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이나 앉아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따끔거리는 감각이 기묘하게 멀게 느껴질 즈음. 자신을 향해 인사를 하는 그를 보았습니다. 진정해요. 의식하고 한 마디 한 마디를 신경쓰는 거예요.
한동안 켜지 않다가 켰더니, 시야가 어지럽습니다. 약간 인상을 찌푸렸다가 미간을 손으로 짚어 펴고는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안녕하세요. 현호군. 보시다시피 춥기는 하지만 딱히 불편하진 않아요." 눈을 얻어맞기는 했지만.. 라고 중얼거리며 어깨에 내려앉은 지 오래된 듯 밑부분이 살짝 녹아 젖은 옷 위의 눈을 살짝 털어냅니다. 그리고 현호의 어깨 위의 패밀리어를 바라보더니 그쪽은 당신의 패밀리어? 라고 물어봅니다.
확실히 오팔아이를 켜면 의식하지 않는다면 지배자답게 약간 말투부터가 달라지는 걸까요? 현호는 소중하다는 듯 품에 안았다고 표현하긴 했지만-실제로도 소중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서도.- 그녀는 검을 거의 무신경할 정도로 내동댕이치듯 내려놓고는 그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새파랗게 산 날이 그들을 비추었을지도.
안녕하세요, 현호군이라는 인사에 소년은 가볍게 다시금 인사를 되돌려주듯이 사화를 한손으로 받치고 세연을 향해 목례를 한번 더 해보인다. 미간을 짚는 세연의 모습을 느릿하게 깜빡이던 시선을 돌려내고 어깨에 내려앉아서 녹고 있던 눈을 털어내는 것을 차분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소년이 경계의 눈빛을 보이는 사화를 조심스럽게 추슬러서 제 팔 안에 안아들었다.
"날이 아직 쌀쌀합니다만. 눈을 맞은 채로 꽤 오랫동안 계신 모양입니다. 그렇게 얇게 입고 오신 것은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이세연양."
사화를 품안에 안고 있다가 잠시 바닥에 내려놓은 소년은 자신이 걸치고 있던 가디건을 벗어서 세연에게 한발 가까이 다가가서 가디건을 조심스럽게, 닿지 않도록 신경쓰면서 몸에 배인 배려와 의식하지 않은 깍듯한 친절함으로 그것을 젖은 세연의 옷 위에 천천히 걸쳐준 뒤에 발치를 맴돌면서 귀찮게 구는 사화를 다시 안아들고 그 발에 묻은 눈을 털어내고는 천천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예. 사화라고 합니다. 평이하고 차분하게 높낮이가 일정한 목소리로 말한 뒤 바닥에 내동댕이치듯이 내려놓은 검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세연양의 지팡이인데."
새파랗게, 자신과 세연을 비추는 검날을 응시하던 시선을 느릿하게 한번 깜빡이고, 소년은 한호흡 말을 끊고 세연과 시선을 맞춘다.
"저리 두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쓸때없는 참견이라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라고 덧붙히는 것도 잊지 않고 소년은 저를 올려다보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되려, 무심하리만치 차분하게 응시했을 뿐.
"건강에 안 좋은 일이지만, 딱히 하지 않을 이유를 찾지 못해서 그러니까 말이지요." 건강하지 않기를 바라는 듯한 건조한 목소리였습니다. 그리고 사화라고 불린 고양이를 바라보다가 너무 오래도록 쳐다보면 공포에 질릴지도 모를 일이니. 라고 중얼거리고는 조금 편하게 바위에 기대고는 그가 말하는 것을 좀 더 기울여 들어야 했습니다. 심한 상태에선 기울여 들여야 합니다. 접근해서 가디건을 둘러주자. 그걸 만지작거리면서 잠깐 침묵했습니다. 따뜻하네. 라고 작게 중얼거리고는 검에 관해서는 뭐라 말할 건 없었습니다. 본인의 것이었으니 가지고 가야겠지요. 실려 있을 거예요. 실려있지 않는다면 존재조차 잊힐 지팡이인 것을.
