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 말 그대로 먼 치킨을 뛰어넘어 정말로 위험한 능력이지요. 과거 성류시에는 그런 힘을 쓴 익스퍼도 있었답니다. 지금은 없지만 말이에요. 다만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익스파를 분석한 자료는 남아있고, 그것은 아직도 쓰이고 있답니다. 리크리에이터로서 말이에요. 그리고 이야기의 중심이 되어서 R.R.F는 그 힘을 노리고 있고, 서하는 위키의 데이터를 보면 알겠지만.. 서하 역시 그 힘과 관련해서 성류시로 내려온 상태지요.
나츠미와의 증거 모으기는 며칠 후에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로 하였다. 그 녀석, 아직 성류시에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오자마자 그런 진지한 이야기하기에도 좀 그런 면이 있으니까. 아, 5년 전 사건의 범인을 잡았다는 이야기는 꺼냈다. 예상대로 나츠미는 놀랐다. 그런데 '센하, 사고 칠 뻔 했지, 그 때?'라고 진실을 꿰뚫은 건 조금 아팠단 말이지...그러고 보니 팀원들에게 사과의 의미로 복불복 버터쿠키와 다루마를 선물했는데.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무표정인채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성공적이었으려나."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 일에 관해 완전히 잊어줬을지는. 그런데 웬만하면 성공했으면 좋겠다. 그야, 아직 마치지 못한 복수가 있으니까.
그건 그렇고, 오늘은 비번인데 딱히 할 짓이 없다. 방의 침대 위에서 이불을 가지고 뒹굴다가, 책상에 앉아서 나츠미와 이야기할 증거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다가, 끝마치지 못한 조립 작업을 완성해보다가, 음료수를 꺼내서 마셔보다가...여러 뻘짓들이나 하다가 결국은 다시 침대 위로 돌아와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고 있다. 그러다 문득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얼마나 되었을까.
"6시 반인가."
어느새 저녁시간이네. 그렇게 생각하니까 뒤늦게 허기진 감각이 느껴졌다. 좋아, 이제 슬슬 저녁을 먹어야겠다. 어떻게 떼울까. 냉장고에서 적당히 꺼내서 먹을까, 아니면 편의점에 들러서 아무거나 사 먹을까. 혹은 맛집에 가서 먹을까?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 뇌리에 어떤 한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그러고 보니까 전에 스키장에서 유혜한테 밥을 한 끼 사주기로 했었지. 소원권으로. 내가 알기로는 그녀도 오늘 비번이다. 뭘 먹을지도 모르겠는데 잘 된 일이다. 왜냐하면 메뉴는 그 녀석이 정하기로 했으니까. 스마트폰을 집어들어 연락처 목록을 뒤적거리다가 천유혜라는 이름을 찾고 문자를 보냈다.
[야, 좋은 비번날.] [나는 친절하니까 알려주는 건데] [소원권 오늘이 만기일이다.]
어딘가 악마스러운 문자지만 아무래도 좋다. 답은 정해졌다는 듯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옷을 챙겨입었다. 아, 배고프다.
아, 배고파. 짧은 중얼임이 유혜의 목을 타고 흐른다. 시계는 이미 6시를 지나 있었고 오늘은 비번 근무일이었다. 어제 밤을 새고 그 무거운 몸을 이끌어 잠을 늘어지게 자다가 일어난 지 겨우 두시간이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와아, 행복해. 그림자가 드리운 눈가를 박박 비비며 유혜가 찌뿌둥한 몸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켠다. 오늘 저녁도 컵라면인가? 라는 대답이 뻔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유혜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외투 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전화를 꺼낸다. 익숙히 휴대전화를 쥐며 다시금 침대로 몸을 던져내자, 문자 한 통 들어오지 않던 황량한 휴대전화 액정에 익숙한 이름이 떠오른다.
“ 오늘까지였어!? “
아차, 목소리가 너무 크게 나와버렸다. TV앞을 어슬렁거리던 나비가 그 도도한 발걸음을 옮겨 유혜의 침대 앞으로 걸어온다. 절레절레 손을 내저으며 나비의 머리라도 한 번 쓰다듬으려 했건만 나비는 곧바로 제 장난감이 있는 거실 구석으로 발걸음을 돌려버린다. 나비야아..., 집사의 구슬픈 목소리만이 나비의 이름을 붙잡는다. —하기야 센하와 유혜가 스키장에서 내기를 한지도 꽤나 많은 시간이 지났지. 유혜가 곰곰히 무언가를 생각하며 휴대전화의 액정을 툭툭 쳐낸다.
에잇, 유혜가 통화버튼을 꾹 눌러버린다. 액정 위로 선명히 떠오른 ‘ 아키오토 센하 ‘ 라는 글자를 물그럼 바라보며 뭉그적 몸을 뒤척여낸다.
“ 센하! 너도 오늘 비번이었지? 그럼 나 오늘 소원권 쓸래! “
연결음이 끊기기 무섭게 유혜가 몸을 벌떡 튕겨내며 밝은 목소리로 센하를 부른다. 컵라면보단 친구에게 얻어먹는 식사가 낫지. 느릿히 발걸음을 떼내어 탁자 위에 올려진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으며 유혜가 센하의 대답을 재촉한다.
“ 으응? 뭐 먹을까—? 나 지금 배고파 센하 “
협박이라도 하듯 유혜가 생긋 입꼬리를 올려낸다. 으음, 메뉴는 못 정했는데. 무심코 바라본 거울에 비치는 제 얼굴에 눈을 가늘게 흐리며, 우선 씻기라도 해야겠단 생각을 품는다.
