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피해 달아난 하늘은 지독히도 새카만 색이었다. 마치 내가 그 아름답던 하늘을 검은 크레파스로 덮어놓은 것만 같이 새카매서, 차마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병상 생활이 끝난 후, 돌아가신 아버지와 언니의 흔적이 묻어있는 그 아파트에서 당신은 나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이제 이 세상에는 당신과 나밖에 없노라고, 서로를 의지해 살아가야 한다고. 뜨거운 눈물이 손등을 타고 흐르는 그 감촉에 나는 그제서야 시선을 바닥에 떨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서야 고백한다면, 나는 눈물로 얼룩진 당신의 얼굴을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아버지와 언니의 사망보험금과 얼굴 한 번 맞대지 않고 전해진 위로금은 오롯이 나의 어깨에 쏟아들어갔고, 당신은 그들의 흔적에는 손끝 하나 대지 않은 채 시간이 멈추어 차갑게 식어버린 집안을 다시 가꾸어나가기 시작했다. 시든 화분들을 치우고 새로운 화분을 들였고, 멈춘 시계의 건전지를 갈았다. 먼지 쌓인 소파와 가구들을 털어내고 아직 그 때에 멈추어있는 공기들을 흘려보냈다. 태양이 떠있는 세상은 너무나도 무서울 정도로 평화롭게 흘러가서, 잠깐 내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열여섯살의 겨울 끝자락에 나는 늘 꿈에서 아버지와 언니를 만났다. 온통 새빨갛고 뜨거운 그 곳에서, 나는 비명을 질렀고 아버지와 언니는 내 앞에서 녹아내렸다. 가장 참을 수 없던 것은, -나는 항상 그들을 두고 도망쳤다는 똑같이 반복 되던 결말이었다. 당신은 자애롭고 상냥하던 사람이었고, 나는 당신을 너무나도 사랑했다. 그랬기에 나를 괴롭히던 악몽들은 내 머릿속에서 꾸물거리며 내려와 내 입을 나와 버리고 말았다. 아, 그 때 당신에게서 짙게 나던 술냄새를 미리 알아챘더라면.
“ 유혜야, 엄마도 힘들어. 엄마도 힘들단말야. “ “ 그 때 엄마가 말했지, 이제 그만 집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 “ 내가 했던 말만 들었더라면, 너때문에 모두가 죽는 일은 없었을거야. “
아, 당신 스스로 그 입을 틀어막는다. 그리고 또 새빨개진 눈으로 눈물을 흘리고야 만다. 나는 당신을 이해했다. 당신은 그 시련을 감당하기엔 너무도 여린 사람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당신을 과분히도 사랑해 주었고, 나의 언니는 너무나도 착하고 어여뻐서 당신이 아주 사랑했었으니. 당신은 내가 아닌 다른 이가 살아남았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겠지. 나를 그토록 원망하면서 말야. 나는 당신의 눈물을 보고서야 방안으로 돌아갔고, 그 날의 꿈에서는 아버지와 언니가 아닌 나를 증오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당신을 보았다.
다음날 아침, 당신은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갑게 식은 집안에서 평소와 같이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내며 설거지를 할 뿐이었고, 식탁에는 내가 혼자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아침밥이 차려져 있었다. 내가 식탁에 앉아 수저를 드는 순간에 당신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현관을 나서버렸다. 혼자 먹던 밥은 너무도 차가워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터트렸다.
한 번 뱉어낸 속마음을 다시 뱉어내는 일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고 밤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온 당신에게서는 늘 기분 나쁜 술냄새가 났었다. 하루는 막 씻고 나왔던 내게 그 징그러운 어깨를 보이지 말라며 소리를 질렀고, 다음날 아침에는 여전히 차가운 아침밥이 차려져 있었다. 당신은 내가 식사를 채 마치기도 전에 집을 나섰고, 또 기분 나쁜 술냄새를 풍기며 집으로 돌아왔지. 당신이 처음을 내게 손을 대던 날에- 나는 창문 밖으로 비치는 달을 보며, 당신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겨울이 지나고 아직은 차가운 봄이 찾아온 어느 날에, 학교에 갈 준비를 하던 나를 보며 당신은 잘 다녀오라는 말을 건네주었다. 나는 온기 없던 그 말 한마디에 너무도 기뻐서,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집을 나섰다. 아, 당신에게도 봄이 찾아왔구나. 라고, 어리석은 생각을 품고서.
