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6241846> 자캐가 나오는 아무 장면이나 되도록 1500자 이하로 쓰고 가는 스레 :: 29

117자

2020-09-14 21:37:10 - 2024-06-22 02:43:05

0 117자 (A9bEfm.sg2)

2020-09-14 (모두 수고..) 21:37:10

제목대로다.
그냥 묘사 연습, 글연습, 자캐자랑, 일상 등 아무 장면이나 쓰고 가라.
1500자 이하는 기준일 뿐이니 정말, 정말정말정말정말 길어져야만 한다면 더 써도 좋다.
나메는 글자수. 공백포함 기준이다.

1 32자 (A9bEfm.sg2)

2020-09-14 (모두 수고..) 21:45:32

생각해 보니 공백포함 기준으로 치면 1500자는 무리군. 미포함으로 세.

2 이름 없음 (QflfELZzhs)

2020-09-18 (불탄다..!) 20:59:54

T는 어린 시절부터 비행기를 좋아했다. 그의 아버지가 말하길, 그녀는 비행기를 볼 때면 항상 웃으며 좋아했다고 한다.
나이를 조금 먹고 나서는 우주비행사로 꿈을 넓혔다. 그녀는 분명 그러한 꿈을 이룰 만큼의 재능을 타고났다. 아무나 우주비행사가 될 수는 없는 법이지만, 그녀는 그 소수의 기회를 얻을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 머리의 핏기가 빠지면서 두뇌가 예쁜 상아색으로 무르익어갈 때 즈음, 그녀는 그냥 가족을 아무 때나 볼 수 있고 돈과 시간만 된다면 좋아하는 비행기를 탈 수 있는 지구가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공무를 수행하는 기관에 비밀리에 채용되어 매일 자기가 좋아하던 하늘을 관측하며 나쁘지 않은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자기가 하던 계산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된 이후는 별로 좋은 일상이 되지 못했지만.
줄줄이 번호표를 뽑아가며 사임하고 일할 직원이 부서별 AI만 남게 생겼다며 사정하는 인사담당자를 뒤로하고, 그녀는 캐리어를 끌고 공항으로 도망쳤다. 비행기를 타면서 기분이 별로일 줄 몰랐는데. 비행기 위에서 마음이 착잡한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또한 살면서 처음으로 목적 없이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붕 떠 있는 기분이란 건 이럴 때 쓰는 말이리라. 그녀는 두통을 가라앉히려 기내 제공 커피를 마셨다. 친구와 마실 때는 시가를 우려도 이것보단 맛있겠다고 농담하곤 했는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구수한 신맛이 썩 나쁘지 않았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먹어서 그런 걸까. 그녀는 이제 비행기가 내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제 모스크바까지 4시간 남았다. 아마 운이 좋다면 방공호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구식 소련제 방공호가 인공지능으로 돌아가도록 보수했기나 바랄 뿐이다.

3 이름 없음 (5GNC5IRDiA)

2020-09-18 (불탄다..!) 21:39:57

"네가 알고 있었을 지 모르겠지만."

J의 손에서 피가, 마치 피처럼 보이는 액체가 배여나온다. 손으로 잡아 생긴 칼날 아래의 상처가 아무렇지 않은 것 마냥 남자는 말을 계속한다.

"나는 잠을 취하지 않아."

취할 필요도 없고, 취하지도 못한다.
그 소리가 떨리는 Y의 귀에 제대로 들어갔는지 모른다. 애석하게도 들어가지 않았을 것 같다고 추측한다.
소녀는 칼날을 놓는다. 빼앗으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남자에게 간단히 빼앗길 남자 손 안의 칼날을, 남자를 찌를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이해해버린 마음 속의 칼날을, 그리고 자신을 상처입히고 있는 이 칼날을.

4 이름 없음 (q4WF2a2wQA)

2020-09-25 (불탄다..!) 22:25:23

"교수님, 교수님은 어쩌다 철학을 연구하게 되신 겁니까?"
"성적 맞춰서 철학과 들어가다가 그렇게 됐습니다."
"예?" "뭐요. 어차피 언론사랑 하는 인터뷰도 아니잖습니까. 화장실에서 물어보니까 제대로 대답해주는 거요. 망할, 이딴 곳에서 일할 줄 알았으면 철학과 말고 차라리 신학과를 갔을 거야. 무신론자지만 매일 거지 같은 논리적 트랜지스터를 설계하는 것보단 낫겠지."
"둘만 있다고 너무 솔직하게 말씀하시는군요."
"솔직히 난 아직도 어처구니가 없소. 갑자기 정부에서 무슨 연구를 한다길래 와봤더니, 공간 이상작도(空間 理想作圖)를 통해 구심적 극하침투(求心的 極下浸透)로 차원 간 베르누이-프로이트(Bernoulli-Freud) 주머니 공간을 뚫어 개념정리(槪念整理)하에 공감적 현실화(共感的 現實化)를 하겠다고? 개소리가 따로 없지. 1년 안에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지 않았으면 당장 때려치웠을 거요."
"그래도 거의 막바지 아닙니까. 현실화하면 분명 새로운 세상이 열릴 거에요."
"그랬으면 좋겠군. 안 그러면 내가 편안한 교수 자리를 팽개치고 실종으로 위장해 온 보람이 없으니까 말이야."