“ 7시까지, 서 앞에서 만나자. 알겠지? “
짤막한 통보를 마지막으로 유혜가 통화종료 버튼을 꾹꾹 눌러대더니 곧바로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한다. 세수를 하고, 부스스한 머리와 외관을 조금 정리한다. 아까전 늘어진 고무줄로 묶어낸 머리도 다시 깔끔히 위로 묶어올린다. 그런 뒤에야 유혜는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편한 후드티와 바지를 입고 그 위에 외투를 겹쳐입는다. 시간은 넉넉하니까, 먼저 나비의 사료를 챙겨주고 이불을 갠 뒤에야 드디어, 채비를 마쳐낸다.
“ 자. 밥 얻어먹으러 가자, 나비야! “
비록 나비는 같이 데려갈 수 없지만. 여전히 장난감에 정신이 팔린 나비를 보며 홀로 인사를 건네더니 현관문을 열어 집 밖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옷을 챙겨입고 이제 외투를 꺼내고 있었는데, 별안간 침대 위에 던져놓은 휴대폰이 울기 시작했다. 멜로디를 계속해서 흘리는 걸 보니 전화다. 외투를 손에 쥔채로 침대쪽으로 다시 걸어가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문자를 보냈더니 문자가 아닌 전화가 돌아오네. 장난 같기도 한 제 생각에 헛웃음을 살짝 흘리다가 이내 화면을 밀어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입을 열기도 전에 유혜가 속사포로 말을 먼저 내뱉었다.
"'여보세요'도 못하겠네. 아아, 그럼 당연히 오늘 써야지. 마지막 기회인데."
그렇게 심술궂게도 말하면서 잠시 큭큭 웃었다. 어지간히도 밝은 목소리네. 오늘이 만기일이라고 일부러 놀리듯이 문자를 보냈는데, 그저 나한테서 한 끼를 얻어먹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들뜬 것 같다. 뭐, 내 멋대로인 생각이지만.
여전히 메뉴는 정하지 못했는지 뭘 먹을까라며 말꼬리를 늘리고 투정이라도 하는 것 같은 어조로 배고프다라고 말하는 십년지기 친구에게 "그런 건 네가 알아서 정하라고 했지"라고 태평하게 대꾸했다. 난 생각하기 귀찮아, 라고 농담도 슬쩍 곁들어낸다.
"그래, 난 5분도 안 걸리니까. 그럼 7시에 보자고."
전화가 끊겼다. 서 앞에서 7시까지인가. 시계를 바라보았다. 나는 본래 시간약속이 있으면 딱 정각에 맞출 수 있도록 나가는 타입이다. 여태껏 웬만하면 그래왔다. 그런고로 이번에도 그렇게 할 생각이다. 먼저 나가서 기다리는 건 잘 안 한다. 나는 서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지내서, 아까 말한대로 5분도 걸리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현재 엄청 여유로운 것이다. 작은 하품을 한 번 나른하게 하고 눈을 다시 뜨자 거울속의 자신이 눈에 들어왔다. 차분하지 못한 머리카락이나 그런 건 모두 그대로고, 현재의 자신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캐주얼한, 편하고 무난한 옷차림을 히고 있다. 이 위에 이따가 대충 패딩을 하나 걸치는 거지. 나는 손에 들고 있었던 패딩을 일단 침대 위에 눕혔다. 이제 7시 3분 전까지 뭐할까. 허리춤 위에 손을 얹고 가만히 생각하다가 그냥 바닥에 앉아서 멍을 때리기로 하였다. 뇌의 휴식시간이다. 이건 절대로 자기합리화가 아니다. 뇌의 휴식시간이라고.
"...57분."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뇌의 휴식시간은 끝났다. 패딩을 챙겨입고 나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이대로 느긋하게 걸어가서 밖으로 나가면 그 때 딱 7시가 되어있을 것이다. 경험담이다. 그리고 이제 밖으로 나온 것이다. 손목시계를 보니 이제 7시로 바뀌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딱 그 시간에 맞추어서 나왔다. 차가운 공기 사이로 퍼지는 입김을 슬쩍 바라보다가 손을 도로 주머니속에 찔렀다.
"있다. 안녕. 비번 날에 밖으로 나오는 일은 드물지?"
유혜를 발견하고 위와 같은 말을 무게없이 흘리면서 잠시 헛웃음을 지었다.
//답레입니다! 그럼 저는 잠시 외출을...(흐릿) 한 30분 정도 걸릴 거예요! 조금 뭐 사고 하는 거니까!
월하가 자신의 이름을 불려주자 눈에 띄게 밝아진다. 선배의 기억 속에 자신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뿌듯 할 것이다. 지은은 기쁜 마음의 고개를 꺾어 월하를 보았는데 장신이라 눈높이가 저만치 올라가는 것을 깨달았다. 키가 얼마나 큰 건지 쓸데없는 잡념을 하는 도중 월하의 당혹감을 눈치채고 지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싶어 다시 한 번 경찰차를 보았지만 아무 문제가 없어보였다. 심각한 문제라도 있나 걱정하였는데 생각보다 별 중요치 않은 문제였다. 오히려 지은에게는 기쁜 소식이었다.
"네! 저 운전할 수 있어요. 제가 운전할게요."
천천히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운전석 문을 열었다. 드디어 경찰차를 타보는구나. 밀물마냥 치고오는 감격감. 지은은 자리에 앉아 순찰차 내부를 둘러보았다. 앞좌석과 뒷좌석을 가르는 칸막이가 멋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은은 옆으로 손을 뻗어 안전밸트를 매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려는 월하에 지은은 특유의 그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차 문을 세게(세개) 닫지 않게 조심하세요. 차 문은 네개니까요!"
회심의 개그라 생각했는데 무리수를 두었다. 지은은 문득 후회가 되었다. 지은은 굳은 미소로 시선을 슬쩍 피하며 다시 앞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