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연은 현호를 바라보면서 가볍게 안은 팔을 풀러 다른 다리도 아래로 내렸습니다. 그리고 현호가 말하는 말을 듣고는 공허한 미소에 언뜻 보기엔 정말 진심인 듯한 미소를 띄웠습니다.
"네가 나랑 동갑인 걸 잊어버린 것 같구나." 그 말을 하면서 가까이 다가온 현호의 정강이를 걷어차긴 했지만.. "뭐. 어떤 의미라 하여도 끝을 보는 이상 이젠..아니 앞으로도 상관없지만." 이라고 덧붙여서 별로 연연하진 않는 듯합니다.
"그래. 바뀌었지. 누가 널 파헤친 건지는 모르지만." 파헤쳐진 네 모습도 마음에 들어. 덮여 있던 것이 흩어져 갈 길을 잃었지만. 라고 말하면서 반장갑을 낀 손을 들어 턱을 들어올리려 합니다. 그것은 약간은 친애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친애가 꾸며낸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지만요.
//세연주:데이세연 성격 나빠! 정강이를 힐로 걷어찼어! 미아내 현호야아아아(공허한 메아리) 데이세연:검으로 옷자락이나 머리카락 몇가닥 베어낼까 했는데 새연주: 아 그거에 비하면 조금 덜 나쁜 거려나요..
소년은 정강이가 걷어차여지자, 잠시 눈을 살짝 내렸다. 힐로 걷어차인 정강이로 인해 소년의 무게중심이 일순 흔들렸지만 용케 앞으로 고꾸라지거나 주저앉는 모습은 절대로 보이지 않았다. 단지, 걷어차여진 정강이를 보고 소년은 세연의 말을 곱씹었다. 모든 것을 지워버렸더니 다른 것까지 모조리 지워진 모양이다. 입력하고 출력하는 것을 멈추니, 모든 기능이 정지됐다.
"죄송합니다. 세연양. 무례를 범했습니다."
소년은 살짝 미간을 찡그린 채 천천히, 높낮이가 일정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사과의 말을 건넸다. 걷어차여진 다리를 디디자 지끈하는 통증이 몰려왔지만 아무렴, 디핀도에 어깨가 베이고 스투페파이에 기절했던 것과 비할게 있을까. 턱을 들어올리는 세연의 손길을 피하지 않은 채 소년의 턱이 저항없이 들어올려진다. 소년은 세연의 행동에 대해 아무런 느낌을 품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는 바뀐것입니다."
누가 널 파헤친 건지 모른다는 말과 이어지는 마음에 든다는 말에 소년은 그저 천천히, 그리고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세연을 바라볼 뿐이였다.
너에게는 이미 상관없지, 아가야. 오 물론 그 의지는 네가 잘 이어가고 있고 말이야. 어리석은 녀석.
들리는 환청이 묵직했다.
//데이 현호 :........ 나이를 잊...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정강이걷어찼엌ㅋㅋㅋㅋㅋㅋㅋㅋ힐로 걷어찼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긋지긋하다. 이 의미없는 투쟁의 종결점을 찍고싶다. 애초에 추종자들의 승리는 당연한 것이었으니, 결과가 어떻게 흘러가든 빨리 이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그때가 되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을테니까. 도태되는건 싫다. 어서 빨리 내 자리를 찾아가야 한다. 애초에 다른 선택지를 택할 여유따위는 없었다. 변하는게 없다는걸 알면서도. 발버둥이 무의미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그녀를 향한 아픔 때문인지, 내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인지 이제와선 구분되지 않는다. '그 날' 이후 내게 주어진 건 무에 가깝다는 것을 충분히 깨달았음에도 나는 더 많은걸 손에 쥐고 싶었다. 죄책감 같은건 이미 오래 전에 지워버렸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반드시 올라갈 것이다. 그것이 그녀를 향한 최소한의 속죄임과 동시에, 나 자신을 위한 선택이니까.
책을 덮고 뉘였던 몸을 일으켰다. 공터로 나가 선선한 바람이라도 쐐고 들어올 생각이다. 머리속에 복잡하게 얽힌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힐끗 시선을 돌려 비어있는 새장을 확인했다. 패밀리어와 함께 있을땐 몰랐는데, 막상 사라지고 나니 허전함이 느껴진다. 무의미한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쓸모도 없는 뱁새따위 사라지든 말든 알 바 아니다. 기숙사를 나와 복도를 걸었다. 원래 이 시간의 복도는 학생들로 북적였었다. 하지만 시기가 시기인만큼 현재는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복도를 거쳐 한적한 공터로 나와 가볍게 주변을 훑었다.