5 이름 없음 (y2BGp0gW16)

2020-10-11 (내일 월요일) 12:31:34

처음 그의 눈동자를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단 한 순간도 그의 눈동자를 잊지 않았다. 그 때는 마치 보석같은 눈동자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마치 우주를 담은 창 같이도 보였다. 그래, 아름답지만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 다른 어떤 것 보다도 그다운 것.

6 글자수딱111인거자랑하고싶은데레스에썼다간111이안되니까여기다자랑해야지 (RGMynuFox.)

2020-10-11 (내일 월요일) 21:54:13

손님 중에서는 유난히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었다. 자주 오는 건 아니었다. 기껏해야 이 주에 한 번 정도. 주로 그를 맡는 건 나였다. 처음 지명을 받은 걸 기점으로, 어느 순간부터 그가 오면 자연히 내가 불려나가게 되었다. 요컨대, 내게도 단골이랄 만한 게 생긴 셈이다.

7 이름 없음 (AMcN4UXqqo)

2020-10-17 (파란날) 01:15:38

너는 나의 비겁함에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고발할 것으로 생각이 들 터임에도 내 앞에서 굳이 혁명단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을 터다. 애석하게도 네가 기댈 곳이란 돌탑 같은 내 비겁함밖에 없었고 난 그런 너를 받아낼 힘이 없었다.
결국 우리는 무너져버린 것이었다. 난 배신자로, 넌 패배자로... 이리저리 나뒹굴고 내팽개쳐진 채 쓰린 상처만이 남은 우리는 더는 날 수 없었다. 눈이 지붕 위에 앉고 우리의 수배지가 닳아 없어질 때쯤 우리의 과거도 잊혀갔다. 지도 하나에 들어오는 이 작은 영토에서조차 우리의 역사는 자리를 얻지 못하고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한 채 그저 하나의 흐름이 된 지 오래일 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도저히 버틸 수 없어 이 헝크러진 육체를 벼랑 끝에 내던지는 그 순간 나는 일순 쾌거를 맛보았다. 그것은 목적을 달성했을 때 느끼는 개운함이 아닌 이미 미쳐버린 사람이 아편을 씹는 순간 느끼는 향긋함에 가까웠지만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린 정신과 육체는 예리한 단면을 통해 새어 나가는 붉은 생명의 기운에 봄을 맞아 온몸에서 새순이 피어나고 새로워진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아아, 나는 결국 죽는 순간까지 비겁하고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내가 몸을 버리지 않았다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게 죽어버린 나는 지옥에조차 발을 들이지 못하고 이렇게 흰색으로 영혼이 새어버린 채 죽은 성벽을 배회하는 유령이 되어버렸을 뿐이다. 나는 죽고 나서 아마도 영혼은 원래 붉은빛일 것으로 생각하곤 했다. 나 외에 다른 혼을 본 것은 아니지만 죽는 순간 나의 붉은 기운을 모두 땅이 흡수해버려 이렇게 된 것이라고.

8 이름 없음 (XnlkrTdfNg)

2020-10-19 (모두 수고..) 23:51:28

"제가 정온동물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흙냄새와 풀내음이 침울한 분위기와 함께 찾아왔다. 그 목소리는 뒤에서 허리를 감은 팔 한 쌍의 주인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알맞게 미지근한, 어쩌면 서늘할 수도 있는 맨살을 쓰다듬어본다. R은 M의 체온이 애매하게 높아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정도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 열을 식혀주는 이 아이에게 ─ R에겐 M이 무엇이든지간에 그저 철없는 청소년으로만 보였으니 ─ 무슨 일이 있었기에 긍자리고 여기던 종족을 한탄하는 걸까? M의 손등을 가만히 쓸어주며 그 푸념의 의미를 되묻는다.

"만약 제 몸이 비늘이 아니라 깃털로 뒤덮여 있었다면, 용사님께서 온기를 필요로 하실 때마다 바로 달려갈 수 있었을텐데, 하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햇볕 아래에서 몸을 달군 뒤에 찾아뵈어야 하니까요."

이 기특한 아이는 자기를 위로하려 해준 것이다. 행동 하나하나가 서툰 아이가 자신이 슬퍼하는 것을 보고 급하게 마당 한가운데에 누워 있었을 상상을 하니 울던 얼굴도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아냐, 나는 지금이 딱 좋아."

