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누나 손이 차갑네. 작은 손을 꼭 쥐고서 깍지를 꼈다. 자신을 올려다보며 살풋 미소를 보이는 모습이 마냥 좋다는 듯 다정한 미소를 지어보인 그는 지하의 주차장으로 가는 계단을 내려가며 코트 주머니를 뒤적여 차키를 꺼내고 능숙히 버튼을 눌렀다.
"나리나리개나리.."
멀리서 차의 시동이 걸리고 헤드라이트가 켜지자 익숙한 음을 흥얼거리고 당신을 흘끔 바라본 그는 눈을 휙 휘어 웃었다. "지하주차장에 사람도 없는데..농담이야." 라고 농담을 던져보기도 하고, 당신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기쁜 듯 행복하게 웃어보인 그는 차를 향해 걸어갔다.
결벽증 같은 건 살다보니 그저 그런 걸림돌 같은 것에 불과했다. 있어봐야 나만 괴로운, 나만 귀찮은 무언가.
형식적인 대화를 나누고 늘어져있으니 옆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제가 그리 뻔뻔해보였냐는 말부터 예리하다던가, 방이 싫어졌다던가, 갇힌 기억이 있다던가. 술기운 때문인지 들어서는 안 될 소리까지 들은 기분이었다. 아니. 기분 탓이 아니었지.
"네 낯짝이 얼마나 뻔뻔하고 두껍게 보이는지 너는 좀 자각할 필요가 있는 것 같군."
늘어진 자세와 다시 마른 목 때문에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한마디 하고, 좀더 늘어져 있는데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찔렀다. 분명 캔 떨어지는 소리였다. 그전에 가느다란 헛웃음 소리도 들린 듯 한데.
"......"
흘끔 눈을 떠서 그쪽을 보니 바닥에 나뒹구는 캔과 부여잡은 손목이 보인가. 밤이고 술기운이라 손목의 상태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구태여 그 상태를 묻지 않았다. 묻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그가 태연스레 중얼거리며 캔을 버리고 오는 것을. 쓰레기통에 캔이 나뒹구는 소리가 들린 후 기척이 돌아오자 느긋하게 말을 꺼내었다.
"내가 스무살 때, 좋아하는 남자에게 고백하려다 차이고 도리어 찔린 적이 있어. 상황적으로는 내가 찔렀어야 맞겠지만, 당시의 나는 너무 어렸어. 지금보다 더한 철부지였으니까. 그 때의 상처는 7년이 넘은 지금도 흉터로 고스란히 남아있어. 흉터로 남아서....가끔 아파. 악몽 같은 걸 꾸면 피도 나더군."
이미 아문지 오래된 흉터였지만 그런 기묘한 부분이 있었다. 악몽을 꾸다가 극심한 고통에 깨면 배가 피로 흥건한..결코 유쾌하지만은 않은 이야기였다. 그만큼 말로 꺼내기 쉬운 얘기도 아니었고.
계속해서 방송되고있는 긴급속보만이 사무실을 울렸다. 하루종일 울리는 뉴스라 그렇게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서류를 정리하거나, 순찰을 돌거나 그저 무기질적으로 할 일을 수행할 뿐. 아마도 자정을 조금 넘길 무렵이였을거다. 단조로운 벨소리가 그런 단조로운 일상을 깨고 울려퍼졌다. 수화기 너머 울먹이는 목소리. 예기치 못한 불행이 찾아왔다.
"...어...?"
얼빠진 소리가 그 입술안에서 새어나왔다. 쓰러져? 어째서? 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거지? 누가?
...지연이가?
---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상황이기에...
--- 누나가 눈을 안 떠... 어떡해야해?
--- 전원 뇌사상태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발표가...
--- □□병원으로... 응급실이야... 빨리...
그제야 화면 속 아나운서가 지껄이는 말들이 귀에 들어왔다. 아무 대답 없이 강준의 전화를 들어준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를 거부한 채로. 제정신이 아닌걸까? 머리가 이상해져 잘 못 들은걸까? 손으로 앞머리를 쓸 어올리다 그대로 쥐어뜯는다. 통증조차 느끼질 못했다. 수많은 물음표들과 수많은 말소리들이 의미불명의 웅성거림이 되어 뇌리를 가득 채워갔다. 웅성거림은 점점 커지다가
한순간에-
"...저, 어디 갔다오겠습니다."
겨우 한마디를 던졌다. 곧바로 첫번째 서랍 속 오토바이 키만 챙긴 채, 수없는 웅성거림들을 뒤로하고 사무실 문으로 뛰쳐나갔다.
**************
수십분의 거리를 단 몇분만에 온 것 같다. 넘어질 듯 말 듯 단 한 숨도 채우지 못하고 달려갔다. 그렇게 도착한 응급실은...-- 공간을 빼곡히 채운 침대 위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사람과, 분주히 움직이는 흰 가운의 사람, 침대 옆 금방이라도 실신할 듯이 울고있는 사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애꿎은 의사를 상대로 분풀이를 하는 사람, 모든게 다 혼란스러워서-- 그 광경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멍하니 눈으로 그 풍경들을 좇다, 익숙한 사람을 찾아 낼 수 있었다.
"지연이..."
기계장치에 의지해 숨을 이어가는 지연이는 마치 잠에 빠진 듯 했다. 하지만 얼굴에 생기가 없어서, 금방이라도 부숴질 것 같아서,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아서... 귓속에 벌래가 들어간 것 처럼 웅웅거림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게 현실이라는듯 누군가가 비웃었다. 어금니가 뿌득 갈렸다. 하지만...
절망스럽게도 상황을 직시할 수 있었다.
"강준아."
침대 옆 의자에 웅크리고있는 강준이에게 말을 걸었다. 빨갛게 달은 눈가가 방금까지 울고있었다는 걸 말해준다. 평소의 어른 흉내는 온데간데 없는 모습. 정신을 못차리고 바들바들 떨고있어서 어깨를 강하게 흔들었다. 강준이는 한참을 끅끅거리다 잠긴 목소리로 말한다.
"으...형... 어떡해?
"...권강준."
"누나... 누나 괜찮을까?"
"괜찮을거야, 분명."
지금까지의 사건들은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왔지만, 솔직히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뇌사에 빠질 수 있다... 였나? 속에서 불덩이가 치밀었다. 그럼에도, 안심 시키려는 듯 침착하게 말한다. 지금은 그저 다독일수밖에.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나서 혼란스럽겠지만... 형은 경찰서에 돌아가야 해."
"하지만...!"
"정신 차리고, 세수도 좀 하고, 너무 힘들면 한숨 자고... 그러니까."
"네가 누나를 돌보고있어."
짧은 대화를 끝으로 등을 돌려 밖으로 걸어나갔다. 불안하게 맥동치던 심장이 조금씩 가라앉는걸 느끼고, 안개가 짙게 껴있던 머리 속도 점점 맑아져갔다.
...누가 저지른 일인지 모른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아는 건 익스퍼의 소행이라는 것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