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긋한 발걸음으로 서에서 나오는데 금방 유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때 들었던 생각을 말해보자면, '늦지 않았네' 정도였다. 저 녀석은 고양이ㅡ사실 그렇게 달가운 동물은 아니다ㅡ를 한 마리 데리고 지내고 있어서 그 때문에 조금 늦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는데 아니었다. 뭐, 그렇게 생각한 것 자체가 심심해서 해본 아무 생각이니까. 그냥 내 이름을 부르면서 손을 흔드는 그녀를 보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다. 인사를 나누고 들려오는 내 말에 대한 대답에 능청스럽게 무표정으로 대꾸했다.
"잘 생각했네. 내가 사주는 밥은 귀하니까."
근거없는 소리다. 그냥 농담식으로 무게없이 던진 소리에 가깝다. 우리 둘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주고받은 말은 없지만, 분명 근처에 맛집이 많으니 걸으면서 찾아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천천히 걸어가다가 곰곰히 생각하는 것 같던 유혜가 '생각해봤는데'라며 운을 떼며 원하는 메뉴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생각보다 광범위한 메뉴였다. 일본 가정식. 조금은 예상 못하기도 한 주문이었기에 나는 반사적으로 옆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게 되었다. 저 천진한 미소를 보니 진심인가보다. 뭐, 이런 걸로 거짓말을 치는 녀석은 아니었지. 자신이 그 주문에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내가 별로라면 다른 걸 먹자면서 치킨과 고기집을 말해보는 모습을 보다가 헛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패자가 뭘 바라냐고 했던 내 말 기억하지? 그래, 좋네. 일본 가정식. 적당히 일식 전문점에 들어가면 되는 걸까."
아니면 자세한 메뉴를 말해보시든지, 라고 무뚝뚝한 분위기로 덧붙이면서 자신도 신호등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은 어느새 어둑해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저 신호등의 빨간 불빛이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였다. 만일 아직 하늘에 노을이 남아있었다면 어땠을까. 라고 쓸데없는 생각도 해본다. 저 빨간 빛은 조금 존재감이 약해졌을지라도 하늘 자체는 예뻤을 것이다. 그런데 황혼이란 끝을 이야기하는 걸. 음. 여전히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십년지기는 갑자기 저번 사건을 언급하면서 분신 15명은 처음이어서 죽는 줄 알았다고 하였다. 저번 사건이라...
"만약에 네가 초등학생이었다면 저번 사건 때 분신 15명을 만들고 말았다. 죽는 줄 알았다. 참 재미있었다. 다시 해보고 싶다...라는 식의 일기도 적을 수 있었을텐데."
사차원적인 분위기로 무게없는 말을 내뱉고 잠시 큭 웃었다. 초등학생의 일기 끝에는 그것이 어떤 내용이었는지와 무관하게 언제나 '참 재미있었다' 같은 말이 붙더라고. 그 사이에 그 존재감 강하던 빨간 불빛은 자취를 감추고, 바로 아래의 녹색 불빛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바뀌었다. 먼저 발걸음을 내딛는 십년지기 친구를 보고 뒤늦게 따라 발걸음을 옮기면서 다시금 바로 옆에 섰다. 태평한 무표정으로 말없이 걷다가 나도 모르게 입을 열어 나지막히 읊조렸다.
"...그러고 보니 그 사건 때 난 머리랑 배를 맞았더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오른팔도 잡혔던 것 같았는데, 그건 아마 너였던 것 같아. 틀렸나?"
잡힌 직후 왁하는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난 왜 이런 말을 따라 꺼내는 것인가. 왜 버터쿠키와 다루마를 각자에게 선물했는데.
"...아아, 쿠키는 맛있게 먹었냐?"
급하게, 그러나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면서 화제를 돌렸다. 그 복불복 버터쿠키의 이야기로.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유혜가 천연덕하게 대꾸했다. 으음, 일본 가정식이라고 말은 던져놓긴 했다만 정확한 메뉴는 정하지도 않고 무작정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유혜였다. 지금 생각나는 건,
“ 이 근처에 전문점이 있으니까, 거기로 가자! “
한 번 가봤던 곳, 인테리어도 괜찮고 분위기도 예뻐 기억에 남는 곳이었다. 다만 그곳에서도 혼밥을 했던 기억이 문제이긴 했지만. 뭐 어때? 요즘 혼밥 정도는 다들 하는 거 아냐?
“ 나 그때 진짜 쓰러질 뻔 했다니까. 이왕이면 앞에 오늘은—으로 시작하는 게 좋겠네. “
무게 없는 말을 장난스레 받아치며 유혜가 넌지시 미소를 짓는다. 초등학교 때 일기는 모두 오늘은—으로 시작하더라고. 중학교 때 일기는 글쎄. 없어서 모르겠네. 아니, 버렸던가? 추워, 라는 짤막한 말을 내뱉으며 유혜가 외투를 동여맨다. 목도리라도 매고 올 것을 급히 나온다고 후드티에 외투만 입은 게 화근이었다. 머리도 묶어 목이 휑한건지, 오른손으로 제 뒷목을 매만지며 유혜가 다시금 입을 열어낸다.
“ 아..., 기억하고 있네. 기억할 줄 알았다면 어디 한 대 때릴걸.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우선 막아야겠단 생각만 들었지 뭐. “
용케도 나라는 건 기억하는구나, 제 배와 머리를 가격한 사람이 누구인진 기억 안나는거야? 유혜가 장난스레 웃으며 대꾸한다. 그리곤 쿠키는 맛있게 먹었냐는 센하의 질문에 유혜가 웩, 하는 소리를 내며 후우 숨을 내쉰다.
“ 솔직하게 말해, 너가 준 쿠키 중에 버터쿠키는 없었던거지? 나 그거 먹고 진짜... “
차마 제 십년지기의 정성이 들어간 —어쩌면 의도적으로 정성을 배제했을— 쿠키에 대해 혹평을 남길 수는 없었기에 유혜가 입을 다물어버린다. 생생한 그날의 기억, 맛잇게 한 입 베어물었다가 물만 잔뜩 먹고 왔다지요.
“ 그래도 그 선물은 귀여웠어. 그, 눈을 하나 칠하고 소원을 빌고, 소원이 이루어졌을 때 남은 하나를 칠하면 된다고 했던가? 눈을 두 개 다 그리는 날이 왔으면 좋겠네. “
센하는, 빌 소원 있어? 가볍게 질문을 던지며 유혜가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러는 그녀에게는, 빌 소원이 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