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년의 진한 우정이라는 표현에 질린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면서 낮은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금세 능청스러운 무표정으로 돌아와서 "그냥 알고 있냐는 의미야"라고 놀리듯이 덧붙였지만. 덧붙인 말 그대로, 별 의미 없이 아무렇게나 던진 소리다. 농담 삼아서. 십년의 진한 우정이라...아, 그렇기는 그렇다. 벌써 10년이네. 성재를 통해서 이 녀석을 만난지가. 시간도 참 빠르다. 새삼스레 그런 생각도 든다.
반응이 시큰둥한데 고마운 게 맞냐는, 놀리는 것 같기도 한 말이 건네져온다. 입꼬리를 생긋 올린 그 밝은 미소를 향해 차분한 쓴웃음을 옅게 지었다. 비교적 어렵사리 꺼낸 내 소원에 관한 이야기ㅡ아, 그런데 역시 소원이라는 단어는 안 어울린다ㅡ에는 소박하다는 평을 남긴다. 누가 뭐래도 적어도 자신에게는 10년을 알고 지낸 아키오토 센하라면서. 그 말을 들으며 부드럽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말없이. 그래, 저런 반응이 정상이겠지. 한국에 오기 전의 나를 모르니까. 내가 어떤 생각을 품고 다니는지 모르니까.
뭐, 이와 관련해서는 각설하기로 하였다. 유혜는 큰 유리창 너머로 바깥이 훤히 보이는 자리로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분명 저런 자리가 인기가 좋은 곳이겠지. 어느 자리든지 상관하지 않았던 나는 따라서 걸어갔다. 자리에 앉고 메뉴판을 펴니, 주문할 음식에 관한 화제로 대화는 전환되었다. 쇼가야키 정식을 시킬 거란 십년지기의 말에 팔짱을 낀채 '흐음'거리면서 그녀가 들고 있는 메뉴판을 넘겨다보았다. 유혜가 손가락으로 톡톡 치는 글자는 당연히 쇼가야키 정식이었다. 당연하겠지만 모국어도 보인다. 어딘가 묘한 느낌이네. 그런 생각도 해보면서 유혜가 들고 있는 메뉴판을 계속 훑었다.
"그럼 나도 같은 걸로...는 농담이고 나는 가라아게 정식. 나란히 정식 먹자고. 든든하게."
옅은 미소를 잠시 지으면서 능청스레 농담을 던졌다가 그 뒤로는 무덤덤하게 중얼거리듯이 내가 시킬 메뉴를 읊조렸다. "쇼가야키 정식과 가라아게 정식, 주문하고 올게"라고 무표정하게 말을 던지고는 카운터로 향했다. 직원을 향해 간단하게 주문을 마치고는 자리에 돌아왔다.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함께하지 말자라니, 유혜가 키득 장난스레 웃으며 대꾸한다. 10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유혜에게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남들의 10년과 저의 10년의 무게는 생각보다도 무거웠고, 사실상 지금 제 곁에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버티지 못 했을 시간이었으니. 유혜가 옅은 미소를 삼켜낸다.
“ 좋아, 저녁은 든든하게 먹어야지. “
맛있겠다, 라는 짧은 한마디를 덧붙이며 유혜가 방긋 미소를 짓는다. 컵라면을 벗어난 게 얼마만인지, 레트로 식품을 벗어난 게 얼마만인지! 비록 식당에서 먹는 가정식이었지만 가정식이 그토록 그리웠던 유혜였다. 집에서는 직접 밥 하나 지어먹기가 그리도 귀찮다보니, 어느새 배달업계의 vvip가 되어 있었단다. 주문을 하고 온다는 센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던 유혜가 자연스레 젓가락과 숟가락을 꺼내 각각 저와 센하의 자리에 세팅한다. 이쯤되면 버릇이 아닐까—. 라는 생각과 함께.
“ 그나저나 성재 안만난지도 꽤 됐네. 너는 아직 연락 많이 해? “
사회로 나오면서 조금 데면데면해진 면이 없잖아 있었단다. 센하와 저는 같은 대학을 나왔으니 그렇다해도, 성재와는 거의 연락이 끊긴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 학교 졸업 이후로는 셋이서 만는 일도 드물었지. 오랜만에 성재 생각이 난건지 유혜는 센하가 자리에 채 앉기도 전에 질문을 던진다.
“ 언제 셋이 만나서 놀아야 하는데. “
추억에 젖은 한마디였다. 가끔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순간도 있는 법이니. 유혜가 컵에 물을 따르며 중얼이듯 내뱉는다.
단수가 풀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샤워실로 향하고, 덕분에 자리가 충분했을터였던 샤워실에선 보기 힘든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였다. 병원의 샤워실이 조용해진것은 새벽 즈음. 모처럼이니 떡진 머리카락이라도 감을 생각으로 발을 옮겼다.
대충 웃통을 벗고 세면대 앞에 선다. 그러다 무심코 눈 앞의 거울을 보았다. 평소에는 가려져 드러나지 않은 흔적 -길이 약 9cm의 목젖과 목 오른쪽을 잇는 기다란 창상- 은 되도록이면 의식하지 않으려 했었던데다 집 안 욕실은 이미 거울이 떼어져 있어 꽤나 오랜만에 보는 것이였다. 더 이상 보기가 거북해져 금새 거울에서 시선을 돌린다. 빠르게 씻고, 빨리 나가는거야. 그래도, 따뜻한 물에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는 것은 나쁘지 않지. 수건으로 얼굴을 박박 문질러 닦다, 고개를 들었다.
