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약속성 버리면 나한테 남는 게 있긴 해요? 제이가 메이비의 알만하다는 듯한 혀차는 소리에 깔깔 웃었다. 당신이 곤란할 게 어디 있다구요. 내가 쓰러지면 챙겨주긴 할 건가봐. 제이가 부드럽게 숨을 죽여 웃었다. "왜, 나 쓰러지면 당신이 업어주면 되잖아." 설마 이젠 사수 아니라고 매정하게 굴 건 아니죠? 남은 커피 전부로 목을 축인 뒤 소리없이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음, 난 정말 익스파라도 없었으면 이 험한 세상 살아가기도 힘들었을거야. 그치?
"헉, 오늘도 왔어요?" 제이가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의자 위에 두 무릎을 끌어모았다. 남자? 여자? 능력은 어떤거래요? 아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어차피 만날 거잖아. 다들 잘 지냈나 몰라. 조금씩 기억나는 인영들을 기억으로 더듬던 제이는 다행이 제 자리가 무사하다(?)는 말을 듣고서야 날숨을 흘렸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늦기 전에 서장님한테 인사도 드려야 하는데. 서하 씨랑 하윤 씨한테도. 서하 씨는 여전히 깨가 떨어지나? 다른 커플들은 어떠할까. 내가 없는 동안 뭐가 변했을까. 그걸 내가 아는 날은 올까. 시덥잖은 걱정과 상념을 전부 밀어내고서 제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두 손으로 툭툭 털며 정리하는 모양새를 한다. "뭐어…, 우리 사무실은 조용하지 않은 게 매력이니까." 잠잠하다 싶으면 또 사건사고 처리하러 나가고, 툭하면 삐지고 싸우고 그러다가도 웃고 울고. 그런 거지. 사람은 외로워서 어쩔 수 없다나요, 뭐라나. 제이가 빙글 웃으며 메이비를 올려다본다.
"오늘은 그냥 인사차 왔어요. 당신 얼굴이라도 보고 가서 다행이다. 그래도 몸은 챙기면서 해요." 제이의 걱정어린 잔소리는 아마 당신에게 익숙할지도 모른다. 당신은 달리는 법만 알지 멈춰서 쉴 줄은 모르니까. 퓨즈가 없다구요. 가끔은 그런 당신이 염려스러워요. 나보다 젊은데, 많이 살아야지. 제이가 발끝을 살짝 올려 손을 쭈욱 뻗고는 당신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린다. "또 봐요. 음, 아마 내일?" 서장님한테도 연락 해야 하니까. 오늘은 짐정리가 바빠요. 윽 청소도 해야하구, 할 게 너무 많아요. 제이가 허공에 손을 휘적이며 당신을 지나쳤다.
지독한 열병 끝에 눈을 떴을 때에 보인 것은 익숙한 방 천장이었다. 성류시에 있는 내 집 내 방의 천장. 지난 4년간 눈을 뜰 때마다 지겹도록 봐온 천장.
밋밋한 벽지가 발린 천장을 보며 지난 날을 되짚어본다. 분명, 바람이 매섭던 날 바깥에서 밤을 보냈다가 정신을 잃고 찾으러 온 프레이에 의해 병원으로 실려가고...
중간에 상태가 나아져 집으로 돌아온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 뒤로도 한 이틀은 잠만 잔 것 같은데.
"아-...크흠, 흠."
무어라 말을 해보려다 목이 깔깔해 관뒀다. 물이라도 마실까 싶어 일어나려는데 침대 옆 협탁에 이미 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언제든 마실 수 있도록 그들이 놓아둔 모양이었다.
미지근한 물 한잔을 천천히 마시고 일단 폰을 집어들었다. 별도의 연락은 없었는지 슥슥 넘겨보다가 문득 위화감을 느낀다.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진 듯 한' 위화감. 명치 깊숙한 곳을 긁듯 느껴지는 불길한 그 감각.