M이 가져다 준 햇살만으로 R은 충분히 따뜻했다.

9 이름 없음 (7Y4Uyt3dl.)

2020-11-02 (모두 수고..) 22:15:53

누구나 겪는 일이다. 그렇다. 누구나 그런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견딜 수 있느냐 아니냐가 삶의 방향을 가른다.
나는, 나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어.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저히 도망칠 수 없을 곳까지 와버려서. 그래서 결국 마지막 선택을 해버렸다.
죽는 게 끝이 아닐줄은 몰랐지만 완벽한 방관자로서 세상을 떠돌며 사라지길 기다리는 게 낫다.
다행이다.
마지막 시도가 성공해서...

10 이름 없음 (khWRoZEhss)

2020-11-05 (거의 끝나감) 11:15:05

내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어쩌면 더 행복한 삶을 손에 넣을 수도 있지 않나. 다정하고 존경스러운 부모 아래에서, 사랑 받으면서, 다른 사람들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고 실연하고, 좋은 일을 겪고 싫은 일을 겪으면서,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그토록 원했던 그 삶을 너는 이룰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11 이름 없음 (j1Yrm6FHvA)

2020-12-03 (거의 끝나감) 01:36:57

E는 자신의 삶을 단 한번도 후회한 적 없었다.
그러니까, 빌어먹을 총구가 이마에 겨눠지고 코끝에는 밀크 로션과 소똥냄새가 어른거리는 지금도 그렇다고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었다. 사람을 믿었고, 때로는 내쳤고, 등에 칼이 꼽히고 때로는 그 칼을 뽑아 악을 처단했다. 결단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뿐 결단 그 자체를 후회한 적은 없었다. E는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여자의 환상을 보았다. A, E의 종달새. E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인이었다.

E가 A를 잃게 된 건 우연 같은 필연의 결과로, 두사람이 식사를 하고 나온 어느 저녘의 일이었다. 시계약을 갈아야 겠어요. A는 E의 손목 시계를 쓸어내며 말했다. E는 은쟁반 같은 사내였다. A의 손길이 닿으면 E는 온기를 머금었다. E는 A의 손길에 제 죄악마저 닦여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한마디로, E는 A를 사랑했다. 시계약은 나중에, 우선 당신과 집에서 밤을 함께 보내고 싶다. E가 그리 대답하려고 할 때였다. 총성이 울렸고, A는 쓰러졌다. A가 손을 놓았을 때, E는 그녀가 자신을 감싸고 쓰러졌다는 걸 알았다.

그 이후로 E의 시계는 여전히 멈춰있었다.

제게 총구를 겨눈 사내의 몸에서 나는 냄새에 E는 코를 약간 찌푸렸다. 화학적 가공 과정을 거친 밀크 로션은 신선한 우유를 재료로 삼은 것이 무색하게도, 싸구려 사탕같은 뒷맛이 향의 밸런스를 심각하게 무너뜨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내의 몸에서 나는 땀내가 로션에 섞여 기괴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햇볕에 익어가는 소똥냄새가 지천에 가득했다. 잊을만하면 올라오는 악취의 하모니에 E는 차라리 사내가 얼른 저를 쏘아버렸으면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아직은 E의 시간이 멈출 때가 아니었다.

뒈져라, 새끼야.

사내가 고함치면서 총을 발사했다.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던 E는 사내의 총구를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바닥에 쓰러진 건 E가 아닌 사내 쪽이었다. 제 손목을 묶어놓은 밧줄을 어느새 풀어낸 E가 그 밧줄로 사내의 목을 조였다. 얼굴이 파랗게 질려가는 사내를 향해 E가 속삭였다.

총기 관리를 더 잘했어야지.

E가 사내의 총이 오작동 한 걸 가리켜 말했다. 사내는 숨이 막혀 꺽꺽대고 있었다. E는 밧줄을 풀지 않은 채 사내가 떨어트린 권총을 집어들었다. 사내의 귀에 E가 속삭였다.

가서 전해. 내가 A의 이름으로 너희들에게 키스를 보내겠다고.

사내의 귓가에 가볍게 입을 맞춘 E가 밧줄을 풀고 물러났다. 밧줄이 풀리자마자 사내는 목을 감쌌다. 그런 사내의 모습을 E는 무심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E가 걸린 탄환을 빼내고 권총을 재장전했다. 사내의 뒤통수에 총을 겨누고 E가 나직히 말했다.

어서 가.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사내는 휘청이면서 뛰쳐나갔다. 사내의 모습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E는 미동없이 총을 겨누고 있었다. 마침내 사내가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E는 제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멈춘 시간은 저녘 7시 59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밝은 태양이 E를 비추고 있었다.

