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4690295> [1:1/HL] 사자와 북극성 01 :: 662

Rick

2017-12-31 12:18:05 - 2022-04-15 07:33:53

0 Rick (3753456E+5)

2017-12-31 (내일 월요일) 12:18:05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
햇빛처럼 꽃보라처럼
또는 기도처럼 왔는가
행복이 반짝이며 하늘에서 풀려와
날개를 거두고
꽃피는 나의 가슴에 걸려온 것을.
하이얀 국화가 피어 있는 날
그 짙은 화사함이
어쩐지 마음에 불안하였다.
그날 밤 늦게, 조용히 네가
내 마음에 다가왔다
나는 불안하였다. 아주 상냥히 네가 왔다
마침 꿈 속에서 너를 생각하고 있었다
네가 오고 그리고 은은히, 동화에서처럼
밤이 울려 퍼졌다
밤은 은으로 빛나는 옷을 입고
한 주먹의 꿈을 뿌린다
꿈은 속속들이 마음 속 깊이 스며들어
나는 취한다
어린 아이들이 호도와
불빛으로 가득한 크리스마스를 보듯
나는 본다, 네가 밤 속을 걸으며
꽃송이 송이마다 입맞추어 주는 것을.

<라이너 마리아 릴케,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

2 폴리주 (2028482E+4)

2017-12-31 (내일 월요일) 16:12:42

앗... 여기도 인증... 나메란에 #단어 치면 인코가 되나요?
폴리주도 갱신해요! ㅠㅠㅠㅠ 네, 날아간 것들이 아쉽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다시 만날 수 있었다는 게 중요하니까요. 릭주 다시 한 번 더 감사해요... (꼬옥)

3 릭주 ◆rAqAiJ2zqg (3753456E+5)

2017-12-31 (내일 월요일) 16:15:01

네, 똑같이 #단어 하면 인코 생기네요!! 네에 다시 만날 수 있어 다행이예요.. 참치로 이주 얘기가 나온 시점이라서 다행이구..♡´・ᴗ・`♡ 저도 항상 고마워요 폴리주. 많이 고마워요(♡´౪`♡)

4 크리스마스 선물 (2028482E+4)

2017-12-31 (내일 월요일) 16:16:52

~제인이 중3이고 릭이 고1입니다~
[릭과 제인의 크리스마스 3일 전]

이브도 아니고, 크리스마스도 아닌. 이브의 이브라고 부르면 좋을까, 생각하며 제인은 핸드폰 달력을 봤다. 학교가 달라져 보기 힘들겠지, 중3으로 올라가는 날 생각했지만. 옆집이라서 연락만 하면 예상했던 것보단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역시, 학교에서 볼 수 있는 거랑 없는 거랑 차이가 크다.
릭이 없는 학교가 조금은 –가끔은 조금 이상으로- 쓸쓸하게 느껴진다.
뭐, 어차피 내년에 같은 학교에 갈 것이고. 올해는 얼마 안 남았으니까.

한숨을 푹 내쉬는데 릭이 옆에서 TV 안 봐? 하면서 은근슬쩍 조금 더 가까이 붙어 제 핸드폰 화면을 정말 티 안나게 훔쳐본다. 아마 내가 한숨 쉰 게 신경 쓰였던 모양이지. 제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볼 거야, 작게 말하곤 핸드폰 화면을 껐다. 조금 과장을 보태 학교에서 제일 인기 있을 남자와 같은 쇼파에 앉아서 TV 시청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순전히 릭의 옆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이겠지. 소꿉친구의 특권이라면 특권이란 거다, 생각하며 제인은 릭의 팔을 조금 당겨서 그의 몸을 살짝 기울게 해 그의 어깨에 조그마한 머리통을 기댔다. 그리고 나른한 표정으로 눈을 반쯤 감고는 TV 화면에서 웃고 떠들고 있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

“제인.”

릭이 제인을 불렀다. 돌아본 시야에, 릭의 손에 들린 크리스마스 트리장식으로 쓰일 작은 지팡이-흰색과 녹색이 감긴 지팡이모양 막대사탕 같은-가 흔들거리는 것이 잡힌다. 고양이풀 흔들 듯 흔드는 모양, 그리고 어쩐지 기대감이 어린 것 같은, 재밌어 하는 게 역력히 보이는 릭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없던 심술이 솟는 것 같다. 제인은 뚱한 표정으로 지팡이와 릭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손을 둥글게 말아 지팡이를 투닥투닥 조금은 전투적으로(?) 건들었다. 발톱을 감추고 솜방망이같은 손으로 장난감을 전투적으로(?) 치는 새끼고양이가 절로 연상되는 꼴을 하고 제인이 새침하게 입술을 열었다.

“내가 특별히 너랑 놀아주는 거야.”

니가 놀아주는 게 아니라, 내가 놀아주는 거다, 라는 뜻을 담아 한껏 도도하게 말했는데. 어쩐지 릭이 입술을 꾹 다물고선 희미하게 몸을 떤다. 웃음을 참는 게 분명한 소꿉친구를 보며 제인이 눈을 가늘게 흘기며 입술을 삐죽였다. 그리고 둥글게 주먹 쥔 손을 릭의 뺨에 사뿐히 얹는다. 고양이 손처럼 말린 손가락의 마디 부분이 정말 릭의 뺨에 살포시 닿기만 했다. 주먹을 쥐니 살이 없는 제인의 손이 한결 희고 작아 보인다.

“재밌어?”

뾰로통하게 묻는 게 아무래도 삐진 모양이지. 그러나 언제나처럼, 릭은 삐진 제인을 잘 달래줄 것이라 믿는다.

*

릭 좋아해.

네가 너무 좋아, 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5 생일 선물 (2028482E+4)

2017-12-31 (내일 월요일) 16:17:27

[네 생일을 축하하고 싶어.]

올해는 직접 만든 케이크를 선물하고 싶어서,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었다. 릭의 생일이 마침 휴일이라 다행이었다. 뭐, 너무 어려운 것은 못 만들겠지만. 이 정도면 만들 수 있겠지 싶어서 지난주 토요일에도, 지난주 일요일에도 팬케이크를 굽는 연습을 했다. 제인은 이제 태우지도 설익지도 않은, 적당한 색감의 맛있어 보이는 팬케이크를 크기별로 구울 수 있었다.

층층이 밑에는 넓고 위에는 좁아지는 형태로. 구상한 케이크를 만들기 위해서 제일 커다란 –제일 커다랗다고 해도 제인의 손바닥보다 조금 큰 정도지만- 팬케이크를 아래에 깔고 그 위에 생크림을 바른 후 슬라이스로 자른 딸기를 얹고, 그 위에 팬케이크를 얹고 생크림을 바르고 또 다시 슬라이스로 자른 딸기를 얹는 작업을 몇 번 반복했다. 5층 정도를 쌓고서 그 위에 생크림을 바른 후 슈가 파우더를 솔솔 뿌렸다. 그 위를 딸기로 만든 장식을 얹었다. 윗부분을 살짝 잘라 생크림으로 얼굴을 만들어주고 잘랐던 윗부분을 모자처럼 덮어주고 깨를 눈동자 위치에 붙여준 장식이 꽤나 귀여워 보였다. 케이크를 완성한 제인은 만족스레 웃었다. 이정도면 릭도 놀라겠지, 의기양양하게 옆집…으로 향하려다가 혹시 팬케이크를 올린 접시를 길가다 엎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릭을 제인의 집으로 부르기로 했다. 시계를 보니 점심을 먹기 직전인 시간대, 아직 안 먹었으면 좋겠는데. 생각하며 제인은 깨끗이 손을 씻고 핸드폰을 잡았다.

[생일 축하해, 릭. 지금 우리 집으로 와줄 수 있어?]

문자를 보내는 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데, 왜 이렇게 떨릴까. 릭이 이 케이크를 마음에 들어할까? 초조함과 설렘 사이를 오가는 기분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며 제인은 릭의 답장을 기다렸다.

6 이름 없음◆lcVSk6vvyc (2028482E+4)

2017-12-31 (내일 월요일) 16:21:54

앗...!! 그럼 저도 인증코드 달아봅니다. 이주 이야기 미리 해두길 정말 다행이예요! ㅋㅋㅋㅋㅋㅋㅋ... 릭주 너무 귀여우셔... (꼬오옥) (*´ ワ `*)

7 릭주 (5135391E+4)

2017-12-31 (내일 월요일) 23:40:35

흑흑 고마워요 폴리주ㅜ♡ㅜ ㅠㅜㅜㅜㅜㅜ(와락) 저는 지금 종치는거 보러 보신각 와있어요!! 그리고 폴리주 생각나서..헤헤 급하게 달려와써요 조금 일찍 새해인사 드리구 가요 해피뉴이어예요 폴리주!!~~ 내년에도 잘부탁해요 사랑해요♡♡!~~♡

8 폴리주 ◆lcVSk6vvyc (2028482E+4)

2017-12-31 (내일 월요일) 23:47:21

폴리주는 졸림을 참고 2018년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아... 보신각에 가셨군요! 보신각에서 종 치는 것을 실물로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보러가셨다니까 신기해요. 감기 안 걸리게 따뜻하게 입고 계시나요? 으아... 흑흑... 제 생각이 나서 급하게 달려와주셨다는 게 감동이예요...ㅠ////////ㅠ

해피뉴이어 릭주, 내년에도 릭주에게 좋은 일이 잔뜩 있기를 바라요. 내년에도 잘 부탁해요, 사랑해요...!! 사탕하고 캔디하고 쥬뗌므해요!

9 폴리주 ◆lcVSk6vvyc (6914985E+5)

2018-01-01 (모두 수고..) 00:02:57

사실 크리스마스 때 레스 남기지 못했던 게 마음에 걸려서, 올해 1월 1일은 레스 남겨야지! 마음 먹고 열심히 깨어 있었어요..!! 눈이 건조해서 슬슬 자러가야겠네요. 릭주는 보신각에서 종 치는 것 보시고, 주위 분들과 신년 축하 나누시고 조금 늦게 주무실까요? 감기 안 걸리게 따뜻하고 입고 계셔야 해요. 오늘도 좋은 꿈 꾸시구요.

릭주가 찾아와주신 0레스의 시는 봐도 봐도 좋아요. 그 이후로 릴케의 시를 찾아보고 있지만 제 0레스의 시와 릭의 시 (소녀의 기도), 폴리의 시 (내 눈을 감기세요)만큼 제 마음에 드는 시가 없어서, 2판을 제가 세우게 된다면 릴케의 시가 아니라 노래가사를 적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 어쩌면 0레스의 시를 계속 사용하게 될지도 모르겠고요! (0레스의 시는 정말 읽을 때마다 좋아서 감탄이 나와요)

올해에도 잘 부탁 드려요. 사랑하는 릭주! (´͈ ᵕ `͈ )♡

10 릭주 ◆rAqAiJ2zqg (2621189E+6)

2018-01-01 (모두 수고..) 11:37:36

ㅠㅠㅜㅜㅜ네에, 폴리주에게도 좋은 일이 그득그득 하기를 바라요.. 그리고 그 중 하나쯤은 제가 만들어드릴 수 있기를 바라요(`∀´)ゝ” 다시 한번, 올해도 잘 부탁드려요!!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해요 폴리주(●o’∪`o)ノ―♪`*.+
그 보신각 얘기를 좀 하자면, 놀랍게도 사람이 너무 많아서 하나도 춥지 않았어요^-^ㅋㅋㅋㅋㅋㅋ 그, 뭐랄까.. 펭귄들이 단체로 꽁기꽁기 안고 있는기분...?(??) 네에, 2판에는 노랫말을 적어도 좋을거예요ㅎㅎ!! 뻘하지만 저 어제 노래 하나 들었는데.. 달과 별의 노래라구, 들으면서 왠지 릭과 폴리 생각이 났어요 왜일까♡(ŐωŐ人) 텍본 정리는 시간날 때마다 얼른얼른 해놓을게요!! 오늘도 행복하구 좋은 하루 되세요 폴리주!~(♥ω♥*)

11 릭주 ◆rAqAiJ2zqg (2621189E+6)

2018-01-01 (모두 수고..) 11:52:50

으음.. 그런데 빨리 정리하고 싶은데 참치에 스탑기능을 어떻게 쓰는지 모르겠어요(T▽T).. 에 설마 없는거면 그 그득그득한 양을 스탑 없이 올리는게 너무 폐()가 될거 같기도 하구.. 아 참치는 그런데 파일 업로드도 할 수 있는 모양이더라구요 아예 텍본 자체를 여기 올리는게 나으려나요ㅎㅎ..!

12 폴리주 (6914985E+5)

2018-01-01 (모두 수고..) 15:06:38

이미 만들어 주시고 계시는 걸요! 이렇게 같이 새해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게 폴리주에게 좋은 일이예요. :> 와ㅏ... 사랑한다는 말을 연달아 들었네요. (햅삐) 사모하고 연모하고 또 사랑하고 있어요! 한국어는 좋네요, 사랑이라는 표현이 이렇게나 다양해서. (헤헤) 아닠ㅋㅋㅋㅋㅋㅋㅋ 펭귄... 단체 펭귄이라니 넘 귀엽잖아요...ㅠㅠㅠㅠ... 그 펭귄 중에서 물론 릭주가 제일 귀엽고 사랑스럽겠지만요. 달과 별의 노래.. (메모) 몰랐던 노래니까 메모해두고 나중에 들어봐야겠어요! 앗... 폴리주는 스탑기능을 사용해본 적이 아예 없어서(...) 트래픽도 걱정되고 하니, 파일업로드로 텍본 자체를 올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레스를 연달아 올리는 것도 힘든 일이기도 하잖아요. 릭주가 더 편한 쪽으로 해주세요. >/////<

13 릭주 ◆rAqAiJ2zqg (2621189E+6)

2018-01-01 (모두 수고..) 19:06:13

ㅠㅜㅜㅜㅜㅜㅜㅜㅜㅜ흑흑ㄱ.. 사랑이라는 말에 슬슬 면역이 생길법도 한데 저는 여전히 녹아내리네요 흐ㄱ흑흑..(파스스) 폴리주 말 너무 상냥상냥하게 하셔요... 저도 좋아하고 애정하고 사랑해요 폴리주(T▽T) ㅋㅋㅋㅋㅋㅋㅠㅠㅠㅠㅠㅠㅜㅜ네에, 달과 별의 노래!! (이)진아님 노래인데, 정말 좋아요 시간 되면 들어보셔요!!+。゚φ(ゝω・`○)+。゚ 헤헤, 그럼 텍본으로 올리는걸로 한번 해볼게요!! 자암시만요..

14 릭주 ◆rAqAiJ2zqg (2621189E+6)

2018-01-01 (모두 수고..) 19:10:56

에에.. 아 업로드되는 파일은 그림 형식 뿐이구 텍본은 안되네요..ㅠㅜㅜㅜ 어카지 좋은 방법이 뭘가요()(끙끙) 으음, 일단 이 문제는 제쳐두고 새 일상을 돌리고 있을까요...? 어디 파일 올릴 수 있는 데 찾아볼게요오(T▽T)

15 폴리주 (6914985E+5)

2018-01-01 (모두 수고..) 20:22:34

사랑이라는 말에 면역이 안 생기시는 릭주가 귀여우시니 면역 안 생겼으면 좋겠네요 ㅎㅅㅎ(야) 앗.. 달과별의 노래라고 검색하면 다른가수 이름이 뜨는데 (이)진아님 노래였군요!

아.. 올라가지 않는군요 ㅠㅠㅠㅠ
그럼 텍본문제는 일단 제쳐두고 새 일상을 돌려요..!
다만 폴리주가 지금 하고 있는 게 있어서 오늘은 10시나 11시쯤에 올 것 같아요 ㅠㅠ (끙) 그 시간쯤이면 주무시려나.. ㅠㅠㅠ...

16 폴리주 (6914985E+5)

2018-01-01 (모두 수고..) 22:02:06

안녕, 릭주! 폴리주가 와써여! 아까 모레딕으로 몰래 접속해서 짧게 남기고 갔는데 릭주가 지금 계시려나요. (빼꼼)
릭주 언제나 감사하고 또 미안해요. 이케저케 애써주시는 모습 보면서 감사하다고도 죄송하다고도 말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폴리주는 원래 이모티콘을 잘 안쓰는 사람인데... (뜻밖의 고백) 릭주의 이모티곤을 보고 있으면 기쁘고 귀엽고 어쩌면 이렇게 적절한 곳에 쓰실까 감탄하고는 해요...ㅋㅋㅋㅋㅋㅋ

늘 고마워요...! 많이많이 고마워요..!! ( ◍•㉦•◍ )♡제가 선레 쪄오기로 했으니까 부지런히 타자 쳐올게요..! 제인으로 만나려고 하니까 새삼 떨리네요..!!

17 제인(폴라리스) - 어느 뒷골목에서 (6914985E+5)

2018-01-01 (모두 수고..) 22:52:08

냐옹-

고양이가 길게 울며 제인이 놓아둔 사료를 쌓아둔 밥그릇에 다가온다. 차콜색 후드티, 흰색 선이 들어간 검은 기모 트레이닝 바지. 그 위를 감싸는 검은 롱패딩으로 완전 무장한 제인이 양손을 제 입술 앞에 모아 호- 불었다. 하얀 입김이 새어나오는 완연한 겨울이었다. 아마 이 계절을 다 보내지 못하고 죽는 고양이도 있겠지, 생각하면 마음이 아주 조금은 착잡해지는.

여기 저기 인적 드문 골목을 돌며 사료를 뿌려서 가방 안의 사료가 슬슬 바닥을 보인다. 밤의 도시에서 새벽은 안전한 시간대는 아니다. 아니, 어느 시간대든 안전하지가 않다. 호신용품으로 무장하였다 해도 마음을 놓을 수는 없는, 그런 날. 제인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창백한 달이 까만 밤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제인은 제 연인을 떠올렸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와 밤이 어울린다고 생각하겠지만, 태양 아래서 내리쬐는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금발을 보면, 그는 환한 낮도. 아침도. 그리고 이런 새벽도 어울리는 사람일 것이다. 그와 보지 못한 지 한달 쯤 되었을까. 다친 곳은 다 나았을까, 오늘도 생각하면 좀 우울해진다. 끝까지 다친 곳의 상처를 보지 못했다. 다쳤다는 사실만 알고 상처의 경중을 모르는 것은 꽤 불안해지는 일인 것이다. 그저 빨리 낫기만을 바랄 수 밖에 없는 게 슬펐다. 의사였다면 좋았을까. 집적 그의 상처를 살피고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직업이었다면 좋았을까. 그렇지만 그런 직업으로 만났다면 지금의 관계와 다른 관계가 되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연인이 되지 못했을 수도 있지. 제인은. 폴라리스는 그것은 싫었다. 이미 사랑을 알게 되고, 연인이 된 그가 얼마나 다정한 눈을 하는지 알게 되면 그 이전으로는 도저히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냐앙.

사람보다 더 인기척에 밝은 작은 짐승이 꼬리를 세운다. 경계심이 다분히 묻어나는 그 몸짓에 제인은 주머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립스틱 모양-겉으로만 봐서는 립스틱으로밖에 안 보이는 정교한-의 전기 충격기를 쥐고 제인은 마음속으로 숫자를 센다. 당연히 전기 충격기는 아직 꺼내지 않는다. 일촉즉발의 순간까지 숨기는 것이기에.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가 더 가까워진다. 제인은 그 특유의 무표정-속을 알 수 없어 고양이처럼도 보이는-을 하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제인의 까만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고양이의 그것처럼 빛났다.

18 폴리주 (6914985E+5)

2018-01-01 (모두 수고..) 22:58:49

아앗... 빨리 쪄오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들었네요... ㅇ<-< 달과 별의 노래, 아니 밤과 별의 노래 듣고 왔어요! 릭주가 왜 폴리와 릭을 떠올렸는지 알 것 같았어요... ㅎㅎㅎㅎ (저는 내가 어두운 밤이 되면 별이 되어 줘~~ 부분에서 릭과 폴리 생각이 났어요.) 친구가 되어줘, 를 사랑이 되어줘, 라고 고치면 더 완벽하겠지만. 충분히 사랑스러운 노래네요..!!

19 폴리주 (6977603E+5)

2018-01-03 (水) 17:59:04

갱신해두고 갈게요!S2 오늘도 좋은하루 되세요XD

20 폴리주 (0982039E+5)

2018-01-06 (파란날) 23:49:34

갱신할게요! 으아.. 언젠가는 포스트가 15개 이상 보였으면 좋겠네요!

21 폴리주 (2720952E+5)

2018-01-09 (FIRE!) 19:43:45

갱신할게요 :>

22 폴리주 (2057311E+5)

2018-01-13 (파란날) 22:45:05

봄이되면 언젠가 릭주가 추천해주신 생딸기라떼를 먹으러 쥬씨에 가볼 생각이예요 :) 갱신할게요!

23 폴리주 (2415114E+6)

2018-01-20 (파란날) 22:55:14

오랜만에 갱신이네요. 릭주는 많이 바쁘신걸까요8-8?
만나지 못하는 동안에도 건강히 잘 지내시길 바라요. 보고싶네요.

24 ◆rAqAiJ2zqg (6273871E+5)

2018-12-27 (거의 끝나감) 22:50:15

인코가 맞았으면 좋겠네요. 일년만에 다시 갱신하려니 많이 떨리고, 죄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커요.. 그렇지만 그만큼 기쁘고 감사한 마음을 담아 갱신할게요.. 사자와 북극성이라니, 누가 지었는지 다시 봐도 찰떡같은 이름이네요(*´ω`*)

25 릭주 ◆rAqAiJ2zqg (6273871E+5)

2018-12-27 (거의 끝나감) 22:51:26

앗, 맞았네요 인코! 기뻐요!(*´∇`*)

26 폴리주 (312715E+60)

2018-12-27 (거의 끝나감) 22:55:02

전... 인코도 다이스 굴리는 법도 다 까먹었습니다... (아하하) 저 왜 이렇게 까먹은 게 많..죠... 휴식기가 길었나봐요. 릭주 기억력 왜 이렇게 좋으시죠? (동공지진)
.... 8ㅁ8... 릭주 귀여운 이모티콘 너무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서 눈물이 나네요...

27 릭주 ◆rAqAiJ2zqg (6273871E+5)

2018-12-27 (거의 끝나감) 22:57:04

그렇지만 다시 정말 미안하다고 하고싶어요
그렇게 사라져서, 오랜 시간 돌아오지 않아서 정말 미안해요
폴리주가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다고 하셨어요 절대 원망하지 못하고, 안 했겠지만 거절하고 싶지 않다고 하셔서 정말 기뻤어요. 기억해주셔서 고마워요. 어떻게 마무리지어야 할지 어렵지만... 잘 부탁해요. 다시요8▽8

28 폴리주 ◆lcVSk6vvyc (312715E+60)

2018-12-27 (거의 끝나감) 22:58:16

제 기억력은 안 믿지만 제 메모장은 반쯤만 믿어 볼게요... ◑◑ 전 이제 제 기억력을 믿을 수가 없어...

29 릭주 ◆rAqAiJ2zqg (6273871E+5)

2018-12-27 (거의 끝나감) 22:59:58

>>26 ㅋㅋㅋㅋㅠㅜㅜ저도 나머지는 다 까먹었어요.. 이모티콘도 일년 만에 쓰네요. 오랫동안 서랍 속에 묵혀두었던 걸 꺼낸 뭉클한 느낌이예요. 다시 빛이 바래지 않게.. 자주 써야겠네요! 앞으로는 자주 볼거예요..ヽ(ヅ)ノ

30 릭주 ◆rAqAiJ2zqg (6273871E+5)

2018-12-27 (거의 끝나감) 23:06:00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그새 나이를 더 먹었다고(?) 그런지... 왜 이렇게 조잘조잘 실없이 떠들고 싶어질까요...?(T▽T) 텍본은... 참치에 여전히 스탑 기능이 없는 것 같으니 새벽에 사람 없을 때 슬쩍슬쩍 옮겨둬야겠어요 폴리주 주무시면.. 언제 주무시나요?(/ω\)

31 폴리주 ◆lcVSk6vvyc (312715E+60)

2018-12-27 (거의 끝나감) 23:11:08

>>27 또 그렇게 말없이 사라지시면 안 돼요. 알겠지요?
앗... 어떻게 마무리 지을지 어렵다고 생각한 건 못다말 스레 166번 레스 쓸 때의 저... 네요... (._. .... 응, 잘 부탁합니다. 다시요.
(´͈ ᵕ `͈ ) <-그때 제가 자주 썼던 이모티콘이 이거 였던 거 같아요...

조잘조잘 말하는 릭주가 참새보다 더 귀여우니까 자주 조잘조잘 해주셔도 전 좋아요. (´͈ ᵕ `͈ ) 스탑기능 있어도 어떻게 쓰는지 몰라요... (어떻게 푸는 지도 몰라요...) ㅋㅋㅋㅋ
새벽에 옮기시는 거 피곤하시지 않겠어요? 전... 오늘은 12시 즈음일까요? 그보다 일찍 기절할 수도 있구요.

32 릭주 ◆rAqAiJ2zqg (6273871E+5)

2018-12-27 (거의 끝나감) 23:21:51

>>31 정말 그러지 않을게요.

폴라리스도, 폴리주도 항상 나긋나긋하게 말하지만 말에 힘이 있어요 그런 부분도 참 좋아했던 것 같네요.. 멋대로 폴라리스를 보호..하려고 들었던 릭을 야단치던 모습이 바로 얼마 전에 봤던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져요

맞아요 그 이모티콘 자주 쓰셨어요 흑흑..ㅠㅜㅜ 피곤하지는 않아요!(〃▽〃) 오늘은 거의 하루종일 집에 있었네요. 사실 아까 밖에 나갔다올까 말까 하다가 어쩌다보니 잠깐 과제하느라.... 못 나갔는데 폴리주 레스 올라온 거 보고 신의 한수였다고 생각했어요..(T▽T) 일찍 주무셔도 괜찮아요. 오늘도 그렇고 요즘 엄청 추운데 건강하게 지내셨나요?

33 시트 (6273871E+5)

2018-12-27 (거의 끝나감) 23:48:19

~릭 시트~

-이름: 릭Rick
-성별: Gentlemen
-나이: 25

-외형:
속된 말로, 잘 빠진 사내다. 본인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릭은 희미하게 미소지을 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180cm대 후반, 작은 머리 탓에 더 넓어 보이는 어깨에 좋은 비율이다. 슬림한 몸이지만 마르지는 않은 것으로 보아, 옷 안에는 탄탄한 근육들이 맵시좋게 자리잡고 있을 모양이지. 좋은 옷걸이에는 응당 근사한 옷을 입혀두어야겠다. 자기 관리에 흐트러짐이 없는 그는 거의 항상 베스트조차 생략하지 않은 완벽한 정장 차림이다. 그러나 끝까지 채운 셔츠 단추가 금욕적이기만 하냐면 그건 또 아니다. 손목에 달린 화려하기 짝이 없는 커프스는 매일 달라지는 것을 보아 아마도 그 본인의 취향. 자세히 보면 왼쪽 귀에는 피어싱도 세 개나 뚫려있다. 의외라고 하자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역시 종잡을 수 없다.
오른쪽 언저리에서 적당히 가르마를 타내린 창백한 금발은 어깨 즈음에서 차분히 내려앉아 있다. 상당히 좋은 머릿결인 탓에 바람이 불면 찰랑찰랑 나부끼기라도 할 모양새다. 잘 정돈된 눈썹 아래의 눈은 길고, 쌍커풀이 잡힌 다정한 눈매가 인상적이다. 언제나 짓고 있는 옅은 미소가 그의 온화한 분위기에 한 몫 했을까. 창백한 금발과 대조되는 온화한 다갈색의 눈동자가 그보다 더할 수 없을만큼 따뜻하다. 높고 부드러운 콧대며, 혈색이 도는 입술. 말끔하고 흰 피부가 어딘가 우아한 분위기를 가진 것 같기도 하다.

-성격:
일단은 친절하다. 정말로, 처음 보는 누구에게나 친절하다. 세련된 말투에 훌륭한 매너, 적당한 위트와 센스는 금상첨화일까. 그러나 그와 수 시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웃음 사이 문득 가라앉은 차가운 무표정을 본 당신은 갑자기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당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가요. 릭은 대답하지 않는다. 이하 공란.

-기타:
>인페르노. 이태리어로 지옥. 조직 '인페르노'의 언더보스다. 밤의 도시 최대 마약운반상, 인페르노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렇다.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릭이 그곳의 머리를 꿰어차고 있는 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을 거다. 릭은 인페르노의 보스를 '아버지'라고 부르나, 감히 그가 보스의 친자인지를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명석한 두뇌, 신들린 사격술, 그리고 동물적인 감각. 그 세가지가 릭을 지금의 자리에 설 수 있게 했다. 뛰어난 감각이라는 게 오감과 육감 중 어느 것을 뜻하는 지는 모르겠다. 문 너머에서 회의 내용을 옅듣고 있던 첩자의 머리를 귀신같이 꿰뚫어버리는 걸 보면 두가지 모두인 지도. 그것이 그를 수많은 죽음의 위협에서 살아남게 한다.
릭의 '아버지'는 암살당했다.

>뭐 그리 중요한 특징은 아니다만, 릭은 왼손잡이다. 모든 일을 왼손으로 처리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총도 왼손으로, 시가도 왼손으로 잡고, 중요한 서류의 사인도, 왼손으로.

>그래, 시가. 릭은 꽤 헤비 스모커다. 일반 담배도 좋아하지만 더 선호하는 것은 시가 쪽일까. 한창 같이 카드를 치던 릭이 어느 순간 사라져 있다면 그는 아마 머리도 식힐 겸 밖에서 시가 한 모금을 빨고 있을 테다.

>담배는 좋다만 담배 냄새가 내키지 않는다는건 모순일까. 릭은 흡연 후에는 언제나 향수를 뿌린다. 전형적인 고급스러운 남자 향수 향, 덕분에 그의 곁에서는 언제나 향수 냄새가 난다. 깊이 껴안는다면 묘한 담배 향이 섞여 알싸하겠지.

>알코올에 취약하다. 문제는 그거다. 아예 술을 입에 대지 않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가 자기관리에 정말 철저하다고 여기기 마련인데, 사실을 한 잔도 못할 정도로 심각하게 술을 못마셔서 그렇다.

>외형란에 채 다 적지 못한 그의 신체적 특징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역시 사소한 특징이다만, 릭은 발폭이 좁다. 발사이즈 자체는 275-280mm인데 발폭이 좁아 신발 선택이 애매한 모양이다. 덕분에 그의 구두는 언제나 맞춤이다.
왼쪽 가슴 윗부분부터 쇄골까지 장미 문신이 있다. 덩쿨을 타고 오르는 장미는 꼭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다.

>말끔한 저음. 처음 보는 이를 대하는 것은 친절한 존댓말. 그의 반말은 살벌하다.

>그는 독서를 좋아한다. 특별히 장르는 가리지 않는다. 유명한 시구부터, 스릴러, 철학, 셰익스피어의 비극적 서사까지. 물론 그 비극조차 그를 눈물흘리지는 못할테지만.

>피아노를 상당히 잘 친다. 선호하는 것은 야상곡. 그게 아니라면 베토벤 소나타.


~폴라리스 시트~

-이름: 폴라리스Polaris
-성별: Lady
-나이: 22

-외형:
눈처럼 하얀 백발은 날개뼈를 살짝 덮는 길이로 찰랑찰랑하게 내려온다. 뽀얗고 흠 없는 피부 미인. 청순하다는 느낌을 자연스럽게 주는 이목구비는 모양과 균형이 잘 잡혀있다. 그 청순함의 절정을 찍는 것은 청량한 느낌을 주는 선명한 아이스 블루색 눈동자. 옷 위로 봐도 전체적으로 늘씬한, 나올 곳 나오고 들어갈 곳이 확실하게 들어간 선이 예쁘고 축복 받은(듯한) 몸매는 운동으로 가꾼 것. 천사, 악마, 정령.. 판타지 속에 나오는 캐릭터 중에 이미지를 꼽자면 눈과 호수의 정령에 부합하는 이미지. 눈물을 흘리고 난 후나 기쁨의 감정(혹은 그 외의 감정)이 짙어질 때는 눈동자가 얼린 소다처럼 깨끗하고 달콤하게 반짝인다. 육안으로 보기에는 늘씬해서 가벼울 것 같은데,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몸무게가 나간다. 167cm 58kg. 기본적으로 상냥해 보이는 옅은 미소를 유지하고 다녀서 유한 인상을 주지만, 작정하고 서늘한 표정을 지을 때는 (의외로) 차가운 인상으로 돌변한다.

+) 아이스 블루색 눈동자는 렌즈의 도움을 받아서 완성한 것. 렌즈를 끼지 않은 본래 눈색은 보랏빛을 띄는 벽안.

+) 가게에서 일할 때는 누구나 흔히 떠올릴 수 있는 바텐더 복장을 한다.

-성격:
바에서 폴라리스가 일하는 요일. 일하는 시간대에 만나면, 거의 누구나가 폴라리스를 잘 웃고 친절하고 상냥한 점원으로 생각할 것이다. (이하 캐붕방지 공란)

-기타:
>목소리가 끝내주게 좋다. 말할 때도. 노래할 때도.

>건전하고 모던하고 신비로운 분위기의 칵테일바 솜니움에서 바텐더로 일하고 있다. 근무하는 요일은 주로 금, 토. 교대제 근로. (드물게 다른 바텐더와 일정을 바꿔줄 때는 다른 요일에 근무할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금요일과 토요일에 근무하고. 일주일에 2일만 바텐더로 일한다.)

>칵테일바 솜니움에서 제공하는 것은 칵테일과 안주와 로망이다. 마약과 마약을 포함한 불건전한 향락은 제공하지 않는다. 밤의 도시에서 가장 건전한 칵테일 바를 사람들이 꼽는다면 솜니움이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

>제공하는 로망은 ‘이 중의 한 명은 네 취향이 있겠지.’ 싶은 타입 다른 미남미녀(?) 종업원들의 (건전한) 서비스. 솜니움의 사장은 두 사람. 여기 모인 미남미녀가 사장님들 취향의 일부라고는 굳이 밝히지 않아도 아시겠지.

>폴라리스가 제공하는 서비스는 ‘들어주는 것.’
기본적으로 본인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타인의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 + 뭐든지 들어줄 것 같은 상냥하고 온화한 미소 장착 + 사람 마음을 녹이는 달콤하고 사근사근한 목소리 + 서비스업(?)으로 다져진 경청 내공 + 긴장을 풀어주는 바의 분위기와 술. 폴라리스 앞에서는 원래 수다스럽지 않은 사람도 종종 수다스러워지곤 한다.

>부와 행운의 신이 주관하는 별 아래서 태어난 건 같은 운의 소유자. 경마, 도박, 경품 추천, 주식 투자, 땅 투자.... 등등 각종 운이 필요한 곳에서 운이 빛을 발하지만...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고아인 걸 봐서 친부모 운은 없나 보다.

>물론 운 나쁜 날도 드물게 존재한다. 그 날은 몸을 매우 사린다.

>본인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이 있을 뿐이지, 아름다운 구석이 전혀 없는 인간은 드물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움의 크기와 가치가 같지 않다고도 생각한다.

>가면을 쓰는 것도 능숙하고, 연기도 매우 매우 잘한다. 내숭도 잘 떤다. 상냥하고 친절하고 온화게 웃을 수 있다고 해서 속내까지 언제나 상냥하고 친절하고 온화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돈을 좋아한다. 돈으로 모든 행복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돈 없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바늘구멍에 낙타가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고. 돈은 신용할 수 있는 친구 같은 것이므로. 본인의 금전 운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운을 맹신하지는 않는다.

>눈에 띄는 외모이므로 외출 시에는 변장한다. 가장 자주하는 변장은 새카만 썬글라스 + 깊게 눌러쓴 검은색 후드 집업 + 청바지처럼 캐주얼한 복장의 흑발 여자.
이 변장 시에 착용하는 렌즈는 머리카락과 같은 검은색. 이때 사용하는 이름은 ‘제인.’ 간혹 렌즈를 안 끼기도 하는데 이때는 선글라스를 벗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34 릭주 ◆rAqAiJ2zqg (6273871E+5)

2018-12-27 (거의 끝나감) 23:49:42

일단은.. 시트네요!(つ﹏<。) 정말 오랜만이예요 릭도 폴리도..

35 독백 (6273871E+5)

2018-12-27 (거의 끝나감) 23:50:39

별명 : Morning, Rick. 기능 : 작성일 : 17-08-07 20:56 ID : siQYqIqobxrqA
여자는 코끝을 간질이는 매캐한 연기에 눈을 떴다. 잠이 덜 깬건가, 아직도 약에 취해있나. 흐릿한 시야에 잡히는 구름같은 연기가 몽환적이다.
여자는 두어 번 눈을 꿈뻑이고서야 그것이 어젯밤 저와 같은 침대에서 잠든 남자의 담배향임을 깨달았다. 릭. 작게 속삭인다. 잠이 덜 깬 허스키한 고음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매혹적인 것을. 그러나 무언가 생각에 빠져있기라도 한지, 남자는 그럼에도 대답이 없다. 대꾸하지 않겠다면야 이쪽에서 다가가면 그만이다. 스르르, 몸을 일으키는 여자의 어깨에서 도톰한 이불이 흘러내렸다. 이제 그녀를 안정감 있게 감싸는 것은 입고있는 얇은 슬립 뿐이다. 고개를 돌린 여자는 이윽고 말없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남자의 상체. 숨을 쉴 때마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탄력 있는 근육, 아아. 어제 빨아들인 약이 다 깨지 않은걸까, 가슴 위의 한줄기 장미들이 금방이라도 천장을 향해 뻗어오를 것 같다.

여자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 작은 황홀경에 머리를 묻었다. 담배 연기 사이를 비집고 나는 희미한 향수 향에 빠져들 것 같다. 이건 당신의 장미에서 나는 향기인가요? 여자의 높은 목소리가 달짝지근하게 감긴다. 제가 말하고도 나쁘지 않은 조크라는 생각이 들어 키득 웃었다.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다. 가슴에 안겨있는 자신을 껴안지도, 내치지도 않는다. 무언가 부족해서인가. 그러나 이 나를 보면 머지않아 참을 수 없게 될것을. 여자는 고개를 들었다.

"......"
"......"

사자의 눈.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는 불현듯 그렇게 생각했다.

"시, 실례했습니다."

화들짝 놀라 남자의 몸에서 떨어진다. 순간의 절대적인 공포가 그녀를 급격하게 옥죄었다. 언제부터 나를 보고있었나. 내가 안겼을 때부터? 아니, 어쩌면 내가 깨어난 그 순간부터. 여자는 그제서야, 어젯밤 남자의 부하가 했던 경고를 떠올렸다. '날이 밝으면 눈을 뜨는대로 나오는 게 좋을겁니다.' 왜죠? 앙칼지게 되물었던 것 같다. '릭님은 잠에서 깨어난 직후가 가장 예민하시거든요.' 멍청이, 그게 이제야 생각나다니! 상대가 인페르노의 거물이라는 것까지 떠올리고 나니 등뒤로 식은땀이 흐른다. 부모도, 이렇다할 친지도 없다. 나따위는 내일 아침 시내의 까마귀밥으로 던저진다고 해도 누구도 알지 못할 테다.
여자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옷가지들을 주워 빠르게 방 밖으로 나섰다. 문을 열고 나가는 그 순간까지, 남자는 다행히 그녀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온 그녀는 곧바로 그녀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또다른 남자를 마주쳤다. 어제 그녀에게 나직한 경고를 남겼던 바로 그. 여자는 저도 모르게 꾸벅 목례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달려간다.

빠르게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남자-아이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랬듯이, 여전히 알다가도 모르겠군. 사라진 여자를 뒤로하고 아이작은 그녀가 떠나간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큼큼."

남자가 작게 헛기침했다. 동물적인 감각을 지닌 저 사내가 내가 방 안에 들어섰음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러나 릭은 여전히 이쪽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벌써 몇 개비 째인지 모를 담배를 털어내고 있었으므로, 그냥 그렇게라도 저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예의겠거니 싶었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정면만을 보고 있다. 가끔은 저 싸늘한 다갈색 눈 너머에 도대체 무엇이 담겨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이작은 입을 열었다.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
"반드시 잡아서 목을 따라고 하셨지요. 감히 이 인페르노의 정보를 팔아먹던 그 쥐새끼를 찾았답니다."

후. 순간 눈이 번뜩인 것도 같다. 릭은 연기를 뱉었다.

"확실하게 처리해."

사자의 눈이 그제서야 이쪽을 향한다. 존명. 눈이 마주칠 새라, 아이작은 그가 시선을 돌리는 즉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젠장. 잠시 저 눈빛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린다. 사자 앞에 선 가젤은 이런 기분이겠군. 적이 아님을 다행으로 여겨야하나. 푸, 뒤를 돌자마자 한숨을 뱉었다.

마침내 홀로 남은 방 안은 고요하다. 반쯤 남은 담배를 탁자 위에 지져 끄고, 릭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잘 개켜있는 가운을 걸친다. 뚜벅뚜벅. 창가로 걸어가는 발걸음은 흐트러짐이 없다. 사이사이 희미한 빛이 드는 두꺼운 암막커튼. 릭은 그 틈을 비집고 열었다.

"......"

방 안에 스미는 햇살. 밤의 도시.

그 황홀한 아침이다.

36 첫번째 일상(1) (6273871E+5)

2018-12-27 (거의 끝나감) 23:52:51

1-1
(곧 죽을)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8-07 22:51 ID : siDkbcrKAtcqw
여름철 피서 중 꿀인 장소 중에 백화점이 Top 10안에 들어가리라 폴라리스는 생각한다. 태양이 완연히 지상을 비치기 전인 오전 10시 경에 백화점에 입성한 그녀는 1층부터 갈 수 있는 제일 윗층까지 다 보고 나올 생각에 심장이 다소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날렵한 디자인의 검은 선글라스, 회중 시계가 그려진 흰 반팔 티, 무릎 아래 부분이 멋스럽게 찢어진 청바지. 그리고 웨지힐이 오늘의 쇼핑룩이었다. 원래 비싼 옷은 아니었지만 선이 고와 옷을 날개로 만들어 버리는 폴라리스의 몸매가 열일 했다. 간혹 시선을 받기도 했지만, 그녀는 선글라스를 방패 삼아 그 시선을 모른 척 했다.

...이상하지. 쇼핑이 기대되서 두근거리는 것치고는 좀 과한데.

그 두근거림은 아마도. 오늘 있을 만남에 대한 경종이었으리라. 아직은 아무 것도 눈치 채지 못한 채 그녀가 백화점을 5층을 돌 무렵이었다. 목이 마르니 뭔가를 마셔야겠는데 정수기 물은 별로 내키지 않은 폴라리스는 백화점 내 카페로 가서 녹차라떼 아이스를 시켰다. 혼자 자리에 앉아 마셔도 되겠지만, 머릿 속에 아까 본 원피스가 아른거린다. 세일가가 아닌데 사 버릴까. 사버리고 싶다. 세일가의 물건을 좀 더 선호하지만, 정말로 마음에 든 물건은 정가로도 구입하는 폴리는 한 손에는 아이스 카페라떼 음료. 다른 손에는 오늘 구입한 옷들이 담긴 쇼핑백 두 개를 들고서 그대로 점내 카페 밖으로 나갔다.

나간 것까지는 좋았으나 폴라리스는 평소에 잘 하지 않는 바보같은 실수를 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폴라리스의 일진이 사나운 날인가 보다. 행운의 신의 사랑을 받는 것 같은 그녀는, 불운의 신의 사랑 역시 받고 있으니까. 어느 시점 이후로 운 좋은 날들이 이어지는 편이었지만 재수가 황인 날도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폴라리스는 발을 헛디뎠다. 그대로 넘어져 음료를 손에서 놓쳐 버리기까지 했다. 뚜껑이 열린 음료의 내용물이, 그 근처를 지나려던 누군가에게 튀었다.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이 글을 보는 당신이라면 이미 짐작하고 있으리라 믿고 자세한 서술은 생략하겠다.

아, 발 삐끗한 것 같은데. 이게 완전히 접질린 건지 살짝 삔 건지 모르겠네.
음료수도... 쏟은 것 같은데, 설마 누구한테 튄 거 아니겠지? 부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리적으로 찔끔 나온 눈물이 폴라리스의 눈동자를 맑고 깨끗하게 만들었다. 넘어진 직후 부터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는 울상인 얼굴을 들어 혹시 근처에 음료수 튄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고자 했다.

그때 시야에 잡힌 것은....

1-2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07 23:07 ID : siQYqIqobxrqA
짙은 푸른색 코트를 입고 있는, 잘 빠진 검은 정장의 남자. 그의 시린 금발이 언뜻 갈색으로 물든 것은 당신 눈의 착각이 아닐런지도 모르겠다.

릭에게는 언제나와 같은 오늘이었다. 슬림한 몸에 잘 어울리는 멋스러운 수트, 베스트까지 갖춘 완벽한 풀세트에 비해 과하게 화려한 커프스 버튼은 그의 취향을 담뿍 담은 종점이다. 수십 분 전에 진열대에서 나온 롤렉스는 언뜻 가려진 셔츠 아래에서도 빛이 났다. 어쩌면 그 화려한 유리장에서보다 이 남자의 오른손목에서 더, 라고. 릭의 카드를 받아든 점원은 조심스럽게 생각했을까. 어쨌든 1 뒤에 0이 수없이 붙은 그 시계를 릭은 아무 미련 없이 손목에 둘렀다. 사이즈를 정확히 맞춰 착 감겨드는 느낌이 퍽 시원했다.

괜찮은 하루였을 것이다. 이대로 자택으로 돌아가 시가 한 대를 무는 것도 나쁘지 않게 황홀한 기분이었겠지.

"......"

특별한 반응 없이 얼굴이며 머리카락에 묻은 음료들을 털어내는 릭의 동작은 간결했다. 아니, 오히려 지나치게 평온해서, 옆에서 수군거리는 다른 행인들조차 대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고민하는 수준이었다. 살짝 시선을 내린 셔츠에는 보기 싫은 얼룩이 져있다. 다시 입진 못하겠군. 릭이 별 감흥 없이 중얼거렸다.

다음 순간, 그는 살짝 무릎을 굽혀 넘어져있는 폴라리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결 좋은 금발이 언뜻 볼을 스친다. 살짝 미소짓고 있는 눈이 다정하다. 누구도 그 갈색 눈동자 안에 담긴 따뜻함을 의심하지 못할만큼.

"괜찮나요, 레이디?"

매력적인 저음에 세련된 말씨. 언뜻 보면 잘 교육받은 도련님 같기도 한.

"잡고 일어나요. 많이 다친 게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1-3
별명 : 폴리(사슴...?) - 릭(사자) 기능 : 작성일 : 17-08-07 23:46 ID : siDkbcrKAtcqw
폴라리스는 눈물로 흐린 눈을 몇 번 깜박거리며 남자를 (겉으로는 전혀 티가 나지 않는 매의 눈으로) 스캔했다. 눈물 나게 비싸 보이는 옷은 베스트까지 갖춘 풀셋이었고, 부자들의 잇템인 시계는 슬쩍 봐도 0이 천문학적으로 붙었을 것 같다. 비교적 얌전한 정장과 다르게 화려해 뵈는 커프스 단추와 왼쪽 귀에 피어싱 세 개가 특이하다면 특이한 금발 미남이었다. 폴라리스에게는 그가 미남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세상에.. 옷에만 묻은 것도 아니고 머리랑 얼굴에도 튄 거야? 어떻게 해. 진짜 기분 나쁘겠다....

단지 쏟아진 음료수가 남자의 어디부터 어디까지 젖게 했는지가 중요했다. 배상. 배상 어떻게 하지... 배상이야 물론 망가진 것의 두 배로도 해줄 수 있지만, 그 돈의 출처를 궁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지금 제 차림은 딱 봐도 부자의 차림이 아니었으니까, 그저 가난뱅이로도 보이지 않을 뿐. 지금 내가. 지금 폴라리스가 해야하고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배상이 무엇일까?

“....”

그러나 폴라리스의 배상에 대한 고민은 특별한 반응 없이 음료를 털어내는 지나치게 평온해 보이는 릭의 모습에서 서서히 그 크기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고민은 동전 크기가 되어 뒤편으로 물러났다. 폴라리스는 자신의 지론을 상기했다.

…완벽한 것일수록 의심한다. 그 완벽한 것이 아름다워 보이고 상냥해 보이기까지 한다면 더더욱.

물론 자신은 완벽하지 않은 것도 의심하는 의심병 말기 환자지만. 눈앞의 남자는 부자일 것이 확실한데 서민(....)의 녹차라떼 샤워를 맞고도 기분 나쁜 내색 없이 다정하게 웃기까지 하는 사람인 것이다.

…수상해. 엄청 이상해.

남들이 의심할 수 없을 정도의 다정함에, 오히려 든 의혹이 폴리의 직감과 연결되는 경고등을 울렸다. 뭔지는 아직 확실치 않는데. 지금 내가 지뢰를 밟았거나, 혹은 몹시도 위험한 것과 엮일 위기에 처한 것 같다. 폴라리스는 흔들리는 동공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눈물을 주르륵 쏟았다. 펑펑 우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눈물만 주르륵 흘러 나왔다. 폴라리스는 그가 내민 손을 잡지 않고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괜찮아요.”

아뇨. 하나도 괜찮지 않아요. 속으로 생각했지만 폴라리스의 열린 입에서 나오는 것은 가냘프게 떨리는 미성이었다. 젠장. 왜 음료를 쏟아도 지뢰에게 쏟은 거야, 나 자신. 십분 전의 자신을 손날로 기절시켜 카페 밖으로 나오지 않게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지금 폴라리스의 표정은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의 것이었다.

“다친 게 아니라 쪽팔려서 못 일어나는 거니까....”

쪽팔린 건 둘째치고 발목도 아픈 것 같다. 제발 기분 탓이었으면 좋겠다. 부러졌어도 멀쩡하게 걷는 척 해야 하나, 생각하는 폴라리스의 뺨이 부끄러움에 젖은듯한 분홍빛으로 물든다. 창피해서 견딜 수 없는 사람처럼 시선을 내리깔고 속눈썹만 파르르 떨고 있기도 했다.

“그.. 배상은 어떻게 해드릴까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처럼 시선도 못 맞추고, 죄진 사람처럼 말하는 게 퍽 사슴처럼 연약한 아가씨 같았다. 겉은 완벽하게 그랬다. 마음속으로는 그냥 아무 말도 없이 부러진 다리로라도 내빼고 싶은 자신이 존재하는 것을 느끼며, 폴라리스는 완벽하게.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연약한 아가씨의 껍데기를 뒤집어썼다.

1-4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08 11:50 ID : si+WWwaOjcmVM
운다. 우는 여자를 보는 건 질색이다. 그는 드러나지 않는 깊은 내면의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릭은 내쳐진 손을 거두는 대신 그대로 무릎을 굽혀 앉아 울고 있는 폴라리스와 눈을 맞추는 일을 택했다. 눈물 때문일까, 선그라스에 반쯤 가린 볼이 붉다. 눈썰미가 좋은 릭마저 눈치채지 못한 대단한 연기력이다. 코트 안쪽으로 손을 넣는다 싶더니 그는 두번 접힌 손수건을 침착하게 내밀었다. 푸른 체크무늬. 하단에 작게 적힌 버버리는 한눈에 봐도 값나가는 물건이다.

배상이라.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웃는 얼굴 그대로 릭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입고 있던 것은 릭이 가지고 있는 것들 중 가장 고가에 속하는 물건은 아니었다만, 그래도 그런대로 꽤 아끼던 컬렉션이다. 가슴 아프리만치 아쉽지는 않다고 해도 처음 본 여자를 위해 아끼던 것을 아무렇지 않게 희생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가 생각하기에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으로 눈물이 떨어지는 속도에 기름을 붓고 싶지는 않았다.

릭은 여자가 꼭 사슴같다고 생각했다. 이 사자의 시선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녀를 흠모해 뒤쫓는 남성들을 두손 가득 꼽을 수 있을 법한 미인이다. 그리고 그런 미인이 우는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아있는 남자는 백화점의 고객들에게 꽤 볼만한 볼거리일 것임이 분명했다. 저 남자가 울렸나봐. 릭은 이쪽을 힐끔 쳐다보던 행인이 쑥덕거리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좋지 않다. 저 중에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보다 귀찮은 일이 없겠지. 사자는 또한번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장소를 옮겨서 더 이야기하기로 하죠. 일어날 수 있겠어요?"