"그렇던가.." 내 지팡이였지. 라고 느릿하고 작게 중얼거리고는 지팡이를 집어들어 검집에 꽃아넣으려 합니다. 스릉 하고 들어가는 소리가 선명했습니다.
"어쩐 일로 이쪽까지 온 건지 궁금해지네요." 패밀리어를 위해서? 혹은 산책이려나요. 라고 말하면서 차가운 입술을 열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어쩔 수 없죠. 일단은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는 걸요.
애초에 월하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는 자기 자신이니까요. 가장 싫은 존재도 자기 자신이지만... 그러니까 방아쇠를 누르면 흑역사 삭제+가장 싫은 사람도 같이 삭제=시너지라는 느낌. 흑역사라기보다는 트라우마겠지만(비설 통과되는 걸 기준으로 합니다) 본인이 흑역사로 생각하니까
건조한 세연의 목소리에 답하는 소년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이하고 차분할 뿐이였다. 감정기복이 적은, 조용하고 담담한 목소리. 세연의 목소리와는 상반되어있다면 상반된 목소리였다. 제게 매달리듯이 기어오르는 사화를 어르듯이 달래면서 소년은 자신의 패밀리어의 귀와 귀 사이를 가볍게 손을 구부린 상태에서 쓰다듬어준다. 괜찮아. 나직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도 방금 전에 중얼거린 목소리와 다를바 없었다. 세연을 바라보며 소년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따뜻하네,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어깨를 천천히 으쓱이고 세연이 검을 잡아 검집에 꽂는 것까지 소년은 이미 익숙해져버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스릉, 하고 서슬퍼렇던 검날이 스치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단지 제게 익숙한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였다.
"패밀리어를 위해서임과 동시에 산책이라고 하면 이상합니까."
이쪽으로 산책을 자주 나옵니다. 덧붙히면서 제 가디건을 걸친 세연을 보고 소년은 한호흡을 끊었다. 차분하고 고요한 눈동자가 아래를 향했다가 이내 소년은 사화를 자신의 어깨 위에 올리며 천천히 몸을 낮춘다. 어려운 사람. 다른 기숙사지만, 동급생이면서 소년이 파악하기 힘든 타입은 몇 되지 않았다. 눈을 바라보고 있다고 한들, 감정을 파악하기 힘들다. 소년은 몸을 살짝 낮춘 채, 느리게 입을 열었다.
"무엇 하나 바꿀 수 없으니까. 그렇다. 외엔 말하긴 그렇죠." 어깨를 으쓱이면서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거든요. 라고 여전히 건조하게 중얼거리고는, 그런 반면 거짓말 굉장히 많이 하고 있잖아요. 란 생각을 떨쳐내려 하지만, 사실은 자기를 해하려고 앉아있었을지도 모르죠. 거짓말같나요? 란 소리가 후훗 거리면서 들린 기분이었습니다. 현호의 대답을 듣고는 고개를 부드럽게 저으면서
"이상하지는 않아요. 그저.. 좀 더 깊이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희미한 표정을 띄웠습니다. 금방이라도 바람에 흩어질 듯 옅기는 했지만, 의미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낮춘 몸을 올려다보며 그의 질문에 여전히 건조하게 답했습니다.
별 일 없는 이상, 그것은 식까지 이어질 것이었습니다.
"그건 그렇지요. (이대로 있다간)얼음동상이 되어버릴 거예요." 파랗게 질린 입술하며, 손끝이 얼어붙는 기분이며. 충분히 자기를 해쳤습니다. 참으로 다양하네요. 비꼬는 듯한 소리를 무시하고는 사각사각하게 녹았다 언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손끝으로 집으며 순순히 인정하고는 바위에 손을 짚고 일어서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