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릿바람이 창문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도시의 겨울은 제법 추웠다. 하루에 한 번 수도관이 터지거나 강이 얼어붙거나 남극보다 춥다는 등. 여러 얘기가 뉴스에 정신없이 나왔다.
" 야. " " 왜. " " 오늘 바쁘냐? " " 너랑 시간 써줄 생각은 없으니까 저리 꺼져라. "
달라붙으려는 에디를 떼어내고는 시은은 두꺼운 교재로 눈을 돌렸다. 이번 교수님은 깐깐해서 그런지 시험도 그렇고 수업도 난이도가 높았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수업을 따라갈 수 없어서 우리들은 그 교수를 '공부쟁이 교수'라고 얕잡아 불렀다. 그렇게라도 안하면 자신들의 수준이 꼭 낮은 것처럼 보이곤 했으니까.
" 너네 교수는 어떻냐? " " 말도 마라...이거 한 권이 전부 시험이야. "
고개를 저어대는 시은의 모습을 보면서 에디는 티비소리에 집중했다. 저번주에 있었던 대규모의 경영계 게이트가 그의 새로운 관심거리였다.
" 시은아. " " 어. 왜? " " 저런 상황이면 어떻게 해야 잡을까. "
읽던 책을 내려두곤 시은은 뉴스를 잠깐 들었다.
" 일단 관련자랑 사법거래를 해서 정보를 얻어내야지. 그렇지 않으면 고삐 잡는 일부터가 쉽지가 않을걸. " " 역시 위쪽에 손을 쓰는 방법밖에 없나? " " 포기해. 만약에라도 꼬리를 잡아도 그건 쥐 꼬리야. 언제든 자르고 도망칠 수 있는 꼬리. "
시은의 무덤덤하게 말했다.
" 하지만 그걸 계기로 누군가를 찌르려 한다면. 방법은 없을까. " " 인터넷에 올리면 일단 효과가 커지는 대신. 신뢰성이니 어쩌니 하면서 당분간 뜨거워질걸. 그때 흔적을 잡아보든지. "
바삭, 과자를 씹던 시은에게 에디가 손을 뻗었다. 그 위에 과자를 올려주곤 시은은 손을 털었다.
" 괜히 경영계를 찌르려면 일단 패기가 필요하다고 하겠어. 일곱시 뉴스에 괜히 나오기 싫으면. 무시해. " " 하지만. " " 누나 화낸다? "
슬쩍 손을 들어올려 에디의 머리를 툭 치고는 시은은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 시은을 바라보면서 피식 웃은 에디는 시은을 품기라도 하려는 듯 크게 그녀를 안았다.
" 잘못했어요 누나. " " 알았으면 괜히라도 그런 짓 하지마. 그러다 골로 간 선배들 자주 봤어. "
귀찮은 듯 말하는 시은이었지만 그 말뜻을 알아서. 에디는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시은의 몸은 뜨거웠다. 그래도 그 뜨거운 몸을 꼭 안으면서 에디는 눈을 감았다. 잠든 에디를 귀찮다는 듯 들어올려 침대에 던져놓고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러곤 다시 거실에서 전공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 얼굴이 조금 붉어진 것은. 아마도 조명 탓일 것이다.
응, 좋아. 너의 손으로 내 손을 뻗어 깍지를 끼듯 조심스레 손을 파고들어간다. 작고 빨리 차가워지는 내 손과 다르게 너의 손은 크고 늘 따뜻했다. 그래서 이렇게 잡고 있으면 뭔가 따뜻하고 포근해지는 느낌을 늘 받는 듯 했다. 정말이지, 당신이 나의 연인이라는 것에 정말 고마워요. 당신을 올려다보며 살풋 미소를 보였다.
"후훗."
좀 더 깊은 스킨십을 하고싶지만, 그건 조금 나중에. 저녁을 먹은 후에라도 늦지 않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당신의 손을 잡고 스튜디오 지하의 주차장으로 가는 계단을 내려간다.
놀랍게도 저도 없어요. 무게없이 덧붙이면서 울프 씨가 벤치에 내려놓은 맥주캔을 다시 집어들어 이쪽 또한 주저없이 마셨다. 남이 봤을 때는 좋은 집에서 잘 자란 도련님이겠지만, 실상은 다르다고 할까. 손목이 다시금 욱씬거리는 기분이었다. 뭐, 정말로 아낌 받으면서 자랐으면 그런 결벽증, 어쩌면 생겼을지도. 의미없는 생각을 해본다. 한박자 정도 뒤에 들려오는 잘 먹었다는 말에는 맥주캔에서 입을 떼며 "천만에요"라는 형식적인 답변으로 반응을 다하였다.
물로는 풀리지 않는 갈증을 푼 울프 씨는 자세가 좀 더 나른해졌다. 나 또한 편한 자세로 맥주를 계속 홀짝였다. 약간의 시간 뒤, 캔 안의 맥주가 어느샌가 거의 다 없어지려 할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너 같이 뻔뻔한 인간도 잠 안 오는 밤이 있나보지. 잠시 그 말을 곱씹었다. 뻔뻔한 것과 잠이 안 오는 것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 아니면 집이 싫어지는 밤이든가라는 첨언도 들려왔다. 혼잣말일 수도 있지만, 나는 대답하기로 하였다. 애초부터 술에 조금 취한 것도 있고.
"제가 그렇게 뻔뻔한 인상이었나요? 재미있네요."
말끝이 살짝 늘어진 기분이었다. 이것도 술 때문인가. 맥주캔을 흔들어 일부러 물이 찰랑이는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에도 피식 웃었다. 잠시였지만.
말은 다 해놓고 입을 다물었다. 헛소리까지 나와버렸네. 하, 정말로 술에 강하지는 못한 모양이지. 어쩐지 우스워져서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 싸늘하게 표정을 굳혔다. 두 눈이 공허해지더니 손에서 맥주캔을 놓쳤다. 맥주캔이 땅과 부딪쳐 깡하는 소리가 작게 울려퍼지는 동시 제 손목을 잡았다. 붉어져있는 손목을 어루만졌다. 순간적으로 두려움이 덮쳐왔다. 괜찮아. 나지막히 스스로를 향해 중얼거렸다. 겨우 손목을 놓고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다시금.
"...괜찮아."
그런 일 다시는 없을 거고, 환상도 보이지 않을 거야. 손을 거두고, 다시 여유로워진 분위기로 태평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아, 조금 남았는데. 아깝다"라고 능청스레 말하며 내용물 흘린 맥주캔을 주워 바로 옆 쓰레기통에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