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러진 유안은 예상 밖의 행동을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에서 일어나 지은을 무표정으로 쳐다보았던 것이다. 상대가 반응이 없자 지은은 어쩔 줄 몰라, 자신이 어딘가 엄청난 실수를 해버린 것이 아닐까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첫날부터 선배에게 찍히다니. 최악이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그 모든 것이 완벽했던 하루가 순식간의 최악의 하루로 바뀌고 말았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자신을 쳐다보는 유안의 눈과 마주쳤다. 밝은 갈색 눈. 짙은 검은색의 눈을 가진 지은이 상대가 자신에게 화나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조차 잊고 자신도 모르게 유안의 그 밝은 갈색이 참으로 예쁜 색깔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유안의 눈을 멍하니 바라보던 지은에게 유안이 말을 걸었을 때, 당연히도 지은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괜찮으신 건가요? 그전에 제가 투명인간인건 어떻게 아ㅅ... 아.”
지은의 뇌를 거치지 않은 말이었다. 지은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게, 어쩌면 신입인 자신의 능력을 선배가 알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급하게 하던 말을 멈추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어지는 유안의 발언에 이미 그녀의 얼굴은 붉어지다 못해 터질 것만 같았다.
“네? 제가 방금 입 밖으로 제 생각을 말한 건가요? 그럴 리가 없는데 혹시 능력이...”
지은은 안유안의 능력이 독심술일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며 유안에게 물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질문이 체 끝나기 전에 유안이 문 쪽으로 몸을 돌려버렸다. 그런 그의 뒤를 보자 다급해진 지은이 멋쩍게 웃고는 “그럼 저도 휴식시간을 잠시...”라고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유안의 뒤를 따랐다.
사무실 밖 복도로 나온 것은 유안 혼자만이 아니었다. 첫날에 자신도 잠시간의 휴식시간이라며 따라나오다시피 한 지은도 있었다. 문이 또 열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문득 뒤를 돌아보자 그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방금 자신이 그녀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한 것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하던 것 같던데. 끝까지 듣지도 않고 나와버렸다. 오히려 독심술은 아실리아인데. 하지만 굳이 지금 그것에 대해서 언급할 생각은 없어보인다. 지은쪽에서 먼저 입을 열지 않는 한. 대신 다른 이야기를 유안이 꺼냈다. 몸을 완전히 뒷쪽에 있었던 지은에게로 돌리면서.
"따라나오신 이유는?"
...엄청나게 무뚝뚝한 어조의 말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아까 자세히 보지 않아서 이제 눈치챈 건데, 저 느슨하게 양갈래로 묶은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 어딘가 인위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가발인 건가. 유안은 그 생각에 이르렀다. 뭔가 그렇게 생각하니 납득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배게 옆에 놓아둔 핸드폰 진동에 깨어 쳐다본 액정에는 자동이체 알림 문자와 내 대출금 상환까지 6백만원 가량 남았다는 문자였다. 언제부터 이렇게 살았지. 무기질적인 액정을 보며 든 생각은 고작 그거였다, 겨우 그거였다는게 너무 허탈하고 우스워서 헛웃음만 나왔다.
22시 34분. 섀해를 조금 넘긴 1월 초순의 밤은, 감성이나 낭만을 느낄 겨를도 주지 않을만큼 추워, 괜히 후드집업의 매무새를 고쳐입게 만들었다. 역시 나오지 말 걸 그랬나며 후회하기엔 로얄빌라 603호는 너무 좁고 쓸쓸한 공간이었고 서두르는 발걸음은 로얄빌라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흐으, 춥다."
주머니에서 꺼낸 담배는 타이밍이 좋지 않게도 빈곽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피러 나온거였는데. 그냥 집에 다시 들어갈까. 돌연 하늘을 보니, 거기 뜬 것은 우연찮게도 보름달이었다. 예쁘네. 사진 찍어서 보내볼까. 우리 하반장님이나 엄마나 다름없는 윤경감님, 또... 전화나 해볼까 켠 액정은 한 번호 앞에서 멈췄다. 동생, 이라고 저장해둔. 로제.
"...너무 성급했었지."
그땐 왜그리 성급해서는, 뒤늦게 이런식으로 궁상이나 떨고. 전화 해볼까. 손가락은 녹색 통화버튼 앞에서 망설인다.
유안이 뒤를 돌아 지은을 보았을때 그녀는 조심스럽게 사무실의 문을 닫고 있었다. 아직 문을 닫느라 앞을 보지 않고있어 유안이 자신에게 말을 걸긴 커녕 지켜보고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진못한 지은은 상대의 물음에 퍼뜩 몸을 떨고 경직되고 군기잡힌 경례를 했다. 지은은 침을 삼키고 목소리가 제발 떨리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신입, 이지은입니다. 제가 따라나온 이유는..."
선배님을 따라왔다? 말도 안되는 답변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휴식을 하기워해 나왔다고 하기에는 타이밍이 이상하다. 어찌 답할지 모르고 흐지부지하게 말이 끝나버렸다. 빨리 답해야한다는 압박감이 입을 채찍질하는 것만 같았다.
"죄송합니다. 선배님과 친분을 쌓고 싶었... 아니, 그러니까..."
