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꾹 감고 고개를 숙여보이는 백소진은, 다행히 에일린의 위험한 눈빛(?)을 보지 못했다. 아마 그 눈빛을 잠깐이라도 봤으면 바로 족히 십 미터는 뒤로 점멸했으리라...
"깜빡 졸았습니다. 거의 열닷새째 한 숨도 못 자고 이걸 쫓아다니는 통에-"
백소진은 자신의 옆구리로 눈을 돌렸다가, 거기 있어야 할 망태기가 없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행히도 망태기는 그녀가 땅에 착지한 지점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널부러져 있었다. 그녀는 망태기로 다가가서, 안에 든 것이 이상이 없나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 절벽 위에서 떨어졌는데, 큰 상처를 입어야 응당한 일이었으나... 공에게 폐를 끼치고, 보잘것 없는 몸뚱이를 보전했군요. 혹여 제가 무언가 보답해드릴 만한 방법이 없을는지요?"
자신의 위험한 눈빛을 보지 못했던 것인지,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는 여우를 늑대는 말없이 쳐다볼 뿐이였다. 충분히 가까운 거리, 여차하면 바로- 아니. 잠시만. 상대는 환상종이다. 그냥 여우가 아니야. 인내심을 끌어내어 겨우 이성을 잡은 늑대는 상대의 말에 고개를 갸웃이고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눈을 옮겼고, 망태기를 확인하는 것을 보며 꼬리를 살랑인다.
[약초를 캐던 중이셨던 겁니까.]
늑대는 다시 한번 시선을 올려 벼랑 위를 쳐다본다. 상당히 높은 곳, 신체를 단련하지 않은 환상종이 떨어진다면 최소 1주일은 움직이지 못할 높인데. 저런 곳에서 약초를 캐고, 졸기까지 하다니, 그는 은빛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내려 그녀를 빤히 쳐다본다.
[저는 지금 배가 고픕니다. 그래서 사냥을 하던 중이였고요.]
늑대의 꼬리가 휙, 하고. 사슴이 있었던 곳을 향한다.
[그대가 저 위에서 떨어지는 덕에. 사냥에 실패했고 말이지요.]
늑대는 몸을 일으킨 뒤 하품을 짧게 하더니, 여우에게로 발걸음을 옮기며 그녀를 빤히 쳐다본다. 가까워지는 거리. 사냥감을 보는 듯한 눈 속에는 묘한 장난끼가 담겨 있어, 이것이 그의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그는 살짝 이빨을 드러내며 크르릉. 소리를 낸다.
"...공양하시는 것을 방해했군요. 제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큰 결례를 저질러 버렸네요. 용서를 빌 염치도 없는 일이군요."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펼쳐져서 살랑이던 아홉 갈래의 꼬리가, 제각기 축 처진다. 귀 역시 아래로 접히는 것이, 풀이 죽은 듯하다. 에일린이 으르렁대는 소리를 항의하는 것으로 알아들은 것인지, 백소진의 시선은 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갈팡질팡한다. 육포라도 있으면 그것을 나누어주련만,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말린 과일 몇 쪽과 퍽퍽한 길양식용 강정뿐이었다. 아마 이 육식성의 말하는 늑대에게, 이런 것을 내밀어 봤자 좋아할 리가 없다. 그녀는 잠깐 머릿속으로 셈을 해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꼬리가 축 처지고, 귀 역시 아래로 접히는 것을 보며 늑대는 재미있는 것을 본 것마냥 살짝 입꼬리를 올린다. 조금 더 놀려먹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리고, 도와줄 필요 또한 없답니다.]
그대 자체가, 좋은 먹잇감이니까요. 늑대는 낮게 으르렁거리듯이 말을 이었고, 여우에게로 좀 더 다가가며 그녀를 빤히 쳐다본다. 채 한 걸음도 되지 않을 정도의 거리와, 푸르게 불타는 듯한. 사냥감을 보는 눈이 여우를 향하며 타올랐고, 세워진 발톱이 땅을 푹 패며 약한 흙먼지를 일으켰다.
[......]
잡아먹을 것만 같이, 벌어진 주둥이에서 날카로운 이빨이 보이고, 짧은 시간 동안 여우를 빤히 쳐다보던 늑대의 귀가 당장이라도 뛰어들 것마냥 세워진다.
