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꺼낸 동전지갑은 지은이 쓰고 있는 가발의 색과 비슷한 듯, 귀여운 디자인이었다. 고양이를 모티브로 했는지 세모난 귀가 달려있다. 하지만 그런 독특한 동전지갑의 모습에도 유안은 별 감흥이 없다는 듯 그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뜰 뿐이었다.
"글쎄요..."
지은의 물음에 팔짱을 낀채로 자판기 음료수들을 지그시 응시했다. 일단 포카리스웨트는 제치기로 했다. 그렇다면...
"요즘 콜라도 맛있다고 하더군요."
라고 중얼거리더니 손을 천천히 움직여 사이다 밑의 버튼을 눌렀다. 아니, 콜라 이야기를 하더니. ...어쩌면 이런 논리일지도 모르겠다ㅡ자신은 콜라가 맛있는 것 같다고 했을 뿐 콜라를 먹겠다고 한 적 없다...같은 거. 하지만 유안의 얼굴에서 딱히 얻을 수 있는 힌트는 없었다. 무미건조한데 그러면.
모든 것은 끝이 났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의 결말처럼, 나쁜 인간은 벌을 받고 착한 사람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여생을 보내는 일 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나의 뒷 이야기는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다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채워넣으면 되었을 일이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가 남지 않은 사람에게는 과연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사건이 끝난 뒤의 아롱범팀 사무실은 평화 그 자체였다. 꽤나 골머리를 썩히던 인간이 잡혔으니, 그녀를 그리도 옥죄이던 사슬을 끊어내었으니 행복할 법도 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어쩐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다. 과연 나는, 올바른 길을 선택한 것일까. 십 년을 꿈꿔왔던 순간이었고 미친 듯이 갈망했던 장면이었다. 나의 인생을 모두 바칠 만큼 소중한 목표였다. -필요하다면, 나의 모든 것까지. 마음 한 구석이 시큰했다. 분명 그 남자를 두 눈으로 마주하고 직접 수갑을 채운다면 이 썩어빠진 길이 분명 아름다운 꽃밭이 될 것만 같았다. 앞으로도 행복한 인생을 살고, 당신들을 이제야 당당한 얼굴로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 죽였어야했나... “
유혜가 두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입을 다물어버렸다. 속에서 속삭이던 말이 밖으로 튀어나올 줄은 몰랐던건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유혜가 사무실 밖 복도로 걸음을 옮겨버린다. 건조했던 공기를 벗어나 시원한 겨울공기를 맞이하는 기분은 좋았지만, 이 답답하고 아려오는 기분을 밀어낼 수는 없었다. 한 순간에 나의 ‘목표’가 사라진 허탈감이었을까. 참 끝까지 자격이 없는 인간이었다, 나는.
“ 유안씨? “
복도에 기대어 한참동안 머리를 식히던 유혜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저번 사건 때 자신의 파트너를 해주었던 유안이었다. 유혜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불러 세우고는,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간다.
콜라를 아닌 사이다를 누르는 유안의 모습에 혼란이 온 지은이 눈을 깜빡이며 사이다와 유안을 번갈아 보았다. 뭐지, 신종 개그인건가 싶어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로 어색하게 웃는다.
”그럼 전 역시 포카리스웨트를 마셔야겠군요.“
익스퍼들이 사용하는 자판기치고는 지나치게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며 포카리스웨트 밑의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판기 밑에서 포카리스웨트가 떨어져 들려야할 둔탁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라?“
당황한 지은이 다시 포카리스웨트를 여러번 눌렀으나 자판기는 반응이 없었다. 지은이 재빠르게 투입된 금액이 적혀있는 판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1000원이 아닌 0원이라고 적혀있었다.
”이런, 먹혀버렸군요. 제 돈.“
뭐가 문젤까 싶어 자판기를 몇 번 툭툭 치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어보였다. 지은은 화풀이라도 하려는 듯 자판기를 세게 한번 툭 쳤는데, 놀랍게도 아까 들렸어야 했던 소리가 이제야 들렸다. 그것도 하나의 소리가 아니었다. 다리를 쭈그리고 자판기 아랫부분을 확인한 지은이 놀랐다는 듯이 중얼거린다.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춰세웠다.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시선을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향했다. 이번 사건에서 일시적으로 파트너로서 있었던 유혜였다. 천천히 다가오는 그녀를 무슨 용건이냐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윽고 미소와 함께 따라오는 말은, 파트너를 해줘서 고맙다는 감사의 말, 그리고 큰일날 짓은 저지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말이었다. 아아ㅡ라는 나지막한 감탄사를 흘리면서 몸을 제대로 돌려 유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는 범죄자를 싫어하니까요. 그 길을 걷지 않으신 점은 훌륭합니다. 아주 훌륭해요."
선명한 목소리로 다소 과장스럽게 말하는 유안의 얼굴에 아주 희미하기는 하지만 미소가 살짝 보인 듯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곧바로 무표정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무표정으로 돌아오더니, 잠시 유혜의 표정을 보다가, 시선이 약간 공허해졌다. 차가운 분위기도 섞인 듯하다.
"...뭐, 솔직해집시다 누님. 사실 죽이고 싶으셨죠?"
사족없이 직구로 덧붙인다. 어조가 약간 비꼬는 듯했다. 이런 곳에서 꼭 통찰력이 발휘되는 유안이었다. 쓸데없이.