그 불안감을 떨쳐버리고 싶어 연락처를 죄다 뒤져본다. 한명 한명 넘겨보다가 무언가 공백 같은 걸 느끼지만 그게 무언지 알 수가 없다. 연락 기록도, 갤러리도, 전부 뒤져보지만 알 수가 없다.
나 무언가 정말 중요한 걸 잃어버린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어. 모르겠어.
기억 나지 않아.
"...아, 아니야...아닐거야...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떨리는 손에서 폰이 툭 떨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떨림은 손에서 시작해 팔을 타고 전신으로 퍼진다. 이내 온 몸을 와들와들 떨며 일어나 방을 나갔다.
조용한 집 안, 불 꺼진 거실. 평상시와 같은데 이 속에서 무언가 없어진 것만 같다. 없어졌는데 그게 뭔지를 몰라 미칠 것 같다.
거실, 부엌, 욕실, 서재, 현관, 침실. 떨리는 다리를 이끌어 곳곳을 돌아다녔다. 고작 집 안을 돌아다니면서 몇번을 넘어졌는지 모르겠다. 넘어져서 아픈 줄도 모르고 집 안 전부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돌아다닐수록, 희미한 기억을 붙잡을수록 그 정체는 점점 멀어져만 간다. 멀고 멀어져 나를 '떠나갔다'.
더는 일어날 힘도 없어 부엌과 거실 사이에 주저앉았을 때, 나는 무심코 내 귀를 만졌다. 일종의 버릇이었다. 귓볼에 달린 귀걸이를 만져 안정을 찾는. 그러나 손 끝에는 잡히는 것이 없었다. 구멍 뚫린 귓볼만이 손가락 사이를 맴돌고 있었다.
"...아."
아아. 그 하나의 부재로 나는 내가 잃은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이 내게 얼마나 소중했는지, 얼마나 중요했는지도 잔인할만큼 확실히 깨달아버렸다.
다신 돌아오지 않을 것이란 사실이자 현실도.
"......"
그것을 깨달은 후, 나는 목놓아 울었다. 불안감의 정체를 안 뒤에 찾아온 것은 그저 쓰디 쓴 아픔 뿐이었기에. 이미 너덜한 마음을 다시 죽죽 그어내리는 아픔에 나는 울고 또 울었다. 흘린 눈물에 잠겨 숨이 멎어버릴지도 모를 만큼 눈물을 흘리고 흐느낌을 흘렸다. 혼자뿐인 집 안에 내 울음소리만이 가득 채워지고 또 사라져간다.
얼마나 울었을까.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게 되었을 무렵 나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다리가 제대로 서지 않아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기었다.
가는 길을 눈물로 장식하며 어두컴컴한 부엌으로 들어갔다. 빛이 없어도 어디에 뭐가 있는진 몸이 기억하고 있어서, 나는 도구꽂이로 손을 뻗어 날붙이 하나를 뽑았다. 어둠 속에서 날붙이가 시퍼렇게 빛나며 그 날카로움을 뽐낸다. 나는 잠시 날을 내려다보다가, 그것을 두 손으로 쥐고 내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인 채 앞으로 쓰러졌고 어두운 부엌엔 선명히 붉은 웅덩이가 생겨났다.
마지막 눈물 몇 방울은 붉은 웅덩이로 흘러들어가고 이내 멈추었다.
모든 것이.
. . .
담배 연기가 그림자 드리운 손가락 저 편 모든 것을 놓아버린 아침
깨달았지 내가 투명해져 가는 것을 그대 향한 마음이 내게 색을 입혀주고 있었음을
하얀 세계로 사라져 버려야지 달빛도 닿지 않고 햇빛 비쳐들 길도 없는
하얀 세계로 사라져 버려야지 잠들어가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 ...... ......
-
The End.
//그동안 함께한 스레주와 여러분 모두 감사했습니다. 정말 고마웠고, 즐거웠고, 잊지 못 할 거에요. 잘 있어요.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