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기본적으로 주어진 익스레이버 아롱범 팀의 멤버 자료에서 본 네헤모트 씨의 능력이다. 그녀의 능력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소감은? 글쎄,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저 설명으로 보았을 때 특이한 능력이었던 것만을 기억할 뿐이다. 그림자 공간 안의 생명체들을 다루는 능력이었더라. 방금 사과주스를 그녀에게 건넨 기다란 손팔은 분명 그림자 속 생명체 중 하나이니라.
"어느 소년만화가 생각나는 장면이네요..."
한편 모 소년만화의 커다란 반전 중 하나인 뫄뫄 꼬맹이를 생각해내고 말았다. 소꿉친구와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그 만화. 애니도 봤고. 뭐, 기본적으로 전투 따위에 특화된 자신의 능력과는 조금 다르게 평소 일상생활에도 유용하게 쓰일 것 같기는 하다.
나는 무료한 얼굴로 들고 온 콜라를 흘깃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뚜껑을 땄다. 누군가가 먼저 열은 모양인지 플라스틱 병의 뚜껑을 처음 열 때의 그 걸리는 감 없이 자연스럽게 열렸다. 에, 반갑지는 않은 걸, 이 느낌. 말 그대로 누군가가 건드렸다는 소리잖아. 설마 입을 대서 마신 건...다소 불안한 얼굴로 문제의 콜라를 잠시 지그시 응시하였다. 설마 이 콜라병 안에 든 액체가 간장일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 잠깐 고민하다가 그냥 내가 입을 안 대고 들어서 마시기로 하였다. 이게 현명한 방법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입을 대지 않고 입에 액체를 붇는 순간 나는 이것이 현명하지 않은 방법임을 깨달았다. 기대했던 단맛이 아닌, 쓴맛. 간장의.
"억."
칠칠치 못한 비명 같은 외마디를 턱 흘리면서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 일단 목 뒤로 넘기지는 않았어. 일단... 콜라가 든 콜라병을 가장한 간장병을 탁자에 내려놓아 비어있는 다른 손을 들어 손바닥을 정면으로 보였다. 잠시 실례라는 의미다.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서 병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화장실을 찾아야했다. 입안에 침입한 이 망할 간장과 최대한 빨리 작별을 하고 싶었다. 다행히 화장실은 근처였다. 나는 금방 다시 병실 문을 열 수 있었다.
"...하아, 누가 콜라병에 간장을 담아놓는 끔찍한 짓을..."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면서 의자에 다시 앉았다. 잠시 간장이 담긴 콜라병을 노려보았다. 터뜨려버릴까, 라는 충동이 잠시 들었다.
"유감스럽게도. 소년만화같은 건 안 봐서 잘 모르겠는걸." 타미앨주도 눈치가 없어서 잘 모르는 듯합니다. 정말 타미엘은 묘하게 무미건조하게 살았군요. 진짜 안에서 니트처럼 지낸 게 다인가..란 의문을 타미앨-TO가 할 즈음 억. 하는 소리가 들린 걸 보고는 의문을 살짝 담아 고개를 갸웃하자 뛰쳐나갔습니다.
그 장면을 생각해보니 한 편의 콩트를 본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웃기지는 않았지망요. 애매하긴 하지만 분명 저건 콜라가 아니군요... 도대체 누가 그런 걸까요. 란 궁금증이 일기는 했지만. 본인이 아니니까요. 란 생각을 하면서 자신도 쥬스를 마셨는데..
"...마..맛이 없는 건 아닌데.." 동기화에서 본 거랑은 좀 다른 기분인데요. 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동기화에서는 먹고 쓰러졌는데 이건 맛있는걸요.
"그러게. 누구일까요." 금방 돌아온 그를 보면서 전혀 몰랐다고 말했습니다. 진짜였는걸요. 자칫 잘못하면 그녀가 마실 수도 았었는 것을.. 하지만 그녀가 그것을 알았다고 해서 알려줬을 건 아니었습니다.
