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나는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한다. 자기 홀로 방안에 침대 누워 있을 때면, 시끄러워 죽을 것 같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 저번의 소동으로 강제로 휴가를 받아버렸다. 보통 이단 심문관이라면 벌로 추가 근무를 했을 테지만 상관은 아리나를 너무 잘 알았다. 분명 추가 근무를 주었다면 더 기뻐하리라. 그렇기에 상관은 특별히 아리나에게 징계로 휴가를 주었던 거이었다. 추가 근무를 기대하다가 왠 날벼락이람. 아리나는 한숨을 쉬며 바깥에 나왔다. 여전히 머리가 아팠다.
‘산책, 산책을 하자.’
산책을 할 때면 그나마 괜찮았다. 아리나는 비틀비틀 일어나 가운을 걸쳤다. 쪼잔하게 총을 꺼내든 걸로 이런 징벌을 내리다니. 아리나는 상관을 향해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하며 집을 나섰다. 어디든 좋으니, 일단 걸어보자. 아리나는 아무생각 없이 발이 가는 대로 걸었다. 길을 잃었다는 생각은 없었다. 지금은 그냥, 걷고 싶었다.
걷다보니 아리나의 눈앞에 아름다운 장소가 펼쳐졌다. 강이 이어져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근처에 이런 장소가 있던가? 아리나는 갸웃거리며 고개를 꺾었다. 그 때, 익숙한 붉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오늘부터 1주일간 여명으로 자유롭게 놀러가도 된다는 공지가 떨어졌다. 얼마전 이런 저런 사건이 일어난 탓에 학원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는데. 학생들의 기분이라도 풀어주려는 것일까. 갓 입학한 신입생들은 여명으로의 여행을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썩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평소 여명에 자주 들리는 편도 아니었으며 여명에서 별 다른 재미조차 찾지 못했다. 가끔 간식이 떨어졌을때 넥타르 과자상점에 들러 간식을 보충하러 가는 정도? 그래서 이번에도 여명에 가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요즘따라 너무나 따분하게 느껴지는 학교생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간만에 들려보기로 했다. 아무리 그래도 혼자 여명에서 시간을 보내는건 무척 심심한 일이다. 내 심심함을 덜어내기 위하여 유채헌과 기숙사 휴게실에서 만나 함께 여명에 가자고 미리 약속을 잡아놓았다. 교복을 입고 가도 상관은 없었지만 간만에 사복을 입고 외출하고 싶었기에 새로운 마음으로 옷장을 열어보았다. 평소 사복을 입을때면 항상 남성용 기모노를 고수해왔다. 다만 오늘은 기분전환을 하고싶어 평범한 사복을 택하기로 결정. 잘 다려진 검은색 와이셔츠에 검은 슬렉스를 맞춰 입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버건디색 오버코트를 셔츠 위에 걸쳤다.
"미미쨩 제발 좀 닥쳐줘."
뭐가 불만인지 내 패밀리어인 뱁새 미미쨩이 하염없이 지저귄다. 배고플까봐 모이도 제대로 줬는데. 왜 저러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오랜만에 바깥 바람이라도 쐐게 해주고 싶어 미미쨩도 함께 데려갈 생각을 하고있었지만 내 심기를 건드린 대가로 하루종일 새장 안에 넣어두기로 했다. 새장에 갇힌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더욱 시끄럽게 지저귀는 소리를 뒤로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아씨오, 노예."
노예면 노예답게 미리 나와서 주인님을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게 정상아닌가? 마음에 드는게 하나도 없다. 코트 안주머니 넣어둔 지팡이를 꺼내어 재미삼아 아씨오 마법을 외쳐보았지만 역시 통하지 않는다.
"아씨오, 유채헌."
가능할리가 없지. 제발 사람한테도 통하게 누군가 아씨오 마법을 상향시켜줬으면 좋겠다. 작게 한숨을 내쉬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다리를 꼬았다. 유채헌이 나타나면 날 기다리게 만든 벌로 엄청 괴롭혀줄 생각이다.
