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앨리스를 바라보았다. 앨리스의 몸은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모델로 착각할 만한 몸매였다. 그에 비해 평범한 지은의 몸은... 평소에 딱히 관심쓰지 않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노천탕에서 보니 신경쓰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었던 것이었다. 지은의 복잡한 표정과 함께 앨리스를 바라보는 무습이 뾰로퉁했다. 자신도 저렇게 크고 싶었는데 고등학교때 160 중반에서 멈춘 키에 포기했었다. 잊고 지냈는데 이렇게 키큰 사람을 보니 다시 옛 소망이 떠오른 것이었다. 지은은 선배님이 듣지 못하도록 작은 한숨을 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역시 부럽네요~"
어색한 웃음이었다.
"좋아요. 저 맥반석 계란도, 식혜도 좋아해요! 엣날에는 목욕탕갈때면 매번 먹었는데 바쁘다 보니 요즘은 별로 못먹었네요. 선배도 맥반석 계란이랑 식혜 좋아하시나요?"
서로간의 공통점이 언급되자 얼굴에 미소를 한가득 띄우고 하이텐션으로 물었다. 온천탕의 열기때문인지 단순히 흥분해서인지 양 뺨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지은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왼쪽은 흉터로 얼룩져있지만 오른쪽은 그 나이때 젊은 이들 답게 주름하나 없이 깨끗했다. 아무리 관리를 한다지만 나이는 못 속인다. 나잇살에 조금씩 생겨나는 주름과 떨어져가는 체력은 아직 젊음을 누리고 있는 이들을 질투하게 만들었다. 일단 능력 덕분에 살은 그리 찌지 않지만 확실히 옛날 보단 몸무게가 늘었다.
"젊은 게 좋은 거예요. 젊은 게 좋아요..."
'뮤지컬에서 남자배우가 이런 대사를 했지 아마? '숨긴다고 없어지나 흰머리가?' 아아, 나이는 32살 남자친구도 없고 가장 최근에 사귄에 10년 전쯤이지 아마...이러다가 노처녀로 평생 사는게 아닌 지 몰라...'
생각보다 쉽게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상대의 말에 동의를 했다. 앨리스가 유심히 지은의 얼굴을 쳐다보자 지은도 그것을 깨닫고 다시 멋쩍은 웃음과 함께 얼굴을 붉혔다. 분명 자신의 흉터를 가려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앨리스의 앞에서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라고 생각하며 홀로 자신의 변화에 감탄할 무렵 젊은게 좋다는 앨리스의 말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 그런가요? 전 아직 잘 모르겠네요. 아직은 좀 더 크고 싶고. 뭐라고 해야할까, 어른스러움? 멋있잖아요. 물론 저도 어른이지만요."
지은이 속편한 소리를 해대며 노곤노곤한 온천의 기분을 한껏 느끼고 있었다. 따뜻한 온천이야 말로 자신의 피로를 완전히 풀어주는 것 같았다.
"역시 좋아하시는 군요! 이상하게 맥반석 계란은 이런 곳에서 먹어야 제일 맛있더라고요. 다른 곳에서 먹었는데 목욕탕에서 맛이랑 너무 다른 것 같아서 실망한 기억이 나네요."
행복한 표정을 짓던 지은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온천탕에 기대고 있던 자신의 상체를 들어올렸다.
"지금 먹으러 갈까요? 곧 있으면 폐점시간이니까 빨리 가지 않으면 문을 닫을지도 몰라요."
태연한 목소리로, 아쉽다고 하는 서하의 말에 겨우겨우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를 짜내서 대답하던 아실리아가 이내 서류를 들고 똑바로 몸을 돌려서 서하 쪽을 바라보고 앉았다. 아마도 혼자 부끄러워서 이리저리 숨기고 피하는 제 모습과는 달리 태연한 서하의 모습에 살짝 오기가 돌았던 것이리라. 그래봤자 이후에 건네져 오는 농담에는 도로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제 손에 들린 몇 안 되는 서류들로 얼굴을 탁 하고 가려버렸지만. 정말이지 이런 쪽으로는 지독하게도 면역이 없다고, 아실리아는 새삼스레 그 사실을 인지했다.
" 솔직히 부끄, 러운 건 맞지만... 맞긴 하지만.. 놀리지 마.. "
살짝 의기소침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아실리아는 이내 서류를 한 장씩 넘겨보더니 서하에게 그 서류들을 반으로 나누어서 건네었다. 평소 같으면 굳이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혼자서 처리했겠지만, 그래도 도와준다는 말을 꺼내준 것 자체가 매우 고마웠으니 거절하기도 뭐했다. 게다가, 솔직히 말해서 서하가 도와준다는 게 좋기도 했고.
" 그, 고마워요. 휴가 낼 수 있게, 도와준다.. 는 것도, 서류도. 다른 것도 전부. "
제 몫으로 나눈 서류를 뒤적이다 말고 넌지시 건네는 말에는 진심이 서려있었다. 이것저것 받기만 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은 언제나 마음 한 켠에 자리하고 있었기에, 서하의 호의와 애정은 언제나 진심으로 고맙고 단 것임과 동시에 이따금 과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 걱정.. 해 주는 것도 그렇고 날 좋아해주는 것도, 정말 다 고맙고. 그런데 나는 항상, 받기만 하는데다가.. 소심해서 표현, 도 잘 못 하고. 여러모로 많이 미안해서. "
잠깐 침묵. 아실리아는 흝어본 서류를 제 무릎 위에 살짝 올려놓더니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 ...어, 조금 뜬금없, 기는 한데. 혹시, 내가 해 줬으면.. 한다거나, 하는 거 있어요? "
어젯밤은 집에 오자마자 뻗어서 유안주 소식도 이제야 보고 정상주 다녀간 것도 이제 봤어요. 아, 유안주. 아직 유안주일 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유안이 좀더 챙겨주고 그러고 싶었는데. 뒤늦게 보니까 왜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날까요.
