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닉은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의 말에 이토록 진심으로 수긍하게 된 적은 손에 꼽았다. 그리고 레오닉의 예감으로도 그녀가 진정 과격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면 원색적, 더욱이 근본적인 화법이 먼저 튀어나가리라 생각했다. 총과 함께 말이 나가는 사람, 그의 생각에 아리나는 일단 총이 먼저 자기주장을 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이게 체스 게임이었고, 네가 한 말이 전략인 거라면 나는 널 존경해 버릴 것 같다."
레오닉은 기가 막힌 심정이었다. 다만 그것은 무언가 일이 잘못 되어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고 단순히 감탄스러운 마음에서 발산하는 심정이었다. 분명히 자신의 의도에 걸려든 듯 하면서도 사실은 치밀하게 간파당하는 듯이 느껴지는 것은 술이 들어간 레오닉의 혼자만의 착각일 뿐일까.
"정말로 감자를 좋아하는 것 같네."
아리나가 살며시 눈을 감자 레오닉도 눈을 감았다. 이 쪽은 그녀의 상황과는 달라도 다른 이유로 머리를 식혀야 했다. 정말로 색깔이 강한 사람이다, 라고 레오닉은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향토적 사투리하면서 그저 사람의 형식 자체에 아리나라는 부류가 독단적으로 존재하지 않을까.
"그게 가장 위험하게 마시는거야. 어디 다친 곳은 없고?"
사뭇 진지한 어투로 레오닉이 되물었다. 표정 또한 게슴츠레한 눈빛에서 진중하게 굳었다. 누구라도 코가 삐뚤어질 정도로 먹다 진탕 취해서 길바닥 신세를 지는 사람을 보면 걱정하기에 마땅하지만, 의사를 지망하던 레오닉은 체감하는 바가 더욱 컸다.
"이거 내가 먼저 취해버리면 어쩐담."
진심이었다. 게다가 술상대가 툭하면 허허벌판의 길바닥 취침이 잦다니 먼저 취할수도 없는 노릇이고.
처음 이 방에 발을 들였을때 느낀 휑함은 보통 이상의 것이었다. 사용한 흔적도 없는 저 찬장을 이용하여 불을 지피고 나서야 사람이 사는 온기가 조금 나지않았나. 비비안이 그걸로 좋다면 특별히 건드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역시 이대로는 이 방이 가엾게 느껴질 정도로 조금 심심했다. 그런 까닭일까 레이첼은 괜찮다면 도와주겠다고, 그녀에게 선뜻 말했다.
"재밌군. 이 내가 쉽게 먹힐거라 생각하는건가."
그렇게 장난삼아 말하며 송곳니를 세우는 그녀가 그저 귀엽게만 느껴지는지, 그 뺨을 감싸던 손을 움직여 손 끝의 손톱으로 툭툭하고 가볍게 건드려 보일뿐이었다.
맞대었던 이마를 천천히 떼어낸 엘라리스는 미묘한 표정을 지은채 위트니를 바라봤다. 어제 손을 올렸을때와 별반 다를게 없는 것 같은데. 이제 그녀가 아프지 않다는건 확실해 졌다. 아픈게 아니라면 무엇때문에 얼굴이 붉어지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의 대답으로 인해 이유를 알게된 엘라리스는 허탈한듯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걱정되는 마음에 평소의 나라면 하지않는 쪽팔린 짓까지 했는데. 뭐? 부끄러워서?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엘라리스는 천천히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기분이 굉장히 언짢은데. 따지고 보면 그녀의 잘못도 아니었기에 화를 낼 수도 없다. 화풀이 상대가 필요하다. 그것과는 별개로 그녀가 정말 아프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어왔다.
"아이씨... 그딴 말을 당당하게 내뱉으면 어떡해? 장난하냐?"
그게 뭐가 부끄러운데. 짜증스럽게 덧붙였다. 아까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예쁘다' 라는 단어와 자신이 얼굴을 붉혔다는 사실이 떠올라 잘 정돈된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앞으로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졔는 왜 쓸데없이 솔직한 대답을 해서 날 혼란스럽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머리가 복잡해진 엘라리스는 그냥 방금 전 일을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계속 떠오를 것 같았기에. 왜 자꾸 그녀에게는 평소의 나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지 모르겠다. 그게 의도한 것이든, 의도치 않은 것이든 이유를 알고 싶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외출을 하고 돌아올 때 마다 꾸준하게 선물을 건네는 행동도 그녀에게만 한정되어 있었다.
"진짜 느리네. 빨리 빨리 좀 다니자. 사람 기다리게 하지 말고."