힐끔 여자의 발목을 본다. 저거, 어쩐지 조금 부어오르는 것 같기도 한데. 접질린 게 아니었다면 좋으련만. 따뜻한 미소를 띠고 릭은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1-5
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8-08 16:30 ID : sidIg2ZdXL6J+
폴리의 눈물은 완전한 거짓이 아니었다. 정말 저도 모르게 주르륵 흘러나온 것뿐. 펑펑 울지 않게끔, 조절하는 것과 뺨을 살짝만 상기되게 만든 것만이 폴리가 한 연기. 혹은 즉흥적으로 만든 가면이겠지. 폴리는 남자가 손수건을 꺼내 내미는 동작이 퍽 자연스럽게 우아하다고 생각했다. 선천적으로 몸에 밴 건지,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우아함인지 판별할 수 없지만. 내밀어진 손수건은 누구나가 알 법한 메이커의 것. 저 남자한테는 그 비싼 손수건이 휴지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며 손수건을 받아 조그맣게 감사합니다. 라고 중얼거렸다. 작은 중얼거림이지만, 릭은 확실히 들었겠지.

선글라스를 쓰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것은 이상한 것이므로 폴리는 선글라스를 슬쩍 들어 올려 머리에 머리띠처럼 얹고서 눈물을 훔쳤다. 하얀 속눈썹에 반쯤 잠긴 눈동자는 소다색으로 보일 정도로 짙어져 있으리라. 그리고 폴리는 제 달콤한 색을 띠는 눈물 젖은 눈동자가 남자의 마음에 들지 않기를. 혹은 남자의 취향에 들지 않기를 반쯤은 체념한 심정으로 빌었다. 눈물이 닦여졌지만, 아직도 물기가 남아 있는 듯 촉촉한 눈동자에 담겨 겉으로 보이는 감정은 여전히 ‘미안해 죽을 것 같다.’ 였다.

“네에...”

말끝을 조금 늘린 얌전한 대답. 귀가 어둡지 않은 폴리는 행인의 쑥덕거림을 들었고, 그 소리가 꼭 사자의 아가리에 제 머리를 쳐 넣으려는 하이에나의 수군거리는 소리로 번역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아무래도 착각 아닌 것 같아. 폴리는 선글라스를 도로 내려 쓰고서는 친절하게 또 다시 내밀어진 릭의 손이 무안하지 않게끔 제 손을 얹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지는 일은 좋지 않은 일이다. 첫째로는 눈앞의 남자가 사람들의 시선을 좋아할 것 같지가 않았고, 둘째로는 폴리 역시 쏟아지는 시선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 손은 릭의 손에 얹은 채, 다른 손으로 6cm 굽의 웨지힐을 벗기 시작했다. 벗으며 손에 슬쩍 스친 발목이 아팠다. 그렇지만, 일어날 수는 있을 것 같다. 좀 절뚝거리긴 하지만 걸을 수도 있을 것이다. 폴리는 한쪽 손으로는 신발을 챙기고, 다른 손에 약간의 힘을 주어 릭의 손에 의지해 몸을 일으켰다. 바보같은 누군가가 묘사한 것을 까먹은 크로스백은 폴리의 어깨에 얌전히 매여 있었지만. 쇼핑백은...

쇼핑백은... 음, 그건 포기하자. 그냥 버리자. 그리고 신발도 버려두고 맨발로 걸을까. 어차피 이 발목으로는 힐 신고 걷는 것보다는 맨발이 편할 테니까. 지금은 폴리의 손에 달랑 들린 웨지힐은 머지않아 버려질 위기에 처했다. 그리고 폴리는 제 웨지힐보다 본인의 명줄... 아니, 신경줄이 더 위험에 처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장소를 옮겨 이야기하자는 말에 순순히 따르겠지만, 공으로 넘어가주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남자는 손해 보는 것을 싫어할 것이다. 그렇지만 너무 과한 금액을 청구하지는 않을 것 같다. 젠틀한 신사의 껍데기를 부디 오래. 오래오래 쓰고 있어 주면 좋으련만. 둘이 있는 장소에 가면 이야기가 달라지려나... 뭐, 그것은 가보면 자연히 알 게 될 것이다.

1-6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08 16:59 ID : si+WWwaOjcmVM
자의로든 타의로든, 릭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왔고, 앞으로도 끝없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갈 테다. 휘하에 있는 이들만 수백, 상대한 '고객'들은 생각만으로 꼽을 수조차 없다. 그 사람들 모두의 얼굴을 어렴풋이라도 기억한다. 유달리 비상한 두뇌는 그들의 특징 하나하나씩을 머릿속에 새긴다. 인생에서 다시 보기 어려울 별 특이한 인간 군상도, 릭은 여럿 만나보았다.
그럼에도 이런 색의 눈은 낯설다. 어디서 이런 눈을 본 적이 있던가. 아, 언젠가 보았던 남태평양의 비취색이 떠오른다. 곧장 남극으로 이어진다던 그 깊은 물의 색을 닮았다. 특이한 빛깔이군. 사자는 금세 선글라스 뒤로 숨은 그 눈을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다.

폴라리스는 이번에야말로 순순히 릭의 손 위에 자신의 것을 겹쳐주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릭이 위로 뻗어있는 그녀의 손을 힘있게 지탱했다. 그는 제 손을 잡은 여성이 신발을 벗으며 보인 순간의 통증을 놓치지 않았다. 이래서는 어디로 이동하기도 곤란하다.

"걸을 수 있겠어요?"

처음보는 다친 여자를 데리고 돌아다닐 자신은 없다. 릭은 힐끔 폴라리스가 벗어든 한 쌍의 신발을 보았다. 평범한 힐이라면 힘으로 부러뜨리겠다만, 저런 형태의 굽은 떼어내는 것도 불가능할 테다. 간만에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버리고 가는 것은 당연히. 내키지 않는다.

"집에는 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가져온 차가 있나요?"

1-7
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8-08 17:22 ID : sidIg2ZdXL6J+
이 남자는 아마도 젠틀함이 몸에 배인 것 같다.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모를 정도로 꽤 깊게. 폴라리스는 릭의 배려 덕에 삐끗한 발목으로도 비교적 수월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아픔을 참느라 미간이 조금 구겨지긴 했지만, 그 구겨짐이 오래는 안 갔다.

“걸을 수는 있어요, 오래는 못 걸을 것 같지만.”

그 오래가 언제냐 하면 한 두시간쯤? 폴라리스의 고통을 참는 인내력(육체 한정)은 밖의 도시 여자보다는 높고도 깊은 것이다. 초인적인 수준에는 물론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래서 폴라리스는 그 오래가 언제냐고는 자세히 일러주지 않았다. 그가 적당히 알아서 추측하도록. 그녀의 걸음은 점점 느려질 것이다. 느려지다가 한 10분에서 20분 정도쯤에 울상을 하고서 더 못 걷겠다고 하면 되겠지.

“택시 타면 되니까, 괜찮아요.”

난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라. 솔직히 그냥 버리고 가도 좋다. 바래다 주겠다는 소리는 제발 하지 마라. 솔직히 말해서 이대로 버리고 가주었으면 좋겠지만, 지금 하는 모양을 봐서는 당장에 버릴 것 같지는 않다. 폴라리스는 약간 쭈뼛쭈뼛하며 얌전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행동이나 몸짓 말투와 태도가 어딘지 초식동물다운 것을 폴리 본인이 자각하고 있다. 폴리는 평소에 원래 이렇게까지 초식동물답지는 않은데... 악갼 아련한 마음으로 그녀는 생각했다.

“저어.., 이제 어디로 갈까요?”

1-8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08 17:41 ID : si+WWwaOjcmVM
하늘도 무심하시지.

"데려다 드리죠."

딱한 여자. 보나마나 심하게 접질린 모양인데, 이대로 두고 갔다가는 또 언제 길 한복판에 넘어져서 엉엉 울고만 있을지 모르겠다. 릭이 보는 폴라리스의 이미지는 딱 그정도였으므로, 그에게 있어서는 별 의도 없는 사소한 매너였다. 그녀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르는 모양이지. 데려다 드리죠. 릭이 사근사근하게 웃어보인다.

"자택보다는 병원에 가는 게 낫겠네요."

그리고는 가볍게 다음 행선지까지 이야기하고 있는거다. 당연히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인건가. 빨리 데려다주고.. 그러고 나서 담배 한 대를 태우려나. 주머니 속의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린다.
빠르게 엘리베이터 쪽으로 걷던 릭은 제 손을 잡고 있는 여자가 다쳤음을 순간 깨달았다. 부러 걸음을 늦춰본다. 다리길이 탓에 원래도 차이 났을 보폭에 발목을 다치기까지 했으니. 릭의 입장에서는 기듯이 걸어도 과한 처사는 아닐 것이다.

"연락처를 드리죠. 치료 받고, 나중에 다시 연락주세요."

엘리베이터 옆의 역삼각형 버튼을 누르고 싱긋 웃었다

1-9
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8-08 18:23 ID : sidIg2ZdXL6J+
하늘이 나를 버렸나 보다.

“네에?”

폴라리스는 깜짝 놀란 듯 되물어 본다.

“그으, 민폐 끼친 것도 미안해 죽겠는데.... 그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돼요.”

민폐 끼친 게 미안하기도 죽겠고, 그렇게까지 하면 더 송구해 할 기세였다. 내가 이렇게까지 송구해 하니까 그냥 날 놔줘! 라는 마음의 외침은 물론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파스... 붙이면 낫지 않을까요...”

파스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다. 자신 없는 목소리로 파스 붙이면 괜찮지 않겠냐고 말을 흘리고선 흘긋 릭을 바라본다. 당신 왜 이렇게 나한테 친절해요? 친절함이 너무 과한 거 아냐???? 라고 따지고 싶은 마음은 깊이 묻어둔 채로.

초반. 폴라리스는 릭의 빠른 걸음에 황새 따가가는 뱁새의 심정을 느끼며, 황새 따라가는 뱁새처럼 걸었을 것이다. 으흑, 작은 신음이 잠깐 튀어나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그 배려 없는 빠름 걸음에 친절함이 없어서 도리어 안심이 되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크기의 안심이었지만. 중반부쯤부터 남자가 걸음을 늦춰준다. ...들었을까, 내 신음? 되게 작은 소리였는데. 어쩐지 시무룩해진 상태를 유지하며 남자의 손을 잡고서 폴라리스는 걸었다. 뒤로 갈수록 남자의 걸음이 느려져 심정적으로 뱁새가 되었을 때보다 편하긴 하다고 아주 잠시 생각했다.

“네에, 그럴게요.”

나중에 연락 주라는 말에 착하고 얌전하게 답하고서는 잠시 머뭇거렸다.

“엄청 상냥하시네요...”

그래서 더 고맙고 죄송해요. 뒷말을 작게 덧붙이고 머쓱함과 감사함과 죄송함이 복잡하게 뒤섞인 듯한 어설픈 미소를 띄웠다. 그 미소로 잠시 싱긋 웃는 릭을 바라보다가 민망한듯 고개를 숙였다.

1-10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08 18:44 ID : si+WWwaOjcmVM
파스라니.

"그 정도로는 택도 없을겁니다."

그녀가 뭐라고 해도 자신의 생각을 관철할 것임을, 릭은 가벼운 어투 아래에 담았다. 한 조직을 이끄는 자란 대부분 이런 족속들일까. 분명 웃고 있음에도 보이는 묘한 카리스마가 자신만만하다. 웃음을 벗고 보이는 냉랭한 표정은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진 않을 테다.

너는 사자를 닮았구나, 아들아.

둔탁한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댄다. 작았던 그 때에는 이해할 수 없던 말이었다. 긴 금발이 사자의 갈기를 닮았다는 뜻인가. 그때는 그저 그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성장하고, 골격이 굵어지며, 어느날 거울 속의 그 자신을 보았을 때. 모든 것이 달라졌지만 어린날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형형한 눈빛, 릭은 그제서야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이 여자는 마지막까지 친절함 이면을 알지는 못할 테지. 상냥하시다는 말에 별다른 대꾸 없이 빙긋 웃는다. 천사마냥 다정하다.

"이쪽이예요."

릭은 오늘 백화점에 어울리는 젠틀한 벤틀리를 타고 온 것이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조수석 문을 여는 동작이 군더더기 없다. 문과 본체 사이, 그 공간을 손으로 받친 것은, 정확히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다만 아마 그 사이로 들어갈 폴라리스가 머리를 부딪히지 않도록 한 배려였던 것 같다.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 기어 아래에는 흰 명함 한 장이 끼어있다. 인페르노.

37 첫번째 일상(2) (6273871E+5)

2018-12-27 (거의 끝나감) 23:53:58

1-11
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8-08 19:19 ID : sidIg2ZdXL6J+
응. 그렇구나. 이정도 변명으로는 도주로 생성이 택도 없는 거였구나.

“....”

더 이상 무슨 말을 해도, 릭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관철할 거라는 것을 폴라리스는 알아차렸다.

자기가 원하는 바를 관철할 수 있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거나. 포기를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이다. 폴리는 눈앞의 남자가 전자에 속하는지, 후자에 속하는 건지는 아직은 모른다. 다만 역시 오늘 일진이 사납다고 또다시 속절없는 생각을 하고 마는 것이었다.

이 이상 운수 사나운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이미 같이 병원에 간다고 정해진 상태, 발목이 나으면 제 스스로 위험한 사람에게 연락해야 하는 미래에서 더 무언가가 추가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는데. 불행의 신은 폴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지 않았다. 폴라리스는 릭이 문을 열어주고 손을 받쳐주는 것을 약간은 불안한 심정으로 보았다. 물론 겉으로는 전혀 표내지 않았다. 선글라스는 역시 언제나 신의 한 수다. 폴라리스는 릭의 젠틀함이 언제까지고 유지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상냥? 그래. 상냥하기야 했지. 그렇지만 그것이 이 남자의 다가 아니라는 것은 진작에야 알아챘다.

선글라스 너머로 처음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

폴라리스의 행동이 우뚝 멈추었다. 기어 아래 깔린 한 장의 명함에는 인페르노라는 글씨가 떡하니 박혀 있었다. 그녀는 저것이 밤의 도시 최대 마약운반조직의 이름인 것을 알았다. 이태리어로 지옥이라는 뜻을 가진 것 역시 알았다. 그렇지만 그곳의 언더보스가 누구인지는 몰랐다.

여태까지의 친절은 날 방심시켜 차에 끌고 오려는 수작이었나요...?

묻고 싶은 것을 꾹 참고서 폴라리스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아, 남자의 친절이 끝날 시간이었다.

1-12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08 19:46 ID : si+WWwaOjcmVM
릭은 폴라리스의 행동이 갑자기 멈춘 것을 의아하게 느꼈다. 선글라스에 가려진 그녀의 남태평양빛 눈이 천천히 이쪽을 돌아본다. 왜요, 릭은 싱긋 웃어보였다. 시트 위에 당신이 기겁할만한 바퀴벌레 따위라도 있었나. 살짝 고개를 들어 폴라리스의 머리 너머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

그리고 그 순간, 릭은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기어 밑에 끼워진 한 장의 명함. 그것의 정체를 그도 익히 알고있었기 때문이었다. 저게 왜, 저런 곳에?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 따위에 의문을 품을 시간이 없었다. 그는 이제 벗어버려야 할 가면 아래를 생각해야했다.
릭은 당황하지 않고 조수석 안으로 허리를 굽혀넣었다. 팔을 뻗어 명함을 들어올리는 손이 우아하다. 명함은 그와 어울리는 정갈하고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으로 꾸며져있다. 장식 하나 없는 두툼한 흰색, 그 위에 쓰여있는 유려한 검은 필기체의 "Inferno". 당신만을 위한 지옥이다. 그리고 표정을 보아, 릭 앞에 서있는 여자는 그 이름이 가진 무게를 알고 있었다.

"제가.. 이름을 알려드렸던가요?"

폴라리스는 그 순간, 아마도. 웃음 사이 가라앉은 릭의 차가운 무표정을 보았다. 찰나의 공허다. 여전히 웃는 표정이건만, 묘하게 섬뜩한 분위기는 마치 사자가 이빨을 드러내기 직전이다. 릭은 미소지은 얼굴 그대로 폴라리스의 오른손을 살짝 받쳐 들어올렸다. 로렉스를 찬 손목이 주차장의 밝은 형광빛에 반짝 빛난다.

"릭입니다."

그리고는 부러 명함을 뒤집어 그녀의 손바닥 위에 얌전히 올려놓는 것이다. 인페르노의 뒷면에는 그의 이름이 간략하게 써있다. Rick. 그리고 언더보스. 그녀가 이것의 무게까지는 모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뭐,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지만서도.

여전히 조수석 문을 열어둔 채로, 릭은 차체에 기대어 코트 안에 손을 넣었다. 아까는 손수건이 나왔던 곳에서 담뱃잎을 감싸 만 희여멀건 것이 나온다. 길쭉한 것이 꼭 그의 손가락을 닮았다. 릭은 폴라리스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불을 붙였다. 장소가 주차장이라는 것 따위는 이 남자에게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듯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라이터 뚜껑을 연다. 그리고 고개를 튼 그대로. 움직이는 사자의 갈색 눈동자가 폴라리스를 응시한다. 각도 탓에 흘러내린 금발 사이로는 그제서야 드러난 세 개의 은빛 피어싱이 있다. 이제 어쩔 것이냐. 그는 눈빛으로 묻는다.

1-13
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8-08 20:37 ID : sidIg2ZdXL6J+
폴라리스는 저 명함을 먼저 차에 올라타 슬그머니 제 호주머니 사이에 숨겼을 수도 있었다. 저 명함을 보고 굳지 않고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올라타서 기어 사이에 명함이 떨어져 있네요, 라고 천연하게 말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선택지를 고르지 않고, 우뚝 멈춘 것은 왜였을까. 그리고 굳어 있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 것은 왜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Inferno. 지옥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 때문이었을 거다.

-폴리는 지옥을 안다. 지옥을 안다는 것은 악마를 안다는 것이다.

차가운 무표정, 찰나의 공허, 섬뜩한 분위기의 웃는 표정 앞에서 폴리의 시선은 약간 멍하니 그의 동선을 그대로 따라갔다. 손바닥 위로 올려진 명함을 약간 멍하니 읽었다. Rick. 아마 이것이 남자의 이름이다. 폴리는 아까 흘려들었던 소리를 약간 힘겹게 머릿속에서 찾아와 재생시켰다.

‘제가.. 이름을 알려드렸던가요?’
아뇨, 당신은 제게 이름을 알려준 적 없어요.

‘릭입니다.’
명함에 적어진 것과 같은 이름이네요, 릭.

-폴리는 지옥을 알았다. 지옥을 안다는 것은 악마를 안다는 것이었다.
폴리는 저 조직명이 그녀가 알던 그 지옥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눈 앞의 남자 역시 그 악마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 역시 알았다.

그렇다면 그녀가 두려워 할 것이 뭐가 있을까? 폴라리스는 오직 같은 형태의 지옥만이 저를 덮쳐오지 않으면, 공포에 질리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다. 폴리는 제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담배에 불을 붙이는 남자를 얌전히. 아니, 고요히 바라보았다. 아무 것도 던져지지 않은 호수처럼 잔잔하게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틀어 저를 바라보는 사자의 시선을 물끄러미 마주 보았다. 피어싱은 아까 전에도 그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좀 더 분명한 형태로 보인다. 이제 어쩔 것이냐, 눈빛으로 묻는 그를 보며 빙긋, 소리 없이 웃었다. 그 매끄러운 미소가 답변의 전부가 아니었다. 5초 정도 미소는 지속되었다. 폴리는 은은한 분홍빛이 도는 입술을 태연하게 열었다. 솔직히 악마랑 비교하자면 사자는 귀엽지. 사자가 사람 잡아 먹는 맹수라는 걸 알고 봐도 얌전떨고 있는 사자는 귀엽긴 하지. 라는 태평한 생각도 잠깐 했다.

“글쎄요, 릭. 제가 어쩌면 좋을까요?”

글쎄요, 릭. 마치 오늘 점심 메뉴는 무엇으로 정하면 좋을까요, 묻듯이 평이한 어조의 말이 흘러나왔다. 목소리는 언제나와 같이 끝내주게 예뻤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일상 속에 솜니움 안에 있는 것처럼.

“이 발목으로 뛰어봤자 잡힐 것이고.”

남자의 본색의 일부를 본 이상. 어차피 도망칠 생각도 없었다. 도망가면 쫓는 게 맹수의 본능이라 하지 않던가. 폴리는 맹수의 사냥 본능을 자극할만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아마도. 아직은.

“겁에 질린 척은 해줄 수도 있겠는데. 겁먹은 척이랑, 진짜로 겁을 집어 먹는 것이랑은 다른 거잖아요?”

폴리는 멋쩍은 듯 명함을 가지고 있지 않은 손으로 뺨을 긁적였다. 그리고 손에 들린 명함을 한 번, 릭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진짜로 모르겠어서 묻는 거예요.”

그렇다. 진짜로 모르겠어서 묻는 거다. 살려주세요, 라는 남자가 수없이 들었을지도 모르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진짜로 저를 죽이려 들면. 부탁 한 가지만 들어달라고 해야지.

물론 폴리의 그 부탁이 목숨을 구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유언을 그에게 남길 뿐이다. 소박한 소원이니 그 정도는 들어줬으면 좋겠다.

안 들어줘도, 뭐... 별 수 없지만.

1-14
별명 : 릭 - 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08 21:26 ID : si+WWwaOjcmVM
릭은 담배를 입술에서 떼어냈다. 이제는 몸을 틀어 폴라리스를 똑바로 응시한 채로, 선글라스 너머 그녀의 눈 외에는 아주 잠시도 한눈을 팔지 않고. 느릿한. 그러나 그래서 더 우아한 움직임이었다.

겁에 질린 척은 해줄 수도 있겠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가라앉았다.

사자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더없이 다정했던 눈빛을 씻고, 차가운 고요 속으로 끝없이 추락했다. 릭은 그제야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방금까지 그 앞의 폴라리스는 연약한 사슴이었다. 사슴이었고, 사슴이서, 사자는 마치 놀잇감을 가지고 놀듯 그녀의 다음 행동을 궁금해했다. 지켜보면서도, 사실 이빨을 드러내고 그 작은 몸을 집어삼킬 생각은 없었다. 그저 궁금했을 뿐이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이냐. 당신은 내가 보여준 다정한 모습을 믿겠는가. 전번의 소녀-라일-처럼 그것을 믿고 순순히 내 호의를 받아들이겠나, 아니면 뒤돌아 도망칠텐가. 갑자기 궁금해진 것이었다.

왜 갑자기 그런 어울리지도 않는 호기심을 품었던걸까. 어쩌면 그 안에 웅크려있던 사자가 그도 모르는 사이 이 여자의 이면을 보았던 걸지도 모르겠다고. 릭은 문득 생각했다.

"...글쎄요."

무표정한 얼굴은 대체 무슨 생각을 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릭은 잠시 제가 만났던 셀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 이런 인간군상이 있었는지를 생각했다. 아니. 대답은 단호하다. 이제껏 그의 앞에 섰던 여자들이 떠오른다. 당신은 겁에 질려할 줄 알았는데. 답지 않은 착각이었다.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문 릭이 불을 붙이기 위해 살짝 턱을 당렸다. 후, 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첫 숨을 뱉는다.

"실수했네요, 내가."

릭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흥미가 일었다. 사자의 형형한 눈이 이제 사슴인지 무엇인지도 모를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예민한 육감이 순간 경고했다. 파멸할거야. 위험한 여자, 부지불식간에 갑자기. 그러나 그는 처음으로, 그 자신을 여러번 죽음의 위기에서 지켜주었던 그 육감을 가볍게 짓밟아버리기로 한다. 그래. 릭은 자신의 뜻을 관철할 줄 아는 남자다. 강한 사람, 지나친 프라이드. 결코 자신의 고집을 거두지 않을 테다.

"당신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요."

그가 입을 열었다. 눈치챘어? 이상하지, 그는 간헐적으로 향을 빨아들이면서도 절대 그것을 정면으로 뱉지는 않는다.

"하나는 내 차를 타고 안전하게 병원에 내려지는거고, 또 하나는 내가 건네줄 돈을 받아 안전하게 택시를 타는거죠."

릭이 웃었다. 그러나 아까처럼 밝고 다정한 것이 아닌 차갑고 희미한- 차라리 실소에 가까운 것이다.
입에 문 담배를 빼더니, 불씨가 뜨겁지도 않은지 검지를 내리쳐, 툭, 때리듯이 불을 껐다. 저보다 더 강한 힘에 부딪힌 불씨가 어쩔 도리 없이 무너져내린다. 꼭 폭죽처럼 터져오르는 불빛이 둘 사이를 잠시동안 장식했다.

"어떻게 하겠어?"

그러고보니, 릭은 아직도 이 여자의 이름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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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8-08 22:28 ID : sidIg2ZdXL6J+
정말로 한눈팔지 않고 똑바로 내 눈을 보네, 저 사람.

그래서 폴리는 릭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담배를 입술에서 떼어내는 동작이 우아했다는 것도, 그의 무엇인가가 툭-하고 가라앉았다는 것도, 그녀의 가면 중 일부를 이제는 그가 깨달았다는 것도. 그렇지만 폴라리스는 독심술사가 아니었다. 보는 눈이 좋고, 눈치도 빠르고, 감이 좋은 편이어도 그의 생각까지는 완벽하게 읽어낼 수가 없다. 그래서 궁금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라는 질문에 그가 어떤 대답을 되돌려줄 것인지가.

“....?”

새로 바꾼 담배의 첫 숨을 뱉은 후. 고개를 들어 시선만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남자가 무엇을 실수했다는 것인지 모르겠어서. 폴라리스는 그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천천히 옆으로 기울였다. 갸웃, 하는 동작이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퍽 귀엽다고 생각했겠다마는.
글쎄. 이제 그는 폴라리스를 마냥 사슴처럼 보아주지 않을 테니 쓸데없는 귀여움이지 않을까?

“뭘 실수했는지 물어보는 건, 엄청 눈치 없는 행동일까요?”

폴라리스는 고개를 바로하고 선글라스를 천천히 벗었다. 빗물이 그친 후, 비가 개인 후의 하늘의 색상이 달라지는 것처럼. 소다처럼 달콤한 색채를 가졌던 눈동자가 지금은 약간 시리고 또 청량한 색상으로 변모해 있었다. 아이스블루. 그렇게 흔하게 볼 수 있는 색은 아니겠지. 깜박깜박. 몇 번 속눈썹 아래로 숨었다 모습을 드러냈다를 잠깐 반복한 눈이 그의 눈을 직시한다.

“어느 쪽이든 당신이 내 안전을 보장해 준다면.”

안전하게 내 차를 타고 병원에 가거나, 안전하게 택시를 타거나.
진짜로 안전한 선택지가 있기나 할까?
똑바로 그의 눈을 직시하던 폴리의 눈동자가 둥글게 휘었다. 그 눈웃음이 자못 부드러웠다. 그에게 어떠한 해도 끼치지 못할 것처럼.

“당신 차에 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겠죠. Mr, 릭. 병원까지 데려다 줘요.”

밝고 다정한 미소는 당신의 가면. 그리고 아까 보여준 차갑고 희미한 웃음은 당신의 진짜?
글쎄, 어느 쪽도 가면이고. 어느 쪽도 진짜일지. 지금의 나는 모르지. 그러니까 조금 더 당신이랑 있는 게 지금의 내게 있어서 더 나쁘지 않은 선택지 일 거야. 폴라리스는 선글라스를 도로 껴 제 눈동자를 감추었다. 그리고 신발을 먼저 릭의 차 조수석의 밑바닥에 내려놓고는 제 가방을 뒤적여 손수건을 찾았다. 릭이 준 손수건을 아까 엘리베이터 타기 전에 이미 제 가방 안에 넣어두었고, 찾아서 꺼낸 손수건은 본인의 것이다. 유명한 메이커의 것은 아니고, 그냥 백화점 세일 때 골라서 산. 에스닉한 무늬가 남색, 바탕이 연한 회색인 별로 비싸 보이지는 않지만 깨끗한 손수건을 똑바로 펴 발이 앉을 자리에 먼저 깔았다. 맨발로 주차장까지 내려왔으니 발이 성할 리 없다. 생채기도 생겼고, 더러워졌고. 그런 발로 비싼 차를 타는 것은 좀... 그랬던 것이다. 차는 청소하기 힘드니까 내 특별히 배려해준다. 폴라리스는 손수건 위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삔 발목이 아까 릭이 보았을 때보다 부어 있었지만. 폴라리스는 아프다는 티를 조금도 내지 않았다. 그리고 조수석에 앉아 스스로 안전벨트까지 매고 릭 쪽을 바라보았다.

안 타고 뭐해요?

라고 묻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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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 릭 - 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08 22:57 ID : si+WWwaOjcmVM
당신을 마냥 사슴으로만 여긴 거겠군. 무얼 실수했냐는 물음에 가볍게 대답한다.

미스터 릭. 상대의 뻔뻔스러운 말투에 이름의 당사자는 작게 코웃음쳤다. 정말 차를 타겠다고 한 것도 우스운데, 배려랍시고 바닥에 손수건을 깐 것은 더 우습다. 배려는 강한 쪽이 약한 쪽에 베푸는 자비라고 생각해왔다. 저 여유로운 태도는 무얼까. 이래서야 내가 사슴이 된 꼴은 아닐지. 마주친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에 순간 잡아먹히는 착각이 든다. 그녀의 눈동자는 아까와는 또 다른 색깔이다. 남태평양, 이제는 남극의 빙하 그 자체. 꼭 그녀의 페이스에 휘말리고 있는 느낌이다. 상황의 주도권을 쥐지 못한다는 건 만족스럽지 못한 일이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탈겁니다. 릭은 비릿하게 웃는 얼굴로 조수석 문을 닫았다.

차에 타자마자 담배를 태우는 것은 그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주차장 밖을 나서기가 무섭게, 그는 차창을 내리고 또 다른 조각을 물었다. 긴 금발이 기분 좋은 바람에 흔들리고. 두 사람이 타고 있는 승용차는 일절의 소음도 내지 않은 채 아스팔트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진다. 릭이 사랑하는 편안한 승차감이다.

"이름이 뭡니까?"

갑작스레 묻는다.
릭은 상대와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나갈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차에 타면서부터 그는 굳이 이어지는 침묵을 깨려 하지 않았다. 어쩌면 더 이상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지도 모르겠다. 한번 이빨을 보인 상대에게 굳이 얌전한 양의 탈을 뒤집어쓸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 이어진 얼마 간의 침묵 끝, 차가 신호를 받아 멈추고서야. 릭은 여전히 정면을 보는 채 툭 물었다.

"억울하네요. 나만 당신 이름을 모르는 게."

..이쪽은 농담이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아닌가. 상냥하고 위트있는 남자의 탈은 이미 벗어던진 줄 알았더니, 아까와 다른 무표정으로 종잡을 수 없는 소리를 한다. 역시 알다가도 모를 사람. 릭은 과거의 누군가가 그에게 했던 말을 문득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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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8-08 23:20 ID : sidIg2ZdXL6J+
내 사슴처럼 연약한 아가씨 가면은 완벽했나보다. 가볍게 대꾸하는 그의 말에 슬쩍 미소가 피었다. 하지만, 역시. 나는 완벽을 믿을 수가 없다. 완벽을 추구하는거지, 완벽한 가면은 아니었을 거야.

비릿하게 웃는 얼굴이 아니라, 문이 내는 쾅 소리에 놀랐다. 눈을 땡그랗게 하고 닫힌 문을 보아도, 그 눈이 선글라스에 가려져 있어서 그냥 놀라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던 걸로 그가 착각할지도 모르지.

차창을 내리고 또 다른 담배를 무는 그를 잠시 보다가 담배 연기를 피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담배 연기는 대부분 릭이 열어놓은 창으로 빠졌지만, 간혹 창 밖으로 빠지지 못한 희미한 연기가 차 안으로 들어올 때는 미간을 슬쩍슬쩍 찡그렸다. 간접흡연이 더 건강에 나쁘다는 소리를 폴리는 생각하면서도 릭에게 털어놓지 않았다. 침묵의 시간동안 그를 바라보지 않고 창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을 보고 있는데 갑작스러운 물음이 들렸다.

“?”

이제 와 그게 궁금해요?
사실은 이제 물어볼 타이밍이 생긴 거지, 실은 아까 전부터 궁금하지 않았어요?

“....”

계속 억울해 하세요. 얄밉게 말하고 손으로 입술을 가리며 호호 웃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은데, 폴라리스는 위태로운 평화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돌 것 같은 일이 없으면 미친 짓을 사서 하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폴라리스는 고개를 돌려 릭을 바라보았다.

“폴라리스.”

지금 이 모습일 때의 풀 네임을 한 번 차분하게 불러주고.

“폴리라고 부르셔도 돼요.”

약칭 또한 차분하게 불러주었다.

“담배 많이 좋아하세요?”

많이 좋아하는 것 까지는 아니면 그냥 꺼 줬으면 좋겠지만. 내가 꺼달라고 하면 꺼 줄까?
젠틀한 남자의 가면은 이미 벗었잖아, 당신.

1-18
"폴라리스."

피아노를 치듯, 말끔한 저음이 그녀의 이름을 혀끝에서 한바퀴 굴린다. 폴리라고 불러도 된다는 말에 릭은 여전히 정면을 쳐다본 채로 그 이름 역시 중얼거린다. 폴리라, 아까 들었다면 웃으며 예쁘다고 칭찬해주었을 법도 한 이름이다. 그러나 이제와서 그런 말을 할 이유는 없으니- 릭은 잠자코 창밖으로 내밀고 있던 것을 다시 입에 물었다. 신호가 푸른색으로 바뀌고, 그는 브레이크 대신 엑셀을 밟는다.

"......"

담배 많이 좋아하세요? 청아한 물음이다. 릭은 대답 대신 슬쩍 시선을 옮겨 폴라리스의 표정을 보았다. 폴라리스에게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퍽 눈치가 빠른 남자다. 쓰고있는 선글라스 탓에 눈빛이 읽히지 않는다해도 당신의 의도 정도는 단번에 읽었을 것이다. 후. 마지막 연기를 빨아들인 릭이 폴라리스를 힐끗 훑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러고는 별 미련 없이 손을 내밀어 담배를 차창 밖으로 털어버린다. 착각일까, 차가 달리는 속도가 조금 빨라진 것도 같은데. 계기판의 속도 표시가 점점 올라가는 걸 보면 착각은 아니고. 이 오만한 남자의 마음에 뭐라도 불편함이 있었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표정변화가 없다. 여전히 담배를 물고 있는 듯 평온한 표정이다.

차는 그의 손을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완벽한 승차감인 덕분에 창문까지 닫고 나자 그다지 빨리 달리는 것 같지도 않다. 변하는 것은 창밖의 풍경뿐. 조용한 침묵과 표정없는 릭 탓에 차 안의 시간은 마치 아까 전에서부터 멈춘 듯, 고요히. 고요하게 흘러간다.

"잠깐 기다려요."

마침내 도착한 병원 앞이다. 마지막에서 불친절한 이 남자는 그 말만을 남긴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 안을 빠져나갔다.

1-19

별명 : 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09 00:08 ID : sis9782/y0KA2
피아노 소리도, 낮은 저음도 좋다. 기실 누구나 미남이라고 인정할 릭의 외형보다는 그의 목소리가 더 마음에 드는지도 모르겠다. 남자는 시각에 약하고 여자는 청각에 약한 동물이라더니 그 말이 틀리지는 않아. 생각하며 폴라리스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제 이름을 들었다.

“.....”

담배를 사랑한다고 말한 남자가 아무 미련 없이 손을 내밀어 창밖으로 담배를 버린다.

...?

대체 왜? 라는 의문이 들기는 했다. 피워도 불평 못하는데 사랑한다고 말할 정도면 피우지 그랬어요. 그리고 폴리는 올라가는 계기판의 속도를 보며 차라리 담배 좋아하세요? 라고 묻지 말 걸 그랬다고 쪼끔. 아주 쪼끔 후회를 했다. 그리고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선호한다고 추정되는 기호품을. 좋아하냐고, 말 한 마디 물었다고 버려준 것은. 후회보다 좀 더 큰 크기로 신기하게 여겼다.

안전한 사람은 아니겠지만, 내 예상보다 훨씬. 위험하지 않게 굴어준다. 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내게 배려를 해줄 이유가 없을텐데?

젠틀남의 가면을 쓰고 있던 아까처럼 과하다 싶은 친절은 베풀지 않지만, 어째 이상하게 내 예상보다 훨씬. 훨씬 더 친절하기까지 한 건 대체 왜일까...? 의문을 품었으나 아무에게도 묻지 못하고 고요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폴라리스는 꽤 많은 생각을 했다. 릭에게 받은 손수건은 나중에 전화할 때, 그래서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세탁해서 돌려줘야 하는 것인가, 하는 실없는 생각도 그 생각들 중에 포함된 것이다.

잠깐 기다리라는 말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렸으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 남자가 알 턱이 없겠지. 릭이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는 것 역시 알 길 없겠지.

1-20
별명 : 릭 - 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09 00:50 ID : siko2967EoaK6
아무런 예고도 없이 조수석 문이 벌컥 열린다.

"신어요. 이거."

확실히 제멋대로인 남자다. 폴라리스가 신기 편한 방향으로 툭 내던진 것은 다름 아닌, 방금 병원에서 가지고 나왔음이 분명한, 병원마크가 큼지막하게 찍힌 초록색 슬리퍼였다. 신발을 신기 편하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선 그의 시선은 무얼 생각하는지 그녀의 발쪽으로 향해있다. 그냥 멍이라도 때리고 있는건가 싶지만, 아무 생각 없이 남의 발이나 들여다보고 앉아있기에 그는 지나치게 계산적인 사람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걸까. 이 알수없는 남자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은 그 부모라도 무리일 테다.

릭은 한참을 기다리다, 폴라리스가 병원 접수를 끝내고 진료실 안으로 들어서고서야 비로소 일어나 병원을 떠났다. 비싼 맞춤형 가죽구두로 길고 긴 복도를 흐트러짐 없이 걷고. 가장 바깥쪽의 유리문까지 지났다. 마침내 지상에 위치한 병원 주차장까지 도착한 그는, 바로 몇십분 전 주차한 자신의 차를 찾아 차체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었다. 그래도 병원에서 담배를 피워선 안된다는 생각은 있는지 반쯤 뚜껑을 연 라이터를 다시 코트주머니에 집어넣는다.
고개를 든 하늘에는 화사한 태양이 땅을 비추고 있었다. 밤의 도시와 어울리지 않는군. 릭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

그리고, 이건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

"아이작입니다."

치료를 받고 나온 폴라리스는 아마도 병원 입구에서 무언가 똥씹은 듯한 표정의 남자를 만났을 거다. 아이작입니다. 단정한 머리에 은테안경, 그러나 양팔에는 한눈에봐도 나 불량하오~하는 문신을 가득 새긴 이 남자는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다.

"폴라리스님 맞으시죠?"

그리고 폴라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면, 아마도. 말없이 무언가를 슥 내밀었을 거다.

"신으세요."

꼭 누군가가 생각나는 말투다. 어리둥절하게 받아든 쇼핑백 안에는 작은 상자가, 상자 안에는 하얀 운동화가 하나 들어있다. 신발은 놀랍게도 폴라리스의 발에 잘 들어맞는다. 어떻게 사이즈를 이렇게 잘 알았지? 생각하는 폴라리스의 머릿속에, 어쩌면, 한시간 전의 어떤 장면이 오버랩될지도 모르겠다. 병원 슬리퍼를 신는 발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모습. 릭이 보고 있던 것이 자신의 발사이즈였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아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상자 바닥에 깔려있는 메모 하나를 발견하겠지. 어울리지 않게 쪽지 모양으로 접혀있는 그것을 펴보면- 정갈한 글씨체로.

[당신이 적신 그 수트, 리미티드 에디션이었어요.]

...소름이 돋을 지도 모르겠다.

38 두번째 일상 (6273871E+5)

2018-12-27 (거의 끝나감) 23:55:11

2-1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09 22:25 ID : siko2967EoaK6
모란방 향주와의 짧은 대화를 마무리짓고, 릭은 잠시 바람이라도 쐴 요량으로 발코니 쪽으로 발을 옮겼다. 글라스 안의 붉은 와인이 그가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조심스럽게 출렁인다. 이럴 때 만큼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체질. 린과의 대화 중 고작 한 모금을 마셨을 뿐인데 취기가 오르는 것도 같다. 불쾌하군. 릭은 마침 그의 곁을 지나가던 딜러의 쟁반 위에 들고 있던 것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는 발코니 옆에 기대어 있는 익숙한 은발을 보았다.

"신발은 잘 받았나요?"

끝이 뾰족한 멋스러운 맞춤구두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간다. 처음 본 그 순간의 다정한 미소를 띈 채로. 사자는 태연하게 그녀에게 인사했다.

"또 보네요, 폴리."

2-2
별명 : 폴리 - 릭 기능 : 작성일 : 17-08-09 22:39 ID : sis9782/y0KA2
...음, 젠장. 적어도 여기서 마주치고 싶지는 않았는데. 생각하면서도 폴리는 릭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태연히 고개를 돌렸다.

"잘 받았어요."

감사를 표하듯이, 폴라리스는 빙긋 웃었다.
솔직히 당신의 정갈한 글씨로. 내가 적신 정장이 리미티드 에디션이라고 하는 것보다도.
발에 꼭 맞는 신발이 내 취향이라는 게 더 소름 돋았었다. 심지어 색깔도 폴리가 선호하는, 하얀색이었어.
-라는 속마음이 1도 들리지 않는, 차분한 목소리로 릭의 말을 받았다.

"이런 곳에서 볼 줄 몰랐는데 신기하네요."

2-3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09 23:22 ID : siko2967EoaK6

"칭찬이겠죠?"

너무 잘 어울린다는 말에, 릭이 싱긋 웃으며 되묻는다. 웃고 있는 눈매가 참 부드럽다. 이렇게 보아서는 티끌만한 오점도 없이 선한 인상이거늘. 느껴지는 자꾸만 묘한 위압감은 왜일까. 아, 아무래도 희미하게 풍기는 향수 냄새 때문인가보다. 고급스러운- 그러나 분명한 남자의 것. 후각은 오감 중 가장 예민한 감각이라고들 하니.

"난 한번 본 사람은 잊지 않아요."

릭은 자신이 이 수많은 군중 속에서 폴리를 찾은 것을 아주 당연한 일이라는 양 가볍게 치부했다. 명석한 기억력에 뛰어난 눈썰미다. 이 일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대체 무얼 하고 살았을까, 어쩌면 그 좋은 머리를 굴려 나쁘지 않게 높은 자리에 앉았을 지도. 그러나 밤의 도시에서 태어나 여섯에 처음 총을 잡은 시점부터 그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탕, 갑작스럽게 들린 총소리에 릭은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대화를 나누고 있던 여성의 앞을 막았다. 꼭 뒤따라오던 부하의 움직임을 제지하기라도 하는 양. 살인사건이다! 누군가 소리친다. 잠시 그쪽을 바라보고 있던 릭은, 곧 얼핏 웃으며 고개를 돌려 다시 폴라리스를 보았다.

"내가 한 거 아니야."

...핀트가 어긋난 농담이다.

2-4
별명 : 폴리 - 릭 기능 : 작성일 : 17-08-10 00:00 ID : siR6XUWzWPXJU

“칭찬이죠, 물론.”

따라서 싱긋 웃으며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찔리는 거 있어요? 굳이 칭찬이냐고 묻게. 느껴지는 위압감에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겉도 그랬고, 속도 그랬다. 나한테 위압감을 주려거든 일단 내 장기를 뺀다고 말로 협박하지 그러세요... 그렇게 분위기로 위압하려들지 말고.

“...그래요?”

그것 참 오싹한 멘트네요. 라고 말하고 싶지만, 폴리는 한 번 본 사람을 잊지 않는 사람. 그러니까 기억력이 비상한 사람을 처음 만난 게 아니었다. 전혀 놀랍지 않았다. 새롭지도 않았다. 조금의 침묵 후에 그래요? 되묻는 게 왠지 그럴 줄 알았어요, 라고 들린 것은 릭의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
일순간에 멈춘 암전. 멈춘 음악.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탕, 소리에 저도 모르게 한 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버린 폴리-본능적으로 몸을 낮춘 것이다-가 혼란 속의 웅성거림에서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온 물체 같은 것-릭의 손-을 반사적으로 양손으로 잡아버렸다. 날아온 야구공 잡듯이 그렇게.

세상에. 내가 지금 잡은 게 누구 손이지?

불이 켜지고 누군가 살인사건이라고 하는 게 들렸지만. 그 소리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폴리는 지금 제 포즈가 부끄러웠다. 미친 것 같아. 꿇어앉아서 릭 한 쪽 손을 제 양손으로 붙들고 있는 게, 릭의 포즈와 맞물려 꼭. 주님의 손을 붙든 베드로나 요한 같은 것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도로 불 꺼요. 왜 켰어요.

“...알아요.”

망연히 답한 후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손을 잽싸게 떼서 제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고 몸을 수그렸다. 눈썰미 좋은 릭은 폴라리스의 선글라스 쓴 얼굴이 붉은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귀까지 붉어져서 양손으로 얼굴을 가려도 소용이 없을 듯 싶었다.

-나 빼고 다 여기서 나가주세요.

-제발.

심각한 살인현장에서, 남들은 다 진지하게 추리하고 있는 판국에. 저 혼자 개그캐가 된 것 같아서. 지금 폴라리스는 이 자리에서 소멸해 버리고 싶은 기분을 느끼며 어깨를 바들바들 떨었다.


2-5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10 00:21 ID : sisGoUmcheCxM
릭은 이렇게 희한한 방식으로 제 손을 잡는 사람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애초에 불필요한 스킨십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긴 거래를 마치고 협상의 성사를 알리는 악수를 할 때도, 그는 땀에 젖은 상대의 손이 불쾌하게 축축하군, 따위의 건조한 감상만 늘어뜨릴 뿐이었다. 겁도 없이 손을 잡는 옛 연인들-애인이라고 생각하기는 했던가-의 가냘픈 손가락 따위는 어렵지 않게 뿌리쳤다. 의도가 빤히 보이는 접촉은 불쾌하다. 기분이 몹시 저조해져서, 곧장 화장실로 걸어가 흐르는 물에 끈적해진 손을 쑤셔넣곤 했다.

...그런데 이건, 뭐지? 불이 켜지고, 반사적으로 내민 손이 누군가에게 잡혀 있음을 깨달은 순간. 그리고 방금까지 옆에 서있던 그 여자가 손에 아이마냥 대롱대롱 매달려있음을 안 순간, 릭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더랬다. 내가 한 거 아니야. 되도 안되는 농담. 이건 대체 무슨 의도일까. 릭은 어쩌면 제가 조금 당황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알고 있었다면 다행이군요."

약간의 침묵 끝에 그는 느릿하게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건지 못들은건지. 폴라리스는 잽싸게 손을 거둬 이제는 자기 얼굴을 오밀조밀 가리고 있다. 텅 비어 갈곳을 잃은 제 손이 안쓰러워 릭은 그것을 천천히 내렸다. 찰나의 순간 스쳐지나갔지만, 선글라스에 가린 그녀의 볼은 붉다. 저건- 또 연기? 아니면.

"울어요?"

바들바들 떨리는 어깨를 보며, 릭은 애매하게 웃었다.

2-6
별명 : 폴리 - 릭 기능 : 작성일 : 17-08-10 00:35 ID : siR6XUWzWPXJU
수치사로 죽고 싶다. 그런데 여기 말고 딴 데서 죽을 거야. 그렇지만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범인을 찾는 것 뿐이라고.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수치사로 죽어가는 와중에 기적적으로 들렸다.

XX.. 창문 깨고 탈출하고 싶다...
그렇지만 그게 불가능 하대...

"안 울어요..."

흑흑, 흐느끼는 것 같은. 부끄러움에 죽어가는 소리가 울지 않는다는 대답에 묻어나왔다. 어깨가 바들바들 떨리는 것 역시 여전했다. 진짜로 울고 있냐고 묻는다며. 몸 말고 마음으로 울고 있다고 대답해야겠지.

"몸은 안 우는데, 마음이 울어요..."

툭 치면 죽어버릴 것 같은 연약한 목소리가 죽어가는 와중에 착실히 대답했다. 로우 포니테일로 묶은 탓에 노출된 귀에서 붉은 물이 빠지지 않았다.

"누가 절 불쌍히 여기신다면 범인 좀 빨리 찾아줬으면 좋겠어요. 저 여기서 탈출 좀 하게...."

탈출해서 가는 장소로는 어디가 좋을까? 자살 명소로 핫하다는 데가 요즘 어디였지?

2-7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10 00:56 ID : sisGoUmcheCxM
꼭 울고 있는 것 같은 목소리 위에, 처음 만나던 날 그녀가 흘렸던 눈물이 미세하게 오버랩된다. 설마 이것도 연기는 아니겠지.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를 사람, 릭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볼 때 어떤 느낌을 느끼는 지를 비로소 깨달았다.

"여기서 이야기나 나누다 보면 어느 순간 나갈 수 있게 되겠죠."

그러나 폴리가 부끄러움으로 죽어가든 말든, 범인을 찾아달라고 하든 말든, 릭은 시종일관 여유롭다. 강자의 힘에서 나오는 자신감일까, 하지만 그렇다기에 릭은 지금 이 상황에 티끌만큼의 흥미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에게 언제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안전이다. 어쩌면 폴라리스와 떨어져있는 홀의 이 한켠이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는 지도 모르지. 적당히 시간을 떼우다가, 정 안되면 바깥에 연락해 문을 부숴버리자. 그 전까지는 유유자적 이곳에 머물러있으면 그만이다.
별 생각없이 습관처럼 담배를 꺼내물던 릭은 곧 그것을 코트 주머니에 다시 쑤셔넣었다.

"조금 다른 얘기나 할까요."

잠시 벽에 기대어 무대 위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는 듯도 했다. 얼마 가지 않아 그는 흥미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입을 연다.

"왜 연락 안했어요? 신발을 받았으면, 그 안의 내 쪽지도 봤을 거 아닌가."

리미티드라니까. 다시 못 구해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예의 그 다정한 표정을 다시 지어보인다.

2-8
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8-10 01:16 ID : siR6XUWzWPXJU
-여기서 이야기나 나누다 보면 어느 순간 나갈 수 있게 되겠죠.

지금 이야기 나눌 정신 없거든요? 지금 누구 약올려요? 속으로만 따박따박 반박하며 폴리는 슬슬 정신줄을 챙겼다. 하... 인생... 훅 가는 게 한 방이라고 했지만, 이런 방식으로 훅 갈지는 몰랐지.

어깨의 움직임이 잦아들 무렵. 그가 다른 이야기나 하자는 제안을 한다.

싫어요. 안 돼요. 하지 마세요.

"....."

폴리는 포즈를 풀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힘 없는 걸음으로 걸어, 의자 두 개를 질질 끌고 와 하나는 릭의 근처에 놓고. 다른 하나는 릭의 의자에서 테이블 하나 들어갈 간격을 두고 놔두었다. 그리고 그 의자에 앉았다. 하...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숙인 채로 폴리는 입을 열었다.

"연락은 발이 완전히 나으면 하려고 했죠. 지금은 대충만 나았어요."

하아... 또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서 폴리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어차피 선글라스가 표정의 반은 가려줄 것이다.

"원하는 배상이 정확히 어떤 거예요?"

힘이 없는 표정. 힘이 없는 목소리.

"얼마 주고 사셨는데요...."

솔직히 지금은, 눈 앞의 남자가 무엇을 배상으로 요구하든. 얼마를 주고 샀든. 전혀 놀라지 않을 것 같다. 놀랄 영혼이 반쯤 털려 있는 상태였으니까. .....다정한 표정이 (비)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내 착각이었으면 좋겠다. 그래, 뭐. 지금 내 꼴이 웃기긴 하지.. 맘껏 (비)웃어라...

2-9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10 01:48 ID : sisGoUmcheCxM
고마워요. 출중한 매너를 지닌 이 남자는, 레이디의 친절한 행위에 대한 감사 표시 후에야 싱긋 웃으며 자리에 앉는다.

