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같은 이단심문관이 스스로 하고 싶은대로 하다니, 저흰 나름 국가기관입니다. 어린 군인양. 그리고 저희에게 주어진 사명은 환상종의 멸종. 당신에게 더 자세히 환상종으로 인해 일어나는 피해를 알려드리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당신에게 설명한다 하여도 당신은 그저 지금과 같이 저를 광대, 당신 스스로를 여왕으로 여기며 내려볼 뿐이겠지요."
한 손으로 지팡이를 돌린다. 마치 수레바퀴 처럼 돌아가는 지팡이를 손으로 다시 붙잡고, 그는 어떤 존재로 보이냐는 쥬피앙의 질문에 살갑게 웃으면서 최대한 공손하게 말했다.
"군인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너무나도 어린 영애- 로 보입니다. 어린 군인양. 너무나도 어리고 가냘파서 손을 가져다 대면 흩어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그 검이 손을 두동강 내버리겠죠."
"저의 이 철혈의 정의관. 동감도 동정도 이해도 바란적 없습니다. 이해를 받는다면 조금 기쁘겠지만.. 흠 - 이전 까지는 이단심문관을 포함한 교단의 모두가 저의 이 정의관과 비슷한 정의관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환상종이라면? 흠 글쎄요? 당신에겐 환상종의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열심히 지운 듯한 비싼 향수 냄새 비스무리한게 날 뿐이죠. 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주세요. 농담이니-"
부러진 강철과 수많은 피로 채운 거짓된 정의관으로 스스로를 속인다. 그게 허황된 진실이란 사실을 누구보다 스스로가 잘 알지만 속아넘어간다. 자신이 자신에게 속지 않음을 알고 있음에도 억지로 속이고, 또 자신이 자신에게 뻔한 거짓말임을 알고 있음에도 넘어가야 한다.
"이미지? 하아- 이미지는 무의미 하답니다 어린 군인양? 만약 세상 사람들이 저를 도살자, 흉악귀족이라고 손가락질 한다 하여도- 제가 지금 행하는 일이 먼 미래에 평화로운 인류를 구축하는 것에 도움이 되었다면 전 역사책에 마저 그렇게 남겠습니다. 물론 같은 인간을 죽이지는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환상종 한정의"
그런 정의관.
"쥬피앙 크리스티나 데 메데치아. 아- 그 집안의 여식이로군요. 제가 괜히 이상한 호칭을 붙인 무례를 용서해주시겠습니까 메데치아 양?"
쥬피앙이라고 불러주라고 했음에도 알폰스는 그녀를 메데치아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는 괜히 허례의식이 가득 들어간 인사를 건네며 생글거렸다.
누가봐도 장미인데. 까칠하게 대답하던 중, 환하게 웃는 모습에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서 기분이 좋아진 건가. 확실히 지난 번엔 약속시간을 지키지 않고 1시간이나 늦게 돌아가긴 했었다. 솔직히 그녀가 날 기다리던 말던 알 바 아니지만 그때를 회상해보면 조금 미안하긴 하다. 그녀는 나와 꽤 오랜시간 함께 지내왔고, 자신이 맡은 일도 착실하게 수행하고 있으니 애써 고생시킬 필요는 없겠지. 장미를 잡아드는 위트니를 보며 들리듯 말듯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별 생각없이 가져온 것이니 버리던가, 간직하던가 알아서 해라."
그녀의 성격상 버리진 않겠지만. 혹시나 내가 선물해준 장미를 잃어버리더라도 신경쓰지 않는다. 정원에 장미는 많이 피어있었고, 또 하나 꺾어오면 되는 일이다. 열심히 하는 모습이 기특해서 가끔씩 재미삼아 위트니에게 선물을 건네기는 했는데. 이젠 버릇이 되어버린 기분이다. 이렇게 아낌없이 선물해주다간 시녀의 버릇을 잘못 들이게 될지도 모른다. 슬슬 자제하는게 좋겠지. 가볍게 머리를 헝클어 뜨리곤 가르마로 인해 나뉘어져있던 앞머리를 전부 내려버렸다. 앞으로 그냥 내리고 다닐까, 의미없는 고민을 하며 방금 전 내가 건넨 망토를 접는 위트니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딴 낯간지러운 말은 필요없어. 어서 식사나 준비하지 그래?"
슬슬 배가 고파졌거든. 위트니의 요리 실력은 꽤나 수준급이었다. 이전에 내 음식을 담당하던 요리사가 만든 요리보다 그녀가 만든 요리가 더 입에 맞았기에 아예 내 식사를 그녀에게 맡겨버렸다. 그러고보니 요즘 저택에서 식사하는 일이 잦아진 것 같다.
"미열이라도 있나?"
그녀의 상기된 뺨이 눈에 띄었다. 잔병앓이라도 하는 것인가. 그녀가 아프면 내 시중을 들 사람이 하나 사라지는 것이니 상당히 곤란해진다. 무표정한 얼굴로 빤히 쳐다보다가 그녀의 이마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뭐랄까, 고약한 원숭이들 같아. 눈 앞에서는 온갖 아양을 떨면서도 멀리서는 괴성을 지르며 비웃는거지. 하지만 요점은, 결국 걔네는 원숭이라는거야."
