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한 규칙 조항만 따른다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을까요. 일은 일일 뿐이죠. 저는 딱히 그런 사명을 가진 기억은 없는데 말이죠. 아뇨, 딱히 말해주시지 않아도 괜찮답니다. '환상종들에게 많은 인간들이 죽었다.' 단지 그 뿐이잖아요. 아닌가요? 허나, 나는 그들의 행위와 생명이 결단코 무의미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만일 그랬었다면 이런 시긴에 이런 장소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테니끼요. 그들은 자신들 생각한 대로 행동했고 그 결과를 맞이했을 뿐. 그리고ㅡ. 틀리셨어요. 저는 여왕이 아니에요. 당신과 똑같은 광대죠. 맞겨진 배역과 역활이 조금 다를 뿐이에요. "
스스로에게 주어진 일만 잘하면 될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기관이니 뭐니 업무에만 충실하면 되니까 상관없잖아. 그런 것. 모두가 자신의 직업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고 허물며 사명감 같은 감정을 지니고 있는 것은 더욱 드물다.
"그렇겠지죠? 그렇지 않다면 저같은 사람이 무엇때문에 귀찮게 이단심문관을 지원했겠나요? 뭐ㅡ. 그리고 제가 젊은 것은 사실이니까요. 다만, 후자는 틀리셨네요. 나는 검으로 사람의 팔목을 뼈채로 자르는 재주는 없어요. 그런 짓을 했다간 뼈에 칼날이 걸려버리겠죠. 하지만.... 죽이는 것은 가능하죠. "
"음~ 아마도 그럴거라고 생각했어요. 이해를 바라는 태도는 아니였거든요. 종의 구분을 냄새만으로도 할 수 있나요? 특별한 재주를 가지셨네요. 그런데 기껏 좋은 향수를 썻다면 뭣하러 그 향기를 다시 지워버리는 수고를 하겠나요? 처음부터 쓰지 않으면 될텐데요. 아니면.... 어쩌면 그 향기 때문에 환상종이나 다른 인간에게 호감을 살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아ㅡ. 농담이였나요. 딱히 농담에 재주가 있지는 않으시네요."
나를 떠보는 걸까? 아무래도 좋아. 왜냐면 그건 사실이거든. 맞아, 내가 나이도 적고 이 군인놀이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거든. 상대의 말에 능글거리는 듯한 태도로 나는 답한다. 상대쪽에서 은근히 '그런 종류'의 농담으로 나온다면 나도 그렇게나와야만 하지 않겠어? 나는 그렇게 말하는 상대의 말에 능글거리는 듯한 태도를 유지하며 그렇게 말한다. 그런데 모두가 자신의 생각과 같을 거라는 발상의 자신감은 자기 자신의 신념에 따른 기반인 걸까. 방금 그게 농담이였다면 정말 재미가 없네. 사실, 나에게는 농담이라기 보단 다분히 상대를 약올리려는 짓처럼 보이지만.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이미지라는 것은 의외의 복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당신을 적대하는 것이 환상종뿐만아니라 같은 인간도 있을 거라는 것은 당신도 잘 알지않습니까?"
다른 의미로는 이미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라는 것은 사실인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대외관계이 있어 살갑게 대하게 주는 첫번째 요인이 이, 이른바 '이미지'라는 것에는 부정없는 사실이다. 이건 뭐, 한명을 죽이면 살인자 1000명을 죽이면 영웅이라는 논리가 아닌가. 자신만의 욕망을, 목적을 성취하기위에 대의로 포장하고 그것을 들먹이는 것이야 말로 '이미지'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아까부터 뭐가 '인류를 위해서다!' 라는 거야. 단순히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을 뿐인 거잖아. 자신이 환상종에게 당했으까.
"뭐ㅡ. 그렇지요. 저는 그 가문이 딸이지요. 그런데, 용서라던가 그런게 왜 필요하죠? 저는 당신 저에게 피해을 받은 기억은 없는데 말이죠. 애초에 문제가 있었다면 처음부터 지적했을 거에요."
아, 이름이 아니라 그쪽으로 부르는 호칭방법인가. 딱히 상관 없긴 한데 굳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모르겠다. 애초에 그런 건 궁금하지도 않고. 지금에서 보니 이 사람, 묘하게 웃는 것이 많아지 않았나?생글생글 거리고 말이야.
딱히 그녀에게 불만이 있어 삐딱한 대답이 나간건 아니었다. 내 말투는 본래 상냥함과는 거리가 먼 편이다. 한 마디 한 마디에서 타인을 향한 배려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어릴적에도 이런 건방진 말투 덕분에 가문의 어른들께 자주 꾸중을 듣곤 했었다. 내 말투에선 전혀 품위가 느껴지지 않는단다. 하지만 난 그런 사소한 부분까지 일일히 신경쓰는 성격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고칠 마음이 없었다. 아까 까칠한 대답에 그녀가 상처받지 말았으면 한다. 혹시 상처받더라도 달래주지 않을 생각이지만. 그녀와는 지금처럼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 직접적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수다스러운 그녀의 성격이 재밌기도 했고, 유능한 시녀를 잃는건 탐탁치 않은 일이다.
"꽃이 시들면 다른 장미를 꺾어주면 되잖아. 한낯 장미일 뿐인데 애지중지할 필요는 없지."
내가 선물한 장미는 그녀의 앞치마 주머니에 안전하게 꽂혀있었다. 내가 준 선물을 소중히 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지만 티를 내진 않을 것이다. 괜히 쪽팔려질게 뻔하니까. 장미를 빤히 바라보단 시선을 살짝 돌려 그녀의 얼굴에 고정시켰다. 그녀가 가진 보라색 눈동자는 언제봐도 신비롭게 느껴졌다. 한 번도 말해준적이 없는탓에 그녀는 모르겠지만, 처음 만났을 때 부터 그 눈동자가 아름답다 생각했었다. 루나티아 가문의 뱀파이어들은 대부분 나와 같은 붉은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기에, 처음보는 생소한 색의 눈동자에 마음이 끌리는건 나로선 당연한 일이다.
"어떤 요리를 준비했지?"
설마 날 엿먹이기 위해 풀만 가득한 식탁을 준비하진 않았으리라. 딱히 가리는 음식은 없었지만 아삭아삭한 식감을 가진 야채는 나와 맞지 않았다. 애초에 난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면 입에대지 않는터라 야채를 제대로 먹어본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이왕이면 고기 요리가 좋은데. 요리와는 별개로 그녀가 만든 디저트 또한 내 입에 맞았다. 오늘도 그녀가 만든 디저트로 식사를 마무리할 생각이다. 달달한 브라우니를 준비시켜야지.
"다행이네. 네가 아프면 걱정되거든. 유능한 시녀가 앓아눕는건 내게도 큰 손실이니까."
다가오는 내 손길에 그녀는 당황한 표정을 비췄다. 이에도 아랑곳 않은채 그녀의 이마에 손을 살짝 올려보았다. 다행히도 열은 없었다. 천천히 손을 떼네고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마주보았다. 주인의 얼굴을 빤히 보다니 시녀주제에 건방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