"사실 돈은 딱히 필요 없어요."

릭은 얼마를 주고 샀냐는 폴라리스의 말을 가뿐히 무시했다. 분명히 똑같이 다정한 말투이긴 한데- 이런 사소한 부분들이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의 완벽한 상냥함과는 묘하게 다르다. 그때라면 사근사근하게 손사레를 치며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겠지. 같은 듯 미묘하게 다른 부분들. 계속해서 드러나는 새로운 면모, 그건 폴라리스가 아직 온전한 릭을 모두 보지 못했다는 것을 뜻하는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돈은 필요 없다는 말만은 진심이었다. 당연하지, 돈이라면 썩어날만큼 많은 인페르노의 언더보스가 고작 그만한 푼돈을 받겠다고 이런 정성을 들이고 있겠는가. 그러나-폴라리스는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원하는 배상이 정확히 어떤 거냐는 말에, 릭은 뜻밖에도 아주 잠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글쎄. 모르겠네. 무얼 요구할까. 이 계산적인 남자는 오랜만에 기분이 시키는대로 흔들리고 있다.

"글쎄, 모르겠네... 나도 내가 뭘 원하고 있는지..."

의자 등받이에 반쯤 기대어 다리를 꼬고 있는 오만한 자세. 고개를 틀자 떨어지는 금발 사이로 릭은 조용히 속삭였다.

장내가 갑자기 조용해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웬 남자의 장황한 설명이 이어지더니.. 칼이 어쩌고, 총이 어쩌고. 이내 사람들의 환호성과 탄성 비슷한 것들이 들린다. 릭은 직감적으로 게임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옳지. 굳게 닫혀 절대 열리지 않을 듯하던 문이 일제히 입을 벌렸다. 상황이 종료된 것이다. 새가슴인 누군가는 비명을 지르고 죽은 시체는 피범벅이 되어 되살아난다. 그제서야 시체의 얼굴을 분명히 보았다. 치나츠였군. 릭은 이 살벌한 게임이 참으로 치나츠 답다고 생각했다.

"저 남자가 수수께끼를 풀었나보네요."

당신이 바라던 대로. 누구라도 좋으니 빨리 문제를 풀고 탈출하고 싶다면서요. 턱끝으로 던킨 쪽을 가리키며, 릭이 별 감흥 없이 중얼거린다.

"뭐해요? 가서 키스를 퍼부어줘도 부족할텐데."

...그러니까 이건, 진짜 농담. 아마도. 빨리 뛰어가요. 이제서야 코트에 박아두었던 담배를 물며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2-10
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8-11 20:47 ID : siRDgL24v8IpE
돈은 딱히 필요 없다는 말에 쉬이 납득했다. 애초에 배상 예상 선택지가 세 개였으니까. 첫째, 돈으로 배상한다. 예상 액수는 외제차 한 대에서 세 대 정도. 둘째, 돈은 필요 없으니 돈이 아닌 다른 것으로 요구한다. 이때는 물질적인 게 아닐 확률이 높았다. 대체 뭘 요구할 것 까지는 예상할 수 없었지만. 셋째. 배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셋째가 제일 확률이 낮지. 아무래도. 0에 수렴하는 확률이지 않을까.

“....?”

조용히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글쎄, 모르겠네... 나도 내가 뭘 원하고 있는지...’ 라는 대답이 돌아올 줄은...
솔직히 말해 릭의 대답은 폴라리스의 예상 범주 내에 없는 것이었다. 본인이 원하는 걸 왜 몰라요? 배상 고르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자연히 폴라리스는 의문을 가졌지만, 선글라스로 가려진 그녀의 눈동자 외에 의문을 생각하는 사람들 특유의 동작이 없었다. 남자의 오만한 자세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 그러던 중 폴리는 잊었던 무언가를 떠올렸다.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려던 찰나에, 장내가 조용해졌다. 그녀는 열려던 입을 도로 다물고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귀울였다.

마침내, 수수께끼가 끝난 모양이었다. 폴리는 약간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약간의 해방감도 같이 느꼈다. 스르륵 어깨가 내려갔다. 이제 드디어 갈 수 있겠다.

“뛰어가서 키스하면 미친 여자 취급 받을걸요.”

폴라리스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애초에 감사의 키스를 남발하는 타입도 아니었다. 그리고 내 입술 비싸요. 억만금을 줘도 살 수 없는 거라고요. 릭의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가볍게 받아치고서는 고개를 돌려 릭이 턱 끝으로 가리킨 남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렇구나, 저 사람이... 수수께끼를 풀어주었구나. 탈출의 일등 공신이었다. 폴리는 남몰래 저 남자-던킨-을 가면무도회의 용사님이라고 불러보았다. 기억해 둬야지.

“....”

폴리는 고개를 도로 릭에게 돌렸다. 담배를 물고 희미하게 웃는 그가... 아니, 그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정확히는 그의 행동을 이해 못하겠다. 연기를 내 쪽으로 뱉지 않고, 피던 담배를 버리고, 도로 집어넣고, 물기만 할 뿐 불을 붙이지 않는. 사소한 것 같으면서도 사소하지 않는 배려인지, 예의인지, 정중함인지 모를 것을. 그 명함을 발견한 순간부터 친절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폴리는 자신의 판단을 되물렸다. 그의 친절은 아직, 끝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의 본성을 알기 전에 릭이 보여준 ‘완벽한 상냥함’을 보는 것은 이제 무리겠지만.

폴리는 서류가방을 열어 잊었던 무언가를 찾아서 꺼냈다. 그때 빌렸던-그것을 빌렸다고 표현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릭의 손수건을 세탁 후에 포장한 것. 그리고...

“발은 일주일 후에 나을 것 같아요. 원하는 것은 천천히 생각하셔도 좋아요.”

일주일 후에 연락하겠다는 소리다. 천천히 생각하는 건 좋은데, 너무 열심히 생각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폴라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있는 릭에게 다가갔다. 릭의 무릎 위에 포장한 손수건을 올리고, 그 위에 그림엽서를 올렸다. 손수건은 그렇다 치고, 왜 그림엽서까지 올렸는지 궁금하겠지.

“....당신이 준 운동화가 솔직히 지나치게 내 취향이었어요. 그림엽서는 하잘 것 없는 답례라고 생각하세요.”

그렇다. 남자가 힘들이지 않고 골랐을 그 운동화가 소름 끼치도록 폴라리스의 취향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폴리는 공짜로 무언가를 받는 것을 선호하지도 않았다. 꽤 많이 생각하고, 꽤 많은 고민 끝에. 밤의 도시 바깥에 열린 미술 전시회까지 찾아가는 수고-명화 그림 엽서는 미술 전시회 기념품으로 구할 수 있다-를 들여 고른 답례였지만. 그에게 하잘 것 없으리라는 것을 안다. 남의 손을 탄 손수건을 도로 쓸 것 같지도 않았다. 어쩌면. 아니 지극히 당연하게. 손수건도, 그림엽서도 버려질지도 모르지. 버려질 확률이 높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세탁해서 예쁜 포장지로 포장하고, 예뻐 보이는 엽서로 골랐다.

…주는 건 내 마음대로지만, 버리는 건 어디까지나 당신의 마음대로 하세요.

폴라리스는 언제나 많은 생각을 속으로 삼킨다. 그녀는 생긋 웃고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제 슬슬 헤어질 시간이지.

2-11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12 00:29 ID : siEJuH8xEn5Tc
릭은 잠시, 제 무릎 위에 올려진 작은 두 개의 물체가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나 폴라리스는 곧바로 그 의문에 대한 답을 내놓는다. '이게 뭡니까'하고 물어볼 새도 없이.

"......"

그는 대답 대신 잠시 침묵한다. 그림엽서라니. 당혹스러워서였을까? 설마, 이 철저하게 차갑고 계산적인 남자가. 역시나- 침묵을 이상하게 여겨 바라본 릭의 얼굴에는 그 어떤 표정도 남아있지 않다. 지나친 무표정, 심지어는 항상 짙고 있던 옅은 미소마저 사라진 채로. ...그래. 미소마저 사라졌다. 그러니 이걸 포커페이스라고 해야할지, 그 가면이 깨졌다고 말해야할지 모르겠다. 몇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자신의 무릎 위에 눈길을 주고 있다는 것이며, 그 차분한 갈색 눈동자에서는 여전히 그 어떤 생각도 읽히지 않는다는 사실.
침묵의 너머는 공허하다.

"고맙네요. 소중히 간직하죠."

그러나 남자의 침묵은 길지 않았다. 언제 무표정했냐는 양 싱긋 웃는 미소는 마치 폴라리스가 릭을 처음 만난 순간만큼이나 온화하다. 소중히 간직하죠, 하며 두개의 선물(하나는 원래 자신의 것을 돌려받은 것 뿐이지만, 어쨌든)을 집어들어 코트 안주머니에 넣는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일주일 뒤에 뵙죠', 웃으며 화답하기까지 한다.

소중히 간직하겠다. 그 말이 그의 진심인지- 아니면 단순히 선물을 준 상대의 호의를 눈앞에서 짓밟아버릴 수 없어 예의상 꺼낸 말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페르노의 사자는 상대의 진심을 짓밟는 데 양심의 가책 따위를 느낄만한 순수한 인간이 아니며, 폴리의 선물이 원래의 그에게는 아무런 가치를 가질 수 없는 법한 물건이라는 것. 언젠가는 시가의 불을 붙이기 위한 하나의 불쏘시개로 전락해버릴 가능성이 만무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의 릭은 그의 말대로 해돋이가 아스라이 그려진 작은 그림엽서를 코트 안에 소중하게 집어넣는다.

'모네의 해돋이.'

릭은 여전한 무표정으로 생각했다.

-

며칠 뒤, 릭의 집무실.

"...해서, 그레인 패밀리 쪽에서 완전히 발을 빼버렸다는 소식입니다."

완전히 흥분한 끝에 저도 모르게 서류더미를 릭의 책상에 내동댕이쳐버리고, 모가지가 날라갈까 불안해하던 아이작의 바로 그 시점이다.

'...망할,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거지? 화난 거 아니야? 설마, 고작 이거 가지고 내 목을 날리진 않겠지-'

오싹, 아이작은 릭의 왼손 근처에 놓여있는 총이 그대로 자신의 심장을 꿰뚫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 떨며 정신없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그는, 곧 상사의 책상 한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그림 엽서 한 장을 발견하게 된다.

'뭐야, 저게?'

말 그대로 그림 엽서다. 해질 무렵. 푸른 하늘을 물들이는 석양과, 저무는 바다가 이끌어내는 희미한 경계의 순간이 그려져 있는. 저런걸 좋아하셨나? 딱 필요한 것들만 놓인 깔끔하기 짝이 없는 책상 한켠, 업무와 영 상관이 없어보이는 엽서는 이질적이다.
마침내 릭이 '가봐'를 말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무사히 방 밖으로 빠져나온 리트리버는 생각한다.

'아무래도 집무실에 그림 한 점이라도 걸어드려야겠어.'

...역시. 그는 참으로 단순한 사내다.

39 폴리주 ◆lcVSk6vvyc (312715E+60)

2018-12-27 (거의 끝나감) 23:55:56

>>32 그래요. (쓰담)

폴리는 몰라도 제가요....? (동공지진) 보호 보호... 알렌을 붙였던 것을 말씀하시는 거죠? ㅋㅋㅋㅋㅋ... 어느 때였더라, 그때 릭주 묘사 보고 되게 철렁했었는데. (불안하기도 했었고) 그런데 그때 일상의 마무리를 릭이 스윗하게 해줘서 감동했었다구요... (앗) (근데 릭이 폴리한테 집착하는 모습을 그때의 제가 보고 싶어했었던 거 같아요!)

(´͈ ᵕ `͈ ) 이거는 폰으로 쓰긴 어려우니까 폰으로 옮기면 다른 이모티콘 쓰거나 안 쓸 거 같아요.... (폰으로 이모티콘 못 쓰겠다...) 울지 말아요. (토닥토닥) 안 나가길 잘하셨어요... 오늘 와... 진짜 대박 추웠거든요... 여름이나 겨울이나 했던 생각이 한반도 날씨 너무 하다 (ㅜㅜㅜㅜ) 였어요... 이렇게 추워서 앞으로 어떻게 살지.. 라는 생각은 오늘 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릭주 따뜻하게 입고 다니세요! 건강... 건강... 릭주... 건강하게 지내셨냐고 저한테 물으시면 안 돼요...ㅋㅋㅋㅋ큐ㅠㅠㅠㅠㅠ... 예스라고 대답을 못하거든요..◑◑ 릭주는 건강하게 지내셨나요?

40 세번째 일상(1) (6273871E+5)

2018-12-27 (거의 끝나감) 23:57:47

3-1
-일주일 뒤에 뵙죠.

그로부터 딱 일주일 되는 날, 아침. 폴라리스는 폰 여러 대를 앞에 두고 고민에 빠져있다. 폴라리스로 다닐 때 쓰는 폰을 쓸 것이냐, 추적이 불가능한 대포폰을 쓸 것이냐. 아니면 어느 가게에 들어가 그 가게 전화를 빌려 쓸 것이냐.... 한참을 고민하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것이다.

“아침부터 이게 뭐하는 짓이지...”

더 고민하면 위가 아파질 것 같다. 폴리는 샤워하면서 마음을 정비하기로 했다. 샤워실 문을 열어 샤워기 앞으로 직행했다. 입욕제를 푼 욕조에 몸을 푹 담그면, 거기서 나오고 싶지 않을 것 같아서. 장미, 백합, 라벤더... 폴리는 눈앞의 통들-보통 여자 욕실보다 통들의 개수가 더 많을 것이다. 욕실 자체도 넓었고-을 보다가 그중 세 개를 골라 집었다.

음, 오늘 샴푸는 체리블라썸. 바디워시랑 바디로션도 거기에 맞춰서 체리블라썸으로 할까...

*

몸과 머리카락에서 봄 내음이 났다. 현재 계절이 여름인데도. 폴리는 제 손목의 냄새를 킁킁 맡아보다가 오늘은 향수를 뿌리지 않기로 정했다. 체리블라썸으로 하길 잘 한 것 같다. 기분이 좋아지는 냄새라서.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하얀 목욕 가운을 입은 채 헤어드라이기-냉풍-로 머리를 말리며 폴라리스는 오늘 입고 갈 복장을 점검했다. 신발은 하얀 운동화로 정했으니까, 약간 캐주얼한 복장으로 하는 게 좋겠지.

폴리는 옷장에서 벚꽃색 5부 반팔 티와 청치마를 꺼내 갈아입고서 침대 위에 올려둔 핸드폰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아무 번호도 입력되지 않은, 추적 불가능한 대포폰이다. 밤의 도시 선량하고 평범한(?) 시민이면 대포폰 한두 개는 응당 가지고 있지 않겠어? 누가 지금 그녀의 생각을 읽으면 마시고 있던 음료수를 뿜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녀는 결코 알지 못했다.

폴리는 전에 받은 명함을 꺼내 번호를 확인한다. 폰에 릭의 개인 번호를 저장하고서 그 번호로 문자를 남겼다.

[안녕하세요, 폴라리스입니다. 오늘이 약속한 날짜네요.]

언제 어디서 보는 게 좋겠냐고 적으려다가 말았다. 어차피 10분 후에 전화를 걸 생각이었으니까. 문자를 보내고 정확히 십분. 폴라리스는 저장된 번호를 찾아 전화 버튼을 터치했다.

3-2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15 20:39 ID : sihIK4VXcwq36
일주일 뒤에 뵙죠. 청아한 목소리가 떠오른다. 그 약속을 그녀가 기억하든 기억하지 못하든-혹여나 그게 당장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빈말이었다고 해도 상관없다. 연락이 오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하면 그만이지. 습관처럼 반대쪽 손끝을 까딱거리는 채로, 오늘 치의 마지막 결제서류에 만년필로 길게 서명을 남기며 릭은 생각했다.

폴라리스로서는 안타깝게도 릭은 핸드폰을 그다지 중요시 여기는 타입의 사람은 아니었다. 일과 관련된 중요한 통화는 아이작을 위시한 다른 비서들의 손을 통해 전해올테니, 조그만 전자기기 하나를 멀리하는 것 따위의 성미가 한 조직을 이끄는 자로서 큰 결함이 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그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분 전 도착했을 폴라리스의 메시지를 보지 못했다. 수신음과 함께 현재 그의 액정에 띄워진 것은 그에게 있어 완전히 낯선 번호였다.

"발신 조회해볼까요?"

낯선 번호로부터의 전화. 곁에 선 아이작이 물었다. 평소같았다면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릭은 그러하지 않았다. 그는 비상하게 감이 좋은 남자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의 동물적인 감이 때때로 빛을 발할 때면, 반쯤 의심스러워하던 표정의 그의 '아버지'조차 으레 호오, 작은 감탄사를 중얼거리곤 했다. 릭은 손을 들어 아이작을 제지했다.

"네, 릭입니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눌러 가볍게 대답했다.

3-3
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8-15 20:53 ID : siI6IlV/nJwwg
폴라리스는 릭에게 번호를 넘긴 적이 없다. 그저 그에게 명함을 받았을 뿐. 뭐, 인페르노를 이끄는 그라면 어떤 특정 바의 바텐더의 번호를 찾아내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그러니까 폴리가 한 고민은 일종의 자각 없는 바보짓 인 거다.

"안녕하세요, 폴라리스예요."

폴라리스는 그 약속을 잊은 적이 없다. 전화기를 타고 넘어오는 매끄러운 목소리. ...전화 목소리는 이런 느낌이구나. 아니, 업무할 때 목소리가 이런 느낌이려나. 사람은 전화 목소리와 평소 말하는 목소리가 종종 다르기도 하다. 조금은 다른듯도 싶지만, 조금 바뀐 정도로 그의 목소리를 못 알아 들을 바보는 아니었다.

"약속한 날짜라서 전화 드렸어요."

그리고 폴리는 지금 통화 목소리랑 평소에 말하는 목소리에 큰 차이를 두지 않았다. 통화 너머의 사람에게 말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눈 앞에 사람을 두고 말하는 것처럼. 평이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듣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청아함이 있었다.

"오늘 언제, 어디서 보는 게 좋을까요?"

말하고 나서, 문득 떠오른 게 있다. 그야 나는 오늘 바쁜 날이 아니지만. 그는 바쁜 날일 수도 있잖아?

"아, 오늘 바쁘시면. 나중에. 다른 때에 뵈어도 좋아요. 제가 시간에 맞춰볼 테니까요."

3-4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15 21:08 ID : sihIK4VXcwq36
굳이 이름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릭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어렵지 않게 떠올렸을 것이다. 비상한 기억력, 그러나 꼭 그 때문이 아니더라도 폴라리스 특유의 청아한 목소리를 잊는 건 어려운 일일 테지. 스피커 너머로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순간 그는 까딱거리던 담배를 자연스럽게 책상 위에 지져 껐다. 바로 옆에 선 아이작이 '그게 대체 얼마짜린데..!'하는 표정으로 사정없이 눈동자를 뒤흔든 것은 그의 안중 밖의 일이었다.
오늘 언제, 어디서 보는 게 좋을까요. 그 말에 릭은 고개를 내려 책상 위에 놓인 달력을 보았다. 여전히 그 한켠에 놓여있는 자그마한 모네의 해돋이가 시선을 잡아끈다.

"오늘... 바(bar)에 나가는 날은 아닐테고."

다른 때에 뵈어도 좋아요, 하는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가볍게 넘어간다. 바에 나가는 날은 아닐테고. 저음의 목소리가 별 뜻 없이 중얼거렸다.

"그쪽으로 가죠. 지금 집에 있나요?"

내 코트 가져와, 휴대폰에서 살짝 얼굴을 뗀 채로 릭은 아이작에게 손짓했다.

3-5
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8-15 21:21 ID : siI6IlV/nJwwg
....내가 바에 근무한 걸 알려준 적 있던가?

기억을 뒤졌지만 없는 일이었다. 눈 앞에 사람이 없어서 표정관리를 할 필요가 없어진 폴리의 얼굴에 당황이 떠올랐다. 눈동자는 흡사 지진난 것처럼 떨렸다.

내 뒷조사 끝마친 건가. 그러면 당연히 내 핸드폰 번호도 알았을테고. 위치 추적 불가 대포폰으로 건 건 엄청 바보짓이었잖아?

별 뜻 없는 중얼거림은 아마 혼잣말이었을 것이다. 생각하며 폴라리스는 열심히 침착함을 찾아왔다. 나는 지금 세상에서 제일 침착한 사람이다.

"....네, 집에 있어요."

약간의 침묵 후, 집에 있어요. 라는 말은 아까와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약간의 침묵을 제외하고서 말이다.

"제 집까지 찾아 오신다는 말은 아니실테고, 제 집 근처에서 보자고 하시는 거죠?"

아뇨, 당신 집에서 보죠. 라고 만약에 릭이 말한다면 또 한 차례 태풍이 폴리의 눈동자를 거세게 흔들 것이다. 물론 수화기 너머의 릭의 그 모습을 못 보겠지만.

3-6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15 21:40 ID : sihIK4VXcwq36
"전화할테니까 15분 뒤에 나와요."

아이작이 받쳐주는 코트에 능숙하게 팔을 꿰었다. 코트의 깃을 툭툭 털어내며, 릭은 열리는 문 사이로 발을 옮겼다. 지금 집에 있어요. 그 대답을 듣기 전까지 이어진 침묵과 대조적으로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에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다. 지배자 특유의 결단력, 혹은 오만함일까.

"당신 편한대로 해요."

집에서 보든, 집 근처에서 보든. 어차피 장소 따위는 아무 짝에도 상관이 없다. 여유로운 말투, 그러나 방금까지의 여유가 신기루처럼 사라지듯 릭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방금 코트에서 꺼내 손목에 뿌린 향수를 목 뒤에 문지른다. 열 몇살부터 시작된 오랜 습관이다.
릭은 타고 있는 세단의 엑셀을 천천히 밟았다. 그와 지독하게 어울리는 우아한 흰색의 차체가 도로 위를 부드럽게 운행한다. 릭은 시간약속에 정확하다. 그래도 이렇게 칼같을 정도는 아니었는데-우연히도, 그가 말한대로, 흰 세단은 정확히 15분 뒤 목표하던 장소 앞에 멈춰섰다.

피곤하군. 내내 서류만 들여다보던 눈이 짧은 운전을 마치자 조금 침침한 것도 같다. 높은 콧대를 손끝으로 압박하며 릭은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3-7

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8-15 21:59 ID : siI6IlV/nJwwg
'아니. 지금 이 사람이...'

전화할테니 15분 뒤에 나오란 말에 생각 속에 절로 위의 문장이 떠올랐다. 여자에게는 준비 시간이라는 게 있는데. 15분 뒤에 나오라니, 이 사람 틀림 없이 남자 준비 시간을 기준으로 말한 걸 거야. 아니면 여자의 준비 시간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거나. 혹은 고려하지 않거나... 그것도 아니면. 사람에게 준비 시간이라는 것을 많이 안 주는 사람이거나.

물론 외출 준비를 거의 다 끝낸 폴리에게는 15분 후, 라는 시간이 그리 촉박한 시간은 아니었다.

"그럼 집 근처 카페에서 봐요. 15분 후에. '카페 에덴'에서요."

라고 말한 목소리를 릭에게 닿지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말하기 전에 전화가 끊겼거든.

....편한대로 하라는 말이 진심인 건가... 아련과 아연 사이에서 폴라리스는 약간의 허망함마저 느꼈다. 그 허망한 와중에 착실히 렌즈를 끼고 화장을 점검하고 -썬크림은 이미 발랐으니 코랄색 틴트를 바르는 것 정도였다- 소중히 모셔둔 물건을 찾아왔다. 릭이 선물해준 취향의 하얀 운동화를 상자에서 꺼내 현관에 두었다. 이런 저런 물건들이 담긴 회색 가방을 매고 운동화를 신고 폴리 본인이 신은 오피스텔 1층으로 내려온 것은 릭의 전화로부터 10분 후. 엘리베이터 바로 앞보다는 그래도 현관으로 나가 기다리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폴리는 우편물들이 모이는 철제 우편함 앞. 투명한 유리 문으로 닫힌 앞을 응시했다. 번호를 누르고 유리문을 빠져나가 잘 보일 장소에 서서 시계를 확인했다.

*

....엄청 정확해.

폴리는 차에서 내리는 릭을 약간 동그래진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그리고 릭과 마주치면 빙긋, 상냥하고 친절한 바텐더 특유의 미소를 피울 것이다.

3-8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15 22:13 ID : sihIK4VXcwq36
"나와 있었네요."

나오라고 전화할 참이었는데. 릭은 싱긋 웃었다. 역시나, 주소를 알려주지도 않은 집앞으로 정확히 찾아오는 것 정도로는 놀라지도 않는다.
릭은 며칠 전 아이작으로부터 건네받았던 폴라리스의 서류를 떠올렸다. 이름 폴라리스, 나이 22세. 간단한 사진 몇 장, 사는 곳은 어디, 근무처는 어디. 그리고는 그 아래 적힌 별 영양가 없는 행적 몇 줄이 전부였다. ...이게 끝이야? 수 분만에 그 짧은 문서를 훑어보고,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오른쪽에 시립해있는 아이작을 올려보았었다. 아이작은 조금은 긴장한 표정으로 대답했었지.

'그..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아무리 찾아도 근 1년 사이의 정보 외에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 조사해볼까요. 조심스레 묻는 목소리에 릭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그리고 며칠 후, 울상이 되어 걸어오는 그를 보며 릭은 그것 또한 의미없는 시도였음을 깨달았다.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일단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폴라리스는-심지어 그녀의 성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다-그냥 어느날 갑자기, 홀연히, 그 솜니움이라는 바의 바텐더로 나타났다.

"잘 어울려요."

다정하게 웃는다. 운동화 말이야. 그 흰 끝에 잠시 눈길을 주며, 릭은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3-9
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8-15 22:29 ID : siI6IlV/nJwwg
나와서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나오라고 전화할 참이었다는 말에는 그저 연한 미소로만 답했다. 주소를 알려주지도 않은 집 앞으로 정확히 찾아오는 것에 놀라지 않았냐고? 아까 바에 나가는 날이 아니고, 라는 중얼거림과 집에 있나요? 라는 물음에 이미 오늘 분의 놀랄 것은 다 놀랐으니까. ....아니다, 이 남자랑 있으면 또 놀랄 일이 생기겠지. 폴리는 제 생각을 정정했다. 바에 나가는 날이 아니고~ 라는 말에서 당황히 끝난 후 -아직 릭과 만나기 전- 릭이 이미 제 뒷조사를 했음을 미루어 짐작했다. 그리고 '폴라리스'로 뒷조사를 해봤자 그가 1년 분의 정보밖에 못 얻으리라는 것도.

...굳이 내 과거를 캐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고마워요."

잘 어울린다는 칭찬에 폴라리스는 일순 활짝 웃었다. 그 표정이 망울을 터뜨리는 벚꽃을 닮아있었다. 폴라리스는 운동화 흰 끝에 그가 시선을 잠시 준 것을 알았다. 그 어울린다는 말이 지금 복장이나 틴트색이 아니라. 운동화가 어울려요, 라고 말한 것도 대충 때려 맞췄다. 천천히 다가오는 릭에 맞추어서 폴리도 한 발짝, 한 발짝 가벼운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릭도, 오늘 근사해요."

수없이 들었을 말이겠지. 덤덤하게 생각하면서도 칭찬에 답하여 상냥한 미소로 답칭찬을 건네었다. 누군가 지나가는 행인이 두 사람의 대화와 표정을 보면 평범한 남녀의 데이트인줄 착각할지도 모르겠다.

3-10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15 22:46 ID : sihIK4VXcwq36
외모나, 패션 따위의 것에 대한 칭찬은 귀에 물릴 정도로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당신의 다정한 눈, 단단한 어깨와 긴 손가락,으로 시작하는 별 희한한 것들에 빚댄 찬사도 가벼이 웃어넘길 줄 알게 되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뒤돌아서서 지겹다고 생각했더랬지.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지금, 아무런 미사여구도 없이 짤막하게 건넨 근사해요,가 신선하다고 생각되는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특별히 꾸며입지도 않은 날-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치고 들어왔기 때문인가. 가까이 다가온 폴라리스에게 에스코트하듯 손을 내밀며, 친절하게 웃어보이는 너머로 릭은 조용히 생각했다.

"고민해 봤어요."

그리고, 갑자기 별 뜬끔없는 맥락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내가 뭘 원하는지."

아.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오늘의 목적에 맞는 주제인가. 내가 뭘 원하고 있는지 나도 모르겠다, 일주일 전 자기 자신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낮게 되뇌여진다. 릭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갈까요."

또다시 옮겨간 화제. 폴라리스의 눈을 응시했다. 묻는다.

3-11
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8-15 23:06 ID : siI6IlV/nJwwg
폴라리스는 운동화가 어울린다는 칭찬이 순수하게 기뻤다. 기실 눈동자와 목소리를 칭찬-특히나 눈동자 칭찬에는 싫거나, 전혀 안 기쁘거나, 순수하게 기뻐하기만 할 수가 없다- 받는 것보다도. 취향의 물건이 어울린다는 건 기쁜 일이라서 활짝 웃었다. 릭이 근사하다는 건 지극히 사실이었으므로 답칭찬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건넬 수 있었다.

폴리는 에스코트 하듯이 내밀어진 손에 짧게 고민했다. 그리고 짐짓 도도하게 손을 올리고 -표정은 안 도도하고 손짓만 도도했다- 그의 친절한 웃음에 따라서 미소를 지어보였다.

무엇을요?

라고 물을 필요없이 릭의 말이 이어졌다. 폴리는 그 뜬금없는 맥락에 놀라지도 않고 고개만 살짝 옆으로 기울였을 뿐이다. 그렇지만 심장이 일순 철렁했다. .....그 원하는 게 무얼까. 궁금하기는 한데. 궁금해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도 들고. 그냥 맘껏 궁금해 하고 싶기도 하고. 이것저것 예상 선택지를 머릿 속에 띄워보았지만. 이 남자는 또다시 제 예상에 없는 선택지를 고를 것도 같았다.

그렇지만 안 들을 수는 없는 이야기지. 피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릭이 제게 무엇을 원하는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과연 내가 그것을 당신에게 줄 수 있을지도 궁금하고요. 폴라리스는 응시해오는 릭의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오늘은 선글라스도 안 껴서. 아이스블루 특유의 청량감이 느껴지는 눈동자로. 폴리의 눈은 호수처럼 그대로 그의 모습을 비추었다.

"이 근처 카페로 가요. 카페 이름은 에덴이예요."

제가 안내할게요. 가볍게 답하고 폴라리스는 릭의 손을 잡은 그대로 방향을 일러주듯 몸을 틀었다. 그리고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느긋한 걸음걸이로 카페 에덴을 향했다. 폴라리스는 제가 어떤 속도로 걷든 남자가 쉬이 따라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일단은 느긋하게 걸었다. 내가 조금 앞서 걸어야 방향을 알겠지만, 이러는 편이 아주 조금이라도 발걸음을 맞추기에 어렵지 않겠지. ....너무 느린가?

3-12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15 23:37 ID : sihIK4VXcwq36
저와 족히 8인치는 차이 나는 사람이다.

'...느려.'

그 걸음에 맞추느라, 금방이라도 스텝이 꼬여버릴것만 같다고. 릭은 제 눈높이에도 미치지 못하는 여자의 손을 잡고 걸으며 생각했다. 이제보니 보폭 차이가 문제가 아니라 원래 폴라리스의 걸음 자체가 느린 것같다. 처음 만났을 때도 이랬었나. 이러니까 그 사람 많은 백화점에서도 넘어지지.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상대의 걸음이 불편할정도로 느리다는 것을 입밖으로 내지 않았다. 둘 사이에 자리한 침묵을 위로하듯, 달려드는 바람은 은은한 체리블라썸 향을 실어 분다. 향수인가. 혹은 샴푸 냄새. 함께 걷고 있는 것이 처음 만나는 사람이었다면 좋은 향이네요, 어울려요. 다정한 목소리로 칭찬이라도 건네었을 것이다. 그러나 릭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그렇게 걸었다.

"사실 당신에게 바라는 건 없어요."

툭 던진다.
카페 에덴. 릭은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창가 자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홀 안쪽에 위치한 2인석, 상대 몫의 의자를 빼주고 자신은 그 건너편에 앉는다. 잠시의 침묵 후에서야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내가 뭘 원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

...그러나 폴라리스의 긴장이 무색하게 릭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영 뜻밖이다. 무얼 원하는지 자기 자신도 모른다니, 그러면 대체 그 외에 세상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당신 편한대로 해요."

가볍게 농담은 던지더라도, 쓸데없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 남자다. 진심이다. 가라앉아있는 헤이즐색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보상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일어나도 할 말은 없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평소처럼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릭은 싱긋 웃었다.

3-13
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8-15 23:58 ID : siI6IlV/nJwwg
카페 에덴. 홀 안쪽에 위치한 2인석, 릭이 빼준 의자에 앉아서. 툭 던진 그의 말에 눈을 땡그랗게 뜨는 폴리가 있다. 뒤에서 툭 치면 눈알이 굴러나올 것 같다.

"네?"

고민했다면서요.... 크게 뜨인 눈이 깜박거리다가 깜박임에 천천히. 평범하게 돌아온다. 폴리는 눈을 깜박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정리 하려고 했다.

"....왜 모르는데요? 바라는 게 있기는 한데, 그걸 모르겠는 건가요. 아니면 정말로 제게 바라는 게 조금도 없는 건가요?"

약간은 긴장이 풀려서, 허허 실없이 웃었다가 그친다. 하는 물음도 긴장이 없었다. 그리고 긴장 없는 물음을 뱉고 나서야, 좀 더 생각하고 입을 열 것 그랬나. 하는 생각이 아련하게 든 것이다.

"제가 편한 거..."

리미티드 명품을 망쳐놓고, 그냥 입 씻고 넘어가기는 그렇다. 똑같은 명품을 구해다줄 수는 없겠지만. 폴리는 잠시 시선을 내리깔고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진지한 생각에 다소 깊고 짙어진 색의 눈동자가 생각이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원래의 아이스 블루로 되돌아 왔다.

"제가 당신 옷을 골라서 사드려도 되나요? 물론 릭이 산 것처럼 리미티드 명품을 사줄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음..."

백화점 정장이라면 그 매장에서 제일 비싼 것도 맞춰줄 수 있기는 한데, 정장이 많을 것 같은 사람에게 정장을 또 선물하기는 좀 그렇지.

"캐쥬얼룩?"

이건 좀 아닌가? 말하고서는 갸웃 고개를 기울였다. 캐쥬얼도 사려고 들면 저 남자는 매장 몇 개로 사들일텐데... 폴리는 머쓱하게 볼을 긁적였다.

"기실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은, 당신에게 의미 없을 것 같기도 해요."

그리고 또 진지하게 고민에 잠기는 것이다. 돈으로 살 수 없으면서도, 명품의 가치가 있는 것.

"노래 듣는 거 좋아하세요?"

그리고선 뜬금없는 물음을 제법 진지하게 던지는 것이다.

3-14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16 00:26 ID : siOQd/EtAHZOM
"내 힘으로 가질 수 없는 게 없어서."

아주 당연한 것을 말하듯이 태연한 목소리. 몇 초간의 침묵 끝에 그는 그렇게 대답했다.

"재수없습니까?"

그리고는 가볍게 묻는다. 내가 원하는 건 전부 가질 수 있으니 더 필요한 것이 없다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만할 소리를 해놓고는 농담식으로 물어보는 것이다. 정말 재수없게 들린다면 어쩔 수 없겠지. 손등에 반쯤 얼굴을 괸 채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 상태 그대로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다. 졸린 것은 아니고, 폴라리스가 고민하는 것을 잠시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옷을 골라서 사드려도 되냐. 뭐든, 당신이 편한대로. 그는 긍정의 의미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어진 폴라리스의 말에 릭은 진심이냐, 저도 모르게 반문할 뻔했다. 캐쥬얼.

"...안 입어요, 그런 건."

자기가 말하고도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폴라리스가 고개를 갸웃, 기울인다. 하기사 후드티 따위를 입고 있는 것은 스스로도 상상이 가지 않는다. 릭은 피식 웃었다.
그러면, 돈으로 살 수 없는 무형의 물건- 노래. 아니. 릭은 사실 세상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가수가 있다면, 그의 노래도, 초청해 불러줄 것을 요구하면 그만이다. 노래를 좋아하냐니. 누군가의 것을 추천해주기라도 할 모양이지. 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해요."

결정됐나. 테이블에서 손을 떼고 천천히 허리를 곧추세운다.

3-15
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8-16 18:21 ID : sitVb0KPspU+E
“아뇨, 그다지요.”

재수 없냐는 물음에 평범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가볍게 답하며 살랑살랑 손을 내젓는다. 그 ‘힘’이 돈이라면 폴라리스도 제법 재수 없는 부류(....)에 들어가는 사람이고, 그 ‘힘’이 권력이라면 뭐. …본인-릭-이 느낀 사실만을 말한 걸 테니까. 본인이 느낀 사실을 말하는데 그걸 재수 없어하진 않는다. 어이없어 할 수는 있겠지만. 어이없는 이야기도 아니지 않아?

폴라리스는 힘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이 꽤 많다는 것을 안다. 어쩌면 거의 대부분의 것을 손에 넣을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언제나 ‘힘’이 있다고 해서 전부는 얻을 수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그리고 폴리는 그가 사실을 모르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세상을 떠난 자와의 시간, 죽음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영혼. 그리고 돈과 권력으로도 결코 손에 넣을 수 없을 것들을 떠올리며, 폴라리스는 궁금해진 것을 문득 묻는다.

“하지만, 릭.”

가벼운 질문이었다.

“당신의 힘으로 가질 수 없는 게 나타나면 어떻게 할 건가요?”

…가볍게 물을 질문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이미 입에서 튀어나간 걸 어쩌겠나. 물음을 던지고서 폴라리스는 아주 옅게 미소했다.

“입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걸요?”

…설마 태어나서 한 번도 편한 복장-캐쥬얼-을 안 입어 본 거 아니죠? 라고는 차마 물을 수 없었던 폴라리스는 그 말 대신에 다른 말을 무던하게 꺼냈다. 그리고 좋아해요, 라고 말한 그의 말을 듣고 나서 가게를 잠시 둘러보는 것이다. 다행이 손님이 거의 없다. 사장님과 종업원 두 명, 그리고 과제하러 카페에 온 것 같은 대학생이 한 명. 카페가 넓은 데 비해 손님이 없는 것은 이 카페가 활발해지는 시간대가 따로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라이브가 있는 날의 저녁이 아니었다. 폴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장에게로 갔다. 그리고 기타 좀 빌려주세요, 라고 자연스레 묻는다. 폴리만 자연스러웠고, 사장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뜬다. 기타 칠 줄 알았어? 라는 사장의 물음에 폴리는 글쎄요? 라는 대답으로 의문을 풀어주지 않고 빙긋 웃었을 따름이다.

*

Fly me to the moon
(나를 달에 데려가 주세요)
And let me play among the stars
(별들 사이에서 노닐 수 있도록)
Let me see what spring is like on Jupiter and Mars…
(목성과 화성의 봄이 어떤 모습인지 볼 수 있도록…)

<중략>

…In other words, please be true
(…말하자면, 진실해 주세요)
In other words, I love you
(말하자면, 사랑해요)

*

본인이 치는 기타 선율에 맞추어, 폴라리스는 힘을 빼고 노래를 불렀다. 노래 부르는 내내 릭을 바라보고 있었냐고? 아니. 폴라리스는 아주 살짝 고개를 내리고 시선을 내리깐 후 그저 편하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연주와 노래에 집중했을 뿐이다. 노래에 너무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폴라리스는 본인이 힘준 상태에서 노래에 취해 부르면 말할 때보다 음색이 약간 변하며 더 풍부하고 짙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렌즈 낀 눈동자 색이 감정이 진해질 때면 더 짙고 달콤한 색깔로 변하는 것처럼.

In other words, I love you.

담백한 끝맺음 후, 폴라리스는 약간 멍하니 눈을 꿈벅거렸다. 입술을 얌전히 다물고 눈만 꿈벅거리고 있다가, 문득 잠에서 깬 사람처럼. 고개를 들어 릭과 시선이 마주친다.

지금은 온전히 당신만을 위한 연주였는데. 마음에 들었어요?

그렇게 묻지 않고 옅게 미소만을 지었다. 내 노래 비싸요. 영광인줄 아세요. 라는 진담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농담 역시 굳이 밖으로 꺼내지 않고 생글거렸다.

3-16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16 19:11 ID : siOQd/EtAHZOM
당신의 힘으로 가질 수 없는 것.

"그런건 없어요."

릭은 싱긋 웃었다. 내 힘으로 가질 수 없는 것이 없다, 마지막 어절에 강한 악센트가 실린다. 어쩌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만큼의 프라이드. 좌절해본 적 없는 상류층 특유의 오만, 역설적이게도 밤의 세계 가장 어두운 곳에 웅크린 젊은 사자에게서는 그 찬란한 향이 난다. 미소짓는 폴라리스를 보는 헤이즐색 눈이 다정하게 빛난다. 언젠가 당신의 그 높은 자존심이 꺾일 날이 올까. 글쎄, 모를 일이지. 사자는 생각했다.

-

입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걸요. 그 발랄한 목소리에는 가벼운 침묵으로 응수했다.

-

릭은 폴라리스가 기타를 빌리고 그것을 메고 하는 것을 다리를 꼬고 앉은 채로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제보니 노래를 추천해주는 게아니라, 제 목소리로 직접 불러줄 모양이었나보다. 굳은살도 없어 뵈는 가는 손가락으로 음을 조율하더니 건너편에 앉는다. 시작하는건가. 편하게 해요. 희미하게 웃으며 자세를 고쳐 앉는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의 노래에 큰 기대는 없었다. 애초에 목소리보다 악기를 더 선호할 뿐더러, 작은 칵테일바 바텐더의 노래에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럼에도 부드럽게 미소짓는다. 학예회에 온 부모의 기분인지도. 기타의 부드러운 선율이 귓가를 스쳐지나간다.

Fly me to the moon
(나를 달에 데려가 주세요)
And let me play among the stars
(별들 사이에서 노닐 수 있도록)
Let me see what spring is like on Jupiter and Mars…
(목성과 화성의 봄이 어떤 모습인지 볼 수 있도록…)

be true.
진실해 주세요.
love you.
사랑해요.

사자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문득- 예전에 읽었던 긴 소설의 시놉시스가 떠오른 것은 왜였을까. 이탈리아의 마피아와, 그의 아름다운 연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랑을 모르던 냉혈한 킬러가 그 연인이 될 발레리나의 우아한 백조에 첫눈에 빠져드는. 뻔하고 진부하고 스토리라인. 릭은 그 소설의 한 챕터도 끝마치지 못하고 책장을 덮었었다.
뻔하고 진부해.. 그는 중얼거렸다.

연주가 끝나자마자 눈을 들어 폴라리스와 시선을 마주친다. 차가운 얼굴의 사자는 무엇을 생각하는가. 연주 도중에도 끝난 후에도 표정 없는 얼굴은 드물게 공허하다. 그는 그런 사내다. 수 시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당신은, 웃음 사이 문득 가라앉은 차가운 무표정을 본 순간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무엇을 떠올리는가. 상대가 미소지음에도 그는 티끌만큼도 입꼬리를 올리지 않았다. 마침내 천천히 입을 연다.

"부탁할 게 있어요."

맥락에 맞지 않는 말. 침묵 끝에 말했다기에는 흡사 생각을 거치지 않고 바로 뱉은 듯한 어투. 그러나 진지하게, 그는 말을 이었다.

"같이 가줬으면 하는 곳이 있는데."

부탁하는 사람의 입장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당당하다. 오만해. 당신은 문득 생각한다.

3-17
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8-16 19:54 ID : sitVb0KPspU+E
정말요?

되묻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눈앞의 사자는 좌절을 모르는 운이 좋은 사람인가, 아니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인건가. 단 한 번도 좌절을 겪어보지 않고,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폴라리스는 그것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는. 진심을 감추는 데 지나치게 익숙한. 혹은 익숙해진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당신의 진심을 알고 싶어요, 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 줄까? 궁금해 하면서도 폴라리스는 아직은 그것을 묻지 않는다.

*

폴라리스는 제 연주에 집중하고 있느라고, 뻔하고 진부해. 라는 릭의 중얼거림은 듣지 못했다.
만약에 그 중얼거림을 들었다면, 제 노래가 뻔하고 진부하다는 거예요. 아니면 제 연주가 뻔하고 진부하다는 거예요? 어리둥절해 하는 얼굴로 물었을지도 모르지.

폴라리스는 표정 없는 그의 얼굴을, 공허를 가만히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았다. 몇 번은 본 모습이다. 폴라리스는 그 공허의 가장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는가, 혹은 그 공허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가 궁금했다. 그녀는 호기심과 탐구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그것들을 참고 있는 사람일 뿐이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싶다고 생각하는. 릭의 관점에서는 다소 많이 특이한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릭은 그것을 아직 깨닫고 있지 못하겠지만.

무엇인데요? 바로 묻지 않았다. 뒤이어 그가 목적이 무언지 답해줄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가 바라는 것은 어딘가로의 동행. 부탁이라고 말하고 명령조인 말은 아니었지만. 당연히 같이 가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 어딘가 오만하고 당당한 부탁이다.

“어디를요?”

그래, 이게 ‘지금의 내’가 아는 ‘지금의 당신’답지. 비굴한 태도로 부탁하는 것보다 오만하게 부탁하는 게 더 어울리는 사람. 폴라리스는 태연하게 물었다.

“장소 정도는 말해주셔야죠.”

상냥한 투의 말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오연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위에 번지듯이 그려진다. 상냥한 목소리랑 오연한 미소가 안 어울릴 것 같으면서도 아주 자연스레 어울리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장소를 물었을 뿐이지. 같이 가겠다고 답해주지는 않았다. 아직은.

아직은, 말이다.

아마 이후의 릭이 하는 말과 태도에 따라서. 그녀는 그에게 꽤 다른 답과 꽤 다른 반응을 보여줄 것이다.

41 세번째 일상(2) (4850063E+5)

2018-12-28 (불탄다..!) 00:00:39

3-18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16 20:25 ID : siOQd/EtAHZOM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있던 남자는 되묻는 말에 조금 당황했다.
당연히 제가 하자는대로 따라줄거라고 생각했나. 그가 '누구'인지를 알면서도 마음처럼 휘둘려주지 않는 사람은 좀처럼 드물어서, 눈앞의 사람이 그가 알던 연약한 여자들마냥 만만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생소한 대답에 또다시 당황하고 마는 것이다. 장소 정도는 말해달라니. 나를 상대로 그렇게 당당한 표정은 반칙이다. 배드민턴 시합에서 진 어린애마냥 머릿속에서 우물쭈물댄다.
얼마의 침묵이 지났나. 울렁이는 마음 속과 대비되는 태연한 표정으로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짧은 정적을 폴라리스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모르겠다. 겉으로보이는 그는 언제나처럼 완연한 무표정이었다. 다 자란 근사한 성인 남성의 탈을 쓰고 있다.

"도시 끄트머리의 작은 언덕."

작은 언덕. 반쯤 감긴 눈으로 읊조리듯 이야기한다.

"거기서 한번만 더 노래를 불러줬으면 좋겠어요."

릭은 시선을 들어 폴라리스를 보았다. 왜 하필 거기냐. 그곳에 뭐라도 있냐. 물어도, 그는 아마 더 이상 대답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럼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고 안전하게 집까지 모셔드리죠."

대신 그는 진실만을 약속한다. 문득 폴라리스를 처음 만난 날, 그 백화점 주차장이 떠올랐다. 내 차를 타고 가거나, 내가 준 돈으로 택시를 타거나. 웃기지도 않는 협박. 릭은 그날의 제가 꽤나 유치한 모습이었다고 생각했다.

3-19
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8-16 21:10 ID : sitVb0KPspU+E
…왜 당황한 것처럼 보이지. 눈의 착각인가. 폴라리스의 눈이 아닌, 그녀의 직감이 겉으로 보이지 않는 릭의 당황을 읽어냈다. 물론 폴라리스는 독심술사-상대에 따라서 한없이 그에 가까울 때는 있겠지만-는 아니기 때문에, 릭이 지금 머릿속으로 배드민턴 시합에 진 어린애처럼 우물쭈물 하는 것은 몰랐다.

…어쩐지 내가 지금 굉장히 귀여운 것을 못 보고 지나치는 것 같은데. 이것은 마음의 착각인가. 직감도 때로 쓸모가 없을 때가 있구나, 생각하며 그다지 길지 않은 정적의 시간동안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심지어 폴라리스는 현재 제가 그를 빤히 본다는 자각마저 없었다.

-도시 끄트머리의 작은 언덕.

폴라리스는 눈을 두어번 깜박였다. 빤한 시선이 물끄럼 정도로 바뀌었다.

-거기서 한번만 더 노래를 불러줬으면 좋겠어요.

~줬으면 좋겠어요. 약간은 소망처럼도 들리는 말에는, 폴라리스의 얼굴에는 아까의 오연한 미소 대신에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진다. 릭이 시선을 들어 본 그녀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미소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정도면 못 들어줄 것도 없다. 폴라리스는 릭이 제게 해준 사소한 배려들을 떠올렸다. 아까의 부탁도.

처음에 오만하게 꺼낸 것치고 -그래서 그것이 폴라리스의 경계심을 한껏 높였고- 지금은 귀엽기까지 한 부탁으로-그래서 이것이 폴라리스의 경계심을 한껏 낮췄다-변한 것이 퍽 마음에 들었다.

“좋아요.”

짧고도 부드러운 답을 하고서 폴라리스는 기타를 맨 채 사장에게로 걸어갔다. 그리고 몇 마디 말을 하더니 아예 기타 케이스(.....)까지 얻어내서 기타를 케이스 안에 넣었다. 그리고 얼마간의 돈을 사장에게로 지불하고 릭에게 돌아온 것을 보면, 아예 기타를 산 모양이었다. 악기점에 들러서 살까 싶었지만. 그러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까 여기서 사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물론 정가보다 저렴하게 구입했다. 중고 악기기도 하고, 사장님이 미인에 약했기 때문에.

“갈까요, 그럼? 당신이 아는 작은 언덕으로요.”

어떤 길거리 기타리스트처럼. 기타 케이스를 맨 그녀가 의자에 앉은 릭을 내려다보며 옅게 웃었다.

3-20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16 21:47 ID : siOQd/EtAHZOM
아무렇지 않게 뒤돌아 서 메고 있는 기타의 값을 지불한다. 잠시 빌리는가 싶더니, 아예 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태연하게 지폐를 내미는 손에 적잖이 당황했나. 아. 자기도 모르게 낸 소리를 낸 것이 퍽 바보같다고 느꼈다.
나는 보면 볼수록 당신을 더 모르겠다. 그저 그런 연못인가 했더니, 호수같은 외양 너머에 펼쳐진 끝없는 바다가 드넓다. 젊은 사자는 부드러운 미소 너머로 생각한다.

방금 폴라리스의 소유물이 된 기타를 뒷자리에 적당히 밀어넣은 채로. 제 주인 외에 또 한 명을 태운 흰 세단은 아스팔트 위를 천천히 달렸다. 의식하지 못한 채 담배를 꺼내물었다 바로 창문을 열어 도로 위로 내던진 것이 두 차례나 반복된 것으로 보아, 핸들을 잡은 동안 담배를 태우는 것은 아마도 그의 오랜 습관이었리라. 어쨌든 세번째로 꺼낸 담배가 뒤따르던 차의 바퀴에 밟혀 납작해진 후에야 릭은 비로소 그 멍청한 행동을 그만두었다. 대신 그는 양손으로 핸들을 잡고-의식적이든 아니든-좀 더 빨리 엑셀을 밟는 편을 택했다. 단단한 구두 바닥에 발판이 눌렸다.
열린 창 안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결좋은 금발이 부드럽게 볼을 스친다. 나쁘지 않은 기분. 생각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저녁무렵이 되어 하나둘씩 켜지던 네온사인들이 점차 끝나간다 싶더니 어느순간 풍경이 바뀌어 보이는 것은 밀밭이 인상적인 야트막한 언덕이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창밖으로 보이는 푸른 하늘 언저리에는 붉은 석양이 타고있다. 고급스러운 세단과는 어울리지 않는 장소. 릭은 마땅히 주차할 곳도 없는 그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시동을 껐다.