썩 좋지 않은 결과였다. 지은은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영원할 것 같은 침묵에 자괴감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은은 긴장한 듯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못하였다. 유안은 조금 예상 밖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야 다른 팀원들은 자신의 이런 무뚝뚝한 태도에 그렇게까지 연연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귀엽다며 머리를 쓰다듬는 누군가 씨도 있었다...유안은 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그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아무튼, 팀원에게서 이렇게 긴장한 반응은 처음이라고 할까. 이대로 침묵이 계속 이어질 것 같았지만 유안이 깨기로 했다.
"선후배간의 친분이라, 미담이군요."
끝의 '미담'을 말하면서 조금 불쾌한 표정이 얼굴에 일순간 지나간 듯하다. 미담을 싫어하는 건가. 잠시 벽으로 시선을 옮겼다가 긴장한 상태의 지은을 다시 응시하였다. 한 번의 박수소리가 짝 울러퍼졌다. 묵직한 분위기를 깨듯. 유안이 한 것이다. 박수를 치는 동시에 유안은 입을 다시 열었디. 평소의, 과장스럽게 들리기도 하는 연설조.
"뭐, 악의는 없어보이는군요. 훌륭합니다, 누님. 아주 훌륭합니다."
도대체 이 훌륭하다는 말은 나올 때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각설하고, 자판기에서 음료수 뽑을 줄 아십니까?"
이번에는 질문이다. 표정은 여전히 없는데다 무미건조하기까지 하지만. 조금 두서없는 화법이지만 지은아, 익숙해질 거야...(?)
깔끔하게 마른 머리를 빗질하던 손이 멈췄다. 이내 빗을 내려놓고 화장대에서 멀어진 그는 거실로 휠체어를 끌었다. 한산한 거실을 둘러보며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은 그는 부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빈 병이 가지런히 놓여있고, 개수대에선 알코올 냄새가 아직 희미하게 남아있겠지. 남은 술을 싹 개수대에 부어버린건 꽤나 파격적인 일이었다. 악몽은 언제나 그의 발목을 잡았고, 처방전이 되어버린 술은 그를 좀먹기 시작했음을 눈치챈것이겠지.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가진 큰 결심은 며칠이 지났다고 그를 슬금슬금 시험했지만 로제에겐 그것을 견디고 잊게 할 만큼 큰 결심이 있었다.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것.
압생트빛 눈은 부엌을 노려보다 거실을 투명히 비추는 베란다를 향했다. 오늘따라 날이 밝은건 기분탓이 아니겠지. 보름달과 함께 주변을 맴도는 별은 주위를 환하게 밝혔고, 로제는 한참동안 달을 바라보다 손에 쥔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들려있는 핸드폰 사이로 신호음이 들렸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원래 이렇게 전화를 했던 사이라는 듯. 자연스럽게 통화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귓가에 댄 그는 미리 할 말을 정하듯 고민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신호음이 세번째 들릴 때 즈음, 휠체어를 끌며 엘리베이터 밖을 나섰다. 바깥은 마냥 차기만 했다.
미담. 상대에 입에서 또 예상치 못한 답이 나왔다. 유안의 성격을 제대로 알리가 없는 지은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불쾌해보이는 유안을 본 지은은 해탈해지기로했다. 그래, 나는 세상에서 제일 나쁜 후배야. 분명 머리 속에서만큼은 하얗게 불태운 포즈로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10년간 고아원에서 아이들과 싸웠는데 여기서도 같은 악순환이라니. 지은은 상념은 잠시 치워두고 일단 사과부터 하자는 생각으로 허리를 막 접으려는 순간 손바닥이 서로 마주쳐 나는 소리를 들었다. 그 후, 갑작스러운 상대의 칭찬의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고 어색하게 답할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자판기 음료는... 아마도 뽑을 수 있습니다."
부들거리는 입꼬리를 약하게 올려 웃는건지 뭔지 모를 애매한 표정을 만들어내버렸다. 자판기 음료야 당연히 뽑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익스퍼들이 모인 익스레이버. 자판기가 갑자기 트랜*포머 마냥 변신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기에 지은이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애매한 대답이군요. 그래도 뽑을 수 있다니 다행입니다. 지금 막 1층으로 내려가서 자판기 음료를 마실 생각이었거든요. 따라나오신 김에 동행해주시죠."
사람을 대하는 것이 싫다던 유안인데, 이런 모습을 보인다. 아, 일종의 대가 지불일 수도 있겠다. 자신이 넘어져서 지은의 시선을 끌고, 어떻게 되었든지간에 따라나오게 했고, 긴장시켰으니. 그것에 대한 확실한 대가 지불의 심정일 수도. 그야 무언가를 대가 없이 받으면 어떻게든 언젠가는 돌려주는 정신을 가진 사람이니. 자판기까지 같이 가면서 나름대로 스스로 끼쳐버린 긴장을 풀어주고 선배로서의 역할을 할 생각인 모양이다. 이 반쯤 은둔형 인간이 과연 얼마나 할지는 의문이지만.
지은의 대답도 무엇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몸을 돌려서 앞으로 느릿하게 걸어갔다. 그녀가 옆에 있든 말든 혼잣말을 모노톤으로 늘어놓아본다.
"참고로 이쪽은 능력이 독심술 같은 것이 아니라, 감각 차단입니다. 저주 받은 능력, 그 자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