레오닉은 살포시 달아오르는 낯짝의 후끈함을 음미한다. 입과 코에서 짓눌린 포도향이 숨을 간질였고 눈은 게슴츠레 힘을 잃어갔다. 술기운이 유입되면서 그의 비유적 표현 회로 또한 가동의 불이 켜졌다. 레오닉은 점차 땅으로 치우쳐갈 듯이 고꾸라지는 아리나의 고개에 손가락을 가볍게 짚었고 부드럽게 밀어올렸다. 위를 향해.
"감자! 꼭 들러봐야겠는걸. 하지만 아리나, 나는 평가만큼은 냉정한 사람이야."
장난스러운 제스처를 곁들이며 기대에 부응할만큼 맛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아리나의 당찬 미소를 보며 이단심문관의 정복, 규율, 상징 따위는 없이 단촐한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아리나를 떠올렸다. 만일 그림으로 그려낸다면 그 이름은 북부 노을과 앵무새 아가씨로 하겠다.
"아냐, 그러니까 내 말은, 안주는 필요 없냐는 뜻이었어. 오늘은 축제니까 뭘 원하던 다 먹을 수 있는 날이잖아?"
붕 뜬 구름들 사이를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하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녀에게는 일련의 상황보다 즉각적인 현상이 더 쉽게 주목을 끄는 듯 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입으로는 너스레를 떨면서 화두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레오닉이었다.
"오, 건강하군. 그럼 체기 말고 취기는 어때?"
항상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대답하는 아리나였지만, 레오닉은 그 부분을 의식하는 것처럼 보이려 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그걸 물은게 아니라고 수정하려 드는 사람이야 끝내는 둘 다 피곤하게 만들게 아닌가. 붉어지는 아리나의 이마에서 손을 떼어 와인, 머리카락,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길게 자라난 한 올의 붉은 머릿칼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얼굴도 머리처럼 빨갛게 변한다면 그럼 달걀귀신일까.
"여기 촌놈이 둘이나 있는데 잘 안 맞을수가."
레오닉은 익살스럽게 웃었다. 적어도 비슷한 경험을 토대로 친밀감을 느끼는건 그들 두사람밖에 없었으니.
까칠하게 대답하는 도련님에 위트니가 입을 조금 삐죽였다. 이것도 다 도련님의 성격을 어느정도 알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저렇게 매정하게 구실 때가 있어도 정말로 엄하게 벌을 준 적은 없었으니까 괜찮은 것 맞겠지? 위트니가 속으로 이것저것 고민했다. 아무리 오랜 시간 같이 있어도 불안한 것은 불안한 것이었다. 위트니는 흘깃 도련님의 가슴께-그녀는 키가 작았다-를 보고 다시 눈을 아래로 깔았다.
“어떻게 버려요! 이 예쁜 걸... 꽃병에 넣어 놓을게요.”
위트니는 자신의 앞치마 주머니에 기어있는 장미를 확인했다. 아직까지는 아까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실수로 망가질가 노심초사한 위트니는 일부로 팔을 자신에게서 멀게 떨어지게 했다. 이러다가 잘못 짓눌리면 큰일 날라, 온 정신이 장미에 팔려있었을 때, 갑자기 머리를 헝크리는 도련님에 모습에 위트니는 입을 작게 벌렸다. 저 머리를 하려고 얼마나 많은 시간이 투자되었을까 위트니는 오래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헝클어진 앞머리조차도 잘 어울리는 도련님이었다. 참으로 축복받은 얼굴이었다.
“알았어요! 그리고 식사준비는 이미 해놓았으니까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위트니는 이미 그가 배고파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요리를 썩 마음에 들어 하는 듯 했기에 자신에게 모든 식사준비를 맡기었다. 일거리가 늘어나는 일이라고 동료들은 위로했지만 위트니는 오히려 인정받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위트니는 퉁명스러운 대답과 반대로 옅은 미소를 띠웠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어린 얼굴은 다가오는 엘라리스의 손에 당황으로 물들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차마 그 손길을 거부하지 못하고 변명을 하는데,
시이는 그렇게 말하곤 이내 한숨을 푸욱 쉬더니 얼굴을 붉히며 손으로 얼굴을 덮어 가린다. 귀에 대고 속삭이는 그 목소리가 얼마나 설레는지 정신을 못 차리겠다 싶은 느낌이 들어 일단 얼굴부터 가린다. 그보다 축하파티라니 이 사람 지금 무슨 소리인거지?! 하는 생각이 들어 순간 조금 당황했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도리질하며 그건 좀 아니라는 의사를 아나이스에게 전한다.
"......그보다 미안해 할 게 뭐가 있어요. 내가 그동안 티를 안 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제대로 어린애를 벗어나서 여자로 인식되고 싶었다고요. 그래서 일부러 티 안 냈던 건데. 지금보다 더 어릴 적에 말했으면, 아나이스는 분명... 어린애 취급 했을 것 같아서. ......이젠 어때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가만히 아나이스를 올려다본다. 이젠 좀, 제대로 인식될 수 있을까나. 이젠 내가 어린애가 아니게 보일까. 그렇다면 좋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