낮설다. 라는 감상이 거울을 본 감상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처음 보는 얼굴인 것 처럼, 아니 그보다는 골짜기 깊숙히 무언가의 불쾌함이 느껴질 정도로 보기가 껄끄러운 느낌.
이런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하는 걸까. 병원에 가더라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는데. 자신의 얼굴조차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게 몇년째인지.
카운터를 향해 등을 보이며 자리로 돌아와 앉기도 전에 십년지기에게서 질문이 하나 건네져왔다. 무슨 이야기인가 싶었더니 성재에 관한 이야기였다. 대답하기 전에 우선 자리에 앉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내 앞쪽 상이 눈에 들어왔다. 벌써 숟가락과 젓가락이 나란히 올려져있다. 건너편 끝ㅡ이라고 해도 거리가 긴 것도 아니지만ㅡ을 보니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유혜가 내가 주문하러 간 사이에 세팅해놓은 것이다. 세심하다고 해야할까, 뭐라고 해야할까.
"간혹 만나기도 하지. 아무래도 대략 4년동안 그 녀석 집에 얹혀 살았다보니까. 오히려 연락을 끊는 쪽이 힘들다고 할까."
담담하게 답하면서 그 사이에 대령온 물통과 컵을 지그시 응시하다 컵을 각자의 자리에 놓고 물통의 뚜껑을 열어 적당한 속도로 따랐다. 먼저 유혜의 컵을 채우고, 내 컵은 다음 순서였다. 딱 75퍼센트 정도의 비율을 맞추는 것이 고집스러워 보여도 어쩔 수 없다. 결벽증은 아니지만 이런 건 어째선지 맞추고 싶어진다니까. 물통을 도로 상 위에 올려놓고 75퍼센트 물로 채워진 내 컵을 오른손에 들었다. 왼팔은 팔꿈치를 상 위에 대충 올리고 있다. 그러고 보니 유혜는 경찰대를 졸업한 이후로는 나와도 연락이 없다시피 했더라. "너도 언젠가 연락해보든지. 전화번호는 그대로니까"라고 무심히 덧붙여본다.
"셋이서라, 추억팔이는 되겠네."
부드러운 미소를 소탈하게 지으면서 그리 대답하고는 컵을 기울여 시원한 물을 살짝 마셨다. 하기는 어렸을 때는 자주 놀았었다, 셋이서. 그 때의 기억을 살짝 떠올려보기도 한다. 컵을 입에서 뗀 나는 평소의 나른한 무표정으로 돌아와있었다.
"그 녀석 근황 들려줄까? 어렸을 때부터 글을 많이 쓰더니, 어느새 소설가로 데뷔하셨더라. 아직 그렇게 유명하진 않지만, 그래도 조금씩 주목을 받고 있는 모양이야."
실소와 함께 나지막히 읊조리고는 컵을 도로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아까처럼 팔짱을 끼었다. 무심코 카운터를 옆눈으로 힐끔. 나도 배고프긴 배고픈가보다.
나도 연락 좀 걸 걸, 유혜가 후회스러운 듯 뒷목을 만지작 거린다. 셋이서 한창 놀러다닐 때는 정말 즐거웠더란다. 하긴, 그나이대 애들에게 즐겁지 않은 일이 있겠냐만. 도움도 많이 받았고, 고등학교 때에 접어서는 즐거운 일도 많았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냐 묻는다면—
“ 아, 진짜? 언제 한 번 연락 넣어봐야겠다. “
허투로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근시일내에 다시 연락을 넣어봐야겠단 생각을 품으며 유혜가 컵을 입가에 가져간다. 목이 차가워지는 감촉에 정신이 바짝 드는 느낌이었다.
“ 많이 친했으니까. 게다가 너랑은 벌써 10년을 봐온데다 직장도 같잖아. “
신기한 인연이었다. 십 년을 알고 지낸 친구가 엄청난 확률로 익스퍼였던데다 직장도 같은 곳이라니. 아마도 얘는 미래에도 만나고 있을 거 같단 생각이나 품으며 힐금 카운터를 바라본다. 배가 점점 더 고파온다.
“ 진짜? 책 냈나보네? 완전 잘 됐다! “
세상에, 유혜가 두 눈을 크게 깜빡인다. 와, 소설가라니. 언제한번 책을 찾아봐야겠단 생각이 문득 든다. 그래도 점점 주목받는 신인작가가 되어있다니, 어느샌가 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둘 변해가고 있었다. 과거 교복을 입고 ㅡ센하는 사복이었다.ㅡ 셋이서 웃고 떠들던 기억이 지금의 우리와 오버랩된다.
한참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점원이 각각 가라아게 정식과 쇼가야키 정식을 들고와 센하와 제 자리 앞에 놔주었다. 먹음직스러운 외관을 보며 방긋 웃어대던 유혜가 찰칵, 사진을 몇 장 찍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