12 이름 없음 (owJmy5d2fY)

2020-12-28 (모두 수고..) 01:01:34

평범한 그 나이대 청년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K의 모습과 단두대의 칼날을 인형으로 조형한 것마냥 무기질한 K의 모습이 한데 뒤엉켰다.

어지럽기만 했다.

내가 친근하게 어겼던 K는, 내가 불렀던 K는, 그리고 내가 긍정했던 K는 과연 어느 쪽이었던가.

그 사이에서는 단지 겉모습의 아름다움만이 분명하고 변함없다.

영원히, 영겁히, 끝없이 아름다울 남자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곁에서 봐왔던 옆얼굴의 곡선도, 하늘을 비추는 창을 들인 것마냥 짙푸른 그 눈동자도, 물결치는 긴 머리카락도, 그 모든 것들이 필요 이상으로 생생했고. 그래서인지 떠올리는 것을 그만둘 수 없었다.

의미따위 없다.

저 아름다움에 남을 것은, 남자가 어떤 발버둥을 치더라도 그 끝에는 손에 넣지 못했던 무언가의 종말 뿐이라고, H는 저주에 가까운 불안을 느꼈다.

잊자고, 이런 생각따위는 잊어버리고 다시 그의 앞에서는 웃자고, 예전과 같은 모습을 그에게 보여주자고 스스로를 다그쳐도 그 끝에 남는 것은 그 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같을 수 없다는 사실 뿐이다.

부서진 손목이 다시 예전과 같은 그림을 그릴 수는 없듯이, 부서진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원망.

두려웠다.

13 이름 없음 (uY7KUaI/D2)

2021-01-03 (내일 월요일) 14:49:39

호숫가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서있는 B, 이윽고 A가 서서히 다가온다.
"A인가. 어서 와라. 너에게 패하여 돌아온 자는 나에게 죽었다. 그 정도면 되었으니 이만 돌아가라. 나는 네가 찾는 것을 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미 한 사람의 영웅으로서 차고 넘치는 위업을 이루었다. 너와 싸워보고 싶기는 하지만, 이대로라면 너를 죽여야 한다. 나는 생애 처음 보는 내 대적을 이렇게 빨리 잃고 싶지 않으니."
"그럴지도 모르지만... 물러나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네 손에는 내 제자와 친우, 그리고 수십만 민중의 피가 묻어 있고, 그것은 너에게 맞서려는 내 손에도 마찬가지니. 그 손을 여기 두고 가라."
"무모하지만 만용이라 부를 수는 없겠구나. 그럼 와라."
A은 몸을 낮추고 빠르게 접근해, B을 왼쪽 아래서부터 갈라 올리려 한다.
"그런데, 너는 대체 무엇을 믿고 나에게 덤비는 것이냐?"
A의 예상보다 민첩하게, B는 오른쪽으로 짧게 도약하며 말한다.
"받는 가호는 내가 너를 압도하고, 지형도 너가 내 본거지로 공격해오는 구도. 유일하게 남은 건 실력이겠지만-"
검을 회수하여 B을 찔러 들어가는 A. 그러나 B는 옆으로 얕게 피한 뒤 폼멜로 그대로 A의 왼팔을 박살낸다.
"결국은 그것도 내가 동등하거나 그 이상, 너는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다."
뒤쪽으로 물러나 자세를 정비하는 A.
확실히, 이곳에 뛰어든 것은, 그리고 초반부터 도박수를 던진 것은 B을 얕본 A의 오판이었다. 이곳에 온 이상 도박수의 성공 이외에는 살아나갈 방법이 없기는 했지만- 애초에 자신이 살아나가는 것이 그리 중요했던가?
오른팔로 검을 쥐어들고, 마무리를 위해 뛰어드는 B의 공격을 땅을 굴러 피한다.
"그런다 한들, 늦다!"
자세를 고쳐 일어나는 A의 오른팔을 향해 날아드는 검. 그러나 A는 그것을 그대로 두고-
B의 손목을 발로 강타해, 자신의 오른팔을 갈라내고 순간적으로 힘을 잃은 검을 저 멀리 호수 속으로 튕겨낸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섰다.
B는 더 이상 검이 없다.
A는 검이 있으나, 한쪽 팔이 잘리고 한쪽 팔이 부러진 상태에서 검을 휘두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은 이렇게 되었구나."
B가 한탄하듯 말한다. B는 검을 잃었고 손목이 부러졌다. 낫더라도 전처럼 검을 휘두르기는 어려울 것이고, 그러면 B는 메말라 죽을 것이다. 혹은, 그 전에 영광스럽게 죽을 수도 있겠지만. 아니, 자신의 강운을 고려했을때, B는 후자일 것을 스스로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A는... 지금도 오른팔에서 피가 새나오고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쓰러져 옮겨지고 집에서 유언 몇 마디 남기면 그것으로 끝일 것이었다.
"나는 내가 이룬 모든 것들과 영광스러운 최후로 기억되겠지만, 너는 팔이 잘리고 물러선 자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그걸로 좋은가?"
"네가 이룬 모든 것이라 결국은 타인의 희생과 너의 행운으로 쌓아올려진 인업이 아닌가. 내 후손들이 언젠가 너를 덮어버릴 만큼 높고 위대한 탑을 쌓을 것이다."
"인업, 그저 인업이라... 정말로 웃기는구나. 그래, 너가 아니라면 아무에게도 들을 수 없는 말이겠지. 그리고 내가 살아있는 한 너희 후손들은 절대로 그러지 못할 것이다."
"네가 쌓아온 모든 죄업을 돌아보라, 너도 오래 살지는 못할 거다."
"오른 어깨가 반쯤 창백해진 자에게 듣고 싶지는 않구나... 너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아있었다면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의 너가 후손들에게 남길 수 있는 건 유언과 묘비명 정도가 전부일 테니."
"아무튼, 가는 길에 거리에 있는 아무 여관에나 잠시 들렀다 가거라. 죽음을 피할 수는 없더라도, 집에서 죽을 수 있을 정도의 치료는 해 줄테니."

