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찰을 마치고 방에 돌아와서도 구석에 웅크려앉은채 손목을 신경질적으로 문질렀다. 그 피부가 붉게 되어버릴 정도로. 제정신으로 한 행동은 아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그 때처럼 쓸린 자국이 남은 제 손목을 두려움 가득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제일 싫은 기억 중 하나를 떠올리고 말았다. 심호흡을 하였다. 이미 지나간 일이야.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다시는.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말했다. ...답답하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방이 굉장히 답답하게 다가왔다. 찬 바람이나 쐬러 외투를 아무렇게나 걸쳐서 밖으로 나갔다. 아마 자정 조금 안 되었을 것이다.
서있으며 멍이나 때릴까 싶었지만 그냥 걷기로 하였다. 외투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 터벅터벅 천천히 걸었다. 뒤늦게 손목 부분이 따가워진 것을 느꼈다. 젠장. 모국어로 욕지거리를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이렇게 아파오면 그 때와 똑같잖아. 이를 으득 갈다가 밝은 빛을 발견했다. 마트다. 우울하거나 짜증나거나 할 때는 술만한 것이 없던데. 담배는 피우지 않는다. 나는 주저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외투 안에 소량의 돈이 들어있어서 맥주를 살 수 있었다. 밖으로 나와 캔을 따고는 벌컥벌컥 마셨다. 얼른 취했으면 좋겠다. 아무래도 도피하고 싶었는가보다. 자신의 과거에서.
목적없이 발을 내딛으며 아무데로나 걸었다. 그렇게 걷다보니 광장 같은 곳에 다다랐다. 사람은 없다시피하였다. 뭐, 오늘 밤 언제부터 그런 것을 신경썼는가. 나른한 눈으로 맥주를 홀짝이고는 발걸음을 계속 옮겼다. 그러다가 본 적 있는 얼굴을 발견한 것이다. 자신을 이름으로 불러달라 한 울프 씨.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그녀에 관해서는 별로 좋은 기억이 없다. 지금은 목을 뒤로 젖히고 하늘을 바라본다. 그래서 내가 바로 앞에 있음을 모르는 것 같다. 나는 여기에서 두 가지 선택지를 가졌다. 무시하고 지나치느냐, 아니면 아는 척을 하느냐.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시 치고는 별이 밝다. 덕분에 조금 나은 느낌일까. 나는 다시 시선을 울프 씨에게로 향했다.
"...당신에게 별을 보는 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네요."
평소처럼 능청맞게 아무런 말이나 던졌다. 시선을 내리깔며 맥주를 한모금 마시고는 적당히 거리를 두어 옆자리에 앉았다. 그래, 내가 언제부터 남의 눈치를 보던가.
하염없이 밤하늘을 바라보던 나는, 누가 오거나 뭐가 일어나거나 그런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고 해야겠지. 거기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그대로 눈을 감고 잠들어버렸을 테니까.
그 불퉁하고도 능청스런 목소리를 나는 들은 적이 있다. 목소리를 들음으로써 겨우 내 앞의 인기척을 눈치채었다. 놀리는 것처럼 말을 걸어온 그는 내가 앉은 벤치의 빈자리에 앉았다. 적당한 거리감과 함께 혼자던 벤치에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 날씨에 이런 곳에서 만취한 채로 밤하늘을 보는 걸 취미라고 부르나."
그가 앉고도 얼마간 지나고서 내 입이 열렸다. 고개를 젖히고 있었던 탓인지 목소리가 조금이 갈라졌다. 침이라도 삼켜보려고 했지만 입안은 뻑뻑하게 마르기만 했다. 혀로 마른 입천장을 한번 훑으며 시선을 흘긋 센하 쪽으로 돌렸다가, 그의 손에 들린 맥주캔을 보았다. 한모금만 마셔도 속이 시원해질 것 같은 맥주.
"한모금 마시게해주지 않겠어?"
그렇게 말하는 나는 생각이라곤 일절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저 음료를 한모금 얻어마실 수 있다면 좋을텐데. 그 생각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반쯤 풀린 눈으로 멍하니 응시하면서 그의 대답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갈라진 목소리로 대꾸하는 말에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세상은 넓고 취미는 많으니까요, 라고 여전히 능청스럽게 반응하였다. 벤치에 등을 기댔다. 이런 자세를 하니 시선은 자연스럽게 허공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조금 애매하게 보일 수도 있는 시선처리.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이대로 울프 씨가 말을 걸어오지 않고, 나도 할 말을 떠올려내지 못하면 나는 그냥 계속 맥주나 마시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인사를 건넬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 내용을 예상하지 못해서 그렇지.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어이없다는 듯 '허'라는 감탄사를 낮게 흘렸다. 어중간하게 허공을 향하던 시선을 도로 그녀에게로 옮겼다. 아까는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눈이 반쯤 풀렸다. 멍하니 응시하는 눈을 똑바로 보니 아무래도 이 사람도 술을 마신지 얼마 되지 않은 눈치다. 그런데 또 술을 마시겠다 나오는 상황인가. 거기에다 생판 남이 마시던 것을.
"진심이에요? 갈증이라면 물을 추천하고 싶은데."
나는 살짝 비웃는 분위기로 울프 씨에게 흘러가듯 말하였다. 그렇게 말해놓고는 저가 들고 있는 맥주캔을 잠시 지그시 응시하다가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선배 맥주 못 마시게 해서 죽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기는 싫네요"라고 무심히 읊조리면서. 어떻게, 얼마나 마시든 알아서 하라는 눈빛으로 그녀를 똑바로, 그러나 어중간하게 쳐다보았다. 이미 나도 조금 술기운이 돈 것이다. 술에 강하지는 않은 것, 이건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그렇겠지. 나라도 그의 입장이었으면 같은 기분이었을 거다. 그래서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인데. 지금의 나는 제정신이 아니니까. 그 말을 방패 삼아 나를 보는 그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물로는 풀리지 않아. 가지고 있지도 않고."
술을 마셨을 때의 나쁜 버릇 같은 것이었다. 주사라기는 좀 그렇고, 나쁜 버릇 정도로 치부할만한. 내 눈에 든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강박 아닌 강박. 그래서 그가 캔을 내밀었을 때 주저않고 받아가 곧장 입에 대었다. 마시던 캔이니 그의 입이 닿았던 곳이건만 그런 건 지금 걸릴 것이 없었다. 나는 그저 목을 축이고 싶었을 뿐이니까.
급히 받아간 것 치곤 정말 딱 한모금만 마셨다. 입안을 한번 채울만큼만 들이키고 캔을 벤치에 내려놓았다. 그대로 그의 쪽으로 밀어놓으며 천천히 입안에 머금고 있던 것을 삼켜내었다. 바싹 말랐던 입안과 식도가 짜릿한 탄산과 알콜로 적셔져 내려가는 감각은 정수리를 찌를 정도로 짜릿했다...
"...잘 마셨어."
한박자 늦게 말을 하곤 좀을 좀더 편히 늘어뜨렸다. 빈 손을 겉옷 주머니에 꽂고, 아까처럼 고개를 뒤로 젖히진 않고. 느릿하게 숨을 내쉬며 정면 어딘가를 멍하니 응시했다. 그러고 또 잠시 시간이 흘러갔다. 그 시간 뒤에 입을 연 것은 나였다.
"너 같이 뻔뻔한 인간도 잠 안 오는 밤이 있나보지."
아니면 집이 싫어지는 밤이라던가. 묻는 건지 혼잣말인지 모를 말이 조용하던 공기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