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있었다, 라는 자신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 응시하는 레이첼의 눈을 피하지 않고 너무나 당연하게 눈을 깜빡깜빡거리면서 레이첼의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케이크는 이미 다 먹은지 오래였다. 와인보다 케이크를 먼저 먹어버리다니! 차암. 나도. 내게 감사하고 있다는, 레이첼의 말에 비비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하게 레이첼을 바라봤다.
무엇을? 뭐가? 대체?
"레이첼님? 혹시 어디 심하게 다쳤어요?"
평소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고맙다던가, 어딘가 굉장히 진심을 담아 말하는 레이첼의 말에 비비안은 과장스럽게 눈을 끔뻑이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것뿐, 비비안은 글라스 잔을 살살 흔들면서 레이첼의 말을 들었다. 고맙다며 후회는 없다는 레이첼의 말에, 그녀는 후우 - 하고 과장스럽게 숨을 내뱉었다. 생각이 조금 느린걸 보니, 취하긴 한 모양이다. 비비안은 단숨에 제 잔을 비우고 제 입술에 피처럼 묻은 와인을 살짝 장갑으로 닦아낸 뒤 레이첼을 바라봤다. 가늘게 뜬 노을색 눈동자가 이질적인 푸른색 눈동자를 응시한다.
"레이첼님~ 레~이~첼~니임~"
비비안은 손을 뻗어서, 가볍게 고개를 숙인 레이첼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천천히, 쓰다듬는다. 아주 느릿하게.
"좋은 사람이 어디있나요?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거에요! 맙소사, 레이첼!! 내가 왜 당신에게 가냐구요? 그거야 당연하죠! 심심하니까! 아, 뭐어!!이건 조금 농담이긴 했으니까 ~ 그으냥 내 성격이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레이첼니임~ 어차피 같이 인간에서 환상종으로 바뀌었는데 자알 지내보자는 거죠."
뭐가 고마우실까아 우리 레이첼님께서는! 꺄르륵, 비비안은 레이첼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던 손을 떼어내고 턱에 꽃받침을 하고 방긋 웃는다.
앓는 소리가 약하게 들려왔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엎드려서, 얇은 민소매만 입은 채 자고 있는 사람은 잔뜩 헝크지다못해 엉킨 것 같은 붉은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헨리 하이드!!! 버럭 누군가가 내지르는 소리에, 죽은 듯이 자면서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끙끙거리던 사람이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도 하지 않고 벌떡 일어났다. 침대 위에서 엎드려서 자다가, 양팔로 침대를 짚고 일어나려던 그 사람은 팔 하나를 잘못 짚었는지 그대로 우당탕 하며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아파! 아파아파! 바닥에 허리라도 찧었는지 그 사람은 허리와 엉치뼈 부근을 양손으로 잡은 채 그대로 엎어져서 부들부들 떨었다. 그 근처로 휠체어가 가까이 다가왔고,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낮은 한숨 소리에, 눈꼬리가 쳐져 졸린 것 같은 눈매와 어울리는 옅은 분홍색 눈동자가 슬쩍 위로 치켜올라가 휠체어에 앉은 사람을 눈에 담았다.
"얼씨구? 내가 엎드려서 자지 말랬지!"
짝! 얇은 옷 위로 등을 때리는 손길이 매웠다. 헨리는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며 하필이면 제대로 손이 닿지 않는 부분을 때린 휠체어를 탄 사람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다가, 그 엄한 눈동자에 고개를 확 숙이고 침대 위로 슬슬 올라가 걸터앉았다. 아무튼, 엎드려서 자고. 저러다가 숨이라도 막히지. 기관지도 않좋으면서 왜 자꾸 엎드려서 자는거야. 자는 동안 얼굴 양 옆에 베개라도 고정시켜버릴까. 헨리는 듣기만해도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휠체어 탄 사람의 등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양손바닥을 짝 하고 부딪혔다. 앞으로 나아가려던 휠체어가 멈추고 앉아있던 사람이 고개를 돌리자 헨리는 양 손가락을 움직였다. 잘잤어? 잠이 덜 깬 얼굴로 생긋 웃자, 그 사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한번 내쉬고 대답한다. 잘잤어, 얼른 세수하고 와. 그 대답에 헨리는 미소를 짓고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한다.
샤워를 마치고, 헨리는 낑낑거리면서 제 머리와 씨름을 하고 있었지만 전혀 소용이 없는 듯 했다. 아, 진짜 정리 더럽게 안되네. 좌절한 표정으로 빗을 든 채 한숨을 푹 하고 내쉬던 헨리는 제 손에 들린 빗을 가져가는 행동에 거울로 그 사람을 바라봤다. 휠체어이긴 했지만 어정쩡하게 걸린 거울때문에 살짝 허리를 숙인 탓에 휠체어에 앉아도 충분히 위치는 닿았다. 버리를 정리해준 사람은, 손짓으로 제쪽으로 돌라는 제스처를 해보였고 헨리는 얌전히 그쪽으로 돌아서 천과 엠블럼을 건넨다. 검은색 셔츠 깃 사이로 천이 끼워지고 엠블럼으로 고정된다.
"됐다. 근데 진짜 머리는.... 답이 안나온다. 안나와."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정리해줘서 고마워.'
환한 헨리의 웃음과 손짓에, 그 사람은 정체를 알수 없는 주스를 건넸다. 특제 영양주스야. 오늘은 사과랑.. 하는 말에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눈을 한번 질끈 감아, 숨을 몰아쉰 헨리가 그대로 벌컥벌컥 숨도 안쉬고 주스를 깨끗하게 비우고 되돌려준다. 맛없어! 헨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슬슬 나갈 시간이다. 오늘은 시가지를 잠시 돌아보고, 바로 처리가 들어온 환상종을 찾으러 가야한다. 그런 걸 아는지 그 사람은 휠체어에 앉은 채 양팔을 쭉 뻗었다.
"다녀와. 헨리. 다치지 말고."
헨리는 그 사람의 양팔을 제 어깨에 올리고 휠체어에서 아주 조금 들어올리는 정도로 꽉 끌어안고 손짓이 아닌 작게 그 귓가에 속삭인다. 다.녀.올.게 다시 조심스럽게 휠체어에 그 사람을 앉힌 뒤 헨리는 한손으로만 수화를 한다. 점심 잘 챙겨먹고, 산책도 좀 가고. 금방 돌아올거야. 걱정하지말고 있어. '지킬' . 고개를 끄덕이는 상대의 모습이 만족스러운지 헨리는 몸을 일으키고 검은 머리카락을 잔뜩 헝크러트리듯 쓰다듬은 뒤 벨트에 무기를 차고, 산탄을 꽂이넣은 뒤 코트를 걸치고 집 밖으로 나섰다.
사실 시이 어머니는 시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병이 있기는 했지만, 아주 가벼운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이가 태어난 이후 병이 악화되었죠. 시이 어머니가 병이 악화된 원인은 시이의 친구 때문입니다. 친구라곤 해도 같은 집에 살며 가족처럼 지냈는데, 환상종이었던 시이의 친구는 언젠가 시이의 어머니를 잡아먹기 위해 시이의 어머니에게 천천히 독기를 주입합니다. 시이의 어머니는 그렇게 점점 병이 악화되죠. 그런 시이의 친구였지만 친구는 유독 시이를 아꼈기에 시이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았습니다. 독기를 주입해서 미리 나 얘 머그꺼야 하고 찜해두지도 않았고... 근데 그게 역으로 독이 되었는지 그 녀석은 결국 시이에게 살해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