14 공포 107자 (sfR8n9G4MM)

2021-03-26 (불탄다..!) 18:20:22

원래 창작하는 애들은 전부 자의식 과잉이에요. 그런데 어느날 눈 앞에 자기 창작물 주인공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안 사랑할 수가 있겠어요? 가장 완벽하게 다듬어 세상에 내놓은 자신의 일부인데요.

15 140자 (LOpK4SjQ.A)

2021-03-30 (FIRE!) 15:30:55

너는 늘 홀로 남겨지기를 두려워해. 그래서 난 언제나 네 한발짝 뒤에 따라붙고 있어. 너보다 앞서는 일도, 뒤로 지나치게 떨어지는 일도 없이 언제나 한발짝 뒤. 내가 네게 기생하는 딱 그만큼 넌 내게 의존하지. 난 네 그림자. 너의 유령. 너의 우울.

16 319자 (8cIVOG8JxY)

2021-03-30 (FIRE!) 22:16:35

매캐한 매연냄새, 탄냄새, 까맣게 눌러붙은 자국, 그리고 붉게 물들어 지워지지 않던 네 얼굴. 그 애와 나의 사이를 굳이 정의하자면 아무것도 아닌 것에 가까움에도. 왜 나는 너를 이 순간에 제일 먼저 떠올리는 걸까. 내가 쓰는 가면과 아무에게나 주는 거짓된 애정이 원래 네 것이라서 그런 걸까. 네가 짙은 빛깔 보다 연한 색이 예쁘다 해서 심통이 났었던 기억이나. 내 머리칼과 눈은 네가 좋아하는 소위 아련하게 번지는 느낌보단 강렬한 신호같은 느낌이란 걸 알아서 괜히 심술을 부렸어. 그런데 이젠 나도 네가 쓰던 색이 좋아. 네 얼굴이 내가 좋아하던 붉은 빛에 가려져서 더 이상 볼 수 가 없어서...차라리 핏방울이 옅은 색이였다면 네가 내가 부르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까.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마주할 수 있었을까. 까맣게 번진 붉음이 너와 나의 연결을 흐리지 않았을까.

17 177자 (lmnDoe0Ibw)

2021-04-03 (파란날) 16:35:36

나는 얼마만큼이나 나인 걸까. 너는 알테지만, 그러니 사실은 나도 알아. 우린 언제나 우리인만큼만 우리였지. 인간은, (줄을 긋고,) 사람은, 떠나보낸 것을 오래 붙들고 있곤 한다는데, 우린 어떻게 했어야 했던 걸까. 떠나지 않기 위해 머물러 있던 시간들을 기억해. 그러니까, 다시 말해, 붙들리지 않기 위해 머물던.

18 공백제외 341자 (At9WPVmPZY)

2021-04-07 (水) 10:46:35

"희생하기 싫어. 아픈 것도 싫고."
너의 품에 안겨, 조용히 너에게만 들릴 투정을 부린다. 너는 말없이 나를 더 당겨 안는다. 너의 따뜻한 손이 내 머리를 감싼다.
"...무엇보다도, 너는 나를 위해 뭐든지 해 줬는데 나는 또 너와 세상의 운명 중에서 고민하는 내가 싫어."
"그래? 난 네가 나를 이 세상만큼 사랑해주니까, 그런 고민을 하는게 기쁜데."
나즈막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손을 들어 너의 등을 할퀴듯 움켜쥔다.
"나한텐 너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알아, 난 네 꺼잖아. 그러니까 우리, 이렇게 하자."
고개를 들어 너와 눈을 마주친다. 장난기 반, 슬픔 반으로 어그러진 네 얼굴.
"내가 억지로 널 데려간거야. 네가 세상이 아닌 나를 선택한 게 아니라, 내가 나를 선택하게 너를 강요한거야. 모든 원망과 업보는 나에게로 돌아갈 수 있게, 더 이상 네가 혼자 아파하지 않게."