모습을 반쯤 가린 나무 너머를 응시한다. 코미키 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시신을 찾으러 왔다. 두 사람의 시신을 받고 일본으로 돌아가 바로 장례식을 치루겠지. 센하는 피곤한 눈으로 계속 앞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얼마 전, 백화점이 테러 당했다. 코미키 하루나와 코미키 코우스케가 그 사건에 휘말려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분명 둘은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에 오미야게를 위해 그곳에 들렸던게다. 재벌인만큼 돈을 많이 쓰기는 하겠다만, 몇 개의 선물을 사가는 것에 대한 대가는 생각보다 컸는 걸. 무심코 실소가 입밖으로 튀어나왔다. 재수도 없지.
나무 줄기에 얹고 있었던 한쪽 손을 내려서 후드티 주머니 속에 넣었다. 검은 후드티와 바지. 온통 검은색으로 차려입은 모습은 마치 무고하게 죽은 이를 추모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그럴지도 모르고. 음침한 분위기의 얼굴은 왠지 복잡해보이는 듯했다.
허무한 죽음인 걸, 코미키 코우스케. 잘 가.
서늘한 가을바람이 맴돌았다. 슬슬 돌아가려고 생각했는지 센하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는 순간, "엇, 잠깐"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그를 멈춰세웠다. 의미만 보면 무시할 수도 있는 평범한 소리였지만, 그 소리가 한국에서 그렇게 쉽게 들을 수는 없는 일본어였기에 센하는 자신도 모르게 발을 멈추고 그쪽을 돌아보았다.
"...아아."
탄식 비슷한 소리가 나왔다.
"코미키 유우카잖아."
세련된 외모의 소녀, 유우카는 일자로 자른 단발을 귀뒤로 넘겼다. 울었는지 눈가가 빨개져있는채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알아보네. 오랜만이야." "오랜만이기는 하네. 그 때 이후로 벌써 한 5년에서 6년 정돈가. 좀 더 오래 안 보기를 기대했는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되네."
조금 비꼬는 말투가 거슬렸다.
"어디론가로 사라지더니, 한국에 살고 있을 줄은 몰랐어. 음, 그건 그렇고...이번 사건, 내용 알지?" "짜증날 정도로." "...엄마랑 오빠가 죽어버렸어." "알아. 그래서 나 보고 어쩌라는 거야?" "......"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다가 유우카는 머리끝을 한 손으로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쪽이 저지른 건 아니지? 그렇지?" "의심할 걸 의심해. 사람 질리게 하지마." "...알았어. 응. 애초에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 방금 질문은 그냥 확인차."
고개를 젓던 유우카는 문득 센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살짝 놀란 표정을 잠시 짓더니 담담히 말한다.
"그러고 보니...그 색 싫어하지 않았어?" "응? 뭔 소리......아아."
센하는 눈을 반쯤 감아 유우카를 응시했다.
"예전에는 그랬지." "...그랬지. 알겠어."
고개를 끄덕인 유우카는 몸을 돌렸다. 이제 다시 가족들에게로 돌아갈 생각인 모양이다. 그대로 발을 내딛으려다가 멈추었다. 그러더니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그쪽이 한국에 있는 건 알리지 않을게. 할아버지한테도, 외삼촌한테도, 누구한테도." "하, 그것 참 고마운 걸." "그럼 안녕(じゃあね)." "안녕(さよなら)이라고 해. 다시는 보는 일 없도록."
센하의 날선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유우카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센하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혀를 쯧 차고는 마찬가지로 발걸음을 옮겨, 유우카와는 반대되는 쪽의 길을 걸었다.
서하의 말을 잠자코 듣던 아실리아는 가만히 옅은 미소를 띄었다. 좋아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라. 물론, 아실리아 또한 서하와 같은 마음이었다. 그렇다 해도 이 사람과 이 감정이 자신에게 과분하다는 생각만은 여즉 떨쳐낼수가 없었기에 살짝 석연찮았다만. 문득 연인 앞에서까지 이런 생각을 하는 제가 싫어서 이내 자괴감마저 덮쳐왔다.