성큼성큼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던 엘라리스는 그녀가 잘 따라오나 확인하기 위해 그 자리에 멈춰섰다. 보폭이 꽤나 벌어져 아직까지 따라오지 못하고 저 멀리서 총총 걸음으로 뛰어오는 모습을 상상했건만 그녀는 생각보다 잘 따라오고 있었다. 내가 선물한 드레스까지 입고 나와줬는데 두고 가기는 조금 미안하네. 그녀가 제 앞에 다다를때쯤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내밀었다.
굳이 도와줄 필요없이 레이첼네로 들어가버릴까요? 그녀는 도와주겠다는 레이첼의 말에 굉장히 연극적인 특유의 목소리로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쓸쓸해보인다면 뱀파이어 한마리는 어떠신지~? 라고 덧붙히며.
"네에, 쉽게 먹히지요. 몇가지 나열해볼까요? 하나! 레이첼니임~은 스킨십에 약하다! 두번째느은~"
손톱으로 톡톡 귀여운 고양이 내지는 동물에게 하듯이 행동하는 레이첼의 모습에 그녀는 순식간에 뱀파이어다운 얼굴로 나긋하게 속삭이면서 뺨을 두드리는 손끝을 앙- 하고 물려고하며 스치듯이 레이첼을 안고있던 팔을 미끄러트리며 가볍게 레이첼의 단단한 등이나 어깨를 손끝으로 만진다.
레오닉 말에 알겠다는 듯 아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나는 크게 하품을 한 번하고는 테이블에 그대로 엎어지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조금 졸린 듯 해보였다. 아니면 단순히 취기가 심해진 것일 수도 있다. 그 풍성한 머리카락에 얼굴이 모두 가려 해변에 떠밀려온 해조류 같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리나는 총이 먼저 나간 후에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이런 성격 때문에 실제로 징계를 많이 먹었고 심지어 지금도 징계를 받고 있는 중이다.
“뭔 소리인지는 잘 모르겠고 날 존경한다면 고마워.”
갑작스러운 레오닉의 칭찬에 벌떡 일어난 아리나-머리카락이 장관이었다―가 입 꼬리를 올려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어쩜 저리 다양한 미소를 짓는 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감자 진짜로 좋아하지- 어렸을 때는 싫어했는데 커보니까 계속 먹고 싶더라고!”
눈을 반짝이며 몸 상체를 이리저리 흔들던 아리나가 기대어린 표정을 지었다. 분명 곧 나올 찐 감자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술에 취해 붉어진 얼굴을 식히려는 듯 손을 들어 열심히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괜찮다! 나 건강하다고 말했지 않나!”
아까보다 사투리가 심해졌다. 아리나도 느끼고 있었다. 이러다가 다시 표준어를 못 쓰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에 입을 빠르게 닫았다. 세상에 내가 어떻게 표준어를 써온 거지.
“니가 먼저 취하면 내가 잘 데려다 줄게, 걱정 마.”
대체 어떻게 잘 데려다 준다는 소리며, 저렇게 말하는 사람치고 믿을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리나는 제법 당당해 보였다.
“이야, 니 머리색깔 이쁘다.”
더 이상 아리나의 본능을 컨트롤 해줄 이성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의 있는 말을 입 밖으로 바로 내뱉을 수밖에 없다.
원한다면 성을 문서 상에서 지워버릴까? 하고 말했다면 분명히 반대하겠지. 한참 전에 일거리를 몰아 주는 것 정도로도 뭐라고 그랬으니까. 아나이스는 온화하게 미소지으며 시이의 볼을 손가락으로 간질였다.
"확답을 원한다면, 그래."
당연하다는 듯, 망설임 없는 답변이였다.
"좋아하는 데 하지 말라는 것은 역설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무슨 뜻으로 말 한 것인지는 알겠지만. 아나이스는 히죽 미소지으며 약올리듯이 시이의 손을 피해 움직이려 한다. 정말로 직접 먹여주고 싶은 생각도 있었으나, 부끄러워하는 걸 보고 싶다는 마음이 아예 없지는 않았기에 망설임없이. 그래도 이건 비밀로 하는 편이 더 좋을 것이였다.
".....어라."
순식간에 입에 과자가 물리고, 또 그것을 반쯤 코 앞에서 베어물어간 시이의 담대한 행동 덕에 아나이스는 이럴 거라곤 몰랐다는 듯이 조금 멍해 보였다. 반 뿐이 안 남은 과자를 먹고 있기는 했지만. 아나이스는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것과는 정 반대로 물들어 감정을 드러내는 시이의 얼굴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린다.
"있지, 시이. 그렇게 훅 다가오면.."
짧게 한숨을 쉬다가 잠시 침묵한 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곤 시이의 볼을 꼬집으려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