19 이름 없음 (eVx4CLNYCk)

2021-04-08 (거의 끝나감) 00:10:24

어느 화창한 날, 나는 그녀를 죽였다.
사실 화창하지 않은 날이어도 좋다. 비가 오는 날에도 그녀는 죽었을 것이다. 내가 이 타자를 치는 순간에도 나는 그녀를 죽이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나는 그녀에게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힐 것이다. 그녀는 나의 심장이다, 라고 나는 말하지만. 그녀를 썩히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닌가? 그녀는 전에 존재하였던 많고 많은 심장들처럼 특별하지 않은 그저 하나의 심장일 뿐인가? 정말로, 그녀는 죽어야만 하는 것인가? 그녀를 죽이지 않을 수는 없을까...!

20 이름 없음 (OfCpmoDey6)

2021-06-14 (모두 수고..) 22:41:15

>>13 흰소리야.
검을 놓치게 한 게 아니라 손목을 부러트린 거겠지.
부러진 손목으로도 죽일 수는 있지만, 완벽한 호를 그리지 못하는 시점에서 의미가 없으니.

21 이름 없음 (oYoQreBXDQ)

2021-07-28 (水) 21:20:01

세상을 구하고 돌아온 소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평소 감정표현이 거의 없던 그녀이기에 앙 다문 입술에 흘러내리기만 할 뿐인 눈물이 그 표정이 낯설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남자는 말했다.
"울지 마."
하지만 소용 없었다. 남자는 더욱 당황하여서, 그녀가 평소 자신을 만지는 걸 싫어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황급히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제발 울지 마, 뭐든 할테니."
"내 눈물이 아니야." 그녀는 답했다. "그 아이의 눈물이 내게 넘쳐 들어온 거야."
아아 그래. 그 두 사람은 서로의 정신과 감정을 공유했었지.
"이미 거의 차버린 너의 눈물의 잔이, 그 아이로 인해 넘치고 있다는 말 아니냐. 그토록 슬프면 차라리 울부짖으란 말이야, 내가 죄책감을 느끼도록 날 원망하란 말이다."
남자는 안타까운 듯 탄식했다. 소녀는 비웃는 듯 입술을 비틀었다.
"너를 위해 울부짖지 않는 게 아니야. 그 아이를 위해 참는 거야. 내가, 나도 이토록 아픈데 그는 얼마나 더 아픈 걸까. 말로만 항상 내 선택을 존중한다면서, 뒤에서 슬픔을 삼키기나 하고 있는 바보 주제에... 울지 말란 말이야..."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세상이 조명하지 않는, 자기 자신을 버리고 세상을 구한 메시아의 비참한 뒷모습이었다.

22 이름 없음 (6QdBc4olYg)

2021-09-06 (모두 수고..) 05:25:55

"사실은... 조금 걱정했어. 바깥 세상은 어떨까 하고. 하지만 다행이야, 이렇게 좋은 사람인 너를 만나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까?"

I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디서부터가 Yes, 어디서부터가 No일까.
걱정은 옳았다.
바깥 세상은 역겨웠다.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좋은, 그리고 사람, 모두 틀린 말이다.
그리고 나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좋은 사람이 아니다.
좋은, 그리고 사람, 모두 Y에게는 틀린 말일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한, 앞뒤를 자른 대답으로, I는 Y를 기만하기로 했다. 새삼스러운 말이었다. I는 계속, 항상, 처음부터 그리고 지금까지도 Y를 기만하고 있었다. 그건 I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네, 마찬가지일 겁니다."

제가 좋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다른 인간들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I의 무표정은 깨지지 않았다. 거짓말은 태연했고 상대는 순진했다. 그 사실이 I의 깊은 곳을 강하게 찌르는 것을 I는 억지로 삼켜눌렀다.
I는 불행한 남자였다. Y가 I의 거짓말을 알게 된다면, 분명 그렇게 I를 평할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런 것에 상관하고 살았더라면, 애초에 I는 몇 백번은 그대로 죽어야 했다.
죄책감, 뭐 그런 명목으로.

23 싸이버거여도 괜찮아 (3YY4Hb4Ez6)

2021-11-04 (거의 끝나감) 10:35:42

#1. 오전, 나는 어디로
천정의 실링팬은 느긋하게 돌아가며 미풍을 만들고, 블라인드 사이로 비추이는 광선은 격자 무늬의 그림자를 쏟아낸다. 마호가니 책상 위에는 커피가 담긴 머그컵과 구식 CRT 모니터 하나, 그리고 ‘R.K’ 이라고 적힌 사립탐정의 명패.
모니터는 여러 문서들을 띄우고 있는데, 천칭과 월계관이 그려진 심볼로 보아 미합중국 정부기관, 그 중에서도 수사국 쪽의 문서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문서를 읽고 있는 것은 검은 페도라를 비딱하게 걸쳐 쓴 녹안의 백인 여성, R.K이다.

