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쳐지는 대검에 바닥의 흙과 풀이 요동친다. 간신히 피하다시피 한 그녀는 결국 쓰러졌고, 후속타를 내기 위한 레이첼이 검 끝을 겨눈채 자세를 잡자 도신이 진동하며 달빛이 모여들었다. 이대로 찌르면 폭발과 함께 눈 앞의 심문관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때 그녀가 손을 움직인다. 공격은 아니었다. 가파르게 숨을 내쉬며 바쁘게 손을 움직이는 그것은 '말'이다. 레이첼 또한 이내 그것이 수화임을 알아챘고, 목에 나있는 희미한 흉터를 눈치챈것도 그때였다.
'항복하는건가.'
그러자 지금 잔뜩 지친채로 쓰러져 있는 것도 이해가 가는것이다. 여전히 기이한 소리를 내며 진동하는 대검. 레이첼은 고민했다. 이 인간을 침입자로 보고 여기서 끝내야 할지, 환자로 보고 돌려보내야 할지 선택해야 했던 것이다. 숲 지킴이가 할 일이란 물론 적대의사를 보이는 인간을 배제하는것. 여기있는 그녀 또한 그랬고, 시체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 거기에 예외는 없다. 하지만...
"가라, 심문관."
오랜 시간 끝에 마침내 결정을 내린듯, 레이첼은 그렇게 말하며 제 검을 털어내듯이 허공에 휘둘렀다. 대검의 주위에 둘러싸여있던 달빛이 산산히 흩어지면서 허공으로 떠올랐다. 자신의 프라이머리를 해제 한 것이었다. 그녀의 공격은 다채로웠지만 허를 찌르거나 살기를 그득히 담고 있는 부분은 없었다. 눈 앞의 심문관이 하고자 했던것은 사냥이 아닌 명령. 거기에 노리는게 다른 환상종도 아닌 이 숲 지킴이였다면, 그것은 오히려 돌려보낼 또 다른 기회일테다.
"그리고 돌아와서 죽어라."
어쩌면 그저 나 자신에게 하는 합리화 내지는 변명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쓰러져있는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짜증 서린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는 모습에 일부러 평온한 척을 한다. 속으로는 잘 됐다고 쾌재를 부르고 있었지만. 에일린과 활이 부딪혔을 때의 충격에 가볍게 아려오는 손목을 붙잡아 스트레칭하듯이 가볍게 돌린다.
“먹잇감 취급 당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리고 누가 쓰러질 지는 모르는 일 아닌가.”
마소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것도 싫어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에일린은 진짜로 먹을 생각일테니 더더욱 질색이였다. 저번에 워낙 거하게 당했던 것도 있었고. 비웃음을 보고 울컥했지만 가까스로 표정 관리에 성공한다.
이번에는 정말로 맞출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다시 또 빗나가버린 화살에 애도를 표할 시간도 없이 달려드는 에일린에 뒤로 물러서서 피하긴 이미 늦었다는 걸 깨닫고는 차라리 공격이라도 해 볼 요령으로 화살통에서 화살을 하나 꺼내 손에 쥔 뒤, 접근해 온 에일린을 향해 냅다 내리꽂으려 들며 활로 물어뜯기는 것을 방지해 보려 시도한다.
“무, 물어뜯거나 발톱을 휘두르는 걸 빼곤. 할 수 있는 공격은 없는가.”
힘 차이도 있었고, 게다가 한 손만으로 에일린을 밀쳐 내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조금씩 뒤로 물러서며 비꼬듯이 중얼거린다. 이빨에 물린 팔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수화를 못알아듣는건가. 아니 헨리 하이드 이 멍청아, 지킬이 들으면 등짝을 후려맞을 생각을 하고 있네. 네 수화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도 얼마 없는데, 환상종이라고 알아듣겠어? 나는 톤파로 바닥에 필담이라도 적을 걸, 하고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민하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환상종은 대검을 내 쪽으로 겨누고 다시 그 빛인지, 달빛인지 알수 없는 것들을 모으고 있었다. 이대로 꼼짝없이 죽나. 아, 인간을 일찌감치 때려칠걸. 헬리오스시여. 너무 자연스러운 생각을 이어가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추슬러서 그 공격에 쉽게 당해줄 수 없다는 뜻을 보이려 했다.
가라 심문관. 이라는 말과 함께 허공을 향해 대검을 휘두르는 환상종의 행동에 당황한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지? 공격안하는건가. 일단은 살았나? 나는 그런생각을 하면서 톤파에 기대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시선은 환상종을 바라보면서 아주 천천히. 산탄이 떨어진 두개의 톤파를 벨트 거치대에 걸어놓고 환상종의 발치에 떨어진 엠블럼을 바라봤다. 천은 베어져나갔지만, 저건 주워가야했다.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니까.
