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큰 덩치의, 소위 말하는 대형견종류에 들어갈법한 스테그하운드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는 개가 연회장 한구석에 자세도 반듯하게 앉아서 늘씬한 주둥이를 바닥에 대더니 천천히 몸을 엎드렸다. 소년은 이제는 거의 반포기 상태였다. 또다시 개가 됐을 때엔 정말로 자신에게 음료수를 먹인 친구를 공격해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 마저도 저 멀리 머리 한구석에 치워두고 소년은 한쪽으로 몸을 피했다. 슬슬 익숙해진다는 게 무서울 정도였다. 도대체 이 난장판은 언제 끝날 것인가.
앞발을 교차한 뒤, 그 위에 얼굴을 댄 굉장히 얌전한 자세로 엎드려(?) 있던 소년은 자신의 매끈한 앞발과 말랑말랑한 새까맣고 매끈한 털에 알맞는 까만 젤리를 바라보다가 소년은 한쪽 앞발로 눈가를 턱 하고 가렸다. 제발 아무도 안왔으면 좋겠다.
소년의 앞으로 학교 소유의 부엉이 한마리가 부엉 - 하고 날아와서 편지 하나를 떨어트리고 도로 날아갔다. 그 부엉이는 잠시, 연회장 한구석에 엎드려있는 소년의 앞에 착지하더니 마치 소년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소년은 컹 ! 하고 짖었고 부엉이는 부엉 - 하고 빠르게 날아가버렸지만. 편지의 인장은 익숙한 제 가문의 인장이였다. 그러니까, 편지를 보낸 사람은 자신의 셋째 누님이 아니면, 어머니일 것이다. 일단 공식적으로 어머니가 수장이시고, 누님은 후계자의 신분이니까.
자그맣게 그려진 삼족오의 날개에 잔뜩 달린 새까만 눈동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년이 앞발을 이용해 편지를 제 턱 아래에 냅두고 다시 얌전하게 엎드렸다. 지금 당장 편지를 뜯을만한 기운도 없고, 뜯을 생각도 없었기에 소년은 그렇게 한참을 연회장 한쪽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아이는 그저 멍~한 채 사이카의 말을 들었다. 그 멈뭄멈뭄미의 신인가 뭔가하는 작자는 무엇이며 이 사태는 대체 뭐란 말인가? 문득 소녀의 기억 속에서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최근 제 친구들이 새로 산 음료수라면서 뭔가를 들고다녔지. 그리고 나서... 아이는 한숨을 쉬었다. 그런 일이라면 확실히 여러모로 곤란해질 것이다. 화장실엔 무지개색 토사물이 넘쳐날 것이며 머리가 라푼젤 급으로 길어진 아이들도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방금 전 사태처럼 동물로 변했다가 돌아온 아이들과 그런 아이들을 동물 취급했다가 뻘쭘해진 아이들은...
"곤란한 일이 벌어졌네요..."
향은 걱정스런 눈길로 말했다. 이제 누가 주는 음료수는 마음 놓고 마시질 못하겠구나. 그녀는 한숨을 쉬며 사이카를 바라본다. 대체 그 멈뭄멈뭄어쩌고 신이란 자는 무슨 속셈으로 이런 일을 벌인건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 없었다. 단순히 재미로 그런 건가? 그렇다면 더 큰일인 거고. 이렇게 무시무시한 일을 단순히 재미로 하다니. 한 번만 더 이런 일을 벌였다간 온 학교가 난리일 것이다.
이 시간에 여기서 뭘 하고 있었냐라. 향의 눈이 느리게 깜빡여진다. 향은 여기서 산책을 하고 있었고... 그 다음은 상상하지 말자. 쪽팔리니까. 향은 사이카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린다. 그 동안은 그 멈뭄뭐시기 신이 벌인 짓에 혼란해하느라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 저는... 산책을 하고 있었어요... 그... 그쪽은요?"
뭐라고 불러야 할 지 몰라서 잠깐 멈칫했던 건 비밀이다. 나이도 모르는데 섵불리 선배니 동급생이니 함부로 정하는 건 실례였다. 향은 더듬거리며 대답을 하곤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혹여나 제가 부른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아니할까? 초조함이 온 몸을 훑어내렸다.
신나게 무지개토를 하고 난 다음 향은 목이 말라 컵에 따른 음료수를 마시고 말았다. 그런데 설마 그 음료수가 아까 그 무지개토의 주범과 동일한 것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향은 신명나게 잠에 빠져들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긴 어디일까? 향은 눈을 뜬다. 여긴... 여기는? 향은 눈을 크게 뜬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여긴 옛 집이었다. 그녀와 그녀의 어미가 같이 살았던 그 곳. 향은 헐레벌떡 일어났다. 또 학대당할 지도 모른다. 또 맞을 지도 모른다. 또 욕을 들을지도 모른다. 또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괴롭힘을 당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때였다. 방문이 스르르 열렸고 하늘빛 머리의 여인이 들어왔다. 여인은 제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빛에 따라 색이 바뀌는 갈색 눈동자도 그대로였다. 다만 차이점이 하나 있다면 온화한 웃음을 띠고 있다는 것 정도.