" 부모님, 그렇구나. 으음, 그럼 당분간.. 은 우리 둘 다, 서로의 집에는 못 놀러가겠네. "
나도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으니까, 라고 덧붙이는 것과 동시에 어색한 낌새를 애써 지워버린 아실리아는 도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시선을 돌리려고 했었다. 그래봤자 결국에는 대충 바라만 보다가 그대로 책상 위에 서류를 놓아두곤 몸을 일으켜버렸지만. 이어, 아실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발생한 현기증과 더해져 더욱 심해진 두통에 살짝 휘청이는 걸음으로 서하의 등 뒤로 조용히 다가가, 그대로 서하의 어깨에 가볍게 기대다시피하며 가만히 껴안았다.
" ...그, 사실, 의지하는 거.. 맞아. 솔직히 의지하고 싶었어. 그런데, 너무 의지하게 되어 버릴까.. 봐, 불안해. "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다른 사람과 가까운 관계를 맺으려 해도 그 과정이 쉽지 않다. 그 사람을 얼마나 좋아하고 아끼건, 아니.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 더 마음 한 구석의 무언가가 진득하게 표현과 감정을 옥죄고 제한시킨다. 내가 이래도 되는지, 당신이 계속 이렇게 있어줄지, 그리고 과거의 실수와 상처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는지. 끉임없이 의심하고 의식하는 사람의 머릿속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어지럽다.
그리고, 아실리아는 고개를 살짝 들어 서하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볼 보다는 조금 더 아래이지만 입술보다는 더 위쪽인, 다소 애매한 곳에 몇 초간 입을 맞췄다가 떼면 곧잘 주르르 미끄러지듯 고개를 떨어뜨려 서하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몸을 푹 숙여버리는 것이다.
" ...숙직실, 에서 자는 건.. 서류, 다 끝나고. "
아마,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도 지금 아실리아의 목소리보다는 클 것이다. 그나마 잘 들릴법한 곳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일은 없었지만서도.
볼을 잡는 손에 부루퉁히 바둥거렸지만 그의 말이 싫지는 않다. 혼자 두지 않으면 좋을텐데. 감시해도 좋으니까 쫓아다녀주면 좋을텐데. 하지만 거기까지 바라는 건 너무 무거울테지. 나는 그냥 얌전히 그에게 장단을 맞출 뿐이었다.
"어휴, 하나둘 뿐이겠어요- 파도 파도 끝이 없을 걸?"
수사 중에 몰래몰래 익스파 쓴 것만 해도 두 손으로 모자랄 지경인데.
졸리다고 보채니 그대로 나를 안아들어 침대로 데려간다. 아니 잠깐 이 사람아. 이대로 자면 안 되죠! 안겨있는 동안은 차마 움직이질 못 하고 있다가 내려놓아지자마자 다시 발딱 일어나 앉았다.
"나 아직 화장도 안 지웠는 걸!"
이대로 자면 얼마나 큰일이 나는지 알아요?! 괜시리 호들갑을 떨며 침대 위 쿠션들을 두들겨본다. 아, 이것도 치워야지. 주섬주섬 쿠션들을 휘적거리다가 결국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잠깐만 기다려요."
그가 다시 잡을 새도 주지 않고 쪼르르 방 밖으로 나갔다. 어디선가 부스럭대더니 금방 돌아왔는데, 손에 옷 한벌을 들고 있었다. 편하게 입을 수 있어보이는 상하의 한벌 정도? 거기다 그건 왠지 그의 사이즈에 딱 맞아보이더랬지... 히히. 웃은 나는 그에게 옷을 쥐어주고 씻고 오겠다며 방을 나갔다.
"...언젠가 소개하게 되면 놀러갈 수도 있겠지. 혹은 자취를 하게 된다던가. ...물론 나는 아직 생각은 없지만..."
아무래도 집값이라는 것이 싼 편은 아니니까 지금의 내 월급으로 감당하기는 조금 힘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보다 직급이 높아지면 생각해보겠지만 아직 내 직급으로는 무리였다. 위험수당이 있다고는 해도... 그것만으로 집값과 생활비를 감당하기는 조금 어려우니까. 그렇다고 집에 손을 빌리기도 싫고... 언젠간 자취를 하게 되는 날도 오지 않을까. 하지만 그러면 엄청 귀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기에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서류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 잠시 눈으로 서류를 보는 도중, 아실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아실리아를 바라보니 아실리아는 휘청이는 걸음을 걸으며 내 뒤로 다가왔다. 그리고 껴안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이건 아실리아가.. 아니, 그 전에...