그리고 간혹 소외감을 느낀다는 분에게 스레주로서 큰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스레주로서 뭔가 더 이것저것 챙기고 신경써야하는데.. 그리고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직 저는 부족한 모양입니다. 스레주가 좀 더 노력해서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정말로 죄송한 바입니다.
유혜가 얄팍한 미소와 함께 대꾸했다. 순간 유안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비친 듯 했지만 이내 사라지고 만다. 유혜는 그런 유안의 무표정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공허해진 시선에서 차갑게 식은 분위기를 읽어낸다. 유혜는 하릴없이, 그 흐릿한 미소로 그를 바라 볼 뿐이었다.
“ ...뭐, 유안씨에게 숨겨서 어쩌겠어요. 솔직하게, 네. 그랬어요. “
피식 웃음을 지으며 유혜가 뒷통수를 긁적였다. 보기 좋게 들통났네. 그 공허한 눈동자 앞에서는 무얼 숨기려해도 숨기기가 여간 쉬운 것이 아니었다. 눈치가 빠른 그에게서 암만 거짓말을 해봤자, 들통날 것이 뻔할 일이었지.
“ 그치만 금방 그만 둬버렸어요. 내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보이면 서하씨나 유안씨나, 막으려 들 것도 뻔하고. 그리고... “
유혜가 말끝을 천천히 흐렸다. 차마, 죽이고자 마음을 먹었을 때 비겁하게도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라고는 말 할수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복수를 핑계삼아 온갖 불행한 척은 다 하고 독기를 품은 듯 사는 사람이었지만, 정작 그 기회가 주어졌을 때는 복수라는 칼보다 자신의 안위가 먼저였던 사람이었다. 비겁하고, 비열한. 남자를 만난 순간 자신을 위해 대신 죽어가던 아버지가 제 눈 앞을 스쳤음에도, 그녀는 칼을 쥘 수 없었다.
“ ...유안씨야 말로, 왜 그때 그렇게 달려든거예요? 큰일 날 뻔 했잖아요. “
유혜가 제 오른편에 있은 아롱범팀 사무실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이내 그 시선을 유안에게로 가져오며 입을 열었다. 유안이 내게 말을 돌리는 거냐며 꼬투리를 잡는대도, 무어라 할 말은 없었다. 그저 커피의 뒷맛 같은 미소로 그를 보며, 그녀는 입을 다문다.
조용히 몸을 굽혀 자신이 고른 사이다를 꺼내었다ㅡ덤으로 이번에는 전과 같은 불운이 따르지 않은 점에 대해서 살짝 감사하며ㅡ. 몸을 다시 일으키면서 지은의 그럼 자신은 포카리스웨트를 마셔야겠다는 말에 영 애매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이 자판기는 그 때의 자판기가 아니니까.
"...어..."
...분명히 아닌데. 지은이 고른 포카리스웨트가 나오지 않는다. 그 때와 같은 상황. 당한 사람이 다를 뿐... 돈이 먹혀버렸다며 툭 내뱉는 그녀의 모습을 조금 멍청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지은은 별 반응없이 자판기를 툭툭 쳤다. 이럴 때는, 동정인가. 동정을 해야하는 건가. 무펴정인채 눈동자를 살짝 굴리는와중 마음속에서 그런 목소리가 소리를 높였다. 뭐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ㅡ우와, 한 개가 더 나왔어요. 어떻게 된 일일까요?
응?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자판기를 한 대 세게 때리면 두 개가 나온다? 예전에 자신이 그 자판기에 발길질 했을 때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는데. 더욱 혼란스러움을 느끼다가 아무튼 정신을 바로잡았다. 무감정한 얼굴로 대답을 툭 내놓았다.
어서 오세요! 아실리아주! 좋은 밤이에요! 어...그리고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그냥 생각을 해보니까 아실리아주가 서하와 일상을 돌린 것이..제 기억상..아마.. 1달 전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해서..그러니까 12월 이맘때죠. 그래서..혹시 시간 괜찮으면 한번 돌려보지 않겠냐는 것으로 물어본 거였는데.. 일단 서하도 보고 싶어하실 것 같고 말이에요. 음... 너무 신경은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자신의 짐작을 확인받은 유안은 여전히 무표정인채로 무게없는 말로 대답한다.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죽일 생각을 하다가 그만둔 것에 대한 이유를 나열하려는 듯하다가 '그리고...'에서 멈추어버린다. 그러더니 어째서 유안이 그 때 달려든 것인지에 데해서 물어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말을 돌리는 것이다. 밝히기 어려운 생각인 건가. 순간, 유안의 마음속에서 두 가지 무언가가 갈등하였다. 참견하느냐, 마느냐. 사건 전의 자신이었다면 큰 고민없이 후자를 택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범죄자 씨를 보면서, 조금 심경의 변화가 일어서 말이야...
"저번에도 비슷한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제 자신을 혐오합니다."
주저없이 자신을 향한 조롱 섞인 소리를 툭 내뱉어 유혜의 그 질문에 답하였다. 본래 자기자신을 싫아하는 티를 숨김없이 내는 유안이었기도 했지만, 과거를 반쯤 밝힌 유혜 앞이었기에 더욱 노골적인 듯했다.
"뭐, 한박자 정도 뒤로 가서...이유, 거기까지만 말씀하시면 제재 당할 것이 두려워서 살인에 대한 생각을 그만둔 사람이 되는 걸요. 그에 대한 감상은 생략하겠습니다. 더 덧붙이고 싶으신 것, 정말로 없습니까?"
평소의 다소 거만한 분위기로 말했다. 유혜를 묵묵히 응시하며 외투의 주머니속에 두 손을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