아리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헨리를 보았다. 헨리의 수화를 한번 쓱 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속이 터지는 헨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리나는 자연스럽게 답했다.
“맞아, 그때는 조금 위험했는데. 다행히도 잘 돌아왔어! 그리고 걷다보니까 여기던데? 헨리를 만나서 다행이야. 잘못했다가는 오늘 안에 집에 못 들어가는 줄 알았잖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무슨 일인지 가늠하기 힘들지만 분명히 제정신으로 저지른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이 한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는 것인지 아리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마치 오늘 날씨가 매우 좋다고 전하는 어투였다. 헨리가 자신의 뺨을 쭉 늘리자 아리나가 ‘으아아‘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고 해도 딱히 제재할 생각은 없는 것인지 양손이 허공에 맴돌 뿐 헨리의 손을 붙잡지는 않았다.
소류가 잔을 소리없이 내려놓았다. 사소한 버릇들이 가랑비에 젖듯 자신도 모르는 새에 찬찬히 바뀌어 가고 있다.
"무릎 정도는 흔쾌히 꿇었을 것을."
속이 베베 꼬여 한마디의 말에 백가지의 뜻을, 하나의 행동에 천가지의 의미를 담는 자들이 있다. 아쉽게도 소류의 주인은 그런 종류의 인간은 아닌 모양이지. 소류가 스테이크 접시를 살짝 밀어냈다. 신선하고 질좋은 고기인 것이 눈에 빤히 보였지만 아직 혀 끝에 남은 피 맛이 선했다.
"고맙군. 사냥개가 누리기엔 더할 나위 없는 호사가 아닌가."
소류의 무서운 점은 이것이 비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소류가 신선한 피색의 눈으로 캐서린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딴엔 고마움의 표시가 맞았다.
"그렇게까지해서는 유흥이 부족하지, 진심으로 우러나오는게 아니면 봐봤자 흥미가 없다구? 마치 너처럼 말이야. 전혀 무미무취의 볼거리를 굳이 내 혀를 놀려가면서 시켜 볼일은 아니지."
소류가 자신을 보면서 비꼬듯 고마움을 표하자 그녀는 콧방귀를 끼면서 이야기합니다.
"확실히 사치지. 너에게가 아니라 나한테 하는이야기야. 설마 너가 사치를 누린다는 그런 신세 좋은 이야기가 될거 같았어? 자의식 너무 큰거 아냐? 어느 누가 너따위가 사치를 즐긴다 생각할까, 안타깝네, 이건 사냥개에게 인간의 식량을 나누어준다는 사치를 내가 누린다는 이야기였어. 아, 너 손으로 먹어볼래? 보고싶어졌는걸? 할 수 있지?"
얼굴이 싸해지는 헨리의 얼굴을 보고나서야 자신이 한말중 이상한 말이 있었음을 깨달은 아리나가 떠듬떠듬 변명을 했다. 헨리는 화나면 무서우니까.
“어... 괜찮아! 일단은 살아서 돌아왔고. 딱히 문제될 것도 없으니까.”
아리나는 양심의 가책 하나 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 환상종 친구를 하나 사귀고 온 것이 문제가 아니라면 또 뭐가 문제가 되겠는가. 분명 아리나라면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헨리가 자신의 볼을 더 세게 잡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야 허공에서 멈춘 손을 올려 헨리의 손을 붙잡았다. 비록 헨리의 악력을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아리나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아아아, 아파. 헨리 아파!”
한쪽 볼이 쭉 늘어져 발음도 잘 되지 않았다. 아리나는 살면서 자신의 볼이 말랑거린다는 자각도 없었고 지금도 그렇게 말랑거린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헨리는 왜이리 자신의 볼을 좋아하는 지 알 수 없었다. 아리나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헨리에게 보여주려는 표정임이 분명하게도 헨리를 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