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6241846> 자캐가 나오는 아무 장면이나 되도록 1500자 이하로 쓰고 가는 스레 :: 29

117자

2020-09-14 21:37:10 - 2024-06-22 02:43:05

0 117자 (A9bEfm.sg2)

2020-09-14 (모두 수고..) 21:37:10

제목대로다.
그냥 묘사 연습, 글연습, 자캐자랑, 일상 등 아무 장면이나 쓰고 가라.
1500자 이하는 기준일 뿐이니 정말, 정말정말정말정말 길어져야만 한다면 더 써도 좋다.
나메는 글자수. 공백포함 기준이다.

23 싸이버거여도 괜찮아 (3YY4Hb4Ez6)

2021-11-04 (거의 끝나감) 10:35:42

#1. 오전, 나는 어디로
천정의 실링팬은 느긋하게 돌아가며 미풍을 만들고, 블라인드 사이로 비추이는 광선은 격자 무늬의 그림자를 쏟아낸다. 마호가니 책상 위에는 커피가 담긴 머그컵과 구식 CRT 모니터 하나, 그리고 ‘R.K’ 이라고 적힌 사립탐정의 명패.
모니터는 여러 문서들을 띄우고 있는데, 천칭과 월계관이 그려진 심볼로 보아 미합중국 정부기관, 그 중에서도 수사국 쪽의 문서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문서를 읽고 있는 것은 검은 페도라를 비딱하게 걸쳐 쓴 녹안의 백인 여성, R.K이다.

R는 질렸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며 신발도 안 벗고 책상 위로 다리를 쭉 펴올린다. 그리고는 모자를 살짝 벗어내려 눈을 가린다.

삐걱거리는 목재 계단참을 밟으며, 누군가가 올라와 열린 문 틈 사이로 들어왔다.
“일이 잘 안 풀리나보군?”
여성은 덮어 쓴 페도라를 올리지도 않고 건성으로 대답한다.
“어어, 뭐.”

“쉬엄쉬엄 해, 이 일 중독자야.”
검은 터틀넥 스웨터에 항공점퍼를 입은, 머리칼이 걸레같이 헝클어진 남성은 얼음이 든 음료를 R의 목덜미에 갖다 댔다. R는 화들짝 놀라 거의 뒤로 넘어질 뻔 한다. 키득거리는 남성에게 R는 마구 화를 낸다.
“아이, 씨… 작작 좀 해. 그리고 여기 들어오지 말랬지?”

남성은 뒤로 한발짝 물러난다.
“워, 워, 진정해.”
“너같으면 진정하게 생겼냐, 이 약쟁이 히피 노숙자 새끼야.”

남성은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며 항변한다.
“약쟁이 아니거든. 그리고, 기껏 힘들게 정보를 캐냈는데 감사는 못할 망정.”
“그럼 뭐라고 불러줄까? 약쟁이도 아니고 히피도 아니지만 노숙자는 맞는 브리 씨?”
“B거든.”
“흥, 알바냐.”
R는 새침하게 코웃음 치며 차가운 음료를 잽싸게 낚아챈다. 휘핑크림과 시럽이 가득한 카라멜 마끼아또. 분명 R의 지친 두뇌에 활력을 불어넣어줄 것이다.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는지, R는 잠자코 발을 내리고는 마우스 휠을 드륵거렸다.
“이상해. 정말 이상해. 분명 입국 기록은 있는데, 그 전 활동 경력이 불분명해. 케이프타운이라. 심지어 한 명은 아예 신원 자체가 은폐되어있고.”
R는 어느새 음료를 입에 털어넣고는 얼음을 까득거리며 말했다.

“그쪽은 분쟁지역이니까. 입국 기록이 남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지.”
“그건 나도 알고있다만… 분명 어딘가 기록이 남아있을 거야. 그 틈새를 찾아야지.”
R는 모니터에 거의 얼굴을 파묻을 듯이 바짝 붙어서는 문서를 읽어내려갔다.

B은 R를 관찰하듯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리고 작게 한숨을 쉬곤 팔짱을 끼며 묻는다.
“그래서? 어떻게 찾을건데?”
“그건…”

말문이 막힌 R는 대뜸 화를 냈다.
“아이 씨, 신경질나게 자꾸 그럴래? 그리고 말하지 않았나? 수사 방향을 결정하는 건 나, 서류같은 정보를 뒤져오는 건 너. 그렇게 되어있었잖아?”
B은 그런 R가 조금은 우스웠는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화제를 돌린다.
“뭐, 화내지 말고. 이럴 때 가끔은 좀 쉬어줘야, '아, 이런 게 있었지.' 하고 새로 깨닫는단 말야. 어차피 고객도 없는데, 오늘은 이쯤 하지?”
“…”

R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2. Detroit Dreamin'
버지니아 파크, 48202 디트로이트 미시건. 어느 한적한 초가을의 공원을 두 사람은 함께 걷고 있었다. 회색빛의 우중충한 하늘 아래, 돌연한 강풍에 갈색 낙엽이 흩날리고, 공원에는 인적 하나 없이 그저 싸늘할 뿐이었다.

B은 숨을 크게 마셨다 뱉었고, 무언가 상쾌해보였지만, R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어색한 침묵 속에 두 사람은 계속해서 공원을 거닐었다.

"그래서, 좀 기분이…"
먼저 말을 튼 것은 B이었다.
“좋을 리 있겠냐.”
그리고 냉랭하게 일축한 것은 R 쪽이었다.

B은 머쓱하게 머릴 긁었다.
“흠.”
어쩌면 속으로 ‘다 큰 성인이 사춘기 소녀마냥 행동하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는 식으로 생각하며 난처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R는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B을 흘겨보며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솔직히, 여기 와서 더 우울해졌어. 봐, 기억나?”
R가 뒤돌아보지도 않고 엄지로 가리킨 그 곳에는 헨리포드 병원이 있었다.
“…아.”

그 날. R가 소련의 실험체로 추정되는 소년과 비극적으로 헤어진 날, R는 알코올을 과다 섭취했고, 만취 상태에서 충동적으로 물질 D 한 움큼을 입에 털어넣었다.
그 탓에, 헨리포드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 시원하게 위세척을 받느라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마음도 싱숭생숭하고. 그 날 이후로 일도 손에 잘 안잡히는 것 같고.”
“이상하게 생긴 주름관 다발이 목구멍에 낑겨 넣어지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게?”

“글쎄, ‘나도 이 노숙자새끼랑 똑같은 약쟁이가 되어버렸구나’ 같은 거?”
B은 어깨를 으쓱이면서 생각없이 받아쳤다. 그런 B의 옆구리에 강한 훅이 날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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