쭉 정주행 하다보니까 왜 이렇게 자괴감이 드는지. 잠들지 않았으면 잡담도 끼고 일상도 돌리고 했을텐데. 내가 이러려고 여기서 뭐빠지게 일하는 거 아닌데...
요즘 거의 갱신만 하고 돌리지는 못 하고 있네요. 솔직히 갱신도 지쳐요... 매일 야근에 조기출근에... 참치로 옮긴 후로 뭔가 좀 거리감도 느껴지고...
스레에 대한 애정은 그대로인데 현실과 피로가 달라붙으니 도저히 이길 재간이 없어요. 매일 살아도 사는거 같지가 않습니다. 바뀐 체제에 적응할 틈도 없이 이거해라 저거해라 쏟아지니 하루 스물네번 머리박고 훅 가버렸음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피로에 박카스가 만사는 아닌데 버티려면 마셔야 하고 그럼 속이 안 받아서 일하다 화장실 뛰쳐가고. 말은 안 했지만 어제까지 거의 사흘에 한번 꼴로 코피가 터지더군요. 이러다 조만간 피눈물도 날것 같슴다. 매일 화장으로 안색 감추고 사니 멀쩡한 줄 아나봅니다. 하하...
아침부터 푸념해서 미안합니다. 정주행하다보니까 너무 울컥해서 뭐라도 말하고 싶었어요. 현실엔 달리 말할 사람이 있는 처지도 아니라서. 보고 불쾌했다면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당분간도 지금처럼 갱신만 틈틈히 하게 될 것 같아요. 저도 어서 상황이 나아져서 돌리고 싶어요. 더 손 놓고 있다간 감 다 잃고 이벤트충이 되버릴 것 같아..(동공지진
그럼 여러분, 오늘 하루도 좋은 하루 되고 감기 조심해요. 이미 걸리신 분들은 어서 쾌차하시길.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이 잘 느껴지네요. 울프주. 현실의 바쁜 상황은 참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지요. 매일 야근에 조기출근..힘들 수밖에 없겠죠. 현실의 피로라는 것은 자고로 감당하기 힘든 법이니까요. 정말 여러모로 고생이 많은 것이 글로서 절로 느껴집니다. 사흘에 한번 꼴로 코피... 세상에....
그리고 푸념을 하면 좀 어떤가요. 힘들어서 털어놓을 곳 정도는 있어야죠. 그런 곳도 없으면 사람은 정말로 버티기 힘든 법이에요. 이 스레가 울프주에게 있어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면...그 또한 좋은 것이겠지요.
결론은 제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부디 힘내주세요. 울프주. 갱신만 틈틈히 하셔도 상관없어요. 지금은 울프주의 현실이 그만큼 힘드니까요. 그 현실. 하루라도 빨리 개선되길 스레주가 조용히 빌어봅니다.
피식 웃으면서 아실리아가 건네주는 서류를 받았다. 솔직히 서류 작업은 매우 귀찮은 일이다. 아니, 정확히는 일 하는 것 자체가 매우 귀찮다. 그냥 마음 같아서는 일을 하지 않고 쉬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아직 일이 남아있다면 도와주는 것이 맞겠지. 그 상대가 연인이라면 더욱 도와야할 것이다. 빨리 끝내버리고 같이 쉬는 것이 좋을테니까.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서류를 대충 바라보았다. 그렇게 어렵진 않지만, 조금 시간은 걸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와중에 아실리아가 하는 말들이 계속 귓가로 들려왔다. 고맙다는 말의 연속이었다. 말 그대로. 자신은 받기만 하고 소심해서 표현도 잘 못하고 여러모로 미안하다는 말도 함께 들려오며 최종적으로는 자신이 해줬으면 하는 것이 있냐는 그 물음에 서류에서 아실리아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 말에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조용히 입을 열어 그 말에 대답했다.
"나를 좋아해주잖아? ...그걸로 난 충분해. 내가 좋아하는 이가 나를 좋아한다. 그 가능성과 확률은 사실상 적어. 특히 나 같은 녀석이라면 더욱 말이야. ...그다지 다정한 말도 잘 못하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하고, 뭔가 달콤한 말을 속삭여주는 것도 아니고... 나른할 뿐이고... ...그런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 사람이 날 좋아해줄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 ...나를 좋아해주는 마음만으로도 난 충분히 받고 있어. 표현은 이미 아실리아. 너의 행동에서 느껴지는걸.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서류를 나눠주는 것만 해도 나를 의지해주는 거잖아. 안 그래?"
작게 피식 웃으면서 윗주머니에 꽂아놓은 볼펜을 끄집어냈고 서류를 체크하면서 잠시 끊었던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도 굳이 해줬으면 하는 것이 있다면... 나중에라도 좋아. 언젠가 용기가 든다면, 내가 방금 너에게 했었던 입맞춤. 받아보고 싶은걸? 아니면 야근을 끝내고 야간을 한 이들이 쉴 수 있는 숙직실에서 나란히 누워서 자다가 돌아가도 좋고. 손을 꼬옥 잡고 자고 싶을 때도 있거든. ...여건만 된다면 집에 초대하고 싶지만.... 나는 부모님과 같이 살거든. 아마 널 데리고 가면, 그...여러모로 너나 나에게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아서 그건 미안해서 힘들 것 같고... ...그래도 언젠간 소개해주고 싶긴 해. 네가 내 연인이라고 말이야."
간만에 정말로 길게 이야기했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다시 서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이건 이렇게 처리하면 될까. 나중에 내 노트북으로 가서 확인을 좀 해봐야할지도 모르겠네.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