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자신의 머리를 괴롭힌다. 그러다가 이제는 볼을 괴롭힌다. 그 누군가는 당연히 울프라고 유안은 인지하고 있었다. 졸리는 와중에도. 힘없이 뜬 눈을 조금 움직여 어느새 옆자리에 앉아 빤히 쳐다보는 울프를 의욕없는 시선으로 조용히 응시했다.
"...안유안 아닌데요."
여전히 의욕 제로의 목소리로 나지막히 대꾸하고는 고개의 방향을 천천히 바꾸었다. 울프가 있는 반대쪽 방향으로. 역시 당직은 싫다. 철야를 해야함은 물론 조금 눈을 붙여두려고 해도 누군가가 이렇게 깨우러 들이닥친다. 졸음과 힘듦을 차단시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하면 자신도 모르게 소리소문없이 쓰러져서 잘못하면 병원에서 눈을 뜰지도 모르게 되어서...최후의 선택지로 삼고 있는 중이다.
이런 식으로 자정에 쓰러진 유안괴는 반대로 울프는 멀쩡히 눈을 뜨고 있지만. 역시 생활패턴을 바꿔야하는 건가ㅡ라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아까 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다시 눈을 감았다. 아, 피곤해...
언제나 같은 맥 없는 목소리로 대꾸한 유안이 고개를 반대로 돌리자 뭐가 아니냐며 그 뒷통수를 쿡 찌른다. 적응할 때도 되지 않았나. 얼마나 엉망진창의 생활을 하길래 이 모양인가 싶기도 하다. 얘라면 왠지 잘 시간에 안 자고 안 잘 시간에 잘 거 같아서.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뒤통수를 응시한다. 얘를 이대로 자게 둘까, 아님 어떻게든 깨워놓을까. 사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이대로 둬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서장님이나 하윤이에게 들킨다면 분명 잔소리가....그 불똥이 나한테도.... 안되겠다. 깨워야겠어. 지난날 잔소리 폭탄을 떠올린 나는 유안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근무시간에 누가 이렇게 엎드려 자라 그랬냐. 안 일어나? 당장 안 일어나면 안아서 일으킨다?"
일으켜놓고 쓰담쓰담형에 처해주마. 라는 아무말이나 하며 깨웠다. 이래도 안 일어나면 군대 기상나팔이라도 틀어볼까?
후폭풍을 두려워한 울프는 유안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열심히 깨우려고 하였다. 누가 자라 그랬냐, 안 일어나냐, 안아서 일으킨다, 쓰담쓰담형에 처힌다...등등 여러가지로 화려한 말을 하면서. 갑자기 어깨를 잡히고 흔들린 탓에 유안은 잠시 화들짝 놀라며 '어엇'이라는 칠칠치못한 외마디를 흘렸는데, 이 목소리마저 의욕 제로인 게 황당하다.
"...글쎄요."
이건 아마 울프의 첫번째 한마디에 대한 답변일 것이다.
"...아, 제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조금 특이했었죠. 아마 거기서 배웠을 겁니다. 아, 완벽한 대답이군요."
기력없는 목소리로 무슨 말을 하나 싶었더니 또다시 아무말. 울프의 다른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못했다. 여하튼 그 말만을 남기고 다시 눈을 감았으나, 유안은 순간 한 가지 생각에 미쳤다. ...이 누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날 깨우고 볼 듯한데... 거기에 저항할 기력도 없다. 울프는 어차피 마지막엔 자신을 깨우는 데 성공할 것이다. 그렇다면... 유안은 다시 입을 뗐다.
"...돈."
기력이 전혀 없는 탓에 한 박자 쉬고는 말을 이었다.
"돈을 받을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 같은데..."
이득은 취하고 본다ㅡ주의인가. 이 녀석 제정신이 아니다. 저 눈을 봐. 의욕은 하나도 없는데 뭔가 진지한 기색이 비친 눈.
놀랍게도(?), 유안은 그 말을 듣자마자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다. 마치 죽은 사람의 것 같기만 하던 얼굴에 어느새 생기가 도는 듯하다. 아무래도 결국 능력을 쓴 것 같다. 힘듦과 지침은 냅뒀지만, 졸림은 차단했다. 사정없이 쳐들어오던 졸린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딜."
그리고 즉답. 음흉하게 웃는 울프를 비웃는 듯 하는 말로 들리지만, 그의 표정은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훤히 보이는 울프의 지갑을 양해도 어떤 말도 없이 제 손으로 가져간다. 힘들고 지쳐도 무례한 건 여전하다. 여전히 그는 앉아있다. 지폐가 담긴 자리를 열고 빈손으로 안에 들어있는 돈을 능숙히 세어본다. 돈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는 사람답다고 할까 뭐라고 할까.
"많군요. 과연 금수저는 다르다고 할까요."
목소리가 평소대로 돌아온 듯하다. 태세전환이 빠른 사람이다.
"얼마나 가져갈까..."
혼잣말 후 실소를 잠시 옅게 짓고는 지갑을 계속 응시하였다. 저기요, 앞에 사람 있거든요. 선배요. 연상이요. 유안의 종횡무진은 당직 때도 변함이 없다.