"내려요."

아무 말도 없이 차에서 내리더니 폴라리스가 있는 조수석 문을 벌컥 열고 말한다. 내려요. 대답도 듣지 않고 다시 등을 돌린다. 그녀가 차 밖으로 발을 내딛는 동안, 남자는 뒷자리에 실어둔 오래된 기타를 내리었다.

3-21
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8-16 23:00 ID : sitVb0KPspU+E
…담배 피운다. 그것도 생각보다 많이 피운다. 폴라리스는 창밖의 풍경을 보며 담배에 정확히는 담배빵-물론 평범한 담배빵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는 어떤 흉터-에 대한 생각을 지우려고 노력했다. 그때와는 다른 냄새잖아, 그러니까 나는 괜찮아. 담배라고 생각 안 하고 향수라고 생각하면 돼지. 애써 어둑해지려는 생각을 밝은 쪽으로 돌리며 폴리는 머릿속으로 아까 불렀던 노래가사를 떠올렸다. 그러다 어느 가사에서 잠시 생각을 멈추었다.

…In other words, Hold my hand.
(…말하자면, 내 손을 잡아주세요.)

그러고보니 이 남자와는. 만날 때마다 손을 잡는 것 같다. 처음에는 부축, 두 번째는… 예수와 그의 제자. 세 번째는 평범한 에스코트. 폴리는 잠시 몸의 방향을 앞으로 틀었다. 그리고 시선을 핸들을 잡은 릭의 손에 준다. 바텐더는 관찰을, 특히 손님의 손의 관찰을 잘 할 수밖에 없는 직업이다. 이 남자의 손이 피아노를 쳤을 거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총을 잡았을 거라는 것도. 그 외의 것을 잡았을 거라는 것도. 밤의 도시에서 언더보스의 직위까지 오른 남자다. 비단 곱고 예쁜 것만을 잡을 수는 없었을 거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했다.

폴라리스는 예쁘다고 생각한 것을 좀 물끄러미 보는 버릇 같은 게 있다. 늘 발동되는 버릇은 아니지만.

깨끗한 것만 잡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뻐 보이는 손이라는 게 좀 신기했다. 물끄러미.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동안 그의 손을 눈동자 안에 담고 있다가 폴리는 눈을 감았다.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너무 오래 쳐다보고 있으면 실례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감고 있는 시간이 좀 길어서 평범한 사람이라면 폴리가 잠들었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르겠다.

*

도착했나? 폴라리스는 눈을 떴다. 감기 전과는 다른 풍경이 그녀의 눈 안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푸른 하늘 언저리에 타고 있는 석양이 아름다웠다.

내려요.

대답도 듣지 않고 등을 돌리는 남자를 보며 폴리는 대답 안 듣고 전화 끊던 것이 생각나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아주 잠시 가늘게 뜬 눈이, 차 밖으로 발을 내딛기 전에. 반쯤 나른하게 뜬 눈으로 빠르게 바뀐다.

…저기, 릭. 당신이 매너 챙기는 포인트가 남들과 조금 다른 것. 알고 있어요?

오래된 기타를 내려주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마워요, 라고 감사의 말만 전하고선. 폴리는 살풋 미소를 지었다.

3-22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16 23:38 ID : siOQd/EtAHZOM
대화를 젠틀하게 이끌 줄 아는 센스 있고 부드러운 남자-라고, 뭇 사람들에게 일컬어지고 했던 인페르노의 젊은 사자는 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이었나. 그 완벽하게 천절한 모습들은 단지 대외적인 이미지일 뿐이었던 걸까. 아주 가까운 곳에서 당신이 지켜본 릭은 실상 생각보다 말이 많지 않다. 필요한 순간에 적절히 침묵할 줄 알고, 이어지는 긴 정적을 즐길 줄 안다.
그러나 자고로 진정한 맹수란 입을 다물고 있는 순간에까지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되는 법이다. 그는, 침묵하고 있는 동안에도, 폴라리스가 자신의 손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핸들을 잡은 길고 흰 손. 잘 빠져 제법 시선을 끌 만하다는 것을 그는 또한 알고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이 나오려나. 사자는 이제껏 그래왔던대로 상대의 다음 행동을 예상했다. 또다시 뻔하고 진부한 대로, 남자치고 퍽 예쁘다고 표현해주려나. 그러면 나는 싱긋 웃으며 고마워요. 짧게 대답하겠지. 몇 초 후에 있을 일을 그려본다.

하지만 옆자리에 앉은 여자는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 말이 없다. 이쪽을 바라보던 시선도 어느 순간 사라져버리었다. 왜 내 손을 보고 있습니까, 물어볼 타이밍도 집중하던 사이 놓쳐버렸는지 모르겠다. 그는 줄곧 정면만을 보고있던 시선을 내려 조수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그러나 힐끗 바라본 폴라리스는 눈을 감고 있다. 자고 있나. 아니, 어쩌면 단순히 생각에 빠져있는지도. 어느 쪽이든 상관 없을 테다. 릭은 핸들을 잡은 손을 내려 바람이 들어오고 있는 창을 닫는다. 차가 완전히 멈춰설 때까지, 그는 구태여 폴라리스를 깨우지 않았다.

-

차에서 내린 기타를 폴라리스에게 건네던 손이 잠시 멈췄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주 잠시의 정적 끝에 그는 도로 그것을 제 어깨에 멘다. 턱짓으로 길 한쪽을 가리켰다.

"이쪽이예요."

...사실, 길. 이라기도 퍽 열악한 구조물. 구두를 신은 릭은 그 먼지쌓인 흙길을 조금도 개의치 않고 걸어올라간다. 야트막한 언덕, 그래도 풀이 높이까지 자라지 않아 걸어올라가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도시 가장 변두리의 언덕은 이제껏 내가 살던 곳에 이런 장소가 존재했나 싶을 정도로 외져있었다. 꽤 오랫동안 사람이 다니지 않은 듯한 길이 이해가 가면서도, 언덕을 오르는 도중 문득 타는 듯한 석양이 보일 때면, 어쩌면, 그래. 당신은 다시 의문을 품게 될 지도 모르겠다. 왜 도시의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이 아름다운 장소를 모르고 있는가. 그리고 앞서나가는 이 남자는, 어째서. 알고 있는가.

의문은 길지 않다. 허리를 꼿꼿이 편 채로 일말의 지친 기색 없이 오르막을 헤쳐나가던 남자의 구둣굽이 일순간 멈춰선다. 릭은 천천히 상체를 돌려 메고 있던 기타를 그 주인에게 넘겨주었다.

"다 왔어요."

타는듯이 땅 위에 내려앉는 석양, 당신을 향해 반쯤 뒤돌아선 남자. 그리고 그 앞에는. 아주 작고 초라해서 언뜻 눈길도 주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법한- 먼지묻은, 작은 십자가 두 개가 있다. 제대로된 묘비도 초석도 없는 작은 봉우리. 다시 당신에게서 등을 돌린 릭의 목소리가 노을 지는 바람 틈에 아스라이 흩어진다.

"여기에서 불러줬으면 했어요."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결코 울먹이지도, 슬픈 목소리도 아니다. 평소처럼 부드럽고 잔잔한 톤. 릭은 당신에게 그렇게 말했다.

3-23
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8-17 00:07 ID : siziMvN96hEI6
받아들려고 했는데 릭이 도로 가져가 자기 어깨에 매버린다. 약간의 얼떨떨한 감정이 잠시 폴라리스의 눈동자에 스쳐 지나간다. 텅 비어도 가엽지 않은 제 손을 잠시 보다가 폴라리스는 고개를 들고 릭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마치 대신 들어줘서 고마워요, 라고 말하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조금 앞서 걸어주실래요?”

처음 오는 곳이다. 모르는 곳을 척척 돌아다니며 걷지 않는 폴라리스는 방향을 일러주는 릭에게 조심스럽게 말하고 그의 뒤를 따른다. 선물 받은 하얀 운동화가 먼지 쌓인 흙길에 더럽혀 지는 게 가슴 아팠다. …예뻐서 아껴 뒀었는데. 그러나 흑흑, 하는 훌쩍이는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릭이 밟아간 길을 따라 착실히 걸음을 옮긴다. 언덕을 오르는 도중, 보이는 석양이 언덕의 경치와 어우러져 퍽 근사했다. …비밀의 화원에 초대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오직 그만이 간직하고 있던 비밀의 화원에.

멈춰설 때는 좀 말하고 멈춰요. 일순간 멈춘 발걸음. 반사적으로 따라 멈춘 것이 다행이었다. 폴라리스는 약간 흐트러진 호흡을 고르며. 폴라리스는 릭에게서 기타를 넘겨받아 느긋한 동작으로 그것을 맸다. 눈썰미 좋은 폴라리스는 먼지 묻은 작은 십자가 두 개를 포착했지만, 굳이 아는 척 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마음속의 무덤은 있다.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사람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다 같은 무덤의 형태를 띄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 저 십자가 아래에는 릭이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묻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가만히 생각했다.

“아까 부른 노래가 좋을까요, 아니면 새로운 노래가 좋을까요?”

폴라리스는 빙긋 미소하며 표정이 보이지 않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호흡이 다 골라진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맑고 깨끗했다.

“신청곡 받을게요.”

누구에게나 슬픔을 있을 것이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도 있을 것이고. 해서, 폴라리스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지금 본인이 할 수 있을 최선의 배려를 하는 것이다. 평소와 같이 행동하며. 그가 원하는 곡을 물었다.

3-24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17 01:17 ID : sii/FF6/Kk65c
릭은 슬프지 않았다. 정말이었다. 나는 슬프지 않아, 강해야해, 따위의 사자같은 마음으로 저를 감싸는 기제가 아니라, 정말로. 그는 슬프지 않았다.
애초에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이다. 먼저 스러져간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 밑에 칼로 새긴 듯한 작은 이름들 뿐인가. 심지어 적혀있는 것도 성을 제외한 간추린 호칭. 그웬, 여기 잠들다. 율리안. 여기...-아랫부분이 흐릿하게 닳아있다-...아마도, 잠들다. 이제는 기억 속에 묻어둔 그 아련한 이름들을 들어도 마음 속에 와닿지 않는다. 아래로 내리깔린 헤이즐색 눈이 타는듯한 석양을 담아 가만히 일렁인다.

"......"

하지만, 그렇다면. 정말 그들을 잊었다면, 구태여 이곳에서 폴라리스의 노래를 듣고 싶었던 것은 왜였나. 아아. 어머니의 노랫소리, 사실은 폴라리스와 하나도 닮지 않았을 그 목소리가, 노래를 듣는 내내 왜인지 자꾸만 귓가에 웅웅거렸나보다. 그래서 그냥 들려드리고 싶었던 것도 같다. 꽃 하나 놓여있지 않은 초라한 무덤. 하나뿐인 무심한 아들도 찾지 않는 이곳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여전히 잠들어 있다고 믿고싶어서. 떠오르는 마지막 추억이 그를 이곳으로 이끌었나보다.

"신청곡..."

신청곡. 릭이 속삭이듯 읊조렸다. 그분들이 가장 좋아하던 곡을 말한다면 참으로 의미깊을텐데. 그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가 그런것 따위를 알고 있을 턱이 없다. 신청곡, 이라. 릭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둠이 내려오고 있는 하늘이 붉다. 피처럼 붉고, 광석처럼 차갑다. 릭은 그것이 꼭 제 마음 같다고 생각했다.

"그냥.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걸로 불러줘요."

짧은 고민 끝에 그는 마침내 그리 대답했다. 아까 그것이 그러하다면, 다시 한 번. 아니라면 당신이 지금 떠올리는 곡으로.
후.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 사자는 긴 숨을 내쉰다. 뜨거운 석양이 흰 얼굴이며, 시린 금발에 내려앉는다. 곧 귓가에 부딪혀 올 청아한 선율을 기다린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3-25

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8-17 18:48 ID : siziMvN96hEI6
그냥.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걸로 불러줘요.

“…엄청 곤란한 신청곡이네요.”

제일 좋아하는. ‘제일’ 좋아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밝히는 사람도 있겠지만 폴라리스는 그럴 수 없는. 아니, 그런 것이 힘든 사람이다. 석양에 젖어가는 남자를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리고서 폴라리스는 피식,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로 웃었다.

“그렇지만 들어 줄게요.”

특별히. 라는 단어를 붙이지 않았지만, 특별한 일이었다. 무덤 앞에 나를 데려와 놓고 제일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달라니. 실로 치사하고 곤혹스러운 부탁이었지만, 폴라리스는 불평하지 않았다. 다만 입술을 다문 그녀는 잠시 먼 곳을 보는 듯한 시선을 저물어가는 석양과 남자에게 주었다.

이어 시선의 방향은 작은 십자가를 향해 옮겨졌다.

그녀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과거를 보듯이 작은 봉우리 무덤을 가만가만 푸른 눈동자 안에 담다가 눈을 반쯤 내리깔고 기타를 조율했다. 그 간단한 조율은 어떤 음악의 반주로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바뀐다.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

Every night in my dreams
(매일 밤 저는 꿈속에서)
I see you, I feel you
(당신을 보고, 그리고 또 느껴요)
That is how I know you go on…
(당신이 살아 있다는 걸 그렇게 알 수 있죠…)

조금 떨렸던 첫음절. 왠지 모르게 간절하게 들리는 -혹은 그러한 착각이 들 것 같은- 음성은 그녀가 말할 때의 목소리와는 조금 다른 것도 같다. 좀 더 풍부하고 짙고 호소력 있는 음색을 지녔다.
첫음절 이후 서서히. 자연스럽게 공기 중에 녹아드는 노래는 잃어버린 그리운 것들을 부드럽게 더듬어 나갔다.

*

과거의 것을 더듬는 시간은 그렇게까지 길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한 호흡을 쉬며 고개를 들어 올려 그와 눈이 마주친다. 그리고 어린 아이처럼 씩 웃어보였다. 깜박깜박. 두어번의 깜박임 후 내려진 시선, 그리고 그녀의 표정에는 어린아이 같은 웃음은 사라져 있었지만. 어른만이 가질 수 있는 부드러움이 대신 자리했을 것이다.

*

Near, far, wherever you are
(가까이에, 멀리에, 그 어디에 있든지)
I believe that the heart does go on
(당신의 그 마음은 계속 되리라 믿어요)
once more you open the door
(다시 한 번 당신은 문을 열고)
And you're here in my heart…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아요…)

한 호흡 후, 다시 시작되는 노래는 무언가가 크게 바뀌어 있다. 과거에서 현재의 방향으로 음이 흘러간다. 길을 헤매는 것 같다 느껴지기도, 길잡이별(Polaris)을 향해 똑바로 나아가는 것 같다 느껴지기도 하는 모순이 희미하게 샌다. 잠시 새어나온 모순을 도로 품은 채 음은 앞을 향한다.

때로는 영혼을 흔들고, 때로는 영혼을 감싸는.
섬세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가 종막을 향해 내달렸다.
동시에 존재하기 힘들, 연약함과 강인함이 그녀의 노래 안에 공존했다.

*

…We'll stay forever this way
(…우린 이대로 영원히 머물 거예요)
You are safe in my heart
(내 사랑 안에서 당신은 안전하고)
And my heart will go on and on…
(내 사랑은 언제까지나 계속 될 거예요)

노래는 끝이 났다. 여느 때보다 달콤하고 짙은 농도의 눈동자에 어느샌가 물기가 고여 있다. 또르르. 한 방울의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폴라리스는 드물게도 지금 자신이 어떠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른다. 하여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좀 멍하니 있었던 것이다. 계속 울지는 않았다. 한 방울, 오직 한 방울이 어쩔 수 없이 흘러나왔을 뿐.

깜박깜박. 가볍게 눈을 깜박인 후 폴라리스는 옅게 미소했다. 더없이 자연스럽게.


“이제 돌아갈까요?”

폴라리스는 정중하게 손을 내밀며 빙긋 웃었다. 일전에 그가 그녀에게 그렇게 해주었듯이.
그녀는 그의 비밀의 화원의 일부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저 단순한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하여, 그에게 제 비밀의 일부를 보였다. (그가 그것을 분명히 목격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역시 착각이었을까? 그리고 폴라리스는 손을 내민 10초 후, 퍼뜩 깨달은 것이 있다.

아, 다소 멍청하게 들릴 것 같은 탄식이 새어나왔다.

“둘이 걷기에는 좁은 길일까요…”

길이 좁은 게 아니라, 보폭차가 크게 났지. 폴라리스는 제가 내민 손을 뻘쭘하게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내가 에스코트 해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다. …나 여자치고 그렇게 키 작은 편도 아닌데. …아마, 아닐 텐데.

3-26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17 19:54 ID : sii/FF6/Kk65c
나는 보면 볼수록 당신을 더 모르겠다. 그저 그런 연못인가 했더니, 호수같은 외양 너머에 펼쳐진 끝없는 바다가 드넓다.

릭은 눈을 감았다. 청아한 노랫말에 몸이 가라앉는다. 찰랑이는 바닷물이 호흡을 막고, 물살을 가르는 사지를 결박해, 종래에는 끝없이 깊은 심해에 잠식한다. 불빛 하나 없는 해저는 더없이 춥고 어둡다. 당신, 어디에 있습니까. 제 손도 볼 수 없는 완전한 암흑이 소리조차 집어삼키는 그곳에서 사자는 문득 그렇게 소리치고 싶어졌다. 당신, 어디에 있습니까. 뜻대로 되지않는 무력한 몸으로 마지막 힘을 짜내 묻는다. 바다의 세이렌은 그를 구원해줄 손을 뻗는 대신 노래한다.

You are safe in my heart.
내 사랑 안에서 당신은 안전하고.
내 사랑 안에서...

당신은 안전해. 그녀가 속삭인다. 내 사랑은 언제까지나 계속 될거야. 중얼거린다. 미소짓는 순간 깊은 바다에 갉아먹힌 사자의 심장은 부유한다. 떠오르고, 떠올라서, 그 차가운 해수면에 코끝이 닿은 순간, 참았던 숨을 몰아쉬듯 깊게 기침한다. 털이 젖고 폐에는 물이 찼다. 내쉬는 숨에는 아직도 깊은 물소리가 난다. 사자는 아마도 오래토록 이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눈을 들어 본 곳에는, 아스라이 빛나는 길잡이별.

사자는 이제 길을 잃지 않는다. 바다에서 헤엄쳐 나와, 메마른 모래사장에 발을 딛는다. 고운 달빛이 그의 창백한 갈기에 내리쬔다. 걸어가는 뒷모습에는 물에 젖은 축축한 발자국이 남아있다.

-

릭은 눈을 들어 뺨을 타고 흐르는 폴라리스의 눈물을 보았다.

"......"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숨을 죽이고, 그 자리에 서서, 북극성이 눈물을 훔치고 아무렇지 않게 구는 양을 지켜본다. 왜 울어요. 묻지 않는다. 두개의 작은 십자가를 본 폴라리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 어떤 말로도 그녀를 곤란케 하지 않고.

"고마워요."

대신 부드럽게 웃는 것이다. 밤의 도시니, 인페르노니 하는 것들은 금방이라도 내던져버릴 것처럼 밝게, 쑥쓰러움 따위는 없이 정말로 기쁘게.
타는 듯한 석양이 웃는 얼굴 위로 내리쬔다. 어쩌면, 처음으로 아무런 계산도 가식도 없이 웃는 얼굴을 보았는지도 모른다고. 당신은 생각한다.

-

릭은 내밀어진 폴라리스의 손을 잡았다. 둘이 걷기에는 좁은 길일까요. 그 망설이는 목소리에는 가벼운 침묵으로 응수했다.

"가죠."

느릿하고 천천히, 남자는 걸음을 옮겼다.

3-27
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8-17 21:10 ID : siziMvN96hEI6
그는 왜 눈물을 흘리느냐고, 내게 묻지 않았다.

-고마워요.

다만 부드럽게 웃으며 감사의 말을 전했을 뿐. 그의 웃는 모습을 처음으로 본 것은 아닌데. 여태까지의 미소와 달랐다. 석양을 잠긴 밝고 쑥스러운 웃음이 참 예뻐 보였다. 어쩌면 저 미소는 가식도 계산도 없이 행한 것일지도 모른다. 폴라리스는 그 미소는 물끄러미. 아주 물끄러미 마주하며 기억 한 켠에 담았다.

…곱씹으면 심장이 아플 것도 같다.

막연하게 안개를 더듬듯이 생각하지만 폴라리스는 제가 원치 않아도 지금 눈앞의 미소를 곱씹어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제법 명확하게 인지한다. 쌓여온 경험이 있으니까.

그래, 언제가 시작이었을까.
언제부턴가 남자의 행동을 곱씹게 되고, 고민하게 되고, 생각하게 되면. 마음이 심란해지는 것은. 폴리는 제 심란함의. 릭을 생각하는 마음의 기저에, 무엇이 싹 터 있는지를 몰랐다. 심긴 감정의 씨앗의 이름을 모르고 있다. …그것을 언제 알게 될지도 역시. …다만 앞으로도 그로인해 열심히 심란해 할 것이라는 것만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다.

“…”

폴라리스는 릭과 손을 잡고 함께 길을 걸었다. 대화 없는 시간이 이제는 제법 익숙해질 법도 했다. 그녀는 눈치가 그렇게까지 어둡지 않다. 본인은 그저 느긋하게 걷는 걸음이, 남자에게는 불편할 정도로 느리겠다는 것을 이제는 짐작할 수 있다. 둘은 차에 도착하고, 릭은 폴라리스에게서 기타를 넘겨받아 차의 뒷자리에 실었을 것이다. 그는 운전석에 앉고, 그녀는 조수석에 앉아 창밖을 보다가 문득 그를 부르는 것이다.

“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라는 덧붙임은 없었다.

“당신, 사람 심란하게 만드는 재주 있다는 말. 종종 듣지 않나요?”

대신에 다른 말을 농담조로 이렇게 덧붙였지만, 이 말 역시 꽤 진심이다. 사람 심란하게 만드는 재주가 없을 거 같지 않다.
폴라리스는 고개를 돌려, 운전하는 그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실은 방금 한 말보다 더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차분한 얼굴이었다. 다만 그녀의 눈동자만이 깨끗하게 빛나는.

“배상은 이제 끝났잖아요. 기실 우리는 만날 이유가 없어졌죠.”

음. 짧게 고민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 고민의 소리가 끝나고도 잠시의 침묵의 깔린다. 고요의 시간동안 폴라리스의 차분했던 표정이 머쓱하게 변했다. 그녀는 머쓱하게 변한 얼굴로 씩 웃어보였다.

“그런데 나는, 당신을 또. 만나고 싶은 것 같아요.”

그리고 태연한 어조로 다음과 같은 물음을 건네는 것이다. 담백하게. 그저 그의 의향만을 묻듯이.

“당신은 어떻게 하고 싶어요?”

그러나 폴라리스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호기심이 찰랑이고 있다는 것을, 릭이 모를 것 같지 않다.

나는 당신이 궁금해요. 당신이 위험한 사람인 거 충분히 알겠는데, 배려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알겠어요. 다만, 나는.

당신에 대해 더 알아가고 싶은 것 같아요.

…그래요, 나는 당신을 알고 싶다고 생각해요. 지금보다 더 많이.


//그 씨앗의 이름은 아마도 사랑이겠죠.

42 세번째 일상(3) (4850063E+5)

2018-12-28 (불탄다..!) 00:01:31

3-28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17 22:14 ID : sii/FF6/Kk65c
사람 심란하게 만드는 재주 있다는 말. 종종 듣지 않나요?

아니, 처음 듣는 괴이한 평이다. 간이 배밖으로 나오지 않은 이상, 감히 어느 건방진 놈이 이 사자같은 남자의 면전에 대고 그리 지껄일 수 있었겠나. 듣는 상대에 따라서는 다분히 거슬릴 수 있을 만한 말을 폴라리스는 두려워하지도 않고 가볍게 이야기한다. 순간, 릭은 또다시 그녀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가졌던 의문에 빠진다. 정말로 내가 무섭지 않은가. 아, 어쩌면 티끌만큼도 거슬려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을까. 현명한 여자- 심란하게 만든다는 말의 의중을 알 수 없어, 릭은 살짝 시선을 돌려 그녀를 곁눈질했다. 타이밍 나쁘게도 커브길이 나와버린 탓에 곧바로 정면으로 돌아와야 했지만.

"......"

릭은 말을 아꼈다. 다만 계속해서 이어지는 폴라리스의 말을 들었다. 사실은 커브를 돌고 나서 다시 그녀에게 고개를 돌릴 수도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음은. 폴라리스가 제 옆얼굴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직감적으로 그녀가 지금 저와 시선을 마주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 굳이 그리 잔인하게 굴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지금 그녀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조금은 궁금해졌다. 불현듯 노래를 부르던 순간의 달콤하고 진한 눈동자가 떠오른다. 그게 아니라면, 언제나 그렇듯 맑고 청명한 빛. 릭은 저도 모르게 핸들을 쥐고 있는 손에 조금 힘을 주었다. 그것이 잡고 있는 것이 언제나 그렇듯 담배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습관에 길들여진 손이 조금 떨렸다.
그는 당장이라도 입을 열고 싶은 것을 참았다.

당신을 또 만나고 싶은 것 같아요.

아, 바다가 집어삼킨 심장이 부유한다.

당신은 어떻게 하고 싶어요.

걸어가는 뒷모습에는 물에 젖은 축축한 발자국이 남아있다.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사람. 첫만남의 설렘이 그러하듯.
줄곧 움직이지 않던 핸들이 별안간 오른쪽으로 세게 꺾인다. 끼익, 완벽한 승차감의 고급 세단이 살면서 한번도 내지 못한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길 한켠에 멈춰섰다. 급하게 멈춰선 반동으로 창백한 금발이 긴 호선을 그리며 출렁인다. 헝크러진 머리카락이며, 흐트러진 셔츠깃. 그 어떤 것도 상관하지 않은 채, 릭은 폴라리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아아. 일렁인다. 당신이 그의 공허함을 깨달은 뒤로, 언제나 차갑게 가라앉아 있던 헤이즐색 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담고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던 그곳이 일렁인다. 그 안에는 어떤 생명이 살아 숨쉬고 있나. 죽음과도 같은 침묵, 고요한 기다림. 당신은 지금 이 순간이라면 그것을 알것도 같다고 생각한다. 피아노를 치고, 총을 쥐고.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온갖 더러운 것들을 감쌌던 손이 조수석의 등받이를 잡는다. 그 어떤 예고도 경보도 없이. 높고 우아한 콧대가 다가온다. 일렁이던 눈이 감기고, 날카로운 턱선이 옆으로 꺾인다. 고급스러운 남성용 향수 사이로 미묘하고 알싸한 향이 풍기는 것도 같다. 입술이 부딪힌다.


아무 말도 없이, 갑작스럽게, 더 이상 길을 잃지 않는 사자는, 하늘의 가장 저편에서 빛나고 있는 길잡이별에게, 키스했다.


-


릭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또 만나고 싶다는 것이 무슨 의미였든, 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제 마음대로 해석하기로 했다.
그것은 욕망이었다.

3-29
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8-18 00:24 ID : siUc37IO0xJLc
폴라리스는 선이라는 것을 안다. 사람에게는 절대로 ‘넘지 않아야 할 선’ 그리고 이정도면 ‘넘어도 되는 선’이 있다는 것을. 놀랍게도 폴라리스는 첫 만남부터, 릭의 ‘넘지 않아야 할 선’을 넘지 않도록 조심한 사람이다. 그가 무서워서 그랬냐고? 아니. 그냥 폴라리스는 선을 넘지 않으면 그가 분노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직감했을 뿐이다. 맹수는 겁먹고 도망가는 사냥감을 쫓아가는 생물이잖은가. 그러니 그 앞에서 겁을 집어 먹고 움츠러드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 뭐, 적당히 상황 봐서 움츠러드는 척은 해줄 수도 있었겠지만. 강자 앞에서 비굴하게 구는 것은 대체로 멍청한 짓이다.

…게다가 그가 그녀가 만났던 악마가 아닌데. 그것을 알았는데. 공포에 패닉할 리가 없었다.
단지 그녀는 진실로, 릭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었던 거다.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그리고 이어지는 만남에 '절대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처음 예상보다 제게 관대한 것 같아서 놀랐다. '이정도면 넘어도 되는 선' 역시 관대한 것 같았다. 원래 이렇게 관대한 사람은 아닐 텐데, 이상하기도 하지. 끓는점이 높은 타입인걸까? 그렇게 마음속으로 갸웃거리면서도. 그녀의 무의식이 그가 제게 관대하게 구는 것을 퍽 마음에 들어 했다.

*

관찰이라기보다는 시야가. 폴리의 시선이 그의 행동을 그냥 자연스레 담았다. 커브를 돌고 나서도 그는 그녀 쪽을 바라보지 않는다.

-배상은 이제 끝났잖아요. 기실 우리는 만날 이유가 없어졌죠.

…그 말이 너무 매정하게 들렸던 걸까. 조금은 미안해하면서도 어쩔 수가 없다 생각했다. 그녀는 매정하다면 매정한 사람이고, 야박하다면 야박한 사람이니까. 야박 쪽에 조금 더 가깝기는 했다. 매정보다, 냉혹보다, 냉정이나 냉소라는 단어가 그녀에게 더 어울렸지만. 냉소적인 것만이 그녀의 전부가 아니기도 했다. …다정한 일면이, 놀랍게도 아직. 폴리의 마음 깊은 곳. 혹은 영혼 깊은 곳에 남아 있는 것이다. 천사가 그녀의 다정함을 지켜주었으니까. 폴라리스는 악마를 만난 적도 있지만, 천사를 만난 적도 있는 사람이다.

릭의 손이 조금 떨린 듯도 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있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폴라리스는 다만 기다렸을 뿐이다. 그가 입술을 열기까지. 혹은 그가 무슨 행동을 하기까지.

줄곧 움직이지 않던 핸들이 별안간 오른쪽으로 세게 꺾이고 차가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길 한 켠에 멈춘다. 폴라리스는 그것에 몸을 움찔 떨었다. 릭의 창백한 금발이 긴 호선을 그리며 출렁이는 것도, 헝크러진 머리카락이며, 흐트러진 셔츠 깃이 눈에 들어오자 이번에는 심장이 움찔 떨린 것도 같았다.

…이 상황에서 할 감상은 아니지만. 릭, 당신. 새삼스레 섹시한 남자네요.

다소 태평한 감상 따위를 하고 있는 폴라리스의 머리에 제 머리카락도 약간 흐트러져 있다는 사실이 현재 있을 리는 없다. 깊은 밤, 폴라리스의 새하얀 백발은 달빛을 받으면 은백색으로 은은하게 빛나기도 한다. 창으로 새어들어온 연약한 달빛에 그녀의 백발이 희미하게 빛나는 것도 같다. 달무리처럼. 혹은 요정의 머리카락처럼. 그의 일렁이는 눈동자를 마주하며 폴라리스의 태평한 표정과 눈동자에 약간의 의아함이 깃든다. 왜? 릭은 말 대신 행동으로 그 의문에 답했다. 릭의 손이 등받이를 감싸고 그의 얼굴이 다가오는 동안 무방비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그녀의 입술은 그의 입술에 삼켜졌다. 예고치 않은 키스에 깜짝 놀랐어도 폴리는 그의 키스를 뿌리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와 키스하는 그는 눈치 챘을 것이다. 그녀가 지금 저의 키스를 받아들이는 것이 몹시 서툰 사람의 것과 같다는 것을.

서툴게나마 그의 키스를 따라가고 있는 와중에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가 하면.

글쎄, 처음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지. 다만 넋이 나가 가만히 입맞춤에 당하고 있다가, 다음에는 릭이 키스에 도가 튼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고, 그 다음으로는 아니. 대체 왜 나한테 키스하고 있는 거지? 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다만 그녀는 그 의문을 밖으로 표현하는 대신에. 그의 키스를 거절하지 않았다. 거부하지 않고 서툴게나마 따라가며. 약간 파르르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한 쪽 어깨에 다정하게 얹었다.

3-30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18 02:24 ID : si9hCKTmqMBVI
언제 처음 여자와 입맞춰 보았던가. 열다섯 혹은 열여섯, 퍽 긴장한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던 금발의 소년을 떠올린다. 더없이 어색했던 손길. 상대가 누구였는지, 장소는 어디였는지, 무엇 하나 정확히 기억나는 것 없이 아스라진 기억이다. 감히 전과 지금을 비하자면 당신은 마치 내가 처음인 작고 여린 유리결정 같다. 그러나 그것이 전혀 거슬리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서툰 움직임을 무시한 채 입술을 맞부딪히고, 가지런한 치아를 혀끝으로 훑는다. 릭은 문득, 이제까지 제가 겪은 모든 시행착오들은, 지금 이순간 바로 당신을 위해서였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스물 다섯의 다 자란 남자가 입밖으로 내기에는 더없이 유치한 사랑고백. 그러나 당신이라는 파도에 부유하는 심장이, 부드러운 볼에 스치는 콧대가, 참을 수 없이 간지러워서. 그는 지켜왔던 평정을 깨고 그것을 당신의 귀에 터트리듯 속삭이고 싶어졌다.

어째서 사랑하게 되었나. 묻는다고 해도 아마 정확히 대답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한순간에 마음에 와 박혔던 것은 아니었다. 분명 처음에는 우는 얼굴이 성가시다는 생각 뿐이었는데. 아둔하고 멍청한 소리, 당신의 그 호수빛 눈을 보는 순간 나는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나도 모르는 새에 빠져들고, 마침내 호수 너머의 바다를 보았을 때는, 몸이 젖어드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뛰어들어버렸다. 어쩌면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이 몰아치는 파도에 면역없이 잠식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답지않게 몰아치는 입맞춤에 당신의 몸이 서서히 뒤로 기운다. 거절하지 않는 상대, 제 어깨를 잡아오는 손에 탄력을 받았는지, 그 때를 기점으로 조심스러웠던 움직임이 깊숙이 파고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폴라리스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릭은 등받이를 잡지 않은 반댓손을 뻗어 그녀의 둥근 뒷통수를 능숙하게 받쳐들었다. 부드러운 흰 머리카락이 단단한 손에 감겨든다. 따뜻한 그것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몰아치는 입술과 달리, 다정하게 감싸안았다.

콩. 머리카락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낀지 얼마 되지 않아 뒷통수를 감싸 쥔 릭의 손등은 세단의 닫힌 차창과 가볍게 충돌했다. 그래, 그는 적당한 선에서 절제할 줄 아는 남자다. 이제 그만 보내주어야 할 시간임을 알며, 당신을 아껴줄 줄도 알 것이다. 천천히 몸을 움직여, 등받이를 잡고 있던 손을 당신의 어깨 위에 얹는다. 아주 천천하고 느릿한 움직임으로 한참을 맞대어 있던 입술을 떼어내고, 굽혀진 채 폴라리스의 어깨 위에 있던 팔을 천천히 펴들었다. 후. 참고 있던 숨을 내쉰다. 언덕을 오를 때도 고르지 않았던 호흡을 낮게 가다듬는다.
이제 당신의 얼굴이 아래. 그리고 그 눈을 마주한 채, 릭이 위에 있다. 팔 안에 상대를 가둔 채로- 릭은 꽤 오랫동안 폴라리스의 그 말간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래. 당신의 눈은 이렇게 생겼었지. 청명한 블루, 그 아래의 부드러운 콧대. 그리고. 릭이 희미하게 웃었다. 서로의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보는 것은 퍽 미묘한 기분이다. 그는 짧은 정적 끝에 입을 열었다.

"가지고 싶은 게 생겼어."

언제나 그랬듯 맥락없는 화두. 내 힘으로 가질 수 없는 것은 없어요, 오만하게 미소짓던 얼굴이 떠오른다. 그러나 말을 꺼내면서부터의 그는 그때와 달리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이다. 전의 것들이 싸늘하고 공허해 무(無)에 가까웠다면, 이번은 지나치게 많은 감정들을 담고 있는 것이 한눈에 보임에도 차분하다. 당신이 본 그의 어떤 모습모다 진지하다.
느닷없는 반말. 그러나 결코 오만하지는 않은 말투. 어딘가 조금 떨리고 있음에도, 그답게 당당한.

"연애하자, 나랑."

아아. 언제부터 시작이었나. 정확히 알지 못하기에 그는 아마 그 질문에도 제대로된 대답을 내놓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의 노래를 듣고 나서부터였나, 아니, 어쩌면 처음 만난 그 순간에서부터. 첫눈에 반한다는 뻔하고 진부한 속설 따위는 믿지 않지만, 이번에는 그냥 모른 체 넘어가고 싶기도 하다. 부유하는 심장의 떨림은 결코 순간의 착각이 아니다. 당신을, 당신의 마음을, 가지고 싶어. 가장 깊은 곳의 목소리가 말한다.

나랑. 다른 누구도 아닌 나와. 사자는 속삭인다.
후회할지도. 파멸할지도. 당신을 처음 본 날 울렸던 적색등이 또다시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앵앵거리는 것을, 애써 무시하고 있는지도.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페르노의 젊은 사자가 그럼에도 당신을 놔주지 않으리라는 사실이다. 릭은 알고 있었다.


그것 하나만은 온 진심을 다해 확신할 수 있었다.

3-31
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8-18 19:57 ID : siUc37IO0xJLc
대체 왜 나한테 키스하고 있는 거지?

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잠식하는 것을 끝으로 폴라리스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흐트러진 생각의 틈새에서 그녀의 넋을 무언가가 잡아당기고 있는 것 같다 느꼈다. 무언가는 속삭이듯 흐느끼는 것 같다. 호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은 이렇게 말했다.

-그냥,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의심도 하지 말고. 그를 받아들이라고.

폴리는 그 속삭임이 그녀의 본능인지, 무의식인지, 혹은 그녀의 영혼인지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은 그녀의 마음에 싹이 튼, 어떠한 감정의 것일지도 몰랐다.

*

그의 어깨에 다정히 손을 올린 것은 그녀가 생각하고 행한 일이 아니다. 다만 자연히 무언가를. …아니, 그를 붙잡고 싶은 그녀의 마음이 그녀의 생각대신에 폴라리스의 손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 키스가 점점 깊어진다. 그에 따라 점차 의식이 멍해지는 것 같다. 멀고 먼 우주를 떠돌듯이. 혹은 깊고 깊은 바다에 잠기듯이. 구명줄이 필요한 사람처럼, 그녀는 그에게 매달리고 싶었다. 좀 더 키스에 능숙한 사람이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폴라리스는 그냥, 서툰 자신을 그에게 온전히 내맡겼다.

*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몸이 뒤로 기울고, 그의 손이 제 뒤통수를 감싸온다. 그리고 어떠한 것-세단의 닫힌 차창-에 느리고 부드럽게 충돌한다. 그의 손이 조수석 등받이에서 폴라리스의 어깨로 내려온다. 아주. 아주 느릿하게 맞대고 있었던 입술이 멀어진다. 아. 어쩌면 그녀는 멀어지는 그것이 아쉬운 지도 모르겠다.

더없이 달콤하고 몽롱한 눈동자, 발그스레한 양 뺨, 타액에 젖어 축축하게 붉어진 입술.
흐트러진 제 상태를 의식하지도 못하고 있는 여자가 거칠어진 호흡을 채 가다듬지도 못하고 릭을 바라보았다. 폴라리스는 그냥 지금 정신이 멍했다. 아주 멍했다. 마치 꿈에서 채 깨어나지 못한 사람처럼 말이다.

-가지고 싶은 게 생겼어.

그의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불렀다. 그리하여 그녀는 아직 덜 깬 정신으로도 그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당신이 가지고 싶은 게 무엇인가요?

-연애하자, 나랑.

…………
………
……

…네? 그 말에 불현듯 꿈에서 그녀는 깨어난다. 눈동자가 연신 깜박였다. 잠시 제가 무엇을 들었나 반추해보던 그녀는 그에게서 사귀자는 제안을 들었다, 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아무 생각 없는 멍청한 여자였다면, 지금쯤 그의 말에 그냥 머리를 끄덕거리고 있겠다. 폴라리스는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멍청한 여자처럼 굴고 싶은 자신을 발견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네, 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지금 미쳤나 보다. 혹은 저 남자가 나를 미치게 하고 싶은가 보다. 맥락을 잃고 이어지던 생각은 지나치게 많은 감정을 담고 있는 그의 진지한 표정을 인식하고 나서야 멈추었다.

…그렇게 쳐다보면,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싶어진다는 거 알아요?
…그러고보니 아까 가지고 싶은 게 생겼다고 말한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던 것 같다.

폴라리스는 어쩔 수 없어서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마치 사랑스러워 못 견디는 것을 바로 앞에 둔 사람처럼. 그렇게.

“릭.”

웃음기 어린 그녀의 목소리가 가볍게 그를 불렀다.

“나 지금 굉장히 멍청한 여자가 되고 싶은 것 같아요.”

당신이 지금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주면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일 것 같아요. 덧붙이듯 작게 웅얼거렸지만 그의 귀에는 확실하게 들렸을 것이다. 시선이 수줍게 내리깔린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5초의 침묵. 폴라리스는 어쩐지 떨리는 것 같다 느껴지는 입술을 약간 힘겹게 열었다.

“…그러니까 사랑한다고 말해줄래요?”

말하는 목소리의 어딘가가 긴장한 것처럼 파르르 떨려도. 떨려 나올 것을 알고 있었어도.
폴라리스는 지금 제가 하고 싶은 말을, 그리고 듣고 싶은 말을 참지 않았다.
아니, 도저히 참지 못했다. 아아. 어떻게 하지. 심장이 조금. 아니, 조금보다 더 많이.
…아프게 울리는 것 같다, 느끼며 폴라리스는 내렸던 도로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

부디 내게 확신을 주세요.

3-32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18 21:23 ID : si9hCKTmqMBVI
시동이 꺼진 차 안. 적막이 감도는 공간은 갈라지는 목으로 삼켜내는 침마저 조심스럽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 외진 길- 갓길에 세워진 차창 너머로 들어오는 달빛은 지나치게 감상적이다. 푸스스, 적막 속에 들려오는 것은 오직 바람이 부는 소리. 흔들리는 가로수 그림자가 당신의 얼굴 위에 언뜻 드리워진다. 그로부터 내려오는 긴 금발이 당신의 옆얼굴에 스치고, 굳은살 박힌 단단한 손은 어느새 돌아서 희고 작은 뺨을 감싸고 있다. 꼭 이 세상에 당신과 나, 둘만이 남은 것 같다고. 릭은 문득 생각했다.

사랑한다고 말해줘.

그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끝까지 사람 당황시키는 재주가 있는 여자다. 그 말을 그렇게 당당하게 요구하는 법이 어디있어. 뻔뻔스럽게도, 아직 당신조차 하지 않은 말을 내게 요구하는 건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지 않는지. 그건 반칙이야, 어린애처럼 채근하고 싶어진다. 폴라리스. 나는 왜인지 당신 앞에만 서면 자꾸만 어려지는 것 같아. 끝없이 솔직해지고, 순수하게 붉어진 소년같은 얼굴을 하고 싶어져. 간질거리는 심장의 울림이 턱끝까지 차오른다.

그러나 릭은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폴라리스의 얼굴을 두고 그리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많은 것을 담고 있음에도 여전히 차분한 눈빛. 마치 당신을 처음 만난 날처럼, 그렇게, 길잃은 사자는 잠시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하늘 한켠의 북극성을 똑바로 올려다본다. 그리고 침묵 속에서 천천히 입술을 여는 것이다. 방금 전까지 당신을 담았던 것.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당신을 사랑해."

속삭인다.

"내 사랑, 내 마음, 내 정신과 신체, 내가 가진 그 모든 걸 당신을 위해 희생해도 하나도 아깝지 않아."

침착하고 어른스러운 말투, 그러나 그림같은 가면 아래 미묘하게 터져나오는 격정적인 호흡. 당신을 사랑해. 그 어떤 미사여구 없이 정직하고 날카롭게 파고든다. 아무런 꾸밈도 포장도 없이 다만 솔직한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억지스러운 가식도, 완벽한 친절도 벗고, 다만 있는 그대로를 얌전히 내보인다.
아아. 언제부터였을까.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내 심장에 칼을 찔러넣어도 얌전히 죽어주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당신은 내 이성을 꿰뚫는 창이다. 머릿속을 주무르고 냉정함을 함락시켜, 나를 전에 알던 것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도대체 언제부터였나. 그는 아마 영영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나의 모든 게 당신 것이야."

그리고, 고백한다.

"사랑해. 폴라리스."

자신의 온 진심을 내던져서.

"...사랑해."

떨리는 심장을 받아들여 줄 것을 종용한다.

3-33
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8-18 22:51 ID : siUc37IO0xJLc
부디 내게 확신을 주세요.
내가 의심을 내려놓고 당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

폴라리스는 릭이 제게 사랑한다고 말하면 본인이 말한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다. 그에게 뺨이 잡히지 않았다면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감히 생각했다.

-당신을 사랑해.

그 크지 않은 속삼임이 심장을 뚝, 떨어뜨리고.

-내 사랑, 내 마음, 내 정신과 신체, 내가 가진 그 모든 걸 당신을 위해 희생해도 하나도 아깝지 않아.

침착하고 어른스러운 말투 사이사이에 미묘하게 터져 나오는 격정적인 호흡이 모든 의심의 장막을 벗겨내고.

-나의 모든 게 당신 것이야.

마침내 그녀의 영혼에 닿아 가장 깊은 곳에 입술을 맞추는 것이다. 그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것처럼, 혹은. 그녀의 모든 것을 감싸 안는 것처럼. 그렇게……

아아, 폴라리스는 그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무력한 여자였다. 그에게 고개를 잡혀있지 않았더라도 고개는커녕,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음을. 어리석게도 확신을 바랐던 그녀는 몰랐던 것이다. 뚝, 떨어졌다 생각한 심장이 바로 귓전에서 울렸다. 크게 뛰는 심장 소리에 귀가 멍멍했다. 고동치는 맥박에 마음이 먹먹했다. 제가 어떻게 호흡을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해. 폴라리스.

어째서 눈물이 흐르는 걸까. 나는 조금도 울고 싶지 않은데.
폴라리스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찬다. 차오른 감정이 그대로 밖으로 흘러넘친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모든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녀의 눈물이 슬픔만이 아닌 것을 알았을 것이다. 사람은 슬플 때만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다. 무언가에 감동했을 때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도. 눈물은 마음을 넘어서, 바깥으로 흘러넘치게 되는 것이다.

-사랑해.

…심장이 터져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입을 열면 그대로,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서 그녀는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을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죽을 때까지.

*

다만 어떻게든, 사랑한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그러나 지금은 도저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아서.

북극성은 제 양 뺨을 감싸고 있는 사자의 한쪽 손을 파르르 떨리는 제 양손으로 끌어와. 눈을 감고서 그의 손바닥, 가장 안쪽에 입술을 내리 눌렀다. 넘쳐흐를 것 같은, 모든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간절한 입맞춤이었다.

3-34
별명 : 그대의 영혼 속에서 풍성한 것을. 기능 : 작성일 : 17-08-19 00:00 ID : siw264D5dCfZ+
입술이 파묻힌 손바닥이 불에 데인 듯 뜨겁다. 온 몸의 신경이 오직 맞닿은 부분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 같다. 첫키스의 충격이 이보다는 덜했을까. 견딜 수 없이 아득해지는 정신 가운데, 사자는 단지 이 미미한 스킨십 만으로 심장이 이리도 빠르게 뛸 수 있다는 것을 놀라워했다. 손바닥을 타고 오르는 찌릿한 전파가 중추를 헤집고 심장을 꿰뚫는다.

당신은, 내게, 이러한 존재가 되었다.

기분좋은 포만감이 온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아쉬워할 것 없어, 당신이 소리내어 제 진심을 전하지 않는 것 따위는 티끌만큼도 신경쓰지 않는다. 때때로 사람의 마음에는 말로써 전할 수 없는 진심이 가장 깊숙한 곳에 숨죽여 기생하는 법이다. 당신의 진심을 안다. 나도 당신에게 그러한 존재가 되었다. 구태여 목소리를 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

손안에서 파르르 떨리는 움직임이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사치스러운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전에 없던 감상적인 마음. 릭은 달빛이 비치는 흰빛 머리카락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바다, 나는 이 드넓은 모래사장을 거니는 작은 소년이 된 것 같다. 나는 언제부터 이런 사람이 되었던가. 그런것 따위는 하나도 중요치 않다. 상체를 숙여, 폴라리스의 둥근 이마에 자신의 것을 맞댄다.
속눈썹이 콧잔등을 스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 남자로부터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두터운 커튼처럼 두 사람과 외부 사이를 가로막는다. 커튼에 부딪힌 숨소리가 귓가에 웅웅댄다. 나뭇잎 스치는 밤의 적막이 그 희미한 소리를 거대하게 증폭시킨다.

릭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큰일이네..."

당신의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간지러울 지도 모르겠다.

"이제 이쪽 손은 쓰지 못하려나."

다시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얽힌다. 무슨 의미. 물어볼 새도 없이, 릭은 폴라리스가 입맞추고 있는 손을 떼어 부드럽게 그녀의 이마를 쓸었다. 땀에 젖어 헝크러진 머리카락이 말라붙어 있다. 다정한 말투. 당신의 붉은 뺨에 쪽, 입맞춘다.

"당신, 나 왼손잡이인건 알고 있어?"

왼손. 방금 전까지 당신이 입술을 묻고 있던. 아직까지 화끈거리는 손바닥, 그 안에서 움직이던 선연한 감촉. 이 손으로 다시 총을 잡는 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릭은 막연하게 생각했다.

"책임져야 할 거야."

무엇을요. 당신이 물었다면, 대답했을 테지.

나를 가지기로 선택한 것을. 릭은 희미하게 웃었다.

-

차를 돌려 폴라리스의 집까지 운전하는 내내. 릭은 정말로 왼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오른손만으로 핸들을 잡았다. 창문을 열지도, 담배를 쥐지도 않았다. 정말로, 무릎 위에, 가만히. 무언가 소중한 것이 잔류해있기라도 한 듯이.
그렇지만 폴라리스의 위험하게 그러지마요, 한 마디면 바로 양손으로 핸들을 잡았을 테다. 그건 아마도- 당신이 내게 이러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일 테다.


언제부터였던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랑한다고 말한 순간, 무형의 씨앗은 그대로 싹을 틔워 정말로 사랑이 되었다.



그 언젠가 그대가 나를 보았을 때엔
나는 너무도 어렸습니다.
그래서 보리수의 옆가지처럼 그저 잠잠히
그대에게 꽃피어 들어갔지요.
너무도 어리어 나에겐 이름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대가 나에게 말하기까지
나는 그리움에 살았었지요.
온갖 이름을 붙이기에는 내가 너무나 큰 것이라고.
이에 나는 느낍니다.
내가 전설과 오월과 그리고 바다와 하나인 것을,
그리고 포도주 향기처럼


그대의 영혼 속에선 내가 풍성한 것을.

3-35
별명 : 내 눈을 감기세요 기능 : 작성일 : 17-08-27 19:08 ID : siP4FBNeM5/xo
얼마의 시간동안 입술을 그의 손바닥에 묻고 있었을까. 흐르는 눈물도 닦지 못하고 그저 제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눈물과 함께 입맞춤을. 말로는 다 전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넘치는 마음을. 그저 그의 손 안에 담고 있었던 것은.

이마에 뭔가 부드러운 무게가 닿는다. 그가 제 이마에 그의 이마를 맞댄 것이라는 것을 폴라리스는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의 숨결이 부딪힌다. 그가 내린 커튼에 부딪혀 돌아와 닿은 숨결이 간지러웠다. 나뭇잎 스치는 소리도 들릴 것 같은 적막에, 폴라리스는 숨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심장소리도 함께. 하지만 그것이 누구의 것인가 파악할 정신은 없었다. 자고 있지 않은 심장이 강하게 뛰는데,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대체 왜였을까.

큰일이네...

귓가에 닿는 그의 목소리가 간지럽다고 인식하기 이전에. 폴라리스는 제 숨소리가 신경 쓰였다. 심장이 아프게 울리는 소리도 신경 쓰였다. 큰일은 나한테 난 것 같아요. 이대로 가다가는 심장이 터져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나는 내 심장이 이토록 세차게 뛸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어요.