"우리 '추종자' 사이카.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낯익은 얼굴에 자연스레 말을 건네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진 그녀가 나와 같은 선택을 할 줄은 몰랐다. 애초에 그녀는 혼혈이다. 차별에 반발해 레지스탕스 쪽을 택하는게 더 일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같은 선택을 내린건 자신의 신념보단 안위가 우선이었겠지. 아니면 뭐, 말 못 할 사정이 있거나. 나야 우리 사이카쨩에게 지팡이를 겨누지 않아도 돼서 좋지만.그녀를 흘겨보며 낮게 실소를 흘렸다.
세연은 무례라는 말을 듣고는 테이블을 짚은 손을 들어 자신의 턱을 괴었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을 세상이야. 파멸로 떨어뜨리기엔 이게 알맞지. 유감스럽게도.
"무례인줄은 아는구나." "상관없는 일이 되겠지만.." 지금은 중요하다. 라고 평해지는 일이니까. 라고 말하고는 이 몸이 좀 더 관대하지 않았다면 이 레지스탕스에게도, 네게도 그다지 좋진 않았겠지. 라고 말하고는 손에 뭔가 묻은 것을 탁 털어내듯 턱을 툭 쳐내 밀어내려 합니다. 분명 악의적인 밀침이었습니다.
"그래. 바뀌었겠지." "그렇지만 토해낸 건.. 적을 것 같다만" 사람의 인격이란 쉬이 바뀌는 게 아니란다. 네가 바뀌었다고 해도 그건 그냥 겉껍데기만 부서진 채 그 조각을 아직도 그러모은 채 있는 걸텐데. 세연은 그걸 왜 그렇게 깔깔 웃으며 말한 걸까요? 비꼬는 것? 이입된 것? 그러나. 진실로는 이유 같은 게 존재할 리가요. 아슬아슬한 끝이 툭 끊어진 이후로는 충동과 계략이 공존하고 있음에. 다만 충동인지 계략인지는?
혹시. 세연이 갑자기 데스이터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가요? 우습군요. 아슬아슬하던 것이 끊겨 산산조각나버린 것이었지요.
세연양, 이였나. 소년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저 조용히 평이한 어투로 중얼거릴 뿐이였다. 턱을 들어올렸던 손이 그대로 밀쳐지는 것, 소년은 그것의 의미를 알았다. 분명한 악의적인 밀침이였기에 소년은 조금 주춤하며 뒤로 두어발 물러나서 세연과 거리를 두었다. 손으로 턱을 문지르다가 천천히 입가를 매만졌다. 기계적이고 무기질적인 움직임이였고, 의미없는 행동이다. 세연의 악의적인 밀침에 뒤로 물러났어도 소년의 눈빛은 변함없이 공허하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세연양."
그래. 소년은 세연을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이세연님에서 불편하다는 이유로, 이세연양이였다가 이름을 부르라는 것에, 세연양으로 합의점을 찾았다. 소년은 입가를 매만지던 손을 떼어내고 세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호흡을 느릿하게 끊어내고 말을 이었다.
"모르겠습니다."
부서져내린 조각들을 끌어모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 애초, 너에게 그런 것이란 없었잖니, 아가야. 소년은 입가를 매만졌던 손으로 다시금 귀를 가리듯 막아내며 그렇게 말을 마무리 지었다.
"그렇구나" 현호의 사과를 받아들이며 밀쳐낸 뒤 레지스탕스 위에서 내려와 땅 위에 굽이 부딪치는 소리조차 없이 부드럽게 내려섰습니다.
"유감스럽지만. 이해를 위해 말하는 타입은 아니야." 그걸 스스로 찾지 않는다면 누가 찾아주지? 누가 찾아준다고 해서 될 일이던가? 과한 공감각의 너머에서 무어라 속삭인 것 같았지만 취하면 감각이 너무 폭발적이었습니다. 그녀는 명실상부 지배자이자 파괴자였으니 그걸 제대로 말해줄 리가 없었잖아요. 그녀의 오팔아이가 현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습니다. 모르겠습니다. 란 말을 듣고는 정말 아무것도 개의치 않은 듯 냉담한 표정으로
"그래서?" 꼴사나운 광대 정도는 되겠구나. 아무것도 모른 채로 오필리아처럼 물에 잠겨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란다. 차가운 세연의 목소리는 처음부터 그랬다는 양 사람을 긁어내리는 듯할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