R는 질렸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며 신발도 안 벗고 책상 위로 다리를 쭉 펴올린다. 그리고는 모자를 살짝 벗어내려 눈을 가린다.

삐걱거리는 목재 계단참을 밟으며, 누군가가 올라와 열린 문 틈 사이로 들어왔다.
“일이 잘 안 풀리나보군?”
여성은 덮어 쓴 페도라를 올리지도 않고 건성으로 대답한다.
“어어, 뭐.”

“쉬엄쉬엄 해, 이 일 중독자야.”
검은 터틀넥 스웨터에 항공점퍼를 입은, 머리칼이 걸레같이 헝클어진 남성은 얼음이 든 음료를 R의 목덜미에 갖다 댔다. R는 화들짝 놀라 거의 뒤로 넘어질 뻔 한다. 키득거리는 남성에게 R는 마구 화를 낸다.
“아이, 씨… 작작 좀 해. 그리고 여기 들어오지 말랬지?”

남성은 뒤로 한발짝 물러난다.
“워, 워, 진정해.”
“너같으면 진정하게 생겼냐, 이 약쟁이 히피 노숙자 새끼야.”

남성은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며 항변한다.
“약쟁이 아니거든. 그리고, 기껏 힘들게 정보를 캐냈는데 감사는 못할 망정.”
“그럼 뭐라고 불러줄까? 약쟁이도 아니고 히피도 아니지만 노숙자는 맞는 브리 씨?”
“B거든.”
“흥, 알바냐.”
R는 새침하게 코웃음 치며 차가운 음료를 잽싸게 낚아챈다. 휘핑크림과 시럽이 가득한 카라멜 마끼아또. 분명 R의 지친 두뇌에 활력을 불어넣어줄 것이다.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는지, R는 잠자코 발을 내리고는 마우스 휠을 드륵거렸다.
“이상해. 정말 이상해. 분명 입국 기록은 있는데, 그 전 활동 경력이 불분명해. 케이프타운이라. 심지어 한 명은 아예 신원 자체가 은폐되어있고.”
R는 어느새 음료를 입에 털어넣고는 얼음을 까득거리며 말했다.

“그쪽은 분쟁지역이니까. 입국 기록이 남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지.”
“그건 나도 알고있다만… 분명 어딘가 기록이 남아있을 거야. 그 틈새를 찾아야지.”
R는 모니터에 거의 얼굴을 파묻을 듯이 바짝 붙어서는 문서를 읽어내려갔다.

B은 R를 관찰하듯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리고 작게 한숨을 쉬곤 팔짱을 끼며 묻는다.
“그래서? 어떻게 찾을건데?”
“그건…”

말문이 막힌 R는 대뜸 화를 냈다.
“아이 씨, 신경질나게 자꾸 그럴래? 그리고 말하지 않았나? 수사 방향을 결정하는 건 나, 서류같은 정보를 뒤져오는 건 너. 그렇게 되어있었잖아?”
B은 그런 R가 조금은 우스웠는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화제를 돌린다.
“뭐, 화내지 말고. 이럴 때 가끔은 좀 쉬어줘야, '아, 이런 게 있었지.' 하고 새로 깨닫는단 말야. 어차피 고객도 없는데, 오늘은 이쯤 하지?”
“…”

R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2. Detroit Dreamin'
버지니아 파크, 48202 디트로이트 미시건. 어느 한적한 초가을의 공원을 두 사람은 함께 걷고 있었다. 회색빛의 우중충한 하늘 아래, 돌연한 강풍에 갈색 낙엽이 흩날리고, 공원에는 인적 하나 없이 그저 싸늘할 뿐이었다.

B은 숨을 크게 마셨다 뱉었고, 무언가 상쾌해보였지만, R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어색한 침묵 속에 두 사람은 계속해서 공원을 거닐었다.

"그래서, 좀 기분이…"
먼저 말을 튼 것은 B이었다.
“좋을 리 있겠냐.”
그리고 냉랭하게 일축한 것은 R 쪽이었다.

B은 머쓱하게 머릴 긁었다.
“흠.”
어쩌면 속으로 ‘다 큰 성인이 사춘기 소녀마냥 행동하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는 식으로 생각하며 난처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R는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B을 흘겨보며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솔직히, 여기 와서 더 우울해졌어. 봐, 기억나?”
R가 뒤돌아보지도 않고 엄지로 가리킨 그 곳에는 헨리포드 병원이 있었다.
“…아.”

