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란하다면 곤란했다. 이번 사건 탓에 요 며칠동안 심적으로 쭉 혼란했으니. 그 때문에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좋았지만. 미뤄진 수업의 후폭풍은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몰아치겠지만 그건 일단 나중의 일이다. 어차피 후일은 미래의 자신이 알아서 해줄 것이다. 사이카는 뒷일은 고려하지 않기로 했다.
"어, 그래? 나는 귀여운 멍멍이로 변해서 혼자 숨으려고 나왔지. 너도 알겠지만 귀여운 멍멍이를 보면 애들 반응이 장난 아니거든."
물론 자신이 말한 '애들'은 이미 그 멍멍이의 정체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고의적으로 쓰다듬을 즐기는 악랄한 부류였고, 심성적인 면에서 소녀와는 차이가 있었다. 물론 자신 역시도 자신이 개가 된 상태가 아닐 때는 그 지옥의 쓰다듬에 기꺼이 동참하고 있었지만. 이건 굳이 말할 필요는 없어보였다.
그쪽,처음 본 사이에서 어색하게 남을 부를 때 종종 쓰곤 하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적당하기는 가장 적당하단 말. 사이카는 상대가 저를 심하게 낮춰 부르지 않는 이상 뭐라 부르든 상관하지 않는 편이었고, 또다시 고개를 숙인 소녀의 말에 천천히 답하기만 했다.
"근데 혼자 있으면 무섭지 않아? 뭐, 내가 굳이 남이랑 같이 있으란 소리 하려는 건 아닌데, 밤중에 혼자 다니는 건 위험하잖아."
든든한 패밀리어랑 같이 있다면 모를까, 그런 것 같지도 않아보이는데. 또 그렇다고 자신이 상관해야할 일은 아니지만. 거기까지 생각하며 사이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지? 라는 말에 향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이 일이 잠잠해졌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컵에 든 게 뭔지 조심해서 먹을 필요도 없고 강아지로 변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귀여운 멍멍이로 변해서 혼자 숨으려 나왔다라... 향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이윽고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 것도 같다. 모든 학생들이 자신처럼 귀엽다며 쓰다듬다가 들어올리거나 한다면... 끔찍할 것이다. 향은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앞으로 자기도 저렇게 강아지가 된다면 어디 숨어있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사람들 반응이 장난 아닐 것 같아요... 막 쓰다듬으려 하거나 안아들려고 할테고..."
문득 자신이 한 짓이 생각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소녀는 또 한 번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러다가 목뼈가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하마터면 또 다시 죄송합니다 러쉬가 나올 뻔했으나 이 즈음 되면 상대가 부담스러워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입을 꾹 틀어막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네... 저도 그래서 달이 밝게 떠 있을 때까지만 있으려고 했어요."
너무 늦게까지 있으면 저번의 그 현호선배 일처럼 다른 사람이 나서서 도와주지 않는 이상은 벌벌 떨 게 분명하니까. 아이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고보니 이름도 안 물어봤었다. 앞으로 얼마나 자주 마주칠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상황에서 만큼은 그쪽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상대는 상관하지 않는 것 같다만 이쪽이 불편하다. 설마 이름 물어봤다고 싫어하진 않겠지. 향은 슬쩍 눈치를 보다가 말을 꺼냈다.
1. 멈뭄멈뭄멈뭄미체로만 말하게 되는 술 2. 무지개를 토하게 되는 술(?) 3. 멍뭉이로 변할 수 있는 폴리쥬스 4. 유포리아 묘약(마시면 행복감에 취하게 됩니다. 독특한 진줏빛.) 5. 윤기나는 마법 머리약(feat.엘라스~틴) 6. 펠릭스 펠리시스(행운의 물약. 황금색) 7. 한 가지의 행복한 꿈을 꾸게 해주는 약 8. 그저 평범한 음료수
처음에는 그저 지옥의 무한 쓰다듬과 강제 포옹 정도가 다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다가 장난의 대명사인 청룡답게 그 수법이 점점 진화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강아지용 간식을 눈앞에서 흔들면서 먹고 싶으면 배를 뒤집고 애교를 부려보라고 하거나, 프리스비를 10초 안에 물어오면 10갈레온을 주겠다며 딜을 넣거나, 귀여운 강아지 옷을 입히고 사진을 찍는 식으로 개가 된 학생을 고문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응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개가 된 상태에서는 무작정 거부하기 어려운 일이라서, 그야말로 악독하기 짝이 없는 장난질이었다. 그에 비하면 소녀의 행동은 지극히 예의바른 축에 들었다.
"그래? 그럼 됐고."
달이 밝게 떠있을 때까지.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한적한 데서 달 구경도 하고, 가끔은 조용하게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은 법이다. 물론 자신은 그렇게 보내는 시간이 지나치게 많은 게 흠이었지만. 머글 사회라면 몰라도, 이곳은 하늘이 맑아 하늘을 보며 한적하게 있기에도 좋았다.
"나는 키노 사이카고, 청룡. 신입생이야?"
지금 이 시기에 1학년이라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사이카는 말이 끝난 후에야 질문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음, 괜히 입 아프게 더 물었네. 왜 그랬지.