더이상 당신에게서 술냄새가 풍기지 않을 거란 상상은 당신의 손에 시들어 죽어버렸다. 그 날은 이상하게도 내가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기도 전에 당신이 집으로 돌아와있었고, 내가 현관문을 열고 발을 들인 순간 당신은 나의 뺨을 내려쳤다. 너무도 놀라 밖으로 도망치려던 나의 머리카락을 잡아끌던 당신의 표정이 너무나도 슬퍼보여서, 나는 겨우 잡았던 현관문의 문고리을 놓고 말았다. 멍청하게도. 당신은 나의 교복을 보며 네 언니가 불쌍하지도 않냐고 목을 놓아 울었다. 차마 신발을 벗지도 못하고 신발장에 주저 앉은 나를 보며 당신 또한 바닥에 주저앉고 내 언니의 이름을 불렀다. 내 딸은 그 불구덩이에서 죽었다고, 그 애도 고등학교 생활에 마음이 부풀어 행복해하고 있었다고. 아직도 내 딸의 방문에는 그 애가 직접 걸어둔 교복이 걸려있다고. 불쌍한 당신 딸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부르며, 그토록 서럽게 울다가 당신은 잠들었다. 나는 당신이 무서워 그 한시간 동안 멍하니 앉아있다가, 또 다시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에 당신은 없었다. 그나마 차려지던 차가운 아침밥도 없었다. 나는 너무도 행복했다. 너무도 행복해서, 이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랬다.
그 날에서야 생각했다. 그 시련을 감당하기에 당신은 너무도 여린 사람이었다고. 그래, 내가 당신을 이해 해야한다고. 멍청하게도, 나의 아픔은 누가 이해해주는가에 대한 대답은 내놓지 못하였다. 그 때의 나는, 서서히 무너져가는 모래탑을 무시하고 아직 건재한 당신의 모래탑을 걱정하고 있었지. 당신이 더 힘들거라며, 당신의 모래탑이 먼저 무너질 거라며. 파도는 다가오지 않고 있었음에도.
당신은 사흘이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당신은 꼬박 이틀을 방에서 지냈다. 그렇게 대략 일주일이 흘러서야 당신은 이전과 같은 모습을 되찾은 듯 했고, 나는 당신이 없던 일상에 녹아든지 오래였다. 그렇게 돌아온 당신의 얼굴을 마주한 날, 마음 속에서 일렁이던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나는 아직도 대답하지 못한다. 그 감정의 정체를 알고서도, 마음 속 깊숙한 곳에 파묻고 말았으니.
내가 당신의 폭언과 폭력에 삶을 포기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던 건 그다지 멀지 않은 미래였다. 겨울이 다시 찾아오던 날이었고, 공교롭게도 새하얀 함박눈이 내려 마치 오늘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던 날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기분 좋게 집으로 들어갔던 그날에 당신은 거실 TV옆에 장식 되어있던 미니 액자를 내게 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액자 유리가 깨져 손등에 작은 상처가 났었고, 바닥에 떨어진 유리파편들은 전등에 반짝였다. 아름다운 보석처럼 반짝이는 파편 사이에 파묻힌 나의 어릴 적 사진을 보며, 파편 중 가장 큰 조각을 들고 손목을 베어버렸던 건 온전한 나의 의지였다.
그 날 달라졌던 건 나였으니 당신은 미안해하지 말라고. 그날 밤 병원을 나와 새카만 하늘 아래서 당신에게 나직히 말했지만, 당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215 유혜 어머님 나빴어....!!! 그래서 지금도 유혜는 어머님과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다만 유혜가 저렇게 사고를 치고 난 뒤로는 좀 잠잠해졌다가 (가끔 유혜를 보며 혼잣말로 뭐라 한다던지) 유혜가 익스퍼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리고 정신과 상담을 받으면서 그런 일은 없어졌죠! 다만 유혜와의 사이는 변하지 않은...(흐릿
>>220 사실 유혜는 어머니와의 관계 회복을 할 의향이 없다고 합니다... (우중충 유혜는... 그냥 일년에 한 번 찾아가서 같이 수목장 가고, 대충 용돈 드리고 올라오는 정도예요. 사실 유혜가 독립 하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바로 그 집을 빼고 유혜가 적당한 원룸을 살 수 있을 정도의 돈만 준 뒤 바로 경기도의 작은 아파트로 이사가버렸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