크게 웃음을 터트리는 레이첼싀 모습에 그녀도 쿡쿡 웃었다. 평소에 하고다니는 옷차림과 아주 잘어울리는 우아하고 조용한 웃음이였다.그녀는 내심 레이첼이 크게 웃는다면 생각했었고 그 바램을 지금은 이뤘다.
근사하기도 하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눈물이 살짝 고인 채 머리를 쓰다듬는 행동에 손에 얼굴을 부비는행동은 하지 않은 채 그저 다리를 한데 모아서 레이첼의 말을 들었다.
"네에~ 그럼 다행이에요~"
행복하다면 됐다며 그녀는 웃고는 모은 다리의 무릎 위에 턱을 대고 가볍게 눈을 데굴 굴렸다.제 집에 있는 의자에 레이첼의 외투가 걸린다. 방금, 자신을 바라보던 새파란 불꽃같은 눈동자에서 오싹하리만치 맹수의 눈앞에 있는 잡아먹으려나? 라는 생각이 드는 느낌과 다르게 간질거리는 기분이였다.
"앗! 그으럼 같은 침대에서 자는건가요? 자다가 잡아먹어도 되나요!"
레이첼의 허락과도 같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녀는 한손을 들고 과장스럽게 악센트를 넣어가며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예의 레이첼에게 잘 통하지 않는 말을 건넸다. 이쪽으로 오라는 듯, 다른 손으로는 제 옆자리를 두드리며.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의 행동에 기가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 저리도 경박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인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모르겠다. 평소였다면 기분나빠 당장이라도 짜증을 부릴 정도로 심각한 상황임이 분명한데 이상하게도 짜증이 치밀지 않았다. 물론 기분이 상할뻔 한 건 사실이지만 그것보다는 저 웃음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컸다. 이 또한 상대가 그녀이기 때문일까. 잠시 입을 다물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자신의 앞에서 저리 경박한 웃음을 터뜨린다면 분명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알게 모르게 그녀를 특별취급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어안이 벙벙해진다.
"미쳤네. 진짜."
거친 단어를 내뱉긴 했지만 그 목소리에 악의는 담겨있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왜 유독 그녀만을 특별취급 해주고 있는 건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녀와 오랜 시간을 함께 생활한건 사실이다. 과거의 기억을 찬찬히 되짚어 보았다. 그녀의 뛰어난 가사실력에 반해 본래 집사가 관리하고 있던 개인실과 서재의 청소를 맡겼기에 엘라리스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공간은 대부분 그녀가 관리하고 있었다. 엘라리스가 외출하기 전 자신의 귀가시간을 미리 귀뜸해주는 사람도 그녀였으며, 엘라리스가 귀가했을때 저택 정문에서 마중을 나오는 사람도 그녀였다. 식사는 말할 것도 없고. 식사하는 동안에도 줄곧 그녀를 옆에두곤 했었다. 이렇게 돌아보니 자신이 보내는 일상 대부분에 그녀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정이라도 들어버린 건가. 머릿속이 복잡해진 엘라리스는 생각을 정리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뒤따라 걷지 말고 내 옆에서 걸어. 오늘은 특별히 허락해줄게."
그녀의 작은 손을 부드럽게 감싸쥔채 저택 밖으로 빠져나온 엘라리스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주변을 스윽 둘러보았다. 자신의 영지에서 상점가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심심하니까 옆에서 가만히 걷지만 말고 입이라도 좀 놀려봐."
평소 생활에 대해 이야기 해보던가. 같이 일하는 시녀들과의 관계라던가. 개인적인 이야기라던가. 솔직히 개인적인 이야기가 가장 듣고 싶었지만 이것까지 콕 집어서 말하진 않았다.
레이첼이 픽하고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예의 그녀라면 분명 '거절한다'며 아주 간결하게, 딱딱한 어조로 말했을 것이다. 이것은 그녀에게만 보여주는 모습이었고, 그녀라는 존재가 불러온 변화였다. 레이첼 본인은, 그것을 썩 나쁘지 않게 받아들였다. 정말로 죽을 때까지. 죽지 않을때까지. 죽지 못할때까지 그녀와 함께 할 수 있다면 그런것은 한참이나 가벼운 비용이였다.
옷을 걸어놓은 그녀가 비비안이 두드리는 옆자리로 천천히 걸어가 앉고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침대로 몸을 던졌다.