나는, 환상종을 향해 한손의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가 핀 뒤 그 발치에 있는 엠블럼을 가리키고 자신을 가르키려다가 심호흡을 크게 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감. 사. "
간신히 말을 뱉은 뒤, 나는 입술을 잘근거리며 다시금 방금 전에 행동을 반복하고 자신을 가르켰다. 바닥에 있는 엠블럼이 자신의 것이니 주워주면 고맙다는 뜻이였고, 당신에게 갔다가는 정말로 죽을 것 같다는 행동이기도 했다.
'그거 주워서 돌려주면 돌아갈게요 내가 받은 건 당신을 해하라는 명렬이였지만 내가 패배했다고 하고 좀 깨지죠 뭐'
이런 식으로 취급 당하는 것은. 영 불쾌해보이는 표정을 짓다가 공격이 성공한 데에 그나마 조금 풀어진 듯이 보인다. 그래도 완전히 데미지를 입히지 못했다는 건 아쉬웠지만.
“흡..그래, 잘 봤어. 멋지네.”
방금 전까지 박혀있던 이빨이 팔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고통스러움과 동시에 꽤 별로인 느낌이라 입가를 가리며 신음소리를 삼킨다. 정작 에일린이 뭘 하려고 했던 건지는 못 보았지만 실제로 궁금한 것은 아니였는지 대강 대답한다.
“안타깝게도 날 먹는 것은 실패할거야. 그래도 더 이상 귀찮게 사냥 할 필요 없게 해 주지.”
왜냐하면 여기서 내가 널 죽일 거라서. 덧붙이며 다친 팔로 용캐 화살을 시위에 재운다. 에일린과 눈이 마주치자 싸늘하게 표정을 굳혔다가 원래의 평온한 미소로 되돌아온다.
“하필이면 팔을 다칠 게 뭐람. 공격을 제대로 할 수가 없잖아.”
투덜거리듯이 중얼거렸지만 이 정도 다쳤다고 해서 명중률이 떨어질 린 없었다. 거리가 아주 멀었다면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가까웠고. 힘겨운 척을 하다가 생긋 눈웃음을 지으며 상처를 신경쓰지 않는 듯 연달아 두 번 공격을 감행한다. 처음 것을 피하더라도 그 뒤의 화살에 맞도록.
겨우겨우 육성으로 낸 짤막한 말이 끝나고도 자리를 뜰 생각을 보이지 않는 것에 의아함을 느낄 찰나, 다시 한번 바삐 움직이는 그녀의 손.
"현명하군."
그 말을 무리 없이 알아 들은 레이첼이 바닥에 떨궈져 있는 엠블렘을 주워올렸다. 깔끔하게 잘린 끈의 절단면이 전투 당시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명령이라곤 하나 거의 죽일뻔했던 환상종에게 주워달라고까지 말하는 이건 상당히 중요한 물건이겠지.
"돌아가라. 마음이 바뀌기 전에."
감사를 표하는 헨리에게 엠블렘을 가볍게 던져 건네곤 돌아선다. 그리고 돌아서자마자 느껴지는 마소의 손실감. 인간일적엔 전혀 느끼지 못했던, 익숙해 지지 않는 묘한 감각이었다. 안 그래도 사람을 먹는 것을 피하는 레이첼에게 있어서 그 공백은 크다. 마치 세포 하나하나가 인간을 먹으라 소리치는 것 같았다.
걷어차인 부근이 뻐근한지 늑대는 작게 끄응 소리를 낸다. 털이 어느 정도 데미지를 줄여줘서 망정이지, 옆구리 부근을 맞았더라면 꽤나 데미지가 있을 뻔했으니까.
[글세요, 과연 누가 죽게 될지]
웃음지은 늑대는 그가 화살을 시위에 재우는 것을 마치 해 보려면 해 보라는 듯이 가만히 바라본다.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모양새로 흥미롭게 꼬리를 살랑이던 늑대는 연달아 쏘아지는 화살을 앞발을 들어 내려찍는 식으로 첫번째를 막고, 두 번째 화살을 자신의 꼬리를 움직여 받아낸다.
[흐음]
꼬리에 박힌 화살을 이빨로 뽑아낸 늑대는 조금 더 뒤로 점프해 아나이스와 거리를 벌렸고, 발을 꼬리로 감싸는 자세로 앉더니 한쪽 앞발을 살짝 들며 달을 향해 크고 길게 울부짖는다. 그것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희푸른 털이 안개처럼 반짝이며 흩어지는가 싶더니, 그 자리에는 거대한 늑대 대신 은색 머리칼과 늑대의 귀와 꼬리를 가진 청년이 서 있었다.
"아....진짜. 이 모습은 싫은데."
짜증을 내듯이 말한 은색 머리의 남성은 아나이스를 흘끗 쳐다보더니 자신의 꼬리에 박혔었던 화살을 주워 손에 들며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것을 아나이스의 복부를 노리며 던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