이제 이쪽 손은 쓰지 못하려나.

…? 대체 왜요?
멍청한 아이처럼 되물어볼 뻔 했다.
평소에는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하던 이성이 지금은, 아니 한참 전부터 어딘가로 날아간 것 같다. 지금의 내가, 꼭. 평소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내가 모르는 다른 여자가 된 것 같다. 폴라리스는 그런 스스로가 낯설었지만,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는 릭은 어째서인지 낯설지가 않았다. 익숙하지도 않았지만. 그냥 자연스럽게 평소와 다른 그도, 그의 행동도, 그의 말도 받아들였을 뿐. 입 맞추고 있던 손바닥이 떨어져 나가고, 이윽고 그의 손이 제 이마와 앞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그의 입술에 뺨에 닿는다. 쪽. 간지럽고 부끄럽고 사랑스러운, 작고 작은 소리. 더 이상 몰릴 열도 없을 것 같은데, 그의 입술이 닿은 자리가 열에 덴 것처럼 화끈거린다.

당신, 나 왼손잡이인건 알고 있어?

알고 있었어요. 다만 제가 잡고 끌어와 입을 맞췄던 손이 왼손이라는 것은… 네, 지금. 방금 깨달았어. 당신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몰랐을 거예요.

책임져야 할 거야.

‘무엇을요?’

눈으로만 물은 말에 그가 입술을 열어 답했다. 희미한 웃음과 함께.

나를 가지기로 선택한 것을.

……이럴 때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폴라리스는 모른다. 폴라리스가 아니라도 모를 것이다. 그녀는 그가 한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나를 가지기로 선택한 것을. 본인이 언제 그런 선택을 했는지조차 모르겠지만, 그는 그녀에게 이미 그를 주었다. 선택권도 주었던 것 같다.

-네 모든 것은 내 거야.

이렇게 말하는 대신.

-나의 모든 게 당신 것이야.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 선택권을 주고, 나를 배려해주고, 존중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가 있을까. 사랑스러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 폴라리스는 그의 말에 두어 박자 늦게 미소했다. 그 미소가 아주 환했다. 그리고 기꺼이 그리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위험하게 그러지 말아요.

-라고 당장이라도 말을 해야 하는데, 가지런히 무릎 위로 올려진 그의 왼손이. 소중한 것이 잔류해 있기 때문에 좀 더 이대로 놓아두고 싶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폴라리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제 심장을 터뜨리려고 작정해도, 저항 없이 죽을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기껍게, 기쁜 마음으로 죽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조금 더. 살고 싶어졌어. 릭. 당신과 함께.

“…달이 아름답네요.”

창밖을 바라보며 읊조린 혼잣말이 그의 귀에 닿았는지 모르겠다. 닿아도 좋고, 닿지 않아도 좋다. 다만 언젠가. 그렇게 멀지 않은 미래에. 비유적으로 돌려 전하는 표현보다, 직설적으로.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폴라리스는 이제 제 마음 속에 싹이 트고, 마침내 꽃이 피어 그윽하고 깊은 향기를 품은 것의 이름을 안다. 그것의 이름은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그것은 사랑이 아닐 수가 없다.

*

내 눈을 감기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으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말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내 팔을 꺾으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을 잡을 것입니다.
손으로 잡듯이 심장으로 잡을 겁니다.

심장을 멎게 하세요.
그러면 뇌가 고동칠 겁니다.

마침내 당신이 나의 뇌에 불을 지르면,
그 때는 내 피가 흘러 당신을 실어 나르렵니다.

43 릭주 ◆rAqAiJ2zqg (4850063E+5)

2018-12-28 (불탄다..!) 00:08:30

>>39 ㅋㅋㅋㅋㅋㅋㅋㅋㅋ집착... 이대로 가면 아주 불가능한 전개는 아닐지도요^q^... 집착이라니, 릭이랑 참 안 맞는 단어인데 사랑에 빠진 릭이라면 또 어떨지 모르겠네요. 생각보다 잘 어울릴지도?(^ω^)

ㅠㅜㅜㅜ맞아요 폴리주.. 자주 아프셔서 항상 걱정했었지요.. 12월 초중반 이었나, 엄청 추웠던 주말이 올 겨울 최저일 거라고 했었는데 기상청이 또 구라를 쳐버렸군요(..) 저는 비교적 건강하게 지냈답니다. 폴리주를 위해 날씨가 어서 따뜻해져야 할텐데요..

아...아 왜 저런 대사를...?생각했던게 이 세번째 일상에 많이 들어있는데(*´ω`*)..ㅋㅋㅋㅋㅋㅋ 오글거리는 대사에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이게 역시 사랑의 힘이었을까요(??) 연애.. 오케이.. 릭 너는 정말^ㅇ^~!

44 네번째 일상(1) (4850063E+5)

2018-12-28 (불탄다..!) 00:11:16

4-1
별명 : 릭[솜니움] 기능 : 작성일 : 17-08-27 19:52 ID : siWRSfas1x9jk
릭은 애초에 사적인 연락이 잘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지독하게 바쁘고, 한술 더 떠서 온갖 전자기기와 친밀한 현대인의 표상과는 매우 거리가 멀었다. 빠르게 타닥이는 자판보다 만년필의 사각거리는 소리를 더 즐기는 것은 조금은 의외일까.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하루종일 문자를 주고받고 제 일과를 공유하는 다정한 연인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면모가, 사랑을 고백한 직후의 가장 달콤해야할 시기, 무려 일주일에 가까운 시간동안 연락이 되지 않은 것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해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어쩌면 더 큰 문제는 그가 그 긴 공백에 대한 아무런 문제의식도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부분이었다.
저에게 맞춰주는 연애에만 익숙해진 사람이다. 그가 드러내지도 않는 발톱이 두려워 불편한 것에 대해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못한 애인들을 과연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있을까. 릭은 폴라리스가 그녀들과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에 따라 제 행동에 어떠한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무턱대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그동안 머리를 아프게 했던 마약 시장에 관한 건은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오랜만에 일찍 일과를 끝마친 날. 평소보다 배는 더 화려한 네온사인이 만연한 오늘이 일주일에 단 두번 뿐인 폴라리스의 근무일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있다.

칵테일바 솜니움의 앞. 릭은 폴라리스가 금방이라도 저 문을 박차고 나올 것을 기다린다.

한눈에 봐도 휘파람을 불 법한 외제차를 길가에 세운 채로 트렁크 뒷편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남자는 두말할 것도 없이 행인들의 시선을 끌었다. 언제나처럼 깔끔한 정장 차림, 입가에 댄 손가락 사이로 물려있는 매캐한 필터. 수군거리는 목소리들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이.
그러나 한없이 강해보이는 이 남자가 솜니움의 문이 열릴 때마다 입에 물려있는 것을 미련없이 버리고 있음을, 나오는 것이 폴라리스가 아니기 때문에 다시 새로운 것을 꺼내들고 있는 것을. 그것이 그의 발밑에 반도 타들어가지 못한 담배들이 쌓여있는 이유임을. ...연락도 하지 않고 찾아온 주제에 이따금씩 여닫히는 문을 주시하고 있는 것은, 길가는 누구의 추측으로도 맞출 수 없겠지.

4-2
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8-27 20:48 ID : siP4FBNeM5/xo
폴라리스는 이제 핸드폰을 두 개 챙기는 습관을 들였다. 하나는 폴라리스 명의의 폰. 다른 하나는 위치추적 불가한 대포폰, 그래. 릭의 전화를 저장한 핸드폰. 그 핸드폰에는 오직, 릭의 전화번호 외에는 저장하지 않았다. 연인이 되지 않았다면, 도시에 위험한 사람들이 차례로 저기에 저장되었겠지만. 폴라리스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폴라리스 명의의 핸드폰에도 릭의 번호를 저장해 두었지만, 한 번도 먼저 걸지 않았다. (물론 머리로도 외우고 있다. 그러니까 본인 핸드폰이 아니더라도 언제라도 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고 한다면 말이지.) 그는 바쁜 사람이고, 내 전화가 혹시라도 그의 업무에 방해되면 안 되니까. 그렇게 일주일. 연락 한 번 안 했다. 릭도 안 하고 폴라리스도 안 하니까 무쓸모로 지냈을 그 핸드폰이 가여워질 지경이다. 폴라리스는 릭이 기다리라고 하면 한 달도. 일 년 정도도 연락 없이 기다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폴라리스는 배려가 과한 사람인지도 몰랐다. 물론, 아무에게나 이렇게 과한 배려를 하는 인간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적당한 배려, 적당한 상냥함, 적당한 친절을 추구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폴라리스는 핸드폰을 챙기고 다니기는 하지만, 수시로 확인하는 타입과는 거리가 멀다. 온종일 문자를 주고받고 제 일과를 공유하는 다정한 연인이 되기는 힘든 여자겠지. (…이쯤 되면 릭이 더 심각한지 폴라리스가 더 심각한지 도저히 모르겠다. 폴라리스 쪽이 더 심각한 것 같기도 하다.)

“폴리.”

아, 교대하고 퇴근할 시간인가보다. 뒤에서 저를 나지막히 부르는 회색머리의 남자의 목소리에 폴리는 앞에 계신 손님에게 목례를 남기고 빙긋 웃었다. 손님이 몹시 아쉽다는 시선으로 바라봐도 그저 철벽같이 친절한 미소만 유지한 채 그 이상을 주지 않고 돌아선다. 폴라리스가 친절하게 웃으며 철벽을 칠 수 있는 여자라는 것을 솜니움 사람-사장, 바텐더, 종업원, 일부 손님들-에 머문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회색머리 남자는 그런 폴라리스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정확히는 그녀의 입술을. 폴라리스가 뒤를 잘 부탁해요. 입모양을 그리고 연하게 웃었을 때에야 비로소 남자도 고정시켰던 시선을 올려 폴리와 시선을 마주하곤 연하게 따라 웃는다. 그리고 업무를 하러 가는 것이다. 폴라리스는 여직원 탈의실을 향해 걸었다. 탈의실에 들어가서야 바텐더로 근무하는 동안 단정하게 틀어 올린 머리를 별다른 아쉬움 없이 푼다. 틀어 올렸던 흰 머리카락이 순간적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광경을 볼 사람이 없다는 데에 어떠한 유감도 없다. 여름 원피스만을 입기에는 밤은 조금 쌀쌀하다. 생각하며 폴라리스는 내일부터 가디건을 챙길까 고민한다. 오늘은 겉옷 없으니까, 길가다가 맘에 드는 거 보면 사버릴까? 빗으로 쓱쓱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가벼운 차림으로 문을 향해 걷는다. 물론 문 밖에 누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문을 나서고 한 걸음. 폴라리스는 릭을 발견한다. 두 걸음. 세 걸음. 자연스럽게 내디뎌야 했을 걸음이 멎었다. 폴라리스는 땡그랗게 뜬 눈을 깜박이며 잠시 고민하다가 릭을 향해 조금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듯이 걸었다.

“절 기다린 거예요?”

솜니움 앞에서, 릭이 기다리는 사람이 내가 아닐 수도 있지. 선택지와 가능성을 열어두면서도. 릭의 앞에 도착한 폴라리스는 그를 올려다보며 방긋 웃었다. 그렇지만 당신이 기다린 사람이 나라면 기쁠 것 같아요.

4-3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27 21:12 ID : siWRSfas1x9jk
지익-, 아직 반도 타지 못한 불꽃이 구둣발에 밟혀 볼품없이 명을 다했다. 그 주인이 줄곧 시선을 주고 있던 문에서 마침내 기다리던 사람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나풀거리는 흰 머리칼의 여자는 사슴이 풀숲에 뛰어들듯 가볍게 이쪽으로 다가왔다. 릭은 부드럽게 웃었다.

"놀라지도 않네."

희미하게 번지는 미소는 아마도 진심이었다. 릭에게 있어 가식과 진심어린 표정의 경계는 종이 한장만큼 사소하지만, 그를 오랫동안 지켜봐온 이들(예를들면, 아이작.)이 이 얼굴을 보았다면 그 미묘한 차이에 놀라 딱 죽지 않을만큼 까무러쳤을 것이다.
저 사자같은 남자가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안단 말이지. 어쩌면 그 저녁, 무덤가에서의 따뜻한 노랫소리가 오래도록 쌓여온 빙벽을 녹였는 지도 모르겠고.

"집에 데려다줄게."

릭은 손을 내밀었다. 지독한 담배냄새와 화약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단단한 손이다. 그러나 폴라리스가 맡을 수 있는 것은 그 외면을 포장한 시원한 향수 내음 뿐이기를, 릭은 바랐다.

4-4
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8-27 21:30 ID : siP4FBNeM5/xo
뒷조사 했다는 걸 알았을 때는 많이 놀랐어요. 지금도 아주 조금 놀랐고요.

“놀랐으면 좋겠어요?”

그렇지만 놀란 티는 안 난다. 어떻게 티가 이렇게 안 나는지 신기하게 여겨도 좋다. 폴라리스는 릭의 발치에 타들어가지 못한 담배가 쌓여 있다는 것을 알고, 지금 희미하게 번지는 미소가 진심일 거라는 것도 안다. 왜냐하면, 나도 그를 향해 진심으로 생글거리고 있으니까.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폴라리스는 릭의 내민 손에 제 양손을 감싸듯이 겹쳤다. 겨울날, 체온으로 다른 이의 손을 녹이는 것처럼. 여름날 밤에 하기에는 조금 낯간지러운 짓일지도 모른다. 그의 손은 차가울까. 대체 언제부터 가게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폴라리스는 담배냄새도 화약 냄새도, 그것을 포장한 향수 내음도 전부 맡았다.

“그거 알아요? 저는 당신 체향과 섞인 담배냄새만은 싫지 않아요.”

구태여 당신이 그것을 향수로 가리지 않더라도 그럴 거예요. 덧붙이는 대신에 폴라리스는 그와 웃음기 어린 시선을 맞춘다.

“제 집까지 안전하게요?”

4-5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27 21:59 ID : siWRSfas1x9jk
"상관없어."

놀라든, 놀라지 않든. 릭은 중얼거렸다.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라면 어느쪽이든 좋다는 의미임을. 때로는 직설적이고, 때로는 무심해 종잡기 어려운 이 남자의 말투에 이제는 적응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당신이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는건 반칙이지.

"......"

결코 아름다운 것만을 쥐지 않는 손에서 자연히 피어나는 매캐한 냄새들. 그럼에도 폴라리스의 앞에서는 다정하게만 보이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 손 위를 감싼 향수 내음은 그런 의미였다. 당신 체향과 섞인 담배냄새만은 싫지 않아요. 그 말이 내포한 것이 그러한 깊은 뜻은 아니었겠다만- 당신이 어떤 더러운 짓을 하고 왔든 여전히 사랑하겠다는 말처럼 들려서, 릭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폴라리스의 손을 붙잡은 채로 뒤돌아 조수석까지 걸어갔다. 보이는 이미지와 다르게, 사자는 생각보다 체온이 높은 사람이다. 확실히 매미 우는 여름밤에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일지도 모르지. 그럼에도 그는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차에 타는 동안에는 잠시 떨어져 있게 되더라도, 곧바로 다시 잡을 것이다.

제 집까지 안전하게요. 조수석 문을 열던 손이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 불현듯 멈췄다. 처음 만났던 날. 릭은 작게 웃었다.

"놀리지 마."

그리고 얼른 타라는 듯 가는 어깨를 부드럽게 밀었다.

4-6
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8-27 22:30 ID : siP4FBNeM5/xo
상관없어. 놀라든, 놀라지 않든.

어떤 모습의 나라도 괜찮은 걸까요. 나는 다른 모습의 나를 보여줄 확신이 안 서는데.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될 수 있으면 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데. 폴라리스는 제가 비밀도 많고, 마냥 예쁘지만은 않은 여자란 것도 알고 있어서. 어쩐지 양심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 저를 콕콕 찌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양심. 필요하다면 버릴 수도 있지만, 당신 앞에서는 어쩐지 못 버리겠어요.

폴라리스는 릭의 따뜻한 손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만을 쥐고 있지 않다는 것을 짐작한다. 처음 만난 날부터 짐작했다. 그러니까, 그가 어떤 더러운 짓을 하고 왔어도 그녀는 그것에 크게 놀라지도 않을 것이다. 깨끗하지 않은 손이라도. 깨끗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이미 사랑에 빠진 것을 어쩌겠는가. 그래서 폴라리스는 입 다물고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릭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속삭임보다 작은 웃음소리가 여름밤에 녹아들듯 퍼진다.

“놀린 적 없어요.”

정말이다. 제 집까지 안전하게, 라는 말은 그냥 릭이 했던 말이 떠올라서 입술에 담았을 뿐. 놀리려는 의도는 정말 없었다. 부드럽게 미는 힘에 폴라리스는 순순히 그가 열어준 조수석 문에 발을 들이고 그곳에 앉는다. 처음에는 손수건을 깔고 다친 발로 여기에 앉았는데. 새삼스러운 사실이 떠올라, 폴라리스는 약간. 실없이 웃고 싶어졌다.

4-7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27 22:55 ID : siWRSfas1x9jk
똑똑한 여자. 도저히 못당하겠다. 왠지 허망한 기분, 놀린 적 없다는 말에 릭은 얼핏 웃었다.

그리고 그는, 보여지는 매너가 완벽한 남자다. 폴라리스의 머리가 부딪히지 않게 천장을 받치고 있던 손은 이제 앉은 그녀의 등받이 위에 살짝 걸쳐있다. 넓은 어깨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찬다. 벨트 매야지. 중얼거리는 말은 그녀에게 건네는 것인지 그저 혼잣말이었는지 알 수 없다. 어찌되었든 분명한건, 흔들리는 금발 사이로 릭이 손을 뻗어 벨트를 매어주었다는 사실이다.

릭은 폴라리스를 오래도록 혼자 두지 않았다. 조수석 문을 닫고 나와 그녀의 옆에 앉는 움직임은 간결하다. 한치의 군더더기도 없는 것이 그의 계산적인 면과 닮았는 지도 모르지. 폴라리스는 돌아서 운전석까지 걸어가는 짧은 순간의 옆모습을 아마도 앞유리를 통해 보았을 것이다. 조금도 서두르지 않은 채 여유롭지만 빠르다.

"그동안 뭐하고 지냈어."

폴라리스는 오늘까지 그의 차를 세번 탔다. 세번 모두 다른 차라는 점이 비범하지만 그 부분은 일단 넘어가기로 하고, 이번 차 역시 아무런 소음도 없이 부드럽게 굴러가는 것으로 보아 그는 상당히 승차감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자연스럽게 트는 카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역시 바이올린 선율이 인상적인 클래식이다. ...귀에 낀 화려한 피어싱과는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듯 싶지만. 어쨌든. 뭐하고 지냈어. 그는 잔잔한 음악소리 위로 물었다.

4-8

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8-27 23:41 ID : siP4FBNeM5/xo
얼핏 웃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가 부딪히지 않게 천장을 받치던 손이 밸트를 매어 주었을 때, 폴라리스는 살짝 움찔 떨었다. 미약한 떨림이었지만, 릭이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는 둔탱이는 아닐 것 같다. …굳이 이런 것까지 챙겨줄 필요는 없는데, 분위기를 깨는 말대신 폴라리스는 수줍어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반쯤 눈이 감겨 있어 아래로 내려진 폴라리스의 풍성한 속눈썹이 가냘프게 떨렸다. 이런 매너, 처음 받아본 것도 아닌데. 내가 이렇게까지 수줍음이 많은 사람은 아닐 텐데. 왜. 폴라리스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우아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세 번 모두 다른 차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에 대한 비범함을 못 느끼는 폴라리스는… 음. 이 이야기는 그만두자. 소음 없이 부드러운 승차감이 어떤 차라도 유지된다는 것에는 조금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운전 잘 하는구나. 너무 때늦은 감상을 하며, 바이올린 선율에 귀를 기울였다.

“…”

평범한 질문인데, 되게 대답하기가 어렵다. 평소와 같이 지냈어요. 아니면 당신 생각만 했어요? 폴라리스는 잠시간 생각에 잠긴다.

“…3일간은 멍했던 거 같아요. 당신한테 사랑한다고 고백 받은 날은 잠을 설쳤어요.”

정말이다. 폴라리스는 릭에게 고백 받은 날, 잠을 아예 못 잤다. 멍하니 침대에 앉아서 그가 해준 말과 행동들을 곱씹어 보다가 얼굴이 화르륵 빨개져서 세수도 몇 번인가 하러 갔던 것 같다. 그래도 그 밤 내내 얼굴이 하얗던 시간보다 붉었던 시간이 더 길었으리라. 지금에서야 막연히 추측한다. 진짜 3일 동안은 겉으로는 평소처럼 굴어도, 주변에 사람이 없으면 -그러니까 집에 돌아오면- 홀로 멍해지고는 했다. 4일째 되는 날에야 겨우 꿈에서 깬 것 같다. 평소처럼 행동하면서도, 평소와 같지 않았다.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폴라리스뿐이었다. 이제는 릭도 알게 되었겠지만.

“실은 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생각이 잘 안나요. 제가 뭘 하고 지냈을까, 저도 알고 싶네요.”

떠올리자고 생각하면 못 할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제가 3일씩이나 멍을 때렸던 것을 떠올리면 얼굴이 도로 붉어질 것 같아서, 폴라리스는 부러 그것들을 떠올리지 않았다.

“저 지금 되게 바보 같죠?”

태연하고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가지만 폴라리스는 지금 제가 되게 멍청해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게 솔직하지 않은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솔직함이야. 미간을 찡그리며 살짝 웃고는 폴라리스는 릭을 잠시 바라본다. 그리고 도로 앞 유리에 시선을 준다.

“릭은 뭐하고 지냈어요?”

45 네번째 일상(2) (4850063E+5)

2018-12-28 (불탄다..!) 00:12:02

4-9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28 21:32 ID : si71g04nB2SFE
"잠은, 잘 자야지."

...바보같은 대답인지도. 그러나 조금 더 솔직해지자니 폴라리스를 탓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못 배길 것 같아서, 릭은 새어나올 것 같은 말을 잠시 입안에 가둬두었다. 사실은 사랑한다 말하지 않으려고 했어. 당신이 요구하지만 않았더라도 마지막 남은 이성이 가슴 깊숙한 곳에 그것을 아껴놓았겟지. 터질 것 같은 마음을 작은 틀 안에 애써 구겨넣고 있었는데,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속삭인 순간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어버린 거야.
잠도 설칠 줄 알았다면 계속 참았을 것을. 어린아이의 유치한 볼멘소리 같아서 그저 삼켰다.

저 지금 되게 바보 같죠. 폴라리스가 물었다. 아니. 릭은 작게 웃었다.

"눈코뜰새 없이 바빴어."

그러는 당신을 무얼 하고 지냈나. 묻는 말에 건조하게 중얼거린다. 눈코뜰새 없이 바빴다. 간결하지만, 그의 일주일을 무엇보다 잘 나타내는 한 문장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를 표현할 수 없음 역시 자명하다. 릭은 조금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그래도 쓰러지듯이 침대 위에 눕는 순간에는 당신 생각이 나더라."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이 사자같은 남자가 도저히 지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평온한 표정이었다. 눈을 감으려고만 하면 자꾸 그 얼굴이 떠올랐다. 말간 미소, 붉어지던 뺨, 흰 머리칼에 아스라이 부서지던 그 밤의 나뭇잎 스치는 소리들.

"잘 수 없어서 괴로웠어."

괴롭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미소를 거두지 않는다. 당신을 떠올리는 일은 달콤하지만 괴로워. 그래도 계속되길. ...영원히. 영원이라는 말이 얼마나 덧없는줄 빤히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고 싶어졌다.

4-10
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8-28 22:39 ID : siGZ8DyJNYv1g
“잠을 설쳐도 좋았는걸요.”

설마 오늘도 당신 때문에 잠을 설치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 생각하면서도 타박하는 릭의 말에 배시시 웃어보였다. 폴라리스는 잠자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기분 좋게. 가슴이 설레어서 잠을 설치는 거라면, 잠 정도는 몇 번이고 설쳐도 좋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바보 같은 생각이다. 음.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바보 같아졌더라. 생각하는 폴라리스는 릭이 저를 현명한 여자, 똑똑한 여자라고 속으로 칭찬해주었던 것을 결코 모를 것이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는 말에 고개를 가벼이 끄덕였다. 어쩐지 그랬을 것 같다. 한 조직의 언더보스가 한가하면 그것은 그것대로 이상하겠지만. 그래도 당신이 한숨 돌릴 정도의 여유는 늘 있었으면 좋겠다.

…실은 나도 그랬어요. 자기 전, 침대에 눕는 순간 당신이 생각났어. 눕는 순간뿐만 아니라. 일상을 영위하는 모든 순간에 문득문득. 당신이 생각났어요. 솔직히 이거 좀 중증이라고 생각했는데. 폴라리스는 고개를 릭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평온이 내려앉은 릭의 얼굴 앞에서 또다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어떡하지. 방금 또 반한 것 같은데.

“…잠은, 잘 자야죠.”

약간 목이 매인 소리로 답하고 폴라리스는 더없이 부드럽게 미소했다. 아. 이제야 왜 당신이 잠은 잘 자라고 타박 같지도 않은 타박을 줬는지 알겠어요. 잠을 자지 못했던 당신이 걱정이 되는 동시에, 또. …사랑스럽네요. 지나치게요. 음. 제가 이렇게 달콤한 말, 달콤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 정말 아닌데. 폴라리스는 부드럽고 달콤한 미소를 띈 채로 잠시 침묵을 지켰다.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고, 어디 가서 다치지도 말고…”

…읊는 것이 죄다 어쩐지 어머니가 할 법한 대사 같기도 하지만. 잔소리라고 치기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거기에 담긴 감정이 너무도 달았다. 고아인 폴라리스는 평범한 가정의 어머니가 자식에게 어떤 잔소리를 하는지 모른다. 일반적인 가정의 따뜻함을 모르는 사람이다. 따라서 이 말을 듣는 릭이 어쩌면 어머니의 잔소리를 연상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다. 폴라리스는 잠시 말꼬리를 흐렸다. 말을 꼭 해야 하기는 하겠는데. 당신 말을 곱씹으면서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어쩐지 꺼내기가 어렵다. 폴라리스는 한 번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릭을 올곧게 바라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리고 이건 중요한 말이예요.

“당신은 당신이 가진 모든 걸 희생해도 아깝지 않다고 했지만, 나는 당신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쩌면 릭이, 폴라리스의 존대 없는 말을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일지도. ‘저’가 아니라 ‘나’라고 호칭하는 폴라리스를 보는 것이 이번이 처음일지도 모르겠다. 존대말은 아니지만, 진중하고 진실하고 차분한 음성이었다.

“릭. 내가 당신을 사랑해.”

어떠한 떨림도 흔들림도 없는 음성인데도, 그녀의 목소리가 정말로 달콤하고 진실 되었다. 폴라리스는 제가 이렇게까지 진심을 다해서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나, 스스로가 신기하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다. 하지만 이 생각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 드디어 말했다. 폴라리스는 사랑해, 라는 말의 끄트머리에서 아주 환하게 웃었던 것 같다. 그리고 또, 잠시의 고요. 연하디 연한 미소.

“…해서, 당신의 희생을 바라지 않는 거예요.”

이번에 이어지는 뒷말은 조심스럽다. 당신의 희생을 바라지 않는다, 는 말이 부디 매정하게 들리지 않기를 바라서. 그렇지만, 릭. 사랑하는 사람의 희생을 바라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악녀나 악당이 아닌 이상에야. 당신의 희생을 바라지 않는 내가, 결코 이상한 게 아니라구요.

“약속해 줄래요? 당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3가지는, 날 위해 희생하지 않겠다고요.”

4-11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28 23:15 ID : si71g04nB2SFE
그웬 아멜리에 카르멘은 바람에 흩날리는 진한 블론드가 인상적인 미인이었다. 아름다운 아내이면서, 동시에 자애로운 어머니. 마지막 순간 아직 소년이라 불리기에도 민망한 어린아이에게 반드시 살아남으라는 비정한 말만을 남기고 죽어버렸지만.

그러니까- 그웬이 아직 살아있었다면. 릭은 폴라리스가 꺼내는 조곤한 걱정들에서 필히 그녀를 떠올렸을 것이다.

"......"

애매한 기분이 피어올랐다. 잠을 잘 자란다. 그건 구두 신은 발로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밟고 지금의 자리에 오른 순간부터 포기한지 오래였다. 밥도 잘 먹으란다. 누가 이런 황당한 걱정을 또 건네겠나. 어디 가서 다치지도 말라니. 이건-

불가능해. 폴라리스가 그에게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단번에 그리 일축했을 것이다. 허망한 소리 말라며 다그쳤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릭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였을까, 그 터무니없는 이야기들을 좀 더 듣고 싶어진건. 어느 순간 흘러나오던 음악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고 오직 그 상냥한 목소리에만 집중하게 된 것은.

그리고, 내가 당신을 사랑해. 마침내 터져나온 고백을 듣는 순간, 일정한 리듬으로 움직이던 심장이 금방이라도 멎어버릴 것마냥 동요했다. ...그래. 분명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 사실이었음에도 그러했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들었다면 과장않고 심장이 갈갈이 찢겨나갔을지도. 반칙이다. 나는 지금 운전중이잖아. 핸들을 붙잡은 손을 뼈가 드러나도록 움켜쥐었다.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릭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끝끝내 긴 정적 끝에 속삭였다.

"...기쁘네."

이 사람, 너무 감정이 격해지면 오히려 표정이 없어지는 타입이던가.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에서 나오는 기쁨은 진심이거늘 어째서 표정은 그리도 차분한지 모르겠다. 어쩌면 감정을 숨기는 데 지나치게 익숙해져서. 그러나 다음 말을 할 때 즈음에는 또다시 참을 수 없어졌던 것 같다.

"계속 반말해줄 생각 없어?"

웃는다. 보면 볼수록 새로운 사람, 이번에는 그 목석같은 얼굴에 한 스쿱의 기분좋은 장난기도 섞였다.

희생이니, 무어니 하는 문제들은 듣지 못한 척 넘겨버린다. 아마 집요하게 또 물어봤자 당신이 원하는 대답을 얻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흘리듯 대답해주겠지.

내가 가진 소중한 게 대체 무언지 알 수 없다고.

다만 당신이 가진 게 나일 뿐.

4-12

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8-29 00:24 ID : siGAYmZqLJ2fk
폴라리스는 그의 동요를 보았다. 눈썰미 없는 사람이면 결코 눈치 채지 못할 순간의 동요, 핸들을 세게 잡아 뼈마디가 드러나는 그의 예쁜 손. …아. 방금 내 말들이 운전에 방해 됐으려나. 얌전히 입 다물고 있어야 했을까, 라는 생각이 스쳐갔지만. 역시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었고, 그 고백에 후회는 없었다. 진심이었으니까. 전할 수 있을 때 전해야 한다. 후회는 언제나 때늦은 것이기에.

“…”

…반말 해주는 게 기뻐요? 약간은 어리둥절해진다. 조곤조곤 속삭이듯 떨어지는 존대 쪽이 더 사근하게 들릴 텐데. 하기사 사람은 취향이 다 다르니까. 내 존대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 반말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겠죠. 차분한 얼굴이지만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에서 묻어나오는 그의 기쁨이 기껍고, 목석같았던 표정에 장난기 섞인 미소가 어린 순간이 좋았다. 기실 이제 릭이라면 다 좋은 것 같다. 뭘 해도 좋을 것 같다.

“당신이 기뻐해줘서 저도 기뻐요.”

…나, 정말로 중증 아닐까? 그런데 이 병은 병원도 못 가. 폴라리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배시시 웃었다.

“그렇지만 반말은 내가 내킬 때만 할 거야.”

그러니까 내가 내키게 해봐, 요. 는 마음속으로만 덧붙인다.

폴라리스는 배시시 웃는 얼굴로 잘도 새침하게 제멋대로인 발언을 했다. 그렇다. 사실 폴라리스는 상냥하게 남에게 맞춰주는 것도 잘 하는 편이지만, 제멋대로 구는 것도 못하는 편이 아닌 것이다. 제멋대로 군다 해도, 그 사람이 기분 나쁘지 않고. 그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선에서만 그러지만. 글쎄, 폴라리스는 아직도. 릭이 저를 어디까지 받아줄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폴라리스는 한 발짝, 더 가까이 릭에게 다가갔다. 물리적인 거리 말고, 마음적인 거리가 가까워진 것이다.

내멋대로인 부분도 좋아해줄 거예요?

묻듯이 폴라리스는 새침함과 부드러움이 기분 좋게 섞인 미소를 제 얼굴에 그렸다.

*

그렇지만. 5분 후, 그 미소는 잠시 사라진다. 폴라리스는 기다렸다. 그가 제 부탁에 답해줄 것을. 그러나 또 다시 묻지 않으면 이 남자는 제 말을 못 들은 척 이 자리를 넘겨 버리겠지.

“릭이 나빠요.”

폴라리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꼭, 새침하기 그지없는 고양이 같은 표정. 그래, 이것은 폴라리스의 얼굴보다는 제인의 얼굴에 가깝다. 그런 표정으로 폴리는 릭에게 뜬금 없을 담백한 투의 타박을 주었다. 뭐가? 라고 그가 의문을 밖으로 꺼내기 전에 폴라리스는 마저 말을 이었다.

“왜 대답 안 하고 말을 돌려요.”

폴라리스는 입술을 살짝 삐죽였다. 삐진 표정은 아니다, 다만 릭의 대답 여하에 따라서 삐진 표정을 지을 지도 모르겠다.

“날 위해 희생하지 말라는 내 부탁, 들어주지 않을 거야?”

4-13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29 14:04 ID : siLxlmcYXgApE
그렇지만 반말을 내가 내킬때만 할 거야.

"...허."

삐끗, 핸들에서 손이 미끌어졌다. 보기 드물게 조금 당황한 것도 같다. 뭐? 잘못 들었나, 저런 타입의 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너무해. 의식하지 못한 채 내는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반쯤 허탈하다.

첫만남을 떠올린다. 부어오른 발목을 붙잡고 울먹이던 모습, 그때에는 정말이지 얌전한 사슴인 줄만 알았다. 머지 않아 사슴탈을 쓴 영리한 인간임을 깨달았지만서도 오기가 생겨 포기할 수가 없었다. 한번 노린 사냥감을 놓치지 않는 맹수의 본능인 지도 모르지. 그러나 연약한 인간은 언제부터인가 사자를 무서워하지 않더니- 이제는 맹랑하게 갈기를 쓰다듬으며 놀려먹으려고까지 드는 것이다. 놀리지 마. 놀린적 없어요. 뻔뻔하게 읊조리던 목소리가 스쳐지나간다. 길들여지는 것은 어쩌면 내쪽이었는지도.

정말로 코 꿰인거 아냐, 의심하기 시작했을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가랑비에 몸이 젖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듯 흠뻑 빠져있었다.

"Do exactly as you want."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릭은 젠틀하게 긍정했다.

-

사자는 한 발짝 다가오는 인간을 붙잡아 끌어안았다. 품 안에 잡아두었다. 내멋대로인 부분도 좋아해줄 거예요? 은은하게 들리는 심장의 울림.

물론.

너무 당연한 질문이라 더 말을 이어갈 가치도 없다는 듯이. 가까이 다가온 머리통에 이마를 맞추고 간결히 대꾸했다.

-

릭이 나빠요. 다시 이어진 바이올린 선율을 깨고 폴라리스가 툭 내뱉는다.

"무슨 말일까."

하여간 사람 당황시키는 재주가 있는 여자다. 그러나 이런 패턴에는 이제 조금 익숙해진 것도 같아서, 그는 핸들을 꺾으며 여유롭게 반문했다. 차는 어느새 부드럽게 달려 두 사람이 목표하던 곳에 거의 다다랐다. 릭은 폴라리스가 생각한 대로 결코 운전에 서툴지 않은 사람이다. 기어를 바꾸고 브레이크를 밟아 주차를 마치는 순간까지 그의 움직임은 한치의 불필요함 없이 깔끔하다.

왜 대답 안하고 말을 돌려요. 희생하지 말라니까.

아.. 그거. 그래, 그게 있었지. 이런 직접적인 물음을 더 이상 어물쩍 회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역할을 다한 키를 뽑으며 릭은 가볍게 대꾸했다.

"당신이 걱정할만한 일은 없을거야."

그는 얼마든지 웃음을 만들어낼 수 있는 남자다. 폴라리스가 충분히 만족하지 못할만한 대답임을 알았는지, 고개를 돌려 싱긋 웃는다. 죽어도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아. 언제든지 빠져나갈 수 있을만한 구멍을 만드는 건 그의 습관인지도 모르겠다.

"들어가."

그리고 무릎 위에 얹혀있는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았다 놓았다.

4-14

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8-29 22:43 ID : siGAYmZqLJ2fk
핸들에서 손이 삐끗했다. 이 남자치고는 대놓고 알기 쉬운 동요였다. 릭이 허탈하게 바람 빠지는 소리로 웃었고, 폴라리스는 그 웃음소리에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당신이 허탈하게 웃을 발언은 안 한 것 같은데. 왜? 눈썰미 좋고, 눈치도 빠르고, 감도 나쁘지 않은 주제에 때때로 이상한 곳에서만 기이한 둔감함이 발휘된다. 그가 동요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동요의 이유를 모르겠고. 그가 허탈하게 웃는 것은 알겠지만, 왜 허탈하게 웃는지를 모르겠다.

Do exactly as you want.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그의 신사처럼 젠틀한 긍정에 그녀는 숙녀처럼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당신이 걱정할만한 일은 없을거야.

…거짓말.

거짓말이다. 그의 말과 거의 동시에 그녀는 눈을 감았다. 평온하게 잠든 사람처럼 보이는 눈을 감은 얼굴. 그 얼굴 뒤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그는 알 수 없겠지. 그가 아니라도 알 수 없겠지. 그녀는 어쩌면 그보다 감정을 감추는 데에 능숙한지도 모른다. 그래, 우리는 닮은 부분이 있죠. 다른 부분도 있고요. 하지만, 릭. 나는 이런 종류의 거짓말은 아주 싫어해요. 하지만 언제든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는 것은 나도 자주 하는 짓이라…

…탓할 수가 없네요.

그녀는 모든 말들을 삼켰다. 어떤 말을 해도, 어쩐지 그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 될 것만 같아서. 어떤 말로 하지 않는 편을 택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상처 입힐 바에야 내가 상처 입는 게 백번은 낫지. 그리고 잠시 생각을 리셋했다. 모든 생각을 리셋하고, 하나의 질문만을 떠올렸다. 만약 우리의 입장이 반대라면, 내가 당신에게 그를 위해 소중한 것을 희생하지 말라는 부탁을 받았다면. 나는 무어라고 대답했을까?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어서, 그저 웃었겠지. 음.

대답할 수 없는 부탁을 했던 내가 잘못한 걸까?

-들어가.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의 손이 제 손을 살짝 잡았다 놓는 순간에. 그래, 그의 손이 닿았다 떨어지는 순간에 그녀는 눈을 떴다. 그리고 멀어지려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양손으로 붙들더니, 잠시 잡아두었던 그것을 천천히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금이 간 유리조각을 만지는 손길도 이보다 조심스러울 수는 없을 정도로. 갓 태어난 연약하고 사랑스러운 짐승에게 닿는 손길보다 더 다정한 시선이 그의 손을 향한다.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한 가지 행동이 더 많은 것을 전한다고 했다.

폴라리스는 말하고 싶었다. 소중한 당신이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그렇지만 그것은 그가 이루어줄 수 없는 바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폴라리스는 그것이 서글펐던 것 같다. 폴라리스는 제가 삼키는 것도, 참는 것도, 인내하는 것도, 숨기는 것도 익숙한 인간이라는 게 지금 이 순간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만 다행인 것도 아니지만. 뭐, 지금은 다행을 넘어 감사해야 할 것 같기도 했다.

…사실은 말하고 싶다.

당신 스스로를 나보다 더, 중히 여겼으면 좋겠다고.

*

시간을 재자면 5분 남짓. 그 시간동안 폴라리스는 그의 손을 어루만지고서는, 그의 손을 그에게 되돌려 준다. 그리고 스스로 안전벨트를 풀고서 그를 바라본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상냥한 미소를 그린다.

“Goodnight, my dear.”

잘자요, 내 소중한 사람.

“오늘은 잠 설치지 말고 좋은 꿈 꿔요.”

부드럽게 말을 건네고서는 폴라리스는 차 문을 연다. 그리고 차 바깥으로 나가 조심히 문을 닫는다. 소리를 최대한도로 죽인 한숨은 문이 닫혀 있으니 들리지 않았을 거다. 폴라리스는 이 순간 솔직할 수 있다면, 상냥하게 미소하는 대신 서럽게 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서럽게 웃는 모습은, 그녀 혼자만 알아도 충분하다. 남에게 보여줄 얼굴은 못 된다. 연인에게 보여줄 얼굴은… 더더욱 못 된다. 폴라리스는 뒤를 돌았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차분하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집까지 도착하는 거리가 멀지 않았다. 서럽게 웃는 것도, 서럽게 우는 것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4-15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8-30 00:05 ID : sisiG99vZdh6Q
스킨십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예상치 못한 순간 다가오는 것은 단호히 거절하곤 했나. 그래- 릭은 언제나 타인과의 일정한 거리를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누가 저한테 마음을 쓰는 것도, 마음이 쓰이는 것도 싫었다. 어쩌면 워커홀릭. 사람보다 일이 즐거운 몇몇의 타입 중 하나였다.
...그런데 왜, 당신에게는. 이라고 묻는 게 벌써 몇번째더라. 이번에도 당신이 마음대로 손을 쓰다듬는 것이 싫지 않았다. 총쏘는 모양대로 굳은살이 박힌 단단한 손, 그걸 깨지기 쉬운 세공품 다루듯 섬세하게 매만지는 것이 이상하면서도. 뭐하는 짓이냐며 매몰차게 뿌리치고 싶지 않았다. 가슴 속 선연히 피어오르는 몽글몽글한 감정이 아찔하다. 단지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내려앉는 것이 생소했다. 어쩐지 입맞췄을 때보다 조금 더 가슴이 아픈지도 모르겠다. 릭은 천천히 폴라리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정면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닿아있는 손을 파고들었다. 격렬하지 않고, 아주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어루만지는 손가락들 사이에 제 것을 끼워넣었다. 훨씬 손마디임에도 완벽히 맞물리는 틈새가 따뜻하고 신기해. 도망치지 못하게 잡아둔 것이 움찔거리는 것 같아서 조금 더 힘주어 가두었다. 잡았다가, 놓았다가. 들려오는 심장 박동을 따라 느릿하게 감싸 안다가- 또 다시 힘을 푼다. ...일부러 그렇게 한 건 아니야. 그렇게 계속 잡고만 있었다간 먼저 터지는 쪽이 당신의 작은 손일지 내 마음일지 모르겠어서. 그래서 그랬다고 되뇌인다.

릭은 자유롭게 풀려있는 왼손으로 제 얼굴 하관을 살짝 가렸다. 민망했던 걸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태연한 표정이지만. 손을 잡고 있는 그 오랫동안(릭은 꼭 수 시간 같은 5분이라고 생각했다)에도 이 차가운 남자는 무표정한 채 저와 맞닿아있는 여자의 얼굴을 절대 돌아보지 않았다. 오직 정면만을 응시한 채, 한마디쯤 건넬 법한 다정한 사랑고백도 굳게 다물린 입 안에 닫아두었다. 또다시 나온 그 특유의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 의아할지도 모르겠다. 이래서야 처음 만났던 날과 다를 바가 없는 듯한 얼굴. 그래도 이해해주었으면. 이제는 알 법도 해, 그는 그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뿐만 아니라 감정이 격해질 수록 표정이 없어지는 사람이다.

사랑해.
어쩌면 당신을 나보다 더.
그래서 속으로만 이야기했다.


-


멀어지는 손이 아쉬웠는지도 몰랐다. 사자는 그제서야 눈을 마주쳐 폴라리스의 상냥한 미소를 보았다.

Goodnight. 잘자요. 잠을 설쳤다는 말도 기억하고 있다. 똑똑하고 세심한 여자.
돌아서는 끝인사에 희미하게 웃었다.

"Have a good dream, sweet heart."

그리고 사랑스러운 사람.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말랑하고 달짝지근한.

릭은 폴라리스를 보내기 위해 굳이 차에서 내리지는 않았다. 그녀가 혼자 힘으로 벨트를 풀고 문을 열고 하는 것을 가로막고싶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다만 차에 탄 채로, 살짝 고개를 꺾어 그녀가 집 안에서 사라지는 것까지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집안에 불이 켜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시동을 걸었다. 아주아주 느릿하게 키를 돌리고, 기어를 바꾸고. 헤드라이트를 켰다.
엔진소리 하나 내지 않는 차는 오래 멈춰있던 곳을 천천히 떠난다. 당신을 데리러오는 건 생각보다 더 즐거운 일이었구나. 앞으로 꽤 자주 이 집 앞에 오고싶을 것 같다고- 그는 문득 생각했다.

46 밤의학교 외전 (4850063E+5)

2018-12-28 (불탄다..!) 00:13:41

외전 1
별명 : 폴리주 기능 : 작성일 : 17-09-03 18:09 ID : sipybwnh5AIkY
[제인과 릭의 경우]

-릭은 내 파파인 거야?

한 번도 그렇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제인은 이 질문을 릭에게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다. 동갑인 소꿉친구는 언제부터인지 이제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부터 오빠인 양, 심지어 아빠인 양 굴었다. 그리고 저를 과하게 보호했다. 내 아빠가 되고 싶은 거냐고, 물을까 하다가 응. 이라는 대답이 떨어질까 무서워 차마 묻지도 못했다.

*

“오빠라고 불러 봐.”

“…”

대뜸 요구하는 릭을 제인은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확 아빠라고 불러버릴까 보다. 잠시 마음속으로 갈등하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무리 지금은 둘만 있다지만 여기는 학교. 학생회실. 사적인 공간이 아니다. 제인은 심부름으로 가져온 서류를 릭의 책상에 내려놓았다.

“회장님. 선배님. 이거 결제해주세요.”

내려놓고, 방긋 웃는 얼굴로 사무적인 대사만을 하고서 이윽고 고개를 꾸벅 숙인다. 그리고 총총 물러가 학생회실을 빠져 나간다. 회장도 아니고 회장님. 선배도 아니고 선배님. 한껏 거리감이 느껴지는 호칭에 릭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제인은 모른다.

…오빠와 여동생은 되기 싫다고. 속으로 깊은 한숨을 삼키는 제인을 릭 역시 모른다. 모를 것이다.

*

“안녕, 릭. 오늘도 좋은 하루 보냈어?”

내가 좋은 하루가 아니었더라도, 너는 늘 좋은 하루를 보내길. 바란다. 제인은 생글거리며 릭의 품 안에 파묻혀 있었던 고개를 들고서 그에게 여상하게 질문을 던졌다.

“응. 너도 좋은 하루였어?”

제인의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릭이 나직하게 묻는다. 웃음기가 어린 얼굴로. 제인이 좋아하는 그의 미소이다. 물론, 그의 웃음기 어린 얼굴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인은 잠시 그의 미소를 담아두다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방금 막, 좋은 하루가 된 것 같아.”

느릿하게 눈을 깜박거리다가 배시시 웃는다. 정말이야. 나는 방금 막, 좋은 하루가 되었어. 제인은 제가 릭을 꼬옥 끌어안는 순간을 좋아한다. 다른 담배냄새는 싫어하지만, 그의 품에서 희미하게 풍기는 그의 체향과 섞인 담배 냄새는 싫지 않다. 그래도 건강에 안 좋으니 좀 끊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부러 담배 냄새 싫다고 그에게 가끔 말하기도 한다.

그래도 릭은 담배를 끊지 않는다. 정말이지 너무한 남자가 아닐 수 없다.

외전 2
527
별명 : 어쩌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 기능 : 작성일 : 17-08-27 23:50 ID : siWRSfas1x9jk
상당히 불쾌했다. 저만의 감정을 굳이 밖으로 표내고 싶지 않으면서도, 열아홉의 미성숙한 소년이 그것을 완전히 숨기는 건 영 불가능한 일인지도 몰랐다. 뛰어봤자 벼룩- 제아무리 똑똑하다 해도 열아홉이 스물다섯보다 감정조절에 능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암.

교문 앞에서 함께 하교할 소꿉친구를 기다리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장면을 보아버린 것이 바로 30분 전이다. 그러니까 그 기다리던 소꿉친구, 제인이, 웬 처음보는 남학생에게 고백을 받고 있더라. 정확히 무슨 감정이라고 정의내릴 수는 없겠지만 속에서 복잡미묘한 무언가가 피어올랐다. ...곱게 키워온 딸내미가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를 놈팽이를 남자친구라고 데려오는 기분? 아니, 이건 아닌가. 릭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깔끔하게 고백을 거절하고 온 제인에게 연애는 신중하게 해야한다느니, 아까 그놈은 눈빛이 탁한게 이상한 놈 같다느니 되도 않는 설교를 늘어놓고 있는 모습은 제가 생각해도 사윗감이 맘에 들지 않아 투정부리는 아버지의 모습과 비슷했다. 그리고 잠자코 듣고 있던 제인이 한 마디를 툭 던진 그 순간, 티내지 않았지만 상당히 당황했던 것 같다.

근데 그러는 너도 여자친구 많았잖아.

...또 누구한테 들은거야. 아이작? 시저? 예상치 못한 말, 그에 대답을 생각하느라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짧은 공백동안 릭은 머릿속에 수없이 많은 얼굴들을 떠올렸다. 누군지 몰라도 가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입술을 달싹였다.

...한 명도 없었는데?

그러나 이윽고 나온 대답은, 생각하고 말했다고 하기에도 민망한. 아. 젠장. 지나치게 유치해서 입안이 썼다. 뭘 어쩌자고 뻔한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언제나 친절한 미소를 무기처럼 휘감고 있다만, 그래도 제인의 앞에서는 되도록이면 솔직한 편이었다. 제인은 모두의 호감을 사는 당정한 학생회장 외에 릭의 수많은 모습을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였다. 구태여 거짓을 말할 필요가 없었다. 너는 특별한 존재였다.

특별한. 릭은 순간, 오래전 오늘, 그림같이 스쳐지나가던 기억들을 떠올렸다.
그의 소중한 소꿉친구 제인은, 꼭 저와 닮은 고양이를 좋아했다. 동물 같은 것에 일절 관심도 없는 릭과는 다르게 말이지. 그래도 친구는 친구라고 제인이 길가던 고양이를 붙잡고 앉아있으면 한발짝 뒤에 서서 가만히 기다려주기는 했던 것 같다. 한두번 있었던 일도 아니니 이제는 그러한 기다림이 익숙해질 노릇이다. 릭이 떠올린 그날도 언제나와 같았다. 신기하네, 제인은 이상하게 동물들이 잘 따르는 걸. 갸웃하면서도 또다시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는 제인을 지켜보았다. 노을지던 담벼락. 그 앞에 쪼그려앉아있는 소녀와, 멀찍이 떨어져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소년.
...어쩐지 그 모습을 혼자만 담아두고 싶어졌다. 왜였을까.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아까 고백했던 그 남학생을 받아줬다면, 이제는 그와도 그 작은 뒷모습을 공유했겠지. 그리 생각하니 심장 한켠이 지독히 쓰렸다. 쿵. 내려앉는다. 어째서인가. 어째서, 어째서... 아아, 사실은 알고 있다.

시집가는 딸을 보내는 아버지의 마음 따위가 아니지. 그래. 사실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어.

"제인."

릭은 나란히 움직이던 걸음을 멈췄다. 릭이 항상 느리다고 생각하던 제인의 걸음은 멈춰서 보면 의외로 그렇지 않아서, 그녀가 뒤돌아 그 자리에 멈춰 있는 릭을 보았을 때 둘 사이의 거리는 이미 상당히 멀어진 채였다. 릭은 굳이 그 간격을 좁히지 않았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좋아해."

뜬끔없는 고백. 목소리가 조금 떨린 것도 같다. 그러나 릭은 제인이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나도 릭 좋아해, 따위의 말을 뱉을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내 좋아해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걸 이제는 너도 알아야지. 망설이지 않고 터트리듯 이어나간다.

"연애하자, 나랑."

