 망쳐버렸네. 라고 힘없이 덧붙인다. 분명히 소원권을 쓰게 하려고 만난 건데 어쩌다가 나는 내 과거를 전부 토로하고 있는 것일까.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아, 오늘 밤도 술을 찾아야하는 건가. 기분이 엉망일 때는 술을 찾아서 언제나 도피해왔다. 뒤늦게 몰려오는 후회감. 그건 어째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