"향아."
여인이 자신을 부른다. 다정한 목소리가 제 귀를 훑는다. 백향은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아이는 어미와 살았을 때 이리도 다정하게 불려진 적이 없었다. 즉 이건 꿈이 분명할 터였다. 그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어머니를 흉내낸 여성은 자신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갈빛 눈동자와 하늘빛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했다. 여인은 아이를 포옥 안았다. 향은 울음을 터뜨렸다.
"사랑하는 내 아가."
"어... 엄마..."
향이 엄마라 부르짖자마자 여인은 무지갯빛 물방울로 화했다. 향은 잠에서 깨어났다. 자신은 바닥에 드러누워 자고 있었다. 눈가에 눈물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이게 다 저 약물 때문이야. 향은 그리 생각하며 눈가를 슥슥 닦았다. 음료는 여전히 컵에 담긴 채로 제 빛깔을 뿜어내었다.
언제나 알기 어려운 말만 하시는 교수님이시네요. 그렇죠? 다각다각 소리와 함께 교수님은 어디론가 가버리셨습니다.
!!! 축하합니다!!! 청룡 기숙사에 50점이 추가됩니다!!!!
' 부엉 '
어디선가 부엉이 울음소리와 함께 낯선 부엉이가 날아들어왔습니다. 부엉이의 발에는 묵직한 상자 소파가 들려있습니다. 부엉이는 몇 차례 날아다니다가 그것을 사이카에게 떨어뜨렸습니다.
' 부엉 '
부엉이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학교 소속의 부엉이는 아니었습니다. 부엉이는 어디론가 날아가버렸습니다. 묵직한 소파를 풀자, [지팡이 관리 세트]라고 금장이 새겨진 제법 묵직한 나무 상자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지팡이 관리에 필요한 모든 게 들어있습니다. 심지어, 설명서까지 말이죠.
곤란하다면 곤란했다. 이번 사건 탓에 요 며칠동안 심적으로 쭉 혼란했으니. 그 때문에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좋았지만. 미뤄진 수업의 후폭풍은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몰아치겠지만 그건 일단 나중의 일이다. 어차피 후일은 미래의 자신이 알아서 해줄 것이다. 사이카는 뒷일은 고려하지 않기로 했다.
"어, 그래? 나는 귀여운 멍멍이로 변해서 혼자 숨으려고 나왔지. 너도 알겠지만 귀여운 멍멍이를 보면 애들 반응이 장난 아니거든."
물론 자신이 말한 '애들'은 이미 그 멍멍이의 정체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고의적으로 쓰다듬을 즐기는 악랄한 부류였고, 심성적인 면에서 소녀와는 차이가 있었다. 물론 자신 역시도 자신이 개가 된 상태가 아닐 때는 그 지옥의 쓰다듬에 기꺼이 동참하고 있었지만. 이건 굳이 말할 필요는 없어보였다.
그쪽,처음 본 사이에서 어색하게 남을 부를 때 종종 쓰곤 하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적당하기는 가장 적당하단 말. 사이카는 상대가 저를 심하게 낮춰 부르지 않는 이상 뭐라 부르든 상관하지 않는 편이었고, 또다시 고개를 숙인 소녀의 말에 천천히 답하기만 했다.
"근데 혼자 있으면 무섭지 않아? 뭐, 내가 굳이 남이랑 같이 있으란 소리 하려는 건 아닌데, 밤중에 혼자 다니는 건 위험하잖아."
든든한 패밀리어랑 같이 있다면 모를까, 그런 것 같지도 않아보이는데. 또 그렇다고 자신이 상관해야할 일은 아니지만. 거기까지 생각하며 사이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지? 라는 말에 향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이 일이 잠잠해졌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컵에 든 게 뭔지 조심해서 먹을 필요도 없고 강아지로 변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귀여운 멍멍이로 변해서 혼자 숨으려 나왔다라... 향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이윽고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 것도 같다. 모든 학생들이 자신처럼 귀엽다며 쓰다듬다가 들어올리거나 한다면... 끔찍할 것이다. 향은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앞으로 자기도 저렇게 강아지가 된다면 어디 숨어있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사람들 반응이 장난 아닐 것 같아요... 막 쓰다듬으려 하거나 안아들려고 할테고..."
문득 자신이 한 짓이 생각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소녀는 또 한 번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러다가 목뼈가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하마터면 또 다시 죄송합니다 러쉬가 나올 뻔했으나 이 즈음 되면 상대가 부담스러워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입을 꾹 틀어막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네... 저도 그래서 달이 밝게 떠 있을 때까지만 있으려고 했어요."
너무 늦게까지 있으면 저번의 그 현호선배 일처럼 다른 사람이 나서서 도와주지 않는 이상은 벌벌 떨 게 분명하니까. 아이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고보니 이름도 안 물어봤었다. 앞으로 얼마나 자주 마주칠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상황에서 만큼은 그쪽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상대는 상관하지 않는 것 같다만 이쪽이 불편하다. 설마 이름 물어봤다고 싫어하진 않겠지. 향은 슬쩍 눈치를 보다가 말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