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얼마 되지도 않을 동안, 형형색색의 토사물을 게워 내고, 발음이 어눌해졌고, 머리카락이 길-어-지-고-, 실신하듯 잠에 빠지고, 강아지로 변하고, 기분이 최고로 high해 지고. 여하튼 평생에 몇 번 없을 일을 다 경험했다.
그래 뭐, 우연일지는 모르겠지만 멈뭄신의 술을 마시고 나서 좋은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12.5%의 승률에 장기적인 부작용은 없다면, 나쁘지 않은 도박인 거다. 어디까지나 장기적인 부작용이 없다면 말이지.
멈뭄신은 음료가 무해하다고 했지만, 그것도 결국 주장일 뿐, 뒷받침해주는 증거가 없다. 털이 복슬복슬한 커다란 강아지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고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지애도 자신이 그 정도로까지 꼬여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혹시 모르잖아, 멈뭄신도 모르는 부작용이 있을 지도.
소년은 만족스레 기숙사에서 제 패밀리아인 사화의 털을 말끔하게 빗었다. 날씨가 날씨이다보니, 페르시안인 사화의 털은 거의 말로 형용할 수 없을만큼 털 뿜뿜이 되어가고 있었다. 빗질을 하는 중에, 소년에게 장난을 걸기도 했지만 제법 얌전하게 빗질을 받은 사화는 그릉그릉하면서 잠에 빠졌다. 그제야 소년은 집에서 온 편지들이 담긴 봉투를 제 침대 밑에 있는 작은 상자에 집어넣었다. 그 안에는 편지들이 가득했다.
뻐근한 어깨를 이리저리 돌리던 소년은 교복이 아닌, 평범한 사복 - 그래봤자 깔끔한 티셔츠에 청바지차림 - 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정리했다. 짧은 투블럭은 정리할 게 없었지만 잠들어있을 때 사화가 잔뜩 침을 발라놔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였다.
"사화, 오빠 다녀올게."
잠들어있는 사화의 미간을 가볍게 긁어주고 소년은 조용하고 차분하게 애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속삭이고는 기숙사로 나서서 자연스럽게 연회장으로 향하는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연회장이 가까워질수록 시끄러운 소음 - 주로 청룡 기숙사에 소속된 이들이 내는 - 이 들려와서 소년은 들어가야하나 말아야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결국 소년은 기숙사의 뜨끈한 공기와는 달리 차가운 복도의 한쪽 창틀에 몸을 기대고 창문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편지와 그런 꿈을 꿨음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표정은 차분하기 그지 없었다. 멀리서 걸어오는 발소리에 소년은 고개를 움직인다.
"아."
조용한 감탄사와 함께, 소년은 비스듬히 창틀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반듯하게 세우고 고개를 숙였다.
동화학교는 기숙학교. 24시간 내내 교복만 입고 있을 수도 없으니, 수업시간만 아니라면 사복차림의 학생들이 자주 보인다. 다만, 전통을 중시한다(고 쓰고 보수적이라고 읽는) 사회 분위기 탓인지, 그 사복이란 것도 꽤나 포말한 느낌. 캐주얼한 티셔츠 차림을 본 적은 별로 없었다. 편해 보여서 좋네.
“연회엔 참석 안 한 거야?”
확실히 이 후배님은 왁자지껄한 연회장과는 안 어울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조용하잖아.
“안 오길 잘한 거야. 거기 완전 난리 났다고?”
이게 진실. 솔직히 자신이 왜 그렇게 계속 술잔을 받았는지도 기억이 나진 않는다. 단순히 연회의 분위기에 휩쓸려서 일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정도로 쉽게 휩쓸리는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건 마치, 이 사태의 이면에 자신도 친구들도 십이간지도 아닌, 다른 누군가의 의지가 개입한 것 같은 기분이다. 누군가 자신의 불행을 보며 낄낄대고 있다는 더러운 기분을 지울 수가 없는 거다.
“누가 잔에다가 저주를 건 거 아닐까.”
엄청난 비밀을 공유한다는 듯이 목소리를 죽이는 지애의 눈이 장난스럽게 반짝인다. 확실히 반 이상은 농담이지만, 어느 정도 진담이라는 게 더 무섭다.
소년은 지애의 말에,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조용하고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 깍듯한 어조가 어디 가지는 않았지만. 편해보인다는 지애의 말에, 감사하다는 듯 고개를 숙여보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참석했습니다만. 일단은 피신이라고 표현하는 게 좋겠습니다."
피신, 이라는 말은 거의 뭉개듯이 발음했지만 지애에게는 정확히 소년의 말이 들릴 것이다. 그래 피신이다. 저 왁자지껄한 연회장에 다시 들어갈 엄두도 나지 않고 방금 전에 꾼 꿈의 여파가 아직 소년을 감싸고 있었다. 편지도 그랬다. 소년은 조금 가라앉은 기분이였지만, 그 기분이 소년의 말에는 묻어나지 않았다. 소년의 성격은 그런 기분까지 묻어낼 정도로, 감정기복이 심하지 않았다.
"잔에다가 저주가 아니라, 그 음료수 자체가 신께서 장난을 친것 같다는 생각은 안하십니까 선배님."
소년은 이미 머리가 길어지고, 멍멍이가 됐다가 또 다시 행복한 기억을 꿈으로 꾸고, 또 다시 무기재토를 하면서 상큼한 맛에 혼란스러워하기도 했고. 그 모든 상황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던 소년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면서 지애의 눈이 장난스럽게 반짝이는 것에 대꾸했다. 조용하고 차분한 어조였다. 소년뿐만 아니라, 지금도 연회장에 갔다가 멍멍이로 변해서 휴계실에서 친구들을 공격하고 있는 선배님도 계셨다. 연회장을 넘어서 기숙사 휴계실까지 점거한 음료수의 파문에, 소년은 애써 무시하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