비비안은 베 혀를 내밀고 툴툴거리듯이, 레이첼의 한없이 가볍고 재밌다는 반응에 이야기를 하고는 소리없이 웃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누군가가, 죽거나 사라질대까지. 영원에 약속한 사랑은 한없이 가볍다. 그녀와 레이첼은 엉원을 사는 존재들. 그 불사의 약속을 들었을 때, 그녀는 레이첼이 변함 없을 거라는 걸 알았다. 한없는 가벼움은 레이첼에게 어울리지 않으니까. 옆자리에 앉은 레이첼이 그대로 자신을 껴안고 몸을 던지자 그녀는 꺅!! 하는 비명을 질렀다.
"잠...레이첼!!"
원망하는 것처럼 이름을 부르던 그녀가 옆으로 마주한 레이첼의 모습에 꺄르륵 웃었다. 새하얀, 레이첼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댄다.
"으응, 사랑해요~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지만요~"
고개른 살짝 움직여서 레이첼의 목과 어깨사이에 얼굴을 웉은 그녀가 갸르릉거리는 고양이처럼 중얼거렸다.
한참을 웃던 위트니가 웃음을 그치고 앞을 보았을 때 분명 도련님의 등이 보여야 했는데 제 눈 앞에 있는 것은 그의 등이 아니었다. 그가 나를 보고있다. 평소라면 인상을 찌푸리시며 뭐가 그렇게 웃기냐고 하셨을텐데 오늘은 저렇게 무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화나보이지도 않아 위트니는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위트니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그만두고 그가 자신을 보는 것 처럼 자신도 그를 빤히 쳐다보기로 했다. 오랜기간 동안 봐왔는데도 이렇게 자세히 얼굴을 본 것은 손에 꼽는 것 같았다.
갑자기 그가 욕지거리를 입밖에 꺼냈다. 위트니에게는 익숙한 말이었다. 오랜 기간 그와 함께한 위트니는 그가 지금 화가나지 않았음을 어렵잖지 않게 알아냈다. 그렇기에 담좋게 그의 얼굴을 보며 빙긋 웃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가 왜 하필 나를 불렀는지 알 수 없었다. 위트니는 자신이 그에게서 특별취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예전부터 알아왔다. 그가 자신에게 이렇게 대할 때마다 그녀는 상상에 젖어 혼자 설레하고 혼자 기뻐했으니 말이다. 그 기쁨도 잠시 그의 행동은 언제나 위트니를 설레게 하면서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은 좋았지만 그러다가 갑자기 일반 시녀처럼 대해지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 비참함을 잘 알면서도 위트니는 그가 자신에게 이렇게 특별히 대할 때마다 거부할 수 없었다. 바로 지금처럼. 그가 제 손을 잡고 옆에서 걸으라 하면 위트니는 거절할 방도도 생각도 없어져 바보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바보라도 좋았다. 기뻤으니까. 그의 한마디에 위트니는 눈에 띄게 밝아져 금방 입을 열고 만다.
"도련님! 정말 감사해요! 정말..."
뇌에서는 어서 아무말이라도 하라고 채찍질을 하지만 입은 그저 숨만 들이 내쉬며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위트니는 울쌍이 되어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퍼뜩 머리 속을 스친 생각을 바로 입밖으로 내뱉었다.
"제 음식을 맛있게 드셔주셔서 너무 좋아요!"
재미도 영양가도 없는 대화라고 생각했다. 내가 평소 어떻게 이야기했더라? 위트니는 안색을 굳히고 떠듬떠듬 변명했다.
"생각나는게 이것 밖에 없어서... 정말이에요. 도련 님이 절 전속 요리사로 임명하셨을 때 너무 기뻐서 다리에 힘이 풀릴 뻔 했다니까요?"
못된 뱀파이어라. 그래, 못됐다. 이 마음을 흔든것 만으로도 충분히 못되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거기에 어울려주겠다. 내가 평생동안 갈고 닦은 우직함, 고집으로 너를 품겠다. 못된, 바보 같은, 그리고 사랑스러운 뱀파이어여. 레이첼은 제 귓가에서 작은 짐승처럼 중얼 거리는 그녀의 머릿칼을 쓰다듬듯이 매만지며 작게 웃었다. 웃으면 복이 온다고 했던가. 오히려 그 반대인 케이스군.
고고한, 우직한 고집스러운 숲지킴이님. 비비안은 말과는 다르게 손으로는 조심스레 레이첼의 머리를 정리해주고 다시 어깨와 목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피의 내음. 그러니까, 가볍기 짝이 없는 나를 꼭 잡아야할거에요, 그렇죠~? 물론, 사랑해요 레이첼. 부비적거리던 비비안이 나직하게 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