"아, 그리고 난 3학년."
그래도, 이왕 연 김에 말은 마저 하기로 했다. 깜빡하고 답에 넣지 않은 부분을 추가하며, 사이카가 오른쪽에 묶인 머리를 빙글빙글 꼬았다.
>>164 앗씨 이분 진짜 너무하시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동안 우리가 같ㅌ이 아무말햇던 그 시간은 잊은거애요????? 아~~~~ 저는 츠카사주때문에 마음의 상처가 너무 심해서 이만 요양하러 떠나렵니다~~~~~~~ 모두 안녕히계세요~~~~~~~
수업이 모두 끝나고 푸른 어스름만이 감도는 시간, 사람이 거의 없는 도서관에서는 한숨이 연이어 몇 번 새어나왔다. 그 소리의 기원을 찾아가보면, 어두운 책장 사이에서 책들을 상대로 낑낑대는 이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와아, 진짜 무거워...”
’이나야, 너 방과후에 도서관 갈 거지? 그치?‘ 나른한 햇빛을 받으며 새근새근 졸고 있을 때, 어느 샌가 질문 하나가 귀에 흘러들어왔다. 잠에 한껏 취해 내용조차 제대로 듣지 못하고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심부름이 하나 늘어버린 것이다. 그래, 뭐 할 일도 없으니까. 대충 수긍하고 손에 꼬옥 쥔 쪽지를 펼쳐보았으나 얼핏 봐도 족히 대여섯 권은 될 법한 책의 목록들을 보며 한숨만이 나올 뿐이었다.
그래, 그 부분까지는 납득할 수 있었다. 뭐. 부려먹고 싶었나보지. 드래곤의 눈을 뽑으라는 것보단 쉬우니까. 그렇게 도서관에 다다르고 부탁받았던 책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는데.
“원래 책이 이렇게 높이 있었던가?”
이상하리만큼 책들이 하나같이 다 높은 곳에 있어서, 고개를 치켜들고 보아야 겨우 제목이 보일법한 것이다. 하지만 높이의 장벽은 머글에게나 통하는 이야기. 이럴 때 쓰라고 마법이 있는 거니까! 윙가르디움 레비오…
“아야!”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마법으로 저 높이 있던 책을 빼내던 중 어디선가 들려온 이상한 소음에 마법이 풀렸고, 공중에 떠버린 책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수직낙하하였다. 으아, 진짜 아프네. 바보가 되어버릴지도…. 맞은 부위를 쓰다듬으며 이미 땅에 떨어져버린 책을 하염없이 노려보지만, 그렇다고 책이 사과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은 없었다.
다 귀찮다... 누군가 지나갈리 없다 판단한 후에 책은 대충 옆에 놓아두고, 바닥에 털썩 앉아버린다. 뭐, 어떻게든 될 거야. 조금 쉬어도 되겠지. 자다 깬 여파로 졸음이 조금 밀려오는 듯 하였다. 노곤한 오후였다.
>>176 아니 이분 기다렸다는듯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저 잠깐 잘못 봐서 상처받았으면 상처로 치유한다고 복수하라고 하는 줄 알았어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후 좋아요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요(코쓱ㄱ
소년은 개에서 사람으로 다시 돌아오고 나서, 아무도 제 자신에게 접근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바람에 아무거나 주워마시고 말았다. 그래 안도하느냐고. 소년은 제 입에서 나오는 아, 가 아닌 마 하는 발음에,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리면서 한숨을 쉬고 말았다. 감정 기복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혼란스럽고 곤란한 상황임은 분명하다. 아무래도 연회장을 빠져나가서 어디에 조용히 피신해있는 게 자신의 정신건강 및 자신의 감정 컨트롤에 도움이 되겠다 싶어서 소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안그래도 무표정에, 차분하고 진중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 주를 이루는 소년의 표정은 꽤나 험악하게 보여서 도서관으로 향하는 소년을 다른 학생들이 슬금슬금 피해다녔다.
소년의 걸음은 도서관의 앞에서 멈춘다. 목을 한번 쓰다듬고, 소년은 천천히 입가를 손으로 매만진다. 도서관이라. 이 상태로 기숙사에 가면 분명히 같은 침실을 사용하는 친구가 놀려댈게 분명했다. 소년에게는 이 장소가 최적이다는 판단을 내리고 조용한 도서관의 분위기를 깨지 않도록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연회장의 시끌벅적하고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피해, 피난혼 학생들이 몇몇 보였다.
소년은 책장 사이를 걸으면서 적당히 읽으면서 시간을 보낼만한 것들을 찾아보다가, 쌓여있는 큼지막한 책들과 그 책 옆에서 노곤한 오후 햇빛에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여학생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필이면 읽을 만한 책이 있는 책장에 기대어 있는 터라서, 소년은 조심스럽게 여학생을 건드리지 않게 걸음을 내딛였다. 그 좁은 틈에, 소년의 발이 책을 조금 툭 하고 친건 여담이다.
"....."
이런, 소년은 ㅇ 발음이 안되는 상황에서 아, 하는 단순한 말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저 입을 막고 그 아 하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틀어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