우리가 어떤 세계에 살고 있든. 당신이 어디에 있어도. 어떤 모습이어도. ...왠지 이 말을 전에도 한 적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연애하자.
열아홉의 릭은 천진하게 웃었다.

외전 3
별명 : 어쩌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2 기능 : 작성일 : 17-09-03 23:52 ID : sipybwnh5AIkY
연애는 신중하게 해야 한다느니, 아까 그놈은 눈빛이 탁한 게 이상한 놈 같다느니 되도 않는 설교를 늘어놓고 있는 릭을 보며 제인은 내 친아빠도 그런 잔소리는 안 하겠다, 태클을 걸어주고 싶어졌다. 때때로 내게는 아빠가 둘인 것 같아.

“근데 그러는 너도 여자친구 많았잖아.”

잠자코 듣고 있다가 결국에는 툭, 태클을 걸었다. 걸지 않았다가는 하굣길 내내 설교를 듣고 있을 거 같아서. 그녀의 태클에 그가 침묵했다. 그렇게 길지는 않은 침묵이지만, 제인은 그가 내심 당황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간파했다. 당황할 게 뭐가 있어. 나는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제인은 그가 입술을 달싹이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 명도 없었는데?”

…되게 티나는 거짓말이다. 태양이 북쪽에서 뜬다는 게 저것보다는 덜 거짓말 같겠다. 피식 웃어야 하나, 헛웃음을 터뜨려야 하나. 조금 고민하며 제인은 그저 새초롬한 무표정으로 입 다물고 릭을 응시했다. 그리고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입 다물고 걸음을 멈추는 릭을 두고 먼저 걸어 나갔다. 알아서 따라오겠지. 내 걸음이 그렇게 따라잡기 어려운 편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평소보다 조금 더 느릿하게 걸었던 것 같다.

“제인.”

그가 그녀를 불렀다. 제인은 당연하게 릭을 돌아보았다. 자리에 멈춰 있는 릭을 보았을 때 둘 사이의 거리는 제인의 예상보다 멀어져 있었다. 제인은 굳이 그 간격을 좁히지 않고서 그를 지켜본다. 이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그가 그녀에게 꺼내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에.

“좋아해.”

…뭘 새삼스럽게. 라고 말하기에는 그의 목소리가 떨리는 게 심상치 않았다. 조금의 떨림, 그리고 망설임 없는 눈빛. 아. 고백을 목전에 둔 남자의 모습이다. 제인은 고백을 한두 번 받았던 게 아니다. 아무리 둔한 여자라도 여러 번 반복되는 일에는 깨닫는 게 있기 마련이다. 제인은 릭의 입술에서 마저 흘러나올 말을 알 것 같으면서도, 제 예측이 빗나가길 바랐다.

“연애하자, 나랑.”

애석하게도 그녀의 예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예측과 차이가 있다면 나랑 사귀자가 아닌, 연애하자 나랑. 이라고 의미는 같은데 대사가 조금 다른 정도의 차이일까. 제인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의 천진한 미소가 가슴에 아프게 박혀들었다. 그 미소는 치사해. 반칙이야. 제인은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동안 침묵했다.

*

“…나는 너랑 연애하기 싫어.”

제인은 시선을 내리깔고 나직하게 말했다. 담담한 어조였다. 그러나 그녀의 속은 그녀의 어조만큼 담담할 수 없었다. 알고 있는 감정들과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섞여서 소용돌이 쳤다. 제인은 릭과 연애하고 싶지 않다. 수없이 갈아치워지는 그의 수많은 여자친구 중 하나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래서. 어쩌면 유일한 소꿉친구 자리에 집착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언제까지나 너의 유일일 수는 없겠지. 네게 수없이 많은 여자친구가 있었다는 말을 전해들은 삼년 전쯤부터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천천히 집착을 버려나갔다. 미련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녀에게 ‘소꿉친구’는 소중한 관계고, ‘릭’은 소중한 사람이니까. 특별한 관계가 깨졌어도 나는 네가 여전히 소중하고 특별해. 그 당연한 사실이 아프다.

“릭.”

실은 나는 너를 보낼 준비를 했어. 하고 있었어. 그런데 예상보다 더. 이별의 순간이 가슴이 아파. 아프고 괴로워. 어쩔 수 없어서 제인은 서럽게 웃었다. 차라리 우는 게 나을 법한 아프고 괴로워 보이는 환한 미소였다. 그러나 그 미소는 제인의 걸음을 따라서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제인은 그에게로 걸어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평소의 걸음걸이였다. 릭의 앞에 멈춰서서 제인은 그의 옷깃-혹은 멱살-을 잡아내려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다. 입술만 닿은 아주 짧은 입맞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아랫입술을 조금 아프게 깨물고 떨어진다. 피가 비칠 정도는 아니고 살짝 따끔하기만 한 수준으로. 그녀는 그에게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다. 그녀는 잡고 있던 그의 옷깃을 순순히 놓아주며 차분한 미소를 그렸다. 물론 겉이 차분하다고 해서, 속까지 차분할 수는 없다.

“결혼해, 나랑.”

네가 나랑 연애하자고 하지 않았으면 꺼내지도 않았을 말이다. 꺼낼 수 없을 말이기도 했다. 제인은 릭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사랑한다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서. 내내 숨기고 있었다. 앞으로도 쭉 숨기고 그에게서 떠날 예정이었는데. 네가 내 걸음을 멈춰 세우고 말았다.

“거절해도 좋아. 대답은 내일 들을게.”

담담하게 고하고 제인은 뒤돌아섰다. 오늘은 차마. 거절의 대답은 못 듣겠다. 이미 충분히 가슴이 아프다. 너무 아파서 찢어진 곳에서 피가 흐르는 것 같다. 그렇지만 내일은 또, 아무렇지도 않게 웃을 수 있겠지. 그래야만 하겠지. 제인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부디 그가 뒤따라오지를 않기를 바라며. 그가 없는 곳에서 혼자서 서럽게 울 생각을 했다.

제인은 여럿이 있을 때, 혹은 릭이 앞에 있을 때 웃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다.

그러나 제인은 혼자 있을 때 우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기도 했다.

47 릭먼의 일기 (4850063E+5)

2018-12-28 (불탄다..!) 00:16:38

995
별명 : Friedrich Rickman's 기능 : 작성일 : 17-09-03 03:44 ID : sijgTPxugKHic
16.
인페르노의 손에 키워졌다. 길바닥을 전전하던 내 재능을 조직의 누군가가 알아보았다. 바깥은 생존을 위한 경쟁의 장, 조직도 그곳과 크게 다르지는 않아보였다.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17.
언제나 혼자 행동하는 것이 더 편했다. 나는 손을 더럽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최고의 수완가였다. 까다로운 조건도 척척 맞춰내는 내게 점점 더 큰 일을 맡기는 게 느껴진다. 일처리는 변함 없이 완벽해. 아직 얼굴에 수염도 나지 않은 꼬맹이라며 무시하던 나를 머지않아 온 조직이 인정하게 될 것이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18.
조직에 묘한 사람이 들어왔다. 나와 마찬가지로 거리에서 자랐다던데, 그럼에도 율리안은 태생부터가 밝고 온화한 소년이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이성적이야. 그리고 그에게는 무엇보다 사람들을 이끄는 특이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신기한 녀석. 드문드문 눈길을 주던 나는 금세 율리안에게 매료되었다.
18.
나는 원체 사교성이 좋은 놈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 율리안이 내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을 때는.. 뭐 조금 놀랐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율리안은 나를 친구라고 불렀다. 나이는 내가 세 살이 많았지만 그 쯤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조직에 비슷한 나잇대가 서로밖에 없었기에 우리는 곧 아주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19.
율리안은 생각보다도 더 괜찮은 친구였다. 이런 친구 한 명쯤은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

24.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율리안과 나의 우정은 여전히 물샐 틈 없이 견고했다. 우리는 마치 서로가 있어야만 완성되는 퍼즐 조각 같았다. 우리가 함께 수행한 임무는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 율리안 말고 다른 사람이 내 파트너가 되는 일은 어느 순간부터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젊은 나이에 이미 조직의 상층부에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다 네 덕분이야, 율리안이 말해주었다. 나는 너 없이는 불가능했을 일이라고 대답했다.

25.
율리안은 항상 주변에 사람이 넘쳤다. 그럼에도 그의 최우선은 항상 나라는 사실이 마음 한 구석으로 기뻤는지도 모른다.

26.
율리안이 요즘 관심 있는 여자가 있다고 고백했다. 율리안과 여자라니, 그가 이성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흥미로운 일이었다. 얼마나 대단한 여자인가 싶어 함께 먼 발치에서 그녀를 구경했다. 햇빛에 물결치는 탐스러운 금발이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래, 확실히 아름다웠다. 왠지 조금 심장 한켠이 조금 두근거렸다.
26.
그녀는 거리에서 꽃을 파는 아가씨였다. 다음날 율리안은 그녀 앞에 놓인 안개꽃 다발을 집어들었다. 이미 여러 번 인사를 나눈 사이인듯 마주보며 웃었다. 이쪽은 내 친구, 율리안이 나를 소개했다. 그녀의 이름은 그웬이라고 했다. 그웬. 내게도 얼굴을 붉히며 웃어주었다. 커지는 심장의 울림이 낯설었다.
26.
얼마 후 율리안은 제 여자친구라며 그녀를 정식으로 소개했다. 알고보니 열여덟 살이라고? 이 도둑놈아, 장난스럽게 엉덩이를 걷어차주었다.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왜였을까. 아아, 친구의 연애를 축복해주지는 못할 망정 질투하는 유치하고 한심한 놈. 벽에 머리를 쳐박았다.

27.
율리안과 그웬은 행복한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27.
율리안은 내가 가지지 못한 많은 것들을 거머쥐었다.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긴 우정을 끊어내야만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율리안은 나의 가장 큰 라이벌이고 동시에 가장 좋은 친구다. 그 역시 나를 그렇게 생각한다.

28.
그웬은 아름다웠다. 무릇 사내라면 한번쯤 사랑해볼 법한 여자였다. 그웬과 율리안은 함께여서 행복해보인다.

29.
해가 갈 수록 고통스러워졌다.

30.
그웬을 사랑해. 율리안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그웬은 좋은 여자였다. 놓치고 싶지 않다면 더 늦기 전에 청혼하라고 조언해주었다.
찌질한 녀석. 그날 아침 면도날에 턱을 벤 것이 아파 조금 울었다.
30.
그웬은 율리안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환호하는 율리안의 전화를 전날 임무로 졸린 눈을 부비며 받았다.
30.
율리안의 최우선은 더 이상 내가 아닌가?

31.
이듬해 봄, 율리안은 그웬과 결혼했다. 성대한 결혼식이었다. 주례를 맡기에 나는 너무 어리고, 축가를 불러주기에는 노래 실력이 좋지 못했다. 대신 식장 한켠에서 실컷 박수를 쳐주었다.
며칠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율리안은 신혼의 행복에 젖어 나까지 신경써줄 겨를이 없었다.

32.
그웬과 율리안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났다. 그웬의 탐스러운 금발과 율리안의 다정한 눈동자를 닮았다. -, 삼촌이야. 그웬은 따뜻하게 웃으며 품 안의 아이를 내게 안겨주었다. 요동치는 작은 생명이 따뜻했다. 당신처럼 사랑스러워.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33.
율리안은 좋은 가장이며 동시에 좋은 조직원이었다. 가정에 집중에 일에 소홀해질 법도 한 그를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 현 보스는 늙고 병들었다. 나와 율리안은 암암리에 다음 대 보스 후보로 내정되어 있었다.
33.
율리안은 점점 더 바빠졌다. 언제까지고 율리안과 파트너일 수는 없는걸 알고 있지만, 아는 것과 인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와 따로 행동하게 되면서 자꾸만 실수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럴 수는 없어. 율리안 카르멘은 나와 친구지만 동시에 라이벌이기도 하다. 이를 악물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가장 밑바닥에서 시작해 가장 높은 곳까지 처절하게 기어오르고 싶었다.

34.
그래도 릭먼보다는 카르멘 쪽이? 누군가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다.
34.
차오르는 분노를 이길 수 없어 단단한 바닥에 몇번이고 주먹을 내리찧었다. 살이 파이고 찢어져 피가 줄줄 흐르는 채로 뼈가 드러났다. 오랜만에 보는 나의 라이벌이 엉망이 된 손을 보고 경악을 하며 달려들었다. 프레드, 무슨 일이야. 나는 그 손길을 거칠게 뿌리쳤다.

35.
네가 감히 날 버려. 그웬과 율리안은 함께 있을 때 더욱 행복해보인다. 치가 떨렸다. 실수가 자꾸만 잦아진다. 돌이켜보면 나는 혼자일 때 가장 완벽했다. 그때, 아직 완벽했던 열여덟, 율리안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계속해서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35.
율리안은 모든 것을 가졌다. 율리안이 나를 망쳤다. 내 모든 것을 빼앗아가고 그는 여전히 행복해보인다.
그가 증오스럽다.

36.
그 사람 좋아 보이던 율리안도 적이 있었음을 처음 깨달았다. 완벽해보이는 그를 향한 시기와 질투. 내 감정은 그런 유치한 종류의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척하며 그들과 어울려줄 수는 있다. 그들을 이용할 방법을 찾았다.
율리안이 아직 가지지 못한 단 하나의 것. 나는 인페르노의 우두머리가 될 것이다.
36.
계획은 순조로웠다.

37.
계획은 순조롭다.
37.
율리안이 배신자였다는 것에 온 조직은 큰 충격을 받았다. 부정하기에 드러난 증거는 지나치게 명백했다. 늙고 병들어 분별력이 떨어진 보스가 분노에 찬 고함을 터트렸다. 그걸로 충분했다. 율리안은 도망쳤다.
37.12.
율리안을 죽이라는 명을 받았다. 추운 겨울이었다.

*


"..., 살려줘."

잘못 들었나. 멍청하게 눈을 꿈뻑였다. 살려달라니, 그 완벽해보이던 네가 내게 목숨을 구걸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미 늦었어,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손쓸 도리도 없을 것이다. 이제 정말 끝이야. 정의내리고 나니 가슴 한켠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생각보다 훨씬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게 무얼까, 염원하던 상황을 마주해 승리감에 도취된, 그따위 억지스러운 카타르시스는 단연코 아냐. 오히려 지독한 불쾌감에 더 가까운.
맙소사. 벌레가 내 온몸을 타고오르는 듯하다. 이어지는 말에 경악했다. 너는 심지어 네 한몸 살아남자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프레드. 그웬을 좋아했던 거 알고 있어."

'그웬과, 내 아이를, 살려줘.'

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숨이 막히는 듯해 나도 모르게 잔기침했다. 총을 쥔 손이 벌벌 떨렸다. 그는 심지어 나를 원망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입닥쳐 율리안, 나는 지금 너를 죽이고 있어. 그웬을 살려달라니. 내가 분명 그웬을, 네 아이를 살려줄거라는, 그 따뜻한 갈색 눈에 담긴 어이없는 확신은 무어냐는 말이다.

왜냐면 너는 그웬을 좋아했으니까. 멍한 눈이 속삭인다. ...아니야, 율리안. 그게 아니야. 나는.

"나는..."
"언더보스."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 망연히 중얼거렸다. 뒤에 서있던 조직원이 떨리는 어깨 위에 두툼한 손을 턱 얹었다. 언더보스.
냉정한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숨이 끊어졌습니다."

율리안 카르멘이 죽었습니다. 그가 나직하게 보고했다.

-

네가 죽었던 12월의 그 눈덮인 길을 아직 기억하니. 그의 내장을 헤집고 흘러나오는 피에 사방에 만연했던 순수한 눈은 비릿한 냄새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왔던 율리안은 채 눈도 감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추운 날씨임에도 눈 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 그는 금방이라도 그 다정한 눈을 빛내며 장난스럽게 자리를 털고 일어날 것 같았다. 프레드, 내 친구. 너니까 용서할게. 다신 이러지 마. 아무렇지도 않게 허허 웃어보일 것만 같았다.

...일어나.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나는 친구의 눈을 감겨주지 않았다.

-

그웬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제 남편이 차가운 눈길에서 죽어갈동안, 그녀는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피흘리는 몸을 이끌어 도망쳤다. 붙잡았을 때는 이미 죽어있었다. 그웬과 내 아이를 살려줘. 율리안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숨이 턱 막혔다.

"-,님."

이제 어떻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이가,-"

아이. 그 순간 불현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이가, 살아있는데요."

정말 그랬다. 율리안을 닮은 갈색 눈동자의 아이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죽은 그웬의 부른 배를 보고 그제서야 알았지만, 그녀는 임신중이었다고 했다. 율리안과 사이가 틀어진 후-사실 내 일방적인 감정이었지만-로는 관심도 가지지 않아서 그들에게 둘째가 생긴 줄도 몰랐다. 율리안이 말했던 자식은 어쩌면 그쪽이었을까. 이제는 영영 알수 없는 노릇이니 그냥 내 마음대로 생각하기로 싶어졌다. 떨리는 걸음으로 살아남은 아이의 앞에 무릎꿇었다. 형형한 눈동자는 조금도 기죽지 않고 나를 마주보았다.

"...얘야, 이름이 무어냐."

나는 분명 너를 안은 적도 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이야, 너의 이름은 무엇이었지.

"......"
"...대답해주지 않을 테냐?"

아이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않았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았다. 다만 율리안의 눈동자로서 가만히 나를 꿰뚫었다. 이름이 무어냐. 대답해주지 않을테냐. 말을 잃은 듯한 모습에 탄식했다. 아아, 사실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너는 이제부터 내 아들이다."

율리안. 나를 용서해줘.

"릭. 내 성을 따서 릭Rick이라고 하자."

그래도 카르멘보다는 릭먼Rickman 쪽이. 나는 눈을 감았다.

*

38.
나는 그토록 염원하던 자리에 올랐다.

48 다섯번째 일상(1) (4850063E+5)

2018-12-28 (불탄다..!) 00:19:06

5-1
별명 : 폴라리스 - ??(알렌) 기능 : 작성일 : 17-09-03 22:16 ID : sipybwnh5AIkY
폴라리스는 시선에 예민한 사람이다. 비단 시선에만 예민한 시선은 아니지만. 며칠 째 제 뒤를 쫓는 시선을 눈치못챌 정도로 둔한 인간은 아니라는 뜻이다. (덕분에 제인이라거나, 다른 모습으로 분하지 못하고 계속 폴라리스로 있어야 했다.) 스토커가 붙은 걸까. 이번에는 어떤 사람일까. 미친 놈? 사이코? 변태? 일단은 만나봐야 정체를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저 셋 중 누구를 만나도 놀랍지도, 신선하지도 않을 것 같다.

어떻게 할까. 여상하게 골목길을 걸으며 폴라리스는 생각에 잠긴다. 저 시선의 주인을 내 앞에 튀어나오게 하려면 내가 뭘 하면 좋을까. 나오라고 순순히 말하면 들어주려나? 아니, 그건 아니겠지.

해서 폴라리스는 평소에 잘 가지 않는 치안도 안 좋고, cctv도 설치되지 않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핸드폰으로 문자를 쳤다.

[내 휴대폰 지금 위치 추적해서 30분 안에 내 앞에 나타나줘요. 나 납치할 준비하고서. 번호판 없는 차에 실어 옮겨요. 추적 위험이 있으니까. 추적에 대한 대처는 숙지하고 있죠?]

잠시 신세 좀 져야겠다. 계속 신세지는 것은 싫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지.... 폴리는 한숨을 삼켰다. 그리고 핸드폰을 닫았다. 내 핸드백에 있는 오늘의 무기가 뭐더라. 총은 없고, 립스틱으로 위장한 미니 전기충격기는 있었지. 폴라리스는 핸드폰을 핸드백에 집어 넣고, 검은 샤넬 케이스 립스틱-실은 전기 충격기-를 꺼내 손 안에 쥐었다. 물론 내 무기가 이것만 있는 건 아니야.

*

폴라리스는 객관적으로 보면 요정처럼 청순한 여자다. 치안 안 좋은 곳을 어슬렁거리는 취객이나 불량배들의 보기좋은 먹이감이라는 거다. 척봐도 양야치인 사람이 슬렁슬렁 접근해온다.

"거기, 예쁜 언니. 나랑 술 한잔 할래?"

이미 한 잔 이상 걸쳤구만. 바텐더는 취하지 않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기민하게 판단한다. 저 남자는 지금 살짝 취했다. 폴라리스는 겁을 살짝 먹은 표정으로 접근해오는 남자를 보며 몸을 움찔 떨었다.

"시, 싫어요. 접근하지 마세요. 페트롤을 부를거야."

첫마디는 긴장한 것처럼 떨려나왔다. 최대한 의연하게 대처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연약하게 겁을 집어 먹는 사슴같은 폴라리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접근하는 남자를 앞에두고 천천히 뒷걸음질 했다. 누가봐도 위험에 처한 건 이 여자일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정말로 위험에 처한 건 누구일까?

5-2

별명 : 알렌-그 여자 기능 : 작성일 : 17-09-04 18:17 ID : siWDwhVJFpWJA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사자에게 목숨을 빚졌다. 한 조직의 머리에 앉은 남자의 은혜를 입는 것은 분명 흔치 않은 일이지만, 알렌은 운좋게도 그 바늘구멍같은 확률을 뚫고 맹수의 자비를 얻어냈다. 피흘리는 제게 내밀어지는 단단한 손, 빛을 등져 캄캄한 역광 속에서도 번득이는 눈. 마주친 순간 그는 평생을 몸바칠 충성을 맹세했다.

릭님이 부르신다.

아이작이 말했다.
아이작은 수 년을 지켜봐온 알렌의 맹세를 신뢰했다. 그는 제가 처음 약속했던대로 릭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을 것처럼 굴었다. 누군가를 위해 제 자신을 희생한다는 건 말처럼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릭이 흔치 않게 알렌을 아낀다는 것을 안다. 아이작은 알렌이 그 믿음을 깨뜨리지 않기를 바랐다. 사랑하면 눈이 먼다더니, 이전과는 다른 맹점이 생긴 듯한 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서 가볍게 목례하고 돌아서는 알렌의 팔을 무심코 붙잡았다.

알렌. 너 말이야.
......
...아냐 됐어. 가봐.

알렌은 아이작이 우물거리다 삼킨 내용을 분명 심상찮게 생각했을 테다. 미간 사이의 작은 찡그림을 캐치할 정도로 눈치가 빠른 남자니까. 그러나 동시에- 알지 말아야할 것에 대해서는 불필요한 호기심을 참을 줄 안다. 그래서 알렌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휴..

에이씨. 몰라. 알아서 눈치 까고 잘 하겠지. 릭의 집무실이 있는 방향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아이작은 작게 한숨쉬었다. 잘 하겠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가던 길로 돌아섰다.

-

알렌은 침을 삼켰다. 아이작의 예상대로 그는 눈치가 빠르다. 그는 시립한 채로 릭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사자의 표정을 보고 대번에 제 상사가 그렇게 뜸을 들였던 이유를 조금은 깨달았다.

그러니까, 지켜보다가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바로 보고해.

단호하다가도 '폴라리스'의 이야기가 나오자 다시 부드러운 얼굴이 낯설다. 알렌은 제가 모시는 남자가 그런 표정을 짓는 모양을 난생 처음 보았다. 그는 릭이 내미는 사진을 받아들었다. 선명한 초상은 눈처럼 흰 머리칼을 가진 여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예쁘장하다. 알렌이 그녀를 처음 보고 느낀 감상은 딱 그 정도였다.

"보고만 할까요, 끼어들어서 저지할까요."

그러나 견고한 빙벽을 무너뜨리고 사자를 변하게 한 여자다. 사진에서 눈을 떼고 무미건조하게 물었다. 털끝 하나 다치게 하지 마. 대답은 간결하고 단호했다.

-

사자에게서 그런 표정을 이끌어낸 여자가 궁금했다. 존경해 마지않던 사람의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는 것은 묘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며칠 간 지켜본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쪽 세계와는 영 거리가 멀어보였다. 아름답지만 그게 전부일 수는 없다. 얼굴로만 따진다면 온 땅을 뒤져서라도 더 예쁜장한 여자를 찾을 수 있을 테다. 그의 가면을 벗겨낸 강점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분께서 이제껏 만났던 여자들과는 뭐가 다른거냐. 공들여 궁리해도 알 수 없었다. 조금은 실망스러운 지도 몰랐다.

그런 주제에 누가봐도 위험한 곳은 왜 굳이 골라다니는지. 젠장, 골치아프게. 수상해보이는 골목에 발을 들이는 폴라리스의 뒤로 알렌이 작게 중얼거렸다.

시, 싫어요. 접근하지 마세요. 페트롤을 부를거야.

과연 예상대로 위험에 빠졌다. 망할. 나직한 욕짓거리를 뱉는다. 털끝 하나 다치게 하지 마, 떠오르는 릭의 목소리를 신호로 발을 뻗었다. 그러나 순간 떠오르는 생각에 그를 잠시 멈칫하게 했다. ...이걸 보고해야되는건가. 고민했다. 아마 릭이 보고하라는 뜻은 이정도의 사소한 해프닝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정도 일로 조직의 머리를 귀찮게 만들고 싶지 않다.

결심이 선 듯 두 남녀에게로 다가갔다. 아, 아. 작게 목을 가다듬었다. 폴라리스에게 닿은 취객의 손이 뒤로 꺾인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이봐... 형씨."

알렌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사납게 생긴 인상은 아니었다. 오히려 선하고 유순해 뵌다는 표현이 맞을까. 얼굴을 가로지르는 긴 칼자국만 아니었어도 완벽히 그러했을 것이다. 강아지같은 눈매, 크고 또렷한 갈색 눈동자. 그러나 어딘가 우수에 차 있는 것은 흡사 버림받은 채 비에 젖은 작은 짐승을 떠올리게 하기도 해. 작고 마른 체구는 분명 남자보다는 소년의 그것에 가깝다.

뭐, 뭐야. 이거 놔!

그런 그를 무시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감이 좋다면 느낄 수 있을 흉흉한 살기였다. 가다듬은 목구멍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믿을 수 없이 음침하고 갈라졌다. 알렌은 희미한 숨을 뱉었다. 취한 성인 남성의 팔을 꺾은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우둑, 뼈가 맞물리는 소리가 난다. 격하게 내지르는 신음이 골목을 울렸다. 그러고도 붙잡은 이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갈길 갑시다."

그 말을 하고서야 손을 놓았다. 조금도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힘이 풀린 즉시, 제 몸을 가누지도 못할만큼 취한 남자는 추한 몰골로 바닥에 엎어져 귀신보듯 뒤를 돌아보았다. 뭐. 알렌이 툭 던지자 히이이익, 괴상한 소리를 내며 비틀거리다 도망친다. 한심한 놈. 애초에 쫓을 생각도 없었다.

"감사 인사는 됐어요."

알렌은 폴라리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달리 작별의 표시도 없이 왔던 길로 빠져나가려고 했다.

5-3
별명 : 폴라리스 - 그 남자 기능 : 작성일 : 17-09-04 19:52 ID : si4iHi+gkHpAM
폴라리스는 부러 위험에 빠졌었다. 혼자 빠져나가려면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는 가벼운 위험이었지만, 제 외양만 보고 판단하면 절대 혼자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음습한 위험에. 가슴께 바로 앞에서 떨리는 손. 불안함에 흔들리는 눈빛과 연약한 표정. 그 가련한 몰골만 보고 있자면, 손바닥 안에 감추어둔 ?혹여라도 들켜봤자 샤넬 립스틱으로밖에 안 보이는- 전기 충격기의 누구도 모를 것이다. 그것을 감춘 폴라리스 외에는.

어쩔까나.

접근해오는 남자, 그리고 가까워진 시선의 주인이라고 판단되는 인기척. 일단 립스틱 사용은 보류해보기로 했다. 취객의 손이 닿기 전에 반의 반 발자국 -놀라 발을 뒤로 뺀 것처럼- 슬그머니 자연스럽게 물러난 폴라리스는, 순식간에 취객을 잡아채는 알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크게 뜬 눈이 흡사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려서 누가 봐도 깜짝 놀란 사람의 모습이었지만, 실은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예측한 미래 안에 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사실 이제 예측한 미래 안에 없는 일이 일어나도 크고 오래 놀라기는 힘들었다. 오래 쪽이 조금 더 힘들었다.

"이봐... 형씨."

객관적으로 보자면 유순한 편에 드는 인상, 그리고 그 유순함을 깨뜨리는 횡으로 눈 밑을 가로지르는 긴 칼자국. 강아지같은 눈매, 크고 또렷한 갈색 눈동자. 그러나 어딘가 우수에 차 있는 것은 약간 버림받은 채 비에 젖은 작은 짐승을 떠올리게 했다. 작고 마른 체구는 분명 남자보다는 소년의 그것에 가깝구나. 어떤 사람은 저 사람에게 단번에 혹할지도 모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폴라리스는 소년소녀도 그보다 어린 아이조차 성인과 평등하게 경계하고 의심하는 사람이다. 어지간한 미남미녀에 혹하기에는 단련된 안목도 높다. 게다가 정말로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어린 악도 있다는 것을 안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 안에 자리한 순수한 악을.

…어려서 순수한 악은 개뿔. 어리든 크든 순수악에 가까운 것은 끔찍하다. 아무리 훌륭한 겉가죽을 뒤집어썼어도 그렇다. 훌륭한 겉가죽이 때때로 흉악한 겉가죽보다 징그럽다는 것을 폴라리스는 안다.

아주 짧은 찰나, 그녀는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마치 그의 영혼을 들여다보듯 깊이.
…보이는 것보다는 안 어릴 것 같은데, 악한 기운은 안 느껴진다. ……지금은 그렇다.

그는 희미한 숨을 뱉었다. 취한 성인 남성의 팔을 꺾은 손에 조금 힘이 들이 들어간 느낌이 들었고. 그 느낌이 들기 무섭게 우둑, 뼈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격하게 내지르는 신음이 골목을 울렸다. 그러고도 취객을 붙잡은 이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뭐, 뭐야. 이거 놔!”

애초에 소년의 외양을 한 그를 무시하지도 않았지만, 그를 무시했을 사람도 ?어지간히 둔감하지 않다면- 깜짝 놀랄 흉흉한 살기였다. (폴라리스가 이쪽관련 감에는 매우 뛰어났기에 느낀 것이긴 했다, 뭐어. 어쩌면 다른 쪽은 둔감할지도 모르겠다만.) 폴라리스는 몸을 옴찔 떨었다. 그리고 아까보다 더 몸을 웅크렸다. 파르르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시선이 그과 취객에게 머문다.

뭐, 사실 그녀는 이정도로 흉흉한 살기 정도에는 겁을 먹지도, 놀라지도, 감탄하지도 않는다. 그냥 살기의 방향이 지금은 저를 향해 있지 않구나, 가만히 속으로 판단할 뿐. 살기의 방향이 제 쪽으로 틀어져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겁? 몸이야 살짝 떨릴지도 모르겠는데. 마음은 전혀.

"..갈길 갑시다."

그 말을 하고서야 그는 손을 놓은 것 같다. 조금도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힘이 풀린 즉시, 제 몸을 가누지도 못할만큼 취한 남자는 추한 몰골로 바닥에 엎어져 귀신보듯 뒤를 돌아본다. 뭐. 그가 툭 짧은 말을 던지자 히이이익, 괴상한 소리를 내며 비틀거리다 도망친다.

어머. 생각보다 간이 조그마하시네요, 이름 모를 취객씨. 그래서야 밤의 도시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어요? 폴라리스는 살짝 태평한 감상을 속으로 했다. 물론 겉으로는 겁을 먹어 조심스럽게 상황을 살펴보는 가련한 사슴같은 꼴을 하고 있지만. 그 가련함에 저를 구해준 남자에 대한 호감정이 자연스럽게 섞인다. 이정도면 밤의 도시 홍천녀 자리는 폴라리스에게 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감사 인사는 됐어요."

그는 폴라리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달리 작별의 표시도 없이 왔던 길로 빠져나가려고 했다. 폴라리스는 립스틱을 제가 입은 자켓의 주머니 안쪽에 집어넣고 그의 조심히 뒤를 따랐다. 따르면서 빠르게 생각했다. 시선의 주인이 맞는 것 같은데, 나를 보는 ?그는 실제로 폴라리스를 거의 쳐다보지도 않았던 것 같다- 눈빛에 스토커 특유의 질척거림이 없었다. 그리고 감사인사는 됐다며 물러서는 걸로 봐서는 내게 큰 관심도 없다. 구해준 걸로 봐서는 모종의 이유가 있겠지. 이유 없이 사람 구하고 사라질 양반이라고는 아직 판단할 수가 없고. 누군가의 부탁, 혹은 명령으로, 날 감시? 감시한 건가? 감시보다는 지켜봤다는 느낌에 더 가까웠는데.

…정보가 부족해.
여기까지 생각이 도달하는데 5초도 안 걸렸다.

하여 그녀는 조금 뛰듯이 빠르게 걸어 그를 따라잡아 마침내 남자의 앞에 척 서서 양팔을 벌렸다. 가지 말아요. 를 단적으로 표현한 제스쳐다. 폴라리스는 어딘가 결연하고 순수한 표정으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만 멈춰보세요, 제 스토커씨.”

청아한 목소리가 차분하게 떨어진다. 그런데 말의 내용이 참 가관이었다. 제 스토커씨, 라는 칭호가 절적치 않은 것은 알겠는데. 며칠간은 내 스토커나 다름없었잖아요, 당신. 그러니까 당분간은 스토커씨라고 부를지도 모르겠어.

“이름이 뭐예요?”

누가 당신을 보낸 거예요? 라고 묻기에는 아직 이르지. 결연하고 순수한 표정에서 빛이 번지듯이. 눈동자가 맑아졌다. 폴라리스는 반짝반짝 눈동자를 깨끗하게 빛내며 그를. 알렌을 바라보며 이름을 물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가장 기초적으로 하는 질문 중에 하나다.

당신은 어디서부터 거짓말을 시작할 건가요.
이름부터?

“사람 구해놓고 그냥 가는 거 아니예요.”

폴라리스는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가 실로 눈부셨다. 밤에 내려온 달의 요정으로 착각할 만치. 달빛이 그녀의 머리카락에, 미소에 잘게 부서졌다.

참고로. 어쩌면 알렌이 구한 것은 폴라리스가 아니라 아까의 취객일지도 모른다.

5-4
별명 : 알렌-거미? 기능 : 작성일 : 17-09-04 20:28 ID : siWDwhVJFpWJA
"잠깐만 멈춰보세요, 제 스토커씨."

헛소리. 알렌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릴 뻔했다. 스토커라니, 너를 취객에게서 구해준 사람에게 웬 우습지도 않은 호칭이냐며 당장이라도 따지고 들고 싶다만, 하기사 지난 며칠 간 그의 꼴이 그 터무니없는 모함과 꽤 흡사했다는 것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눈치채고 있었나. 모른척 시치미를 똑 떼기에는 이미 조금 당황한 표정이 얼굴에 드러난 것 같다. 알렌은 자신이 거짓말에 서툴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가는 팔을 벌리고 제 앞에 서 있는 여자의 저지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지만, 왠지 그대로 밀쳐내고 지나가서는 안될 것 같았다. 사자가 아끼는 여자라서. 따위의 간단한 이유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실이 목을 휘감고 있는 듯한 기분. 눈치채지 못하는 새에 거미줄에 꼼꼼히 매여버린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다.

알렌은 자신이 거짓말에 서툴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양심이란 건 저 깊은 바닷속에 던져버린지 오래인데, 이상도 하지. 거짓인 것을 고하려고만 하면 굳어지는 얼굴이 언제나 그의 발목을 잡았다. 여자가 이름을 물어온다. 굳이 중요하지도 않은 것을 숨겨 더 큰 것을 잃지 말자. 마른 입술이 천천히 공간을 벌려냈다.

"알렌."

무언가를 눈치채서 이러는건가, 아니면. 좋지 않은 예감이 스멀스멀 타고 올라왔다. 애초에 이 여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자체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사람 구해놓고 그냥 가는 거 아니라니, 눈빛을 보아 쉽게 놓아주진 않을 심산이다.

"...비켜줘요."

어쨌든 오래 마주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알렌은 한시라도 빨리 골목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내, 폴라리스를 옆으로 밀어내고 가려던 손이 공중에서 잠시 멈췄다. ...아, 그놈의 털끝 하나. 릭의 명령이 영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단 평화적인 해결을 보는 쪽을 택했다. 비켜줘요. 갈라진 목소리가 건조하게 요구한다.

5-5
별명 : 폴라리스 - 알렌 기능 : 작성일 : 17-09-04 20:54 ID : si4iHi+gkHpAM
입술이 살짝 달싹여진 모양으로 봐서는 헛, 이 나오려다가 끊긴 것 같다. 추론하자면. 헛소리. 혹은 헛소리 하지 마라? …어머. 아주 허튼 소리는 안 했어요. 당신의 얼굴에 떠오른 당황을 보고 판단하건데, 당신도 내 말이 아주 헛소리가 아니란 것을 자각하고는 있을 거 아냐.

…왜 오싹해하지?
폴라리스는 의문을 품었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말똥말똥한 시선으로 순백에 가까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다. 시선을 당당하게 맞추고서.

…???? 왜 찝찝하고 더러워하는 것 같지????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을 때때로 놀라울 정도로 예민하게 느끼는 폴라리스의 육감이 의아함을 가졌다. 나 찝찝하고 더러운 여자 아닌데, 깨끗하게 잘 씻고 다니는데. 작게 꿍얼거리고 싶기도 했다. 해서 마음속으로만 꿍얼거렸다.

알렌.

진짜 이름인가? 아니면 가명인가? 아직은 판단할 수 없지만, 거짓을 말하는 모양새는 아니다. 단지 작은 것으로 더 큰 것을 덮으려는 느낌이 들 뿐. 흐응. 뭘 숨기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비켜줘요.

갈라진 목소리가 건조하게 요구한다. 폴라리스는 공중에 멈춰진 알렌의 한 손을 양손으로 감싸듯이 잡았다. 부드러운 손길. 뿌리치려면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는 연약한 손이, 제법 상냥하게 그의 손을 감쌌다. 뿌리칠테면 뿌리쳐보라지. 실은 뿌리치는 게 당신에게 더 나쁜 선택지 일거야. 폴라리스는 빙긋, 상냥한 미소를 그렸다.

“싫어요.”

차분한 목소리가 상냥했지만 어딘지 단호했다. 비켜줄 생각 없어요.

“알렌.”

가르쳐준 이름을 가만히 불러보며, 그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청량한 눈동자가 또렷하게 그를 바라본다.

“당신은 스토커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죠.”

부정할 수 없었다, 에 가까웠을까요? 폴라리스는 속으로 질문을 골랐다.
왜 내 스토커가 된 거예요? 누가 시켰어요?
…가장 단순하고 핵심적인 질문은 이건데. 이렇게 물어보면 되게 어린애 말투 같은데. 폴라리스는 잠깐 고민하고 입을 열었다.

“대체 왜 제 스토커가 된 거예요?”

…이것도 썩 어른스런 말투는 아닌 것 같다. 그렇지만 이것이 좀 더 포괄적인 질문이기도 했다. 아까 속으로 한 질문보다는 나을지도. 음, 아마 나을 거야.

5-6
별명 : 알렌-폴리 기능 : 작성일 : 17-09-04 21:24 ID : siWDwhVJFpWJA
두 사람의 손이 닿은 순간, 알렌은 겹쳐오는 손가락을 거의 반사적으로 뿌리쳐냈다. 그건 어떠한 불쾌감이나 찝찝함 때문이라기는 어려웠다. 느닷없이 발생한 이성과의 스킨쉽이 부끄러워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당혹스러웠는지도 몰랐다.

'갑자기 왜..?'

알 수 없었다. 그는 잡혔던 손을 반대쪽 손으로 감싸고 일단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알렌은 상당히 손이 차가운 사람이며, 그 낮은 체온에 누군가의 온기가 더해지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상대가 제 주인의 애인이라면 더더욱 그러하겠지. 목이 칼칼해졌다. 퉤, 옆으로 침을 뱉었다.

당신은 스토커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죠. 알렌은 침묵했다. 그러나 머릿속으로는 여러가지 생각들이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그냥 아니라고 말할걸 그랬나. 그러나 이제와 고개를 젓기에는 타이밍이 심하게 늦어버렸다. 대체 왜 제 스토커가 된 거예요. 침묵하는 그에게 여자가 또다시 묻는다. 젠장... 속으로 중얼거렸다. 영 내키지 않지만 그럼에도 답은 하나인 것 같았다.

"...그런 적 없어."

오답임을 알면서도 선택해야 한다. 퍽 끔찍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거짓말하는 스토커로 남는 게 낫지, 더 이상 일을 키우는건 곤란하다. 적당히 기회를 봐서 빠져나가자- 아마도 이쪽이 제일 나은 돌파구일 터. 그렇게 판단하고 싶었다.

5-7
별명 : 폴라리스 - 알렌 기능 : 작성일 : 17-09-04 21:45 ID : si4iHi+gkHpAM
아야. 뿌리쳐진 순간 작게 신음했다. …크게 아픈 건 아닌데. 찝찝하고 더러워서 뿌리친건가, 생각하면 시무룩했다. 아이씨. 내가 그렇게 더러워요? 폴라리스는 눈썹을 팔자로 내리고 약간 시무룩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뿌리쳐질 거라는 것은 예상 답지에 있었는데, 찝찝하고 더러워서 그런 거면 약간 상처 받을 거 같아요.

퇘, 옆으로 침을 뱉은 것에는 약간 더 상처 받은 것 같다. …나 진짜 더럽나. 킁, 제 옷소매에 대고 맡아보지만. 달콤한 칵테일 냄새와 특유의 포근한 냄새가 섞여날 뿐. 딱히 더러운 냄새는 안 난다. …나한테만 이런 냄새고, 다른 사람한테는 안 좋은 냄새인가……. 후각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하고, 나한테 좋은 냄새가 다른 사람에게는 안 좋은 냄새일 수도 있으니까. 이해는 할 수 있다만.

혹시 저 냄새 나요? 혼잣말하듯 작게 물었다.

물론 상처 몇 번 입어도 폴라리스의 멘탈은 흔들리지 않는다. 단지 시무룩할 뿐이다. 시무룩한 와중에도 그가 머리를 바삐 굴리는 것 정도는 눈치챈다.

...그런 적 없어.

너무나도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다. 인간 거짓말 탐지기가 아니라 일반 사람 데려와도 저 거짓말은 맞추겠다. 폴라리스는 눈을 두어번 깜박거렸다.

“거짓말.”

빠져나가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그건 안 될 말이지. 폴라리스는 핸드백에서 핸드폰을 꺼내 짧고 빠르게 문자했다. 물론 폴라리스가 핸드폰을 꺼내 뭐라고 치는 것은 알겠지만, 알렌이 그 문자 내용까지는 못 읽도록 신경 썼다. 애초에 핸드폰 타자 빠르게 치려고 마음먹으면 되게 빠르기도 했고. 이것이 바로 핸드폰에 익숙한 현대인의 모습이다. [약속 취소. 미안해요.] 납치 취소. 미안해요. 납치라는 단어는 약속이라고 바꿔도 알아듣겠지. 폴라리스는 포르르 한숨을 쉬고 핸드폰을 도로 제 핸드백에 집어넣었다.

“당신의 의지로 한 건 아니죠? 누가 시켰어요?”

이번에는 좀 더, 직설적으로 묻는다. 말끄럼한 표정으로.

“…아, 맞다. 아까 구해준 거 고마워요.”

깜박할 뻔 했다. 감사의 말을 전하고, 폴라리스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도로 올렸다. 살짝 머쓱하게 웃은 것도 같다. 정중하지만, 짧은 목례. 실은 이거 나말고, 아까 취객이 해야 할 감사인사일까? 라는 생각이 안 드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나도 구해준 건 맞으니까.

5-8
별명 : 알렌-폴리 기능 : 작성일 : 17-09-04 22:14 ID : siWDwhVJFpWJA
꼭 상처받은 듯한 표정. 그 눈빛과 마주친 순간, 멀리 버려두었다고 생각한 알렌의 양심이 다시 그에게로 찾아와 시린 가슴 한구석을 쿡쿡 찔렀다. 그는 그제서야 아무렇지 않게 침을 뱉은 저의 행동이 상대에게 어떻게 비춰졌을 지를 생각했다. ...아니,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양심이 찔려오는 강도가 아까보다 조금 더 강해진 것도 같다. 그런 의미는 아니었어요, 갈라진 목소리가 또다시 기를 펴려다 삼켜진다.- 그래. 이러니저러니 해도 알렌은 본성이 막돼먹은 사람은 아닌 것이다.

거짓말. 내뱉어지는 목소리에 알렌은 눈에 띄게 움찔했다. 조금 위험한 지도. 폴라리스가 보내는 문자의 화살이 릭이 아니기만을 바랐다. 당신 의지로 한건 아니죠. 누가 시켰어요. 날카로운 질문들이 쏟아진다. 곤란하다. 때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은 최악의 선택이 되는 것을, 그러나 알렌은 알면서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아까 구해준거 고마워요. 그 말이 나오고서야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특이하다는 말 많이 듣죠."

평이하게 끝났지만 분명한 질문형이었다. 어쩌면, 조금 엉뚱하기도 한. 그러나 알렌은 아까부터 그것을 묻고 싶었다. 자, 저 여자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분명 제정신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취객을 만난데다 알지도 못하는 스토커까지 따라붙은 상황인데- 왜 놀라지도 겁먹지도(정확히는, 겁먹었지만 지금 꼴을 보아하니 연기였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않냐는 말이다. 심지어 어느순간 페이스에 말려들어 위화감을 느끼지도 못했다. ...설마 아까 그 취객도 나를 끌어내려는 계획이었던가. 꼭 기다렸다는 듯이, '안녕하세요 스토커씨-아니, 그런 대사는 아니었는데-'하던 모양이 심상찮았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조금 소름이 돋는다.

지잉, 누군가의 휴대전화에서 긴 진동음이 울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보아하니 폴라리스의 가방 안에서 울리는 것은 아니다. 알렌은 황급히 제 바지춤에 손을 얹었다. 꺼내어 발신인을 확인한 표정이 조금 창백해졌다.

[Underboss]

...끔찍한 타이밍. 알렌은 이걸 받아야할지, 말아야할지를 잠시 고민했다.

5-9
별명 : 폴라리스 - 알렌 기능 : 작성일 : 17-09-04 22:32 ID : si4iHi+gkHpAM
…거짓말 잘 못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나처럼 연기로 철저하게 덮어버리는 타입인가. 움찔 떠는 게 너무 잘 보여서 되려 의심스럽다. 곤란해하며 침묵하는 그를 보며 폴라리스는 지금은 전자 쪽에 더 무게를 두었다.

“제가요? 아니면 당신이?”

제가요? 할 때 이리 갸웃. 아니면 당신이? 할 때 저리 갸웃.
잠시 생각에 잠긴 폴라리스는 눈을 깜박였다. 속눈썹이 나비날개처럼 팔랑팔랑 움직였다.

“나 제법 평범하지 않아요?”

폴라리스는 여상하게 물었다.

아니요, 절대.

릭도 알렌도 폴라리스가 평범하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지인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것이다. 하지만 나 특이하다는 말은 별로 안 들은 것 같기도 한데…… 음. 뭐, 평범과는 거리가 있지만. 나보다 더 특이한 사람도 찾아보면 있을 텐데. 무덤덤하게 생각했다.

-지잉.

긴 진동음이 울렸다. 제 전화는 아니었다. 표정이 조금 창백하게 변한 남자를 보고 폴라리스는 아주 짧게 고민했다.

“전화 받아도 돼요.”

중요한 전화 같은데, 흠. 표정을 보아하니 어째 받기 곤란한 전화 같기도 했다. 상사? 무서운 상사한테 온 전화인가? 어쩌면 내 뒤를 밟으라 시킨 사람의 전화일지도 모르겠다.

“없는 척 해드릴까요?”

라고 친절하게 말하고 폴라리스는 입에 지퍼 채우는 시늉을 했다. 얌전히 입 다물고 숨소리도 있는 듯 없는 듯 내겠다는 뜻이다.

이것은 폴라리스가 현재 알렌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5-10
별명 : 알렌-폴리 기능 : 작성일 : 17-09-04 23:03 ID : siWDwhVJFpWJA
솔직히 말해서, 알렌은 지금 당장 저 여자를 밀치고 이 골목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를 이 지리한 스토킹-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을 그만둘지 말지는 그 다음에 생각해도 될 문제 아닌가. ...그러나 상황이라는 건 항상 만약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법이다. 내가 눈을 떼고 있는 잠시의 순간 저 여자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정도의 간큰 놈이 흔하지는 않으리라 생각되지만, 누군가 사자의 약점을 노리기라도 한다면. 아마 알렌은 무엇보다 자기 스스로를 용서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전화를 받을 수도, 받지 않을 수도 없다. 이 자리를 피할 수도, 피하지 않을 수도 없다.

알렌이 대답하지 않는 사이 전화는 끊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의 주인은 다시 한번 통화를 시도하지는 않았다. ...감이라면 타고난 사람이니, 어쩌면,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눈치채셨는 지도. 누군가를 보내 상황을 확인할 수도 있겠다. 그러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도 생기겠지. 알렌은 천천히 핸드폰을 내렸다. 요컨대 시간만 끌면 되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쓸데없이 가볍지도 않은 입을 열고싶어진 건 왜였을까. 네가 정말 내 상상만큼 특이하고 대단한 여자인지, 아니면 그저 터무니없는 비약이었는지. 내 주인이 이번에도 옳은 선택을 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아니, 단지 시간만 끌면 되는 일인데.

"...있어요."

무언가를 긁는 듯한 낮고 갈라진 저음이 흘러나온다. 우수에 가득찬 둥근 눈이 폴라리스를 응시했다. 뒤따라오는 말을 들어보니 이번에도 질문형이었던 것 같다.

"...짐작가는 사람."

있다고 해도 없다고 해도, 알렌은 곤란해지고 실망할 것이다. 결국 어느쪽이든 정답은 없다. 아니면 네가 최악의 선택을 하길 바라. 침묵해라. 알렌은 대답을 기다렸다.

5-11
별명 : 폴라리스 - 알렌 기능 : 작성일 : 17-09-04 23:50 ID : si4iHi+gkHpAM
대답하지 않는 사이에 전화는 끊어졌다. 뭐야, 싱겁네. 폴라리스는 그가 천천히 핸드폰을 내리는 것을 보았다. 쓸데없이 동작이 느렸다. 꼭 시간이라도 끌고 싶은 사람처럼.

..있어요.
...짐작가는 사람.

…????
폴라리스는 의아함을 숨기지 않고 그를 보았다.

“꼭 당신한테 짐작 가는 사람이 있다는 말처럼 들리네요. 누구를 짐작하고 싶은데요?”

아마 나를? 이라고 굳이 덧붙이지는 않았다.

물론 의문인 건 눈치챘다. 저 말의 뜻은, 당신 뒤에 누가 서 있냐를. 내가 짐작하냐는 질문이겠지.

“혹시 질문하는 법 모르세요? 목적어도 주어도 다 빼먹고… 말끝도 안 올리고…”

폴라리스는 살짝 난처해하며 말 끄트머리를 흐렸다. 사람이랑 대화를 많이 안 해봤나…? 그건 차마 물을 수 없었다. 팩트폭력이면 어떻게 해. 팩트폭력은 나쁜 거다. 팩트로 사람을 폭행해야 할 때는 그렇게 하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폴라리스는 조심스럽게 그를 살펴보았다. 그 모습이 왠지 그를 상처주기 싫어하는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음. 당신 뒤에 누가 서 있는지 내가 짐작하고 있냐고 묻고 싶은 거라면, 답은 보류예요.”

폴라리스는 한 번 방긋 웃었다.

“그도 그럴게 지금 제게 주어진 정보는 부족하잖아요?”

명료한 말. 그래, 명료한 말이었지만, 말씨는 조곤조곤 부드럽고 상냥했지만. 목소리도 그러했지만.

“저는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는 확신을 가지지 않아요. 짐작도 쉽게는 안 해요.”

그녀는 상냥한 동시에 냉정할 수도 있는 사람이다. 냉정한 투는 아니었지만, 말이 담고 있는 내용이 냉정하다.

폴라리스는 약간 단호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대체 나한테 뭘 원하는 거예요?

“알렌, 혹시 나한테 실망하고 싶어요?”