그 날. R가 소련의 실험체로 추정되는 소년과 비극적으로 헤어진 날, R는 알코올을 과다 섭취했고, 만취 상태에서 충동적으로 물질 D 한 움큼을 입에 털어넣었다.
그 탓에, 헨리포드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 시원하게 위세척을 받느라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마음도 싱숭생숭하고. 그 날 이후로 일도 손에 잘 안잡히는 것 같고.”
“이상하게 생긴 주름관 다발이 목구멍에 낑겨 넣어지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게?”

“글쎄, ‘나도 이 노숙자새끼랑 똑같은 약쟁이가 되어버렸구나’ 같은 거?”
B은 어깨를 으쓱이면서 생각없이 받아쳤다. 그런 B의 옆구리에 강한 훅이 날아온다.

24 공포 318자. (tbtZSVEGUc)

2021-12-03 (불탄다..!) 00:07:25

친구'라는 단어를 아름답고 깨끗한 것만 나누는 사이로 정의한다면 아마 우린 친구 사이는 아닐 것이다. 우리 사이는... 그래, 내밀하고, 어둡고, 복잡하고, 하여튼 제일 더러운 밑바닥을 까뒤집어 내밀면 손가락 끝으로 훑어 묻은 것을 확인하고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변치 않을 추함에 안심하는 사이였으니. 우린 함께 먼지구덩이를 구를 것이다. 너도, 나도 어느 쪽도 빛을 보지 못하게 추하게 발버둥치며 서로를 끌어내릴것이다. 이렇게 사는 우리는 서로가 있는 한 결코 진보할 수 없겠지. 다만 나는 너를, 너는 나를 결코 놓지 않을 것이다. 이 진창만이 우리를 잇는 증표.

25 이름 없음 (2kdLjsFK5U)

2021-12-10 (불탄다..!) 17:06:04

내가 집으로 돌아온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헨리의 방은 비어있었다. 리처드는 내게 헨리의 방을 사용하라고 권했지만 3층에 남는 빈 방을 쓰겠다며 완곡히 거절하였다. 헨리와 나는 형제였지만 청소년기가 되어서야 서로의 얼굴을 마주본 우리들 사이에 서로에 대한 깊은 우애나 이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이가 아주 나쁜 것도 아니어서 말하자면 서먹한 관계로 남아있던 것이다. 헨리는 집안의 이방인이었다. 그가 가장 험하다는 변방의 관리를 도맡게 된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헨리가 내리 방을 비워두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비롯된 것일지 몰랐다. 그런 위치에 놓여있는 헨리의 자리를, 내가 돌아왔다는 이유로 없애버린다면 그야말로 그를 내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이런 실낱같은 배려를 차라리 동정이라 이름하고 싶었다.

26 이름 없음 (4QMTlSaXKw)

2021-12-16 (거의 끝나감) 18:04:32

그는 평범했다. 평범했고 그 또한 자신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저 봉사하는 삶을 즐기고 박애주의자인 그를 평범하지만 좋은사람이 아닌 사랑을 갈구하는 예정결핍인 폐기물이라 생각할까.
그래 그런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랑해줘"

푹-

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생겼다.
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12초 후에 사라진다.

27 이름 없음 (AQ2zWSFn9M)

2022-03-16 (水) 20:51:28

생명체의 망가진 심장이란 영 처리하기 귀찮다.
내가 다른 차원에 심장 두 개 가진 악마의 몸이 없었더라면 얼마나 귀찮아졌을지 상상도 하기 싫다.
어쩔 수 없이 악마의 몸을 불러와, 심장 하나를 갈아치웠다.
아, 악마의 심장은 인간에게 맞지 않더라. 거부 반응이 좀 쎄.
그래도 버틸만은 하더라. 아, 어서 인간의 심장이 고쳐져서 돌아왔으면 좋겠어.
현 완결웹툰인 소울카르텔 기반 캐릭터. 꿀잼이니까 여러분 한 번 보세요

28 이름 없음 (Okd3J/sMME)

2022-08-09 (FIRE!) 17:37:01

동굴이 두렵다. 다시 돌아온 것 같아서.

...

선생.

난 정말 밖으로 나갔던 게 맞아? 어째서 기억과 비슷한 어둡고 좁고 축축한 동굴에 있는 거야?

이젠 환청이 사람 형체를 가지고 내게 말을 걸고 있어. 나보고 무슨 일이냐고 걱정스럽게 물어. 살아있는 사람처럼 손도 따뜻하고, 다른 환청과 눈빛도 교환해.

선생.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저게 정말 환청이라고 말할 수 있어?

나는 아직도 조현병을 가지고 있는 거야?


하지만 선생은 말하지 않는다. 선생은 죽었고, 내 옆에 있는 이 사람은 선생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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