돈을 꺼내자마자 반응이 달라진 유안을 보고 내 눈이 잠시 커졌다. 아주 잠시였지만. 그가 지갑을 가져가 돈을 세는 걸 그냥 바라만 보았다. 돈이 그렇게 좋을까. 날 때부터 돈부족에 시달려본 적이 없다보니 저런 모습은 잘 모르겠달까. 아니 뭐 그렇다고 돈을 허투로 보는 건 아니다만.
얼마를 가져갈까 고민하는 말에 나는 피식 웃고 그의 손에서 지갑을 도로 가져왔다. 물론 돈은 빼기 전에. 이러면 또 흐느적 늘어지는거 아닐까 생각하며 지갑을 든 채로 말했다.
"돈이 그렇게 좋냐? 여기 월급이 적은 것도 아닐텐데, 왜 그렇게 돈에 집착해?"
이건 질문값. 이라며 지갑에서 신사임당 한장을 들고 팔랑거렸다. 주는 건 대답 들은 후에 줄게.
돈을 빼려고 하기도 전에 울프가 지갑을 도로 가져가버렸다.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돈이 아닌 사람을 쳐다본다. 울프는 재미를 붙인 듯한 질문을 던지며 질문값이라며 오만원 한 장을 보장했다. 유안은 불만스럽다는 듯 표정을 조금 찌푸리며 대답 대신 다른 질문으로 대응했다.
"비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늑대 누님?"
무뚝뚝하게 말하면서 끝에 까칠함이 배어나왔다. 주인을 잃은 돈의 노예는 이런 반응이다. 그나저나 그 말, 유안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우리 페어플레이합시다ㅡ덧붙이는 이 말도 마찬가지다. 그러다가도 의자등에 몸을 기대면서 다소 거만한 어조로 답한다. 졸린 것 치고는 선명한 목소리로.
유안의 입장에서는 당당하게 딜도 하고 5만원이 보장된 질문에 확실한 대답을 돌려줬는데 상대가 전부 부정해버리는 상황이다. 그는 황당하다는 기색을 무표정에 살짝 드러내며 울프를 조용히 응시했다. 다다익선이란 말로 답했더니 날로 먹는단다. 성심성의를 담은 대답을 요구받았다. 유안은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아까부터 열심히 자신을 깨우려고 애를 쓰던데, 그렇게 해서 저 사람이 얻을 수 있는 메리트는 무엇인가...모든 사고가 이해관계로만 이루어진 사람도 아니고 일단 그 생각부터 시작한다. 아, 자고 있는 게 보이면 손해를 보는 건가. 같이 혼난다든지. 그렇다면.
"...됐습니다. 흥미 잃었어요."
한쪽 손을 반쯤 들어 의욕없이 휘휘 몇 번 젓더니 손모양을 바꾸어 손가락스냅을 탁 한다. 졸음이 다시 돌아왔다.
"돈 같은 거 딱히 욕심도 없고...하암."
마음에 있지도 않을 소리를 아무렇게나 툭 내뱉으면서 도로 엎드렸다. 아니, 쓰러졌다. 이대로 깨우면 깨워져서 돈을 받는 거고, 아니면 그냥 푹 자고. 어느 쪽이든 손해볼 건 없다. 혼나는 거? 한쪽 귀로 듣고 다른쪽 귀로 흘리면 그만이다. 적당히 대꾸하면서.
//애교라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나 유안이는 나쁜 생각을 품고 도로 자버렸ㅅ..(노답)
다시금 머리가 괴롭혀지는 감각이 느껴진다. 아니, 이번에는 조금 더 부드럽다고 할까. 아까는 헤집었지만 이번에는 엉키지 않게끔 조심조심 만진다. 외모 관리에 관심이 없어 아주 지극히 기본적인 관리만 되어있어 자를 때가 다가온 머리카락이 울프는 재미있는가보다. 계속 만지작거리는 걸 보니. 그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유안은 잠이 반쯤 깨버렸다. 팔 위로 엎드린 채로 고개를 살짝 돌려 팔 위로 얼굴을 반쯤 보인다. 드러난 피곤한 인상의 삼백안은 울프를 조용히 노려보듯 응시하였다. 그러나 감정은 그닥 실려있지 않아보인다. 침묵을 유지하다가 입을 열어 웅얼거리듯 말한다.
"...희한한 감상이군요. 오히려 건방지단 소리를 더 많이 들었습니다."
정상으로부터 고양이 취급을 받은 기억은 무의식 속으로 사라진 모양이다. 언급하면 다시 모습을 드러내겠지만. 계속 머리를 만지는 손을 뿌리치듯 벌떡 다시 상반신만 일으켜세웠다.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는 울프를 옆눈으로 바라보았다.
"좋습니다. 바라시는대로 아주 성심성의껏 부가설명을 하죠."
비아냥거리는 것 같은 말투로 말했다.
"아까 다다익선이라 했습니다. 풀어서 말하자면,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책을 더 많이 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책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이 읽을 수 있겠죠. 마지막으로 더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울프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사람을 덜 만날 수 있습니다. 이상."
연설조로, 꼬리에서 꼬리를 무는 연쇄적인 말을 무뚝뚝하게 마무리지었다. 얼굴은 여전히 평소의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