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겁 먹지 않고 다가오는 비비안. 오히려 날카로운 도신을 목에 직접 대고서 현재 자신의 정확한 상태들을 나열하며 되묻고 있었다. 그것들을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강하게 말한것도 있었다. 헌데 이렇게 되는가. 아니, 들킬것이란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를 바라지 않았을 뿐이지. 레이첼은 뻗었던 칼을 조용히 내렸다.
"알고있다."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것도 아니었다. 미련하게 보이겠지. 으레 환상종들이 이 숲 지킴이를 보는 시선이 그러하듯이. 환상종이 되었음에도 그 길을 부정하며 일부러라도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넣는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겠지. 이런 자신에 대한 이해나 동정은 바라지 않는다. 지금은, 지금은 그저... 돌아가자.
비비안이 레이첼을 잡아채자 몸이 가볍게도 획 돌아갔다. 평소와도 같으면 그 환상종 사냥으로 단련된 몸이 강철처럼 느껴지면서, 그저 돌아보는 심심한 반응으로 그쳤을테다. 현재의 그녀가 많이 쇠약해졌음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레이첼 스스로도 놀란듯 순간 눈이 동그래졌고, 이내 마지못해 깨달은듯 다시 눈빛이 변했다. 지금 상태로는 이 뱀파이어 조차도 거스를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거다.
"...무슨 말이 하고싶은거냐."
그 와중에도 통증과 싸우는 듯 찌푸려진 눈살. 빈 손으로 움켜쥔 옆구리에는 여전히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이내 손목을 붙잡히자, 의외로 저항하지 않는다. 그리고 손이 내려가며 보인 달아오른 아나이스의 얼굴에 잠시 고민하다가 맹랑하게도 픽 웃더니 답한다.
"그만큼 좋아하니까요. 그러니까 나 이제부터 꽤 대담해질거에요. 알았어요?"
시이는 그렇게 말하곤 장난스레 웃더니, 이내 장난기를 거두곤 확 돌변해서 아나이스의 말을 하나하나 반박하기 시작했다.
"...자, 그럼 이제부터 말하죠. 일단 첫번째, 그 정도는 권력 남용이 아니라고 생각하실 지 모르겠는데. 원래 아니라고 생각하는 가벼운 것들이 모이고 모여서, 교황 성하로서의 아나이스에게도 영향이 가는 거에요. 알았어요? 그러니까 그러지 말아요. 공과 사를 구분합시다, 아나이스!"
그렇게 말하곤 손에 힘을 뺀 채 아프지 않게 아나이스의 이마에 딱밤을 놓는다. 거의 아프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약하게 하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두번째. 쓰라고 있는 건 맞지만, 막 쓰라고 있는 건 아니에요."
그 뒤에 또 다시 딱 하고 아나이스의 이마에 한번 더 딱밤을. 이번에도 거의 아프지 않다.
"그리고 또 마지막. 완전범죄는 없어요. 안 걸리게 잘 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걸려서 떳떳하지 못하게 될 일을 하지 말아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딱밤을 한번 더 놓더니 살짝 웃고는 이내 아나이스에게 말한다.
"자, 그러면 이제 여태까지 벌칙이었고요. 그럼 이제..."
그러곤 다시 그 전처럼의 시이가 되어 일어나더니, 애교를 부리듯이 이마에 한번 키스하고, 그 뒤에는 콧잔등에 또 한번, 그리고 마지막은 아나이스의 목에 걸린 목도리를 잡고 끌어당겨 그의 입술에다가 제 입술을 겹쳤다.
"첫번째는 딱밤 때려서 미안하다는 의미로 한번. 두번째는 그만큼 좋아해줘서 고맙다는 의미로 한번. 그리고 마지막은 그냥이에요."
푸른 은빛의 털을 가진 늑대가 숲길을 걷는다. 두 개의 꼬리가 무언가 불쾌함을 표시하기라도 하는 듯이 조금 거칠게 흔들리고, 입가에는 푸른 털과 대비라도 되듯 붉은 무언가가 가슴께의 털까지 잔뜩 묻어있는 상태. 기분이 안좋다고 사방에 알리기라도 하듯이 늑대는 크르릉거리면서 숲길을 걸어간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숲의 경계 근처에 있는 작은 호수. 경계라도 하듯 주변을 두리번거린 늑대는 평상시 유지하던 성인 어른의 크기에서, 작은 강아지 정도의 크기로 몸을 줄였고 그 상태로 짧게 하울링을 하며 형태를 인간의 그것으로 바꾼다.
"아....으..진짜..."
물은 싫은데. 10살 남짓 되어 보이는 은빛 머리칼의 남자아이는 볼을 부풀리며 꼬리를 탁탁 흔들었고, 꼬리에 맞은 땅이 깊숙히 패이며 흙먼지를 일으키자 갸아악. 이라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후딱...씻어야지"
킁킁거리며 꼬리털 끝자락의 냄새를 맡던 아이는 귀를 살짝 세우는 가 싶더니, 물속으로 조심스레 들어간다.
경계선 근처에서 보초를 서는 임무는 아리나가 제일 좋아하는 임무였다. 잘하면 환상종도 볼 수 있고 동물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무엇보다도 마음껏 친구와 대화도 할 수 있었다. 그 순간을 즐기는 아리나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어째서일까. 갑자기 머리위로 꿀벌집이 떨어졌다. 꿀벌집은 아리나의 머리를 부딫히고 바닥에 떨어져 완전히 산산조각난 상태였다. 큰일났다. 화난 꿀벌들이 윙윙거리는 것이 보였다. 아리나는 기겁해하며 근처의 호수로 뛰어갔다. 멀지 않은 곳에 호수가 있었다. 아리나는 그대로 냇가로 뛰어들어 벌들을 피했다. 1분 정도 지났을까 아리나는 물 밖으로 나와 가픈 숨을 들이마셨다.
그때였다. 어딘가에서, 분명 근처일 것이 틀림없는 곳에서 하울링소리를 들은 것은. 여전히 몸에는 꿀이 붙어 진득거렸지만 상관없었다. 아리나는 활짝 웃으며 호수에서 나왔다. 빙고. 환상종이었다. 아리나는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 너 환상종이니?"
아아, 기뻐라. 아리나는 입꼬리가 부들거릴정도로 올라간 것을 느끼며 외투 안에 권총을 만지작 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