단호하게 바라보는 것치고는 가벼운 투로 물었다. 마치 일상에서 오늘 날씨가 어떠냐고 묻는 것처럼 여상한 투로. 폴라리스는 이렇게 행동하는 저를 알렌이 어떻게 판단할지 모른다. 해서, 그를 똑바로. 올곧게 바라본다. 무엇 하나라도 놓치지 않도록. 호칭이 저에서 나로 바뀌고.

“내 대답에 충분히 실망했어?”

제 대답이 아니라 내 대답, 그리고 친근한 반말 투. 아아. 진짜로 종잡을 수 없는 여자일지도 모르겠다, 폴라리스는. 폴라리스는 질문을 내던지고 10초 후쯤에 후우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이었다.

“…알렌, 나빠요. 아까부터 저한테만 대답하게 하고, 제 질문에는 제대로 대답도 안 해주고, 거짓말하고, 곤란하면 입이나 다물고, 스토킹하고…”

도로 말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나하나 손가락을 꼽아가며 폴라리스는 가볍게 입술을 삐죽였다. 뾰로통한 표정이지만, 삐진 것은 아니다. 실상, 삐질 게 뭐가 있겠는가. 며칠 째 시선을 받았다지만, 만난 건 오늘이 처음. 삐질만큼 기대할 것도 없는 사이인데.

“저를 진실로 상처 입히고 싶은 거라면,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좋아요.”

이번에도 헛소리, 라고 하려나. 하지만 알렌. 나는 상처 입고자 하면, 진실로 상처받을 수 있는 사람이야. 처음 만나 사람에게도, 그래. 생각하며 폴라리스는 도망도 안 가고, 피하지도 않고, 그냥 가만히 그를 마주 본다. 아마 그녀의 눈동자는 지금 사람의 마음을 비추는 투명한 얼음 호수와 닮았을지도 모르겠다. 깨끗하고 투명해서, 도리어 그 안에 무엇이 있나. 짐작할 수 없는.

“저를 스토킹 하라고, 누가 시켰나요?”

5-12

별명 : Lover - Be Loved 기능 : 작성일 : 17-09-05 02:27 ID : siUSWUaIXVp2k
알렌은 인페르노의 주인이 변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기분이 이상도하지, 그런데 막상 본 그 원인이 되는 여자는 생각보다도 평범한 것이었다. 릭이 평범한 여자를 대상으로 답지 않게 무슨 변덕이라도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녀가 평범하지 않음을 깨달았을 때는 당황했다. 무슨 갑갑하고 비뚤어진 감정이었나. 다시 한번 그녀를 깎아내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필수성분도 어순도 꼬여 영 의미를 알기 힘든 말들의 나열이었다. 실망하고 싶어서. 원체 뛰어난 달변가가 되지 못하는 것도 맞고, 사람을 대하는 데 익숙치 못한 것도 틀리지는 않다. 그러나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릭에게 하는 보고였다면 이렇게 중구난방 괴상한 화법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눈앞의 여자에게 공들여 할말을 고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으면 좋겠다.

혹시 나한테 실망하고 싶나요. 폴라리스는 마침내 물었다. 알렌은 달싹이던 입술을 다물었다. 정곡이었다.

그가 폴라리스의 쏟아지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것은 그것들이 모두 옳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원체 말이 많지 않은 사람이었다. 여느 사람들보다도 더 자주 침묵을 긍정으로써 휘둘렀다. 모두 사실이었다, 다만 그 사이의 단 하나만 빼고. '내 대답에 충분히 실망했어?' 아니... 다만 내 머릿속에서 네 이미지를 완전히 수정하고 있다. 알렌, 나빠요. 알아. 나는 나쁘고 이기적인 사람이지. 너한테만 대답하게 하고, 제대로된 대답도 주지 않고, 잘 하지도 못하는 거짓말을 고하고, 곤란하면 입에 자크를 걸어버리고. 스토킹, 그래, 스토킹.. 맞아. 스토킹하고.

그는 다시 바지 주머니에 넣은 휴대전화에서 은은한 진동이 울리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길게 이어졌다가, 짧게 끊어지며, 아까와는 달리 다시 울리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지금의 그에게 그쯤은 아무런 방해가 되지 못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릭, 내 충성은 당신께 무조건 목숨을 바치는 게 아닙니다. 내 충성은...

'네가 진정 충성을 말한다면, 날 위해 죽을 게 아니라 나를 죽일 각오까지도 되어 있어야지.'

그래, 내 충성은. 알렌은 입을 열었다. 저를 스토킹하라고 누가 시켰나요, 폴라리스가 물었다.

-

알렌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오직 시간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당최의 목적이 상실되어버렸지만, 본래 그래서 시간을 끌기 위해 쓸데없는 말을 늘였다. 릭이 저를 대신할 누군가를 보내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에게 이 여자를 맡기고, 거짓에 서툰 나는 무언가 쓸데없는 정보를 더 흘리기 전에 자리를 떠야지. 판단했다.
과연 옳았다. 알렌을 마주 본 폴라리스가 서있는 등 뒤로 누군가의 인영이 비춰졌다. 알렌은 반쯤 열었던 입술을 도로 다물렸다. 무엇을 고하려고 했을까, 이제 그 순간 무엇이 나올 예정이었는지 영영 알 수 없게 되었다. 햇빛을 막고 서있는 것은 릭이 보낸 사람이다. 역광이라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눈꺼풀마저 살짝 찌푸렸다. 꼭 릭과 처음 만나던 날 같다고 느꼈다. 그분처럼 걸어오는 것은 누구냐- 아이작? 헤일? 사샤?

"...폴라리스."

틀렸어, 알렌. 사자 본인이다.

-

공중에 아연하게 멈춘 알렌의 시선이든, 뒤이은 릭의 나직한 목소리든. 무엇을 신호로든 폴라리스는 아마 뒤를 돌아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돌아본 순간 릭은 그 가는 몸을 세게 껴안았다. 우악스러운 손에 등허리가 끌려왔다. 어깨에 입술을 묻고 표정을 찌푸린 채 눈을 감는다. 긴 머리카락이 날리고, 다가온 것은 향수냄새와 섞인 묘한 체취다. 깊이 파묻는다면 익숙해진 담배향이 섞여 알싸하겠지.

그리고 알렌은 가만히 서서 그것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49 다섯번째 일상(2) (4850063E+5)

2018-12-28 (불탄다..!) 00:23:29

5-13
별명 : P - Ich liebe dich 기능 : 작성일 : 17-09-05 23:28 ID : siBgq569pPCns
정곡이구나.

폴라리스는 제가 알렌의 정곡을 찔렀다는 것을 알아챘다. 무슨 이유로 실망하고 싶었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흐응. 침묵으로 수긍하는 가운데, 단 하나. 그가 아니라고 대답한 게 있다. 나한테 충분히 실망 안 했으면, 완벽하게 실망했냐고 물어봐야 하나…? 물론 알렌이 제 이미지를 완전히 뜯어 고치고 있는지, 거기까지는 모른다. 그를 말로 흔들어서 읽어낼 생각도 현재로써는 없었다. 알렌의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리는 것을 (때때로 좀 지나칠 정도로) 눈썰미 좋은 폴라리스는 포착했다. 왜 안 받아요? 속으로만 물으며 폴라리스는 고개를 갸웃, 옆으로 기울였다. 알렌은 생각에 잠긴 것 같다. 그런데 예감이 쌔했다. …저 사람이 하고 있는 생각의 방향이 썩 내게 좋은 것은 아닌 것 같네. 아니면 뭔가 있거나. 있을 예정이거나. 나한테 뭔가 닥치려나…. 예감이 정말로 안 좋았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찰나. 알렌의 시선이 제 뒤에 무언가를 본 것처럼 아연하게 질렸다.

…?

뒤에 뭐가 있나? 저 아연하게 질린 시선, 아까 알렌이 핸드폰 들여다볼 때 목격했던 것 같은데. 생각하기 무섭게.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나직하게 부른다.

*

...폴라리스.

폴라리스는 돌아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확실하게 확인해야 했다. 그리해서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고, 돌아보기 무섭게 목소리의 주인에게 강한 힘으로 안겨졌다. 우악스러운 손에 등허리가 끌려갔다. 어깨에 살짝 무게가 실린다. 아마도 그가 제 어깨에 입술을 묻은 것 같다. 긴 머리카락이 휘날렸고, 다가온 것은 향수냄새와 섞인 묘한 체취. 익숙해진 담배향이 섞여서 알싸한. …누군지 도저히 모를 수가 없었다. 릭, 당신이군요. 그에게 깊이 파묻힌 상태라 그녀의 표정은 아마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겠지. 그녀는 괴로워 보이는, 아니. 몹시 괴로운 표정으로 눈을 감아버렸다. 어쩐지 예감이 몹시도 안 좋았지. 지금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그녀를 껴안았다. 폴라리스는 그동안 릭의 포옹을 즐겁고 설레고 들뜬 마음으로 바라왔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 원한 것은 아니었다.

폴라리스는 그녀를 스토킹 하도록 지시한 사람 목록에 릭을 상정해둔 적이 없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이전에, 직감이 그가 알렌에게 그녀를 지켜보라고 명령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직감이 말하는 것을 무시하고 싶었다. 직감이 말하는 것을 무시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생각 이전에 이미 판단이 내려져 있었다. 알렌의 시선이 아연해진 것과 그가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 가장 명백한 증거였으니.

…왜 내게 감시자를 붙였어요?

그녀는 묻지 않았다. 왜 내 뒷조사를 했어요? 묻지 않은 것처럼. 얌전히 입을 다물고 그에게 얌전히 인형처럼 안겨 있었다. 뒷조사를 하는 것도, 사람을 붙이는 것도 일반적인 연인관계에 없는 일이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했다.

머리 한 구석이 차갑게 식는 것도 같고, 뜨겁게 끓는 것도 같다. 이토록 강렬하게 충격 받은 게 실로 오랜만이었다. 아주 잠깐 헛웃음이라도 터뜨리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폴라리스는 인간불신이고, 의심병이 깊은 사람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 인간불신이 되는 데에는 언제나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한 번도 누군가에게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당신을 신뢰하고 싶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깨달은 이후로 그러한 마음으로 당신을 믿었다. 믿고 있다고 생각했다.

…미안해요, 릭. 누군가를 온전히 믿기에는 내가 너무 너덜너덜할 사람 인가봐. 내가 너덜너덜한 사람인 게 누군가에게 이토록 미안한 적이 없었는데, 당신에게는 정말로 미안한 것 같아요. 한동안 멈추어 있던 폴라리스는 힘없는 팔을 들어, 그의 등허리에 둘렀다. 포옹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연약한 몸짓.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폴라리스는 어디서 읽었던 구절을 문득 떠올렸다.

-누군가에게 상처 받았다고 해도, 누군가를 상처 입힐 권리는 생기지 않는다.

솔직히 처음 읽을 때는 개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폴라리스는 그를 상처 입힐 권리를 가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렇기에 저 구절을 떠올렸던 것 같다. 폴라리스는 릭이 상처 입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정말로, 진실로 원하지 않는 일이다. 하여 그녀는 침묵을 선택했다. 입 열면 날카로운 말들만 튀어나올 것 같아서, 안으로 씹어 삼키고. 그의 허리를 두른 팔에 아주 살짝 힘을 더했다. 아래쪽의 손은 그냥 거기에 있게 내버려 두고 조금 더 위쪽의 손을 약간 더 위로 올려 그의 등을 천천히 토닥이기 시작했다.

폴라리스는 지금 그에게 안겨 있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러면 얼굴이 안 보이니까. 폴라리스는 그의 품에 더 깊이 얼굴을 묻었다.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도저히 모르겠어서. 어쩌면 상처 입은 사람의 얼굴일지도 모르지. 폴리는 지금 제 얼굴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특히 릭에게는. 보여서는 안 될 것 같았다.

5-14
별명 : RicK-PolariS 기능 : 작성일 : 17-09-06 11:51 ID : siAXapjOZPgFY
보호받을 울타리를 잃은 새끼는 아차하는 순간 무리에서 도태되어버리기 마련이다. 죽은 배신자의 혈육이라는 눅진한 꼬리표는 꽤 오랜 시간 죄없는 소년의 등 뒤에 따라붙었다. 어디까지가 적이고 어디부터가 아군인가. 유년의 초창기부터 끊임없이 관찰하고 계산한다.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운좋게도 릭은 동시에 우두머리의 자식이었다. 명백한 제 편 하나 없는 외로운 상황- 그런 그가 움츠러들지도 겁을 집어먹지도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 그 이유에서였을 테다. 사자왕의 죄책감에서 파생된 감정은 점차 그 싹을 틔워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자식을 진심으로 아낄 수 있게 만들었다. 새로운 울타리의 보호 아래서 릭은 조직의 그 누구로부터도 상처받지 않았다. 게다가 사자의 아들은 그 특별 대우를 뒷받침해줄 능력마저 가지고 있었다. 명석하고 기민하다. 남들보다 퍽 머리가 좋다는 것은 말랑한 손에 굳은살이 채 박히기도 전에 스스로 깨달았다. 특별히 못난 부분 없이 특출난 점만 넘치는 아이는 그래서 항상 여유로웠는지도 몰랐다. 학습한 특질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앉은 지배자 특유의 것이었다.

그래, 여유와 완벽은 학습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타고나고 스며든 부분은 어떨까. 릭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것이 조금씩 고개를 쳐든다. 그는 제게 그토록 여린 면이 있는 줄을 조금도 알지 못했다.

불안해.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

'조심하렴. 눈치챈 것이 나뿐은 아닐테니.'
'네 어미의 죽음을 기억해야지.'

프레드리히 릭먼은 잔인한 성미를 가진 남자였다. 릭이 살아온 인생의 여러 시간동안 다정한 아비였던 그는 한없이 냉정해질 수도 있는 사람이다. 그와의 짧은 식사를 끊어내고 나오자마자, 집무실로 돌아간 젊은 사자는 곧장 가장 신뢰하는 부하를 불렀다. 아버지의 말 중 무엇이 그 안의 도화선을 끄집어냈는 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 순간 릭은 초조하고 불안했다. 그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았어도 분명 그러했다.

차라리 그러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릭은 감시당할 애인의 기분이고 감정을 헤아릴 수 없었다. 처리하고 있던 서류들을 다 내팽개치고, 연락이 되지 않는 알렌의 휴대 전화를 추적해, 곧장 폴라리스의 앞에 달려온 지금까지도 그는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을 게다. 다만 한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오래토록 지켜오고 알렌이 존경해 마지않던 그의 완벽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당신의 마음, 바다, 체취와 목소리가 가진 힘이 수십년 간 얼어붙은 빙벽에 끌을 박아넣고 망치를 두드리고 있다.
품 안에 당신이 있음에 심장이 벅차다. 가는 손이 가만가만 허리에 둘려온다. 끝 모를 안정감을 느낀다.

"...당신이 걱정돼서 견딜 수 없었어."

털어놓았다. 고르지 못한 호흡을 잠시 멈췄다가,

"난 절대 솔직한 사람이 아닌데."

내뱉는다. 철저한 모순. 그러나 릭은 담담한 투로 자신의 솔직하지 못함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여전히 폴라리스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였기에 듣고 있는 이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듣고 있는 이도, 확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차라리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릭은 자신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물론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스스로의 행동을 계산할 수 없다는 건 불길한 징조였다.

"당신이 자꾸 나를 그렇게 만들어."

나를 전과는 아주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파멸할거야. 문득 떠올랐다. 처음 만난 순간, 사슴같이 여려 그 손에 찔려도 상처 하나 남지 않을 것 같은 여자를 대상으로 왜 그런 맥락없는 징조를 보았는지, 이제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신이니 운명이니 하는 것들을 믿지는 않지만 그 순간 운명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운명. ..하기사 사랑이나 운명이나 꿈처럼 비현실적인 것임은 마찬가지 아닌가. 지독한 정은 언제나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겹겹이 씌운 가면을 깨뜨린다.
사실, 릭은 두려웠다. 살면서 느낀 몇 안되는 순간의 공포였다. 무엇이 그리 두려울까. 당신을 잃게 되는 것- 물론 더 이상 제 곁에 폴라리스가 없다고 상상하는 것은 가슴을 옥죄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그녀를 안고 있는 지금 느끼는 마음은 그보단 조금 더 원초적이었다. 실토한다.

"변하는 게 무서워."

그건 그 자신에 대한 감정이었다. 25년을 한결같이 고수해 온 삶의 방식이 변하고 있다. 부모의 죽음과 동시에 멈췄던 내면의 시계가 그녀로 인해 천천히 움직인다. 그 자연스러운 변화가 낯설었다. 평소같았다면 저를 그토록 동요하게 만드는 사람의 머리에 망설임없이 총을 겨눴을 것이다. 양말에 난 작은 구멍과도 같은 약점은 그 크기가 커지기 전에 꿰매어 없애버려야 한다. 그것이 그의 평소 지론이고 가치관이었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 있으면 그런것 쯤 아무렇지 않게 느껴져."

하지만 이번만은 그냥 두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당신과 함께 있다면 어떤 어려움이라도 견뎌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랑의 힘인가, 유치한 생각이지만 그랬다. 릭은 처음으로 제 품이 너른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내가 느끼고 있는 안정을 당신도 느꼈으면 했다. 가늘고 힘있는 손가락이 얇은 어깨를 강하게 감싸안았다. 남자다운 선이 손 위에 드리워지고. 목소리를 연다.

"POLARIS. YOU MAKE ME BRAVE."

당신이 나를 용감하게 만든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진실된 고백이다.

-

사실 릭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다. 세상 어느 누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할 수 있을까. 절대 그럴 수 없거늘, 알렌은 이제까지 눈을 가리고 드문드문 드러나는 그의 결핍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그 역시 릭을 빈틈없이 강한 사람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알렌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5-15
별명 : From PolariS~To RicK 기능 : 작성일 : 17-09-06 21:49 ID : siRdP/MVzSULA
그의 등을 안정적인 박자로 천천히 토닥이면서도, 그의 품에 꽈악 안겨 있어도, 그녀는 불안했다. 상처를 들킬까봐서. 그래, 나는 두렵다. 당신이 내게 입힌 상처를 들키는 것도. 내 과거에 끔찍한 누군가들이 내게 입힌 상처들을 들키는 것도. 아주 깊은 곳에 감추어둔 너덜너덜한 자신을 들키는 게 싫고 두려웠다.

나는 왜 그것이 두려울까.

그가 너덜너덜한 자신을 보고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될지 모르겠어서?
그가 너덜너덜한 자신을 보고 더 이상 사랑해주지 않을까봐서?

…아아, 그래. 나는 두려운 것 같다. 전자도 무섭지만, 후자 쪽이 더더욱 무섭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내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일인가?
폴라리스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답은, No.
그의 사랑을 잃는 것보다, 그를 잃는 것이 더 두렵다. 릭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일이 현재 그녀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무섭고 끔찍한 일이었다.

*

...당신이 걱정돼서 견딜 수 없었어.

불안을 완벽하게. 완벽에 가깝게 감추는 와중에, 뜻밖의 고해가 들렸다. 그의 고르지 못한 호흡이 잠시 멈췄다가,

난 절대 솔직한 사람이 아닌데.

이어졌다. 담담한 투지만 그가 내뱉듯이 꺼낸 말은 진솔했다. 평소의 폴라리스라면, 그거 나한테 더 해당되는 말이네요. 한 마디쯤 속으로 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위태롭게 흔들리는 상태로 그의 말을 얌전히 듣기만 했다. 겉은 흔들리지 않는 게 이 와중에 참 대단한 일이었다. 손도 착실히 변하지 않는 속도로 그의 등을 토닥였다. 습관이라는 게 참 무섭지. 그것도 몸이 익힌 습관은.

당신이 자꾸 나를 그렇게 만들어.

언어해석이 평소보다 느렸다. 무슨 뜻이에요? 습관적인 반문도 속으로 하지 않았다. 그냥 얌전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는데, 머리가 아파왔다. 왜 아프지. 머리가 아플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왜.

변하는 게 무서워.

…무엇이요? 평소의 폴라리스라면 앞에 주어가 빠졌어도 알아서 빠르게 잘 해석했을 것이다. 아픈 상태지만 그래도 아직. 머리를 굴릴 수 있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이성을 찾아와서 삐걱이는 머리를 억지로 돌렸다. 그의 말들이 그녀의 안에서 문장으로 천천히 이어져 나간다.

-당신이 걱정되서 견딜 수 없어. 난 절대 솔직한 사람이 아닌데 당신이 나를 자꾸 그렇게 만들어. 변하는 게 무서워.

…아. 릭은 릭이 변하는 게 무서운가 보다. 스스로가 변하는 게 익숙치 않아서 그 변화가 두려운 사람인걸까. 아니면…

“하지만 당신과 함께 있으면 그런것 쯤 아무렇지 않게 느껴져.”

느릿하게라도 추론을 이어나가려던 생각이 잠시 끊겼다. 나랑 함께 있으면 변화가 두렵지 않나요? …불신하고 싶어지는 말인데, 차마 그럴 수가 없네요. 뒤늦게라도 고백하자면, 폴라리스는.

‘…미안해요, 릭. 누군가를 온전히 믿기에는 내가 너무 너덜너덜할 사람 인가봐. 내가 너덜너덜한 사람인 게 누군가에게 이토록 미안한 적이 없었는데, 당신에게는 정말로 미안한 것 같아요.’

라고 생각한 시점부터 그에게 활짝 열어두었던 마음의 문을 반쯤 닫았다. 온전한 신뢰도 이제 못 주겠지, 싶어서. 그래서 그게 더 미안하다고도 느꼈었다. 그렇지만 그가 그녀를 자꾸 약하게 만든다. 그녀의 철벽을 자꾸만 약하게 만들어 물렁해진 벽을 발로 짓밟고서 그녀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사실, 릭을 사랑하기 이전의 폴라리스였다면. 그녀의 벽을 물렁하게 만드는 사람에게는 일부러라도 거리를 두었을 것이다. 마음의 선 또한 분명하게 그어두었을 것이다. 벽을 짓밟고 성큼성큼 들어온다면 위기감을 느껴서 도망갈 준비를 해두었겠지. 언제라도 그 사람에게서 도망칠 수 있도록. 그 사람 모르게 모든 준비를 완전하게 마치고, 그가 깨닫지 못할 타이밍에 완벽하게 도망을 갔겠지.

그렇지만 릭에게서 도망가고 싶냐고 물으면 폴라리스는 아니라고 대답하겠지. 사랑은 때때로 사람을 무력하게 만든다. 단지 사랑은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에서 끝나는가? 아니, 무력함에서도 피어나는 것은 있는 것 같다고 폴라리스는 처음으로 생각한다. 언제 허리에서 올라왔는지 모르겠지만 어느샌가 위로 올라온 그의 손가락이 어깨를 강하게 감싸 안았다. …도망갈 생각도 없는데 미리서부터 붙잡는 거 같다, 그렇게 느낀 폴라리스는 어쩐지 조금 실없이 웃고 싶어졌다. 웃길 일이 아닌데도 괜스레 웃겼다.

"POLARIS. YOU MAKE ME BRAVE."

폴라리스. 당신이 나를 용감하게 만든다.


……
………웃으라는 거예요, 감동하라는 거예요? 둘 중 하나만 하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폴라리스는 푸스스 힘이 빠진 작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토닥임을 멈추고 그냥 그를 꼬옥 껴안아주었다. 포옹한 상태에서 소리를 죽여 잠시간 웃었다. 그녀를 품에 안고 있는 그는 아주 가늘기는 하겠지만 웃는 사람 특유의 몸의 진동을 느꼈을 것이고, 어쩌면 작은 웃음소리가 그의 귀를 간지럽혔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어쩌면의 일이지만 그녀의 웃음이 멈추었어도 그가 느꼈을지도 모르는 간지러움은 오래 남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

“내가 당신을 정말 어쩌면 좋을까.”

평범한 속삭임보다 작은 소리로 그녀가 첫 운을 떼었다.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것 같은 음성이었다.

“당신만 변하는 게 아니야. 나도 변했어요. 나도 모르는 새에 당신이 나를 변화시켰어.”

아까보다 조금 더 커졌지만 속삭임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크기, 아주 가까이에서 말하기 때문에 배려해서 목소리를 줄인 것이다. 어조는 밝았다. 그녀 자신의 변화가 ?어쩌면 그의 변화 또한-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거라고 일러주듯이. 아, 조금 전에 그녀가 소리 죽여 웃은 것도 그를 향한 배려였다는 사실을 눈치 빠른 릭은 지금쯤 알아챘을지도.

“RICK. YOU MELT MY HEART.”

당신이 내 마음을 녹여요.

폴라리스는 사랑을 담아서 릭에게 속삭였다.

당신은 얼음벽도 아니고, 철벽을 녹였어요. 그래, 이쯤되면 인정해야겠지. 내 철벽은 짓밟힌 게 아니라 녹은 거네요. 내가 어지간한 사람 앞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 앞에서라고 읽어도 좋다) 아주 당연하게 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혹은 보이지 않을 철벽을 세우고, 그 벽을 조금 낮춰주거나 (많이 낮춰줄 때도 있기는 있었다), 잠시 치워주는 일은 있어도 (물론 치웠다가 필요해지면 도로 가져다 세운다) (철벽을 치운 상태에서도 여전히 마음의 선은 남겨둔다) 이렇게 힘없이 녹은 적은 처음 같은데… 언제 녹았는지도 모르겠어……

폴라리스는 또다시 실없이 웃고 싶지만 이번에는 참았다. 당신이 내 마음을 녹여요, 라고 말한 후에 문득 그에게 뽀뽀해주고 싶은 충동도 들었지만 그것도 참았다. 그저 가볍게, 애교 부리듯이. 말 못하는 동물들의 사랑표현처럼 그의 품에 몇 번 제 이마를 부볐을 따름이다.

5-16
별명 : Lion-Heart 기능 : 작성일 : 17-09-07 17:14 ID : siWAFmhyz8mH+
변화가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변화는 때로 생소하고 아주 두려웠다. 그러나 언제나 그러한 것은 아니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그깟 변화쯤은 아주 사소하고 내 힘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만한 문제처럼 여겨진다. 괜찮아. 아무렇지 않게 다가온다.

-

당신이 나를 용감하게 만들어. 릭은 마침내 고백했다.

누군가를 이렇게 가슴 터질 듯이 안아본 적이 없었다. 아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와는 조금 다른 느낌일까. 등허리를 감싸는 온기가 따뜻했다. 훨씬 체격이 큰 그가 껴안고 있는 모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바다에 가만히 안겨있는 것만 같았다. 등을 토닥여주던 손이 멈추었다. 가만히 감겨오는 가는 팔 안에 그의 등이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들어찼다. 포근하다.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어쩐지 조금 가슴 한켠이 간지러워진다. 살아가는 스무 해 내내 누구도 그를 이런 식으로 안아주지 않았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는 이미 어른이었다.
타이밍 좋게도 폴라리스의 가는 웃음소리가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그 작은 진동에 릭은 전보다 조금 더 행복해졌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손을 들어 자그만 뒷통수를 품 안으로 조금 더 당겨넣었다. 둥근 머리통 위에 턱을 얹는다. 내가 당신을 정말 어쩌면 좋을까. 폴라리스가 물었다.

"예뻐해줘."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그는 가볍게 웃었다.

-

나도 변했어요, 당신으로 인해서.

그건 참 이상한 기분이 드는 말이었다. 달콤한 고백이었지만 의도를 확신할 수 없어 심장이 철렁했다. 저 뒷세계의 어둠이 청정했던 당신을 물들이고 있다는 의미인가.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좋은 부분만 물려주고 싶은데, 당신을 사랑하면 사랑할 수록 불가능해질 일인 것 같아 조금은 괴롭다. 당신은 그자리에 가장 빛나는 채로 남아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폴라리스는 기뻐보였다. 변화가 두렵다는 것을 인정한 릭과 다르게, 종달새가 노래하듯 밝고 사근한 어조였다. 릭은 그제서야 폴라리스의 변화가 그녀에게 있어 따뜻한 것임을 깨달았다. 묘했다. 그래, 사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신은 나의 길잡이별이며, 태양이고, 또 달이다. 빛에게는 그것이 아무리 강대한 어둠이라도 몰아낼 수 있는 힘이 있다. 나는 언제나 반짝이는 당신을 사랑해. 그러나 또한 당신이 빛나지 않는 그 순간까지도 사랑할 테다.

RICK. YOU MELT MY HEART.

사자는 가슴이 아주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차오르는 바닷물에 심장이 부유했다. 따뜻한 가슴께에 이마를 부비는 마음이 다정하다. 간지러웠다.
그래서 그는 또 한번 웃었다. 그날의 무덤 앞에서처럼, 혹은 그보다 조금 더 순수한 얼굴로. 어느 세계의 열아홉마냥 눈썹을 찡그리며 천진하게 웃었다.

-

릭은 폴라리스를 붙잡고 있던 팔을 천천히 놓았다. 내내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알렌이 반쯤 비틀거리는 모양으로 걸어왔다.

"...알렌, 포스터입니다."

그것만은 거짓이 아니었다. 알렌은, 어쩌면 오래 보게 될 지도 모르는 여자에게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알렌 포스터. 평범하나 강한 이름이었다.

5-17
별명 : HEART ? BRAVE(+) 기능 : 작성일 : 17-09-08 21:54 ID : si8ezRcSdOlME
내가 당신을 정말 어쩌면 좋을까. 그것은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이토록 누군가를 가슴 아프게 사랑해 본 적이 없어서.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어서 나온 한탄 같은 말이기도 했고. 감탄 같은 말이기도 했다.

"예뻐해줘."

그러나 그는 대답을 구하지 않은 그녀의 말에 응답한다. 예뻐해 달라고. 그 직후 가볍게 웃는다. …아. 정말로 내가 어찌하면 좋을까. 농담으로 한말일지도 모르는데, 진지하게 ‘정말로 내가 당신을 예뻐해 줘도 되나요?’ 그에게 묻고 싶어졌다.

*

또 한 번 그가 웃은 것 같다. 넓고 따뜻한 품에 온전히 안겨 있어서, 지금 보지 못하는 그의 웃는 얼굴이 어떤 모습일지 폴라리스는 궁금해졌다.

어쩌면 그 날의 무덤 앞에서의 웃는 얼굴과 닮은 얼굴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 웃음보다 더 천진난만한 웃음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어리고 ?어떤 세계의 그녀가 사랑하는 열아홉의 그처럼- 순수한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그녀의 머리통을 턱으로 가볍게 누르고 있어서 폴라리스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얌전히 있어야 했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게 좋은데, 그의 미소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쉬운 일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것은 달콤한 아이러니였다.

*

릭이 폴라리스를 붙잡고 있던 팔을 천천히 놓았다. 저도 모르게 그와 떨어지는 게 몹시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빼꼼 들어 올려다보았다가 자신의 행태를 자각하고서. 폴라리스는 화들짝 놀라 포옹을 풀고 그와 떨어졌다. 그리고 살짝 붉어진 얼굴을 양 손바닥으로 식히듯 가리고서 다가오는 걸음소리를 향해 몸을 틀었다. (살짝이라고는 하지만 그녀가 하얀 편이라 조금만 붉어져도 너무나 쉽게 그것이 보인다)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알렌이 반쯤 비틀거리는 모양새로 걸어온다.

“? 왜 그래요. 커다란 충격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누가 보면 천지라도 개벽한줄 알겠어요.”

지금의 나는 아무래도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뒤늦게 판단하며 여즉 살짝 홍조를 띄고 있을 뺨을 가린 폴라리스는 알렌이 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놀랄 만 했다. 놀랄 정도가 아니라 경악할 일이었다. 저의 냉정하고 완벽한 보스가 사랑에 빠진 평범한 남자처럼 부하의 시선도 신경 안 쓰고 로맨스를 찍고 있었으니 어찌 경악하지 않겠나. 알렌은 여태 다 보고 있었겠지. 폴라리스는 아까보다 조금 더 낯이 뜨거워진 거 같다고 생각했다.

**

[ 폴라리스 ? 알렌 ]

"...알렌, 포스터입니다."

알렌 포스터. 그가 허리를 꾸벅 숙인다. 그-알렌의 보스인 릭-가 지켜보는 앞이니 이번에는 정말로 거짓이 아닐 것이다. 폴라리스는 눈을 한 번 깜박였다. 가만히 입 다물고 있는 게 나을 법도 싶은데, 아까 든 싸한 예감을 생각하면 그러면 안 될 것 같다. 그래서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슨 말을 어떤 타이밍에 어떻게 꺼내는 게 좋을까. 폴라리스는 그가 몸을 완전히 들 때까지 기다렸다.

“저는 폴라리스예요.”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자기소개지만, 일단 이것으로 서두는 뗐다. 그런데 손은 제 뺨에서 도저히 못 떼겠다. 언제 뗄 수 있으려나, 볼이 안 식는 느낌에 폴라리스는 난처해졌다. 그렇지만 이어질 말은 이 꼴로 할 말이 아닌 것 같아서 그녀는 뺨에 붙이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아까 예감이 안 좋아서 말해야 할 것 같아요. 알렌은 릭에게 충성을 바치는 사람이지요?”

약간은 난처해 보이는 얼굴일지도 모르겠다. 뺨은 아직도 붉은색일까, 아니면 붉은 물이 조금 빠진 분홍색일까. 거울을 볼 수 없으니 확인할 수 없는 사항이었다.

“백 명의 사람이 있다면, 백 가지 형태의 충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을 위해 죽을 각오를 다지는 충성이 있고, 그 사람을 위해 살 각오를 다지는 충성이 있겠죠.”

백 명의 사람이 있다면, 백 가지 형태의 마음이 있겠지. 알렌이 릭에게 바치는 충성은 전자 쪽에 가까울지 후자 쪽에 가까울지 아직은 판단을 내리지 못하겠다. 어쩌면 전자에도 후자에도 안 속했을지도 모르지.

“어느 쪽이 더 가치 있다고는 말 못해요. 사람마다 가치의 기준은 다른 거니까.

폴라리스는 한 번 심호흡을 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읊었다.

“하지만 나는 살아갈 각오를 다지는 충성 쪽이 좋아요.”

죽는 것은 쉽다. 사는 것은 어렵다. 그리해서 폴라리스는 죽을 각오를 하는 충성보다는 살아갈 각오를 하는 충성 쪽이 제가 하기에는 훨씬 더 어려울 충성이라는 것을 알았다.

좋다고는 말했지만 강요하지는 않겠다, 그러니 당신이 스스로 판단해라- 그런 어조였다.

폴라리스는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구태여 강요하지 않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렇다.

“나는 충성이 싫지 않아요.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충성의 말로가 ‘비극’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인 거죠. 나는 알렌의 충성이, 릭과 알렌 두 사람 모두에게 좋은 방향. 보다 나은 방향으로 흘러갔으면 좋겠어요.”

폴라리스는 가볍게 웃었다. 분위기를 한결 가볍고 밝게 만드는 명랑한 웃음소리였다. ‘모두’에게 좋은 방향이라는 것은 잘 없지. 그렇지만 ‘두 사람’에게 좋은 방향이라는 것은 그렇게까지 없는 일은 아니다. 오히려 ‘찾을 수 있는 방향’에 속한다. 사람의 수가 늘면 늘수록 어려운 일이겠지만. 내가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좋은 방향을 찾으라고 한 건 아니잖아? 폴라리스는 좋은 방향이 아닌 ‘비극’에 강세를 두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제발 비극으로 안 흘러갔으면 좋겠다. …진짜로, 제발.

“여기까지가 내 할 말이었는데. 알렌은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있어요?”

폴라리스는 빙긋 웃었다. 친절하고 상냥한, 솜니움이 사랑하는 바텐더의 미소였다.

그리고 그녀는 릭에게도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끙, 어쩌지. 일단 알렌의 말을 들어보고서 생각해보자. 그녀에게도 ‘꺼내기 어려운 말’이라는 것 정도는 있다.

5-18
별명 : 인페르노즈-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9-08 23:42 ID : siiLg9LXWI7zw
릭은 폴라리스와 떨어지는 것이 아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둘이 사랑하고 껴안고 하는 양을 멀뚱이 지켜보고만 있는 부하 앞에서 정도가 있지, 언제까지나 그 표현을 이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위엄있는 상사로서 부하에게 의외의 모습을 들킨 것에 대한 부끄러운 감정 따위에서는 아니다. 릭은 그 정도로 민망해하기에는 당신의 생각보다도 훨씬 더 뻔뻔하고 여유로운 사람이다. 그가 폴라리스를 놓은 것은 그보다는 차라리 알렌에 대한 배려 쪽에 가까웠다. 더 이상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알렌을 배려하면서도 폴라리스에게 상처를 남기고 싶진 않은 마음이 크다. 그가 폴라리스를 놓은 것은 결코 상대를 밀어내는 동작은 아니었다. 그녀의 뒷통수를 타고 부드럽게 내려오던 손길이 얇은 어깨를 살짝 쥐었다 놓고서야 비로소 아래로 떨어졌다. 아쉬운 듯한 손끝이 다정하게 등허리에 스쳤다.

알렌은 그제서야 반쯤 비틀거리는 듯한 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돌이켜보면 그는 애초에 표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충격이었겠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리 짐작한 것은 폴라리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다만.. 릭보다는 좀더 솔직히 제 생각을 표현했을까.

"? 왜 그래요. 커다란 충격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누가 보면 천지라도 개벽한 줄 알겠어요."

천지, 개벽... 이제 폴라리스에 대해 꽤 많은 부분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릭조차도 그 말에는 순간 벙쪘다. 그래도 전과 달리 면역이 생겼으니까. 수 초가 지나자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다시 웃을 수 있었다. 역시, 몇번을 봐도 대단한 사람이다.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 모습조차 매력적인건 어지간한 약으로도 해결이 되지 않을거라는 반증이겠지.

그러나 안타깝게도 알렌은 그런 사랑스러운 불치병에 걸리지도 못했을 뿐더러 폴라리스의 화법에 면역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다. 게다가, 여러 번 말했다시피 표정관리에 서툴기까지 하다. '누가 보면 천지라도 개벽한 줄 알겠어요',라고 이야기 한 순간, 표정이 파작 구겨진 건 더 이상 그가 조절할 수 있는 범위 안이 아니었다. 폴라리스가 입을 다물고 있어야겠다고 결정하지만 않았다면 '그 똥씹은 표정은 뭐예요?'하고 또 한번 물었을 지도 모르겠다. 귀여운 얼굴이 다 마신 캔커피마냥 보기 좋게 찌그러졌다. 저런 뻔뻔한, 릭님은 대체 왜 하필 그 상대로 나를 보내서, 충성해 마지않는 보스의 앞만 아니었다면 알렌은 그리 절규했을 것이다.

-

저는 폴라리스예요.

압니다. 알렌은 하마터면 그리 대답할 뻔했다. 하지만 릭과 함께 있는 자리다, 표정은 관리하지 못할망정 입으로 나오는 말 정도에는 신경을 쓰고 싶었다. 그는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로 폴라리스의 말을 경청했다.

알렌은 릭에게 충성을 바치는 사람이지요?

당연히. 릭이 직접 온 이상 더 이상 숨길 것도 없으니 속으로 긍정했다. 알렌은 지금 대단히 복잡한 마음이지만,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 생각 정리를 끝내도 그가 릭을 향해 충성한다는 사실만큼은 변치 않는 진리다. 죽을 각오를 다지는 충성. 혹은 살 각오를 다지는 충성. 낭창한 여성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유연하게 이어졌다. 비극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아요. 힘주어 말한다.
그녀의 긍정론에는 대비되게도 알렌의 이제까지의 삶은 희극보다는 비극에 많이 치우쳐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단 하나, 릭이 관련된 부분만큼은 파국으로 치닫지 않게 만들 것이다. 당신이 걱정하는 비극은 과한 염려다. 알렌은 몸바쳐 그것만큼은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새겨 듣겠습니다."

어찌됐건 이걸로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인페르노의 젊은 사자는 저 여자에게 매우 지극히 진심이다. 저 여자로 인해 변하고, 숨겨두었던 내면의 인간성을 꺼내어놓고 있다. 릭의 변화는 알렌에게도 혼란스러운 것이었지만.. 그로 인해 릭님이 만족한다면 아직까지는 괜찮을까.
그러나 시간이 지나-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당신이 그로 인해 무너지고 괴롭게 된다면, 나는.

폴라리스의 말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알렌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그 순간 그는 이미 꽤 오래 전부터 그를 주시하고 있던 듯한 릭의 눈빛을 마주했다. 그는 그 눈을 보자마자 제 냉정한 보스가 뜻하는 바를 깨달았다. 고개를 다시 꾸벅 숙였다.
알렌은 릭이 살짝 비켜준 골목 바깥쪽으로 빠져나갔다. 아까까지는 빛이 들어오던 방향이었다. 하지만 그새 태양빛의 각도가 바뀌었는지,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나갈 때 어두침침한 골목에는 그늘이 져있었다. 따지고보면 알렌은 항상 빛보다는 어둠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지독하게 어둡군. 그래서 그는 그걸로 만족했다.

-

"나는 알렌을 신뢰해."

알렌이 골목 밖으로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이야기의 서두를 꺼냈다. 릭은 폴라리스의 이마 위에 손을 얹으려고 했다. 조곤히 이야기하며 쓸어넘겨주고 싶었다.

"알렌이 당신을 지켜줬으면 좋겠어. 보이는 곳에서든, 보이지 않는 곳에서든."

오늘 그가 하는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진심이었다. 릭은 희미하게 한숨쉬었다. 사실은 말이지,

"나 대신."

사실은, 내가 그럴 수 없어 마음 한켠이 쓰려. 이 말은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눈치챌 것 같아 안으로 삼켰다.

50 다섯번째 일상(3) (4850063E+5)

2018-12-28 (불탄다..!) 00:25:35

5-19
별명 : 폴라리스-인페르노스 기능 : 작성일 : 17-09-09 14:55 ID : sid5LKQP5VlUE
알렌이 표정을 파작 구겼다.

?

그렇게 표정 구길 이야기는 안 했는데?? 나는 사실을 말한 것뿐이다. 의문을 가지면서도 구태여 그 의문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알렌이 하는 양을 잠깐 지켜보았을 뿐이다. 아. 지금 나를 뻔뻔한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구나. (폴라리스는 독심술사가 아니기 때문에 -이제는 슬슬 신빙성이 떨어지는 주장같다- 그가 릭님은 대체 왜 저런 여자를 상대로 나를 보내서…! 라고 절규하고 있는 것까지는 모른다)

*

"...새겨 듣겠습니다."

…고작 그것뿐? 폴라리스가 좀 더 솔직한 사람이었다면, 이번에 표정을 파자작 구기는 것은 그녀가 되었을 것이다. 폴라리스는 조금 뚱해보이는 얼굴로 조금 더 기다려주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길게 이야기 했는데. 당신도 뭔가 토해내야 할 게 아닌가.

새겨듣기는 무슨. 필요한 부분만 골라서 들었겠지, 라고 폴라리스는 속으로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표정은 조금 뚱한 표정 그대로였다) 아마도 고집이 있다면, 그것을 꺾지는 않을 것 같다. 알렌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폴라리스와 눈을 맞추는 게 아니라, 릭과 눈빛을 마주하고 고개를 꾸벅 숙인다.

……

내가 아주 안중에도 없군. 나 지금 투명인간이니? 폴라리스가 표정에 숨김없는 사람이었다면, 한 쪽 눈썹만 치켜 올리고 몹시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알렌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폴라리스는 알렌에 대해 돌이켜 본다. 아마 처음부터 내게 호의를 가지고 시작한 것은 아닐 것이다. 마이너스로 시작해서, 현재도 마이너스인 것 같다. ‘둘 다’ 에게 좋은 방향, 이라고 호의를 직접적으로 표현했음에도 ?릭에게 충성을 바치는 사람이니까, 호의 정도는 가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전혀 대꾸가 없다. 아까부터 정말로 말이 없었다. 없는 사람 취급이라고 느끼기에 딱 좋았다. 그리고. 폴라리스는 듣는 편을 더 좋아하지, 본인이 말하는 것을 더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에 비해 더 친절하게, 길고 알기 쉽게 이야기해 주었는데……. 그것도 가짜로 꾸며낸 것이 아니라, 진짜로 그랬는데…….

폴라리스는 제 마음의 문이 쾅! 하고 닫히는 것을 느꼈다. 신경질적인 느낌이었다. 폴라리스는 철벽을 세우고, 선을 확실히 그어두는 사람이지만. 사람을 관찰할 수 있을 정도로는 마음의 문을 열어두는 사람이다. 활짝은 아니고 조금만. 그러니까 손목이 바깥으로 빠져나올 정도로는 열어둔다. 그리고 그렇게 열어둔 마음의 문으로 사람을 지켜보며 천천히 판단을 내리고, 때때로는 호의를 건네기도 한다. 그 사람이 폴라리스에게 나쁘게 굴지 않는다면 구태여 마음의 조금 열린 문을 닫지는 않았다. (활짝 열어주지도 않았지만) (진짜 공략하기 어려운 여자가 아닐 수 없다) 그럴 필요를 느끼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게 호의를 가지지 않는 사람에게 내가 구태여 호의를 가질 필요는 없지.
나를 뻔뻔한 여자라고 생각하는 남자에게 뻔뻔하지 않게 굴 이유 역시 전혀 없다.

……알렌은 아무래도 또다시 폴라리스에 대한 생각을 전면수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은 그녀는 알렌에게 상냥하고 친절하게 굴 필요성을 이제 못 느끼고 있다. 알렌이 릭이 비켜주는 골목길, 아까는 아마도 빛이 들어오던 방향. 하지만 그새 태양빛의 각도가 바뀌었는지, 알렌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갈 때 어두침침한 골목에는 그늘이 져있었다. 폴라리스는 그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고, 다른 부정적인 감정은 겉으로 전혀.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


폴라리스는 지금 제가 좀 신경질적인 상태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겉만 봐서는 절대로 모를 것이다) 본래 예민한데다가 신경질적인 상태라는 것까지 겹쳤으니, 기실 지금 그녀를 건드려서 좋을 것을 하나도 없을 것이다. 정말 하나도 없을 것이다.

끙, 어쩌지. 릭한테 할 말이 있는데 지금 이 상태로는 꺼내기가 좀 그래. 생각하기 무섭게 릭이 말을 꺼냈다.

"나는 알렌을 신뢰해."

제게 다가오는 손이 릭의 것이 아니라면 피했다. 피하거나, 더 나아가서는 쳐냈다. 그녀는 피하지도 쳐내지도 않았다. 그냥 얌전히 그 자리에 머물렀을 뿐. 그는 알렌을 신뢰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폴라리스는 알렌을 신뢰할 수 없다. 신용도 지금으로써는 주고 싶지 않았다. 원래도 폴라리스의 신뢰를 (신뢰의 일부라도) 얻어내기는 어려운 일인데, 만약 알렌이 폴라리스의 신뢰를 얻고자 한다면 그는 더더욱 높은 벽을 넘어야 할 것이다. (안 그래도 높은 벽인데……)

"알렌이 당신을 지켜줬으면 좋겠어. 보이는 곳에서든, 보이지 않는 곳에서든."

보이는 곳에서든, 보이지 않는 곳에서든. 에서 미간을 확실하게 구겼다. 릭이 보는 앞인데도 그랬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를 쳐다보는 시선을. 사실 폴라리스는 몹시도 싫어한다. 평범한 인간처럼 소름끼쳐 하기도 한다. 지켜보는 시선을 감시로, 느낀 것은. 알렌을 스토커라고 칭한 것은. 그냥 단순히 그녀가 예민한 탓이 아닐 거다. 그녀는 과거에 스토커(그것을 스토커라고 불러야 할지……)에게 피해 입은 적이 있다. 스토커에 대한 트라우마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나, 내 생각보다 스토커를 싫어하는구나. 폴라리스는 불현듯 깨닫는다.

"나 대신."

…아. 폴라리스는 구겼던 미간을 천천히 폈다. (그래도 여전히 살짝 찡그려질 기미가 엿보인다) 진실로 유감스럽게도, ‘사실은, 내가 그럴 수 없어 마음 한켠이 쓰려.’ 라는 릭의 마음을 눈치채지도 못했다! (폴라리스가 언제나 모든 것은 눈치 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모든 것을 눈치 챌 수 있는 상태인 것도 아니다) 대신 폴라리스는 한 번 더. 릭이 말해준 문장을 속으로 조합했다.

-나는 알렌을 신뢰해. (그러니) 알렌이 당신을 지켜줬으면 좋겠어. 보이는 곳에서든, 보이지 않는 곳에서든. 나 대신.

…직접 해요.

매정한 말을 꺼낼 수가 없는 것은 그가 그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다. 내 연인이기 이전에 한 조직의 언더보스겠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그것이 서글퍼졌다. 많이는 말고 조금. 그녀는 냉정과 이성이 남아있는 인간이다. 그와 동시에 감정도 감성도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서, 완전히 서글프지 않을 수는 없다고 담담하게 생각한 것 같다. 서글프지 말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머리가 판단했으니, 나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 폴라리스는 눈을 두어번 깜박였다. 그러므로 서글픔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하는 릭이라 하여도. 지금의 그녀를 읽기는 힘든 일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당신이 저를 지키신다 하셔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지키는 것은 싫은 것 같아요. ‘보이는 곳’에서 지켜야 내가 안심을 할 것 같아.

알렌은 릭이 신뢰하는 남자인거지, 폴라리스가 신뢰하는 남자가 아니다. 신용하는 남자조차 아니었다.

그리고 나 기본적으로 나는 내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그래야 나중에 뒷통수나 앞통수, 옆통수를 맞아도 덜 아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건데…

차마 말로 꺼낼 수 없는 생각을 하며 폴라리스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지금은 진짜 아무 말도 못 꺼내겠다. 덜 아픈 거지만, 안 아픈 것은 아니다. 이미 너덜너덜해서 더 이상 상처 입을 곳도 없을 것 같은데 또 다시 상처를 입는다. 나 생각보다 이상한데서 섬세하구나… 폴라리스는 또 한 번 불현듯이 깨달음을 맞이했다. 반가운 깨달음은 아니었다.

-당신이 내 뒷조사를 했던 게 실은 기분이 나빴다. 당신이 나한테 사람을 붙인 것은 기분이 나쁜 것을 넘어서 (대단한, 이라는 말은 아무래도 릭을 위해 생략해야 할 것 같다) 충격이었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판단이 안 서요. 내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폴라리스는 릭과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단지 속눈썹을 나긋하게 내리깔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꺼낸다.

“판단이 안 서는 경우에는 판단을 유보하거나, 입을 다무는 편인데.”

그렇다. 유보하면서, 침묵을 했을 것이다. 상대가 사랑하는 남자만 아니라면 겉으로는 여유 있게 빙긋 웃어주기도 했을 것이다. 혹은 의뭉스러운 미소를 띄울 수도 있었겠지. 그녀는 지금 미소하지 않는다. 그랬다고 해서 침울한 표정도 아니었다. 냉막한 표정은 더더욱 아니다. 망설이는 사람의 표정에 가깝겠지.

“침묵이 모든 경우에 좋은 건 아니라서, 지금은 침묵도 선택 못 하겠어.”

-우리 잠시 시간을 가질까요? 그동안 내게 알렌을 비롯한 사람을 붙이지 말고요.

라는 말은 지금은 꺼내지 않았다. …사실, 릭이 내 말의 어디에서 어디까지 충격 받을지도 지금은 판단이 안 서니까. 잠시라고 말했지만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지면 잠시라는 표현은 차라리 안 쓰는 게 나을 것이다. 우리 시간을 가질까요?

어쩌면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더 긴 시간동안 나는 그와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말을 아끼는 게 좋겠다. 너무 긴 시간동안 그와 만나지 못하는 것은 싫으니까. 폴라리스는 눈을 두어번 깜박이고서는 그제야 릭과 시선을 맞춘다. 잠시간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빙그레 미소했다.