"...괜찮아? 아까 보니까 휘청거리던데. ...정말. 그 정도면 무리해서 출근할 필요는 없잖아. 하아. 그리고 불안하다라. ...고백할 때, 자신이 집착할지도 모르겠다고 한 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거."
이내 이어지는 입맞춤. 그것은 그녀에게는 겨우겨우 한 애정표현일지도 모른다. 그에 얼굴을 살짝 붉히며 아실리아를 잠시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렇게 입을 맞추는 것은 처음이니까. 조금 부끄럽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시선을 돌리진 않고 아실리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어 나에게 기대는 그녀를 바라보며 피식 웃어보였다. 정말.. 행동 하나하나가 보통 귀여운게 아니라니까.
"...불안하다면 지금은 불안해해도 상관없어. 나는, 말을 돌려서 표현하지 못하니까 다시 직구로 이야기하지만... 네가 불안하다면 편해질때까진 불안해도 된다고 생각해. ...억지로 불안해하지 마. 나에게 의지해. 그런 말은 안 해. ...그런 거 강요일 뿐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네가 많이 의지해도 상관없어. ...오히려 환영이야. 이기적인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네가 그만큼 나에게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잠시 말을 끊은 후에 나는 손을 올려 아실리아의 포니테일 스타일 머리를 몇번 쓰다듬었다. 그리고 고개를 제대로 돌려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피식 웃으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정말로 너의 연인이 된 것 같아서 기쁘거든. ...그야...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의지하는 것이니까. ...일단은 나 독점욕 꽤 강한 편이야. 표현은 안하지만 질투심도 조금은 있고... 그러니까 나에게 의지하면 의지할 수록 나는 좋아. ...이기적일지도 모르지만..."
너에게는 그만큼의 욕심을 부리게 돼. 아실리아. 그렇게 말을 작게 덧붙이며, 다시 작게 속삭이듯이 아실리아에게 말을 하면서 한쪽 팔을 올려 아실리아의 어깨에 손을 내리며 끌어안는 것처럼 자세를 잡으며 말을 이었다.
"...자장가라도 불러줄까? 아니면 수면제라도 전송해줄까? ...아니면 손을 잡아도 괜찮을테고. ...물론 후자면 관계를 걸릴 것을 각오해야겠지만 말이야. 하윤이라던가. ...조금 귀찮겠지만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죽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는 나는 아직 간장의 충격에서 다 벗어나지 못하였다. 다소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다시 일어났다. 알고 보니 간장이었던 콜라병을 들어 뚜껑을 도로 닫아놓고, 잠시 노려보다가 그대로 다시 냉장고로 향했다. 냉장고 문을 열고 콜라를 원위치에 넣었다. 나중에 아무나 똑같이 당하라, 라는 다소 비딱한 생각과 함께. 그리고 다른 주스를 꺼냈다. 같은 색의 물감탄 물이 아니라, 이번에는 진짜 주스임을 바라며. 다시 의자로 돌아와 앉으면서 나는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이 음료가 아롱범 팀 내에서 여자 오퍼레이터 쪽의 건강즙으로 통하는 물질인 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앞에 있는 네헤모트 씨가 들고 있는 음료도.
"그건 무슨 맛이죠?"
무료한 눈빛으로 그녀가 들고 있는 음료를 잠시 바라보며 지나가는 투로 툭 물어보았다. 간장의 충격에서는 이제 슬슬 벗어나려고 하고 있다. 이성을 되찾으면서 몰려오는 것은 내가 왜 간장임을 못 알아봤지, 라는 묘한 일종의 자괴감. 무시하였다. 아무튼 네헤모트 씨에게 물어본 후 음료수의 뚜껑을 열고 마셔보았다. 이번에는 물감이었습니다, 라는 결말이기만 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