5-20
별명 : 릭 - 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9-09 22:53 ID : si/VXVC4mFfA6
때때로 머릿속의 복잡하고 방대한 생각은 말을 꺼낼 여유마저 잡아먹곤 한다. 그리고 알렌은 그런 일이 매우 빈번하게 일어나는 사람이다. 말수가 적은 대신 생각이 많다. 그래도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릭이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고있지만 않았다면 어느정도 생각의 공간을 할애해 진정성 있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려고 했을텐데. 안타깝게도 알렌은 제 주인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대놓고 고까운 말을 뱉을 정도로 막돼먹진 않았다. 하지만 최선이라고 생각한 침묵은 때때로 최고의 독이 되어 기껏 틈을 벌려놓았던 폴라리스의 마음의 문에 걸쇠를 잠근다. 콰직, 폴라리스와 알렌 사이에 메꾸기 어려울 균열이 주욱 그어지는 게 느껴졌다. 건드려선 안될 선을 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폴라리스가 선을 넘은 알렌을 대하는 방식이 바뀐다 해도, 그녀를 대하는 알렌의 태도는 방금과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어째서냐. 묻는다면, 그건 아마 사자가 어떤 마음으로 그녀를 대하는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일 테다. 릭이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은 할 줄 안다. 뒤돌아 걸어가는 알렌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그의 충성은 누군가가 쉬이 이해할 수 있을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

그늘진 골목. 더이상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향에 선 릭의 표정이 그림자에 반쯤 잠겼다. 창백한 머리카락이 온전히 어둠에 가리고, 그 밖으로 비져나온 것은 코 아래의 날카로운 턱선과 입술 뿐이다. 드러난 입술이 숨을 쉼에 따라 희미하게 움직였다.

폴라리스는 쉽사리 판단이 서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음지에 삼켜진 갈색 눈이 고요히 일렁였다.

"...그건 어째서일까?

화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그것이 무슨 이유에서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릭은 감이 좋고 눈치가 빠른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도 그가 짐작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일 뿐- 그가 살아온 환경에서 전혀 동떨어진 문제에는 별수없이 취약하다. 폴라리스를 위험에 빠트리고싶지 않았던 그의 선택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잘못되었는지를,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폴라리스가 왜 기분이 상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찡그리는 미간 사이에는 기분이 묘해졌다. 어째서. 어떻게든 해답을 찾으려는 머릿속 사고회로가 이내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알렌이 당신을 험하게 대했어?"

묻는다. 폴라리스보다 한뼘 반은 족히 큰 릭은 대화를 나누는 내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연인을 대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냉랭한 말투가 시선을 따라 그대로 내리박혔다. 릭을 올려보았다면 당신은 아마 어조와 크게 다름없는 얼어붙은 눈빛을 보았을 것이다. 그림자에 파묻힌 속에서도 형형히 살아 움직이는 빛이다. 릭이 폴라리스와 있지 않을때 어떤 사람인지가 어렵지 않게 짐작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 굳은 표정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폴라리스의 이마에 닿아있던 손이 천천히 내려와 손끝으로 그녀의 볼을 쓸었다. 릭은 그녀와 눈맞추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그림자로 만든 가면을 쓰고 있던 윗얼굴이 그제야 빛 아래 완전히 드러났다.

"당신이 불편하다면 다른 사람을 보내줄게."

다정하게 구슬리는 투. 그러나 폴라리스가 진정 불편한 것은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본다는 그 자체란걸 아직도 인지하지 못했다. 본질을 뚫고지나지 못하는 대화는 진전없이 피상적인 부분만을 빙빙 돈다. 그녀가 이야기해주지 않는다면, 사자는 답지않게 끝끝내 깨닫지 못할지도 모른다.

정적이 흘렀다. 그 애매한 간극을 뚫고 폴라리스는 그림같이 미소지었다. 릭은 왜인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설레는 감정이나 떨림에서 오는 기분좋은 심장의 울림이 아니었다. 그 미소를 마주한 순간, 왜일까, 아까 찡그리던 얼굴을 보았을 때보다 더 마음이 아파왔다. 그는 감이 좋은 사람이다. 어쩌면 기민한 그의 감은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한 불길한 기운을 모두 캐치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5-21

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9-10 00:12 ID : siAILvF/BePKk
“...그건 어째서일까?”

정말 모르는 걸까? 내게 사람을 붙이는 걸로 인해, 내가 어떤 충격을 느꼈을지. 뒷조사를 했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고서도 물어보는 건지, 정말로 모르고 물어보는 건지는 조금 더 생각해 보려고 했는데.

"알렌이 당신을 험하게 대했어?"

이어지는 말에, 릭이 정말로 모르고 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니, 모르고 했다 쪽에 판단의 추가 기울었다.

알렌은 나를 험하게 대하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싫어하는 짓을 몇 번이고 저질렀을 뿐이지. (일단 스토킹을 했다, 폴라리스가 일단 대화하려는 노력을 했는데 침묵했다, 표정은 솔직했지만 말은... 글쎄. 중요한 말을 자꾸 삼켰고, 릭이 나타나니까 내가 안중에서 완전히(폴라리스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아마도 알렌의 충성이 너무 깊은 탓이겠지) 사라졌다. 무시당한 기분이었다.) 그녀를 안중에 두지 않는 사람을, 폴라리스는 굳이 제 안중에 넣어두지 않는다. 폴라리스는 알렌이 당신을 험하게 대했냐는 말에 입을 다물었지만, 그가 그녀를 험하게 대한 것은 아니므로 한 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 ‘험하게’ 대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느끼기로는 그녀를 ‘존중해’ 주지 않았을 뿐이지. 그런데 이건 주관적인 거니까, 그는 어쩌면 내게 개미눈꼽만큼의 존중은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겠다. 무덤덤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폴라리스는 이순간 알렌을 한 번만 더 존중해 주기로 했다. 릭이 신뢰한다고 했던 부하니까. 신뢰한다고 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고개를 저어주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한 번만 더 존중해주기로 할까. 릭이 신뢰할 정도면 되게 아끼는 부하일텐데.

“알렌은 나를 험하게 대하지 않았어요.”

폴라리스는 사실만을 말하는 어조로 이야기 했다. 팩트긴 했다. 험하게 대하지 않은 게 전부가 아닐 뿐.

알렌이 험하게 대했냐고 물었을 때 그의 말투가 냉랭했고, 시선에 굉장히 예민한 폴라리스는 저를 내려다보고 있을 릭의 눈빛이 그 말투처럼. 어쩌면 그 말투 이상으로 냉랭할 것을 굳이 그를 바라보지 않아도 알았다. 인지했다. 그렇지만 그것에는 상처받지 않았다, 저를 향한 것은 아니기에. 이미 은연중에 추측했던 사실이지만, 그는 내 앞에서가 아니면 꽤 냉정한 사람이겠구나. 생각했다.

이마에 닿아있던 손이 천천히 내려와 손끝으로 제 볼을 쓸었다. 실은 폴라리스는 지금 릭에게 만져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성을 흐리게 만드는 사랑하는 사람의 손길이다. 이성적인 판단이 필요할 때 닿으면 곤란한, 그런 다정한 손이었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맞추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그림자로 만든 가면을 쓰고 있던 윗얼굴이 그제야 빛 아래 완전히 드러났다. 폴라리스는 가만히 시선을 들어 그와 눈을 맞추었다. 언제나와 같은 청량한 아이스블루 눈동자와도, 달콤한 소다색 눈동자와도 조금 다른 것 같은. 그래. 어쩌면 이지적인 블루라고 칭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지금 그녀가 이지적인 생각을 하고 있냐, 그러면 그것은 아니라고 대답해야겠지만.

"당신이 불편하다면 다른 사람을 보내줄게."

다정하게 구슬리는 투. …내가 구슬림 당하는 거 별로 안 좋아 하는 거 모르겠구나, 폴라리스는 또 한 번 깨닫는다. 폴라리스는 구슬리지 않는 투였어도, 상대가 저를 구슬리고 싶어한다는 것을 눈치 채는 사람에 속하지만. 차라리 이렇게 대놓고 구슬리는 투인 게 더 판단하기에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떻게든 나한테 사람을 붙이고 싶은 거 같다. ……그가 원해도 그녀가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마음속으로만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

정적이 흐르고, 폴라리스는 그림처럼 빙그레 미소했다. 그리고 그것은 천천히 난처해하는 미소로 변화한다.

“…이런 때까지 사랑스러운 건 반칙이잖아요, 릭.”

한숨처럼 말하고 미간을 찡그리며 당신이 어쩔 수 없이 사랑스러워 웃었다. 소리는 없는 웃음이었지만, 그 웃음도 한숨과 닮았을지도 모르겠다. 화도 못 내게 사랑스럽기는 하지만, 내가 할 것은 화내는 일이 아니니까. 한 손을 들어, 릭의 뺨을 한 번 다정히 쓸고서 내린다. 솔직히 이런 순간까지 사랑스러운 것은 반칙이다. 반칙이 아닐 수 없다.

“정말로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데. 말을 해야 할 것 같기는 해요.”

사랑의 말만 속삭이는 게 능사는 아니지. 연인 사이여도, 연인 사이기에 더더욱. 해야하는 말들이 있다. 그녀는 지금 제가 냉정해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폴라리스는 시선을 내리고 한숨을 폭 내쉬었다. 정말로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나는 지금부터 내가 할 말에 당신이 상처받기를 원하지 않아요. 진실로.”

분명한 어조였다. 그러나 분명한 어조로 말을 꺼내놓고, 이어지는 말은 주저한다.
내가 느낀 것들을 말할 건데, 당신이 상처 받는 것은 정말로 원하지 않는다…
근데 왜 상처 받을 거 같다는 기분이 자꾸 들지. 폴라리스의 내리 깔린 시선이 흔들렸다.

“나는 당신이 내게 사람을 붙이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그게 알렌이 아닌 그 어떤 누구여도요.”

폴라리스는 최대한 조곤조곤 설명했다. 아이에게 말하는 것도 이보다 상냥하지는 않을 것이다.

“…실은 당신이 내 뒷조사를 했던 것도 기분이 나빴어요. 그 일이 연인이 되기 이전의 일이긴 하지만요.”

폴라리스는 또 한 번을 더, 난처하게 미소했다. 그리고 잠시 말을 쉬었다. 중요한 말을 꺼내는 사람에게도, 그것을 듣는 사람에게도 준비라는 것은 필요하니까.

“내가 알기로는, 일반적인 연인 관계에 뒷조사라던가. 사람을 붙여 스토킹 한다는 항목은 없어요.”

폴라리스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모든 연인 관계를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아는 일반적인 연인 관계에 그런 항목은 없다. 일반적이지 않은 연인 관계에는 있을 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의처증 걸린 남편도 아니고, 보통은 뒷조사를 한다거나 사람을 붙이지 않는다.

“저를 지키시려는 의도였겠지만, 제가 그렇게 느낄 수가 없어요. 제가 원래 누군가의 시선이 몰래 따라붙는 거 안 좋아하는 사람이라서요. 대놓고 따라붙는 것도 안좋아해요. 저 보이는 것보다 예민해요. 보이는 것보다는 냉정하고요. 뭐, 언제나 예민하고 언제나 냉정한 것은 아니지만요.”

…여기까지 말해도 충격적일 텐데. 나는 더 해야할 말이 남기는 했다. …진짜로 어쩌면 좋지. 폴라리스는 난처했다.

“알렌은 당신이 신뢰하는 사람이지, 내가 신뢰하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예요. 라는 말은 구태여 하지 않았다. 폴라리스에게도 제 신뢰를 얻어내는 게 몹시도 어려운 일이라는 자각 정도야 있었다. 나한테 ‘완전한 신뢰’를 구할 바에야 진짜로 다른 은하계에 위치한 별을 가려고 노력하는 게 더 빨리 더 쉽게 실현될 수 있는 일이지. 어느 정도의 신뢰를 얻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고. 심지어 저는 신용조차 까다롭게 준다. …나 새삼스럽게 인간 불신인가? 그런데 정말 용케, 지금 당신을 사랑하고 있네. 순간이기는 했지만 폴라리스는 상황에 안 맞게 웃고 싶어졌다. 그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실없이 웃고 싶었다. 지금은 그래서는 안 될 상황이라고 판단했기에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지만.

“우리…”

시간을 가지는 게 좋을까요? 라는 말은 정말이지 꺼낼 수가 없어서 말을 흐렸다. 내가 말해놓고, 내가 울 일 같다. 그리고 당신은 울지는 않겠지만, 우울해 할 것 같았다. 폴라리스는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지금 내 표정 슬퍼 보이거나 애처로워 보일 것 같아, 용케 빠른 자각이었다. 폴라리스는 슬픔을 지워내고 또 한 번 빙그레, 그림같이 웃었다.

5-22
별명 : 스물다섯-스물둘 기능 : 작성일 : 17-09-10 01:42 ID : silfdPV/tSZkI
이런 때까지 사랑스러운건 반칙이잖아요. 폴라리스가 속삭였다. 대체 어디가, 릭은 반문하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이해가 되지 않는 말. 사랑스러운- 그게 Lovely든 Adorable이든 객관적으로 나보다는 당신에게 훨씬 더 어울리는 단어선택이다. 그러나 당신의 화법은 참으로 기묘해서, 그 말의 뜻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음에도 그냥 아무말 없이 웃어주고만 싶다. 그래서 릭은 웃었다. 폴라리스가 손을 뻗고, 이윽고 닿아오는 감촉에 온 몸의 신경을 집중했다. 아침마다 깔끔하게 면도해 수염자국 하나 없는 뺨에 따뜻한 손길이 스쳤다. 기쁘게 마주 웃었다.
그녀가 조곤히 말을 이었다. 당신이 상처받기를 원하지 않아요. 그 걱정이 다정해서 담고 있는 의도가 무엇이든 전혀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당신 생각만큼 약하지 않아..."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비웃음이 아니라, 말 그대로 희미한 미소였다. 나는 말로 헤집는 상처 정도에 아파할 인간이 아니야. 그러니 당신이 해야할 말이 뭐든 편하게 해- 말 한마디에 그는 그 모든 것을 함축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어진 폴라리스의 다음 말에는 조금 충격 받았는 지도 몰랐다. 나는 당신이 내게 사람을 붙이는 걸 원하지 않아요. 방금 전 다른 사람을 보내주겠다 말한 그가 그러했듯 아이를 어르는 듯한 말투, 그 와중에도 전하고자 하는 바는 명료했다. 뒷조사를 했던 것도 기분이 나빴어요. 그런 것에도 기분이 나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다시 한번 깨달았다. 완전히 생각을 재정비할 틈도 없이 또 한마디가 날아와 꽂힌다. 내가 알기로는 일반적인 연인 관계에 뒷조사나 스토킹은 이루어지지 않아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난 당신이 말하는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까 나와의 연애는 당신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연인 관계와도 거리가 멀겠지. 지금, 당신은 나를 가지기로 선택한 것을 후회하는걸까. 궁금해졌지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미안하다고 말함으로써 제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철회해야 할 결정이 걸린다. 이 오만하고 이기적인 남자는 결국 폴라리스가 그렇게까지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폴라리스를 '보호'하라는 명령을 무르지 않을 것이다.

지나친 걱정, 불안, 매사에 언제나 여유롭고 침착했던 그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선택. 완벽했던 철가면을 벗어낸 것은 한켠에 드러난 여린 마음을 의미하기도 하는 걸 아직은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잃는 것이 무서워 더욱 바보같은 결정을 내리게 된다. 명석한 그를 아둔하게 만드는 하나의 존재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유일무이한 그의 약점이 되었을까.

알렌을 신뢰하는건 내가 아니잖아요. 폴라리스는 쐐기를 박았다. 말을 들은 사자는 수 초 후 반사적으로 슬프게 웃었다. 그 말에는 진심으로 상처받았는 지도 몰랐다.

그녀 자신과 그 사이에 선을 긋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랑한다고해도, 당신과 나는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이야. 같아질 수는 없어. ...당연한 말인데, 이제와 마음이 아파지는 것은 어째서.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이윽고 흘러나온 말은 그 답지 않게 바보같으리만치 솔직했다. 릭이 쥐어짜듯 속삭였다.

"그럼 내가 계속 당신 곁에 있을까..?"

멍청한 말이라는 걸 스스로 알았다. 그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 쯤은, 말하고 있는 그도 폴라리스도 사실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문득 그렇게 말하고 싶어서 끝끝내 내뱉고 말았다. 낮은 목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우리. 폴라리스가 말끝을 흐렸다. 뒤에 올 것이 무엇이었는지 더 말하지 않아도 눈치챌 수 있다. 헤어질까요. 눈을 감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은 알았지만, 그 말이 이렇게 빠르고 갑작스럽게 찾아올 줄은 몰랐다. 전이라면 예감한 순간 더 입씨름할 필요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을 거다. 하지만 이번은... 나는. 어떻게하고 싶은걸까.

무어라 말하고 싶은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어, 할 말을 고르느라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거운 정적이 두사람 사이를 메웠다. 결국 솔직하게 고백할거였으면 길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던 것을. 그는 나중에서야 후회했다.

"당신을 못보면 난 많이 힘들 것 같은데."

눈썹을 찡그리며 미소지었다. 부드러운 미소, 그러나 결코 아까 폴라리스를 안고있었을 때처럼 순수하고 천진한 웃음은 아니었다. 슬픔, 씁쓸함, 고통, 그 모든 것들이 섞여 탁한 빛이다.

"당신은 그렇게 하고싶어?"

사실 묻는 의미가 없을 지도 몰라. ...그는 상당히 제멋대로인 사람이다. '네가 행복하길 바라니 헤어져줄게' 따위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어서, 폴라리스가 그렇게 하겠다고 긍정해도 흔쾌하게 알겠다며 대답해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묻는것이다. 당신의 의사를, 그것은 젊은 사자가 누군가에게 행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존중이었다.

5-23
별명 : Tender - Gentle 기능 : 작성일 : 17-09-10 12:38 ID : siAILvF/BePKk
손을 뻗자 정말 미약하게 뺨을 손바닥 안에 붙이고 마주 웃어주는 당신이 좋다. 사랑스럽다. …진짜로 이런 순간에 귀여우면 어떻게 해요. 진짜 마음 약해지게. 안 그래도 나는 당신에게는 충분히 마음이 약한 사람인데.

"나는 당신 생각만큼 약하지 않아..."

내 생각보다는 강한 사람이겠지만, 당신 스스로의 생각보다는 연약한 사람일 거예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한, 적어도 내 앞에서는요. 나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폴라리스는 그가 제 말에 충격 받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그녀의 심장에도 가시로 박혔다. 내가 상처 주고서는 내가 상처 입다니, 우스운 꼴이다. 딱히 씁쓸해 하는 표정은 아닌 것 같은데, 그는 어쩐지 씁쓸해 보이기도 했다. 해야 할 말을 하는 건데도, 되게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분 탓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렇지. 내가 완전한 선인은 아니지. 완전한 악인 역시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알렌은 당신이 신뢰하는 사람이지, 내가 신뢰하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는 수 초 후 반사적으로 슬프게 웃었다. 그 말에 진심으로 상처받은 사람처럼. 심장이 꾹하고 죄였다. 거짓말하지 않았는데, 차라리 거짓말을 하는 게 나았을까. 그렇지만 당신은 내 말이 거짓말인 것을 알아챘다면 더더욱 상처 입었겠지. 폴라리스는 거짓말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릭 앞에서는 그랬다.

"그럼 내가 계속 당신 곁에 있을까..?"

쥐어짜듯 속삭여진 목소리가 말했다. 그럼 내가 계속 당신 곁에 있을까. 너무나도 달콤해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지만. 폴라리스는 그게 실현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말하고 있는 릭 본인도 알고 있을 거였다. 사실을 알고 있어서 당신은 괴로운 걸까요. 폴라리스는 릭을 안아주고 싶었다. 안고 토닥여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를 안고, 토닥이며,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그 행동이 앞으로의 관계에 도움이 될지 판단이 안서요. 내가 이렇게 판단 못하는 사람이 아닌데…

"당신을 못보면 난 많이 힘들 것 같은데."

…힘들 것 같은데, 앞에 ‘많이’라는 부사가 붙은 것에 가슴이 아프면서도 조금은 기뻤다. 나만 많이 힘든 게 아니었다. 그러나 눈썹을 찡그리며 웃는 그의 모습이. 그 부드러운 미소에 얽힌 여러 감정들이. 슬픔, 씁쓸함, 고통… 그 모든 것이 섞인 탁한 빛에 죄책감이 안 들 수가 없었다. 폴라리스는 그의 미소를 정말 좋아하지만, 그가 웃는 것을 언제까지고 보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그랬다고 해서 그가 슬프고 아프게 웃는 것은 원하는 것은 아니기에.

나는 당신이 행복하게 웃었으면 좋겠어요.

"당신은 그렇게 하고싶어?"

…아니요, 전혀요. 이성이 잠깐 떨어져 시간을 가지는 게 좋을 거라고 속삭여도. 내 마음은 그것을 바라지 않아요. 그래서 폴라리스는 이번에는 이성이 아니라, 제 마음의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

그에게 조금 더 다가가 그를 힘껏 껴안았다. 어쩌면 매달리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당신을 있는 힘껏 껴안아 주고 싶다.

“뭔가 당신이 조금 착각하고 있는 게 있는데, 저는 헤어지자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었어요. 잠시 시간을 가지자고 말하려고 했던 거지.”

울먹이는 건지, 칭얼거리는 건지. 폴라리스는 지금 자기 목소리가 좀 애 같다고, 스스로 듣기에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나는 당신과 헤어질 각오가 전혀. 조금도 안 되어 있는 사람이거든요? 심지어 잠시 시간을 가지자고 이성이 판단했는데, 마음이 그러기 싫어서. 지금 이렇게 당신을 붙잡고 있다고요.”

…표현하지 않으면 모르는 게 마음이라고 했다. 지금 할 수 있는 최대한. 솔직하게 표현해 보는데, 나 왜 이렇게 애 같냐… 폴라리스는 속으로 한탄했다.

“사랑한다구요, 내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만큼.”

사랑한다, 내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만큼. 릭. 당신을.
내가 믿을 수 없는데, 아마 당신은 더더욱 믿기 힘들지 않을까. 말을 하면서 왜 자꾸 슬퍼지는지 모르겠다. 나는 당신이 내 사랑을 믿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걸까?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요.”

이제는 내 행복보다 간절하게, 당신이 행복하길 바란다. 절절하게 바라는 목소리가 살짝 물기에 젖어 파르르 떨렸다.

“…어쩌면 당신은 나랑 헤어지는 게 더 행복할지도 모르고, 당신이 바란다면 저는 마땅히 헤어져 줄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말끝을 잠시 흐렸다. 마지막 말은 아무래도 존대가 아닌 게 낫겠다.
헤어질 각오가 전혀 서지 않은 상태에서도, 당신이 바란다면 나는 헤어져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이것을 보고 이타적이라고 해야 할지, 헌신적이라고 해야 할지, 자기 희생적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미련하다고 해야 할지는 폴라리스 본인 스스로도 몰랐다. 아마 미련한 게 제일 맞을 것도 같은데… 폴라리스가 작게 훌쩍거리는 소리를 냈다.

“릭. 나는 네가 그리울 거야.”

그리고 쥐어짜듯 속삭였다. 그리고 폴라리스는 지금 제가 울고 있음을 아주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그의 옷을 젖게 하기는 싫은데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제 눈물로 인해 그를 슬프게 만들고 싶지 않다), 우는 얼굴을 보여주기는 더 싫었다. 폴라리스는 제 얼굴을 조금 더 깊이 그의 품에 묻었다. 그녀는 소리 죽여 울었지만, 어깨를 비롯한 몸이 가늘게 떨리는 것은 숨길 수가 없었다.

5-24
별명 : 릭-폴라리스 기능 : 작성일 : 17-09-10 20:29 ID : sijQOnCpFqONY
시간을 가진다는 것은 결국 잠시의 이별이다. 릭이 생각하기에 헤어짐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말을 폴라리스는 아무렇지 않게-적어도 그가 보기에는- 내뱉는다. 상처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라, 헤어질 각오가 되지 않았다는 말에도 사랑한다는 애절한 고백에도 그는 다만 미묘하게 씁쓸한 표정일 뿐이다. 전에 그랬던 것처럼 심장이 쿵 떨어지기는 했다지만 그만큼 깊은 진동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녀를 여전히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깊은 충격이 판단력을 흐려 폴라리스의 진심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일테지. 나는 원래부터가 순수하지 못한 사람이어서 사소한 일도 끊임없이 돌아보고 불신한다. 작은 의심의 씨앗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여린 땅에 심겼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감정이 얼굴에 이렇게 쉽게 드러나는 사람이었던가. 그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다. 대놓고 믿지 못하는 릭에게 폴라리스가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릭, 나는.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요.

움찔, 그 순간 몸이 떨린 것을 안고있는 폴라리스도 충분히 깨달았을 것이다. 분명 빠른 속도로 뿌리를 내려가던 씨앗이 그 말 한마디에 형체도 없이 파헤쳐짐을 느낀다. 당신이 행복하길 바란다.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한다면 당연한 말이나 죽는 순간의 그의 어머니조차도 그에게 그리 말해주지는 못했다. 어린 사자는 눈을 감았다. 반드시 살아남아- 끝의 끝에서 전하기에는 지독하게 잔인한 말. 사실은 사랑한다고, 행복하길 바란다고, 그렇게 말해주길 소원했던 것 같다. 스무 해를 더 돌고돌아 이제와서야 누군가 그의 행복을 빌어준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이유로는 감격이라는 단어가 가장 적절할 듯 싶다. 끝없고, 무한한 감동. 따뜻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 말만은 더없이 진실된 고백임을 알았다.

"나도..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

폴라리스가 흐느꼈다. 릭은 그 가시같은 눈물에 찔린 심장이 따끔거리는 것을 오롯이 느꼈다. 하지만 끝끝내 같이 울어줄 수는 없어 슬프다고 생각했다. 분명 죽을만큼 슬프고 또 기쁜데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폴라리스가 웅얼거렸다. 내가 바란다면 헤어져주겠다고. 바보같은 소리. 나는 당신을 필요로하고, 당신도 그래야한다. 그래서 당신이 나로 인해 행복하기를 바란다. 언제까지고 함께하기를 원한다.

"내가 행복하려면 당신이 있어아해."

릭은 품안에 들어오는 작은 등을 힘주어 껴안았다. 옷이 젖어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그 눈물을 언제까지나 받아내었으면 했다. 그래. 그러길 원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 함께 눈물 흘리지는 못해도 너른 품 하나만은 아낌없이 베풀어주고 싶었다.

5-25
847
별명 : 이런놈이라-미안하다ㅜㅜㅜㅜ 기능 : 작성일 : 17-09-10 20:30 ID : sijQOnCpFq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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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을 빠져나와 릭의 차 안이다. 폴라리스의 집으로 가는길, 릭은 벌써 네번째 핸들을 그녀에게 보여주었음에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아마 뿌듯함, 혹은 기쁨이었다.
둘 사이에 아직 해결해야할 숙제가 남아있음에도 그랬다.

"내 부하가."

아직 해답을 찾지 못한 문제. 그에 대해 먼저 운을 띄운 것은 운전석에 앉아있는 남자 쪽이었다. 그 뒤에 올 말은 구태여 잇지 않아도 자명했다.

"당신이 보는 앞에 있으면, 그것도 안될까?"

한치의 물러남도 돌아섬도 없이 깊숙이 돌직구를 던져. 구제불능, 벽창호, 이기적인 사람, 뭐라고 욕해도 지금의 그는 할 말이 없을 테다. ..아니, 도리어 꿋꿋이 제 의견을 밀고나가려나. 그러나 언제나처럼 뻔뻔하고 오만하게 구는 것 같아도 실은 제 옆의 앉아있는 여자의 눈치를 보고있는거다. 힐끗, 줄곧 앞을 내다보고 있던 눈이 조수석 쪽을 잠시 돌아본다. 인페르노의 누군가가 안다면 뒷목을 잡고 통탄할 일이었다.

51 다섯번째 일상(4) (4850063E+5)

2018-12-28 (불탄다..!) 00:25:59

5-26
별명 : 폴라리스 - 릭 기능 : 작성일 : 17-09-11 00:01 ID : si6/Qkl2jxgBs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요.

왜 그 말에 그가 몸을 크게 움찔 떨었는지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아, 아니구나.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내 행복을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왔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혹은 사랑한다고 말하지도 않으면서) 집착 (그것도 평범한 수준의 집착을 넘어선) 을 하는 사람들을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고 하며 폴라리스는 상념을 애써 쫓아냈다. 어쩌면 이 말은, 내게 있어서도, 당신에게 있어서도 당연하지 않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어쩐지 나는 문득 그것이 서러워졌다.

"나도..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

내게 있어서도, 당신에게 있어서도.
평범한 삶을 살아왔다면 당연했어야 할, 그렇지만 평범한 삶을 살지 못했기에 당연하지 않은 말이 흘러나왔다. 폴라리스는 정말이냐고 되묻지는 않았다. 그의 말이 진실 되었다는 것을 접촉한 품에서 직접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행복하려면 당신이 있어아해."

정말요? 그러나 폴라리스는 릭의 말에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함께 있어서 행복한 사람, 의 분류에 자신이 들어간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자신감’이라는 것을 가질 수가 없다. 릭. 당신이 행복해지려면, 차라리 나를 만나지 않는 편이 좋았을지도 몰라요. 라는 생각이 스쳤지만, 폴라리스는 그 스쳐간 생각을 구겨서 자신만 살펴볼 수 있는 마음의 방에 넣어두었다. 본능적으로 ‘지금’ 꺼내서 펼쳐보면 안 되는 생각이라는 것을 알아서다.

*

골목을 빠져나와 릭의 차 안이다. 폴라리스의 집으로 가는 길. 적지 않은 눈물을 흘렸던 그녀는 지금 머리가 약간 아프고, 멍하다고 아주 잠깐 생각하고선 머리를 비우고 있는 상태였다. 말하자면 완전히 방심하고 있는 상태였던 거지.

"내 부하가."

폴라리스는 살짝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눈시울이 붉었다. 이때까지는 정말로 아무런 생각도 안 하고, 멍을 때리고 있었다.

"당신이 보는 앞에 있으면, 그것도 안 될까?“

그녀의 얼굴에 충격이 고스란히 비쳤다. 누가보면 가족의 부고 소식을 들은 줄 알겠다. 순간적으로 믿기지 않는 충격-믿고 싶지도 않은 충격-이 그녀를 강타하고 지나갔다. 아, 맥없는 신음을 흘리며 폴라리스는 이마에 손을 얹었다가 상체가 아래로 기울기 시작했다. 양손을 이마에 대고, 팔꿈치로 허벅지를 눌러 무너지려는 몸을 지탱했다. …아. 사람은 방심하고 있는 순간에 충격 받으면 진짜로 무너지는구나. 폴라리스는 새삼스럽게 놀랐다. 내가 릭 앞에서는 어쩌면 진심으로 무방비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그의 앞에서 안심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오래도록 멍을 때린 것도 일종의 안심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는 했다.) 그 상태로 잠시 굳어 있던 폴라리스는 이제 생각이라는 것을 해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미쳤어요?
나 말라 죽는 꼴 보려고 그래요?
스트레스로 내가 미치는 거 보고 싶어요?

폴라리스가 침묵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위에 생각이 고대로 튀어나갔을 거다.
평범한 여자였다면 이 시점에서 떠오르는 대로 쏘아붙였겠지. 밥상이 있었다면 엎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정말 다행히도 남들보다 인내가 길었다. 길다 뿐이지, 그것이 영원히 안 끊긴다는 것은 아니다. 폴라리스는 릭을 위해서도 그녀를 위해서도 그녀의 인내가 길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냉정과 이성을 찾아왔다.

솔직히 말한다면. 안 돼요, 싫어요, 하지 마세요. 를 뚝뚝 끊어 아주 강경하게 말하고 싶다.

그러나 그녀는 제 욕구를 인내하고서, 그가 이렇게 집요하게 느껴질 정도로 제게 사람을 붙이려는 까닭을 찾았다. 단서는 있었다. 오늘 그가 처음 만났을 때 이름을 부른 후의 첫 마디. ...당신이 걱정돼서 견딜 수 없었어. 그러니까 그가 걱정할만한 일이 제게 있었다는 거지. 모르는 사이에 위험에 처했나 보다. 음, 예상할 수 있는 것은. 그보다 높은 사람, 인페르노의 보스에게 내가 찍혔다거나. 그의 적들에게 내가 노출 되었다거나. 누가 나한테 암살자를 고용해 내 장기를 빼가려고 했다… 세 번째 선택지도 있을 법한 일이었지만, 그것을 제쳐두고 폴라리스는 선택지를 두 개로 좁혔다.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다른 가능성은 열어두었다. 최악이라고 생각한 상황에서도, 때때로 인간은 더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릭. 당신이 내게 이유 없이 집요하게 스토... 아니, 사람을 붙이려는 사람은 아니겠지요.”

스토커라고 당당하게 말할 것을 그랬다. 내가 느끼기로는 스토커라고 저 사람이 알아야 할지도 모른다. 말하고서야 그 생각이 났지만. 도로 정정하기에는 꼴이 영 우습다. 몸은 무너진 것에 가까운 상태 그대로 말은 침착하게 했다.

“당신은 내가 걱정이 돼서 견딜 수 없었다고 했어요. 그건 아마 내가 당신이 걱정할만한 위험에 처했다는 걸 거예요.”

그렇죠? 굳이 되묻지는 않았다. 그냥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을 뿐이지.

“가령 당신보다 높은 사람에게 내가 찍혔다, 아니면 당신의 적들에게 내가 노출되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당신이 알았다.”

폴라리스는 바텐더가 안 되었다면, 타로카드로 점 쳐주는 직업도 안 어울리지는 않았을 거다. 너무 잘 어울려서 문제일지도 모른다.

“…뭐, 내 예측이 빗나갔을 경우도 염두에 두고 있으니까. 내게 사람을 붙이려고 했던 이유 좀 알려줄래요?”

…아픈 상태에서 머리 과하게 쓰면 열나는데. 어쩌면 내일은 열에 시달릴지도. 폴라리스는 막연하게 내일의 자기 상태를 예측해 보았다. 의미 없는 짓이었다. 어차피 버티고자 마음먹는다면. 폴라리스는 속으로 날짜를 세었다. …버틸 수 있는 건 앞으로 삼일이겠다. 설마 삼일 내내 내가 릭이랑 붙어있지는 않겠지.

5-27
별명 : Mars-Venus 기능 : 작성일 : 17-09-11 03:34 ID : sigqNtaYzNuHU
릭은 아직도 폴라리스가 불쾌해하는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한다. 그는 감이 좋지만, 동시에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되기에는 신이 지나치게 공평하다. 그러니 그저 어설프게 짐작할 따름이었다. 폴라리스에게는 내 호의가 불편했구나. 내가 못하는 그녀의 먼 과거에 무언가 일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이상을 읽어낼 정도의 초능력을 지니지 못함이 안타까웠다.

곁눈질하는 시선 사이 폴라리스는 무너지듯 앞으로 넘어지고 만다. 릭은 폴라리스가 그 정도 반응을 보이리라고 생각치 못했다. 당황할 새도 없이, 반사적으로 오른팔을 뻗어 쓰러지는 상체를 받치려 했다. 그러나 제 몸을 똑바로 조절할 수 있는 그녀에게 지금 그의 단단한 팔은 필요한 배려가 아님을 금세 깨닫는다. 스스로 힘으로 고개를 지탱한 폴라리스가 완전히 쓰러지지 않음에 안도했다. 릭은 별 말 없이 반쯤 펼쳤던 팔을 다시 접어내렸다. 하지만 물론 걱정하는 눈빛마저 거둘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폴라리스는 분명히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얼굴에 서려 있는 미약한 혐의 감정을 읽었다. 그 역시 충격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대체 왜. 지켜주고 싶다는데 왜 그러는거야. 어깨를 붙잡고 따지고 싶었다. 릭이 그 정도로 침착하고 이성적인 사람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언성을 높였을 게 명백했다. 다행히도 타고난 성미가 그것을 막았고, 많이 사랑하는 사람을 상대로 그렇게 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아주 컸다. 그래서 그는 다만 창문을 열었다. 창밖으로 손가락 두어개를 까딱 내민다. 가을 저녁의 시원한 바람이 차 안으로 쏟아져들어왔다. 청량한 숨결은 뜨겁게 들끓는 머릿속을 에이곤 해. 복잡한 생각들을 멈추고, 그가 응당히 해야 할 반응을 처리할 수 있게 만든다. 그는 창백한 머리카락을 스치는 그 여유로움에 만족했다. 이제는 입을 열어야겠다. 폴라리스의 말들이 수없이 쏟아졌다.

릭. 당신이 내게 이유 없이 집요하게 스토커를 붙이려는 사람은 아니겠지요.
당신보다 높은 사람에게 내가 찍혔을지도, 아니면 당신의 적들에게 내가 노출되었을지도. 그리고 그 사실을 당신이 알았을지도.
그중 내게 사람을 붙이려고 했던 원인은 뭔가요?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야."

들려오는 감정의 홍수 속에서 그는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을 가까스로 미뤄두고 먼저 대답해야 할 것을 붙잡을 수 있었다. 그의 대답은 솔직했다. 프레드리히가 폴라리스를 언급한 것은 맞지만, 그건 그녀를 고깝게 여겨서가 아니었다. 충분히 인페르노의 적들에게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결국 릭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확신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당신이 알았을지도. 전혀 그렇지 못했다.
릭을 불안케 하는 것은 결국 그 무지였다.

"나로 인해 당신이 다치고 위험한 게 싫어서,"

그는 제가 느끼는 감정을 될 수 있는 한 조곤히 설명헀다.

"불안하고 걱정돼서 그래."

불안과 걱정. 결국 본질은 그것이었다. 그가 폴라리스를 이해할 수 없는만큼, 폴라리스도 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이제서야 든다. 나는 당신이 걱정돼. 걱정돼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그러니 안되겠어. 내가 어떤 마음인지가 훤히 들여다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항상 숨기기에 급급했던 머릿속을 꺼내 보여주고 싶다고 느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당신이 이런 나를 알아주었으면. 이기적인 마음가짐에 의해서였다.

릭은 제 감정에 대해 충실히 설명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의 질문 차례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묻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나도 당신이 불쾌한 이유를 물어보고 싶어."

불쾌한 이유.

"나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 미안해."

미안해. 이어나가면서도 단호히, 말끝을 흐리지 않았다. 그는 본디 미안하다는 말에 매우 인색한 사람이었다. 사과는 곧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행위, 평생을 짓밟고 지배하며 살아온 그같은 남자에게는 특히 어려운 언사다. 그가 굳건한 제 자존심을 얼마나 굽히고 들어갔는지 폴라리스는 아마 짐작하지도 못할 것 같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그 순간으로 인해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신을 이해하지 못함에 정말로 미안한 마음이 커서, 사과하고 싶어졌다. 그러니까 그 짧은 한 마디는 어디까지나 진심이었다.

수십초 후, 짧은 정적을 찢고 잔잔한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따르릉, 도저히 21세기의 것이라고는 봐줄 수 없는 구식 벨소리가 튄다. 릭의 것이었다. 그는 정장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발신자도 확인하지 않고 거절 버튼을 밀어넘겼다. 그것도 모자라 아예 전원을 끄고 앞유리 앞의 작은 공간에 툭 던져버린다. ...아마도 업무 관련 전화였을 테다. 하지만 그따위 연락 따위로 지금의 시간을 방해받을 생각은 없다. 적어도 그는 그랬다.

5-28
별명 : White - Gold 기능 : 작성일 : 17-09-11 21:14 ID : si6/Qkl2jxgBs
가을 저녁의 바람이 차 안으로 들어왔다. 약간은 차게 느껴지는 바람이 머리를, 혹은 다른 것을 식히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야."

뭐가요? 반문하지 않았다. 지금은 상대의 말을 들어줄 시간이기 때문이다. 폴라리스는 이어질 릭의 말을 얌전히 기다렸다.

"나로 인해 당신이 다치고 위험한 게 싫어서,"

그건 나도 그래요. 당신이 ‘나’로 인해 다치고 위험한 게 싫다. 단순히 ‘싫다’는 표현도 부족할 정도다. 폴라리스는 릭의 말에 공감했다. 나로 인하지 않은 거여도 당신이 다치고 위험한 건 싫은데. 그게 나로 인한 거라면 상상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다.

"불안하고 걱정돼서 그래."

그것 역시. 공감하는 바였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생각할 때, 걱정과 불안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해서 폴라리스는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어 나지막하게 첨언했다. 당신이 겪고 있는 감정들을, 나 역시 겪는다. 그렇게 말해주고 싶어서였다.

*

"나도 당신이 불쾌한 이유를 물어보고 싶어."

…불쾌라, 제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이 불쾌던가. 혼란함과 충격과 슬픔과 상처가 섞인 것에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아주 다른 감정 같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그가 묻고 있는 것은 지금 내가 불쾌-불쾌한 것과는 약간 달랐지만, 그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불쾌해 보였나보다. 막연히 추측했다-한 까닭이 아니라. 사람을 붙이는 것을 거부하는 이유일거다. 다른 방향으로 해석해보자면, 지켜주고 싶다고 했는데 왜 그걸 당신은 받아들이지 않아? 라고 그는 내게 묻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는 그가 내민 호의를 누군가에게 한 번도 거절당하지 않은 사람일까. …그것 역시 모르겠다.

호의로 건넨 것이 언제나 호의로 느껴질 수는 없다고, 자신에게는 ‘호의’ 지만, 타인은 ‘호의’로 느낄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말할 수 없었다. 타인, 이라니. 너무 매정한 표현이지. 그와 내 사이를 그렇게 무정하게 선 긋고 싶지는 않았다.

…매정한 여자인 주제에 그에게는 이렇게나 무르다.
폴라리스는 속으로만 실소했다.

"나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 미안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 그의 말은 이어졌다. 나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 미안해. …나는 왜 놀라고 있는가. 깜짝 놀라는 것은 아니고. 놀랍다는 감정이 아주 서서히 번졌다. 여전히 저 스스로를 홀로 지탱하고 있는 자세로 폴라리스는 몇 번 눈을 깜박였다. 믿기지 않는 말을 들어서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미안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에 폴라리스는 제법 솔직하게 사과하는 인간이었으니까. (그녀는 미안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순간에도, 미안하다고 솔직한 투로 사과할 수도 있는 인간이었다) 단지 그는 미안하다는 말을 쉽사리 꺼낼 수 없는 위치에 여태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미안하다는 말이 몹시 익숙하지 않을 사람일 거라고 막연히 짐작했을 뿐이다.

*

수십초 후, 짧은 정적을 찢고 잔잔한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따르릉, 시대에 안 맞는 구식 벨소리가 튄다. …요즘 휴대폰 기본 벨소리에 저런 것도 있었나. 폴라리스는 아주 살짝 동공을 떨린느 것을 느꼈다. 그녀의 것이 아니니 당연히 릭의 것이겠지. 따르릉 울리는 소리가 그치고, 작은 물체가 툭 던져지는 소리가 났다.

…그냥 받아도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폴라리스는 천천히 몸을 들었다. 이제는 저 스스로를 홀로만 지탱하는 포즈가 아니었다. 그녀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가 헤 웃었다. 퍽 느슨하게 풀린 얼굴로 미소한 것이다.

“…미안하다고 말해줘서 고마워요.”

미안하다고 말하게 미안해요, 라는 것보다. 이쪽이 더 적절한 표현일 거다.

“불쾌…한 것과는 다른데, 뭐라고 설명하기는 어렵네요.”

…거부감? 이라는 표현이 불쾌보다는 적절한 표현인 것 같은데. 말하기 힘든 단어다. 해서 그녀는 속으로 말을 골랐다. 내가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까.

“나는 시선에 민감한 편이예요.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텐데, 아마도 과거에 스토킹 당했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폴라리스는 이 부근에서 살짝 릭의 눈치를 살폈다.

“…미친놈을 만났어서 그랬을 수도 있는데에……”

…욕을 속으로는 생각해도 그 앞에서 말하기는 싫었는데. …어쩔 수 없잖아. 나도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는 예쁘게 보이게 최소한(?)의 내숭은 떨고 싶었다고. 그러나 그녀는 내숭보다, 직설적인 표현을 택했다.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말꼬리를 늘리며 끝을 흐리다가 헤헤 웃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미친놈을 미친놈이라고 하지. 뭐, 나쁜 놈이라고 하랴. 둘은 엄연히 다른 분류에 있는 인간들이다. 미쳐 있는데다가 거기에 더해 나쁘기까지 한 놈은 또 다른 분류에 넣어야 했다.

“그래서 지켜보는 시선도 감시하는 시선으로 느껴질 때도 있고, 별 의도가 없어 보이는 시선도 꺼림칙하게 느껴질 때도 있어요. 내가 그렇게 느끼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에요. 이젠 어쩔 수 없는 거지.”

늘 그런 것은 아니니, 가끔 그럴 때도 있다고 아주 가볍게 말했다. 무거운 이야기를 무겁게 이야기하면,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고. 폴라리스는 이이상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은 좀… 좀 그랬다.

“솔직히 릭이 붙인 사람이라도 24시간 내내 저를 지켜본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지켜주고자 하는 의도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어도 심각하게 스트레스 받을 것 같아요.”

“내가 보는 앞에 있다고 해도, 하루 종일이라면 좀…”

스트레스 받을 거예요. 라는 말은 생략했다. 말꼬리를 흐리고 어쩔 수 없이, 난처해 보이는 얼굴로 미소했다. 사생활의 자유는 (많이) 존중받고 싶어요. 그런데 내 사생활의 자유 범위가 좀, 남들과는 다른 범위에 위치해 있어서… 라는 말은 속으로만 했다. 어떻게 꺼낼 수 있겠는가. 지금도 충분히 이상한 ?어쩌면 괴상한- 여자로 보일 텐데, 여기서 더 이미지가 실추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미 실추된 것… 같아.

폴라리스는 시무룩해졌다. 속으로도, 겉으로도. 알기 쉽게.

5-29
별명 : Warm-Adorable 기능 : 작성일 : 17-09-12 21:38 ID : siOFh3AZX7jCY
고맙다는 말은 미안하다는 말의 짝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어울리지 않는 응대에 지긋한 가슴이 또 한번 떨린 것은 왜였을까. 미안하다고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러면 나는 고맙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그렇게 덧붙이다간 끝이 없을 것 같아 더 이어나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스토킹. 미친놈. 사용한 적나라한 표현이 스스로도 민망했는지 폴라리스가 말끝을 조금 늘였다. 릭은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조금 움찔했으나, 사실은 직설적인 말투에 그가 충격받을 이유도 그녀가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폴라리스를 사랑한다고 고백했고 이것은 또한 폴라리스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리고 또, 그래. 그럼 미친놈을 미쳤다고 하지 무어라 부르랴. 그 또한 속되게 '미친놈'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들을 몇몇 알고 있다. 이 밤의 도시의 주민이라면 살면서 이상한 사람 한명쯤 만나지 않는 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다만 나직하게 맞받아쳤다.

"아주 개자식이네."

폴라리스 앞에서만큼은 절대 상스러운 소리를 하지 않았는데. 구태여 신사다움을 버린 것은 그녀가 무안하지 않게 하려는 일종의 배려일까, 그가 조금 더 솔직해졌다는 지표일까.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다. 흔한 일이라지만 그녀가 그런 자식을 만났다는 것을 직접 시인하니 또다시 마음 한켠이 아파온다.
릭은 핸들을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사실은 아까부터 담배를 태우고 싶은 욕구를 눌러 참고 있었다. 그래서 이어지는 폴라리스의 말에 머릿속을 조금 더 집중했다. 때와 상황에 맞지 않는 감상이지만, 고요한 차 안에서 들리는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에 깊이 빨려드는 기분이었다.

내가 그렇게 느끼고 싶어서 그런건 아니예요. 이젠 어쩔 수 없는거지.

아, 담고있는 가사가 더없는 비극만 아니었다면 그는 그것을 듣고있는 것만으로 행복해졌을 것이다. 대단한 심리학자가 아니더라도 그녀의 말이 트라우마라는 단어를 내포하고 있음은 어렵지 않게 눈치챈다. 인간이란 결국 인생을 살며 경험해온 것의 결과물이다. 인생은 종종 내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아서, 때로 어떤 경험은 결코 원치 않던 영구적인 상처를 남기고 지나가기도 해. 폴라리스가 금세 울적해진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인지도 몰랐다. 릭이 건네는 호의를 올곧게 받아들여줄 수 없어서. 결국 사랑하고 신뢰받은 만큼 베풀 수 있는 게 사랑인 것을, 그녀는 그를 온전히 믿어줄 수 없어서.

릭은 꽤 오래토록 말이 없었다. 정면을 바라본 옆얼굴은 평이한 눈매를 보아 화가난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당연히 기분이 좋을 수는 없겠지만, 화가 난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는 폴라리스의 집앞에 도착할 때까지 장시간 침묵을 지켰다. 멈춰선 후에 시동을 끄고 나서는, 후. 어울리지도 않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그제서야 폴라리스 쪽을 돌아보았다. 말없이 팔을 벌렸다.

"......"

폴라리스는 그의 생각처럼 따뜻하게 안겨주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망설이며 어정쩡하게 다가갔을 수도 있겠지. 사실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러면 그가 먼저 다가가 세게 껴안았을 것이다. 그는 어떻게든 넓은 품에 다시 한 번 폴라리스를 안고 있고, 이제는 지켜보고 있는 사람도 없으니 한참을 그럴 수 있다. 쪽, 볼에 가볍게 입맞췄다.

"I adore you, honey."

...자기야, 라니, 릭의 입에서.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아 오싹 소름이 돋았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막상 말을 꺼낸 당사자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아보이는 얼굴이다. 여전히 침묵할 때와 마찬가지로 무표정이지만, 더없이 따뜻한 눈빛으로 폴라리스를 바라본다. I adore you. 완벽한 진실을 말하듯 편안하고 담담하기 그지없는 사랑 고백이었다.

-

릭은 폴라리스가 가진 상처마저도 사랑하고 싶다. 그래서 그녀가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호의에 더 이상 낙담하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

멀지 않은 시일 내에, 릭은 자주 그랬던 것처럼 폴라리스의 집 앞에 또 한 번 나타났다. 다만 트렁크에서 짊어지고 내리는 큰 보따리의 것이 남달랐다. 그는 지퍼를 열고 그 안에서 나오는 내용물을 하나하나 친절히 설명했다.

이건 권총, 이건 전기충격기, 스프레이, 이건 뭐, 이건 또 뭐-

"총 쏘는 법은 알아?"

태연히 묻는다. 위험에는 물량으로 승부하겠다는건지, 도대체가 없는 게 없다. -아마 당신이 상상할 수 있고, 릭이 구할 수 있는 범위 내의 물건이라면 전부 들어있을 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꺼내든 화려한 장식의 함이 하나 있었다. 뚜껑을 열자 폭신한 쿠션 정가운데에 무언가가 들어있다.

"...어때?"

그건 케이스만큼이나 아름다운 시계였다. 큐빅-이 상식적이겠지만, 아무래도 진짜 보석인 것 같다- 여덟 개가 테두리에 주르륵 박힌 아름다운 은빛이다. 아. 물론 단순한 시계인 것만은 아니었다.

"호출기야."

시계 옆면의 버튼을 누르면 곧장 릭에게로 위험 신호가 전해지는 방식. 이제보니 릭의 오른손목에도 비슷한 형태의 손목시계를 차고 있다. 항상 당신 곁에 있지는 못하겠지만, 부르면 언제든지 찾아가겠단다. ...10대 어린애들이나 할 법한 유치한 고백. 그러나 또다시, 아무렇지 않다는 듯 뻔뻔하고 담담하게.

"마음만은 언제나 함께 있다는 걸 알아줘."

그는 부탁했다. 다정하게 웃었다.

52 릭주 ◆rAqAiJ2zqg (4850063E+5)

2018-12-28 (불탄다..!) 00:30:41

이거는.. 진짜 좀 많이 부끄럽지만 이제는 말할수 있는 이야기인데....☞☜ 사실 다섯번째 일상 하기 직전에 알렌 정보 공개했을 때 폴리주가 알렌을 엄청 귀여워하셔서... 왠지 속상해했었어요(??) ㅋㅋㅋㅋㅋㅋ ㅠㅜㅜ지금 생각하면 진짜 웃기지요 사실 따져보면 릭도 내가 만들었고 알렌도 내가 만들었는뎅....? 왜 질투 비슷한걸 한걸까? 릭에 동화되었던 걸까요?(。・・。)ㅋㅋㅋㅋㅋㅜㅜㅜ 사실 그래서 알렌을 약간 더 싸가지 바가지로 굴렸던 것 같기도.. 일상 막바지에 가서 약간 아차 싶었어요 대체 왜 그랬을까^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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